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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들어선 교회는 어떻게 문화에 영향을 끼칠 것인가
by Michael Keller
2022-08-05
오늘날 세속 문화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과 겸손과 사려 깊은 태도로 사회 문제를 책임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약 중독이 죄라는 것을 믿는 데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마약 중독자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매춘이 부도덕하다고 믿는 데에서야 다 동의하겠지만, 동시에 성매매에 휘말린 남성과 여성을 돕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못하도록 아예 가두는 게 중독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아니면 더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을까?진실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 다 세상의 어떤 문제에 관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옳다고 철석같이 믿기에 그의 특정한 도덕적 비전을 다른 사람에게도 동의하라고 요구한다. 당신이 어떤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대신에 “누구라도 자신의 도덕적 비전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특정 도덕,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도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견해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어떤 특정한 도덕에 관해서 의견을 표출하는 순간에 그 자체로 바로 강요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도덕적 비전을 성경에 기초하지만, 이러한 성경적 도덕을 입법화한다고 할 때, 어떤 것을 추구하고 비준해야 할까? 또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까? 십계명이 분명히 금지하는 도둑질을 막기 위한 도덕적 의무를 입법화하는 데에는 누구나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상숭배는 어떤가? 성경은 우상숭배를 죄라고 명시하지만,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그중 대부분은 우상숭배를 불법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왜 어떤 성경 원칙은 입법화하길 원하지만, 동시에 또 어떤 원칙에 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 이 질문이 가진 복잡성이야말로 해답을 찾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겸손한 자세를 갖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정치 소셜 미디어에서 만나는 적지 않은 비판이 왜 일어나는지까지도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회 문제를 감당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 복음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복음의 가치를 알고, 또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로 그 복된 소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도 우리의 태도는 따뜻한 겸손과 소망이 될 것이고, 나아가서 성숙한 시민다운 상호작용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복음은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심각한 죄인이며, 그럼에도 무한히 사랑받고 있다고 가르친다. 복음이 알려주는 이런 사실만으로도 교만과 자기혐오를 없앨 수 있다. 복음은 또한 성경을 세상에 적용하는 방법에 있어서까지 우리를 주의 깊고 겸손하며 사려 깊게 만든다. 글로벌 관점편견과 문화적 맹목, 잘못된 직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예외 없이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별생각 없이 피상적으로 성경을 읽게 될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자신에게만 지극히 상식적인 적용에 빠지기 쉽다. 그런 식의 적용이 단지 자신에게만 말이 되는 이유는 누구나 자신이 사는 사회가 만들어낸 특정한 문화의 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의 하나는 노예들에게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말한 바울을 곡해한 것이다. 그 말씀을 읽은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는 제도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이런 과거의 실수를 통해서 행여 미래의 그리스도인이 현재 우리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또 다른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나 않을지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앞에 놓인 복잡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많은 국가의 정치 상황을 생각해 보라. 독일의 경우 다양한 정치 기반을 가진 여러 정당이 있다. 그러나 그중 어떤 정당도 모든 기독교 가치를 완전히 하나로 통합하지 않는다고 할 때, 독일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 투표해야 할까? 중국에는 아예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대표하는 정당이나 민주주의 제도가 없다. 그럼 중국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도덕적 비전을 문화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그들에게는 명확한 답이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다른 수많은 나라의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도덕 가치를 얼마든지 정치에 적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정치 지형에 접근하는 미국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다.몇 년 전 영국에서 일할 때, 한 젊은 여성이 내게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므로,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기꺼이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이다. 또한 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과 관련해서 가장 정통적인 이해를 고수하는 스코틀랜드의 많은 장로교인을 만났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일요일에 아예 텔레비전도 켜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성경 해석에 근거해서, 문화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킬 가장 좋은 길이 최소한 국가의 책임에 관련해서만은 나라가 보다 더 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많은 영국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미국인처럼 더러운 단어로 생각하지 않으며, 마르크스주의나 공산주의와 동일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내가 그들에게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진정한 신자들이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광범위한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이렇게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1. 정치적 접근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첫째, 모든 문화는 다른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어느 것도 기독교 가치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즉, 믿음을 적용하는 방법에 관해서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건전한 판단과 성경적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 둘째, 우리와 매우 다르게 사물을 보는 그리스도인이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그들이 가진 다른 견해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에서 그들을 기꺼이 잘라내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겸손을 보여야 한다. 명확히 말하자면, 모든 정치 시스템이 다 똑같이 좋다거나 또는 외국의 다른 정치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서 지금처럼 잘 작동할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똑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녀 삼으신 그들을 우리가 하나님의 집 밖에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신학적 그리고 도덕적으로는 얼마든지 동의하지만, 정치적으로 또는 실천하는 방식에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의 도덕 규범에는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지만, 그 도덕이 세속 문화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방법론에 있어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미국 정당은 일반적으로 성적 자유가 가져다주는 부정적인 영향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이 다르다. 세속 문화에서 금욕을 요구하는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게 더 나을까, 아니면 피임 방법을 제공하는 게 나을까? 일부 그리스도인은 모든 형태의 산아 제한 또는 피임 홍보를 반대한다. 그게 결국은 혼외 성관계로 악용되어 소비주의적인 성행위와 문화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더 잘 반영하는 정당에 투표한다. 한편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피임 도구를 쉽게 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성적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방지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차라리 피임 도구를 적극적으로 써서 성병과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정당에 투표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혼외 성관계가 제7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데에는 도덕적 합의가 있지만,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문화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적용하는 최선의 길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동의하는 도덕적 영역이 있지만, 동시에 정치 정책의 적용에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는 영역이 많다. 따라서 미국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투표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한다. 가난한 사람과 이민자를 사랑해야 하지만, 정치 영역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성경이 가르치는 도덕을 모두 지지하는 정당은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특정 정당과 자신의 가치를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절대적 도덕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성경을 근거로 해야 한다는 점은 당연하지만, 또한 동시에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문화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도덕과 그러지 않아도 되는 도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런 식의 구분은 그 어떤 문화에서도 신중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사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을 주의 깊게 적용하기 위해서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통해서 각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모두가 성경적 영감에 근거해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내 주장만이 성경의 절대적인 보증을 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도덕적 명령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그 도덕을 문화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관해서 건전한 (심지어 열렬한!) 토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교회에 얼마나 큰 자유를 주는가? 서로를 향해 배려와 겸손, 호기심으로 충만할 때, 토론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줄 것이다. 2. 정치적 참여가 우리의 복음전도의 사명을 전복시킬 수는 없다.둘째, 정치적 참여가 전도의 문을 막지 않도록, 우리에게는 복음이 주는 겸손이 필요하다. 복음은 특정한 정치적 의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복음이 하나의 불가피한 정치적 의제를 포함한다고 설교한다면, 교회는 결국 교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셈이 된다.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이 특정 정당에 유권자 등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에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더한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특정 정당의 비전을 통해서 세상의 문제로부터 “구원” 받는 것 이상을 포함하는 전인적 사명(holistic enterprise)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 모든 잘못을 바로잡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죄와 사망, 그리고 심판의 권세를 내리시는 예수님과 동역하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류를 대표해서 거룩한 위임을 받은 존재이다. 창세기 3장 속 아담과 하와의 소외로 시작하여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저지르는 아벨 살인, 그리고 결국 창세기 11장 속 모든 민족의 분열로 이어지는 분열의 죄를 일부 해소하는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라고 말씀하신다(사 66:18). 마태가 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마 25:32)라는 말을 들어보라. 이건 사실상 요한계시록 7:9과 같은 의미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하나님 나라가 만물을 회복하는 일에 능동적인 역할을 하고, 우리가 ‘만국’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의 일부를 감당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다른 ‘모든 민족’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특정한 사회적 현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 했던 설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르스 언덕에서 그리스인에게 설교한 이유이다. 그는 언제나 설교를 듣는 청중이 처한 특별한 상황을 고려했다. 팀 켈러의 센터처치는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사계절”을 활용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 봄-교회는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박해와 희생적 제자도의 결과로 성장하고 있으며(중국이 여기에 해당) 활력의 징후가 곳곳에서 보인다. • 여름-교회는 본질적으로 문화 그 자체이며 나라는 이제 기독교로 인해 명실상부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대부분의 서구 문명과 현재의 남아메리카).• 가을-교회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교회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커진다. 기독교 가치와 정반대로 선한 삶을 사는 새로운 방법이 제시된다. 기독교 국가라는 맥락에서 손쉽게 전도하던 교회가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허둥지둥한다. • 겨울-교회는 공개적인 반대에 직면한다. 교회는 이제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인식되고, 여러 면에서 지하로 후퇴해야만 한다(이란, 이라크, 또는 아프리카의 많은 무슬림 통제 국가).교회에 관한 이 계절 비유는 도덕적 비전을 문화에 올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계절, 역사적 순간, 그리고 사회적 맥락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방식에 민감해야 한다. 최근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자세에 대해 그리스도인 사이에 흥미로운 내부 논쟁이 있었다. 마이클 그레이엄(Michael Graham)은 동일한 신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복음주의자가 문화적 입장에 따라 어떻게 분열하고 있는지에 대한 글을 썼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지 굳건한 신학적 확신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문화에서 그 확신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에 관한 명확한 틀이라는 사실을 그의 글은 잘 보여준다. 뉴욕에 사는 우리가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 미국인이 적지 않다. 미국 교회에게 계절은 더이상 여름이 아니다. 이미 한참 전에 가을에 들어섰다. 우리가 수십 년 동안 뉴욕에서 사용한 모델이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으로 미국 나머지 지역에서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적 자세 어떻게 해야 할까? 겸손하고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과거의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명확하지 않으면 서로 오해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외 없이 항상 도덕적 신념을 지키도록 부름받았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덕적 신념을 실천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불의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며 핵가족과 건전한 성을 지지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도 관여해야 하지만, 구원받으려면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반드시 특정 정당의 당원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결코 정치가 교회를 정의하는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떠야 한다. 신앙이 정치적 성향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전도의 힘을 잃을 뿐 아니라, 교회를 책임질 다음 세대까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비극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예수님께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도 원수를 구원하려고 발버둥 치셨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방식을 우리 삶 속에 반영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이해는커녕 심지어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까지도 반문화적인 태도로 희생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설혹 거부당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며(마 5:10-11),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벧전 2:11-12) 것이다. 현실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바른 기독교적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나를 거부하는 사람조차 내가 거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을 온유하다고 하셨고(마 11:29),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 그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어떻게 “온유와 두려움”(벧전 3:15)으로 살아야 할지를 상기시킨다. 단지 문화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또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친절하고 온유하며 또 오래 참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그의 사랑을 세상 속에서 반영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빛이 절실히 필요한 문화에 복음의 빛을 가져오기 위해 함께 사역하자. 사려 깊고 은혜롭게 그리고 지혜를 가지고 단합하여 이 사회를 함께 변화시키자. 원제: The Autumn of the Church’s Influence on Culture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세속문화
