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생각보다 더 깊고 깊은 죄
by Greg Morse
2020-07-10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를 맞았다.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어떤 태도나 행동을 “죄”라고 부르려고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죄라는 단어가 이제는 너무도 구닥다리로 느껴진다. 얼굴을 붉히고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기운 빠진 회중들을 향해 죄에 대해 꾸짖는 설교자를 한번 상상해보라.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설교 또는 그런 설교자와 엮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러나 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도 상실하게 된다. D.A. 카슨(D.A. Carson)은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무엇으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죄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가 없는 한, 십자가가 무엇을 성취했는지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Fallen: A Theology of Sin,’ 22).죄에 대한 얕은 생각은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얕은 생각으로 이끈다. 죄가 가진 엄중함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가진 심오한 세계를 맛볼 수 없다.가짜 그리스도들죄의 본질에 관해 깊은 사고를 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싸구려 이해가 우리 주변을 채우게 되고, 그 가짜들은 각자 나름의 ‘메시아적 메시지’를 제시한다. 인생 코치 예수. 죄를 출발점으로 보지 않을 때, 또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보게 될 때, 우리는 죽음과 심판 그리고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대신 불가능한 목표와 거창한 꿈을 성취하도록 돕는 ‘그리스도’에 치중하게 된다. 예수는 이제 착한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존재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인간이 잠재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우뚝 서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가정부 예수. 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인간인” 우리가 당연히 저지르는 것으로 죄를 바라보게 된다. 즉, 죄는 애통해야 할 것이 아닌 사소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죄는 단지 하나의 실수일 뿐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이 정도로 고백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 인간이 “악마”는 아니니까. 따라서 예수는 이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우리가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의 뒤처리를 해주는 존재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우리의 ‘사소한 실수’를 청소하는 청소비를 내주기 위해서다. 인본주의자 예수. 죄를 거룩한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않고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로만 바라보게 되면, 좋은 목적을 가진 대의명분을 아예 궁극적인 명분으로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 예수는 이런 명분에 필요한 좋은 선전도구로 사용되며, 인간은 죄를 짓는 자와 그 죄로 인해 해를 당하는 자의 관계로 정의된다. 따라서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우리가 가장 열정을 쏟는 문제인 사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내게 임하소서(Kumbaya) 예수. 죄를 우리가 겪는 고통보다 훨씬 더 사소한 것으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예수를 단지 좋은 느낌을 전해주는 존재로 보게 된다. 예수는 이제 우리의 문제와 스트레스를 들어주고, 이 땅의 새와 꽃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우리를 푸른 초원과 안전한 물가로 인도하는 존재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는 예수이기에, 그는 굳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어떤 고난을 만나도 우리가 맘 편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왜곡된 그리스도가 주는 위험에서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가 무엇이고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은 우리의 타락과 죄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류의 옷장 속에 넣어 놓은 해골과 다시 대면해야 한다. 바로 아담 속에 있는 우리의 원죄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지 내 자신과 우리 시대가 짓는 죄의 수준을 벗어나 인류의 뿌리를 점거하고 있는, 바로 그 죄의 근원까지 내려가야 한다.아담의 죄 그리고 우리의 죄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중에 얼마나 있을까? 또한 그의 죄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이해하도록 준비시키는지를 생각하는 이는 또 얼마나 있을까? 우리가 지은 죄의 역사는 우리 존재보다 앞선다. 우리는 아주 오래 전에 노예의 굴레로 던져졌다. 우리 모두는 다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죄에 빠진 상태다. 그리고 예수님, 진정한 그리스도가 또한 바로 그 장소에서 약속되었다. 어떻게 아담의 죄가 곧 우리의 죄가 되는 것일까? 어떻게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8-19)가 가능했던 것일까?다윗과 골리앗의 기념비적 전투를 생각해보자. 블레셋 거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조롱을 퍼부었다. 이스라엘의 왕이자 거인이었던 사울은 텐트에 숨어있었다. 그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목동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을 참지 못했고, 골리앗에게 도전했다. 골리앗이 다윗을 놀리자마자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박살냈고 그의 머리를 잘랐다(삼상 17:51).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이기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을 것이다. 왜 다윗과 골리앗, 두 사람만 싸운 거지? 왜 일대일 싸움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른 거지? 우리는 골리앗처럼 쓰러졌다일대일 결투로 전쟁의 승패를 겨룬 마지막이 과연 언제일까? 이것은 바로 최고의 전사, 즉 우리의 “챔피언”이 상대편 챔피언과 죽을 때까지 싸우는 싸움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르던 고대의 관습이다. 골리앗은 바로 블레셋의 챔피언이었다.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 17:8–9).다윗과 골리앗은 대표로, 그러니까 양측을 대표하는 챔피언으로 만난 것이고, 그들의 싸움은 양쪽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만약에 다윗이 죽었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쓰러졌을 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우리의 챔피언이 사탄과 결투를 벌였고 그때 아내까지 아담의 곁에 있었지만, 아담은 패배했다. 뱀의 머리를 박살냈어야 했을 아담은 도리어 그의 자손까지 걸려있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사탄에게 굴복했다. 우리의 대표, 우리의 전사는 그 사악한 뱀의 거짓말하는 혀를 잠재우지 못했고, 대신 자기 자신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시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선악과의 열매를 먹었다. 뿌리에서부터 독에 오염된인류의 챔피언으로서, 또 창조주와의 언약을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적과 싸운 아담은 쓰러졌고, 그의 자손들은 이제 아담의 타락성과 죄를 모두 다 상속하게 되었다. 아담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다 즐겁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고, 사랑하며 살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며, 또한 악을 피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다 선천적으로 분노의 자식이며, 불순종의 자녀들이고 또한 우리의 조상이 패한 대상인 사탄에게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어버린 상태다(엡 2:1-3). 우리의 조상 아담 때문에, 우리의 신세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가 되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 17:9)는 상태가 된 것이다. 우리는 다 죄 중에서 태어난다(시 51:5). 우리의 죄가 단지 우리 자신의 정욕과 교만함 그리고 거짓말하는 혀,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아담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챔피언은 적의 피를 흘리게 하는 대신에 무릎을 꿇었고, 달콤한 선악과를 깨물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저주의 쓴맛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중생하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에 수도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탄과 맺은 동맹을 확인할 수 있다. 인류라는 나무는 뿌리에서부터 독에 오염되었다. 두 전투 이야기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향하도록 한다. 동화 속 요정 예수, 정치적 활동가 예수, 집을 치워주는 예수가 아닌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다. 첫 번째 아담은 궁극적으로 진짜 챔피언이 와서, 아담의 머리를 잘라버린 바로 그 적과 제대로 싸우기 위한 하나의 설정이자 복수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롬 5:14). 이 세상에 죄가 한 사람으로 왔던 것처럼(롬 5:12), 용서도 다른 이를 통해서 온다(골 1:14). 아담의 범죄가 모든 이에게 죽음을 가져다줬다면(롬 5:15), 예수님의 승리는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롬 5:17). 아담은 그의 자손을 저주와 타락으로 밀어넣었고 또한 그들을 사탄과 죄의 노예로 만들었지만, 두 번째 아담은 아버지를 위해 그의 형제들을 해방시켰고, 거룩함 안에서 그들에게 그의 온전한 은혜와 신령한 도움을 준다(롬 5:16). 에덴동산에서의 전투 때문에 세상은 저주받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 밖에 있는 겟세마네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서 구원받은 모든 이들은 이제 축복을 받게 되었다. 우리의 첫 번째 챔피언은 세상과 육욕 그리고 사탄에 의해 박살났지만, 우리의 진짜 챔피언은 이 세상과 육욕 그리고 사탄을 박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죽음을 이겼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다 노예고 하나님의 적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고 또한 앞으로 맞게 될 세상에서 우리는 다 왕과 왕비가 될 것이다.우리가 죄의 혈통을 잊을 때, 또 우리가 아담이 가져다 준 타락 때문에 죄 속에서 태어나 사탄을 따르는 자였다는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죄를 ‘가벼운 실수’ 정도로 여기고 서로의 상처를 너무도 쉽게 치유한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필요는 우리의 행위 수준에 따라서 달라지며, 또한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를 입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에 지식적으로 또는 기능적으로 유혹받기도 한다. 그러나 죄의 우물은 너무도 깊다. 우리의 죄는 너무도 오래되었고 우리의 노예 생활은 너무도 끔찍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전사가 필요했다. 다른 아담이 필요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린다. 그리고 그는 곧 다시 오실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Your Sin Runs Deeper Than You Think번역: 무제
복음
변증
아담
원죄
DA카슨
쿰바야
골리앗
챔피언
에덴동산
인종차별은 구원의 원칙을 훼손하는 죄
by Tim Keller
2020-07-09
성경적으로 말하면, 죄는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모자란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죄는 하나님의 율법과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다(요1 3:4; 롬 3:23). 그렇다. 인종 차별은 죄다.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기에 죄라는 사실을 최소한 네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다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에(창 1:26-28), 인종 차별은 누구나 다 평등한 존엄성과 가치를 가진다는 신성한 진리를, 생각과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거스르는 죄다. 진리가 훼손되는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가 야고보서 3장 9절에 나온다. 그것은 사람을 향해 욕을 하는 것, 그러니까 누군가를 존경심 없이 마구 지칭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살인하지 말라”(마 5:21)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누군가를 향해 혐오감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라가” 또는 “바보”라고 부를 때, 당신은 이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사실상 어기고 있는 것이고, 그 결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마 5:22) 위험에 처하게 된다. 지금 기준에 비추어서 볼 때 이건 좀 심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살인하지 말라는 이 여섯 번째 계명 뒤에 숨은 진짜 의미는 사실상 야고보서 3장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기본 교리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집단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것, 즉 당연히 받아야 하는 존경과 사랑 그리고 보호로부터 그들을 소외시키는 것은 분명한 죄다. 단지 인종에 근거해서 누군가를 불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아무리 널리 퍼진 관행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일 뿐이다. 어떤 특정 인종이나 국적이 내재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간주하고, 그 결과 다른 인종이나 국적을 (1) 불공정하고 불의하게 대하거나, (2) 기만하거나(‘라가’의 의미 중 하나는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nobody]이다), 또는 (3) 적극적인 경멸감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죄며, 그런 사람은 “지옥불에 들어가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하나님의 법은 그의 성품에 근거하고 있다. 주님은 말 그대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는”(신 10:17) 분이다. 이 구절이 나오는 문맥은 다름 아닌 인종과 계급에 관한 내용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7-18). 사도행전 10장 34절을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라나 인종을 근거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종과 국적을 근거로 편을 들거나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죄가 된다. 2.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 때문이다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다음 두 가지 “대계명”(마 22:36-40)으로 정리했다. 