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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을까?
by Justin Taylor
2018-12-05
여기서는 초대교회의 세례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선 교회사가 에버렛 퍼거슨(Everett Ferguson)의 975페이지짜리 대작, ‘초대교회의 세례: 첫 5세기 동안의 역사, 신학, 예전에 대하여’(Baptism in the Early Church: History, Theology, and Liturgy in the First Five Centuries)에서 결론적으로 설명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2세기 후반에 유아세례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2세기 후반에 유아세례를 행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입니다”(856페이지).그렇다면 유아세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까?“유아세례가 행해지지 않았다기보다는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세울 만한 역사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856페이지).“많은 사람들은 이 역사적인 공백을 신학적인 또는 사회학적인 설명으로 대체합니다”(856페이지).왜 유아세례가 생겨나게 되었나요?“유아세례의 기원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비상적인 관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을 앞둔 병든 아이들이 곧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긴급적으로 행해지던 세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856페이지).언제부터 유아세례가 세례의 일반적인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까?“예비적인 차원에서 아기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 조금씩 늘어났습니다”(857페이지).“그렇게 유아세례는 일반적으로 용인되었지만, 그 타당성에 대한 질문은 5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857페이지).“그러다가 5-6세기에 들어서며 통상적인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857페이지).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까?“본 연구에서 수집된 증거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예외적인 경우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더불어 증거에 관한 일관된 해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857페이지).“당시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사용하던 (세례를 의미하는) 단어나 (물에 몸을 담그던) 유대교의 관습을 포함한 기독교 문헌들을 분석하였을 때, 거의 압도적으로 전신을 물에 담그는 세례가 일반적인 방식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857페이지).“그러나 물이 부족하거나 병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할 때는 예외였습니다”(857페이지).“물 속에 잠기게 하는 방식은 의심의 여지없이 (동방) 그리스 지역에서는 4-5세기에도 행해졌고, (서방) 라틴 지역에서는 그보다 약간 덜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857페이지). 물 속에 잠기게 하는 방식은 (1) 초기 관습에서 변형된 것입니까? 아니면 (2) 이전에 존재했던 방식들 가운데 하나입니까? 또는 (3) 처음 3세기 동안 행해지던 방식이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까?“본 연구의 결론에 따르면, (3)의 해석이 현재 가지고 있는 증거에 가장 부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857페이지).“물 속에 잠기게 하는 방식을 누군가가 생각해서 고안해냈다면 모르겠지만, 문학과 미술 및 고고학적 증거들은 이번 연구의 결론을 지지합니다”(857페이지).다음으로 이 주제에 관한 또 다른 관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앤서니 레인(Anthony Lane)의 ‘초대교회는 유아세례를 주었는가?’(“Did the Apostolic Church Baptise Babies?: A Seismological Approach,” Tyndale Bulletin 55, no. 1, 2004)에서 설명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첫째, 초대교회가 유아세례를 주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입장을 확정짓기에는 1세기로부터 확보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둘째, 이에 대한 대안적인 접근은 초대교회 이후 바로 이어지는 속사도교회의 세례 관습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 관습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초대교회의 원인을 소급하여 연구할 수 있다.셋째, 3세기 초부터 그 이후 두 세기 동안 행해진 세례에 관해서는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 가정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자녀들이 세례를 받은 경우를 포함하여 다양한 세례의 관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넷째, 초기에 행해졌던 일반적이지 않은 다른 세례의 관습들을 원리상 비(非)사도적이라거나 잘못된 방식이라고 주장했던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다섯째, 비록 구전 전통(oral tradition)이 연구물로서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과거에 접근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라고 전제할 수 있다. 그 전통을 고려하면, 교회가 다양한 방식들로 세례를 베푼 관습에 대하여 사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기원을 설명하는 편이 가장 자연스럽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Baptism in the Early Church번역: 조현빈
역사
초대교회
세례
유아세례
관습
방식
에버렛퍼거슨
앤서니레인
이 땅의 성전과 예수님의 빈 무덤
by Chad Ashby
2018-12-04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대제사장, 골고다, 두 강도, 빌라도, 군중, 십자가, 무덤, 그리고 예수님 자신과 같은 익숙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친숙한 기사이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다.마태에 따르면, 그 요소는 바로 성전이다.마태는 마지막 여덟 장에 걸쳐 성전을 16회 언급한다. 마태복음이 정점에 도달할 때, 성전이 중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태의 서술이 십자가에서 성전을 지나 무덤으로 이동하는 흐름 속에는 독자들이 예상하기 어려운 문학 장치가 자리하고 있다.곧 마태는 전문가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무덤을 단순한 바위나 돌 그 이상의 것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 무덤은 바로 한 장의 성전 그림과 같이 묘사된다.성전 허물기예루살렘을 향하는 종려주일 가두행진 후에 예수님은 성전의 뜰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분은 성전이 부정한 것들, 즉 환전상이나 강도들의 행위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예수님은 상을 뒤엎고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았고, 눈 먼 자와 저는 자를 고치셨다. 다음 날, 그분은 제사장들 및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셨고, 그들에게 지옥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선언하신 후 그 성전을 떠나셨다.이때 제자들이 성전의 외면적인 아름다움에 감탄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그리고 몇 장의 이야기가 흐른 후, 우리는 예수님을 붙잡고자 모의하는 대제사장들이 그분을 고발할 만한 내용을 겨우 한 가지밖에 얻지 못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그 한 가지는 어느 두 사람이 대제사장 앞에 나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내용이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0-61).예수님은 성전을 무너뜨릴 생각이셨다. 이 장소는 자기 의로 가득한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의 오물로 채워진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전을 회칠한 무덤으로 바꿔 놓았으며, 겉은 번쩍번쩍하고 깨끗하지만 속은 악으로 가득 찬 곳으로 만들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고 3일 만에 새로 짓고자 계획하셨다.휘장 찢기마태의 수난 이야기는 놀라운 변화로 끝이 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를 향한 모욕이 가해지자, 예수님은 시편 22편의 말씀을 큰 소리로 외치셨다. 그리고 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마 27:50).하지만 클라이맥스는 여기가 아니라 그 마지막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성전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마 27:51-52).이렇듯 수난의 일주일은 예수님이 성전 외부 뜰에서 격노하신 일로 시작된 후, 성전의 파괴에 관한 예언으로 이어지고,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했던 휘장이 찢어지는 소리로 마무리되었다.성전에서 무덤으로요셉이라는 한 남자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고, 그 시신을 세마포로 감싼 후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다(마 27:60). 마태는 여기서 무덤을 성전과 병행구조로 연결시키는 문학 장치를 사용한다. 곧 성전 벽은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 무덤 벽으로, 불의 천사들로 수 놓인 휘장은 경비가 보초를 서는 큰 돌로 대치된다.이렇게 마태는 그 당시 성전의 이미지를 무덤에 투영한다. 마치 석관 상자인 언약궤가 두꺼운 휘장 뒤에 놓여 인간이 보지 못하게 감춰진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인) 임마누엘 곧 예수님은 무덤의 입구를 막아 놓은 돌로 인해 우리의 시야에서 가리워 지셨다. 돌 휘장이 하나님과 죄인의 사귐을 막은 것이다.성전은 곧 죽음의 장소, 피가 흘려져서 항상 죄를 기억하게 하는 무덤과도 같았다. 또한 성전은 무덤처럼 악한 제사장, 거짓 가르침, 오물 같은 부패한 장사꾼의 부정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이 모든 것은 곧 큰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빈 무덤예수님은 성전을 허물고 3일 만에 다시 세우기 위해 돌아오셨다. 돌 성전도 돌 무덤도 하나님의 임재를 영원히 가둬 놓을 수는 없었다.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다(마 28:2).성전 휘장에 수 놓여 있던 천사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었다. 그러나 이번 천사는 반대로 주님이 계셨던 무덤으로 여자들을 이끌었다.