사계절
전도
팀켈러
복음
빛과소금
문화변혁
그리스도인의사명
신앙과정치
순전한 기독교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George Marsden
2022-08-04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가 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책이 잠시 인기를 얻었다가 사라졌지만, 루이스의 이 변증서는 처음 발간이 되었을 때보다 21세기가 된 지금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영어로 출판된 것만 해도 2001년 이후 400만 부 넘게 팔렸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책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 지인들이 그에게 300권이 넘는 책을 보내주었는데, “그중 100권이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였다.”사실 순전한 기독교는 원래 책으로 출판하려던 게 아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모두가 고통 속에 있던 시절, 루이스가 BBC 라디오에서 네 차례에 걸쳐서 강연한원고다. 루이스는 방송을 한 후에 이 글들을 각각의 작은 소책자로 출판했다. 그러나 1952년이 되어서야 그는 이 글들을 하나로 묶어서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이 책의 성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도대체 루이스가 신앙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하였기에 이 책은 이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우리 중 누구도 C. S. 루이스가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 루이스를 통하여서 우리의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 루이스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했다루이스의 시대나 오늘 우리들의 시대나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습관의 하나는 삶과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그에 대한 오래된 이해보다 더 선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루이스는 역사를 전공한 학자답게 우리 시대의 “최신 사상”도 다음 세대에게는 진부한 얘기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잠시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유행보다는 오랜 시간 지속될 수 있는 영원한 진리를 찾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순전한 기독교”를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믿음”(viii)으로 정의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최신의 현대적인 사상들을 제시하기보다는 “그가 태어나기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그가 좋아하든지 그렇지 않든지”(ix) 관계없는 기독교의 본질을 제시하려고 했다.그는 역사에 기초하여 기독교를 설명함으로써 될 수 있는 대로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연관하여 기독교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피했다. 예를 들어서 그는 “기독교와 채식주의자” 또는 “기독교와 새로운 세계 질서”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또 다른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보면, 삼촌 마귀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마귀 웜우드에게 그가 담당하는 환자(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위험이 있는 젊은 남자)를 다음과 같이 유혹하라고 가르친다. 그 젊은 남자가 기독교를 잘 활용하면 정치적으로 중요한 담론을 제시할 수 있고, 이를 통하여서 앞으로 정치적으로 유리한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유혹하라는 것이다”(135). 이와 같은 정치적인 편향성을 가지면 그 환자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더욱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현대 신학 사조에 맞추어서 기독교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시도는 “기독교와 물”을 분리하는 것처럼 생명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기독교의 본질을 희석하는 시도라고 보았다. 당시의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 사조는 기독교를 비신화화하려고 노력했지만, 루이스는 수백 년 동안 복음의 중심 메시지였던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더욱 강력하게 옹호했다.2. 루이스는 불변하는 인간의 속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루이스는 영원한 진리를 찾고자 노력했다.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대와 지역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문학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루이스는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을 찾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BBC에서 모든 영국인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도 루이스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모든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었다.그는 선과 악에 대한 보편적 기준을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보편적 기준에 대한 경험에 호소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예를 들어서 당시에 그들이 싸우고 있었던 나치)들이 선과 악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사실 그들도 정직하게 그들 자신을 되돌아보면 자신들도 항상 그 기준에 맞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루이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인식하도록 유도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을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3. 루이스는 다양한 상징들을 사용하여서 근거를 제시했다순전한 기독교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이 책이 사용하는 언어의 선명함이다. 특별히 루이스는 상상, 은유, 비유를 효과 있게 사용했다. 어떤 사람들은 루이스를 합리주의적인 변증가로만 여긴다. 그래서 그에게 무관심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21세기에는 루이스가 가진 그러한 합리성이 유효하지 않다고 무시하기도 한다. 물론 순전한 기독교 안에는 몇몇 탁월한 논리적인 주장도 들어있다. 그러나 많은 평론가가 강조했듯이 루이스는 더 많은 경우에 다양한 상징들을 활용하여 순전한 기독교의 본질을 제시했다. 문학 작가로서 그는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현실을 이해할 줄 알았다. 나니아 연대기와 다른 문학 작품들을 저술한 루이스는 동일한 방식으로 순전한 기독교를 저술했다. 순전한 기독교의 독자들은 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묘사하려고 사용한 다양한 상징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오는 여정과 같다. 또는 반역을 하던 손을 내려놓고 항복하는 것과 같다. 또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자신의 일부분을 죽이는 것과 같다. 또는 걸음마를 배우거나 글쓰기를 배우는 것과 같다. 또는 하나님께 선물을 사드리는 것과 같다. 또는 물에 빠진 사람이 자신을 구하러 온 구조대원의 손을 붙잡는 것과 같으며, 장난감 병정이 살아나는 것과 같고, 말이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것과 같다. 또는 나침반의 자침이 북쪽을 향하여서 움직이는 것과 같고, 어두운 온실 하우스에 갑자기 햇빛이 비치는 것과 같다. 이외에도 루이스는 더 많은 비유를 사용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했다. 4. 순전한 기독교는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루이스는 동시대를 살았던 디트리히 본회퍼가 언급한 “값싼 은혜”를 말하지 않았다. “순전한 기독교”는 최소한의 기독교가 아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다. 도리어 이 책의 독자들은 기독교 복음이 그들에게 과도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고 요구받는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한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224). 또한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이다.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 교회는 사람들을 이끌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들을 작은 예수들로 만들기 위하여서만 존재한다"(199). 우리는 “너희는 온전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변화되고 있는 중이다(198).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변화되고 가고 있다(220). 이것은 오직 새로운 인류의 첫 열매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진정한 포기”이다(226).“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요구는 대중적 부흥주의 전통에서는 간과되었던 요구이다. 부흥주의 전통에서는 “거듭남”을 마치 개인이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루이스에게 있어서 강조점은 그가 자신의 자서전의 제목으로 붙인 “예기치 못한 기쁨”에 있었다. 복음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얻는 예기치 못하는 기쁨만이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자기 자신의 포기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자신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재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마치 태양을 돌고 있는 행성과 같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랑이 제자리에 자리 잡은 모습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5. 루이스는 독자들에게 복음 자체의 아름다움을 제시했다1939년에 루이스는 The Personal Heresy라는 제목의 글을 문학 비평으로 출판했다. 이 글에서 그는 시를 시인의 정서적인 상태와 연결하여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시인은 자신을 보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시인은 저것을 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따라서 바라본다면, 나는 더이상 사람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14).루이스는 변증가로서 순전한 기독교를 저술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끌게 하거나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반영하여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의 책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것은 루이스가 의도적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자신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이 발견한 것들을 그저 다시 설명하는 수준에 머물러있지 않았다. 그는 친절한 여행 안내자처럼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마치 등산에 동행하며 설명해 주는 해설자와 같았다. 그래서 혼자 갈 때는 놓치기 쉬운 온갖 종류의 꽃과 풀을 보게 해주고, 멋진 암석들을 바라보게 하였다. 이런 안내자가 우리에게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멋진 산봉우리와 호수의 전경을 보여주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에게 무척이나 고마웠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것은 바로 당신이 보게 된 그 아름다움일 것이다. 원제: Mere Christianity: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박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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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최고의 치료제
by 최창국
2022-08-03
잠은 단연 최고의 필수적, 보편적 안식의 한 형태요, 여가의 한 유형이요, 쉼의 핵심적인 요소다. 잠은 창조적 선물로서 최고의 치료제다. 건강한 수면 없이 건강한 안식, 여가, 휴식을 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따라서 충분한 수면 습관을 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진정한 워라벨(work-life balance)은 숙면 없이 불가능하다. 잠은 안식과 쉼 윤리의 토대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우리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도록 지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낮을 위해 밤을 주신 것이 아니라 밤과 낮은 각각의 임무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낮에는 적극적으로 몸과 정신을 활용하여 일하도록 지으셨지만, 밤에는 몸과 정신의 안식과 휴식을 통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도록 지으셨다.성경은 일의 중요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잠과 복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시편에는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시 127:2)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의 문맥을 보면 단순히 수면이 가져다주는 건강상의 혜택을 말하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호와께서 필요한 복을 자는 동안에도 주신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일하지 않고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받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표준새번역은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자는 동안에도 복을 내리신다”고 번역하고 있고, 다른 번역본에서는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들을 위해 그들이 자는 동안에도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GNB), “그는 사랑하시는 이들을 위해 그들이 자는 동안에도 공급해 주심으로”(JB)라고 번역하고 있다. 인간은 일을 통해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잠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공급받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인간은 실제로 잠을 통해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건강한 사람은 매일 여러 수면 주기를 통과하는데, 보통 한 주기의 지속 시간은 90분 정도다. 특히 수면 주기에서 숙면과 렘수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숙면은 신체적 치유와 회복을 담당하고, 렘수면은 정서적 치유와 창의성을 담당한다.잠은 우리 건강에 어떤 약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면이 짧아지면 수명이 짧아진다. 수면 부족은 심혈관 건강에 많은 타격을 준다. 수면 부족은 집중력 저하와 판단의 착오를 낳는다. 예를 들어, 오전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19시간 연속으로 일을 하거나 깨어 있는 사람의 인지 능력은 음주 운전자의 인지 능력과 비슷하다. 잠을 소홀히 하면 면역체계도 약화된다. 매일 6시간만 자는 사람은 암 발병률이 40퍼센트나 증가한다. 잠만 충분히 잘 자도 여러 질병과 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 잠은 우리의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준다.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잠을 충분히 자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잠을 적게 자면 전전두피질의 이성적 통제 능력이 약해진다. 그 결과 편도체가 우세해져 분노, 감정적 반응, 투쟁, 도피 반응 등 부적절한 정서적 반응이 야기될 뿐 아니라 긍정적 부정적 감정이 두루 증폭되어 감정 기복과 위험한 행동이 증가한다. 잠을 충분히 잘 자면 사회성이 크게 개선될 뿐 아니라 인지 능력도 향상된다. 잠은 이처럼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잠은 어떤 약보다 더 효과적인 치료제다.렘수면은 창의성을 부화시키는 강력한 원동력일 뿐 아니라 정리정돈의 귀재이기도 하다. 렘수면을 할 때 정서를 조절하는 뇌 속 중심부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반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노라드레날린 호르몬은 전혀 분비되지 않는다. 덕분에 심한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는 기억과 감정을 완전하게 재연하고 해소한다. 그 과정에서 ’나쁜‘ 기억이란 잡초는 솎아내고 부정적 감정을 처리하며 중독적 행태를 줄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잠은 꿈을 통해 매우 효과적으로 정서적 상처를 치유한다(존 피치·맥스 프렌첼, 이토록 멋진 휴식, 128-29).인간의 뇌도 휴식이 필요하다. 잠을 통해 뇌가 휴식할 때 뇌는 정리정돈된다. 잠을 잘 때 인간의 뇌에 축적된 1차 쓰레기가 처리된다. 놀랍게도 인간이 자는 동안 뇌세포 부피는 60퍼센트 정도로 쪼그라든다. 덕분에 뇌척수액이 뇌에 쌓이면 알츠하이머병을 유발하는 단백질인 아밀로이드 같은 유해 물질을 밖으로 흘려보낼 수 있게 된다. 잠을 충분히 잘 자면 뇌를 건강하고 젊게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 특히 고령자를 힘들게 신경퇴행성을 늦출 수 있다. 인간이 겪는 스트레스, 비효율적인 능률, 감정적 갈등, 수많은 분노 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된 선물인 잠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건강한 수면 습관을 형성해야 한다.개인차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하루에 7시간 미만 잠을 잘 경우를 짧은 수면시간으로 정의한다. 하루 7시간의 수면시간은 이상적인 수면시간이 아니라 최소치라는 의미다. 매일 6시간만 자면서 일주일을 보내는 것은 하룻밤을 꼬박 새우는 것만큼이나 유해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면 윤리가 최소한의 잠을 자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저버리는 그릇된 것이다. 