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길

시편 133편 묵상

by 고명환2023-11-25

1 

신학교 교회사 시간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는 분열을 계속해 왔다는. 


사실이다. 개신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그 가지 수를 늘리고 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한국에서 그 실상은 쉽게 발견된다. 교파를 가르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교파 안에 수많은 교단이 정통의 깃발 아래 간판을 달리하고 있다. 개신교를 방어하는 혹자는 이를 다양성이라는 미명으로 애써 포장하지만, 다양성을 낳은 태생의 동기를 파헤쳐 보면 얼마나 허전한 변명인지 금방 알아채게 된다. 


분리는 연합보다 쉬운 선택이다. 일치를 위해 애쓰는 것보다 떠나 독립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며 나아가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이 긴 고민 없이 분리를 선택하는 큰 이유일 것이다. 


덩치가 큰 기독교 집단이 분리하는 이유와 그리스도인들끼리 협력보다 분리를 선택하는 이유는 일맥상통한다. 그 속성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갈등하며 같이 가는 것보다 혼자 자신의 길을 가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함께 가기 위해 맞춰주고 받아주고 기다리고 설득하고 때론 싸워 조정하는 데에는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렇지만, 떠나고 숨고 거부하고 무관심한 편을 선택하면 그런 일과 씨름할 필요가 없어진다.


나 역시 쉽게 떠나는 편을 선택해 왔다. 어떤 그룹은 세상적이라고, 아니면 그 친구들은 너무 보수적이라고 하면서. 생각이 맞지 않는다며 동역자들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들의 모임을 피하려 했다. 소수라도 마음이 맞는 교우들과 일하려 했지, 껄끄러운 분들을 적극 설득해서 같이 하려 하지 않았다.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가 교회를 떠나면, 어쩔 수 없다며 적극 다시 끌어오려 하지 않았다. 마음 한 켠에 앞으로 속 썩지 않아도 된다는 얄팍한 계산도 했던 것 같다.  


2

시편 133편은 시의 분량이 말해주듯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간결한 시이다. 그런데, 시작이자 시 전체를 수렴하는 1절은 긴 공명을 일으킨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새번역)


시편 133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1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2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3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형제자매들(하나님의 백성)이 연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사는 모습은 밖에서 보기에 좋아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즐거움이 있다(1절). 주님의 사람들이 선한 일에 연합하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즐겁고 기쁜 일은 없다.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은 두말할 필요 없고,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답다. 이런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며 마음껏 복을 주신다(3절)


형제들과 함께하며 얻는 즐거움은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시편 122편을 시작하는 구절이다. 시 전체는 성전을 비롯한 예루살렘을 둘러보고 느낀 황홀한 감격을 그린다. 이 잊지 못할 경험은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는 형제들의 제안에서 시작된다. ‘기뻤다’는 표현이 말해주듯 같은 마음을 품은 형제들과 좋은 일을 함께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전도서에는 주님의 백성이 연합하여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때 비단 즐거움을 얻는 데 그치지 않음을 들려준다.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받는 유익을 얻게 됨을 가르친다. 물론, 힘을 합하여 큰일을 도모할 수도 있다. 홀로 일어나지 못할 때 서로 일으켜 줄 수 있으며, 혼자의 힘으로 맞설 수 없는 상황에서 힘을 보탤 수 있다. 한 사람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여럿이 힘을 합쳐 이루어 낼 수 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도서 4:9-12, 새번역)


예수님은 사람의 도움 없이 뜻하신 일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다. 그런데도,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셨다.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과 다니며 일하셨다. 이 땅을 떠나시기 전,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그들이 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요한복음 17장). 잡히실 것을 아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깨어 기도하라 부탁하기도 하셨다. 부활 후에는 제자들 곁을 아주 떠나지 않으신 채, 한동안 세상에 머무시며 확신을 심어 주시고 사명을 부여하셨다. 마침내, 그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교회가 시작되게 하심으로 주님의 원대한 계획에 제자들이 동참하는 영광을 얻게 해 주셨다. 


