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정하신 ‘그날’까지 견뎌내려면
by Eric Landry
2019-11-15
브라운 목사는 이십 년이 넘는 목회 기간 동안 교회가 겪어 온 풍파를 한번 돌아보았다. 언젠가는 예배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로 성도 간에 불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 사역 현장에 최신 기술을 도입하여 이전에 없던 파장이 교회 안에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정한 잘못을 저지른 사역자들로 인해 큰 폐해가 일어나 이로부터 회복하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교회에 새로 온 한 가정을 통해 공동체에 왜곡된 가르침이 퍼지면서 야기된 악한 영향은 그야말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게 된 뜻밖의 문제였다.스미스 부부는 어떤 사역자라도 꿈꿀 만한 그런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친절했을 뿐 아니라, 경건한 자녀들을 키우며 흔들림 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고, 교회 사역에도 언제나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교회에 온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남편은 주일 학교 교사가 되기로 자원했고, 부인은 육아실에서 봉사하겠다고 신청했으며, 청소년이었던 자녀들은 예배팀에 들어가 섬기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름 아닌 이혼과 재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그 부부가 왜곡된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혼 후에 재혼을 하는 일은 신자에게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런 종류의 결혼은, 어떤 이혼 사유를 막론하고 ‘간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남편 스미스는 교회 안에서 그와 같은 견해를 계속 주장했는데, 이 모습을 지켜보며 염려하던 일부 교인들이 브라운 목사에게 상황을 보고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예배 후에든 그 중간에든 스미스가 다른 부부에게 접근하여 마치 그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며 결혼 생활이 어떠냐고 묻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부부가 재혼한 관계이면, 그들에게 이혼을 하라고 권하면서 간음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결코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이러한 행동은 실제로 몇몇 사람들의 삶에 신앙의 위기를 초래했고, 이에 브라운 목사는 그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결국 두 사람이 만나게 되자, 스미스가 브라운 목사를 향해 자신이 이전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들과 똑같다며 비난을 했다. 사실 스미스는 과거의 여러 교회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결코 진리를 대변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브라운 목사는 스미스 부부를 쫓아내진 않았지만, 그들의 견해가 공동체의 화평을 깨뜨리고 교회의 가르침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 교회 안에 그런 견해를 더 이상 퍼뜨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결과 긴장 어린 몇 주의 시간이 흘렀고, 결국 스미스 부부는 교회에서 섬기던 일을 그만두고, 자신들의 견해에 공감하는 몇몇 지체들을 데리고 나가 가정 교회를 세웠다.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교회 안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목회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수고에 더하여 이 적대적인 세상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생존할 수 있도록 그들을 무장시켜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된 가르침에 대항하며 싸울 수밖에 없다. 간혹 그 가르침이 복음의 핵심을 위협하지 않을 때에도 교회의 화평과 순결은 그로 인해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 22-23절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듯이, 그리고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바울이 설명하였듯이,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함에도, 그릇된 가르침의 타격을 받으면 교회는 동요하다 분열을 겪게 되기도 한다.물론 우리는 잘못된 가르침이 야기하는 위협에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교회의 문을 단단히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기회만 있으면 몰래 들어와 무엇인가를 노략질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양 떼를 해치는 이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회의 리더들은 그런 문제가 들이닥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교회의 화평과 순결을 지키기 위해 파수꾼보다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주의 사항이 있다. 화평과 순결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서로 대립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화평을 지키는 데 너무 치중하여 교리적 순결성을 소홀히 여길 수 있고, 또 순결을 지키는 데 너무 몰두하여 성도들을 의심과 불안의 눈초리로만 살필 수 있다.그렇다면 교회의 화평과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교회에 침입하는 모든 적군을 막아 내기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미치는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실천하며 도움을 얻을 수 있다.첫째로, 사역자이든 일반 성도이든 교회에서 리더의 자리를 맡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높은 기대치를 유지해야 한다. 바울은 교회에서 지도자를 세울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기준이 무엇인지를 디모데와 디도에게 각각 알려 주었다. 곧 장로나 집사는 올바른 신학과 경건한 성품을 지녀야 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딤전 3:1-7; 딛 1:5-9). 그렇다면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과연 중직자 후보로 거명된 사람들에 대해 성경이 제시한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는지 분명히 확인하고 있는가? 슬픈 현실이지만, 많은 교회에서는 성공적인 사업가라든가 유력한 인사 또는 교회에 상당한 액수의 후원금을 기부하거나 기부할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하며, 성경이 제시한 자격 요건은 무시하기도 한다. 분명 교회는 그와 같은 세상의 기대치가 아니라, 성경이 제시하는 기대치에 맞는 리더십을 요구해야 한다.둘째로, 문제의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폭넓은 독서를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올바른 신학으로 구성된 영적 양식을 꾸준히 제공하려면, 그 다양한 책들 중에서도 청중이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줄 수 있는 작가와 저서를 규칙적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표준적인 견해에서 벗어난 문헌이나 학자로부터 신학적인 설명을 굳이 취하는 일은 청중에게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한번 교회 도서관에 들어가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를 보라. 또 교육관 탁자 위에 널려 있는 책들도 검토해 보라. 과연 그 자료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정통적인 신학을 떠올리게 만드는가? 아니면 급진적인 신학을 소개하며 그릇되고 낯선 사상으로 그들을 이끄는가? 목회자는 세상의 주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검증되고 신뢰할 수 있는 진리를 교인들이 배울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셋째로, 모든 사역은 주일 설교의 메시지와 조화를 이루는 선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평신도 리더들과 정기적으로 만나서 주간 모임이라든가 성경 공부 수업이 지난 주일 예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각 소그룹이 교회의 전체 사역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모임으로 바뀌기 쉽다. 그러면 그 모임의 리더가 사역자들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어 교회 안에 그릇된 가르침이 소개될 수 있는 빌미를 주게 된다. 이런 위험성은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모임을 인도하며 가르치는 리더만이 아니라 그 모임에서 사용할 교재까지도 신중하게 선별함으로써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또 이 외에도 소그룹 리더들과 성경 공부 교사들이 서로 훈련하고 기도하며 격려할 수 있도록 정기적인 모임을 가져야 한다. 이때 목회자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르치는 내용이 주일 설교의 대척점이 아니라 연장선에서 이뤄지고 있는 게 맞는지를 확인시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목사와 장로와 집사 그리고 일반 리더들이 모두 하나님이 각자에게 은사를 주어 섬기게 하신 사역 현장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사랑 안에서 자랄 수 있다(엡 4:16).넷째로, 교회를 지키고자 하는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 사실을 발견하면, 그 문제를 직면해서 다뤄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가상의 공간에서 익명성을 띠고 타인과 소통하며 서로에게 끔찍한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으면서도 정작 ‘상대를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a nonconfrontational age)를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누군가를 만나 어려운 대화를 나누는 일은, 그저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려는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는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신앙의 지혜를 갖춘 성도라든가 인생의 선배가 되는 지체들이라면, 혹 공동체의 화평과 순결을 깨뜨릴 만한 자들이 있을 경우 그들에게 다가가 인격적으로 훈계하고 권면하는 일을 해야 한다.이에 대해 앞서 소개한 브라운 목사의 사례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교회의 입장이 어떠한지를 스미스에게 설명했다. 상황이 저절로 나아지기를 바라면서도 문제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또한 스미스를 공개적으로 질책하거나 교회에서 쫓아내며 그 문제에 지나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교회에서는 언제나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사역을 할 수 있기에 우리는 공동체의 화평과 순결을 지키기 위해 늘 힘써야 한다. 특별히 직분을 맡은 자들이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힘써야겠지만, 실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베뢰아 사람들처럼 그들이 배운 가르침을 확인하며(행 17:1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살전 5:21).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리의 노력을 통해 건강한 교회를 세우신다. 또 그 안에서 우리는 매주일 예배를 드리며 그분이 우리를 돌보실 뿐 아니라 설교 사역을 통해 직접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일반적으로 교회의 화평과 순결을 위해 힘쓰는 일은 그리 매력적인 일이 아니다. 그렇게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늘 수고롭게 돌아보며 한결같은 성품을 지녀야만 하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절망하며 포기하고 싶은 때도 찾아온다. 그럴 때면 기억해야 한다. 비록 교회의 화평과 순결이 언제든 깨지기 쉬운 상태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습을 지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장래의 소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약속된 날이 다가오고 있다. 새 예루살렘의 성문이 닫힐 필요 없는 날,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 위험에도 노출되지 않는 날,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계 21:25-27). 그날에 예수님은 순결하고 흠 없는 신부로 교회를 맞이하실 것이다(엡 5:27).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 바로 그날이 도래하리라는 확신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교회가 화평하고 순결하도록 우리는 힘을 다해 수고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False Teaching and the Peace and Purity of the Church번역: 장성우
교회사역
화평
순결
가르침
성품
리더
기대치
주일설교
브라운
종교적 믿음이란 무엇인가?
