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오래된 지구_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by Wayne Grudem
2022-08-15
요약: 창세기가 지구의 나이를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므로, 젊은 지구 또는 오래된 지구 관점 중 무엇이 맞든지 창세기는 진리이다. 그러나 천문학과 다양한 지구 과학의 증거에 따르면 우주와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 년이다.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입장이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오래전에 창조되었다(an old creation)라는 관점에 맞게 창세기 1장을 해석해야 한다.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우리는 웨인 그루뎀 교수와 제이슨 드루치 교수에게 각자의 오래된 지구와 젊은 지구 관점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 다음 서로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_제이슨 드루치 · 오래된 지구_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_웨인 그루뎀 ·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웨인 그루뎀 · 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제이슨 드루치 나는 하나님이 지구의 나이를 알려주려고 성경을 쓰셨다고 믿지 않는다. 이어지는 자료를 통해서, 나는 성경에 관해서 내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한 요인을 설명하고 지구의 나이에 대한 몇 가지 과학적 징후를 요약하겠다.[1]날 또는 하루라는 단어의 뜻창세기 1장에 사용된 날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욤(yom)에서 번역되었는데, 이는 종종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하지만, 또 어떤 문맥에서는 분명하게 길이가 지정되지 않은 기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바로 그렇게 쓰인 욤의 사용을 우리는 천지창조가 시작하고 바로 이어지는 창세기 2:4의 문맥에서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기서 날은 24시간 하루가 아니라 엿새 동안 있었던 창조 작업 전체를 의미한다. 일정 기간을 의미하는 날이라는 단어의 다른 예로는 시편 20:1(“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잠언 24:10(“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잠언 25:13(“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전도서 7:14(“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등이 있다.창세기 1장에서 날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경우에도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단순히 낮 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창 1:5).과학에 비춰본 창세기 1장무엇보다 창세기 1장의 문맥을 보면 본문은 결코 날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딱 한 가지로 고정하지 않는다. 다양한 학문에서 도출되고 또 유사한 답변을 제공하는 과학적 데이터가 지구 나이가 수십억 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면, 오랜 기간이라는 의미로 날이라는 이 단어를 해석하는 것은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문맥 안에서 볼 때 가장 좋은 해석일 수 있다. 오래된 지구라는 생각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실은 지구가 자전하고 태양 주위를 돈다고 처음 주장했던 그리스도인이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 그들에게는 해가 뜨거나 진다는, 전도서 1:5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시 104:22; 약 1:11 및 기타 구절을 참조하라). 그렇다고 그들이 그 구절 때문에 행여 독자들이 오해할까 봐 태양 중심의 태양계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구절에 대한 가장 자연스럽고 쉬운 해석이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단지 태양이 움직인다고 표현한 전도서의 구절은 관찰자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라고 이해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과학적 관찰을 근거로 할 때, 태양 중심의 태양계가 해당 텍스트를 해석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반대에 대답하기창세기 1장의 각 날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와 같은 표현으로 끝난다. 그럼 이런 표현 때문에 꼭 각각의 날이 24시간으로 되어 있었다는 결론내려야 할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이 구절은 단지 첫 번째 창조의 “날”(즉, 아주 오랜 기간)이 끝나고 다음 창조의 “날”이 시작했음을 알리는 저자의 말투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가로, 예민한 독자라면 처음 세 번 창조의 “날”에는 땅에 비치는 빛이 없기 때문에 아예 저녁과 아침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왜냐하면 태양은 넷째 날까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창 1:14-19). 그러므로 창세기 1장 속 “저녁과 아침”이라는 언급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저녁과 아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요일의 하루하루가 일일히 매겨지는 게 정말 중요할까? 젊은 지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히브리어 욤이 다른 곳에서는 더 긴 기간을 가리킬 수 있겠지만, 최소한 창세기 1장에서만큼은 하루, 이틀이라는 숫자가 붙어 있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한다. 욤에 숫자가 붙는 경우, 그건 24시간, 하루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그건 마치 “하루 24시간”이라는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서 미리 필터를 붙이고 숫자가 붙은 히브리어 욤에게 그 의미를 강요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평범한 인간의 삶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날”은 긴 기간이 아니라 24시간이다. 