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인생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라
by Robert Cutillo
2019-01-03
여러 달 동안 다리에 통증을 느끼던 할머니 환자가 있었다. 외국에서 온 그 할머니는 가족과 함께 이곳에 한동안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밤, 할머니는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기에 이르렀고, 가족들은 결국 그분을 응급실로 모시고 갔다. 의사는 통증의 원인을 알기 위해 CT를 찍자고 했고, 다행히 할머니의 척추와 다리에는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그 CT 사진은 몸의 전혀 다른 부분에서 무엇인가 이상한 알갱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종양이었는데, 그 크기가 작고 양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단서에 씌여진 비정상이라는 단어가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결국 할머니는 세 가지 추가 조사를 받았고 고통스러운 조직 검사까지 마쳤다. 다행히 이 모든 검사가 끝난 후에, 종양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이 경우, 할머니는 ‘정상’이라는 판정을 받기 위하여 수백 만원을 소비했을 뿐만 아니라,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병원을 찾은 원래의 이유였던 통증에 대해서는 아무런 처방도 받지 못했다. 우리의 의료 시스템은 환자의 실제 고통이 ‘너무 크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면서 환자에게 발생하고 있는 다리의 지속적인 통증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이날의 최첨단 의료체계에 대하여 결국 화를 내시고 말았다. “우리나라로 돌아갈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의사들이 검사 결과만 쳐다보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요.”오늘날의 선진 의학 기술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이는 분명히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분명 그 기술을 과하게 사용하려는 경향을 절제해야 할 때도 종종 있다. 다만 세상이 험하고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한 의학 기술을 지혜롭게 사용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삶 속에서 고난의 극복을 위하여 인간의 생각과 도구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고는 한다. 만약 그보다 더 강력한 것에 의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비상사태 인정하기우리는 이제 에덴동산 밖에 있다. 이미 금단의 열매를 먹어 버렸다. 다시는 돌아갈 길이 없다. 결백하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기에는 우리가 너무 많이 떠나왔다. 세상은 무섭고 낯설며, 혼돈을 통제하려 할수록 우리는 그 혼란을 더욱 두려워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창세기 3장 이후의 세계는 우리를 점점 더 큰 불안으로 몰아간다.창세기 후반부는 요셉의 시기심 많은 형들이 요셉을 애굽의 종으로 팔아넘긴 이야기로 이어진다. 요셉을 가까이 두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종으로 팔아넘기는 것이 좋다고 여겼던 형들은 이제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아버지의 슬픔을 야기했고, 그 문제는 너무나 커졌다. 성경은 아버지의 슬픔에 대하여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창 37:35). 아버지 야곱의 슬픔은 그의 활력을 점차 앗아갔다.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받게 되고, 개선하려는 의지와 판단 능력의 약함으로 실패하며, 아픔과 슬픔이 지속될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도 앞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대본의 감독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그 대본의 한 부분만을 알고 있는 작은 배우일 뿐이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세상의 마지막 밤’(The World’s Last Night)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그 연극의 내용을 모른다. 우리가 1막에서 나오는지 아니면 4막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주연인지 조연인지도 모른다. 오직 감독만이 그 대본의 처음과 끝을 알고 있다. 우리가 비록 어느 한 가지가 전체 극에서 무척 중요하다고 확신하며 매달릴지라도, 사실 우리는 그것이 가지는 정확한 의미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다. 그리고 감독은 우리가 모른다는 그 사실까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연극이 다 끝나고 나면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 각자가 연기한 부분에서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따라서 배우인 우리는 감독의 인도에 따라 잘 연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감독이 그 어떠한 엄청난 사건에도 영향받는 분이 아니고, 그분이 작성한 대본은 절대 흔들리지 않으며, 내 눈에 보기에는 예기치 못한 상황까지도 이미 그분이 작성한 대본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연기'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좋은 소식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하나님이 인간을 내버려 두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인간이 불안한 자유를 원했던 것이라면, 우리는 정확하게 원하는 그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속 불완전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반복되듯이, 다행히 하나님은 멈추지 않고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 그리고 창세기는 요셉이 종이 된 일이라든가 그 아버지가 슬퍼하는 상황으로 끝나지 않는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의 형들은 그 애굽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아들 요셉과 다시 만났으며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었다.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팔았던 형들은 이제 권력을 가진 동생 앞에 서게 되고, 그들이 한 일에 대하여 요셉이 ‘악한’ 복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주가 제멋대로 돌아간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선악에 대한 개인의 지식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대본의 감독이 극본의 처음과 끝을 완전히 알고 있고, 배우들의 실수까지도 받아들여 사용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었다. 창세기가 끝날 즈음에, 요셉이 형제들에게 한 말은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자 기억해야 할 메시지이다.“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하나님이 세상과 내 삶에 여전히 개입하시며 불행마저도 선이 될 수 있도록 더 큰 계획으로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건강과 질병에 대한 지금의 관점을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어떤 나쁜 일이 있어도 그 일을 선으로 바꿀 능력과 의도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최첨단 의료 기술에 모든 기대를 걸기보다는 그보다 더 큰 기대와 소망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rust in God More than Medical Technology번역: 정은심
생활
건강
고통
신뢰
요셉
세계관
의료기술
CS루이스
세상의마지막밤
그리스도의 부활은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
by Matthew Barrett
2019-01-02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중요성 면에서 부차적인 교리로 여겨진다. 부활의 의미는 해마다 부활절이 오기 전까지는 무시되고 잊혀진다. 그 경향은 우리가 복음을 나누는 방식에서도 보여진다. 크리스천들이 복음에 대하여 나눌 때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거기서 그냥 끝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십자가에 달리심에서 ‘회개하고 믿으라’로 곧바로 가버린다. 이는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22-24절과 4장 26절에서 말하는 예와는 다르다. 십자가는 구원의 핵심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성취하려는 것은 부활절 아침의 빈 무덤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니케아 신조를 빌려서 말하면)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정확하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우리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 부활 이야기를 읽고 나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에 내가 거듭났다!”고 말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런 적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거듭남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거듭남은 오직 예수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가르쳐 준다. 우리의 거듭남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단독적인 행위로,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는 것이다.베드로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벧전 1:3) 하셨다.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살리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 사망에서 영적 생명으로 살리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지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고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참고로 골 3:1)라고 말한다.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다.우리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음을 믿는 사람들은 의롭다고 여겨진다. 로마서 4장 23-25절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의롭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확증하셨다. 하나님은 아들의 사역이 완성되었다고 선언하셨다. 우리 죄 값이 지불되었고 아무 죄도 남지 않았다.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은 그의 저서 ‘조직 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죄 값이 지불되었기에 너에게 어떤 죄도 찾을 수 없고 내 눈에 의롭게 보인다’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한번 신뢰하면 우리에게도 그것이 적용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마지막 증거가 되었다.”