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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No에 Yes로 답하다
by Ann Swindell
2018-12-18
하나님이 항상 치유와 온전함을 보장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나를 즉각적으로 치유하시는 것이 그분에게는 정말 작은 일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과 씨름했다.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쯤, 10여 년 동안 나는 털을 잡아 뜯는 병과 투쟁하고 있었다. 나는 그 병을 싫어하고 멈추기 원했지만, 매일 내 속눈썹과 눈썹을 쥐어 뜯어 냈다. 신경학적으로 나의 뇌는 그 행동을 멈출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었다. 치유를 요청하는 기도에 대해 계속 ‘아니다’(no)라는 답변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침묵하고 멀리 계신 것 같았다.어느 날, 하나님께 불일 듯 불만이 일어나자, 나는 기도실로 향했다. 일기장에 분노와 경솔한 말들을 막 쏟아냈다. 하나님이 나쁘고 냉담하며 멀리 계셔서 이런 문제를 잘 다룰 줄 모르시는 것 같다고 써 내려갔다. 속눈썹을 일기장 여기저기에 흩어 놓은 채, 나의 행동에 수치심을 느끼며 앉아 있었다.울며 눈물을 흘린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는 외쳤다. “하나님 내가 계속 묻고 있잖아요. 왜, 왜 나를 치유하여 주시지 않는 건가요? 그 많은 시간의 기도와 간구들, 금식한 날들까지, 그것들은 다 무엇인가요? 아무것도 아닌가요?” 나는 스스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지. 그것들은 아무 변화를 주지도 않았어! 이제 더 이상 나빠질 수도 없게 되었다고.”나는 그분을 밀어내기 원했다. 어디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기를 원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씁쓸해지고 분노의 씨가 불신의 뿌리로 깊게 자리잡는지를 알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쓴 뿌리와 하나님과 싸운 방식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정신이 혼란스러웠고 마음이 상했다.반항이라는 선택우리가 하나님께 간청하고 요청했는데도 우리의 상황을 바꿔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반항 아니면 순종 밖에 없다. 반항은 우리를 재판관의 자리에 앉힌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당연히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선언한다. 그분이 우리의 계획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마음이 상한다. 또한 우리는 그분이 잘못했다고 외친다.물론 하나님께 솔직해야 하겠지만, 진정한 솔직함과 반항적인 솔직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진정한 솔직함은 하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겸손과 신뢰로 간구한다. 반항적인 솔직함은 하나님의 잘못을 지적한다. 우리의 솔직함이 반항적으로 변하면, 결국 우리는 거칠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그분을 판단하고 그분으로부터 도망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정말로 필요한 위로의 원천을 거절한다.순종이라는 선택두 번째 선택은 순종이다. 우리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할 때라도 ‘네’(yes)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단기간 동안에는 더 힘들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계속 동행하려면, 오직 이 길 밖에 없다.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그 교만한 반항심으로부터 나를 끄집어내셨다. 그 결과 작은 순종의 걸음들을 옮기자, 그분은 자신의 진리와 온유를 내게 상기시켜 주셨다. 그분은 나의 마음을 두 가지 방법으로 어루만져 주셨다. 첫 번째 방법은 내 교수님의 아내인 니타(Nita)라고 하는 분을 통해 나를 도우시는 것이었다. 그녀와 나는 한 달에 두 번씩 만나 주님과 동행하는 삶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이야기하고 기도했다.어느 날 오후,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의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분노, 불만, 상처 등이 거품처럼 커져서 식탁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니타의 말이 아니라 그녀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 손위에 올려놓고 함께 울었다. 그녀는 꾸짖거나 즉각적으로 나를 바로잡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어딘가로 억지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지도 않았다.그녀가 이 말을 했을 때, 그 목소리는 바이올린 소리처럼 울림이 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앤(Ann),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항상 아는 것은 아니지. 그렇지만,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늘 알고 있어. 항상 알고 있지.” 내가 말했다. “그분의 응답을 때로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아니다’라는 대답이 서로 조화가 된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렵네요.” “앤, 이해해요. 나도 그래요.”나는 니타가 감내해야 했던 상실들, 겪어야 했던 슬픔들을 떠올렸다. 나는 그녀가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 쉬고 다시 말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내가 동의했다. “아무것도 끊을 수 없지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어느 누구도요.” 물론,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실 때도 그 말씀은 사실일 것이다. 그날 니타가 건네 준 친절하고 진실한 말은 내게 축복이 되었다. 그녀는 성경 말씀을 들어 이야기해 주었고 내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날 하나님은 나의 상처와 불평, 불만을 치유하기 시작하셨다.두 번째 방법으로 나는 순종하며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와 만났을 때, 그분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시간을 보낸 성경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이해할 수 없을 때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게 되었다. 진정으로 겸손한 기도로 그분께 마음을 쏟아내자, 나는 그분의 위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치유보다 더 나은 것하나님께 조금씩 순종하자, 그분은 내가 반항심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다. 나의 진정한 필요는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다. 반항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은 어떤 병이나 원치 않는 증상을 계속 다루는 것보다 더 비참하다고 할 수 있다.치유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얻었다. 그리고 그분이면, 내게 충분하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Fighting to Say ‘Yes’ When God Says ‘No’번역: 정은심
영성
신앙과소명
하나님
반항
순종
선택
치유
yes
no
그리스도
마음의 평안을 확신하지 말라
by Matt Rogers
2018-12-17
사라(Sarah)는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이다. 대학 선택을 앞두고 네 개의 대학 캠퍼스를 돌아본 후에, 그녀는 한 학교로 마음을 정했다. 부모님이 그 선택의 이유를 물었을 때, 그녀는 “그냥 마음이 편안해서요”라고 대답했다. 또 벤처 사업을 구상 중인 한 사업가는 “그 사업이 어느 정도 위험성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업을 진행하는 건 옳은 선택입니다”라고 말했다.우리가 ‘평안’이라는 내적 감각을 의사 결정의 궁극적인 이유로 내세울 때, 그 결정에 대해 아무도 당신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당신은 어쩌면 이 심리적 평화를 마치 하나님이 주시는 일종의 긍정적 사인(sign)처럼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이 틀렸거나, 혹은 당신이 느끼는 그 평안이 틀렸다고 말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결정 앞에서결정해야 하는 일이 대학 선택이나 사업 추진처럼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사안인 경우가 있다. 이럴 때에는 심리적 안정을 따라가는 일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에 대한 그러한 접근을 삶의 다른 영역으로까지 광범위하게 적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예를 들어, 교회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자. 목회자의 설교에서 복음의 선포를 들을 수 없고, 교회 행사의 많은 부분에서 거룩함을 찾아볼 수 없음에도, 만약 다른 이유로 당신이 그 교회에 편안을 느낀다면?또는 배우자와 자주 논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평화롭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속단한다면?혹은 동성애가 당신에게 심적 안정을 주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라고 판단한다면?이러한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기를 바라시지 않을까?’, ‘심리적 평안이 확실하게 주어진다면 이는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신호가 아닐까?’ 설마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을 느끼지 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분일까? 그것은 분명 아니다. 고장난 나침반불행하게도 우리의 마음속 나침반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망가졌다.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항상 거짓되고 부패한 상태로 있게 된다(렘 17:9). 이러한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지라도, 당신의 마음에 평안을 안겨 준다. 죄를 짓는 것은 곧 부패한 본성과 일치하는 행위이므로, 우리는 죄를 지을 때 내적 평화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참된 복음을 알게 하신다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놀랍도록 거듭난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또 그분을 찬양하고자 하는 새로운 심령이 내면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가 죄를 짓게 되었을 때, 우리의 심령은 그 행위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게 된다. 