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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 매일 ‘하나님 대화’를 나누라
by Julie Melilli
2018-11-15
탁자 위에는 지저분한 낙서들과 찢겨진 노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부러진 연필, 지우개가루와 다 마신 음료수 병들이 한껏 구겨진 과자봉지와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들리는 낮은 신음소리가 내게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이곳은 범죄 현장인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곳은 내가 사랑하는 고등학생 아들의 방이었다. 아들은 기하학 숙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팔로 머리를 감싼 아들이 주저 앉아 외치고 있었다. “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나와 눈이 마주친 아들은 자신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하려 했는지 보여 주며, 자기가 선택한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분명히 아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움이 필요했다. 안타깝게도 아들은 답을 찾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도착해 있었다.나는 맛있게 요리하고, 울창한 정원을 가꾸고, 떨어진 셔츠단추를 달거나 바짓단을 줄이는 일은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기하학 숙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은 내게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기하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자녀가 기하학 숙제와 같이 답하기 어려운 성경 질문이나 신학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나는 그때를 준비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고자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강조하자면, 당신이 모르는 문제에는 답을 줄 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기란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이 부모로서의 소명을 깨닫고, 신앙 교육에 도전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언제, 어느 순간, 자녀가 성경에 관한 질문을 할지 모른다. 그리스도인 부모에게는 그에 대답할 준비가 항상 필요하다. 매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공부해야 한다. 어려운 신학 문제를 이해하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딤후 2:15), 소망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벧전 3:15), 주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약 1:5).그리스도인 부모에게는 자녀를 그리스도의 제자(마 28:19)가 되도록 가르칠 의무가 있다. 그렇다고 신학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 얼마나 감사한가! 복음의 기초,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하셨던 모든 일과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자녀에게 당신이 경험한 복음에 대해 알려 주기를 바란다. 당신이 성경과 신학을 완벽히 이해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지 말라. 말씀을 완벽히 이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약하고 흠이 있는 말(입술)을 사용하실 것임을 신뢰하라. 그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이 아닌 하나님께 달린 일임을 기억하라. 당신은 그저 자녀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일을 하면 된다. 그 씨앗을 자라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3:7). 당신에게 주어진 양육의 소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이 모든 임무를 위해 당신은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고, 신앙 서적을 읽고, 팟캐스트의 성경 강의를 듣고, 성경 공부에 참석하고, 영적 멘토를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행하신 일을 깊이 이해할 때, 복음을 나누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될 것이다.일상에서 자녀와 함께하는 ‘하나님에 관한 대화’일단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성경 말씀을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7-9)이제부터 ‘하나님 대화‘(God Talk)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대화는 내가 일상에서 자녀들과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즉, 모든 이야기를 하나님에 관한 대화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줄 때, 그날의 날씨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은 정말 춥구나. 나는 주님이 만들어 주신 날씨를 기뻐하고 감사해.” 또 당신의 기도 제목을 아이들에게 나누고,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고 계신지 아이들과 함께 점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의 불평거리를 찬양과 감사로 바꿔 준다. “오늘도 학교에 갈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도 주무시지 않고 지키시는 하나님께 아이들과 함께 기도한다. “하나님, 이 밤도 평안한 쉼이 있도록 돌봐 주세요.”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일상 대화를 하나님에 관한 대화로 이끄는 것이 좋다. 짐작했겠지만, 하나님에 관한 대화는 예수님을 만나 삶이 바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에 관한 대화를 더 많이 할수록 당신은 자녀와 가까워질 것이다. 당신의 자녀는 이 대화를 통해 삶의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이제 당신은 자녀와 복음에 대해, 신앙에 대해 나눌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하나님을 삶의 주권자로 인정했으며 최고의 스승으로 삼았으니, 담대할 필요가 있다. 자녀가 “죄가 뭐죠?”라고 묻기를 기다리지 말라. 당신이 먼저 죄에 대해 가르치라. 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친구나 동생과 다툴 때, 죄가 무엇인지 설명하라. 죄의 결과와 회개의 방법, 용서에 대해 말해 줘라. 일상생활 속 예화와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상황이 복잡하게 꼬여 있다면, 잘 정리하여 당신과 자녀가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 바란다. 이해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복습해 보는 것도 좋다.하나님에 관한 대화가 힘들 때때때로 자녀는 하나님에 대해 당신이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때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말고, 당신도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음을 자녀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자녀 앞에서 인정하는 일은 큰 도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도전으로 인해 낙담할 필요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대화하지 않는 것보다는 답을 모르는 편이 더 낫다.마지막으로, 자녀와 이런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부모에게 권면하고 싶다. 분명 당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용기를 내어 이 대화에 도전한다면, 당신의 자녀는 신앙 성장의 특별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물론, 십대 자녀는 처음에는 ‘하나님에 관한 대화’의 시도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 일련의 과정이 당신 마음을 괴롭힐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로 인하여 자녀와의 대화가 가능할 수 있음을 의심하지 말라.자녀에게 열린 마음과 들을 귀를 허락하셔서 말씀을 깊이 깨닫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라. 