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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설교에서 배운 열 가지 교훈
by Sam Storms
2018-12-27
나는 지난 6월, 서른 여덟 번의 계시록 설교 시리즈를 마쳤다. 지금 그 순간들을 돌이켜 보면 열 가지 진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이 글은 숫자적 상징, 666, 짐승, 음녀, 천년왕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힌다.1. 성도의 삶은 박해와 동떨어질 수 없다현대를 사는 크리스천은 불신과 우상숭배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강한 핍박을 받을 것이다. 이는 모든 크리스천에게 예외 없는 일이다.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을 실망시켜서 받는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겸손과 용기로 이 고난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완전하고도 아름다운 모든 일들을 이해하게 된다. 2.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다하나님은 모든 인간사(affairs)에 대해서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신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권세 밖에 있을 수 없다. 오늘날 전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연이은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종려주일에 ISIS의 폭탄 테러로 수십 명의 크리스천이 죽었다. 피비린내 나는 내란과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끊이지 않는다. 세상은 온통 극도의 불안과 혼란, 그리고 통제 불능의 상태로 보인다. 하지만 계시록은 하나님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을 완전히 통제하고 계심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3.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다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권세자보다 높고 강한 분이다. 하지만 죄로 가득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나 혹은 힘을 가진 누군가를 신으로 받들면서 예수 그리스보다 더 높은 존재로 추앙하고는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왕들 위에 군림하는 유일한 왕이시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들의 주인이시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주권자들을 자신의 완전한 통치권으로 다스리신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중남미뿐만 아니라 북한, 중국, 러시아에서 발생하는 온갖 일에도 예수님은 그 주권을 행사하신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을 다스리는 분’으로서 모든 권력 있는 자와 온 나라의 대통령들을 통치하신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왕과 대통령이 하는 일을 알고 있고, 종종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정리하며 통제하신다. 때로는 그들이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또 때로는 그들의 계획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일의 방향을 바꾸신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예수님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도록 이끌어 가신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 일을 행하시는지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은 분명히 그렇게 하신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노릇 하시리니”따라서 성도는 신문을 문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인터넷 기사의 표면적인 의미만 파악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통해 그 모든 기사와 사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통치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상황을 통찰력 있게 바라보며 예수님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4.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완성에 이를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목적대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이끄시고 마침내 완성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는다. 우리 눈에는 현재의 상황이 나빠 보일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여러 모양으로 핍박을 받을 수 있다. 당장은 세상과 악한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고, 악인의 길이 형통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한다. 그 어떠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여시고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방해받지 않는다.5. 교회는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교회에 대한 전 세계적인 핍박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심지어 교회가 완전히 파괴된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다가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교회의 외침은 들리지 않고, 심지어 교회의 존재 자체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외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이 보내신 추수꾼들이 영혼의 추수를 진행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들림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가? 계시록 11장을 천천히 읽어 보기를 바란다.6. 사탄은 두려운 존재이지만 이미 패배한 적이다사탄은 하나님을 증오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와 교회도 증오한다. 사탄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성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려 한다. 또 성도로 하여금 믿음을 포기하도록 한다. 그러나 사탄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우리의 고백으로 사탄을 이기고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을 때, 우리는 온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보장받게 된다(계 12:11).7.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다재림의 때가 다가올수록 죄와 우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더 크고 넓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때 성도는 그 진노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이르기까지 안전하고 확실하게 성도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종들을 성령으로 인봉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과 역경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을 수 없다.8.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이 보이실 크고 놀라운 일들을 다 헤아릴 수 없다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에 예비하신 형언할 수 없는 복에 대하여 직접 보고 들은 이는 없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9.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날 것이다핍박으로 가득한 세상을 사는 성도는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마음을 갖기 쉽다. 이를 위해 계시록이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말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며, 그때 하나님은 이 땅에 그분의 공의를 시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날 진리는 밝히 드러나고, 악은 합당한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 10.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계시록에는 상징, 이스라엘 문제, 휴거, 그리고 환란과 관련된 논제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인격을 가진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모든 성도에게 가장 기쁘고 복된 소망이다.그러므로 다음을 기억하라. 어떤 이들은 계시록이 어렵고 이해하기 모호한 부분이 많다고 말한다. 그들은 계시록을 읽거나 묵상하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는 정반대로 말씀하신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계 22:7).계시록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믿고 순종하기 힘든 책이 아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모든 자에게는 약속된 축복이 임할 것이다. 이를 놓치지 말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Lessons I Learned from Preaching Revelation번역: 김재덕
신학
신약성경
계시록
설교
교훈
성도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교회
하나님의공의
초대교회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by Tim Keller