충분한 수면 습관을 기르는 것은 근면하게 일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건강한 숙면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생체리듬을 알아야 한다. 생체리듬은 24시간 주기로 이루어진 내면 시계다. 이 시계는 빚과 온도 변화 등과 외부 신호에 따라 24시간 주기와 적절히 동기화된다. 생체리듬은 밤에는 멜라토닌이 분비하여 잠을 잘 준비를 시키고, 아침에는 코르티솔을 분비하여 각성된 느낌을 준다. 건강한 숙면을 위해 알아야 할 또 하나의 내용은 아데노신 분자 축적으로 졸림을 발생시키는 수면 압박이다. 체내 아데노신 함량이 높을수록 피로감이 쌓여 수면 압박을 일으킨다. 피로로 인해 우리 몸에 쌓이게 되는 아데노신은 잠자는 동안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커피 등에 들어있는 카페인을 마시면 아데노신 수용체와 결합하여 우리 몸에 수면 압박이 쌓이지 않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착각이 우리 몸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게 되면 몸의 피로는 누적되어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체내 카페인 반감기는 개인차가 있지만 보통 5-6시간이다. 정오에 커피를 마시면, 마신 카페인의 4분의 1은 자정까지 혈액 속에 남아있게 된다. 특히 늦은 저녁에 먹는 알코올, 매운 음식, 기름진 음식, 항우울제 등은 숙면을 방해하고 나쁜 꿈을 꾸게 한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도 사람이 과식을 하게 되면 간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되고, 그 결과 뇌에 자극적인 액체(humors)를 보냄으로 숙면을 하지 못하게 하여 나쁜 꿈을 꾸게 된다고 하였다(Morton Kelsey, Dreams: A Way to Listen to God, 60). 따라서 건강한 숙면을 위해서는 늦은 저녁에 잠을 방해하는 음식을 피해야 한다.건강한 숙면을 위해서는 적정한 침실 온도도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침실 온도를 15-19도 사이로 유지할 것을 권한다. 침실의 온도가 높으면 수면을 방해한다. 그리고 숙면을 위해서는 환한 LED와 화면 배경조명인 청색광은 취침이 가까울수록 피해야 한다. 청색광은 우리 몸에 한낮이라는 신호를 보내 취침에 필요한 멜라토닌 분비를 막기 때문이다. 건강한 숙면은 우리 삶에 어떤 휴식이나 여가보다도 효과가 크다. 학술지 〈슬립〉(sleep)에 따르면, 스탠퍼드대학 농구 선수들에게 5-7주간 평상시 매일 밤 6-9시간보다 더 많은 10시간의 수면을 취하게 했을 때, 선수들의 정확도가 평균 9퍼센트 향상되었다(존 피치·맥스 프렌첼, 이토록 멋진 휴식, 136-37). 건강한 숙면은 우리의 삶에서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로서 일을 더 효과적으로 가꾸어 내고,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가 더 멋진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창조적 선물인 삶의 리듬의 중요한 한 축인 잠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잠은 우리의 일상의 일, 안식, 예배, 기도, 관계, 여가, 성격 형성 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이다. 건강한 숙면은 건강한 워라벨 형성에 필수적인 요소다.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잠의 중요성을 교회가 인식할 때 한국 교회의 중요한 전통 중의 하나인 새벽기도회를 저녁기도회로 전환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새벽기도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발전적으로 성도들의 연령층에 맞게 기도회의 방법을 전환하는 것이다. 요즈음 새벽기도회를 저녁기도회로 전환하는 교회도 있다. 실제로 새벽 5시 전후에 모이는 기도회보다 저녁 9시 전후에 모이는 저녁기도회에 참여율이 많은 교회도 있다. 물론 노인 성도들이 많은 교회는 새벽기도회를 실행하는 것이 좋을 수 있지만, 젊은 성도들이 많은 교회는 저녁기도회로 전환하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역자들이 여러 명이 있어 새벽기도회와 저녁기도회를 함께 실행할 수 있는 교회라면, 새벽기도회와 저녁기도회를 함께 실행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잠을 성도들이 충분히 누리도록 사역 시스템을 구축하여 실행하는 것도 하나님 사역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잠
수면
안식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갱신을 위한 전략(4-3)
by Tim Keller
2022-08-02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의 마지막 글입니다. 1부 주류 교회의 쇠퇴2부 복음주의의 쇠퇴3부 갱신의 길4부 갱신을 위한 전략[4-1] 갱신이 필요한 이유갱신을 위한 비전 [4-2]갱신 앞에 놓인 함정갱신을 위한 리더십[4-3]갱신 프로젝트부록: 클래펌 그룹갱신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 목록은 완성된 게 아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들을 당신의 뜻에 맞게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제시하는 이 목록은 세 번째 기사에 이미 나와 있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1. 교회 개척과 갱신. 우리는 미국에서 새로운 교회 개척의 수를 현재 매년 3-4천 개에서 6-8천 개로, 그러니까 두 배로 늘려야 한다. 현재의 교회 개척 모델이 바뀌어야 한다. 첫째, 빈곤층과 노동계급 인구 사이에서 개척 자원이 너무 부족하지만, 조건이 좋은 지역에서는 개척 비용이 너무 비싸다. 전반적으로 교회 개척자에게는 (a) 훨씬 더 많은 코칭과 지원, (b) 사역에 필요한 보다 다양한 훈련과 교육, (c) 마케팅과 교회 이전을 통한 성장 모델이 아니라, 초신자 개종을 통해 성장하는 복음주의 모델에 대한 더 많은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2. ‘교리로 반격하는’ 제자도. 일반적으로 기독교 교육은 대대적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성인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기독교 교리를 사용하여 교인들의 삶에 깊이 파고드는 기본 문화 내러티브를 전복해야 한다. 우리는 교리 자료를 모든 사람에게 널리 배포할 뿐 아니라, 지역 교회와 협력함으로 사회에 범람하는 기존 문화의 채널을 방해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3. 탈 기독교 시대의 전도. 서구의 기독교 교회는 역사상 최초로 탈 기독교 시대가 주는 깊은 세속 문화에 직면해 있다. 교회는 아직까지 세속적인 사람과 “종교 없음”(none)을 천명하는 사람들을 전도할 제대로 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그들을 전도하기 위한 내용과 수단을 모두 개발하는 것이다. 전도 수단은 초대 교회에서와 같이 전도에 평신도를 동원하는 것을 포함한다. 전도 내용은 기독교가 존경받을 만하고 바람직하며 믿을 만하다는 것을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담을 것이다(파스칼의 팡세, 187 참조).4. 사회 정의를 위한 네트워크. 우리는 네트워크(최소한 하나의 초교파 사역 또는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네트워크는 지역사회에서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조직하여 다양한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또한 지역 사회 수준에서 보다 더 공정한 사회 질서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어느 정도는 규모가 있는 교회만이 사회 문제를 다루는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 네트워크는 해당 지역사회에서 가장 심각하고 만성적인 불의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에 제공할 것이다.5. 믿음의 사역 네트워크.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직업에 신앙을 통합함으로써 공동선에 봉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들의 직장에서 ‘빛과 소금’(faithful presence)[19]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조직하고 준비시키는 네트워크(기존 또는 새로운 사역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네트워크는 교회로 하여금 제자훈련 사역을 실행함으로 교인들이 교회 따로 직장 따로의 생활을 하지 않도록, 또한 직장에서 직업을 타인을 지배하는 도구로 악용하지 않도록 훈련시킬 것이다. 6. “기독교 지성” 프로젝트.[20] 복음주의는 대다수의 인구에 대한 호소력을 잃지 않으면서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강력한 반지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한 목표에는 정통 개신교를 위한 강력한 지적 문화를 구축하는 동시에 대학 교수진과 기독교 공공 지식인의 수를 늘리는 것이 포함된다. 이런 목표가 단지 기본적으로 (a) 대체로 진보적인 대학과 (b) 대체로 보수적인 싱크 탱크의 기존 지적 및 문화 경제 속에 더 많은 그리스도인을 키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거기에 더해서 학문과 지적 작업을 위한 일종의 대체 문화 경제를 만드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7. 새로운 리더십 파이프라인. 우리는 전국의 청소년 사역과 캠퍼스 사역을 갱신, 재창조, 확장, 그리고 크게 강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지역 교회 및 교단, 사역/신학 훈련 센터, 그리고 대학과 (과거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리더십 개발을 위한 일관되지만 매우 다양하고 유연한 경로를 형성할 수 있다(예: 개종, 학생 리더십, 인턴십, 직원 및 기타 리더십 직위). 이 모든 사역의 목적은 잘 갖추어진 기독교 지도자를 보다 더 많이 배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일곱 개의 프로젝트 뒤에는, 기독교 자선 사업이라고 부르는 여덟 번째 ‘메타’ 프로젝트가 있다. 강력한 재정 지원 없이는 교회를 새롭게 할 수도 없을뿐더러, 교회가 사회에 도움이 될 수도 없다. 이 자선 프로젝트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기부하고 부를 관리하는 방식에 변화를 요구한다. 그 결과 그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재정을 사역을 위해 헌신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결론: 예수님은 그 어떤 종잣돈도 없이, 그 어떤 조직이나 기관도 없이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을 시작하셨다. 그는 심지어 책이나 비전, 사명 또는 가치 선언문도 남기지 않으셨다! 그가 남긴 것은 고작해야 몇 명의 사람이 다였다. 그들을 통해 동일한 가치와 경험을 공유한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우리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하나님께 우리의 눈을 열어 동일한 것을 보고, 진리와 열망으로 축복하고, 주님이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새롭게 하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이들로 만들어진 공동체가 필요하다(행 20:28).부록: 클래펌 그룹윌버포스. 1787년 28세 국회의원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두 가지 큰 목표를 내 앞에 두셨다. 노예 매매 금지와 사회 풍속 개혁이다.” 그는 불과 2년 전에 개종한 초신자였다. 노예무역 폐지는 그 가능성이 희박했다. 노예제도는 인간이 기억하는 한 인류 역사 속에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여론은 일반적으로 그런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대영제국의 경제는 노예제도에 완전히 묶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윌버포스가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가 소속한 지역 대부분 유권자의 장기 소득과 번영이 크게 감소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누가 봐도 정치적 자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존 웨슬리는 죽기 열흘 전에, 젊은 윌버포스에게 편지를 썼다.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하여 당신을 일으키지 아니하시면,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과 마귀의 반대에 치여서 지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신다면, 누가 감히 당신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긴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요약하자면, 윌리엄은 그 후 46년이 흐르고 죽음을 딱 사흘 앞뒀을 때까지, 대영제국 내 노예무역 폐지의 성공 전까지 겪어야 했던 물리적 폭행을 포함한 각종 반대를 고스란히 모두 다 견뎌냈다. (참고: 노예를 해방시킨 노예 소유주 보상을 위해 그는 영국 국고를 열도록 했다. 실로 엄청난 액수였다!) 윌버포스가 도덕과 관련한 문화적 기준을 개혁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그의 놀라운 재능과 탁월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의 성공이 가능했던 건 클래펌 펠로우십이라는 흥미로운 기독교 공동체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작가는 이렇게 썼다. “윌버포스가 노예무역의 심장을 꿰뚫은 화살이었다면, 클래펌 펠로우십은 그를 날아가게 한 활이었다”(J. Hart, “Every Arrow Needs a Bow,” Regeneration, Fall 99).클래펌 모임의 형성 클래펌 런던에서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은행가이자 국회의원이기도 했던 윌버포스의 그리스도인 친구 헨리 손톤(Henry Thornton)이 윌버포스 가족에게 클래펌에서 큰 집을 하나 사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합의를 한 후, 손톤은 에드워드 엘리엇(Edward Eliot)과 찰스 그랜트(Charles Grant)가 임대한 땅에 두 개의 작은 집을 지었다. 그랜트와 나중에 테인머스 경(Lord Teignmouth)이 된 존 쇼어(John Shore)는 둘 다 인도에서 경력을 쌓았고, 나중에 강력한 인도 선교의 후원자가 되었다. 노예제도에 강력히 반대했던 또 다른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학자이자 활동가인 그랜빌 샤프(Granville Sharp), 그는 노예제 반대 협회(Anti-Slavery Society)의 회장이 되어 시에라리온 프로젝트(Sierra Leone Project)와 영국 및 해외 성서 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의 활동에도 참여했다. 다른 한 사람은 고작 16세에 서인도 제도의 부동산 감독관이었던 자카리 마컬리(Zachary Macauley)였다. 그는 노예무역이 주는 피해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절감한 상태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클래펌 그룹에 합류했다. 스태포샤이어 욕살(Yoxall in Staffordshire)의 지주이자 더햄(Durham)의 성직자인 토마스 기스본(Thomas Gisborne)은 매년 일정 시간을 윌버포스와 함께 사역에 투신했다. 한나 모어(Hannah More)는 교육자이자 작가였다. 교구 목사인 존 벤(John Venn)은 직접적으로 종교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목사이자 교사였다. 그는 전체 지역 사회를 영적으로 양육했으며 그의 조언은 클래펌 모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783년, 존 벤은 존 뉴톤(John Newton), 찰스 시미온(Charles Simeon), 리차드 세실(Richard Cecil) 및 기타 여러 사람을 포함한 복음주의 성공회 성직자들과 격주 토론 그룹을 만들었다. 일렉틱 소사이어티에서 교회 선교 소사이어티(Church Missionary Society)가 만들어졌고, 그 결과 무려 9,000명 이상의 남녀가 해외로 파송되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은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정기 간행물인 크리스천 오브저버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다양한 클래펌 회원이 향후 70년간 이 잡지가 계속 발행되는 데에 관여했다. 클래펌 펠로우십이 가장 중점을 두었고 또한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노예제 반대 사회 개혁이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그들은 광범위한 이해관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노예제 폐지가 클래펌의 핵심 관심사였으며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지만 [그들은] 또한 다른 다양한 사회 운동 및 자선 사업에도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형법 개정, 기자단 폐지, 정신질환자 돌봄 개선 [특히 아동노동법 개혁], 굴뚝 청소 소년 돌봄, 공장 조건의 규제와 학교 및 기타 교육 사업의 진흥을 들 수 있다.”[21]교훈클래펌 펠로우십이 문화적 갱신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사회 정의에 집중했던 것만큼 개종과 선교를 통해 개인의 신앙을 전파하는 데에도 전념했다. 놀라울 정도로 균형 잡힌 그들은 단지 ‘한 가지 문제’만 파고든 편협한 단체가 아니었다. 교육과 문학 그리고 신학 저널과 교회 확장 및 정치적 대의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2) 그들은 종파에 얽매이지 않았다. 물론, 핵심 종파는 성공회였다. 그러나 당시 영국에서 성공회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종파는 말할 것도 없고, 노예제 반대 활동과 관련해서는 기독교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공동 전선을 구축했다. 그들이 강조한 것은 ‘종파주의’가 아니라 복음 중심이었다. 3) 그들은 개인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사역을 구축했다. 단순히 자신의 개인 경력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서로에게 헌신했다. 그들의 관계는 평생 이어졌다. 그들은 함께 예배하고,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하고, 또 함께 살았다.4) 그들은 단지 목표 추구라는 면에서만 그리스도인이었던 게 아니라, 그 목표를 추구하는 방식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었다. 윌버포스와 오늘날 우리 사이의 역사적, 문화적 거리는 상당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이미 이미지와 돈 그리고 동원된 유권자를 기반으로 한 정치공학이 만연했고, 거기에 더해서 야당에 대한 분노와 ‘우리가 남이가’(rally the base) 식의 선동적 수사가 넘쳐났다. 그러나 윌버포스가 택한 것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의 정치에는 단지 기독교적 내용(사회 정의)만 있는 게 복음이라는 형식(관계, 정직, 성실, 지속성)까지 함께 들어있었다. 5) 그들은 자신이 재능이 넘치고 헌신했기에 똑같이 재능 있고 헌신적인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의 “두뇌는 그들의 종교를 비웃는 사람들조차도 부정할 수 없었다. 백과사전 수준의 지식, 연구 능력, 번뜩이는 재치와 문학적 스타일, 사업적 현명함, 외교 정책의 전문성, 법률 능력, 웅변 및 의회 활동에서 보여준 실력 등 놀라운 범위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어떤 수상도 윌버포스가 도움을 요청해야 할 수준의 내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22]6) 마지막으로,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초점을 잃지 않았다. 핵심이자 구체적이며 전략적 목표는 단 하나, 노예무역의 종식이었다. 이 하나의 목표야말로 그들을 하나로 묶은 ‘접착제’였다.클래펌은 죄인인 인간으로 구성된 집단이었고, 따라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23] 그러나 클래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화를 바꾸었다. [주][19] See Hunter, To Change the World, for a description of the concept of “faithful presence”.[20] 나는 마크 놀(Mark Noll)의 획기적인 저작인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 Eerdmans, 1994)을 기리기 위해 이 ‘기독교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정했다.[21] Nigel Scotland, “The Social Work of the Clapham Sect: An assessment,” Themelios, Volume 18, Issue 1.[22] Garth Lean, God’s Politician, Helmers and Howard Publishers, 1987, 135.[23] 클랩햄 그룹의 사회 개혁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이전에 인용한 나이젤 스코틀랜드(Nigel Scotland)가 쓴 훌륭한 글을 참조하라.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가 아니라 단지 그들을 ‘위해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영국 상류층의 경우처럼), 클랩햄은 그런 면에서 분명히 시대를 앞서갔다고 지적한다. 클랩햄은 “샤프츠베리 경(Lord Shaftesbury),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그리고 수백 개의 복음주의 단체 속 여러 인물들을 포함해서 19세기 이후 수많은 자선 사업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빈곤하고 소외된 이를 위한 현대 국가의 원조와 지원 모델의 토대가 클랩햄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4-The Strategy for Renewal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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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갱신을 위한 전략(4-2)
