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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가 영원처럼 느껴질 때
by Josh Butler
2022-09-07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약속에 관한 책에는 그 약속이 수백 가지는 된다. 축복, 번영, 위로, 출산, 구원의 약속이 있다. 그런데 놓치고 있는 약속이 하나 있다. 이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요 16:33).예수님은 이 약속을 하셨고, 나는 이 약속이 어긋나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우리는 힘든 시기에 어떻게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한없이 되풀이하는 질문이다.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라 긴급한 질문이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16절). 그리고 제자들이 서로 질문한다. “도대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18절).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이 네 구절에 걸쳐 일곱 번이나 나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조금 있으면”은 사흘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말씀이 영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조금 있으면”이 끝이 없을 것 같이 느껴질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시간은 느리게 지나간다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조금 있으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 되시는 것을 지켜본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조금 있으면/잠시”는 우리가 그 시간 안에 있을 때 영원처럼 느껴진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우울할 때면 시간이 느리게 지나간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걸 감지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단편 영화를 보여주고 그 길이를 물었을 때, 우울한 사람들은 실제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추정한다. “즐거울 때는 시간이 날아간다.” 이런 옛말이 있지만, 그 반대도 성립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고약하게 느껴질수록 더 천천히 지나간다.” 정말 그렇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병원 대기실에서 ‘하나님, 왜 고쳐주지 않으십니까’ 부르짖고 있을 때, 원하지 않는 싱글인 당신이 ‘하나님, 지금쯤이면 결혼했어야 하지 않나요?’ 기도할 때, 국가적 비극이 또 닥치고 ‘주님의 손에 온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 상황은 더디게 지나간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주님께 말씀드린다. 주님께서는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희가 다른 측정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주님의 ‘조금 있으면’이 저희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집니다.기쁨이 오고 있다그러나 기쁨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평화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요 16:20).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겪는 그 일을 해산에 비유하신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근심에 잠긴다. 진통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요 16:21).제자들은 아이를 낳는 여자다. 그들의 고통은 현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이야기의 시작이다. 끝이 아니다. 그들이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면, “크게 기뻐(overjoyed, NIV)할 것이다(요 20:20). 신약성경도 출산을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키는 이미지로 사용한다.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나신(firstborn, NIV) 분”이시다(골 1:1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죽음의 산고(birth pangs)에서 그를 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산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오딘)는 비유적으로 새로운 것을 여는 데 필요한 고통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죽음은 새로운 것을 여셨다.아내 홀리가 강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첫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아내가 정말 얼마나 강한지 실감하지 못했다. 아내는 2009년 9월 8일에 진통을 시작했다. 나는 아내가 출산을 하루만 더―“조금 있으면”―참아 준다면, 우리 딸이 09/09/09라는 정말 멋진 생일을 가질 것 같았다. 나는 이 놀라운 아이디어를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아내는 내 열정을 사양했다. 아내는 바로 지금 아기를 원했다! 우리 아기가 도착했을 때, 아내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나 커서 산통이 까마득한 옛 기억처럼 느껴진 그런 기쁨이었다.예수님은 부활이 우리가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말씀하신다(요 16:21; cf. 롬 8:18). 이것은 잊는다는 뜻이 아니라 기쁨에 휩싸여 우리 기억이 바뀐다는 뜻이다. 우리는 한때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출산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웃는 엄마처럼 될 것이다.평안은 우리가 견디고 있는 고통을 힘들지 않은 척할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고통을 다가오는 세상과 비교할 때 온다. 미래의 기쁨은 현재의 슬픔보다 클 것이다. 그러므로 ‘잠시’가 길게 느껴질 때는 눈을 들어 부활을 바라보자.임신한 여인의 믿음우리는 출산의 날을 기다리는 임신한 여인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환난 중에도 당신 안에서 평안을 찾을 수 있음을 알기를 원하신다(요 16:33).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기까지의 사흘을 말씀하고 계시며, 또한 승천하시고 재림하시기까지의 2,000년이 넘는 시간을 말씀하고 계신다. 곧, “조금 있으면”은 우리에게도 해당한다.우리는 여전히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옛 세상의 자궁에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롬 8:19)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롬 8:22)고. 우리는 그 골짜기를 통해 앞을 바라보며, 새로운 창조의 빛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우리의 형제이신 예수님을 본다. 내 친구 제이크와 렉시는 1년간 큰 시련을 겪었다. 렉시의 양수가 22주에 터졌다. 이 부부의 아들 애셔는 6주 뒤에 1킬로그램 겨우 넘긴 몸무게를 갖고 태어났다. 이 부부는 아기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기는 심장에 난 구멍을 막는 수술과 목에 구멍을 뚫는 기관 절개술을 받아야 했다. 의사들은 아기에게 실명을 예방하기 위한 장치와 생명 유지를 위한 호흡 기계를 아기에게 달았다. 이 가족은 거의 1년 동안 병원에서 살았다.영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제이크는 한 가지 이유로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기쁨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들려준 말이다.내 궁극적인 기쁨이 이번 생에 올까? 아니면 다음에 올까? 내가 정말 믿는 건 무엇일까? 내 희망은 상황이 나아지는 것뿐일까? 아니면 언젠가는 병원이 다시는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기에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병원의 벽돌을 모두 허물어 버리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는 희망일까?지금 이 아이든, 부활한 이 아이든, 내가 내 아들을 안을 수 있다는 걸 알아. 내가 이 아이를 위해 울부짖은 시간보다 더 오래 이 아이를 보게 될 거야. 우리가 예전에 얼마나 걱정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웃으면서 얘기하면서 애셔를 안아 줄 거야. 죄와 질병과 죽음은 왕이신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발판에 지나지 않아.예수님은 세상의 시련보다 더 큰, 생명을 주는 기쁨을 가져오신다. 주님의 치유는 너무나 깊고 강력하여 이러한 “잠시 받는 환난”을 압도하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으로 바꿀 것이다(고후 4:17).잠시가 영원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부활 기쁨(resurrection joy) 안에서 평안을 찾을 수 있다. 그 부활 기쁨이 오고 있다. 원제: When ‘A Little While’ Feels like Forev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조금있으면
부활
부활기쁨
환난
고통
기쁨
시간은 강, 우리는 조약돌이다
by Brett McCracken
2022-09-06
지난여름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떠난 가족 여행에서 우리는 많은 강과 시내를 보았다. 우리 아이들, 체트(4)와 아이라(2)는 틈만 나면 그 흐르는 물에 자갈과 돌멩이를 던지면서 놀았다. 남자아이들에게 이건 만국 공통의 본능이다. 나도 그 시절 그렇게 했다(솔직히 지금도 그러고 논다). 아이들이 돌멩이를 바위투성이 강바닥으로 던지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여행 내내 맴돌던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준비해 간 여행 음악 목록에 있던 노래 (Zaac Pick의) “Whitewater”도 일조한 생각이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시간은 강물, 너무 빨리 움직여우리 몸의 강둑 너머로시간은 강물, 얼마나 깊은지 몰라우리 발을 스쳐 지나가는 그 물이 시간은 정말이지 강과 같다. 결코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곧장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흐름은 우리 모두를 데려간다. 우리가 좋아하든 말든. 강물 속 바위 더미강물에 돌을 던지고 놀던 아이들 모습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우리는 돌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저항할 수 없는 거센 탁류에 휩쓸려 내려가는, 우리는 조약돌이다.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거센 물줄기가 떼어내 빚고, 깎고 옮겨놓은 게 우리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 저 유체의 완력에 바스러지는 모든 돌처럼,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될 것이다.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전 3:20)그렇지만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의 강물에서 잠시 가라앉는 돌처럼 그렇게 쉬어 가기도 한다. 가끔은, 흐름이 잦아들면, 우리는 한 자리에서 한 철을 보내기도 한다. 