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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개혁
by Burk Parsons
2018-11-29
각성(Awakening)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우리를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첫걸음이다. 각성은 주권적이고 은혜로운 하나님이 행하시는 강력한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울 때는, 단순히 잠에서 깨우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깨우신다. 각성은 중생과 부흥 및 개혁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영광스러운 일이다.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울 때에는 먼저 마음을 되살리고 거듭남의 선물을 주어서 결국 우리가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아 있으라!”라고 말씀하신다(겔 16:6). 그러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의 영혼을 정복하고 설득하신다. 성령은 완고하고 자기를 신뢰하는 돌 같은 우리의 마음을 뜯어내고 새롭게 하여 살아 있는 마음으로 바꾸신다. 이 새 마음은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는 마음이고, 그 아버지의 뜻에 부드럽게 반응하려는 마음이며,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사랑의 노예가 된 마음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일깨울 때는, 단일한 영혼의 부흥이든, 가정의 부흥이든, 공동체의 부흥이든, 아니면 어느 민족의 부흥이든 항상 부흥의 결과가 따라온다.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킬 때,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는 깊은 회개를 하도록 만들어서 믿음과 회개 및 순종의 삶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일깨울 때, 그분은 참되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개혁, 곧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개혁을 일으키신다. 그러나 우리는 각성을 계획할 수 없으며, 또한 각성을 일으키는 피상적이고 정형화된 계획을 세우려는 시도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각성은 오직 하나님이 그 일을 작정하실 때에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부흥은 결코 광고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스스로를 광고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각성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원하실 때,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게, 그 선한 뜻에 따라 각성을 일으키신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은 각성을 작정하는 것처럼, 각성의 방편도 정하신다. 하나님은 만물의 목적을 주권적으로 작정할 뿐 아니라, 모든 목적의 수단까지도 정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우고자 정하신 방편들은 정기적인 주일 예배, 그리고 매일의 은혜 가운데 우리의 성장에 필요한 통상적인 수단들을 가리킨다. 즉,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세례와 성찬으로 행해지는 성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통상적인 은혜의 방편들이다. 이는 성령이 참된 회심, 참된 부흥, 참된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를 각성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자신의 계획과 전략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과 바로 그 통상적인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 발현된다. 이때 우리는 코람 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그 얼굴 빛이 우리에게 비췬다는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적인 지혜를 따라 그분이 기뻐하는 일을 정확하게 행하실 것을 신뢰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rue Reformation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역사
종교개혁
진정한개혁
부흥
각성
가정에서의 세계관
by John Tweeddale
2018-11-29
오랫동안 크리스천들은 가정을 삶의 중심으로 보았다. 가정은 큰 꿈을 가진 우주 비행사를 키우는 육아실이고, 영웅이 되고자 하는 자를 위한 놀이터이며, 미래의 여행가가 즐기는 성소이다. 또 가정은 두서 없는 대화, 커다란 웃음, 정성스런 식사, 견디기 힘든 시련, 많은 고된 일들을 통해 덕을 일구는 장소이다. 당신이 읽기를 배우는 어린이이든, 기숙사에 들어간 대학교 신입생이든, 이제 막 결혼해서 처음으로 아파트에 입주한 신혼부부이든,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이든, 여러 명의 아이를 키우는 요란한 가정에 속해 있든, 아니면 배우자 없이 인생을 항해하는 과부이든, 가정의 위안은 우리 삶의 안정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가정은 천국이 아니라 지구상의 지옥과 같다. 가정이 학대와 폭력과 조종의 가마솥인 경우, 그곳은 피신처가 아니라 달아나야 할 감옥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따뜻함의 경험은 고사하고 가정을 피난처로 삼아 본 경험이 전혀 없다. 크리스천들은 가정의 가치를 논의하면서, 타락의 죄책과 부패가 가족과 이웃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더불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의 거처’이신 하나님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시 90:1). 가정에 관한 신학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두 가지 상반되는 오류들이 있다. 먼저는 가정 역시 타락한 세상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서의 삶이 ‘모든 것’이라고 여기는 착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 그릇된 종말론에 빠지는 죄를 짓게 된다. 우리는 교회의 회중석을 채워야 하고, 세상의 대로로 나가는 모험도 해야 한다. 지상명령에 나오는 “가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가정이라는 조용한 거처 속으로 숨고 싶은 유혹을 받는 이들에게, 가정에 안주하는 것은 자신의 취향과 전통에 따라 천국을 잘못 이해하는 행위임을 알려 준다. 우리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요 18:36).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야 한다(히 11:10).우리가 가진 한 가지 오류가 이처럼 가정을 이상화 곧 우상화하는 것이라면, 피해야 하는 또 다른 오류는 가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가정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서의 삶이 공적으로 행하는 활동과 (거의) 무관하다고 믿는 치명적인 함정에 빠진다. 그럴 때, 사적인 신념과 성품은 공적인 정책이나 생산과 무관하게 된다. 그 결과,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는 일은 사업장에서의 성공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기도하는 골방이나 식사하는 식탁과 같은 사적 영역이 다른 모든 공적 영역의 탁월한 삶을 위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생산성은 경건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앞에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나누는 장벽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요 34:21).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거룩하게 행동해야 한다(벧전 1:15).가정은 무분별한 욕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중립적인 장소가 아니다. 단순히 전통적인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보루도 아니다. 가정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덕성을 함양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덕성을 함양하는 장소란 사적인 존재로서의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또한 우리의 공적인 일을 촉진시켜 주는 공간을 의미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가정들에게 편지를 쓸 때, 아내, 남편, 자녀, 주인, 종 모두에게 육신의 자랑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덕목들로 옷을 입으며, 말과 행위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가르쳤다(골 3:1-4:1). 그는 또한 에베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헌신 및 예배에 대한 가르침(엡 5:1-21)과 영적인 전투에 대한 가르침(6:1-20) 가운데 놓는다. 그리고 베드로는 가정에 대한 권면을 교회에 대한 논의와 함께 말하는데(벧전 2:1-11; 2:12-3:8), 이는 가정생활이 결코 교회생활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이 땅의 천국인 가정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활짝 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 여기서 믿음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소망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이기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기대를 가리킨다. 또한 사랑은 영광과 아름다움이 끝이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타락한 세상을 사는 크리스천 가정은 낙관론에 뿌리 내려야 한다. 그리고 이 낙관론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주님의 나라에 뿌리를 내려야만 한다. 가정은 문화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황량한 전장과 같다. 교회가 참된 복음을 옹호하고 세속주의와 싸우는 동안, 우리는 가정에서 덕을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교회가 언덕 위의 도시로 남기 위해서는, 복음의 빛이 가정에서부터 밝게 빛나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ldview at Home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문화