by Tim Keller
2022-08-01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의 마지막 글입니다. 1부 주류 교회의 쇠퇴2부 복음주의의 쇠퇴3부 갱신의 길4부 갱신을 위한 전략[4-1] 갱신이 필요한 이유갱신을 위한 비전 [4-2]갱신 앞에 놓인 함정갱신을 위한 리더십[4-3]갱신 프로젝트부록: 클래펌 그룹갱신 앞에 놓인 함정갱신의 가능성을 품은 운동에는 많은 함정이 있기 마련이다. 위험을 미리 인식하고 피해야 한다. 교회 갱신으로 가는 길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 모든 교단과 기관이 과거에도 저질렀고, 지금도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실수를 피해야 한다.[4] 지난 수십 년 동안 주류 교회의 위축은 복음주의의 성장과 맞물려 있었다. 많은 이들의 눈에 그 사실이 주는 교훈은 단순했다. 종교에서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보수정통주의가 통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이제는 더는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복음주의 교회도 쇠퇴하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남침례교는 무려 100만 명이 넘는 교인을 잃었다.[5]교회 갱신의 길은 진보와 보수 교단 및 기관이 지금 현재 저지르고 있는 실수를 피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잘 알려진 비유를 사용하면 양쪽에 괴물이 있다. 선원들은 스킬라로부터 제대로 떨어져서 항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카리브디스의 손아귀에 빠지고 말았다. 오늘날 미국 교회에는 조심스럽게 피해야 하는 경쟁적인 “괴물”이 몇 가지 있다.괴물 스킬라 피하기첫 번째 글에서 나는 왜 자유주의/진보 기독교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지, 왜 교회 갱신 프로젝트에서 그 방향을 피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했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모든 세기와 문화에 걸쳐 보편적으로 믿어 온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거부한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재정의하는 것만이 현대 과학 시대에서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자유주의 개신교는 결국 현대 자유주의 세속주의와 하나 다르지 않게 되었고, 본질적으로 그들은 실재에 관해서, 하나님의 본성과 방식에 관해서,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서 세속주의와 하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현대 문화가 결코 제공하지 못하는, 구별되는 뭔가를 세상 사람들에게 제시할 능력은 이제 그들에게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보수 교회의 지독한 실패에 분개하는 많은 전-복음주의자(ex-evangelicals)가 복음주의라는 괴물 카리브디스를 피하려고, 오히려 다른 괴물 스킬라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완전히 ‘탈 회심’(de-convert)하지 않은 사람들은 (관점에 따라서 모호하다고 할 수도 있는) 교리적 자유와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 때문에 주류 개신교 교회로 향한다. 그러나 정치와의 긴밀한 연계는 주류 교회 자신을 쇠퇴시키는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를 쇠퇴시키는 이유가 되고 있다. 괴물 카리브디스 피하기두 번째 글에서 나는 복음주의의 쇠퇴에는 많은 뿌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19세기 초부터 반지성주의와 반엘리트주의 성향이 강했던 미국 복음주의는 고등교육과 학문, 과학을 크게 불신했다.[6] 물론 모든 보수 종교는 자연적으로 율법주의와 독선, 즉 “죽은 정통”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7]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대중의 눈에 세 가지 심각한 불신을 일으키게 하는 실수로 이어졌다.첫째, 상당수의 복음주의자가 기독교 신앙을 미국의 우익 포퓰리즘이라는 특정 정치적 의제와 결합시켰다. 많은 젊은 성인들, 특히 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눈에 복음주의자는 기독교를 단순한 파워 블록으로 격하시키는 존재로 비췬다.[8]둘째, 복음주의자는 현대 문화를 향해 날카롭고 가혹한 발언을 함에 따라 사람들을 끌어당기거나 복음을 전하려는 의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국민의 절반이 넘는, 즉 자유주의와 세속적 인구에게 ‘우리는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음’이라는 표시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복음주의자가 호소할 수 있는 대상은 전통적으로 사고하는 덜 세속화된 미국인, 점점 줄어들고 있는 숫자에 불과하다. 복음주의자는 그들의 사역 방식을 역사의 새로운 단계인 탈 기독교 사회에 적응시킬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9] 하나님, 죄, 도덕적 절대성, 그리고 내세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참여시키고 설득하는 데 복음주의자가 그동안 진전을 이룬 건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진보 좌파의 인종과 젠더에 대한 과도한 이념적 주장에는 저항하면서도 많은 복음주의자가 인종차별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그들은 교회와 목사들을 성적 학대로 고발한 여성들에 대해 비극적이라고 할 정도로 잘못되고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다.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와 교회가 여성 고소인을 ‘페미니스트’에 빠진 사람으로 호도했다. 용서와 화해를 내세운 것도 따지고 보면 다 피해 여성을 침묵시키고 성범죄자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대중의 눈에 비친 일련의 모습은 복음주의 신뢰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중도” 피하기이제 우리는 반대편에 서 있는 두 개의 바다 괴물이라는 신화의 이미지는 뒤에 남기고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두 괴물의 손이 닿지 않게 정확하게 바다 한가운데에서 항해할 수만 있다면, 이론상 우리는 그 어떤 사망이나 손상 없이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교회 갱신의 길은 너무 보수적이지도, 또 너무 진보적이지도 않은 길을 택하는, ‘중도’를 걷는 것이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있다.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그것은 나쁜 조언이다. 자유주의 주류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개신교 교리를 보수주의보다 덜 지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을까? 인종 및 경제적 정의에 대해서는 꼭 조금만 걱정해야 하는가? 거기에 더 에너지를 쏟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현대 문화가 조장하는 우상과 권력 구조에 대해 꼭 온건한 비판만 해야 하는가? 성경의 권위를 꼭 적절한 수준에서만 인정해야 하는가? 교인들이 꼭 모두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항상 ‘중도’ 아니면 철저한 ‘비정치적’이어야만 하는가? 전혀 아니다. 새로워진 교회는 역사적 교리에 있어서 완전히 정통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이어야 한다. 진정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차이를 줄이는 것’ 또는 양쪽 모두를 다 조금씩 받아들이는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양극단에 빠져 범할 수 있는 실수를 피하는 방법도 있다.[10]믿음, 윤리, 영성, 그리고 실천에 있어서 새로워진 교회는 자신의 길을 개척할 것이다. (a) 갱신된 교회는 더 수준 높은 지적 온전함(integrity)과 철저한 학문을 추구할 것이다. 교회는 그럼으로써 주류 교회보다 공동선과 공공 정의에 더 큰 공헌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이제 철저하고 공들인 주석과 보수적인 개신교보다 훨씬 더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고 전파하는 모습을 통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b) 윤리적인 면에서, 갱신된 교회는 인종과 빈곤에 대한 ‘자유주의적’ 견해와 낙태, 섹슈얼리티, 가족, 젠더에 대한 ‘보수적’ 견해를 묘하게 결합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이 외부인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함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개인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갱신된 교회는 사회 개혁에 대한 헌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경청,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희생적인 사역과 전도, 새로운 교회 개척, 변증, 현대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대한 깊은 헌신 등 이 모든 것을 결합할 것이다. 교회는 새로운 문화에 복음을 맥락화하고 신학과 현대 사상이 서로 대화하도록 해야 한다는 당면한 필요를 신학의 회복뿐 아니라 역사적 교리와 전통의 충실함(faithfulness)이라는 점과도 결합할 것이다.[11] 교회는 (성공회, 루터교, 개혁파와 같은 정통 고백 교파 중심의) 역사적 교리에 대한 강조와 (오순절 및 기타 부흥 전통에 의해 강조하는) 영적 경험 및 (주류에서 중시하는) 사회 개혁에 대한 강조를 하나로 합칠 것이다. (c) 갱신된 교회는 많은 백인 미국인이 지향하는 급진적인 개인주의[12]나 진보 좌파 대부분이 주장하는 세속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인종과 정의에 대한 방향을 찾을 것이다.[13] 정의에 관한 성경 말씀과 더불어, 미국의 유색인종이 겪은 경험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실제로 좌파, 우파 또는 중도가 아닌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리키는 작가와 사상가가 있다. (d) 갱신된 교회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급진적인 개인주의나 부정적인 혐오를 반영하지 않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육체의 긍정, 동의, 다양성, 자유, 안전, 그리고 사랑에 대한 문화 고유의 내러티브를 사용함으로써 교회는 기독교 성윤리를 거부하기보다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더 큰 틀 안에서 설득력 있는 용어로 성에 대한 성경적 비전을 제시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e) 갱신된 교회는 정치와 국가에 대한 더 나은 방법을 찾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등장한 새로운 포퓰리스트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는 국가에 대한 기존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멀어졌다. 우파에서는 점점 더 많은 보수주의자가 국가 권력을 사용하여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을 억압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홍보하는 데 매력을 느낀다(예: 헝가리의 빅터 오르반(Victor Orban)에 대한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의 매료). 다른 한편으로, 대부분의 젊은 성인들은 진보적이며 국가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국가가 부와 권력과 지위를 특권 집단에서 불리한 집단, 특히 인종 및 성 소수자 및 여성에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이런 주장은 수혜 집단 구성원의 자유와 평등한 대우,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까지도 정당화한다.[14]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국가의 역할과 정치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거의 전쟁을 치른다고 할 정도로 서로 다른 견해로 다투고 있다. 갱신된 교회도 이런 논쟁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는 모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일각에서 들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무시하면 안 된다. 그건 모두가 다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5] 교회는 현재 미디어 ‘거품’ 중 하나에만 완전히 또는 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뚜렷한 세계관을 특권으로 하는 유망한 제안도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더 중립적인 방향을 지향함으로 공공 영역에서 여러 종교가 다 함께 번성하고 참여를 촉진하는 제안을 채택해야 한다.[16]갱신을 위한 리더십효과적인 운동의 핵심은 리더십이다. 리더십은 다음과 같은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다중 민족(multi-ethnic). 앞서 말했듯이 갱신된 교회는 처음부터 다중 민족이어야 한다. 초기 성립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몇 명의 나이든 백인 남성이 처음에 교회를 시작하고는 젊은 다민족 지도자를 초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나 처음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이 처음에도 또 시간이 가도 계속해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다중 교파(multi-denominational). 교단과 전통을 초월한 지도자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특정 전통에 지나치게 지배받는다면, 교회는 신뢰성을 잃고 “사실상 침례교” 또는 “사실상 장로교” 등으로 비췰 것이다. 참을성 있는 경청과 노력 없이는 결코 함께하지 않을 많은 그룹(루터교, 오순절, 전통적인 흑인 교회)이 있다.다중 “접점”(multi-“nodal”). ‘노드(node)’는 네트워크의 교차점이다. 기독교 지도자는 공적인 교단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인과 교회 및 사역의 강력하고 다양한 네트워크와 비공식적이지만 많은 경우에 엮여서 살고 있다. 갱신 리더는 네트워크가 잘 형성되어야 한다. 이런 부분에서는 다를 수 있다.(a) 영적 은사, 적성, 재능 및 전망. 광범위하고 심오하며 지속적인 운동은 결코 한 명의 지배적 인물에 의해 주도될 수 없다. 심지어 예언적 기질이나 예술적 기질, 경영적 기질 또는 학문적 기질이 다 비슷하다면, 아무리 여러 사람이 모였다고 해도 제대로 된 운동이 일어날 수 없다. 리더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리더를 분류하는 방법은 다양해야 한다! (아래 목록은 중복된다.)• 다양성을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은 에베소서 4장에 기초한 앨런 허쉬(Alan Hirsch)의 “APEST” 목록이다. 이것은 사도적(apostolic), 예언적(prophetic), 전도적(evangelistic), 목양적(shepherding), 그리고 가르치는(teaching) 은사와 성향을 의미한다.[17] • 다양한 은사를 생각하는 또 다른 방법은 흔히 조직의 이사회에서 자주 인용하는 네 가지 유형의 리더로 구분하는 것이다. (1) 비전가 또는 ‘아이디어 형’ (2) 예산, 기금 마련 및 비즈니스 모델을 이해하는 금융 전문가, (3)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을 이해하는 전략가, (4) 조직의 실제 제품을 꿰뚫고 있는 해당 주제 전문가.• 은사를 다양하게 갖추는 마지막 방법은 리더십의 직업 구성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다. 목사와 신학자가 기독교 갱신 운동에 중요한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성직자가 지배하는 갱신 운동은 단지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결과를 낸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건 결코 개신교와 맞지 않다는 점이다! 학자, 사업가, 예술가, 과학자, 언론인, 정치인, 변호사 등의 평신도 지도자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b) ‘자본’의 형태. 자본은 여러 형태를 가질 수 있다. 부와 같은 경제적 자본이 있다. 관계적 연결과 같은 사회적 자본뿐 아니라, 상징적, 문화적 자본 및 기타 세분된 다른 자본도 있다. 제임스 헌터(James Hunter)가 썼듯이, 중복된 자본과 다양한 은사를 가진 지도자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할 때 “세상은 진짜로 변한다.”[18]그러나 이 분야에서는 달라선 안 된다.영적 성숙. 새로운 운동이 저지르는 지극히 흔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는 아주 단순하다. 꼭 필요한 다양한 형태의 자본과 연결을 얻기 위해 영적 성숙이 부족한 사람을 지도자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물론 성장하고 있는 확고한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다양한 수준의 성숙과 영적 경험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교만과 자기중심적 태도, 또는 분노와 가혹함의 패턴이 익숙한 사람을 지도자로 끌어들이는 것은 비극을 부르는 치명적인 실수이다. 리더는 이래야 한다.진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갱신을 위해 일하는 지도자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 활력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여한 사람들의 다양한 은사와 자본은 단지 인위적으로 결합할 뿐이다. 여러 사람의 다양한 관점과 지식이 우리 속에 깊이 스며들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더 현명해지고, 더욱 폭넓은 관점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더 창의적인 태도로 서로를 신뢰할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전형적인 예는 18-19세기 영국의 “클래펌 모임”(Clapham Group)이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친구들의 내부 서클로, 런던 교외의 클래펌 마을로 이사하면서 문자 그대로 공동체가 되었다. 그들의 공통 목적은 기독교/성경적 가치로 영국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노예제 폐지에 중점을 두었다. 클래펌 모임에서 파생한 것 중 하나가 격주 토론 그룹에 외부 인사를 초대한 성직자 그룹인 에클레틱 소사이어티(Eclectic Society)이다. 바로 에클레틱 소사이어티에서 처치 미셔너리 소사이어티(Church Missionary Society)와 중요한 복음주의 신문인 크리스천 오브저버(Christian Observer)가 탄생했다. 클랩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록을 참조하라.너무 빨리 움직이지 말라. 클래펌의 사례는 깊고 지속적인 변화가 결코 한 번에 또는 빠르게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그보다 더 기초적인 다른 프로젝트가 먼저 완료되어야만 가능하다. 가장 빨리 이뤄져야 하는 것 중에는 이 시리즈의 세 번째 기사에서 언급한 ‘이니셔티브’가 있다. 공통된 신학적 토대가 구축되어야 한다. 회개와 특별한 기도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미래에 대한 비전과 구체적인 목표를 꿈꾸고 브레인스토밍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인도할 “프로테스탄트 사회 교육”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된 마음과 비전의 통일성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수행할 특정한 이니셔티브와 프로젝트를 결정하고 각 프로젝트를 장기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리더십 팀에 새로운 사람들을 모집하라(이 기사 하단의 부록 참조).