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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인간의 가치
by 전재훈2023-12-01

인류 역사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글입니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 하고, 고고학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하지요. 역사시대의 시작은 문명의 시작과 맥을 같이 합니다.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그 예입니다. 


문명은 크게 넷으로 봅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서 발생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강을 중심으로 이집트 문명, 황하강을 중심으로 황하문명,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인도문명입니다. 이들 문명을 확인하는 것이 문자입니다. 즉 문자는 문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죠.


역사시대 이전의 선사시대에 대해서는 수많은 신화가 존재합니다. 그리스 신화, 바벨론 신화, 구약의 원역사 같은 일들이 전해져 옵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선사시대는 돌을 들고 뛰어다니던 구석기, 신석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구석기는 돌을 깨서 날카로운 돌을 사용한 타제석기 시대이고, 신석기는 돌을 갈아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사용한 마제석기 문화였지요.


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그냥 짐승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또 다른 짐승이었지요. 이들이 불을 발견하고 고기를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익은 고기는 씹는 힘을 줄여주어서 머리뼈를 가늘게 만들었고, 소화 에너지를 뇌로 보내 뇌가 발달하는 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사냥과 채집에 의존하던 이들이 농사에 눈을 뜨면서 정착된 삶을 살게 됩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소유가 생기게 되지요. 농사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게 되고 재산이 생기게 됩니다. 자연스레 재산은 친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망을 만들어 냅니다. 이로써 혈연의 개념이 생깁니다. 


혈연이 생기기 전에는 모계 사회였습니다. 남자들은 사냥을 다녔고, 여자들은 아이를 키우며 채집하고 살았지요. 남자들이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사냥하던 습관에서 나왔다고 하지요. 사나운 짐승과 눈싸움을 하고 절호의 순간을 잡아야 하기에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는 버릇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나무의 열매를 따면서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으므로 여자들은 통화를 하면서 설거지하고, 거실에서 하는 수다에 끼어드는 게 가능한 신비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농경사회가 되면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바뀌게 됩니다. 농사지을 땅과 농기계 및 농사 기술을 가진 사람에게 힘이 몰리면서 자연스레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중요해졌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큰아들이 누군가 하는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씨족사회가 형성된 것입니다. 


사회가 형성되면 응당 리더를 결정해야 합니다. 추장이 되었건, 족장이 되었건, 마을 이장이 되었건, 그 주변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지요. 당연히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그의 장남계열이 승계하게 됩니다.


씨족이나 부족이 여럿 모여 국가를 이루면 그 국가의 왕을 누가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힘 있는 사람이 나서서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주장하면 되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무리들은 하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기에 그 하늘에 있는 신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리더를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신의 아들을 중심으로 신의 뜻에 따라 나라가 세워지고 신의 아들은 신의 지혜와 힘을 이용해 국가를 통치했습니다. 


신의 아들이 다스리는 사회는 신정국가입니다. 하늘의 뜻을 점치는 제사장과 무녀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권력을 형성한 이들은 이런 하늘의 뜻을 독점하고 백성을 다스렸던 것이지요. 


이런 문명이 시작될 때의 문헌들에는 신의 뜻을 묻는 글들이 많이 나옵니다. 황하문명의 오래된 갑골문에도 대부분이 신의 뜻을 구하는 질문과 그 뜻을 찾기 위해 점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문헌은 자신들이 신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시대 이전 선사시대의 내용들에 대해 신화적인 요소들을 많이 차용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처음에는 한낱 짐승에 불과했다가 불을 사용하면서 짐승과는 다른 구별된 존재임을 자각했고, 나중에는 선조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된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혈연관계로 자신을 이해하면 자신은 그저 한 시대의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진 존재임을 알게 되면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게 되지요. 그러던 이들이 신정국가로 발돋움하면서 보편적 절대자인 하늘의 백성으로 승격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디엔가 소속되기를 원하지요. 소속은 진영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진영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납니다. 이런 갈등이 부딪치는 것이 전쟁이지요. 전쟁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대개 신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신이 진짜 신인가 하는 테스트를 전쟁을 통해 하게 됩니다. 또한 누가 진짜 신의 아들인가 하는 것도 왕조가 바뀔 때마다 등장하지요. 때로는 신의 뜻이 어디서 어디로 옮겨지는가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신이 없다는 생각을 못 하던 시대이니만큼 이해되지 않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신의 뜻이 인간의 행동에 따라 옮겨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신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로까지 성장했지요.


