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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
by Vaneetha Rendall Risner
2022-07-26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 나는 에벌린 크리스텐슨(Evelyn Christenson)의 책 What Happens When Women Pray(여자가 기도할 때 무슨 일이 생기는가)의 제7장 제목인 이 문장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솔직히 말해,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나는 이 문장을 냉소했다. 진부하고 순진하게만 들렸다. 나는 작가가 인생에서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거라고, 그랬다면 이처럼 대담한 주장을 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교만하게 추측했다. 내 생각에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절대 실수하지 않으셨다는 주장은 이 세상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악과 고통의 현실과는 일치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크리스텐슨의 말에 너무 짜증이 나서 나는 책을 던지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그녀의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막 큰딸을 임신함과 동시에 닥쳐온 결혼 위기의 여파를 겪고 있었다. 나는 우리 부부가 다시 원상회복한 것에 감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수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소리로만 들렸다. 내 삶은 이미 여러 면에서 어려웠다. 유아기에 앓은 소아마비로 나는 수도 없이 병원을 들락거렸다. 초등학교 내내 왕따를 당했고, 최근에는 무려 세 번이나 유산을 겪었다.시련으로 얼룩진 내 삶을 되돌아볼 때,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내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내 모든 고통?절대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이 적어도 내가 처음으로 겪었던 일부 고통에는 함께하셨다고 믿었다.열여섯 살 먹은 내가 그리스도께 나왔을 때, 나는 이미 장애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우연히 요한복음 9장을 읽었고, 거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가리켜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가 지은 어떤 죄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하나님이 지금 내게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내 고통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고, 그로 인해 삶과 역경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바뀌었다.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는 육체적인 어려움을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그 원칙이 나의 모든 고통에 다 적용되는지는 의심스러웠다.하나님의 주권회의적이었지만 내가 인도하는 교회 독서 토론회의 책이 크리스텐슨의 책이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읽어야만 했다. 모임 전에 성경을 숙고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지혜와 인도를 구했고,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주권과 목적에 대한 구절에 끌렸다. 나는 관주 성경을 이용해서 특히 눈에 띄는 구절로 목록을 만들었다.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마태복음 10:29-30.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욥기 42:2.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성취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뜻뿐이다. 잠언 19:21.처음부터 내가 장차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였고, 내가, 이미 오래 전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미리 알렸다. ‘나의 뜻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이룬다’고 말하였다. … 내가 말하였으니, 내가 그것을 곧 이루겠으며, 내가 계획하였으니, 내가 곧 그것을 성취하겠다. 이사야 46:10-11.말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 구절들을 읽고 또 읽었다. 내가 흔들 수 없는 진리토론이 시작되자 나와 마찬가지로 다들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라는 이 한 문장에 사로잡혔다. 일부는 확신에 차서 반대했다. 하나님과 실수를 연결한 구절에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세상에서 힘든 일이 일어나긴 하지만, 우리는 그걸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운 경험 또는 상실로 인한 어려움을 나누기도 했다. 한 자매가 그랬다. “로마서 8장 28절, 다 알잖아요? ‘주를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것을 다 통제하고 계시고, 결국에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모든 어려움을 사용하신다는 거잖아요.” 멋진 말이었지만, 내게는 진리가 아니라 그저 허공에서 둥둥 떠다니는 진부하고 순진한 소리로만 들렸다. 그 어떤 공감이나 이해심도 없이 단지 교리에만 매달린 것 같은 그녀의 단호한 주장에 나는 다른 관점을 옹호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그렇지만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쩐지 내 속 깊은 곳에서 나는 저자의 말이 성경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며 이게 인생을 바꾸는 진리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나는 내 믿음을 독서 모임에서 선포했다.내 아들이 왜 죽었냐고요? 몇 주 후에 나는 믿음을 시험할 상황을 만났다. 20주 정기 초음파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 폴에게 수술이 필요한, 생명을 위협하는 심장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나는 그 문장이 내 어휘가 될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러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내게 임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이 말이 임신 기간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태어나자마자 성공적인 수술을 받은 폴은 경과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달 정도가 지나 의사의 부주의로 갑자기 사망했다. 솔직히 멍하기만 했지만, 남편과 나는 장례식에서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반복했다. 우리 부부는 그 말을 통해 주님 안에서 소망을 찾기 위해 서로를 도왔다. 장례식에서 한 말은 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고 몇 주가 지나자 갑자기 그 말이 공허하고 진부하게만 느껴졌다. 내 아들이 왜 죽었지? 하나님은 왜 죽음을 허락하셨지? 그건 의사의 부주의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하나님이 실수하신 거 아니야? 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내게는 공허하고 건조하게만 보였다. 말이 되는 게 없었다. 그 어떤 말도 마음속에서 튕겨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왔다. 몇 달이 지나고,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나를 다시 당신께로 이끄셨다. 차 안에서 흐느끼다가 과격하다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만났고, 내가 밀어냈던 말씀 속에 굳건한 진리가 있음을 보았다. 거기에는 내 삶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모든 말이 다 들어있었다. 가장 어두운 날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말이 다 담겨있었다. 아, 폴을 만드신 하나님, 폴을 우리에게 잠시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다시 폴을 데려가신 하나님, 하나님은 그 어떤 과정에서도 실수하지 않으셨다. 우리 아들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목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하나님의 플랜 A폴이 죽은 후 나는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가 쓴 When God Weeps(하나님이 울 때)를 읽었다. 그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조니는 말한다.둘 중 하나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거나, 아니면 사탄이 세상의 의제를 정하고 하나님은 단지 거기에 반응할 뿐이거나. 후자라면, 전능자는 단지 사탄의 청소꾼이 되어서 마귀가 짓밟고 지나간 뒤처리를 하면서,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끌어낼 방법을 찾는 수준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최선의 계획, 플랜 A가 아니다. 결코 그건 그가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아무리 나중에 수습한다고 해도, 그 경우에 당신이 겪는 고통 그 자체는 무의미한 것이다(84).크리스텐슨의 그 문장처럼, 조니의 말이 나에게 강하게 와 닿았다. 나의 고통에는 의미가 있었다. 고통 모든 부분 부분이 다 의미가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플랜 A를 살고 있다. 조니의 말을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써 인생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고, 가장 어두운 시련을 헤쳐나갈 힘을 얻었다. 나는 다시 하나님의 손길을 찾았고, 내 고통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음에 감사할 수 있었다. 악몽 속에서조차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 이 말은 내 삶을 빚고 다시 빚었으며, 많은 폭풍우를 뚫고 내 삶 속에서 닻을 내렸다. 소아마비후증후군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이 말을 붙잡았다. 첫 남편이 나를 떠난 뒤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 말을 되풀이했다.내게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악몽이 현실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말이다. 하나님은 나의 선과 그의 영광을 위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과라도 사용하실 것이다. 크리스텐슨은 말한다.몇 년 동안의 시련과 어려움을 겪은 후, 모든 것이 다 당신의 선을 위해서였고, 또한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 때에 도달하는 곳,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깨닫는 바로 그 자리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 모든 곳에 자리 잡은 “만약에 그때 그랬더라면…”을 다 알고 계셨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당신은 이제 시련 중에서도 기쁨을, 그것도 깊은 기쁨을 가질 수 있다(89-90).몇 년 전,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크리스텐슨이 말하는 수준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감사한다. 에블린 크리스텐슨이 겪은 다양한 시련 속에서 함께하시면 그녀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동일한 하나님이 나와도 함께 걸으시고 나에게도 동일한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죽으시고,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시는 예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뜨겁게 감사한다. 원제: God Never Makes a Mistak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감사
고통중에감사
에블린크리스텐슨
조니에릭슨
의료사고
성숙한신앙
시련
하나님의뜻
거대한 우주 너머에, 그리고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by Chris Martin
2022-07-25
