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균형있게 복음을 제시하라
by 고상섭
2020-01-16
팀 켈러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두 가지 방법으로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이 세상은 어떤 소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첫째 질문이 복음을 개인주의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창조, 타락, 구속, 회복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설명한 것이다. 균형 잡힌 복음을 제시하라 쉽게 말해서 개인 구원을 향한 복음 제시를 ‘죄 사함의 복음’이라 말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 제시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둘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죄 사함의 복음만을 복음으로 고집하게 되면 복음은 단지 개인 구원의 차원에 머물게 된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선함이나 물질세계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마치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인 것처럼 들리게 된다. 하나님 나라 복음만을 강조하게 되면 복음이 이 세상을 갱신하는 이야기로만 이해되는 위험성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거대담론에는 가슴이 뜨거워지지만 정작 나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구원에 동참하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된다. J.I 패커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개인 구원이 없는 하나님 나라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근년에 성경신학과 현대적 성경 주해에 큰 발전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축복하시는 성경의 큰 틀과 하나님의 계획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절정에 이르는지에 관한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발전은 우리의 시야를 거대담론으로 채움으로써 루터가 개인적인 관점에서 던진 질문을 다루지 못하도록 우리를 산만하게 한다. 이는 복음의 이해를 돕는 것만큼이나 방해하고 있다.” 개인의 구원에 대한 복음이 사라진 공동체적 구원은 위험한 복음이 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도 이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구약은 공동체가 가난한 약자들을 돌보지 않은 것을 심각한 범죄로 묘사한다. 복음의 공공성을 상실하고 개인주의 구원에 몰두해 있는 교회를 깨우기 위해 또한 한쪽의 복음만을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과 개인이 가지는 바른 관계에 대한 이해없이 공동체적 구원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또 다른 극단이며 오류이다. 팀 켈러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개인 구원과 공동체적 구원을 나눠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개인 구원에 관심이 있고 복음의 공공성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부족한 한 쪽을 강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를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개인 구원을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는 세상에 대해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이렇게 묘사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에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일에 자연스럽게 헌신한다.” 즉 참된 죄사함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복음의 명제를 이야기 속에서 표현하라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두 가지 답이 서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한 폭의 그림을 그리도록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이것은 복음 진리들이 단순한 명제의 집합이 아니라 여러 장으로 구성된 이야기 속에서 표현되게 하는 것이다. 이야기식 접근 방식은 질문을 제시하며 명제적 접근 방식은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Q1.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A :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은 홀로 계시지 않고 연합으로 존재하신다. 그 연합은 완전하다. 무엇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충만한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시고자 우리를 지으셨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있는 기쁨과 사랑에 동참시키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 채우셨다. 곧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알고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 Q2. 어디서 잘못되었는가?A: 인간의 죄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교만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늘 다른 우상들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영적 속박과 정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Q3.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가? A: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이다. 예수님이 성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또한 온 세상의 어그러진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고 최종적으로 세상을 갱신하고 회복하며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몸까지 모두 구속하신다.Q4. 나는 어떻게 바르게 되는가?A: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바르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용서받았다. 또한 그리스도처럼 죽음에서 일어나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은 더 많은 노력을 통해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다. 또 믿음의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구원의 믿음은 심리적 확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그분을 신뢰하겠다는 의지의 행동이다. 이렇게 우리는 죄사함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모두 균형 있게 전해야 한다.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명제적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균형 있는 복음 제시의 좋은 예이다. 죄사함의 복음이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연결되게 하라.
목회
설교와교육
팀켈러
패커
죄사함
복음
균형
선교적 교회의 아름다움과 능력
by Trevin Wax
2020-01-16
나는 마크 갈리의 “The Elusive Presence” 시리즈에 많은 칼럼을 쓸 계획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선교적 개념은 정말로 중요하기 때문에 통찰력 있는 복음주의 관찰자인 마크와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기쁘다. 나는 복음주의 내에 문제점을 기술한 마크의 글이 와닿았지만, 그의 선교적 교회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갈리의 접근에는 로드 드레허의 “Benedict option”와 동일한 자세의 문제점이 보인다는 것이다.잘못된 태도Benedict option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드레허 제안의 강점은 다가오는 문화적 압박을 견디기 위해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여, 값진 생명의 무언가를 세상에 돌려줄 수 있도록 하자는데 있다. 문화 전쟁의 최전방에서 싸우는 것은 의미 없다고 말한 드레허의 말은 옳다. 만약 전장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가 영적으로 약하고 영양실조의 상태에 있어서 세상에 보여줄 복음의 문화가 없다면 말이다.갈리의 선교적 운동에 대한 비판의 핵심에서 귀 기울여야 하는 유사한 경고를 발견한다. 텅 비어있고 열정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한 채로 진행하는 행동주의적 믿음의 접근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드레허의 Benedict option 과 갈리의 “elusive presence”가 제안하는 자세는 주로 방어적이다. 그리고 내가 신약 성경에서 본 자세는 그렇지 않다. 내가 걱정하는 두 자세는 우리를 미션 보다는 유지를 우선시하고, 바깥 대신에 안으로 향하게 한다. 문제점은 태도이다.선교적 문제점?갈리가 교회의 선교 개념에서 본 주된 문제점은 교회를 다른 모든 것의 마지막 목표로 삼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지나치게 업무에 시달리게 하며 너무 많은 일 - 복음전도, 선교, 혹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노력으로 지치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해 내면의 생명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교회의 선교적 개념이 필요하다면?밖으로 집중된 선교적 충동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필요를 깨닫고, 연약함과 무능력함을 알게 하며,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깨닫는 내면의 절망감을 일으킨다면?땅끝까지 예수의 이름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그분의 이름이 세상에 전파되기를 소망하는 선교사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는다면?선교와 예배선교는 예배를 증가시킨다.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가?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을 그분의 주권에 순복하도록 초청하는가? 우리의 목적은 창세기에서 주어진 문화적 명령과 혼합된 지상명령이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이 창조주를 알고 구원자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해야 한다. 믿음 안에서 열매 맺고 번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선교를 지속시키고, 선교는 예배를 증가시킨다. 처음 사랑으로 우리를 다시 부른 마크의 생각은 옳았지만, 현재 문제점에 선교적 교회 개념을 비난한 것은 잘못되었다. 그가 권하는 자세는 우리를 안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밖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고, 선택하시고, 이끄시고, 구속하시고, 심판하시고, 찾으시고, 그분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심으로 창조물을 다시 회복시키시기로 하셨다.정체성과 기능선교적 교회는 우리가 누구인가로 정의되지 않고 우리가 하는 일에 의해 정의된다. ‘정체성’ 혹은 ‘기능’ 중 무엇이 먼저인가? 정체성과 기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기능’인 도구와 ‘정체성’인 표현은 둘 다 존재하는데, 이는 레슬리 뉴비긴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식이자 도구라고 말한 이유이다.예수님은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정체성이 과업보다 앞선다. 우리는 증거하는 일을 하기에 앞서 증인이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에 앞서 그것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정체성을 주셨다. 마치 왕위에 오른 사람과 같다. 왕이 되었지만 사람들을 통치하거나 판결을 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주어진 정체성을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왕으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틀에서 밖으로 나와 부르심을 이행해야 한다.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빛을 비추라고 하셨고 말 아래에 놓인 등불에 대해 경고하셨다. 우리의 정체성이(세상의 빛) 그것의 목적(비추라)과 묶여 있음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비추기 위한(목적) 세상의 빛(정체성)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목표)만약 교회의 선교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구원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적 자기희생의 사랑이 드러날 수 있겠는가?