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도 이 문제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 값이 모두 지불되었는지에 대하여 아직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부활은 하나님이 흡족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부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완성되었다.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의롭다고 여겨진다”(Miscellanies, Vol. 13, 227).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지 않았다면 “죄인들을 위한 너의 속죄 사역에 흡족하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여전히 죄로 인해 죽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죄로 인하여 여전히 죽어 있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고 의롭지 못하며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가망이 없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다시 시신 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우리의 형벌이 감당되지 않았고, 우리의 죄는 다루어지지 않았으며,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The Assurance of Our Salvation, 492). 우리의 성화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계속 죄 가운데 있지 않다. 바울이 질문하듯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 더 살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롬 6:3-4) 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부활과 우리의 성화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5-11). 바울의 마지막 두 문장은 특히 강력하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가 다시 사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산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육을 따라 살 것이 아니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의 죄로 가득하고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불신앙의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며 성령의 능력으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무덤에 그대로 있으면 그 무엇도 가능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의 권세를 이긴 우리의 승리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이 있고 성화된 삶을 살 능력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우리가 성화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우리의 확신을 더욱 강조한다.“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구속 역사의 정점리처드 개핀(Richard Gaffin)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의 구원론에서 핵심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신자 개인이 구속 역사의 풍성함을 구체적이고 고유하게 경험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Resurrection and Redemption, 135).진정으로 그의 말에 동의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구속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놓치면,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이 살펴보고 있듯이, 우리는 복음을 오해하고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과 우리의 구원을 연결시키지 못하게 된다(Resurrection and Redemption, 6). 칼빈이 설명하듯이,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 전체와 그와 관련된 모든 부분들을 이해하는" 크리스천에게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된다(기독교강요 2권 16장 19절).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Neglected Resurrection번역: 정은심
복음
부활
거듭남
근거
성화
구속
권세
승리
불완전한 삶의 아름다움
by Chad Bird
2019-01-02
아직 유치원에서 색칠 놀이를 할 즈음, 혹은 세발자전거를 겨우 탈 즈음의 어린 시절부터 그 영혼의 밭에 뿌려지는 씨앗이 있다. 그 씨앗은 TV와 각종 미디어를 통해 물과 거름을 공급받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그 후 때가 차면 곧 꽃을 피우고, 벌과 바람의 도움을 받아 다시 무수한 씨앗을 사방으로 퍼뜨린다. 우리는 이 씨앗을 경쟁심, 성취욕, 또는 우월감이라고 부른다.“일등이 되어야 해.” “특별해야만 해.” “남들보다 돋보여야 해.” “친구를 밟고 일어서.” “너의 이름을 높여.” “평범은 안돼.”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현대 사회를 장악한 성취주의에 세뇌된다. 완벽에 대한 열망은 서구는 물론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다. 하지만 과도한 성취주의는 감당하기 힘든 사회적 악몽이 되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곤 한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성공 만능주의는 타인에 대한 믿음을 사그라뜨리고, 관계의 희망을 부수며, 사람을 향한 사랑을 말살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인격적인 개념이자 사회적 문젯거리가 된다.성공주의의 폐단이제야 막 빛을 보기 시작한 내 상실의 여행은 사실 20년 전인 18살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이 기나긴 여행의 열매부터 말하자면, 나는 야망을 향해 허우적거린 끝에 길을 잃었고, 졸업장이 보장하는 행복을 내려놓았으며, 성취에 대한 과한 집착과도 이별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지난 20여 년의 시간 동안 줄곧 성취주의에 사로잡힌 채 살아왔다. 학창 시절에는 우수한 성적을 위해서, 목회자가 된 이후에는 탁월한 찬양과 월등한 헌금액을 향하여 고군분투하였다. 나는 인생이라는 사다리의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고자 매번 그렇게 기를 쓰고는 했다. 원하던 학위를 손에 쥔 후에도, 그 다음의 학위, 또 그보다 높은 학위를 계속해서 움켜쥐며 나아갔다.결국 나는 라틴어와 히브리어, 독일어를 넘나들며 여러 신학 고전들을 막힘없이 읽고 쓰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이토록 화려한 성취와는 달리 내 삶은 실패를 경험하고 있었다. 많은 학위와 지식을 얻었지만, 나는 정작 어린 내 딸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동물을 무서워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타인들의 박수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의 가장 소중한 영역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이 실패의 뒷이야기가 궁금한가? 역설적이게도 나는 실패하는 것에 성공함으로써, 성취 만능주의에서 벗어난 삶의 행복을 뒤늦게나마 알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평범한 삶의 추구를 통하여 안정을 배우고 있다. 원대한 꿈을 따르기 위해 목표 이외의 것은 보지 못하는 생활, 그 인생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만족을 주는지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다.조용한 삶이 주는 아름다움바울은 조용한 삶을 추구하라고 조언하였다(살전 4:11). 그가 만약 이 내용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아닌 오늘의 우리에게 쓰고자 했다면, 아마도 그가 가진 두루마리 종이로는 지면이 모자랐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마치 우스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야망을 잠재우는 연습을 하라고, 겸손의 옷으로 자신을 드러내라고, 그리고 소소한 삶을 추구하라고 말이다. 즉, 바울은 우리에게 개인적 성취에 도취하지 말고, 그 성취를 앞세워 관계의 주도권을 확보하지 말며, 그 성공을 통해 나의 무게감을 입증하려 하지 말라고 지적한다. 또한 본인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드러나야 하는 자리를 은근슬쩍 탐내지 말라고 조언한다. 다시 말해, 그는 우리에게 성공주의라는 그릇된 문화를 경계하라고 요구한다.화려함 대신에 고요한 삶을 추구하라는 조언은 인생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조언의 정확한 뜻은 첫째, 위로만 향했던 눈을 아래로 돌림으로써 당신 주변의 사람들을 살피라는 의미이다. 인생의 사다리를 어떻게 뛰어오를지, 어떤 트로피를 거머쥘지 골몰하느라 오직 나밖에 보지 못하는 삶을 경계하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는 눈을 돌려 하나님이 내 곁에 머물도록 하신 가족과 이웃을 둘러보고, 이들을 깊이 섬겨야 한다. 그는 나 자신보다는 이웃들이 어떠한 문제로 고민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 조용히 생각하라고 조언한다(빌 2:3). 더 크고, 화려하고, 강력한 성취를 끝없이 갈망하는 행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이러한 우상을 바라보는 대신 가족 및 이웃과의 작고 소소한 행복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고요한 삶을 추구하라는 의미는 둘째, 하나님이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일상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라는 것이다. 대단히 짜릿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굉장한 성취를 통하여 주님의 역사를 보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부서진 심정으로 죽음의 골짜기를 다니는 자들과 함께하신다. 주님은 이리저리 헤매느라 상하고 새카매진 자녀의 발을 만지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상한 심령을 소생시키려 마지막 피와 땀까지 모두 쏟아 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다. 한없이 높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낮은 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약속한 때가 되어 주님의 나라가 열리는 그날, 우리는 하나님께 칭찬받을 자가 누구일지 기억해야 한다. 분명 하나님은 작고, 연약하고,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아이와 같은 자에게 그 왕관을 씌워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최고라고 말씀하실 자는 일등의 자리에 선 자가 아니요, 낮은 곳에서 겸손히 거하는 자일 것이다.하나님은 언제나 그 위대함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분은 한계가 없는 장엄함을 지녔지만, 좁고 낮은 당신의 공간에 거하신다. 