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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TULIP이 주는 기쁨
by David Mathis
2019-11-27
최근 개혁신학이 다시 각광을 받으며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젊은 기독교인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스스로가 주장하는 신학에 어울리는 영적 성숙을 이루지 못한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칼빈주의 신학에 부합한 신앙의 덕목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 TULIP(칼빈주의 5대 강령: Total depravity, Unconditional election, Limited atonement, Irresistible grace, and Perseverance of the saints)에 짝을 이루는 또 다른 TULIP을 제안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 삶에서 열매 맺어야 하는지를 강조하고자 한다.전적 겸손(T: Total Humility)“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위의 두 구절에서 야고보와 베드로는 잠언 3장 34절을 인용했다(“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성경이 다루고 있는 위대한 주제는 이처럼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낮은 자리에 있는 자를 돌보며 세워 주신다는 내용이다(눅 1:48, 52; 14:11; 18:14; 약 4:10; 벧전 5:6).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낮춰 비천한 자를 도우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분의 기이한 영광을 보게 된다. 바로 여기에 칼빈주의의 핵심이자 정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 속에 내재하는 죄는 그와 달리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지식을 왜곡시켜 우리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려고 한다.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이다(마 18:4).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겸손한 왕으로서 오셨다. 그래서 건장하고 멋진 준마가 아니라 짐을 싣는 나귀에 올라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슥 9:9; 마 21:5).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만일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따르고자 칼빈주의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빌 2:3)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존 뉴턴(John Newt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야 할 칼빈주의가 악의와 분노와 경멸이 가득한 논쟁으로 훼손되고 말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물었다. “과연 당신이 신봉하는 칼빈주의는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었는가?”무조건적 친절(U: Unconditional Kindness)“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친절은 현대인의 시선으로 볼 때 하찮은 덕목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초대 교회의 이야기를 다룬 사도행전은 친절을 베푼 작은 행동들을 의미 있게 소개하고 있다(행 10:33; 24:4; 27:3; 28:2). 그뿐 아니라 신약의 다른 본문들도 친절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고후 6:6; 골 3:12; 딛 2:5). 이렇듯 모든 성도들은 “서로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엡 4:32). 교회에서 공인된 지도자라면 더욱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해야 한다(딤후 2:24). 친절은 성령의 열매일 뿐 아니라(갈 5:22),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고전 13:4).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절한 성품을 함양하라고 명하시는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세상에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다(눅 6:35). 그처럼 인자하시기 때문에, 또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신다(마 5:45). 더 나아가 그 인자하심은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만들기도 한다(롬 2:4). 그래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믿음을 통해 원가지에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롬 11:22).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며(딛 3:4), 또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시는 계획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에(엡 2:7),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자비가 타인의 삶 속으로도 흘러가도록 기도한다. 따라서 ‘인색한 칼빈주의자’라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한다.제한 비판(L: Limited Criticism)“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중략]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딤후 2:24-25).우리는 ‘4대 강령주의자’(four-pointer)와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참고로 4대 강령주의자란 칼빈주의 5대 강령에서 ‘제한 속죄’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 교리만을 수용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칼빈주의자는 비판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간혹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며, 세부적인 논점을 짚어 내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을 갖춘다고 해서 반드시 다툼을 일삼아야 하는 건 아니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이 “다투지 아니하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고 말했다.물론 성도들에 대해 책망해야 할 때가 있다(눅 17:3; 딤전 5:20; 딛 1:9, 13; 2:15). 이때 목회자는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딤후 2:2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바울은 종을 부리듯 회심한 성도들을 대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와 같이 그들을 대하며 권고했다(고전 4:14). 그 결과 때로는 눈물로 훈계했으며(행 20:31), 교회의 장로들에게도 그런 자세로 성도들을 대하라고 요구했다(살전 5:12, 14). 따라서 우리 모두는 사랑 가운데 서로의 잘못을 친절하게 고쳐 주며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해야 한다(골 3:16).이때 우리의 비판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또한 그 목적은 언제나 상대방을 세우는 데 있지 넘어뜨리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후 13:10). 그러니 날카로우면서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시선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담대하면서도 친절한 태도로 상대방에게 다가가 겸손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잘못을 짚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비판은 가급적 제한해야 한다.불가항력적 공손(I: Irresistible Graciousness)“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 4:6).이 구절은 젊은 칼빈주의자가 귀를 기울여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여기서 바울은 놀랍게도 ‘항상’이라고 강조했다. 누군가의 오류를 지적할 때에든,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릇된 문제에 맞서 싸울 때에든, 항상 은혜 가운데 말을 하려고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사람들에게 잘못을 알려 주거나 또는 그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할 때에도 은혜 가운데 말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평상시에 말을 하는 태도 자체가 공손한지 불손한지를 한번 돌아볼 필요도 있다. 그렇지 않고 영광스러운 ‘은혜의 교리’를 내세우면서 타인에게는 불손한 태도로 말을 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비극적인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토록 강조하는 칼빈주의자라면, 자신이 정말로 그 은혜 가운데 말하고 있는지도 신경 써야 한다.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다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눅 4:22). 그러므로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볼 때도, “은혜를 입술에 머금”었다고 말할 만큼 공손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시 45:2).만일 우리가 은혜 가운데 공손히 말한다면, 5대 강령을 둘러싼 논쟁도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게 될지 모른다. 바울은 은혜로운 말을 할 때 뒤따르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혔다.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참음 속의 인내(P: Perseverance in Patience)“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에 관해 묘사한 첫 번째 속성은 “사랑은 오래 참고”이다(고전 13:4). 또한 그는 인내야말로 자신의 사역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는 특징으로 여겼다(고후 6:6; 12:12 딤후 3:10). 그렇기에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참으라고 반복해서 권했다(살전 5:14; 딤후 2:24; 4:2). 심지어 디모데 후서 4장 2절에서는 단순히 참으라고 말하지 않고 “오래” 참으라고 명했다.분명 우리의 신학이 점점 더 하나님 중심적인 성격을 갖출수록, 우리의 삶도 점점 더 인내하는 모습을 갖춰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인내를 보여 주신 위대한 모델이기 때문이다(롬 2:4; 9:22; 벧전 3:20; 벧후 3:15). 그래서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도 우리에게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셨다(딤전 1:16).감출 수 없는 기쁨훌륭한 신학이 그에 못 미치는 행동으로 비방을 받는다면, 이는 얼마나 큰 수치겠는가! 하지만 그와 같은 행동으로 혹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다시 용기를 내야 한다(빌 1:6; 2:13). 이와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바울은 기도했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바로 이러한 인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혹 우리는 아무 기쁨도 없이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마땅히 깨달아야 할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우리가 지닌 기쁨을 드러내야 한다.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온유한 태도는 둘 다 중요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에 따라 최적의 타이밍이 되었을 때, 우리와 생각을 달리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실 것이다(빌 3:15). 이때 우리는 은혜 받은 자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바로 그 사역에 참여할 수가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Doctrines of Graciousness: Five More Points for Young Calvinists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칼빈주의
겸손
친절
공손
인내
비판
기쁨
설교 후에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by Dave Harvey
2019-11-26