다른 돌들과 모둠(community)을 이루고, 강물의 완력이 우리를 깎아내는 만큼이나 우리끼리 서로 부대끼면서 그렇게 우리 모양새를 빚어나간다. 그러다가도 물줄기가 너무 빠르고 거세지기라도 하면 우리는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던 돌 더미에서 밀려나 급작스레 하류로 옮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급류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갑자기 밀어닥치기 마련이다. 우린 이걸 돌발 홍수라 부른다. 이럴 때면 우리는 한동안 같이 지낸 돌멩이 친구들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눌 기회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눈 깜박할 사이에 그 강의 다른 장소에, 새로운 암석에 우리 몸을 박고서 또 한때를 보낼 준비를 한다. 내가 이 은유[시간은 강이고, 우리는 조약돌이다]를 처음 생각한 것은 지난여름이 시작될 무렵 체트를 유치원에서 집으로 데려오면서였다. 그날은 체트가 어린이집을 졸업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체트가 어린이집 친구들을, 약 9개월 동안 같은 시냇물에서 함께 지낸 사랑스런 조약돌들을 다시는 같은 바위 더미 모둠에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가을에 새 학기가 시작되면 그 친구들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렇게 시간은 가혹하게 흐른다. 장소와 사람의 항상성(permanence)을 희구하는 인간의 갈망에 무심하게.우리가 어떤 것/곳에 붙박여 있으면, 어김없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이 우리를 다른 것/곳으로 옮겨놓는다.함께, 잠시나는 그 늦여름이 되어서야 아타바스카, 보우, 블래버리… 못다 센 강과 개울들에 서서, 이 은유가 (가족 공동체를 포함한) 모든 공동체에 똑같이 적용된다는 걸 깨달았다. 카이라와 나는, 같은 시냇물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그 강바닥 진흙에서 한 몸이 되어 지금까지 10년 동안(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앞으로 수십 년 더!) 함께하며 하나의 더 큰 바위 더미가 된 두 개의 돌과 같다. 그동안 우리는 작은 바위 셋을 우리 몸에서 떼어냈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휘감아 도는 강물 가운데서 우리의 작은 바위 공동체를 함께 유지해 가고 있다.그렇지만 나는 이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걸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알고 있다. 언젠가 이 강은 이 작은 우리 조약돌들, 우리 아이들을 흩어놓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아이들은 다른 돌들을 만나 또 다른 바위가 될 것이다. 오늘은 체트와 아리라가 강물에 돌멩이를 던지면서 유아기를 보내고 있다. 아마도 다음에는 우리 모두 캐나다에 있을 것인데, 그때는 이 아이들이 십대가 되어 있을 터이고, 더 묵직한 돌을 집어 들어 더 깊은 물에 던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곧 내 나이가 될 터이다. 돌멩이를 강물에 던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될 터이다. 변함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이 근원의 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시간은 강, 점점 더 빨리 흐르지필요한 걸 전부 가질 시간은 절대 없어시간은 강물, 가라앉지 않으려면 헤엄쳐야 해우릴 붙잡아 둘 닻은 없어마침내, 아마도 80년 후, 예전에 맥크래켄 가족 바위 더미(McCracken Family Rock Pile)라 불렸던 5중주단은 굵은 모래, 가는 모래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강물의 흐름에 맞춰 함께 춤추며 흘러가기보다는 강바닥의 일부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1,000년이 지나면 우리 후손 세대도 이 강을 따라 내려갈 것이다. 아마도 자기네가 떨어져나온 암석 조상을 모른 채, 그들도 그 강을 따라 흘러갈 것이다. 강 같은 평화가차 없는 강, 그 강 어디에도 영원히 닻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은 슬픈 생각이 아니다. 내가 강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신비한 기쁨을 느끼듯이(흐르는 물의 진면목과 아름다움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게 인간 아닌가?), 강에서 나의 위치는 체트가 강둑에서 흐르는 강물로 던진 돌만큼이나 잠정적이고 미약하다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 두 가지 중요한 이유로 나는 이러한 생각에 마음이 편하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가족과 친구라고 부르는 귀한 돌들과 함께하는 여행이 너무나 짧다는 생각에 가슴이 너무 아플 것이다. 하나. 나는 이 강이 고요하고 영원한 안식의 바다 어딘가에서, 고요의 바다, 영원한 안식에서 끝날 것임을 안다(히 4:1-11). 아마도 내가 알고 사랑했고 끝내 여정 중에 헤어졌던 돌들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주었고 때로는 겹치기도 했던 각자의 연속 드라마의 기억을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둘. 나는 강의 근원을 믿는다. 시간의 거센 흐름이 그저 우연이고 목적 없는 흐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힘에 맡긴다는 것은 절대로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다. 가망 없는 해안을 향해 필사의 헤엄을 치거나, 아니면 절망하여 가라앉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강에는 근원이 있고, 창조된 시작이 있으며, 그 여정에 목적이 있음을 안다.이렇게 흐르는 강물이니, 여전히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그 여정에 평온과 위안이 있음도 안다. 이것은 내가 목적지가 있는 길 위에 있음을 아는 평온이다. 이는 아내와 아이들, 내가 사랑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구도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 다만 우리가 그 근원을 믿고 목적지가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그 흐름에, 우리가 알게 될 가장 잔잔한 대양으로의 여행에, 무한히 좋은 새 땅에 닿게 될 여정에 즐거이 나를 맡길 수 있을 터이다. 원제: Time Is a River and We Are Pebbl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시간
영원과순간
인생여정
천국의소망
지리 정보가 빼곡한 본문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by Bryan Murawski
2022-09-05
구약의 내러티브는 흥미진진하다. 여호수아를 예로 들어보자. 이 내러티브는 독자를 서사시에서 서사시로 이끌어간다. 기생 라합은 스파이 둘을 숨긴다. 요단강이 갑자기 그 흐름을 멈춘다.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린다.그런데 여호수아서의 피날레 전에, 마치 아름답게 채색한 지도책을 워드 문서로 변환해 놓은 것처럼, 지리 정보가 가득한 열 장이 이어진다. 설교자는 여호수아 15장에서 하살 수알, 브엘세바, 비스요댜, 엘돌랏 같은 지리 정보가 들어 있는 총 63절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의 주일학교 교재에 들어 있는 색칠 공부 페이지는 보통 이런 긴 장소 목록은 건너뛴다. 설교자들도 많이들 그렇게 한다. 태양이 여호수아 10장에서 멈추어 서고, 강해 설교 시리즈도 거기서 멈추어버린다.지리학 정보로 가득한 장이 여호수아서에만 많은 것도 아니다. 민수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에스겔, 느헤미야 같은 성서도 도시, 성읍, 복잡한 여행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지리를 설교한다는 게 까다롭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음은 이런 까다로운 장들에 접근할 때 도움이 될 몇 가지 조언이다.1. 설교 전에 먼저 위치를 추적하라.어떻게 사용하는지 안다면, 지리는 설교자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 설교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 도시에서 마을로, 산에서 산으로, 호수에서 해안으로 플롯의 지리적 이동을 추적하라. 지리 추적을 성경 연구의 루틴으로 만들라. 설교 본문에 등장하는 지명이 성경책 뒷면에 있는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면, 기운이 빠질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성경 소프트웨어나 웹사이트가 수고를 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로고스의 도움을 받기 전에 직접 지리 경로를 추적한다면 설교 준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주석을 참고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주해하고 공부하면서 훈련을 쌓는 것처럼,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지리를 연구하는 습관을 들여라.2. 지리 정보가 많은 본문의 신학적 목적을 기억하라.신학이 항상 지리학을 이긴다. 너무 역사에 사로잡혀 본문의 신학적 중요성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여호수아 15:33-63에는 100개가 넘는 마을과 성읍의 이름이 나온다. 최고의 성서 지도책도 따라잡기가 어렵다! 이런 본문에 접근할 때 “이 장소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만 할 게 아니라, 이 질문도 해야 한다. “이 본문의 핵심은 무엇일까?”여호수아 15장은 유다의 기업의 경계, 곧 하나님의 축복의 경계를 추적한다. 열거하고 있는 모든 계곡, 산, 성읍은 이 지파를 위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해 들려준다. 상세 지도 속에서 쉽사리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 디테일 속에서 들어 있는 보물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장 중간쯤에서 우리는 옷니엘의 영웅적인 정복과 그에 따른 보상을 본다(15:13-19). 그러나 이 위대한 승리조차도 유다가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여호수아서 화자의 논평과 함께 그 빛이 바랜다(수 15:63). 모든 축복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장은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는 우리에게 여호수아나 옷니엘보다 더 나은 구주가 필요함을, 가나안 땅보다 더 영구적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필요함을 가리킨다.3. 메시지를 보강할 때만 시각 자료를 사용하라.대부분의 교회 역사에서 지도 부록이 있는 성경책을 가져본 사람은 많지 않다. 마르틴 루터는 라마가 베들레헴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지도에서 찾아본 적이 없다. 그런 지도가 없다고 종교개혁을 못한 것도 아니다. 지도나 시각 자료 없이 설교하려는 당신에게는 무수히 많은 동료가 있는 것이다.그러나 시각 자료가 설교를 풍성하게 할 수는 있다. 그게 본문의 요지를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면 말이다. 예를 들어, 지도에서 숙곳, 에담, 비하히롯의 위치를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죄 때문에 짧은 거리에 있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먼 길을 돌아 여행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4. 본문의 지리를 회중이 익숙한 장소와 연결하라.“단에서 브엘세바까지 거리는 150마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대신에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의 거리는 디트로이트에서 그랜드래피즈까지 거리와 거의 같습니다”라고 말하라. 진정한 미시간 사람이라면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두로는 고대 세계의 마서즈빈야드[미국의 유명한 휴양지]였습니다”는 “두로는 북이스라엘의 부유한 해상 도시”보다 더 맛깔스럽고 더 수월하게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지리 정보가 빼곡한 본문에 접근할 때 겸손한 마음과 희망적인 기대를 똑같이 가지길 바란다. 그런 본문을 공부하거나 설교하기가 쉽지만은 않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설교자들은 이러한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며, 배우고 성장하는 데 힘써야 한다(딤후 3:16-4:5).원제: 4 Tips for Preaching Geography-Heavy Tex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경지리