또한 세상을 창조하신 그 영광의 목소리를 약한 목회자의 입을 통하여 나타내신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대단한 업적으로 우리를 복종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기 원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란,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선물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평범하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생명과 같은 것이다.예수님을 닮아가는 겸손한 신앙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라는 고전에는 고참 사탄이 등장한다. 그는 웜우드(Wormwood)라는 이름의 신참내기 사탄에게 “변함 없는 것에 질색하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라”라고 지시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불변에 대한 거부감은 사탄이 “인간의 마음에 심어 놓은 가장 효과적인 약점”이다. 하지만 불변이란 질색해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도리어 크리스천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은 물론, 지금 이후로도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실 분이다. 인간은 이전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죄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부터 지금까지 성령을 통하여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성취를 위해 끊임없이 방황할 것이 아니라, 그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연약함과 평범함 속에 있는 이웃들이 알아가도록 도와야 한다.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그 영광 안에서 크리스천이 누리는 기쁨은 전혀 빛나거나 화려하지 않다. 이는 아기 예수의 탄생이 말구유에서 시작되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예수님의 부활을 빈 무덤으로 증명하셨던 것과 역시 같은 이치이다. 주님과 그 백성들의 영광은 우리의 대단한 성취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오히려 그 영광은 겉보기에는 마치 소박한 선물처럼 보이는 삶의 작은 면면에서 발견된다. 그것도 화려한 포장지가 아닌, 재생지로 감싼 듯 평범하고 겸손한 삶 속에서 말이다. 구유에서 태어나신 연약한 아기 예수와 죽임 당하신 메시아. 우리는 낮고 곤궁한 자리를 자처하셨던 예수님을 상기하면서, 지금 그와 같은 자리에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웃을 바라보아야 한다. 바로 우리 주위의 배고파 하는 이웃들과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 말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온전한 삶을 이루는 길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약함 속에 처한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우리의 사랑을 모두 비워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비워진 자리가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시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고요한 삶이 주는 하나님의 큰 영광을 맛보게 될 것이다. 원제: The Joy of an Unaccomplished Lif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새롬
영성
신앙과소명
아름다움
성공주의
조용한삶
고요한삶
하나님
예수님
위대함
큰영광
목회자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
by Dan Steel
2018-12-31
간혹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006년 여름이었다. 나는 성장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와 가진 모든 소유를 뒤로하고 영국 버밍엄에 있는 파송 교회로 돌아가라는 부름을 받았다. 2년 전에 떠나온 곳에 돌아가서 그곳의 교회 개척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회 개척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모든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분주히 움직이며, 2006년 가을까지 숨 가쁘게 준비했다. 핵심 팀을 만들고 꿈을 꾸며 계획하고 기도하는 인내의 시간을 거쳐, 우리는 드디어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감격스러운 첫 부활절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의 삶을 바꾼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는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아픈 순간들 중의 하나였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였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섭리나는 버밍엄과 옥스포드를 수없이 오갔고, 8주 후에 아버지의 장례식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항상 활동적이었고 건강하셨다. 그래서 정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헌신적인 신앙인이었지만 그분의 죽음은 나를 힘들게 하기에 충분했다.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이 교회 개척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좋은 질문이다. 지난 12년 동안 나는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교회의 개척 사역에 협력하는 특권을 누렸다. 내가 아는 한, 교회를 개척하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는 교회를 개척하기 바로 전이나 혹은 바로 후에 내적으로 겪는 고난이 있다는 점이다.“하나님은 자주 교회 개척 목회자들에게 특유의 고난을 겪게 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그것이 관계나 건강 문제일 수도 있고, 외적 핍박일 수도 있고, 내적 갈등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교회 개척 목회자들에게 나름의 고난을 겪게 하신다. 하나님은 한이 없는 지혜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려 한다. 반직관적 수단인간적으로 말하자면, 그 말은 이상한 소리로 들린다. 우리가 원했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훌륭한 정원사라면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화분에 나눠 심으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영양분을 골고루 공급받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싹이 나기 시작했을 때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겨울에는 가장 이상적인 조건에서 자랄 수 있도록 화분을 온실에 넣어야 한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또한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는 비바람에 노출하여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사 55:8-9). 하나님의 경륜에서 고통과 고난은 우리를 겸손으로 성숙시키는 열쇠이다. 목적이 있는 고통도대체 왜 고통을 주실까? 각각의 상황과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고통의 문제로 자신을 의지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게 하기 때문이다(고후 12:10). 스펄전이 “파도에 의해 이리저리 던져지더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듯이 인생의 파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한다.때때로 우리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 통화를 받거나, 또 다른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혹은 애통하는 성도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순간에도 스스로를 성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물론 교회 개척 안내서에서도 이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을 수 없다.우리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폭풍과 파도를 만나는 때이다. 물론 그것은 고통스럽다. 그리고 정말 피하고 싶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모르실까? 하나님은 오직 능력이 있으신 그분만을 보배롭게 여기도록 우리의 연약함을 부드럽게 나타내신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 개척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다. 둘째, 문제와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더 나은 목자로 세워 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고통을 겪게 하신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여러 교회 개척자들은 에너지로 가득하고 용기가 있으며 대담하다. 그들은 열정으로 임한다.하지만 병상에서 죽어 가는 사람 옆에 앉아 있거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로 씨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많은 목회자들은 알게 모르게 힘들어 한다.아마도 주님은 우리를 일부러 고난의 ‘온실’에 넣어 두신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고후 1:4) 할 수 있게 하신다.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가장 잘 배우고 진실한 내 모습을 살피게 된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지만 이를 이루시는 이는 주님이시다.아버지의 죽음을 되돌아보면서, 나의 관점이 많이 바뀐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생명, 사역, 교회 개척, 설교, 목양을 새로운 렌즈로 보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나와 다른 사람의 삶에 복음을 더 잘 적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정말로 나를 아프게 했다. 여전히 아프다.왜 주님은 시험을 주실까?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사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죽음의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심은 아닐까. 아마도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의 현실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복음의 필요성, 그리고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상기시켜 주려 하시는 것은 아닐까.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를 서서히 그분이 원하는 모습의 목회자로 만드시는 것이 아닐까.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 Your Pain has a Purpose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성숙
주님의은혜
섭리
고통
복음
교회가 소비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는가?