설교자에게 있어 설교의 결론부는 조마조마한 순간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연구한 것을 온 열정을 다해 강해의 홍수 속에서 30–45분 내내 청중에게 쏟아부었다. 10–20시간에 걸친 설교 준비 시간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고, 설교자는 지금 차에 올라타 집으로 가기 위해 시동을 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매우 지쳐 있다.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말이다.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강단 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이는 내 경험이기도 하다. 지난 30년간 설교자로 섬기면서, 설교 직후에 뭘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배웠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경계를 늦추지 말라설교는 우리의 대적에게 매주 싸움을 거는 행위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고 말한다. 죄인들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중략]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으로부터 낚아채 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설교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바꾸시고, 그들이 대적들의 지배로부터 탈출하도록 하신다. 복음을 전하는 설교에 대한 사단의 생각은 확고하다.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사단의 총에 달린 조준용 십자선에서 벗어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물론 연구, 묵상, 기도를 통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설교자들이 보호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설교를 마치고 나면 설교자는 탈진하여 텅 빈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해 설교자는 이제 폭격의 위험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육신의 옛사람도 당신을 노린다. 설교는 많은 유혹을 의미하는데, 먼저, 하나님이 당신을 쓰신다는 교만이 있겠고, 또한, 당신을 쓰시지 않는 것 같을 때 느껴지는 정죄감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듯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잠 10:19), 우리는 많은 말을 쏟아 내어 설교 한 편을 전한다. 사람이 설교를 전할 때면 오류들이 넘치도록 생겨나게 마련이다. 일정 기간 설교를 해 본 사람이라면 실수가 없는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그런 약점들이 예배를 마친 주일 오후에 아주 친근한 방문자의 모습으로 찾아와 당신의 집 문을 두드릴 것이다. 절대 문을 열어 주지 말라. 문을 열어 주면 집으로 쳐들어와 당신의 평강을 해치고 당신 눈앞에서 당신의 설교를 왜곡할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고, 정죄감도 일어날 것이다. 마치 그날 전한 설교 전체가 완전히 엉망이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다. 설교 직후에 설교를 평가하면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혐오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 후에는 육신의 옛사람 및 사단으로부터 동시에 오는 공격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 군인들이 적의 맹공격에 대비하듯, 우리 역시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공격 전에, 공격 중에, 그리고 공격을 당한 후에는, 언제나 복음의 좋은 소식으로 달려가라. 설교는 당신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관한 것임을 기억하라. 인류 역사에 있어, 너무 엉망인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힘을 완전히 가려 버렸던 설교는 없었다. 주님은 위대한 분이므로 회중으로 하여금 설교자의 어리석은 말은 잊고 당신 자신의 영원한 말씀을 기억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이 정말 당신이 하는 설교의 질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가? 착각하지 말라. 주일 오후마다 이 사실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라.설교를 마치면, 공격에 대비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실수보다 크신 분임을 기억하라. 2. 당신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공격을 받는 중에는 우리 영혼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정죄하는 생각들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며 당신 마음의 문을 쾅쾅 두드릴 것이다. 또는 스스로를 높이는 생각들, 즉 당신의 자기애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떠올라 당신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롬 12:3)을 품어 스스로를 높이게 된다. 그런 순간이 오면, 당신 영혼의 목소리를 죽여야 한다. 설교의 결과를 주님께 맡겨 드림으로 당신의 영혼을 잠잠케 하라. 당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께 당신의 생각을 고정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잠잠케 하라. 자만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전한 메시지에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당신의 설교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기억하라. 정죄감이 든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사 55:11). 당신이 전하는 설교는 정확하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만 성취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당신이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내 형제 같은 목회자들이여, 당신을 덮친 적의 공격을 무시하고 탁월한 것들에 생각을 고정하라(빌 4:8).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차를 몰고 돌아오는 설교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는 시편 말씀이다(46:10). 이렇게 해야 비난과 칭찬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이 한 설교를 하나님께 맡긴 후에는 마음의 쉼을 누리라.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려 보라. 내 경우, 설교 후에 다시 힘을 얻기까지 적어도 두세 시간은 걸리곤 한다. 그 시간에 나는 책을 읽고, TV를 보거나, 잠을 청하기도 한다. 자녀들이 더 어렸을 때에는 아이들과 놀아 주면서 내 주의를 교회로부터 돌리고 에너지를 다시 충전시키곤 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한 번 하는 것은 여덟 시간의 육체노동과 맞먹는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몸과 영혼을 보살펴서 다시 힘을 내어 일어나, 다음 설교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 칭찬의 말을 건져 내기 위해 낚시질하지 말라설교를 하고 나면 비난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흠모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때문에, 설교자는 칭찬의 말을 찾아 낚시질을 해보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설교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 다시 말해 설교자로서의 정체성을 고양해 줄 수 있는 반응을 끌어내는 유도 질문들을 던지고 싶어진다. 나도 셀 수 없이 많이 해 본 일이다. 옆구리를 찔러 받아 내는 칭찬만큼 피상적인 것도 없다. 칭찬의 말을 고대하며 낚싯줄을 드리웠다가 낚싯대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비판’의 물고기가 걸려 올라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로 인해 낚시를 할 때는 어떤 고기를 낚을지 전혀 알 수가 없음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낚시질 이면에 숨은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설교 전달 행위에 너무나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설교가 잘 전달되었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마치 설교가 어떻게 “느껴졌는지”가 하나님이 하시던 일, 하실 일에 대한 측정 기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드리기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통해 우리 자신을 떠받치고자 한다. 일반 성도들이 직장에서 십 년 동안 받는 격려의 말들을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한 달이면 받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라. 낚시질을 멈추라. 칭찬의 말이 들려올 땐 하나님께로 영광을 돌리라. 그리고 제발, 자기 설교 팟캐스트는 듣지 말라. 자기가 한 설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주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 설교자이기 때문이다. 최소 15시간에서 20시간을 그 설교 준비에 쏟았다는 것은 이미 자기 설교에 대해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정말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경험 많은 다른 목회자들 또는 성도들 중에서 당신의 인정을 갈구하지는 않지만 신뢰할 수 있는 이들에게 부탁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건설적인 피드백을 달라고 부탁하라. 피드백이 오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감사의 마음을 전하라. 스펄전의 불만족 이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난 3세기 동안 최고의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족스러웠던 설교를 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 아마 한 적이 없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이가 ‘설교자의 황제’로 불렸던 그 사람이다. 스펄전이 자기 설교에 만족하지 못했다면, 똑같은 인간에 불과한 당신과 나 같은 이도 그리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때를 대비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3 Things Not To Do After You Preach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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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적피드백
스펄전의불만족
제임스 패커가 말하는 '참된 회개'
by Sam Storms
2019-11-25
거룩한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회개가 있을 수밖에 없다. 회개란 하나님을 향해 처음으로 돌이킬 때 한 번 하고 마는 일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습관적인 행동이자 자세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경건 생활에 필수적이며 그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영적 훈련이 회개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회개란 과연 무엇인가?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또한 그 특징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패커를 면밀히 연구해 보면, 그에게 있어 회개라는 주제는 상호 연관된 여러 내용들을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참된 회개를 하게 되면 죄가 무엇이며 또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생각과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마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회개는 우리의 사고와 자세와 신념 체계가 여러 가지 면에서 성경에 계시된 진리와는 상반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로 시작된다. 우리는 본성상 비뚤어지고 뒤틀려 있는데, 이런 상태는 진리를 판단하는 과정에도 반영된다. 그래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거나 가증하게 여기는 대상들이 하나님의 가치 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회개는 이런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깨닫는 일은 참된 회개의 시작에 불과하다.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친다고 해서 회개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행동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즉 우리의 죄악되고 반역적인 생각이 야기하는 여러 가지 행실을 자각하고 계속해서 멀리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패커는 ‘거룩의 재발견’(Rediscovering Holiness)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회개는 앞서 저지른 행동을 거부하는 일, 자신의 생활과 관계에 해악을 끼친 나쁜 행실을 중단하는 일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언급된 회개는 신학적인 용어로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며 금지하시는 행동을 하여 그분께 반항했던 지난날의 행실을 버리는 과정을 가리킨다. [중략] 따라서 회개는 우리가 지닌 사고의 습관, 자세, 견해, 계획, 방향, 행동 따위가 충분히 변화되어 우리의 인생이 잘못된 상태에서 올바른 상태로 회복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회개란 사실상 영적 혁명이다.”이러한 참된 회개는 정서적인 슬픔과 깊은 뉘우침을 동반한다. 물론 자신의 죄악에 대해 단순히 후회한다고 해서 그 자체를 회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반항해 온 삶에 대해 그 잘못을 깊이 깨닫고 거기에 수반되는 고통을 느끼지도 않고 회개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처럼 죄악된 생활을 후회하는 감정이 반드시 찾아오기에, 회개는 이전의 어두운 인생길에서 적극적으로 돌이켜 하나님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께 감사드릴 뿐 아니라, 그분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감정이 회개에 뒤따르든, 그 감정은 불순종했던 이전의 모든 생활 방식을 버리고 싶게끔 만든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는 것이 회개의 일면이라면, 또 다른 일면은 그 범죄를 낳은 행실을 버리는 것이다. 이 양면이 참된 회개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된다. 따라서 회개에는 자신이 돌이키기 전에 살았던 삶을 돌아보는 뉘우침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헌신적인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 역시 포함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신자는, 과거에 불신앙적으로 행한 그 어떤 모습도 다시금 자신의 생활 속에 자리하지 못하도록 스스로의 마음과 습관을 계속해서 점검한다.