[주][4] 어떤 사람은 우리가 미국 교회의 갱신을 위해 주류 개신교나 복음주의 개신교를 기대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가톨릭교회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게 어떻겠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톨릭도 매우 심각한 성적 학대 스캔들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급격한 쇠퇴에 직면해 있다. 로스 두타트(Ross Douthat)은 다음과 같이 썼다. “최근 들어, 우리[가톨릭]는 교황이 바뀔 때마다 신학과 이데올로기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나라와 교회 사이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있고, 현재의 교황 제도 아래에서 벌어지는 교리적 갈등은 추기경 사이에도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일반 신도 수준에서 말하자면, 서유럽에서 라틴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이전에 가톨릭이었던 많은 국가와 지역에서 가톨릭은 종교 개혁이라는 위기를 능가하는 신도 이탈을 경험했다.” “The Shadow of Failure: A Reply to Edmund Waldstein,” First Things, June 2022. [5] “Southern Baptists Drop 1.1 Million Members in Three Years,” Christianity Today, MAY 12. [6] Nathan O. Hatch, The Democratization of American Christianity, Yale, 1989.[7] “Live Orthodoxy” in Richard Lovelace, Dynamics of Spiritual Life: An Evangelical Theology of Renewal(Expanded Edition), IVP, 2020, 271-288; Sinclair Ferguson, The Whole Christ: Legalism, Antinomianism, and Gospel Assurance―Why the Marrow Controversy Still Matters, Crossway, 2016.[8]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주의자는 개신교 주류가 자유주의 및 민주당과 결합했을 때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보수주의 및 공화당과 관련해서 저질렀다.[9] See Lesslie Newbigin, Foolishness to the Greeks: The Gospel and Western Culture, Eerdmans, 1988, and “Can the West Be Converted?”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January, 1987.[10] 단순한 조합이나 ‘중간 타협책’이 아닌 대안을 찾기 위해서 가장 접근이 쉽고 탁월한 방법은 크리스토퍼 왓킨(Christopher Watkin)이 곧 출간할 책에서 찾을 수 있다. Biblical Critical Theory: How the Bible's Unfolding Story Makes Sense of Modern Life and Culture, Zondervan, 2022.[11] For example, Michael Allen and Scott Swain, Reformed Catholicity: The Promise of Retrieval for Theolog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Baker, 2015.[12] Christian Smith and Michael O. Emerson, Divided by Faith: Evangelical Religion and the Problem of Race in America, Oxford, 2000; Also see C. Smith, American Evangelicalism, especially chapter 7- “Ironies of Subcultural Distinction,” 178-217.[13] 미공개 논문에서 제임스 헌터(James D. Hunter)는 “분석적이고 비판적 인종 이론”과 “존재론적이고 비판적 인종 이론”을 구분한다. 후자는 당신의 인종을 당신의 궁극적인 정체성으로 바라보고, 다른 모든 요소를 제거하거나 주변화함으로 인종을 “구체화”한다. 내 생각에 헌터의 논문이 출판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우리가 다루는 모든 가능성(option)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할 것이다.[14] Eric Kaufmann, “The Politics of the Culture Wars in Contemporary America”, Jan 25, 2022, The Manhattan Institute. [15] 갱신된 교회가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들어야 할 두 개의 에세이는 에릭 카우프만(Eric Kaufmann)의 Manhattan Institute 기사와 아담 조이스(Adam Joyce)가 쓴 “만약 ‘제3의 길’이 있다 해도, 이건 아니다(ABC Religion and Ethics, May 10, 2022.)”이다. 조이스는 매우 진보적인 입장에서 말한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닌 사람을 중도주의자로 구분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 중 상당수가 그의 말과 달리 실제로 권력과 인종 분석을 실시했다. 또한 어떤 주제에 있어서 단지 스펙트럼 양쪽의 다른 주장을 결합하는 것이 중도주의자라는 그의 주장도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에세이는 단지 ‘중도’ 입장을 취함으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떻게든 정치적 수준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유익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16] See Rowan Williams, “Secularism, Faith, and Freedom”, chapter 2 in Faith in the Public Square, Bloomsbury, 2012—can be found on-line at VIRTURONLINE; Wilfred McClay, “Two Kinds of Secularism” in The Wilson Quarterly(Summer, 2000). A sophisticated dialogue on this subject can be found in R. Audi and N. Wolterstorff, Religion in the Public Square: The Place of Religious Convictions in Political Debate(Lanham: Rowman and Littlefield, 1997).[17] See Alan Hirsch, 5Q: Reactivating the Original Intelligence and Capacity of the Body of Christ, 100 movements, 2017. 앨런은 아주 세세하게 각 유형의 리더의 특성을 설명한다. 어느 리더나 혼자로는 안 된다는 사실, 누구나 다른 성격을 가진 리더와 동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하게 강조한다. [18] James Davison Hunter, To Change the World: The Irony, Tragedy, and Possibility of Christianity in the Late Modern World, Oxford, 2010, 43.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4-The Strategy for Renewal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미국교회
교회갱신
개인주의
공동체
복음주의교회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갱신을 위한 전략(4-1)
by Tim Keller
2022-07-31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의 마지막 글입니다. 1부 주류 교회의 쇠퇴2부 복음주의의 쇠퇴3부 갱신의 길4부 갱신을 위한 전략[4-1] 갱신이 필요한 이유갱신을 위한 비전 [4-2]갱신 앞에 놓인 함정갱신을 위한 리더십[4-3]갱신 프로젝트부록: 클래펌 그룹갱신이 필요한 이유 1. 교회에게는 지금 갱신이 절실하다. 미국 개신교는 영적, 제도적 쇄신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주류-자유주의 교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가파르게 쇠퇴해 왔으며, 역사적으로 축적된 재산과 부동산 자산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보수-복음주의 교회도 쇠퇴하고 있으며, 특히 엄청난 숫자의 젊은이 이탈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흑인 교회는 그들대로 매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세대적, 신학적, 제도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국 역사상 교회가 지금처럼 약해진 적이 없었다. 또한 미국 인구가 지금처럼 종교와 단절된 적도 없었다. 기독교 국가 미국이라는 지붕 아래에서 생존하던 다양한 기관이 지금처럼 한꺼번에 이렇게 세력을 잃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가톨릭교회조차 교구 축소와 성직자 감소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 관해서는 이전 글에서 자세히 설명했다.)2. 국가에도 갱신이 필요하다. 많은 세속적 목소리가 전례 없는 교회의 변질을 말 그대로 축복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많은 분석가와 사회 이론가는 다른 어디에서도 제공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종교가 사회에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바로 도덕적 직관의 합의, 강한 공동체적 유대, 물질적 환경을 뛰어넘는 삶의 의미, 그리고 미래를 향한 강력한 희망 말이다.이런 문제와 관련한 사상가를 딱 한 명만 꼽자면, 로버트 벨라가 쓴 고전 Habits of the Heart(마음의 습속)에서 다룬 주제를 한번 살펴보자.[1] 벨라는 미국 사회사를 통해 미국 사회야말로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개인주의적 문화로 넘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어떤 문화도 미국 문화만큼 개인의 이익을 가족과 지역사회와 국가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문화는 없었다. 그 어떤 문화도 미국 문화보다 개인의 성격과 정체성과 생활 조건까지, 그 모든 것이 다 개인의 결정과 선택 때문이라고 말하는 문화는 없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가난하거나 소외되었다면, 그건 온전히 그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더 나은 선택을 하고 더 적극적으로 살았더라면 얼마든지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난 2세기 동안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그나마 득세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이 가진 종교적 본성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목소리를 높임으로 미국 문화가 가져다주는 악영향에 맞서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과 긍휼을 강조했다. 교회는 기혼자에게 결혼 서약을 고수하라고, 오로지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성적 만족을 찾으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제 종교가 쇠퇴하면서 이런 “가드레일”이 사라지고, 우리는 더 급속한 사회적 붕괴를 목격하고 있다. 벨라는 현재 종교의 저항에서 크게 벗어난 미국의 개인주의가 사회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가족 붕괴 및 기타 여러 기능 장애를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2]또 다른 최근의 예를 찾아보자. 버클리 대학교의 캐롤린 첸(Carolyn Chen) 교수는 뉴욕타임스 기사 “당신의 직업이 당신의 믿음까지 대체할 때, 그것은 문제가 된다”[3]에서 종교가 후퇴할 때 사람들은 또 다른 신이나 믿음을 대신할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다고 말한다. 결국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신격화할 뭔가를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사람이 오로지 일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와 안정감과 의미를 발견하게 될 때, 그 결과는 단지 일 중독과 불안으로 끝나지 않는다. 윤리적 타협, 공동체와 시민 참여의 부족,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극심한 경쟁, 그리고 비인간적인 경제 상황이다. 첸의 결론은 단순하다. 종교가 후퇴할 때, 우리는 직업과 일을 새로운 종교로 섬기게 되고 그 결과 모두가 다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발견한 사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이러한 문제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통해서 우리는 벨라가 분열된 문화 전반에 대하여 쓴 내용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 연구를 발견한다. 3. 하나님의 사랑이 갱신을 요구한다. 미국 교회의 쇠퇴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영적 갱신을 요구하는 이유는 종교가 제공하는 사회적 효용 때문도, 자신들의 제도적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갱신을 바라는 이유는 기독교가 사회 현실에 유용하기 때문에 진리라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이 사회에 유용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가지는 이유가 단지 희망, 기쁨, 깊고도 끈끈한 공동체, 그리고 사회 치유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는 이런 가치를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갱신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갱신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 세례를 주고 … 가르치라”(마 28:19-20)고 말씀하셨다. 미국은 예수님이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수많은 국가 중 하나이다. 예외는 없다. 예수님은 또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 갱신이야말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또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 사랑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서 교회의 갱신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갱신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이다. 갱신을 위한 비전우리의 비전은 단순히 교회와 기독교 기관을 이전의 강력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는 오류이다. 우리의 비전은 성령의 공동체로서 교회에 대한 놀라운 성경적 가능성이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미국 사회에서 실현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우리의 삶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과 선하심을 발산하는 원천이 되는 거룩한 능력을 받았다(벧후 1:3-8). 교회는 새로운 인류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 즉 탁월한 아름다움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엡 2:14-18, 4:15-16).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교회는 주변 지역사회를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마 5:13-16; 눅 10:25-37; 갈 6:10). 그러므로 교회는 더 많은 이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 앞으로 이끌어야 한다(벧전 2:11-12; Cf. 신 4:5-8).우리는 다음과 같은 날을 꿈꾼다. 1. 자신의 삶과 능력의 핵심 원천으로 교회를 지목하는 사람들로 도시가 점점 더 넘쳐난다.2. 미국의 모든 지역사회에 그리스도인을 양육하고 불신자를 환영하며, 이웃을 섬기는 가정 친교 그룹과 가정 교회가 벌집처럼 빽빽하게 넘쳐난다. 3. 문을 닫는 교회보다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가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새로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2/3는 이전에 교회에 다니지 않았거나 불신자로 구성된다. 4. 역사적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개신교가 미국 인구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다.5. 많은 그리스도인이 일상적인 관계에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며, 듣는 사람 대부분이 불쾌하거나 어색한 대화로 인식하지 않고 도움이 되고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6. 교회를 떠나는 지금 젊은이의 현실이 완전히 역전된다. 교회를 다니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역사적 신앙이 주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속 문화가 제공하는 매우 불충분한 대안적 정체성과 내러티브를 분별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속 문화를 향해 제대로 답변하는 능력까지 갖추게 된다. 7. 그리스도인은 재난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나서서 희생자를 돕는 것으로 유명해진다. 8. 교회는 사회에서 인종과 문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다양한 기관으로 알려진다. 사회를 향한 새롭게 된 교회의 ‘얼굴’ 그러니까 교회를 주도하는 목소리는 인종적으로 매우 다양하며, 동시에 미국 교회는 세계 교회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9. 오직 믿음만을 통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개신교 복음은 여러 시대에 걸쳐 교회에 만연했던 율법주의라는 만연한 병을 피해 많은 교단에 걸쳐 탁월하고 아름답게 선포되어 왔다. 이제는 거기에 더해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한마디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장려하는 방식으로 복음이 선포된다. 10. 많은 교단과 전통이 번성하며, 각각 고유한 특성에 대해 감사하고 확신하며, 교리적 희석이나 타협 없이 교단을 초월하여 서로 도우며 협력한다. 11. 교회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된다. 슬픔과 고통과 상실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된다. 12. 기독교 예술가가 점점 늘어난다. 죄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현실주의와 회복의 은혜에 대한 확신에 찬 그들은 고품질의 이야기와 음악 및 시각 예술을 생산하여 (a)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아름다움과 직관적인 개연성을 목격하게 하는 동시에 (b) 그 결과 이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더 큰 희망을 품게 된다. 13.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수하려는 건전하고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만들어진 학자 공동체가 점점 커진다. 이들은 (a) 탐구가 가능한 모든 학문 분야에서 활동할 뿐 아니라 해당 분야에서 크게 기여하고 변화를 촉진하는 학문을 생산하고, (b) 대학에서도 그 존재감을 점점 더 키워가고 있으며, (c) 연구 센터, 싱크 탱크, 아카데미, 정기 간행물 및 출판이라는 지적 경제 분야를 전적으로 대체하는 세력이 된다. 14. 교회는 가시적일 뿐만 아니라 존경받는 ‘성적 반문화’의 중심이 된다. • 섹슈얼리티가 이기적이고 비용-수익을 기반으로 하는 소비재가 아니라 언약 안에서 자기희생(self-donation)의 수단이 되는 공동체이다. • 결혼과 가정의 건강과 지속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공동체이다. • 독신, 특히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로, 낭만적인 관계에서 훨씬 더 큰 정서적 안정과 더 명확한 기대를 갖게 하는 공동체이다. 피상성을 근거로 해서 배우자를 구하는 현대의 흐름을 거부하는 곳이다. 따라서 외모와 돈은 훨씬 덜 강조된다. • 동성에 끌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성경적 비전과 성에 대한 윤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하는, 건전한 기독교 남녀를 양육하고 존중하는 공동체이다. 15. 권력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한다. • 비즈니스에서 그리스도인은 덜 이기적이고 무자비하며 동료와 직원 및 고객에게 더 관대하다고 알려진다. • 사회적 기업가 정신에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회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비영리 단체의 폭발적인 성장을 부추기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빈곤율의 측정 가능한 감소와 사회 복지에 대한 다른 통계의 개선으로 이어짐으로 그리스도인의 명성을 높인다. 기독교인은 자선 사업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 정치와 정부에서 그리스도인은 선거 이익보다 공동선을 추구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정부 정책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 개척과 교회 갱신의 바람이 더 일어나며, 교계(broader church)에 의해 비가부장주의적인 지원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실질적인 주도를 감당한다. 나아가서 이런 현상은 사회에서 목격될 뿐 아니라 개선된 사회 지표의 하나로로 인식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변화는 돈과 권력보다 공정한 분배로 이어질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웃과 삶에 대해 더 많은 통제력을 갖게 될 것이다. 16.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대한 확고한 입장, 그리고 잘못된 믿음과 주장에 대한 가감 없는 비판으로 이름을 날린다. 동시에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믿는 세계관과 신념을 자유롭게 말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진정으로 다원주의적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손함과 헌신으로 유명해진다. •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도덕적 신념과 신념에 깊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상호 존중, 환영, 친절한 태도를 바탕으로 점점 더 공손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길을 주도한다. • 그리스도인은 따뜻한 대화와 지적인 토론, 언론과 양심의 자유 수호를 가장 강력하게 촉진하는 사람들로 알려진다. [주][1] Robert Bellah, et al, Habits of the Heart, With a New Preface: Individualism and Commitment in American Lif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7.[2] 벨라의 원본 작업은 1985년에 출판되었고, 그 후 1996년과 2007년에 각각 새로운 서문으로 재발행되었다. 초기 연구 이후, 벨라가 수십 년 동안 점점 더 심해지는 사회적 악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알고 싶다면, 세 개의 서문을 모두 읽을 것을 추천한다. [3] Carolyn Chen, “When Your Job Fills In for Your Faith, That’s a Problem,” New York Times, May 24, 2022.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4-The Strategy for Renewal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미국교회
