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우리 가정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자
by Jani Ortlund
2019-12-20
“혹시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때만 하는 특별한 일이 있나요?” 며칠 전 이웃과 저녁 식사를 할 때 그 집 아이가 물었다. 이 시즌에 나올 법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절기보다도 크리스마스를 더 손꼽아 기다린다. 그날을 둘러싼 신비로운 옛이야기에 경외심을 품기도 하고, 그 이야기에 담긴 영원한 메시지를 묵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시즌의 의미가 더 풍성해지기를 소망한다. 또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온전히 기념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결혼 후 맞이한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생각난다. 그때는 유난히 마음이 심란했다. 그날 나는 남편과 함께 있었는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이전처럼 가족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해의 크리스마스가 출산 예정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집에만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나 장식을 하며 집을 꾸미지도 못했다. 심지어 오 헨리(O. Henry)의 ‘크리스마스 선물’(The Gift of the Magi)에 나오는 짐과 델라 부부처럼 서로에게 작은 선물을 해 주지도 못했다.하지만 그날은 어쨌든 크리스마스였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러니 일 년 중 가장 행복하고 믿음도 충만해져야 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경이감을 회복하고 우리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어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다른 이들을 돌아보는 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두자고 다짐하게 되었다.사도 바울은 서로가 함께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분명히 밝혔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5).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진보와 기쁨”은 우리가 매해 만들어 온 크리스마스 전통의 목적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묻는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무엇을 하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되겠는지, 또 무엇을 하면 그분 안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겠는지를 말이다.크리스마스 장식과 이야기, 그리고 함께 나누는 식사우리 집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은 추수감사절 다음 날부터 시작된다. 부엌에서는 칠면조 수프가 끓고, 거실에서는 캐럴이 들리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연출된다. 추수감사절 때 사용된 호박과 곡물 바구니는 사라지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소품과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녹색으로 집이 꾸며진다. 그리고 성탄의 느낌이 물씬 풍기도록 커다란 달력을 벽에 걸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우리는 서랍과 옷장을 열어 온갖 장식품을 꺼낸다. 오래 보관된 물건을 싸 놓은 포장을 벗겨 내며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기도 한다. 힘들었던 결혼 첫해의 크리스마스 때부터 쓰던 도구들도 나온다. 40년이나 된 쿠키커터도 보인다. 거기에는 알록달록한 리본이 붙어 있다. 과거에 남편은 크리스마스트리 판매상을 찾아가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싼값에 사 온 적이 있다. 당시 우리는 트리를 장식할 만한 조명이 없었지만, 펠트 조각이나 손수 만든 장신구를 매달아 트리를 돋보이게 했다. 이와 같이 전통은 작게 출발하여 해가 거듭될수록 그 아름다움과 의미를 더해 가며 성장할 수 있다. 마치 우리의 믿음과도 같다.우리 가정의 크리스마스 전통은 추수감사절부터 새해 전야까지 다양한 캐럴과 이야기를 즐기는 특색이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크리스마스용 화환이나 그림 성경책을 사용하여 아이들이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다른 크리스마스 책들도 구해 시즌만 되면 읽어 주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살펴보는 당신에게도 권하고 싶다. 2천 년이 지난 그 오랜 이야기를 진실하게 들려주는 책, 그러면서도 매번 성탄의 느낌을 신선하게 전달해 주는 책을 해마다 한 권씩 장만해 보기를 말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만 펼쳐보는 아름다운 책들로 작은 서재를 꾸미고 저녁 시간이나, 거실에 함께 모였을 때, 그 이야기를 나누며 성탄의 기쁨을 누려 보기를 권한다.만일 당신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어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크리스마스 당일에만 즐기는 음식을 준비해 볼 것을 추천한다. 당신이 어려서부터 즐겨 먹던 음식을 마련해도 좋겠다. 그런 음식이 없다면 현재 당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선정해도 괜찮다. 나의 경우는 매년 어머니가 구워 주시던 다섯 가지 모양의 쿠키를 만든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남편의 고향 음식을 기념하기 위해 스웨덴식 뷔페를 즐긴다. 거기에 과일 수프나 쌀로 만든 푸딩을 곁들인다. 이렇게 전통 음식을 먹을 때 믿음의 대화도 함께 나눈다. 음식만이 아니라 믿음도 양가의 가족을 통해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의 경우, 부모님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신 후부터 믿음의 꽃이 활짝 피게 되었다.선물을 나누는 크리스마스 전통크리스마스이브에 교회 행사를 마치고 돌아와 밤늦게 ‘멋진 인생’(It’s Wonderful Life)이나 ‘스크루지’(Scrooge) 같은 영화까지 보고 나면, 우리는 아이들을 재우고 조용히 선물을 꺼내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으면 계단 위에 막내부터 첫째까지 차례로 줄을 세우고 마지막 꼬리에는 내가 섰다. 남편은 앞사람의 눈을 손으로 가리라고 말한 다음, 우리 모두를 계단 아래 크리스마스트리로 인도했다. 거기서 하나, 둘, 셋을 세고 각자의 손을 거두게 하면 네 명의 아이들은 흥분과 호기심, 기쁨을 이기지 못해 껑충껑충 뛰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양말을 열어 선물을 확인하고는 아침을 나누었다. 그 후에는 아이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해가 지나며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는 행동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선물을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기쁨이 넘치는 경험은 하늘이 내리는 축복임을 알려 주었다. 우리가 선물을 주는 이유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남편과 나는 매년 서로에게 묻는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나눔으로써 그 ‘부요함’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베풀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 기쁨을 누리며 함께 웃을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 때로는 우리가 저축해 놓은 돈에서 선물 비용을 마련하기도 하고, 창의력을 발휘하여 그 예산을 절감하기도 한다. 해외에 있는 학생들에게 성경책을 보내기도 하고, 빈곤 가족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돈을 대신 내주는가 하면, 때로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필요한 사역에 참여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우리의 형편이 어렵고 가난하게 살았을 때, 어떤 사람이 크리스마스 당일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문 앞에 놓고 간 적이 있다. 자기 가정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따라 선물로 놓고 간다는 쪽지만 붙어 있었다. 그날 우리는 백만장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일을 크리스마스 전통으로 삼게 되었다.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또 다른 전통은 한 해 동안 우리가 경험한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노트에 기록하는 일이다. 우리는 매번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 가족만이 아니라 집으로 초대한 친구들에게 이 소중한 노트에 자신의 생각을 한 마디씩 기록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무엇이 감사했는지를 적고, 또 다른 이들은 기분 좋았던 추억이나 선물에 대해 기록한다. 어린아이들은 그림을 그려 놓기도 한다. 그리고 상황이 허락되면 작은 스냅 사진을 찍어 거기에 붙여 놓는다. 이 노트는 우리가 경험한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기록물인 셈이다. 매년 우리는 그 노트를 펼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떠올리며 기뻐하기도 하고, 또 다가오는 새해에는 어떤 일을 행하실지 기대하기도 한다.이처럼 당신도 소중한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어가며 즐거워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이 시즌을 기념하다 보면, 어느덧 당신의 크리스마스도 그동안 이루어진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드러내고, 나누는 날이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mas Traditions: For Progress and Joy in the Faith번역: 장성우
가족
전통
나눔
선물
은혜
믿음
진보
기쁨
성탄에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by 이승구
2019-12-19