여기서 더 나아가 패커는 ‘겸손’을 회개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 본다. “우리는 낮아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참고로 겸손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humility’는 ‘낮은’을 의미하는 라틴어 ‘humilis’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작아짐으로써 커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은 이 겸손만큼 우리의 본능을 거스르고 시대정신에 반하는 개념도 없다. 하지만 겸손이야말로 개인의 성취를 추구하는 모든 형태의 그릇된 신앙이나 세속적인 모범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특징이 된다. 그래서 성경 저자들이 겸손과 회개를 말할 때는, “개인의 미약함을 통해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은혜의 위대함이 나타나게 되는 변화”를 염두에 두었다. “이렇게 변화되는 성장은 다름 아닌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받아 주신 하나님만이 인생의 전부가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나타난다.” 따라서 회개는 “옛 자아가 계속해서 작아지는” 과정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더 크게 드러나기를 소원하기 때문이다.이처럼 평생에 걸친 회개의 마음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부터 갖추어지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나타나는 초월적인 영광에 매료되어 거기에 마음을 빼앗김과 동시에, 그와는 조금 달리 느껴질 수 있는 거룩과 공의와 순결에도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커는 이렇게 설명했다.“하나님의 자비와 엄위를 동시에 지각하는 그리스도인의 감각으로부터 평생에 걸친 회개가 경건 생활에 필수적임을 아는 지식이 자라난다. 이 지식은 그 외의 다른 어떤 조건에서도 자라나지 않는다. 이 지식이 결핍되면, 자기만족이라든가 죄에 대한 근시안적 견해로 인해 마땅히 드러나야 할 거룩한 삶이 드러나지 못하고 훼손되고 만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회개의 필요성을 깨닫거나 강조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영혼이 성장을 멈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성경이 증언하는 거룩하신 분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건이 아직도 요원하다.”결국 참된 회개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함으로써 자기 신념이나 현대 심리학자들이 일컫는 방어 의식 따위에서 벗어나 오직 성경이 묘사하는 진심 어린 죄의 자각을 경험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회개는 불순종으로 가득했던 자기 중심적 삶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적 삶을 살도록 이끈다. 바로 그 결과로 인해 우리 모두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백성을 섬기며, 또한 그분이 주신 말씀을 순종하는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출처: www.crossway.org원제: J. I. Packer’s Thoughts on Holiness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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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혁명
복음을 앗아가는 두 대적
by 고상섭
2019-11-23
팀 켈러(Tim Keller)는 그의 저서 ‘센터처치’(Center Church)에서 오늘날 설교 강단에서 복음과 그 혜택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복음의 능력을 앗아가는 두 가지 오류가 발생되는데 그것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이다. 터툴리안은 “예수님께서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복음은 두 오류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했다. 이 두 오류는 ‘종교’, ‘비종교’ 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도덕주의, 상대주의라고도 불리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가리키는 말이다(팀 켈러, ‘센터처치,’ 59).복음과 복음의 혜택이 분리되지 않는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그 일로 인해 구원을 받은 은혜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복음과 그 혜택이 분리가 되면, 구원을 얻었으니까 이제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흔히 설교자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설교’를 행할 때 성도들이 ‘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율법주의’란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율법주의’에 걸린 성도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노력하기를 포기하면서 ‘반율법주의’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은 ‘온전한 그리스도’(The Whole Christ)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했다(109).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동일한 뿌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누가복음 15장을 설교한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일 것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어떻게 등장하는가?누가복음 15장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말하고 집을 나가는 탕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둘째 아들인 탕자는 반율법주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없이 자신 마음대로 삶을 살아가고 싶은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집나간 동생이 돌아오자 잔치를 여는 아버지를 못 마땅하게 생각해서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눅 15:29) 왜 나에게는 이런 잔치를 열어준 적이 없냐고 분노하는 첫째 아들은 아마도 율법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두 아들은 모두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두 종류의 신앙이다. 늘 우리는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다가 또 반율법적인 삶을 살 때가 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은 이유는 그런 순종을 통한 또 다른 보상을 얻고 싶은 마음의 동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분노했고, 자신의 순종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율법주의는 늘 이렇게 숨어 있다가 결정적일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교회를 개척해서 열심히 했는데 무언가 숫적인 부흥이 없거나 뜻 대로 되지 않을 때 “왜 하나님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좋은 직장을 버리고 선교지로 나간 선교사들도 “내가 주를 위해 이렇게 많은 것을 버렸는데 왜 선교지에서 예상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지?”라는 원망이 들기도 한다. 이런 모든 생각들이 바로 율법주의의 모습이다. 이렇게 율법을 지킴으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쟁취하려고 하던 노력들이 너무 힘들어지면 반율법주의로 바뀔 때가 있다. 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런 제약을 주실리가 없다는 잘못된 오해가 반율법주의적 삶으로 인도할 때도 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오해하여 “이런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실텐데” 라는 적용을 할 때도 있다. 이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두 가지 잘못된 대적들이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나님을 엄하고 두려운 분으로 오해한다. 반율법주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제약도 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정도로 오해한다. 모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것의 출발은 바로 에덴동산이다. 에덴에서 하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호의를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여 죄를 범하였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가 사탄의 거짓말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였다고 말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사랑한다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금하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고 그저 순종만 하라잖아”라고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많은 것이 있고 금지한 한 가지가 있지만 하와의 눈에는 오로지 금지 명령만 보였다. 하와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율법폐기주의’로 간 것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복을 주는 ‘율법주의’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두 가지 길을 추구한다. 한 가지는 모든 도덕률을 깨뜨리고 스스로 자유롭게 길을 정하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모든 도덕률을 다 지키고 지극히 선한 삶을 사는 길이다. 이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해결책은 무엇일까?복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팀 켈러는 목회자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한 가지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그것을 오해할 때 율법주의의 해결책으로 반율법주의를 또 반율법주의의 해결책으로 율법주의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아들 모두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들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며, 자신의 사랑과 잔치 속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두 아들 모두를 초대한다. 이는 예수의 메시지(복음)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길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종교도 비종교도 아니고, 도덕도 비도덕도 아니며, 도덕주의도 상대주의도 아니고, 보수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니다. 그렇다고 두 극단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예수의 복음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팀 켈러,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56-57).싱클레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다. “율법주의의 진정한 치료제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복음이 율법 폐기주의에 대해 처방하는 치료제와 동일하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고 실제로 맛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새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이제 그리스도가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할 힘을 주신다. 이것만이 율법주의(율법이 더는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는다)와 율법 폐기주의(우리가 율법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제 율법이 그리스도의 손에서 우리에게 오며, 우리 마음에 그 율법을 쓰신 성령이 그것을 지킬 힘을 주신다)의 속박을 모두 깨드리는 유일한 치료제이다. 이 치료제가 아니면 율법주의자든 반율법주의자든 모두 하나님의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올바르게 연관될 수 없다. 의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결합되지 못한다”(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211).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한 “의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결합되지 못한다”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 그 대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가장 큰 기쁨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기쁨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참된 목적이다. 결국 바른 복음을 선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 그분 자체를 향한 사랑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향한 자발적인 순종이 흘러나오게 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경건한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그저 형벌에 대한 끔찍스러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기리기 때문에, 또한 그를 주로서 경배하고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거스른다는 것만으로도 끔찍스러워 견딜 수 없는 심정일 것이다”(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 원광연 역, 48).설교자들여! 복음을 먼저 누리라, 그리고 바르게 선포하라.그때 우리의 양떼들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길이 아닌 복음이라는 아름다운 길로 걸어갈 것이다.