지혜로운 은퇴 생활을 위하여
by Luke Bolton
2022-09-04
우리 회사는 연금 플랜이 있고, 나와 아내는 IRA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축한 게 적은 어리석은 사람도 되지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이 저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럼 은퇴를 위한 적절한 저축은 어느 정도면 될까요? 내 돈이 어디에 어떻게 투자되고 있는지 알아볼 수는 있을까요? 은퇴 설계사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 돈이 지금 어디에 어떻게 투자되고 있는지 걱정이 되기도 한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이런 질문에 용기를 얻었고 당신도 같은 질문과 씨름하고 있기를 바란다. 성경은 우리에게 재물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라고 요구한다(잠 3:9).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퇴직금을 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올바른 태도금융 서비스 분야에서 일하면서 나는 다양한 개인과 가족의 재정 상황을 접했다. 같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어떤 부부는 수백만 달러를 가지고 은퇴하는 반면에 또 어떤 부부는 쥐꼬리만큼만 가지고 은퇴할 수도 있다. 게다가 생활비도 집집마다 크게 다를 수 있다.그러나 돈 문제를 개인에게 맞추지 않고 단지 “얼마나 들지”에 대해서만 대답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J. D. 그리어(J. D. Greear)가 유용하게 설명했듯이,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들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단 하나의 규칙은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성경을 돈과 관련한 결정에 필요한 원칙의 매트릭스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은퇴 저축에 대한 내 생각은 적어도 다음 네 가지 성경적 개념에 의해 형성되었다. 1. 근면태초부터 하나님은 사람이 생육하고 일하도록 축복하셨다(창 1:28; 2:15).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은 세상 속에서 그분의 창조성, 생산성, 열매 맺음, 노동을 반영하도록 부름받았다.생산성과 근면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장소 중 하나가 직장이다. 일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이 “어떻게 해야 오늘 하루도 또 잘 버티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어떻게 해야 직장에서 하나님을 더 공경하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또 나의 은사를 극대화할 수 있을까?”가 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열심히 일하면 최소한의 생활비 이상을 벌어 더 큰 경제적 능력을 창출할 수 있다(잠 10:4). 일의 신학 프로젝트(Theology of Work Project)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단지 생존만 하는 게 아니라, 좋은 것으로 더 풍족하게 사는 것”이다. 열매 맺는 노동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풍요로움을 만들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방법이다. 2. 책임일반적인 지침으로서 성경은 사람이 재정적으로 스스로 부양하라고 명령한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1-12). 성경은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명령하지만(이삭줍기, 과부 부양 등),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자립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살후 3:7-10).일하기 힘든 나이가 되었을 때도 스스로 재정적으로 부양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는 것이 현명하다. 이것은 은퇴에 대한 언론의 과장된 꿈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도 개미처럼 미래의 필요를 충족시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점이고, 그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잠 6:6-8).우리 자신과 가정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성경적 우선순위이다(딤전 5:8). “얼마나 들까”라는 질문은 은퇴 이후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비용을 계산하도록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신자들은 재정적 유산을 다음 세대에 남기기를 열망할 것이다(잠 13:22).3. 너그러움 저축에 대한 성경적 사고는 우리 가정을 부양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지역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지적했다.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행 20:34-35).기부를 많이 하는 것은 부유한 그리스도인에게 선택 사항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부는 제자를 제자로 만드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샌드위치 세대”의 편부모와 성인조차도 재력에 따라 너그러움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다(고후 8:12). 우리 모두 다 시간, 돈, 능력 등등,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너그러울 수 있다. 은퇴를 위한 저축이 기부를 주저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책임감과 너그러움은 함께 성장하고 상호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장기 저축 계획을 통해 실제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더 책임감 있고 너그러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4. 지혜재정 관리라는 측면에서 정직함 또는 세금 납부는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보편적으로 옳고 그른 것에 속하는 몇 개 되지 않는 주제이다. 그에 반해, 저축과 투자에 관한 결정은 분별력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그렇다. 지혜로운 사람은 빚을 줄이고 절약한다. 또한 보험에 가입하고 미래를 위해 수입의 많은 부분을 저금할 것이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적용하고 그 과정에서 조언을 구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만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인에게는 다 필요하다. 현실적 대응이러한 모든 원칙을 고려한 후에도 신자는 장기 저축률에 얼마를 추가할지 결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한 투자가 5퍼센트를 더 벌어줄까? 아니면, 10퍼센트? 더 많이?온라인 계산기를 통해 특정 저축률이 미래 재무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금, 자녀, 보험, 사회 보장 및 투자 등 상황이 복잡해지면 재무 설계사의 조언이 필요하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주님은 더 세부적으로 재정 계획을 세우려는 그리스도인을 돕기 위해 말 그대로 수천 명의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전문가를 키워놓으셨다.은퇴 투자가 나의 가치와 일치할 수 있을까?점점 더 많은 사람이 투자 회사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투자 회사에 대해 걱정해야 할까? 뛰어난 그리스도인 전문가들은 이 주제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일부는 특정한 투자를 피하라고 조언한다. 또 어떤 전문가는 그건 무조건 피할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스스로 분별할 문제라고도 한다. 간단히 대답하자면, 고용주가 후원하는 퇴직 계획은 사전 승인된 투자 금액으로 제한된다. 따라서 직원 대부분은 그 금액에 관해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할 선택권이 없다. (일부 교회와 사역 기관은 예외이다.) 재정 전문가에게 지금 가입한 플랜에 자기 주도적 옵션이 있는지 확인하고,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올바른 기금 옵션을 추가하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 또는 Roth IRA 방식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투자자는 광범위한 옵션을 가진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여러 펀드 회사가 크게 성장했다. 많은 기금이 재정적 수익뿐 아니라, 지역사회 개발, 의료 연구 지원, 인신매매 감소, 공정 임금 옹호, 유해 사업 방지에 선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투자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으로 흥미로운 기회이다. 그렇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을 돌보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은퇴 저축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가치 중심의 장기적 투자는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주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는 동시에 당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방법이다. 이 자료에 나오는 의견은 일반적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며 특정 개인을 위한 특정 조언이나 권장 사항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떠한 투자 전략도 재정적 성공을 보장하거나 손실을 방지할 수 없다. 과거의 성과가 미래의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모든 투자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을 포함한 위험이 따른다. 원제: How Can I Save for Retirement Without Being Greedy or Foolis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은퇴
성경적투자
미래계획
저축
교회와 SQ
by 최창국
2022-09-03