두 번째 계명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요청에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예를 들었다. 그 사람은 큰 위험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의 육체적인 필요와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었다(눅10:25-37). “너희도 나가서 이렇게 하라”고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명령은 내가 나 자신과 우리 공동체를 향한 것과 동일한 관심과 존경심으로 인종과 국가 그리고 계급과 소속집단이 다른 모두를 대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 대계명과 관련해서 존 칼빈(John Calvin)은 이 계명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교리와 겹친다는 점에 주목했다. 칼빈 시대에 외국인은 얼마든지 멸시받아도 되는 존재였고, 또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은 무시받는 게 당연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까지 굳이 힘들게 도와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다음의 놀라운 글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다 주님을 대하듯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에 관해서) 말하자면, 당신은 그에게 아무런 빚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를 깨달을 수 있도록, 그를 그 위치에 두셨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 사람한테 내가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보다 훨씬 못한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당신 때문에 당한 수모가 어떤 것인지는 생각해 보았는가? [중략] 사람들의 사악한 의도를 보지 말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도록 하라. 하나님의 형상은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지우고 그 대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향해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도리어 그들을 사랑하고 포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기독교강요 II.8.6).이 글은 인종 차별 또는 모든 종류의 편견에 경종을 울린다. 칼빈은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 점을 스스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에게 빚진 자이기에 그들을 향해 친절을 베푼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이 허락하는 한, 그 어떤 한계도 정해서는 안 된다”(기독교강요 II.8.7).3. 새 창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말미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할례나 무할례”는 바로 인종 또는 종족의 차이를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바울에게 이런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여기서 어떤 절대적인 가치를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유대 혈통을 향한 사랑과 그에 상응하는 자부심을 표현하기도 했다(예를 들어, 롬 9:1-5).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인종 또는 종족의 차이는 새 창조에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새 창조란 무엇인가? 새 창조는 완전히 새롭게 된 물질 세계, 그래서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전쟁과 불의함도 나아가서 죄와 수치까지 깨끗하게 사라진 세상을 의미한다(사25:7-8; 65:17-25). 그런 세상은 이 세상이 끝날 때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세상의 일부가 현재로 앞당겨져서 이미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는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나오는 새 창조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님 왕국의 새로운 현실. 그리스도로 인해 도래하는 새로운 세상은 단지 미래의 종말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계 21:1–5, 3:12; 막 14:25), 이미 현재에도 해당한다. 이런 새 창조는 이미 인간 속에 만들어졌다. 새 창조는 무엇보다 선물이다. 그러나 그 선물은 그에 합당한 과제와 함께 주어진다.”많은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단지 우리의 죗값을 치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했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위대한 증거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메시지가 숨어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롬 4:25). 이런 식의 부족한 생각은 구원이라는 선물을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도록 만든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내가 이제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충분하고, 굳이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래에 있을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23)로서 부활했고, 우리에게는 성령님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따라서 성령님은 어떤 의미로 볼 때, 미래에 만날 새로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일종의 “보증금(downpayment)” 또는 “선지급금(first installment)”인 셈이다(고후 1:22; 5:5; 엡 1:14-16).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영으로 또 생명으로 예수님과 한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같은 예수님을 믿는 다른 이들과도 이미 한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앞으로 만나게 될 미래의 세상과도 한몸이 되었다. 그 세상은 바로 모든 고통과 눈물 그리고 불의와 악, 나아가서 죄가 없는 세상이다.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온 우주를 정화시킬 그 능력은 새로운 탄생(cf. 마 19:28과 딛 3:5에 동일하게 나온palengensia라는 단어)을 통해서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로움을 만드는 바로 그 능력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구원받은 개인을 품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세상은 폭력과 갈등 그리고 전쟁과 불의가 사라진 새로운 종류의 인류(a new humanity)가 사는 세상이다. 새 창조의 능력은 부분적이나마 이미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렇기에 리델보스는 이 선물이 “그에 합당한 과제와 함께 주어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죄와 어둠의 옛 세상을 따라 행동하면 안 된다. 앞으로 다가올 빛의 세상(롬 13:11-14)에 어울리게 살아야 한다. 새로운 미래 세상이 어떠할지 알 수 있는 하나의 표시가 바로 인종, 종족 그리고 나라 간의 갈등과 모든 반목 및 폭력이 종말을 맞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사 19:25).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때 주님 앞에서는 모든 인종이 다 평등하게 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사야가 새 창조를 표현할 때(사 65:25), 그는 모든 나라들과 이 땅의 모든 왕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사 60:1-7). 모든 나라의 왕들이 다 그들의 영광을 하나님의 도시로 들고 온다고 요한계시록 저자가 썼을 때(계 21:24), 또 하나님의 백성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계 7:9)으로 구성되었다고 썼을 때, 계시록 저자는 바로 이사야서에 있는 이 메시지를 반복한 것이다. 마지막 새 창조가 가져다 줄 이런 놀라운 비전은 우리 개개인을 구분하는 ‘민족성(peoplehoods)’과 국적에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 개인적인 특징은 너무도 중요하기에 없어지는 게 아니라 새 창조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특징을 여전히 간직한다고 해도 우리의 부활한 몸은 완전히 정화될 것이고, 옛 몸이 약함과 썩음이 없는 새 몸으로 바뀌는 것처럼 죄성이 가져다주던 모든 해악은 깨끗하게 정화될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이 해야 하는 과제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런 미래, 새 창조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최선을 다해서 그 새 창조를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 새 창조를 삶에서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인종 간의 평등을 고취시키고, 또한 인종 간에 발생하는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갈 3:26-28)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4. 오직 믿음으로 인한 은혜로만 의롭게 되는 복음 때문이다인종 차별이 죄라는 사실을 이해할 뿐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전진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인종 차별이 복음의 핵심이 되는 메시지, 은혜로 인한 구원이라는 그 기본적인 원칙을 훼손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리처드 러블레이스(Richard Lovelace)는 ‘영적인 삶의 역동성(Dynamics of Spiritual Life)’에서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자신들의 공로 또는 의로움 때문이 아닌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진리를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질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면, 사실상 기독교인 대부분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은 단지 다음과 같은 기독교인에 불과하다.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의롭다함(justification)을 받기 위해서 그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의존한다….. 성실함, 과거의 회심 체험, 최근의 종교적 성과 또는 상대적으로 적은 고의적인 불순종 횟수 등에 근거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인정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끌어낸다.”자신의 가치와 안정감을 확보하는 데 그리스도가 의롭게 하시는 역사함 대신 자신의 업적이나 혈통 또는 행동에 의존하는 사람은 “급진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된다고 러블레이스는 주장한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나 자신이 결코 선하거나 사랑스럽고 또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을 높여주는 감정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하게 되어 있다. 이런 식의 불안함(insecurity)은 여러 형태로 표출되는데, 흔히 오만과 교만, 자기 혐오와 수치심, 또는 타인을 향한 자기 방어적인 비판으로 드러난다. 은혜가 주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당신이 경험하게 되는 가장 쓴 열매가 바로 인종 차별이다. 러블레이스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은 자기들의 안정감을 강화하고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문화가 다른 타인종을 자연스럽게 증오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종만을 같은 편에 속하는 멤버십으로 고정시킨다…. 자신들의 문화만이 가치있는 대상이 된다. 그들의 문화는 마치 자기 의심을 방지하기 위한 갑옷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아니고는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육신까지 쪼개고 들어가는 정신적 속박이다.”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종과 문화는 일종의 자기 의로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저기 사는 “저 나라 사람들”과 내가 결코 같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 말은 결국 자신에게 더 익숙한 그 문화를 도덕적 절대성과 명예로운 훈장감으로 바라본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여러 방식들, 즉 감정 표현, 찬양, 예배 시간의 길이, 서로가 대화하는 방식 등등은 단지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형태일 뿐이지 결코 성경의 지시 사항이 아니다. 그럼에도 은혜의 깊은 데까지 이르지 못한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예배 방식만이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바른 길”이라고 쉽게 단정하고, 우리 눈에 생소한 다른 문화의 예배 형태를 경멸한다. 우리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우리 스스로의 의로움을 수선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와 다른 인종과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은밀하게(또는 노골적으로) 경멸한다.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할 말을 다 하고 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본 바울이 근거로 삼은 논지의 핵심은 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느냐는 것도 아니었고, 또 왜 하나님의 형상을 존중하지 않느냐도 아니었다(물론 바울은 얼마든지 이런 논지를 전개할 수도 있었다). 그의 논지는 인종적 그리고 문화적 우월감이 주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태도는 결코 “복음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태도는 우리 자신에 관한 다른 모든 것을 다 떠나서라도, 우리 모두를 죄인인 동시에 또한 은혜의 수혜자로 동등하게 바라보는 복음을 훼손한다는 것이다(갈 2:14-16).지난 몇 년간 인종 차별에 관한 좋은 신앙 서적이 많이 나왔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결함이 있다. 그것은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뜻에 거스른다는 설명을 하지만, 아쉽게도 왜 신학적으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인종 차별자가 되는지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인종 차별이라는 태도와 행동에만 포커스를 맞추었지, 거기서 단 한 걸음도 더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 책들은 결국 인종 차별주의자(또는 인종적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 구조가 주는 문제점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는 그렇지 않은 우리보다 도덕적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것은 위험하다. 인종 차별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내재적으로 자연스럽게 인종 차별주의자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되고, 그 결과 타락한 인류로서 공통으로 느껴야 하는 죄성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홀로코스트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간에 한 집단이 다른 어떤 집단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라며 악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런 판단은 언제라도 소외와 학대에 대한 정당성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비록 끔찍해도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구원과 분리된 상태에서 인간이 자신의 의와 정체성을 내세우는 죄성의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타락한 인류의 일부라는, 부인할 수 없는 죄성에 대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저지르는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죄성의 발현이라는 차원으로 인종 차별을 바라볼 때, 그나마 이런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마저 잊을 때, 인종 차별에 연루된 사람을 향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는 커녕 서로 간의 분열만을 더 깊게 만드는 방법, 그들을 향한 비난 뿐이다. 바울이 베드로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고 꾸짖었을 때, 바울은 베드로를 망신주거나 또는 그가 강제로 바울의 뜻을 따르도록 압력을 행사한 게 아니었다. 바울은 단지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는 점을 깨닫도록 도왔을 뿐이다.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겸손과 희망의 방법이다.출처: 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sin of racism번역: 무제
