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을 장려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방식
by Heidi H. Dean2024-01-18

정해진 범주를 흩트리고 청취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신학자로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따라올 사람은 없다. 


그는 도덕 윤리 분야의 최고 목소리였고, (내가 지지하는) 개혁 신학에 대한 비판자였으며, 내가 아는 한 강의 시간에 입에 욕을 담은 유일한 신학자이다.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고도 남을 그는 신학적 좌파에 관해서는 그들이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며 무시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타임은 2001년에 그를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명명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그는 “최고”라는 단어는 자신이 아는 한 신학 용어가 아니라며 무미건조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우파가 가진 우상과 좌파가 가진 우상, 그리고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가장 위험한 우상을 불러내는 데에 적극적 의지를 가진 하우어워스로부터 우리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목사가 설교 시간에 헌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교회가 얼마나 조용해지는지 눈치챈 적이 있는가? 하우어워스는 이런 모든 어색함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물질주의, 통제에 대한 욕구,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실패가 우리의 출산 신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말로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불편해진다. ‘출산’에 대한 논의는 그만큼 어색하다. 그렇다면 하우어워스는 아이들에 대한 나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토론(debating)에서 데이트(dating)로 


나는 독신 대학원생으로서 하우어워스와 함께 공부했는데, “낭만적으로 이상화하는 가족”에 관한 그의 비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바로 범인이었다. 좌절한 범인. 미혼이었던 나는 전반적으로 진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듀크 대학에서 나는 데이트보다 토론을 더 좋아하는 남자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다가 철학과 학생 한 명이 내 마음을 끌었고, 나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듀크뿐 아니라 같은 교회를 다녔던 그 “친구”와의 몇 주간에 걸친 논쟁에서 (그게 과연 단지 우정이었을까?) 중심이 된 건 결혼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견해였다. 단순한 학문적 활동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논쟁이었다. 우리 각자가 독신 생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혼 부부만큼, 혹은 그 이상을 이바지할 수 있는가? (내 친구의 입장이다.) 아니면 뭔가 더 좋은 것은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만 성취될까? (내 입장이다.) 우리는 교제와 로맨스 같은 개인적인 가치와 다음 세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과 같은 사회적 가치의 바른 위치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스티븐은 나이 많은 독신이고 로맨스보다 생산성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하우어워스의 강력하고 비감정적인 결혼 비전 덕분에 오늘까지도 그 큰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다섯 자녀를 둔 후에도 우리 부부는 여전히 가족의 목적과 관련해서 하우어워스의 도전적이고 파괴적이며 필요한 관점을 인용하고 있다. 


믿음과 소망의 행동


노틀담 대학에서 진행했던 결혼 강의에서 하우어워스가 학생들에게 던졌던 첫 번째 질문을 생각해 보라. 


나는 “당신이나 다른 사람이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들은 건, “아이들은 재미있다” “아이들은 외로움을 막아주는 울타리이다” 같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개를 키우라고 추천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진짜 좋게 들리는 멋진 대답을 하나 내놓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사람들은 완벽한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충분한 재정과 집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그게 가능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이들을 이 세상에 맞이하려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어떤 아이는 장애를 갖고 태어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 끔찍한 비극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녀를 갖는 것은 실로 엄청난 믿음과 소망이 필요한 특별한 행위이다. 


자유주의나 복음주의 집단 중 그 어디에서도 하우어워스가 2001년에 발표한 글에서 말했던, 자녀 출산에 대한 “급진적 소망”과 같은 말을 하는 신학자는 만날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녀를 갖는 것이다. 자녀를 먼저 낳아야 하고, 그런 다음 우리 삶의 다른 측면을 ‘내게는 자녀가 있다’라는 현실에 종속시켜야 한다.”


하우어워스는 불편하지만 절실하게 필요한 진실을 말한다.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이 원하지 않는 어린이들을 환영”할 만큼 급진적인 소망을 품고 있는가?


성경 전체에서 드러나는 소망


출산, 입양, 양육, 봉사 등에서 우리가 출산을 원하는 사람(pro-children)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 전체에 걸쳐 있다. 고대 세계에서 억압받던 여성, 어린이, 기타 약자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신 예수님은 다름 아니라 구약 전체에 걸친 하나님의 패턴을 이어간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문화적으로 열등한 대상이었던 과부, 둘째, 외부인과 어린이를 높이셨다. 