“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5-6).휘장처럼 돌이 입구에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대제사장들이 작은 방에 하나님을 다시 가두려고 했지만, 예수님과 세상을 분리한 바위벽과 무거운 돌은 더 이상 그분을 가둬 놓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무덤을 떠나셨다. 성전이든 무덤이든 어떤 물리적인 벽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더 이상 분리할 수 없었다.여자들이 두려움과 기쁨으로 무덤에서 떠날 때, 걸어오던 누군가와 마주쳤다.“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마 28:9).그렇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나와 세상으로 오셨다. 마침내 하나님과 인간은 오래 전 에덴 동산에서 그러했듯이 다시 함께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무덤에서 새 성전으로마태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돌을 모으라고 제자들을 보내신다. 부활하신 왕은 이제 차갑고 생명이 없는 돌로 된 무덤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로 지어진 영적인 집, 곧 새 성전을 짓고 계신다. 그리고 깨끗하게 씻음 받고 제자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을 세상 곳곳에서 모으고 계신다.최고의 소식은 이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분의 성전이며, 이 땅에 심겨져서 번성하고 충만하게 될 정원(곧 회복된 에덴동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는 바로 이 살아 있는 성전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Earthly Temple and the Empty Tomb번역: 이주일
신학
신약성경
성전
예수님
빈무덤
휘장
마태복음
부활
마태
제자들
결혼 생활을 끝내는 다섯 가지 방법
by Josh Squires
2018-12-04
결혼 생활은 사역이다. 특히, 당신이 그 결혼 생활을 통해 장기적인 안정과 복음을 추구한다면 더욱 그렇다.반대로 결혼 생활을 끝내는 일은 어떨까? 믿기 힘들 정도로 정말 쉽다.얼마나 쉽게 가정이 파괴될 수 있는지 알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도 놀랄 것이다. 손쉬운 다섯 단계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가정 생활을 끝낼 수 있다. 여기에 그 방법이 있다.1. 완벽함을 기대하라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는 요한의 말(요일 1:8)을 깨끗이 잊어버려라. 대신, 배우자의 모든 죄를 부지런히 찾아내고 흠이 없는 상대를 상상하며 마음 속으로 무결한 상대와 배우자를 비교하라. 또한 배우자의 실패를 되새겨라. 모든 일이 배우자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일부분이 되게 하고 바울의 권면(엡 4:31-32)도 잊어버려라. 그래서 고통의 강이 그 삶에 휘몰아치도록 하라. 당신이 이 결혼의 피해자임을 기억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라.완벽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육체의 완벽함, 감정의 완벽함, 이성적인 완벽함, 그 모든 완벽함에 대해 생각하라. 그리고 배우자의 결점에 대해 심히 불쾌하게 여겨라. 일말의 희망이 보이려 할 때면, 그가 얼마나 여러 차례 실패했었는지를 상기시켜 주어서 수치심을 느끼도록 해주어라. 어제보다 나은 진전을 모두 과소평가하라. 그 어떠한 진전도 당신에게 상처를 줄 것이고, 당신은 그 진전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어쩌면 배우자가 당신이 기대하는 바에 부응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절대 그와 함께 축하하며 즐거워하지 말아라. 그 대신, 배우자가 겨우 ‘이제서야’ 당신의 요구에 부응해서 화가 난 모습을 보여라. 분명히 그의 부응 이면에는 (돈, 자녀, 섹스 등) 나로부터 얻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고 의심하고 그 숨은 동기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이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당신이 불만족스러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갈보리 언덕을 바라보지 말아라. 만약 갈보리 언덕을 그려본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사람이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음을 떠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 소통하지 말고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라밝은 이모티콘은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쉽게 속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고, 상대에게 부드럽게 말하는 것은 약자들만 하는 행동이다. 덕을 쌓으라는 바울의 권고를 떠올리지 말아라. 그의 권고는 좌절 또는 혐오를 드러내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다. 당신의 감정만이 모든 진실의 심판자이니 항상 감정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게 만들어라. 지옥의 불길처럼 말이 거칠어지더라도 참지 말아라. 옳은 쪽은 당신이니까 당신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대화에 은혜(골 4:6), 사랑(벧전 3:10), 진실(엡 4:15)이 가득한가? 이러한 명령은 영적으로 탁월한 사람 또는 최소한 당신의 배우자보다는 더 능력 있는 사람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는”(약 1:19) 일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소리를 지르거나, 발을 세게 구르거나, 거친 언어를 참지 말라. 흥분할수록 더 쉽고 빠르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것이다. 당신이 배우자의 말을 들을 시간은 없을 수 있지만, 당신의 배우자는 항상 당신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3. 더 많은 선택을 생각하라언제, 어디서, 지금보다 더 좋은 일이 생길지 결코 알 수 없다. 사실 당신은 주님과 증인들 앞에서 서약했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약속이 순진한 행동이라는 것을 안다. 무엇보다도 배우자의 모든 결점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약속을 했을까?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게으르고, 탐욕스럽고, 살기 가득한 우상 숭배자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그러한 약속들을 주셨겠는가(롬 5:6-11)? 당신은 하나님이 하신 그와 같은 일을 결코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엡5:1-2)?지금의 배우자가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그 중 한 명이 당신에게 진짜로 오랜 만족을 줄 열쇠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현재의 배우자에 대해서도 좋은 면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당신은 상대방의 많은 흠을 알게 되었다. 만일 당신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당신은 더 매력적이거나, 의사소통이 잘 되거나, 더 예술적이거나, 더 멋져 보이거나, 더 깔끔하거나, 그 무엇이든 더 괜찮은 사람을 얻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그러므로 당신도 앞으로는 더 잘 행동해야 한다. 체육관, 식료품점, 심지어 예배당 그 어느 곳에 있든지, 더 나은 배우자를 얻기 위해 배회하라.4. 자기 자신만 생각하라당신의 순간적인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도,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당신의 행복보다 먼저일 수 없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더 닮아가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당신을 불만족스럽게 할 수도 있는 그런 하나님은 상상하지도 말아라(롬 5:3-5). 당신의 인생과 관련된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결혼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당신이 섬김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막 10:43-45),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기라고 당신을 부르셨지만(빌 2:3), 전혀 개의치 말고 ‘본인의’ 필요를 첫 번째로 두어라.당신의 가치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당신을 예수님이 선택하셨다는(빌 2:6-8) 사실에 달려 있지 않다. 그 가치는 최고의 수준으로 당신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 배우자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되뇌어라. 지속적이고 효과적이며, 능률적이면서도 즉각적으로 당신을 섬겨줄 때에만 배우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기대할 수 있다. 그 대가도 오직 당신이 편안할 때에만 허락된다.5. 도움을 구하지 말아라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수많은 상담가를 필요로 하겠는가(잠 15:22)? 당신에게는 그런 도움이 필요 없다. 당신은 지금 제3세계 빈곤의 해결책이나 암을 위한 치료법 따위의 거창한 주제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자신의 선한 언약을 인류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 만드신 ‘작은’ 공동체(즉 결혼 생활)에 대해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창 2:18-24)?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부유하거나 가난할 때에'라고 한 당신의 서약은 '그의 백성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리라'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세상에 반영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결혼 생활은 간단하다.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다.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결혼 생활에 연루되면 문제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다. 잘 사는 것처럼 보여지는 모습과 결혼 생활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는 환상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상담가, 목회자, 멘토 등은 당신의 삶에 껄끄러운 진실을 조언할 수도 있다(엡 4:15). 심지어 그들은 당신의 배우자에게 어떠한 흠이 있더라도 당신에게 배우자로서의 소명에 부응할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롬 12:9). 행복하고 건강한 결혼 생활을 오래 지속하고 있는 선배 부부들에게는 절대 조언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또한 아무리 많은 현실적인 조언도 당신이 수년간 훑어보았던 연애와 결혼 블로그보다 나을 수는 없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을 가리킨다. 당신은 비참하며,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배우자에게 있다. 어느 누가 도와줄 수 있겠는가?이것이 전부다. 작은 노력과 엄청난 우월감으로 당신은 결혼 생활을 끝낼 수 있다. 언제라도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위해 보여주신 언약적 사랑의 강력한 이미지를 깨뜨릴 수 있다. 슬프게도 세상은 당신이 그처럼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Ways to Murder Your Marriage번역: 안재영
