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 우상까지 드러내라
by 고상섭2023-10-04

팀 켈러는 뉴욕에서 리디머 교회를 시작했을 때 단순히 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형식을 통해 죄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젊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효과적이었다고 고백했다. 혹자는 팀 켈러가 죄에 대해서 선명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팀 켈러가 죄에 대해 선명하게 선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는 그의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내가 처음 맨해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한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 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을 전했을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나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비록 그것이 아주 좋은 것일지라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 


마음의 죄를 드러내라 


폴 워셔로 대변되는 설교자들의 특징은 신자의 죄에 대해 강하게 선포한다. 폴 워셔 목사는 음란에 대해서 매우 강하게 죄를 지적한다


음행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들 중 하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지배하지 못했다면 신앙의 기초조차 달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 여러분, 맥 빠진 채로 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음란의 문제를 처리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폴 워셔 목사로 대변되는 죄의 선포는 강력한 도전이 있지만 두 가지 문제를 양산하는데,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과 죄를 거룩하지 못한 행위로만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죄란 단순히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한다. 


C. S. 루이스도 사람의 행위를 통해 죄를 구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모성애, 애국심은 선하지만 성 충동이나 싸우려는 충동 등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단지 싸우려는 충동이나 성 충동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가 모성애나 애국심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보다 더 많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나 군인처럼 의무적으로 성적 충동을 북돋우거나 싸우려는 충동을 북돋워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또 자녀를 향한 모성애나 조국을 향한 사랑을 억누르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자녀나 나라에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다.[2]


폴 워셔 목사로 대변되는 죄의 선포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있고 그 행위도 악한 행동을 죄라고 지적하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단순히 악한 행동이 죄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 곧 그것이 비로 좋은 것일지라도 죄가 된다고 선포함으로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죄로 드러낸다. 자녀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랑의 대상이 될 때 그 좋은 것은 우리를 노예로 삼게 되고 죄로 변질되게 된다. 


팀 켈러가 행위의 죄를 강하게 선포하지 않는 이유는 적극적 사고방식의 선두주자였던 로버트 슐러 목사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죄를 선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마음의 죄를 드러내 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팀 켈러는 이런 방식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이 접근법은 젊고 세속적인 직장인들에게 아주 효과적이었다. … 우상숭배의 개념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진 집착이나 두려움, 중독, 도덕적 결여, 타인에 대한 시기심, 그리고 분노 등을 적절하게 이해하게 한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구원을 그들의 직업과 로맨스에서 추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3]


팀 켈러의 우상숭배로서의 죄의 선포는 로버트 슐러식의 죄를 선포하지 않는 소비자 중심주의적 설교도 아니고, 폴 워셔 식의 행위의 죄만을 강하게 강조하는 것도 아닌 인간 마음속의 숨어있는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좀 더 균형 있고 설득력 있는 방식의 죄의 선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우상을 드러내라 


팀 켈러가 죄의 문제를 우상숭배라는 관점으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데이비드 폴리슨의 논문 덕분이었다. 팀 켈러는 데이비드 폴리슨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지냈는데 당시 미국 교회의 분위기는 죄에 대해 언급할 때 개인적인 죄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었고 개인의 행위적 노력을 통해 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설명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죄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와 악,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적인 악의 문제까지 언급했는데, 그 중심에는 인간 마음의 기만성이 있다고 보았고, 이를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4] 


팀 켈러는 데이비드 폴리슨을 추모하면서 쓴 기사에서 내가 만든 신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논문에서 발전시킨 개념이라 말하면서, 단순히 개인의 우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서 심어지는 우상이 있음을 언급한다.


영국의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18세기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신이 사라지고, 비록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에 신의 대리 역할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술, 이성, 문화라고 말한다.[5]


데이비드 폴리슨도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에서 인간을 우상숭배로 몰아가는 세 가지를 육신과 마귀와 세상이라고 말한다. 육신은 인간 안에 있는 욕망을 다루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의 죄라고 할 수 있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폴리슨이 언급한 ‘허영의 시장’이라는 말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소를 비유한 말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믿음’을 만나 서로 간증을 나누면서 도착한 곳이 ‘허영의 시장’이다. 그곳은 온갖 욕망을 사고파는 장소였고, 거기서 ‘믿음’은 순교하고 ‘크리스천’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내용에서 착안하여 데이비드 폴리슨은 우상이 한 개인의 욕망만이 아니라 허영의 시장이라는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 있음을 말한다. 