결국 죄는 점점 더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내적인 평화는 사라진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당신이 크리스천이라고 확신한다면, 과연 스스로의 내적 평화가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과연 그 평안이 신뢰할 수 있을 만한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 때문이다.1. 어쩌면 우리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거룩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아직 참된 회심이나 거듭남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특히 거듭남은 신앙생활의 연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당신이 여전히 죄에 빠져 영적 죽음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면, 그 마음은 의를 바라볼 수가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 느끼는 평안은 그저 당신이 거듭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표시일 뿐이다. 2. 우리는 언제든지 죄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다거듭난 크리스천이라면, 과거에는 기쁨과 평안을 안겨 주던 죄에 대하여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 과거에는 죄를 지으면서 쾌락을 느꼈겠지만 회심한 크리스천이라면 이제 쓰라림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과거에는 그저 순간적인 불안을 느끼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깊은 뉘우침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에 대하여 늘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거듭남을 경험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합리화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자. 처음에는 그 마음으로 죄를 명백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심의 감동이 사라지면서 점차 내적 불안감은 사라지기 시작하고, 심지어 자신의 죄를 정당한 것처럼 생각하는 지점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특히나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불편함이나 거부감이 들 정도로 영혼이 메말라 버렸다면, 크리스천이라 해도 이전보다 쉽게 죄를 정당화할 것이다. 이러한 두가지 이유로, 우리는 무언가 선택하기에 앞서 자신의 감정보다 더 신뢰할 만한 다른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은 '내 마음이 평화로운가?'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1.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가만약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그 답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면, 당신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성경은 늘 옳으며 변치 않는 진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만약 죄악을 즐기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윤리적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당신은 성경을 왜곡해서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에 속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이 보고, 느끼고, 소유하는 그 모든 감각보다 언제나 앞서야만 한다. 예를 들어, 성경은 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설령 이와 관련된 죄가 당신에게 내적 평화를 안겨 준다고 할지라도, 그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개인적 욕망을 잠재우며, 죄를 회개해야 한다. 또한 성경은 크리스천의 이웃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원수 같은 이웃일지라도 그들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또 사랑해야 한다. 그러한 행위가 비록 내게 심리적 피로와 고통이 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모습을 기억하면서 인내해야 한다. 2.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조언하는가크리스천 공동체는 성경 다음으로 우리의 선택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하다. 인간이 그 연약함 때문에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고자 쉽게 성경을 왜곡하려 하듯이, 크리스천 공동체에도 당신의 감정적 선택을 옹호하고 부추기는 몇몇의 사람들이 주위에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감정적 평안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써 기쁨, 평안, 만족을 찾도록 배워가는 곳이다. 교회는 크리스천들이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죄에서 벗어나도록 함께 힘써 나가는 곳이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서 나의 연약함과 죄까지도 예수님 안에서 용서하고 다독여 줄 믿음의 지체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자들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라.또한 신앙적으로 보다 성숙한 지체가 나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조언할 때에, 이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당신의 마음가짐도 역시 중요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의 마음에 평안을 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올바른 질서, 올바른 평안성경과 교회 공동체는 내면의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당신을 이끌 것이다. 성경이 우리의 선택을 격려하고 (또는 적어도 금지하지 않고), 동시에 믿음의 동역자들이 찬성하는 말을 보내온다면, 우리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다. '나는 이 결정에 평안을 느끼는가?' 혹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도 좋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이 결정이 옳다고 말씀해 주시는가?'중요한 것은 질문이 아니라 질서다. 만약 당신이 내적 평안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면, 분명 당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성경을 왜곡할 것이고 또 그것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찾아 위안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구하고, 그 다음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성숙한 지체들의 조언에 귀 기울여라. 선택의 질서를 그렇게 바로잡는다면, 분명 당신은 내적 평안과 옳은 결정이 한 곳에서 일치하는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삶을 형성할 여러 결정 사항들을 향해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n't Trust the Peace in Your Heart번역: 이주일
생활
감정
평안
선택
내적
거듭남
거룩
질서
나침반
성령님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몇 가지 방법
by Reuben Hunter
2018-12-17
나는 목회자 컨퍼런스 일정에서 ‘거룩한 교회 개척’이라는 제목을 본 적이 없다. 아마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목회자들의 참여가 적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거룩함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거룩에 대해 논하는 것은 종종 목회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삶 속에서 거룩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았던 장면들이 슬며시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신 ‘선교적 교회 개척’, ‘문화적 교회 개척’, 혹은 그 외의 듣기 편한 수식어가 붙은 컨퍼런스로 발길을 돌린다.하지만 성경은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두드러지게 가르치고 또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보다 거룩함에 대해 더 많이 다루어야 할 것이다.피할 수 없는 거룩거룩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거룩함은 그분의 완벽하고 장엄한 초월성을 보여 주고, 창조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와의 닿을 수 없는 간극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묘사한다(사 6:3). 하나님의 거룩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우리를 떨게 만드는 두려운 것이다.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곧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인내하는 그 거룩함을 강조한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거룩은 교회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성경 속 사도들은 이 새로운 정체성을 온몸으로 품어야 하는 크리스천의 소명 역시 강조한다. 베드로는 말한다.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또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들이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름 받았다”라고 말했다(엡 1:4).오직 하나님 안에 머무를 때, 거룩을 추구하는 삶은 기피하고 싶은 행위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변한다. 이전에는 우리를 ‘밀어내던’ 거룩이 이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를 ‘끌어당긴다’는 경험을 해야한다. 한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거룩한 삶이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세상과 대립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복음을 전파할 때에 시대적 혹은 문화적 상황에 맞추어 포용하거나, 혹은 반대로 경계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이를 ‘상황화’라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크리스천은 반드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 이 세상과는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당신의 사역이 아무리 상황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또 당신이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 또는 지도자라 하더라도, 성경에 충실한 모습으로 사역하고자 한다면 세상과는 불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당신을 고상한 척하는 사람, 고루한 윤리관을 가진 사람, 우둔한(혹은 위험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두려워하지 말라. 