세계관
가정
우상화
덕성
천국인가정
믿음소망사랑
복음의빛
그릇된종말론
우리의거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by Guy Waters
2018-11-29
예수님을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거나 일반적인 가정에 도전을 제기하는 놀라운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식을 그저 인정해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영원한 진리에 관해 우리가 자신의 확신을 재점검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들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요하게 만든다.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도 그런 역할을 한다.잔치이 비유는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왕에 관한 이야기, 곧 천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마 22:2). 혼인 잔치는 성경의 보편적 의미를 함축한다. 바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완전한 거룩과 기쁨 가운데 자신의 임재를 누리게 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왕의 명령에 따라 잔치 초대장이 발송된다. 그런데 왕이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한다(마 22:3). 그들은 여러 변명을 했을 뿐만 아니라 왕이 보낸 종들을 함부로 대했기에 왕은 그들을 벌한다(마 22:5-7). 그리고 다시 종들을 파견한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마 22:9).여기서 예수님은 복음이 먼저 유대인에게로, 그 다음 이방인에게로 전해진다는 사실을 설명하신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주신 메시지를 결정적으로 거부했다. 이 거부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공포하시고, 결국 로마의 군대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파괴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유대인의 거부는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되는 과정으로 연결된다. 그렇기에 여기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마 22:10)라고 말씀하신다.그런데 이 잔치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왕이 손님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고”(마 22:12) 온 자를 발견한다. 이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를 전혀 말할 수 없다. 왕은 그에 대해 종말론적 심판을 거행하며 사환들에게 명령한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3). 예수님은 이 비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한 마디의 경구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신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청함을 받은 자바로 이 의미심장한 최종 선언을 이해하는 것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의 뜻은 무엇일까? 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여기서 사용된 ‘청하다’와 ‘택하다’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청하다’라는 단어는 이 비유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헬라어 본문에서 종들은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게”(마 22:3)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여기서 청함 받은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을 의미한다(마 22:4, 8). 종들은 이방인들을 ‘청하여’ 오게 하도록 명령을 받는다(마 22:9). 14절에서 “청함을 받은”으로 번역된 단어는 3, 4, 8, 9절에서 ‘청한’으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군에 속한다.이 패턴을 알면, 비유에서 언급되는 청함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청함은 종들, 즉 구약성경의 선지자들, 더 나아가 신약시대의 사역자들을 통해 부르시는 일, 바로 하나님의 초대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듣는 자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이 명령을 거부하는 일도 발생한다. 예수님은 청함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책임져야 할 과실이 있다고 교훈하신다.택함을 입은 자청함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자들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그들을 “택함을 입은” 자, 즉 헬라어 의미에 따르면 선택된 자라고 부르신다. 이들은 성부가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이다(엡 1:4). 오직 택함을 입은 자들만이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돌아오실 때 구속된 무리에 속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있어야 청함에 진심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그런데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청함을 곧 택함이라는 의미로도 표현한다(롬 8:30; 딤후 1:9).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청함을 받았으나 택함은 받지 않았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답은 성경 저자들이 ‘청하다’라는 말을 언급하는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있다. 즉,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청하다’를 외적 의미로 언급하신다. 이는 복음의 메시지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청함은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부르는 명령이다.또 성경 저자들은 ‘청하다’를 내적 의미로도 언급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내적 부르심을 언급하는데, 이는 복음의 외적 부르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령이 내면에서 효과적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역사를 의미한다. 이 내적 부르심은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게 한다. 외적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지만, 선택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때에 내적 부르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에게 복음은 실제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롬 1:16).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처럼 우리를 놀라게 하고 동요하게 만드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교훈은 무엇일까?첫째, 하나님이 그의 메신저를 통해 우리를 부르실 때 이를 거절하는 일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부르심을 거절한 자들에게 심판날에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교묘한 방법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외적 부르심에 입술로만 반응하고, 그 부르심으로 제시된 예수님은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거절 역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한다.여기서 나쁜 소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마음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인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부르심을 거부하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따라서 우리가 외적 부르심에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이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신다. 구원은 오직 은혜의 결과이다. 어쩌면 이 사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 불안을 통해 우리가 진리를 보도록 이끄신다. 즉 오직 은혜로만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Did Jesus Mean by ‘Many Are Called, But Few Are Chosen’?번역: 이주일
신학
신약성경
청함
택함
교훈
잔치
그리스도
고린도전서1장24절
구약성경은 부활 소망을 가르치는가?