두 가지의 유혹하나님을 위해 너무 바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 교회에는 일로 바쁜 마르다는 많지만, 마리아가 소중히 생각한 “더 좋은 것”을 잊고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인간의 마음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끊임없는 유혹이다.우리는 내부에만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그러한 유혹에 빠지면 더 이상 지상명령에 대한 의식이 없어진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정체성과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해 간다.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스스로를 보지 않는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잃어가는 것이다. 선교는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기도하게 만든다. 선교는 예배가 있는 곳으로 이끈다.열병이 나은 즉시 섬겼던 베드로의 장모와 예수님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마을로 보내진 귀신들린 남자, 열매 맺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많은 비유를 잊지 말자.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하늘에 가득한 것을 올려다보며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던 이사야를 잊지 말자.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적 행위의 본질은 거룩, 자기희생의 사랑, 그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불같은 열정이다. 우리가 그의 사명에 동참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선교적 교회의 아름다움하나님은 교회를 선교의 도구와 표현으로 바라보시는데, 교회가 선교적 이해를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정체성과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는 것이다.교회의 선교적 이해는 모든 민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원의 기쁨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 사랑과 구원의 감동을 함께 누리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이 신학을 잃어버리는 것은 복음주의의 문제를 유행 탓으로 돌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진단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원제: The Beauty and Power of a Missional Church번역: 송유희
선교지침
드레허
마크
정체성
예배
유혹
아름다움
구원
문제점
관계가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by Jon Bloom
2020-01-15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삼하 19:25). 지친 왕은 앞에 앉은 이, 힘들어하는 장애인을 바라보며 엄하게 물었다. 다윗은 지금 막 그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겪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려다가 실패한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고 있었다(삼하 15-18). 쿠데타는 실패했고 반란군은 죽거나 흩어졌다.다윗에게 충성을 지킨 많은 사람에게는 축하의 시간이었지만, 다윗에게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 하는 힘든 시간이었다. 그의 슬픔은 탕자 아들의 비극적인 종말을 보는 것보다 더 깊었다. 자신이 아들의 죽음에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인생의 복잡함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 앞에서 펼쳐졌던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도 그의 귀에 생생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삼하 2:9-12).그는 참기 힘들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바로 그 이웃이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다윗은 이 말을 소리내서 계속 할 수 없었다. 백성의 사기를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삼하 19:5-7). 그러나 그는 영혼 깊은 곳에서 계속 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이 비극은 그의 아들뿐만 아니라 그 아들로 인해 동요된 모든 사람 - 그중 일부는 지금 새로 만든 무덤에 누워 울부짖는 어머니와 아내를 보고 있다 - 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악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불가피하게 엮여 있다. 그랬기에 다윗은 압살롬의 군대가 한창 세를 얻어갈 때 그를 버렸을 뿐 아니라 그를 저주한 사람에게까지 자비로울 수 있었다. 다윗은 격렬하고도 복잡한 시대의 흐름 속에 빠졌을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을 초래한 데에는 어느 정도 자신의 책임이 있음도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상황의 복잡함은 이 위대하고 슬픈 왕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혼란스러운 일로 만들었다. 그는 지금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그에게 합류하지 않은 사람들의 불충한 말은 단순히 두려움과 혼란스러운 전쟁의 소동 속에서 나온 바람과 같은 것에 불과한가? 다윗이 복귀했을 때 전과는 전혀 다른 찬양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진짜 모습일까 아니면 단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연기일까?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시 116:11). 다윗은 그 “모든 사람” 속에 자신도 포함했다.그리고 지금 여기 므비보셋이 있다. 그의 배신은 특히 아팠다.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이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어린 시절에 장애인이 되었다(삼하 4:4). 다윗은 가장 친한 친구(삼상 20:42)에 대한 깊은 사랑과 언약을 지키기 위해 므비보셋을 찾았고, 그에게 할아버지 사울의 땅과 더불어 사울의 종 시바를 붙여주었다. 시바에게는 15명의 아들과 20명의 하인이 있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왕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명예로운 자리를 주었고,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다(삼하 9:7-8,11).그러나 반란군이 들어와서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도망쳤을 때 그와 함께 한 사람은 정작 므비보셋이 아니라 시바였다. 그리고 시바의 보고에 따르면, 므비보셋은 그의 왕좌를 향해 창을 겨눈 또 다른 위험한 “아들”처럼 보이기도 한다(삼하 16:3-4). 다윗은 그가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모든 재산을 시바에게 줌으로 시바의 충성을 보상했다. 모호함이 떠오른다그런데 지금 승리한 다윗이 예루살렘에 다시 입성할 때 므비보셋이 그를 맞이하는 현장에 있다. 그는 초라하고 냄새가 날 정도로 비참한 상태다. 한 보좌관은 다윗에게 보고하기를 므비보셋은 다윗의 망명 내내 면도와 목욕을 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고 했다(삼하 19:24). 그리고 므비보셋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것은 시바의 보고 내용에 심각한 의구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상황이 모호해졌다.“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지친 장애인이 대답했다.“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삼하 19:26-28).므비보셋의 진실함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건 바로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속였던 방법이기도 하다(수 9:3-6). 게다가 시바는 다윗이 가장 위급한 순간에 처했을 때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의 곁을 지킴으로 충성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 다윗 자신도 후새에게 생명을 걸고 압살롬에게 충성하는 척 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가(삼하 15:32-37)? 시바가 다윗 곁에 있었던 건 충성이라기 보다는 오만함으로 가득한 왕자가 아닌 경험 많은 왕에게 베팅을 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아닐까? 여기서 누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걸까?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그래서 다윗은 새로운 판결을 내렸다. 사울의 이전 재산을 므비보셋과 시바에게 반반으로 나눠주었다(삼하 19:29). 그들 중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적게 받은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더 많이 받는 셈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두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게다가 상황의 시급함을 고려할 때 거짓말에 대한 조사가 우선순위가 될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다시 하나로 모아야 할 왕국과 가족, 그리고 민심이 우선이었다. 지금은 새로운 적을 만들 시간이 아니었다.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그에게 충성을 나타냈으며, 다윗은 그들 각자로부터 가장 좋은 쪽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진정한 정의 구현은 하나님께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때로는 다윗처럼 하는 게 복잡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일 때가 있다. 가족, 우정, 목회 및 직장 상황에서 복잡한 일이 발생했을 때, 증거가 충분하지 않거나 상황이 너무 모호하거나 또는 시간이 너무 제한되어 있어 우리가 원하는 완전한 정의가 이루어지기 힘들 때가 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한 최선의 결정은 관련된 당사자의 선의를 믿고 최대한 관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그리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다”(신 32:4). 그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공의를 실행하신다. 인간 또는 사탄이 의도한 악을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을 통해 완벽한 공의로 바꿈으로 선을 가져다 주신다(창50:20; 롬 8:28). 그리고 우리의 불완전한 판단과 이 시대의 불의를 사용하여 그분의 선을 성취시킬 것이다. 비록 한정된 능력이지만 불완전한 판단을 최대한 활용하여 믿음을 바탕으로 선한 결정을 하도록 우리는 부름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한정된 능력”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밀리에 악과 타협하는 것이 “정의를 행하는 것”(미 6:8)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ometimes We Must Settle for Peace번역: 무제
생활
관계
충돌
배신
므비보셋
진실함
나단
다윗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by Dan Dodds
2020-01-14