by Shaun Cross
2018-12-31
소비주의는 우리 사회에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이미 소비주의는 우리 삶에 깊이 배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는 일은 마치 공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모든 사람은 단지 살기 위해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비하기 위해 산다. 우리는 ‘더 새로운 것’, ‘더 나은 것’, ‘더 많은 것’으로 내적 공허를 채우려고 애를 쓴다.그런데 주목할 것은 발표되는 연구마다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뚜렷이 증명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는 더 많이 소비할수록 오히려 더 적은 만족감과 더 낮은 성취감을 느낀다. 소비의 대상이 된 교회슬프게도 교회는 소비주의라는 덫에 쉽게 빠진다. 우리(교회)는 고객(교인)에게 품질 좋은 제품(하나님, 설교, 음악)을 주기적으로 공급한다. 교회라는 기업에서 담임목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목자에서 CEO로 변한다. 그들은 성도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경영하려 든다. 장로는 하나님이 맡기신 양 떼를 보살피는 대신(벧전 5:2), 이사가 되어 회사의 이익을 관리하고 투자 금액에 맞는 수익을 보장하려 한다.나아가 직원은 거대한 괘종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반복적으로 사업 시행과 고객 만족의 업무를 수행한다. 또한 회원 수(교인)는 우리가 제품을 얼마나 잘 팔았는지 보여 주는 지표가 된다. 그러나 교회가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죽어가는 경우도 있다. 전도, 섬김, 봉사 활동이 하나님보다 교회의 브랜드를 견고하게 하고, 더불어 ‘대상’인 청중을 솔깃하게 하는 전략으로 전락하는 경우이다(여기서 ‘대상’인 청중은 현재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다).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변질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모인 성도들의 모임에서, 고객으로 가득 찬 상업적 기업의 모습으로 변한다. 이 지점에 이른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나 죄인의 회심에는 큰 관심이 없다. 말 그대로 기업과 다를 바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세속적인 성공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는 건강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죽어가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건강한 주님의 몸예수님은 우리를 소비하도록 부르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며, 정의와 자비를 행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은 초대교회가 보인 자세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초대교회의 성도는 “내가 여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여기서 음식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묻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이 가족을 위해 내가 어떻게 은사와 물질을 활용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보다 형제자매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초대교회에는 소비가 아닌 섬김이 있었고, 시장이 아닌 가족이 있었다.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소비주의 유혹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방법은 바로 교회 개척이다. 교회 개척을 통해 적어도 세 가지 방법으로 소비주의에 저항할 수 있다.1. 교회 개척은 하나님 나라와 선교를 위해 ‘파송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새 교회를 개척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교회는 파송하는 것에 대한 질문과 하나님 나라 중심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인력, 재정, 자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새 교회를 지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미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할 좋은 목회자를 양육할 수 있을까? 복음 안에서 이처럼 협력하는 일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이런 질문은 교회의 임무와 목표, 그리고 방향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답을 따라 성도들이 고심하며 노력할 때, 이러한 질문들은 성도와 또한 교회 밖 사람들에게도 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소비주의는 힘을 잃게 된다. 2. 교회 개척은 모두가 ‘섬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교회 개척은 종종 명확하게 정해진 사역 없이 조그맣게 시작된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은 기존의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하나님이 내게 어떤 은사를 주셨을까? 내가 이 교회를 위해 어떤 은사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하고 자유롭게 고민할 수 있다. 나는 교회에서 다음의 현상을 목격했다. 한 성도가 주기적으로 찬양을 인도하기로 자처했다. 그는 처음 지원했을 때 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지만 교회에서 은사를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우리 교회는 무너졌다가 회복되고 있는 도시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정의와 자비 사역을 감당할 만한 구체적인 제도가 아직 없었다. 그에 따라 성도가 주도적으로 그러한 사역을 감당해야만 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환경 때문에 예배와 성례를 단순히 소비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섬김을 통해 복음 안에서 성장하게 되었다.다시 말해, 교회에 미리 준비된 직원과 사역 체계가 없었던 열악한 환경이 오히려 그들을 복음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이다.3. 교회 개척은 숨거나 불편함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 교회는 참으로 작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오지 않으면,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도 주님은 내 안에서 일하신다. 그 예로 작은 교회가 성도를 양육할 수 있는 독특한 방식들을 보여 주신다.우리 교회를 방문하면 교인들의 눈에 띄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교회보다 좀 더 큰 개척 교회를 가더라도 이는 마찬가지다.교회 개척 팀은 종종 더 크고 체계적인 교회는 시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방문자를 섬길 수 있다. 왜냐하면 작은 교회는 왔다가 소리 없이 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즉 작은 교회에서는 소비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곳의 공동체를 소개받게 되고, 그렇게 한 번 뛰어들면 마음을 쏟을 수밖에 없게 된다.교회 개척 자체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소비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성령님과 복음의 인도를 통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신부가 어떤 모습인지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교회의 소비주의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교회 개척은 이러한 시작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소비가 아닌 섬김의 자세를 갖게 하실 것을 기대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Church Planting Kills Consumerism번역: 하늘샘
교회
교회개척
소비주의
주님의몸
하나님나라
선교
파송
목자
기독교 신학에서 아름다움은 반드시 인식되어야 한다
by Matt Capps
2018-12-31