지역 교회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1. 세상과 구별되는 사람을 구분하라교회 개척 초기 단계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기성 교회라 할지라도, 이 또한 변함없이 중요하다.교회를 개척하면, 종종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새로운 교회’를 구경하러 온다. 여기에는 사역에 헌신하려는 준비된 크리스천도 있을 것이고, 의심의 눈초리로 교회 곳곳을 살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끊임없이 계속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며, (바라건대) 비신자도 있을 것이다.이들 중 누가 그리스도의 자녀라고 공적으로 선언하기를 망설이고 있는가? 혹은 누가 당신과 더불어 교회의 사명을 기꺼이 감당하고자 하는가? 이들 중 누가 인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마지막 날에 인도자의 청산을 받을 것인가(히 13:17)? 달리 말하면, 회개도 없고 거룩하지도 못한 사람들로부터 구분해야 할 자들이 누구인가?구별되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일은 누가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도록 이끈다. 경계를 모호하게 두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룩하지도 않다.2. 구별되는 예배를 선택하라교회사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위해 모였고, 그 예배의 정확한 형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모일 때, 예배하는 행위는 반드시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배를 세상의 문화와 최대한 닮게 하려 애써서는 안 된다.우리는 예배를 통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을 거행해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예배가 그 어떤 방법으로도 기쁨이 되지 않으니, 예배를 세상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가면서까지 그들을 만족시키려 하지 말라. 3. 구별되는 메시지를 선포하라오늘날의 문화는 낙관주의 못지않게 비관주의에 의해 특징 지어진다. 기술은 발전하고 있고 우리는 점점 더 혁신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도시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비관론으로 일관한다.이때 망설이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설교한다면, 교회는 모든 형태의 죄와 고통까지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죄와 타인의 정죄는 우리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지만, 복음을 통한 구원의 소망과 값없는 은혜는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희망을 준다.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성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무너지는 자신을 경험할 것이다. 마치 좌초하는 배와 같은 자신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안에서 교회가 복음을 담대히 전할 때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성경 앞에 나아오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4. 탁월한 연합을 보이라복음이 주는 은혜보다 더 강력하게 연합을 이끌어 내는 힘은 없다. 정치적 성향, 타고난 인종, 경제적 소속 집단 등을 기준으로 점점 배타적인 사회가 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삶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배경 및 집단에 속한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또 연대를 이루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그런 행보를 전혀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곳 런던에서는 웹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젊은 부부가 타국에서 이민 온 싱글맘의 창업을 돕기 위해 웹사이트 개설을 지원한 예가 있다. 이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물론이다. 그 젊은 부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도운 싱글맘을 그들이 참여하는 교회에 초대하여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왔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연합을 추구하는 삶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이는 많은 기도와 겸손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분된 백성으로서 우리에게 연합은 성취할 수 있는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흠 없이 서게 될 그날을 바라보며, 거룩함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교회를 세우자. 그리고 그 거룩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나아가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Ways to Become Holy—as a Church번역: 하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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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예배에 기도를 더 많이
by Jason Helopoulos
2018-12-17
초청을 받아 미국 교회를 순방한 어느 아프리카 목회자 이야기를 들었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교회 대표가 그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미국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놀라울 뿐입니다.”내 경험도 그렇다. 미국 교회는 다른 건 몰라도 기도에는 유독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특히 주일예배 같은 회중예배에서 이 특징이 두드러진다. 예배에 3분 정도의 대표 기도가 들어 있는 교회도 찾기가 쉽지 않다. 비단 미국만의 문제일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21:13). 독립성을 중시하는 미국인의 정서가 원인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더 솔직히 말하면, 미적지근한 신앙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예배 중에 기도시간이 현저하게 부족한 교회는 이제라도 회개하고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내가 이 글을 통해 꼭 전하고 싶은 건 이것이다. 기도를 회복하라교회에서 공동 기도를 시행하거나 증진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모든 예배에 기도를 필수 순서로 삼는 것이다. 몇 곡의 찬양과 이어지는 성경봉독만으로 예배를 마친다면, 신앙의 성숙을 기대할 수 없다. 찬양을 기도의 한 형식으로 본다고 해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 예배에 공동체를 대표하는 공식 기도가 없다면, 그것은 곧 성도에게 기도를 배우고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나는 여러 차례 세미나에서 가정 예배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라고 권면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본질적인 통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강의가 끝나고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하나같이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기도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줄 모르는 감기에 걸린 것 같다. 회중예배 시간에 기도가 부족할 때 독감이 번지듯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기도함으로써 기도를 가르치라회중예배 시간에 기도 비율이 늘어날수록 자연스럽게 성도는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때 기도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기도의 구조, 어조, 어휘, 태도, 강조하는 항목, 적용되는 말씀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기도는 가르치는 만큼 배울 수 있다.주일 예배에서 대표기도 시간을 갖는 것은 성도에게 단시간에 기도를 교육하는 탁월한 방법이다. 하지만 대표기도의 이유가 꼭 교육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배에서의 대표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공동체의 필요와 갈망을 간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혼자 힘으로는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우리의 영적 삶은 한 몸으로 부름 받은 지체들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회중기도는 모든 성도를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회중예배를 위해 여러 형식의 기도를 시도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교회를 위한 일반적인 대표기도의 형식으로 기원하는 기도, 경배하는 기도, 죄를 고백하는 기도, (목회나 중보를 위해) 간구하는 기도, 설교를 위한 기도, 그리고 감사의 기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 간구하는 기도는 좀 더 긴 형태를 갖출 필요가 있다. 물론 너무 긴 기도는 회중을 깜빡 졸게 만들 수도 있지만 회중이 집중할 수 있을 만큼 길면서도 잘 구성된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즉흥으로 기도하기보다는 기도를 미리 적어 두거나 준비해 두어야 한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오늘날의 목사 또는 장로는 사전에 따로 준비하지 않고 교인의 마음을 감화하고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긴 기도를 즉흥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기도의 방식으로, 모든 성도가 함께 준비된 기도문을 소리 내어 읽는 시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정기 기도회를 열라교회에서 회중기도가 고취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정기 기도회를 여는 것이다. 이 기도회는 말 그대로 ‘기도’가 주가 되는 모임이다. 그런데 나는 기도 대신 가르침, 설교, 또는 찬양으로 가득한 ‘기도회’를 많이 보았다. 기도회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무릎 꿇고 공동의 제목을 위해 간구하는 자리이다. 기도회의 횟수는 일주일에 한 번이나,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가 좋다.이때 기도회의 순서가 반복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도회 중에 회중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변화의 장치를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총 한 시간이 기도회를 위한 시간이라면, 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편이 좋다. 그리고 서로 다른 기도의 방법과 유형, 주제를 사용해 보는 것이다. 기도를 위한 방법이나 유형, 주제의 조합은 무한하고 다양할 것이다. 이를 통해 자칫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는 기도회에서 벗어나, 참여하고 싶고 진짜 기도하고 싶은 ‘기도회’를 만들 수 있다.회중예배에서의 기도가 성숙될 때 성도 개개인의 기도가 성장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기도의 훈련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이다. 특별히 나는 복음주의 교회가 기도에 대해 다양한 시도와 변화를 추구하길 바란다. 성도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시리라 확신한다.원제: Pastor, Include More Prayer in Your Church Servi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주영식