중세 시대에 로마가톨릭이 점점 타락하면서 교회는 미심쩍은 교리들을 공표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교회와 말씀이 갖는 이중적인 권위에 대한 교리였다. 물론 교회와 말씀이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는 로마 교회가 자신의 판단대로 우선적인 권위를 차지했다. 이렇듯 로마가톨릭은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성경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최종적인 발언권을 거머쥐었다.바로 이 말씀 해석에 대한 권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이 비판하고자 한 주요 대상이었다. 그들의 비판은 오직 성경을 의미하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라는 표현으로 요약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양자가 충돌할 때는,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로마 교회에 상반되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즉 신자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매여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이러한 정신은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진술한 루터의 답변 속에 잘 묻어나 있다.“저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이 아닌, 교황이나 의회에 설득당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주 스스로 모순된 주장을 펴 왔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행위는 올바르지도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할 수 없고, 저의 입장을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바로 이 솔라 스크립투라의 원칙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교리가 주어진다. 이 교리는 하나님 백성의 양심을 속박하려는 어떠한 사람이나 기관의 불법적인 권위도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 교리에 의하면, 성경이 (혹은 성경에서 합법적으로 도출된 진리가) 특정한 윤리 문제를 다루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그 문제를 판단할 수 있으며, 이때 그 양심은 누구에 의해서도 속박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의 권위나 견해가 그리스도인을 억압할 수 없다.이렇게 신앙의 본질과 관련 없는 자유의 영역에 대해 신학자들은 ‘아디아포라’라는 용어를 들어 설명한다. 이 용어는 헬라어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아’와 판별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디아포라’가 합성된 개념이다. 그 두 가지 의미가 결합된 아디아포라는 판별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결국 성경이 아무런 도덕적 명령을 제시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선호에 따라 자유로운 입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그리스도인에게 있다는 게 아디아포라의 적용이다.바로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교리는 종교개혁 당시에 중요한 논제로 취급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 교리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까지 여겨졌다고 주장한다. 왜 종교개혁자들이 그 문제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을까? 칼빈이 그 답변을 제시한다.“[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흔히 생각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양심이 일단 함정에 걸려들면 길고 복잡한 미로에 빠져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아마포를 가지고 시트나 셔츠나 손수건 또는 냅킨에 사용할 수 있는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는 곧 대마포에 대해서도 불확실한 마음을 갖게 되고, 결국에는 삼베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된다. [중략] 이러한 의심에 빠진 자들은 어디를 보아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만 보이게 마련이다”(기독교강요, 3권 19장 7절).어떤 그리스도인이 성경적으로 중립적인 행위를 마치 보편적으로 그릇된 행위처럼 규정하며 자신과 타인을 위해 그 행위를 억제한다면, 그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멈춰 세울 수 없는 미끄러운 비탈길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이런 태도가 율법주의 한 형태이다. 그와 같은 율법주의는 자유와 동떨어진 율법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신자의 양심은 억압되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는 자세그처럼 사람이 만든 율법이 교회 안에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섬기는 교회의 경우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되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이 달린 과정을 새가족반에 첨가했다. 현재 이 과정에는 스물다섯 개가 넘는 주의 사항이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심사를 가지고 교회에 와서 다른 신자의 양심을 억압하려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마련되었다.그런데 간혹 그런 일이 발생하듯, 우리는 이편에 있는 도랑을 피하려고 방향을 바꾸다가 저편에 있는 도랑에 빠지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그 교리를 오해하며 부주의하게 다루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잘못 사용될 수 있다. 바울은 그런 잘못을 예방하고자 다음과 같이 교훈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이에 베드로도 동일한 원칙을 제시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이렇듯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에 대한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로마서 14장에는 좀 더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지침이 소개된다. 마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마셔도 되는가를 놓고 토론을 벌이듯이, 초대교회 당시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가 이슈였다. ‘그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이에 바울은 두 가지 원리를 제시했는데, 이는 우리가 숙고해야 할 내용으로서 다음 한 구절에 잘 요약되어 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먼저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을 정도로) 믿음이 강한 형제가 (그런 음식을 먹지 못할 만큼) 믿음이 약한 형제를 업신여기는 교만을 범하지 못하도록 경계시킨다. 그러면서 또한 음식을 먹지 않는 자에게도 음식을 먹는 자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죄로 규정하지 않으신 행동을 죄로 여기며 형제를 판단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한다]”(롬 14:19).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를 섬기는 일을 할 때, 우리 자신의 자유를 과시해서도 안 되고 또한 그 자유를 사용하는 자를 경멸해서도 안 된다.결국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불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여러 모양새로 실천하되, 다른 지체를 판단하기보다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그 자유를 행사해야 한다(마 7:1; 롬 14:22-23).출처: www.ligonier.org원제: Christian Liberty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루터
양심
아디아포라
자유
판단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라
by Scott Hubbard
2020-01-13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이미 거룩에 대한 열망을 심어 놓으셨다. 그 거룩은 당신을 가두는 좁은 방처럼 불편하게 느껴지기보다 즐거움이 깃든 정원처럼, 하늘의 메아리처럼, 다시 찾은 에덴의 눈부신 경관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따라서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물론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사실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와 같이 의롭게 되기를 진정으로 사모한다. 그분이 거룩하시듯 당신도 거룩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거룩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구체적으로 말해, 어떻게 하면 늘 더듬거리며 샛길로 빠지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만 집중하는 영적 대화로 바뀔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잔걱정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가 인생에 산적한 고민을 그분께 다 맡길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헛된 자랑을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이 가난한 심령으로 변화되어, 의에 대한 무관심이 뜨거운 갈망으로, 인색한 태도가 관대한 손길로, 쉼 없는 고달픈 일상이 평온한 생활로 바뀔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하면 인생의 궁극적 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그분을 알 때만 생명을 얻고 가장 고상한 유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을까?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본문을 통해서 그러한 거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르침을 대하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곤 한다. 바로 거룩이란, 너무나도 자주 사소한 일들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일과를 주목하라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거룩을 어떻게 추구하라고 권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그는 전반부에 걸쳐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는다.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생을 보증하셨다고 찬양한다(엡 1:3-14). 또한 우리의 영혼을 살리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으며(엡 2:1-10)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선포한다(엡 3:14-19).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랑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후반부에 걸쳐 바울이 하는 작업은, 그 복음을 일상의 소소한 생활 속에 적용해 나가는 일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나열한다. 서로에게 진실하라(엡 4:15). 빨리 화해하라(엡 4:26). 정직하게 일하라(엡 4:28). 선하게 말하라(엡 4:29).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품으라(엡 4:32).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으로서 그리스도를 의식하며 서로를 대하라(엡 5:22-6:9).이 각각의 교훈은 그 자체로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거기서 강조되는 순종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관심을 잘 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순종의 대부분은 일상에서 쉽게 잊히는 순간, 어딘가 방치된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스타프 빙그렌(Gustaf Wingren)은 루터의 직업소명에 관해 설명하며 “성화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일과 속에 숨어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너무나도 평범해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수밖에 없는 일상의 영역, 바로 거기서 거룩이 이루어진다.눈을 땅 끝에 두지 마라그래서인지 거룩을 추구하면서 미련한 자의 오류에 빠지는 이들이 많다.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잠 17:24). 저 멀리 있는 놀라운 광경만 바라보다가 정작 발끝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먼 미래에 실행하려고 거창한 순종을 계획하는 데만 마음을 둔 나머지 당장 코앞에 있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순종은 실천하지 못할 수 있다.날을 잡아서 아내와 아이들을 섬기는 데 하루 종일 헌신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당장 가사를 돌보는 일에는 무관심할 수 있다. 이다음에 미전도 지역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게 해 달라고 뜨겁게 기도하는 선교사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소그룹은 소홀하게 돌볼 수 있다. 언젠가 비영리 단체를 개설하여 사회에 공헌하기를 바라는 청년이 맡겨진 계산대 아르바이트는 대충 때울 수 있다. 앞으로 닥칠 어떠한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대학생이 조금 전 룸메이트가 치우지 않고 나간 그릇 더미를 보며 투덜거릴 수 있다.이 모든 일상의 영역에서 때가 되면 순종하리라는 마음은 오늘의 순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곤 한다. 앞선 잠언에서 솔로몬이 밝혔듯이, 명철한 자는 자기 앞에 있는 지혜를 본다. 