성육신에 대해서 가르칠 때 제일 먼저 우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모든 사실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과 독특성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어린 학생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성육신이 다른 역사적 사실들과 같이 일어난 것으로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에게 수태된 것의 역사성, 그 뒤 다른 아이들과 같이 어머니 자궁 속에서 10개월 동안 자라나신 일의 자연스러움, 그리고 베들레헴에서의 출산 등을 모두 역사적인 사실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이 때 이와 함께 잘못된 정보가 같이 전달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매우 애를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부모님과 교사들이 가르친 것 가운데 잘못된 요소가 있는 것을 알고 제대로 가르친 것까지를 의문시하도록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위 “경건한 허구”를 섞어 가르치게 되면 후에 의심이 몰려 올 때 모든 것이 거부되기 쉽기 때문이다.이 때 유의해야 할 대표적인 것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예수님께서 언제 탄생하셨는지 우리는 정확한 연대를 모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수님께 탄생하신 것을 중심으로 온 세상의 연대를 새롭게 기록해 보려던 소 스키디아(Scythia Minor) 출신의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로마에서 525년에 시작한 계산법에 착오가 부가되어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난 연도를 BC 4년을 생각하지만, BC 6년, BC 7년, BC 12년이나 심지어 18년까지를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출생하신 정확한 연대도 모른다. 성경은 대강의 기간을 제시하고 있지 정확한 연대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2) 더구나 우리는 주께서 어느 날 탄생하셨는지 모른다. 초기 기독교 역사가 아프리카누스(Sextus Julius Africanus, c. 180-c. 250)에 의해서 221년에 처음으로 (부정확하게) 예수 탄생 기념일로 언급된 12월 25일은 로마 교회에서 이교 시절에 로마인들이 “패할 수 없는 태양의 탄생일”(Dies Natalis Solis Invicti, the birthday of the undefeated sun)이라고 부르며 기념하던 태양신 축제(solar festival)를 대신하여 “의의 태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그렇게 정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 온 것의 연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 어린 아이들에게라도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생일인 것과 같은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3) 또한 마리아에게 수태 고지를 한 천사 가브리엘(눅 1:26-38)과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한 ‘주의 사자’(눅 2:9), 그리고 그 후에 그 천사와 같이 있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찬양한 수많은 천군들은(눅 2:13-14) 결국 여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며, 가브리엘의 이름이나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남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을 것임이 확실하다는 것과 특히 조각을 할 때나 이상(vision) 중에 나타난 경우가 아니라 천사가 직접 나타난 경우에는 천사가 날개를 달고 나타난 적이 없었다는 것에 유의해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칼빈은 왜 천사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성경이 묘사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답하면서 이것은 우리의 이해력 정도에 맞추어 표현하면서 신속히 도울 수 있도록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잘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건전한 해석들에 근거한 사유를 하고 그런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4) 또한 천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한 선언을 듣고서 목자들이 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눅 2:15-20)과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서 계신 집으로 찾아와 예물 드린 사건(마 2:1-12)은 시간적 거리를 지닌 사건임을 분명히 각인시켜 주어야 한다. 또한 동방 박사가 몇 명이 온 것인지를 성경이 명확히 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 숫자를 셋으로 강조하여 말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6세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서방에서는 8세기에 상당 보편적으로 그들에게 부가된 이름인 카스파르(Caspar), 멜키오르(Melchior), 발타자르(Barthasar) 등의 이름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가르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이렇게 어릴 때부터 성육신과 관련된 명확한 사실성을 분명히 하면서 가르치다가 초등부 고학년부터는 그 시기나 앞으로 다가오는 역사적 회의주의를 극복시킬 수 있는 교육을 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중고등부 시절, 그리고 대학 시절에 올려 올 수 있는 회의를 미리 극복하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예방주사를 놓으며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런 회의적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한 발자국 앞서 가면서 그 역사성과 독특성을 미리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목회
설교와교육
성육신
성탄
마리아
가브리엘
역사성
독특성
일이 문제일까, 내가 문제일까
by Teena Dare
2019-12-18
“계속해야 할까 떠나야 할까? 내게 맞지 않는 일을 택한 아닐까? 아니면 나란 사람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불평꾼에 지나지 않는 걸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건 당신의 고민이자 또 내 고민이다. 오늘, 다섯 번째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문득 예전에 하던 일이 떠올랐다. 남의 손에 들려 있는 떡이 커 보이는 법이다. 불만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다. 내가 지금 왜 불만인지조차 모를 때도 있다. 불만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불만의 원인이 각양각생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불만이 항상 나쁜 것만도 아니기에 그렇기도 하다. 성경을 여는 첫 장면에서 우리는 이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푸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창조주가 주신 불만태초에 하나님은 세상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모든 것을 신중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지으신 세상을 보시고 좋아하셨다. 하나님의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를 지으셔서 세상을 돌보고 가꾸고 누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시원한 시간에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니시며, 두 사람이 당신이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운 면면을 찾아내고, 또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 보는 걸 보시며 미소 지으셨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데 만족하는 존재로 지음 받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혜와 규칙에 따라 세상을 가꾸어 나가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일그러진 불만그런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권위를 거역한 결과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다. 서로 보듬어 주지 못하고, 서로를 탓했다. 그들이 누렸던 창조 세계가 조화를 잃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 이제 고생하며 일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인생은 고뇌의 연속이요, 그 끝에서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과 내가 느끼는 일그러진 불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아는 현실은 이렇게 망가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 구속적 불만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세계가 죽음과 부패에 빠져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창조세계를 죄의 손아귀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우리는 상상도 못할 일을 하셨다. 당신이 직접 사람이 몸을 가지시고 조롱과 고문을 받으시고 맨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셨다.구속적 불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을 일깨우는 불만이요 우리로 하여금 오실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게 하는 불만이다. 우리의 일은 허리춤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고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발을 씻겨 줌으로써 이 구속의 이야기에 들어가는 기회이다. 창조세계를 가꾸어 가는 만족그러면 우리 불만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가꾸어 나가고자 하는 불만인가? 자신의 안위와 현실에 집착하는 불만인가? 망가진 세상에서 좌절하여 생긴 불만인가? 흐트러진 창조세계를 다시 잘 짜 맞추고 싶은 마음에서 생긴 불만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다음은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실천 방법들이다. 1. 당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시 서술하라.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네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하라.” “네 열정을 추구하라.” “네 꿈을 좇으라.” 주어진 일이 행복하지 않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변화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행복의 원천이 있다. 부와 명예, 지위, 권력, 또는 우리가 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성취감과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일반적인 관념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온통 ‘우리’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이야기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 당신을 이 이야기에 맞추라. 성경 말씀에 시간을 쏟아라. 말씀을 읽고 외우고, 말씀대로 기도하고, 말씀을 노래하고, 말씀을 서로 이야기하고, 일상의 세세한 부분들에서 말씀을 적용하라. 일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시시때때로 점검하여 하나님의 계획에 다시 맞추어야 한다. 로마서 12:2에서 바울은 우리를 이렇게 상기시킨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2. 