문화
인종차별
죄
사회이슈
하나님형상
이웃사랑
칼빈
민족성
불평등
기독교강요
삼색 은총의 길 따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by 정현구
2020-07-08
사회적 거리두기가 수개월 째 계속되면서 사람과의 마음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고, 영상 예배를 계속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마저도 멀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될수록 정작 더 필요한 것은 사람과의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이고, 특히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를 좁히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 사태는 주일 예배를 이전처럼 드리지 못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를 점점 멀게 만드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거리를 좁힐 수도 있다. 알다시피 인간은 그동안 첨단 기술 문명을 만들면서 하늘까지 잔뜩 높아졌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고 자연까지 조종할 수 있는 신의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신의 자리까지 올라감으로 스스로 호모데우스가 된 인간들이 코로나 사태를 통해 바이러스 앞에서 무참히 무너지게 되었다. 우주를 정복하는 존재라고 자랑했던 인간이 우주의 먼지와 같이 연약한 존재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인간이 흙이요 먼지라는 점을 얼마나 잊고 살았는지 모른다. 구약성경의 ‘아담’이란 이름이 ‘흙’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인간에 관한 학명인 ‘호모 사피엔스’의 ‘호모’도 ‘흙’을 뜻하는 라틴어 ‘후무스’에서 나왔듯이 인간이 지혜롭다고 해도 결국 흙임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 기본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것이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인간의 본질을 코로나 사태가 다시 자각하게 해준 것이다. 사람과의 거리두기로 인해 이전보다 혼자 길을 걸으면서 흙을 보고 밟게 되었다. 이전까지 저 흙을 내가 아닌 타자요 물체요 이용의 대상일 뿐이라고 여겼는데, 사실상 저 흙이 인간의 본질이며 사실상 나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이 각종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 있지만, 인간은 흙의 색인 갈색을 결코 떠날 수 없음을 자각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흙과 먼지임을 알고 낮은 자리에 앉으면 비로소 그 낮은 자리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파스칼은 31세에 끔찍한 마차 사고를 당했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는데, 그 사건을 통해서 그는 죽음이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자기 곁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았다.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위대한 존재지만, 한 방울 물로도 죽을 수 있는 매우 연약한 갈대임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그의 깊은 자각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만든 것이다. 어쩌면 코로나 사태는 파스칼의 마차 사고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파스칼이 마차 사고를 통해 인간의 유한함을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갔던 것과 달리, 현대인들은 코로나 사태를 통해 그런 성찰을 갖지 못하고 있다. 모르기는 해도, 코로나 백신을 발견하면 인간은 다시 자신이 흙임을 망각하고 신의 자리로 올라가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교만의 높은 꼭대기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길을 결코 찾을 수 없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아무것도 없는 광야의 낮은 자리에 앉았을 때 그 위로 하늘의 문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내려왔다. 야곱이 얍복강의 낮은 자리에 앉아 자아가 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던 것이다. 갈색의 땅 위로 파란 색의 하늘이 펼쳐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예배당에 모일 수 없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 막힌 것 같지만, 이 사태를 통해 우리가 흙임을 깊이 자각하며 낮아진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이 펼쳐진다. 이런 갈색 은총의 길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가 도시 문명 속에서 살면서 잃어버린 또 하나의 색깔이 있다. 그 색은 도심의 화려한 색깔에 도취되고, 인간이 만든 인공물에 눈이 팔려 보지 못했던 자연의 색깔인 녹색이다. 우리는 건물로 된 성전에 매우 익숙하다. 그 성전에 매주 올 수 없어서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또 하나의 성전이 있다.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이 만든 건물 성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고 장엄한 성전이다. 그 속에는 인간만이 아닌 수많은 종류의 피조물들이 있고, 인간의 언어만이 아닌 다양한 피조물들의 언어들이 들린다. 그 속에는 파도 소리,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들이 거대한 합창단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속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과 나무 잎새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미한다. 자연을 단순한 물체나 이윤의 도구로만 봤던 현대인의 눈에는 이런 모습이 보일 리가 없다. 필립 얀시의 말처럼 “우리의 시야는 잔뜩 흐려져서 물질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필립 얀시, ‘기도’ 32쪽). 그러나 자연을 또 하나의 성전으로 깨닫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대한 우주적 예배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 구약의 시편 기자가 그랬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편 19:1-4). 시인은 거대한 우주 속에 창조주를 향하여 노래하는 수많은 언어들이 만드는 거대한 합창을 듣고, 자신도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우주적 예배에 찬양하면서 참여한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시 98:4) 거대한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지만, 도심에서 만나는 소박한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콘크리트 길가에 핀 작은 꽃, 계절마다 변하는 나뭇잎 색을 보면서, 도심에 찾아와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면서 창조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영적 오솔길을 매일 걸으셨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코로나 사태 이후 자연이 더욱 생기를 얻게 되면서 그 속으로 열린 영적 오솔길들이 더 많아졌다. 이전처럼 자연을 사물로만 보지 말고 또 하나의 성전으로 보면서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녹색 은총의 길이다. 우리는 창조 세계를 보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지만, 녹색 은총의 길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해주는 곳까지는 인도하지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온전히 깨닫게 해주는 곳까지 이끌어가지는 못한다. 창조의 장엄함을 보게는 하지만, 파괴된 창조 세계와 그 속에서 죄로 병든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훼손된 자연 세계의 탄식과 고통을 해결하시는 구원주 하나님을 만나게 하지는 못하기에 또 다른 길이 필요하다. 그 길은 갈보리 언덕에서 시작된, 그곳에서 흘린 십자가 보혈이 만든 새로운 길이다. 그 길은 자연이 우리를 인도하는 성전의 뜰의 한계를 넘어 성전 휘장을 가르고 지성소 안까지 인도한다. 그 길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감탄을 넘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이끌어간다. 녹색 은총의 길이 피조물 된 우리들을 창조주 하나님께 인도한다면, 적색 은총의 길은 죄인 된 우리들을 구주 하나님께로 이끌어간다. 십자가 보혈이 만든 길은 우리를 구원의 은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한다. 매일 말씀을 펼치면 그 속에 십자가의 은혜의 길이 열려 있다. 그 길을 따라 회개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매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적색은총의 길이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 처하며 산다. 어떤 때는 길이 열리고 어떤 때는 길이 막힌다. 코로나 사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아 버린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언제나 어디서나 열려 있다. 우리의 눈이 감겨 있을 뿐이다. 지금도 갈색, 녹색, 적색, 삼색 은총의 길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삼색 은총의 길을 찾기를, 그 길을 통해 모든 때 모든 곳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체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목회
난관
코로나19
사회적거리두기
아담
파스칼
갈색
녹색
적색
소란스러운 시대 묵묵히 자기 일 하는 법
by Mark Ward
2020-07-07
몇 년 전 유튜브 채널인 College Humor에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마냥 요란을 떨며 소셜미디어를 그만두는 사람들을 풍자하는 영상이 올라왔다. 이 영상을 보면,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가 그저 조용히 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시간 낭비일 뿐인 이 파티장을 떠나 인생에서 더 중요한 일을 할 거라며 갑자기 열변을 토해낸다. 이 영상이 자주 생각났다.그 영상이 생각난 이유는 소셜미디어를 떠나는 사람들이 계속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 소셜미디어를 떠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에 넘쳐나는 자기 홍보, 성급한 정죄, 새로운 것에 대한 아테네식 탐닉에 더해 다툼, 잘난 체와 아는 체를 비롯한 각종 척하기, 자기 의 등에 신물이 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 역시 거기에 동참하라는 유혹에 매일 직면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끌리지는 않지만, 각종 음모론, 믿기 힘든 민간 의료 요법, 정치적 분파주의, 배교, 이혼 등에 관한 포스팅을 볼 때 피로감을 느낀다. 조쉬 해리스(Josh Harris)가 입에 담기도 싫은 말을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필자는 충격을 받았다. 과거에 그의 책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이제는 아내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어머나 세상에”라고 하면 거의 동시에 내가 “알고 싶지 않으니 나한테는 말하지 말아요”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신 기술이나 기계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친구들이 부럽다. 십대 소녀가 사이버 폭력으로 인해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들으면 어찌 보면 나도 공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스마트폰에 이처럼 탐닉하는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거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고, 나 역시 이 실험의 한 부분이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소셜미디어에서 나름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기 위해 계속하여 도움을 구하며, 내가 하는 포스팅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라고 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오늘 같은 소셜미디어 시대를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지침을 알 수 있다.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다음 두 구절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살후 3:11)나는 내 동료 그리스도인들 중 누가 게으르게 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인류 역사에 있어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오늘날의 정보 통신 기술이 나를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busybody)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Logos에서 일하는데, 필자의 그리스어 어휘론 지식에 의하면,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우리 것이 아닌”이라는 뜻의 비즈(βιζ)와 “밀랍”을 뜻하는 보데이스(βόδης)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은 돌아다니며 자기 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자들, 다시 말해 자기 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 자칭 감독관 행세를 하는 이들을 말한다(벧전 4:15). 성경은 때로 덕과 악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준다. 하지만 덕과 악을 목록 형태로 제시한 후 적용을 우리 각자에게 맡기는 때도 있다.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오직 관용하며”(딤전 3:3).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최근에 올린 소셜미디어 포스팅 50개 중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는 것은 몇 개 정도인지 세어보라.자기 일바울은 그저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보았듯 바울은 대안을 제시한다.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고든 피(Gordon Fee)의 설명에 의하면 바울은 여기에서 모순 어법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NIV나 NASB 번역인 “조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열망하라”(make it your ambition to lead a quiet life)를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소셜미디어는 요란하게, 더 크게, 그리고 더 큰 영향력을 미치며 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잔치에서 끝자리에 앉으려는(눅 14:7–11)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바울이 주는 강렬한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소셜미디어를 전혀 하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면서’ 동시에 소셜미디어에도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자기 일”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해보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우선 나에게는 내 친구들과 가족이 바로 “자기 일,” 즉 나의 일이다.