아빌라의 테레사는 그녀가 살던 시대 속에서 ‘영적이지 않아도’ 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영적이지만’ 지식이 없는 사람보다 더 나은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영성이 없는 지도자보다 지성이 없는 지도자가 더 위험하다는 그녀의 말은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 진술이었다. 그녀의 말은 영성이 있다고 하면서 지성을 외면하는 사람들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녀가 영적 지도자들의 지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역으로 지성의 홍수 속에서 영성을 갈망하는 시대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요즈음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리 스트로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1) 교회 다니는 그리스도인들(Churched Christians). (2) 교회 다니는 비그리스도인들(Churched Non-Christians). (3) 교회 다니지 않는 그리스도인들(Unchurched Christians). (4) 교회 다니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Unchurched Non-Christians)이다(Lee Strobel, Inside the Mind of Unchurched Harry and Mary 참조).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생활보다 영적 의미와 가치에 더욱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는 하나님은 진, 선, 미의 궁극적 실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생동적인 관계 속에서 진리의 길, 선함의 길, 그리고 아름다움의 길을 추구하는 데 더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헨드릭스는 교회가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서 성장을 가져오도록 안내하기보다는 많은 프로그램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하였다. 영적으로 굶주린 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이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찾기 위해 떠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William Hendricks, Exist Interviews: Revealing Stories of Why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9). 요즈음 한국 교회의 본질적 문제는 SQ(Spiritual Quotient, 영성 지능)의 문제와 깊게 관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Q는 우리로 하여금 선과 악을 질문하게 하고, IQ와 EQ를 통합하며, 제한된 조건을 초월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게 하는 인격이다. IQ가 낮으면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EQ가 낮으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이방인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SQ가 낮으면 존재 자체가 불구가 된다. SQ가 빈약하면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인습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물질주의와 편협한 자기중심성에 빠져 버리게 된다. 한국 교회가 깊이 던져야 할 질문은 교인 수도, 예배당 크기도, 현란한 설교도, 권력도 아니다. 교회가 깊이 성찰하며 던져야 할 질문은 SQ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어느 목회자가 감옥에 가보니 믿을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자신의 독자 외아들만 믿을 수 있다고 외치면서 세상보다 못한 방식으로 세습을 주장하고, 성도들을 무기 삼아 교회 부동산에 대한 과도한 재개발 비용을 받아내어 사회의 혐오 대상이 되어도 성령의 역사라고 외치고 있다. 교회를 정치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기도 하다. 교회는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보수적이어야 하지만 정치 이데올로기에는 개혁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으로 세상을 끊임없이 개혁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영적 의미와 삶을 추구하다 소천하신 목사님도 있다. 바로 엄두섭 목사님이다. 엄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졸업 후 나주 공산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엄 목사님이 목회를 시작했을 때, 당시 산중파 지도자였던 이현필 선생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교회 내에 팽배했다. 이 무렵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산중파”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던 대부분의 성도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만, 끝까지 남아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다가 죽음의 위험에 처한 미국 여선교사가 있었다. 이때 어려움에 처한 여선교사를 산중파 그리스도인들이 구출하였다. 산중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삼십 리 길을 맨발로 오가면서 궤짝에 여선교사를 숨겨서 지게에 지고 번갈아 가면서 구출하였다. 엄 목사님은 가장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삶 속에서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고민하게 된다. 그 후 서울에서 목회하시면서도 나주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여정 속에서 엄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먼저 자신의 영적 성숙과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찰을 위한 장으로 한국 개신교 최초로 경기도 포천에 은성수도원을 설립한다. 평생 청빈의 삶과 기도와 순전한 영적 삶을 실천하다가 소천하였다. 엄 목사님은 은성수도원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신학생들의 영성 훈련을 위해 모 신학대학원에 기증하셨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소개된 두 목사의 본질적인 문제는 신학적 지식이나 종교의 정치 이데올로기화도 아니다. 바로 SQ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SQ가 결여된 종교적 행위는 오만, 야망, 지적 교만 등과 같은 무신론의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 이러한 무신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우상화하고 섬기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날처럼 어떤 신상을 만들어 놓지는 않지만, 우상 숭배 자체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상 대신 돈, 권력, 지위, 지식, 종교 등에서 신을 만들어 낸다. 하나같이 다 우리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것들이지만, 이는 흔히 관계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깊은 차원에서 신앙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와 관계되기보다는 SQ와 관계된다고도 할 수 있다. SQ는 삶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게 하는 지능과 인격을 말한다. SQ는 종교와 우리의 삶의 이면에 있는 근본적인 의미와 본질적 영혼과 깊이 관계된 지능과 인격과 관계된다. SQ가 높은 사람은 종교 생활과 삶에서 편협함, 배타성, 아집, 편견에 메이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SQ가 높은 사람이 종교적이지 않으면서 영적인 속성을 가질 수 있다. 오스 기니스가 설명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신자’와 ‘비신자’의 구별이 아니다. 진짜 구별해야 할 것은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신경을 쓰는 사람이냐, 아니면 그런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이냐다”(Os Guiness, Long Journey Home: A Guide to Your Search for the Meaning of Life, 24).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간다는 뜻인가? 하나님에 대해 입술로 노래를 하는 것인가? 정규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인가? 성경을 읽는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뜻인가?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신앙이 일상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 방식을 변화시키기까지 한다는 의미인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단순히 신학적 IQ나 EQ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어떤 종교적인 행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SQ가 필요하다. SQ는 의미 추구와 관계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다. 영적인 것은 어떤 세련된 교리 체계나 종교적인 행위와 관계되기보다는 삶의 근본적인 의미와 가치와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영적으로 둔하다는 것은 근본적인 가치, 즉 지구와 사계절, 하루 24시간, 우리 생활의 수단과 일상의 의례들, 몸과 그 변화, 성, 노동과 그 열매, 삶의 여러 단계, 죽음 등에 결부된 근본 가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도나 조하·이안 마셜, SQ, 44). 한국 교회는 그동안 영적인 의미를 예배, 기도, 말씀 묵상과 같은 행위와만 관계시켜 온 경향이 있다. 영적인 것은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관계된다는 것을 간과해 왔다. 깊은 차원에서 보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영적인 의미도 어떤 종교적인 행위와 관련되기보다는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방향과 관계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한 ‘영적 예배’에서 영적 의미도 삶과 관계된다(롬 12:1-2). 영적 예배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 행위와 관계되기보다는 마음 또는 의식의 변화(renewing of the mind)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마음의 변화는 사고(thinking), 가치(value), 동기(motive), 삶의 방법(method)과 관련이 있다. 바울이 언급한 ‘변화’는, 폴 와쯜라위크(Paul Watzlawick)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차 변화와 비견될 수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연구했다. 이들은 사람들이 두 가지 변화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일차 변화(first order change)와 이차 변화(second order change)다. 일차 변화에서 사람들은 현 상황에 맞게 기능하거나 적응한다. 즉, 상황에 더 잘 기능하는 것을 배우지만 삶의 의미, 가치, 믿음, 태도, 행동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차 변화는 삶의 의미, 가치, 믿음, 태도, 행동 전체가 바뀐다(Paul Watzlawick·John Weakland·Richard Fisch, Change: Principles of Problem Formation and Problem Resolution, 10). 영적으로 건강해지면 삶의 근본적인 의미,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변화되고 성숙해진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가장 시급하게 추구해야 할 것은 교회의 IQ나 EQ가 아니라 SQ라고 할 수 있다. SQ가 결여되면 교회의 존재 자체가 불구로 되어 버릴 수 있다. 교회의 SQ가 낮을 때 교회는 자신을 희화화하고 존재 자체가 제한되고 분열될 수 있다.