가정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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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암송해야 하는 이유
by John Piper
2018-12-04
몇몇 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한다. 간접적으로 들은 달라스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Howard Hendricks) 박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에게 결정권이 주어진다면, 그 신학교에서 수학하는 모든 학생들이 졸업하기 전에 천 개의 암송구절을 완벽히 외우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남가주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던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 암송은 영적 성장의 절대적인 기초다. 신앙생활의 모든 훈련들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성경 암송을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암송은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는 기본이자 핵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성경은 바로 입에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율법책이 당신의 입에 있게 할 수 있는가? 암송하면 된다.”또한 척 스윈돌(Chuck Swindoll)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경 암송을 최고의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암송으로 기도 생활은 강화될 것이고, 영성은 더 날카롭고 효과적이 될 것이다. 당신의 태도와 세계관은 변화하게 될 것이고, 생각은 깨어 있으며, 영적으로 민첩하게 될 것이다. 담대함과 확신은 고양될 것이고, 그 믿음은 견고해질 것이다.”‘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마틴 루터의 위대한 발견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있던 시절, 요한 폰 스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를 통해 말씀을 사랑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도 않은 채 신학박사학위를 받을 때, 루터는 하루 만에 성경을 완독했다. 루터는 동료 교수인 안드레아스 칼슈타트(Andreas Karlstadt)가 신학박사학위를 받을 때는 물론 그 이후 수년 동안 성경책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수많은 성경 구절을 암송했던 루터에게 주님은 그의 눈을 열어 로마서 1장 17절의 이신칭의 진리를 보게 하셨다. 그 때 루터는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 즉시로 기억 속의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았다”라고 했다.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성경 암송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고백했다. 그 고백과 확신의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1. 성경 암송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한다“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 바라봄은 말씀을 통해 가능해진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삼상 3:21). 성경 암송은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지속적이고 분명하게 고정시키는 효과가 있다.2. 성경 암송은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한다“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9, 11). 바울은 우리가 “영으로써 몸의 악한 행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롬 8:13). 그 죽이는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엡 6:17). 죄는 몸을 악한 행실로 유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고, 죄의 유혹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3. 성경 암송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한다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예수님은 암송하고 계셨던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셨다(마 4:1-11).4. 성경 암송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권고의 말씀을 전하게 한다사람들이 당신에게 위로와 권고를 기대하는 중요한 순간에, 당신의 손에 성경책이 들려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암송이 필요하다. 마음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상대를 향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잠언 25장 11절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사과니라”라고 말씀한다.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의 입에서는 경우에 합당한 축복의 말이 흘러나온다.5. 성경 암송은 비기독교인에게 복음을 나눌 수 있게 한다비기독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는 성경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예리한 능력이 있는 성경 구절을 암송함으로써 우리는 복음을 네 가지 주제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1) 하나님의 거룩/법/영광, 2) 인간의 죄/반역/불순종, 3)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 4) 믿음을 통해 거저 받을 수 있는 영생의 은혜. 이 네 가지의 주제와 관련된 구절들을 미리 암송해 두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것들을 나눌 준비를 하기 바란다.6. 성경 암송은 하나님의 인격과 뜻을 즐거워하며 그분과 교통하게 한다하나님과 교통하는 방법은 그분의 속성을 묵상하고,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며, 그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도록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그분의 진정한 성품을 알게 되어 주님과의 교제에 많은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다음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8-14).이 단락의 제목(“하나님의 인격과 뜻을 즐거워하며 그분과 교통하게 한다”)에서 나는 ‘즐거워하며’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영적인 감정에 있어서 무감각의 상태에 빠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감정의 잠재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된 수준에서 경험한 적이 없다.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 한 가지 방법이 성경에 있는 감정적 표현들을 암송하고, 주님께 그 표현을 고백하며 서로에게도 권하는 것이다. 그 감정들이 나의 일부가 될 때까지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편 103편 1절을 암송하며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표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상적이거나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성경의 다른 감정적인 표현들을 암송하고 자주 고백함으로써 그 감정들이 나의 일부가 되기를 구하면, 우리는 그런 감정과 표현을 실제로 경험하는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감정적인 무감각에서 벗어나 올바른 찬양과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다.물론 이 외에도 성경 암송을 해야 할 이유들은 더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삶 속에서 그 이유들을 계속해서 발견해 나가기를 바란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Read Your Bible More and More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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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과의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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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뜻
번영신학 속에 감추어진 신앙
by Jessica Hong
2018-12-03
2015년 11월의 어느 날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일평생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없던 어머니가 폐암 4기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의사는 더 이상 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말과 함께, 길어야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생을 잘 정리하라고 조언했다. 충격적인 진단을 받은 어머니에게 소식을 들은 오랜 친구들이 찾아왔다. 대부분 그녀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지만, 몇몇 친구들은 욥을 찾아온 친구들과 같이 어머니가 암에 걸린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코니(Connie), 혹시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는 것은 아니야?” “과거에 끔찍한 일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 건 아닐까?” 심지어 한 친구는 어머니가 귀신에 사로잡혔다고 두 번이나 이야기했다.그러나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성경을 바르게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덕분에 어머니는 친구들의 어떤 말에도 동요하지 않았고, 그 후로도 16개월 동안 암과 싸우셨다. 그러나 그 사이 나는 어머니의 친구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믿음의 위기를 겪었다. 