비록 자녀가 당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하는 동안 딴짓을 하더라도, 분명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이야기의 서두에 등장한 기하학 숙제의 결말이 궁금하지 않은가? 결국 아들은 기계 공학을 전공한 이웃에게서 도움을 얻었고, 덕분에 꽤 좋은 성적을 받았다. 이 결말은 그 이웃이 기하학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당신이 신학에 대해 ‘기계 공학을 전공한 사람’ 만큼의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 다만, 자녀의 바른 신앙 교육을 위해서라면, 전공자 만큼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자녀의 기하학 숙제는 학원이나 타인의 손에 맡길 수 있다. 하지만 자녀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을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주일학교 선생님이나 담당 교역자가 아이들의 신앙 교육을 위한 필수 구성원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자녀를 위한 첫 번째 신앙 선생님은 바로 ‘당신’이다.부모에게 자녀의 신앙 교육은 가장 큰 소명이고, 특권이며,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부모의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 힘쓰는 우리 모두에게 능히 감당할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한다.원제: Make ‘God Talk’ an Everyday Part of Family Lif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고갑균
가정
양육
그리스도제자
자녀의신앙교육
부모의특권
하나님에관한대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신다
by John Piper
2018-11-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위의 두 본문을 통하여 나는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만, "혹 회개함을 주사"라고 기록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원하는 바를 모두 행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바람 중 일부는 다른 조건들로 인해 실행하지 않으신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지혜는 그분의 영광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방향으로만 발휘된다. 하나님이 모든 죄인에게 회개의 은혜를 주시지 않고, 일부 죄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는 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둘째, 진리를 알게 하심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본문은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선물이 없다면, 우리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도 이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구원을 받으며 [그럼으로써]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구원에 닿을 기회를 얻게 되며, 이는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도록 이끈다.셋째, 여기서 본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진리’란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자연인도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진리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진리를 아는 것(지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이에 대해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 자연인이 볼 수 없는 진리란 무엇일까? 자연인은 복음 안에 있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넷째,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보는 눈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한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 눈이 멀어 있다. 사탄은 우리를 계속 눈이 먼 상태에 머물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복음의 진리를 보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주시면’ 우리의 눈이 열린다. 다섯째, 우리는 비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전도해야 한다. 이때 우리의 기도 혹은 전도는 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희망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다시 말해,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는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영적인 죽음과 사탄의 꾀를 극복할 능력을 가지셨다. 우리는 이 진리 위에 기도와 말씀의 증거를 붙들어 매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기를 신뢰하며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 사도의 가르침을 새기도록 하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 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Desires All to Be Saved and Grants Repentance to Some번역: 매일배움
신학
교리
하나님
모든사람
구원
회개
진리
사도
가르침
하나님의선물
11세기의 개혁자
by Burk Parsons
2018-11-15
전승에 따르면, 1066년에 노르만족이 영국을 정복한 후, 노르망디의 공작인 정복자 윌리엄이 영국의 왕좌를 차지했다. 그 결과로 영국의 황태자 에드가는 영국의 왕권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망명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적이 있는 헝가리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에드가는 누이 마가렛과 함께 영국을 떠나 대륙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올라탔다. 그러나 폭풍이 불어 배는 북쪽으로 밀려갔고, 스코틀랜드의 바위투성이 연안에 도착했다.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3세는 그곳에 도착한 영국 가족을 크게 환대했고, 시간이 지나 에드가의 누이 마가렛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에드가가 영국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계속 고투하는 동안, 마가렛은 남편과 스코틀랜드 백성을 위해 헌신했다. 스코틀랜드의 왕후 마가렛(1045-1093년)은 교회 역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1세기 스코틀랜드에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자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는 동안, 동방에서 교회가 분리되는 동안, 안셈이 마가렛의 고국인 영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마가렛은 남편인 스코틀랜드 왕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전설에 따르면, 왕후 마가렛은 한밤중에 왕궁을 조용히 빠져 나와 근처의 동굴에서 남편이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남편의 왕국에 대한 반역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의심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말콤이 기독교로 회심하고 변화되는 과정에서 마가렛은 다행히 혐의를 벗게 되었다. 말콤의 회심으로 그의 왕궁에 변화가 불어왔고, 궁극적으로 스코틀랜드 민족 전체의 변화가 이어졌다. 마가렛은 하나님이 크리스천의 성품과 거룩함, 그리고 예배의 본보기로 제시하신 경건한 여인이었다. 왕궁의 여인들과 스코틀랜드의 많은 여인들은 마가렛을 매우 존경하고 섬겼으며, 그녀를 겸손과 기도의 본보기로 삼았다. 마가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한 ‘말씀’의 여인이었다(마가렛이 읽었던 복음서는 오늘날까지 영국의 가장 위대한 보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으며, 옥스퍼드대학의 보들리 도서관에 전시되어 있다). 마가렛은 여덟 명의 자녀들을 낳고, 아홉 명의 고아들을 입양하여 양육했다. 또한 교회에 대한 대단한 열정으로 수없이 많은 교회의 건축과 사역에 사재로 후원했으며, 특히 무너져가는 교회들을 찾아 활력을 불어넣었다. 마가렛은 주일 예배와 안식일을 지켰으며, 이에 감동받은 왕과 왕궁은 결국 그 예를 따랐다. 덕분에 그들에게 일요일은 예배와 안식 및 섬김의 날인 주일이 되었다. 마가렛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였다. 그녀는 정의롭게 살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행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n 11th Century Reformer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역사