2018-12-26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전통적 교리를 지켜 온 크리스천들은 시대에 뒤쳐지고, 지나치게 배타적이며, 심지어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말한다.그러나 역사가이자 성경 학자인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는 이러한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들을 냈다. 바로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Destroyer of the Gods: Early Christian Distinctiveness in the Roman World)과 ‘도대체 처음 3세기 동안 왜 그들은 크리스천이 되었는가?’(Why on Earth Did Anyone Become a Christian in the First Three Centuries?)이다.그에 따르면, 초대 교인들은, 특히 문화적 엘리트들이 보기에는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세력과 상업의 중심부에서 배제되었고, 때로는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허타도는 로마의 권력자들이 다른 종교들에 비해 유독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다고 말한다.왜일까? 당시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신들을 모시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신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제국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가정과 도시와 전문 길드(guild)는 각자의 신을 믿고 있었다. 가족들과 식사를 하러 갈 때나 공적인 행사에 참여할 때, 그 집단이나 장소의 신들을 찬양하는 의례를 행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집이나 공동체 내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모독 행위였다. 이는 신들의 진노를 야기할 수 있기에 위험한 행위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신성한 통치권을 정당화하는 데 기반이 되었던 로마 제국의 신들을 경배하지 않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되었다.반면, 초대 교인들은 이러한 의례들 및 경배하는 행위들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예배했다. 유대인들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들의 경우에는 통상적으로 용인되었는데, 유대인은 독특한 민족 집단이며 이 독특함이 고유의 민족적 정체성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든 종족들로 퍼져갔고, 대부분의 기독교 성도들은 이전에 이교도였다가 회심한 후 다른 신들에 대한 경배를 거부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거부 행위는 막대한 사회적 분열과 문제를 초래하여 그들을 공적인 집회에 참여할 수 없게 했다. 가족 구성원이나 노예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경우, 그들은 돌연히 집안의 신들을 경배하는 일을 거부했던 것이다.기독교의 확산은 그 문화를 구성하는 삶의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사회 질서에 대한 전복으로 간주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좋은 시민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배타적인 부류로 여겨졌다.기독교가 폭발적으로 확산된 세 가지 이유1-3세기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생각해 볼 때, 사람들은 대체 왜 그리스도인이 되려 했을까? 왜 기독교는 그토록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일까? 사회적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기독교의 매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허타도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세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1. 기독교인들은 타인에게 거부감과 호감을 동시에 주는 ‘사회 변혁’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기독교인들은 낙태와 더불어 원치 않는 아기를 쉽게 버리는 ‘유아 유기’의 관습을 금지했다. 또한 그들은 이성 간의 결혼 관계 외에 모든 성행위를 피했다는 점에서 성적으로도 반문화적이었다. 이는 특히 결혼한 남성의 경우에 창녀, 노예, 아이들과 성행위를 하는 것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던 당시 사회의 한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다.반면에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돈을 사용하는 일에 매우 관대했으며, 그들의 가족이나 민족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특별히 그러했다. 또 다른 놀라운 차별성은 기독교 공동체가 다민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한 정체성은 각자의 민족적 정체성보다 더 근원적이었고, 따라서 종교상 전례가 없는 다민족적 다양성을 만들어 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민족을 죽인 원수들이라 할지라도, 복수하지 않고 용서해야 한다고 믿었다.2. 기독교는 창조자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제시했다당시 주변에는 신들이 내려 주는 은총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동방의 종교들도 각성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사랑의 관계는 그 어느 종교에서도 제공되지 않았다.3. 기독교는 영생의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모든 종교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획득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죽기 전까지는 누구도 영생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복음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즉 인간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행위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가르치기에, 온전한 구원의 확신을 바로 지금 믿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초대교회와 오늘우리는 이러한 연구가 갖는 현대적 적실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는 온갖 종류의 신들(deities)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매우 배타적이자 사회 질서에 위협적인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온갖 종류의 정체성(identities)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 매우 배타적이자 사회 질서에 반하는 사람들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그와 같은 당시 상황 속에서도 번성했다. 왜 그러한가?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 다르고 배타적이라고 놀림 받은 데에 있었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끌린 것은 ‘기독교가 달랐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종교에 주변 문화와 다른 점이 없고, 문화를 비판하여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특징이 없다면, 그 종교는 불필요하게 여겨져서 생명력을 잃을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자선, 관용, 정의, 다민족성, 평화의 중재자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인식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겠는가?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인들은 그 시작부터 성(sex)과 관련하여 세상 문화와 조화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바뀐 것은 교회가 아니라 문화였다.기독교가 번성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어떤 문화나 종교도 갖지 못했던 것, 즉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와 은혜로 인해 거저 주어지는 구원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다른 어떤 종교도, 세속주의도 이 구원을 줄 수 없다. 다른 어떤 영적인 접근으로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여전히 갈망하고 있는 진리는 바로 기독교의 독특한 가치관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초대교회는 분명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완고한 소신으로, 그들은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우리 역시 이런 변혁을 갈망해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We Need to Learn from the Early Church번역: 김재완
역사
초대교회
팀켈러
교훈
사회변혁
관계
영생
확신
사랑
아이라고 예수님을 모를까
by Jaquelle Crowe
2018-12-26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노하시는 장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예수님께 아이들이 다가오는 걸 막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장면도 그 하나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예수님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하셨다. 아이들이 다가오도록 부르시고 두 팔을 벌려 맞아주셨다. 우리가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유아들과 미취학 연령의 아이들을 가르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막 기본적인 현실을 알아 가고 있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성경 말씀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 아이들이 성경을 알고 좋아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이런 문제로 고민한다면, 성경의 진리를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방법도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자레드 케네디(Jared Kennedy)의 ‘초급자를 위한 복음 이야기 성경’(The Beginner’s Gospel Story Bible)을 통해 어떻게 그런 방법을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아이들이 이해하는 표현이 책에서 저자는 유아와 취학 전의 아이들을 독자층으로 삼아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313쪽에 이르는 아름다운 장면들로 묘사해 놓았다. 그는 이 작업을 ‘약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진행해 나간다.여기서 그는 “아이들은 약속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지요”라고 설명한다. 