하나님은 당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이 이야기에 비추어 어떻게 여기실지 생각하라.다음 질문들을 가이드로 활용하라. •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당신의 동료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 당신의 일은 상처와 실패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와 유익을 주는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제공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3. 잘 섬기고, 잘 쉬라.교회나 공동체, 현재의 직업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세워 두신 계획에 맞는 일이 어떤 것인지 찾아 나가라. 예수님이 당신에게 사랑을 넘치게 베풀어 주셨듯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라. 그리고 의도적으로 쉬도록 하라. 우리는 때로 일을 하면서 불만을 품는데, 이는 우리가 일이 우리에게 기쁨과 성공과 정체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상에 빠진 것을 회개하고, 잠시 멈추어 쉬면서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묵상함으로써 그 우상을 물리쳐라. 4. 조언을 구하라.당신을 좋아하고 잘 아는 경건한 사람에게 당신의 재능과 은사, 고민과 두려움에 대한 조언을 구하라. 공동체와 떨어져 있으면 자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가 적다. 가능하면 연장자이고 현명한 상담자와 이야기하며 자신에 대한 진지한 조언을 구하라. 막히고 답답한 삶의 큰 돌파구가 될 것이다. 현재 하는 일을 그냥 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주는 등 적어도 한 번쯤은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행동해 볼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라.5. 적극적으로 기다리라.구직 정보를 계속 찾아보거나 이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을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잠잠히, 느긋하게 이렇게 하라. 가장 좋은 때 하나님이 다른 일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 그동안 당신은 현재 있는 곳에서 마음을 다해―신실한 만족과 불만 둘 다 품고서, 하나님을 섬기면 된다.원제: Is My Job the Problem? Or Am I Just Discont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생활
직업
이직
욕망
창조
고민
기도
인도
구속
사랑
츠빙글리에 대한 특종 아홉 가지
by Joe Carter
2019-12-17
2019년은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스위스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시점을 밝히는 데 있어서 루터가 95개 논제를 게시한 1517년 10월 31일 못지않게 1519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그처럼 커다란 영향을 끼친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에 관해 당신이 알아야 할 아홉 가지 사실이 있다.1. 츠빙글리는 존 칼빈(John Calvin)이 등장하기 전까지 스위스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종교개혁자다. 그가 스위스에서 일으킨 신앙의 혁명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독일에서 일으킨 운동에 비견할 만한 의미를 지닌다. 츠빙글리 자신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이 지역에서 누구도 루터를 알지 못했던 1516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중략] 그때는 나도 루터의 이름을 들어 보기 전이었다. 그 이후로도 최소한 2년 동안은 그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으니, 나는 분명 루터의 가르침에 따라 설교한 게 아니다. 오직 성경을 따라 설교했을 뿐이다.”2. 츠빙글리는 오늘날 스위스 동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1484년 1월 1일에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그는 1504년 빈대학교(University of Vienna)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1506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는 로마가톨릭의 사제직을 수여 받아 글라루스에 있던 그의 모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헬라어를 독학하며 원문으로 된 신약성경의 긴 본문들을 암송해 나갔다.3. ‘크리스천히스토리’(Christian History) 매거진에 의하면, 사제들조차 성경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대에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Erasmus)의 라틴어역 신약성경을 구입했다. 그 이후로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었다. 스티븐 로손(Steven Lawson)은 루터가 선포한 메시지와 동일한 메시지를 츠빙글리가 먼저 설교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츠빙글리는 1523년에 ‘67개 논제’(Sixty-seven Theses)를 기록했는데, 거기서 그는 금식 강요, 성직자의 독신, 연옥과 미사, 사제에 의한 중보 등 중세 교회의 온갖 미신을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제였음에도 안나 라인하르트(Anna Reinhard)라는 과부와 결혼했다. 이때는 루터가 수녀 출신인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결혼하기 일 년 전이다. 로손에 의하면, 이 모든 일은 츠빙글리가 루터에 대해 알기 전에 일어났다.4. 종교개혁의 가장 큰 특징은 성경적인 설교를 회복한 데 있다. 이에 대해 츠빙글리는 크게 기여를 했는데, 바로 성경의 각 권을 설교하는 혁명적인 접근을 선보였던 것이다. 1519년에 마태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렉시오 콘티누아’(lectio continua)라고 알려진 방법을 적용했다. 마태복음 이후로는 사도행전, 디모데전후서, 갈라디아서,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 요한복음, 바울 서신에 대한 강해설교를 진행했고, 그 다음에는 구약성경으로 가서 시편과 오경, 역사서에 관한 설교를 이어갔다.5. 츠빙글리는 루터보다 두 달 늦게 태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점도 많았지만, 개신교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츠빙글리는 루터에 대해 “로마의 수퇘지를 멸절시킨 헤라클레스”라고 격찬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대야말로 이 싸움을 위해 주님이 기름 부으신 진짜 다윗과 같다. 하늘의 군장으로 무장한 참된 용사로다.” 그러나 루터는 츠빙글리를 높게 평가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에 대해 “마귀에 속한” 자라고 여기며 “벌레가 파먹은 열매”와 같다고 비난했다. 이런 두 사람의 견해 차이를 좁히기 위해 1529년에 마르부르크 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두 개혁자는 15개의 신앙 조항 가운데 14개에 대해서는 동의하게 되었지만, 성찬에 관해서는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이때는 츠빙글리도 루터가 자신을 “당나귀 같이” 취급한다며 격분했다. 두 사람은 화해에 이르지 못했다.6. 숀 마이클 루카스(Sean Michael Lucas)가 언급했듯이, “루터파와 개혁파 진영을 갈라놓은 가장 중요한 차이는 성찬에 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서로 갈라지게 된 원인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루터와 츠빙글리가 각각 달리 해석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찬에는 예수님의 몸이 실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츠빙글리의 견해는 그와 달랐다. 루카스의 설명을 빌리면, 츠빙글리는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고 믿었다. 교회가 떡과 잔을 나눌 때, 교회가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구현되는 신비로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 변화는 떡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일어난다는 게 츠빙글리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이것은 내 몸이니라’에서의 ‘이니라’에 해당하는 술어는, 교회가 떡을 받을 때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었다.” 트레빈 왁스(Trevin Wax)는 이렇게 부연한다.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가 성찬에 관하여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한 결과, 지난 5백 년간 개신교의 정치와 신앙에는 균열의 여파가 지속되어 왔다.”7. 츠빙글리는 성경의 가르침이 인생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고 확신하며, 복음은 개인적 구원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문화의 모든 요소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혁 운동도 시민이 참여하는 행정 기관을 통해 진전되기를 바랐다. 리곤 던컨(Ligon Duncan)이 말했듯이, “츠빙글리는 카이퍼와 같이 일종의 변혁주의자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했다. 즉 개인이나 교회의 생활뿐 아니라 만사에 미치는 그분의 통치를 확신했다. 그래서 복음의 진전을 위해 정치, 경제, 군사, 동맹 문제 등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8. 1531년 취리히에서는 로마가톨릭 관할에 있는 스위스 지역에서 개혁파 설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 위해 가톨릭교회에 압력을 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가톨릭교회가 반발하며 카펠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한다. 츠빙글리의 사위이자 목회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츠빙글리가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록했다. 어느 사제가 베푼 마지막 종교 의식을 츠빙글리가 거절하자 적군의 대장이 “칼을 뽑아서 츠빙글리를 그 자리에서 찔러 죽였다.” 이때 적군은 츠빙글리의 머리를 베고 몸을 난도질했다. 그의 유골이 유물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시체를 태우고 돼지 창자와 섞어 놓기까지 했다. 이후 루터는 ‘탁상담화’(Tabletalk)에서 츠빙글리가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나는 츠빙글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염려스럽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자신을 부인하면 저주를 받게 되리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9. 츠빙글리의 신학은 가끔씩 ‘츠빙글리주의’라고 불리는데, 주로 스위스 내에서 그 세력을 형성했다. 개신교 종교개혁을 일으킨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음에도, 츠빙글리는 루터나 칼빈, 불링거에 비해 가려져 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견해라든가 성구집이 아닌 성경을 그대로 설교한 그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많은 교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존 페인(John B. Payne)은 이렇게 말한다. “츠빙글리는 개혁주의 전통의 선구자였다. 그 전통은 스위스와 독일 남부를 넘어 프랑스 위그노들과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에 걸쳐 있는 회중주의자들, 장로교인들, 그리고 대서양 건너 뉴잉글랜드에 있던 회중주의자들과 중부 식민지의 장로교회와 화란과 독일 개혁교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경로를 통해 확장되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Ulrich Zwingli번역: 장성우