중세교회
11세기
개혁자
왕후
마가렛
목회자는 성도들을 좋아해야 한다
by Gavin Ortlund
2018-11-14
애정은 목회 사역의 일부이다.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빌 1:8)라고 하거나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8)라고 말한다.애정은 친절함이나 사랑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위 성경 구절에서 애정은 사모함(빌 1:8), 또는 극진히 생각함과 친애함(살전 2:8)을 의미한다.다시 말해, 목회를 잘하려면 성도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의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러나 목회의 중압감이 있거나 목회를 오랜 시간 하다 보면 애정이 식기 쉽다. 부부가 의지를 가지고 계속적인 노력을 해야 하듯이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목회자는 성도와의 관계에서 의지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애정(예를 들어, 사모함, 극진히 생각함, 친애함)을 쏟아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1. 성도들의 가족에게 관심을 보이라아버지로서, 내게 가장 의미 있는 일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내 자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누군가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는 길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가족에게 여러가지 방식으로 관심을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이름을 외울 수 있다(가능하다면, 메모지에 적어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있으라). 교회의 규모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가능한 선에서 교회 아이들에 관해 이야깃거리들을 메모하고, 그중 최소 한 가지는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는 것도 좋다. 그들을 격려하고 대학에서 영적으로 자라가는 길을 상담해 주어라.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시켜라.2. 성도들에게서 은혜의 증거를 찾아 축하하라목회자는 모든 문제들에 관심을 두기 쉽다. 목회자는 시간을 일부러 내서라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삶에서 행하신 선한 일을 찾아 나누고 축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음 속 복음을 따라 불평없이 긴 시간 교회의 일을 감당하는 청년이 있을 수 있다. 또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넘어지기 쉬운 죄를 잘 분별하여 삶의 본이 되는 오랜 교인이 있을 수 있다. 또 어쩌면 당신의 목회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새신자가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찮거나 사소한 일들이 아니다. 정말로 축하할 만한 일들이다. 이것들을 무시하지 말라. 그 무게를 온전히 느끼라.문제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성도들에게 애정을 느끼기 쉽지 않다. 훌륭하거나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관계에 도움이 된다.3. 성도들의 일터를 방문하라성도들은 일터에 방문하여 관심을 표하는 목회자에게 감사와 친밀함을 느낀다. 이것이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관계를 더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이 ‘그들의 세계’를 방문하고 나면 성도는 당신을 이전과는 다르게 본다. 또 일터 방문을 통해 해당 성도의 동료들까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4. “사랑합니다”라고 많이 말하라나의 할아버지는 설교를 하던 중 잠시 멈추고, 성전의 곳곳을 둘러보며 “사랑합니다”를 여러 번 말했다고 한다. 이는 그 자리에 있던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는 상황에 따라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물론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채 말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랑합니다”라고 크게 말하고 나서 성도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보라. 특히 이전에 불화와 갈등이 있던 사람이라면, 사랑한다는 표현이 서로 간의 신뢰와 선의를 다시 세우도록 도울 수 있다.나는 목회에서 내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고 싶다. 사랑이 가진 치유의 힘은 죄의 파괴력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5. 성도들을 위해 규칙적으로 기도하라규칙적인 기도는 기본이지만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기 쉬운 일 중 하나다. 이를 위해 일정표나 시스템을 갖는 것은 분명한 도움이 된다. 내가 실천하고 있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나는 매일 아침 QT를 하고 난 후, 성도 중의 한 명을 위해 기도한다. 물론 당신은 다른 시간과 방식으로 기도해도 좋다. 그러나 내가 실천하고 있는 이런 기본적인 방식을 통해 각각의 교인을 기억하며 기도를 실천할 수 있다. 또 한 해에 모든 성도를 위하여 적어도 한 번은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준다. 물론 교회의 크기와 성도의 수에 따라 여러 번 기도할 수도 있다.6. 성도들이 당신을 섬길 수 있게 하라슬프게도, 교회에는 목회자를 공격하려는 비판적인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회자를 진정으로 격려하기 원한다. 때때로 격려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거나 혹은 당신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다. 격려자들과 기도의 병사들은 보통 비판자나 반대자보다 눈에 띄지 않거나 목소리가 작다.많은 경우,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을 꺼리고, 적정한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한 목회를 위해서는 그들에게 주는 것뿐만 아니라 받는 법도 배워야 한다. 목회자는 성도를 돌보는 목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한 지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성도들에게 감정적 담을 쌓는다면, 그들을 향한 애정은 조금씩 식어갈 것이다.만약 성도들이 당신의 아이들을 돌봐 주겠다고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아라. 죄책감을 갖지 말라. 성도들이 당신을 위해 기도해 준다고 하면, (이것이 복잡한 일임을 알지만) 당신이 정말로 기도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부탁하라. 당신이 진정으로 휴가나 안식년이 필요하다면, 그것에 관해서도 정직하게 말하라. 부글거림을 안고 당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보다는 건강한 목회를 추구하기 위하여 해고당하는 편이 더 낫다.7. 하나님의 눈으로 성도들을 보라성도들은 목자의 양떼다. 하나님은 질투하며 사모하는 남편 같은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하신다.“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아 8:6).만약 성도들과의 관계에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하라. 당신 앞에 서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신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 주시기까지, 예수님은 그들을 생각하고 계신다. 지금도 예수님은 피로 값 주고 사신 자신의 귀한 백성들을 위해 중재하고 계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성도들의 가치를 드높이는 방식이다.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해 보혈을 흘리셨다면, 목회자인 우리는 그들에게 온 마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s Should Like People (Not Just Love Them)번역: 정은심
목회
리더십
애정
하나님의눈으로
목자의양떼
규칙적인기도
일터를방문
가족에게관심
사랑표현
칭찬하기
회개와 개혁
by R. C. Sproul Jr.