가령, 엄마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사 준다고 약속했는데 마트가 문을 닫아 버렸을 때 아이들은 약속이 좌절되는 실망감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육신의 부모와는 달리,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약속을 지키십니다(민 23:19).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방법은 그 누가 상상할 수 있는 방법보다 더욱 놀랍지요.”그렇게 시작되는 이 성경은 창조부터 재림까지 구속의 역사를 추적한다. 그리고 구약성경 이야기에 대해서는 ‘세워진 약속’(Promises Made), 신약성경 이야기에 대해서는 ‘지켜진 약속’(Promises Kept)이라고 각각 이름을 붙인다. 각 이야기는 4-6쪽 분량이며, 기억해야 할 핵심 진리와 토론할 수 있는 적용 질문을 하나 씩 담고 있다. 이렇듯 가정 예배나 주일학교 예배에 적합하도록 디자인되었다.트리시 마호니(Trish Mahoney)가 그린 삽화는 선이 굵고 색이 다양하지만, 톤이 단순하여 아이들에게 자극적이지 않다. 셈하기, 반의어, 패턴과 모양 및 대상물 인식하기 등 교육적인 요소도 많이 들어 있다.아이들이 이해하는 신학이 성경은 어린 독자층의 수준을 배려하면서 동시에 신학적 측면까지 놓치지 않는 부분이 큰 장점이다.요셉의 이야기를 예로 살펴보자. 요셉의 생애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저자는 “이것이 좋은 일인가요? 아니지요”라는 후렴구를 넣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이다.“요셉의 형들은 화를 내며 그를 질투했습니다. 이것이 좋은 일인가요? 아니지요.”“형들은 그의 외투를 벗기고 그를 구덩이 던졌습니다. 이것이 좋은 일인가요? 아니지요.”“그는 상인에게 팔려 이집트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좋은 일인가요? 아니지요.”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요셉에게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났지만, 하나님이 늘 요셉과 함께하셨어요.” 그러면서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좋았나요? 그렇습니다. 나쁜 일이 생겼을 때도 하나님의 계획은 여전히 좋았습니다”라는 새로운 후렴구를 사용한다.이와 같이 저자는 짧은 문장과 그림을 사용하여 3세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고통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설명한다. 그는 어려운 교리를 피하지 않고 눈높이에 맞는 방식으로 그 내용을 다룬다.그는 또한 성벽을 재건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느헤미야나 구덩이 속에 던져진 예레미야 같이 흔히 어린이 성경에는 들어가기 쉽지 않은 내용까지 세심하게 포함시켰다.그러면서 그는 모든 이야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궁극적으로 성취된다는 점을 가리킨다. 가령, 예수님의 완벽한 순종, 희생적 죽음, 부활, 중보, 용서, 사랑, 신실하심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그 제목과 같이 참으로 복음적이다.아이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지금까지 예를 들어 언급한 어린이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곧 아이들도 예수님에 관하여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저자가 “예수님은 가장 어리고 작은 아이들도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원하신다”라고 쓴 것처럼, 우리는 아이들이 예수님께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들이 이해하고 주목할 수 있는 적절한 방식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이 성경이 보여 준 방법처럼, 우리도 단순한 문장과 어휘를 사용하고, 반복을 통해 개념을 강화하며, 수시로 질문을 하고, 모든 이야기에서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이 이해해야 하는 복음의 기초를 세워 줄 수 있다. 이 신앙의 기초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원제: Toddlers Are Not Too Young for Jes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신앙의기초
자레드케네디
세워진약속
지켜진약속
트리시마호니
예수님
복음이 주는 도전과 위로
by Trevin Wax
2018-12-26
나는 상담을 하며 두 부류의 사람을 만난다. 한 부류의 사람은 자기가 참 성도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복음이 주는 도전을 받아야 한다. 다른 부류의 사람은 자기가 참 성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성도이다. 그들은 복음이 주는 위로를 받아야 한다.어떤 형제의 이야기샘(Sam)은 최근 사업 수익이 줄어들어 하나님한테 화가 난 20대 청년이다. 그는 하나님과 교회에 화가 난 채로 내 사무실에 저벅저벅 들어왔다.내가 그를 진단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 바로 그가 여자친구와 동거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교회에도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일이었다.요약하자면, 그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서 진심 어린 회개의 열매를 볼 수 없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가 기독교 공동체에 헌신하고 있지 않은 모습에 대해 거리낌이 없는 마음과 잘못된 우선 순위, 그리고 성적 부도덕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나는 그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질문을 건넸다. 그는 10년 전 참석한 한 청소년 집회에서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는 그날 손을 들었고, 카드를 작성했으며, ‘천국 입장권’(ticket to heaven)을 얻었다. 그는 이 경험으로 인해 자신이 확실히 구원받았다고 우겼다.이런 형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복음이다.그는 자기 인생 가운데 열매가 없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삶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교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진정한 구원이 선행의 열매를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사실을 들어야만 한다. 그의 인생 가운데 열매가 없다는 사실은 그가 참된 성도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나는 그가 믿음 안에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자기 생애를 돌아보도록 권면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돌아보도록 권면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하도록 권면했다. 그의 인생 가운데 열매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새사람으로 바꾸어 가신다는 복음 진리로 그를 도전했다. 그는 자기 죄에 대해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복음을 제대로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어떤 자매의 이야기제니(Jenny)는 내가 사무실에서 아내와 함께 만나는 20대 청년이다. 그녀는 다정하며 태생적으로 내성적인 사람이다. 그녀는 날마다 짓는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님을 실망시킨 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죄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은 그녀로 하여금 구원을 의심하게 했다.나는 그녀를 진단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서, 그녀가 교회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했다. 또한 자기 죄성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구원을 증명할 충분한 열매가 없다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 곳곳에는 회개와 믿음의 열매가 있었다.이런 자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복음이다. 앞서 언급한 형제나 지금 소개하고 있는 자매, 이 두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이지만, 나는 형제에게 접근한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매의 문제를 다루었다. 형제에게는 자기 삶을 살펴보고 그의 삶 가운데 맺히는 열매를 통해 자신이 병든 나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전했다. 그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해야 했다. 그가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복음에 직면하도록 도왔던 것이다.하지만 자매에게는 그런 접근을 결코 취하지 않았다. “당신의 삶을 보세요! 당신은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선행을 하고 있고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매에게 삶을 돌아 보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정죄할 것이다. “저는 제 구원을 증명할 만큼 충분히 잘 살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대신에 나는 우리 죄성을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덮어 감춘다는 진리를 돌아보도록 도와주었다.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구원은 당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크리스천이 된 이후에 행한 일에도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의로움이십니다.” 그녀는 자기 구원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위로가 필요했다. 따라서 나는 그녀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했다.도전과 위로우리 모두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어떤 사람은 삶 가운데 진정한 열매를 맺지 않았으면서도 한 번 내린 결정에 의해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복음으로 도전을 받아야 마땅하다.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또 어떤 사람은 죄성 때문에 자신이 크리스천이 아니라며 의심한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주는 위로가 필요하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한다.’복음은 불안한 자에게는 ‘위로’를 주고, 편안한 자에게는 ‘도전’을 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spel Confrontation and Gospel Comfort역자: 하늘샘