기도회
주일예배
공예배
대표기도
회중예배
회중기도
정기기도회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
by Glen Scrivener
2018-12-14
“그가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8:19).이 구절을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처음부터 ‘곤란함’을 느꼈다. 도대체 이 구절을 성도들에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당신은 ‘그게 뭐가 그렇게 복잡한 것일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특히 당신이 이 구절을 읽으며 복음의 의미를 발견했다면 더욱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종종 하나님의 사랑을 본래적인 의미와는 정반대로 이해하고는 한다. 그런 나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도 어리석다는 생각을 한다.거꾸로 된 사랑내 생각의 오류는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수 있다는 착각이다. 즉,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에 앞서 구원의 작업이 필요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기에 앞서 정결하게 하셨고 은혜를 베푸셨다고 말이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 안에서는,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전제 조건과도 같다.그래서 시편 18편의 “주님이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라는 구절을 마주할 때, 성경이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음에 혼란스러웠다. 결국, 나는 이 말씀을 다시 살펴보아야 했다.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요 3:16-17).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이유도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엡 2:4). 더 나아가, 하나님은 무력하고, 사악하며, 죄로 가득 찬 원수들을 위해 그분의 아들을 죽이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기록한다(롬 5:6-11).이러한 구절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파악했는가?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즉, 사랑이 먼저고 구원이 그 사랑의 결과인 것이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하시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숨이 멎을 듯이 놀라운 사랑왜 이런 구절들이 중요한가? 한 가지 이유는, 죄인인 나를 그리스도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상태여야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악한 나도 사랑하신다. 그분은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정결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건 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나를 정결하게 해 주셨다.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의문이 찾아올 때면, 죄인인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일에 대한 증표인 십자가를 떠올려야 한다. 내가 구원받은 상태인지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현재의 정결함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단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 같은 자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분은 내가 가장 선한 상태일 때에 그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내가 가장 더러운 상태에 있을 때에 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그리스도가 흘리신 보혈을 통해 주어진 귀한 구원은 나를 향한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을 증명한다. 그분의 사랑은 경건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같은 것이 아니라 그분을 대적하던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하시는 모든 사역의 밑바탕에는 이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때, 나는 나를 구원하신 이유가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있는 것이다. 즉 나를 향한 변함없고, 고갈되지 않으며,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고 있는 것이다.“그가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8:19).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 Didn’t Die So He Could Love You번역: 주영식
복음
예수그리스도
하나님
거꾸로된사랑
놀라운사랑
구원
시편18
십자가
확증
소그룹과 제자도
by Jeremy Linneman
2018-12-14
당신이 이끄는 소그룹 사역의 목적은 무엇인가?친교? 우정? 성경 읽기? 선교 동원? 이웃 섬김? 소그룹 리더가 위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이처럼 다양한 대답을 할 것이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러 상황에서 직접 소그룹을 인도해 본 결과, 이전보다 더욱 확신하게 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제자도(discipleship)가 공동체 사역의 유일한 목표이자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위에 언급된 대답들은 제자도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이다. 나는 수단과 목적이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를 섬기는 최고의 목표가 단순히 친교나 배움, 혹은 인원을 확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표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내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성숙한 제자들을 만드는 것이다.어떻게 제자를 만드는가?제자도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 성경공부 모임, 훈련 프로그램, QT, 가정 예배, 일대일 멘토링, 교리, 또는 새신자 양육 같은 많은 요소들이 떠오를 수 있다.내가 속한 소그룹은 (성별로 구분된) 구성원들에게 책임을 강조하면서 매주마다 죄를 고백하고 성경을 암송하도록 압박을 준다. 또 한 소그룹은 보통 세 시간 이상 모임을 갖는데, 어린 자녀들을 둔 가정들이 먼저 일어나는 상황에 대하여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내가 인도하는 또 다른 소그룹도 마찬가지로 구성원들끼리 오랜 시간 함께 모여 있으면 그 자체가 제자 훈련이 된다고 여기기도 한다.제자도는 많은 교회가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장황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만큼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왕도도 없다. 제자도는 의무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교육 같은 것도 아니고 풀어야 할 난해한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한 구성원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헌신적이고 은혜로운 삶의 과정이다. 당신의 소그룹은 제자도를 이루어 가고 있는가?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1. 제자도는 그리스도께 중심을 둔다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중심을 둘 때에만 생명력을 갖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임은 정체된 모임이 아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모임이어야 한다. 지친 자들이 와서 기쁨을 얻고 가는 모임이 되어야 하고, 잡담하고 험담하는 모임이 아니라, 말씀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임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제자도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 근거한 복음 중심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2. 제자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다참된 제자도는 영적인 변화에 대해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하고,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갈망하도록 만든다(딛 2:11-13). 우리는 자주 실패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계속해서 제자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준다.3. 제자도는 실제 제자로 사는 과정이다제자도는 이론이 아니다. 공부 모임도, 훈련 프로그램도, 혹은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하는 교제의 시간도 아니다. 제자도는 새로운 인생의 방향과 삶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일상의 변화를 이루고자 오늘을 살아내는 실천적 과정이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면, 제자로 사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4. 제자도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다제자도는 그리스도나 교회를 위해 헌신할 때 요구되는 필수적 자격이 아니다. 제자도를 위한 첫걸음은 성장이나 변화가 아니다. 순종도 아니다. 제자도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는 그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가르쳐 준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5. 