복음
변증
율법주의
반율법주의
칼빈
팀켈러
센터처치
싱클레어퍼거슨
온전한그리스도
해결책
이 세상의 결혼은 끝이 있다
by Greg Lanier
2019-11-22
우리가 속한 문화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결혼에 집착한다. 한편으로, “결혼 평등” 운동은 결혼을 행복, 상호 수용 그리고 법률적 혜택을 보장하는 삶에서 만날 수 있는 궁극적인 목표로 바라본다.반면에, 이혼 또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커플의 동거는 점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영화와 각종 쇼는 순전히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미성숙한 남편과 불행한 부인의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줌으로 결혼의 실패를 계속 강조한다. 오늘의 문화는 결혼이야말로 이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난 세대로부터 이어온 엄청난 실패라고 말한다. 비록 형태가 다를지는 몰라도 교회도 이런 긴장에서 예외일 수 없다. 미국 복음주의 내의 많은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왕국에서 “일등” 시민권은 오로지 어린 아이들과 결혼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일종의 신유대주의적(neo-Judaizing) 주장을 하기도 했다. 반면에, 결혼의 본질적인 상실 또는 실패(brokenness)를 당연한 사실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의 문화에서는 결혼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질 정도가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결혼의 궁극적인 선함은 이런 도전들 앞에서 위협을 받는 상태이다. 사두개인에게 말한 예수님의 어려운 말씀이 이 상황을 돌파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눅 20:27–40; 마 22:23–33; 막 12:18–27). 두 세상의 삶예수님에게 접근한 몇 명의 사두개인이 과장된 한 결혼 사례를 가지고, 자신들은 믿지 않는 부활과 관련하여 그분을 시험하려고 했다(눅 20:27;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8.1.4; 유대전쟁사 2.8.14). 이 사두개인들은 결혼 자체에 관심이 없지만 “모세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따짐으로, 명백한 성경적 모순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결함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취수혼(levirate marriage), 그러니까 자녀 없이 남자가 죽는 경우에 그의 형제가 죽은 남자의 부인과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서 죽은 이의 혈통을 유지하는 결혼에 관한 토라의 규정을 인용한다(창 38:8; 신25 :5). 그런 다음 사두개인들은 한 명의 여자와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 이 취수혼이 계속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만약의 경우”를 가정한다. 그러니까 취수혼이 맞아서 이런 결혼이 일곱 번 발생한다면, 그럼 나중에 부활했을 때 이 여자는 무려 일곱 명의 남편이 있는 건데, 그것이 모세의 법이 금하는 일처다부가 아니냐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이 성경과 대치되는 이 문제가 예수님을 코너로 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취수혼과 부활 중에서 한 가지는 성경적일 수 있어도 두 가지가 다 성경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순이 발생하니까. 예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능숙하게 대답하셨다. 부활에 대한 그들의 전제를 묻고 또 성경을 한 번 더 확증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부활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셨다. “저 세상”(20: 35)을 단지 “이 세상”(20:34)의 연장으로 간주하는 게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보여줌으로 그들을 바로잡으셨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죽는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2) 는 성경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결혼하여 정당한 방법으로 후손이 이어지도록 했다. 그러나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사는 저 세상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죽지 않는다(20:36).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백성은 애초에 그들에게 의도되었던 최고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롬 11:12,25). 죽음의 저주는 사라졌고 더 이상 새로운 창조는 필요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게 된다”(20:35). 참으로 우리는 이제 “천사와 동등이요”(20:36), 우리의 존재는 영원해지고 우리의 숫자도 고정이 되어서 더 이상 결혼해서 자녀를 낳을 필요가 없게 된다. 중요한 점은, 구원받은 자들은 더 이상 육신의 부모의 아들 또는 딸로 불리지 않을 것이고, 또 누구의 남편이나 부인으로 불리지도 않으며, 단지 “하나님의 자녀”(20:36; 계 21:7) 로만 불릴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미래는 현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모든 질적인 면에서 현재의 세상을 능가한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모세가 부활을 믿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 사두개인들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하는 모세 오경을 그들에게 인용한다(출 3:15).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 진짜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만 유효한 결혼의 특성에 대해 중요하게 언급하시지 않는다.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이고 또한 부활한 자들이 사는 세상이 지금의 세상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명확한 통찰을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있는 바로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하여 우리는 결혼을, 또 위에서 언급한 결혼과 관련한 긴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있다. 저 세상과 이 세상“저 세상”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오로지 성경 말씀만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사는 문화와 인간의 육체는 최고의 기쁨이 오로지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에만 있다고 아우성친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지금 여기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한 저 세상이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우리의 몸은 변할 것이다(고전 15: 35-56). 모든 고통과 슬픔, 그리고 죽음은 사라질 것이다(계 21:4). 우리는 더 이상 희미하게 보지 않고, 그분의 아들을 통해서 영원히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받을 최고의 상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이다.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기쁨, 즐거움, 친밀한 관계 또는 슬픔, 상처, 관계의 혼란은 결코 궁극적이지 않다. 소홀하게 방치되었던 아이가 처음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활한 저 세상이 얼마나 더 좋을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아직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저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정신적 상태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대한 생각도 철저하게 말씀만을 따라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결혼은 그림자, 복사품,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의 결혼이라는 궁극적인 결혼의 단면 중 하나일 뿐이다(엡 5:32; 막 9:15). 참으로 저 세상이 정의하는 실재는 “신부”(구원받은 자) 와 그리스도(계19:7; 21:2, 9; 22:7) 간의 결혼이다. 이 땅에서의 결혼은 영원히 지속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 세상의 결혼은 결국 구원받은 자가 어린 양과 치르는 결혼에 그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가 특히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대상인 결혼하지 않은 기독교인에게 이 점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소식이다. 당신의 정체성은 지금 이 세상에서의 결혼 여부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 결혼 여부에 달렸다. 이 세상에서 결혼하지 않았거나, 결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은 그들의 독신 상태가 결코 궁극적인 기쁨과 의미를 찾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혀 열등한 게 아니다. 불완전한 것도 아니다(고전 7:32-35). 결혼하지 않은 그들의 인생이 나중에 저 세상에서 더 위대한 관계와 더 위대한 실재를 위한 준비라는 사실을 굳건히 믿을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결혼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라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하나님의 말씀은 큰 위로가 된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결혼에 궁극적인 가치를 두고 살 때에는 결국 좌절감, 서운함(bitterness) 그리고 해체(dissolution)를 맞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배우자 또는 자녀 숭배라는 우상 숭배로 이어질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이다. 이 세상에서 결혼은 결혼 그 자체에 닻을 내리고 있지 않다. 결혼은 저 세상에 있는 다른 결혼에 닻을 내리고 있다. 결혼은 새로운 세대의 예배자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 시대의 성적인 충동을 조절하고 또 바른 방법으로 성적 만족을 추구함으로 우리가 행여 완악함에 빠져 저 영원한 왕국에 어울리지 못하는 자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결혼이다(고전 7:9; 마 5:27-30). 그리고 결혼은 저 세상을 향한 성화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결혼 관계에서 두 배우자의 주된 목표는 복종, 희생적인 사랑, 존중, 회개 및 저 세상을 향한 위로이다. 결혼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으로 온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신부를 거룩하게 만들고 그분에게 바로 나아오게 하신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엡 5:25-28). 성령님으로 인해서 배우자들은 ‘그때’ 저 세상에서 서로를 그리스도에게 넘겨줄 준비 과정으로 ‘지금’ 이 세상에서 서로를 사랑한다. 이 세상에서 결혼한 이들에게교회 안에서 불행하게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사실은 위로가 된다. 당신의 결혼 생활은 끝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붕괴된 상태, 심지어 실패한 당신의 결혼도 천국을 향할 때 의미가 있다. 천국에서는 이 땅에서의 모든 상처와 갈등이 신부의 상처를 싸매 주는 어린 양으로 인해 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결혼 생활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슬플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런 결혼의 친밀함이 없는데도 어떻게 저 세상이 이 세상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걸까? 당신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저 세상은 더 낫다. 당신이 비록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저 세상은 더 낫다.그러나 한번 이렇게 상상해 보자. 저 세상에서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했던 배우자를 우연히 만나게 하신다면, 그래서 우리만 아는 농담을 서로 나누고 또 어린양을 예배하는 순간에 우리만이 아는 시선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신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났기에 잃어버린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저 세상에서 얻은 것 때문에 기뻐할 것이다.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배우자로 만났던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마워요, 천국에서의 삶을 잘 준비하도록 도와줘서.”우리의 결혼은 끝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단지, 더 나은 결혼을 위해서.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arriage Is Built to End번역: 무제
가정
결혼
동거
사두개인
위로
부활
성화
성적만족
교만해질 땐 ‘바닥’을 생각하라
by Tim Keller
