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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가르친다고 애썼지만

성경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철저히 배워야 하는 이유

by 박혜영2023-05-12

교회의 큰 절기가 되면 내 “영혼의 크기”가 작은 것을 실감하곤 합니다. 절기가 기념하고 선포하는 교리의 크기를 저의 그릇으로 담지 못해 버거운 느낌이랄까요?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으니, 저의 방침은 이랬습니다. 웅장하게 선포하지 못한다면, 그 내용이라도 철저하게 가르치자!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왜 이렇게 성경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철저히 배우는 게 중요할까요? 그래야 조금이나마 교리가 지시하는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들었을 뿐, 그 이름 안에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면, 과연 그 교리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리가 마음에 와닿은 적이 없는데, 그 교리를 믿고 따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으니, 저는 그동안 교리와 성경 내용을 가르치려고 많이 노력했으며, 저에게는 큰 유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늘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지난 수난 주간에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르치면서도 그랬습니다. 사실 이 크고 중요한 책은 한 주에 한 과씩, 뒤에 나오는 복습 문제까지 풀이하면서 철저하게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교인을 상대로 그런 기회를 찾기란 무척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 핑계로 20년을 보내고 나서, 이번에 큰맘 먹고 시도했지만, 또 철저하게 가르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여전히 남습니다. 한 주에 한 과씩 나가야 할 진도를 이틀에 무려 다섯 과나 나가버렸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될 텐데….


이 책을 읽고 가르치면서, 전에 좀 더 체계적으로 철저하게 가르쳤다면 이 책이 더 잘 이해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생각하게 된 ‘새 언약’이란 말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 주간에는 ‘성찬’을 받기 때문에 더 깊게 다가왔습니다. 존 스토트는 예수님의 ‘다락방 최후 만찬’의 목적은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출애굽기를 언급했고, 예레미야를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시내산 언약을 맺는 전 과정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어떻게 나타나 있으며, 모세는 언약을 수립하기 위해 희생 짐승의 피를 어떻게 뿌렸으며, 시내산 언약을 세우고 나서 계명을 준 것은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가르쳤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언약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며, 저들이 실패한 자리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의 의의는 무엇이며, 그 내용은 무엇인지도 가르쳤어야 했습니다. 곧 ‘새 언약’이라는 말에 담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전체로 가르쳐, 교회의 신자들이 ‘성찬’을 받을 때 큰 유익이 되게 해야 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새 언약’에는 더 큰 그림이 있습니다. 성경 시대의 언약 형식은 무엇이고, ‘사랑’과 ‘충성’이라는 성경 용어가 언약의 형식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십계명과 신명기 전체를 통해 가르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할례, 계명, 안식일이 시내산 언약과 어떤 관계인지, ‘새 언약’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십계명은 어떤 의미이며, 할례는 어떻게 적용되며, 주일을 지킨다는 건 왜 중요한지, 교회의 신자들은 조금이라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세례[입교]와 성찬식은 어떻게 ‘새 언약’이라는 전체에 통합되어 있는 것인지 배운다면, 예수님이 자기 피로 세우고자 하신 ‘새 언약’이 얼마나 중대한 주제인지 알게 되고, 그 ‘새 언약’을 오늘의 것으로 살리기 위하여 교회의 신자들이 세례를 받아 성찬을 받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나아가 주일 예배를 왜 공(公)예배라고 하는지, 사도신경은 교회를 왜 “거룩한 공회(公會)”라고 부르는지, 우리는 왜 ‘공회 가입’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쓰는지, 주일에 공예배로 모이는 일이 왜 중요한지, ‘새 언약’의 맥락에서 확실하게 배운다면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이 십자가라는 말만 알 뿐, ‘새 언약’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알지 못해서 주일을 휴일로 여기거나, 성찬식에 큰 의미를 부여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만약 이게 다 목사가 ‘새 언약’을 전체로, 체계를 세워, 철저히 가르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면, 저는 이걸 어떻게 만회해야 할까요? 다만 성경의 표현(요 21:25)을 슬쩍 바꿔 변명할 따름입니다. “만일 낱낱이 가르치고자 하면, 전 생애라도 시간이 부족할 줄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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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혜영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말씀을 듣고 그 길로 행하자’ 외치는, 안양시 관양동에 있는 산오름교회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