제자도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이다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우리는 점차 그분을 닮아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닮아 갈 때 진정한 삶의 변화가 시작될 것이고, 더불어 우리의 순종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갈망으로부터 행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시선이 닿아 있는 존재를 닮아 간다.“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6. 제자도는 함께함에서 이루어진다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being)로서 그분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becoming)은 매우 개인적(personal)이지만, 그렇다고 은밀한(private) 성격의 변화는 아니다. 그 과정은 ‘예수님과 나’라는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 변화를 경험하기 가장 좋은 장소는 헌신적인 신자들이 동일한 목적 아래 매주 모이는 작은 지역 교회이다.예수님이 패러다임이다제자도를 위한 청사진을 얻고자 한다면, 진정한 제자도가 시작된 그 출발점으로 가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보여 주신 그분의 삶과 사역을 살펴봐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하여 행하신 사역 속에서 몇 가지 핵심 주제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중 그분의 교제 방식을 배우는 것은 제자도를 이루는 데에 특히 중요하다.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알고 부르셨다. 그분은 열세 명도 아니고 열한 명도 아닌,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셨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후로, 그중 누구도 더 나은 사람으로 대체하지 않으셨다. 열두 명의 제자들은 그들의 가능성 때문에, 혹은 과거의 경력 때문에 선택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다 아셨고, 제자들 역시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드렸다. 좋든 나쁘든, 그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사람들이었다(유다까지도 말이다).예수님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제자들을 초대하셨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친구들 없이 혼자 계시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제자들은 늘 예수님의 사역 여정에 동행했다. 예수님은 가족 모임에도, 종교적인 행사에도, 특별한 잔치에도 제자들과 함께 가셨다. 예수님은 항상 가르치지는 않으셨지만, 매순간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예수님의 모든 삶이 그들에게는 곧 진리와 은혜의 가르침이었다.예수님은 식사하실 때조차도 제자들과 함께 드셨다. 마태복음 11장 19절은 이렇게 말한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이 가장 선호하는 교제의 수단이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과도, 즉 바리새인, 세리, 이방인, 군중과도 함께 먹고 마셨는데, 그 자리에 항상 가까운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님이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바로 그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신다는 의미였다. 예수님의 이런 행보 때문에,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매우 격분했다.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는 사명에 집중하셨다. 예수님은 세례 받은 직후, 열두 제자를 부르는 일로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분의 사명은 곧 제자들의 사명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제자들을 통해서 이뤄 가시는 사명이었다. 한마디로 그분의 사명은 관계의 사명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심지어 가르치고 치유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늘 공동체 안에 머무르시면서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키셨다.이처럼 공동체는 제자 훈련에 필수적인 요소이다.공동체 안에 속해 있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삶과 사역에서 보여주신 교제의 흐름(fellowship rhythms)을 잘 이어갈 수 있다. 따라서 소그룹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관계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교회야말로 참된 제자도를 이루어 가는 교회이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r Small Group Should Be Making Disciples번역: 김재덕
목회
모임
제자도
그리스도
패러다임
제자훈련
교제
성경신학과 공예배
by Bobby Jamieson
2018-12-14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매주 모이는 모임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복음주의적인 크리스천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성경으로 눈을 돌린다. 그렇다면 성경의 어느 곳을 보아야 하는가? 구약성경은 예배에 관해, 즉 기도와 희생 제사 및 찬양대와 악기 등에 관해 자주 언급한다. 하지만 그 모든 내용이 신약시대의 예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배에 관한 성경신학이다. 성경신학은 불규칙하게 전개되듯이 보이는 성경 줄거리 속에서 통일성과 다양성,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모두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훈련이다. 이 글에서 나는 공예배에 관한 성경신학을 네 단계로 나누어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구약성경에서의 공예배.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 셋째, 신약성경에서의 공예배. 넷째, 공예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1. 구약성경에서의 공예배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여 그분의 임재로부터 추방된 이후,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께로 다시 모으는 일을 해 오셨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속박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구해내어 억압에서 벗어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분의 임재 안에서 예배하게 하셨다(출 3:12, 18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자신의 거처로 들어가게 하셨다(출 15:13, 17절). 그 거처는 어디인가? 처음에는 성막이었다. 그곳에서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죄와 부정함을 없애기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렸다.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4-46). 출애굽의 목표는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 목적을 위해 거룩한 장소(성막)와 사람(제사장)을 지정하셨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 하나님은 그들을 백성으로 삼으셨다. 또한 이스라엘과의 이 새로운 관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이 소위 말하는 ‘모세 언약’이다. 출애굽기 19장에는 이 모세 언약의 내용이 자세히 나오는데, 먼저 여호와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낼 때 행하신 일을 상기시킨 후, 그들이 그 언약의 조항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소중한 소유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출 19:1-6). 여호와는 출애굽기 24장에서 백성과 이 언약을 체결하시는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모든 율법들은 이 언약의 조항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 모든 세부 내용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과 맺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서로 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레위기에 세부적으로 묘사된 희생 제사와 정결 예식은 이 언약이 깨졌을 경우, 그 관계를 복구하는 방편으로, 그들은 의식을 통해 언약을 보존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초실절 등과 같은 절기들을 지키기 위해(레 23장), 1년에 몇 차례에 걸쳐 성막에 모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절기들 외에도, 정기적인 희생 제사들이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졌으며,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죄나 부정을 제하기 위한 특별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있을 때에는 성막(나중에는 성전)으로 갔다. 달리 말해서, 이스라엘인들은 1년 중 몇 차례의 특별한 경우에만 공예배를 드렸다. 오직 여호와께만 드리는 개인적인 헌신의 예배는 그들이 주야로 행해야 할 의무였지만(레 6:12-13),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가까이 나아간다는 의미에서의 공예배는 특정한 사람들과 장소들과 시기들에 국한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셨지만, 그 임재는 성막에 국한되었고 제사장들의 호위를 받았다.2.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성경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하나의 큰 전환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성자 하나님,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셨다(고후 1:20). 예를 들면, 구약의 모든 모형들이, 가령, 제사장, 성전, 왕권 등의 제도들과 출애굽, 유배, 귀환 등의 사건들이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다. 따라서 성경 전체의 예배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세 언약의 예배가 예수님을 통하여 어떻게 성취되고 또 변화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성막(후에는 성전)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 가운데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신 곳이다. 예수님이 바로 이 구약의 성막을 성취하고 대체하신다. 요한은 이르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주하셨다고 기록했다(요 1:14). 또한,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약속하셨다(요 2:19). 달리 말해서, 이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만나고 그 임재를 드러내며 그들의 죄를 처리하시는 성전이 예수님의 몸이다(요 2:21-22). 