역사
종교개혁
츠빙글리
루터
카펠
카톨릭교회
존칼빈
광야에 있다고 느낄 때
by Gavin Ortlund
2019-12-16
성경에서 ‘성공적인 목회 사역’의 모델을 꼽으라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엘리야보다 더 역동적인 일을 겪은 사람은 없어 보인다. 엘리야는 혼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하였다. 우상 숭배에 빠져 있던 백성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들의 신앙을 돌이키도록 했다. 3년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가뭄도 끝나게 했다. 멋지지 않은가!우리는 엘리야의 갈멜산 사건을 기억하지만, 그가 갈멜산에 오르기까지 경험했던 것은 곧잘 잊어버리곤 한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그는 광야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광야의 훈련 기간을 보낸 후에 엘리야는 갈멜산에 섰다. 우리는 엘리야와 같이 능력의 사역자가 되기를 원한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사용하여 목회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 사역에는 17장과 같은 준비 기간이 있다. 그 시간은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리며 마실 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현실에 대한 어려움이 끝날 때까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질문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시간의 연속일 것이다. 광야 기간은 잔인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7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광야의 기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홀로 외로이열왕기상 17장 1-6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이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한 것에 대한 심판으로 온 땅에 가뭄이 들게 하신다. 그리고 엘리야를 광야로 보내어 까마귀가 그를 먹이도록 하신다. “내 말이 없으면”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왕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던 사람이(1절) 광야에 숨어 지내며 까마귀가 가져오는 음식을 먹고 시냇물을 마셔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2-5절). 하늘의 구름을 다스릴 만한 권세가 있던 사람이 시냇물을 마시기 위해 땅에 몸을 구부려야 했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당장 마실 것을 걱정해야 하는 비참한 상태가 된 것이다.시간이 지나면서, 더 힘든 것은 참담한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 2:18)라고 했는데, 엘리야는 오랫동안 홀로 외로이 있었다. 나는 그가 바위 위에 앉아 있거나 동굴 안에 숨어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그는 외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추측해 보건대, 그릿 시냇가에 신문이 배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으로 본다면,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해서 주위에 아무도 없거나 혹은 SNS에 올린 당신의 이야기에 아무도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다.외로움을 극복한다고 해도 이 기간은 무척이나 지루했을 것이다. 엘리야는 두려워하지 않고 왕에게 도전할 만큼 강하고 용기 있는 선지자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자신의 먹을 것을 위해서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시냇가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날마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대면해야 했다. 여러 날을 보내면서 주변의 나무들과 모래가 어떤 모습인지 기억할 정도였다. 매 끼니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같은 음식(빵과 고기)을 먹었다. 말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이 시련이 끝날 무렵, 그의 모습은 아마도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에서 흰머리, 덤불 같은 수염, 갈라진 피부, 거친 눈매의 톰 행크스와 비슷했을 것 같다. 그리고 시내가 말라버린 어느 날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른 곳으로 보내셨다. 거기에는 광야 경험에 대한 출판 계약도 없고 순회강연의 기회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머물며 또다시 기다리고 숨어지내는 시간을 보내게 했다(왕상 17:7-24). 그의 목회 사역은 사회적으로 약자인 이방인 과부와 그의 아들뿐이다. 과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밀가루 한 줌과 병에 남아 있는 기름 조금이 전부이다. 엘리야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계속 믿어야 했다.보호, 공급, 준비광야 기간에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며 가장 강력하게 일하고 계신다는 소망이다. 열왕기상 17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엘리야의 삶에서 일하고 계셨다. 보호하시고 공급하시며 준비시키셨다.아합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첩자를 보냈기 때문에(왕상 18:10)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고 계셨다. 가뭄 동안 그가 안전하게 있을 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광야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시냇가에 있는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어 먹이셨고,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을 계속 공급하심으로 먹이셨다. 까마귀는 매일 왔고, 밀가루와 기름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단조로운 방식이지만 기적 같은 공급이었다.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살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보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준비시키고 계셨다. 엘리야가 18장에서 바알의 모든 거짓 선지자들을 대항하는 믿음과 용기를 어디서 얻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동안, 곤란 중에서 신실하게 돌보심을 경험하면서 그의 믿음은 다이아몬드처럼 확고하고 단호해졌을 것이다.우리가 광야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공급하시며 준비시키시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한다. “내가 이토록 황량한 곳에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을 수 있겠는가?”라며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기억하라! 그분은 최악의 광야를 겪으셨다. 십자가의 비참한 고통을 겪으셨다. 그것이 죄인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마음이기에 우리도 그분을 믿으며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광야에 있더라도 말이다.하나님 중심 사역열왕기상 17장은 우리가 목회를 수행하고 평가할 때, 우리의 관점과 행위 면에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나아가도록 촉구한다. 결국 ‘목회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신실함이라고 정의된다. 그 부르심이 열왕기상 18장에서처럼 능력을 발휘하는 일일 수도 있고, 열왕기상 17장처럼 끝까지 인내해야 하는 광야로의 부르심 일 수도 있다.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열매가 맺히기를 원한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마 9:37)라고 긴급함을 느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아신다. 만일 엘리야가 까마귀를 기다리는 것이 열매를 충분히 맺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떠나버렸다면 어땠을까? 그는 갈멜산의 놀라운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생존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별 볼 일 없는 상황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신실하게 수행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기로 부르셨다면, 광야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별 볼 일 없이 느껴지겠지만 매 순간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사역의 마지막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사역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맛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실제로 생명의 길이다.하나님께서 광야의 시기로 부르시면 두려워하지 말라. 황량하고 질식할 것 같은 곳에 있다고 느끼는가? 겨우겨우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여겨지는가? 엘리야를 돌보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보호하고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까마귀를 찾아보라.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라. 그리고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펼쳐질 것들을 준비시키는 시간으로 사용하고 계심을 인정하라. 만일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 없다면, 앞으로 당신에게 주어질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You’re Waiting in the Wilderness번역: 정은심
영성
신앙과소명
광야
엘리야
외로움
소망
부르심
인내
신실함
예수님은 왜 성령이 필요하셨을까?