by Joe Carter
2019-11-14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올바른 임무는 생각과 말의 본질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의 문제들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에 대한 오해로 발생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가 꽤나 실정을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중요한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철학뿐 아니라 종교와 같은 다른 분야에서도 많은 문제들은 언어의 부정확한 사용이 원인이 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무엇이 ‘종교적 믿음’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다.하나의 신념을 종교적 믿음으로 정확히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결정하기 위해 우선 우리는 모든 종교적 믿음과 종교적 믿음에만 해당되는 사실들을 모두 나열함으로써, 너무 넓거나 좁지 않은 방식으로 용어를 정의해야만 한다. 이것이 명확한 의미로 나타날지도 모르는 반면, 의미 정의에서 필수적인 구성 요소가 제거되었을 때 무엇이 제거되었는지를 발견하게 되어 종종 놀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모든 나무에 해당하는 사실이지만 나무에만 사실인 것을 제한된 방식을 통해 나무의 개념으로 정의하려 한다고 상상해 보라. 어떤 방식으로 설명을 점차 축소시키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호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정의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나무의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은 종교적 믿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는 특정한 종교적 신념의 특징들인 나뭇잎과 덤불을 잘라 버린 후 남겨진 헐벗고 빈약한 갈대에 감명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최소한의 정확한 정의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다른 것들이 실제로 더 종교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 반면, 우리가 종교적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믿음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하게 될 것임을 예상해야 한다. 비록 놀라고, 만족스럽지 않고, 인상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은 우리가 용어를 바르게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종교적 믿음에 필수적이라고 흔히 믿게 되는 두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종교적 신념은 신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종교적 믿음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신 혹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특징은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다신교를 배제시키기 때문에 너무 제한적일 것이다. 사실상, 일부 종교, 예를 들어 힌두교, 소승 불교 등은 그야말로 무신론을 따르기 때문에 신의 개념을 전혀 포함할 수 없다.종교적 믿음은 예배 혹은 예배 관련 활동들을 유도하는 믿음이다이 특징 또한 예배 행위를 하지 않는 힌두교와 소승 불교의 반증에 의해 일축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인들과 신들은 사람을 알지도 돌보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던 쾌락주의자들의 종교적인 신념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런 무관심한 존재들을 숭배할 의무가 전혀 없다고 느꼈다.의미 정의에서 신과 예배를 제외한다면 공통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종교적 신념은 거의 없다. 철학자 로이 클로저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성서적 하나님의 개념, 브라만-아트만에서 힌두의 개념, 소승 불교에서 법신의 개념, 도교에서 도의 개념을 통해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인가?” 모든 종교적 전통은 어떤 것 또는 다른 것을 신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들 모두는 신성 그 자체의 지위에서 공통분모를 가진다고 답한다.많은 종교들은 무엇이 신적인 것이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 모두는 신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는 동의한다. 신적인 것은 무엇이든 절대적이고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실체, 즉 무엇이든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신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궁극적으로 신적인 무언가에 존재를 의존한다. 비의존성과 그에 상응하는 개념은 모든 종교적 믿음의 공통적 특징이다.클로저는 공통된 요소들을 사용하여 정확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공식화한다. (1) 어떤 것을 신적인 것으로 여기는 믿음, (2) 신적인 존재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에 관한 믿음, (3) 어떤 것을 무조건적으로 비의존적인 존재, 즉 신적인 존재로 믿는 믿음.우리가 이 정의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모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야기해 오던 우리의 전 생애를 산문에서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사투리로 말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모두가 종교적 믿음의 체계와 행위,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적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터무니없을 수도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실수로 종교의 반대라고 믿는 이론이나 신념, 즉 물질주의 등에 중점을 둠으로써 나타날 수 있다.물질주의(유물론)라는 개념은 적어도 고대 그리스인 이후로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비종교적인 개념으로 간주되고 있다. 물질, 또는 다른 물리적 실체가 무조건적이고 비의존적인 실재이며, 믿음에 기반하여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명백한 주장은 다소 이상하다.사실상 유물론은 무신론과 같은 일부 관련된 믿음보다 정의에 더 가깝다. 마치 유일신교가 신의 수를 하나라고 또 다신교는 그 수를 하나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무신론은 많은 신은 제로라고 주장한다. 단순히 종교적 신념의 비본질적인 요소에 대한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무신론이 본질적으로 종교적 신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반면에 유물론자는 범주적이고 명확한 방식으로 정의하기에 적합하다.클로저의 정의는 너무 광범위하거나 좁지 않다. 이는 알려진 모든 종교적 전통에 적용 가능하며 논리적으로도 강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질주의자들은 그들의 논리를 굽혀 지나친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을 강조하면, 많은 물질주의자들은 ‘종교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의미론에 있어서 특별한 간청을 하거나 언쟁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클로저가 말했듯이, “만약 당신이 신적인 것이라고 믿는 어떤 것이든 당신에게 종교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종교적 특징을 인정하는 우리에게는 당신의 믿음은 자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종교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걸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원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라는 사고는 틀림없이 종교적 믿음처럼 보이고 기능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is a Religious Belief?번역: 송유희
문화
세계관
종교적신념
클로저
물질주의
무신론
유물론
종교적믿음
율법을 내게 어떻게 적용할까?