사도 바울은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전도 여행에는 언제나 동행자들이 있었다. 때론 그들 가운데 뜻이 맞지 않아 의견 다툼이 생기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혼자의 길을 고집하지 않았다. 새로 만나는 주님의 일꾼들과 거리낌 없이 협력했고, 의견이 다른 일꾼들과 잠시 갈라서기도 했으나 영영 결별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편지에는 받는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들이 그가 하는 일에 기도와 마음으로 동참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3

즐겁고 아름다운 형제의 연합은 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는,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다름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인식하기보다 다양성의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같은 모습으로 만드시지 않았다.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에서 각각 차이가 난다. 이처럼 각 사람을 독특하게 지으신 목적은 자기만의 색깔을 내며 홀로 독불장군이 되어 독립적으로 살아 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아니하면서 다른 색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큰 그림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사람들의 모습과 성격이 다르듯이 살아가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한 아버지를 모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양태 역시 제각기 다르다. 유사한 사람들로 그룹을 지을 수 있지만, 면밀하게 뜯어보면 그 안에도 똑같은 생각이나 방식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란 없다.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고, 형편에 따라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신앙인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TV를 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제 될 게 없다고 하는 신앙인이 있다. 어떤 사람은 좋은 프로그램만 골라 보면 된다고 한다. 유행가를 불러도 된다 혹은 안된다. 교회 안에서 반바지를 입지 말아야 한다, 괜찮다 등등, 다양한 의견 차이와 생활 방식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 


미국에 사는 동안 현지 목사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 목사님들의 삶에 익숙한 내게 미국 목사들은 너무도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매일 새벽잠 깨어 교회로 향하지 않아도 되고, 밤늦은 시간에 기도회를 인도하지 않아도 된다. 주일 오전 예배에 사용할 설교 한편이면 설교 준비는 끝난다. 주중에는 교회에 마련된 목사실로 며칠 출근하여 스스로 정한 근무 시간을 채우면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개인적으로 활용하든 상관하는 사람이 없다. (미국 목사들은 ‘오피스 아워’라고 부르는 시간 동안 사무원처럼 사무실에서 일한다.) 본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특별한 요청이 있을 때 어쩌다 교인을 심방하기 때문에 심방으로 시간을 빼앗기지도 않는다. (계절별로 대심방이나 성도들의 기념일로 심방 하는 일은 없다. 병원을 방문하거나 상을 당한 성도를 심방 하는 일 정도가 심방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상대방이 원하는지 잘 판단해야 한다.) 


게다가 일 년에 한 달 이상 휴가를 다녀오고 두세 주 정도의 독서를 위한 특별휴가까지 받는 것이 보통이다. 설교 시간에 지난주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거나, 프로야구 경기장에 가서 친구들과 환한 얼굴로 찍은 사진들을 교회 프로젝트 화면에 띄우며 자랑하기도 한다. 사명감에 불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회 일에 분주한 한국 목사들에 비하면 그들은 놀고먹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직무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설교 준비에 성의를 다하고, 매일 새벽에 교회로 향하지 않지만 개인의 처소에서 경건 생활을 위해 힘쓴다. 단지 그들은 한국의 목사들과 다를 뿐이다. 목사라는 직책을 수행하는 방법이 다르고, 목회 철학이 다르고, 세상과 가정과 개인 생활을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은 어떤 이유에서 건 다 다르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반목과 무시로 서로를 대하기 쉽고 불협화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가진 것만이 옳다고 믿고 주장할 때, 다른 그룹의 사람들은 어울리지 못할 타인들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합과 조화에서 오는 즐거움은 고사하고 분열에 따른 아픔만 남게 된다. 이는 서로 사랑함으로 그 정체성을 세상에 알려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히려 분열함으로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은 차가울 것이고 나아가 주님에게 큰 손해를 끼칠 건 뻔하다. 


어떤 그룹이나 개인이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면 그다음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작은 이슈들에 집착해서 서로 옳고 그름을 따져 거리를 두기보다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집중하면 좋겠다. 