by Mitch Chase
2018-11-28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에는 공통점이 있다.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무찌르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복된 소망을 선포한다는 점이다(고전 15:26). 어쩌면 부활 소망이 온전히 신약성경에만 속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망’의 줄기를 잡아당겨 보면, 그 뿌리가 구약 속에 깊이 박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기 백성에게 부활 소망을 허락하셨다.모든 사람이 구약성경에도 부활 소망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모세오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인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를 읽지 않았느냐”(마 22:29, 31). 우리는 예수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구약성경을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하나님을 바라보셨다.육신의 부활미래에 일어날 육신의 부활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다루는 본문은 다니엘 12장 2절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이 본문의 가르침에 동의한다(요 5:29; 행 24:15).부활 소망에 대해 말한 선지자는 다니엘 뿐만이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육체적 부활에 대하여 예언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기뻐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이사야 선지자는 ‘죽은 사람들은 티끌에 누워 잠자는 사람들이요, 부활은 그들을 깨울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땅이 생명을 낳는다는 표현으로 부활을 묘사한다. 무덤은 자궁이요, 죽은 자는 언젠가 새롭게 된 육신의 생명을 입고 나타날 것임을 드러낸다.미래에 있을 육신의 부활은 말로 선언할 ‘진리’일 뿐 아니라 노래할 ‘소망’이기도 하다. 시편의 저자는 지혜 있는 자와 무지한 자가 모두 죽을 것이지만(시 49:10),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시 49:10)라고 노래한다.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는 일은 곧 전인을 죽음에서 데려오는 일이다(시 16:10; 행 2:24-29). 나아가 저자에게 시편 71편의 부활은 위로이다. 저자는 과거에 겪은 고난과 미래에 있을 구원을 생각하며 선언한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시 71:20). 하나님은 우리를 땅에서 일으키심으로써 다시 살리실 것이다.이러한 진술들에 담긴 부활 소망은 마치 정원 토양에 심긴 씨앗에서 자라는 꽃과 같다. 실제로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고려해 보면, 부활 소망은 낯선 개념이 아니다. 창세기 2장에는 육체가 없던 아담과 하와가 주님에게 몸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성경은 하나님이 흙으로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7, 21-22). 그렇게 지어진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반역한 아담이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와와 함께 동산에서 내쫓으셨다(창 3:22).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 나무는 아담이 갖지 못한 영생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동산에서 쫓겨남으로 인해 이 나무에 다가갈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를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 나무로 인도하기 위해 마지막 아담이 오셨다. 그분은 나무에 달려 죽으시고(갈 3:13), 3일만에 생명 나무의 열매를 드셨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돌아오실 그 때, 죽은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우리 역시 그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다른 종류의 부활들간혹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물리적 상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타락한 세상에 거하는 우리 삶의 면면을 통해 죽음을 묘사한다. 이 면면은 재난, 기근, 질병, 상실, 불임, 유배 등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종류의 죽음들에 대해서도 부활을 허락하신다. 먼저 ‘유배’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살아난 마른 뼈의 환상을 보았다(겔 37:7-10).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땅으로 돌아오는 사건을 상징했다(겔 37:12).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배는 일종의 죽음을 의미했고, 그들의 귀환은 부활을 상징한다.‘불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모두 각각 불임인 아내를 두었다. 자녀가 없던 라헬은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 30:1)라고 호소했다. 이는 불임이 혈통(가문)의 죽음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임의 반대는 무엇인가? 죽음이 생명의 역사로 뒤바뀌는 일이다(롬 4:19). 따라서 하나님께서 족장들의 아내들이 겪은 불임을 해결하실 때마다 죽은 자궁과 혈통에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죽기 전에 구원하심으로써 생명부터 죽음까지 다스리는 그분의 능력을 보이셨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은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기 위해 묶고, 이제 곧 칼날이 그의 몸을 관통하기 직전이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순간 이삭을 대신할 정결한 제물을 주심으로써 그의 죽음을 막으셨다(창 22:4-13). 실제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삭이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히 11:19).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이 틀을 바탕으로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부활 신앙을 그려낸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홍수에서, 요셉은 구덩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서,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유대인들은 하만의 계략에서, 요나는 거대한 물고기에서 구원을 받았다. 이처럼 재난으로부터 구원받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은 죽음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보여 준다.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다구약성경에 부활에 대한 전제와 이해가 없었다고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이 약속을 성취하지 않으셨다고 오해하며 눈을 감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족장과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창 12:7; 13:15),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히 11:13).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약속의 말씀을 지키실 것인가? 바로 부활을 통하여 그들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지키실 수 있다. 부활하게 될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을 받을 것이다(롬 4:13). 그러므로 죽음은 하나님을 약속 불이행자로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란 사실을 부활이 증명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모든 크리스천은 부활 소망의 불변성을 신뢰하고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내세에 대한 약속들은 절대 흔들리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셨지만 아직 성취되지 않은 소망이 남아 있다. 우리의 내면은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는 반면, 우리의 외면은 날마다 늙고 낡아진다(고후 4:16). 그러나 부활을 맞이하는 그날, 썩을 육신은 마침내 썩지 않을 몸을 입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다(고후 4:16). 우리는 예수님이 죽음의 무덤을 탈출하셨으므로, 미래의 우리 역시 죽음이 아닌 영생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es the Old Testament Teach Resurrection Hope?번역: 하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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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신이 꿈꾸던 대로 교회가 개척되지 않을 때