by R. C. Sproul
2019-11-13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율법과 그것의 역할에 대한 연구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십계명부터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명기를 읽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시편을 읽으면서 율법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편이야말로 율법에 관한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어야 하는 곳이다. 시편에서 가장 긴 119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놀라운 찬양으로 가득 찬 글이다. 119편은 이합체시(역자 주: 시의 형식 중 하나로, 각 구의 첫 글자를 조합하면 다른 뜻의 말이 나온다. Acrostic)이다.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수와 동일한 22개의 절(stanza)로 이뤄졌는데, 각각의 절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한 문자를 상징하고, 또 해당하는 문자로 내용이 시작된다. 왜 이렇게 구성했을까? 알파벳으로 치면 A에서부터 Z까지,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통틀어서 율법을 기뻐하고 즐긴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이다. 신약의 가르침에 더 익숙한 우리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한다는 개념은 완전히 고풍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오히려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뻐한다. 성경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라고 말하고 있다.그 결과 우리는 구약에 나오는 율법을 기독교인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는 현대에 만연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우리는 다음 시편 저자의 말을 숙고해야 한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 119:97–104).119편의 이 부분은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감탄으로 시작한다(한글 성경과 달리 영어 성경에서는 ‘Oh’라는 감탄사로 97절이 시작된다-역주). “오우!”라는 말은 실로 깊고도 심오한 감정을 드러낼 때 쓰는 표현이다. 여기서 저자의 감정은 다름 아닌 ‘애정’이다. 이렇게 말하는 기독교인을 본 적 있는가?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 하나님의 율법이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만난 적이 있는가? 당연히 대답은 No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는 왜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더 깊은 감사와 애정을 느끼지 않는지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구약 성경 속 성도들의 삶에서 기쁨의 초점이었던 그 어떤 것을 지금 와서 경멸하거나 무시하도록 만드는 게, 그리스도의 삶 자체와 그분의 사역이었다는 게 말이나 될까?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구약의 율법이 신약 성경 속 기독교인들과 더 이상 관련이 없으며, 우리의 영적 성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잘못된 가정 때문일 것이다. 율법은 구약 시대의 신자들을 위한 것이지, 오늘날의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표본은 모세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고,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생각에 기인한다.오늘날 교회에서, “오, 예수님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또는 “오, 주님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와 같은 열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기독교인을 만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감정에 뭐라고 응답하실까? 초기 교회에 대한 그분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는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나도 한 때는 율법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율법은 무시합니다.”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음식이자 음료는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요 4:34) 우리에게 알려 준다. 예수님은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율법의 한 획, 한 획을 다 준수했고, 또한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사명으로 보셨다. 그분의 동기는 율법의 항목 하나하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율법을 통해 당신의 뜻을 분명히 나타내셨다.시편 119편에는 ‘율법’과 ‘말씀’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강한 애착을 드러내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예 제외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교차해서 사용하며 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이 시편 119편에서 이런 이분법은 찾을 수 없다. 시편 기자는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애정을 반복적으로 찬양한다. 그럼, 시편 기자는 왜 하나님의 율법을 그렇게 깊이 사랑했을까?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건 다른 말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이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는 왕, 회장, 지도자 또는 다른 사람들이 지시를 내릴 때, 그들의 명령은 도전받지 않는다. 그들은 권위의 최종 목적지(the final court of appeals)이기에 그들의 명령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말이 바로 법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건 혹시 아닐까? 그분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율법인가? 그분은 구약 성경에서와 같이 여전히 절대 주권자이신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신약 시대 교회의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인가? 그분의 말씀은 율법이며, 그분의 율법이 그의 말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즉 율법은 꿀보다 더 달콤하다(시 119:103).시편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축복으로 시작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이 구절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지향하는 행태, 관습, 그리고 일반적인 지혜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구절을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대중적인 지혜를 따르지 않는, 또 우리 사회의 문화적 풍습과 패턴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여기 1절에서는 어떤 특정한 것을 ‘하지 않는 사람’, 즉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며 축복이 선포된다. 그럼 긍정적인 측면, 그러니까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절).오늘날 기독교인이라면 이 구절을 이렇게 다시 쓰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겠다. “바보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율법주의자 같은 사람들이나 율법을 기뻐하고 일 년에 5분 이상을 그것을 묵상하는 데 쓸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복 있는 사람은…”시편 기자는 이렇게 계속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절). 시편 기자와 그의 독자들에게 익숙한 유대 광야를 한번 상상해 보자. 불모의 황무지인 땅에서 나오는 마른 싹과 타는 듯한 태양 아래에서 바싹 마른 땅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그나마 살아 있는 잎사귀를 상상해 보자. 그리고 저기 멀리 수풀에 심겨져서 과실을 주렁주렁 맺은 나무가 무성한 오아시스를 한번 그려 보자. 또는 요르단 강가의 입구에 심겨진, 뿌리가 땅속 깊숙이 들어가서 수분과 영양분을 마음껏 흡수하는 나무들을 상상해 보자. 이 나무들은 건강하고 가지마다 맺는 과실은 풍성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복 있는 사람은, 밤낮으로 내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막 한가운데에 심어져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뿌리 없는 작은 나무 같지 않다. 그는 생명이 넘치는 강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계절에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이다.”현대 기독교인의 눈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면, 그 비밀은 비단 율법뿐만 아니라 예언서와 지혜서와 같은 구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 성경은 하나같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마치 외계인 또는 우리의 삶에 불쑥 들어온 침입자처럼 느껴진다면, 그뿐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항상 넘어지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고 있다면, 그리고 시시때때로 사소한 산들바람에도 멀리 날아가는 겨처럼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바로 그때야말로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의 율법을 깊이 묵상해야 할 때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w Does God’s Law Apply to Me?번역: 무제
신학
구약성경
시편
구약
축복
말씀
명령
성품
묵상
이제 더 이상 불평 금지!
by Larry Osborne
2019-11-12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당회 모임 하나를 기억한다.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한 대형 교회 목회자의 강연을 들은 후에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로 막 돌아왔을 때였다. 그 목회자는 목회 사역에 동반되는 고유한 도전과 어려움에 대해 열변을 토했었다.그 강연을 요약하자면, 목회 사역은 가장 힘든 일이며, 위태로운 일이 끝없이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의 적은 악의 전형이며, 음흉하고, 사나우며, 궁극적으로 속이는 자이다. 우리는 오해받기 쉽고, 우리의 메시지는 인기가 없다. 우리의 보상은 대부분 나중에 온다. 그리고 우리는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기를 요구받는다.그때 나는 목회의 아주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기에, 그의 말은 내 관심을 끌었다. 시편 73편의 아삽처럼, 목회 사역 자체가 가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을 때였기 때문이다.그 다음의 당회에서, 나는 그 강연자가 한 말을 당회원들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기도를 요청하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다. 실제로 나는 그저 약간의 공감과 이해를 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연민을 구하는 부분에 이르기도 전에, 당회원들 중의 한 명이 내게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그 장로는 베트남 전쟁이 있을 때 세 번이나 복무하고 은퇴한 해병이었다. 그는 용맹스럽게 싸웠고 전쟁의 공포와 대학살을 직접 경험했다. 더군다나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비웃음과 조롱을 당했다. 영웅에 대한 환영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내 말은 연민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내 말을 멈추게 한 것은 옳았다. 