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 일이기에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리거나 답글을 다는 것을 통해 그들을 축복한다. 친구들이나 가족이 GoFundMe(온라인 모금 사이트)를 통해 모금을 하면 거기에 참여할 수도 있다. 내 가족이나 내가 섬기는 교회의 교우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만 않는다면 소셜미디어를 통해 인간관계를 넓혀가는 것도 큰 유익이 될 수 있다. 상담이라든지 구직 관련 추천 등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은 많다.내가 알고 있는 주제들 역시 내 일이다. 필자는 영어 및 그리스어 언어학을 즐기고 영국 합창 음악을 좋아한다. 이 주제들에 대해 글을 올리며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비그리스도인들 또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는 논쟁 모두 내 일이다. 내가 토론 상대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애쓸 때, 그리고 토론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할 때 이는 “내 일”이 된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사려 깊으면서도 그들이 보기에 설득력 있는 의견들을 내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고, 자극적인 말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기준에 의하면, 기후 변화는 내 일이 아니다.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가 진심으로 회심했는지 여부 역시 내 일이 아니다. 스타벅스에서 제공하는 크리스마스 커피 컵이나 이란에서 벌어지는 군사 작전의 복잡다단함 역시 내 일이 아니다. 그런 일들이 중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 역시 개인적 의견이 있다. 하지만 그 의견을 공적으로 표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닌 그런 대화들에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작을 것이다. 잠언 18장 13절을 잊지 말라. 소셜미디어는 내가 ‘실제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고 그저 지금 온라인에서 내 눈 앞에 보이는 그 사람보다 더 크게 더 빠르게 목소리를 내는 것에만 신경을 쓰게 한다. 내가 올린 글이 사람들에게 덕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거나(엡 4:29) 논쟁 주제에 대한 지식이 피차 비슷하다면, 온라인에서의 싸움이나 언쟁의 자리는 피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올린 헛된 글에 대해 심문을 받을 것이다(마 12:36).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바울 서신에 나온 이 짧은 단어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은 필자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평가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선사해주었다. 내가 피해야 할 악이 무엇인지 보여준 것이다. 또한 바울의 명령인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를 통해 내가 배양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소셜미디어의 모든 죄악을 다 없앨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사랑과 은혜와 적극성으로 내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to Mind Your Own Business When Everyone’s Sharing Theirs번역: 이정훈
생활
관계
소셜미디어
스마트폰
논쟁
데살로니가교회
Logos
고든피
기후변화
카이퍼 통신 5: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주권
by 김은득
2020-07-06
한국교회 성도 여러분, 미국 뉴욕의 5번가에 가 본 적이 있나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5번가의 티파니 매장을 선망의 대상으로 봤던 것처럼, 여러분 역시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바로 그 화려한 명품가를 활보하며 쇼핑하는 자신을 꿈꿔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5번가에 위치한 모건 스탠리 건물이나 록펠러 센터가 보여주듯이 이 5번가는 역사적으로 도금 시대(Gilded Age, 대략1870-1900)에 어마어마한 부를 획득한 재벌들(밴더빌트, 록펠러, 카네기, 모건 등)의 거리로 출발했습니다. 5번가에 자신의 호텔을 소유한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대선 슬로건을 제시했을 때, 아마도 그런 5번가의 찬란한 역사를 의식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갑작스레 웬 미국 뉴욕 5번가 타령인가 싶으신가요? 사실 제가 1898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스톤 강연에 초대를 받고,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해 처음 숙소를 잡은 곳이 바로 메디슨 스퀘어에 위치한 5번가 호텔(the Fifth Avenue Hotel)이었습니다. 구 유럽 대륙에서 온 한 여행자로서 그 호텔에서 바라본 뉴욕, 아니 신대륙 미국에 대한 첫 인상을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미국 땅에 심으신 놀라운 잠재력이 드디어 휘황찬란하게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해서 경이로울 정도의 강대국으로 발전할 것(Lectures on Calvinism, 9)”이라는 기대감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그 호텔에 숙박하면서 당시 뉴욕 주지사 선거를 근접해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공화당 후보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와 민주당 후보 어거스터스 밴 위크(Augustus Van Wijk) 모두 화란계 미국인이라는 점이 더욱 제 흥미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여러분의 관심은 화란 출신 주지사 후보들이 아니라 바로 제 정치적 성향, 즉 제가 그 두 후보 중에 누구를 선호했는지, 어느 정당을 지지했는지에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제가 미국에 방문했을 때, 수많은 기자들이 제게 가장 궁금해 했던 질문들 중 하나였습니다. 심지어 한 지역 언론은 저의 기독민주당(Christian Democrat)성향 때문에, 제 허락없이 저를 민주당원으로 보도해서 그 기사를 내려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으니까요. 만일 미국 양당 정치, 더 나아가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에 관해 제 정치적 입장이 어디에 속하는지 물으신다면, 제가 숙박했던 5번가 호텔에 위치한다고 대답하고자 합니다. 제가 묵은 5번가 호텔, 바로 그곳에서 공화당 루스벨트는 자신의 주지사 캠페인을 이끌었고, 그 호텔 바로 근처에 미국 민주당의 본부가 위치했다고 말입니다. 한편 제 정치적 성향을 보수적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당시 민주당의 본부가 5번가 호텔 근처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면서, 저와 공화당 루스벨트의 공통점에 집중할 것입니다. 제가 당시 신생 정당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 아브라함 링컨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미국을 방문했던 바로 그해 11월 30일, 공화당 출신의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를 만났고, 그를 “기도의 사람”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맥킨리가 암살된 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뉴암스테르담을 개척하러 온 전형적 화란 칼빈주의자들의 후예인데요. 그는 나중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저와 동일한 스톤 강연을 한 제 후배 신학자인 바빙크와 백악관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저를 보수주의자라고 성급하게 지칭해도 될 것 같지만, 링컨의 공화당이 지금 트럼프의 공화당, 아니 적어도 레이건의 공화당과 동일한 보수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아까 언급한 5번가의 재벌들이 링컨의 상공업 우대 정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미국 연방과 분리되어 자기들만의 독자적 연합을 구성한 남부에 대항해 벌어진 남북 전쟁의 폐허에서 새롭게 미국을 일으키는 과정은 무엇보다 미국 국민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정치 사회적 비전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링컨은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지정하면서 미국의 역사는 정치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한 청교도에 기원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플리머스 개척을 이끈 목회자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의 분실된 일기를 영국으로부터 다시 돌려받는 것에 미국이 그렇게 목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혼의 하나됨을 위해 미국에게 청교도 정신이 필요했다면, 미국을 한 몸이 되게 하기 위해 링컨은 재임시 미국 전역을 철도로 다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의 부작용으로 철도(밴더빌트), 은행(모건), 석유(록펠러), 철강(카네기)등의 독점이 가능했고, 바로 5번가의 재벌들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링컨의 공화당이 현재 공화당의 선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조지 밴크로프트(George Bancroft)와 같은 동시대 역사가들처럼, 저도 미국이 칼빈주의의 영향 아래 뉴욕 5번가로 상징되는 정치 경제적 번영을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가 미국 공화당 지지자라고 주장한다면, 일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유 방임형(lasses faire)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로서 노동자들이 재벌들의 독점적 지위에 대항하도록 기독교인 노동 조합을 구성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의 공화당이 지금 공화당과 같은 보수주의라고 말하기엔 상당히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바로 노예 해방 정책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듯이, 링컨의 공화당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의 공화당이 백인 중심주의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공화당의 진보적 성향 때문에 제가 매킨리 대통령을 만났을 때 건의했던 것은 남아공 보어인(Boer)을 위협하는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세계 평화에 큰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때 매킨리의 정신적 상태가 불안해 보여서 그와의 만남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제가 언급했던 것처럼, 이후에 매킨리 대통령은 신경질적 정신분열증세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집니다. 루스벨트에 이르러 공화당의 진보적 성향은 더욱 강화됩니다. 심지어 루스벨트가 공화당에서 분리돼, 사회개혁을 강조하는 불무스당(Bull Moose Party)이라는 급진 정당을 세우기도 합니다. 이때 공화당 내에서 진보적 색채를 띄는 당원과 유권자들이 루스벨트의 정당으로 이동하였고, 1960년대 시민 운동 이후, 공화당의 핵심 지역 기반을 남부 지역으로 바꾸면서 지금의 보수적 공화당에 이르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 정치적 성향을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제가 묵었던 5번가 호텔과 민주당 본부 당사의 근접한 거리에 주목하면서, 저와 동일한 호텔에서 유세를 시작하고 끝맺은 루스벨트에 눈을 감습니다. 먼저 제가 기독교 사회(Christian Society)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을 마치 전근대적 기독교 국가(Christian State) 개념을 옹호한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크리스텐덤의 시대를 살았던 장 칼뱅이나 청교도들이 기꺼이 국가가 참된 종교와 예배를 장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와 바빙크는 프랑스 혁명에 영향 받은 세속 국가가 종교적 이슈를 판단할 만한 능력, 즉 어떤 종교가 참된지 아닌지를 결정할 만한 분별력이 없다고 보았고, 오히려 국가 권력이 이런 영적 문제에 간섭하면 할수록 더 많은 부작용이 발생함을 역사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프랑스 혁명이 강조한 정교분리의 세속화(Secularization as Social Differentiation)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없다는 세속주의(Secularization as Secularism)에 반발합니다. 이런 식으로 공적 영역에서 아예 개인적 신앙을 배제하면서 누군가의 양심, 특히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짓밟는 것이 정녕 프랑스 혁명이 약속한 자유와 평등인지 묻고 싶습니다. 아니 기독교인들, 적어도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고 믿습니다. 기꺼이 기독교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성도들은 다양한 공적 영역들, 즉 정치, 경제, 사회, 학문, 예술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하고 또한 참여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 단체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의 개인적 자유주의나 공산주의 혁명의 사회적 국가주의를 보완하는 제 3의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가 바로 이런 기독교적 제 3의 길이라면서 예찬했습니다. 특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며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의 종교적 자유 개념과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 저와 거의 흡사한데, 바로 매디슨의 정당이 민주당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매디슨처럼 저도 작은 정부를 지지하고, 시민 단체들의 자유를 극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정부 예찬론자이며 주정부 독립을 강조하는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에 대한 제 개인적 오해가 너무 커서, 저는 민주당의 제퍼슨보다 연방론자(the federalist)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제 입장과 더 유사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상당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즉 당시 제가 진보적 의제를 주창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수주의자로 오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 지역의 변천으로 인해서 지금의 민주당은 큰 정부를 선호하고, 공화당은 작은 정부를 선호하는 역사적 아이러니 때문에, 저를 오늘날의 공화당과 동일한 보수주의로 여기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이런 미국의 일례만 살펴봐도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만큼 유동적이며 상대적인 개념도 없을 것입니다. 예전의 진보가 지금의 보수가 되며, 예전의 보수가 지금의 진보가 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스스로를 진보로 또는 보수로 지칭하는 분들조차도 그 정도의 차이가 상당합니다. 누구나 자신을 중도라고 지칭하지만, 비교 대상에 따라서 언제라도 극좌와 극우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진보냐 보수냐 판단의 대상이 되는 제 자신이 그런 판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칼빈주의 정치인으로 제 자신을 규정했고, 또 그렇게 기억되길 바랄 뿐입니다. 한국 교회가 카이퍼라는 제 이름을 좌로나 우로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토록 강조했던 하나님의 주권을 모든 삶의 영역에 나타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ro Rege!