by Noel Heikkinen
2018-11-28
교회 개척은 당신의 영혼을 무척 힘들게 할 수 있다. 물론 지구상에는 물리적으로 더 위험한 직업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순전히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교회 개척’의 위험성을 능가하는 직업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다른 손쉬운 일들을 그만두고 교회 개척으로 뛰어들고자 한다면, 먼저 무슨 상황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교회를 개척한다.1. 신앙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기 위해2. 자신이 사는 동네, 도시, 그리고 이웃이 활력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보기 위해3. 자신의 교회로부터 새로운 교회가 계속해서 세워져 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이러한 목표들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가슴을 설레게 한다. 반면, 이를 성취하는 일은 특히 이제 출발한 교회로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진행된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기에 나는 최근 한 교회 개척자가 보낸 짧은 이메일의 내용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척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여기서 나를 구해주기를 원합니다.”좀처럼 잊을 수 없는 이 문장을 통해 교회 개척이라는 사역이 열정적이고 경건한 사람에게도 무척 고되며 일상적인 지루함마저 안겨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전의 수많은 교회개척자들이 그러하였듯이, 그는 새로운 교회를 향해 전력 질주했지만 정작 지속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복음 사역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힘들게 배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 교회에 오도록 초청받은 사람들조차 의심의 눈초리로 목회자를 바라보게 된다.이처럼 교회 개척자가 어렵고 느리게만 진행되는 상황에 맞닥뜨릴 때, 그 마음에 숨겨진 우상들이 쉽게 드러날 수 있다. 심지어 거룩한 야망을 통해서도 숨은 우상들이 드러날 수 있다.변함없는 구세주당신이 지친 사람들을 향해 매주 설교하는 바로 그 복음은 성도들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은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하나만 상기해 보자. “예수님은 당신이 실망하는 그 순간에도 당신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신다.”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실망시키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곧 세상을 떠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 없이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버거운 현실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족을 잃게 되고 회당에서도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더욱이,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해 주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슬퍼하셨다. 이는 낯설고도 무서운 현실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우리는 예수님이 여기서 자신의 죽음, 장사, 부활, 승천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음을 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이 약속은 사도들이 개척한 그 시대의 교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2천 년의 시간이 지나 오늘의 우리가 개척하는 교회에도 동일하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힘들 것이다, 그리고 슬픔이 따라올 것이다슬픔은 이 세상의 구조에 얽혀 있으며, 교회 개척도 여기에 속한다. 교회 개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계획들은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은 당신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 줄 것이다. 당신의 교회는 본인이 생각했던 모습이 아닐 수 있고, 아마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더욱 의미 있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예수님의 말씀대로 당신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할 것이며,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는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진실이다. 그 기쁨은 누군가가 빼앗아 갈 수 없는 참되고 지속적인 경험일 것이다.그러나 교회 개척의 과정에는 기쁨과 동시에 슬픔을 느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기뻐함과 동시에 목회에 필요한 어려운 결정도 내려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만약 당신이 현재 처한 상황 안에서 영적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면, 당신의 삶은 끝없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수 있다.확실한 희망예수님은 이 모든 일이 우리의 현실임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 특히 그분 자신을 세상에 알리려는 우리의 노력들이 환난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임을 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난 중에서도 평화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평화가 있다. 평화는 교회 개척이 가져올 폭풍 속을 뚫고 지나간다.교회 개척의 목표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분명 환난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낙심하지 말라.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교회를 개척한다. 우리는 환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에 거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를 얻게 되기를 소망한다.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잘 지켜야 한다. 교회 개척은 복된 일이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잘못된 경우에는, 교회 개척을 통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이 세워질 수도 있다.교회 개척이 당신에게 예수님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기 시작한다면, 일상은 곧 서서히 진행되는 죽음이 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당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면, 예배당의 빈 의자들은 점점 당신의 영혼에 상처가 되고 마음 속에서는 쓴 뿌리가 자랄 것이다.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지금도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절대 홀로 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분명 당신의 교회 개척에도 그분이 함께 하실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Your Church Isn’t What You Dreamed번역: 주영식
교회
교회개척
영혼
신앙
구세주
확실한희망
그리스도
하나님
기쁨
목표
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려가야 하는 세 가지 이유
by Ric Rodeheaver
2018-11-28