단지 창조 이야기는 어쩌다 보니 날이라는 단어에 더 긴 기간이 적용된 유일한 맥락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의 날이 24시간이어야 한다고 보는 해석자들에게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 각각의 창조가 일어난 날은 24시간이고, 그 사이에 수백만 년이 있는 경우이다. 나는 이런 해석이 창세기 1장을 오래된 지구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또 하나의 가능한 방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족보 사이의 갭1650년대에 저명한 역사가이자 성서학자인 아일랜드 대주교 제임스 어셔(James Ussher)는 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오는 족보를 근거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 날짜가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창세기 5장과 11장에 있는 족보뿐 아니라 성경 외 모든 역사적 자료를 사용했다고 한다.그러나 하나님이 성경에 족보를 넣은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창조 시점이 언제인지 계산하도록 하기 위해서인지는 의문이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의도였다면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쓰도록 했을 것이다.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4년이 흘렀다”(또는 비슷한 시간). 그러나 창세기 5장이나 창세기 11장에 그런 요약문은 없다.반면에 창세기 5장과 11장 속 족보에는 공백이 담겼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요람이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마 1:8-9)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역대상 3:10-12을 보면(본문에는 웃시야 대신 다른 이름 아사랴를 사용했다), 마태는 요아스, 아마샤, 그리고 아사랴까지 세 세대를 생략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창세기 5장에서 “셋이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셋이 꼭 에노스를 아들로 낳았다는 게 아니라 한참 아래의 후손이 에노스였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창세기 5:6-8에 나오는 에노스는 사실 셋 이후 여러 세대 이후에 나온 사람일 수 있다. 그렇다면 족보가 드러내는 이 사람, 저 사람의 많은 연수는 인류의 나이를 알도록 하는 연대기 제공이 목적이 아니라, 많은 나이에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당시 사람의 건강과 장수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당시 사람은 백 살이 넘어서도 아이를 낳았고, 912세까지 살 수도 있었다.영원히 사는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 그런 하나님은 아마도 138억 년이라는 시간, 아주 먼 별들의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그 시간마저도 그리 길지 않은 적절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점차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했을 것이다. 우주의 나이와 크기에 대해서 점점 더 알아갈수록, 우리는 이 거대한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의 위대하심에 경탄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영원한 존재는 138억 년보다 훨씬 더 길고 위대하다.오래된 지구를 지지하는 과학적 증거천문학과 지구과학의 다양한 관측 (또는 과학적) 증거는 지구와 우주가 모두 극도로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우주는 138억 년, 지구는 45억 년).[2]우주의 팽창 비율천문학자들은 지구에서 다양한 별과 은하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별들이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속도까지도 측정한다. 이 두 값을 사용하여 시간을 역순으로 돌리는 게 가능하고, 자연스럽게 우주가 얼마나 오랜 기간 팽창해왔는지를 계산할 수 있다. 우주의 팽창을 측정하는 세 가지 방법을 요약한 휴 로스(Hugh Ross)는 이렇게 말했다. 우주의 평균 나이는 “137억 년에서 플러스마이너스 9,600만 년”이고, “세 가지 독립적인 방법이 보여주는 결과의 일관성은 매우 놀랍다.”[3]먼 과거로부터 도달하는 별빛 많은 별들이 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 수백만 또는 수십억 년이 걸린다. 이 사실은 빛의 속도에 대한 간략한 논의가 필요한 증거를 제공한다. 빛의 속도(진공 상태)는 초당 약 186,000마일이고 태양은 지구에서 약 92,960,000마일 떨어져 있다. 즉 태양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에는 8분 이상이 걸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일출이나 일몰은 바로 그 순간의 태양이 아니라 8분 전 태양이다. 이 원리는 다른 별의 빛에도 적용된다. 망원경으로 알파 센타우리 자리(태양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별)를 볼 때, 우리는 4.4광년 떨어진 별을 보는 것이다. 즉, 그 별에서 시작한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 4.4년이 걸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건 4.4년 전에 존재했던 알파 센타우리이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별 중 일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 무려 13,800,000,000년이 걸리기도 한다. 이런 사실은 우주가 아주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젊은 지구 지지자라면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고 첫날 밤에 바로 수천 개의 별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미 존재하는 광선으로 우주를 창조했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이다. 동물도 다 성장한 동물로 창조된 것처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도 갓난 아이가 아니라 “성인으로” 창조했다. 그러나 이런 제안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 별의 수명이 다해서 핵연료가 고갈될 때 형성되는 백색왜성이라는 게 있다.[4] “별이 모든 핵연료를 다 태워 백색왜성이 되는 데에는 최소한 수백만 년이 걸린다.”[5] 따라서 우주의 나이가 겨우 10,000년이고, 하나님이 광선으로 별을 창조했다면, 왜 수십억 년 전에 죽은 별에서 나오는 물질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만드었을까? 애초에 그렇게 오래된 별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천문학자들이 우주에서 관찰하는 다른 사건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초신성은 거대하고 극도로 밝은 폭발이며, 별이 거의 타버릴 때 발생하는 그 현상은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지속된다. 