참 예배자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예배할 필요가 없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요 4:21-24). 예수님은 지상의 예루살렘 성전을 성취하고 대체하시므로 이제 참 예배자들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또한 예수님은 모세 언약, 성막, 성전과 관련된 전체 희생 제사를 성취하며 대체하신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기록했듯이, 매일 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던 제사장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단번에 자기를 드려” 백성의 죄를 속하셨다(히 7:27).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것은 구약의 희생 제사들처럼 단지 육체를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정결케 하고 내면을 새롭게 한다(히 9:13-14). 예수님이 이 단번의 드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온전케 하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황소나 염소를 드릴 필요가 없다(히 10:1-4, 10, 11-18절).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레위기의 희생 제사들을 성취하고 대체하신다. 이제 그 피가 우리의 영원한 구속을 보증한다. 이 외에도 예로 들 것들은 많지만, 핵심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이 백성과 관계 맺으시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개시하신 새 언약은 옛 언약, 곧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맺으신 언약을 폐한다(히 8:6-7, 13절).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인 희생 제사를 믿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는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제, 소수의 제사장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히 4:16; 10:19-22).3. 신약성경에서의 공예배이 모든 것은 새 언약 시대의 공예배를 위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첫 번째로 주목할 사항은, 구약성경의 예배 용어들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신자들의 삶 전체에 적용되어 그들의 영적 생활을 규정 짓는다는 점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희생 제물의 대상으로 짐승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드린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행위이다. 또한 히브리서 13장 15절을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송은 곧 제사이며, 우리는 주일 아침 한두 시간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사를 드린다. 더불어, 하나님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는 찬양은 물론이고 훨씬 더 많은 것도 포함한다. 예컨대, 공개적으로 담대히 복음을 고백하는 것과 진리와 사랑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그리고 우리의 모든 말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예배’가 주일에 국한되어 교회에서 주로 행하는 제한적인 의식이 아님을 뜻한다. 예배는 우리의 삶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것이어야 한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예배는 신성한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연합되었고,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주하사 당신을 개인적으로나 혹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고전 3:16-17; 6:19; 엡 2:22).그렇다면 새 언약에서의 공예배는 어떠한 특징이 있는가? 성경 읽기와 설교(딤전 4:14), 시와 찬미 및 신령한 노래로 찬양함(엡 5:18-19; 골 3:16), 기도(딤전 2:1-2, 8절), 세례와 성찬식의 거행(마 28:19; 고전 11:17-34), 그리고 사랑과 선행을 서로에게 격려함이다(히 10:24-25). 새 언약에서의 공예배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지는 사항들 중 하나는, 각각이 아닌 전체로서의 몸을 세우는 일에 줄곧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골 3:16).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서로를 가르치며 권면한다. 또,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서로를 세워간다. 바울은 모임에서 하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몸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고까지 강조한다(고전 14:26). 매주 교회에서 모일 때마다, 우리는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예배함으로써 서로를 세우기도 한다. 그리스도가 세우신 새 언약으로 인하여, 새 언약 시대의 공예배는 옛 언약하에서의 공예배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띤다. 이제 신자들은 1년에 몇 차례가 아니라, 매 주일마다 공예배를 위하여 모인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지 않고, 자신의 거주지 인근의 지역 교회에서 모인다. 하나님의 임재가 지성소에 국한되거나 제사장들의 호위를 받지 않고, 이제 하나님은 성령으로 그분의 모든 백성 안에 거하시며,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곳마다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마 18:20).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일련의 정교한 제사나 제물도 드리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설교하며, 말씀으로 기도하고, 또 말씀을 노래하며, 성례들을 통해 그 말씀을 본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사랑 안에서 하나의 몸을 세워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4. 공예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공예배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먼저, 교회의 정기 집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삶 전체가 예배이지만, 교회에서의 정기적인 모임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모든 크리스천은 교회에 함께 모일 필요가 있기 때문에(히 10:24-2)5), 교회 출석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는 예배 때,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가 교회 구성원들에게 꼭 필요한 것임을 뜻한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고안된 규례나 예배 관행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골 2:16-23). 이 성경적인 원칙들이 역사적으로 공인된 우리의 예배를 구성하고 특징지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즉, 교회는 공동 모임에서 뚜렷한 명령으로든 혹은 표준적인 사례로든 성경에 적극적으로 제시된 일들만 실행해야 한다. 다른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손상시키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함께 예배하는 법을 성경에서 배워야 하며, 성경이 지시하는 것만을 행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성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알려 주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경에서 예배에 대한 어느 자료가 표준이 되며, 또 구속력이 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철저히 답하려면, 아마 책 한 권의 분량의 안내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시하고자 한다.예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파악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분석적인 눈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서도 완전하며 표준적인 ‘예배 순서’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모든 교회를 향해 분명한 구속력을 발휘하는 몇몇 명령들이 있다. 에베소와 골로새의 교회들은 찬양하라는 명령을 받았고(엡 5:18-19; 골 3:16), 고린도 교회 역시 함께 모일 때 찬송한 것으로 언급되는데(고전 14:26), 이는 모든 교회의 예배에서 찬양이 필수적임을 암시한다. 바울이 목회와 관련하여 디모데에게 성경을 읽고 설교하라고 명한 것은(딤후 3:15-16), 그렇게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일이 모든 예배를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한다. 그런가 하면,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롬 16:16)와 같은 명령은 당시 문화에만 특별히 국한된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를 좀 더 보편적인 표현으로 옮기면,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서로 환영하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매주 첫 날에 헌금을 모아 두라며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특별한 명령은 문맥상 더 넓은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를 위한 특별 헌금이었지만, 모든 교회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갈 6:6), 따라서 헌금은 공예배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지금까지는 신약성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은 어떠할까? 구약성경에는 예배에 대한 명령이 매우 많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시 150:3-5). 이러한 구절은 교회의 예배에서 나팔, 비파, 수금, 소고, 춤, 현악, 퉁소, 그리고 소고를 준비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의미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시편은 모세 언약 시대의 예배를 표현한 것으로서, 모세 언약을 가리켜 신악성경의 저자들은 ‘옛 언약’이라고 말한다(히 8:6). 예레미야 31장에서 우리는 약속된 새 언약이 도래했기 때문에, 옛 언약은 폐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모세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롬 7:1-6; 갈 3:23-26). 따라서 모세 시대와 결부된 예배 형식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 성전에서 섬기는 역할을 맡은 자들은 제사장들이었고, 그중에는 예식 음악의 전문가들도 있었다(대상 9:33). 