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려가야 할까? 아마 전이라면 아니라고 답변했을 것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긍정적인 경험을 제공해야 하고, 어두운 현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장례식은 분명 어두운 현실이다.자녀들을 보호하려는 이와 같은 마음은 일반적이기도 하고 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성경 속 지혜는 우리의 관습적인 생각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려가야 하는 세 가지 긍정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자.1. 장례식은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녀들에게 알려 준다우리 자녀들은 삶 속에서 죽음을 경험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아이들은 죽음을 비현실적인 단면으로 경험한다. 예를 들면, 컴퓨터 게임에서 죽음이 멋지게 포장되거나, 혹은 영화에서 수많은 죽음이 아무렇지 연출됨으로써 아이들은 죽음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진다. 다시 말해, 우리 자녀들이 대중 문화를 통해 죽음을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 죽음이라는 개념은 그들에게 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또한, 사회적으로도 점점 더 죽음이 주는 슬픔을 지우는 문화가 발달함으로써 아이들은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예만 보아도 그 미세한 변화가 감지된다. ‘무덤’이라는 말이 ‘묘지’가 되었고, 이제는 ‘추모공원’이라는 장소도 생겼다. ‘장례식’은 ‘추도식’이 되었고, ‘생애 축하행사’라는 용어가 생겼다. 과거에는 묘지가 보통 교회 뜰에 있었기 때문에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은 죽음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현실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수많은 묘지들은 이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더 깊이 숨어 들어가고, 그중 대부분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가 갈수록 젊음, 건강, 활력, 그리고 죽음과 노화를 방지하는 음식 등에 집착하는 현상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자녀들은 죽음이 세상에 실재하는 악이라는 사실을 잘 배우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장례식은 자녀들에게 생명의 유한함과 그 무게를 충분히 깨닫도록 돕는다.2. 장례식은 슬픔이 무엇인지를 자녀들에게 보여 준다우리는 자녀들과 재미있게 노는 법을 알고 있다. 그에 반해, 그들과 함께 우는 법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녀들을 삶의 기쁨에만 노출시키고, 시련은 철저히 피하도록 양육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죄의 결과로 신음하는 이 세상에서 그들을 제대로 준비시키고 있는 것일까(롬 8:28)? 죽음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슬픈 감정을 회피하거나 절제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감정적으로 무너져 내리거나 슬픔을 전혀 주체하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삶 속에서 슬픔이나 절망의 감정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인생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훈련의 기회를 잃는 것이다.자녀들은 상실을 느낄 필요가 있고, 솔직하게 그 감정을 겪어 나가야 한다. 또한, 우리가 슬픔에 빠져 있는 모습도 볼 필요가 있고, 어둠의 순간에도 부모가 하나님께 기대는 자세 역시 눈으로 봄으로써 배워야 한다. 상실을 함께 겪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 그리고 ‘고통’의 문제에 대해 자녀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일은 그들의 신앙을 강화시킨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세 가지 주제가 늘 등장하는 이 세상에서 자녀들을 미리 준비시킬 수 있는 적절한 훈련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장례식은 죽음을 대면할 때 슬퍼하는 방법과 그리스도의 빛에 소망을 두는 방법을 알도록 돕는다(요 11:25).3. 장례식은 자녀들이 어둠 속에서 복음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밝게 빛난다. 장례식보다 삶에 대해 더 명백한 깨달음을 주는 경우는 없다. 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리고 갔을 때, 나는 그들에게 복음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장소에 참석함으로써 아이들 스스로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은혜와 소망의 결심을 볼 수 있었던 반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는 엄청난 슬픔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소망의 목소리와 더불어 절망의 흐느낌도 한자리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그들은 어렸기에 이러한 차이점을 정확하게 분별해 낼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과 눈빛은 그들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미 차이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이 복음의 씨앗을 싹트게 하는 대화의 옥토를 만든다. 삶과 죽음, 영원, 그리고 예수님과 그가 주시는 구원이 왜 중요한지를 나눌 수 있는 대화 말이다. 장례식이 다른 경험과 차별되는 이유는 바로 이처럼 자녀들이 복음의 능력과 필요를 이해하도록 돕기 때문이다.장례식은 참석하기 쉬운 행사가 아니다. 장례식은 감정을 뒤흔들고 비극적인 죄의 결과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지혜와 소망이 자라도록 하기 위해 바로 그와 같은 경험을 사용하실 수 있다(전 7:1-4).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들이 삶의 어두운 면을 보며 살아가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 속에 거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악 된 이 세상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로써 진정한 소망 안에서 담대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기회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장례식이더라도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Reasons to Take Your Children to Funerals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장례식
삶의일부
죽음
영원
예수님
구원
슬픔
복음서 간의 불일치는 성경의 무오성을 약화시키는가?
by Robert Plummer
2018-11-27
우리는 성경이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원하신 대로 정확하게 기록되었을까?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히브리서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저자는 시편 95편을 언급하며, 두 명의 저자를 그 시편에 적용한다. 처음에는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히 3:7)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다윗의 글에”(히 4:7)라며 동일한 시편에 대해 두 저자를 언급한다. 이는 성경의 오류일까? 아니다. 히브리서는 이중 저작, 즉 성경의 공동 저작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둘 다 옳다.하나님은 완벽하게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거짓을 전하실 수 없다. 성경이 확언하는 모든 내용은 완전하게 진실이다. 크리스천은 이 진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네 개의 복음서를 나란히 펼쳐 놓고 보았을 때, 표면상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을 세심하게 읽는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도대체 왜 이렇지? 어떤 문제가 생긴 걸까?”복음서들이 불일치하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서로 다른 목격자에 의해 같은 사건이 역사적으로 재진술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증인의 서술은 요약, 부분적 보고, 대안적 표현(paraphrasing), 자료의 연대기적 재배열 등을 거치게 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 정확히 이런 식의 증언을 발견할 수 있다.복음서들이 모순을 포함하는가?1세기 인물인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Papias of Hierapolis)는 복음서의 기원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그는 마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가복음을 기록했다고 상술한다. 파피아스에 의하면, 마가는 초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후에 베드로의 설교 전체를 기록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상황적 이유로 인해 그는 기록에 있어서 연대기적 순서를 반영하지 않았다. 최초의 독자들은 복음서가 연대기적 순서로 기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 역시, 성경을 읽을 때 연대기적 순서의 뒤바뀜이 있다는 특징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그러므로 현대의 독자들이 복음서를 엄격하게 연대기적인 기록으로 간주한다면, 복음서의 기록을 ‘실수’로 인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독자들은 저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것을 복음서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시험 이야기를 비교해 보자. 