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목사 된 것은...오로지 주의 은혜
by 전재훈2023-11-01

제대하고 학교에 복학했을 때였습니다. 복학을 신청하러 학교에 갔는데 채플실 올라가는 계단을 시각장애인 학우가 혼자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팔을 내어 주고, 어디 가냐고 물었습니다. 그 학우가 대뜸 ‘재훈이 형?’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인지 다시 봤지만 전혀 기억이 없어서, 나를 어떻게 아는지 물었더니, 내가 군대 가기 전에 도와드렸던 시각장애인 선배가 이맘때쯤 전재훈이 제대해서 도와줄 거라고 “예언”했다네요. 사람들은 대개가 도와줄 때 팔을 잡지, 자기 팔을 내어 준 사람이 없었다고 해요. 나는 부모님이 시각장애인이셔서 몸에 밴 습관이라 팔을 내어 드렸던 것입니다. 자기 팔을 내어 주자 저를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 친구를 신대원 졸업할 때까지 6년간 도와주었습니다. 신대원 다닐 때는 장애인신학연구회를 맡아서 장애인 학우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길을 가다가 시각장애인을 만나면 팔을 내어 드리고 가는 곳까지 안내해 드립니다.

 

신대원 졸업할 때 시각장애인 교회에서 전도사로 와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받았으나 전부 거절했습니다. 장애인들을 잘 알고 그들을 돕는 법도 알지만, 하기가 싫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장애인 사역으로 부르시지 않는다고 믿었고, 그냥 평범한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장애인들을 돕다가 지쳤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사역을 감당하려면 장애인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사역에 대한 소명이 확실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장애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목회자가 소명 없이 일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만, 특수 사역이라고 부르는 일들에는 그만큼의 특수한 소명이 필요한 법이지요.


최근에 목사 안수식에 갔다가 들은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목사님들을 대접하려고 집에서 기르던 개를 끌고 다리 밑으로 갔습니다. 개를 죽이기 위해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는데, 그만 빗맞아서 개가 도망갔습니다. 할 수 없이 개를 포기하고 닭이나 몇 마리 잡아서 보신탕 대신 삼계탕으로 목사님들을 대접하셨지요. 그리고 집에 돌아가 보니 도망간 그 개가 집에 와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보면서 반갑게 꼬리를 치면서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 개를 보면서 장로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죽이려 했는데도 그런 자기를 주인으로 알고 여전히 꼬리치는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목사님이 목사안수를 받는 분들에게 이 개처럼 충성해야 한다고 권면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지요.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 땅의 부귀영화를 바라고 사는 것은 아니기에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분명한 자기 확신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개처럼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보내시면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는 헌신과 이름도 빛도 없이 살겠다는 희생정신이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나는 장애인 사역과 선교사로만 부르지 말아 달라는 조건부 헌신을 했던 전도사로 그런 면에서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최소한 소수의 대형교회 목사님들을 보고 자신도 성공하려고 목사 안수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솔직히 나는 할 수만 있으면 큰 교회를 하고 싶었고, 성공해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화성에서 평범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섬기고 있지도 않고, 선교사로 나갈 마음도 여전히 없습니다. 큰 교회에 대한 동경과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도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 안수를 받을 때와 비교하면 변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그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는 목사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한 바울처럼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자기 일을 버리고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종은 자기 일도, 자기 시간도, 자기 소유도 없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목사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또한 목사는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대로 주님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주님의 사역자나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개념에 목사의 지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는 성도들보다 조금 높고 하나님보다는 조금 낮은 존재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예수님만큼은 아니어도 성도보다 좀 더 거룩해야 한다고 느꼈고, 집사님이나 장로님보다는 더 신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권사님보다 1분이라도 더 기도해야 하고, 구역장보다 한 장이라도 성경을 더 읽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성도가 21일 작정 금식기도를 하면, 목사는 40일쯤은 해야 하고, 성도가 방언하면, 목사는 통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목사로 살면서 느끼는 긴장감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종 주제에 자기 시간과 소유가 많다는 것이 죄책감으로 작용했고,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이유로 돈의 유혹에 너무 약한 것도 불편했습니다. 거룩해 보이고 신령해 보이는 성도들과 경쟁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세속적인 오락과 쾌락에 눈이 돌아갈 때마다 거부할 힘이 없어 몰래 숨어서 해야 하는 숨바꼭질도 상당한 스트레스였습니다. TV에 걸그룹이 나올 때 눈을 떼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고, 컴퓨터로 영화를 보다가도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다가도 누가 오면 성경 보고 있었던 것처럼 쇼할 때마다 ‘나는 가짜다’라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돕는 것이 아무런 보상 없이 그저 나의 희생과 헌신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매우 힘들게 했습니다. 차라리 다른 일을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잘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학원 강사라도 했더라면 아내를 공장에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거, 갖고 싶다는 거 다 사 주고, 남들 다 가는 학원에 우리 아이들도 보낼 수 있었을 거라 여겼습니다. 나와 내 가족이 다 희생하면서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보상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이 땅에서 거지같이 살아도 하늘에서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으니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는 말에 발끈해서, 천국은 들어가기만 하면 됐지 무슨 면류관이냐고, 차라리 이 땅에서 돈으로 바꾸어 쓰게 미리 가불해 줬으면 좋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천국은 가게나 매장도 없을 텐데 거기에 보화가 있다고 한들 어디에 쓰겠냐고 하면서, 이 땅에서나 유용한 것이니 쓰다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지요. 