그러나 로스(Ross)에 따르면, 젊은 지구 옹호자는, “천문학자들이 163,000광년 떨어진 대마젤란운에서 발생했다는 말하는 초신성 폭발이 163,000년 전에 발생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사실, 젊은 지구의 견해에 따르면, 10,000년 전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우주에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천문학자들이 폭발한 후 빠르게 사라지는 초신성에 관해서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수십만 년 전에 초신성이 발생했다고 (잘못)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우주 공간에 배치된 착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말이 되는가? 거짓말은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6]일부 젊은 지구 옹호자 중에는 이렇게 대답하는 이도 있다. 빛의 속도가 바뀌었고, 아마도 수천 년 전에는 빛이 훨씬 더 빠르게 이동했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빛의 속도는 물리학에서 가장 보편적인 상수 중 하나이며, 빛의 속도가 크게 달랐을 수 있다고 추측하는 것(예를 들어, 백만 배 더 빨랐다고)이야말로 젊은 지구라는 관점 전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얼음층과학자들은 남극 중앙부와 그린란드 북부의 얼음층 깊숙이 구멍을 뚫었다. 그들은 “남극 대륙에서 3개의 얼음 코어가 … 각각 과거 800,000년, 720,000년 및 420,000년에 대한 연속적인 기록을 제공한다”라고 말한다.[7] 젊은 지구 옹호자는 일 년 내에 얼마든지 여러 층이 쌓일 수 있다고 대답하겠지만, 로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층(layers) 내에는 이미 알려진 화산 폭발의 먼지 흔적이 있다.” 그것은 서기 79년에 발생한 베수비오 화산 폭발을 비롯해서 472, 512, 968, 1037, 1139, 1631, 그리고 1944년의 분화를 포함한다. “연구원들은 이러한 분출 사건의 먼지 흔적을 포함하고 있는 층 사이를 일일이 세어서 각 층이 실제로 일 년에 해당한다는 것을 확인했다.”[8]호수 바닥의 퇴적층지질학자인 그레그 데이비슨(Gregg Davidson)과 켄 월게무스(Ken Wolgemuth)는 “[일본의] 스이게츠 호수에서 미세하게 층을 이룬 퇴적물이 50,000년 이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매년 퇴적되었다”는 광범위한 연구 문서를 작성했다. 그들은 또한 이 퇴적층 중 가장 최근의 층은 14,000년 이상 된 나이테와 밀접하게 일치하며, 탄소-14 붕괴율 (퇴적층의 다양한 깊이에서 채취한 다양한 샘플로 측정함)은 “변하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되었다”라고 보고했다.[9]암석의 방사성 연대 측정화성암은 용암이나 마그마(지하에서 발견되는 매우 뜨거운 용융 물질)가 냉각되어 액체에서 고체로 변할 때 만들어진다. 화성암 중 일부는 암석이 응고되자마자 붕괴하기 시작하는 방사성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붕괴하면 다른 원소로 변한다. 예를 들어, 우라늄-238은 붕괴하어 납-206으로 변한다. 우라늄-235는 납-207이 되고, 토륨-232는 납-208이 된다.[10] 우리는 모든 유형의 방사성 물질에 대해 붕괴 속도를 측정할 수 있다. 그 정보를 가지고 지질학자는 암석에 포함된 다양한 종류의 우라늄과 토륨 동위원소의 양 및 각각의 종류에 포함된 납 동위원소의 양을 측정할 수 있고, 동시에 암석의 나이를 여섯 가지 독립적인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다.우라늄과 토륨 동위원소는 각각 다른 속도로 붕괴하기 때문에, 만약에 한 암석 표본에 세 가지 우라늄과 토륨 동위원소가 모두 있고, 또한 생성된 납의 세 가지 동위원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면, 각 종류의 우라늄, 토륨, 그리고 납의 비율은 암석의 나이에 대한 여섯 가지 독립적인 측정이 가능하도록 한다. 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특정 납에 대한 서로 다른 방사 측정 요소의 비율과 그것과 다른 납의 측정 비율은 일관되고 정확한 날짜를 제공한다. 모두 결과가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 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11]대륙 분리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해안 근처의 화석을 함유한 암석 지대는 분명히 이전에 이 두 지역이 붙어있다가 대륙 이동에 의해 점차적으로 멀어지면서 분리되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지구본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북아메리카 대륙과 남아메리카 대륙을 동쪽으로 이동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서쪽으로 움직여서 약간의 회전만 주면 양 대륙붕의 각이 서로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서양 아래에는 중부 대서양 능선이라고 하는 큰 산등성이가 있는데, 이 산등성이는 이 두 대륙 사이 중간 선의 곡선 패턴을 따른다. 이 모든 것이 판 구조론, 즉 대륙이 놓여 있는 판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과학적 연구의 증거이다. 대륙이 얼마나 오래 전에 분리되었는지를 결정하는 두 가지 별도의 방법이 있다. 대륙의 가장자리에 있는 대서양 지각에서 표본을 채취하면, “대서양 지각의 최대 연대는 약 1억 8,000만 년”임을 알 수 있다.[12] 이는 이 대륙이 약 1억 8,000만 년 전에 분리되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갈라졌음을 시사한다. 북미 해안선의 한 지점에서 아프리카 해안선의 해당 지점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면 거리는 3,480마일이다. 3,480마일을 180,000,000년으로 나누면 “연간 평균 1.2인치가 나온다.”[13] 여러 지점에서 반복되는 계산에 따라 수치는 연간 1.1인치에서 1.7인치로 아주 조금씩만 다르다. 그럼 이 대륙들이 지금도 같은 속도로 멀어지고 있을까? 장기간의 정밀 위성 관찰 결과, “북미와 북아프리카의 상대적 위치에 대한 측정은 현재 연간 약 1인치의 속도로 떨어지고 있고, 그것은 방사 측정으로 확인된 속도와 현저하게 일치하는 값이다.”[14] 이것은 대륙이180,000,000년 전에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지구의 나이가 만 년 미만이라면, 그건 불가능한 소리가 아닌가? 결론: 오래된 지구나는 젊은 지구 옹호자들이 내가 지금까지 제시한 증거에 대한 나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빛의 속도가 크게 달랐을 수도 있고, 호수의 퇴적물 퇴적 속도가 크게 다를 수도 있으며, 또한 지구의 지각판의 이동 속도가 크게 다를 수도 있다고. 