교회갱신
개인주의
공동체
주류교회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신약의 메시지
by 정현구
2022-07-30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과 하나님 나라]①기도, 타인을 향한 자비의 실천ⓩ주기도문,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③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구약의 메시지④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신약의 메시지온유한 자 예수님이 산상수훈 이야기를 하셨다. 팔복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복을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다. 팔복은 천국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팔복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하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란 사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심령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중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잘 알려주는 내용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이다. “온유한 자”는 성품이 온순하고 유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하나님의 다스림 앞에서 유순한 사람이다. 그 온유한 사람이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가 주어진 삶의 현실을 다스리며 왕처럼 살아간다는 뜻이다. 온유한 자는 땅을 다스린다.민수기 12:3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했는데, 모세는 원래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광야 40년의 용광로 속에서 제련되어나온 다음 성품이 굉장히 유순하게 바뀌었다. 사실 성격이 바뀌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체질로 바뀐 것이다. 온유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 자격을 얻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가정도 잘 다스린다는 말처럼, 하나님께 훈련을 잘 받았기 때문에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성이 불평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권위에 도전하자 모세는 분노한다. 백성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자 하나님이 바위를 명하라고 하셨는데, 그는 지팡이로 바위를 쳐버렸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분노의 다스림을 받은 것이다. 이후 하나님은 모세가 이 사건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사람이 주어진 땅을 다스리며 사는 곳이다. 그런데 모세는 이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오직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다. 성령충만에 관련된 구절을 둘러싼 에베소서 4, 5, 6장은 부부 관계, 부자 관계, 노사 관계, 국가와의 관계 등 삶의 다양한 현실들이 나온다. 부부를 향하여 “피차 복종하라” 하고, 부모를 향하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하고, 자녀에게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관계의 현실이 나오는 본문의 중심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 부자 관계, 부부 관계, 노사 관계와 같은 현실의 땅에 속한 여러 문제를 다스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와 갈등에 정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그 문제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림으로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시켜가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우리는 이 땅에서 다스림을 받아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로 부름받았다. 에베소서 2:5-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한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유명한 중국 전도자 워치만 니(Watchman Nee)가 에베소서를 강의하면서 좌행참:앉으라, 행하라, 서라라는 얇은 책을 썼다. 그중 좌(坐)는 ‘앉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앉히신다는 말은 그냥 쉬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왕의 의자에 함께 앉는다는 의미다.사도신경에도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편한 소파에 앉아 쉬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 의자에 함께 앉아 계신다는 뜻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 지금도 하늘에서 통치하고 계신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과 같이, 신자들도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늘에 앉히셨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옆에 앉아서 다스리듯이, 우리도 영적으로 그리스도 옆에 앉아서 다스린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스림을 받아 주어진 삶의 땅을 다스릴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한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 임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삶의 다양한 문제에 정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염려를 감사로 바꾸며, 문제를 기도로 돌파해 나가고, 사고를 만나도 절망하지 않고, 상처를 입어도 오히려 치유자가 되어 주어진 삶의 땅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우선으로 구해야 할 것이 바로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솔로몬이 성전을 준공한 다음에 일천 마리 양으로 엄청난 제사를 드렸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구할 것을 물으셨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며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그 대답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겠다고 하셨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듣는 마음’이었는데, 그 듣는 마음은 바로 순종하는 마음이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실제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았을 때 그는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었고,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채워주셨다.주기도문이 나오는 마태복음 6장의 마지막 부분은 이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은 기도할 때 이 한 가지를 구하라고 하신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의 나라와 의는 그분의 다스림이다. 주기도문 전반부의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와 같은 내용이다.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는 것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기도문 후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삶의 현실에서 왕처럼 다스리며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신구약 성경에 흐르는 큰 줄기는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고, 다스림을 받는 만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해야 할 매일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하나님이 나를 다스려주셔서 내가 딛고 있는 땅과 역사를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며 살게 해주소서”라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이런 기도를 살아낸다면,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그 사람이 서 있는 삶의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살아나가는 사람의 가슴 속에, 그리고 그 사람의 현실의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비로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된다.예루살렘은 유대 종교의 중심지였다. 당시 헤롯은 금을 칠한 성전을 짓고 있었다. 수많은 양이 제물로 바쳐지고 있었다. 제사장들이 형식적으로 많은 제사를 드렸지만 마음속에 진짜 하나님의 다스림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형식적이었다. 그런데 다스림을 참으로 구하는 소수가 주변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드로, 요한과 같은 어부 몇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역사가 완전히 바뀐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이야말로 역사의 중심지이고, 그곳에서부터 역사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역사는 갈릴리, 즉 주변부에서 일어났다. 어디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역사가 일어나고 역사가 동심원을 그리면서 확장되는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잘 받고 삶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일어난다. 그러니 주변부가 중심부가 되고 중심부가 주변부가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데, 핵심은 주기도문이 말한 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제대로 깨닫고 이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우리는 주기도문이 보여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하소서, 다스림을 받아 다스리게 하소서’라는 분명한 두 가지 원리가 어떻게 구약과 신약에 흐르는지를 살펴보았다. 주기도문을 통해 앞으로 무엇을 기도하고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가 하는 교훈을 얻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의미를 제대로 알고 주기도문을 간구함으로 주기도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삶의 땅을 다스리면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이 글은 하나님 나라 복음(새물결플러스)에 실린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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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다스림
하나님의통치
다스림의거부
주기도문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구약의 메시지
by 정현구
2022-07-29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과 하나님 나라]①기도, 타인을 향한 자비의 실천ⓩ주기도문,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③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구약의 메시지④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신약의 메시지문제의 뿌리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는 기도다. 기도의 제목이 많을 텐데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다스림’을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반드시 구해야 할 핵심적인 기도 제목으로 가르치셨을까? 그 이유는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가 바로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잘못된 뿌리에서 수많은 죄악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열매의 종류는 많지만 뿌리는 하나다. 그 하나의 뿌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불순종이다. 문제의 핵심인 뿌리를 해결해야 참된 응답이 주어지기에,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는 것이다.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을 알려주는 책이다. 죄의 시작을 다루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사건을 보면 죄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에덴동산이 나온다. 에덴동산은 단순한 동산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초기 모델이다. 그곳에 다스림을 받는 백성으로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거하는 땅인 에덴이 있었습니다. 그 땅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하는, 선악과 명령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다. 그런데 아담이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서 먹는다. 선악과 사건의 의미는 이렇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다. 선악과를 금지한 명령은 마치 하나님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 자체를 나쁜 것으로 여기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선과 악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의 구분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이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입법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행위다. 이렇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했기에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처럼 인간 죄의 뿌리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에 대한 거부와 반역적 독립 선언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은 똑같은 내용의 기도를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 그 이상을 담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인격적인 신 앞에 기도한다는 의식이 약했기 때문에, 기도할 때 주로 주문을 외웠다. 주문을 외움으로 신이 기도를 꼭 들어주게 만들고자 하는 일종의 종교적 주술을 행했다. 이것이 ‘중언부언’이다. 이것은 인간이 기도로 신을 조종해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이렇게 종교에까지도 깊이 들어가 있다. 이처럼 신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면, 인간 문제를 푸는 핵심은 그 뿌리를 뽑아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근원적 기도를 가르치셨다고 할 수 있다.진정한 응답주기도문은 기도의 진짜 응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 기도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내 삶의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응답받은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생각해보자. 기도를 했더니 내게 필요한 양식이 주어졌다. 표면적으로 기도가 응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일에 대해 염려한다면, 아직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경제적 삶의 현실을 다스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보살펴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경제 현실이라는 땅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우리는 물질이 많음에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욕망에 이끌려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비록 일용할 양식이 풍족하더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는 물질이라는 땅을 다스리지 않고, 도리어 물질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물질을 기꺼이 사용할 수 있다면, 그때 그는 물질이라는 땅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의 참 응답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경제 현실이라는 땅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용서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용서의 가르침의 핵심은 “내 죄를 용서해 주소서”의 기도가 아니라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하게 해주소서”의 기도다. 사실 남을 용서하는 것 만큼 어려운 것도 많지 않다. 