복음
변증
도전
위로
구원
영적상태
열매
거룩하심
크리스천
소비주의에 저항하라
by Carl Trueman
2018-12-26
문화에 대한 상반된 목소리는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현대 복음주의의 상징적인 주제가 되었다. 성경에 기반한 문화 저항론과 기독교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문화 옹호론 사이에 문화가 논의의 중심에 있는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 현대 문화를 옹호하는 크리스천에 대하여 한 가지 당혹스러운 사실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화’가 우리가 일컫는 대중문화, 특히 젊은이들이 거의 주도하는 영화, 인터넷, 음악 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들이 ‘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사회가 삶의 방식을 대대로 전승시키는 전통, 제도, 장치로서의 ‘문화’를 염두에 두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늘날 ‘문화’는 대중문화를 의미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개념이 공급과 소비로 대표되는 시장주의의 틀 안에 축소되어 있다. 음악이나 영화 등은 사회가 삶의 방식을 대대로 전승시키는 전통, 제도, 장치로서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당장 잘 팔릴 것과 잘 팔리지 않을 것, 즉 상품성을 반영한다. 그러한 대중문화는 단순히 현대인의 기호를 반영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들의 기호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고 싶은 바는, 우리가 문화에 대해 논의할 때 현대의 상투적인 관념 가운데 하나인 ‘현대 문화는 항상 변하고 있다’라는 관념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관념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현대 문화가 항상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한 변화 자체가 현대 문화이다. 오늘날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들(패션, 음악, 연예)은 늘 변화를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문화의 변치 않는 본질인 소비주의의 단면이다. 소비를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에서는 그 집단을 유지시켜 나가는 본질적 엔진이 곧 변화이다. 의도적인 진부화,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상품과 이를 팔기 위한 시장, 새로운 것에 대한 탐욕 등이 문화를 급속한 변화로 이끄는 필수적 요인이다. 만약 이러한 요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한 대의 텔레비전, 한 대의 냉장고, 한 대의 스마트폰으로 만족하고, 또 한 벌의 멋진 정장을 입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2년에서 3년 사이에 스마트폰을 바꾼다. 자주 바꾸는 것이 좀 부담스럽더라도 우리는 삶의 많은 물질들을 계속해서 바꾸어 나간다. 이전 모델보다 기능적으로 더 나은 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유행에 더 맞는 것으로 바꾼다. 심지어는 대중문화의 초국가적 대표들(청년문화와 스포츠)도 똑같이 급속한 변화에 종속되어 있다. 어떤 청년이 작년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싶어 하겠는가? 또한 국가대표 팀을 비롯해서 갈수록 많은 스포츠 팀이 유니폼 디자인을 매우 자주 교체한다. 이는 관중들로 하여금 최신 디자인의 유니폼을 구입하도록 유도하고, 더불어 그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마치 자기가 응원하는 팀에 기를 불어넣어 그 경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이 모든 변화는 내가 위에서 암시한 것처럼 일종의 착시 현상과 같다. 세상은 영원히 변하고 있는 상태로 보일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마치 어지럽고 변화무쌍한 그림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한없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착시 현상일 뿐이고, 모든 세대가 자신에 관해 믿고 싶어 하는 일종의 만들어진 신화(神話)를 낳는 현상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은 독특하고 특별하며, 작년에 나와 세상을 지배했던 것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가치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우리는 마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변치 않는 일관된 한 가지 문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변화를 숭배하는 소비주의 문화다. 이 소비주의 문화는 교회가 반드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대 문화의 본질이다.그러면 교회는 소비주의 문화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다. 바로 그 문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교회는 지역 차원에서든 교파 차원에서든 반-문화의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정책이나 TV 프로그램 등을 대상으로 선포한 ‘문화 전쟁’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문화에 저항할 필요가 있고, 이 부분에 있어서 교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 소비주의의 열매 안에 기독교 정통주의를 반대하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견고하거나 안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끊임없이 이동하거나 해체되거나 무너지거나 변형되거나 심지어는 그와 정반대의 것으로 변화할 때, 고정 불변의 진리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래서 의미의 참된 정의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세상이 물질적 소비를 따라 가는 방식과 세상이 진리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은 그 방향이 동일하다. 끊임없는 변화가 세상을 유지시키는 한 요소로 간주될 때, 이 변화의 문화는 불가피하게도 우리가 어떤 옷을 사야 할지를 결정하는 방법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시 말해, 변화의 미학이 곧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결정짓는다.둘째, 소비주의가 끌고 가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은 상품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 안에서는 시장에서 내쳐지지 않을 상품을 찾는 것, 그리고 내 상품을 소비자가 사고 싶게끔 매력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물론 이러한 문화 안에서 정통주의가 상품으로서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팔린다고 해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소비주의 문화는 정통주의를 손질하여 변화시키고, 재포장하고, 더 매력적인 것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시장에 등장하는 다른 매력적인 상품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부추긴다.요약하면, 기독교는 그 자체로 현대 문화에 대한 저항이다. 즉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고, 바울 당시의 예수님은 오늘날의 예수님이며, 하나님은 유일한 조물주이시고, 그 외의 존재는 모두 피조물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은 소비주의 문화의 피상적인 특성과 근본적인 특성 모두에 저항한다. 피상적 특성이란 ‘안정된 것은 존재하지 않고 변화만이 진리라고 말하는 소비주의의 겉모습’을 말하고, 근본적인 특성이란 그 소비주의를 변함없이 유지시키는 방식인 생산자-소비자 형태의 사회구조적 역학 관계를 의미한다.이 즈음에서 우리가 한가지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혁명을 팝니다’(Nation of Rebels: Why Counterculture Became Consumer Culture)라는 흥미로운 책에서 조셉 히스(Joseph Heath)와 앤드류 포터(Andrew Potter)는 1960년대에 ‘노 로고’(No Logo)와 같은 표어의 등장을 통해 소비주의가 어떻게 반-문화주의마저 그들의 세계로 끌어들였는지 보여 준다. 1960년대의 미국에서는 브랜드와 소비로 점철되는 현대 문화에 대한 저항 운동이 부상했는데, 시장은 이를 ‘노 로고’라고 하는 또 하나의 유행으로 만들어 관련 상품과 이미지를 판매하는 전략으로 크게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반-문화주의가 상품이 되면서 그 진정한 저항 정신은 흔적 없이 종식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노 로고와 연관된 상품은 엄청난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를 진지하게 되짚어 봄으로써, 소비주의는 지금도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가장 강력한 문화의 힘 가운데 하나이고, 심지어는 소비주의에 저항하는 정신까지도 상품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 강력한 존재임을 알려 준다.그러므로 교회가 단순히 변화에 변화로 대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 문화를 이끄는 동력들, 곧 상업적 마케팅, 탐욕, 능력과 성공에 대한 세속적 개념, 복음보다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는 욕구 등과 교회가 어떠한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현대 정치에서 사용되는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행동은 지역적이되 계획은 글로벌하게 유지해야 한다. 지역 교회는 확실히 문화에 대한 저항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집단이다. 예컨대 매주 예배를 드리는 동안 사도신경을 낭송함으로써, 기독교는 다시 만들어지는 종교가 아님을 교회와 세상에 명확히 선포해야 한다. 묵묵히 그 자리에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는 목사들은 자신의 직분이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사다리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나 이런 저런 정치적 연설에 대해 공허한 통찰력을 전파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는 일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 그렇게 공허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일은 장려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소비주의 문화의 가장 피상적인 증상에 불과하다.