더불어 아마도 암석에서 방사성 원소의 붕괴 속도도 현저하게 다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결국 이런 주장은 내 귀에 이렇게 들릴 뿐이다. “팩트가 다를 수만 있다면, 모든 팩트는 결국 내 입장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사실 모든 팩트가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단지 성경적 증거만을 근거로 하는 경우라면, 오래된 지구 또는 젊은 지구, 두 가지 중 어떤 것을 주장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 그러나 나는 성경이 우리에게 지구나 우주의 나이를 알려 주기 위해서 쓰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1. 오래된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을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다음을 참조하라. Systematic Theology, 2nd ed.(Grand Rapids: Zondervan, 2020), 385-413. 2. 내가 이 글에서 사용한 자료의 대부분과 관련 문서는 기독교 천문학자 휴 로스(Hugh Ross)가 쓴 ‘A Matter of Days: Resolving a Creation Controversy, 2nd ed’의 2015년 판(Covina, CA: RTB Press, 2015)에서 가져온 것이다. 로스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이들과 반복적이고 구체적으로 토론하고 있다. 3. Ross, A Matter of Days, 147, 150. 4. “White dwarfs are the final state of all stars possessing less than enough mass to become either black holes or neutron stars”(Ross, A Matter of Days, 156). 5. Ross, A Matter of Days, 156. 6. ‘창세기에 응답하기’(Answers in Genesis) 사역이 비록 젊은 지구를 지지하지만, 하나님이 별들과 지구를 포함해서 단지 제자리에 있는 광선을 바탕으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생각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 see Jason Lisle, “Does Distant Starlight Prove the Universe Is Old?” December 13, 2007, https://answersingenesis.org/astronomy/starlight/does-distant-starlight-prove-the-universe-is-old/. 7. Ross, A Matter of Days, 190. 8. Ross, A Matter of Days, 190. 9. Gregg Davidson and Ken Wolgemuth, “Testing and Verifying Old Age Evidence: Lake Suigtsu, Varves, Tree Rings, and Carbon-14,”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hristian Faith 70, no. 2(June 2018): 75-89. 10. Ross, A Matter of Days, 187. 11. Ross, A Matter of Days, 187. 12. Roger Wiens, “So Just How Old Is That Rock?” in The Grand Canyon: Monument to an Ancient Earth, ed. Carrol Hill, Gregg Davidson, Tim Helble, and Wayne Ranney(Grand Rapids: Kregel, 2016), 94. 13. Wiens, “So Just How Old,” 94. 14. Wiens, “So Just How Old,” 94. 원제: Our Old Earth: Arguments For Billions of Year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창조론
유신진화론
진화론
젊은지구론
오래된지구론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by Jason DeRouchie
2022-08-14
요약: 아무리 오래된 지구 견해가 기독교 정통의 범위 내에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수백만 또는 수십억 년이 아니라 수천 년 이내에, 그러니까 비교적 최근에 지구를 창조하셨다고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다. 창세기 1장은 문자적인 노동의 관점에서 창조를 묘사하고, 신약은 초기 인류 역사를 “태초”와 연관시키며,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에는 간격이 없으며, 인류는 성경에서 창조의 절정(the head of creation)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성경은 반복해서 동물의 죽음과 고통을 타락과 연결한다. 이러한 주장 중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모든 근거가 모여서 젊은 창조(young creation)라는 주장을 더 설득력 있도록 만드는 사례를 제공한다.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우리는 웨인 그루뎀 교수와 제이슨 드루치 교수에게 각자 오래된 지구와 젊은 지구 관점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 다음 서로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_제이슨 드루치 · 오래된 지구_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_웨인 그루뎀 ·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웨인 그루뎀 · 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제이슨 드루치 지구의 나이라는 논의에 걸린 문제는 다름 아니라 과연 우리가 과학적 데이터를 바르게(faithful)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faithful) 성경 본문 주석을 하고 있는가 여부이다. 태초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었고, 성경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기에 시간과 공간의 문제에 답하는 데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그 어떤 주제라도 관계없이 성경의 가르침은 창조된 영역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평가하는 지침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거기에 걸맞은 무게를 가져야만 한다. 분명히 하자.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첫 부모로서의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은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욱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진화론적 창조론(즉,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많은 것이 걸려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구의 나이가 반드시 그리스도인을 분열시킬 정도로 중심 교리는 아니다. 