영성지능
SQ
지성과영성
영성
청소년과 소셜미디어에 관한 최신 통계
그들을 제자로 키우려면 알아야 할
by Chris Martin
2022-09-02
청소년들은 소셜미디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가?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셜미디어는? 다양한 소셜미디어가 있겠지만,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발표한 새로운 통계에 따르면 유튜브와 틱톡이 현재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소셜미디어이다. 우리가 이 통계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오늘날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를 매개로 맺은 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이 통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우리 사회 전체의 소셜미디어 사용방식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가 활성화하던 초창기에 청소년들이 거의 모든 측면에서 그 방향을 결정했다. 새로운 앱의 성공 여부는 청소년이 그것을 얼마나 사용하느냐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오프라인에서 문화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콘텐츠들도 청소년 이용자들이 만들고 전파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자녀든, 교회 청소년이든, 아니면 우리가 돌보는 청소년이든,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의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파악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몇 가지 통계를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1. 청소년 95%가 유튜브를 사용한다. 그중 19%는 “거의 항상” 사용한다.사실 유튜브는 전통적 의미의 소셜미디어(페이스북, 인스타그램)보다는 TV 대체품처럼 보이지만 유튜브는 분명히 소셜미디어이다. 퓨 리서치의 통계에 따르면 유튜브는 전 세계에서 나이, 성별, 인종, 경제 수준과 상관없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소셜미디어이다. 거의 모든 청소년이 유튜브를 사용하고 있으며, 다섯 명에 한 명꼴로 “거의 항상” 유튜브를 사용하고 있다.청소년 다섯에 한 명이 '거의 항상" 유튜브를 보거나 이용한다. 현재 유튜브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따라서 가장 중요한 웹사이트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거의 모든 청소년이 유튜브를 사용하고 있으며, 퓨 리서치의 2021년의 최신 통계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81퍼센트가 유튜브를 사용하고 있다. 가히 유튜브는 소셜미디어 세계의 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튜브는 IT 기업 알파벳의 자회사인 구글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인터넷 검색엔진이기도 하다. 2. 청소년 67%가 틱톡을 사용한다. 62%는 인스타그램을, 59%는 스냅챗을 사용한다.아마도 미국 청소년의 95퍼센트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통계(2014-15년에는 73%)만큼이나 놀라운 통계는 틱톡 관련 통계일 것이다. 틱톡이 지금의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으니 틱톡의 인기 자체에 대해서는 그리 놀라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틱톡이 청소년 사이에서 점유율을 확대하며 단기간에 인스타그램과 스냅챗을 추월한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사실 6년 전에 퓨 리서치에서 같은 조사를 했을 때 틱톡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다.청소년 사이에서 인스타그램과 스냅챗의 이용률도 2014-15년 조사(각각 10%, 18%)에 비하여 큰 폭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틱톡이 이들 두 소셜미디어를 빠르게 추월하며 등장한 것은 매우 인상 깊다. 청소년들의 소셜미디어 이용 추이주: 이 조사에서 청소년은 13-17세 사이의 십대를 말한다. 물론 틱톡은 중독성 있는 알고리즘이라는 점부터 중국 정부와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틱톡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나는 원래 바인(Vine)이라는 소셜미디어를 가장 좋아했다. 그런데 2017년 1월 트위터가 바인을 폐쇄한 후에 비디오 클립 시장에서 틱톡이 바인의 빈자리를 빠르게 채워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2014-15년 조사에서 바인은 미국 청소년의 24퍼센트만 사용하던 소셜미디어인데, 현재 틱톡은 67퍼센트의 청소년이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3. 청소년 46%가 ‘거의 항상' 인터넷을 사용한다고 말한다.청소년들은 항상 온라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들이 일이나 공부 때문에 온라인에 접속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들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영상이나 사진을 즐기는 데 하루에 7시간 넘게 사용한다. 또한, 60퍼센트가 넘는 청소년이 소셜미디어에서 하루 4시간 이상을 사용하고 있다.항상 온라인에 있는 그들을 두고 데렉 톰슨(Derek Thompson)은 그의 책 히트 메이커(Hit Makers)에서 청소년들은 “항상 그 복도"에 있다고 말했다. 소셜미디어는 현대판 학교 복도나 식당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친구들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고 있다.그러다 보니 청소년들은 관심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많은 청소년이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4. 청소년 36%가 소셜미디어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고 말한다. 청소년 46퍼센트가 거의 항상 온라인에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48퍼센트의 청소년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인터넷에 접속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신이 “너무 많은” 시간을 소셜미디어에서 보낸다고 말하는 청소년은 36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이 조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이가 많은(15-17세) 청소년일수록 어린(13-14세) 청소년보다 자신이 너무 많은 시간을 소셜미디어에서 보낸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나이 많은 청소년 중에서는 42퍼센트가 너무 많은 시간을 소셜미디어에서 사용한다고 말하지만, 어린 청소년 중에서는 고작 28퍼센만 같은 말한다. 여기서 그 이유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어린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에서 더 적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나이 많은 청소년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소셜미디어에서 보내는 것에 대하여 더 심각한 경각심을 갖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5. 단 32%의 청소년만 페이스북을 사용한다. 2014-15년에는 71%가 사용했다.이는 그리 놀라운 통계는 아니지만 주목해 볼 만한 통계이다. “무엇이든지 빨리 만들고 빨리 파괴한다”는 신념으로 온갖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황소 같았던 실리콘 밸리 괴물은 청소년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물론 페이스북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2012년에 10억 달러에 인스타그램을 인수했다(이는 2018년에 1,000억 달러 가치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2013년에는 스냅챗을 30억 달러에 인수하려고 노력했다(스냅챗은 그 제안을 거절했고, 현재 170억 달러 가치의 기업으로 성장했다).청소년들의 거의 절반이 '거의 항상' 인터넷을 사용한다고 말한다.주: 이 조사에서 청소년(십대)은 13-17세 사이의 십대를 말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왓츠앱의 지주회사인 메타는 주력 사이트인 페이스북에서 젊은 이용자들을 잃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인스타그램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틱톡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데, 때로는 그런 시도가 사용자들을 실망케 하기도 한다.제자훈련의 맞수소셜미디어는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 청소년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는 데 가장 강력한 맞수가 될 수 있다. 부모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압도적인 화려함으로 쉬지 않고 항상 청소년들을 유혹하는 소셜미디어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모와 교회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첫째,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우리 삶의 습관부터 바꾸어야 한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모든 연령대의 사용자들이 하루에 평균 2시간 30분을 소셜미디어에서 보내고 있다.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퓨 리서치에 따르면 소셜미디어가 청소년의 문제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것은 청소년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돌보는 청소년을 가르치기 전에 반드시 우리 자신을 먼저 되돌아봐야 한다.둘째, 오프라인 생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당수 청소년이 소셜미디어가 자신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으며, 최소한 그들의 친구들에게 인터넷이 심각한 악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 온라인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질책하는 것보다 그들이 오프라인에서 보내는 아름다운 시간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늘 온라인에 있는 청소년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한다고 해서 그들을 강제로 오프라인으로 끌어내서는 안 된다. 더 좋은 방법은 소셜미디어 밖에 있는, 더 아름답고 좋은 오프라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눈에 보이는 실제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한다. 어쩌면 우리 가정이나 교회에 있는 청소년들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이 교회 공동체와 그 의미를 발견하게 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 어쩌면 최고의 방법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정확하게 드러내 주고,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교회의 모든 활동에 청소년을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성경 공부, 예배, 공동체 모임에 청소년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교회가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한다.인터넷 시대에 청소년을 제자 삼는 일은 마치 물총을 가지고 불난 집에 물을 뿌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를 의지하면서 그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원제: 5 New Stats You Should Know About Teens and Social Medi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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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의삶
소셜미디어
상한 갈대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Nick Roark