그는 오늘의 의무, 오늘의 과제, 오늘의 대화, 오늘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그 모든 게 사소해 보일지라도 말이다.마찬가지로 지혜로운 크리스천은 그때그때 쌓이는 낱장의 벽돌로 웅장한 예배당이 지어지듯 거룩도 그렇게 이루어짐을 알고 있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는 일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과정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순종하라그렇기에 거룩을 추구하는 일은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정도보다 더 쉽기도 하고 더 어렵기도 하다. 더 쉬운 이유는, 우리의 성장이 대부분 한 번에 한 단계씩 은혜 안에서 꾸준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어려운 이유는, 성화의 과제가 일상의 전 영역 속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일과, 즉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그 모든 일을 통해 거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우리의 영적 성숙은 바로 이 “무엇을 하든지”에 달려 있다. 남들에게 보이는 곳에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특별한 일을 할 때든 평범한 일을 할 때든, 인생의 중대한 순간에든 일상적인 순간에든,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따라서 하루 열두 번도 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이 10년 후에는 어떤 사명을 맡기실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잘못된 생각에 빠지려 할 때마다 그 생각을 바로 멈추는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시간에 쉬지 않고 기도하려고 힘쓰는가?’, ‘한눈팔지 않고 오늘도 정진하고 있는가?’, ‘상대를 향해 따뜻한 말을 하고 있는가?’이처럼 일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부담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격려가 되기도 한다. 일단 부담이 되는 이유는, 주님이 인생의 모든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만의 시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격려가 되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가 애쓰며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매순간 지켜보시며 그 일로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행하는 작은 일, 말하자면 냉수 한 잔을 떠 주는 일조차 잊지 않으신다(마 10:42). 반드시 그 일을 기억하시며 그에 맞는 상급을 준비하신다.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게 된다(엡 6:8). 더 나아가 그분은 우리의 순종에 어떤 결함이 있든,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는 그 순종을 자신의 은혜로 덮으신다.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라그렇다면 과연 어디서부터 거룩을 실천해야 할까? 당연히 다른 곳이 아닌,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C. S. 루이스는 ‘개인기도’(Letters to Malcolm)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의 원리를 제시했다.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를 시작하라.” 이를테면 매번 기도할 때마다 “창조와 구속과 ‘인생의 모든 복락’에 관해 생각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모조리 고백하는 식으로” 기도를 시작하지 말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작은 대상들에 주목함으로써 기도의 말문을 열라고 권했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나무 한 그루라든가 이제 막 끝마친 아침식사 또는 옆방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며 감사의 고백으로 기도를 시작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루이스가 지적했듯이, “가장 사소한 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한다면, 가장 고상한 일에 대해서도 그분을 결코 예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원리는 우리의 순종에도 적용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세를 배운 자만이 큰 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거의 예외 없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작은 일을 통해 훈련되지 않고는 큰 일을 감당할 수 없다.우리가 세운 계획대로 일정이 진행되지 않고 엉망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를 익혀야만 자녀들의 구원과 같은 큰 일에 대해서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수입이 부족할 때도 자신의 소유를 내어주며 섬길 줄 알아야만 수입이 넉넉해졌을 때도 똑같은 마음으로 섬길 수 있다. 오늘 만나는 이웃과 부끄러움 없이 예수님을 나눌 수 있어야만 언젠가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도 그분의 이름을 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상의 작은 순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오늘 하루가 우리에게 대단한 순종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수십 년간 형성된 우리의 성품도 하루만에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한 변화는 긴 세월이 흐르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하루는 오히려 그보다 작아 보이는 일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친구를 용서하기, 부끄러운 생각을 멈추기, 아이에게 관심 갖기, 진심어린 말로 격려하기,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등.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상의 순종을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Offensively Ordinary Steps to Godliness번역: 장성우
영성
묵상과기도
거룩
구스타프
루이스
순종
평범
일상
개인기도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by Albert Mohler
2020-01-11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가 쓴 ‘백치’(The Idiot)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기독교적 취지와 신학을 깊이 반영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이야기에서 다소 이상해 보이는 개념을 상정한다. 곧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개념이다. 흥미로운 아이디어이긴 한데, 기독교의 사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이에 대해 두 가지 성경 본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사야 53장과 시편 27편이다. 먼저 이사야 53장은 메시아를 묘사하며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말한다(사 53:2). 그런데 이 말은 시편 27편이 주님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있는 내용과는 좀 다르게 들린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이 두 구절을 병행시켜 묵상할 때, 우리는 어떤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일단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아는 사람들이 지켜볼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분으로 그려진다. 그분은 매를 맞고 고통을 당하신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분으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여기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외모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메시아의 대속 사역과 그분의 위대한 사역을 통해 이루어질 죄에 대한 심판을 예견하고 있다. 이와 달리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기를 간구한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이란 메시아의 사역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어떻게 보면 성경은 아름다움으로 시작해 아름다움으로 마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그분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창 1:4, 10, 12, 18, 21, 25). 심지어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도 말한다(창 1:31). 그런데 이 좋다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보다 의미가 깊다. 히브리어에서 그 표현은 아름답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는데 심히 아름다웠다는 내용을 전달한다.이렇게 시작하는 성경은 어떻게 마칠까?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2-27).이와 같은 새 예루살렘의 모습과(22장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생명수의 강은 아름다움의 회복을 증언한다.결국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에 끌리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과 미술 전시회 또는 그랜드 캐니언에 간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어떤 개념일까? 또한 구속 사건에서 그 아름다움은 어떻게 드러날까?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아름다움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인간이 아름다움을 봐도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지각하는 우리의 감각이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마트의 계산대에 진열된 온갖 잡지들만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 잡지들이 인위적으로 그려 내는 모델의 외관은 세상이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혹 그들의 이미지가 좋아 보일지는 몰라도, 그런 이미지는 성경이 바라보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기독교 세계관은 진실로 선한 아름다움이란 스스로 계실 뿐 아니라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그 근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초월적인 가치인 진(the true), 선(the good), 미(the beautiful)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가르쳐 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편 27편 기자가 말한 여호와의 아름다움에는 그분의 선하심과 진실하심까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우리는 타락한 상태에 있기에,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서로 분리하려 한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인가가 진실하다면, 그 대상은 또한 선하고 아름답다고 가르쳐 준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선하다면, 그 대상은 또한 아름답고 진실하다고 가르쳐 준다. 그렇기 때문에 진열대의 잡지들이 언뜻 보기에는 좋은 이미지를 그려 낼지라도, 그런 이미지는 진실로 선한 모습을 전달하지 못하기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기독교 세계관은 다운 증후군을 가진 아이의 얼굴이 전문 모델의 조작된 이미지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관점에서 매력적이지 않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희생하면서 피를 쏟아내는 그 끔찍한 광경은 보기에 좋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좋지 않을지 몰라도, 십자가는 분명 아름답다. 예수님이 거기서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십자가가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거기서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진실하고 선한 일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에 참으로 아름답다.그러니 도스토옙스키가 옳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아름다움이 그저 눈으로 보기에 좋은 상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선재하는 아름다움우리는 더 나아가 인간 내면에 있는 아름다움의 선재성(the priority of beauty)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진리에는 우리 모두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심지어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세속주의자도 해가 지는 광경에 놀라곤 한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모든 인간의 마음은 아름다움에 끌린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아름답지 못한 대상에 사로잡힌다는 게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드러내는 문제이다. 물론 어거스틴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단지 감성의 작용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의 객관적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갈망 역시도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우리의 상태를 드러낸다고 고백했다.세상을 구원하는 아름다움우리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역은 아름답기에 진실하다. 또한 그 희생은 진실하기에 선하다. 결국 예수님의 대속 사역은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보기에 좋지 않은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아름답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ill Beauty Save the World?번역: 장성우