by Mark Jones
2019-12-14
흔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러 기적을 행하셨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 맞다. 그런데 그분의 신성이 인성을 통해 늘 역사하여 기적을 행하도록 만들었다면,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그분의 생애에서 성령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정말 예수님의 신성만이 유일하게 그 인성에 작용하는 역할을 했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예수님은 성령이 필요하셨을까?’ 많은 기독교인들은 (때로는 뛰어한 신학자들조차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있어 성령이 무슨 역할을 하셨는지를 확실히 모를 때가 있다.성령을 따라 사역하신 예수님예를 들어 로마가톨릭이나 루터파 신학자들의 경우, 각자의 전통에서 내세우는 기독론을 고수하는 한 성령의 의미심장한 역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로마가톨릭과 루터파 신학자들은 (가령 믿음이나 소망과 같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사나 은혜를 성령과 어떻게 연관지어 설명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이와 달리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논증하며 통찰력 있는 성령론을 발전시켰다. 내가 아는 한, 오웬 이전에 그처럼 선명하게 그 관계를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온전하게 통합된 상태에 있음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오웬은 성자의 신성이 아무런 매개 없이 인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일은 단 한 번으로서, 오직 성육신을 통해 인성이 실재하도록 결정하는 일을 할 때만 그러했다고 주장했다.그에 따르면,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모든 활동의 주체는 성령이 되신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적 권능이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권능을 베푸셨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시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위격적 연합’(the hypostatic union)에 의해 ‘직접적으로’(immediately) 활동하는 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 ‘매개적으로’(mediately) 활동하기 때문이다(여기서 위격적 연합이란,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이 함께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오웬의 접근과 달리, 그리스도의 기적에 관해 통상적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그분 자신의 신성에 의해 기적이 행해졌다는 주장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오웬과 다른 개혁신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성령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직접적인 주체가 되신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성령의 관계를 이해할 때만,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와 관련된 성경 본문을 읽을 때 마주하는 수많은 물음들에 답변할 수 있게 된다.인간의 영혼을 지니신 예수님기독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분의 영혼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은 순수한 의도에서 나왔을지는 몰라도 잘못된 추측이다. 예수님은 여느 인간과 같이 이성적인 영혼을 지닌 순전한 사람으로 성육신하셨다. 자신의 도덕적 행동에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영혼을 지니셨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의식을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성자의 위격이 곧 그리스도의 자의식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자들이 설명한 바와 같이, 위격이란 한 존재의 양식 내지 정체성이지 영혼의 활동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그분의 위격을 가리키는 물음이며, 이에 우리는 (그분의 정체성을 가리키기 위해) ‘예수님은 신인(the God-man)이시다’라고 답변한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분의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그 신성에 묻혀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성령을 필요로 했다. 또한 하나님께 올려진 그분의 기도도 단순히 사람의 기도이거나 심지어는 신인으로서 성부께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바로 성령의 권능 가운데 성부께 드려지는 성자의 기도였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입을 열어 간구한 어떤 기도도 그분의 인성에 강력하게 역사하신 성령의 도움 없이 드려진 기도는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도 주님의 간구와 같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이렇듯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그분과 동행하신 분은 성령이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일어난 모든 주요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신 분도 성령이셨다. 이를테면 성육신을 일으킨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원인 자체도 성령께 있었다(마 1:18, 20; 눅 1:35).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처럼 성령에 의해 시작된 사실은, 메시아가 성령을 받게 될 사람이라고 말했던 이사야의 예언과도 잘 들어맞는다(사 42:1; 61:1).실제로 신약성경은 이사야의 증언을 여러 군데서 확증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에 대해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라고 언급한다(요 3:34). 또한 세례 시에는 성령이 그분 위에 내려오셨다고 묘사한다(마 3:16). 그리고 광야의 시험 전후로도 성령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인도하고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하셨다고 설명한다(눅 4:1, 14).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시작하는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으시며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다(눅 4:21). 그래서 그 선언대로 성령의 권능을 따라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마 12:18; 행 10:38).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영혼이 지닌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치셨다(히 9:14).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처럼, 그분의 부활 역시도 성령에 의해 일어났다(롬 8:11). 그 결과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롬 1:4; 참고 딤전 3:16; 벧전 3:18).이처럼 성령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 동안 계속해서 동행하셨다. 따라서 그분이 성부께 기도하실 때도 성령의 능력을 따라 간구하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로마서 8장 26-27절 본문도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를 언급하는 수많은 성경 본문은 개혁신학의 해석 전통을 따를 때 가장 잘 설명된다.연약한 사람이 되신 예수님지금까지 설명한 기독론을 전제했던 휴 마틴(Hugh Martin)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약하고 힘없는 상태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 의존성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간구를 담고 있는 그분의 기도 속에 잘 드러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그분이 여자의 몸을 통해 율법 아래에서 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갈 4:4). 율법 아래에서 나셨다는 말은, 다른 규례나 의무와 마찬가지로 기도해야 할 책임 역시 그분에게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도의 율법은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늘로부터 응답받지 않고는 그 무엇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조건을 가리켰기 때문이다(겔 36:37).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인성에서 나오는 믿음, 사랑, 존경, 기쁨을 하나님께 기도로 표현하셨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는 하늘의 모든 은혜를 성령의 권능을 따라 체험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간구와 소원을 늘 아뢰기 원하셨고, 또한 자신이 신뢰하는 그 아버지를 언제나 찬양하고자 하셨다. 나아가 거룩한 결정을 내리실 때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과의 교제를 다른 어떤 의무보다 우선하는 최고의 본분으로 여기셨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 속에서 그분의 참된 인성이 구현되었다.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예수님그렇다면 이 모든 내용이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세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에 대한 사역을 지속하신다는 사실이다(행 2:33).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사역을 이제는 천상에서 적용하는 일을 하시는데, 이 일을 다름 아닌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심으로써 행하신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후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역할을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그분의 이름을 지닌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활동하신다(롬 8:9).둘째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이끄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은 그리스도 자신의 의로운 생명을 우리 안에 두셔서 그분의 정서와 갈망을 갖게 만드신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인도하신다(롬 8:29).셋째는, 성령이 우리의 인생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 생애를 통해 역사하신 성령이 이제는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 다시 말해 성령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듯이, 지금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그 아들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결국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성부와 성자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다.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그 사실을 떼 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성령을 이제는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루셨다(요 14:18).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y Jesus Needed the Holy Spirit번역: 장성우
복음
예수그리스도
성령
사역
영혼
사람
필요
성육신
존오웬
기독론
교회 개척에 필요한 진짜 목회자
by Matt McCullough
2019-12-13