팀 켈러의 설교와 가르침이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 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지 못하면 청중은 교회 안에 있지만 다른 하나님 즉 자신이 만든 가짜 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우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목상 앞에 절하는 원시인을 떠올리지만 … 현대도 동일한 우상을 섬기고 있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와 경기장 같은 신전에서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다. 미모와 권력, 돈과 성취의 신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6]


콜롬비아 대학 인문학 교수 마크 릴라(Mark Lilla)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불충분성을 인식한다’는 말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자율적인 삶을 버리고 자신이 더 큰 무언가에 의존적인 존재임을 이해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팀 켈러는 이것을 오늘날 현대적 문화에 속한 자율성(autonomy)에 대한 도전이라 분석한다.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많은 사람은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희망을 둔다. 팀 켈러는 이 자율성이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종교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이유라고 말한다.[7] 이런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개인의 우상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문화 저변에 있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고 평가하고 도전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 


“오,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이런 고백이야말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가장 해방적이고 촉매적인 단계 가운데 하나라고 팀 켈러는 말한다. 바울처럼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을 향한 그들의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8]


근원적 우상을 드러내라 


자신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문화적 내러티브 안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상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상의 문제를 다루려면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이 아닌 내면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 자기 내면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할 때, 돈, 성공, 사랑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의 심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표면적 우상’은 더 구체적이고 눈에 잘 띄지만, 숨겨진 마음속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근원적 우상’이 도사리고 있다.


돈을 사랑하는 표면적 우상도 근원적으로는 돈을 통해 인정을 원하는 우월감이 내면에 작용할 수도 있고, 돈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도 있다. 또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끼는 안정감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같은 돈이라는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통제, 안정, 우월감 등의 다양한 근원적 우상이 존재할 수 있다.[9]


근원적 우상이 ‘힘’인 사람은 자신이 굴욕당하고 창피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가 단순히 분노하는 문제만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 안에 힘을 추구하려는 근원적 우상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정을 원하는 사람은 거절의 감정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계속 인정을 갈구하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이 숨 막힐 정도가 된다. 또 타인의 인정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맞추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어지고 비겁해지는 감정을 해결하지 못한다.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은 모험을 하거나 도전하는 상황들을 두려워한다. 요구사항이나 스트레스의 상황을 극도로 불안해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은 방치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무기력과 권태의 감정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근원적 우상이 ‘통제’인 사람은 매사에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불확실한 상황에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일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돌발상황을 힘들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일을 통제해야 하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고, 걱정과 염려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다. 


표면적 우상만을 다루어서는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돈과 권력에 대해서도 표면적인 방식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에 대해서도 너무 사랑하는 모습으로 우상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지만, 돈과 권력을 미워하고 그것을 가진 사람들도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렇게 돈과 권력을 멀리하면서 고결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태도이다.[10]


내가 만든 신에 리디머 교회의 한 목회자가 부부를 상담한 내용이 나온다. 돈 관리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였다. 아내는 남편을 구두쇠로 여겼고 남편은 아내가 낭비벽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목회자와 상담하던 중에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이기적입니다. 옷과 외모 단장에 돈을 엄청나게 쓰거든요!” 남에게 예뻐 보이려는 욕구가 아내의 돈 씀씀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남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러나 목회자는 남편에게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의 개념을 알려주고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전혀 쓰거나 베풀지 않고 동전 한 푼까지 다 쌓아두는 것도 똑같이 이기적인 일임을 아십니까? 당신은 지금 안전과 보호와 통제라는 자기 욕구를 채우는 데 무조건 전액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11]


아내는 돈을 많이 사용함으로 무엇을 얻고 싶었다면, 남편은 돈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안전과 보호와 통제라는 자기욕구를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우상은 돈, 섹스 같은 표면적 우상만 없애서는 해결될 수 없다. 그 일을 행하는 마음속 근원적 우상이 해결되어야 한다. 


내가 만든 신에서도 제임스라는 한 목회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임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매번 다른 여자들을 유혹해 잠자리를 갖고 그 후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적 일탈을 끊고 기독교 사역에 매진했지만 근원적 우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나 토론 때마다 그는 논쟁을 일삼으며 이기려 했고 자신이 회장이 아닌 모임에서도 늘 회장 행세를 하려고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신앙 주제로 대화할 때도 회의론자들을 거칠게 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께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건 권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제임스가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한 것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동침할 수 있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만 얻으면 여자는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었다. 기독교 사역도 사람을 섬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우상이 성적인 형태에서 종교적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상은 꼭꼭 숨어있다.[12]




1. 팀 켈러, 센터처치, 271.

2.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37. 

3. 팀 켈러, 센터처치, 272.

4. “Idols of the Heart and ‘Vanity Fair’“ 

5.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6.

6.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15.

7. 팀 켈러, 설교, 166.

8. 팀 켈러, 설교, 35.

9. 팀 켈러, 설교, 116.

10. 팀 켈러, 왕의 십자가, 283.

11. 팀 켈러, 일과 영성, 117.

12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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