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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설교자들이 표현하는 네 가지 정서

설교자의 정서_2

by 이정규2023-03-27

설교자들은 어떠한 정서를 표현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선 우리는 설교자들이 보통 어떠한 정서를 뿜어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나는 이 분류법의 아이디어를 팀 켈러의 ‘설교’에서 얻었다.[1] 


설교자들이 표현하는 네 가지 정서


첫째, 설교자 자신을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나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전달되는 형태는 자랑일 수도 있고 훈계일 수도 있다. 형태는 다음과 같다.


• 설교의 중심에 자신이 행했던 선행 또는 순종으로 인한 간증이 있는 형태

• 설교자 자신의 지식이 설교의 핵심 메시지에 기여하지 않고, 쓸모없이 등장하는 형태

• 설교자와 청중을 우리/그들의 구조로 나누고, 무작정 훈계하기만 하는 형태

• 설교자가 자신을 다른 설교자와 다르게 우월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형태


설교자가 이러한 정서를 드러낼 때, 청중은 설교자를 예배하거나 혐오하게 된다. 또는 설교자의 인격을 혐오하며 비판하는 자기 자신의 지성 또는 정서를 예배하게 된다. 청중은 설교자와만 대화하게 되고, 그 결과 예배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둘째, 공동체를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우리 교회 (또는 부서)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첫 번째 정서보다는 훨씬 나아 보이며, 또한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긍정적 기여를 하는 측면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형태는 다음과 같다.


• 속한 공동체가 얼마나 큰 성과를 이루었는지, 또는 무엇을 이루고 있는지에 집중되는 형태

• 공동체의 당면 과제와 향후 목표가 메시지의 중심을 이루는 형태 (절대로 당면 과제와 향후 목표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설교 시간은 가장 효과적인 광고시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여서는 안 된다)

• 해당 교회와 다른 교회(또는 공동체)를 우리/그들의 구조로 나누고, 우월감을 강조하는 형태

• 다른 집단의 교리/치리구조/집단정서를 신학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며 피하라고 경고하는 형태(이러한 형태에서 청중들은 암묵적으로 소속된 공동체에 대한 우월감을 느낀다)


설교자가 이러한 정서를 드러낼 때, 청중은 소속된 공동체를 예배하거나 혐오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향한 헌신도가 높고 강한 사람과 낮고 비판적인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기가 쉽고, 양쪽 모두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가 아닌 다른 공동체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지게 된다. 당연히 그 결과는 공교회성의 파괴이며, 이러한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신앙 수준과 자신의 신앙 수준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따라서 신앙 성장에 치명적이다.


셋째, 본문과 교리를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이 본문의 의미는 대단하지 않나요? 이런 해석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이러한 교리는 처음 배워보지 않나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형태는 다음과 같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모든 형태가 그 자체만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모든 형태가 네 번째 정서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면 아주 유익할 수 있다.


• 청중이 지금까지 이해한 본문과 실제 본문이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지를 강조하는 형태

• 청중이 암시적으로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 기독교 교리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는 형태

• 교리적/주해적 오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비판의 분량이 설교 시간 전체의 1/4이 넘어가는 형태. 이때 청중은 설교라기보다는 교리강좌(또는 성경강좌)를 듣는 상황이 된다.


사실상 이 정서는 앞의 두 정서보다는 훨씬 더 성도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러한 정서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성경과 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삶과 지식에 괴리가 생길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 과정 중 첫째나 둘째 정서로 타락하게 될 가능성을 늘 내포한다. 설교자는 아주 신중하게 자기 설교의 목표를 재조정하고, 마음을 살펴야 한다.


넷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우리 하나님 정말 위대하지 않나요? 그분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보세요! 당신이 가진 모든 문제가 이분 안에서 해결될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이러한 정서를 지속적으로 전달할 때 청중은 진리를 사랑하며, 공동체를 기뻐하고, 설교자를 존경심으로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의 목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설교자의 목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있다. 설교자는 교육하기도 하고, 훈계와 권면을 하기도 하며, 여러 예화와 증명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설교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 때 설교자는 더 이상 설교자로만 남지 않고 예배자가 된다. 이때 설교자가 하는 말들은 찬양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청중은 예배의 진정한 목표.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일을 시작한다. 설교자와 청중 모두가 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삶의 문제를 그분께 드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설교문을 완성한 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 이 설교문이 정말로 높이고 싶어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 (설교문의 내용에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내가 설교를 통해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설교 직전의 내 마음에서, 내 입술에서 찬양이 흘러나오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높이고 기뻐하는 마음이 있는가?

• 내 마음은 낮아져 있는가? 나는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 역시 이 설교를 들어야 하는 청중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는가? 혹시 스스로를 가르치는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나는 하나님을 유용한 분으로만 제시하는가? 아니면 아름다운 분으로도 제시하는가?


설교자의 정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마음의 움직임을 추적하여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흉내만 낸다면, 그것은 진정한 방식이 아닐 것이다.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싱클레어 퍼거슨의 충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설교자 대부분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책보다 설교하는 법에 관한 책(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하는 법과 같은 책도 마찬가지)을 더 많이 소장하고 있지는 않을까? 정말로 그렇다면(조사를 해보면 알 수 있을 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다. 설교할 때 (혹은 설교를 들을 때) 나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 이를테면 죄를 극복하거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법 혹은 복음을 통해 받는 혜택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이런 것이 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중심 무대는 이런 주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 … 설교를 들을 때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오래 남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2]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주된 관심사를 말하기를 좋아한다. 우리 구주께서도 사람들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셨다(마 12:34). 우리는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한다. 기술적으로 설교문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쓴다고 해서, 설교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예수님을 넣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 깊이 그분을 사랑하고 찬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설교자의 가치가 설교자의 능력/청중의 규모/사역의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에 있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충분히 맛보고 누리고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그분을 바라보고 기뻐해야 하며, 만족해야 한다. 설교자의 가치는 설교자 자신의 성취와 능력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정에 있다. 우리의 위치는 그리스도 안이며, 우리의 가치는 그리스도만큼이다! 우리가 왜 설교를 통해서 스스로를 입증할 필요가 있는가!


이러한 주장들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듯 자신의 정서를 끊임없이 점검할 때, 설교 시간을 행복하게 보냈노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 은혜를 누렸으면 좋겠다.



[주]


1. 팀 켈러, 설교, 채경락 옮김 (서울: 두란노, 2016), 7장을 보라. 여기서 켈러는 설교자 내면에 숨겨진 정서를 ‘서브텍스트’라는 말로 표현한다. “서브텍스트는 우리 메시지 저변에 흐르는 메시지다. 그것은 그 메시지가 의도한 진정한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의미로서, 단어의 표면적인 의미보다 깊다. 예를 들어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라는 진술은 ‘저는 관심 없어요. 당신 원하는 대로 하세요’라는 서브텍스트를 품고 있을 수 있다. 또는 ‘관심은 있지만 직접 대놓고 말하고 싶지는 않네요’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설교자의 어조, 얼굴 표정, 자세, 제스처가 청중을 향한 설교의 실질적인 목표에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선포된 메시지와 상관없이 그 목표가 커뮤니케이션을 장악할 수 있다.” p. 269.


2. 싱클레어 B.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p.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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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정규

이정규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B.A.)와 고려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현재 시광교회(www.seetheglory.or.kr)를 담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님의 기도학교』(IVP), 『새가족반』(복있는사람), 『회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