멈출 줄 모르고 변화하는 특성의 우리 문화는 진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다시 바꾸고, 재포장하는 가공할 만한 힘을 자랑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소비자에게 그 진리를 상품의 형태로 판매함으로써, 변화의 문화는 본연의 힘을 유지 및 확장시켜 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로서의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저에 흐르는 소비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변화는 빙산의 일각처럼 실제적인 위협이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위협은 수면 아래에 있음을 기억하라. 다시 말해, 교회는 모든 것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드는 이 변화의 문화에만 저항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본질적 특성에 저항하도록 부름 받았다. 저항해야 할 그 특성은 바로 소비주의다. 소비주의는 우리의 전체적인 경제적 관점과 행위를 장악하여 대중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삶과 사회를 지배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w Consumer Culture Fuels Change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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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오해들
by 박태양
2018-12-25
성탄절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는 날로서 부활절과 더불어 기독교 최대의 축일이다. 안타깝게도 성탄절을 기뻐하는 모습이 한 세대 전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약해졌다. 그렇지만 성탄 시즌이 되면 여전히 아기 예수님과 목자들 그리고 동박박사의 그림을 곳곳에서 볼 수 있고, 또한 미디어를 통하여 즐거운 캐럴과 경건한 찬송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사실 사람들이 성탄에 대해 상식으로 여기는 어떠한 것들은 오래된 오해이다. 그 중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오해 1. 예수님이 탄생한 해는 기원전 0년이다?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기원전(Before Christ, BC)과 기원후(Anno Domini, AD)의 기준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인 것은 맞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기원전 5년경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시점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이는 중세 수도사였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노스(Dionysius Exiguus)가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잘못 계산했는데, 이를 온 세계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사용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경과 일반 역사의 다양한 자료를 통해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비교적 정확하게 유추할 수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아기 예수님은 악명 높은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 죽기 얼마 전에 탄생했다. 헤롯 대왕이 죽은 때는 기원전 4년 4월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적어도 그 이전(기원전 5-8년쯤)에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이 활동을 시작할 때가 로마의 디베료 황제(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티베리우스) 재위 15년이었다. 그 시기는 기원후 26년이고,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사역 시작 시점이 30세 정도로 비슷했으므로, 결국 둘 다 태어난 시기가 기원전 5년 전후가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 헤롯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지고(정확히 말하면, 증축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헤롯 성전 확장 공사는 기원전 20년쯤 시작됐다. 즉, 예수님이 31세 정도일 때가 기원후 26년이니까 예수님이 태어난 때는 기원전 5년쯤 되는 셈이다. 이것 말고도 여러 자료를 통해서 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기원전 5-8년 정도로 확신하고 있다.(참고로, 기원전 0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원전 1년 다음은 기원후 1년이다.) 오해 2. 예수님 탄생일이 12월 25일이다? 최소한 12월이나 겨울이다?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겨울철에 목자들이 밖에서 노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키게 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근거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것이다. 교부였던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예수님이 3월 25일에 수태되고, 12월 25일에 탄생했다”라고 자신의 책에 기록했다. 사실 3월 25일은 당시 유럽 교회에서 그리스도 수난일로 지키던 날인데, 이날을 동시에 그리스도 수태일이라고 임의로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 12월 25일이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되는데 별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기원후 350년에는 로마교회의 대주교였던 율리우스 1세(JuliusⅠ)가 성탄절을 12월 25일로 공식화했고, 이후에 지금까지 그렇게 지켜지고 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12월 25일이 고대 로마의 태양신을 섬기던 동짓날을 계승한 것이라는 주장을 들어봤을 것이다. 교회가 의도적으로 이방 신의 축제일과 같은 날로 성탄절을 정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태양신을 섬기기 위함이 아니라 태양신 숭배를 없애기 위한 조치로 보아야 한다. 결국 그 태양신을 섬기는 축제는 얼마되지 않아 완전히 사라지게 됐으니 말이다. 오해 3. 세계 모든 국가들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킨다?그렇지 않다. 세계 3대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 개신교, 로마 가톨릭, 정교회 중에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정교회는 1월 6일 또는 7일을 성탄절로 지킨다. 이렇게 구분이 된 것은 표준 달력이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교회에 속한 러시아, 그리스, 이집트, 루마니아 등은 원래의 율리우스력으로 12월 25일에 해당하는 (그레고리력) 1월 7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이다. 몰도바, 레바논, 벨라루스 등은 두 개의 날짜를 모두 성탄절로 지킨다.오해 4. 동방박사와 목자들이 함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했다?절대로 그렇지 않다. 목자들은 아기 예수 탄생 직후에 마구간에 가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맞지만, 동방박사들은 짧게는 수주 후 길게는 1, 2년 후에 예수님을 만났다. 성탄절 그림에는 종종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 함께 등장하고 그것이 보기에도 아름답다. 그러나 헤롯 대왕이 동방에서부터 온 박사들을 만난 후 아기가 태어난 때를 자세히 묻고 얼마 후에 두 살 아래 유아들을 모두 죽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동박박사들은 이미 아기가 탄생하고 시간이 꽤 흐른 뒤에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부가적으로, 성경은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라고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지고 온 선물이 황금, 유향, 몰약 세 가지였지 사람이 셋이 아니었다.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목자들이 동방박사들처럼 들에서 밝은 별을 따라 예수님이 탄생한 마구간으로 온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천군천사들이 나타나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탄생했다는 말을 해줬고, 목자들은 별빛을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서 아기를 찾은 것이다. 예수님은 집 안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고 집 밖에 있는 마구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찾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고, 아마도 아기 울음소리도 있었을 것이다.오해 5. 성탄절은 해피 홀리데이다?그리스도, 즉 크라이스트(Christ)를 헬라어로 쓰면 맨 앞글자가 ‘키’라는 철자인데 이게 영어의 엑스(X)와 똑같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엑스가 아니고 키, 즉 그리스도다. X-마스라고 하면 미지의 대상인 X를 마스(mass), 즉 예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쾌락을, 돈을, 산타클로스를, 자기만족을 놓고 성탄절을 보내는 모습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한 채 평화를 말하고, 기쁨을 노래하고, 사랑을 외친다. 심지어 성탄절 조차도 구주의 탄생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는 공영방송이나 공공장소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이나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해피 홀리데이(Happy Holiday)라는 인사가 더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성탄절은 그냥 행복한 공휴일이 아니다. 성탄절은 구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을 즐거워하는 날이다. 이것을 망각하거나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성탄절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의 행위이다.