2019-11-21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한 지 42년의 시간이 지났다. 슬프게도, 함께 시작했던 많은 목회자들이 결승선에 도착하기 전에 그 걸음을 멈추었다. 내 생각에 이처럼 많은 이들이 사역을 완주하지 못했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어느 누구도 교만을 통해 그 길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에 기록된 바울의 말씀은 목회자인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신학과 사역을 훈련받았던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운 이끄심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신학적 훈련과 사역의 삶은 되려 목회자를 교만으로 이끌 수 있다고 경고한다.이 글에서는 사역 중 우리를 교만에 빠져들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목회자들이여, 주의 깊게 살펴보기 바란다. 1. 신학적인 지식첫째는 신학적인 지식이 가져오는 자만심이다. 당신은 어쩌면 ‘바울이 신학적인 지식이 교만을 이끈다고 언급한 것은 과장된 주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다른 본문에서도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고전 8:1–2)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신학적인 지식과 교만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하게 경고한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제사 음식으로 쓰인 고기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자만하게 되었다. 즉 진리를 아는 지식이 그들을 우쭐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이 자신이 가진 신학적 지식과 통찰력에 뿌듯해하며 점점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자기 스스로를 비우는 것이다.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진리와 당신의 관계가 단순히 이론적이고 학문적으로만 이어질 때마다, 당신은 사탄의 손아귀에 빠지게 된다. [중략] 진리의 통제에서 벗어난 채 연구를 하는 순간, 당신은 마귀의 희생양이 된다. 만약 성경을 연구할 때에 지도와 검수를 받아 겸손해지는 과정이 없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지 않거나, 혹 하나님이 당신을 인내해 주신 사실에 감동이 없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이루신 구원 사역의 아름다움을 놀라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강단에 서 있을 때나 혼자 연구하는 시간에 주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열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만하기 쉬운 상태이다. 이를 피하려면, 당신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가 갖는 힘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성경을 놀라운 능력의 말씀이 아닌 단순한 정보의 집합체로 접근했던 사람들의 특징을 설명한다. 그 한 가지는, 그들이 ‘영적인 고집쟁이’로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영적인 고집쟁이’란, 상대적으로 큰 문제가 아닌 교리 간의 차이에도 격하게 논쟁하고, 성경 해석이나 최근의 신학적 쟁점에 대해 자신과는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맹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영적인 고집쟁이들은 성경 말씀을 하나님이 그분의 역사를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가 아닌 자신의 논점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취급해 버린다. 이들은 결국 지적 자만과 그가 속한 신학 집단의 지지에 의해 교만에 빠지게 된다. 2. 거짓된 정체성두 번째 교만은 사역 중에 형성된 거짓된 정체성에서 발생한다. 목회자가 사역을 개인의 성취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 사역의 부흥까지도 오직 자신이 지닌 역량의 결과로 바라보게 된다. 만약 이러한 시각으로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고 있다면, 이는 ‘능력있는 목회자’라는 거짓 정체성에 빠져든 것이다.거짓 정체성이 부르는 교만은 다음의 네 가지 모습으로 요약된다.성공에 대한 자부심사람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당신의 설교를 들을 때, 인정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당신의 교회를 떠날 때에는 그것을 사적인 공격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비판에 대한 경계비판을 극도로 경계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사역은 거짓 정체성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비판은 당신이 얼마나 좋은 목회자인지를 궁금해 한다. “당신의 설교는 별로 좋지 않아요. 목사님이 설교를 더 잘했으면 좋겠어요!”와 같은 비판이 들려올 때, 이를 마치 개인적인 공격처럼 듣는가? 만일 그렇다면 비판이 올 때 당신은 충격을 받고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다. 비판은 당신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거나 혹시 당신이 비판을 무시할 경우엔 그것으로부터 성장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두려움에 대한 짓눌림거짓 정체성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두려움에 굴복당하는 비겁한 모습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비겁함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진정한 비겁함으로, 곧 복잡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대한 비겁함과 헌금을 많이 하는 성도를 무언가로 불쾌하게 하거나 젊은이들이 거부감을 가질 만한 내용을 설교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하는 비겁함이 이에 해당한다.두 번째는 가짜 비겁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너무 거슬리거나 심히 가혹하여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도록 하는 비겁함으로, “보라, 나는 진리를 위해 용감하게 행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행위는 사역과 당신을 동일시할 때 나타난다. 그것은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역 안에 있음을 보여 준다. 비교에 대한 질투당신이 거짓된 정체성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는 마지막 신호는 비교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이다. 동료 목회자를 통한 교회의 부흥을 바라보며 시기하고 있는가? 아마도 그 목회자가 자신보다 열심히 일하지 않거나 혹 신학적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은근하게 무시하고 있던 경우라면 당신의 질투는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비교하며 분노하는 것은 자신이 상대방보다 낫다는 거짓 정체성에서 비롯된 교만일 수 있다.3. 사역 안의 위선당신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이야기하는 방법과, 하나님과 교제하는 척하면서 이야기하는 방법이다. 사역자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그리고 크리스천이 얼마나 훌륭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전해야 하기 때문에 사역자의 삶은 이를 반영해야 한다. 따라서 당신은 사역을 하는 동안 하나님과 실제로 친밀해야만 하거나 아니면 친밀한 것처럼 행동해야만 하며, 마치 당신이 실제보다 하나님과 더 가깝게 지내는 것처럼 말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믿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당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는 당신에게 대단히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날 밤, 주님은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3:21). 여기서 보인 제자들의 반응은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서로를 둘러보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묻기 시작했다. 사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떡을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다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겉으로 볼 때, 유다는 영향력 있는 사역자였다. 하지만 내적으로, 그의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내면의 삶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삶을 더 가꾸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책 ‘사랑과 그 열매’(Charity and its Fruits) 에서 비록 유다가 구원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러한 사역의 유산을 원치 않는다.하지만 여기에서 위선이 시작된다. 사역은 당신을 더 나은 크리스천이 되도록 하거나 아니면 더 나쁜 크리스천이 되는 길로 인도한다. 사역을 통해 당신은 고집스러운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가 될 수도 있으며, 반대로 더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역은 당신으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도록 강권하며 연약함 가운데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즉, 사역은 당신을 주님께로 인도하거나 혹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유다의 예처럼, 당신이 가꾸는 삶이 무엇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교만을 극복하라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교만을 극복할 수 있을까?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바울의 상황을 기억하라. 바울은 자신에 대해 진정한 사도가 되기엔 신뢰할 만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과 선생들을 만났다. 바울은 스스로에게 사도로서의 자격이 분명하게 있다고 반박했는데, 이는 우리가 예상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모든 자격 요건의 조항을 뒤집어 버린다. 그가 갖춘 신학적인 지식, 위대한 성공 혹은 겉으로 드러나는 완벽한 삶을 자랑하는 대신에, 바울은 자신이 경험했던 모욕과 고난 그리고 쫓겨났던 경험을 자랑한다. 이렇게 바울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그와 함께 하심을 주장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무릎 꿇도록 행하신 모든 일들을 바라보라고 우리에게 권면한다. 목회자들이여, 당신의 교만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생각해 보라.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곳까지 하나님이 당신을 이끄신 모든 방법들을 바라보라.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께 더 바짝 붙어 있게 될 것이다. 모든 실패와 낙심 그리고 연약함이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에 못 박도록 하라. 그것들을 받아들여야만 참된 목회자가 되어 결승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Ministry Can Make You Conceited번역: 정진호
목회
리더십
교만
바닥
마틴로이드존스
바울
고린도후서
신학적인지식
거짓된정체성
위선
중독은 곧 우상숭배
by Edward T. Welch
2019-11-20
“하고 싶어,” 모든 중독은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씩 단계를 거치면서 ‘하고 싶어(want)’는 갈망(need)으로 바뀐다. 중독을 모두가 다 동의하는 딱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능성 있는 정의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중독은 어떤 대상 또는 어떤 상태를 향한 강박적인 추구인데, 추구하는 대상이 필연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을 알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고 여전히 추구하는 상태를 말한다. 중독을 정의한 내용 대부분은 중독성 행동이 기본적인 뇌의 패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도 포함하고 있다. 중독에 빠지는 형태는 다 다르다. 중독이라는 굴레에 빠지는 방법은 수천 가지가 넘는다. 그럼에도 몇 가지 연구를 통해 알려진 부분이 있는데, 그것들을 파악함으로 우리는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좀 더 잘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독자가 추구하는 것은 변화된 신체 경험이다. 그 변화는 빠르고 강렬할수록 더 좋다. 따라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각성제, 코카인, 마약, 아편, 진정제 및 술 등이다. 음식도 리스트에 넣을 수 있는데, “힘들거나 우울할 때 찾는 음식”(comfort food)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음식은 처방전이 필요하거나 불법적인 물질처럼 효율 또는 강도 면에서 그다지 높지는 않다. 가장 강력한 감각적 체험을 주는 것 중의 하나가 섹스이다. 따라서 인류 역사 전반을 통해 섹스는 항상 중요했고 섹스 중독자와 섹스를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비극을 초래하기도 했다. 섹스와 관련해서는 직접 신체 접촉을 통해서, 인쇄물로 또는 디지털 형태로까지 쉽게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섹스는 중독을 초래하는 중요한 유혹으로 남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와 비디오 게임은 최근에 생긴 욕구 대상이지만, 그 강도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스크린을 끊는 주간을 후원하는 초등학교들도 있다. 소셜 미디어는 사회적 연결을 통해, “소외”(out) 가 아닌 “소속”(in) 을 보장함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 비디오 게임도 일종의 사회적 권력을 제공하는데, 현실과 다른 세상에서 살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와 비디오 게임은 일반적인 대화나 독서를 통해 경험하는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신경 자극을 뇌에 가져다준다. 제어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은 “하고 싶어”, “더 하고 싶어”라고 외친다. 문화에 따라 중독은 정도의 차이가 있다. 중독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개인의 자유와 개인적인 탐닉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가장 일반적인 중독성 물질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여가 시간이 플러스로 보장되는 사회여야 한다. 이러한 환경 안에서, 중독은 번성하고 쉽게 퍼져 나간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특별한 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일반적인 중독에 관한 관찰이다. 그런데 중독에는 성경의 렌즈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다른 측면들이 있다. 