과학 교육을 유별나게 강조하는 초등학교에 나를 입학시킨 부모님 덕분에 나는 천문학과 밤하늘의 신비에 푹 빠져들었다. 우리 학교에는 초급 천문대도 있었고, 나는 그 시절 여느 아이들처럼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저런 게 정말 저 하늘에 다 있을까?”그리고 스타워즈,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그리고 특히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서 천문학을 가르치셨던 제임스 루소 선생님이 내 가슴에 호기심의 불을 붙였다. 별들을 너무나 좋아하셨던, 그리고 그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셨던 루소 선생님은 우주에 대한 내 열정이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에게 닿을 수 있게 해주셨다. 그래서 나사(NASA)가 지난 크리스마스에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을 발사했을 때, 나는 이 망원경이 몇 달 뒤에 보내올 것들을 기대하면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난 천문학자가 아니다. 밤하늘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다. 창피하게도 망원경도 없다. 하지만 최근에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보내온 이미지들을 관찰하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장엄함에 놀라 숨을 헐떡이는 데는 굳이 천문학자가 될 필요도 없고 망원경을 장만할 필요도 없다. SMACS 0723 이미지를 찬찬히 보자. 나사가 “지금까지 먼 우주에서 가장 깊고 선명한 적외선 이미지”라고 부르는 그 이미지 말이다. 며칠 전에 제임스웹의 첫 이미지들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 생각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중요하다.그 이미지들을 보면서 우리 우주가 얼마나 거대한지 상상하면, 오늘 직장에서 있었던 힘든 일도, 곧 있을 휴가도, 나의 멋진 가족도 특별히 중요할 게 없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곧바로 광대한 우주의 티클 만한 이 행성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음미하고 볼 수 있다는—그리고 그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다는—생각을 하면,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가?우주의 거대함을 파악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나사는 SMACS 0723 이미지가 “팔을 쭉 뻗은 공간 안에 있는 모래 알갱이 한 알만 한 크기”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모래 알갱이 하나를 찾아서 밤하늘에 올려놓고, 그 안에 우리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수천수만의 은하들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는 더 많은 은하가 분명히 존재한다. 가장 깊은 우주의 먼 과거를 바라보면서 나는 궁금해졌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실까?”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우주 저편의 은하에 있는 먼 행성에 계시면서 그의 나라가 지구에 임할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깊은 우주와 우리가 우주-시간을 통해 되돌아보는 먼 과거를 초월하여 계신다. 그러나 내가 SMACS 0723 이미지에 처음 시선을 고정했을 때, 고백하건대 나의 경이로움은 의심과 섞여 있었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실까?그렇다. 말씀으로 수조 개의 별들을 존재하게 하신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든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가장 먼 은하계들을 넘어서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또한 그 은하계들을 둘러싸고 계시며, 그리고 그 은하계들을 통하여 실제로 존재하신다. 우주의 거대함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하나님이 그보다 더 크고 그 너머에 계신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훨씬 더 어렵다. 그렇다.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믿기 어렵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수 있다!우주의 가장 깊은 범위에 있는 수천 개의 은하를 담고 있는 SMACS 0723 이미지는 많은 사람이 제임스웹 우주 망원경을 통해 본 최초의 이미지이다.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이 정말로 그런 이미지를 넘어서실까 생각했다. 그러나 카리나성운 이미지(아래)를 보았을 때, 나는 깨달음의 답을 얻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모든 것 배후에 계실 수 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의 배후에 계시고, 이 모든 것을 품으시고, 또 이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실 뿐만 아니라(시 121; 사 40:28), 이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다(렘 32:17).오직 하나님만이 이러한 아름다움을 빚어내실 수 있다! 오직 한없이 강하신 하나님만이 이토록 헤아릴 수 없이 크고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으셨다.어떤 이미지가 130억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우주의 먼 과거를 보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상당히 긴장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것이다. 우주의 나이를 둘러싼 논쟁들이나 창조론과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들은 교회 안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카리나성운이 존재하고 하나님께서 이 성운을 창조하셨다는 것에 경외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음식이 꼭 맛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꽃이 꼭 향기로워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몇 광년 높이의 우주 절벽이 있는 카리나성운이 꼭 아름답고 신비로워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 우리는 카리나성운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보는 것만 같다(시 33:6). 하나님께서 별을 탄생시키는 초거대 광경을 만드시면서 아름다움까지 더하셨다. 지금까지는 어떤 인간도 이것을 보지 못했다. 우주의 어느 구석에는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다른 비길 데 없는 경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감지하지 못한, 당신의 지극한 즐거움을 위해 또 어떤 영광을 손수 빚어두시지 않았을까? 그분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폭발적인 창조성은 끝이 없으니 우리는 결코 그 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지구라고 불리는 우주 암석의 조각에 있는 한은 말이다. 영원의 이쪽에 있는 한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신다하나님은 당신의 이름과 내 이름을 아신다. 그리고 그는 지금 카리나성운에서 태어나고 있는 별들의 이름을 아신다(시 139:13-14; 시 147:4).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무엇을 보여주건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은 또한 당신 안에 계시고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고, 우리처럼 사시고 죽으신, 그리하여 그를 통하여 우리가 영원히 그와 함께할 수 있게 하신, 작고 연약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아마도 당신도 나처럼 이 놀라운 이미지들을 보고서는 궁금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은 정말 이렇게 크신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나만 이렇게 크다. 그리고 너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엡 3:20)그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시다(골 1:16). 당신을, 나를, 그리고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은하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온 피조물이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소리높여 외친다(롬 1:20). 그 합창에 참여하자(시 95:6; 계 5:13). 원제: God Is Beyond and Behind the Enormous Univers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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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I. Packer
2022-07-24
제임스 이넬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년 7월 22일 - 2020년 7월 17일) 은혜란 무엇인가? 신약에서 은혜는 사랑과는 정반대되는 것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행동으로 베푸시는 사랑을 의미한다. 은혜란 자신을 구원하고 싶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죄인들을 향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움직이시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란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하늘 나라에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로 보내셔서 지옥에까지 내려가도록 하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신약은 은혜의 뜻과 은혜의 역사 둘 다에 대해 말한다. 은혜의 뜻은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다. 은혜의 역사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너희 안에서 [행하신] 착한 일”(빌 1:6)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을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교제로 부르시며(고전 1:9),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리시고(엡 2:1-6), 하나님의 영을 선물로 주사 당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치시며(엡 1:13-14), 당신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며(고후 3:18), 마침내 영광중에 서 당신의 몸을 살리실 것이다(롬 8:30; 고전 15:47-54).수년 전 개신교 학자들 사이에서는 은혜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와는 별개로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비성경적 구분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10을 보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라는 말은 분명 바울 안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 사랑의 역사로 바울을 먼저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다음에는 사역자로 만드셨다.은혜의 목적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리하여 이 회복된 관계의 기초를 놓으시는 것은, 이후로는 우리가 그분과 교제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을 향해서 사랑과 신뢰와 기쁨과 소망과 순종을 보여 드릴 수 있도록 만들며, 사실상 그러한 행동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서다. 우리 편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행동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더욱 깊어지는 지식 그리고 하나님과 계속 친밀해지는 교제야말로 모든 은혜의 역사가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그분께로 점점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이다.하나님은 은혜 안에서 어떻게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시는가? 그분은 우리를 세상과 육신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막아 주시거나, 부담스럽고 좌절되는 환경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거나, 우리 자신의 기질과 심리로 인해 생겨나는 문젯거리들을 막아 주시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이 모든 것에 노출되도록 하신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함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께 더욱 매달리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이러저러한 괴로움들과 당혹스러운 일로 채우시는 궁극적인 이유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꼭 붙잡는 법을 확실히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강력한 반석이시며, 견고한 방어물이시고, 확실한 피난처시며, 연약한 자들의 도움이시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데 그처럼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이유는,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연약하다는 것과, 옳은 길을 찾거나 따르기 위해 감히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많은 시간을 소비하시기 때문이다.기분 좋게 거칠 것 없는 길을 따라가는데 누군가가 우리를 돕겠다고 팔을 잡아 준다면, 우리는 성급하게 그 사람을 뿌리쳐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폭풍우가 점차 거세지고 힘은 다 빠져 가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거친 시골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우리를 돕기 위해 팔을 잡아 준다면,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기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이 험하고 혼동스러울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경건한 삶의 비결을 가르쳐 주는 전형적인 성경의 문구를 빌린다면 ‘여호와를 앙망하도록’ 하기 위해, 조처를 취하신다.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 진리는 여러모로 적용된다. 가장 놀라운 적용 중 하나는 하나님이 사실상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 죄와 실수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패와 실수라는 교육적 징계 수단을 매우 자주 사용하신다. 성경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경건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와, 그로 인해 하나님이 그들을 연단하시는 것에 대해 다루는가!