나는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불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목회의 난관과 중압감에 대하여 불평할 권리도 없었다. 물론 목회 사역에 나름의 도전과 어려움이 있지만, 베트남이나 팔루자 전장에서의 복무와 비교하면 식은 죽 먹기이다. 사실, 원죄가 인간에게 생긴 이래로, 모든 일은 난관과 어려움 투성이였다. 잡초가 없는 정원은 없듯이 말이다. 나는 재빨리 사과했다. 그는 나의 사과를 잘 받아들였다. 그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목회가 마치 훌륭한 특권이라기보다 짐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목회의 난관과 짐에 대한 불평을 다시는 공적으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불평하지 않기”라고 부른 규칙을 만들어 스스로 지키기로 했다. 그것은 다음의 성경 말씀과 지침을 기억하는 것에 근거한다. 1. 리더십은 선택 사항이다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을 평생의 제자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자로 부르셨다. 하지만 공적 리더십은 선택 사항이다. 나는 공적으로 목회 사역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도 이 사역을 공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할 수 없다면, 물러나거나 잠시 중단하면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 책임을 맡을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는 더욱 잘 섬김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목회는 “즐거움으로” 그리고 “근심으로 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히 13:17). 그것은 난관이 어렵지 않은 척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관적이고 우울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겨도 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러면 그분이 섬김을 제대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감독자의 자질을 나열할 때, 디모데에게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적용하라고 말했다(딤전 3:1-7). 그리고 예수님이 섬김의 리더십의 길을 가르칠 때, 그것이 모든 사람에 해당된다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자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호소하셨다(마 20:25-28). 이것을 놓치지 말라. 리더십 역할에서 섬기는 것이 선택 사항임을 이해하는 한, 나는 불평할 것이 없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다.2. 섬김의 리더십은 종처럼 취급받는다는 의미이다나는 섬김의 리더십 개념을 좋아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종처럼 취급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좀 다른 문제가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대해 진정으로 말씀하셨다. 진정한 섬김의 리더십은 종처럼 취급받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현실이다.종이 주인을 위해 하는 일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주인은 드물다. 사실, 대부분의 주인들은 특권 의식을 가지고 종들을 대한다. 그래서 성도들 중 누군가가 나를 소유한 것처럼 행동하거나 내가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으면 놀라지 말아야 한다. 목회 사역은 섬김의 영역과 함께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내가 살고 섬기겠다고 선택한 영역이다. 3. 우리의 보상은 오고 있다나는 육상 선수로서 ‘지옥훈련’(hell week)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할 수 있었다면 그 주간을 건너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주간은 한 시즌 전체 게임의 전초전이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그리고 간절함으로 해마다 계속 참여했다. 같은 방식으로 나는 목회의 일부인 ‘지옥훈련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웠다. 현재의 고통이 아니라 내일의 약속으로 평가하는 법을 말이다. 주님은 그분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셨다(히 12:2). 바울은 다가올 영원한 영광의 빛에 비추어서 그의 난관과 박해를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으로 여겼다(고후 4:17). 그리고 강박에 눌려서나 혹은 이기적인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그리고 간절함으로 양 떼를 돌보는 목자들은 목자장이 나타날 때에 영원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벧전 5:1-4). 4. 고난은 특권이다목회 사역의 난관을 매우 웅변적으로 토로한 그 목회자의 강연은 부분적으로는 맞다. 목회는 종종 힘든 소명이며, 위험한 일들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목회는 소심한 사람이 감당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난관들은 한탄해야 하는 문제가 아님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안에는 영광을 돌릴 무언가가 있다. 예수님에게 고난은 저주가 아니었다. 수용되어야 하는 귀한 영예였다. 그 의미는 예수님이 우리를 가치 있게 여기셨다는 뜻이다(빌 1:27-30).목회 리더십에 기쁨이 없고 그것이 점점 짐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의 영적 패러다임이 잘못되었다는 표시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리더십은 짐이 아니다. 목회 리더십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특권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이 나의 죗값을 지불하셨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다. 그분이 나를 아들로 그리고 상속자로 삼으셨다는 사실은 내가 상상하거나 요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돌보고 먹이는 일을 나 같은 사람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은 완전히 불가사의한 일이다.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과분하고 설명할 수 없는 특권에 대해 내가 타당하게 응답하는 길은 목회의 가장 캄캄한 계곡을 지나는 중에도 기쁨과 감사로 가득찬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했듯이, “더 이상 불평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이를 잘 지키는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Leading with Joy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불평
특권
보상
제자
사역자
리더십
섬김
종
예배는 주님과 세상을 향한 사랑 증거
by David P. Barry
2019-11-11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된 유아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라도, 혼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압도적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싸우며, 장난감을 던지고, 이것을 하다가 저것을 하는 등 유아원은 온통 난장판 같을 수 있다. 노는 시간 혹은 “자유 놀이” 시간은 아이들의 발달을 위해 비구조적일 필요가 있다. 그러니 이러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돌보는 성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 아이들이 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하고 있는 무질서를 적절하게 정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시끄러운 유아원은 용납할 수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러한 무질서가 불쾌한 태도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는 무질서한 졸업식이나 결혼식을 적합하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졸업식이나 결혼식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이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면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예배드릴 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유아실의 혼란스런 이미지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예배를 묘사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문제는 찬송시도 아니고 가르치는 말씀도 아니었다. 각 사람이 자신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대로 예배드린 것이 문제였다. 그 분위기는 신자들이 성장하거나 불신자들이 복음을 이해하는 것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이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절을 비교하면, 우리는 신자들을 성장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는 명령(26절)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40절)는 명령과 나란히 간다. 변화는 주님을 흠모하는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부산물이다. ‘자유로운 예배’의 개념은 각 개인이 인도되는 대로 참여하는 예배로, 예배가 연합을 구현해야 한다는 깊은 현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에 다루기 힘든 개인들을 한 가족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예배에 질서가 없다면, 외부에서 관찰하는 사람은 우리가 원래 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을 질서 없이 행하고 있다고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기독교적 사랑에 대하여 가르친 후 바로 다음 장에서 예배를 드릴 때 품위 있고 질서 있게 드리며 모든 것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참되며 복음적인 사랑을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4-5)라고 묘사한 후에, “사랑을 추구”(14:1)하는 데 힘쓰라고 촉구하고, 이어서 바른 예배에 대해 묘사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무질서한 예배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예배의 품위는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바울이 이 특정 단어를 사용한 다른 두 번의 경우는 그가 도덕적 행위에 관하여 말할 때이다(롬 13:13; 살전 4:12).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함께 모이게 하였음을 보여 주거나 아니면 그것이 거짓임을 보여 주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다]”(살전 14:33)라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고린도에서의 혼란스런 예배는 교회 내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 전파를 저해했다. 불신자들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조차 막았다. 어느 부모든지 극심하게 혼란스런 유아원에 자기 아이를 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말하며 질서를 따르지 않는 무질서한 예배에 불신자들이 올지를 염려하며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 그는 “믿지 않는 자들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23절)라고 결론을 내린다.