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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자기 정체성의 시대와 ‘균열적’ 전도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2023-04-10

종교적 신앙도 취향의 하나로 취급되는 시대에 교회가 할 일은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의 또 다른 취향의 선택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기반에 균열을 가하는 증언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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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리 미셔널

Simply Missional


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첫째 물음과 답은 이렇게 시작한다.


문: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이 선언은 내 인생은 전적으로 나의 것, 나의 선택이라고 외치는 자기 정체성 시대에 저항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기독교 메시지이다. 서구의 근대사회는 인간의 ‘자아’가 세계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사상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더욱 맹렬히 추구한다. 20세기에는 인종, 젠더, 국가, 민족, 문화가 제각기 고유한 권리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면, 21세기에는 이러한 거대 정체성이 개인과 사회집단의 차원으로 분화되고 있다. 다문화 사회는 단순히 인종적, 종교적, 언어적 다문화가 아니라,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신념적 취향이 동등하게 공존하는 사회로 진화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 사회를 떠받치는 신념은 ‘표현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가 되었다. 이 용어는 원래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와 그의 동료들이 함께 쓴 Habits of Heart(마음의 습속)에서 처음 사용했고,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도 현대 서구 사회를 규정하는 특징으로 세속시대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인간이 외부의 간섭이나 제약을 받지 않고, 또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롭게 자기의 신념과 취향을 선택하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는 표현적 개인주의 시대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일성, 곧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고백은 누군가에게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떤 누군가에게는 그의 신념적 기반을 뒤흔드는 균열적 메시지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스도인 영문학자 알란 노블(Alan Noble)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을 그의 은혜 안에서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투명하게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소속의 고백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을 내세우는 현대의 지배적 신념과 정면으로 맞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인생에 관한 진리를 나눠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항상 기억하고 그것을 삶의 실체로 보여줘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Alan Noble, You Are Not Your Own, IVP, 7/218)  


필자가 정식 MBTI 검사를 받은 것은 20년 전이다. 그때도 제법 많은 이들이 MBTI를 알고 있었고, 그 뒤로 애니어그램, DISC 등의 성격 검사들이 관심을 끌었다. 그러다가 지난 몇 년 전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 다시 일어난 MBTI 열풍이 여전히 맹위를 떨친다. 친구들이 서로 만나서 각자의 MBTI를 묻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MBTI까지 공개된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심지어 어떤 회사들은 특정 MBTI 유형은 채용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기 정체성 시대의 대표적인 욕구를 반영한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할 뿐 아니라, 적절한 인간관계를 조성하고자 한다. 라이프스타일과 성격유형을 파악하며 자기와 잘 맞는 사람들을 분별하려는 것이다.


“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은 위선적으로 들려요. 그것은 고상한 영적 명분 아래 결국 개인을 위축시키고 권위에 순응하게 만들 거라고 봐요.” 수년 전에 필자와 함께 기독교 공동체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나눈 대화에서 한 청년이 던진 말이다. 그는 당시 전통적인 교회와는 조금 다르게, 사회적 고민과 비판 의식을 지닌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공유하는 수평적 관계, 신앙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 생태주의적 사고와 기독교 신앙이 조우할 가능성에 관심을 갖게 된 필자는 모인 그들이 어떻게 영적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문해 주었다. 


그러나 맞닥뜨린 한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였다.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이 그 공동체의 중심적 가치로 기능을 할 때,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고 목양의 섬김과 돌봄을 제공하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자기 부인의 영성은 더 큰 권력의 위계질서를 복무할 뿐이라고 냉소한다. 사람들은 굳이 자기를 양보하고 희생하면서 특정한 공동체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실제로 필자가 관심 가졌던 이 실험적 청년 공동체도 오래 가지 못했다.