아브라함은 아들을 약속받았으나, 그 아들을 갖기까지 기다려야 했고, 참지 못하여 섣불리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를 시행하려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그에게 말씀하시기까지 13년을 기다려야 했다(창 16:16-17:1). 모세는 권력을 휘두르고, 애굽인을 죽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사사로운 문제까지 해결하려 하면서, 주제넘게 나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 애쓰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고는 자부심과 허영심이 사라질 때까지 수십 년 동안 광야의 뒷전으로 추방당해 있었다. 다윗은 밧세바를 유혹하고, 우리아를 죽였으며, 자기 가족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명성을 위해 인구 조사를 하는 등 연달아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호된 연단을 받았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도망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다.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요점은 인간의 실수에 이어 하나님이 즉시 불쾌함을 보이신 것이 결코 이야기의 끝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모세는 그의 자신감을 치유받았다(실로 그 이후 모세는 너무 심하게 바뀌어 그의 태도는 거의 죄에 가까웠다! 출애굽기 4:10-14을 보라). 다윗은 실수를 저지른 후에 회개했으며, 처음보다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으며, 살아난 뒤 니느웨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하나님은 우리의 심각한 어리석음에서도 선을 이끌어내실 수 있다. 하나님은 메뚜기가 먹어 버린 수년의 시절을 회복하실 수 있다.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 분명 이 사람들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실수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께 매달리도록 가르치셨다. 그런 실수가 없었다면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실패감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있는가? 무시무시한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괴로워하는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은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종교에서 비현실성은 불행한 것이다. 비현실성은 저주다. 하나님에 대한 비현실성은 현대 기독교의 고질병이다. 우리 자신과 하나님 모두에 대해 현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아마도 존 뉴턴(John Newton)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찬송가는 우리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이 찬송가에서 뉴턴은 자신이 현실주의로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나는 주님께 구했네.믿음과 사랑과 모든 은혜에서 자라게 해 달라고주님의 구원을 더욱 알게 해 달라고그리고 더욱 진지하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해 달라고나는 어떤 은총의 시간에주님이 즉시 나의 요청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랐네.그리고 주님의 사랑의 억제력으로나의 죄를 진압하고, 내게 안식을 주시기를 바랐네.그러나 그 대신에 주님은마음속에 감추어진 죄를 느끼게 하셨네.그리고 지옥의 성난 세력이내 영혼의 전부를 공격하도록 하셨네.그뿐 아니라 주님 자신의 손으로나의 비통함을 더 깊게 하시느라 애쓰셨네내가 세운 모든 훌륭한 계획을 방해하셨고나의 모든 희망을 사라지게 하셨으며 나를 쓰러뜨리셨네나는 떨면서 울부짖었네.“주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세요?”“벌레 같은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주님은 대답하셨네.“바로 이것이 은혜와 믿음을 구하는 기도에 대한 나의 응답이니라.”“이 내적 시련들을 사용해서나는 너를 자아와 교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 한다.그리고 지상의 기쁨을 위한 너의 계획들을 무산시켜네가 내 안에서 모든 것을 구하게 하려는 것이다.”이 글은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IVP)의 21장 “내적 시련”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
은혜
시련
실수
회복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를 파헤치다
by Josh Howerton
2022-07-23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4일 ‘도브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했습니다.관련 기사· 승리의 팡파르가 아니라 긍휼을: 낙태 판결 이후 교회가 해야 할 일·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누가 뒤집었는지 기억하자!· 낙태 금지는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미국의 낙태권 찬성론자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이를 두고 그리스도인들은 태아 생명에 대한 정의 실현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며 기뻐하지만, 기독교 바깥에 있는 상당수의 우리 이웃은 이를 실존의 위협으로 느끼고 있다. 이들은 대법원의 결정이 위선적이고 심각한 국가적 비극이라고 비난하며 종교 단체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이들은 왜 이토록 불안해하는 것일까? 우리의 친구와 가족과 동료들이 한탄하는 이 결정을 신앙을 가진 우리가 환영하는 이유를,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바로 알릴 수 있을까?사랑의 마음으로, 사실에 기초하여 이웃의 잘못된 통념에 접근해 보자. 다음은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 곧 잘못된 통념과 그에 관한 우리의 대답을 그 근거와 함께 제시한 것이다.신화 #1: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태아만 존중할 뿐이다.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옹호한다는 주장에 반감을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태아만 옹호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태아만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나 상처받고 소외된 생명 모두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는가? 다음의 수치는 “물론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미국의 도시 도처에 있는 위기 임신 센터 대부분을 그리스도인이 시작했다. 이 밖에도 그리스도인의 입양률은 미국 전체 평균의 두 배를 웃돈다.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비율도 일반 시민보다 그리스도인이 훨씬 높다.입양 비율 미국 전체 가구 2%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5%출처: Barna Research, 2013 report기부지난 일주일 동안 가난한 이웃에게 돈, 시간, 물품을 기부한 적이 있다.주일마다 교회 가고, 매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65%그 외 1%출처: Pew Research Center, 2014 data신화 #2: 낙태를 반대하는 쪽은 남성이다.과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한 것일까? 자궁이 없는 남성이 어떻게 여성을 대신해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하게 할 수 있겠는가? 다음의 수치를 보자.아래의 그래프는 여성이 남성보다 낙태 반대론자일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현상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한 예로 2014년 가디언 기사의 제목은 이렇다. “여성은 왜 낙태에 더 부정적인가?”) 신화 #3: 나의 몸, 나의 선택 “나의 몸, 나의 선택”은 낙태권 찬성 운동의 슬로건이다. 이 구호는 픽사 영화에도 등장한 바 있다. 낙태 찬성론자들은 태아는 여성의 발톱과 유사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려고 한다. 솔직히 이러한 관점은 과학이 태아 발달과 정체성에 관해 말하는 내용과 반대된다.뱃속의 태아도 그만의 고유한 DNA, 지문, 심장 박동, 사고, 감정, 고통과 쾌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태아는 다른 사람의 몸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만의 뚜렷한 몸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과학은 확증한다.신화 #4: 대부분 합당한 이유로 낙태를 한다.선의를 가진 낙태 찬성론자들은 미국 낙태 대다수의 사유를 강간, 근친상간, 빈곤,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 등과 같은 끔찍한 상황에 돌린다. 그러나 다음의 낙태 통계 분석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유일하게 모든 낙태 사유를 상세하게 기술하는 플로리다주의 낙태 사유 통계를 보면, 2020년도 낙태의 75퍼센트 가까이가 특별한 이유가 없이 이루어졌다. 하나의 주에 국한된 결과이긴 하지만, 미국 전체 실정을 예증한다고 할 수 있다.플로리다는 해마다 주에서 일어나는 낙태의 사유를 모두 기록한다. 지난 2020년 플로리다에서는 총 7만 4,868건의 낙태 시술이 행해졌는데, 아래의 표는 각각의 이유와 그 비율이다.백분율 이유 0.01%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0.15% 강간에 의한 임신 0.20% 여성의 생명에 위협 0.98% 태아에 심각한 기형 1.48% 여성의 신체적 건강에 위협 1.88% 여성의 정신적 건강에 위협 20.4% 사회경제적 이유 74.9% 이유 없음(여성의 선택)신화 #5: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폐기는 수많은 여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미국의 낙태 찬성론자들이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시대(post-Roe world)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로 임신하게 된 여성들이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많은 사람이 자궁외임신, 패혈성 자궁염, 유산을 경험한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보살핌을 받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다.현실은 이렇다. 낙태를 강하게 규제하는 주에서도 산모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절차를 반드시 따르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돕스 판결 이후 이러한 것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낙태 반대론자도 낙태 찬성론자만큼이나 산모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신화 #6: 낙태 반대 정서에는 백인 우월주의가 들어 있다.일부에서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폐기는 백인 우월주의라는 더 큰 질병의 징후라고 주장한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 소수 집단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특권이 있는 위치에서 백인 중산층과 상류층이 자기네 의견을 훨씬 더 수월하게 내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종이나 사회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낙태 반대론자들은 존재한다. 슬픈 사실은 1976년 이후 다른 어떤 인구 집단보다 소수민족의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낙태 찬성 운동은 인종차별주의와 연관성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낙태 합법화 운동을 주도하는 Planned Parenthood의 설립자인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 1879-1966)는 소름 끼치는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유색인종을 차별했다. 신화 #7: 대부분의 미국인이 낙태권을 지지한다. 대법원은 6대 3으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지만, 만약 이것을 일반 투표에 부쳤더라면 명백한 다수의 동의를 얻었을까? 미국은 일반적으로 낙태권 찬성이 다수 의견이라고 간주한다. 그렇다면 ‘돕스 판결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 체제를 뒤엎은 것이라는 말인가?간단히 대답하자면, 아니다. 미국인의 약 71퍼센트는 여성의 선택권을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아래의 그래프는 낙태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사이의 수치의 격차가 실제로는 상당히 근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낙태는 예외 없이 항상 합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역시 극소수의 사람들이 낙태는 예외 없이 항상 불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중간 그 어디쯤 자리하고 있다. 이 둘이 합의에 이르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대부분이 여성의 선택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한에는 동의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임신 후기 단계에서는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이 증가한다. 임신 24주 이후의 낙태에 대서는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법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거의 두 배나 많다. 미국 성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임신 6주가 되면 심장 박동이 감지된다고 합니다. 이 시점에 낙태는 법적으로...