처음에, 우리는 이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고 싶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그가 예배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복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불신자가 ‘비영적’인 상태에 놓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예배에서 사랑이 없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더 중요한 차원의 문제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락방에서 하신 말씀이 아닌가?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 예수님의 기도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요 17:11, 21-23). 예배의 모든 부분은 우리가 서로 연합하고 있음을 반영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것을 위해 기도하셨고, 사셨으며, 이를 완성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방식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보여줄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의 예배가 연합성보다 개별성을 반영하게 되면,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에게 예수님이 사람들을 함께 모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바울이 사용한 용어를 사용하면, 고전 14:16)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하나같이 고백하고, 하나같이 노래하며, 하나같이 기도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전파하신 말씀 가운데 그들에게 언급하시는 것처럼 그들의 기도 속에서도 연합됨을 잘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외부자가 예배의 단일성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모아 거룩한 목적과 거룩한 사랑으로 연합시키시는 모습을 외부자가 볼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고전 13:8)라고 상기시킨 후에, 계속해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절)고 말한다.다음번에 예배드리는 장소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명령을 기억하라.출처: www.ligonier.org원제: Orderly Worship as a Witness to the World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주님
사랑
증거
바울
기독교적사랑
대명령
자유로운예배
기쁨과 슬픔은 늘 공존한다
by Winston T. Smith
2019-11-09
용서와 기쁨은 내 신앙의 오랜 초석이었다. 복잡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으므로 나는 기뻐한다는 식의 생각으로 교회를 다녔으며, 내가 출석하는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일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쁨으로 찬양하기에 열광적인 곡들을 불렀으며, 또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들었다. 내가 아는 한 그것이 ‘복음’이었다. 한동안 그럭저럭 도움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전문 상담가로 일하면서, 죄 용서와 기쁨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고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하루 일과 중 많은 시간을 어려움을 겪고, 깨어지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 보내야 했다. 그 결과 나 자신도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주일 교회에서 내가 보고 느낀 것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을 보는 일이 점점 더 힘들게 다가왔고, 내 솔직한 감정들을 숨겨야만 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정말로’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불협화음이 나를 진지하게 만들었다. 예수께서 내 고통을 알고 계시는지 간절히 알고 싶었고, 내가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내가 영적인 실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침내, 기쁨과 슬픔은 영적 대차 대조표에 적힌 자산과 부채처럼 서로를 상쇄하는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기쁨과 슬픔은 똑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주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고전 12:27).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다(골 3:12).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 안에 거한다(요 15:4). 이곳 및 다른 본문에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아들과 연합시키셨음을 가르치는데, 이는 단순한 법적 거래 이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비하고도 지극히 실제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우리의 인생은 점점 더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 우리가 성숙해갈수록, 그리스도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고 그리스도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이 되어간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목회자들이 특히 잊지 말아야 한다. 목사의 소명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그가 섬기는 성도들에게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비춰 보여주는 것도 포함한다. 바울이 썼듯이, 진정한 사랑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게 한다(롬 12:15). 즐거워하는 것과 우는 것 모두 자기 백성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사명은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섬기는 과정에서 그 둘이 적절하게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기뻐하고 있다면 나도 그 기쁨에 동참한다. 슬픔에 잠긴 이를 보면 그 슬픔에 동참한다. 종종 기쁨과 슬픔은 마구 섞인 채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자주, 오랜 기쁨 또는 오랜 슬픔의 시기를 통과하기도 한다. 또한 너무도 자주, 목사는 슬픔에 빠진 이를 기쁨으로 인도하고, 즐거워하는 이들을 주어진 상황에 맞게 슬픔으로 인도하기도 해야 한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지난 6년은 내게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이 시기에 부모님뿐 아니라 내 형님까지 세상을 떠났다. 가까운 지인들은 만성 질환, 우울증 등 다양한 비극들을 겪었다. 최근 친구 한 명과 함께 내 어려운 시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놀랍게도 그 시기 내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사랑하심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를 생각하고 있었을 때, 내 친구가 라 스토르타(La Storta)에 있던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Loyola)를 그린 작은 그림 하나를 보여 주었다. 그 그림에서 이그나티우스는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부르시는 환상을 본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다른 사제들이 상처 입은 어떤 사람을 업고 걸어가는 모습을 배경에 그려 넣었다. “목회는 단순히 ‘자네’ 십자가만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네. ‘다른 이들’ 역시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거기서 자네가 위로를 얻기 바라네.” 슬픔을 겪는 이들을 받아주고 심지어 그들을 업고 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고, 이는 목사 소명의 중요한 부분이다. 다른 이들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회라는 것을 깨닫자 내게 힘과 용기가 생겼고, 역설적이게도 소망이 생겨났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넌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야?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을 때가 많지만, 우리가 확신하는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랑 안에서 서로의 슬픔을 나눠 지고 함께 걸어가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슬픔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억제되고 또한 성숙된다. 부활의 삶당연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복음의 결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표현이나,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완전한 형태로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가 경험할 부활을 보여 준다는 약속에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기쁨이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죄와 죽음이 승리하고 우리 삶에 고통이 끝없이 일어나는 것 같아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것들을 비춰볼 때 그것들은 일시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지닌 기쁨은 이 세상에서는 잠시 억눌려질 수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미래의 구원의 약속 위에 굳게 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승리는 ‘전적으로’ 미래 시제인 것만은 아니다. 부활의 사역은 아주 실제적인 방식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라. 그는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 1:19–20)라고 하였다. 달리 말해 부활의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고통의 시간을 통과할 때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기쁨의 근원이 된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우리는 부활의 삶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육체가 약해지고 있지만, 달리 보면 우리는 매일 새로워져 간다(고후 4:16).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관찰하고 실제로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기쁨을 배가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삶 속의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심에 뿌리를 둔 기쁨을 경험하면, 특히 어두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할 때에, 지속될 뿐 아니라 자라기까지 하는 기쁨을 계속 누릴 수 있게 된다.균형이라기보다, 사랑우리는 바울의 신학을 흔히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구속하셨으나 우리는 아직 우리의 영광스러운 최종 상태에 이르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삶은 여러 가지를 뒤섞어 담아놓은 봉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구원으로 인한 기쁨을 경험하기도 하나, 이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는 계속되는 죄악과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 현실이 그러하므로, 그 안에서 균형을 잡는 것보다는 그것들을 사랑으로 마주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기쁨이나 슬픔은 올 때가 있고 갈 때가 있다.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이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지도록, 우리는 그저 사랑 안에서 그것들을 대할 뿐이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In Ministry, Joy and Sorrow Don’t Cancel Each Other Out번역: 이정훈