작년에 나는 ‘크리스천이 신학에서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5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한 기독교적인 연구의 첫걸음을 제안하고 싶다.아름다움이라는 주제에 관한 대부분의 생각과 글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신학과 철학 및 전문 분야로서의 미학을 전공한 사람들 때문이다. 심지어 이 철학자들 중에는 아름다움은 폐기되어야 하는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하지만 아름다움은 반드시 인식되어야 한다.크리스천은 아름다움에 관해 뚜렷한 기독교적 관점을 공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는 자주 등한시되는 주제이지만 이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은 강변하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선물이다. 아름다움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크리스천에게 있어 아름다움에 관한 연구는 계시 교리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계시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알려질 내용을 설명하고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신다. 칼 헨리(Carl F. H. Henry)의 말처럼, “하나님은 계시의 조건과 이유만이 아니라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드러나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도 결정하신다.”계시 교리는 자신을 능동적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는 그분의 아름다움이 포함된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 위에 인간을 두신 일은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가 나아갈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첫째,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근원이시다. 둘째, 인간이 아름다움과 미적 경험에 몰두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권적인 성찬식과 다른 피조물에게 없는 경험을 주신다. 저녁 노을의 위엄 앞에서 생각에 잠기거나 혹은 모차르트의 작품을 주체적으로 즐기는 골든 리트리버를 찾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을 즐기고 경험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이다.아름다움과 일반 계시역사적으로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자연, 문화, 인간의 이성, 선한 행위 등 일반 계시를 통해 미적 진리와 아름다움을 계시하신다고 믿어 왔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일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얻을 수 있지만 그 범위, 일관성, 깊이에 있어서는 제한된다고 생각하곤 했다. 죄의 효력은 항상 일반 계시를 파괴한다.일반 계시가 본질적인 권위는 아니지만 신학 안에서 고유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다.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이 “매우 좋다”라고 7번이나 선언하시며 창조의 순간을 기뻐하셨다고 명백하게 보여 준다. 이는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이 즐겁고 유쾌할 만한 결과라는 뜻이다. 따라서 최초의 창조물을 기준으로, 이 선언은 하나님이 판단하시기에 그분이 만든 것들이 미적 특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성경은 땅, 나무, 돌 등 창조의 요소들을 아름답고 유쾌한 것으로 자주 묘사한다.그렇다면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무엇을 알려 주는가?아름다움과 특별 계시일반 계시 속 아름다움과 죄로 인한 영적 무감각이라는 현실은 특별 계시, 즉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일반 계시를 제한적이고 왜곡적으로 인식하게 되므로, 성경을 통해 일반 계시를 알려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시편 19편 1-4절은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명확히 알려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또한 바울 역시 하나님이 창조 질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음을 확실히 선포한다. 이는 루스드라(행 14:15-17)와 아덴(행 17:22-32)의 이방인을 향한 그의 연설에서 잘 나타난다. 더불어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도 이 사실을 알렸다.“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19-20).세계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은 하나님의 예술 작품이다. ‘시’라는 문학이 저자의 분명한 설계와 의도를 담고 있듯이 하나님은 우주라는 강력한 시를 통해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시편 19편의 하늘에서부터 마태복음 6장의 백합화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풍부한 아름다움에 반영되어 있다.아름다움과 성경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인간에게 계시하는 책인 성경은 ‘그 자체로’ 위대한 아름다움을 지닌 중요한 문학 작품이다. 성경은 미학의 중요성을 그 기록뿐만 아니라 특유의 문학적 형식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말한다.아름다운 문학적 전통들이 성경 전체에 존재하는데 심지어 사실 위주로 건조하게 기록된 역사 부분에서도 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평행법 같은 문학적 구조들, 이야기 속 세심하게 만져진 표현, 예술적 복합성을 지닌 시는 하나님의 계시 속에 자리한 아름다움의 중요한 역할을 증명한다. 릴랜드 라이큰(Leland Ryken)이 말했듯이, 성경에서 아름다움이 중요한 몫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작가들이 정교한 패턴을 지닌 운문 형태로 기록하거나, 혹은 탁월한 솜씨로 간단하고 주의 깊게 이야기를 구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아름다움이 우리를 이끄는 곳아름다움이 없는 세상에서 발타자르(Balthasar)는 이렇게 선언한다. “남은 것은 단지 존재하는 하나의 덩어리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아름다운 것들을 이렇게 많이 만드실 필요가 없었지만, 분명히 그렇게 하셨다.아름다움이 눈길을 끈다면, 그 아름다움에 주목해 보자. 인간의 내면에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본성이 존재한다면, 그 본성이 우리를 이끌어 가게 해 보자. 이 세계와 말씀은 주권자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이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 자체를 넘어 하나님의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가리킨다.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을 부르는 강력한 표지판이다. “보라. 참되고 유일한 진리인 하나님은 선하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In Christian Theology, Beauty Demands to Be Noticed번역: 이주일
문화
문화예술
칼헨리
계시교리
특권
일반계시
특별계시
발타자르
아름다움과성경
자녀와 함께 기도를 배우다
by Megan & Jared Kennedy
2018-12-28
기도는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에 속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이런 어려움을 알기에 나는 이 글에서 기도와 관련하여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과 수시로 기도할 수 있는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세심하신 하나님남편과 나는 주일 아침에 서로 다른 차를 운전해서 교회에 간다. 남편은 일찍 교회로 가서 다른 목사님들과 함께 기도로 예배를 준비한다. 그동안 나는 딸들을 힘겹게 끌고 아침 예배에 참석하러 간다.그런데 어느 주일은 지각을 했다. 우리가 늦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시간이 모자란 상황에서 아이들과 나는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건널목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제대로 주차할 공간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주차 공간을 찾기 시작했는데, 마침 다른 차가 눈앞에서 출차하기 시작했다. 나는 엄청 운이 좋았다고 외쳤고, 그 말을 하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이 그 하루의 아침부터 나와 내 가족을 지키고 계셨음을 말이다.우리 부부는 최근에 폴 밀러(Paul Miller)의 일상 기도(A Praying Life)를 읽었다. 거기서 저자는 예전에 읽었던 기도에 관한 한 책을 언급하는데, 그는 해당 책이 주차 자리를 허락해 달라는 식의 사소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내용만 빼면 매우 탁월했다고 설명한다. 그러고는 장로교 선교사였던 자신의 어머니 로즈 메리 밀러(Rose Marie Miller)가 그 내용에 관해 무슨 말을 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옮겼다.아침식사를 하려고 앉으면서, 이 책의 저자가 주차 공간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자, 어머니는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주차 공간을 찾을 수 있을까?’하나님이 우리의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에도 개입하신다는 로즈 메리 밀러의 확신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과는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그 거짓말을 믿기 때문에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 나 역시 집안 청소, 아이들 등교시키기, 그리고 주차 공간 찾기 같은 일상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한테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한다.하지만 성경은 거룩한 영역과 일상의 영역을 인위적으로 나누는 일을 경계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실제로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은 일상생활에 대하여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 시편 104편에서 시인은 이런 생각에 대해 확신을 준다. 그는 하나님이 이 땅의 작은 일까지 다 관여하신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딸들이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으면 부모로서는 너무 힘들다. 나는 이기적이게도 밤 9시가 되면 딸들이 모두 잠에 들어서 나만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저녁만큼은 마땅히 나만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이 더 좋은지를 잘 아신다.사실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잠들기 무서워하는 막내딸을 내게 주셨다. 