같은 시험이 두 복음서에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마지막 시험은 사탄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세상 왕국을 주겠다고 하는 내용이다. 반면, 누가복음은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시험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각기 다른 순서로 시험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강조점을 달리 하는 것이다. 마태는 산을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한다. 그래서 5-7장에 걸쳐서는 산상설교를 상세히 설명할 뿐 아니라, 마지막 장에서는 산꼭대기에서 예수님이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여준다(마 28:16-20). 이런 측면에서 사탄의 마지막 시험도 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된다.반면, 누가는 예수님 안에서 새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관점을 강조했기에 성전 모티프에 관심이 깊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성전 시험을 마지막에 배치했다.이렇듯 마태와 누가는 단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복음서도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 연대기적 특수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독자들은 과거 성경의 저자들이 연대기적 서술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진리가 반드시 정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얼마 전, 약국 주차장에 세워 둔 아내의 미니밴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다행히 내가 나의 경차를 가져다 주어 아내와 세 아이들은 집으로 갈 수 있었고, 그 사이 나는 미니밴을 지키며 수리공을 기다렸다. 그 다음날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할 일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이메일을 보내기 위함이라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어제 제 아내의 미니밴이 주차장에서 고장났습니다.” 하지만 선약이 있던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제 차가 어제 고장이 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이웃에게는 또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다. “아내는 어제 본인의 차가 고장나서 제 경차를 운전했습니다.”수백 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이 위와 같이 그 묘사가 조금씩 다른 세 가지 경우의 설명을 듣게 된다면, 아마 내가 거짓말을 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의 아내에게는 미니밴이 있는가, 아니면 경차가 있는가? 무슨 차가 그녀의 차이며, 도대체 어떤 차가 고장난 것인가?” 구어체에서 ‘차’(car)는 한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운송수단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또한 기혼이라면, 남편의 소유는 아내의 소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내 이름이 그녀의 미니밴 호칭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미니밴은 내 차이지만, 아내가 항상 몰고 다닌다.당신이 고장난 차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상세히 조사한다면, 내가 부분적인 사실만 언급했거나 서로 다른 면을 강조해서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거짓은 아니다.이는 복음서의 상세한 내용들이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좋은 예가 된다.마태복음의 계보와 누가복음의 계보 사이의 차이를 주목해 보라.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은 예수님의 계보에서 서로 다른 이름들을 담고 있다. 특히, 요셉으로부터 시작해 그를 이어가는 세대들에서 그렇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 차이에 대해 상세히 논의했다.300년대 전반에 글을 쓴 유명한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설명하며,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의 견해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율리우스는 16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이스라엘을 방문해 예수님의 이복 형제자매의 육체적 후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초기 사람들의 증언을 인용했다. 아프리카누스에 따르면, 계보상 불일치는 ‘계대 혼인’(곧 죽은 자의 형이나 아우가 그 형제를 대신해서 미망인과 결혼하는 제도)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의 율법이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들은 과부가 된 여성을 위해 이 제도를 마련했다. 만약 남편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과부와 결혼할 수 있었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갔다. 이 제도는 법적인 계보와 생물학적인 계보를 둘다 만들어 냈다. 따라서, 율리우스는 법적 계보를 따르느냐,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르느냐에 따라 계보상에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더 자세히 보기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계보들은 두 가지를 설명한다. 첫째, 계보의 복잡성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반영한다. 따라서 면밀한 연구에서 표면상의 불일치가 관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 초기 크리스천들은 불일치처럼 보이는 부분들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의 신뢰성과 권위를 기준으로 삼아 그에 대해 가능한 해결책들을 제시했다.만약 당신이 성경에 회의적인 독자라면, 스스로 갖게 되는 질문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염려되는 부분을 놓고 기도하라. 성경 본문을 주의 깊게 연구하라. 그 본문의 출처에 대해 질문하라. 이렇게 솔직한 질문을 한 후 답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구하는 데 두려워하지 마라.기억하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사랑이 가득한 하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당신을 속이거나, 무언가를 숨기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당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이미 역사 속에서 완전한 삶을 사셨다. 더불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아들을 죽게 하시고 또 보내심으로써, 자신의 계시에 관한 확실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설명을 우리에게 주셨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 Inconsistencies in the Gospels Undermine Scripture’s Inerrancy번역: 이주일
복음
변증
복음서
성경의무오성
진리
정확성
시편95
다윗
베드로
선교사가 직면하는 공통의 문제
by Mark Pfuetze
2018-11-27
기독교 상담가이자 신학교 교수로서 나는 오랜 기간 수많은 선교사와 협력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선교사들마다 그들 각각의 독특한 경험들이 있지만, 나는 그들이 당면하는 문제에는 공통점이 있음을 확인했다. 바람이 있다면, 그들이 직면하는 문제를 교회와 선교사가 함께 다루는 것이다.여기에 선교사가 공통적으로 직면하는 문제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보았다.1. 대인 관계의 갈등선교사는 종종 팀원과의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갈등은 쉽게 커지고, 선교 사역을 늦추거나, 심지어 팀 전체를 해체시킬 수도 있다.선교에서 갈등을 다루는 일은 필수적인 사역에 속한다. 일부 선교 단체는 이를 잘 수행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분쟁을 효과적으로 중재하거나 이 과정을 위한 훈련 및 체계가 부재하다. 이를테면, 개인 상담을 통해 갈등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돕는 안전 시스템을 찾기 힘들다. 선교사가 배치되기 전, 상담과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통해 자기 인식과 정서적 근육을 향상시키는 데에 도움을 줌으로써, 갈등이 닥쳤을 때 보다 유연하게 처리하도록 준비시켜 주기 때문이다.2. 정서적으로 폭력적인 리더들감정적으로나 영적으로 폭력적인 리더는 선교팀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한 리더가 의도하는 바는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자주 팀 안에서 혼란과 의심을 악화시킨다. 