이유를 고민하다성경, 특히 욥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왜 고통과 비극을 허락하셨는지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고통에 처한 사람들이 갖는 의문과 기도, 삶의 여정,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깊어지는 믿음에 대해 배울 뿐이다. 그들이 왜 그런 고통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어디서도 듣지 못한다.나는 성경이 고통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그 고통과 고난의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 묻지 않을 수 없었다.고통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했다. 나름의 신학 지식을 토대로 마음 깊은 곳에 신앙의 전제를 세워 놓은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엄마의 친구들처럼 고통을 그 사람이 지은 죄의 결과로 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사고방식이 번영신학(the prosperity gospel)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매사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남을 돕기 위해 충분한 재정을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재정, 건강, 지위 등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주실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축복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번영신학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이러한 깨달음 이후 어머니의 병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자세히 살펴보았고, 내 신앙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번영신학에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신앙에 대한 나의 반응은 사실상 번영신학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고통을 피하다도대체 왜 하나님은 어머니를 죽을병에 걸리게 하셨을까? 이 끊임없는 물음은 내 잠재의식 속에 숨겨진 믿음의 모습을 드러냈다. 숨겨져 있던 그 의식은 만약 내가 굳건한 믿음을 가진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이 반드시 건강과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최소한 비극이나 고통은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그저 고통을 피하기 위해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런 노력은 나를 자연스럽게 번영신학의 늪에 빠지게 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 믿음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병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나의 잘못된 생각과 믿음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이렇듯 고통은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숨은 생각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해 주었다.그동안 성취한 신학 학위와 풍부한 사역의 경험들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꽤 괜찮은 신앙을 가졌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믿음의 길잡이는 예수님과 나의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관계보다도 내 안에 축적되어 있던 신학적 지식들이었다. 어머니의 병과 죽음 이전에 나는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고통이 내 삶 가운데 들어온 이후로, 나는 마음속 믿음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성장에 감사하다욥이나 내 주변에 존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여전히 하나님이 왜 어머니에게 고통과 죽음을 허락하셨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그 시간 속에서 애통하는 동안 하나님은 내 안에 숨어 있던 비틀어진 복음을 마주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부끄러움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잘못된 견해를 하루라도 빨리 깨닫게 하시고, 고통을 통해 나를 다듬어 가심에 감사한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에 감사한다. 더불어 이 모든 사실들을 지금 알게 하신 것에 감사한다. 또 나를 여전히 교회의 사역자로 사용해 주심에 감사하고, 나의 비뚤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막아 주신 은혜에 감사한다. 비록 나는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지만, 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y Hidden Trust in the Prosperity Gospel번역: 김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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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소명
번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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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고민
고통
성장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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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는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
by John Piper
2018-12-03
초대교회는 하나님이 그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기를 기도했다.“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다.“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검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엡 6:17-18).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8-19).“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행 4:29).기적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주여 이제도 ...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29-30).“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기를 기도했다.“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약 5:14-15).믿지 않는 자들의 병을 고쳐 주시기를 기도했다.“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행 28:8).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기도했다.“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기적적인 구출을 위해 기도했다.“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 12:12).“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행 16:25-26).죽은 자를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했다.“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 9:40).그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기도했다.“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전략적인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했다.“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지도자를 세워 주시기를 기도했다.“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3).일할 사람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했다.“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8).“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2-3).다른 선교사들의 성공적인 사역을 위해 기도했다.“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롬 15:30-31).공동체의 연합과 화합을 위해 기도했다.“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만나서 격려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우리가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3:10).총명한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했다.“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 1:9-10).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기도했다.“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하나님을 더 잘 알도록 기도했다.“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기도했다.“이러므로 내가 ...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너희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4-15, 18-19).더 깊은 소망의 확신을 갖도록 기도했다.“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6, 18).능력과 오래 참음을 위해 기도했다.“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9-11).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깨닫도록 기도했다.“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6, 19).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더 큰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했다.“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막 9:24).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했다.“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 6:13).“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하나님이 그들의 결심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했다.“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그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기도했다.“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기도했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악한 자에게서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했다.“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the New Testament Church Prayed For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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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존파이퍼