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6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25%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6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19%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6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12%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임신 초기가 끝나는 무렵인 임신 14주가 되었을 시점에 낙태는 법적으로...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14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15%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14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22%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14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19%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임신 24주가 되면 건강한 태아는 엄마의 몸 밖에서도 의학적 도움을 받아 생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시점에 낙태에 대해서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24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3%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24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18%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24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34%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신화 #8: 낙태 금지가 낙태율을 줄이지 못한다.낙태 금지법은 효과가 있는가?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 방법 부재로 혹 임신을 중지할 다른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렇듯 낙태 금지법이 곧 낙태 감소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실용적이다. 그러나 낙태 반대론자의 입장은 실용성이 아닌 도덕성과 관계가 있다. 노예 해방 선언이 모든 주에 적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라고 할 수 있는가? 노예제가 도덕적 악인 것처럼 낙태는 도덕적 악이다. 도덕적 악을 억제하고자 하는 모든 법률은 환영받아야 한다.더욱이 주 차원의 낙태 금지령과 함께 낙태율이 급감했다는 증거 자료도 있다.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오늘날과 같은 정치적 극단의 시대에 정직한 질문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이러한 논쟁에 관련된 영적 전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여 잘못된 가정과 주장에 맞서는 것은 이웃 사랑 실천에 꼭 필요한 일이다.우리는 은혜와 진리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 가운데 이웃의 진리가 되어 버린 신화를 바로잡기 위해 겸손히 헌신해야 할 것이다. 우리 이웃의 양심을 위해서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의 삶을 위해서 말이다.원제: Debunk 8 Abortion Myth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불쌍한 짐승들, 부러운 짐승들
by 전재훈
2022-07-22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불쌍한 짐승들성경을 보면서 말도 못 하는 짐승들이 참 억울하겠다 여겼던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가운데에는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 하셨지요. 하지만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죽이시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내보내며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에덴동산에서 쫓아낸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그것도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죽은 것은 다른 짐승이었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려고 짐승을 죽이셨습니다. 짐승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구별하신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실 때 잡은 짐승은 결코 부정한 짐승이 아닙니다. 가장 흠이 없고 정결한 짐승을 잡으셨습니다.이 짐승이 만약 뱀처럼 대화가 가능했다면 아마도 하나님께 원망하였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이건 정말 너무 억울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 때 저희는 그 근처도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그 아담과 하와를 죽이셔야지 왜 저보고 죽으라 하십니까?”제가 이 짐승이었다고 상상하면 억울함에 미쳐 죽었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억울한 짐승들이 성경에 더 나옵니다. 세상이 악해져 갈 때 하나님은 노아를 택하셔서 방주를 짓게 하시고 노아의 식구들과 그 방주에 탄 짐승들을 제외한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명을 멸하십니다.그때 방주에 타게 되는 짐승들의 규정이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이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으로 정하셨습니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는 창세기 6:19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위의 규정을 다시 생각해 보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세 쌍에 한 마리를 더 태우고 부정한 것은 암수 한 쌍만을 태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신 이유는 방주에서 나올 때 제물로 사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며 예배하는 장면을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창 7:20-21).저는 제물이 된 정결한 짐승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세상을 멸하실 때는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세상에 나갈 때는 죽임을 당한 짐승들입니다. 이럴 거면 왜 자신들을 살려 주었냐고 항의할 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 죽으려고 더러운 세상에서 정결하게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고 항의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 짐승들이 불쌍해 보였습니다.벧세메스 암소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사무엘상 6장에 보면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두 마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자꾸만 패배하자 이스라엘 장로들이 회의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다가 전쟁터에 두기로 결의합니다. 그 언약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지요.그러나 결과는 언약궤를 블레셋에 뺏기게 됩니다. 이 일로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서 죽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 엘리 제사장도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맙니다. 비느하스의 아내 역시 만삭의 몸이었는데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죽습니다.블레셋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다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신전에 갖다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그다음 날은 아예 부서져 있었고 아스돗에 사는 사람들은 독한 종기와 재앙으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아스돗에 있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두려워하여 가드로 보내지만 같은 일이 벌어졌고 다시 에그론에 보내니 그곳 사람들도 독한 종기가 나서 죽어갔습니다.블레셋 사람들은 이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 어떻게 해야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그리하여 속건제로 바칠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 수레에 하나님의 궤와 함께 실어 이스라엘로 보내기로 합니다. 그들은 새 수레를 만들어 멍에를 매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매어 벧세메스로 보냅니다. 젖 나는 소란 어린 송아지가 있는 소를 말합니다. 멍에를 한 번도 매어보지 아니한 소라면 수레를 끌기가 매우 힘듭니다. 거기에 더해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는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로 갈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멍에를 매어보지 않았으니 불편해서 몸부림을 치거나 본능을 따라 서로 자기 새끼들에게 가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두 마리의 소는 벧세메스로 곧장 나아갑니다. 그때의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삼상 6:10-12). 암소가 벧세메스로 가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저는 소를 키워본 경험이 없지만 듣기로는 소가 영물이라 도살장에 끌려갈 때는 운다고 들었습니다. 이 두 소는 자신이 가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 두 소에게 실컷 여물을 삶아 먹이고 깨끗하게 씻겨서 자기 송아지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야 옳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수레를 장작삼아 두 소를 번제물로 하나님께 태워 버립니다. 이 두 소는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했을까요? 한번도 매어본 적 없는 멍에를 매고 새끼들마저 떼어놓고 귀한 예물을 담아 여호와의 궤를 고생고생하며 가져왔더니 상은 못 줄망정 번제물로 태워 버리다니요. 저는 이 두 소가 매우 불쌍해 보였습니다. 부러운 짐승들 그러나 제가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서는 이 짐승들을 보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 죽어야 했던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의의 옷을 입혀 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이 짐승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부러웠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수많은 정결한 짐승들 중에 하나님께 택함을 입어 ‘거룩한 산 제물’이 되었습니다.노아의 방주에서 나온 정결한 짐승들도 부러웠습니다. 땅에는 짐승들의 시체로 넘쳐났지만 이미 죽어버린 짐승은 제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암수 짝을 찾지 못한 나머지 그 한 마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었습니다.이방 땅에서 태어나 결코 일평생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볼 수 없었던 이 두 마리 암소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셔서 그 말씀을 전하시고 사람들의 손에 번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귀한 은혜를 입었습니다.영적 예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가장 거룩한 예배는 십자가 위에서 드린 예수님의 예배였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드렸던 예배는 전혀 그 어떤 희생도 담아내지 않는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향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자비하심으로 저의 악취 나는 예배를 참아 주셨습니다.그 언젠가 저도 구약의 그 짐승들처럼,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제 평생 소원이 이 땅에 거룩한 순교자의 피를 필요로 하실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한 번이라도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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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 J. I. 패커를 기리며
by Sam Storms