특히 선교팀이 가정이나 후원 조직과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선교사는 강압적인 지도자를 상대할 방법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의 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이런 현상에 반드시 당황할 필요는 없다.어떤 이들은 내가 과장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교회와 선교 단체 모두에서 이런 유형의 문제를 자주 보았다. 목회자가 곁길로 가거나, 동역자 대신 목표에만 집중할 때 이러한 현상이 종종 나타난다. 그는 죄의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길이 하나님의 길이자 옳은 길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리더는 지배하고 통제하는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데 필수적인 것처럼 합리화한다. 교회와 선교 단체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이런 파괴적인 패턴을 잘 이해하고 대응해야 한다. 교회는 죄악된 행동을 사랑으로 대면하고, 동시에 그 피해자들을 보호하도록 부름 받았다.3. 과거의 트라우마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트라우마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상담 중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다가 선교 현장에서 쉽게 발현되는 경우도 있다. 선교 단체는 선교사가 임무를 위해 떠나기 전에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 상담을 받도록 도와야 한다. 공통적으로 너무 흔한 트라우마 중 하나는 바로 성적 학대다. 한 통계에 따르면 18세 이하에 해당하는 인구 중 여성의 3 분의 1과 남성의 4 분의 1이 성적 학대를 경험했으며, 이 수치는 음란한 문화에서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이런 통계가 사실이라면, 다수의 선교사들 역시 성적 학대의 경험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선교사는 이런 치명적인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늦어도 선교 현장에 가기 전에 그 심리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4. 수행 압박감선교사는 파송 단체에게 자신의 정신적 혹은 정서적 상태에 관해 말하기를 두려워할 수 있다. 선교사는 종종 ‘최고의 크리스천’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에 대해 정직하면 안 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거나 재정 지원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다. 교회 또한 외적인 성과에만 치중하여, 선교사가 자유롭게 본인의 인간적인 모습이나 상한 내면의 문제들을 나눌 수 없도록 제한적이고 일방적인 문화를 형성하기도 한다.나는 선교사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선교사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완벽하지 않으며, 그에게도 거룩하게 성장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시점에서는 전문 상담가를 찾아야 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나는 선교사가 개인적인 문제를 털어놓고 지속적인 상담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선교 단체들이 그 인식을 점차 높여가는 중이라고 본다. 어떻게 하면 교회는 선교사가 부정적인 반응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문제를 상담할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연구하고 해결 방안을 만들어 가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5. 기독교적 상담에 대한 접근성 부족 많은 선교사가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기독교 상담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 몇몇 선교 단체는 전문적인 상담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제한적이어서, (1) 단기간의 집중 상담을 위해 상담가가 특정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거나, (2) 선교사가 상담가를 만나기 위해 선교지를 떠나야 한다. 선교지에서 상담가와 주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이러한 요구로 인해 국제 상담 네트워크(Global Counseling Network) 및 갓스피드 리소스(Godspeed Resources)와 같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제3자 상담 기관도 생겨났다. 이러한 단체들은 자격을 갖춘 기독교 상담가가 매주 선교사와 얼굴을 마주 보며 상담을 진행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다. 이런 시스템은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는 동안 자신의 문제를 꾸준히 털어놓고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다. 선교사의 상담을 위해 넉넉한 재정을 유지하는 선교 단체나 교회는 많지 않다. 하지만, 상담 프로그램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단체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여야 한다. 각 선교사가 경건하고 비밀스러운 환경에서 충분한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교회와 선교 단체가 총체적으로, 즉 경제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선교사를 후원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Challenges Missionaries Face—and How Your Church Can Help번역: 고갑균
선교지침
갈등
분쟁
폭력적리더
트라우마
압박감
기독교상담
대인관계
선교사
문제
분노 죽이기
by John Piper
2018-11-27
결혼생활에서, 분노는 영혼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정욕과 라이벌 관계에 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분노가 정욕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분노는 다른 여러 종류의 동지애까지도 파괴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분노를 품고 있다. 분노가 위장술에 능하기 때문이다. 의지력으로 격분을 억누를 때, 분노는 표면 아래에서 들끓는다. 또 영혼의 치아는 좌절로 부득부득 갈린다. 분노는 마치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는 눈물로도 표출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눈물은 마음의 상처를 더해 줄 뿐이다. 우리가 싸우지 않기로 결심할 때, 분노는 침묵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분노는 까다로운 비판과 가차 없는 비난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분노는 분노하는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종종 분노는 잘못된 원인에 근거하여 정당화되기도 하는데, 그에 대한 예를 성경에서 잘못 찾기도 한다. 가령 예수님도 분노하셨다든가(막 3:5), 바울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라고 말했다며(엡 4:26) 분노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이 선한 분노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라고 말한다(약 1:19-20). 그리고 바울은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또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라고 말한다(엡 4:31). 그러므로 인생의 가장 큰 전투 가운데 하나는 단지 분노의 표현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인 ‘분노를 없애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아래에 제시하는 아홉 가지 성경적인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 첫째, 분노할 수 있는 마땅한 권한을 지니신 그리스도가 오래 참음의 본보기로서 십자가를 어떻게 참으셨는지 생각해 보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둘째, 당신이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았는지, 얼마나 많은 긍휼을 입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셋째, 자신의 죄악을 생각하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넷째, 과연 자신이 마귀에게 자리를 내어 주기를 얼마나 원치 않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 성경은 마음속의 분노가 마귀에게 문을 열어 주고 들어오라고 초청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다섯째, 자기 학대의 어리석음을 생각해 보라. 분노하는 사람에게 그 분노가 미치는 수많은 해로운 영향들을 생각해 보라. 영적인 영향, 정서적인 영향, 신체적인 영향, 그리고 관계적인 영향까지도 분노에 영향을 받는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잠 3:7-8). 여섯째, 자신이 분노한 죄를 믿음직한 친구에게, 또한 가능하다면 당신을 분노하게 만든 사람에게 고백하라. 