2022-09-01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한 문장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400년 전에 쓰인 글 하나가 그렇게 내 인생을 바꾸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더 크다”(Works of Richard Sibbes, 1:47)이 말을 한 이는 청교도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명인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이며, 이 문장은 그의 가장 위대한 책, 스펄전이 일찍이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양손으로 흩뿌려놓은 책”(Lectures to My Students, 778)이라고 부른 상한 갈대(The Bruised Reed)에 나온다. 이 책과 이 문장은 나를 살아계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글을 쓴 십스 같은, 이미 천국에 간 목사들의 작품을 매달 읽어야겠다는 열정에 불을 붙였다. 상한 갈대는 당신 속에서도 똑같은 열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스위트 드롭퍼십스는 1577년 영국 서퍽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18세에 케임브리지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1603년 그리스도께 회심한 후에 신실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30년 동안 케임브리지와 런던에서 십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복음의 위대한 신비를 달콤한 방식으로 펼치고 적용하는”(Works, 3:4) 따뜻한 은사 때문에 그를 종종 “부드럽게 떨어뜨리는 자”(Sweet Dropper)라고 불렀다.그가 1627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사람들은 그를 “천국에서 사는 십스 박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천국을 품고 사는 그의 삶과 교리 때문이었다. 1635년 7월 6일,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기리는 이런 글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 선한 사람에게 이 높은 찬사를 돌릴지어다: 그가 천국에 가기 전에 그는 이미 천국에 있었노라”(Meet the Puritans, 535).십스는 꾸준히 설교를 집필했고, 무려 200만 단어가 넘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상한 갈대는 그중 단연코 가장 기억에 남고 소중한 책이다. 이 책은 청교도 경건의 고전, 실천 신학의 패러다임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이 책은 이사야 42:3,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에 대한, 그리스도를 높이는 주석이요 적용이다. 십스는 마태를 따라(마 12:18-20) 종이신 주님, 하나님이 마음에 기뻐하시는 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이로 묘사한 이 예언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이해한다.16개의 짧은 장을 통해서 십스는 논지를 세 부분으로 전개한다. (1) 그리스도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실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실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승리로 심판하실 때까지 이 둘 중 어떤 것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지친 신자를 위한 위로오늘의 그리스도인이 거의 400년 전 런던에 살았던 한 설교자가 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이유에서다: 1630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로 수많은 지친 그리스도인이 상한 갈대에 가득 담겨 있는 낙심한 자를 위한 격려를, 약한 자를 위한 능력을 발견했다. 이는 이 책이 죄인을 사랑하는 자비롭고 전능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에서 이렇게 썼다. “한때 너무도 극심하게 지쳤던 나는 악마의 공격에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복종했었다. 바로 그런 시기에 내 영혼을 진정시켜준 이가 리차드 십스였고, 나는 그런 그에게 감사를 멈출 수 없다. … ‘천국의 의사 십스’는 만병통치약이다. … 그의 책 상한 갈대가 나를 진정시키고, 달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또 치유했다”(Preaching and Preachers, 186-187).17세기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백스터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그리스도께로 회심하게 할 때 바로 상한 갈대를 사용하셨다고 고백했다. “상한 갈대는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고, 구속의 신비와 더불어 내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께 단단히 매여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이해하도록 했다”(Richard Sibbes, vii).그리스도, 강하고 부드러우신십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영적 문제에 직면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향한 모든 헌신과 그에게서 오는 위로의 원천이 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성품과 직분”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한 갈대에서 십스는 용서받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찾을 수 있는 “연민과 사랑의 놀라운 달콤함”(Works, 1:38)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다. “예수님처럼 은혜로우신 중보자(딤전 2:5)에게서 어찌 은혜를 기대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우리의 본성을 취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병을 잘하는 의사이시며 특히 상한 마음을 고치는 데에 능하십니다”(Works, 1:45).십스는 상심하고 괴로워하며 낙담한 그리스도인, 그러니까 진짜 “상한 갈대”를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결코 그들을 깨뜨리거나 소멸하지 않으실 것임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긴다. 십스는 아프고 지친 그리스도인에게 위로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초대한다. 우리를 위해 사역을 완성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속에서도 시작한 일을 확실하게 마치실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우리는 구원이 능력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또한 달콤하게 제공되고 있음을”(Works, 1:40) 보게 된다.이사야 42:3의 예언에서 그리스도는 연약한 자의 결점을 부드럽게 사랑할 뿐 아니라 자비롭게 참아주시는 부드러운 구주로 묘사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승리를 가져오는 전능한 은혜를 그리스도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Works, 1:40).“우리는 약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것이다”(Works, 1:71).지친 이들의 기도상한 갈대를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모든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에게 시선을 돌리게 하려고 십스가 얼마나 일관되게 모든 내용의 초점을 맞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큰 악과 두려운 원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하시는 그리스도 은혜의 언약 안에 자신을 두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 그 안에는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합친 모든 것보다 더 높고 깊고 넓은 긍휼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심입니다”(Works, 1:39).우리의 죄는 인간의 죄이지만, 그리스도의 자비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내는 소리는 우리 죄가 내는 소리보다 더 크다(Works, 1:89). 그리스도의 이 은혜로운 마음이 바로 십스가 모든 페이지를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놀라운 은혜 안에 드러나 있는 자비롭고 전능하신 그를 볼 때, 우리는 그의 영광을 위해 그를 섬길 능력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십스는 그리스도인이 자주 실패하고 영혼이 빠르게 지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가 기도 훈련에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진 신자에게 이사야 42:3의 영광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들어보라.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이 탄식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하나님은 혼란 속에 드리는 기도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고, 우리의 기도가 성령으로부터 오기에, 또한 그 기도가 그분의 뜻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기도가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쉬는 거룩한 한숨과 눈물 중에 헛되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Works, 1:65-66).순전한 은혜의 하나님십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성을 입으신 순수한 은혜”(Works, 4:519)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삶을 통해 “심판을 승리로 이끄시기” 위해 헌신하셨기에, 우리는 그 은혜에 의지하며 그가 지역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제공하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여 응답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면(약 4:8), 규례대로 그는 우리를 가까이하십니다.”우리는 은혜로 싸우지만, 궁극적으로 승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기시는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십스는 상기시킨다. 우리는 오직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해지려고(엡 6:10) 노력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기와 같이 되게 하시고, 안팎으로 다 영화롭게 하시고, 또한 아버지 앞에 흠 없는 자로 세우시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유 1:24).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마음으로 갈등을 겪을 때,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항상 그런 상태로 살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조금만 더 노력합시다. 그럼 우리에게는 영원히 행복이 주어질 것입니다”(Works, 1:98).죄인을 죄인의 구주와 연합시키기에 믿음이 위대한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강한 믿음이 아니다. 강하신 그리스도를 향한 연약한 믿음이다. “거인의 손에 들린 작은 것이 큰 일을 해낼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굳세게 된 작은 믿음이 역사를 행할 것입니다”(Works, 1:84).왜 상한 갈대를 읽어야 할까?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원제: The Bruised Reed: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리처드십스
상한갈대
꺼져가는심지
이사야42:3
하나 되기가 왜 이리 힘든가?
by Jon Bloom
2022-08-31
교회 안에서 하나 되는 게 왜 이리 어려울까? 당신이 내 마음과 같다면, 이 질문 앞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굳이 눈물을 언급한 것은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게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일반적인 교회 내 불화에 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불화는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다. 또 나는 지금 (기독교를 정의하는) 일차적 기독교 교리나 (교단을 구분하는) 이차적 교리 같은 수준 높은 주제에 관한 불일치가 불러오는 분열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불일치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온 교회를 분열시키는 훨씬 더 일반적이지만 또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갈등이다. 왜 이런 갈등이 생기는 걸까? 진지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겸손하고 온화하며 참을성 있게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이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엡 4:1-3) 당신도 나와 같다면, 이런 분열을 보면서 가끔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는 “왜 교회 안에서 하나 되는 게 이렇게 힘들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당신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면,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잘못된 가정을 드러낸다. 이 질문 뒤에 숨어 있는 가정은 이것이다(나는 이런 가정을 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하며, 신학적으로 대체로 동의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일치는 결코 어렵지 않아야 한다.’ 이런 가정은 겉보기에는 꽤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가정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꼭 바른 건 아니다. 