하나님 나라는 흑백으로만 그려져야 할 지루한 평면적인 그림이 아니다. 형형색색이 어울려 그려져야 할 화려하고 아름다운 입체적인 그림이다.      


다음으로, 이해와 포용, 용서와 화해의 자세를 가질 때 연합과 조화의 아름다운 그림은 그려진다. 이해와 포용의 기반 위에 협력과 동행의 좋은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관계를 이어가는 힘은 이해와 포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용서와 화해는 이해와 포용보다 차원 높은 기독교의 핵심 정신이다. 이해와 포용이 상대의 연약함이나 약점을 덮을 수 있는 정도라면 용서와 화해는 상대방의 잘못과 허물까지 덮을 수 있다. 용서와 화해가 없는 기독교는 정의와 법만이 지배하는 삭막한 종교의 수준에 머물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해와 포용을 넘어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기까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대학 시절에 교회의 청년부에 속해 있으면서 대학생선교회 활동을 했다. 분명 두 그룹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다. 한쪽은 모이면 전도와 민족복음화를 얘기하는 순수 열정 대학생 모임이었고, 다른 쪽은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대화로 가져와 웃고 즐기는 세상적인 기독 청년 모임이었다. 한창 뜨거웠던 나의 눈에 비친 교회 청년들의 모습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이런 비교는 점점 그들과 거리를 두게 했고 그들 속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속한 대학생선교회에 대한 자부심은 또한 다른 그룹의 대학생선교회들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각자의 특성대로 일하는 동역자이자 형제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못했고 칭찬은 고사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열리는 연합 행사에 건성으로 협조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의 관점에서 대학생선교회를 지도하시는 간사님들은 최고로 헌신된 주님 나라의 일꾼들이었다. 일정한 소득 없이 매달 불안정한 후원으로 살아가면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묵묵히 일하던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주님의 사도들처럼 보였다. 반면에, 의식을 집전할 때는 근엄한 태도의 성직자들이 되지만, 단을 내려오면 언어나 생활에 본이 되지 않는 교회의 목사님들은 그저 그런 일꾼으로 판단했다. 이런 좁은 생각으로 인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고 가까이하여 그분들의 좋은 점들을 배울 기회를 놓쳤다. 기도로 기꺼이 돕지도 못했다. 


미국 교회의 원로 목사님이 해 준 말씀이 생각난다. 아마 그분과의 대화 중 당시 내가 섬기던 교회의 한 성도의 흠을 잡았던 것 같다. 이혼을 거듭했고 말을 사납게 하는 여자 성도가 교회에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자 노령의 목사님은 그 성도를 잘 품어 주라고 당부하며 덧붙였다. 


“당신이 아주 비싼 벤츠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데 헤드라이트 하나가 나갔다고 차를 버리겠냐?” 


내 좁은 속을 부끄럽게 만드는 적절한 충고였다. 그 당시의 나는 전체의 가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트집 잡으며 가치를 절하시키고 나중에는 폐기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다 실수하고 때론 죄를 지으며 산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고 죄를 꼬집는 나 또한 실수와 죄의 비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어떤 사람이 잘못했다고, 실수했다고,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죄를 지었다고 멀리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주님은 그분의 사람들이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고 연합과 조화를 이루기를 원하신다. 상대의 약점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함께 가라고 하신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다시 하나가 되어 주님 나라를 확장해 가라 요구하신다. 


세상은 혼자 당당하게 사는 당신이 아름답다고 한다. 당신에게 유익을 주지는 못하면서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사람을 손절하라고 가르친다. 홀로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부각하며 동경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혼자 살아가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어울려 즐겁고 아름답게 살도록 부름받았다. 그리고 함께 일하도록 부름받았다. 


어울려 살아가고 조화를 이루며 함께 일하려면 서로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형제라도 끝까지 참아 주고 곁에 있어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분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모두 주님에게서 손절당할 무익한 존재들이다. 이를 생각한다면 하찮게 여겨지는 관계라도 함부로 끊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관계들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의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 가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길 바래 본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고명환

고든콘웰 신학교를 졸업(M.Div)하고, 미국에서 한인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유학생, 다문화가정 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