이것은 크나큰 치유 행위이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일곱째, 당신의 분노를 마음속 교만과 자기 연민의 차단제로 사용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사랑으로 대체하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여덟째, 하나님이 베풀어 주실 은혜를 신뢰할 때 그분이 모든 것으로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반응한다면, 그 사람까지도 당신의 선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아홉째, 하나님이 당신의 정의를 옹호하고, 모든 일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해결하실 것임을 기억하라. 당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이 지옥에서 대가를 치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 이미 대가를 치르셨다. 당신이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중에 보복하실 것을 고려하면) 그 사람의 죄에 대해 두 번 처벌하는 셈이거나, 십자가에 대한 위반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출처: www.ligonier.org원제: Killing Anger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복음
감정
분노
그리스도
본보기
용서
긍휼
들보
마귀
자기학대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상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by Michael Kruger
2018-11-26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여러 측면들을 이상하거나 불쾌하게 바라보는 문화에서 살아간다면 기분이 어떨까? 단절감이나 좌절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운이 빠질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처럼 고립되거나 홀로 있다고 느끼는 크리스천이라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현재 당신이 겪고 있는 상황은 과거부터 존재해 온 것이다. 처음부터 크리스천은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존재였다.특히 2세기 기독교의 네 가지 특징인 예배, 교리, 행위, 저술은 로마인들에게 비록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꽤 독특하게 여겨졌다. 이 네 가지 특징은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배척하는 자들로부터 눈총을 받는다.1. 기독교 예배초대교회 예배의 근본적인 성격은 ‘배타성’(exclusivity)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예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었다. 다른 어떤 종교적 대상도 기독교 예배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성도들은 오직 왕이신 예수님께만 전적으로 헌신하는 예배를 드렸다.로마인들은 국교 이외의 사적인 종교 의식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당시의 로마 정부는 종교를 전혀 개인의 영역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제국의 성공과 번영을 지켜 주었던 로마의 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은 그 당시의 시민으로서 중요한 의무였다. 신들에게 경배하지 않는 일은 사회적으로 무례한 행위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신들을 불쾌하게 만들어 국가를 위기에 빠트릴 위험까지 있다고 판단되었다.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여러 신을 섬기는 당시 로마의 종교 의식을 거부하게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동료들의 안녕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s)에 따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간을 증오하는 자들’이라고 불렸다. 그 결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주 심각한 박해로 고통을 받았다.2. 기독교 교리정치적 박해 외에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상당한 ‘지성적 박해’(intellectual persecution)를 받았다. (특히 성육신 개념과 같은) 기독교 교리는 우습고 어리석은 사상으로 취급받았으며, 로마의 지식인들에게는 논할 가치가 없는 내용으로 간주되었다.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예배하는 행위는 로마인들의 눈에 극도로 심각한 정신 이상적인 행동이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수치와 거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왜 굳이 그런 모욕적인 고통에 처한 사람을 따라야 하는가?따라서, 루키아노스, 갈레노스, 프론토, 켈수스와 같은 사람들은 이 ‘새로운’ 종교를 향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비단 십자가에 달렸던 자만이 아니라, 그 가르침까지도 조롱했다.3. 기독교 행위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의 내용만이 아니라 ‘행동하는 방식’(how they behaved) 때문에도 로마인들에게 배타적으로 여겨졌다. 특히 그들의 독특한 성 윤리는 당시 문화 속에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로마인에게는 성적 파트너를 여러 명 취하고 신전 창녀들과 관계를 맺는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관습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예를 들어, 터툴리안은 당시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관대하며 자신의 소유를 서로 나누는지를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의 합법성을 변호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온 마음으로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이 땅의 재산을 서로 나눕니다.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지만, 아내만은 아닙니다.”그만큼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사람들이 배우자를 공유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이상한 관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적 순결에 헌신한 다른 예들은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Epistle to Diognetus), ‘아리스티데스의 변증’(Apology of Aristides), ‘미누키우스 펠릭스의 변증’(Apology of Minucius Felix)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4. 기독교 저술초대교회 성도들은 성경이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지위 때문에 로마인들에게 특이한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에는 성경 중심적 종교가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2세기에는 이러한 특징이 기독교를 유별난 종교로 보이게 만들었다. 고대의 종교들은 일반적으로 글로 기록된 문헌과 그렇게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따라서 기독교는 로마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기독교가 정확히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분명히 로마인들의 눈에 그 종교는 낯설어 보였다. 실제로 ‘책을 좋아하는’ 특성 때문에 기독교는 철학에 가까워 보였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다른 학파처럼 학문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했다.고유성을 신실하게 지키라이처럼 배타적 예배, 논쟁적 교리, 도덕적 행동, 그리고 책에 대한 집중은 처음부터 기독교를 이상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이 요소들은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핵심적으로 보여준다.우리는 2세기 성도들의 모습을 보며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약하고, 어리고, 박해 받던 교회가 살아 남았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제국 전체로, 더 나아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이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기독교의 고유성을 지키는 데 신실했다.만약 오늘날 우리도 그 이질적인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신실하다면, 초대교회가 이룬 것과 동일한 소망을 품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Early Christians Were Odd, Too번역: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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