기도
무엇
믿음
복음
능력
기적
소망
우리의 신앙을 대중과 나누는 방법
by Tim Keller
2018-12-03
대학 시절에 나는 기독교 문학을 읽는 동아리에 참석했다. 거기에는 ‘의심하는 사람을 환영합니다’(Doubters Welcome)라는 제목의 소책자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제목에 놀랐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믿음에 대해 의심하는 크리스천을 보면 눈살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점차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만일 의심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믿음의 도약을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인내와 자비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그 동아리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회의적이고 의심하는 학생들이 초대되었고, 우리는 항상 크리스천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다. 이후로 나는 항상 그와 같이 크리스천이 아닌 혹은 기독교 신앙에 의심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러진 교회를 만들 수 있기를 소망했다.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첫 모임 장소는 집이었다. 그 후 공공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고, 1989년 9월에 마침내 첫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세상과 접촉하는 일’은 시작부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리디머교회의 중심 가치 중 하나는 비기독교인 혹은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그들의 의심과 어려움을 존중하며, 또한 그들의 씨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리디머교회 역시 해가 지남에 따라 그 일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교회가 불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질문을 적극 환영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다. 리디머교회는 세 개의 캠퍼스로 확장되었고, 각 교회의 목사와 지도자들, 그리고 직원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회중이 더 나은 청취자가 되고 자신있게 스스로의 믿음을 나누는 자들이 되도록 훈련의 기회도 열심히 제공했다.대중에게 나아갈 수 있는 이유종교적인 신념을 드러내지 말 것을 강요하는 세속적인 시대에서,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현대 문화에서 인식하는 신앙의 역할은 개인의 정서에 평안을 안겨주는 것이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변화시키는 거듭남이 전혀 아니다. 달리 말해,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적대적인 반응을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뉴욕 같은 대도시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친구나 이웃, 혹은 직장동료에게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당혹감을 느낀다. 즉, 도시인들은 대중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기 어려운 문화 속에 살고 있다.그러나 리디머교회의 경우, 초창기부터 기독교 신앙을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바로 교회의 성도가 그들의 직장동료나 이웃에게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공개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리디머교회는 대중을 향한 우리의 나아감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고, 이러한 정신을 꾸준히 계승하고자 한다. 물론 이 과정은 때로 불편하고 어렵다. 동시에 비기독교인들의 요구 못지않게 기존 성도의 요구도 충족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필요를 한발 양보하는 마음과 훈련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편협하고 자기 방어적이며 결국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이처럼 대중과 신앙을 나눌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복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엄청난 힘을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경이로움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둘째, 복음의 본질인 겸손은 우리가 비기독교인에게 나아갈 때, 우월감이 아닌 존경심을 가지고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선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기독교인들에게 우리보다 나은 지혜와 자비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다.셋째,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타인의 거부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복음을 전하는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 행위는 바로 비기독교인들과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교회로 나아올 수 있도록 관심을 갖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전도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수단적으로 혹은 비인격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믿음을 공유하기 위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 믿음과 삶을 공유한다. 이런 복음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강력하게 나타날수록, 교회는 비기독교인들을 자석과 같이 강력하게 이끌 수 있다(행 2:47).대중에게 다가가는 방법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첫째, 권위적이기보다는 지성적인 접근으로 믿음에 대해 나눠야 한다. 우리는 신앙 없음이 어떤 종류의 마음 상태를 의미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하고, 또 사람들이 단순히 진리에 대해 듣기만 하면 믿음을 갖게 되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다.둘째, 우리는 단번의 행사로 복음을 제시하는 접근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을 제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복음에 노출될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복음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속한 상황 안에서 기독교에 대한 답을 찾아가도록 도울 수 있다.셋째, 우리는 복음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전제주의적’(presuppositional) 접근을 취해야 한다. 여기서 전제라고 함은 모든 사람, 심지어 회의론자들도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롬 1:18-25).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통찰력, 즉 하나님에 대한 단서를 그들 안에서 찾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어떻게 하면 그들이 창조자에게 돌아갈 수 있는지 그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과정’에 있던 한 사람이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고백할 때에 따뜻하게 화답하셨다. 우리의 공동체도 이와 같은 고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한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이런 일들을 해야 하는가? 어느 곳에서든 해야 한다. 리디머교회는 신앙에 회의적인 사람들을 위한 안내 매트(Doubters Welcome mat)를 모든 예배와 모임에 비치해두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또 나누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예배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들로 행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이 예배 후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공부와 활동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신앙 연수와 상관없이 누구나 서로 참여할 수 있도록 공동체의 여러 모임과 행사를 늘 사람들에게 열어 둔다.신앙을 대중에게 드러내도록 교인들을 훈련시키는 일은 곧 세상에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신앙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과 같다. 다시 말해, 이 훈련은 우리가 대중 지향적인 공동체가 되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수시로 나눌 수 있게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동료들의 의구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들이 마침내 복음의 소망에 빠져들도록 해야 한다. 대중을 향해 나아가는 공적 신앙(Public Faith)은 건강한 크리스천의 결정적인 모습이다.리디머교회는 믿지 않는 자들과 떨어져 사는 것이 어려운 대도시에서 사역하기 때문에 오히려 복을 받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도시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자연스럽게 믿지 않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리디머교회는 그 출발부터 교인들이 “만약 내가 믿지 않는 친구들을 우리 교회에 데려온다면, 그들은 기독교가 얼마나 강력하고 합리적인지를 보고 놀랄 것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소원해 왔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과 행동을 계속해 나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계속해서 변화시킬 것이다.참고공적 신앙(public faith)은 진정성 있는 관계를 전제한 개념으로서 우리 자신만의 사회적 · 영적 안전 지대를 넘어서는 신앙을 가리킨다. 궁극적으로 공적 신앙은 성령님이 우리의 관계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신다고 믿는 태도이다. 비록 많은 크리스천들이 고립적인 혹은 개인적인 신앙인에 머무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더욱 공적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고 바란다.개인 신앙(private faith)을 가진 사람은 다른 종류의 믿음을 가진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지만 개인적으로 그 친구들에게 믿음을 솔직히 드러내지는 않는다. 고립 신앙(secluded faith)을 가진 사람은 크리스천 친구들이 많지만, 다른 종류의 믿음을 가진 친구들은 거의 없다. 따라서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는 믿음을 드러내지만,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신앙을 나누는 일이 거의 없고 그들에 의해 도전을 받을 일도 없다. 공적 신앙(public faith)을 가진 사람은 크리스천 친구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믿음을 가진 친구들과도 가깝게 지낸다. 또한 겸손하고, 따뜻하며, 대중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모든 이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여러 친구들로 구성된 다양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ublic Faith-How to Share the Hope You Have in Christ번역: 김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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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머장로교회