보수적 그리스도인은 (유아세례 문제 또는 다양한 천년설과 유사하게) 젊은 지구 창조론과 오래된 지구 창조론 모두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내가 젊은 지구 창조론자인 이유는 거기에 관한 압도적인 성경의 데이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을 반대하는 모두를 단숨에 굴복시키는 마법과 같은 성경적 또는 과학적 논증은 내게 없다. 따라서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는 내가 제시하는 각각의 주장에 대해서 얼마든지 정당하고 사려 깊은 답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제시하는 주장은 통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럼에도 과연 내가 지금 제시하는 주장 하나하나를 과연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지 나는 의문을 가진다. 첫째 주간의 인류논증 1: 창세기 1:1-2:3은 인류의 창조를 창조의 첫 주 안에 배치한다. 성경의 서문을 가장 자연스럽게 읽을 때 우리는 젊은 지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8, 13, 19, 23, 31)라는 후렴구에 쓰이는 히브리어 ‘욤’(날을 의미한다)의 사용, 빛과 어둠 및 낮과 밤에 대한 언급, 그리고 강력한 일주일이라는 구조는 비록 나흘째까지 태양이 창조되지 않았더라도(창 1:14-19), 일관되게 이 계시의 전달자가 하루를 달력상 24시간에 해당하는 날로 묘사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여기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첫 번째 주간의 엿새째 날에 창조된 것으로 묘사된다.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 하나님이 무에서부터 무한한 기간에 걸쳐서 연대기적으로 모든 물리적인 것을 창조했다는 주장)은 이런 문맥에 맞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갭 이론(gap theory, 창세기 1:1과 1:2 사이에 매우 긴 간격이 있다는 주장)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창조에 대한 이후의 묵상(예: 시편 104편)은 결코 “날”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여호와께서 창조 주간의 패턴(출 20:11) 위에 이스라엘의 6+1이라는 삶의 형태를 세웠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이미 오래전부터 창조 주간이 6+1의 패턴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출 16:23-29 참조; 창 7:4, 10; 8:10, 12과 비교하라), 결코 그것을 비유적이거나 유비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제 사건으로 보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라는 이스라엘의 부르심은 결코 유비적으로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원래 일하셨던 경험에 근거한다(출 20:10-11).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태초에논증 2: 신약은 창세기 2-4장의 역사를 세상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오래된 지구 모델은 인류의 창조가 수백만 년 또는 수십억 년 동안 진행되었기에 “태초”라는 특정 순간으로부터는 분리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창세기 1:1의 “태초”는 성경이 그 이후 묘사하는 모든 시간보다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펼쳐져 있을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전자는 창세기 1:1의 “태초”와 1:26-28의 인류의 창조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고, 후자는 “태초”라는 용어를 이상하게 사용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니까 이미 9이닝이 시작한 야구 경기를 보면서 여전히 경기가 막 “시작”했다고 말하는 꼴이 된다. 신약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결혼제도를 창조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결하시는 것을 본다(막 10:6; cf. 마 19:4, 8; 창 2:21-25 참조). 하와를 속이는 사탄의 살인에 가까운 행위(단지 사탄의 성향뿐만이 아니라)가 창조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예수님은 선언하셨다(요 8:44). 예수님은 사탄의 살인적이고 죄에 넘치는 행동을 여자의 후손이 뱀 그리고 그의 후손과 마찰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약속과 연결하셨다(요일 3:8; 참조, 창 3:1-6, 15). 또한 예수님은 인간이 겪은 첫 번째 환난이 창조의 시작 시점에 있는 것으로 보셨다(아마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언급하신 것 같다)(막 13:19; 마 24:21; 창 4:8 참조). 그게 다가 아니다. 예수님은 아벨의 순교를 세상이 만들어지던 시점 근처에 두셨다(눅 11:49-50; 참조 마 23:35; 창 4:8 참조).히브리서 기자는 또한 “세상의 기초”를 여섯째 날의 결론으로 간주하고, 인류의 반역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심)을 이 시기 바로 옆에 두었다. 그리고 이 기초를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실현된 “시대의 끝”과 대조했다(히 4:3-4; 9:25-26).직선 족보논증 3: 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오는 직선(linear) 족보는 최근의 인류를 가리킨다. 성경 속 족보 중 일부는 분명히 선택적이지만(예: 마 1:1; 1:2-17), 창세기 5장과 11장에 있는 족보는 너무 구체적이어서 선택적 읽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이 족보는 읽는 이로 하여금 인류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음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창세기 5장과 11장에 있는 직선 족보는 나이와 관련한 세부 사항 때문에 특히 성경 전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갖는다(예: 창 5:3-11 참조). 비록 “아들”이 때때로 손자나 증손자를 의미한다고 할지라도(그런 묘사는 종종 성경에 있다), 시대의 특수성은 긴 시간 차이 또는 간격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더욱이, 겉보기에 “아버지-아들/손자/증손자”로 보이는 많은 관계가 다른 본문에서 실제로 그런 관계임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아담과 셋(창 4:25), 노아와 함, 셈, 그리고 야벳(6: 10), 또한 아브라함과 데라(11:31)가 그렇다.이 족보에 특정한 시대가 담겨있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창세기가 가진 메시아적 그리고 선교학적 목적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담에서 노아까지, 셈에서 데라까지, 그리고 아브라함에서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에 걸쳐 소망의 가계를 보존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조금은 무리한 시도를 한 것 같다. 