복음
십자가
세상
구원
이사야
창세기
선재성
어거스틴
인식
진실함
죽어가는 교회의 세 가지 증상
by David Gibson
2020-01-10
“나는 그녀가 죽기 전부터 그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0년 전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매우 아팠지만,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더군요. [중략] 그녀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상태는 천천히 그리고 점점 더 악화되어 고통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었습니다. [중략] 여기서 말하는 그녀는 교회입니다.”톰 라이너(Thom Rainer)는 ‘죽어가는 교회의 부검’(Autopsy of a Deceased Church)에서 이렇게 썼다. 죽어가는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교회 영안실로 향하는 여행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서 매주 출석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죽음의 증상이 만연한 교회가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다.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는 교회의 경우, 그게 더 번창하려고 힘차게 숨을 쉬는 건지 아니면 죽기 전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건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의사로부터 받는 도움우리가 어떤 교회에 속해 있든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야고보서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지금 모든 상황이 좋아서 결코 실패할 리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야고보서는 그런 우리에게 언제라도 모든 것이 다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해줄 수 있다. 지금 부서진 상태라서 상처받고 당황한 신자들이 상상 이상으로 절망하고 있다면, 야고보서는 그런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상처를 싸매줄 수 있다. 야고보서가 깊은 영적인 수준에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이유는 문제의 증상과 근본 원인을 모두 다 제대로 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단순한 기침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병원을 찾은 우리에게 천천히 숨을 쉬라고 하면서 더 근본적인 기침의 원인을 진단하는 의사와 같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향하여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는 애정을 가지고 날카로운 메스를 사용한다. 어떤 것을 처방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야고보서는 우리에게 증상, 병, 그리고 죽어가는 교회에 필요한 치료약을 알려준다.죽어가는 교회의 세 가지 증상야고보서는 스스로 교회의 건강을 진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증상을 제시한다.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그어버린 경계선, 그리고 선한 일을 무시하는 증상이다. 1. 교회가 화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우리는 이 증상에 대한 첫 번째 힌트를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 얻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같은 주제가 1장 26절에 또 나온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3장에 이르러서 야고보서는 우리가 혀를 가지고 저지를 수 있는 진짜 재앙이 무엇인지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야고보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그럼에도 야고보서 저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다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주로 목요일에 발생한다. 왜 하필이면 이 날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이날이 되면 우리의 혀가 최악의 말을 내뱉곤 한다. 인내심이 짧아지고 성질이 예민해지며 말이 날카로워진다. 형제끼리 싸우고, 부부가 싸우고, 또 부모가 자녀와 싸우면서 집안은 화염에 싸이고 사람들은 화상을 입는다. 조절할 수 없는 혀는 하나의 증상이지 병이 아니다. 2. 교회가 더러운 선을 긋기 시작한다2장에서 이런 교회의 특징은 편가르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교회는 사람을 편애한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를,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특정 유형의 사람들을 존중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욕감을 준다. 내부 군중이 있고 또 외부 군중이 있다. 각종 사회적인 수단과 부요함을 찾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교회는 아주 매력 있다. 이런 식의 사회경제적 구분선이 당신 교회에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꼭 이런 특정한 선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선을 그을 수 있다. 그렇게 선을 그음으로 우리는 어떤 특정한 물리적 공간과 사회 집단에 포함되어서 안전하다고 느낀다. 어떤 특정 사람들과 유대를 맺거나 다른 특정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무시하게 된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기혼자와 독신자, 직장인과 실업자 외에도 수없이 많은 종류의 선을 긋는다. 사람은 누구나 내게 줄 것이 없는 사람보다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선을 그을 때 하나님과 다르게 긋는다. 하나님은 위험에 노출되고 가난한 자, 약한 자, 줄 게 없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의 눈앞에서 정결한 종교인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람이고 이 세상이 주는 보상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다(약 1:27).3. 교회가 선한 일을 등한시하기 시작한다야고보서가 도전적인 이유는 그 서신서의 수신자가 믿음이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냥 교회도 아니고 복음을 사랑하는 교회였다. 그 교회의 신학은 정통이었고 교회 전체는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었다. 말씀이 선포되고 듣는 것을 사랑하는 교회,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였다.그 교회가 성경을 사랑한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다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그런 사각지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선한 일이 없으면, 행함이 없으면 그건 죽은 믿음이다. 너는 겉으로는 살아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죽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나쁜 말을 하고, 편을 가르는 선을 긋고, 선행은 없다. 우리가 그런 증상을 가지고 의사에게 갔을 때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도움이 될까? 그게 제대로 된 치료가 될까? “좋아요, 그럼 앞으로 좋은 말을 하고, 선을 긋지 말고, 선행을 하세요.” 이런 죄가 어디에서 오는가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5-8).이 구절 속 용어는 인간 구성의 일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의학 용어이기도 하다. “두 마음”이라는 단어는 사실 “두 영혼”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내 속에 “두 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두 개”는 나의 하나됨(one-ness)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두 개로 분열된 자아를 가지고 살 때 조만간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정신과 의사는 당신에게 ‘분열된 자아’라는 진단을 내릴 것이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가장 깊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증상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우물을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영적으로 분열된 자아이다. 분열된 내면은 외부로도 그 분열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분열된 마음은 분열된 행동으로 이어진다. 악한 생각과 이기적인 욕망의 결과로 시들시들 죽어가는, 영적으로 분열된 교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하늘이 준 치료제, 은혜의 복음이라는 치료제가 필요하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ree Symptoms of a Dying Church번역: 무제
교회생활
톰라이너
언어
혀
편가르기
편애
선행
죄
은혜
복음
죽었으나 사라지지 않은 포스트모더니즘
by Collin Hansen
2020-01-09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사망 기사가 나지도 않았다. 조의를 표하는 어떤 소식도 TV 뉴스에 보도되지 않았다. 분명 포스트모더니즘이 죽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죽음을 예견한 이들도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막지는 못했다. 사망의 조짐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DNA를 통해 나타난 바가 있었다.당신이 교회의 목회자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사망 소식을 놓쳤을지 모른다. 물론 수많은 언론인과 문화 평론가 또는 미래학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야말로 이 시대에 크게 성공할 상품인 양 선전해 왔다. 누구도 멈출 수 없는 흐름이라고 예견해 왔다. 그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공격을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가 견뎌 왔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포스트모더니즘에 적응하지 못하면 곧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2011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장례식이 열렸다.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와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그 양식과 전복의 역사, 1970-1990년”(Postmodernism: Style and Subversion 1970-1990)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다.판단 기준의 부재흔히 기독교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마치 철학과 윤리 분야에서 일어난 하나의 혁명적인 사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앞선 모더니즘이 신뢰한 확실성에 반발하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게 된 일종의 대안 정신으로서 처음부터 흔들리는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렇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제나 선택적으로만 각 분야에 적용되어 왔다. 