문화
세계관
기독민주당
루즈벨트
보수주의
진보주의
공화당
바빙크
카이퍼
시편이 더욱 더 절실하게 필요한 때
by Heather Ferngren Morton
2020-07-05
최근 사태는 많은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팬데믹으로 십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생명을 잃었고 실업률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아머드 알버리(Ahmaud Arbery)와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영상은 또 어떤가? 지도자들은 단합이 가장 필요한 지금 국민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가 당면한 위기 상황을 보면서 걱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두려워말라”는 성경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언론이 코로나바이러스의 “제 2의 감염 폭증”을 연일 예견하고 있고, 또한 뉴스에 폭력 장면이 계속 나오는 상황에서 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빌 4:6)라는 명령이 내가 가야할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바로 이럴 때 우리에게는 시편이 필요하다.물론 모든 성경이 다 삶에 도움을 준다(딤후 3:16-17). 그럼에도 어떤 특정한 상황에 더 도움을 주는 특정한 구절들이 있기 마련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잠언 25장 11절은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부른 찬송책인 시편은 특히나 더 우리의 두려움을 생생한 기도로 바꾸는 데 적합하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의 평안을 누리도록 만든다. 고통을 위한 언어시편 중 많은 작품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 속에서 쓰였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나를 죽이려는 사악한 인간으로부터 도망다닌 적이 없는데, 시편에서 그런 상황은 일상에 속한다. 나는 전쟁터에 나간 적도 없다. 그러나 나도 종종 잠재적으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그래서 심각한 정서적 위기를 느끼게 하는 위기를 겪기는 했다. 비록 시편이 쓰여진 상황을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동떨어진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시편 저자가 느낀 절망은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도무지 할 말을 찾지 못할 때 시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마치 익숙한 전례처럼 구원을 간구하는 시편 저자들의 울부짖음은 갈 길을 몰라 헤맬 때,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불평할 때의 기도시편의 많은 시가 기도로 작성되었다. 시편은 단지 우리가 고통 받을 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 인간의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시편은 단지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시편은 우리가 불평의 울음을 내뱉을 때에도 여전히 기도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무엇보다 우리의 반응이 하나님을 향해 수직 방향을 견지하도록 도와준다. 기도는 단지 고통에 빠진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이 아니다. 고통을 누르거나 자기 연민 또는 자기 혐오에 빠지거나 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화를 쏟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시편은 우리의 모든 감정이 애초에 감정을 창조한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하나님께로 이끄는 이미지시편은 시다. 이미지, 반복 그리고 리듬이라는 특징을 가진 시의 형태는 종종 산문과는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음악과 예술처럼 시는 상상과 감성적 지능 그리고 창의적 표현을 담당하는 우뇌의 활동을 필요로 한다. 특히나 불안이 압도할 때, 선형적이고 직설적인 산문 형태의 성경 구절은 우리를 위로하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 속에서 또아리를 튼 두려움은 그런 성경 구절이 아예 들리지도 않게 할 지도 모른다. 놀라서 맥박이 뛰고, 손이 떨리고, 숨이 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적인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이야 말로 우리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진리로 인도하며 우리를 안정시켜준다. 힘든 때를 만나면 내가 반복해서 읽는 구절이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4-5)나는 성문을 통해 쭈욱 이어지는 넓은 조약돌 거리가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고대 도시를 상상한다. 길 주변으로 우거진 풀이 있고 우뚝 솟은 떡갈 나무와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여기는 삶과 휴식과 평화의 장소다. 단순한 환상이나 탈출과는 거리가 먼 이 이미지는 초월적인 현실을 가리킨다. 변치 않는 안전함은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가능하다. 시편 저자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끔찍한 재난(시46:2–3, 6)을 묘사하고나서 곧 도시의 번영과 평화(시 46:4-5)를 교리적인 진리와 함께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46:1, 11).풍요롭고 푸르른 곳, 치료와 평화가 넘치는 이 하나님의 안전한 도시에 머무는 한, 나 자신과 두려움을 바라보며 떨던 나의 시선은 이제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하나님은 참으로 나의 피난처시며 요새가 되신다. 시편 저자의 이 시적인 이미지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품 안에서 안정을 찾도록 한다. 시편을 통해서 나는 문자적이고 직접적인 표현(literal language)이 드러내는 하나님과는 다른, 새로운 측면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음 시편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한번 생각해보라: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시 91:4),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시 130:6). 우리 자신을 벗어나서인간의 깊은 감정이 생생한 이미지에 덧입혀져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이게 바로 시편이 두려움에 빠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울고 있는 아이에게 위로의 말을 속삭이는 어머니처럼, 시편의 시는 우리에게 위로를 속삭이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는 바울의 권고에 순종하도록 우리를 이끈다.로라 파브리스키(Laura Fabrycky)는 이렇게 말했다. “엄습하는 현실 속에서 시편은 고통의 동반자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교훈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벗어나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는 길을 알려준다.”지난 몇 주간의 경험을 통해서 두려움이 얼마나 나를 내 자신 속에만 깊이 빠지게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두려움은 내 눈에 온통 나 자신만 보이도록 만든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는 시대에 우리 믿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 이 부서진 세상도 우리 아버지의 세상이며 미래 언젠가는 새롭게 될 것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승리자로 앉아있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시편은 단지 이런 진리를 가리키고만 있는 게 아니다. 시편은 우리를 실제로 그 진리 속으로 인도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시편이 필요하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y We Need the Psalms More Than Ever Before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_기도
시편
위기
코로나_바이러스
팬데믹
팀 켈러가 묘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by 김상일
2020-07-04
“안 돼. 네가 ‘내’ 주위로 돌아야 해!” 모두가 그렇게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섯 혹은 열 혹은 백 사람이 무대에 올랐는데 다들 중심에 서려고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는 춤이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무대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 위격의 본질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다. 삼위일체의 어떤 위격도 상대에게 자신의 주위를 돌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의 주위를 돌려고 애쓸 뿐이다. (팀 켈러 ‘왕의 십자가’ 37쪽)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 신학하기’를 펼쳐 나가는 뼈대 세우기의 일환으로, 필자는 지난 시간에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가 아닌,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에 대해서 얘기한 바 있다. 이번 시간에는 팀 켈러가 삶을 풀어내는 교리 특히 그 가운데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겠다. 현대 문화 안에는 기독교 교리가 추상적인 것, 일상의 삶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 지루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또한 이런 고정 관념을 거의 그대로 공유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팀 켈러는 교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켈러에게 있어서 교리란, 성경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하심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중요한 주제별로 나누어서 (삼위일체론, 구원론, 종말론, 죄론 등등)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낸 것이며, 따라서 켈러에게 교리는 성경과 분리된 채로 존재할 수 없다. 당신의 춤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삼위 하나님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다룰 때에도 그렇다. 켈러는 자신의 마가복음 강해서인 '왕의 십자가'(King’s Cross)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 등장하는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성부), 비둘기 같은 성령, 그리고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성자) 삼위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살핀다.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9-11) 켈러는 실제 유대교의 경전을 살펴보면서 왜 마가가 ‘비둘기’라는 비유를 통해서 성령을 묘사했는지, 거기에 숨겨진 더 큰 의미는 무엇인지까지 파고 들어간다.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표현이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마가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교의 경전 중에서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경전은 마가 시대 유대인들이 읽던 아람어 구약 성경인 탈굼(Targums) 밖에 없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로 운행하셨다. 여기서 운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훨훨 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령이 수면 위를 훨훨 날아다니셨다. 탈굼을 쓴 랍비들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비둘기’처럼 수면 위로 훨훨 날아다니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세상의 창조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세 주체가 참여했다. 이 세 주체는 예수님의 세례식에도 참여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아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은 비둘기처럼 훨훨 날아다녔다. 여기서 마가는 의도적으로 태초의 창조 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가는 처음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였던 것처럼, 진정한 왕의 오심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왕의 십자가’ 33쪽).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비로운 것이며 인지적으로 도전이 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 신이 조화롭게 일한다고 생각하는 삼신론이 아니다. 또한 한 분의 하나님이 때에 따라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일위론도 아니다. 삼위일체 신학이 가르치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신데,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는 삼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셋이면서 하나이시고, 하나이면서 셋이시다(‘왕의 십자가’ 34쪽). 삼위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워낙 인지적으로 이해하기에 어려운 교리이기에, 또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개념적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켈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대한 개념 정리를 우선 명확하게 한다.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며, 그렇다고 한 분도 아니다.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셋이다. 만약 켈러가 여기서 멈췄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어렵다, 아니 교리는 다 어렵다’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만 불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켈러는 곧바로 마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서, 과연 삼위 하나님이 서로 맺고 계신 관계란 어떤 것인지를 더 깊이 읽어내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물에서 나오시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의 말씀으로 입혀 주시고 덮어 주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와 동시에 성령은 그를 능력으로 덮어 주신다. 이는 삼위일체 안에서 영원 전부터 계속 이어져 온 과정이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을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왕의 십자가’ 34쪽)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게 어떻게 우리의 삶을 풀어내는 지혜가 되는 걸까? 그에 대한 실마리는 하나님께서 서로 맺고 계신 그런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불러들이시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켈러는 자신이 깊은 영향을 받은 C. S. 