사실, 시편 150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악기를 연주한 자들이 바로 이 제사장들이다(대하 5:12-13; 9:11). 따라서 시편 150편은 기독교 예배를 위한 표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성전이나 레위 제사장직과 결부된 옛 언약 예배의 특정 형태를 오늘의 우리에게 알려 줄 뿐이다. 즉 시편 150편 본문은 교회 예배를 위해 어떤 악기들을 동원하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해 정해진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다. 신약의 예배에서 구약의 짐승 희생 제사를 전례로 받아들일 수 없듯이, 구약의 전례라고 해서 단순히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다. 많은 기독교 전통들은 마치 레위기 제사장직과 성전 예배의 몇몇 특징들이 새 언약 시대로도 그대로 연결되는 것처럼 구약성경의 전례에 부분적으로 의존한다. 하지만 이는 성경신학적 이해의 결함으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여러 부분들이 예배 방식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시편은 경외심과 기쁨과 감사로 예배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 교회의 예배 형태나 구성 요소들을 규정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이 옛 언약 아래 하나님 백성을 위한 헌법 역할을 했듯이,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을 위해 새로운 헌법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구약과 신약에서 일관되며 그가 구원하시는 언약 백성도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과 관계하는 방식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새 언약을 세우신 후에 전격적으로 바뀌었다. 공예배를 위한 신학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성경신학의 모든 도구들을 활용할 필요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떻게 그 도구들을 활용하는가? 두 언약들을 비교하고, 모형과 원형 간의 연결점을 추적하며, 약속과 성취를 고찰하고, 더 나아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파악함으로써 활용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 백성이자 약속하신 성령이 내주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 방식에 따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Biblical Theology and Corporate Worship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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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성경신학
공예배
구약성경
그리스도안에서
신약성경
성경의가르침
바울
일이 우상이 될 때
by Daniel Darling
2018-12-13
친구들이 휴일에 집에서 쉬거나 누군가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시간에 나는 새벽부터 무거운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두툼한 옷을 여러 겹 입고서 곧 아버지와 집을 나섰다. 건설업에 종사하시던 아버지는 내가 아직 십대임에도 배관 수리 기술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 휴일이나 방학 때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고객 집을 방문해 구리 수도관, 플라스틱 배수관, 강철 가스관 같은 걸 설치했다. 나는 건설 분야의 다른 기술에는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 않았지만, 배관 작업만큼은 꽤 야무지게 해냈다. 그 일을 하면서 용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게는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성실과 하나님의 부르심, 이 둘의 관계를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배관 수리를 그만두어야 하는 날이 올 때까지도 나는 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직장을 갖고 나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신학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성실한 모습은 나의 삶에 강력한 교훈이 되었다. 아버지는 말수가 별로 없으셨다. 하지만 하시는 일에서 보인 뛰어난 역량과 성실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일을 능숙하게 익히려면 내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긴 기간 동안 이 일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내 ‘조금 더’에 대한 내 나름의 계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완벽주의자에 가까울 만큼 일을 철저하게 하셨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의 완성도에 이르려면 며칠 더 배우는 것으로는 아무 성과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쟁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아버지께 직접 배웠지만 나는 결국 따져 물었다. “벽 안에 있는 파이프는 아무도 볼 수 없는데 왜 그렇게 줄을 맞춰 곧게 세우세요? 그렇게까지 균일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얘야, 남들은 못 보더라도 내가 지금 보고 있잖니.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신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을 닮아가는 선물내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은 인간의 존재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곧 일은 선하다는 점이다. 이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일곱째 날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마치시니”(창 2: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그러므로 일이란 창조주께서 당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선물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창 2:5).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이 없이는,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일하고, 땅을 갈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는 사람 없이는 미완성이다. [창세기의 이러한 기록은] 마치 모세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사람이 가꾸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또 돌아갈 수도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는 이 땅을 숭배하라고 지음 받은 것도 착취하라고 지음 받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는 가장 좋은 의미에서의 ‘환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을 지으시고 우리에게 가꾸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은 단지 인간 삶의 부산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일은 우리를 인간되게 하는 필수 요소다. 우리는 이 땅을 다스리도록, 곧 혁신하고 탐구하도록 지음 받았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함으로써 그리고 이 세상을 돌봄으로써 하나님을 닮는다. 저주받은 노동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다른 모든 선물들처럼 우리의 노동은 그 죄(the fall)로 말미암아 부패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다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자.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창 3:17-19)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가꾸어야 할 곳으로 완벽한 조화 가운데 창조된 이 세상이 이제 썩어짐의 종이 되어 신음하고(롬 8:22), 저주의 고통을 겪고 있다. 땅이 반격한다. 일이 힘들고 지치게 하는 고역이요, 때로는 결실조차 없는 노역의 반복이다. 일하고, 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자고…. 그리고 죽는다. 우리는 일에서 만족감을 얻고 싶어 한다. 이는 온당한 바람이다. 우리는 일에서 언제나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틀린 생각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러나 타락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일을 하면서 만족도 좌절도 모두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복음은 우리의 노동에 새로운 목적을 부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예술가, 장인, 뛰어난 행정가, 법률가, 완벽한 주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노동의 창조적 가치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곧 우리의 노동이 인간 존엄성을 좀먹는 엉겅퀴와 가시에서 마침내 우리의 노동이 해방되는 나라를 바라보게 한다는 의미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원래 목적, 하나님을 닮아가는 목적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우리가 일하는 것은 구원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해야 할 선한 일이 있다. 일이 우상이 될 때안타깝게도, 우리는 일을 가장 중요한 것, 곧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 아니라 숭배와 경배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다.예를 들어, 경력이 정체성과 가치를 드러내는 이름표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대화를 어떻게 시작하는지 떠올려 보라. 교회에서 새 신자를 맞이할 때, 기차에서 옆자리 승객과 인사할 때, 혹은 새로운 이웃 가정을 만날 때, 아마 별생각 없이 이렇게 물을 것이다. “무슨 일 하세요?” 그리고 상대방의 대답에 따라 우리는 그 사람을 이러저러하게 판단하게 된다. 나는 많은 시간을 내슈빌이나 워싱턴DC에서 보낸다. 이 두 도시에서는 직업에 대한 질문이 특히나 중요하다.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사는 복을 받은 내슈빌에서는 종종 사람들의 창조적인 활동이 그들을 규정하는 기준이 된다. “작곡가입니다.” “아무개와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제품/기업/비영리단체에서 마케팅 일을 하고 있습니다.” 워싱턴DC에서는 직업을 묻는 것은 곧 파워 게임(power game)이다. 명함을 교환하고 영향력 순으로 접촉 순서가 정해진다. “의회 세입세출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이 싱크탱크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 정부기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 하면 어떤 질문이 떠오르는지 생각해 보라.