교회 개척자로서 처음 평가받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사업가 유형이라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그렇게 질문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눈썹을 추켜올리며 “당신은 스스로를 사업가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 그 당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하고 있는 학위 과정 외에 다른 일을 시작해 본 것이 없었다. 큰 대학교에서 몇 과목을 맡아 가르치고 있었을 뿐이다.나는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으며, 내가 선택한 영역에서 가르치는 일로 매우 행복해하고 있었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학생들을 가르치기만 했다. 전형적인 교회 개척자가 어떤 모습이든지 나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내 직업적인 배경을 고려할 때 “당신은 스스로를 사업가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의 의미가 이해되었다. 질문을 한 사람들은 교회 개척에 필요한 것은 목회적 상황에 필요한 자질이 아니라 사업가적 기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 생각은 적절한가? 교회 개척자가 사업가이어야 하는가?다소 도움이 되는 용어그 질문에 대한 답은 ‘사업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달려있다. 옥스퍼드 사전은 사업가를 “이윤을 얻을 목적으로 재정적 위험을 감수하며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는 사업가를 “제한된 자원을 넘어 기회”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본다.이 정의들은 사업적 상황에 기초한 것이어서 지역 교회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교회 개척과 사업 활동을 왜 사업과 연계시키는지 알 수는 있게 한다. 교회 개척자는 처음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중요한 기회라고 여기는 곳에서, 기존의 교회들 사이에 있는 어떤 틈을 보고 개척한다. 제한된 자원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교회 개척자로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내가 잘하는 것만 하고 다른 것은 전문가들이 처리하는 식으로 일할 수 없다. 부분적으로 맡은 역할만 하면 나머지는 시스템에 의하여 착착 진행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계획을 세우고,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하며, 목표에 이르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어야 한다. 계속되는 상황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해야 하며, 매일 일어나는 사소한 과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여전히 불충분한 용어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나는 사업가적인 자질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교회를 개척하여 지금까지 잘 인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나 혼자서 이 모든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목회자는 주변에 좋은 협력자들이 있어야 한다. 많은 수의 장로들은 좋은 협력자이다. 나 자신의 경험과 직관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동역자들이 있는 것이며, 그들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다.나의 경험은 교회 개척과는 관련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교회 개척에 사업가의 경험이 가장 필요한 것은 더욱 아니다. 사업가적인 자질은 성경이 말하는 목회자의 자질에는 없는 내용이다. 물론 사업가적인 자질이 교회 개척의 상황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꼭 필요한 필수 요소는 아니다. 교회 개척을 하면서 사업가가 될 수는 없다. 목회자가 아니라면 교회 개척을 하지 말아야 한다.사실, ‘교회 개척’이라는 말 자체가 약간 부적절한 면이 있다. 그 용어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말이지 존재론적 진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개척은 공동체로 모이는 일이다. 교회는 모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 성도를 돌보며 복음적인 삶을 살도록 조언하고 양육할 목회자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국경을 넘어 새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다녀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하여 당신을 부르셨을 수 있다. 바울이 여러 곳을 다녔다고 해도 그가 우선적으로 한 일은 자신이 세운 교회를 위해 목회자를 확보하는 일이었다(행 14:23; 딛 1:5). 그리고 직접 했든지, 서신으로 했든지 목회를 하는 목회자로서 역할에 충실했다.두 가지 질문만일 당신이 교회 개척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거나 사업가적인 직관 때문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교회 개척은 그 나름의 위험이 따른다. 당신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면,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고려해야 하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1. 당신은 교회를 왜 개척하고 싶은가?사업가는 틈새시장의 기회를 노린다. 그들은 고객의 필요와 욕구를 인식하고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생각해 낸다. 어떤 사업가에게는 어떤 틈새가 있는가? 하는 것보다 틈새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사업가는 “제품ㆍ서비스ㆍ산업ㆍ시장과는 무관하게 원시적인 욕구”에 이끌린다고 Forbes.com에서는 말한다. 그들은 특정 제품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공간에서 무언가 시작하는 기회를 좋아할 뿐이다.교회 개척을 그러한 동기로 한다면 건강한 교회 개척을 할 수 없다. 교회 개척자는 지역 교회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일에 이끌려야만 한다. 교회를 개척하는 동기가 새로운 모험에 대한 설렘이라면, 당신은 아마도 평범하고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교회 사역, 그리고 목회 사역의 본질적인 것들로 인하여 힘들어할 수 있을 것이다.교회 개척에 마음이 있다면 사람들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변화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의 조언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성도를 돌보는 것은 건강한 교회의 목회 사역이다. 목회자의 인내를 통해 사람들의 삶에서 열매가 맺히도록 하는 사역이다. 2. 새로운 교회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사업가는 틈새시장에서 기회를 노린다고 했다. 그들은 아직 없는 제품을 개발하여 제공한다. 교회 개척에서도 그것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제공하고 싶은 틈새시장과 제품을 어떻게 인지하는지에 주의해야 한다.교회 개척은 특정 지역에 기존 교회보다 더 건강한 교회가 필요한 이유가 있을 때에 바람직하다. ‘건강한 교회’라는 의미는 매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기 위해 모인다는 뜻이다. 그것은 삶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먼저 배운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주위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말한다. 건강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서로 나누는 모습을 특징으로 한다. 당신이 발견하여 채우고 싶은 틈새가 일반적으로 ‘건강한 지역 교회’보다 더 특별하다면(어떤 혁신적인 사역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은 것들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려는 목표가 근처 교회와 다르지 않다면 불화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당신은 상품이 아니다자신을 기존 시장에는 없는 고유한 ‘상품’으로, 수요는 있으나 아직 공급되지 않은 ‘제품’으로 여길 수 있다. 온라인 옥스퍼드 사전은 사업가에 대한 하위 범주의 정의를 “예능 산업의 촉진자”라고 말한다. 교회 개척자도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 의미의 미묘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교회 개척이 성공하려면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을 가진 리더가 교회에 필요하다고 믿을 수 있다. 만일 홍보하려는 제품이 당신 자신이라면 실패하는 시나리오를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이 실패하면 아무도 탓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당신 때문에 교회가 도약하고 성장한다면 당신은 성경적 공동체가 아닌 다른 것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세우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교회 개척은 하나님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다.교회 개척의 성공을 인정받는 것은 이익도 손해도 없는 게임이다. 신실한 교회 개척자가 되려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고 말한 세례 요한의 고백에 동의해야만 한다.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향해야만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urch Plants Need Shepherds, Not Entrepreneurs번역: 정은심
교회개척
목회자
협력자
틈새시장
사업
중독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by Andy Farmer
2019-12-12
가족 중에 중독 문제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인내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중독이 주는 가장 파괴적인 것 중 하나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이차적인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도우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중독과 투쟁 중인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는 어려움을 계속해서 견딜 수 있는 지구력과 회복력, 헌신이 요구된다. 만일 아무런 준비 없이 접근한다면 중독에서 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실패할 것이다. 자비롭게 생각한 마음은 짓밟히고, 인내는 바닥날 것이며, 사람에 대한 신뢰는 무너질 것이다. 심한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돌아설 수 없다. 중독에 빠져있다고 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우리의 삶에서 완전하게 제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싸워나갈 수 있을까? 혼란 중에서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혼동 속에서도 안정을 제공해주는 진리익숙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심오하고 놀라운 진리가 있다.“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바울의 서신서에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이 세 가지 ‘은혜의 요소’가 여러 차례 나온다. 믿음ㆍ소망ㆍ사랑은 성도의 삶의 지표이며(골 1:3-5), 시련 속에 있을 때도 사역을 계속하여 유지하도록 하고(살전 1:2-3), 어둠의 시기에도 안정적인 일관성을 제공해 준다(살전 5:6-8).만일 사랑하는 사람을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원한다면, 믿음ㆍ소망ㆍ사랑을 기억하라.믿음을 기억하라믿음은 힘든 시기에 있는 당신이 흔들리지 않고 바른 것에 집중하도록 돕는다.중독자는 이미 여러 번 중독된 행위를 그만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는 고백을 했으며, 재활이나 자기 혁신을 위한 시도를 수차례 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고백은 거짓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번 더 신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중독자를 돌보는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든 회복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반면에 중독자들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많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책임과 의무의 무거운 짐을 돌보는 사람에게 떠넘기려 한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중독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다루시며, 더 명확하게 말씀하고, 행하신다. 중독자가 회개와 변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다루신다. 치료와 회복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을 통하여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짐을 그리스도께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맡기며 자비로운 은혜를 구하고, 건져 주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소망을 기억하라중독의 환경에서 사는 것은 중독된 사람의 망가진 모습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망가진 모습이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여 절망하기 쉽다.사랑하는 자녀는 중독으로 인해 그들의 많은 잠재력을 낭비한다. 절제를 잃은 배우자나 부모는 가족의 삶을 비극의 방향으로 천천히 이끈다. 중독 문제가 가족의 삶 전체를 좌우하고 있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 그랬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 가족의 내력이며, 그 가족의 미래인 것처럼 보인다.