2018-11-14
개신교 종교개혁은 좋은 뜻으로 ‘그’ 종교개혁(the Reformation)으로 불린다. 마치 종종 일어나는 일에 1차, 2차를 붙이듯이 1차 종교개혁이나 2차 종교개혁과 같은 식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종교개혁을 언급할 때 “당신은 어떤 종교개혁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종교개혁은 경우에 따라 교회 역사에서 일어나는 갱신이나 부흥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개혁은 단 한 번 일어났다. 그만큼 종교개혁은 일으키기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또 하나의 종교개혁을 갈망하는 우리는 그 개혁을 출범시킨 불꽃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마틴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보름스 의회에서 연설할 때 시작되었는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그보다 이른 때인 루터가 성경을 연구할 때, 곧 칭의에 관한 핵심 본문을 주석했을 때 시작되었는가? 이 역시 맞는 답일지도 모른다. 또는 루터가 자신의 파문을 선언하는 교황의 칙서를 불길 속에 던져 넣기 전에 불보다 더 뜨거운 연설을 했을 때 시작되었는가?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일로 기념한다. 위에서 언급한 날 가운데 어느 한 날이 아니라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재한 날을 기념일로 삼는다. 95개조 반박문에 못을 박는 망치 소리가 종교개혁 출범을 알렸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종교개혁을 바란다면, 이 반박문의 첫 번째 목소리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첫 번째 반박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이는 신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의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다시 개혁을 성취할 것이라면,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여기 있는 우리의 교회가 변화될 때, 비로소 이 세상도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마음이 변화될 때, 여기 있는 우리의 교회도 변화하게 될 것이다. 변화는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에만 일어나기 때문이다.종교개혁의 큰 복 가운데 하나는 세상을 둘로 갈라놓는 관점을 파괴시킨 것이다. 로마 교회는 세상을 초월적 영역과 자연적 영역으로 갈라놓았다. 초월적 영역은 선하고, 자연적 영역은 기껏해야 중립적이었다. 종교개혁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 직분과 우리의 모든 삶이 ‘코람 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부각시켰다. 성경은 우리 선조들에게 영혼이 구원을 얻는 법만이 아니라 문화를 정당하게 다스리는 법, 노동을 이해하는 법, 경건한 자손을 양육하는 법 등에 관한 지혜의 원천이 되었다. 창조적인 영을 가진 필그림과 청교도는 광야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대양을 건넜다. 이후에는 아브라함 카이퍼, 프란시스 쉐퍼와 같은 믿음의 영웅들이 더 넓은 영역에서 개혁의 기치를 들어 올렸다. 우리는 이 모든 복에 대해 감사해야 함과 동시에 조심해야 한다. 경건주의의 위험—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우리 주변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관점—에 대한 반동으로,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경건의 복을 무시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개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바로 경건이라는 확고한 진리를 놓치고 말았다. 여기서 개혁을 이끄는 경건은 종교개혁의 경건임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경건은 단순히 춤을 안 추거나, 술을 안 마시거나, 수다를 떨지 않거나, 데이트를 하지 않는 등 외양에 몰두하는 태도가 아니다. 종교개혁의 경건은 참된 회개의 정신을 불어넣는 경건이다. 종교개혁의 경건은 낙타를 삼키고 하루살이를 걸러 내는 성향, 곧 우리가 자신의 죄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의 죄는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행동을 거부한다. 대신 우리는, 루터처럼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은혜로 덮어 주시기를 충분히 오랫동안 부르짖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은혜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결국 교회를 종교개혁으로 이끈 것은 믿음이었고,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또 다른 종교개혁으로 이끌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변화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만이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거룩해지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깨달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 분명 종교개혁의 믿음은 우리 자신의 구원에서 끝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온갖 문제를 향해 달려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종교개혁의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에서 거룩하게 되는 믿음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회개하는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때 하늘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예수님도 이와 똑같은 사실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런저런 일로 괴로워하거나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불신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키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회개와 믿음이 천국에 들어가는 참된 길이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소유하느냐의 문제다. 우리가 그 의를 소유하여, 다른 모든 것에 관해 끊임없이 걱정하거나 생각하는 일을 멈출 때, 비로소 길이 열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리라고 약속하셨다. 회개와 믿음의 삶,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전략’이 되어야 한다. 회개하고 믿으라. 그러면 개혁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루터도 그렇게 말했다.“우리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출처: www.ligonier.org원제: Repentance and Reformation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역사
종교개혁
회개
오직믿음
하나님의은혜
전략
부르심
경건
천국
태풍 속 우산보다 강한 피난처, 나의 하나님
by Christopher Catherwood
2018-11-14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19세기 영국인 판사였던 찰스 보웬(Charles Bowen)은 저명한 법조인이었다. 반면, 시인으로서는 그다지 명성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법적 판결이 현대의 영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듯이, 그가 남긴 짧은 시구는 여전히 선한 영향력으로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한다. 의로운 자들을 향한 비그리고 악한 자들에게도 내리는 그 비왜 정의로운 자들에게 더 가혹할 수밖에 없는가그 이유는 우산이 악한 자들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문학적으로 그다지 뛰어난 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지은 이 짧은 시구에 뛰어난 신학적 통찰이 담겨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TV를 떠들썩하게 했던 홍수나 태풍을 떠올려 보라.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그 엄청난 재난을 피할 수 있었을까? 무서운 장마가 크리스천의 집만 비껴갔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믿음과 상관없이 태풍의 영향권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집이 물에 잠기거나 목숨을 잃는 고통을 경험했다.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더 가혹한 고통을 겪는 일도 빈번하다. 특히, 크리스천들이 종교적 이유로 박해받는 땅에서는 그 고통의 정도와 빈도가 더 심하다. 