각각 지정된 연도는 모두 다 앞으로 오실 후손을 약속하는 창세기 3:15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런 분명한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생략하는 것은 명백하게 저자의 집필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다. 족보에 담긴 나이를 다 더하면 인류의 나이가 약 6,000세임을 알 수 있다.창조의 클라이맥스논증 4: 첫 창조의 머리로서 아담에게 주어진 큰 역할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자 창조의 클라이맥스로서 인류의 위치는 모두 다 젊은 지구를 지지한다. 하나님이 수백만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런 감독자 없이 피조물을 방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창세기 1:1에서 2:3까지는 첫 번째 모든 창조의 주요 “통치자”를 인류와 연관시킨다. 빛은 낮과 밤을 구분하고 지구의 달력을 설정하지만(창 1:14), 동시에 인간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징표”로도 사용된다(창 15:5, 렘 33:22). 인간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사명을 받았다.인간은 창조의 절정이고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이다.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은 존재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6). 유독 여섯째 날에만 정관사 “the”가 쓰였다. (“a first day, a second day, a third day … the sixth day”). 본문에서 여섯째 날에는 가장 문학적이고 긴 연설이 들어있다. 여섯째 날이 끝났을 때만 하나님은 창조를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여섯째 날에만 하나님은 창조물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선언하심과 동시에 인류에게 세상을 감독하게 하셨다. 성경은 첫 사람 아담을 첫 창조물에 대한 언약적 머리로 묘사한다(창 2:15; 롬 5:18-19; 고전 15:45).또한 동물에 대한 하나님의 감독, 공급, 그리고 보호(시 104:14, 21, 24, 27; 145:14-16; 147:9; 마 6:26; 눅 12:24)는 인류를 통해서 드러난다(창 1:28; 2:15; 시 8:6-8[7-9]).동물의 고통과 죽음논증 5: 성경은 일반적으로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고통과 죽음을 타락으로 인해 받은 저주의 일부로 묘사한다. 따라서 인류의 타락 전에도 이미 수백만 년 동안 동물이 죽고 고통을 겪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은 애초에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을 저주하셨다. 따라서 육지 동물과 새의 죽음과 고통은 인류의 타락으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오래된 지구 모델의 요구와는 달리 타락 전에 동물의 고통과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덴동산 인류의 반역이 가져다준 결과는 육체적이고 영적인 인간의 죽음이었다(창 2:17; 3:16-19; 롬 5:12). 그러나 동산에서 범한 인류의 죄는 인류뿐 아니라 피조물 전체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은 동물까지 저주하셨다(창 3:14). 하나님은 땅도 저주하셨다(창 3:17-19). 하나님은 온 세상을 썩어짐 속에서 종노릇하도록 두셨다(롬 8:20-21).성경은 줄곧 동물의 죽음을 저주와 그리고 동물의 생명을 축복과 연관시킨다. 이 두 가지 현실 다 동물과 새의 죽음과 고통이 타락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첫째, 뱀이 들에 있는 모든 가축과 짐승보다 “더 많이/이상”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모든 육지 동물이 실제로 인간의 타락에 의해 직접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창 3:14; 참조, 3:1).둘째, 땅의 저주(창 3:17)는 노아 탄생(5:29)의 배경을 형성하고 홍수라는 심판 저주는 홍수 후에 인간 외 육지 생물을 보존하기 위해 구별되어 방주에 들어간 동물을 제외하고(6:19-20; 7:3), 모든 짐승과 새와 기는 것의 죽음을 포함한다 (7:21-23).셋째,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 가운데 여덟 가지 재앙은 동물이 인간에게 해가 되거나 또는 가축의 몰살 등으로 인해 인간의 생존에 동물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출 8-12장).넷째, 유월절 어린양의 형벌하는 대속의 피만이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장자의 생명을 보존하였다(출 12:12-13).다섯째, 모세에 의한 (구약) 언약의 축복 아래, 인류는 짐승의 포식으로부터 안전하게 살 것이며(레 26:6), 가축 떼가 번성하고 또 번성할 것이다(신 7:13-14, 28:4, 11). 이와 대조적으로, 저주 아래서 인간은 포식 동물을 두려워하고(레 26:22), 가축 떼가 쇠약해질 것이며(신 28:18), 죽은 인육은 짐승과 새의 음식이 될 것이다(신 28:26). 이러한 현실은 모든 선지자에 의해서 확증되었다(예: 렘 7:20; 12:4, 학 1:9-11, 말 3:9-12; 4:6).여섯째, 심판의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이스라엘을 부른 여호와는 동물을 포함하여 호흡하는 모든 것을 도살하도록 하셨다(신 13:15; 20:16; 삼상 15:3).일곱째, 전도서의 설교자는 동물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과 연관시키고(전 3:19-20), 두 죽음의 현실을 타락으로 인한 저주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연결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창 3:19-20 참조). 이런 연결은 동물과 인간의 죽음이 동시에 시작되었음을 강력하게 가리킨다.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는 저주로 인해 동물 세계에서 실제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명확히 하려고 애를 쓴다. 왜냐하면 그들도 (수백만 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인간의 타락이 없었는데도 동물이 죽고 고통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저주한 그 순간을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지적하고 있고, 일반적으로 동물의 죽음을 저주와 연관시킨다. 육식과 저주의 목적논증 6: 에덴의 회복으로서 영원한 상태에서 동물의 죽음을 제한하는 것은 모든 지상의 죽음이 타락 이후에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육식은 저주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상징하기에, 영원한 상태에서 동물의 죽음을 단지 구속된 인류의 육식이라는 용도로만 제한하는 것은 에덴을 넘어서는 확대라기보다는 에덴의 회복을 보여줌과 동시에 지상에서의 모든 죽음이 다 타락 이후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지구는 젊다.