특히 성경이 이런 가정을 지지하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일치는 언제나 어렵다오해하지 말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얼마든지 하나 될 수 있다. 성경은 일치의 경험을 “아름답고 즐거운”(시 133:1) 것으로 묘사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이 되십시오”(빌 2:2).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우리 안에 내재한 죄와의 싸움이 결코 과거보다 쉬워질 거라고 약속한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인생의 고통이 견딜 만해질 거라 약속한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일치도 이런 사랑의 일부이다)이 과거와 달리 별다른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인간적으로도 쉬워질 거라 약속한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성령으로 충만하고 뜨거운 그리스도인들 사이라고 해도 그들 사이의 일치가 결코 과거보다 더 쉬워질 거라고 약속한 적이 없다. 어쨌든, 신약성경 안에도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이 서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다투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일치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바울의 편지를 읽어야 한다. 다음 사례는 바울이 하나 됨에 관해서 얼마나 자주 언급하는지에 대한 작은 예시이다. · 그는 고린도 성도들의 “분열”과 “분쟁”을 책망한다(고전 1:10-11).· 그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분쟁과 분열과 파당”의 위험을 경고한다(갈 5:20).· 그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라고 권면한다(빌 4:2).· 그는 골로새 성도들에게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가르친다(골 3:13). · 그리고 그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라고 권면한다(엡 4:29-31).맘만 먹으면 나는 얼마든지 더 많은 구절을 인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어렵지 않아야 한다는 우리의 가정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일치는 교회 초창기 때부터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일치가 어려운 이유일치가 쉬울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없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일치가 항상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교회의 일치가 왜 그렇게 어려운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거기에는 수많은 요인이 있다. 심각한 영적 공격을 받는 교회(엡 6:12), 양의 탈을 쓴 이리에게 침투당한 교회(행 20:29),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불신자의 선동에 휩쓸려 “분쟁과 분열과 파당”에 시달리는 교회(갈 5:19-21), 미성숙한 신자들이 당파적 다툼에 유혹받는 교회(고전 3:1-4) 등등을 생각해보라.그러나 수많은 요인 중에서도 왜 교회의 일치가 그토록 어려운지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상위 수준의 요인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향후 누릴 궁극적인 기쁨과 그의 영광을 위해서 굳이 우리의 하나 됨을 그렇게 힘들게 만드신 걸까? 일치는 우리를 단련한다성경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벧전 2:24).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에게 용서의 선물(그는 “우리 죄를 담당하셨음”)과 거룩함의 선물(“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을 주신 것이다. 우리의 거룩함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다 큰 선물이다. 그러나 거룩하게 하는 선물은 종종 고통이라는 포장에 쌓여서 오는 경향이 있다.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삶을 배우는 것은 언제나 힘들고 종종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성령이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엡 4:3)을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엡 4:22-24). 일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따라서 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 더 많이 죽고, 다른 사람의 죄를 더 많이 참는 기회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다. 일치는 그리스도를 높인다“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나는 이 구절을 들을 때면 목가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상상하곤 한다. 성경 속, 심지어 사도행전의 첫 장에서도 본 적 없는 낭만적인 기독교 공동체 말이다. 그럼 예수님은 과연 어떤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걸까? 바로 이전 구절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고 하시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꿈꾼 것은 십자가를 품은 공동체, 서로를 향한 희생적인 사랑이 자신을 “종의 모습”을 취하게 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다(빌 2:3, 7). 일치의 추구는 대가를 요구한다. 그 무엇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뚜렷하게 또 절정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듯,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처럼 세상을 향해 공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 3:16).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 말자지역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수준 높은 소명이다. 그것은 성화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수단이며, 사랑에 굶주린 세상에서 이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줌으로 이 세상이 갈망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포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이 소명에서 실패하는지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 그러나 길게 또 종합적으로 보도록 하자. 너무나 자주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는 것(요 15:4), 거룩함을 위해 애쓰지 않는 것(히 12:14),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것(살전 5:17),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것(눅 6:27),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지 않는 것(롬 12:14), 그리고 여러 가지 시험을 겪을 때 그것을 온전히 기뻐하지 않는 것(약 1:2)을 생각할 때,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너무 자주 지키지 못하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의 실패가 불순종의 핑계 또는 변명이 되면 안 된다. 우리 죄를 자백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과 다른 형제의 용서함을 받아 요한일서 1:9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자.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할 수 있는 대로”(롬 12:18) “성령이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겠다고 결심함으로, 항상 인내하시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속에 나타내자.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높은 소명이며, 그렇기에 어려운 소명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빌 1:19)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 하지만 그게 정상이다. 하나 됨이란 우리가 품은 목가적인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재를 세상 속에 나타내는 거룩한 소명이기 때문이다.원제: Why Is Christian Unity So Hard?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일치
분열과일치
하나됨
흥미롭지는 않지만 중요한 사회기반시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by Joe Carter
2022-08-30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교회 지도자들이 “그 성읍의 평안”(렘 29:7)을 제대로 구하려면 경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경제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시리즈는 경제 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리즈의 취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경제와 공공 정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용어 사회기반시설의미미국 의회는 두 개의 사회기반시설 법안에 대한 표결을 고려하고 있다. 여러분이 이런 계획에 대해 들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일 가능성이 크고(하나는 초당적인 계획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당만 지지하는 계획이다) 가격표는 놀라운 숫자(1조 달러의 초당적인 계획안과 4조 5천억 달러의 민주당 계획안)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잊고 있는 것은 사회기반시설(인프라)이란 정확히 무엇이고 왜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우리는 인프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없게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인프라를 다리와 고속도로, 항만과 철도와 같은 경제 시스템의 골격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필수적이지만 그다지 흥미로운 논의 주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기반시설은 교통 시스템의 틀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방정부는 인프라를 식별할 수 있는 산업, 기관(사람과 절차 포함), 그리고 미국의 국방과 경제 안보에 필수적인 제품과 서비스의 신뢰할 수 있는 흐름을 제공하는 유통 능력 등으로 구성된 상호의존적 네트워크와 시스템의 프레임워크, 모든 수준과 사회 전반에 대한 정부의 원활한 기능이라고 정의했다.이 정의는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인프라는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프라는 우리의 교회와 지역사회에 가장 직접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제의 주요 영역 중 하나이다.중요한 이유우리는 사회 기반 시설이 훼손될 때까지 이것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마도 정부가 이것을 보수하리라 추정한다. 하지만 정부는 두 가지 광범위한 사회 기반 시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네(정부)의 문제와 우리의 문제이다.“그들의 문제”에 관한 범주는 주로 매우 중요한 사회기반시설이다. 이러한 인프라는 무력화 또는 훼손이 발생한다면 국방 또는 경제가 쇠약해질 만큼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인프라들이다. 중요 인프라 보안에 대한 대통령의 정책 지침에는 16개 범주의 중요 인프라 부문과 보안 기능 유지를 담당하는 행정 기관이 명시되어 있다.• 화학 부문• 상업 시설 부문• 통신 부문• 중요 제조 부문• 댐 부문 • 군수 산업 기지 부문• 긴급 서비스 부문• 에너지 부문• 금융 서비스 부문• 식량 및 농업 부문• 정부 시설 부문• 의료 및 공중 보건 부문• 정보기술 분야• 원자로, 재료 및 폐기물 부문• 교통 시스템 부문• 상하수도 시스템 부문한두 개 영역의 중요 사회기반시설이 우리의 거주 지역과 깊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중요 시설의 변화와 규제가 지역 및 지역사회의 경제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폭넓고 일반적인 이해가 도움이 될 수 있다.“우리의 문제” 범주에는 종종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포함된다(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모든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문제는 정부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요 인프라 유형으로 물을 가두고 수위를 유지하기 위해 건설되어 발전하거나 급수용으로 사용되는 저수지를 조성하는 댐이 있다. 가장 많은 댐을 보유한 주는 텍사스이다. 2019년 현재 미국 내 댐의 약 8퍼센트인 7,000개가 넘는 댐이 있다. 이 중 약 60퍼센트는 개인의 소유이고 그에 대한 고유지비용은 소유주의 책임이다.