이와 같은 지역에서 하나님을 믿는 일은 자신의 직업과 자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베드로는 박해에 대하여 ‘믿음을 향한 아름다움이니 고난으로 여기지 말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박해의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실로 감당하기 힘든 수많은 고통을 수반한다.한국이나 기독교 국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이러한 박해의 위험에 크게 노출되지 않은 채 살아간다. 하지만 실천적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일이 미래에도 지금처럼 평온한 일상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보았을 때, 찰스 보웬의 시에 담겨 있는 신앙적 고민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다.“하나님이 계시다면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종종 듣게 된다. 하지만 돈 카슨(Don Carson)은 그의 명저인 ‘얼마나 더 인내해야 하는가? 고통과 악에 대한 고찰’(How Long O Lord? Reflections on Suffering and Evil)에서 이러한 세속적 사고가 신학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모든 사람은 영적 죄인이다. 이미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모든 사람은 선하지 않다. 우리는 타락했으며 죄인이다.그리고 죄로 가득한 타락한 세상 속에 살아간다. 하나님의 백성(의인 혹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이나 동일하게 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만약 우리가 범람 지역에 거주한다면,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홍수를 겪는다. 또한 우리가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살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재해를 만날 수 있다.고난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와 동일한 이치를 개개인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질병이나 죽음 등 인간의 삶과 동떨어질 수 없는 난제들을 만난다. 때때로 이러한 고통은 설명되지 않는 문제로 느껴진다. 그러나 고난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결과물이다. 욥 역시 왜 그러한 고통의 시간을 겪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처럼,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설명이 불가능한 일로 다가온다.지속적인 간구이 문제에 대한 묵상 중에 시편 121편을 읽게 되었다.“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하나님은 이러한 분이다. 이 시편의 내용이 곧 크리스천의 삶이자 운명이다. 우리는 절대 홀로 버려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보호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고, 하늘과 땅을 지으신 구세주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시는 나의 보호자이다.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는가?고난에 부딪힌 인간은 기본적으로 분노로 반응한다.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분노함으로써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이 과연 우리의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그러한 반응은 오히려 고통 위에 분노의 감정까지 더해 상황을 더욱 버티기 힘든 상태로 몰아갈 수도 있다. 또한 유일한 희망인 하나님과 대적함으로써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망연자실에 빠질 수도 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영원한 안식에 닿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나의 아내는 2018년 10월로 예정되어 있던 장인어른의 100세 축하파티에 무척이나 함께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날을 3개월 앞둔 지난 8월, 아내는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기대하던 기쁜 날을 잃어버렸고, 나는 아내 없이 홀로 축하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님 역시 크리스천이셨기에 사랑하는 딸을 영원한 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그 마음을 잠잠케 하셨다. 한 친구는 내게 위로하기를 “함께할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안타까워”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내를 다시 만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아내와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재회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함께할 수 없던 아픔과 슬픔을 영원히 회복할 수 있으리라. 이것은 감정적인 위안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나게 될 예정된 사실이다.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분노하고 맞서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죄다. 홍수와 태풍, 그리고 죽음의 근본적 원인인 인간의 죄성과 싸워야 한다. 반대로, 우리의 구원자이며 진정한 희망인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난을 피할 수 없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방패가 세상 속 호우를 잠시 면하게 해 줄 우산이 아니요, 구원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d Is Better Than an Umbrella번역: 정새롬
문화
세계관
피난처
돈카슨
분노
인간의죄성
복음 중심적 신앙을 이어갈 TGC의 새로운 발걸음, TGC...
by Stephen Um
2018-11-13
The Gospel Coalition Korea(TGC코리아)의 창립으로 The Gospel Coalition(TGC)의 사역이 한발 더 국제적으로 나아가게 되었음을 알리게 되어 무척 기쁘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주로 City to City Asia(CTC Aisa)를 통해 복음 중심적 신앙을 위해 한마음으로 헌신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특권을 누렸다. 그리고 얼마 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여러 교단에 소속된 9명의 목회자들과 함께 서울에서 드디어 TGC코리아 창립이사회를 구성했다.많은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심히 쇠퇴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17% 미만까지 감소했다. 특히, 20대는 1.7%에도 못 미치는 수만이 교회에 참석하고 있다. TGC코리아의 비전은 한국 크리스천의 건강한 복음화를 위하여 TGC의 컨텐츠를 편집 및 배포하고, 그와 더불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많은 이들이 지나친 율법주의나 극단적 믿음주의 양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바른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동안 TGC코리아의 직원들이 웹사이트의 개설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준비해 왔다. 우리의 소망은 한국 교회와 한국어를 사용하는 전 세계 크리스천들에게 복음 중심의 컨텐츠를 제공하는 데 있다. 그 사역의 일환으로, 2019년 10월 30일에서 11월 1일까지 돈 카슨(Don Carson), 필 라이큰(Phil Ryken),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과 나는 서울에서 개최될 TGC코리아 창립 컨퍼런스에 나설 예정이다.친구, 이웃 및 가족들에게 TGC코리아의 새로운 웹사이트와 곧 다가올 컨퍼런스에 대해 많이 알려주기를 바란다. 또한 이 귀한 사역에 여러분이 기도로 함께 하고 큰 힘을 실어주기를 기대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GC Korea Provides New Forum for Gospel-Centered Content 번역: 정은심
선교전략
TGC코리아
복음중심
컨텐츠제공
크리스천
건강한복음화
우리가 모르는 빈곤 이야기
by Joe Carter
2018-11-13