그러면서 모더니즘을 초월한 형태로 자주 표현될 뿐 그 스스로가 완전히 새로운 사조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 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앞서 등장한 모더니즘과의 관계 속에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예술과 문학에 뿌리내린 포스트모던 학파 역시 모더니즘 관습에 대한 산발적인 항변을 나타낼 뿐이었다. 런던 전시회의 주최 측은 이렇게 설명했다.“과거 모더니즘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는 창문과 같았다. 이와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은 깨진 거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균열이 생긴 여러 조각의 유리 표면과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지침은 복잡성과 자기모순에 있다. 권위에 저항하기 위해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에서 90년에 이르는 이십여 년 동안 그 스스로가 애초에 해체하고자 했던 돈과 권력의 문제에 빠지고 말았다.”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포스트모더니즘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몇 가지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일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대담론에 대해 회의감을 표출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테면 마르크시즘과 같은 근대 사조와 달리, 이제 우리는 인간의 동기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순과 역설을 받아들이며 사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이 모든 현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어느 한순간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 묘사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포스트모던 세대는 병원을 방문할 때나 정의를 부르짖을 때는 이상하게도 모던 세대와 비슷한 소리를 낸다. 실제로 가족 간에는 서로 닮은 점이 있게 마련인데, 모더니즘과 그 방탕한 아들 사이에도 그러한 것이다. 그 아들은 돈과 권력에 탐욕을 낸 아버지처럼 크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지만, 세월이 흘러 거울을 보고는 그 빼닮은 모습에 놀라 뒷걸음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에드워즈 독스(Edwards Docx)는 ‘프로스펙트’(Prospect) 매거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몰락하며 소비주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강한 어조로 지적했다. 그 아티클에서 그는 저자의 의도에 대한 반발로 문학에서 일어난 포스트모던 경향을 설명했는데, 이를테면 페미니스트나 동성애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의 발언에 문을 열며 일부 계층에 자유를 허락한다는 명목하에 시작된 움직임이 결국에는 반지성적인 무질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비판했다.“공산주의가 붕괴되며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게 된 서구 자본주의는 잠시 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이러니한 전술로 인해 도전에 직면하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원체 모든 것을 비판하기 때문에, 혼란과 불확실성의 기류도 함께 자라며 번성하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여러 곳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문학의 신조와 기술 또는 미학에 대한 확신도 결핍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문화 전반으로 확산되어 누구도 스스로 안심하거나, 무언가 이룰 수 있는 능력이나 기술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떤 대상의 진위를 가리거나 판별할 수 있는 방도가 정책적으로 마련되지도 않았다. 아무런 미학적 기준이 없다 보니,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이 가져다주는 수익에 따라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이 분석을 통해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낳은 역설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 한 예로 ‘다빈치 코드’(The DaVinci Code)를 쓴 댄 브라운(Dan Brown)을 들 수 있다. 그는 학회에서 자신에게 동조하는 일부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치 학자처럼 행세하며 진리를 오용함으로써 그릇된 돈벌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승자가 역사를 기록한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이런 전제는 포스트모던 사고를 그대로 반영한다. 또 그는 신뢰할 만한 학계의 표준적인 견해는 무시한 채, 이단적인 사설을 마치 교회의 정통적인 입장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보처럼 끌어올려 작품을 전개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저급한 추리 소설을 대중 시장에 내놓았고, 많은 사람이 진정한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하여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게 된 것이다.어찌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죽음은 당연하다. 시장은 상품의 질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언제든 빠질 수 있다. 문제는 에드워즈 독스가 지적한 대로, 현재의 탈포스트모던 세대(post-postmoderns)가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할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도한 소비 행태와 거짓을 진짜처럼 둔갑시키는 시장, 그리고 각종 소셜 미디어를 채우는 온갖 잡다한 이야기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중략] 포스트모던 세대는 모던 세대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태도를 문제 삼았다면, 현세대가 느끼는 문제는 그와 정반대이다. 즉 누구도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다.”따라서 교회의 목회자가 시대에 적응한다는 명목하에 쓸데없는 시도를 하며 적실성만 추구한다면, 현세대에게 정작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지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끝났다. 그 다음에 어떤 사조가 몰려올지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 죽었을지 몰라도, 그 기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판단 기준의 실재깨어 있는 목회자라면, 지난 수십 년간 시대정신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실감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게 그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필요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이점도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인식론적 불확실성이 우리의 죄악 된 확신 내지는 교만을 점검하는 데 유용한 기능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 내포된 지혜를 반영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덕분에, 더 이상 계시와 분리된 이성만으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는 식의 계몽주의 사상은 내세울 수 없게 되었다.문제가 있다면, 모든 것을 알고자 했던 인간의 탐구가 결국에는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의문만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팀 켈러(Tim Keller)는 에드워즈 독스의 아티클에 관해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최근에 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계속 들어 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속한 문화와 역사에 따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인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진리를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쉽게 권력 싸움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이 결국에는 스스로를 해치고 말았다. 거기에는 진리와 정의와 권위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서 그 기준을 찾아야 할지를 알려 준다. 교회 안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어떻게 부정적인 사례를 들어 그와 같은 문화적 흐름에 대응하도록 가르치는지를 놓칠 때가 있다. 두 가지 경우만 생각해 보겠다. 먼저 본디오 빌라도는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들으며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그는 진리이신 그분 앞에 서 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요 18:3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듣는 귀를 주셔야만 진리를 증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요 18:37).다음으로 솔로몬은 돈과 권력을 다 거머쥐고 쾌락을 마음대로 누렸으면서도 인생에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시대의 다원론자처럼 외부로부터 새로운 신들을 다 받아들였다(왕상 11:1-8).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이는 마치 에드워즈 독스의 탄식과 같이 들린다. 전도서는 그 결론부에서 신뢰할 만한 정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문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우리가 속한 문화적 상황은 변할지 몰라도,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록 죽었지만, 그 정신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보편적 절망감을 반영하는 한, 여전히 우리 곁에 그 영향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그분만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진리와 정의, 권위의 근원이 되심을 기억해야 한다.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체하게 될 정신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겠지만, 그 정체가 무엇이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공허한 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바로 그분께 속한 권위 외에는 다른 권력을 손에 넣으려 하지도 않는다.결국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그분의 음성만이 거룩한 공의가 실현된 아름다운 역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 ‘죽음’으로써 수많은 죄인을 위한 영원한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ostmodernism: Dead But Not Gone번역: 장성우
문화
세계관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
에드워즈독스
팀켈러
절망감
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가진 교회
by Derek Thomas
2020-01-08