루이스의 삼위일체에 관한 묵상, 특히 루이스가 사용하는 삼위일체가 함께 누리는 “춤”이라는 이미지를 차용해서 그런 지혜를 더욱 풍성하게 드러낸다. 켈러의 말을 들어보자.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상대방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상대방을 찬양하고 높인다. 그렇게 서로에게 찬양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극히 행복하시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너무도 존경해서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대상이 당신에게도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기쁘기 한량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바로 이런 기쁨을 누려오셨다 …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중요한가? 이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세 위격의 춤, 드라마, 삶의 패턴이 우리 각자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야 한다 … (기쁨과 능력, 평안, 영생은) 실재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아름다움의 거대한 샘이다.” 왜 루이스는 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자기중심적인 삶은 정적인 삶이다. 전혀 역동적이지 않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되고 만물이 자신의 주위를 돌기 원한다. 그가 남을 돕고 친구를 사귀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일 뿐이다. 심지어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간이나 돈이나 여유가 있을 때만 베풀고, 베푸는 목적도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뿌듯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 (‘왕의 십자가’ 35-36쪽).삼위일체는 어떠한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가? 일단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왕의 십자가’ 37쪽)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의 하나님이 돈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돈을 얻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산다. 우리의 하나님이 권력의 모습을 가졌다면, 우리는 권력을 쟁취하는데 모든 것을 건다. 우리의 하나님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그 만큼, 우리의 삶 또한 하나님을 닮아가는데서 벗어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됐다고 창세기는 말한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그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닮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항상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그 하나님이 어떤 모습인지 상관없이) 닮아가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면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루이스의 표현을 빌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추시는 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관계를 그려내시는지를 삶의 지혜로 깨달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은 춤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나를 찬양해라.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라. 나의 아름다움을 깨달아라. 그러면 춤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너는 춤을 위해 창조된 존재니라. 나를 믿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가끔 기도하면서 종교인의 외양만 갖추어서는 부족하다. 힘들 때 내 말에서 약간의 힘을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너는 나를 중심으로 살도록 창조된 존재다. 매사에 나를 생각해야 한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섬겨야 한다. 거기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춤의 의미다.”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막연히 믿기만 하는가?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주위를 돌아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왕의 십자가’ 38-39쪽).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 그 분과 함께 춤을 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켈러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중심성을 버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만큼이나 우리의 이웃 또한 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분과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 맺음에서 크나큰 시사점을 가진다. 이것은 교회 내 사역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가지는 시사점으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되어 있다. 사역이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을 통한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이기에 그렇다.삼위 하나님과 함께 춤추며 배우는 관계적 진실성 켈러는 자신의 책 '센터 처치'(Center Church)에서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역동성에 가장 필수적인 것 중 하나를 ‘관계적 진실성’이라고 규정한다. 그가 말하는 ‘관계적 진실성,’ 특히 신앙이 없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관계적 진실성이란, 1) 그리스도인이 이웃과 같은 점이 있음을 알게 해주고(그리스도인은 이웃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고 그들이 입는 것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의 언어와 휴식과 문화생활과 공공 활동에 있어서 이웃과 같아야 한다, 588쪽), 2) 이웃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해주며(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관대함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 …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생활수준보다 낮게 살아가는 법도 고려해야 한다, 589쪽), 3) 그 두 가지를 바탕으로 이웃과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솔직하게 이웃에게 드러내면서 그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관계적 진실성을 갖고 이웃에게, 특히 신앙이 없는 이웃에게 다가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켈러는 특히 관계적 진실성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두 가지 경우에서 찾는다. 하나는 그가 조화 접근법(the blend-in approach)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 거품 접근법(the Christian bubble approach)이다. 조화 접근법이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의향을 숨긴 채 관계적으로만 가까워지려는 것”(‘센터 처치’ 592쪽)을 가리키며, 기독교 거품 접근법이란, “비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피상적으로만 유지하는 것”(‘592쪽)을 가리킨다. 왜 그리스도인임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않으면서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가? 진실한 자신을 드러내면 믿지 않는 친구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왜 관계를 피상적으로만 유지하는가? 관계를 깊이 맺게 될 때 따라오게 될 희생을 감당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켈러는 조화 접근법과 기독교 거품 접근법 양쪽 모두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신자들 사이에 왜 관계적 진실성이 그렇게도 적은가? 그 답은 주로—전부는 아니지만—동기에 있다. 조화 모드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용기가 부족하다. 그들은 영향력을 잃는 것, 무대 뒤에서 고초를 겪거나, 또는 직업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을 걱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거품 모드에 있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에게 감정적, 사회적, 재정적, 신체적 헌신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센터 처치’ 595쪽).조화 접근법과 기독교 거품 접근법은 모두 자기중심적인 관계 맺음의 방식들이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 맺을 때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춤추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맺어주신 관계의 방식을 따라서 그 관계 안에 충분히 침잠되어 살아가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웃들과 맺어가는 관계 또한 자기중심적인 동기가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동기를 통해서 가꿔간다는 말이 된다.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이렇게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을 돌아보게 해준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가? 우리가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갈수록, 그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될수록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갖고 사람들과 관계 맺어왔던 이전의 방식을 포기하게 된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 맺으시듯이, 그렇게 사람들과 관계 맺기 시작할 때 그 중심 동기는 단지 도덕적으로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중심 동기에는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찬양한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보면 넋을 잃고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내게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그렇다. 대학에서는 A학점을 받으려고 열심히 모차르트 음악을 들었다. 취직이 잘되려면 학점이 높아야 됐다. 다시 말해,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모차르트 음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돈을 주고서라도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다. 모차르트 음악이 내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듣는다. 내게 모차르트 음악은 더 이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아무 조건 없이 섬기고 싶어진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섬기겠다”고 말한다면, 사람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그를 이용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 위격의 본질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다(‘왕의 십자가’ 34-37쪽).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와 맺어주시는 관계를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바탕에 둔다면, 우리의 사역 프로그램과 목회 방법론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지나치게 열심을 쏟지 않게 될 것이다. 대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성경 해석에서 시작된 교리와 전통 읽기는 이렇게 삶으로 풀리며, 사역의 기술과 목회 방법론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신학
교리
삼위일체
팀켈러
왕의십자가
센터처치
중간지대
칼빈
조화접근법
기독교거품접근법
이사야가 노래한 베일에 싸인 종
by Davy Ellison
2020-07-03
영국에는 A Question of Sport라는 오래된 TV 퀴즈쇼가 있다. “Mystery Guest”라고 불리는 단계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참가팀들이 30초 길이의 영상을 보고 그 영상에 나온 유명한 운동 선수가 누구인지 맞춰야 한다. 하지만 선수 본인은 변장을 한 상태로 등장한다. 가령 카우보이 옷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써서 눈을 다 가리고, 목도리로는 입과 코를 가리는 식이다. 베일에 싸인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맞추는 것이 참가팀들에게 주어진 임무다. 베일에 싸인 이가 이사야에도 등장한다. 이사야 40–55장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처음 서른 아홉 장에서 약속하신 소망, 은혜, 그리고 회복을 “여호와의 종”이라 일컫는 베일에 싸인 그를 통해 성취하실 것임을 보여준다. 소위 종의 노래(Servant Songs)라 불리는 네 본문을 통해 이사야는 그 종이 어떤 이인지 보여준다. 그 노래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그 종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첫 번째 노래: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시다(사 42:1–9)이 첫 번째 노래 직전에, 이사야는 우상을 그 종과 대조시키며 그의 청자와 독자에게 우상은 어리석은 것임을 경고한다(사 41:21–29).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41:29)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중략] 보라” (42:1)“바람”(사 41:29)에 지나지 않는 우상들과 달리 그 종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하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자신의 영을 그 종에게 부어주셨다(사 42:1). 그 종이 세울 정의(1, 3, 4절)가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숱한 왕들이 못한 일, 즉 정의로 통치하는 일을 해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실 것이기에 이 일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6–9절). 이사야 1–39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들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 종이 정의를 세워가며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이다.두 번째 노래: 그는 선지자다(사 49:1–7)두 번째 노래에서 그 종은 자신이 이스라엘(5절)과 열방에게(6절)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라 말한다. 이 노래의 서두인 1절에 나온 “들으라”는 이 노래의 선지자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동일한 말로 지속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 부르셨다(사 48:1, 12, 16). 