2022-07-21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제임스 이넬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년 7월 22일 - 2020년 7월 17일) 신중심(theocentricity)은 “하나님 중심”을 간결하게 담아내는 장엄하고도 인상적인 단어이다. 이 단어에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핵심이며, 우리가 하는 행동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근원의 힘이시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 누구도 고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쓴 고 J. I. 패커(1926-2020)보다 더 신중심 관점을 잘 드러낸 저자는 없다. 제임스 패커는 상당히 유명하다. 형벌 대속 속죄(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에 대한 엄격하고도 철저한 성경적 표현, 성경 무오성에 대한 확고한 변호, 그리고 청교도의 공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은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많은 자질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유명한 패커가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왜소한 기독교패커는 하나님 중심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영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했다. 마음의 애정에 생명을 주는 열기가 있으려면, 먼저 그 마음에 성경의 빛이 내리쬐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성경적 지식, 그리고 거기에 대한 인지적 이해야말로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모든 것의 기초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패커의 방식이었다. 패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은 곧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분을 아주 왜소하게 축소해 버리는” 것이며, 결국 그렇게 “왜소해진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리스도 예수의 충만함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17). 패커가 지금 과장하는 걸까? 이런 말이 단지 신학적 과장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패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채로 살려고 애쓴다면, 우리 자신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이상하고 미친 듯하며 고통스러운 장소이고, 삶은 실망스럽고 불쾌한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등한시하는 것은 눈가리개를 하고서 아무런 방향 감각 없이 그리고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아마도 당신은 사는 동안 내내 비틀거리고 머뭇거리게 될 것이며,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고 영혼을 잃어버릴 수 있다(26). 패커는 독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단지 더 차원 높고 궁극적인 영혼의 만족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아님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하려는 목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수단이 될 때, 그 결과는 자존감 상승, 지역 교회가 누리는 더 큰 권력과 존경, 또는 이 지상에서의 더 큰 부와 같은, 훨씬 덜 중요한 목표로 자신을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패커의 이 저작을 읽고 이해하려는 모든 독자를 위한 그의 기도는 에베소 성도를 향한 바울의 기도와 똑같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시는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의미이고 또 무엇을 수반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그분의 성품이 어떠한지에 관해 비추시는 성령님의 빛에 의지하여 이미 기록된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패커는 말한다. 그러나 듣는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경청 후에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우리의 삶과 생각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길지에 관해서까지 영향을 미치도록, 기쁜 마음으로 그 진리를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다면적인 방법을 부지런히 탐구해야 한다. 그 탐구는 하나님의 속성과 행동에 대한 면밀하고 진지한 연구를 포함하며, 그 결과 하나님에 관한 탐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어져 그분이 누구이며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뜨거운 찬양과 감사의 열매를 맺게 된다. 어떤 경우에도 패커는 우리가 하나님께 공헌을 하거나 하나님에게 부족할 영광을 공급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찬양과 직접적인 순종, 그리고 우리 앞에 열린 모든 선택 중에서 그를 가장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항상 하려고 노력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그를 높이고 또한 경의를 표한다. 즉, 우리는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세 가지 개념이 하나로 융합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종합적인 목표이다(기도, 20)패커는 기독교 희락주의(Hedonism)라는 명시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점을 근본적인 진리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모든 활동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그를 위해 존재한다”(Hot Tub Religion, 36). 우리는 그를 영원히 즐거이 누림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존재한다. 계속해서 패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옳다면, 하나님께서도 같은 목적을 갖는 것이 잘못일까?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높은 목적을 가질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그럴 수 있을까?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작은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그건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스스로를 위해 사는 것이 옳지 않은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단지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해 범사에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이시기를 멈추라는 요구와 같은 말이다. 하나님을 향해 존재하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더 큰 신성모독은 없다(Hot Tub Religion, 38).하나님의 속성 찬양하기그 어떤 책도, 또한 우주의 모든 책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다 확인하고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패커는 성경에서 특별히 강조된 하나님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자신의 연구를 제한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성숙하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이다. 그는 빌립보서 3:7-10에서 지나간 모든 것을 “배설물” 즉 “똥”으로 여겼다고 말한 바울의 감정을 다시 한번 되풀이한다. 패커는 바울의 의도가 그러한 것들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바울의 말은 또한 그것들을 계속 마음에 둔 상태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가 향수에 젖어서 멍하니 똥거름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겠는가? 하지만 사실상 많은 사람이 바로 이러한 일을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37).믿는다고 공언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조차 하나님의 속성 중 일부가 일상생활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패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진리는 언제나 영적 변화를 가져온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이 항상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 영광스럽고 안도감을 주는 약속,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성품에 해당하는 신성한 불변성을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위엄, 측량할 수 없는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에 관해서도 장을 할애한다. 하나님은 또한 확고하게 의롭거나 거룩하지 않으시면 결코 하나님이실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 아예 하나님의 진노를 없애려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지만, 패커는 죄를 향해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은 그 어떤 경배와 헌신을 받을 가치도 없다고 믿는다. 이 책에서 많은 깨달음을 주지만 동시에 반직관적인 내용이라고 볼 수 있는 게 바로 하나님의 질투에 관한 부분이다. 왜 그런지 궁금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출 34:14)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구속한 자들에게 전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을 요규하시며, 그들이 신실하지 못함으로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다면 단호한 행동을 취하심으로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보이시리라는 의미다”(271).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면, 이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패커는 이 책이 기독교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1993년 판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이 100만 부가 넘게 팔렸고, 12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에 패커는 놀라서 어쩔 줄 모른다. 그런데 그때로부터도 거의 30년이 지났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이 고전에 관해 훨씬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 놀라운 책을 합당하게 평가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패커 자신이 이 책에 관해 결론 내린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이 책을 읽고 독자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이 점에서 시편 기자의 마음에 더 가까워진다면 이 책은 헛되이 쓰인 것이 아닐 것이다(447). 원제: Knowing God: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제임스패커
하나님을아는지식
기독교고전
무오한말씀
시편기자의마음
하나님중심
하나님의속성
팀 켈러는 왜 ‘도시 선교’를 말하는가?
by 고상섭
2022-07-20
팀 켈러의 센터처치는 복음, 도시, 운동이라는 세 가지 신학적 비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복음을 통해 도시를 변화시키는 연합운동으로 복음 생태계를 만들어 도시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팀 켈러를 언급할 때 지금까지 가장 많이 대두된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복음’과 ‘복음설교’일 것이다. 복음의 재발견은 너무 귀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복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복음은 반드시 도시로 그리고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 도시인가? 도시선교라는 단어는 많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도시를 선교해야 한다면 농촌은 선교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팀 켈러가 말하는 ‘도시’는 단순히 농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도시가 아니고 또 농촌선교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팀 켈러가 도시에 집중하는 이유는 도시는 단위면적당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도시에 몰려서 살고 있고,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문화와 사회가 형성된다는 의미이다.도시의 변화는 한 개인의 변화를 넘어 도시 속에 창출된 경제, 정치. 법질서, 문화의 변화를 촉진한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단순히 개인의 성향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통해 만들어진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도시의 개념에 눈을 뜨지 못하면 복음은 단지 개인의 구원에만 집중하게 되고 구조적인 사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도시를 선교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변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는 도구를 활용한다는 뜻이 된다. 도시의 긴장도시는 사람들이 몰려 밀집된 곳이라 도시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면 선교적 확장성을 가질 수 있지만 또한 죄의 온상지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타락한 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인간이 모여 있는 도시에는 안정과 안정, 다양성, 생산성과 창조성이라는 일반은총의 긍정적 요소도 있지만 죄와 타락이라는 부정적인 모습도 가득하다. 그래서 교회는 도시에 빛을 비추어서 선한 영향력을 통해 문화를 변화시켜야 하고 또한 소금이 되어 도시의 부패를 지연시켜야 하는 책임을 함께 가지고 있다. 