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도 미래를 소망하도록 선물을 주셨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주께서 잡은 손을 결단코 놓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다. 주님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장 완벽한 곳을 준비해두고 계신다. 비록 우리가 그곳에 있지 않지만, 그곳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소망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내하고 가는 길 끝에 영광을 마련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영광의 소망 그 자체가 되신다(골 1:27).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당신의 미래는 이미 영광을 볼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투구인 소망이며(살전 5:8), 중독자로 인해 망가진 환경 속에서도 피폐해지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소망이다. 사랑을 기억하라자기 자신에 빠져있고, 스스로 파괴된 삶으로 향하는 중독자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거짓말과 속임수를 쓰고, 다른 사람의 긍휼한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성경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한다(벧전 4:8). 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오히려 중독자 안에 있는 죄를 허용하는 일처럼 어리석게 느껴진다. 중독자를 사랑하는 일은 고통을 동반한다. 사랑이 죄로 짓밟히고 조롱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이 죄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었다. 누구든지 사랑 없이는 중독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우리의 죄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 우리가 겪을 고난을 대신 당하신 그분의 은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신 그분의 죽음, 바로 이러한 사랑이 곁에 있는 중독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이다.중독자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십자가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중독자와 그를 돌보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중독자와 나누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것은 중독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지치고 힘들더라도 인내하고 버틸 수 있도록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사랑은 곁에 있는 사랑하는 중독자를 한 번 더 신뢰할 수 있도록 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랑은 중독으로 인한 아픔과 그에게 만들어진 우상을 긍휼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사랑만이 중독에서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며, 변화시키는 동력이다. 사랑만이 중독자를 진정한 자유로 인도하며, 예배자로 바꿀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미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믿음ㆍ소망ㆍ사랑을 기억하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해 줄 수 있는 그 어느 것보다도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Do Addicts Need from You?번역: 정은심
가족
중독자
믿음
소망
사랑
신뢰
인내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구약의 하나님
by Miles Van Pelt
2019-12-11
구약에 등장하는 자비(mercy) 또는 긍휼(compassion)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이는 출애굽기 32장부터 34장까지의 내용, 황금 송아지 이야기에 잘 드러나 있다. 이집트로부터 기적적으로 탈출한 이스라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산 아래에 천막을 쳤다. 거기서 그들은 연기 나는 산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천둥처럼 들리는 체험을 통해서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었다(출 20:22). 이때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출 20:4, 23).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로부터 고작 40일 정도가 지났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금지한 일, 바로 우상을 만드는 일을 했다(출 32:1-6). 이 한 번의 불순종은 시내산 언약을 어긴 것이었고,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는 죽음이었다(출 32:10).그러나 서사는 계속된다. 모세가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지 않기로 하셨다(출 32:11-14). 모세는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계속해서 지켜주실 것을 요청했다(출 33:12-26).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놀라운 요청을 한다(출 33:18).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출 33:19).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위 뒤에 숨기시고 그의 영광이 지나가게 하여 모세가 영광을 보도록 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신다. 바로 이 마지막 내용, 출애굽기 34장 6-7절에 나오는 거룩한 이름의 선포 부분이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볼 부분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후략]’”출애굽기에 깊이 묻혀 있는 이 두 구절에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핵심적인 사고 체계(paradigmatic expositions) 중 하나가 들어있다. 이렇게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이 가지는 풍부함에 깊이를 더하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의 근원인, 모세에게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 자신이다. 이 구절이 보여주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다음 두 가지 핵심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6절의 첫 부분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섯 가지로 보여준다. 자비, 은혜, 화내기를 더디 함, 변치 않는 사랑 그리고 신실함이 그것이다. 그리고 7절에 나오는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대할 때, 특히 “악한 행위와 죄를 용서” 하는 데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한다. 무한한 탁월함(His limitless excellence), 측량할 수 없는 능력(immeasurable strength), 그리고 더없이 완전함(complete perfection), 이러한 하나님을 완전하게 이해하기에 한없이 부족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incomprehensibility of God)을 생각해보자.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존재 중 일부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겠다고 결심하셨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또는 성품)과 관련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로 한 첫 번째 속성이 바로 자비하심이다. 이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자비로우신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다.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신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기록한 구절의 원래 문맥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본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언약을 어겼다. 그들은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거두셨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자비는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출 34:7) 라는 구절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 약한”(weaker) 속성을 알려주려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이 특정 속성은 구약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뤄지는 데에(시 78:38; 86:15; 103:7–14) 있어서 중심이 되고, 참되고 진실한 회개에 대한 동기를 부여한다(욜 2:12-13; 대하 30:9).하나님의 자비가 구약 속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 자비하심은 모든 피조물에게로 확장된다. 시편 145편 8절이 출애굽기 34장 7절에 처음 기록된 이 하나님의 속성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한번 보라.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편 145:9) 성경은 편협하게 제한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모든 현실을 형성하는 무소부재한 힘(ubiquitous force)이며, 희망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동기(pervasive impetus)이다.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품성이 먼지 쌓인 건조한 신학책 속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은 죄인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준다. 이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우리의 삶에 가장 잘 적용하는 사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특히 도움이 필요한데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미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단지 죄인에게 내릴 벌을 참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손을 내미신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컸는가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여러 곳에서 잘 드러난다. 돈을 빌려줄 때 가난한 자들은 이자를 면제받았다(출 22:25). 판결을 내릴 때 절대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면 안 되었다(출 23:3; 레 19:5). 제사를 지낼 때도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의 형편에 맞추어 제물을 준비하면 되었다(레 14:21). 신명기 15장 7절에서 11절까지를 보면,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 그 구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1절). 잠언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은 지혜라고 말한다(잠 14:21; 17:15; 22:9, 16; 28:27). 선지자는 가난한 자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자를 정죄한다(사 3:14–15; 10:2; 렘 5:28; 겔 22:29; 암 5:12). 시편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하나님을 찬양한다(시 68:10; 72:13; 112:9; 113:7; 140:12).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 궁핍하고 배고픈 자, 억눌린 자를 돌보지 않고 외면하신다는 말씀 구절은 구약의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 외에도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신다. 물론 과부라고 함은 남편이 죽고 다시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말한다. 구약에서 고아란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말한다. 고아를 영어 성경에서는 “아버지 없는 자”(fatherless, 특히 ESV 성경에서)로 표현하기도 한다. 나그네는 이방인 또는 외국 땅에서 사는 외국 거주인인데,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자기 나라를 떠난 사람들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지역에서 나그네였다(창 23:4). 모세는 미디안에서 나그네였다. 사실 모세는 미디안에서 낳은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 즉 “그 지역의 나그네”라는 뜻으로 지었다(출 2:22).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도 나그네 취급을 받았다(레 25:23).