복음
부활
죄악
고통
능력
기쁨
슬픔
사랑
이그나티우스
우리 아이 소셜 미디어 바른 사용을 돕는 원리
by William P. Smith
2019-11-08
나는 소셜 미디어에 글이나 사진을 게시한 후에 종종 후회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추후에 삭제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물론, 이를 감사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소셜 미디어에 쓴 글의 내용이나 방식 혹은 첨부한 사진이나 영상을 삭제하고 싶은 것이었겠지만, 우리 모두는 원치 않은 것들을 소셜 미디어에 내보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성인들에게 사실인 것은 아이들에게는 훨씬 더 그렇다.소셜 미디어는 얼굴을 마주하는 상호작용과는 다른 소통의 차원을 제공한다. 이러한 차원의 영향력을 무시하면, 당신과 당신의 자녀는 후회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상의 세계가 우리의 삶에 도전하는 면을 이해하면, 그러한 소통의 차원을 개인 성장의 촉매제로 바꾸고 관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다.직접 나누는 정기적인 대화와는 다르다소셜 미디어가 직접 만나서 나누는 상호작용과 다른 세 가지 중요한 방식을 생각해 보자.첫째, 어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익명적이다. 당신이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아마 절대 만나지 않을 사람과도 가상의 세계에서 만난다. 그들의 견해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견해보다 그다지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당신은 직접 만나는 사람들보다 온라인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할 지에 대해 그리 크게 주의하지 않게 된다. 둘째, 당신의 말과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구체화된 피드백이 당신에게 바로 오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고 직접 이야기하게 되면, 그들이 미소를 짓고, 찡그리며, 창피해 하거나 속상해 하고, 웃거나 울며, 계속 이야기하거나 돌아서서 가버리거나 할 때,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된다.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 사이에 시공간적 거리를 생기게 함으로 이러한 영향력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 셋째, 극적인 것들에 피드백이 많이 온다. 인간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군가를 볼 수 없다면 당신이 중요한 지를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결국 당신은 댓글과 논평 및 이모티콘을 통한 간접적인 피드백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은 주의를 끌기 위해 애쓰고 있는 수십 억 명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응답이라도 받기 위해 눈에 띄어야 하며, 그러려면 도발적으로 말하거나 행하게 된다. 좋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당신의 삶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온라인상의 낯선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직접 만나서는 절대 말하지 않을 만한 것을 온라인에서 말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 방법은 당신을 유혹하는 만큼 당신의 자녀들도 유혹한다.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접근하면, 당신은 온라인 소통을 좋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적어도 5가지 접근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1. 아무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수 없음을 기억하라소셜 미디어에서 우리가 주의를 덜 기울이는 경향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밀을 간직할 수 없다는 점을 현실로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모두 감찰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렘 17:10; 계 2:23). 나중에 후회하는 게시물이나 당신이 겨우 게시하기를 모면한 부끄러운 게시물로 인해서 당신과 당신의 자녀가 무엇을 알게 되는가? 당신이 무엇을 게시했느냐의 여부와 그것을 후회하느냐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이미 보고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당신은 마음의 이면에 숨어 있는 어두운 현실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된다(창 6:15; 8:21). 그리고 이렇게라도 자신에게 좀 더 투명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주님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숨길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가기는 쉽지만,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는 그 영향력을 알기만 하면, 마주 대하는 관계에서 여과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 제거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당신 스스로를 좀 더 솔직하게 보게 한다. 2. 자신을 솔직하게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으라어두운 세계에서 스스로를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당신의 자녀가 이해하도록 도우라. 악의 힘은 우리가 자신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악된 성향과 함께 음모를 꾸민다(고후 4:4; 롬 1:18).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 내면의 추악한 모습을 벗겨내서 회개할 수 있게 한다(롬 2:4). 그 가면이 벗겨지면, 그것을 의식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용서를 구하라. 당신은 잃을 것이 없다. 아무것도, 내재하는 죄조차도, 당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롬 8:31–39). 그러한 안정감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여 당신이 가상의 세계와 관련하여 하고 있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보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모든 죄악된 행위와 성향까지도 빠르고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게 한다. 3. 당신이 보는 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라회개하고 죄에서 깨끗하게 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당신이 하는 말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배우기 위해서는, 당신이 막 게시하려는 내용을 읽을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 의해 읽혀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해 보기 위해 당신이 쓴 글을 게시하기 전에 잠시 시간을 내는 것이 좋다. 누군가의 얼굴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라. 그리고 스스로 물어보라. 그들이 내 게시물을 읽을 때, 내가 한 말로 인해 도움이나 용기를 얻거나, 도전받거나, 더 좋아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마음이 상하고 실망하며, 낙심하고 속상해 하거나, 악이 좋거나 혹은 선이 나쁘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겠는가? 4. 인터넷에서는 비밀이 없음을 기억하라자녀들에게 이 점을 기억하게 하라. 그들이 한번 ‘엔터’키를 치고 나면, 게시물은 나름대로 활동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점을 그들에게 알게 해야 한다. 하나를 삭제하더라도, 누군가가 이미 그것을 복사해서 계속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네 말을 온 세상 사람들이 듣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말하거나 쓰지 말라”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칠 좋은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소통 원리는 우리가 평생 노력해야 할 목표이지만(눅 12:2-3), 온라인 대화에서는 아주 본질적으로 기억해야 할 원리이다. 자녀들이 온라인으로 말하는 방식에서 좀 더 지혜롭게 되도록 돕기 위해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 묻도록 가르치라. “나의 부모, 나의 자녀들, 잠재적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그리고 미래의 고용주 혹은 나의 목사님 등이 내가 올린 게시물을 읽더라도, 여전히 괜찮을까?” 5. 현실 공동체를 성장시키라올리려는 게시물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지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후회하지 않을 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고 하더라도, 당신이나 당신의 자녀가 그것을 게시할 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모를 때가 있을 것이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 나는 나의 결점을 이미 알면서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며 믿어주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 불확실성의 가상 공동체와 실제 세계가 견고하게 연결되도록 하여 양쪽 환경을 개선하도록 사용할 수 있다. 성장의 도구온라인 공동체는 다른 방법으로는 말하지 않을 만한 것을 말하게 유혹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또한 당신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그 기회를 진지하게 여기고 당신 자신을 명확히 보며, 더 빨리 은혜를 얻고, 그것을 시공간적으로 당신을 정말로 잘 아는 사람과의 관계를 세워가는 기회로 삼으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Ways to Help Kids Communicate Well on Social Media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소셜미디어
용도
피드백
영향
현실공동체
성장의도구
사도 요한이 전하는 선교를 돕는 다섯 원리
by Andy Johnson
2019-11-07
사도 요한은 그의 세 번째 서신에서 그의 친구 가이오에게 순회 복음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선교사 파송과 지원에 대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성경적 원리를 제공한다.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쓴다.“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요삼 1-8).이 짧은 본문 안에는 선교에 직접 관련된 많은 지침들이 담겨 있다.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선교사 파송과 지원에 대한 다섯 가지 원리들을 생각해 보자. 1. 크리스천은 선교와 선교사에 대해 관심을 보여야 한다(3, 5, 8절)요한은 그의 친구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하고서,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라고 확고히 말한다. 그 다음에 그는 “우리가 이같은 자들[선교사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마무리한다. 성경말씀은 복음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열망은 기본적으로 크리스천에게 당연한 일이라고 명백히 말한다.2. 선교사 지원에 지역 교회들이 서로 협조해야 한다(3, 7절)이와 유사하게, 여러 지역 교회들이 선교에 협조하는 일은 당연히 선한 일로 여겨졌다. 이들 복음 사역자들은 (아마도 요한의 교회일 가능성이 큰) 다른 교회에서 보내졌다. 가이오에게 “나그네 된 자들”(5절)이라고 했으므로, 확실하게 그들은 그의 회중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한은 가이오에게 이 사람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요한의 교회와 가이오의 교회가 진리를 위하여 함께 동역할 수 있도록 말이다. 선교사들을 공동으로 지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예를 높이는 진정한 복음 동역자 관계이다. 3. 