내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는 쉬운데, 남의 죄를 용서하게 해달라는 것은 정말 어렵다.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신 것에 감격하고 기뻐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온전한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기도의 진짜 응답은 나를 용서하신 그 사랑의 엄청난 무게와 은혜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을 받아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갈등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는 진짜 응답을 받은 것이다. 바로 그의 삶의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다.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는 위로 하늘의 다스림을 받는 것, 둘째는 아래로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 삶의 현실을 다스리며 살게 해주소서.’ 이것이 주기도문의 핵심 내용이자, 구약과 신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전부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하나님의 형상으로 산다는 것종종 ‘믿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가 딛고 있는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며 사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창세기의 인간 창조 기사를 보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굉장히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음을 볼 수 있다. 창조 세계는 어마어마하며, 볼수록 기가 막힌 세계다. 그런데 이 창조 세계가 창조의 절정인 인간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만들었으니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을 닮는 것이었다. 창세기 1:26은 인간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에서 형상과 모양이라는 두 가지 단어가 나온다고 하여 의미를 둘로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성경신학이 발전하면서 이 의미가 보다 뚜렷해졌다. 창조 세계 가운데 하나님은 왕 중의 왕으로 계신다. 그 왕이 자신을 닮은 존재를 만드셨다. 하나님을 대신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 즉 인간을 하나님을 대리하는 작은 왕들로 만드셨다는 것이다.고대 사회는 황제를 신의 형상이라고 불렀다. 오직 황제만이 신의 형상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혁명이었다. 당시는 남성 중심 사회였으니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까지는 생각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경은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시대에는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였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고, 인간은 하나님이 할당한 일정한 영역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청지기이다. 인간은 자기의 땅에서 죄에 지배당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다스리는 왕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다스림을 받아 다스리다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왕처럼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일까? 하나님께는 그분보다 높은 존재가 없다. 하나님 위에 왕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에게는 왕이 있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인간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위에 계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와 능력의 다스림을 받아 삶의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왕 노릇 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대로 사는 것에 달려 있다. 이것을 삶의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삶이 굉장히 힘들고 고달파, 순간순간 여러 상황과 그 상황이 주는 감정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자비와 은혜로 다스려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다스림을 받게 되면, 어려운 상황과 염려가 밀려올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면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은 삶이라고 해도 그 바다를 딛고 가는 왕처럼 살아갈 수 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계명을 지키는 길십계명도 살펴보자. 십계명 중에는 ‘하지 말라’는 계명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십계명을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의 계명으로 읽지만, 사실 십계명이 그렇게 쓰인 것은 당시의 사회·문화적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정하다 보니 “거짓말하지 말라”와 같은 부정적인 명령어를 사용했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거짓말하지 말라”에서 끝나지 않고, “참을 말하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라”와 같은 적극적인 명령까지 그 속에 포함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역시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담고 있다. 그래서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칼뱅이 십계명 주석을 굉장히 길게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이 성화되어갈 때 중요한 도구가 십계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소극적 명령에 한정하면 지키기 어렵지 않을 것같이 보이지만 적극적 명령까지 더하면 굉장히 깊어서, 제대로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그런데 어떻게 하면 십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여섯 가지 계명이 인간에 관한 계명이다. 처음 네 가지 계명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신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어기지 말라”이다. 이 네 가지 계명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내게 임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나의 왕이심을 온전히 고백하며 살게 해주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주기도문 전반부 내용과 같다.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에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종류의 문제가 다 들어있다. 이 계명을 어기지 않고 사는 삶이 곧 바른 삶이다. 즉 삶의 문제에 정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다스리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는 내 삶, 내 땅을 다스리며 갈 수 있다.언약궤, 하나님의 통치 의자구약에는 언약궤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스라엘 진영의 정중앙에 성막이 있었고, 성막 제일 안쪽의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었다. 언약궤는 아카시 나무로 만든 상자인데, 이 속에 십계명을 넣어두었다. 지성소 안에 놓인 이 언약궤는 무엇을 의미할까? 언약궤라는 상자를 보면, 그 위에 권능의 천사를 상징하는 날개 넷이 세워져 있다. 역대상 28: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에 다윗 왕이 일어나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헌할 성전을 지을 마음이 있어.” 다윗이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성전 지을 준비를 하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발판인 언약궤를 봉헌하고 싶어서이다. 보통 왕의 의자가 높기 때문에 왕의 다리를 두는 발판을 둔다. 그런데 그 발판이 바로 언약궤다. 언약궤가 발판이라면 언약궤 위에 세워진 네 갈래의 날개는 왕이 앉은 의자의 다리에 해당된다. 즉 언약궤 위에 하나님이 앉아 계신 왕좌가 있다는 뜻이다.언약궤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언약궤를 발판 삼아 하나님이 왕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좌에 앉아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 의자에 앉아 쉬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신다.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지성소에 하나님의 통치 의자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성전의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그럴 때 너희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이것이 바로 지성소 속에 언약궤를 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나갈 때 가끔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나갔다. 언약궤를 하나님의 이동용 왕좌로 만든 것이다. 레위인의 어깨에 메인 언약궤는 백성을 승리로 이끄는 하나님의 이동용 지휘소가 된 것이다. 이런 의미를 지닌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에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잘 받을수록 그들은 전쟁에서 이기며 강한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적 선한 영향력을 온 세계에 뻗칠 수 있는 제사장 민족이 된 것이다.사울과 다윗 이야기언약궤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빼앗긴 상태였다. 블레셋과 싸우다가 패배하자 엘리의 두 아들은 언약궤가 자신들을 이기게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고 가지고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또다시 패하고 언약궤를 빼앗긴다. 사실 언약궤는 요술상자가 아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언약궤 자체를 요술방망이처럼 믿고 나갔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언약궤를 빼앗기도록 하셨다. 이후 사울이 왕이 되었지만 그는 언약궤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통치하려고 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한번은 전쟁을 하고 돌아오는데, 백성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 한마디에 질투심이 화살처럼 사울의 가슴에 꽂혔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그는 결국 질투심의 지배를 받아 쓰러지고 말았다. 대단한 것에 지배받았으면 또 모르겠는데, 왕이라는 자가 고작 질투심에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사울은 겉은 왕인데, 실제로는 평생 종으로 살았다. 실제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위대하게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겉으로는 굉장히 잘 사는 것같이 보여도 대부분 욕심이나 경쟁심이나 시기심의 지배를 받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인격적 성숙도 변화도 없이 인생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왕이 되자마자 그가 행한 첫 번째 국가적 시책이 언약궤를 가져오고, 언약궤를 위한 성전을 봉헌하려는 것이었다. 언약궤를 찾아오려고 했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그는 이전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며 살았다.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 많이 처했다. 이럴 때 대다수의 인간은 그 상황이 주는 수많은 부정적 감정의 지배를 받기가 매우 쉽다. 한 인간이 삶의 최고의 경지와 최저의 경지 가운데 일어나는 수많은 종류의 감정의 파도를 어떻게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을까? 그가 지은 수많은 시편이 보여주듯이 다윗은 그 감정을 영적인 시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상황과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다윗이 썼던 시편들은 다윗이 여러 외적 상황, 내적 감정들과 싸워 이겨 얻은 영적 전리품에 해당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절망의 감정까지도 다스릴 수 있었다. 질투에 지배당했던 사울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다윗은 진작부터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기도문의 가르침은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다.이스라엘 역사이스라엘 역사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는 텍스트에 해당한다. 우리가 많은 민족 중 하필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에게 참 중요하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다. 그런데 다양한 역사 중에서 원형 역사가 있다. 신·구약의 여러 역사적 사건들은 결국 이 원형 역사가 여러 형태로 변주되면서 계속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이 40일간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도 전부 이스라엘 역사라는 틀 안에서 반복된다. 이스라엘 역사라는 하나의 작은 이야기에서 더 큰 본질적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인류의 역사, 전 우주적 역사까지 나선형으로 확장되어가는데, 그 원형이 이스라엘 역사인 것이다.이스라엘 역사는 세 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는 이집트에서의 역사다. 그다음은 광야에서의 역사, 또 하나는 가나안에서의 역사다. 이집트에서의 역사는 파라오의 지배를 받는 역사다. 잘못된 왕의 지배를 받는 역사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포함한 하나님 아닌 존재에 지배받아 영적 의미에서 사실상 노예로 살고 있다. 죄의 노예요 죽음의 노예다. 성경이 인간을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인간이 사실상 이집트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났던 한 번의 구체적 역사이지만 영적으로는 온 세대를 통틀어 인간을 이해하는,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의 렌즈가 된다. 두 번째는 광야에서의 역사다. 출애굽 했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한다. 누가 주인인가? 여전히 자아가 주인이다. 자아가 주인이 되어 방황하는 역사가 광야의 역사다.세 번째는 가나안에서의 역사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수사학이 들어있다. 가나안은 역설적으로 가장 타락하고 가장 어둡고 가장 절망적인 곳이었다. 당시 하나님이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방황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표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잘못으로 40년을 방황한 셈인데, 가나안의 측면에서 보면 가나안 땅이 견딜 수 없어 토해내고 싶을 만큼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가 관영하는, 이른바 임계점에 이를 때를 기다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고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하던 바로 그때가 정확하게 가나안 땅이 더 이상 가나안 백성의 죄악을 견디지 못하고 토해내는 때이다. 하나님의 우주적 역사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방황이 필요해서 40년을 방황시켰다. 가나안은 가나안대로 죄가 관영할 때를 보다가 두 가지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했는데,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놓은 후 들어와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나안 땅은 말 그대로 죄가 가장 관영한 곳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간다.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면 가나안이라는 가장 어두운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죄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땅이 토하고 싶어 할 만큼 어둡고 지옥 같았던 곳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들어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지금 어느 땅에 머무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어느 땅에 머물든지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나안 땅은 주기도문이 성취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나안이라는 미움, 원망, 갈등, 음란, 폭력의 문화 속에서도 영향을 받거나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오히려 주변을 한 사람씩 변화시키고 바꾸어나가는 사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그 사람의 땅에 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 원리가 바로 이렇게 성경 속에서 여러 사건을 통해 연결된다.이 글은 하나님 나라 복음(새물결플러스)에 실린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주기도문
하나님나라
하나님의다스림
다스림의거부
하나님의통치
기독교 강요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Shawn Wright