도시의 긴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시를 변화시키겠다는 기독교 승리주의식 사역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도시는 교회가 변화시켜야 하는 대상이지만 교회의 힘만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곳임을 인식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도시의 완전한 변화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날의 소망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으로 나침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8). 팀 켈러는 ‘일과 영성’에서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곳임을 이해하라고 권면한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노력한 만큼 열매가 거두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노력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밭의 채소’의 위로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는 세상 속에 있지만(도시가 완전히 변화되지 않지만) 우리가 먹을 밭의 채소를 통해(하나님이 주시는 변화의 예고편과 맛보기) 우리는 소망 가운데 실망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게 된다. “이상주의는 속삭인다. 일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고 영향을 끼치며 새로운 것들을 내놓으며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라고. 반면에 냉소주의는 비아냥거린다. 일한들 뭐가 변하겠어? 쓸데없는 희망을 품어서는 안 돼, 그저 먹고 살 수 있으면 그만이지, 너무 공들이지 말고 여건만 되면 당장이라도 집어치워”(팀 켈러,일과 영성, 111쪽).본래 의도된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의 노력은 여전히 얼마쯤 열매를 맺는다. 도시는 교회가 원하는 만큼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로, 천국의 시민권자로 이 땅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임을 선포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가 저기 있다는 나침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도시와 구원 구약 시대의 선교는 구심적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세상 가운데 이방의 빛이 되어서 많은 이방 민족들이 유입되는 중심을 향해 바깥에서 모여드는 흐름이었다. 솔로몬 시대에 시바의 여왕이 와서 감탄하는 형태의 선교적 모델이었다. 신약 시대 선교는 원심적이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향해 움직인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천국을 약속하셨지만 또한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파송의 사명을 함께 주셨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예수님이 교회를 향해 주신 소명은 세상으로 파송이며 이것은 곧 도시를 변화시키라는 부름이다. 도시목회와 선교의 저자인 하비 칸 교수는 선교신학적으로 ‘도시선교’를 단순히 선교라는 개념에 도시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도시선교를 새로운 선교학작 장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도시를 선교하는 것은 기존 선교의 패러다임이 변화되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1) 접근 가능한 미전도 종족 이전엔 선교지로 나가서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이 많았지만 요즘 도시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와 학생들이 유입된다. 국가에서 복지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있고, 이주자들과 이민자들은 여러 가지로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은 교회의 선교에 가장 효과적인 지점이 될 수도 있다. 선교의 불모지에서 선교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선교적 환경이 훨씬 좋은 곳에서 새로운 이주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할 때 미전도 종족에 대해 쉽고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게 된다. 2) 젊은 세대도시에는 젊은 세대들이 몰려 있다.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18세에서 34세 사이의 미국인 중에 55퍼센트가 뉴욕 시에 살고 싶어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가족과 떨어져서 홀로 직장이나 학교 주변에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더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주로 삶과 환경에 변화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사를 하거나, 새로운 직장을 가거나, 결혼과 출산을 했을 때이다. 삶의 변화가 있는 젊은이들을 복음으로 양육한다면 새롭게 직장을 구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믿음으로 도시를 변화시킬 귀한 자원들이 된다. 3) 문화적 엘리트도시는 출판, 미디어, 학문, 예술의 영역이 모두 종합적으로 모여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그 문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시대정신이 된다. 제임스 헌터는 문화가 변화되는 요소 중 중요한 것이 변방에 있는 문화적 엘리트들의 네트워크라고 말했다. 문화적 엘리트들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그것을 수용해서 활용하는 교양인들이 많아질 때 문화는 운동이 되어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세계에 있는 젊은 세대들은 비슷한 문화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문화를 함께 공유하기 때문이다. 헝가리에 사는 청소년들이 뉴욕에 사는 청소년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맨해튼과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문화 생산물이 세계에 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는 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엘리트들이 복음의 가치를 가지고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복음과 연결할 때 도시의 문화는 복음의 가치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4) 빈곤층 도시는 명암이 확실한 곳이다. 화려한 면이 있지만 어두운 면도 있다. 높은 빌딩과 화려한 쇼핑몰 뒤에 보이지 않는 빈곤층과 노숙자들이 함께 있는 곳이 도시이다. 급성장하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1/3이 판자촌에서 살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세계 빈곤층의 대다수는 도시에 살고 있다. 도시에서 엘리트를 전도하는 것과 빈곤층을 섬기는 것은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빈곤층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타당성에 중요한 표시가 된다. 그리고 빈곤층을 섬길 때 필요한 돈과 자원은 엘리트들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빈곤층과 도시의 필요를 위해 엘리트들의 돈과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도시 교회는 빈곤층에 대한 사역과 엘리트에 대한 사역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빈곤층을 돕기 위해서 엘리트들의 경제적, 문화적 자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빈곤층에 헌신하는 것은 우리의 메시지의 타당성을 지지하는 문화 엘리트층에 대한 전도가 된다”(센터처치, 345쪽).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고 싶어 했다. 아마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기 때문일 것이며, 로마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 시대의 로마처럼 오늘날 세계의 도시들은 그 중요성과 영향력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는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도시 사역을 강조하고 지원하는 것보다 선교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모든 교회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교적 교회의 핵심은 성도들의 선교적 삶이어야 한다. 이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는 길이 바로 도시를 복음으로 품는 것이다. 사람들을 전도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다음 세대를 전도하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세상의 문화 한가운데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조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려면 우리는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센터처치, 346쪽).
도시
도시선교
도시목회
진정한 잠언 31장 여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by Jim Davis
2022-07-19
사역 초기에 나는 대학생들과 함께 일했다. 어떤 배우자를 찾아야 할지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학생이 많았다. 우리 집에서 학생 여러 명과 함께 잠언 31장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잠언 31장 여인”을 설명하며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본문은 기혼여성에 대한 성경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때 한 여학생이 충격을 받은 표정이 역력했다. 마치 자동차 전조등 불빛에 놀란 노루 같았다. 또 한 여학생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비현실적인 기준을 세우려고 성경을 잘못 사용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 자리에 있던 일부 여학생들에게 내가 가혹한 짐을 지워주려 했던 것이다. 그날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이 본문은 이상적인 아내에 관한 것을 넘어서는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내 해석의 문제점잠언 31장의 “이상적인 아내” 해석에는 어떤 오류가 있을까?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청중 문제가 있다. 원래 잠언을 기록한 목적은 여성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하려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의 원래 청중은 이스라엘 왕족으로서 장차 통치자가 될 젊은 남자들이었다. 이 본문은 여성들을 독자로 상정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다. 이 본문이 일차적으로 아내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도구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은 그 청중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둘째, 문맥 문제가 있다. 잠언 전체 맥락에서 이 구절은 지혜 여인(Lady Wisdom)을 묘사하고 있음이 십중팔구 분명하다. 잠언 전체에서 현자는 젊은 남자들을 위한 경건한 지혜를 매력적이고 모범적인 여성으로 인격화한다. 31장은 이 책에서 가장 바람직한 그림―완벽한 아내―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본문의 목적은 완벽한 아내가 아니라 그보다 더 훌륭한 지혜 여인 곧 인격화한 지혜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세운 가정에 문제가 있다. 청중이나 문맥에 관해서 전혀 몰랐다 하더라도, 이 여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만 살펴보면 된다! 그녀는 여러모로 완벽하다.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서 남편과 모든 식솔에게 음식을 만들어 준다. 밤을 지새우면서 다음 날 아침에 내다 팔 물건을 만든다. 그녀는 밤에 일하는 올빼미이자 일찍 일어나는 새다! 그녀는 음식을 준비하고, 옷을 만들고, 돈을 벌고, 아이들을 돌본다. 도대체 남편이 할 일은 뭐가 남아 있지? 우리를 궁금하게 만들 정도다. 잠언 31장의 “이상적인 아내” 해석은 우리의 타락한 세상에서 완벽한 배우자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빼고는 말이다. 아름다운 지혜왜 솔로몬은 지혜를 추구하는 내용으로 책 한 권을 다 채우고서는 “자, 원더 우먼과 결혼하라!”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려는 것일까? 그의 요지는 이게 아니다. 잠언 31장의 주된 목적은 경건한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솔로몬은 젊은이들에게 완벽한 아내를 원하듯이 지혜를 갈망하라고 설파한다. 솔로몬의 은유적 아내는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혜는 보석보다 귀하다(잠 31:10). 보물은 우리에게 구매력과 안전을 제공한다. 보석은 우리에게 집과 휴식, 훌륭한 음식, 좋은 옷을 선사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는 어떤 보석도 살 수 없는 것을 살 수 있게 한다.지혜는 정서적이고 영적인 안정을(3:24), 훌륭한 결정력을(12:8),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31:23), 좋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능력을(22:6), 배우자로부터 신뢰를(31:11),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축복할 수 있는 능력을(31:12) 제공할 수 있다. 지혜는 우리에게 술을 끊는 능력을(23:20), 용서하는 능력을(17:9), 더 깊이 사랑하는 능력을(10:12) 구해 줄 수 있다. 지혜는 우리에게 깨끗한 양심과 좋은 잠을(3:24) 줄 수 있다.지혜는 온 가정을 축복한다. 지혜가 풍부해지면 더욱 부지런히 일하게 되고(31:15), 재정은 더욱 유익하게 운용된다(31:16). 지혜는 힘으로 옷을 입고 우리를 보호한다(31:17). 우리는 밤에 잠을 자지만, 지혜는 잠들지 않는(31:18). 