대중
크리스천
복음의본질
공적신앙
종교적신념
공동체
종교개혁 이전의 복음중심적 신학
by Gavin Ortlund
2018-11-30
최근 복음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로 개종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젊은 세대나 훈련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는 신학을 공부한 목사와 교수, 그리고 복음주의신학회(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회장까지 포함되어 있다.물론 이 현상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다. 개인의 경우는 각기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종종 회자되는 이유 중 하나는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가 제공하는 깊이 때문이다. 침례교인이었던 어떤 사람은 ‘나는 왜 가톨릭 신자인가’(Why I’m Catholic)라는 웹사이트에서 자신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일을 교회사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설명했다. 한때 장로교인이었던 어떤 이는 ‘교제로의 소명’(Called to Communion)에서 자신이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된 일을 ‘정통 기독교’로 입문하는 과정으로 표현했다. 또 영국 성공회의 신자였던 한 사람은 ‘정교회로의 여정’(Journey to Orthodoxy)에서 동방 정교회의 예배 형식을 통해 사도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 얼마나 복된지를 묘사했다.개신교 진영 내부에서도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교파(가령 중도파에 해당하는 영국 성공회)로 이동하거나 예배와 영성에 있어 더욱 전통적인 형식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나보다 젊은 개신교 친구들도 대부분이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를 신앙 서적으로 애독하지만, 존 엘드리지(John Eldredge)의 책은 보려 하지 않는다. 찬송가 작사가 늘어나는가 하면, 많은 복음주의자들도 전통적인 형식을 강조하는 예배 달력(the liturgical calendar)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이러한 흐름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던 세대들의 정처 없는 삶과 불안감이 주된 요소라고 생각한다. 현세대의 한 가운데에는 깊은 허무감, 고립감, 단절에 따른 불안감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고전적이고 장엄한 것에 대해, 초월적이고 전통적인 것에 대해, 그리고 안정적이고 견고한 것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을 품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복음주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올해 스물 아홉 살인 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겪는 방향 상실, 다시 말해, 인생을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이 시대의 방황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기 위해 복음주의를 포기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역사적 뿌리에 대한 목마름은 개신교와 복음주의에서도 충분히 만족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가톨릭(Catholic) 신자가 되지 않고도 공교회적(catholic) 신자가 될 수 있고, 또한 정교회(Orthodox) 신자가 되지 않고도 정통적인(orthodox) 신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한 복음중심적 사역’(gospel-centered ministry for the next generation)을 추진할 때, ‘복음적인’ 신앙과 ‘역사적인’ 신앙, 혹은 ‘복음중심적’ 사역과 ‘역사중심적’ 사역을 함께 추구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복음중심성(gospel-centeredness)은 그 자체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복음주의자들과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사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사도 요한과 마틴 루터 사이의 교회 역사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는가?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은 마치 교회사의 중요한 내용들이 1세기에서 갑자기 16세기로 건너뛰며 전개된 것처럼, 그 중간의 역사를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우리는 어거스틴(특히 그의 ‘고백록’)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일찍이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둘러싼 주요한 논쟁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일부 용감한 순교자들이 그 논쟁들 배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설교나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의 시를 감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우리의 전통이 지난 2 천 년에 걸친 견고한 역사라기보다, (몇몇 선구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의) 약 5백 년 정도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에 친숙하지 않은 시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9세기에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언어가 아니라 실재하는) 복음중심성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을까? 오늘날 우리가 지지하는 목회 방식은 교회사 전체와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까?오늘날 개신교인들이 이런 질문들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경향은 초기 종교개혁자들이나 개신교 진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지 재창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참된 복음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일이 결코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루터나 투레틴처럼) 심지어 로마 가톨릭 신학에 대해 가장 공격적이었던 비판가들조차 하나님은 거대한 부패와 타락의 시대에도 항상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셨음을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반종교개혁(the Counter-Reformation) 신조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어거스틴과 교부들에게 호소했을 때, 칼빈은 “누가 어거스틴과 교부들에 대해 신경이나 쓰는가?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종교개혁 신학과 교부 신학 사이의 연속성을 수립하기 위해 교부들을 열심히 연구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모토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임을 의미하지, 다른 것들이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다.가족 앨범나는 개신교인으로서 종교개혁 신학이 복음을 수호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건실한 개신교인으로서 중세 기독교의 좋은 가르침을 배우는 일 역시 가능하다고 믿는다. 교회는 성곽들과 성당, 수도사와 수도원, 활과 창,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시대 동안 완전히 침체되어 있다가, 루터의 95개조 논제와 함께 갑자기 재부상한 것이 아니다. 까에드몽(Caedmon)과 샤를마뉴(Charlemagne) 및 초서(Chaucer)의 바로 곁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견고하고 안정된 기독교의 줄기가 존재한다. 수많은 전진과 후퇴, 부패와 개혁의 역사 속에서도 예수님은 항상 교회를 세워 오셨기 때문에(마 16:18; 사 42:4), 우리는 중세 신학으로부터도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의 가르침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기독교 후기 시대, 곧 방향을 잃고 헤매는 문화적 상황 속에서 좋은 목회 자료로 쓰일 수 있다.물론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프로테스탄트의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는 위험한 일도 발생할 수 있다. 또 한편, 특정 교단의 가르침에만 고립되면 전체적인 기독교 전통과의 연결점을 상실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결국 오늘날 개신교인들에게는 균형 있는 역사적 정체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불연속적인 부분을 인식하고 겹치는 부분들은 장려하면서, 최근의 5백 년과 그 이전의 1천 5백 년 양자에 모두 연결되어야 한다. 교부 시대의 어느 아프리카 신자가 한 말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나는 기독교인이며 기독교에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이질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말이 종교개혁 이전 교회사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를 정확히 집어 준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받은 유산과 정체성의 일부이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는 가족 사진들이 정리된 앨범이다. 