중독과 관련해서 성경이 주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중독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독자에게는 하나님이 아닌 중독성 물질이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된다(시 46:1). 중독에 관한 토론이 영성을 향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그런 토론이 항상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따라서 중독 문제가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중독에 관한 인기 있는 보고서는 언제나 내적 고침(amends)을 강조하지만, 그 고침이 주님 앞에서의 회개를 의미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하나님을 염두에 둔 중독의 본질(Godward nature of addiction)은 성경에 나오는 우상 숭배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도 보게 된다. 첫 번째로 우상 숭배(중독)에서는 환경이 중요하다. 애굽 탈출 이야기를 살펴보자. 존 칼뱅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굳이 자극을 주지 않아도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게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불확실성과 고통의 시기야말로 우상을 만드는 적기이다. 다른 말로 하면, 평상시라면 우리는 노골적인 우상 숭배를 하기 전에 먼저 시험(test)인지 유혹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제한된 음식과 물, 눈 앞에 닥친 죽음,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래서 연락이 닿지 않는 지도자라는 심각한 환경에 처했다. 그런 환경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시험과 유혹 중에서도 현대의 중독에서 확인된 흔한 사실은 애초에 중독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향은 중독 그 자체로 인해 좀 더 복잡해진다. 특히 그런 성향은 중독 자체가 거부할 수 없는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기꺼이 원해서 하는 원인, 즉 인간의 죄성 때문으로 보는 시각에는 성경도 찬성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이, 성경은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중독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영향으로 성경은 “세상”을 말한다. 그건 문화, 친구, 미디어, 교사 또는 심지어 부모까지도 중독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가장 존경받는 이웃이 마약 거래상인 동네에서 자라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또는 집에 음란물이 있는 상황뿐 아니라 그것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정도는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유혹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힘은 노골적으로 우리의 목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대지 않는다. 대신 세상은 욕망을 따라 사는 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평상시의 대화를 통해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성경은 삶의 고난을 중독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꼽는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광야 이야기로 돌아간다. 인생은 힘들고 고통으로 가득하다. 거의 매 순간마다 우리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위안을 찾기 마련이다. 가능한 피난처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님 그분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에서 유래한 무엇인가에서 찾는 것이다. 중독은 창조자 대신 창조물에 의지하는 것이다. 중독자를 돌보는 데 있어서 이런 어려움을 고려할 때, 우리는 종종 희생, 거부, 수치심 및 수많은 슬픔을 발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당신이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중독 물질에 대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하나님이 주시는 위안과 애정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중독에 빠지는 사람 누구나 최소한 시작할 즈음에는 다 이유가 있다. 중독은 삶을, 종종 힘든 삶을 내 힘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다. 따라서 현명한 조언자라면 중독을 일으킨 원인을 알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독자의 자세한 삶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두 번째로, 우상 숭배(중독)는 욕망에 관한 것이다. 구약 성경은 실제적인 우상 숭배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신약 성경은 우상 숭배의 기초가 되는 욕망을 겨냥한다.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욕망은 선하거나 우상적이며 심지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갈망하거나 사랑해야 한다(신 6:5). 그것은 최고의 욕망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그럴듯하고 우상적인 것을 갈망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신 12:20)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그것은 자연스런 욕망이기 때문이다. 우상을 향한 욕망(Idolatrous desires)도 적절하게 조절만 한다면 얼마든지 자연스럽고 적절한 욕망의 씨앗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욕망의 예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 건강, 순종적인 자녀, 소속감, 즐거움, 휴식 그리고 정의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정상적이고 심지어 좋은 욕망조차도 얼마든지 크게 자라날 경향이 있다고 경고한다(약 1:15). 그런 욕망이 힘을 얻게 되면, 언젠가 우리를 상대로 만족하지 못해 날뛰는 거인처럼 싸우게 될 것이다(엡 4:19; 약 4:1).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언제라도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실제 우상에 기초한 욕망으로 초점이 바꾸는 순간, 우상 숭배라는 그물에 즉시 도달하게 된다. 보다 더 주목을 끄는 우상인 약물, 섹스, 알코올을 고려하기 전에, 성경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우상인 사람과 돈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존중과 승인을 갈구하며(잠 29:25), 또한 개인 소득에 집착한다(마 6:24). 진짜 끔찍한 우상 숭배는 다름 아닌 바로 이 두 가지 숭배의 대상 위에 세워졌다. 지혜로운 조력자는 그들 자신조차도 우상 숭배에 빠지기 쉽고, 중독자와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욕망과 그 치료법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세 번째로 실질적 우상 숭배(중독)는 노예가 되는 것이고, 그 결과는 비극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우상의 특성을 닮아 가는 경향이 있다. 생명이 없는 것을 흉내 내면서 우상 숭배자들도 점점 더 속이 비어 간다.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은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기에 그들도 같이 거짓말을 하며(사 44:20), 그들의 인생은 점점 더 비극을 향해 나아간다(잠 23:29-35). 숭배하는 대상이 단순한 돌이나 나무 막대기이기 때문에 힘의 원천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막대기 뒤에는 악마와 동일한 종류의 이 세상의 지배자가 있다. 분명히, 악마는 우상이라는 대리자를 통해 숭배받는 것을 기뻐한다. 중독은 따라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것이다. 중독자는 스스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얼마든지 다른 결정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방법으로 인생을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스스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노예이며 또 결정권이 없는 존재이다. 그들은 이 세상, 육체 그리고 악마라는 삼인조에게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렇기에 중독 전문가라면 누군가가 바닥을 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독에는 명확한 바닥이 없기에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노예가 된 중독자에게 치고 올라갈 힘을 주는 바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우상 숭배(중독)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시작한다. 그분을 믿음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주는 다양한 혜택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예수님의 영(the Spirit of Jesus)을 받을 때에만 그 자유함은 지속된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부터 그분의 백성을 우상 숭배로부터 불러내셨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광야로 가셔서 사탄이 주는 엄청난 시험 중에도 그의 아버지를 믿었을 때 우상 숭배를 향한 우리의 승리는 확실해졌다. 예수님의 능동적이면서 또 수동적인 완전한 대속으로 인해서, 그분은 율법의 형벌을 받았고 우리를 아버지에게 데리고 가기 위해 승천했으며, 우리에게 능력의 성령을 주셨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굴복하지 않고, 오랜 노예 주인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이 싸움은 느리게 느껴지고 또 과거의 신들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누리는 교제와 더불어 우리는 시선을 오로지 그리스도께만 고정하고, 시편 저자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될 때까지 그분을 알아 가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5). 그러면 중독에 빠졌던 우리의 친구들은 축복을 받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살전 1:9).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이 말씀은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각종 우상을 만들고 있는 현실을 알게 하고 또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함으로 그 이름을 서로에게 인내와 선한 마음으로 선포하게 하며, 그 결과 진리를 말하시며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을 알게 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Addictions and Idolatry번역: 무제
생활
건강
중독
환경
유혹
욕망
우상숭배
노예
예수님
자유함
그때 초대교회가 그랬듯
by Matt Ryman
2019-11-19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 중의 하나가 마태복음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 배경은 12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한동안 따르며,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았을 무렵이다. 마침내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두 개의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하실 시간이 다가왔다.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들이 말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3-16).이 상황은 세상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베드로는 엄청난 고백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12명의 제자들을 대표하여 말하고 있었다. 이 순간의 중요도는 예수님이 그들의 고백에 대해 반응하신 방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알게 한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17절). 둘째, 예수님은 교회에 대해 매우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셨다(18절). 셋째, 마태는 예수님이 그때부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21절).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제자들이 믿은 것을 믿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은 바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 크리스천들도 그렇게 믿는다. 예수님은 미리 예언한 대로, 죽으시고 장례되었으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을 통해, 그리고 우리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 죗값을 지불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과 그것이 그대로 일어난 일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삶의 중심축이 되어 왔다. 하지만 마태복음 16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교회에 대해 말씀하신 다른 예언도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반응, 특히 두 번째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제자들을 대신하여 베드로가 말한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고 말씀하셨다. 이 진술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만큼 중요한 예언이었다.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 순간까지 해 오고 있던 것이며, 바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하고 계실 일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이것을 알고 적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이 교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복잡하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서 “교회”(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된 방식 때문이다. 