홍수 시 범람 가능 지역에 위치한 많은 시골 교회들(심지어 더 많은 이 교회 성도들의 집들)은 이 댐 중 하나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영향을 받을 것이다. 여러분의 교회나 집이 그들 중 하나에 해당하는가? 단순히 그러한 인프라 문제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비상 상황과 최악의 재난에 더 잘 대비할 수 있다.이러한 지역적 관심을 위해 미국토목학회(ASCE)가 도움이 될 만한 주요 인프라 분야의 목록을 제공하고 있다. ASCE는 4년마다 인프라 보고서 카드에 포괄적인 평가를 제공하고 있다. 각 범주는 A에서 F까지의 등급을 받는다. 2021년 ASCE는 국가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등급을 부여했다.• 항공(D+)• 교량(C)• 광대역(C)• 댐(D)• 식수(C-)• 에너지(C-)• 유해 폐기물(D+)• 내륙 수로(D+)• 제방(D)• 항구(B-) • 공원(D+)• 철도(B)• 도로(D)• 학교(D+)• 폐기물(C+)• 우수처리(D)• 수송(D-)• 폐수(D+)ASCE는 또한 각 주에 대한 개별 평가표를 작성했다.인프라에 관하여 생각할 때 줌 아웃/줌 인 접근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매크로 레벨 이슈를 볼 때 멀리서 바라보고 마이크로 레벨 이슈를 볼 때 더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본다. 어느 것에서 시작하든 다른 관점도 고려하도록 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전국의 많은 개척 교회들은 학교시설 등에서 예배를 드린다. 많은 교회 개척자들이 발견했듯이, 이러한 공공시설들은 종종 시설의 HVAC(공조시스템)이나 파이프 배관 등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로 정상적으로 시설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사용 시설에서 발견되는 그러한 문제들은 그에 대한 거시적 시각의 이해가 필요하며 이것이 그 교회의 교인뿐만 아니라 그 지역 학군에 속해 있는 학생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고려하여야 한다. 또한, 사회기반시설의 문제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사역자들이 교회 개척을 더 잘 준비하도록 도울 수 있다.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사회로부터 교회 개척을 원한다면, 우리는 대중교통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 지역인지, 악천후에 운전할 수 없는 외곽의 비포장도로가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교통 기반 시설에서 어떤 종류의 문제에 직면할 수 있는지 고려해 보아야 한다.물론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기반시설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어떤 사회기반시설이 우리의 교인과 지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일반적인 이해는 하고 있어야 한다.기타 세부 사항• 연방 고속도로 관리국에 따르면, 미국에는 412만 마일의 도로가 있다. 국내 고속도로 시스템의 핵심은 각 주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로 전체 도로의 1퍼센트가 조금 넘는 47,575마일이지만, 이 고속도로는 전체 고속도로 교통량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주(州)간 고속도로와 179,650마일의 다른 주요 도로들은 미국 고속도로의 화물 및 교통의 대부분을 운반하는 내셔널 하이웨이 시스템을 구성한다.• 미국 도로의 대부분 중 294만 마일은 시골에 있고, 나머지 118만 마일은 도시 지역에 있다. 407만 마일의 도로 중 약 268만 마일은 포장도로이며, 여기에는 도시 지역 대부분의 도로가 포함된다. 하지만, 139만 마일 혹은 미국 전체 도로 마일의 3분의 1 이상이 여전히 비포장 자갈 도로이거나 흙길이다. 이것들은 주로 지방 도로이거나 시골 지역의 소규모 도로들이다.• 2000년과 2013년 사이에, 미국은 매년 평균 13,788마일의 새로운 도로를 건설했다.• 미국에는 614,387개의 교량이 있는데, 그중 거의 10개 중 4개는 수명이 50년 이상 된 것들이다. ASCE에 따르면, 2016년 전체 교량의 거의 10퍼센트가 구조적 결함이 있었고, 평균적으로 매일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는 교량을 통과하는 1억 8천 8백만건의 통행이 있었다.•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대부분의 자금은 사용자가 납부하는 기금의 출처인 연방 고속도로 신탁 기금이다. 이 기금의 주요 자금원은 연방 자동차 연료세이다. ASCE에 따르면 휘발유 1갤런당 18.4센트, 경유 24.4센트의 세금은 1993년 이후 인상된 적이 없으며 인플레이션에 의한 구매력 감소는 40퍼센트에 이른다.• 2014년 연방 정부는 고속도로 인프라(교량 포함)의 건설 비용으로 435억 달러를 지출했으며 주 및 지방 정부는 483억 달러를 지출했다. 주 및 지방 정부는 연방 정부 구역 이외 지역의 모든 고속도로와 도로의 운영 및 유지보수를 책임진다.원제: Economics for Church Leaders: The Importance of Unexciting Infrastructur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인프라
사회기반시설
공공정책
지역사회
험담하지 않고 조언을 구하려면
by Megan Fowler
2022-08-29
험담이 죄라는 것을 압니다. 그 죄에 빠지고 싶지도 않고, 또 다른 사람을 부추겨 그 죄를 짓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제삼자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한 상황이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생길 때가 있습니다. 가끔 직장 동료가 나를 이상하게 대하거나 불합리해 보이는 일을 요구할 때 그렇습니다. 그럴 때면 솔직히 내가 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제삼자에게 다른 생각을 들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그 동료를 험담하게 일이 될 것 같아 망설여집니다. 직장에서 생기는 대인 관계의 문제와 관련하여 제삼자에게 의견을 구할 때, 그게 험담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해마다 나는 남편이 인도하는 기독교 캠프에서 여름을 보낸다. 캠프에 동참은 하지만 직원이 아니기에 나는 팀 역학과 조직 리더십에 직접 관여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지난여름 어느 날, 식당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캠프 상담사 한 분이 흐느끼고 있었다. 큰 병에 걸렸거나 야영객이 저지른 못된 짓 때문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면서, 나는 원인을 파악하려고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 캠프 상담사는 자기에 대한 험담이 들불처럼 직원들 사이에 퍼졌다고 말했다. 그녀가 상처를 받은 건 자신에 관한 거짓말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동료들이 그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마구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먼저 나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그녀를 위로한 다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식으로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상담전문가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시종일관 내 속에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신경한 험담은 관계를 훼손하고 신뢰를 무너뜨린다. 또한 복음 사역에 써야 할 시간과 자원을 허비한다. 그러나 내가 여름 캠프에서 목격한 그런 상황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고민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앙 양심에 맞게 직장 생활을 하고 싶은 당신의 바람은 현명하고 칭찬할 만하며, 제삼자로부터 얻고자 하는 새로운 관점은 당신이 직장 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사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가진 질문은 여전히 합당하다. 내가 처한 상황과 직접 연관이 없는 제삼자와 누군가에 관해 또는 어떤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험담일까? 과연 이런 대화가 도움이 될 때가 있을까?명확히 하기 위해, 나는 당신이 상담하는 사람을 “조언자”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당신과 현재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 그러니까 당신이 정확하게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동료”라고 부르겠다. 신뢰할 수 있고 현명한 조언자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과거에도 같은 직장 동료와 긴장된 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웠고, 또 지금도 그 사람이 당신을 이상하게 대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모든 상황을 목격한 누군가에게 그 상황에 관한 의견을 구할 수 있다. 그건 행여 당신이 상황을 오도하는 건 아닌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음은 제삼자와 대화하기 전에 염두에 둘 몇 가지 사항이다. 기도로 시작하라.동료를 위해서 또 동료의 업무를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하라. 조언자가 성경과 일치하는 지혜를 줄 수 있도록 기도하라. 또한 당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라. 성령께서 당신의 심령을 살피시고 불순한 동기를 드러내시며, 동료를 불쌍히 여기고 바로잡기를 원하는 온유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지금 이 상황에 누구를 참여시킬지 결정하라. 제삼자의 의견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경우, 적절한 사람을 참여시켜야 한다. 직원이 다른 직원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과 관련한 회사 정책이 있는가?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인사팀에 있는가? 상관 또는 동료를 아는 객관적인 제삼자를 찾는 게 좋을까? 동료와의 관계가 이전에 있었던 갈등으로 인해 여전히 긴장으로 팽팽하다면, 두 사람 사이에 그간에 있었던 일을 잘 아는 사람과 상황을 논의하는 게 도움이 된다. 무슨 말을 할지 결정하라.동료가 당신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평가해 달라고 조언자에게 요청하지 말고, 동료와 더불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대화의 틀을 짜라. 그러니까 “동료와 관계를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자세로 대화에 접근하는 게 “지금 내가 부당하게 당하고 있는 거 맞지요?”보다는 더 생산적일 것이다. 동료의 평판을 지키려고 노력하라.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동료의 명예와 평판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라. 조언자 한 사람을 선택하고 동료의 행동을 공정하게 설명하라. (“그녀가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성질을 냈어요.” 이러는 대신에 이렇게 말하라. “우리 사이에 지난달에 의견 불일치가 있었어요.”) 나중에 당신이 나눈 대화를 그 동료가 다 알게 되더라도 당당할 수 있도록, 당신의 신앙 양심에 비추어 하나도 부끄럽지 않도록 말해야 한다. 위험 요소를 명심하라.이 계획에는 위험이 따른다. ‘기도요청’이라는 가면으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교인이 있는 것처럼, 직장에서도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하는 사람에 겨냥한 불평에 몰두하는 동료가 있을 수 있다. 제삼자의 의견을 들으려는 것이 실상은 험담이 아니지만, 조언자와 상황을 논의하는 것이 동료에 대한 험담으로 변질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조언자가 대화의 비밀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동료를 희생시키면서 조언자와 친밀감을 형성하려는 충동을 억제하라. 공동의 적을 만들어 조언자와 “연합”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지만, 이러한 삼각관계는 건강한 직장 환경을 조성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언자의 관점을 들은 후에 동료에게 돌아가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건 어떨까? 어떤 면에서 당신에게 실망했는지 물어보라. 그리고 당신이 업무에서 개선해야 할 면이 무엇인지 물어보라. 성경은 입에 재갈을 물리라고(약 3장), 험담은 위험한 것이라고(잠 11:13; 26:20), 그리고 너무 많은 수다는 어리석은 일이라고(잠 10:19; 20:19) 종종 경고한다. 험담을 피하려는 자세는 지혜로운 판단이다. 특히 가벼운 대화인 척하면서 무책임한 말을 주고받는 대화가 불화를 일으키고, 해로운 문화를 조성하며, 더 나아가 관계까지 해칠 수 있는 직장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마음 상한 캠프 상담사와의 경험을 통해서 나는 부주의한 말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는지 똑똑히 보았다.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관점을 구하는 동시에 동료의 평판과 명예를 보호하도록 주의하라. 직장에서도 오로지 주님을 최우선으로 섬길 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원제: How Can I Ask for a Second Opinion without Gossip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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