학자들은 성경에 번식과 자손의 중요성이 계속해서 강조되었음을 입증한다. “씨”(자녀, 후손)라는 모티브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진다. 이는 창조, 타락, 이스라엘, 예수, 교회, 새 창조 등 모든 주요 순간에 필수 요소이다. 인류에게 내려진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첫 번째 사명, 즉 자신의 형상을 온 땅에 전파하라는 명령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마침내 성취된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왕국을 “열방”(요한계시록 21장),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요한계시록 7:9)로 구성된 하나의 “성(도시)”으로 묘사한다. 


역사적으로 씨와 번식이라는 모티프가 상상력을 자극했을 때 교회는 번성했다. 초기 교회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용하고, 죽도록 내버려진 유아를 입양하는 등 적극적으로 생명 옹호의 입장에 섰다. 바로 그 점에서 교회는 로마 문화보다 우월했고, 그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약자를 통한 교회의 성장은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까지 놀라게 했다. 어린이를 포함하여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독특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모습이다. 


소망은 오로지 교회에서만 찾을 수 있다


자녀 양육이 소망의 기초가 되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은 희생과 지연된 만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생은 아이들이 자라서 광범위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하우어워스는 이렇게 썼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 가지, 즉 권력, 부, 그리고 영향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힘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독실한 신자들의 특징이다. 국립보건원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종교를 중요시하는 여성일수록 출산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한다. 교회에 충성하는 신실한 여성일수록 더 많은 자녀를 원한다. 


그렇다고 출산만이 취약한 사람들을 우선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건 아니다. 더불어서 개인에게 일일이 출산의 소명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백성으로서 교회는 단체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투신할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은 독신의 길을 영원히 존귀하게 여기셨다. 구원과 성화 활동을 통해 독신자도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음을 알려주셨다. 


그러나 독신에 대한 확신이 결혼이라는 소명을 통해서 이뤄지는 생물학적 출산이라는 축복을 과소평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하우어워스의 지적이다. “결혼은 자녀를 목적으로 하는 관행이다. … 결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녀를 낳고 돌보라는 부르심과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는 이 소망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자녀를 갖는 것이 교회에서 여전히 금기시되는 주제라면, 세상에 의해서 제자화 되는 길을 피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출산에 관한 설교가 그 안에 담긴 신학적 복잡성을 간과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 점이 경시되어 왔다. 


내게는 여전히 답보다 질문이 더 많다. 피임 기구 사용과 관련하여 복음주의자가 고려해야 할 윤리 문제는 무엇인가? 피임은 이제 어디에서나 만나는 일상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여기에 관해서 신학적 입장을 형성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도록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비전, 어떤 윤리적 패러다임과 지혜의 인도를 받아야 할까?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 잘 가르치지 못한다면,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우리가 진정한 제자도를 키울 수 있는 영역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는 인공수정 기술과 관련해서 적절한 사용과 부적절한 사용에 대한 지침을 어떻게 받는가? 자녀를 갖기 전에 기다려야 하는 이유와 적절한 임신 시점을 어떻게 판단할까?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부부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결혼이라는 목적 속에는 반드시 출산이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팀 켈러는 물질주의와 같은 우상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계층으로 이뤄진 소그룹을 통해서 이뤄지는 깊은 공동체 의식과 투명성을 통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교회의 몸으로서 서로 간의 피드백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피드백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자녀를 갖는 것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에 수반한 윤리 문제를 탐색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 간에 믿음과 책임을 지며 동시에 개별적인 조언까지 주고 받을 수 있는 소그룹 공동체이다. 


출산과 관련해서 제자 훈련을 하려는 교회라면 꼭 필요한 이 문제를 도발적으로 제안한 하우어워스에게 감사해야 한다. 아기를 갖는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은밀하고 어색한 주제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우선순위로 인식하고 다뤄야만 하는 중차대한 주제이다. 



원제: How Stanley Hauerwas Inspired Us to Have More Kid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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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Heidi H. Dean

하이디 딘(ThM, Duke University)은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다섯 아이의 엄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