그녀의 램프는 꺼지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우리를 계속 지켜 준다. 아무리 훌륭한 아내라도 휴식이 필요하지만, 지혜 여인은 그렇지 않다.지혜 여인은 그녀의 가정뿐만 아니라 그녀의 공동체 전체에게 복이다. 그녀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베풀고(31:20) 혹독한 겨울 날씨로부터 주변 사람들을 보호한다(31:21). 지혜 여인은 그녀를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명예를 가져다준다. 그녀와 관계를 맺고 있기만 해도 자기가 사는 성읍에서 존경을 받는다(31:23). 그녀는 친절하고 자상하다(31:26). 그녀 주위의 사람들을 높여 주고 회복시켜 준다.어디서 지혜를 찾을 수 있을까?지혜 여인은 젊은이들에게 지혜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완벽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우리의 지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전 1:30). 다른 어느 누가 온종일, 심지어 당신이 잠들었을 때도 당신을 위해 일하겠는가(롬 8:34)? 다른 어느 누가 당신에게 보석보다 더 값진 것을 주겠는가(요 14:6)? 다른 어느 누가 당신이 복을 받도록 자신을 내주겠는가(빌 2:7)? 다른 어느 누가 당신이 존경을 받도록 짐을 지겠는가(벧전 2:14)? 다른 어느 누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외하겠는가(마 3:17)? 다른 어느 누가 우리에게 그분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기만 해도 누리는 그러한 모든 복을 가져다주겠는가(요 3:16)? 영원의 문들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다른 어느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에 달려서 받겠는가(고후 5:21)? 오직 예수님뿐이시다!그러면 잠언 31장에는 아내가 배워야 할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아내와 남편, 자녀, 독신이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혜 여인을 맞아들이는 모든 사람이 이생에서 그리고 천국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이 책의 절정을 이루는 끝부분에서 솔로몬이 들려주는 권고에 귀를 기울여 보자. 지혜를 껴안아라. 잠시 취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남자가 완벽한 아내에게 그렇게 하듯이 당신의 삶을 지혜에 맡겨라. 원제: Where to Find the Real Proverbs 31 Wo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잠언31장
지혜
지혜여인
예수님을 노래하는 시편들
시편이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방식들
by Greg Lanier
2022-07-18
어떤 상황이든 저마다 어울리는 노래가 있다. 어떤 노래는 춤추는 데 어울리고, 어떤 노래는 공부할 때 좋다. 어떤 노래는 길을 걸을 때 어울리고, 어떤 노래는 훌륭한 영화를 더 멋진 영화로 만든다. 어떤 노래는 감사드린 다음에 틀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커진다.시편도 마찬가지다.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상황에서도 노래할 수 있게 해 준다. 축하할 때도, 비탄에 젖어서도, 희망을 품고서도. 그리고 이 찬송의 책은 심지어 예수님의 삶을 노래하는 목록이기도 하다.시편 150편의 시 가운데 40편이 넘는 시가 신약성경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100군데가 넘는다. 이렇게 사용된 곳에서 신약 기자는 각 시편을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묘사할 때 적용한다. 어떤 시편은 이런 식으로 반복해서 사용되고(가령 시편 2편과 110편), 또 어떤 시편은 뜻밖의 이면에 가깝다(가령 요한복음 13:18에 들어 있는 시편 41:9). 신약성경이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 시편을 사용하는 세 가지 방식이 여기 있다.1. 예언으로 사용되는 시편신약성경 기자가 시편을 예수님의 삶에서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제시할 때가 있다. 예수님에 관한 예언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대부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예수님의 동정녀 수태 예언(마태복음 1:23이 참조하는 이사야 7:14),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불리는 예수님(사도행전 3:22이 참조하는 신명기 18:15), 그리고 주님 앞서 오는 세례요한에 대한 예언(마가복음 1:1-3이 참조하는 말라기 3:1)이다. 우리는 보통 노래를 예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신약성경 기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예언의 중요한 사례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사용하는 시편 16편이다. 베드로는 다윗이―“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실 것”(시 16:8-11)이라는 소망을 품고서 하나님께 매달릴 때―이 시에서 가리켜 말하고 있는 ‘나’는 그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자신이 아니라, 다윗은 “예언자이므로” 이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내다보고 말했다”는 것이다(행 2:25-31). 다른 사례를 보자. 요한은 예수님이 “쇠 지팡이로” 열방을 “다스리실 것”이라고 예언된 왕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시편 2:9을 넌지시 말한다(계 2:27; 19:15). 모든 시편이 이렇게 할까? 아니다. 다만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몇몇 시편을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 패턴으로 사용되는 시편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은 시편을 읽으면서 그 시인에게서 처음 일어났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삶에서 반복된 패턴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시편 118:22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은 미래의 돌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겪으신 반대가 시편의 시인이 수 세기 전에 겪었던 것과 얼마나 같은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구절을 몇 번씩 반복해서 사용한다(마태복음 21:42; 사도행전 4:11; 베드로전서 2:7). 마찬가지로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노래하는 사운드트랙이 된다. 시편 22:7에서 군중의 조롱과 모욕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다시 일어난다(마태복음 27:39-40). 시편 22:15에서 시인의 바싹 마른 입은 예수님에게 갈증을 일으키는 그 입이다(요한복음 19:28). 시인의 옷을 비웃듯이 나눠 가지는 일은 로마 병사들에게서 그대로 재연된다(마태복음 27:35). 블루스처럼 연주되고 있는 시인의 비극은 예수님의 수난의 비극을 묘사하는 대본이다. 3. 프로소폰으로 사용되는 시편마지막으로, 신약성경은 시편을 예수님이 직접 부르시는 노래로 다룬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프로소폰(prosopon)이라는 그리스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에는 “얼굴” 또는 더 적절한 뜻으로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몇 군데 경이로운 곳에서 시편이 마치 예수님이 그 시편에 있는 페르소나인 것처럼 해석되고 있다. 예수니은 적어도 두 번 이 문을 직접 여신다. 누가복음 20:42-43에서 예수님은 다윗이 시편 110:1에서 두 명의 다른 “주”를 가리키고 있다고 설명하신다: “다윗이 친히 시편에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시인 다윗이 이 시의 “나”이다. 그러므로 “내 주”는 누구이겠는가? 예수님은 놀랍게도 자신을 두 번째 주, 곧 다윗의 주와 동일시하신다. 이는 곧 이 시편은 영원하신 아버지와 선재하신 아들 사이의 대화라는 의미이다. 아들은 태어나시기 수 세기 전에 이미 이 시편 안에 계시며, 아버지로부터 약속을 받으신다. 또한, 시편 22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입술로 시인의 말을 쏟아내신다. 마지막 숨을 쉬시면서 예수님은 외치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예수님은 그 시편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신다. 시인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다.신약성경의 어떤 기자들은 예수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른다. 요한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라는 시편 69:9의 “나”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이 알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요한복음 2:17). 동일한 시편을 가리키면서 바울은 예수님이 시인과 더불어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고 선언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로마서 15:3). 이 노래는 예수님이 직접 자신의 고통에 대해 울부짖는 노래다. 히브리서도 프로소폰 방식을 확실하게 사용한다. 히브리서 10:5-9은 예수님이 직접, 세상에 오실 때, 아버지께 시편 40:6-8의 말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주님은 …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5, 8에서 아버지는 시편으로 아들에게 말씀하신다. 시편 2:7은 예수님께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기록하고 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그리고 시편 45:6-7은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선언이다. “오 하나님,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무궁토록 견고할 것입니다.”이러한 사례들에서 예수님은 다양한 시편들에서 “나”로도 “당신”으로도 페르소폰 곧 페르소나의 자리에 계신다. 이러한 구절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천동지할 진리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의 영원한 아들되심, 하늘의 주되심, 성육신, 그리고 수난을 노래하는 자전적 목록이다. 시편을 그리스도론으로 접근하는 이러한 세 가지 범주는 우리가 성경을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시편이 어떻게 예수님을 다윗의 집에 나신 왕이요 언약을 지키시는 이로 예언하며 고대하는지 묵상할 수 있다. 우리는 시편을 하나님의 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패턴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시편에서 예수님의 페르소폰을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시편을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강력한 증언으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편은 예수님의 삶을 노래하는 목록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교회에서 성도들과 더불어 예수님과 함께 노래할 때는(히브리서 2:12), 우리의 삶을 노래하는 목록이기도 하다. 원제: Listen to Jesus’s Playli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시편
시편의그리스도
페스소폰
페르소나
패커에게서 배우다: 시련이 주는 놀라운 축복
J. I. 패커를 기리며
by Jeremy Linneman
2022-07-17
제임스 이넬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년 7월 22일 - 2020년 7월 17일)나는 신학자 고 J. I. 패커가 쓴 이 글을 읽었던 순간을, 그때 내 상태가 어땠는지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복음 사역은 잔인하다. 그럴 의도야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다.”패커가 염두에 두었던 잔인한 사역이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우울증으로 특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또 만성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너무나도 오래 지속된 시련과 낙담의 계절이었다. 나는 기도했다. 또 여러 상담자와 이야기도 나눴다. 그리도 또 기도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절은 정말 무자비했고, 내 영혼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한 친구가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권했다. 내가 이미 읽었던 책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강조한 부분은 이 책 후반부에 나오는 “내적 시련”이었다. 나는 이 고전을 다시 펴서 해당 부분을 읽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고통과 아픔에 대한 나의 모든 사고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떤 영적 수업은 아무리 머리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그 잔인한 가르침과 그 놀라운 해독제에 대한 패커의 성찰은 내가 고난의 시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내적 시련그렇다면 이 잔인한 복음 사역이란 무엇일까? 패커에 따르면,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삶이 더 쉬워진다는 잔인한 가르침이 있다. 그러니까 신자가 되면 죄를 덜 짓게 되고, 진정한 자아와 가장 깊은 소명을 찾을 수 있게 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까지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전반적인 고통이 덜해진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이런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긍정의 힘(Your Best Life Now)!패커는 이렇게 말한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문제 없는 삶으로 묘사하는 편향된 인상은 조만간 우리를 쓰라린 환멸로 이끌 것이다.”