지원해야 할 선교사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6-8절)누구를 지원해야 할 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도 요한은 우리를 위해 그 목록을 상당하게 줄여 준다. 분명히 크리스천들 중에서 박해 때문에 흩어질 때나(행 8:4) 혹은 사업을 목적으로 여행을 할 때(약 4:13)도 복음을 나누기 원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파송된 사람들을 지원하는 특별한 의무에 대해 설명한다. 이들은 우리가 물질적 지원을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다.세계화가 되었고 유동성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재림까지는 항상 교회가 국제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고, 파송하며, 재정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요한은 이 선교사들이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복음으로 돈을 벌지 않고 있다는 의미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 사역에만 전념하는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한다. 이 일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린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만 지역 교회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선교사라 부른다. 선교사들은 그냥 자유롭게 사역하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그들이 지원받는 만큼 또한 책임을 가지고 특정한 지역 교회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요한삼서에서 언급된 선교사들은 아마도 에베소에 있는 요한의 교회에서 파송되어 그 교회에 대한 책임이 있을 것이다.6절에 나오듯이, 선교사들이 교회와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인지했는가? 요한은 가이오에게 이 선교사들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 가이오에 의해 지원을 받은 후에 그들은 그들을 파송한 교회에 돌아와서 보고를 했다. 요한의 서신은 교회의 승인을 받은 선교사들에 대한 교회의 칭찬을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적 선교사들은 지역 교회와 연결되어 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러한 방식이었다. 4. 선교사에 대한 지원은 풍부해야 한다(6절)요한은 선교사에 대한 우리의 지원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명확히 한다. 풍성하고, 풍부하며, ‘하나님께 합당하게’ 공급해야 한다고 한다. 크리스천 사역자들이 충분히 공급받아야 할 것이라는 언급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온다. 바울도 디도에게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딛 3:13)라고 가르친다. 선교사들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우리가 지원해야 한다. 마치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예수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5. 선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이어야 한다(7-8절)마지막으로, 선교사로 나가고 파송하며 지원하고자 하는 동기는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는 선교 사역의 원동력이다.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필요한 요소들은 매우 많지만, 요한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보내라고 강조한다. 요한삼서에서 말하는 이 다섯 가지 원리는 명백하다. 이 원리를 지키면 교회가 선교 사업을 지원하는 방법에 변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Mission Principles from Scripture’s Shortest Book번역: 정은심
선교지침
가이오
요한
파송
지원
관심
협조
영광
인정받지 못해도 기쁘게 섬겨라
by Betsy Childs Howard
2019-11-06
수요일 밤이다. 나는 수요일 마다 우리 집에서 모이는 성경공부 그룹을 위하여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 음식은 제 시간에 먹을 수 있도록 늘 준비된다. 회원들은 퇴근 후 각지에서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감탄을 하고, 음식은 실제로 맛이 있다. 남자 회원들은 한 번씩 더 먹고, 여자 회원들은 음식이 정말 맛있다고 재차 말한다. 그러면, ‘나는 섬기기를 좋아해!’라며 속으로 조용히 뿌듯해한다.목요일 밤이다. 나는 남편과 나를 위해 저녁 식사를 만든다. 마늘을 사오지 않아서 식료품점에 다시 갔다 오는 바람에 식사 준비가 좀 늦어진다. 음식이 빨리 익기를 기대하며 오븐을 켠다. 부엌은 더워지고 나는 약간 땀이 나지만, 계획한 시간보다 그리 많이 늦지 않게 식탁에 앉는다. 내가 닭가슴살을 자르자, 가운데가 완전히 익지 않아 핑크 색이 보인다. 남편을 처다보니, 아무말 없이 닭가슴살 주변을 가만히 자르고 있다.나는 열정적인 자기 방어의 내적 독백을 시작한다. “그는 내가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는지 모를거야. 우리 오븐은 믿을만하지 못해. 나는 교회를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어. 사실 닭이 잘 익지 않은 것은 내 잘못이 아니잖아!” 이 두 시나리오는 섬김에 대한 나의 애증 관계를 잘 포착하고 있다. 섬김이 나를 좋아 보이게 할 때는 보람이 있다. 덜 익은 닭요리처럼 나의 섬김에 결점이 있을 때는, 화가 나서 다른 사람 탓을 하고 싶어진다. 다른 사람이 나의 섬김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분개한다.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자내가 아는 많은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섬김을 가치 있는 선한 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20:26)라고 말씀하셨다. 더구나, 어린 아이들이나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경우처럼 어떤 관계에서는 우리가 상대방을 섬겨야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의 섬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즐겁게 섬겨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경우, 나의 섬김을 영적인 면에서 보고, 내가 그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주인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섬길 이웃을 내게 주셨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인정보다 그들의 인정을 얻으려고 섬기면, 그들을 주인의 위치에 놓게 되며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을 기대하자사람들이 우리의 섬김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감사하지 않으면, 섬기는 일이 우리에게 더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넣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힘든 일에 보상을 받고 싶어하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가 인정받고 싶어하는 소망없이 희생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설계하신 방식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섬김으로 본을 보이면 복 받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요 13:12-17). 우리가 보상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람들로부터 기대하는 것이 문제이다.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바울이 실제로 섬기는 자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대한 영적 동기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2–24).당신이 1세기 당시의 계약 노동자라고 상상해보라. 당신은 매일 강에 가서 주인의 옷을 빨고 천연 섬유가 하얗게 되도록 햇빛에 말린다. 당신은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한 점을 알아차리기를 소망하지만,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는 당신을 조롱하고 거친 말을 함으로 자신의 나쁜 기분을 당신에게 쏟아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당신의 수고가 전혀 인정받지 못할 것이므로 열심히 노력하기를 멈출 수 있다. 아니면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당신의 수고를 알고 그로 인해 기뻐할 것을 알고 있으므로 여전히 최선을 다하려 할 수 있다. 당신은 현실의 주인이 전혀 모르는 방식으로 섬기고 유익을 줄 수도 있다. 그러면,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에게 보상해줄 것을 알기 때문에, 현실의 주인이 알아주지는 않지만 훌륭히 섬김으로 오는 기쁨의 비밀을 간직할 수 있다.우리 주님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이 무엇일까? 골로새서 3장에 나와 있듯이, 우리는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를 섬기는 자들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우리는 인정받고 싶은 갈망으로 누군가를 섬긴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설계하신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갈망을 충족시켜줄 수 없는 사람에게서 찾고 있다.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라고 경고했다. 이 경고에 숨어 있는 메시지는 다가올 생애에서 우리 아버지는 이 땅에서 인정받지 못한 선한 행실을 축하하실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소식이다. 이 약속된 보상을 고대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며 그분의 상속자임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다.예수님처럼 섬기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사는 변화된 삶은 어떤 모습일까? 다른 사람의 평가에 으쓱하기 보다는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섬기는가? 그것은 직장 동료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매주 직장에서 커피포트를 씻어 놓는 모습일 수 있다. 그것은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족들이 자신을 잊었다고 심히 불평하는 말을 하더라도, 당신이 그녀를 기쁘게 방문하는 모습일 수 있다.그것은 마트에서 후식을 사오는 능력을 아무도 인상적으로 여기지 않더라도,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그 후식을 제공하는 모습을 의미할 수 있다.기금 모금 행사에서 실내장식 자원봉사가 더 재미있고 인정을 더 많이 받는다고 알고 있더라도, 기꺼이 청소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일 수 있다.지난 번 이웃의 아이를 돌봐주었을 때, 그 아이가 설사를 하여 곤란했었는데, 이웃이 그것을 개의치도 않고 감사하는 것 같지도 않았더라도, 그 아이를 기쁘게 다시 돌봐주겠다고 하는 모습일 수 있다. 우리가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섬기는 수고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이미지를 강화하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고, 이웃의 필요를 어떻게 하면 잘 채워줄 수 있을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 우리의 섬김을 훈훈하게 인정해줄 때는 어떤가? 자녀가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엄마라고 말해 줄 때, 혹은 당신의 직장 동료가 상사에게 당신이 주어진 일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는 이메일을 보냈다면 어떤가? 우리는 우리의 섬김이 인정되는 순간을 위하여 살 수는 없으며, 다른 이들이 우리의 섬김에 대해 칭찬하기를 기대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우리의 섬김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모습을 그들을 통해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게 해준다는 면에서 그들의 칭찬을 즐거워할 수는 있다.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하려고 인간의 종이 되셨고, 이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셨다. 예수님은 섬기려고 온 사람들에게 멸시와 거절을 당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빌 2:9) 보상으로 받았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든지 아니면 멸시를 받든지 상관없이, 우리도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섬기면 그분이 주시는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Great Reward in Thankless Service번역: 정은심