아이를 재우고 방에 돌아와 TV를 시청하려고 할 때, 아이가 방문을 두드리며 무서우니 잠을 잘 자게 해 달라고 괴물이 안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기를 조를 때, 부모라면 그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나는 한때 육아를 하면서도 축구 시청 중에 광고가 나오면 화를 불끈 내고는 했다. 나는 그 정도로 방해받는 일을 싫어했던 사람이다.그러나 방해받는 상황은 나의 일상이자 현실이 되었다. 당연히 우리 부부는 그 시간에 하던 일을 멈췄다. 그리고 딸을 위해 기도했고, 그 아이를 끌어안은 후 다시 잠자리에 눕혔다. 어떤 때는 여러 차례 다시 눕히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런 시간이 불만스럽기보다 기도에 대해 배우는 좋은 기회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예수님은 요한복음 14:13-14에서 무엇이든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말하자면, 어린아이와 같이 우리는 하늘 아버지한테 달려갈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마태복음 7:7-12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시고 또한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어떻게 기도하는가?하나님은 모든 일에 신경을 쓰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일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매트 챈들러(Matt Chandler)는 부모가 자녀와 복음중심의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일상생활에서 겪는 일을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고 꾸준히 이야기한다.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상생활에서 겪는 일을 지렛대 삼아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도 기도를 배우도록 이끌 수 있을까?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1. 기쁠 때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표현하라고 가르치라.우리 가정은 식사를 하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 시간을 빌어 최근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에 아이들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강아지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한다.아이들은 하나님께 구체적이고 단순하게 감사를 드린다. 그들은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하심, 그 자체를 찬양하는 일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매일 밤 나누는 성경 이야기의 주제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가르쳤다.2.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라.내가 어렸을 때 잘못을 하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퇴근한 후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분에게 말씀드리라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의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가르치기 위한 방법이었다. 나는 이 간단한 습관을 통해 기도하는 일과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행동을 서로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되었다.아이들은 혼이 날 때 감정에 압도되어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어떤 아이들은 로마서 7장을 경험하기도 한다. “엄마는 쿠키가 식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내 마음은 쿠키를 원해요!” 이때 우리는 아이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일의 모범을 보이고, 성령님께 그 죄에 대한 욕구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을 할 수 있도록 내게 순종하고 싶은 마음을 주세요.”우리가 아이들한테 잘못을 했을 때도 비슷하게 기도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아이들에게 화를 참지 못하고 쏟아 냈을 때, 시간을 갖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백하고 그 아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3. 도움이 필요할 때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고 가르치라.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좋은 방법의 하나는 아이들이나 우리의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잠시 자리에 멈춰서 그 순간의 감정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 감정이 밤에 나오는 괴물에 대한 무서움일 수도 있고, 주차 공간에 대한 걱정일 수도 있다.꼭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아니더라도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도움이 항상 필요하기 때문이다. 매일 밤마다 우리 가정은 마르틴 루터가 밤에 드리던 기도문을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바꾸어 함께 기도한다.하나님, 우리 딸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오늘도 안전하게 보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아이가 커가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훗날에 경건한 남편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리고 오늘밤에 사탄이 교활한 계획으로 방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세요. 아멘.경건한 배우자에 대한 부분은 루터의 기도에는 없었지만,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넣으신 내용이기 때문에 전통을 지키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 또한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아이들에게 어떤 기도를 원하는지 물어볼 수도 있다. 혹 아무 대답이 없더라도 매일 물어보는 것이다. 이 습관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은 하나님과 부모님 모두가 자신의 삶에 깊은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주님은 우리 삶 전체에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 모든 일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일은 이 단순한 확신에서 시작되어야 한다.원제: Lord, Teach Us-and Our Kids-to Pr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조현빈
가정
양육
세심하신하나님
폴밀러
일상생활
감사와찬양
회개
감정
기도
복음이 낳는 문화
by Ray Ortlund
2018-12-28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복음은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와는 다른 분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의 흔한 모습처럼 뽐내거나, 자랑하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자신에 대해 방어적이거나, 타인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태도를 갖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겸손하시다. 우리는 그분과 싸우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와 다투려고 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부풀리며 그분에게 대항하지만, 그분에게는 허영이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비우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우리 같은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순종하는 겸손을 보이셨다. 이처럼 성경 안에 있는 복음 교리는 교회 안에 복음 문화를 만든다.복음 교리 - 복음 문화 = 위선복음 문화 - 복음 교리 = 취약복음 교리 + 복음 문화 = 능력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다음과 같이 복음 문화와 비복음 문화를 구분하고 있다.“영적 교만은 악마가 기독교의 진보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그것은 마음을 어둡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지옥의 연기가 흡입되는 통로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 위해 악마가 소개하는 모든 나쁜 짓의 주요 자원이다. 영적 교만은 비통이나 비웃음으로, 그리고 경솔과 경멸로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게 한다. 그러나 순전한 크리스천의 겸손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침묵하게 하거나, 아니면 슬픔과 긍휼로 말하게 한다. 영적 교만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게 하지만, 겸손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교만한 사람의 마음에는 자신만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아무것도 의심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성도들이 은혜 가운데 있지 않을 때, 또 그들이 냉랭하거나 활기가 없을 때, 그들의 결점을 자주 관찰하고 빨리 지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겸손한 크리스천은 가정에서 할 일이 너무 많고, 그 자신 안에 있는 사악성을 보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주목하기 위해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spel Doctrine, Gospel Culture번역: 정은심