25년 전, 유엔 총회(United Nation General Assembly, UNGA)는 매해 10월 17일을 “빈곤퇴치를 위한 세계인의 날”로 선포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 결의의 목표는 “전세계의 빈곤(poverty)과 절대적 가난(extreme poverty)을 근절하기 위한 대중의 인식 제고”이다. 월드뱅크(World Bank)에 따르면 절대적 가난은 하루를 1.9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상황을 의미한다. 당신은 지난 3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절대적 빈곤층의 비율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고 있는가? (1) 증가했다, (2) 감소했다, (3)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 간단한 질문을 통해 절대적 가난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답은 (2)번이다. 지난 30년간 절대적 빈곤층은 조금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유의미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감소했다. 불과 1980년대만 하더라도 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44퍼센트의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으로 고통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수치는 10퍼센트 미만으로 대폭 하락하였다. 그러나 정답을 (1)번, 증가로 예상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기독교 여론조사기관인 바나그룹(The Barna Group)의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8명(84%)이 빈곤 계층의 국제적 감소 현상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3분의 2에 해당하는 67%의 사람들은 오히려 증가를 예상했다. 더욱이 이 조사에서 미국 성인의 68%에 달하는 대중들이 앞으로 25년 동안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하지만 이러한 비관적 전망과는 다르게 희망적인 관점을 제시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실천적 크리스천들이다. 바나그룹의 정의에 따르면, 실천적 크리스천이란 실제로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자신의 삶에서 종교적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특히, 그중 비교적 젊은 40세 이하의 그룹에서는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48%의 사람들이 빈곤 퇴치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 시각을 가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40세 이상에서 일반 대중은 32%만이 희망적 시각을 밝힌 반면, 이 나이대의 실천적 크리스천들은 역시 그보다 높은 37%가 낙관적 전망을 내비쳤다. 빈곤 퇴치를 희망적으로 볼 수 있는 이유가난의 전 지구적 감소 현상 속에서 크리스천들은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몇 십년 동안 빈곤 계층의 국제적 감소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가난의 퇴치 역시 다가올 미래에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목표가 될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의 그래프는 인류의발전(HumanProgress.org)이라는 단체가 작성한 것으로서 절대적 가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수치적으로 비교한 표다. 주황색 선이 절대적 빈곤 인구를 의미하고, 파란색 선이 그렇지 않은 인구를 의미한다. 선을 따라 계속 왼쪽으로 이동한다면, 아마도 두개의 선이 마주하는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래부터 1820년대까지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적 빈곤 아래에 놓여 있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인구의 일부는 최저생활선 이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제의 부흥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부의 생산은 지극히 한정적이었고, 절대다수에게 빈곤은 현실이었다. 그 예로, 1820년대에는 대략 11억 명의 인구가 지구상에 존재했는데, 이 중 약 10억 명의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의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오랜 시간 지속되었는데, 이는 위의 표에서 두 개의 선이 1820년부터 1950년 즈음까지 좁혀지지 않고 거의 나란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경제 성장과 함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빈곤 문제 연구가인 맥스 로저(Max Roser)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는 대략 1970년대부터 경제의 성장과 빈곤 인구의 감소를 경험하고 있다. 분석에 따르자면 … 1970년대에는 22억 명의 사람들이 절대 빈곤의 상태로 살아갔으나, 2015년에는 그 수가 7억 5백만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절대 빈곤층의 수치가 1970년대와 비교했을 때 거의 3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또한 이러한 감소율은 1990년대 이후부터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로저의 분석에 따르자면, “1990년에 20억 명 수준이었던 절대적 빈곤층은 2015년 기준, 7억 5백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평균적으로 계산했을 때, 1990년부터 2015년까지 25년 동안 매일같이 13만 7천 명의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한 사실은 지난 25년 간 매일 아침마다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법한 굉장한 일이다. 개발을 통해 세계의 모습이 이토록 놀랍게 바뀌고 있다. 물론 전체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 변화의 속도가 긴 시간 속에서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절대적 빈곤층의 유의미한 감소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성취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성취를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는가?어떻게 하면 빈곤의 문제를 줄여나갈 수 있을까?1990년 유엔의 새천년개발계획(UN’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은 2015년까지 빈곤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원래 계획했던 시기보다 5년이나 앞당겨서 달성되었다. 그리고 2015년, 유엔과 월드뱅크가 공동으로 수립한 새로운 개발 목표는 2030년까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는 일이다.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 계획일까?이 야심찬 목표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먼저, 1990년 이후에 경험한 빈곤의 감소는 인도와 중국의 경제 성장에서 기인한 부분이 크다. 1990년 51%에 달했던 인도의 절대적 빈곤 인구는 현재 20%대로 떨어졌다. 중국의 경우는 더욱 눈에 띈다. 1981년 기준으로 88%를 기록했던 절대적 빈곤 계층은 오늘날 무려 2%대로 낮아졌다. 이는 두 나라의 빠른 경제 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와 동일한 성장이 현재 높은 빈곤율로 고통받는 다른 나라들도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사하라 이남 지역의 아프리카를 예로 들자면, 대내적으로는 부패와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고, 해외 원조가 오히려 자원 수탈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다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대내적 상황과 국제 질서 및 무역에 해당하는 대외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해당 지역의 국가들은 지난 30년간 빈곤 인구의 증가세를 보인 유일한 대상으로 남아있다(비록, 아프리카의 인구 대비 절대적 빈곤 계층의 ‘비율’은 1981년에 비하여 적게나마 줄어든 상황이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서 빈곤인구의 ‘수’ 역시 2배로 늘어났다).절대적 빈곤의 급락 혹은 종말 유엔과 월드뱅크가 제시한 원대한 목표가 달성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지구상의 모든 인구가 실제로 가난을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통계상으로 완전 고용을 이룬 상태라 할지라도 실제적으로는 ‘마찰적 실업’(노동력 수급이 일시적으로 불균형한 상태가 되어 생기는 실업. 전체 노동인구의 약 4% 정도의 비율로 발생)이 발생하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쉽다. 통계적으로는 절대적 빈곤이 ‘종식’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의 마찰적 빈곤(약 3%부터 8%까지 예상)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전 세계의 인구가 2030년에는 83억 명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을 바탕으로 계산해보자. 