성경은 모든 형태의 죄, 고통, 그리고 죽음을 오로지 타락하고만 명시적으로 연결한다(창 3:14-15; 롬 1:24, 26, 28; 8:18-23).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인간의 반역과 그 결과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 반역의 결과 속에는 암과 자동차 사고와 같은 자연적 악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도덕적 악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악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만물을 회복하고(행 3:21), 만물을 하나로 연합하고(엡 1:10),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골 1:17), 사망과 눈물과 고통을 없애며(사 25:8; 계 21:4), 나아가서 모든 저주와 부정한 것을 근절하기 위해서(계 21:27; 22:3) 계획되었다고 가르친다.영원한 구속의 실재는 (타락 전)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것으로 그리고 첫 아담이 확보하지 못한 것을 완성함으로써, 태초의 에덴 그 너머로 확대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새 창조/재창조는 타락 전의 원래 창조와 유사한 요소를 포함할 것이다(겔 36:35; 사 51:3; 롬 8:20-21; 계 2:7; 22:1-5, 14, 19). 그러나 동시에 새 창조 속에는 구원을 주신 왕 되신 예수를 향한 경외심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받은 자들에게 꼭 필요한 반역 이전의 사실 몇 가지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 외에는, 과거의 악이나 저주가 주는 잠재적 영향은 전혀 없을 것이다(계 21:27; 22:3).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것의 예로는 죄에 대한 탄식(겔 36:31), 한때 사해 주변 습지에 있던 소금의 존재(47:11; 참조 창 13:10; 19:24-26), 단일 언어가 아닌 변형된 여러 언어(습 3:9; 계 5:9; 7:9; 참조 창 11:6-9), 그리고 시각적으로 희생적이며 정복하는 어린양으로 그리스도를 식별하는 것(계 5:5-6, 12-13, 7:10, 14, 17:14, 19:9, 21:22-23, 22:1, 3) 등이다.이처럼 회복, 화해, 그리고 근절의 맥락에서 볼 때, 동물 사이에서 포식 활동이 중단되고 오로지 인간의 육식을 위해서만 동물의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타락한 시대에 동물의 포식 활동은 가축과(삼상 17:34-35; 사 31:4; 암 3:12) 인간을 위협하지 않는 한(시 104:23; 신 7:22; 삿 14:5; 왕하 17:25),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의 일부이다(시 104:21; 욥 38:39-41). 인류의 타락과 전 지구에 걸친 저주 이후에야 인간까지도 동물이 자행하는 약탈 행위의 표적이 되었고, 부분적으로 하나님은 동물이 인간을 두려워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람에게 육식을 허락하셨다(창 9:2-3; 참조 1:30).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육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주권을 행사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닮고 또 대표하라는 인류의 소명을 확인시킨다(1:26, 28; cf. 시 8:6-8[7-9]). 또한 저주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동산에서 인류를 추방한 초기부터 인간은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별했다(창 7:2-3, 8). 하나님은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한 이후, 오로지 정결한 동물만 먹도록 하셨다(레 20:25-26). 성경은 어떤 식으로든 동산의 뱀처럼 보이는 모든 동물을 부정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 이유는 교활하고 약탈적이며 살인적인 본능과(창 3:1-5, 2:17; 참조, 요 8:44, 10: 10), 또는 죽음 및 낭비와 연결된 먼지를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창 3:1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에(엡 2:16; 골 2:15; cf. 눅 10:18; 요 12:31; 계 12:9), 이제 모든 음식이 깨끗해졌다(막 7:19; 행 10:10-15, 28; 롬 14:14, 20; 딤전 4:4). 십자가로 인해서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저주를 이기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회복된 새 피조물과 새 언약은 짐승과 새와 기는 동물에까지 미침으로 전 세계가 안전해질 것이다(호 2:18; 사 35:9). 그리고 한때 포식자였던 동물(아마도 적대적인 국가의 상징)이 채식 동물이 되어 어린 양, 어린 왕과 함께 평화롭게 거주하므로 이제 그 어떤 피조물도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사 11:6-9; 65:25; 참조 9:6-7). 그 완성의 날에 하나님은 모든 원수의 압제를 엎으시고 모든 인간의 질병과 고통과 사망을 폐하시고 저주를 끝낼 것이다(사 25; 65:17-25; 계 21:3-5, 22:3).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은 포식 동물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동물이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그리스도가 타락으로 인해 잘못된 세상을 고친 새로운 세상의 일부이며, 타락 전 상태가 아니라 그보다 더 나아진 상태로 복귀하는가를 식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완전히 극복하셨다는 지속적인 증거로서, 인간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계속해서 동물을 먹을 것이다(예: 사 25:6, 8, 겔 47:9-10, 마 22:2-4; 눅 22:15-18, 29-30; 계 19:7, 9; 21:1, 4, 10; 참조 눅 24:41-43; 요 21:12-13).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후에야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했고, 그것은 저주를 이기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언한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부정한 뱀을 물리침으로 예수님은 승리의 절정에 이르렀다. 영원한 상태에서 동물의 죽음이 단지 구속된 인류의 육식이라는 용도로만 제한되는 것은 동물의 죽음이 타락 이전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모든 사실은 젊은 지구를 의미한다. 결론: 젊은 지구성경은 지구가 젊다는 믿음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음을 통해서 확인한다. (1) 성경이 창조를 문자 그대로 일하는 주간으로 묘사하는 방식, (2) 신약이 인류의 초기 역사를 태초와 연결하는 방식, (3) 창세기의 직선 족보에 시간적 갭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 (4) 성경이 일관되게 인류를 지상 피조물의 머리로 묘사하는 방식, (5) 성경이 지속적으로 동물의 죽음과 고통을 저주와 연관시키고, 타락 이전에는 그런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 그리고 (6) 영원한 상태에서 인간의 육식이 예수님의 저주 극복 사역을 증언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원제: Our Young Earth: Arguments for thousands of year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진화론