이 땅에서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한 가지 계획이 있다. 바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셨다. 그러다가 빌립보 가이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예수님은 과연 어떤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을까? 어떤 구조와 조직을 갖춘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야 주어지게 된다. 우선 오순절 사건 직후에 탄생한 교회는 그 조직이 뚜렷하게 잡혀 있지 않았다. 그 교회는 사도들이 감독하는 하나의 모임으로서 네 가지 사역에 헌신했을 뿐이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 성도 간의 교제, 성찬, 그리고 기도에 집중했다(행 2:42).그러다가 초대교회의 리더십은, 특별한 구성을 갖추지 않은 가정 모임에서부터 조직화된 회중으로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집사와 장로라는 뚜렷한 직분을 통해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신약교회의 ‘직분’에 관해 연구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그리고 이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쟁점은, 항구적으로 부여되는 직분과 일시적으로 부여되는 직분을 어떻게 서로 구별할 수 있느냐이다.이러한 직분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서 다루기가 쉽지 않은 또 하나의 논점은,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예외적인 은사가 항구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인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주어진 은사인가 하는 문제이다. 나와 같은 은사중지론자는 신약에서 언급되는 일부 은사가 “사도의 표”(고후 12:12)로 주어졌다고 믿는다. 즉 구속 역사의 목적상 교회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약성경에 의존하고 있던 시기에만 주어졌다고 믿는다. 당시 초기 단계에 있던 교회를 이끌고 지도하는 데는 그처럼 예외적인 은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신약의 정경이 완성되고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사도라고 일컬어진 모든 사람이 죽은 후에는, 집사와 장로 혹은 (해석자가 따로 구분할 경우에는) 목사와 같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직분만 존재하는 규범적인 상황이 교회 안에 확립되었다.교회의 조직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는 디모데서나 디도서와 같은 후기 서신들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이 서신들은 더 이상 특별한 직분이나 은사를 언급하지 않고, 집사와 장로 그리고 디모데가 수행했던 복음 전파자의 역할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는 어떤 직분이나 은사가 교회의 유년기에만 허락되었고 성숙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집사의 직분집사라는 직분은 교회의 위기 상황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처음부터 다양한 인종이나 민족을 수용하며 성장하자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문제의 정황은 이렇다. 당시 1세기 문화에서 과부는 취약 계층에 속했는데, 교회는 공동체 의식에 따라 그처럼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는 자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평등하게 음식이 배분되어 실망하는 과부들이 발생하게 되었다(행 6:1-7). 이를테면 아람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과부들을 교회가 편애하여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과부들이 음식을 받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차별 대우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익숙하게 경험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시 사도들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곱 사람을 선택해서 문제 해결에 나섰다. 이런 해결책을 실행하여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자 하였다(행 6:4).물론 그런 편파적인 행동의 책임이 사도들에게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도들이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음식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행 6:2). 교회를 키우고 양육하는 데 자신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이런 차원에서 일곱 사람이 선택되어 따로 세워졌다. 그들에게는 일정한 자질이 요구되었다. 즉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했다(행 6:3).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이라는 지역 교회에서 세움을 받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임명을 받게 되었다(행 6:6). 이처럼 안수식과 임명식이 있었던 사실은 그들에게 분명히 구별된 사명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그렇다면 이 일곱 사람은 정말로 집사로 세워졌던 것일까? 이에 대해 성경은 그들의 직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디아코네오’라는 용어는 (‘집사’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디콘’(deacon)과 근접한 관계성을 지닌다. 그리고 일곱 사람이 집사라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어도, 그들은 성도들을 돌보고 섬기는 사역을 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 일곱 사람을 집사의 원형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직분은 교회가 말씀 사역과 좀 더 실천적이고 물질적인 사역을 어떻게 구분하였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결국 집사라는 직분은 성도의 실생활과 관련된 문제, 가령 재물과 음식을 나누거나 서로를 돌아보는 일을 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섬기는 리더십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섬기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일정한 자격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은 언제나 섬기는 리더십을 전제로 한 직분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집사와 장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하며 자신보다 타인을 더욱 돌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집사와 장로의 두 직분 가운데 어느 한 직분이 다른 직분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경건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집사에게 요구되는 영적 자질을 나열할 때, 장로에게 요구되는 자격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제시했다. 집사는 가르치는 은사를 제외한다면, 그 신앙의 덕성과 영성에 있어 최고의 수준을 보여야 했다(딤전 3:8-12).앞서 언급한 사도행전 6장의 구제 사역은, 집사에게 일반적으로 부과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샘플과 같다. 이에 따르면, 집사는 구제뿐 아니라 교회의 재물과 소유 전반에 관련된 일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직분임을 알 수 있다. 이후에 바울은 집사의 사역 범위 안에 특별히 과부에 대한 섬김을 중요한 항목으로 포함시킨다(딤전 5:3-16). 그리고 일반적인 과부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과부에게 초점을 맞추고 교훈을 제시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내용은, 과부를 섬기는 일에 교회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사는 교회의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관행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자원을 바르게 사용하는 분별력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지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영적 은사를 갖춰야 한다. 그리하여 어려운 문제를 처리할 때 정확한 사리 분별을 해야 한다.여성 집사에 관하여그렇다면 모든 집사는 남자여야 할까? 신약성경에는 여성 장로와 관련해서는 참고할 만한 본문이 없기 때문에 별문제가 안 되지만, 여성 집사의 경우는 다소 애매한 언급이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가령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자매 뵈뵈”를 로마에 있는 교회에 추천하는데, 이때 그녀에 대해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언급한다(1절). 여기서 ‘일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는 안수식이 요구되는 직분은 아니어도 집사의 사역에 참여하는 직무를 의미할 수 있는 단어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3장에서 바울은 집사의 자격을 설명하는 가운데(8-13절), 여자들에 대한 조건을 첨가한다(11절).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동일한 장에서 장로에 관해 설명할 때는 말하지 않는다(1-7절).이와 같은 사실을 감안한다면,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서 “여자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귀나이카스’는 여성 집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의미로 읽을 경우에만 본문의 흐름이 산출하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내가 속한 개혁교단은 이러한 성경 해석의 전통을 따라 여성 집사를 인정하며 그 직분을 공식적으로 제정해 놓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입장이 여성 장로에 대한 논쟁으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장로의 직분이 글에서는 (오늘날 장로교단에서 ‘가르치는 장로’라는 명칭으로 구분하는) ‘목사’가 (‘다스리는 장로’에 해당하는) ‘장로’와 분리된 직분인지에 관해서는 다룰 수가 없다. 그 주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상당한 분량의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만 신약성경이 교회 안에 있는 또 다른 규범적인 직분으로서 ‘장로’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이 직분을 언급할 때 신약성경은 세 가지 타이틀을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한다. 그 세 타이틀은 ‘감독’(에피스코포스), ‘장로’(프레스뷔테로스), ‘목자’(포이멘)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장 17절과 28절에서 그 세 가지 개념은 모두 동일한 사람들에게 사용된다. 이 사실만으로도 지난 수백 년 동안 엄청난 분량으로 논의되며 쟁점이 되어 온 주장, 즉 각각의 타이틀이 독립된 직분을 가리킨다는 주장을 일축하기에 충분하다.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1-7절과 디도서 1장 5-9절에서 장로가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지녀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를 열거한다. 집사와 마찬가지로 장로 또한 특정한 덕목을 갖추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리더십이다. 성품의 결함은 그 어떤 재능으로도 메꿀 수 없기 때문이다.집사와 달리 장로가 갖춰야 할 특징이 있다면, 바로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딤전 3:2). 물론 모든 장로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딤전 5:17). 이는 일반 장로와 다른 역할을 감당하는 장로가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이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집사 또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로서(딤전 3:9), 그중에서도 가령 나이든 여자는 젊은 여자를 가르쳐야 하고(딛 2:4), 나아가 전체 회중 또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를 가르쳐야 한다(골 3:16). 그리고 모든 신자는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벧전 3:15).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능력만으로는 장로의 직분을 얻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능력이 장로에게는 더욱 분명하게 요구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또한 권한에 있어서도 집사와 장로 간에는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집사의 권한은 그 집사가 속한 지역 교회에 제한되지만, 장로의 권한은 그와 같은 지역 교회를 넘어서 행사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의 장로들은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해서 신약교회 전체에 구속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행 15:6-21).이와 같이 신약교회의 리더십은 집사와 장로라는 두 가지 직분을 통해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교회 안에 그 두 직분을 공고히 세워야 한다. 잘 훈련받은, 경건한 직분자를 세우는 일은 교회가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이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그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전 14:40).출처: www.ligonier.org원제: Leaders in the Church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여성집사