절대적 빈곤의 종말을 이룬다고 가정하더라도 약 2억4천9백 명에서 6억6천4백 명 가량의 사람들이 여전히 빈곤의 삶 속에 남게 된다. 전 세계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1.9달러 이하의 돈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고려했을 때, 절대적 빈곤의 완전 퇴치는 어쩌면 달성하기 힘든 환상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힘을 모을 때 바람대로 그에 근접한 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절대적 빈곤의 종식을 달성하더라도,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삶의 기본적인 필요에 실제적으로 닿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가 절대 빈곤의 상태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 비율을 8%대 이하로 계속해서 줄여갈 수 있다면 이는 무척이나 고무적인 성취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2030년까지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가늠하기 힘든 정도의 큰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임할 때, 이는 이룰 수 있는 목표가 된다. 만약 이 원대한 계획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를 경험할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시는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목도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Best Global News You (Probably) Haven’t Heard번역: 정새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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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에 관한 열 가지 사실
by Kevin DeYoung
2018-11-13
1. 모세는 실제로 ‘십계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출애굽기 20장 1-2절은 가장 유명한 성경 말씀 중 하나를 소개한다. 바로, 전 세계가 가장 중요한 종교 문헌이라고 여기는 십계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실제로 ‘십계명’이라고 불리지 않았다.구약성경(출 34:28; 신 4:13; 10:4)에서 세 번 등장하는 ‘십계명’의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 의미로 ‘열 가지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출애굽기 20장이 자주 십계명(decalogue)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즉, 데카(deka)는 헬라어로 ‘10’을 의미하고 로고스(logos)는 ‘말씀’을 의미한다. 이를 해석하면,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열 가지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십계명이 과거를 넘어 현재에도 우리가 따라야 하는 말씀임을 강조하고 싶다.2. 십계명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여 준다율법은 제정자의 마음과 특성을 표현한다. “율법에는 관심 없어”라고 말하기 전에, 또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발끈하기 전에, 우리는 율법을 만드신 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그 계명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준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영광, 가치, 왕권에 관해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우리에게 말해 준다. 율법의 제정자를 무례하게 여긴다면 그 율법을 존중할 수 없다.3. 십계명은 세상과 우리를 구별한다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다(벧전 2:9).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었으며,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한다. 또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법규를 따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항상 거룩한 사람들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부르셨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즉,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다.4. 십계명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제공한다우리는 종종 십계명이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하나님의 법이 우리를 노예처럼 가두고, 우리의 꿈과 잠재성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삶(요 10:10)과 진정한 자유(요 8:32)를 주시기 원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요한일서 5장 3절은 그분의 법이 무겁지 않음을 분명히 말한다.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도록 묶거나 규율들로 짓밟으려고 하지 않으신다. 십계명은 감옥 창살이 아니고, 길을 터주는 교통법규와 같다. 교통법규가 없으면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운전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호등의 변화에 따라 길을 건넌다. 학교 근처에서 운전할 때 속도를 줄이며, 학교 버스가 지나가면 일단 멈춘다. 교통법규가 없다면, 식료품점에 차를 몰고 갈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가파른 산길을 운전할 때 죽음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가드레일을 저주하는가? 아니다. 가드레일을 산 위에 가져다 두기 위해 큰 비용을 들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안전장치가 자유롭고 보호받는 여행을 하도록 돕기 때문이다.십계명은 애굽에서 탈출하는 방법에 대한 지시사항이 아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얻은 백성이 이 세상에서도 자유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법률이다.5. 십계명은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기독교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야만 구원 받을 수 있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율법이 생긴 이유는 구원을 위함이 아니다. 당시 애굽에 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내가 너희의 외침을 듣고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므로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그렇게 너희가 구원을 얻어 자유와 용서를 받게 되면, 나는 너희가 살아갈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구원은 순종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구원은 순종할 이유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계명을 순종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켜 행하는 하나님의 모든 법은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기 때문에 실천 가능하다.6. 십계명은 우리의 직관이나 문화적 코드보다 믿을 수 있는 것이다이 시대의 정신은 주관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 법은 지키지 않으며, 남을 정죄하는 행위에 거침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에 관하여 상당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 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성과 관련된 도덕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더 이상 성에 개방적인 모습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적 자유를 외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격적인 비방과 모욕적인 말들로 쉽게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다툼을 일으킨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자신들만의 도덕적 코드를 지니고 있다.그러나 성경은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잠 9:10). 