그 종은 똑같은 말을 사용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칼과 화살의 이미지(2절)는 그 종이 선지자로서 선포하는 말에 정확히 꿰뚫는 힘이 있다는 것을 묘사하여 그의 선지자적 능력을 나타낸다. 그의 말씀은 과녁을 정확히 맞출 것이다. 이에 더해 그 종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받은 부르심(1, 5절)은 그가 행할 과업이 지닌 선지자적 성격을 강조한다(비교: 렘 1:4–10). 이러한 것들이 그 종이 누구인지를 더 자세히 보여준다. 그는 한 명의 선지자다. 그러므로 그 종이 전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그 종마저 거부할 것이다(7절). 이 사실은 다음 노래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세 번째 노래: 그는 순종하셨다(사 50:1–11)세 번째 노래의 주제는 그 종의 순종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모습이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이사야 1–12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후에도 이사야는 계속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상기시킨다(사 42:18–20; 48:18–19). 이스라엘과는 대조적으로, 완전한 순종을 보이신 그 종이 세 번째 노래를 통해 무대에 등장한다(4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학자들의 혀를 주셨고(4절), 그의 귀를 깨우쳐주셨고(4절), 불순종의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5절)는 사실이 그의 완전함을 보여준다. 그 종의 완전한 순종(5절)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거부하게 했다. 그가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했던(49:7) 두 번째 노래로부터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폭력을 당하는(50:6) 세 번째 노래에 이르기까지 긴장이 상승하는 것이 보이는가? 하지만 그 종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도우심에 의지해 이를 견뎌낼 것이다(7절). 그는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했던 것과 해내지 못했던 것을 다 이루고 해낼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완전하게 순종할 것이다.네 번째 노래: 그는 우리의 대속제물이시다(사 52:13–53:12)51–52장은 흥분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소망, 기뻐함, 즐거워함, 그리고 감사함을 주신다(51:3). 그의 구원은 영원히 있을 것이고(51:6, 8, 11) 시온은 다시금 아름다워지고 강대해질 것이다(52:1–10). 네 번째 노래는 바로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보여준다. 네 번째 노래를 통해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구원은 그 종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본문을 많이 들어봤지만 이 시가 사실 매우 정교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이 노래는 다섯 연으로 되어 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각 연은 세 절로 이루어져 있다. 절정은 가운데 연(사 53:4–6)이다. 이 정점이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그 종이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바로 우리 때문에 계속 이어지는 고난을 당하실 것이다. 그 종이 당하는 고난은 이 중간 연의 앞과 뒤에 나오는 연들에 의해 강조된다(53:1–3, 7–9). 이 두 연에서 보는 바 그가 홀로 이 고난을 감당하시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종의 무죄 판결(vindication)을 암시하는 이 노래의 서두(52:13–15)와 결론(53:10–12)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이 시는 피라미드 모양처럼 재배열할 수 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그 종의 대속적인 고난을 통해서 올 것이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다른 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일에 싸인 그는 누구인가 이사야를 주의하여 읽었다면 이스라엘 자신이 “종”(사 41:8–9)이라 불린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그 종이 누구인가에 대해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이스라엘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종”이라 불리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그’ 종은 바로 이스라엘이라 주장하는 주석가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고, 무엇보다 신약 저자들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종은 누구일까? 첫 번째 노래는 마태복음에 인용되었다(마 12:18–21). 마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이 첫 번째 노래의 성취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의 사역은 성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두 번째 노래는 예수님의 선지자적 사역을 예표한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대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예: 마 5–7). 그 종이 전하는 말을 칼에 비유한 구체적인 심상은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에게 분명히 적용된다(계 1:16; 19:15, 21). 순종이라는 넓은 주제에 대한 세 번째 노래는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다(비교: 마 5:17). 수난에 대해 말하는 이사야 50장 6절은 예수께서 감당하실 고난을 나타낸다. 네 번째 노래는 신약에서 자주 인용되는데,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던 본문도 이것이다(행 8:26–40). 사도 베드로 역시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대속적 희생에 대해 쓸 때 이 네 번째 노래를 암시했다(벧전 2:22–25).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 네 번째 노래를 읽다가 빌립에게 묻는다.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행 8:34). 빌립의 분명한 대답은 이사야가 말하는 이는 타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는 이사야 자신도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였다(벧전 1:10–12). 이사야서 종의 노래에 나온 베일에 싸인 이. 신약은 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o’s the Mystery Guest in Isaiah’s Servant Songs?번역: 이정훈
신학
구약
이사야
종의_노래
예수_그리스도
대속
고난
종
바이러스는 언제 처음 생겼을까?
by 정요석
2020-07-02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요양원에 가서 설교를 한다. 노인들을 돌보는 요양원인지라 외부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입되지 않도록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발열체크와 손소독을 하고, 종사자들은 마스크를 쓰고 근무한다. 가족의 면회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제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6개월 정도 방역을 철저히 하니, 어르신들이 코로나19만이 아니라 독감을 비롯한 여러 전염병까지 예방되었다. 그간 어르신들이 독감 등에 걸린 것이 외부에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해 바이러스가 유입된 결과였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친분이 있는 의사들이 요사이 환자들 수가 많이 줄어서 의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민들이 생활방역을 실천하며 감기와 같은 잔병에 잘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코로나19가 종식되어 국민들의 면대면 접촉이 활발히 이루어질 때 병원 운영도 정상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국민들은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외부의 바이러스가 본인과 거처로 유입되지 않게 생활방역을 실천하면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가 언제 처음 발생했을까? 코로나19는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다는 주장이 강하게 있고, 중국 당국은 이에 맞서 우한을 방문한 외국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방역당국은 확진자가 발생할 때마다 어느 경로를 통해 감염되었는지 파악하여 더 이상 감염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해외 입국자들도 모두 확진 여부를 검사함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국내에 바이러스가 유입되는 것을 막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2012년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2002년의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등은 모두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들인데, 지구상의 최초의 바이러스는 언제 어디서 처음 생겼을까? 지구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했을까? 아니면 우주 어디에선가 이 지구로 유입되었을까?나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땅이 저주받는 벌을 받았을 때 바이러스도 생겨났거나 아니면 최소한 바이러스가 생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이 밭의 채소를 먹고 사는데,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니 그때부터 사람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 그 소산을 먹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땅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생긴다는 의미다. 사람의 몸도 100 퍼센트의 소화와 연소가 이루어지지 않아 소변과 대변과 노폐물과 땀 등이 발생하고, 그것의 축적으로 피로와 병과 노화가 발생하고 끝내 죽는다. 사람이 사는 모든 곳과 하는 모든 일에는 100 퍼센트 완성과 만족이 존재하지 않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발생한다.바이러스는 계속 같은 유형을 유지하지 않고 변형된다. 전염력과 치사율이 더 높은 형태로 변형될 수도 있고, 더 낮게 변형될 수도 있다. 도대체 바이러스는 어떠한 체계로 이러한 변형 형태를 결정할까? 그간 지구에 등장하여 몇 년씩 강력하게 활동하면서 많은 생명을 앗아간 바이러스들은 그 활동 기간과 종식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러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현재의 코로나19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지속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또 코로나19의 종식 이후에 더 강력한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낳는다.나는 코로나19가 몇 년 내에 극복되리라 생각한다. 현재보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도 스페인 독감을 비롯한 여러 전염병이 몇 년의 시간 경과 속에서 해결되었듯, 코로나19도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몇 년 후 더 강력한 전염력과 치사율을 가진 바이러스가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유형의 자연 재해도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모두 공짜로 주신다. 공기, 햇빛, 중력, 물, 부모의 사랑, 인식 능력 등은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시며 사람들에게 주신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밝히 보이지 않고 행함으로써, 사람들은 이 필수불가결한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 채 자신들의 권리로 안다. 호의가 세 번 반복되면 권리로 안다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자연의 선물에 더욱 적용된다.하늘이 닫혀 비가 없는 것, 기근과 전염병의 발생,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와 메뚜기와 황충이 나는 것,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는 것,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는 것(왕상 8:37), 이 모든 것들이 땅의 저주로 말미암은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속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 대하여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어, 사람들의 큰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 불가결한 것들을 계속하여 허락하신다. 하지만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권리로 착각하고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자극적인 욕망과 뒤틀린 정욕을 추구할 때 하나님은 이것들 중 하나를 잠시 거두신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잠시나마 깨닫고 자신들의 악행을 주춤하도록 잠시 은혜를 거두신다.하나님은 코로나19 이후에 지진이나 기근이나 전쟁이나 가뭄이나 황충 등으로 인류를 경고하실 것이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죄악성을 주춤케 하신 하나님은 그간 허락하신 은혜들 중 하나를 잠시 거둘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누구보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큰 일이고 선물임을 더욱 깨달아,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질 것이 아니라(요일 2:16),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코로나19로 인한 불편함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충분히 이겨낼 수 있고, 그간 감사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감사하며 경쾌하게 살아갈 수 있다.발열체크와 손소독과 마스크 착용은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백신이 개발되면 코로나19를 예방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체온계와 소독제와 마스크 등의 생산 그리고 백신 개발 등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더불어 살려는 마음 대신에 과도한 경쟁에 매몰된다면 비록 코로나19 종식에는 성공할지 몰라도 더 강력한 자연재해나 세계전쟁을 겪을지 모른다. 인류는 단지 외부의 바이러스가 침입하지 않도록 신경 쓸 것만 아니라, 내부의 죄가 외부로 크게 발현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한다. 이것이 열왕기상 8장 37절에 나오는 재앙들을 물리치는 지름길이다. 물론 근본적 처방은 자신들의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즐거워하고 널리 전하는 것이다. 지금도 태양의 햇살보다 더 풍성하게 끊임없이 유입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이 없다면 사람들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죄악으로 인하여 인류는 몇 번이나 멸망했음을 명심해야 한다.