2022-07-28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장 칼뱅(1509-1564)은 역사에 큰 양향을 끼진 인물이다. 그에 관해서는 중립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종종 칼뱅에 관해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칼뱅을 비난한다. 그가 이중 예정을 주장했고, 마이클 세르베투스 같은 이단자의 처형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 몇 가지가 칼뱅이 믿었던 전부인 것처럼 말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칼뱅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낼 방법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쓴 인간미 없고 머리만 큰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친구 하나 없고 감정 자체가 없었던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칼뱅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가 성경적이기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마치 칼뱅의 사상이 성경적이고 목회적인 성찰로는 전혀 요약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이런 게 칼뱅에 대해 당신이 가진 우려나 두려움의 일부라면, 더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칼뱅과 그의 사상을 직접 이해하려면 칼뱅의 걸작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읽어야 한다. 당신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신 선물의 하나인 이 책을 통해 큰 유익을 얻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신은 장 칼뱅의 이 저술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할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옛날 책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C. S. 루이스는 학생들이 고전 원문이 아닌 주석을 읽는 이유가 겸손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덧붙였다. “이 학생은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다. 자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으며 그 철학자의 책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바로 그 위대함 때문에 현대 주석가들의 글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사실을 이 학생이 안다면 좋았을 것이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서문).나는 칼뱅과 관련해서 루이스의 말에 동의한다. “위대한 사람은 바로 그 위대함 때문에” 훨씬 더 이해하기 쉽다. 독자가 기독교 강요를 향한 칼뱅의 의도만 정확하게 안다면, 주석이나 지침서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도 거의 모든 내용을 쉽게 다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바로 기독교 강요이다. 왜 그런가? 기독교 강요는 칼뱅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그리스도인을 향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실재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누려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쓴 글이기 때문이다. 칼뱅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원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시간을 초월한 갈망이다. 박해받던 16세기 프랑스 개신교도이든, 세상의 격변을 헤쳐나가려는 21세기 그리스도인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다음 일곱 가지 진리는 우리가 기독교 강요를 읽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마지막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1. 제목Institutes는 라틴어 Institutio의 번역으로 “강요”나 “지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칼뱅은 그리스도인을 가르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다. 그의 책은 고급 학생을 대상으로 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나 찰스 하지의 조직 신학만큼 광범위하지 않다. 칼뱅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방식으로 썼다. 이런 점은 영어 번역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기독교 강요를 들고 읽어보라. 그리고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라!2. 대상기독교 강요를 쓸 때 애초에 칼뱅이 생각한 대상 독자는 두 부류였다. 처음에 그는 당시 학문의 언어인 라틴어로 책을 저술했고 또 출판했다. 따라서 출신 국가에 상관없이 유럽의 신학자와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을 개정하고 확장 보완하면서 칼뱅은 라틴어판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그의 모국인이 모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독자는 주로 박해받는 교회였다. 프랑스와 나머지 유럽의 개신교인은 당시 매우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는 오늘날 신학 저술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진지함을 가지고 있다. 읽는 내내 당신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3. 세밀함에 쏟은 관심장 칼뱅은 모든 것을 다 제대로 하기 위해 엄청나게 몰두했다. 그는 1536년에 초판을 출판했다. 그것은 최종판의 5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곧이어 1539년판이 나왔다. 1543년과 1550년 사이에 칼뱅은 서로 유사한 두 가지 개정판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1559년판은 그가 죽기 불과 오 년 전에 출판되었다.칼뱅은 죽기 전까지 거의 성경 전체에 관해서 강의하거나 설교하거나 또는 주석을 집필했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의 마지막 판에는 그가 평생 성찰한 모든 성경에 관한 설명뿐 아니라 수십 년간 제네바 교회의 목양을 통해 얻은 목회자로서의 지혜까지 다 담겨있다. 1559년에 칼뱅은 기독교 강요의 이전 판에 관해서 이렇게 논평했다. “이제야 마침내 나온, 제대로 된 순서로 완성된 이 작업 전까지 나는 결코 만족한 적이 없었다.”지금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책도 순식간에 쓰이고, 또 그런 책이 과연 제대로 된 책인지 판단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지금 시중에 나온 책이 과연 백 년 후에도 읽을 가치가 있을까? 칼뱅은 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수정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460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 강요는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 강요를 읽고 세밀한 부분에까지 주의를 기울인 칼뱅으로부터 배우라. (현대 독자가 칼뱅의 저술 당시 역사적, 신학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 훌륭한 책은 다음과 같다. 데이비드 칼훈(David B. Calhoun)의 칼뱅을 읽다(Knowing God and Ourselves), 데이비드 홀(David W. Hall)과 피터 릴백(Peter A. Lillback)의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위한 신학적 가이드’(A Theological Guide to Calvin's Institutes), 안소니 레인(Anthony N.S. Lane)의 ‘칼빈의 기독교강요 가이드’(A Reader's Guide to Calvin's Institutes), 그리고 프랑소와 웬델(Francois Wendel)의 ‘칼뱅.’)4. 신학적 균형불행하게도 그리고 부정확하게도 칼뱅의 걸작인 기독교 강요가 소위 말하는 “칼뱅주의의 5대 교리”의 기반이 되어야 하고 또한 칼뱅이 이 책을 쓴 이유도 다름 아니라 “칼뱅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맞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 강요의 첫 문장은 두 가지 큰 주제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가 소유한 거의 모든 지혜 즉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Institutes 1.1.1 ). 칼뱅이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바램이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상호적 지식이다. 하나님을 알 때만 우리는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된다. 또한 내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바로 이 방향이야말로 칼뱅이 책 전반에 걸쳐 자료를 다루는 데 있어 균형을 이루도록 이끈 핵심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예정론 (만약에 기독교 강요가 “칼뱅주의”를 설명하기 위한 책이었다면, 모든 내용을 예정론에서부터 시작할 거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교리를 책의 네 부분 중 세 번째 부분(3.21-24)이 끝날 때까지 다루지 않는다. 기독교 강요는 수많은 보석으로 가득하다. 믿음에 관한 성경적 이해에 대한 긴 설명이 있다 (3.2). 왜냐하면 이것이 신약성경의 핵심이고 칼뱅 시대에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서 뜨거웠던 토론 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의미 있는 부분도 있는데, 거기에 관해서는 칼뱅이 평생 기독교 강요 내용 중에서 별도의 발췌 출판을 허락한 유일한 내용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작은 책’(A Little Book on the Christian Life)을 참조하라. 가장 길고 가장 영광스러운 장의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의미에 관한 칼뱅의 놀라운 설명이다(3.20).모든 자료를 칼뱅이 어떻게 배열했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가 이 책을 얼마나 균형 있게 저술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학자들은 여전히 칼뱅이 왜 기독교 강요의 자료를 그렇게 배열했는지를 놓고 논쟁하고 있다. 그가 네 권으로 구분한 것을 놓고 사도신경(성부, 성자, 성령, 교회)의 일반적인 흐름을 따랐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물론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칼뱅은 실제로 루터교인 필립 멜란히톤의 지도를 따랐던 것 같다. 루터교인 필립 멜란히톤이 쓴 ‘신학총론’(Loci Communes)은 바울의 로마서 배열을 따랐다. 나는 칼뱅도 로마서의 순서를 따랐다고 생각한다. 칼뱅 역시 다른 16세기 개신교인과 마찬가지로 로마서야말로 성경 전체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칼뱅이 1560년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그의 책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열쇠”라고 말한 이유이다. (리차드 뮬러(Richard A. Muller)가 쓴 ‘수용되지 않는 칼뱅’(The Unaccommodated Calvin)에 실린 기독교 강요의 배열에 관한 사려 깊은 에세이 몇 개를 참조하길 권한다.)다시 말해서, 칼뱅은 성경의 윤곽을 고수하려고 했던, 전반적으로 균형 잡힌 사람이었다.5. 성경적 담대함 칼뱅의 말은 너무 직설적이어서 현대 독자들에게는 다소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예정론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정의로 설명한다. 예정이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으로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한 죽음을 맞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좀 더 자세하게 썼다.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선언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예정을 통해 각 사람과 자신과의 관계를 맺으셨다. 사람은 평등한 상태로 창조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생이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어 있다. 즉 누구나 다 이러한 목적 중 하나를 위해 창조되었기에, 우리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생명 또는 죽음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한다 (3.21.5).어떤 이들은 택함을 받은 자와 택함 받지 아니한 자의 상태를 영원히 결정짓는, 예정과 관련한 하나님의 이중적 본성에 관한 칼뱅의 완고한 주장에 움찔할 수 있다. 그러나 칼뱅은 다른 성경 구절 중에서도 특히 로마서 9장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6. 역사적 거리고전 독서의 한 가지 장점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저자가 지금과 다른 압력과 유혹을 받으며 우리와 다른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목격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이런 점은 실망을 줄 수 있다. 고전에서 지금 당장 현실 속에 적용할 수 있는 거리가 많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내한다면 종종 우리가 가진 염려와 질문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칼뱅 또한 전혀 다른 시대의 말을 하기에 지금 우리가 던지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를 칼뱅에게서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던지는 질문의 일부는 사실상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도 깨닫게 될 것이다. 7. 하나님을 아는 지식기독교 강요를 읽는 것과 관련해 지금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이미 말했다. 칼뱅은 성경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친밀하게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렘 9:23-24, 요 17:3). 칼뱅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덮는 순간 주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기를 원했다. 바로 이런 열망이야말로 기독교 강요 곳곳에 숨은 진짜 메시지이다. 예를 들어, 칼뱅은 독자들에게 그가 “경건”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전시키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연관된 경외심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져다주는 유익함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존재의 전부를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는 것, 아버지의 돌보심으로 양육된다는 것, 그분이 모든 선의 창시자이시며 그렇기에 사람이라면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그분께 기꺼이 헌신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찾기 전까지 사람은 결코 진심을 다해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1.2.2).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에게 주신 은혜를 기뻐하고, 그분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존 칼뱅의 안내를 받으며 기독교 강요를 읽으라. 원제: Introducing the ‘Institutes’: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기독교고전
기독교강요
하나님을아는지식
장칼뱅
예정론
칼뱅주의
대영박물관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우다
by Daniel K. Eng
2022-07-27
2019년, 대영박물관에서 성경 속 사건들과 연관성이 있는 유물들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렸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사건들과 관련 있는 물건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흑백 사진처럼 단조롭던 성경 이야기가 총천연색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예후 왕을 묘사하고 있는 6피트(1.8m)짜리 검은 오벨리스크와 느헤미야가 다루었을 수도 있는 대형 은그릇 같은 다양한 아이템을 모아놓은 컬렉션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양하고 풍부한 유물과 정보 속에서 특별히 내 눈을 사로잡은 전시물이 있었다.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이라는 이름이 붙은 호화로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났을 때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얼마나 큰 믿음이 있어야 그리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이 소형 조각상은 우르(현 이라크)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여러 쌍의 형상 중 하나이다. 학자들은 이 조각상이 제작된 시기를 기원전 2500년, 그러니까 아브라함 시대 이전으로 추정한다. 높이가 18인치(45.72cm)에 불과한 이 조각상은 뒷발로 선 채 작은 나무 꼭대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뿔이 있는 염소를 묘사하고 있다. 탁자나 받침대를 지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품이다. The Ram in the Thicket ©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Leonard Woolley)는 우르의 원주민이었던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야기(창 22:1-9)를 바탕으로 이 조각상에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 뿔 달린 동물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 창세기 22:13에 기술되어 있는 그 족장이나 그 숫양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설사 그렇더라도 나는 이 조각상의 복잡한 세부 묘사와 그 재료의 다양성에 매료되었다. 조그마한 받침대에는 자잘한 붉은 석회암과 조개껍데기로 된 모자이크 장식이 있다. 그 동물이 앞발을 올려놓고 있는 관목의 이파리와 염소의 얼굴과 다리는 순금으로 덮여 있다. 염소 몸통을 덮고 있는 털은 나무 뼈대에 조개껍데기를 붙여 표현했고, 귀는 구리 합금으로, 눈과 뿔, 어깨 털은 청금석으로 만들었다. 상상컨대, 훨씬 더 호사스러운 무언가를 받쳐두려고 만들었을 이 작은 조각에 길고 고된 수고의 시간이 들어갔을 것이다. 희귀한 재료와 세심한 요소들은 고대 우르 문명에서 가능했던 풍요와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주께서 짐을 꾸려 떠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우르에 살았다. 낯선 땅을 향해 출발하면서 그는 익숙한 모든 것을 남겨두었다. 창세기의 설명을 너무 서둘러 읽다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면서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대충 넘겨버릴 때가 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창 12:1).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우리에게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저 새집으로 이사한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그는 크나큰 희생을 치렀다. 아브라함의 본토는 원시적인 촌락이 아니었다. 우르는 숙련된 장인과 선진 시설을 갖추고 있던 빼어난 대도시였다. 아브라함은 선진 문명과 기술, 특권이 넘쳐나던 사회를 남겨두고 떠났다.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그의 행동은 정말 어리석어 보였다.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장막에 살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족장은 자식과 손자에게 준 것이라고는 고작 나그네의 거처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거류민의 삶을 살면서도 아브라함은 그 무엇보다도 안정된 삶을 고대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10.우르에는 숙련된 장인들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더 위대한 설계자요 건축자이신 강력하고 미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순종으로 그의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눈이 훨씬 더 안전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우르의 보물들을 포기했다. 그는 호사와 학식보다 더 큰 것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다.우리가 교회에서 믿음을 토론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대상만큼만 가치가 있다. 우리의 믿음을 부와 기술과 학식과 재능에 두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의 가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선택할 때, 우리의 그 결정은 아브라함의 결정처럼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셨고, 그것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입증되었다. 우리의 순종하는 믿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은 그의 믿음을 귀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히브리서 11장이 소개하는 성도의 모범에 들어갔다. 이 족장의 믿음이 히브리서 저자가 청중에게 바라는 바로 그 믿음, 곧 하나님의 약속에 굳건히 서고 행동하는 믿음, 이 세상의 덧없는 가치보다 미쁘신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귀하게 여기는 지혜로운 믿음이다.원제: What I Learned About Faith at the British Museu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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