그러면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가 하나님의 자비로운 관심을 받는 특별한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취약함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정치적, 사회적, 또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억압을 받거나 학대받았다. 사회적 제도로 보호받거나 이웃에게 보호받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셨다. 신명기 10장 18절은 이렇게 말한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언약은 그들을 착취하는 것을 금지했다(출 22:22; 신 24:17). 그들이 먹을 것을 구할 기회를 주도록 했고(신24:19, 21; 26:12), 매년 열리는 축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신 16:11, 14). 그리고 행정적인 처리에서도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했다(신 24:17). 반대로 과부나 고아, 또는 나그네에게 공의를 베풀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신 27:19). 이 죄가 가진 심각성을 말라기 선지자는 거짓말, 마법, 그리고 간음과 동일시하였다(말 3:5)고 말한다.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고 찬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이웃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는 자비의 모습을 세상에서 보여야 한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시 82:3-4).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율법은 그것을 명령하고 지혜는 그것을 가르친다. 선지자들은 거기에 동참하고 시편은 그것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가장 극적이고 위대하게 드러난 것은,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서 발견된다. 신약 성서의 자비와 긍휼은 구약 성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자비와 긍휼이 극치의 상태에 도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약 성경이기 때문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Old Testament God of Compassion and Mercy번역: 무제
신학
구약성경
은혜
자비
긍휼
하나님의속성
창조주
영원을 바라보는 눈을 간직하라
by Adam Ramsey
2019-12-10
강한 불빛이 비치면 잠시 앞을 보지 못하기도 하지만, 자칫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들이 당면하는 상황들이 때로는 강렬한 빛처럼 다가와서 현실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직면한 난관으로 인해 현실 속에 빠진 나머지,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조차 잃어버리기 쉽다.개척한 교회가 건강하게 안정되고 질적 양적으로 성장할 때, 우리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놓치고,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 몰입될 수 있다(참조, 고후 4:16-18).이러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목회 사역을 위한 방법과 전략, 자원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방안 때문에 우리는 늘 혼란과 긴장 속에 있다. 이러한 방안들에는 당장 사용하여 가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론 적인 것이 많다. 필요한 것 같지만 실상은 본질에서 벗어난 방법들로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필요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정보가 온라인에 홍수처럼 넘쳐나기에 필요한 것을 검색하다가 지쳐버릴 지경이다.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눈을 포함하여 매우 많은 목회자의 눈을 들여다보곤 한다. 본질에서 벗어난 방법론적인 내용을 담은 수많은 문자와 이메일을 접할 때마다 요동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머뭇거리는 목회자의 눈을 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반응하기에는 우리의 미래가 너무 먼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놓여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함없이 인도하고 계시는데도 말이다.조나단 에드워즈가 “주님, 내 눈에 영원을 각인시켜 주소서!”라고 기도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소망에 가득 찬 기대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구속의 은혜로 시작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고 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소망으로 인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막연하게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고한 기대를 하는 것이다.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 전에 밀려오는 설렘의 순간처럼.노래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울리는 강렬한 박자처럼. 떠오르는 태양처럼.성경 말씀의 마지막 장은 우리의 장래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낙심하지 않음’과 ‘영원을 생각하는 것’을 연결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후 4:16-18).교회 개척의 초기에 있든지 오랜 시간 교회 사역을 하고 이제는 마무리를 향하여 가고 있든지, 우리는 영원성에 초점을 맞추고 사역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목회를 하고 어떤 전략을 사용하든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여 복음을 전하기로 한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피곤함에서 생기를 되찾기까지예수님을 섬길 때, 우리의 겉사람은 점점 낡아지지만,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후 4:16).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헌신한다(벧전 5:1-4). 다시 말하면,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하게 되면 우리는 피곤하게 될 것이다.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친절함으로 대하는 것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우리의 자녀를 제자로 삼아 가르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한 시험이다.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좌절은 우리 몸을 상하게 한다.매주 새로운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일은 많은 힘을 쏟게 한다.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기에 필연적으로 피곤함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따라서 올바르게 목회하기 위한 피곤함은 성령의 부재를 알리는 표시가 아니다. 은혜의 보좌에 때를 따라 나아가며(히 4:16) 매주 안식할 수 있는 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유가 있다.성령님을 의지하여 신실하고 복음적인 목회를 하면서도 피곤함은 경험될 수 있다. 피곤하다는 그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의존하는 목회에서 느끼는 피곤함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부패한 자아를 의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목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길로 달려가는데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다.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피곤함이다. 우리의 소망을 자신의 경험과 이상에 두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둘 때 진정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피조물과 그분의 백성들이 나눌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의미만은 아니다(롬 8: 19:22), 일상의 어려움 중에서도 우리에게 개인적이고 지속적인 힘을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죽음도 이기신 그분의 능력을 우리의 삶에서 기억하고 살기를 원하신다.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인 만큼, 내일 당신이 겪을 어려움도 이겨내도록 돌보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버려두지 않으신다.상함에서 치유받기까지우리가 지금 당하는 환란은 미래에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고후 4:17)을 예비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확신으로 우리는 현재 당하는 어려움에 정직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목회의 어려움을 축소하지 않고 있다. 다만, 우리의 소망을 최대화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큰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대항하는 모든 것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배신과 비방의 말들과 실망스럽고 비열한 짓들, 실패와 함께 찾아오는 불안 등으로 괴로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극복할 때 영광의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에게 어두운 날이 다가올지라도 의미 없이 지나가는 날은 아니다. 영원성의 시각으로 볼 때 어려움은 우리를 괴롭힐 힘을 잃는다.현재의 어려운 순간을 보장된 미래를 기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불안은 기도로 바뀌고, 지친 마음은 용기로 바뀐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어려움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꺼리지 않는다. 우리는 말씀 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며 굳게 서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당당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가장 선하신 방향으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어려움 하나하나가 태양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가리는 구름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이다. 구름이 아무리 가려도 태양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 겪는 어려움과 고통은 순간적인 것일 뿐이지”하고 말이다.영원을 보는 시각우리는 잠시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후 4:18).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현재의 어려움을 감당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영광의 날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인내한 성도들이 기뻐할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그러니 우리에게 다가올 확정된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보라. 영광의 기념일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을 뵙게 될 그 날을 상상해 보라.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고전 13:12). 그 순간에 당신은 그분의 사랑을 느낄 것이다. 압도적으로 사로잡는 찬란한 영광을 그분 안에서 경험할 것이다. 만일 그 순간 당신이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 땅에서 경험했던 최악의 순간이 떠올랐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떻게 이 둘을 비교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이다. 우리는 확실한 기대를 품고 다가올 날을 맞이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어디로 나아갈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더라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준비시키는 그분의 신실한 약속을 알고 있다. 그 약속으로 우리가 걸어가게 될 그곳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영광스러울 것이다.가는 길에 우리가 넘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의 약속을 믿는 한 지금의 고난을 기쁘게 수용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빨리 영예로운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날이 올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 Your Future Is Brighter Than You Think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소망
기대
생기
치유
에드워즈
영원한세계
처음
이전
열린
156
페이지
157
페이지
158
페이지
159
페이지
16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