직분
디아코네오
디콘
집사
장로
오늘날 요구되는 남성적 리더십
by Greg Morse
2020-01-07
남성성(masculinity)에 관해 가르치는 목록에 힘, 주도성, 열정, 용기와 같은 자질이 포함되는가? 우리가 교회 사무실에서 일할 남자를 평가할 때, 그리고 소그룹 지도자와 경건한 멘토를 찾을 때,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융통성있는 남자, 양을 보호하고 기꺼이 늑대와 싸울 수 있는 선한 목자와 같은 사람을 원하는가?무언가를 지키고, 보호하고, 정복하고, 인도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남성의 힘, 용기, 열심 및 주도성을 높이 평가하는가? 그럼 강하기 때문에 온화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고양이가 아닌 호랑이는 강하기 때문에 온화함을 보일 수 있다.지금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은 것”이라는 아슬란의 설명은 사자의 심장을 가진 남성성(masculinity)이라는 종(species)이다. 현재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생각은 남자를 안전하게 하는 데에 선함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은 선함과 상관없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로 중생한 남자는 상대가 불편해할 말은 하지 않고, 공격하지도 않으며, 주도적인 모습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강요가 없다면 신념 없고, 열정 없고, 심지어는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이러한 이미지는 남자를 만든 하나님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다. 중생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의로움으로 훈련받은 남자의 경건함은 그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변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남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본성을 잃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더함으로써 성숙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친절, 자제심, 동정심은 그의 힘, 용기, 결단력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남자는 어디로 갔는가? 온화하고 강한 남자는 세상에 역설을 제시한다. 그의 손은 집을 짓고, 아들과 씨름하고, 딸들과는 차를 마신다. 그리고 칼자루를 들고 어둠의 세력에 대항해서 싸운다(엡 6:10-20). 그는 갑옷을 입고 잠을 자는 경건한 전사이다. 용기 있으면서 온유하고 선한 사람이다. 다음에 나오는 남자에 대한 묘사도 성령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영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당신은 홀에서 여자들에 둘러싸여 음식을 먹었던 가장 온유한 남자였다. 당신은 모두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람으로 적에게는 가장 무서운 장수이자 가장 용감한 기사였다.”_‘아서왕의 죽음’(Le Morte D’Arthur)우리는 남자의 성품을 강인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나눌 때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 사회는 점차 부드러운 남자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강인한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우리는 히브리서가 말하는 남자를 특별한 인종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3-34).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적극적으로 찾는 남자. 자신보다 나라를 생각하는 믿음의 남자. 위험을 감수하고 많은 것을 잃을지라도 더 높은 가치를 얻기 위해 전진하는 남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살았던 남자.잊지 말자. 미지근한 종교는 미지근한 남성상을 만든다. 그리고 미지근한 남자는 너무 많은 사람이 교회를 지나쳐서 이슬람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또는 단순히 ESPN(미국 스포츠 방송-역주)을 지나 파괴의 길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죽어가는 남성의 불꽃경건한 남자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조차 나타나는 남성의 여성화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불편함을 느낄지가 궁금했다. 성경에서 나오는 오래전 남자의 모습을 버려야 할 것인가? 방황하는 아브라함, 씨름하는 야곱, 싸우는 여호수아, 이방의 선지자를 조롱하는 엘리야, 융통성 없는 다니엘, 거칠게 말하는 세례 요한, 주도적인 바울과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엎는 하나님의 아들을 잘 못 되었다고 꾸짖어야 하는가?우리는 경건이 주는 불편함보다 친절함이 주는 편리함을 선택한 것일까? “여기 아버지, 남편, 교회 가는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었던 한 남자가 잠들어있다”라는 비석 아래에 언젠가 내가 누워있지 않을까 두렵다. “나이스하다는 것”은 아픈 허리에 대해서, 거슬리는 것에 대해서, 용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에 의로움과 바른 것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 나이스하기 위해서 굳이 용기를 낼 필요도 없고, 특별한 신념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악한 자를 상대로 굳이 원수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냥 있으면 된다. 예수님은 적당하게 맞춰주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 경고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이제 우리는 길을 벗어난 것 같은 오류를 과도하게 바로잡으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노력은 오히려 또 다른 도랑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신의 힘으로 만족하며 남자다움을 느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거룩한 힘과 자기희생을 통해 더 나은 남자가 되어야 한다. 불길이 타오르는 남자회복을 위한 한 단계는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준 타협하지 않는 특징을 회복하는 것이다. 거룩한 질투심이다. 우리는 거룩한 남자의 행동만이 아니라 내면의 마음과 확신을 다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다(출 20:5). 그는 자신의 영광을 다른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다. 그는 그와 같은 거룩한 질투심으로 붙 타오르도록 남자를 창조했다. 이런 남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에 불타는 남자, 건강한 교회를 향한 열정에 불타는 남자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불타는 남자는 반드시 현재의 고착상태를 부수어 버릴 것이다. 문화적인 수용과 세속적인 민감함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은 성경이 말하는 남성다움을 연마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거룩한 질투심은 남자를 변하게 만든다. 이 세상을 향해, 육체의 정욕을 향해 그리고 사탄을 향해서 투쟁하게 한다.모세를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민 12:3). 그는 백성의 우상숭배에 분노해 십계명 돌판을 부쉈고, 황금송아지를 녹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마시도록 했다(출 32:20). 그의 백성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은 우상숭배에 대하여 단호하게 행동하도록 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블레셋 거인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무시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시를 쓰는 목자 다윗은 또 어떤가(삼상 17:26).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당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흑인”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졌던 아프리카인 비느하스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졌던 그는 심각한 죄를 짓고 있던 두 명을 창으로 꿰뚫어서 죽임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켰다(민 25:6-13).엘리야를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의 불신을 보며 그는 괴로워했다. 바알의 선지자들과 정면 대결을 요구했고, 우상에게 절하는 그들을 몇 시간에 걸쳐서 조롱했다(왕상 18:20-40).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오직 하나님만 따르는 것을 원했다.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은 어떤가?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대신 온 도시가 우상을 섬기는 모습에 자극을 받았고,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아테네의 위대한 철학자와 지도자들에게 도전했다(행 17:16). 그는 사람들이 놀리고 반대하고 때려도 오로지 하나님의 왕국 사역을 위해서 살았다. 왕의 모든 남자들예수님을 생각해보자. 그는 채찍을 들었고 거칠게 말했으며, 무기를 손에 들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품에 안고 함께 노는 유다의 사자이다(막 10:14). 또한 그의 분노를 만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산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헛된 소망을 할 정도로 무서운 어린 양이기도 하다(계 6:16).그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고후 10:5), 용의 대가리를 부수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사 42:3). 그는 갈보리로 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도둑과 쓰레기들과 함께 죽으려는 나이스한 마음으로 간 게 아니라 그의 신부, 그의 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그 자신의 영광을 향한 불타는 정열 때문에 갈보리로 갔다(요 17:4; 롬 3:25-26; 벧전 3:18). 스펄전 목사가 강단에서 한 마지막 말은 이런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예수]는 대장 중의 대장이다. 선택한 왕자 중에 그분과 같은 사람이 없었다.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에서 우리는 언제나 그를 발견할 수 있다. 바람이 부는 언덕의 가장 황량한 쪽에서 우리는 그를 찾을 수 있다. 십자가의 가장 무거운 끝은 그의 어깨에 있다. 그가 우리에게 짐을 지라고 명령할 때 자신도 함께 짐을 진다. 자애롭고 관대하며 친절하고 부드러우며 사랑에 화려하고 풍성한 것이 있다면, 그건 항상 그에게서 찾을 수 있다"('스펄전: 설교의 황태자')"왕의 남자는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발견될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모험도 하지 않음으로, 어떤 것에도 열정을 키우지 않음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 누구의 편을 들지 않음으로, 믿음의 요새를 세우지 않음으로, 어떤 영적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음으로, 짐을 지지 않음으로, 정복하지 않은 언덕 위에 깃발을 꽂지 않음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살지 않을 것이다. 왕의 남자는 악의 세력에 맞서 거품 칼을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치열한 전투를 통해 여성과 아이들에게 가장 안전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하나님 안에서 위험한 남자는 주위를 향한 책임을 지고, 내가 보호하고 양육해야 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질 때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곰이 공격할지라도 가만히 서 있지 않을 것이다. 온유하지만 치열하다. 거칠지만 부드럽다. 리더지만 섬긴다.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다.바로 예수님과 같은 남자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Not Safe, But Good: The Men We Desperately Need Today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성령의열매
남성의불꽃
거룩한힘
자기희생
스펄전
예수님같은남자
거룩한질투심
처음
이전
151
페이지
152
페이지
열린
153
페이지
154
페이지
15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