생활
관계
인정
섬김
보상
칭찬
기쁨
예수님
거짓 선생에 관한 놀라운 진실
by David Mathis
2019-11-05
거짓 선생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이 질문은 굳이 던질 필요도 없다. 누구나 다 들으니까. 문제는 ‘과연 그 메시지를 듣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분별할 수 있는가’이다. 텔레비전, 라디오, 팟캐스트, 뉴스 등을 보고 듣거나 또는 다른 누군가와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될 때 지금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예외 없이 거짓 가르침에 쉽게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이 거짓 목소리를 아예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건 당신이 거짓에 노출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아예 거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언제나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했다. 말씀을 손으로 필사했거나 말씀을 전파하는 선생들은 걷거나 말을 타고 움직여야 했다. 그땐 자동차도, 비행기도 또 인쇄기술이나 웹사이트 또는 페이스북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거짓 선생들은 다 트위터 계정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기가 훨씬 쉬워진 지금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수많은 거짓 선생들 중에서 참된 선생을 분별할 수 있을까? 거짓 선생들이 일어난다거짓 가르침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들리는 잘못된 가르침에 놀랄 필요가 없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거짓 선생들이 무수히 생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장담할 정도였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막 13:22-23; 혹은 마 24:24).마찬가지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경고했고(행 20:29-31), 또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도(딤후 4:3-4) 거짓 선생들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했다(딤전 4:1과 딤후 3:1-6). 우리가 이런 부분에 여전히 의구심을 가진다면, 이런 경고에는 베드로까지 가세해서 그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 2:1).자, 거짓 선생들이 이미 교회 역사를 통해서 숱하게 생겼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건 지금 우리 시대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교리와 삶을 자세히 보라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아주 놀라운 사실은 거짓 선생들의 삶이 그들의 거짓 가르침을 증명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가르침에서만 거짓이 아니라, 삶에서도 거짓이다. 교리적인 오류 아래에는 비록 매우 교묘하고 속기 쉽지만 언제나 윤리적인 타협이 숨어있다. 그런 타협은 보통 하룻밤 사이에 밖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드러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반드시 나오게 되어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15-20에서 우리에게 대비할 것을 알려주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눅 6:43–44도 참조).예수님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했고, 우리는 그걸 놓치면 안 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처음에 보면 예수님의 경고가 명확하고 단순한 것 같지만,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나무는 하룻밤 사이에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에는 열매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윤리적인 타협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적인 방에서 속삭임으로 시작한 것이 조만간 지붕 위에서 외치는 소리로 바뀔 수 있다(눅 12:3). 그렇기에 바울은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지도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르침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들의 삶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행 20:28; 딤전 4:16). 의심의 여지없이 단번에 거짓 선생을 알아볼 수는 없다. 그들의 개인적인 삶을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없는 경우에, 또 교리적 타락이 행동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경우에, 그들이 바른 선생인지 거짓 선생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룬 사역의 양과 숫자의 열매가 아니라 사역의 특징과 인내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열매로 알게 될 것이다.돈, 성, 그리고 권력이 주는 매력거짓 가르침의 열매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가 새삼 어떻게 확장되는가라는 측면에서, 베드로후서 2장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짓 가르침에 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은 베드로가 타락한 삶에 관해서는 긴 설명을 하고 있다. 1절과 3절에서 ‘멸망하게 할 이단’과 ‘지어낸 말’이라는 용어를 통해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일반적인 언급을 하고 더 이상 그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나머지 모든 구절은 다 삶에 관해서이다. 핵심적인 내용으로 다음 세 가지를 요약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는 모두 다 가르침이 아닌 성품과 행동에 대한 것이다. • 교만 또는 주관하는 이를 멸시함(10절) – 1절,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12-13절과 18절).• 정욕, 보통 성적인 죄를 의미함 – 2절,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10, 12-14 그리고 19절).• 탐욕, 보통 돈과 물질적인 취득을 바람 – 3절,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14-15절). 베드로는 반복해서 탐욕, 정욕, 교만, 즉 다른 말로 하면 돈과 섹스 그리고 권력을 묘사한다. 역사를 통틀어서 볼 때, 거짓 선생들의 공통점은 그릇된 어떤 특정 교리가 아니라 지금 말한 세 가지 영역 중 어딘가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도덕적 타락이다.이 세 가지를 다른 방향에서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거짓 선생들이 저지르는 오류는 자신에게 짓는 죄, 타인에게 짓는 죄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짓는 죄라는 것이다. 탐욕으로 인해 그들은 양 떼를 물질적 필요를 위해 필요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정욕으로 인해 그들은 성적 범죄를 저지른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 말하듯이 간음, 간통 또는 동성애를 통해서이다. 교만으로 인해서, 그들은 “주관하는 이를 무시한다”(벧후 2:10), 그리고 더 큰 권위, 이 세상 모든 권위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무시한다.모든 거짓을 다 공부할 수는 없다거짓 가르침이 단지 그들이 말하고 쓰는 게 아니라 삶에 관한 것이라면,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그런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고 폭로할 수 있을까? 온라인이나 큰 집회를 통해서 설교를 듣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들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 않은가? 거짓 가르침에 대한 가장 좋은 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말씀대로 살고 또 말씀을 즐거워하는 지역교회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 지역교회의 리더가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먼 곳에 있는 지도자가 나를 돕는 것은 힘들겠지만, 내가 다니는 지역교회 지도자라면 훨씬 더 현실적이고 확실하게 나를 도울 수 있다. 우리를 지도하는 지도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너무 높게 평가해서 일반 그리스도인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목사는 성도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목자는 양과 똑같이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 목자도 다름 아닌 양무리 사이에서 살고 생활하는 존재이지 무리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도 똑같은 양이라는 사실을 먼저 자각한 목사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런 자각 이후에 자신을 리더이자 선생으로 인식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사역을 일궈낸 지도자라는 명성보다 천국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다는 사실에 더 기뻐하는 그런 목사가 필요하다(눅 10:20). 예수님이 그의 교회를 지키신다그러나 그걸 알고 있는가? 우리는 거짓 가르침에 대항한 좋은 시스템을 가질 수도 있고 또 지도자의 삶과 교리를 제대로 검증하기 위한 시스템도 얼마든지 갖출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 만든 이상, 절대 완전한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이 사실이 거짓 가르침에 대한 말씀 중에서도 절정에 해당하는 베드로후서 2:9이 제공하는 달콤한 확신이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가르침이 아무리 왜곡되어도, 비윤리적인 지도자 때문에 아무리 교회가 부끄러움을 당해도, 우리 주변이 아무리 어둡게 느껴져도, 복음을 지키고 또 복음에 따른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게 아무리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지속적인 위대한 희망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가장 위대하고 진실한 선생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구하고 또 우리 영혼을 파괴하는 잘못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가장 위대한 구원자이다. 교회가 아무리 소수가 되어도, 우리가 아무리 무력하게 느껴져도, 진정한 가르침과 진정한 삶의 모델이 되신 바로 그분은 우리 삶과 영혼을 지켜주신다. 하나님이 노아를 지켜주셨듯이(벧후 2:5) 또 롯을 구하셨듯이(벧후 2:7), 주님되신 예수님은 그의 경건한 백성을 거짓된 삶을 사는 거짓된 선생의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지켜주신다. 원제: The Surprising Truth About False Teachers 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연관 주제 함께 읽기 ▶ 이리 식별법 ▶ 이리를 조심하라: 거짓 교사의 세 가지 징후▶ 그래도 목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
근현대교회
거짓선생
놀라운진실
교리
삶
돈
성
권력
매력
베드로후서2장
처음
이전
156
페이지
157
페이지
158
페이지
열린
159
페이지
16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