오늘날 부쩍 떠오른 단어가 ‘취향’이다. 사람들의 개인적 관심사와 기호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고 침해나 제한받을 수 없는 권리가 되었다. 취향의 시대를 떠받쳐주는 기둥은 자유와 선택이다. 이러한 문화에서 사람들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는 공동체를 선호한다. 더 이상 학연, 혈연, 지연으로 맺어진 전통적인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에 따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관계를 맺으려 한다. 자신의 취향과 관심에 따라 소모임이나 커뮤니티를 선택하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라고 번역해서 쓰지 않고 ‘커뮤니티’라고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도 특이하다.) 지금도 인터넷과 SNS를 통해 수많은 소모임과 커뮤니티들이 만들어진다. 또한 새로 만들어지는 만큼, 많은 모임이 회원 간 반목과 불화로 금세 문을 닫는다.     


인간은 상호의존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자기 발견과 표현에 두는 것은 스스로를 취약한 기반 위에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각자도생과 능력주의가 판을 치고, 전통적인 끈끈한 연대들이 와해하고 있는 마당에, 서로에게 진정한 관심과 돌봄을 제공하는 공동체를 찾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팀 켈러는 기독교는 시대의 문화현상에 적응하고 상관성 있게 맞추려고 하기보다, 고유한 이론(high theory)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고유한 이론이란 먼저 이 시대 문화의 서사가 안고 있는 주요 결점을 폭로하여 그것들이 실제 인간의 본성이나 삶에 관한 우리의 가장 깊은 직관과도 맞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그럼으로써 기독교의 고유한 이론은 복음의 아름다움과 진리를 시대 문화의 서사보다 더욱 충만한 대항적 서사로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Tim Keller, How To Reach the West Again, Redeemer City to City, 16)  


자기 정체성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태도와 자신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태도 사이에는 실제로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알란 노블은 흥미로운 예를 하나 든다. 만일 한 평범한 젊은 남성이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을 봤다고 치자. 그가 자기 정체성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자신은 저렇게 아름다운 여성에게는 접근도 할 수 없다고 좌절하며 욕망의 충동으로 갈등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의 종착지는 그 남성의 머릿속에 머무른다. 이것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존중하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하며 자신을 더욱 열등하게 느끼게 만들 수 있다. 노블은 자기 정체성과 표현적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지고한 가치가 될 경우 각양각색의 상황에서 이러한 경험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보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그러한 아름다움의 경험에서 나 자신이 중심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포기하는 습관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Alan Noble, Disruptive Witness, IVP, 96) 


자기 정체성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 찰스 테일러가 말한 갇힌 자아(buffered self)로 살아가야 한다. 개인의 취향과 자유가 최고의 선이 되면서, 더 큰 세계의 이야기와 경이로움은 차단될 수 있다. 종교적 신앙도 취향의 하나로 취급되곤 한다. 노블은 이러한 시대에 교회가 할 일은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의 또 다른 취향의 선택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기반에 균열을 가하는 증언(disruptive witness)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균열적 증언에는 복음을 언어로 제시하는 것뿐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독특한 실천들(안식의 실천, 식사에 대한 감사기도 등)도 포함된다. 그러면 어떠한 구체적 언어로 문화를 균열시키는 복음의 증언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개혁신학자 앤드류 퍼브스(Andrew Purves)가 사람들의 상황을 분별하면서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는 예문들을 응용해 본다(앤드류 퍼브스, 십자가의 목회, 새세대, 82). 


• 과거의 죄나 실수로 인해서 자책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용서해 주십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용서하십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봅시다.”라고 선포하라.

• 자신의 자존감이나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미래는 태초부터 당신을 사랑하신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선포하라.

• 극심한 좌절로 살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당신은 인생을 포기했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라고 선포하라. 

• 현재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아픔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은 당신이 겪는 현재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 함께 하십니다. 당신이 살든지 죽든지 그 무엇도 그분의 사랑에서 당신을 떼어놓지 못합니다”라고 선포하라.


위의 진술들은 기독교 신앙의 체계 안에서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갇힌 자아의 세계관에 사는 이들에게는 더 큰 세계의 이야기를 증언하는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변화된 역사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적 상관성을 갖춘 전도가 아니라, 문화적 신념을 근본적으로 균열시키는 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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