하지만 실제로 그런 신이 있어서 어떤 특정한 가문을 통해 나라를 세우고 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진짜 신의 아들인 예수님은 왕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지요. 나머지는 다 가짜 아들들입니다. 즉 신이라는 것과 그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백성을 통치하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이걸 깨달은 이들이 신화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화두를 던지기 시작했는데 그 중 최초라고 알려진 사람이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라는 철학자입니다.


탈레스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사람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굉장히 강한 신화이지요. 그 신화에서 만물의 근원은 모두 신이었습니다. 환경을 변화시키려면 신의 뜻을 어르고 달래는 과정이 필요했지요. 하지만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철학자의 아버지가 됩니다. 만물에서 신을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신의 뜻을 어르고 달래기보다 인간의 노력으로 환경을 바꿀 수 있음을 시사했던 것이지요. 소크라테스가 했던 유명한 말인 ‘너 자신을 알라’가 사실은 탈레스가 한 말이라는 주장도 있지요. 신을 알려고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알려고 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엄청난 주장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가 출현합니다. 공자의 사상은 후에 유교로 집대성되었는데 유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신의 뜻을 따라 살던 사람들을 인간의 예(禮)로써 살게 한 사람이 공자입니다. 노자는 신이 아닌 자연의 뜻을 따라 살자고 주장했지요. 결국 둘 다 신의 뜻을 찾기보다 인간 스스로 길을 찾아가야 함을 강조했던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후로 인간들은 서서히 신에게서 독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과 동양에서 각각 인간의 길을 모색한 철학이 태동하고 인간 스스로의 가치가 증대되어 갈 때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인도에서는 싯다르타 고타마가 태어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치며 절대적 인간관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에 더 가깝다고 하지요. 요즘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을 열심히 하면서 불교는 철학이라는 주장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서양에서는 탈레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화를 배제해 나가고, 동양에서는 공자와 노자, 맹자 등 철학자들이 신의 뜻을 지워나갈 때, 인도에서는 부처가 나타나 인간을 계몽시켜 갈 때, 유대교에서도 한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진짜 신의 아들 예수님이시지요.


가짜 신을 섬기는 나라들에서는 진짜를 추구하기 위해 가짜 신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인간의 가치를 끌어올렸다면 진짜 신은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신의 피조물 중에서 택함 받아 선민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신의 아들이 되는 방향으로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켰습니다. 더불어 선민이 아닌 이방인들과 신의 은총에서 소외되던 사람들까지 신과 합일의 경지에 이르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독점했던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고, 신의 아들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대상이며, 성령을 부어 주어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게 하는 엄청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이 시대는 다양한 사람들이 혼재해 있습니다. 여전히 신화 속에 갇혀 점을 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스스로 독립하여 인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무신론자들과, 여전히 신을 독점하며 사람들을 현혹하여 권력을 누리는 일부 몰지각한 종교 지도자들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사랑을 입어 살아가는 신의 자녀들이 있지요. 


신이 가짜라면 철학자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 존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참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존귀한 삶이 되겠지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은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지성소를 덮어 두던 휘장은 찢겨나갔습니다. 죄는 사함을 받았고, 성령은 이미 각 사람 안에 임하셨습니다. 2,000년 전에 이미 예수의 사람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으며,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신을 배격하고 철학자의 뒤를 따를 것이 아니라면 신의 뜻을 독점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그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존귀하게 살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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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