내 마음 구석진 곳에 하나님을 장애인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느꼈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은 인정도 안 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럴 바에야 뭐하러 목사 할까 싶어도, 쉽게 그만두지도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목회가 하나님의 일에서 나의 일로 슬며시 바뀌면서 교회가 내 사업장이 되고, 성도는 고객이 되었으며, 헌금은 내 수입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상품이 되었고, 십자가는 인테리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에서 하나님과 동업자로 바뀌더니, 심지어는 주객이 전도되어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이 나의 동역자가 되는 이상한 목회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할 주님이 영리법인, ‘(주)예수 그리스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을까 고민하면서 깨달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였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셈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내가 목사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했고, 나를 목사님으로 불러주는 성도들이 내게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대학가 한복판에서 꼭 필요한 직업을 묻는 설문 판을 만들어 세워 둔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쪽은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 20개를 나열하고, 다른 쪽에는 ‘없어도 되는 직업’ 20개를 나열한 뒤 스티커를 붙이게 하는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 미용사, 건축가, 일용직 근로자, 택시 기사 등을 목사와 함께 두면, 20개의 직업 중 목사는 몇 위쯤 할까요?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에서는 하위권에, ‘없어도 되는 직업’에서는 상위권에 오를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부르신 종이나 동역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목사가 성도보다 거룩하거나 신앙이 좋아서 특별히 선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성도를 돌보는 일도 목사가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전도하고 가르쳐 회개시켜서 구원받게 하고, 예배와 설교를 통해 은혜받게 하고, 제자 양육으로 성화하도록 하는 일도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고전 3:7).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는 찬양처럼, 내가 목사가 된 것은 나의 헌신과 희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을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목사가 되려고 했었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목사가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행복한 목사가 되게 하시려고 인내심 많은 성도님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목사로서 하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인 나에게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목사도 그저 당신의 어린 양일 뿐이고, 사랑받아야 할 당신의 자녀였습니다. 


목사 안수식 때, 선배 목사님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며 충성된 목사가 되려고 하셨는지를 설교하거나 권면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으로 그 자리까지 오게 되었음을 고백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예비 목사님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며 희생과 헌신을 결단하도록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으로 예비 목사들을 돌보아 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해 주면 좋겠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세워지고, 성도님들이 계셔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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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