복음
예수그리스도
예수님의탄생
성탄절
동방박사
목자들
성어거스틴
율리우스1세
그레고리력
복음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크리스마스
by Tim Keller
2018-12-24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절기로서는 유일하게 일반 대중들도 중요한 휴일로 맞이하는 날이다. 아마도 기독교 문화에서는 가장 큰 휴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날을 기념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양측 모두에 불편을 끼치기도 한다. 먼저 기독교인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루어지는 대중적인 축제들이 점점 더 크리스마스 본연의 의미를 어떻게든 회피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현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간에 들리는 배경 음악들도, 이를테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Joy to the World)에서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Have a Holly, Jolly Christmas)로 바뀌는 추세이다. 또한 이 절기는 주로 가족, 선물, 아니면 세계 평화를 위한 시간으로만 선전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느 웹사이트의 열정적인 작가는 “크리스마스야말로 이 세상이 즐기는 가장 멋진 휴일이다”라고 묘사하기도 했다.그러나 비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크리스마스의 기독교적인 모습이 전통적인 캐롤 음악 따위를 통해 끼어들어와 불청객처럼 이 시즌의 분위기를 헤쳐 놓는 상황을 지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답하기가 짜증 난다. “이 노래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려고 나셨도다’(born to give them second birth)의 뜻은 무엇이죠?”세상의 축제일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일단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가치를 대중 사회와 공유하는 일이 즐겁다. 세상에서도 크리스마스는 세상을 밝히는 기념일로 여겨진다. 가령 가족 모임을 위한 따뜻한 시간이 된다거나, 주변에 사는 이웃 혹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날이 되기도 한다. 이런 관습은 모두에게 유익이 되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기독교적인 방식과도 참으로 조화를 이룬다.그러나 크리스마스 기간을 상업적인 목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늘 있기 마련이기에, 그날은 이 세상의 축제일처럼 계속 여겨지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대중들이 알기 어려워지는 현상을 보면 염려스럽기도 하다. 사실 이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빛(곧 소망)이라는 크리스마스의 이미지는 원래 이 세상 밖에서 우리에게로 찾아온 참된 빛이 있다는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는 행위는 원래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고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신 그 경이로운 행동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시작된 일이다. 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하나님의 아들이 귀족 가문이 아니라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나신 일을 상기시키려는 목적으로 일어났다. 즉, 우주의 주인이 가장 소외되고 배척 받는 인간 사회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다.바로 이런 일들은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를 함축하는데, 거기에는 진리의 두 가지 측면이 다음과 같이 자리하고 있다. 예수님은 왜 빛으로 오셨는가? 우리가 영적으로 어두운 맹인들이어서 스스로 바른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왜 육신을 입고 죽음을 당하셨는가? 우리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드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전 6:19).결국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불가사의하고 심상치 않은 메시지로 우리의 삶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피할 수 없는 성경의 진리서구 사회는 기독교 신앙의 근간에 역사적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더 빠른 속도로 그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일년에 한 번, 이 크리스마스에는 사람들이 잊어 버린 기본적인 진리가 바로 그들에게로 찾아가는 일이 일어난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모임들과 콘서트, 파티와 여러 이벤트에서, 심지어는 그 참석자들이 대부분 비기독교인일지라도,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그들 앞에 가시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예를 들어,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롤인 ‘천사 찬송하기를 거룩하신 구주께’(Hark! The Herald Angels Sing)가 백화점에서, 식료품 가게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들려온다면, 여러 가지 질문과 답변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날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이다. 여기서 노래하는 ‘예수’가 누구지? ‘하늘에서 내려와 처녀 몸에 나셔서 사람 몸을’ 입으신 ‘영원하신 주님’이다. 그러면 ‘왜’ 이 땅에 오셨지? ‘죄인들을 불러서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려고 오셨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지? ‘의로우신 예수는 평화의 왕이시고 세상 빛이 되시’기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크리스마스 문화는 매우 간결한 스타일로 기독교 신앙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요약해서 보여 준다.물론 대중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노래나 성경 구절이 많지는 않지만, 일년에 단 한 차례만큼은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본연의 메시지를 어디에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한다. 바로 그 상황에서 위와 같은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면, 피할 수 없는 기독교의 진리가 그들의 마음속에 밝히 드러날 것이다.이처럼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기독교의 핵심, 곧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Even As a Secular Holiday, Christmas Makes the Gospel Accessible번역: 장성우
복음
변증
크라스마스
성경의진리
기독교문화
기쁘다구주오셨네
기독교신앙
천사찬송하기를거룩하신구주께
영원하신주님
기독교의핵심
거래를 끝내기 위해 오신 예수님
by Sam Allberry
2018-12-24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이다. ‘E.T.’, ‘레이더스’, 그리고 ‘죠스’는 아주 유명한 그의 대표작들이다. 이 영화들을 보며 어린아이들은 꿈을 꾸고 공포도 느꼈다. 그런데 스필버그는 탁월한 재능 때문인지, 그의 작품들을 평범하게 끝마치기 어려워했다. 이를테면 그의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 너무 깔끔하게 결말이 맺어지거나, 관객들의 믿음이 필요한 엔딩 장면으로 문제가 자주 해결되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마이너리티 리포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그리고 ‘A.I.’이다.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복음서 이야기에 대한 멋지고 행복한 결론으로 본다. 마치 스필버그가 배신과 부인, 또 죽음이라는 어두운 배경에 결말을 위해 어떤 장치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의 영화에서처럼 붉게 타오르는 일몰이 배경으로 자리한 엔딩 장면으로 부활을 바라본다는 것이다.그러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에 이어지는 ‘속편’이 아니다. 부활은 복음서 이야기를 끝내기보다 완성시키는 요소이다. 사실, 부활 없이는 이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연대기적 문제가 아니라 장엄한 신학적인 문제이다. 부활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부활은 우리를 구원한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부활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바울은 부활의 필요성을 놀라운 방식으로 설명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그는 부활을 칭의와 연결시킨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구원이 절반 이루어지고, 또 부활하심으로써 나머지 절반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은 존재라고 말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의롭게 됨도 없다고 말하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만일 예수님이 죽은 상태라면, 우리가 지은 죄의 빚은 여전히 처리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우리는 죄의 영역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부활의 생명이 없었다면, 우리의 새로운 삶도 없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그렇다면 부활의 의미를 그처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무엇일까? 성경의 광대한 이야기가 보여 주는 사실이 있다. 곧 죽음이 갖는 특별한 의미 때문에 그분의 부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때에만, 예수님의 부활이 가지는 의미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다.죄는 죽음을 낳는다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창 2:17). 하나님은 생명이셨고, 그분에게서 돌아서는 일은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죄는 죽음이라는 삯을 받거나(롬 6:23), 또는 그 죽음을 출산한다(약 1:15). 