가족 앨범에는 다양한 사진들이 존재한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친척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삼촌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혹 결점과 흠, 또는 다른 문제들이 있더라도 나의 가족은 여전히 나의 가족이다. 나 자신을 그로부터 끊어내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종교개혁 이전의 역사에 대해 인식하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마크 놀(Mark Noll)의 ‘전환점: 기독교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들’(Turning Points: Decisive Moments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이라는 책의 첫 여섯 장이 2차 자료로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세 개의 1차 자료들을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 작품들은 모두 오늘날 개신교인들에게 널리 읽힐 만한 가치가 있는 고전적인 신학 자료들이다.1. 보에티우스(Boethius)의 ‘철학의 위안’(The Consolation of Philosophy)이 책은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책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거의 잊혀졌다. 이에 대해 C. 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각에 약 2백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 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이 책에 맛을 들이는 것은 중세 시대에 동화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보에티우스가 524년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운문과 산문의 교차 형식으로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고통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주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5권에서는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고전적 난제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 논의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2.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의 ‘목회지침서’(The Book of Pastoral Book)칼빈은 이 책의 저자인 그레고리 대제(약 540-604년)를 본받을 만한 마지막 교황이라고 불렀다. 이 책은 목회신학의 고전으로서 모든 목회자들이 일독할 필요가 있다. 그레고리 대제의 주장에 따르면, 목회는 내면적 특성과 외면적 특성, 즉 이론과 실천, 명상과 활동, 금욕과 행정, 초월적 거룩함과 세속적 지혜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요구한다. 이런 면에서 그의 글은 한 영역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강한 목회자들에게 유익한 일깨움을 준다. 이 책의 좋은 번역본은 초기 기독교 사상을 접하는 데 훌륭한 자료 역할을 하는 블라디미르신학교의 교부학 시리즈(Popular Patristics Series)에서 찾아볼 수 있다.3. 안셈(Anselm)의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안셈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기 위해 ‘존재론적 증명’을 제안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 책에 담긴 풍부한 신학과 열정적인 기도는 본 작품을 매우 유익한 읽을거리로 만든다. 나의 박사 학위 연구는 24-25장에서 안셈이 말한 천국 교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나의 기쁨과 놀라움이 바로 이 글을 쓰게 된 주요 동기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끝으로,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 작품들을 평가절하하는 이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잘 번역된 프로슬로기온을 찾아서 “들고 읽어라!”(tolle le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earching for Gospel-Centered Theology Before the Reformation번역: 주영식
역사
중세교회
종교개혁
개신교
복음주의
마크놀
순전한기독교
보에티우스
그레고리대제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신 일곱 가지 이유
by Dennis Johnson
2018-11-30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내가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예수님의 재림 시점을 알도록 도와주시기 위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또는 “중동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대환난에 대한 악몽을 일깨움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휴거를 놓치지 않게 하시려고”, “크리스천에게 논쟁거리를 제시하시기 위해”, 또는 그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시려고”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대답은 이들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계시를 준 이유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곧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은혜를 주사, 우리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상징적으로 의미심장한 횟수인) 일곱 차례에 걸쳐 복을 약속하신다. 그 약속은 계시록의 메시지를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계 1:3; 22:7),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계 14:13),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는 자들에게(계 16:15),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들에게(계 19:9),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계 20:6), 그리고 어린양의 피로 옷을 씻는 자들에게(계 22:14) 주어지는 복이다.계시록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계획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매일의 삶에서 직면하는 영적 싸움에 승리하도록 우리를 무장시키기 위함이다. 내가 쓴 계시록 주석인 ‘어린양의 승리’(Triumph of the Lamb)의 말미에서, 나는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아래 내용은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1. 계시록은 현재 상황의 이면을 제대로 보도록 도와준다흔히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추세나 세계적인 위기 상황에 관한 뉴스에 근거하여 오늘날 진행되는 ‘전쟁’을 평가한다. 그러나 계시록의 환상들이 보여주는 역설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고후 5:7)한다는 진리를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기력한 어린양을 도살하는 사건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유다 사자의 승리였다(계 5:5-10). 신실한 순교자들이 피를 뿌릴 때는 대적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계 11:7; 13:7), 순교자들은 사탄을 물리친 진정한 승리자들이었다. 곧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계 12:11) 아니하였다.2. 계시록은 대적들의 정체를 드러낸다우리의 대적은 생각보다 더 강하고 교활하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 그러나 여자의 후손이 와서 그 뱀을 물리치고 승천하셨다(계 12:5). 그러므로 사탄은 더 이상 참소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그의 참소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계 12:10-11). 십자가 사건으로 패배한 사탄은 지상의 교회에 그 분노를 터트린다(계 12:12-17). 그의 무기는 격렬한 핍박(짐승), 그럴 듯한 기만(거짓 선지자), 그리고 기만적인 쾌락(음녀 바벨론)이다. 따라서 강한 정부나 거짓 종교 또는 사치스런 방종이 ‘구원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속지 말라. 이들은 당신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 계시록의 상징은 이처럼 사탄이 사용하는 무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3. 계시록은 챔피언인 그리스도를 참된 영광 가운데 계시한다 제목이 말하듯이,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계 1:1). 계시록은 예수님을 계시하고 우리의 마음과 소망이 그분을 향하도록 이끈다. 예수님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모든 극적 장면의 영웅이시다. 또한 다니엘서 7장에 예언된, 신성한 영광으로 빛나는 인자이시다. 자신의 부활로 사망의 열쇠를 움켜잡고 교회들 가운데 거하신다. 또 죽임을 당함으로써 승리한 분이고, 세계 만민을 구속하신 유다의 사자이시다. 또한 그는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시다. 천군의 대장으로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성도들을 보호하며, 용과 짐승들을 마침내 멸하신다. 우리의 챔피언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는 약속으로 우리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진다(계 22:20). 이에 대하여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한다(계 22:20). 4. 계시록은 참된 아름다움 가운데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해 준다아시아 교회들에게 보낸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분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정확히 지켜 보시며(계 1:14; 2:18), 우리의 신실함을 칭찬하는 동시에 허물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계 2-3장). 이 세상의 교회들이 완전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을지라도, 우리의 신랑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처럼 우리를 준비시키시며,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계 19:8) 입히기까지 쉬지 않으신다(계 21:2). 이처럼 계시록은 다가오는 결혼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까닭에 우리는 장차 온전해질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다(요일 3:2-3).5. 