• 내 직업은 중요한 직업인가? • 내 직업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인가?•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사람들은 내 직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할까? 물론 이런 질문을 입 밖에 내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일이 우상이 되어버렸을 때는 한걸음 물러서서 그 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강요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하던 일을 집으로 가져가고 있지는 않은가?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는 않은가? 이메일에 눈을 떼지 못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긴급 프로젝트에 매달려서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일이 우리 귀에 속삭인다. ‘너는 신과 같다. 쉴 필요 없다.’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직업(vocations)에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쏟아 부은 것이 불필요한 희생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고서야 그동안 얼굴 없는 신을 숭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게 되기도 한다. 일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나 하나님 대용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지 우리의 급여나 직위, 직장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 이 좋은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이것들이 우리를 공허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러하기에 매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효용성이나 우리의 영향력이나 우리의 급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형상을 지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터 잡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단지 직장인이 아니라 그와 함께 영원한 공동상속인이다. 원제: Your Work Matters-But Don’t Deify I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형용
직업
신격화
노동
우상
정체성
하나님의형상
선물
기독교적 양육
by Elyse Fitzpatrick
2018-12-13
앨리(Allie)는 괴로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녀는 목사 아들의 뺨을 때려서 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아이의 형을 때렸기 때문이다. 앨리의 엄마 역시 창피하고 실망스러웠다. 앨리는 자신에게 화나고 수치스럽고 절망적인 기분으로 꾸지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대화를 하고자 방으로 들어섰을 때, 앨리는 울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친구들과 놀 자격이 없어!”이것이 당신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녀들에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근본적인 교육 방법에 대해서 고민할 때에는 조금 다른 차원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내가 무슨 수로 이 아이의 행동을 고칠 수 있을까?”에서 “내가 자녀를 바로잡는 방식이 과연 복음적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신약성경에는 양육에 관한 두 가지 명령이 나온다. 그중 하나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이 구절을 주제로 삼은 책들도 더러 있는데, 아버지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방법 또는 적절히 징계하거나 교육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해석할 때 우리는 가장 중요한 표현인 ‘주님의’라는 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초기 독자들은 아마 이 가르침에 무척 놀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베소의 부모들은 헬라 철학자들의 징계와 교훈으로 자녀를 훈육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 앞에서 크리스천 부모들은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먼저, ‘주님의’ 양육법은 은혜에 의존한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했기 때문에(욘 2:9), 우리가 자녀의 마음을 돌려 주님께 순종하도록 할 수는 없다. 따라서 크리스천 부모들은 안달하거나, 조종하려 하거나, 심히 염려하거나, 압박을 가하기 보다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뻐하고 기다려야 한다. 오직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을 내 힘으로 하려고 기를 쓰지 말라. 또한 기독교적인 양육은 솔직하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논한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그 누구보다 더 의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자녀보다 의롭다고 말할 수 없음도 물론이다. 혹시 '왜 우리 아이는 저럴까'라고 생각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 아이가 죄인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가 자녀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죄와 싸우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즉, 부모 대 자녀들의 대결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들 그리고 죄와 불신의 대결이다. 크리스천 부모는 자녀의 삶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아이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알게 하고, 받은 은혜에 반응하는 법을 가르치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도록 이끈다. 하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는데, 바로 율법이 그들을 선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율법을 내세워 자녀들에게 선을 기대한다면, 그 마음을 접어야 할 것이다. 선한 것은 ‘그리스도의 의’뿐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양육에 있어서 무엇을 의지해야 할까? 당신의 교육법이 진정으로 기독교적이며 주님의 말씀에 입각한 방법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기도에 의지해야 한다. 기독교적인 교육 방법은 복음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의 삶이 복음과 연결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크리스천 부모는 자녀를 율법적으로 조종하려 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의에 의존하여 양육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실천적 방법으로 자녀들에게 은혜롭게, 그러나 단호하게 복음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을 선한 길로 이끌고 계심을 알도록 도울 수 있다.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꾸짖기도 하며, 더불어 예수님에 대해 반드시 들려주어라. 이제 서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앨리는 “나는 밖에서 친구들과 같이 놀 자격이 없어”라고 소리치며 낙담했다. 이 외침에 대해 복음은 앨리의 엄마가 어떻게 반응하도록 가르칠까? 비록 앨리의 엄마가 먼저 복음을 떠올리지 않았지만, 주님은 앨리의 말을 통해 그 엄마의 마음을 녹이셨다. “네 말이 맞아, 앨리야. 너는 친구를 때렸기 때문에 함께 어울릴 자격이 없어. 하지만 엄마도 마찬가지야. 내가 너에게 화를 많이 냈잖아. 엄마 역시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어. 그렇지만 하나님은 너무나 친절하고,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귀한 선물을 주시는 분이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자비를 베푸셔. 앨리야, 자비가 뭔지 아니?”앨리는 고개를 저었다. “자비란 벌을 받아야 마땅한 네게 하나님이 사랑을 주시는 거야. 네가 아무리 착하게 행동해도 얻을 수 없는 귀한 것들을 하나님이 네게 가득 주시는 거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니? 바로 그분의 아들이 우리 대신에 뺨을 맞으셨기 때문이란다. 예수님은 너와 내가 하나님의 심판 대신 자비를 경험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셨어. 정말 좋으신 분이지?”“눈물이 나요.” 앨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그래,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엄마도 눈물이 나. 오늘밤에 엄마랑 손잡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기도를 마친 후에 앨리가 엄마를 안으며 말했다. “엄마, 나도 알겠어. 하나님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셔.”기독교적인 양육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을 자녀와 함께 나누는 것이 크리스천의 교육법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Christian Parenting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가정
양육
주님의교훈
주님의훈계
주님의양육법
은혜
성령님
죄인
그리스도의의
보혈과의
누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by Mark Dever
2018-12-13
우리는 종종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설교자나 변증가, 또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그런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우리는 이 가르침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4). 또 사도행전 11장 19-21절은 모든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고 말한다.이와 관련하여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는 지침을 우리 모두에게 준다(벧전 3:15).더 나아가, 우리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자 한다면(막 12:31; 약 2:8),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섬김은 없다. 우리는 이 명확한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Who Should Evangelize?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복음
변증
설교자
변증가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바울
베드로
베드로전서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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