우리는 마음속의 외침을 따를 때 도덕적 가르침을 얻는 것이 아니다. 참된 도덕적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때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알기 원하고, 선한 삶을 살기 원하며, 친구나 이웃과 함께 축복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십계명을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한다. 7.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은 십계명에 근거해 있다교회는 역사적으로 가르치는 사역의 중심에 십계명을 두었다. 특히 어린이와 새신자들을 위한 교육에 십계명을 활용했다. 여러 세기 동안 교리 교육은 세 가지를 기본으로 삼았다. 사도신경, 주기도문, 그리고 십계명.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성경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칠까요? 새신자들이 기독교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그 대답에는 늘 십계명에 대한 강조가 포함되어야 한다.8. 십계명은 구약의 나머지 율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성경이 십계명을 유별나게 강조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대 이스라엘에서 십계명이 가진 특별한 위치를 저평가해서는 결코 안 된다. 먼저 십계명은 하나님이 백성들과 대면하여 주신 말씀으로서(신 5:1-5),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계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신 5:22-27). 출애굽기 20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문학적으로나 영적으로 높은 자취를 남겼다. 이 율법이 쓰인 돌판이 만나 및 아론의 지팡이와 함께 언약궤 안에 놓인 것은 당연한 이치다(히 9:4).구약성경에는 많은 법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십계명이 나머지 법들의 근본이 된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헌법과 같으며, 구약성경의 다른 법들은 그 뒤를 잇는 일반 규율이다.9. 십계명은 신약 윤리의 핵심이다예를 들어, 마가복음 10장 17절을 생각해 보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묻는다. “영생을 얻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계명들을 네가 알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신 후, 우리의 이웃과 관련 있는 계명들을 나열하신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19절).우리는 나머지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그 젊은이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깨닫도록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명백하게 지키지 못했던 한 가지 명령이 바로 예수님이 아무 말씀 없이 넘어간 명령, 즉 탐내지 말라였기 때문이다(20-22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웃에 대한 의무를 가르치실 때, 바로 십계명을 거론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10. 십계명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적절하다우리가 그 계명들을 충분히 혹은 완벽히 지킬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죄를 알게 하고 십자가로 인도하는가? 물론이다. 동시에 그 계명들은 살아가는 방법,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그리고 우리의 온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오늘날에도 시내산에서 전해 내려온 이 열 가지 말씀이 여전히 필요하다. 이 십계명은 구약 시대에도, 그리고 신약 시대와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에게 십계명은 의무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분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계명들을 지키게 될 것이다(요 14:15).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Ten Commandments번역: 정은심
신학
구약성경
십계명
모세
하나님
자유
구원
율법
신약윤리
결혼생활에 도움이 되는 아홉 단계 화해법
by John Piper
2018-11-12
하나님의 은혜는 오랜 인내와 즉각적인 실행, 그리고 꾸준함으로 나타난다. 화해를 시도할 때 우리가 종종 저지르는 실수는 그 방법에 대해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먼저 사과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하면 마치 사과의 기회가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생명력 있는 결혼생활은 골로새서 3장 13절 말씀을 실제의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이 구절에는 "서로 용납하여"와 "용서하되"가 함께 있다. 이 두 가지가 결혼생활에서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여기서 나는 배우자와 화해에 이르는 방법을 아홉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마음이 죄로 가득한 나머지, 진심을 담아 배우자에게 사과를 건네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다음의 아홉 단계가 유용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방법은 실제 자주 일어나는 상황을 기초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잘 기억해두고 활용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배우자의 입장에서도 다음의 단계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1단계배우자가 당신의 말이나 행동의 잘못된 부분 또는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지적한다. 2단계그 말을 들은 당신은 화가 난다(순간 당신이 화를 내야 하는 대여섯 가지의 이유들이 떠오른다). 3단계그러나 그 분노가 경건한 반응이 아니며, 지적 때문에 화를 낸 것은 사과해야 할 일임을 머리로 먼저 깨닫는다. 4단계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미 화가 났기 때문에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끼기 어렵다. 마음은 다정하지 못하고, 아픔을 느끼지 못하며, 미안함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미안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침묵보다는 낫다. 이런 행동은 은혜의 부분적인 결과이다.5단계배우자는 당신이 화가 나 있는 상태를 느끼게 되고, 진심이 아닌 사과에 만족하지 않는다. 6단계하루이틀의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은 당신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화내기를 멈추게 하신다(약 1:19-20). 그리고 복음의 진리들을 다시 상기시키신다(엡 4:32). 또한 부드러운 마음을 허락하신다(겔 36:26). 이 같은 성령의 사역은 말씀을 읽거나 친구와의 대화 중에, 또는 책을 읽다가, 혹은 예배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다. 그동안 당신의 배우자는 당신과의 대화를 기다리고, 궁금해 하고, 기도하며, 화해를 소망하게 된다. 7단계이제 화는 누그러진다. 다정함이 솟아나며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또한, 죄에 대한 반성과 슬픔이 자라난다. 8단계당신은 배우자와 마주보고 대화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 했던 사과는 당신의 죄성으로 인해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였으며, 충분하지 못한 사과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배우자를 어떻게 느끼는지 다정하게 말해 주며 진심을 담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 9단계자비로운 마음으로 배우자는 당신을 용서하고 모든 상황은 나아지게 된다. 나는 당신이 결혼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 아홉 단계의 화해법에 대해 배우자와 함께 나누길 원한다. 그리고 이 방법을 어떻게 두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길 원한다. 이를 실천할 수 있다면 상대방을 함부로 몰아붙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분노를 절제할 수 있을 때, 화가 잠잠해지기 전까지의 단계(1-6단계)가 두 사람에게 너무 큰 절망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A Possible Marriage-Saver in Nine Steps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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