문화
사회이슈
코로나19
팬데믹
바이러스
발열체크
전염병
가시덤불
엉겅퀴
탈진리 시대, 어떻게 설득할까?
by Brett McCracken
2020-07-01
현재 목격하고 있는 인식론적 위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진리가 이성의 문제에서 감정의 문제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다수가 참여하는 커뮤니티 차원의 논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대신 개인적 차원에서 느낌으로 발견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가 내게 진리로 느껴지는가의 여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의 진리”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한,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진리”로 나의 진리를 위협하지 않는 한, 나의 진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진리에 관한 다른 사람의 이해가 내 생각과 충돌하는 경우, 과거에는 서로의 다른 생각을 존중하며 토론을 나눴다. 그러다보면 다른 생각이 내 생각에 도전을 주고 또 내 사고를 전환시키기도 했다(물론 그 반대 경우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사라졌다. 이제는 진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나와 다르면, 아예 침묵한다. 또는 아예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고집쟁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잘하는 것처럼, 트위터를 통해서 상대방을 향한 유치한 욕을 퍼붓는다.SNS에서 조금만 시간을 보내보면 이런 상황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한 예를 들자면, 해리 포터의 작가인 J. K. 롤링(Rowling)이 최근 트위터를 통해 생물학적 성정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온건한 주장을 내놓았다. “성 개념을 지워버리는 것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에 대한 의미있는 토론을 할 기회 자체를 앗아가는 일이다. 미움으로 진리를 말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이뤄졌고, 내가 여자임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나는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 군중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롤링이 이해한 진리를 싫어했고, 그녀가 트랜스젠더를 증오(transphobic)한다고 주장했다. 롤링의 말 속에 담긴 논리에 관심을 갖는 대신, 비난자들은 롤링을 악마로 취급했다. 고작해야 다음과 같은 답글을 반복해서 달았을 뿐이었다. “트랜스젠더 여자도 같은 여자다.” 마치 같은 말을 여러 번 쓰면 그게 사실이 되고 자동적으로 롤링의 논리가 반박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트위터에서든 아니면 뉴욕타임즈 뉴스룸이든, 우리는 점점 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제와 관련한 논쟁을 거부하거나 그런 주제 자체를 무시하려고 한다. 이런 변화는 탈진리 시대를 살아가는(post-truth trajectory) 우리에게 실로 대단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진리를 주장하고 또 진리를 보존해야 하는 기독교인으로서는 이런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의 취약함이런 시대가 도래한 데는 복음주의자들도 나름 한 몫을 담당했다. 다른 목소리는 아예 내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위협적인” 생각과 대면하는 것을 무조건 피하기만 하는 태도는 단지 세속적인 진보주의자들만이 아니다.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도 다르지 않았다. 20세기가 가져다준 “세상적인(worldly)” 사고에 관한 근본적인 두려움으로 가득찼던 복음주의 부모와 목사 그리고 단체들은 그 사고와 대면하는 대신, 어떻게 해야 그들이 책임지는 사람들이 잠재적 해가 되는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까하며 보호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리고 그 결과, 다른 건 몰라도 복음주의자들은 그들만의 “안전한 장소”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자에게 쏟아지는 반지성적이라는 비난이 비록 100 퍼센트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고, 그것은 애초에 예정된 결과기도 하다. 한편 대부분의 복음주의 기독교는 믿음을 떠받치고 있는 신학 사상을 강조하는 대신 믿음이 가진 치유적 측면과 감정적 체험을 강조했다. 취약한 교리 학습과 어려운 교리에 대한 회피는 자연스럽게 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종교적 정체성이 감정에 의해 좌우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는 당연히 더 취약해진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었다. 어려운 질문을 만난 기독교인은 당연히 믿음이 가진 지적 측면을 가지고 씨름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명하다. 애초에 별로 아는 게 없는 기독교인이 발을 디디고 있던, 카드로 만든 집과 같이 허약한 믿음의 집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deconversion accounts)를 통해서 이런 경우를 너무도 많이 목격한다. 논리적 사고와 이성적인 대화 그리고 믿음의 내용에 관해 조리있게 설명하는 능력이라는 면에서 전혀 훈련되지 않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제 그들이 비판하는 “지적 교만에 빠진 세속적인 사람들(secular snowflakes)” 만큼이나 취약한 존재가 되었다.“안전주의(safetyism)”가 주는 매력과 취약성에 대한 가정은 세속적인 좌파와 종교적인 우파 모두를 유혹한다. 우리는 다 공개된 공간(village green)에서 종종 혼란을 주고 진을 다 빼는 이교성을 함축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보다는, 거품과 메아리로 가득한 공간이 주는 안락함을 더 선호한다. 게다가 온라인에서 매일 만나는 나쁜 뉴스와 분노로도 충분한 상황에, 굳이 사람을 더 힘들게 자극하는 새로운 주제를 끌어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특히나 이미 트라우마에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수 인종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목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도록 꺼놓는 게 훨씬 더 쉬운 길이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길 원한다면, 그리고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일한 진리”를 옹호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우리는 불편함을 피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싸워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부드럽게 진리를 항변하는 세 가지 방법 진리를 쫓는 길이 결코 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진리를 수호하는 데 굳이 불필요한 어려움을 유발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서는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온라인 멍청이가 있는 반면, 자신의 생각이 도전 받는 것을 결코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 대단히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두 부류 사이에 중간 지대가 있다. 기독교인이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추구할 때, 담대하면서도 동시에 친절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 말투(tone)에 신경써라아무리 조심해서 전달을 한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트라우마가 되는 진리가 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이 말하는 성 윤리(sex ethic)를 아무리 잘 전달한다고 해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미움과 편협함 그리고 위협이 되는 진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투로 전달하는가에 따라, 사람들로 하여금 힘들고 어려운 주제에도 귀를 기울이게 하고 나아가서 이성적인 대화로도 이끌어 낼 수 있다. 공격적인 전달은 필연적으로 강한 반발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공감적인 이해심과 친절함 그리고 존경심으로 무장하고, 또 논리적이면서도 사랑으로 전달하는 경우라면(벧전 3:15), 어려운 주제까지도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기회를 맞게 될 것이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예수님이 대화를 이렇게 시작했다고 한번 생각해보라.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요 4:18). 이런 시작은 사마리아 여인을 단숨에 방어적인 자세로 만들었을 것이고, 두 사람의 대화는 아마도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어려운 주제를 피하지 않는 예수님이었다고 해서 그가 항상 대화의 시작을 어렵고 딱딱하게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비난이 아닌 초청하는 말투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의 말투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진리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2.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라오늘날 토론에서 아무리 진리를 선포해도 열매가 없는 이유는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단지 선포만 하고 끝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초에 배울 마음이 없는, 가르치는 데만 관심이 있는 선생일 뿐이다. 자칭 “전문가”가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오만하고 자신감 있는 가르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겸손과 듣고 배우려는 마음을 갖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성경의 가르침이 단지 말을 아예 하지 말거나 또는 결코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대화 주제가 아무리 듣기 힘들더라도 듣는 데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단순히 우리가 가진 패러다임에 도전한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특정한 사실이나 주장을 무시하거나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그런 세상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기독교인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압두 머레이(Abdu Murray)는 이렇게 썼다. “탈진리 시대를 맞아서, 증거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나 의견과 일치하면 모든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증거는 아예 용납될 수 없거나 불쾌한 것으로 간주되며, 그런 증거는 이제 얼마든지 건전하게 진행될 수도 있었던 토론까지도 무력화시켜 버린다.” 나름 건전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기독교의 진리와 다르다는 측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에 직면한 기독교인의 경우, 비록 그 주제가 우리를 자극하고 감정적인 스트레스까지 유발하더라도 대화를 피하거나 또는 무조건 공격적으로 대응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들어야 하고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가진 의미 중 하나를 실천하는 길이다(눅 10:27).3. 상대방의 모든 주장에 다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특정한 부분에 반대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비난에 대응하는 오늘날의 방식을 보면 하나 독특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 세 가지를 다 조금씩 합쳐놓은 형태다. (1) 누군가에 대해 절대적 최악으로 생각하기, (2) 밉다는 딱지를 붙이기, (3) 나와 어떤 부분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와는 결코 공통 분모가 있을 수 없다고 가정하기. 그러나 우리의 취약성이 가져다준 이런 증상은 사회에 만연한 자기 방어와 불신의 기운을 증폭시킬 뿐이다. 어떤 글을 읽었을 때 내용 전체에 동의하지는 않아도 일정 부분에는 동의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의견을 듣고도 그 사람의 주장 전부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몇 가지 의견에는 얼마든지 찬성할 수 있다. 어떤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느 일부분에서 서로 동의하는 누군가와 얼마든지 손을 잡고 협력할 수 있다. 그 누구보다도 개혁주의 기독교인이라면 일반 은총의 현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부분에서 완전히 틀린 생각을 하는 누군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부분이 가진 중대함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동의하는 부분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든 부분에서 나와 같지 않으면 완전히 적이라는 식의 당파적 극단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가능한 부분에서 보다 더 상대를 향한 여지를 열어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얼마든지 언론의 자유와 사회적 정의를 위한 입법과 같은 주제에서 서로 동의할 수 있다. 설득을 다시 한번 더 위대한 것으로 만들자사회는 지금 무서운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사실상 설득의 가능성을 거의 다 포기한 상태다. 즉,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누군가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할 수 있다는 것, 우리 모두가 다 지성의 힘을 모아 너와 내가 전혀 다른 진리가 아닌, 진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설득의 힘을 포기하게 되면 남는 것은 단지 권력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정치는 또 하나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초월적인 진리를 포기할 때,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정치 뿐이다. 이 세상은 이제 누가 또는 어떤 당이 리더가 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만의 진리에 충실해서 살도록 강요받게 된다. 슬프게도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실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능적 무신론자다. 그들은 이미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백기를 들었으며, 그 대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쥐기 위해 경주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은 결코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오직 진리를 알 때만 만날 수 있는 참 자유는 이런 식으로는 성취되지 않는다(요 8:32). 이것은 허무하고 위험하다. 이런 접근법은 단지 문화 전쟁이 가져다주는 폭력을 더 가중시킬 뿐이다. 미국을(다른 어떤 나라라고 하더라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부드러운 설득의 과업이 다시 위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제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임시적인 그 어떤 정치적 이득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진리, 그 자체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Exit the Echo Chamber. It’s Time to Persuade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JK롤링
탈진리시대
사마리아여인
성개념
해리포터
진리
증오
처음
이전
131
페이지
132
페이지
133
페이지
134
페이지
열린
13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