문화
세계관
복음
에드워즈
복음교리
복음문화
교만
존중
예수님의 눈물에서 예술을 생각하다
by Makoto Fujimura
2018-12-28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온다. 나사로의 죽음과 마리아와 마르다의 근심을 보며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말 그대로 진(truth), 선(goodness), 미(beauty)로 가득하다.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고” 베다니로 오셨다(요 11:4). 예수님이 도착했을 당시, 마르다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요 11:25).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곧 자신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권능을 갖고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주려고 베다니에 오셨다면, 왜 간단하게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셨을까? 그렇게 하셨더라면, 즉각 찬사가 쏟아졌을 것이고, 눈물을 흘릴 일도 없으셨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눈물을 흘리는 것은 헛된 일, 아니 소모적인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망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연약한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스스로 연약한 상태 속에 들어가셔서 사망의 괴로움을 직접 느끼셨다.눈물을 흘린 다음 예수님은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셨다(요 11:43). 예수님의 깊은 감정적 반응은 부활의 순간을 위한 준비 단계였던 것이다. 나사로는 비틀거리며 무덤에서 걸어 나왔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어서 당국자들이 나사로를 죽이려고 획책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계속 길을 가셨다.예수님의 눈물은 주님에 관한 마리아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베다니의 단단한 땅을 흠뻑 적신 예수님의 눈물은 마리아의 눈물과 뒤섞였다. 예수님은 구주이기만 하셨던 것이 아니다. 친밀한 친구로도 드러나셨다. 이 인자와의 깊은 친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밝게 드러났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제자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이후에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달려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바쳤다. 마리아는 제자들이 있는 비좁은 방으로 들어가 결혼을 위해 준비해 둔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 이 향유는 당시의 노동자 1년 임금에 해당되는 값비싼 나드 향유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예수님의 모든 이적이 예수님을 속죄의 죽음으로 한걸음 더 가까이 이끌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리아는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동시에 의도적인 헌신의 행위로 반응해야 했다.마리아의 이런 행동에 (특히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불평했으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중략)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6-9).예수님의 눈물은 베다니의 어떤 집에서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붓는 마리아의 헌신을 낳았다. 여기서 벌어진 한 여인의 일탈적인 행동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활짝 열어 놓았다. 곧 고통 소리로 가득 찬 우리의 부서진 세상 속에 복음이 침투하는 현실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이 걸치신 유일한 땅의 것은 마리아의 나드 향유였다.예수님의 눈물과 마리아의 나드 향유와 같이, 예술도 어떻게 보면 여분 혹은 낭비처럼 여겨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우리의 삶 속에 널리 퍼진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인생의 ‘여분’으로 생각한다. 곧 여가 생활에 불과한 장식품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쇼팽의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희생해야 할까? 아니면, 무용수가 링컨 센터 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은 어떠한가? 많은 사람이 ‘여분’으로 생각하는 것, 심지어는 낭비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을 규정할 수 있다. 그날 밤 베다니의 한 집에서 마리아가 뿌린 향기 속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그림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칸타타도 함께 떠돌고 있었다. 모든 창작 행위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그분께 바치는 직관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이 직관을 왜곡하고, 부정하고, 유해한 것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의 동력은 창조주에게서 나온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셨다.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격분하고 나드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막 14:5). 실용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탐욕은 덧없는 아름다움이 갖고 있는 힘을 파악할 수 없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율법주의다. 율법주의는 영혼을 서서히 질식시켜 죽이는 완고한 결정론이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겪는 고난에 실용주의적인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해를 끼친다. 율법주의는 우리의 발에 나드 향유가 부어지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생명을 빼앗는다. 예술가들은 마리아처럼 직관적으로 창조하여 그런 억압을 깨뜨릴 수 있다. 때때로 교회와 세상에서 실용주의와 율법주의는 방해가 된다.예술가들은 창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눈물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물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예술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진실로 기쁨으로 나누어 주는 자는 단지 풍성히 베푸시는 하나님께 반응하고 있는 것임을 잘 알고 계신다. 우리가 낭비하고 허비하는 행동으로 간주하는 일을 예수님은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후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후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나는 작업장에서 그림 위에 물을 붓고 그곳에 무기 안료를 섞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은혜를 추구한다. 내가 사용하는 재료는 낭비적이고 비싸다. 금, 백금, 은, 손으로 들어 올린 종이와 실크, 백 년 된 잉크 등 모두 내 그림의 표면을 장식하는 재료들이 된다. 나는 내가 마리아와 같다고 생각한다. 또 예수님의 눈물과 같다고 생각한다.그리스도는 위대한 예술가시다. 아마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보신 것은 자신의 위대한 희생을 모방하고 반사하는 한 작은 예술가였을 것이다.마리아는 왕이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로 전율하면서 그런 사랑의 행위로 당시의 문화 규범을 어겼다. 이 한 행위로 마리아는 그 순간의 신비를 깨고 열어 놓았다. 마리아의 나드 향유는 퍼져서 향기로 방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덧없는 행위였다. 곧 마리아가 ‘예술’로 생각조차 못했던 행위였다. 그녀의 행위가 기념될 것이며, 영원한 유산을 남겨 놓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리아가 도리어 깜짝 놀랐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리아가 행한 일은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퍼져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특별한 선언이 갖고 있는 논리적 결과를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복음 사역은 마리아의 나드 향유의 향기로 흠뻑 적셔 있는가? 유다의 가면을 벗기는 우리의 아름답고 호화로운 예물, 곧 장차 임할 우주적 혼인을 준비하는 예물은 무엇인가?우리가 낭비로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은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하셨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셨다. 그분의 눈물은 아름다웠으며, 우리를 부활에 대한 가장 큰 소망으로 이끈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eautiful Tears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문화
세계관
예수님의눈물
여운
예술
복음사역
사랑의행위
마리아
나드향유
내가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40년 목회에 대한 반성
by Steve Timmis
2018-12-27