다시 말해,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죄가 받아야 할 대가이다.왜 우리가 죽음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종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죽음을 출생과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일어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 중에 하나라고 여긴다. 그러나 죽음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우리가 가진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지하고 것 이상으로 우리가 많은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죄도 그렇지만) 죽음은 원래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경험하도록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죽음은 죄를 통해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죽음의 경험은 죄의 실재를 보여 준다.완료된 거래우리가 죽음의 의미를 파악하면, 부활의 의미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가 임의적으로 행하신 일이 아니었다. 단지 그분이 여전히 살아 계실 수 있는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기적도 아니었다. 그보다도 부활 자체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곧 죽음이 죄의 열매이고 증거인 것처럼, 부활도 구원의 열매이고 증거가 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은 죄와 죽음의 순환이 마침내 깨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고, 죄는 정복당했다.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고, 오직 부활만이 우리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삶으로 가는 관문이 된 것이다.십자가는 여행 배낭 같은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몇 개 챙겨 넣으시고 우리가 알아서 꺼내 쓰라고 주신 그런 배낭이 아니라는 말이다.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거래가 끝났다. 즉, 성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 성부는 그 거래에 서명하신 것이다.출처 :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 Death is Dead, Christ Has Conquered번역 : 김형용
복음
부활
성자
성부
거래
구원
죽음
예수님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by Matt Redmond
2018-12-24
요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힘들어 하는지 알고 있다. 스크루지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한 편의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당연한 일들이 되었고, 어쩌면 늘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시즌의 즐거움은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상상하기도 어려운 자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이 되어 왔으리라.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나는 누군가의 가족에게 일어난 슬픈 사건으로 인해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어려운 시간이 될 수 있는지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는 거의 극단적인 절망과 실패가 자리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이 고통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즐거워하기란 불가능한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로도 나는 그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물론 이해한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휴일이란, 심지어 완벽한 상황 중에도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일은 꼭 암이나 이혼, 아니면 식사 자리에 빈자리가 생기는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연중 가장 멋진 시간으로 만드는 요인이 동시에 그 시간을 가장 잔혹한 시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돌아보면, 나 역시도 그런 어려움에 잘 대비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런데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통념과 조금 다른 생각을 말해 보고자 한다. 나는 어쩌면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행복한 사람들을 위한 날이라는 집단적인 문화 의식(collective cultural consciousness) 속에서 이날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가적인 분위기에서 가족들과 함께 벽난로 주변에 모여 앉아 행복해 하는 그런 날로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웃을 일이 늘 많은 사람들만을 위한 날로 생각한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정말로 그런 날인가? 그렇게 도심의 축복 가운데 살아가는 성공적이고 멋진 사람들은 휴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들은 가족들과 함께 소파에 기대어 크리스마스 시즌의 클래식 영화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우리는 마치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이다. 크리스마스, 곧 우리를 구원하는 자가 육신이 되어 찾아오셨다는 위대한 이야기는 모든 사람을 위한 소식이다. 특히, 구원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소식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알고 우리의 연약함을 끌어안기 위해 아기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게 하시고자 먼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즉, 죽음의 두려움과 상실의 아픔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찾아 오신 것이다. 예수님을 처음으로 경배했다고 알려진 자들은 고상한 사회적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지저분하며 생활과 노동에 짓눌린 목자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이들에게 무시당하는 자들이었다.예수님은 거울을 보면 추한 모습만 비추어지는 그런 자들을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결코 예쁘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는 딸들을 위해 오셨다. 크리스마스는 돈이 없어 ‘술집의 공연’이나 홀로 보러 가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암 때문에 삶이 절망스럽게 된 자들을 위한 날이며, 그 외의 다른 삶은 불가능한 꿈처럼 보이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소셜 미디어밖에 친구가 없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흔들리는 결혼 관계로 인하여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미술 도구들을 갖길 원하지만 아버지가 계속해서 공사 장비만을 맡기는 가정에서 살아가는 아들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사망 선고를 앞두고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그릇된 장소에서 사랑을 갈망하는 창녀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세상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아이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실패한 꿈들에 갇힌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탕진하여 가정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감히 자신을 너그럽게 받아 줄 곳이 없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자녀들의 결혼 생활이 혼란 속으로 접어드는 상황을 지켜 보는 부모들을 위한 날이다.결국 크리스마스는 이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한 은혜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날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로 인해, 그 아기가 태어났을 때 뉘였던 구유는 절망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넘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니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크리스마스는 그날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날이다. 바로 그런 날이 크리스마스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mas Is for Those Who Hate It Most번역: 장성우
문화
사회이슈
죄인
희망
구원
예수님
은혜
복음
그리스도의 나라는 실패의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by Mark Dever
2018-12-23