그 단어는 문자적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보통 공공장소나 집회에 모인 시민들의 모임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예수님이 그분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예수님이 믿는 자들의 모임을 세우시겠다는 의미였다. 신약 성경의 나머지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사용된 방식은 예수님의 교회가 정말로 모임들 중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신약 성경의 어느 곳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이 땅 위의 모든 크리스천들을 의미하며, 다른 곳에서는 특정 지역의 크리스천들의 모임을 말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보편적 교회와 지역 교회를 구분한다. 그리고 보편적 교회는 지역 교회들로 구성된다.우리가 지역 교회에 속하지 않고도 보편적 교회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축구 선수가 지역 축구팀에는 속해 있지 않지만 국가 축구 연맹에는 속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지역 교회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이해한다. 사실, 특히 나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매우 슬프게 생각한다. 하지만 지역 교회에서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지역 교회에 모이게 하여 그분의 보편적 교회를 세우고 계시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크리스천들에 의해 하나님의 명령이 대다수 지켜질 수 있는 곳은 오직 지역 교회의 상황 안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역 교회의 상황에서 안수받은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히 13:17), 서로를 가르치며(롬 12:16), 예배드리러 모이고(히 10:25), 헌금을 드리며(고전 16:1-3), 서로의 짐을 지고(갈 6:2), 서로 화답함으로 찬송하며(엡 5:19), 주의 만찬에 함께 참여한다. 사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선교 여행은 단순히 복음 전도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복음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 삼고, 모든 모임을 위해 지도자를 임명하는 일도 했다(행 14:21-23). 선교 여행은 교회 개척의 여정이었다. 사도들은 보편적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계획에 전 세계적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지역 교회로 모이게 하는 일이 포함된다고 이해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으로 지역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보면 보편적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초대 교회 크리스천들의 인도를 받아서 우리의 시간과 재능 및 보화를 지역 교회와 전 세계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투자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섬기던 지역 교회를 떠나야 하는 날이 오면,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가능한 빨리 다른 교회를 찾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또한 자녀들에게 지역 교회의 가치를 가르치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여러 국가에서 교회 개척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그분의 교회를 누가 세우겠다고 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것을 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그것을 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도 그분이 그 과제를 완성하시는 것을 멈추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를 세우고 계시며,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Supporting the Church번역: 정은심
역사
초대교회
제자
에클레시아
마태복음
교회
죽음
부활
예언
신앙인의 이중 국적
by Justin Taylor
2019-11-18
예수님을 윤리적인 모순이나 신학적인 딜레마에 빠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러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요 18:36). 틀림없이 그분의 나라는 장차 다가올 시대에 속해 있었지만, 동시에 현시대 곧 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 나라는 가정이나 국가와 같이 현시대를 이루는 인간 사회의 조직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누가복음 20장에서 사두개인들은 과부가 되었다가 재혼한 여성의 경우 부활 시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매우 실험적인 질문을 던지며 가정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느니라]”(눅 20:34-35). 즉 가정은 이 땅에서 지속되는 제도에 속할 뿐, 장차 다가올 나라는 그와는 다른 원리로 운영된다는 말씀이었다.또 유대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옳으냐며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시며 누구의 형상과 글귀가 거기에 새겨져 있는지를 도로 물으셨다. 이에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눅 20:24), 예수님은 이 같은 결론을 내리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눅 20:25). 이처럼 도전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은 가이사가 지닌 권위를 제한하시고 하나님이 지니신 무한한 권위는 그들 앞에 드러내셨다. 곧 데나리온에 새겨진 가이사의 형상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면, 모든 인간 존재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께 우리 모두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국가 역시 이 땅에서 지속되는 제도에 속할 뿐, 장차 다가올 나라는 그와는 다른 원리로 운영된다는 말씀이었다.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주후 5세기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이라는 대작을 저술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을 대조하며 자신의 정치학적 견해를 선보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어거스틴을 오해하며, 그가 물질적인 영역인 지상에서의 생활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도성을 이야기하고 그와 상반되는 의미로 천상에서의 생활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도성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에 모두 속할 수 있는 구성원이 되고 만다. 이와 달리 어거스틴은 하늘과 땅이라는 대립된 비전을 제시하며, 서로 동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두 공동체 또는 두 무리에 관해 이야기한다(참고로 이와 같은 두 도성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역사 가운데 공존한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실은, 인간의 도성은 창조가 아니라 타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도성의 욕망과 관심사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심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성령이 아닌 육신의 기준을 따라 표출된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의 도성을 이루는 구속받은 백성들은 하나님 자신을 최고의 선으로 추구하며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도성 가운데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도성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패러다임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먼저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히 13:14),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게 된다(히 11:10). 이 땅에서 영원한 집을 소유하지 않은 “거류민과 나그네”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벧전 2:11). 그런데 이와 동시에 우리는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기도 하다(렘 29:7). 그렇기에 우리는 결국 ‘이 세상에 속한’(of the world)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일꾼으로서 ‘이 세상 속으로’(into the world) 보냄 받아 ‘이 세상 속에’(in the world)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요 17:15-16; 고전 5:9-10).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을 본받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기를 추구하며(롬 12:2)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도록 우리 자신을 지킨다(약 1:27). 그러면서도 또한 우리를 둘러싼 세상 문화 속에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부패함을 막는 빛과 소금으로 살아간다(마 5:13-16; 빌 2:15).두 가지 시민권성경에서 현시대와 다가오는 시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메타포 중 하나가 시민권이다. 시민권이란 공인된 법적 지위로서 누군가에게 부여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말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인 도시(또는 국가)에서 활동하는 각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가 포함된다. 따라서 군주제로 세워진 왕국의 백성과는 다르게, 시민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한다.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의 개념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까지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간수가 상관의 명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서 조용히 풀어 주려고 했을 때, 바울은 이렇게 말하며 분개했다.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행 16:37). 그리고 사도행전 22장에서는 천부장의 명을 듣고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백부장을 향해 간단한 질문 하나를 던짐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한다.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 22:25).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시민권자였다고 밝힌다(행 22:28). 이러한 에피소드에서 로마 당국자들이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인 이유는, 그들이 로마 시민이 가진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였기 때문이다(행 21:38-39; 22:29).아마도 바울은 가족의 내력을 통해 처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에 그는 또 다른 시민권을 얻게 된다. 바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밝힌 시민권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요 18:36).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 그 가족으로 입양될 때, 새로운 나라에 들어가 새로운 왕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곧 “흑암의 권세에서 [중략]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게 된다(골 1:13).이중 시민권자로 살아가는 법이처럼 우리에게는 이중 시민권이 있는데, 그 권리를 바르게 행사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래의 네 가지 사항을 명심해야 한다.1. 하나님이 범사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이 세상을 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시더라도 그 통치를 인정해야 한다.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셨다(마 28:18). 그런데 이 세상은 여전히 타락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리시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정이나 국가를 비롯한 창조 세계의 제도를 포함하여) 세상의 일시적인 질서를 다스리신다. 예를 들어 세상의 정부를 통해서는 공권력과 법적 구속력을 사용하여 질서를 세우는 일을 하신다면, 교회를 통해서는 복음의 선포와 통상적인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변화시키신다. 즉 성령의 권능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시는 것이다.2. 지상의 시민권이 영원하지 않다고 해서 그 시민권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일시적인 것들도 중요한 변화를 일으켜 낼 수 있다. 가령 바울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거론하며 당국자들에게 호소하는 일보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이 땅의 권리를 중요한 일을 위해 사용했다. 