이 글을 쓰게 된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첫째, 새로운 해의 시작이다. 이는 주님이 이루신 모든 것을 돌아보고 나를 반성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둘째, 이것이 아마 더 중요한 이유가 될 텐데, 나는 최근에 60번째 생일을 기념했다. 기쁘고 놀라운 일이다. 내가 어떻게 이런 원숙한 나이에 도달했는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지난 40년 동안의 목회에서 나를 자비로 붙들어 주셨다.지난 삶 속에서 나는 수많은 교회 개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혹은 많은 책임을 담당했다. 성공적인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상황도 있었다. 이제 내가 배운 교훈을 정의하기에 적절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바라건대, 이 정리 중 일부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교회 개척의 세계에 새롭게 뛰어든 자들뿐만 아니라 경험 많은 목회자들에게도 유익이 되었으면 한다.1. 개척의 착수보다 삶에 초점을 맞추라첫 개척을 시도할 때는 경험이나 이와 관련된 지식이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첫 모임은 꽤 성공적이어서 오래되고 비좁은 예배당에 약 30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다. 하지만 일주일 후, 교외로 차를 몰고 나와야만 하는 그 교회에는 아무도 다시 오지 않았다.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인데, 이는 좋은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해 아내와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정말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지역 사회에 참여했으며, 복이 되는 삶, 즉 그리스도를 빛나게 하는 모든 일에 힘썼다.개척에 관한 강연과 자료의 대부분은 ‘착수’에 초점을 맞추며, 이것이 교회 개척의 처음과 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착수는 교회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진정으로 가능할 때에 실행할 수 있는 영역이다. 여기서 교회는 그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시에 모여 노래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 것에 그치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교회 개척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찰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매일같이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을 알리려고 힘쓰며, 서로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고찰 이후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교회를 위해 움직여라. 개척의 방식은 곧 당신이 목표하는 교회를 표현하는 방식이 되어야 하며,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통상적인 혹은 동떨어진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개척 이후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더라도, 당신의 교회는 여전히 깨지기 쉽고 목표를 이루기에 비효율적인 상태로 남을 수 있다. 모임 안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은혜를 얻고, 그분의 영광에 기뻐하며, 서로와 잃어버린 세상을 향해 날마다 그분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때 비로소 ‘개척 착수’를 고려하라.2. 핵심 팀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마라핵심 팀은 개척을 성공시키거나 반대로 무너뜨릴 수 있다. 따라서 핵심 그룹을 구성할 때에는 각별히 주의하라. 순진함을 피하고 예민하게 판단하라.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일할 수 있는 사람들, 재정이나 역량으로 도와줄 사람들, 또 당신이 약해져 있을 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반드시 기도하며 신중하게 팀을 구성하라. 나도 늘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간혹 나는 당장의 시급함이나 하고자 하는 열정, 또는 사역을 도울 누군가가 단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팀을 꾸렸다.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선택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했으나, 좋지 않은 모습으로 끝나기도 했다. 주님은 우리의 능력이나 계획과 무관하게 그분의 교회를 세우신다. 하지만 이 당연한 진리를 믿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곧 사려 깊은 생각의 불필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3. 여성들도 복음 사역자다나는 보완주의(곧 남녀가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하여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결혼과 가정 및 신앙 생활 등을 이루어 간다는 입장)를 지지하는 사람이기에 여성 역시 복음 사역자로서 자신의 부르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나 부가적인 유익이 아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과업을 함께할 파트너인 여성이 필요하다. 그들은 뛰어난 복음 전도자, 성경 교사, 제자 훈련 지도자, 조직 운영자, 일꾼, 리더가 될 수 있다. 그들은 교회의 다른 역할만큼이나 교회 개척에도 반드시 필요하다.목회 사역의 큰 기쁨 중 하나는 여성들이 성장하고, 기회를 제공받고, 훈련되며, 파송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당신의 교회에 속해 있는 여성들을 격려하고 또 강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단지 어린이 사역만 섬기게 하지 말라. 여성들은 조직을 구성하고, 영향을 끼치며, 문화를 이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여성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다.4. 비난받을 정도로 복음에 정통하라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청년이었던 나는 바울이 디모데는 할례를 받게 하면서, 반대로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게 하는 상반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두 상황 모두가 복음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바울은 상황에 맞게 행동하려 한 것이지, 그 행위에 있어서 불일치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원칙에 따랐고, 실용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울을 변덕스러운 자라고 비난했다.내가 교회 개척을 통해 깨달은 점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들로 마음이 분산되거나 심지어 그 방향성을 잃거나, 혹은 주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겁먹지 않으려면 복음에 정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복음은 함부로 수정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여러 상황 속에서 다양한 적용점을 갖고 있을 뿐인데, 그 지점에 다다르려면 복음에 정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알고, 복음을 사랑하며, 복음을 기뻐하고, 복음이 비난받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5. 교회의 성장을 곧 복음의 확장으로 오해하지 말라‘교회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 주변에 다른 교회들이 있어 서로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 원동력이 되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경쟁’이라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옳은 논리일 수도 있다. 주변 다른 교회보다 최신 유행을 더 잘 알고, 최근 경향을 더 잘 따르고, 더 화려하고, 더 크고, 더 큰 소리를 냄으로써 교회가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성장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의사들이 종양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주변 교회와 경쟁하는 마음으로 개척하지 말라. 차라리 복음의 증인이 없는 곳으로 가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분명 성장은 느리겠지만, 복음이 확장될 가능성은 훨씬 높다.나의 지난 경험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숫자적으로 회중을 성장시키는 일은 고되었지만 최고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대가를 요구하지만 더욱 아름다운 사역은 무엇일까? 바로 회복된 죄인들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복음이 드러나도록 이끄는 일이다. 이런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다. 새해를 맞이하며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분명 이러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신 위대하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드리게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ings I Wish I’d Known: Reflections on 40 Years in Ministry번역: 주영식
목회
리더십
개척착수
핵심그룹
교회성장
상호보완주의
여성사역자
공동체
처음
이전
191
페이지
192
페이지
193
페이지
194
페이지
열린
19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