동성애에 대한 여론이 점점 더 변화하고 있다. 물론 이 변화는 더 큰 변동의 흐름 중 하나일 뿐이다. 가족, 사랑, 성, 관용, 하나님 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점은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점점 더 방어 태세를 갖게 한다. 알 몰러(Al Mohler)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윤리적 범법자’(moral outlaws)가 될 것이다. 기독교 원칙을 옹호하는 사람은 점점 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는 법적으로도 난관에 봉착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지지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실직이나 다른 불이익의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견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천들은 당황하여 움츠러들거나, 혹은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굳이 위험에 처할 필요가 없다는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핍박 앞에 그렇게 반응할수록, 스스로가 비성경적인 명목상 크리스천임을 증명할 뿐이다.현재 우리에게 닥친 사회문화적 변화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음의 일곱 가지 원칙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1. 교회는 초자연적인 변화를 위해 존재함을 기억하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영적으로 죽은 이들에게 하나님이 새생명을 주신다는 변치 않는 진리, 즉 복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 역사적으로 회개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기나 문화는 전혀 없다. 그런 문화는 존재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천과 교회, 그리고 특히 목회자는 언제나 우리가 초자연적인 일에 관여하고 있음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최근의 문화적 변화는 우리의 사역을 이전보다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2. 핍박이 정상적인 현상임을 이해하라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요한복음을 설교했다. 그중 ‘핍박’을 주제로 삼은 것에 대하여 여러 교인들이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내 설교의 주제가 크게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990년대의 베드로전서 강해 등, 나의 이전 설교를 되짚어 보면 핍박에 관한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설교의 주제보다는 이를 듣는 교인들의 귀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크리스천들 앞에 놓인 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핍박은 타락한 세상에서 모든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직면하는 현상으로, 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예언하신 부분이다(요 16장). 어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삶을 다 바쳐서 예수님께 순종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별다른 모욕이나 핍박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근사한 교회에 현혹되지 말라.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국가적 범죄자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 얼마 전 동료 목사가 기독교 핍박 역사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핍박의 원인이 ‘복음’이 아닌, 다른 부차적인 문제인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핍박자들은, “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으니 내가 너를 핍박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크리스천으로서 주장하는 어떤 신념이나 관행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상반되거나 혹은 그들의 세계관을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를 핍박한다. 다시 말하지만, 변화하는 문화에 당황하여 움츠러들거나 또는 굳이 안 해도 되는 불필요한 말은 삼가자는 식의 반응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말하는 제자도를 위배하게 만든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명목상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특히 목회자는 성도로 하여금 희생자인 척 행동하지 말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설교와 기도를 통해 핍박이 정상적인 현상임을 지속적으로 알려야 한다. 설령 사회적인 비판, 특권의 상실, 재정적 불이익, 심지어 법적인 핍박이 따르더라도 성도들이 담대히 예수님을 따르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그것이 목회자의 역할이다. 3. 유토피아 사상을 주의하라 크리스천은 사랑과 정의의 사람이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작은 유치원이든 거대한 국가든 이 사회의 공동체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과 정의를 위해 일하더라도,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탈바꿈 시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임무를 부여하지 않으셨다. 대신, 언젠가 이 세상을 완벽하게 만드실 그분을 널리 알리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선을 이루어야 한다. 만일 유토피아 사상을 향한 유혹을 느낀다면, 성경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그리고 역사 속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랐던 인물들조차 유토피아주의로 인해 속임을 당하고 길을 잃었던 사례를 떠올려라. 4. 민주적인 청지기 직분을 활용하라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서 크리스천은 정책이나 정부에 대해 무관심해도 된다고 이해한다면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바울은 국가에 순종할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우리의 민주적인 상황에서는 국가의 권위를 개인이 공유하고 행사하는 것, 그 행위가 곧 정부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정부의 힘을 공유한다면, 그들의 폭압 정치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다. 민주적인 절차가 우리 손에 있는 한,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곧 청지기 직분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만들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가 소유한 것을 제대로 관리할 청지기가 될 수 없음을 뜻하거나, 혹은 공익을 위한 일에 민주적인 절차를 활용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우리는 민주적인 청지기 직분을 활용해야 한다. 5. 인간적인 환경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라 크리스천에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결코 없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에서도 아버지를 의지하셨다(히 12:2). 우리에게 닥칠 그 어떤 어려움도 우리의 왕께서 당하신 고난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가 견뎌야 하는 모든 상황을 통해 자신의 신실함을 입증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의 증거가 되어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6.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라 크리스천은 지옥이 아닌 이상, 그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크리스천이 소유한 모든 것은 곧 은혜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잘 유지해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직장 상사, 친구, 가족, 그리고 정부를 과하게 증오하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바울이 감옥에서 노래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용서받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장차 자신이 받을 영광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선물을 제대로 알고 있었고, 또 소중히 여겼다. 7. 그리스도의 확실한 승리 안에서 안식하라 지옥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동성 결혼의 대두 등 사탄이 조장하는 사회문화적 변화 때문에 마치 그들이 승리하였다고 판단하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결국 우리는 여기서 패배할 거야”라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세계 도처의 크리스천과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크리스천이 겪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난을 겪었다.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사탄이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 나라와 시대마다 하나님을 공격하는 독특한 타락의 방식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패배하게 한 십자가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죽으셨다. 하지만 사흘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전혀 실패의 위기에 처해 있지 않다. 크리스천과 교회와 특히 목회자는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디데이(D-Day)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 시대에서 아무리 세속적인 생각과 행위가 지지를 얻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택하신 사람들이라면 그중 단 한 명도 구원을 얻는 데 낙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논쟁으로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이 우리의 책이나 글에 설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신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또한 오늘 우리는 겸손과 확신, 그리고 기쁨으로 이 세상에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How to Survive a Cultural Crisis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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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사상
청지기
주님의지
하나님의은혜
그리스도의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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