그 결과 그의 시민권은 생사에 영향을 미칠 만큼 큰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물론 누군가의 일시적 필요를 해결하는 일보다 그의 영혼이 구원받도록 전도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영원한 고통을 받지 않게 하는 일이 잠시 지나가는 현세에서의 고통을 줄이는 일보다 우선적인 사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은 복음 전도와 시민으로서의 역할 사이에 양자택일을 하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도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를 제자의 삶으로 부르셨는데, 그 제자도란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그분이 분부한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며 그분을 따라가는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마 28:19-20).3. 하나님이 일반 은혜 가운데 허락하신 정부를 포함하여 그분이 주시는 모든 선물을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세상 나라들이 분개하는 현실을 보며(시 2편), 절망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본래의 모습대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국가라는 제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위해 지상의 통치자를 세우셨다(롬 13:1-4).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악하든 그 직분에 있는 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롬 13:7). 이런 차원에서 정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악한 일은 억제하고 선한 일은 도모하고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기관이 정부이다(롬 13:2-4). 그러므로 우리는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는 정부가 올바른 기능을 하여 우리가 고요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딤전 2:2).4. 우리가 지닌 하늘의 시민권을 공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지상에서 사용하시는 수단에 참여해야 한다.이 세상은 우리가 소유한 하늘의 시민권을 볼 수 없다. 이 시민권은 지상의 정부가 인식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우리의 시민권이 공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방식을 정하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즉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그분의 백성이 함께 모여 구성한 예배 공동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제도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즉 하늘의 시민들로 하여금 지상의 교회에 참여하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원하신 왕의 성품을 반영하며 그분을 예배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예배하도록 초대한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시민의 자격을 부여하며 하나님 나라의 최전방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리가 맡은 공적 역할을 수행한다.분명 우리의 인생에는 정치 체제라든가 시민 활동보다 중요한 일들이 더 많음에도, 때로는 그와 같은 활동에 과도히 헌신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수준 이상으로 삶의 정체성을 거기에 둠으로써 우상 숭배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지상의 시민으로서 우리가 이행해야 할 의무나 참여를 소홀히 하며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도 않은 영적인 이유까지 들며 우리의 무관심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 양극단의 자세 가운데 우리가 어느 쪽으로 쉽게 기울어지든, 우리에게는 두 가지 시민권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천상에서나 지상에서나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무엇보다도 복음에 의해 빚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장차 다가올 나라를 기다리며 그 나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가운데서도,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며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의 공적 유익을 위해 열심히 수고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Living as Dual Citizens번역: 장성우
영성
신앙인
이중국적
어거스틴
하나님의도성
인간의도성
아브라함
거류민
나그네
예수님 승천이 갖는 특별한 의미
by Eric B. Watkins
2019-11-16
짧은 분량이지만 시대를 앞서간 통찰을 담은 책,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기독교를 ‘사건 중심의 종교’라고 정의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어떤 사건이 벌어졌고, 거기 등장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무엇을 믿었고 어떤 행동을 했는가가 기독교를 이루는 사건들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이루는 역사적 사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만약에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느니 차라리,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하면서 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기에 기독교인은 그 부활에 비추어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오로지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을 반영하는,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 부활이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의 마지막은 아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후, 그리스도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이 증거하듯이, “하늘로 올라가셨다.” 승천이 주는 특별한 뉘앙스는 부활하시고 또 부활 후 여러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난 이후에,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다”(사도신경)는 것이다. 부활이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였다면, 승천은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약속한 보좌, 다윗의 보좌에 예수님이 앉으셨음을 의미한다(삼하 7장).제자들에게 반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할 뿐만 아니라 영광 중에 하늘로 승천할 것을 말씀하셨다(요 20:17 등). 그의 승천은 성령님이 오시기 위해 꼭 필요한 선행 과정이었다(눅 24:49-52). 사도행전 1장은 승천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셨듯이 성령 강림을 예언하고 있다. 성령님이 교회 위에 임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먼저 하늘로 올라가셔야 했다. 승천이라는 사건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만,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중에 거하실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인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또한 성령님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믿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마 28:20).승천에는 생각해봐야 할 실용적인 측면이 하나 더 있다. 시편 68편은 하나님을 정복하는 전사로 표현한다. 68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1절). 그러나 의로운 자는 기뻐할 것이라고 한다(3절). 왜 그럴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치 성을 떠나 적들과 싸울 준비를 마친 왕처럼 전쟁의 사람이 되어서 성전에서 나왔다. 68편에 따르면 하나님은 단지 적들을 물리칠 뿐 아니라 포로가 된, 억울한 그의 백성을 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이며 과부의 재판장이다(5절). 그는 또한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언약의 백성을 적으로부터 구하시는 분이다. 시편 68편이 보여주는 전쟁의 모습은 놀랍고 또 두려울 정도이다. 하나님의 발소리에 땅이 진동하고(8절), 하나님은 왕들을 흩으시며(12절), 그리고 마침내 승리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언덕과 성소로 다시 올라가 포로들들 이끌어내며, 그가 사로잡은 자들(captives)로부터 선물을 받는다(18절).어떤 이들은 ‘사로잡은 자들’이 하나님의 적, 그러니까 강제로 붙잡힌 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해당 구절이 일종의 정복당한 자들이 벌이는 죽음의 행진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로잡은 자들’에 대한 훨씬 더 타당성 있는 이해는 그들이 하나님의 적에게 잡혔던 자들, 다름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이 전쟁을 치러서라도 구하려고 했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할 때 해당 시편의 주제와 흐름과 더 자연스러워질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단지 신적 전사로만이 아니라 신적인 구원자로도 바라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해석만이 바울이 에베소서 4장에서 인용하고 주해한 시편 68편 18절과 조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시편 68편을 성취했는지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지 부활만이 아니라 그의 승천을 통해서도 성취했음을 말하고 있다(엡 4:8-10). 그리스도는 죄와 (가장 큰 적인) 죽음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사로잡힌 자들을 구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단지 자유를 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온갖 은사까지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68편 18절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으셨다’라는 구절 때문에 시험에 들기도 하는데, 에베소서 4잘 8절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물을 ‘주셨다’라고 썼다. 그럼 뭐가 맞는 걸까? 둘 다 맞다. 하나님이 구한 사람들도 하나님에게 선물을 주었다. 바로 그들 자신이 선물이다. 그들은 또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필요한 은사를 받았기에, 부활하고 승천한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교회에 주는 선물이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 그는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 재창조하신다(엡 2:10). 그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하신다(엡 4:23-24). 그래서 우리가 단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받기만 하는 수혜자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 필요한 은사를 소유한 존재가 됨으로 이제는 선물을 주는 자로 바꾸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단지 부활 이후에 일어난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왕이 자신에게 합당한 보좌로 다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 왕은 그가 구원한 백성들에게 은사를 제공함으로 그의 왕국에 필요한 자로 만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주시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 바로 그 분 자신이다. 이와 관련해서 웨스트민스터 요약 교리 문답서의 질문 23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삼중 직분(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을 “이 땅에서도 또 하늘에서도”(both in his estate of humiliation and exaltation) 수행하시고 있음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승천해서 영광을 받는 중에도 선지자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질문 24).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쉬지 않고 간구”하신다(질문 25).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며 보호하시고 자신 및 우리의 모든 원수를 막아 이기도록” 하신다(질문 26).부활이 기독교 역사의 가장 주요 사건이자 기독교 서사의 클라이막스라면, 승천은 영광의 보좌에 그가 앉으시면서 면류관을 쓰는 사건이다. 그곳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훌륭한 선물을 주시며, 그 중 가장 훌륭한 선물은 성령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연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 거룩한 구원자이자 우리 영혼이 가장 갈망하는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에게 우리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우리가 신앙의 기반으로 삼아야 할 역사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구성하는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메이첸이 주장한 것처럼 부활과 승천이 없다면, 기독교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역사 속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 생활과 마찬가지로 확고부동한 닻을 지니게 된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며 지금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Ascension of Jesu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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