지난 십 년 반 동안 목회를 하며 지나온 나의 20-30대 영적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쓰라린 환멸이다.영화 ‘파이트 클럽’(Fight Club)에서 타일러 더든(Tyler Durden)의 말처럼 우리는 평생 속아왔다. 나는 내 또래를 미국 중산층에서 자란 밀레니엄 Z세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꾸준히 자존감을 높여주는 양식을 먹으며 자랐다. 우리는 게다가 꽤 괜찮은 시대를 살아왔다. 또한 어떤 꿈이든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너희가 세상을 바꿀 거야.” 그렇게 자란 우리는 성인이 되어 알게 되었다. 삶은 고단하고, 우리는 그리 특별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이 세상은 잔인한 곳이라는 것을.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것을 “헛꿈 꾸기”(wish-dream)이라고 불렀다. 그는 성도의 공동생활을 독일어로 썼고, 더 나은 단어가 없어서 영어 번역가가 생각해 낸 문구가 바로 “헛꿈 꾸기”였다. 헛꿈 꾸기는 우리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 곧 행복과 의미와 만족이 있는 삶이다. 아픔과 좌절, 갈등과 고통이 없는 삶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러한 헛꿈 꾸기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왜 영적인 삶에서 어려움을 겪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직접 고난에 직면하면 우리는 충격을 받는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또는 그게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라며 자기최면을 건다. 실패하기 마련인 헛꿈 꾸기는 자기연민의 온상이 된다. 이런 헛꿈 꾸기가 특히 위험한 이유는 우애와 교회 성장이라는 면에서 그 꿈이 실현되지 않을 때 느끼는 환멸이 기독교 공동체까지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꾸는 헛꿈을 빠르게 산산조각 내어 우리가 현실에 바탕을 두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한다. 하나님은 은혜로, 그의 순전한 은혜로 우리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도 예수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신다. 참으로 성도들에게 예수님과 교회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달리 말해 헛꿈을 꾸게 하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사역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바꾸시지만, 그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패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상황을 훨씬 더 쉽게 만들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아내, 남편, 부모, 시댁, 자녀, 동료, 이웃에 대한 불만이 되풀이된다. 중생 체험과 더불어 영원히 추방된 것처럼 보였던 유혹과 나쁜 습관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고맙게도 이런 고난에 직면한 우리를 말씀은 홀로 두지 않는다. 헛꿈 꾸기를 십자가에 못 박기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관련하여 구약의 전도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우리 내면 깊은 곳에는 선하고 완전한 삶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팀 켈러가 고통에 답하다에서 보여주듯이, 고난은 성경의 주요 주제이다. 창세기는 악과 죽음이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지를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은 압제와 40년간 광야에서의 겪은 시련과 시험의 시간을 묘사한다. 시편은 삶의 모든 상황에 대한 기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빈번한 기도는 궁핍 중에 찾는 도움과 고통 중에 갈구하는 위안이다. 시편이 보여주는 정직한 기도는 삶의 잔혹함과 고통의 부당함을 묘사한다. 구약의 세 책―욥기,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은 고난을 주요 주제로 다룬다. 신약성경의 두 권―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은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을 만난 그리스도인을 돕는 것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슬픔의 사람(Man of Sorrows)이라고 불린다[사 53:3]. 고통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며, 성경은 고통과 고난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제공한다. 장례식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데 쓸 수 있는 간단하고 진부한 몇 마디 수준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해피엔딩만을 주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풀 해상도로 제공되는 22분짜리 TV 에피소드가 아니다.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깨진 세상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결코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맛볼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켈러는 다니엘 3장에 나오는 풀무불을 예로 활용하여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고통을 사용하시는지 설명한다. 불은 위험하다. 불은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린다. 건물과 숲을 잿더미로 만들고 순식간에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잘 통제하고 현명하게 사용하면 불이야말로 삶의 위대한 선물이 된다. 추운 겨울날 집을 따뜻하게 하고, 쇠붙이를 제련하고, 도자기를 굽기도 한다. 음식을 요리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불이 없으면 바비큐도 없다. 제대로만 사용하면 불은 태워버리지 않는다. 불은 모양을 만들고, 정제하고, 준비하고, 정화하고, 나아가서 아름답게 한다. 한마디로, 불은 사물을 성숙시킨다. 마찬가지로 고통은 절대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죽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때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도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고통을 견딜 때, 고난은 우리를 빚고, 연단하고, 준비시키고, 정화하며, 나아가 아름답게 한다. 고통은 사람을 성숙시킨다. 복음 안에서 고통은 악과 아픔을 바꾸어 놓는다. 곧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악과 아픔을 극복한다. 어두움에서 빛이 나오고, 죽음에서 새 생명이 태어난다. 내 인생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나는 세 형제 중 두 명을 잃었다. 동생의 죽음 이후 불면증과 우울증과 만성 통증이 생겼고, 수년간의 기도와 상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양한 증상이 남아 있다. 하나님은 깊은 치유와 평화를 가져다주셨지만, 상처는 여전하다. 다시 패커로 돌아가자. 이런 고난의 목적이 무엇일까? 왜 우리는 오랫동안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나의 상처,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 박은 헛된 꿈을 아버지 앞에 가져갈 수 있을까? 고난의 목적패커는 이렇게 표현한다: 좋은 아버지는 자녀가 자신의 길을 가도록 그냥 두지 않는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비와 지혜로 자녀를 인도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세상의 고통 중 일부를 경험하도록 하시지만 그 모든 과정 내내 자녀와 함께하신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부서진 세상에서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부서진 세상에서) 고통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을 키우고 신앙을 강화하시며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봉사하고 돕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하나님의 강함은 우리의 약함에서 드러난다. 패커는 이렇게 말한다. 은혜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를 성숙시키는) 이 목적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심도 아니요, 힘들고 답답한 상황에서 우리를 보호하심도 아니요… 오히려 우리를 이 모든 것에 노출시켜 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절실히 느끼도록 하신다. 그 결과 그분께 더 간절히 매달리도록 우리를 강력하게 이끄신다. 성경은 반복해서 강조한다. 하나님이 견고한 반석이시고 견고한 방패이시며 약한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피난처이시며 도움이시다. 그렇기에 자신의 연약함을 더 알면 알수록 우리가 주님을 갈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도록) 말이다. C. S. 루이스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하나님은 쾌락을 통해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서는 들릴 정도로 말씀하시지만, 고통 중에서는 크게 소리치신다.”이것이 바로 내 경험이었다. 매일 주님과 함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빼고, 고통보다 나를 더 변화시킨 것은 없다. 동시에 고통만큼 나를 절망에 빠뜨리고 자신감을 뿌리 뽑은 것도 없다.그렇다면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나에게 고통을 강요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시는 걸까? 결코 아니다. 이 세상은 잔인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우리를 면제시키지 않으시고, 이 부서진 세상에서 살도록 하셨다. 웃음과 평화 속에서 만난 하나님보다 눈물과 고통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내게 더 생생했다. 고난을 통해 인내와 연단을, 신뢰와 소망을 배운다. 이것은 고통과 괴로움이 없이는 만날 수 없는 미덕이다.부서진 영혼을 위한 복음우리의 세상은 죄로 인해 망가졌고, 깨어짐은 우리의 관계와 일, 우리 몸의 기본 조건이다. 그의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구속은 이 부서진 세상에서 우리를 아예 탈출시키는 게 아니다. 그는 이 부서진 세상 속으로 들어와 가난과 고난 속에서 태어나셨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기에 슬픔의 사람이라고 불린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회복은 이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의 잔인한 육체적 죽음과 영광스러운 육체적 부활에 달려 있다.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은 것은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삶이다. 그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요한계시록 21:4-5.보라, 우리는 고통과 아픔이 없는 영생을 위해 지음받았기에 우리 가슴에는 영원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이 잔인한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낯설다. 우리는 고통이 없는 세상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그 세상은 언젠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겪는 상실, 슬픔, 배신, 버림받음, 육체적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미리 다 겪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궁극적인 고통을 짊어지셨다고 말한다. 우리의 죄와 그에 따른 형벌인 죽음과 하나님과의 분리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겪은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우리가 그런 궁극적인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우리는 수천 번의 내적 시련을 직면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할 때까지 우리는 이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상황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희망 없는 백성이 아니다. 우리의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그의 임재를 우리가 느끼도록 하신다. 그리고 나중에 반드시 부활과 새 창조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우리가 겪는 시련은 계속되겠지만, 결코 우리의 끝은 시련이 아니다. 스코티 스미스(Scotty Smith)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죽음, 모든 악, 모든 눈물, 모든 고통에는 만료일이 있다.” 이 덧없는 고통은 헛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를 성숙시켜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 이 모든 고통은 우리가 영원한 영광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재료이다. 원제: J. I. Packer on the Surprise Blessing of Trial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복음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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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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