계시록은 고난 가운데 인내를 요청한다계시록의 원래 독자는 신앙 때문에 고난받는 크리스천들이었다. 그들은 궁핍, 비방, 투옥, 심지어는 죽음을 겪었다(계 2:9-10, 13).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된 사탄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역사를 완결하실 때까지 성도에게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전쟁을 피하는 삶이나 고통 없는 인생을 약속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그분은 “세세토록”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신다(계 1:18). 이 약속을 믿는 우리는 인내를 요구하는 왕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계 1:9; 2:2-3, 10, 13, 19, 25; 3:8, 10; 13:10; 14:12).6. 계시록은 타협이 오더라도 순수함을 지키라고 요청한다21세기의 여러 교회들처럼, 1세기의 어떤 교회들은 핍박보다 더 교묘한 위협에 직면했다. 사탄이 거짓 교훈을 퍼뜨려 성도들을 현혹시키려 한 것이다(계 2:15, 20). 또한 물질적 위안이 부르는 세속주의나 주변 문화로부터 유입되는 이교주의도 유혹적이었다(계 2:14; 3:17). 이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교활한 공격은 지금 우리에게도 가해지고 있다. 쾌락과 번영을 우상화하는 마귀의 거짓에 대항하여, 계시록은 흰옷 입은 어린양의 신부가 될 자들에게 순전한 마음과 생활을 지키라고 요청한다(계 3:4-5, 17-18; 7:9, 14; 14:4; 19:7-8; 22:14-15). 7. 계시록은 우리가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인내로써 순전함을 지키라고 요청하는 계시록의 당부는 그저 위험한 세상을 피하여 벙커에 숨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증언하라는 계시록의 가르침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martyr는 ‘증언’을 뜻하는 헬라어 ‘마르티스’(계 2:13)에서 유래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섬에 있었다(계 1:9).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고 자신의 증언을 피로써 보증하는 증인으로 묘사된다(계 11:4-12).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소심하게 침묵하지 않으며 예수님이 만유의 주이심을 담대히 선언함으로써 고난 당하는 자들이다. 우리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은 계시록 7장의 환상을 성취하신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신 이유는 가르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시기 위함이다. 계시록은 우리의 상황, 대적, 챔피언, 그리고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통찰하게 해 주며, 또한 순전한 소망 중에 인내하며 용기 있게 복음을 증언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Seven Applications of Revelation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신약
신약성경
계시록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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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
외로움에 대처하는 잘못된 반응
by Ashley Chesnut
2018-11-30
삶이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아 실망한 홀리(Holly)는 그녀가 싱글맘으로서 직면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외롭고 지쳐 있었다.우리가 만났던 날, 최근 서른이 된 제시카(Jessica)는 비슷한 또래의 크리스천 싱글맘을 만난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독신으로서 고생하고 있는지에 대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느끼는 외로움과 고통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원했던 것이다.이러한 대화는 주로 싱글인 사람들과 나누게 되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대상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다. 전업주부로서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보는 엄마도 외로움을 느끼고, 가정에서 홀로 신앙생활하는 10대도 외로움을 느낀다. 또한 선교사도 사역지에서 언어와 문화 때문에 외로움을 느낀다.외로움은 인간의 공통적인 경험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외로움이 삶에 불쑥 찾아온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여기서 나는 외로움에 대한 잘못된 반응들을 소개하고자 한다.1.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다본질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느끼고 관찰하며 고민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외로움을 느낄 때, ‘왜’ 그런 식으로 느끼는지를 인식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신학생 시절에 한 상담학 교수는 모든 감정은 신학적 표현이라고 말하곤 했다. 당신의 외로움은 하나님과 당신 자신, 그리고 현재 상황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당신이 현재 갖고 있지 않지만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외로움의 뿌리가 될 수 있는 당신의 생각과 믿음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라.2. 건강하지 않은 방법으로 대응한다외로움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죄를 범할 수 있다.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한 여성은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포르노와 자위, 그리고 지나친 의존 관계(codependent relationship)를 선택했다. 이 지나친 의존 관계에 대한 생각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나는 외롭다고 느끼기 때문에, '내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감정이 생겼다. 그는 동성일 수도 있고 이성일 수도 있지만, 그가 누구이든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해결해 주기를 기대한다. 나는 그가 내 외로움을 달래주고 만족시켜주면 좋겠다. 또한 나 자신을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고, 나를 위로해주기 원한다. 나는 그에게 감정적으로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붙잡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런 관계는 우상이 되었고, 그는 나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그리고 포르노와 자위에 대한 생각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나는 지루하고 외롭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감정을 진정시킬, 최소한 한동안 지연시킬 무엇인가를 찾을 것이다. 나는 스크린 속에 있는 사람이 나를 원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나를 자극해서 위로할 것이다.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때, 하나님 대신 사람이나 다른 무엇으로 관심을 돌리기 쉽다. 따라서 절망에 빠지려는 유혹, 건강하지 않은 관계의 추구, 자위, 하나님을 향한 분노 등 외로움이 부르는 건강하지 못한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죄성을 이해하고, 스스로 방어벽을 쳐야 한다. 책임감을 갖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3. 진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의 감정은 죄로 더럽혀져 있다. 따라서 단지 우리가 무엇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감정은 무조건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고 검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이 외로움을 느낄 때, 무엇이 진리인지를 스스로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절대로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신 31:6).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느낌을 받는지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매달릴 때 외로움의 고통을 느끼셨다(마 27:46; 사 53:3).하나님은 위로의 아버지시다(고후 1:3-4). 당신이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로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시 34:18).하나님은 당신의 상황과 고통에 엄청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롬 8:28). 그 목적은 철회되지 않는다.이런 사실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외우고, 스스로에게 설교하라.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으로 당신의 외로움을 즉시 해결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외로움의 길’(The Path of Loneliness)에서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의 외로움이 항상 치유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때 아름다운 경험으로 바뀔 수가 있다. 외로움은 마치 귀중한 보물이 묻혀 있는 밭과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밭을 사야 한다. 혹 그 밭이 아름다운 초원이 아닌 황량하고 텅 빈 벌판일지라도, 거기에 보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주변의 모든 그림은 변하게 된다. 버려진 찌꺼기와 같이 잊혀진 그 땅은 갑자기 가능성이 가득한 장소가 된다. [중략] 이처럼 외로움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을 통해, 전에는 아무도 원치 않는 잊혀진 땅과 같았던 외로움은 이제 보물이 숨겨진 장소로 변하게 된다.”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또 당신을 선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 외로움을 아름다운 경험으로 바꾸실 수 있다. 따라서 외로움을 하나님께 맡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한다. 만일 또 다른 외로움이 닥친다면, 당신의 구원자이고 친구가 되시는,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 그 외로움을 가지고 나아가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Unhealthy Responses to Loneliness번역: 김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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