창조론
유신진화론
젊은지구론
오래된지구론
죽음을 더 많이 말하라
by 김형익
2022-08-13
“죽음과 세금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다. 무언가 확실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그것을 죽음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피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이기에,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관점과 태도로 살기 마련이다. 가령,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모든 사람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언젠가 찾아오고야 말 것이고 미래는 불확실하니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확실한 시간을 즐기자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런 쾌락주의적 태도는 죽음을 대하는 관점에서 파생한 인생관이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관점과 태도는 삶을 사는 태도와 인생관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죽음에 대한 관점이 인생관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를 점검해야 하는 게 아닐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의미를 바꾸어 주셨다. 주님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에 일평생 매여 살아가야 하는 우리를 그 죽음의 종노릇에서 해방해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죽으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여 주셨다(히 2:14-15).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게 죽음은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막연히 피하고 외면해야만 할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싶은 열망 때문에 죽음을 바라고 사모하는 자리에 이르기도 한다(빌 1:23). 하지만 바울의 이 고백은 모든 신자는 마땅히 바울처럼 죽음을 바라고 사모해야만 한다는 주님의 명령은 아니다.사람이 삶에 대해서 가지는 애착과 미련은 생각보다 강하고 질기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달가워하지 않는 심리적 요인은 죽음이 우리의 모든 애착 관계를 단숨에 끊어 놓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나를 완전히 끊어 놓는다. 죽음은 내가 이루고 싶은 삶의 소명을 여지없이 중단시켜 버리고 만다. 살아가면서 애착을 느끼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나를 단절시키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고 그것이 달갑지 않다.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이 꼭 세상에 대한 세속적 미련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모세는 므리바 사건에서 범한 잘못으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은 뒤에(민 20:1-13)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신 3:25). 모세는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자기의 죽음을 최소한 한 달만이라도 연장해 달라는 기도였다. 모세가 이렇게 기도한 것은 지난 40년 동안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을 밟아보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고,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거룩한 소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친구와 대면하듯 하나님과 친밀했던 이 사람 모세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6).지난 40년 동안 가나안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대한 모세의 애착은 점점 깊어져 왔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므리바에서의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모세에게서 가나안과 사명 모두를 거두어 가셨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 편에 서기가 쉽지 않다고 느낀다. “하나님, 참 너무 하신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께 대한 이런 불리한 일련의 사건들—두 번째 므리바 사건(민 20:1-13)과 소위 ‘모세의 기도 거절 사건’(신 3:23-27)—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것일까? 나는 이 본문들 속에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충격적으로 바꾸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가나안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고, 사명도 모세의 인생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지만 가나안 보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들여야 하는 그 거룩한 사명보다 더 나은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는 그 어떤 애착의 대상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어떤 소명이나 사명의 성취보다 더 나은 은혜가 있다. 인생이라는 한시적 렌즈는 그저 우리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만을 잡아내고 보여줄 뿐이다. 인생의 렌즈로 볼 수 있는 것은 인생이라는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한시적인 것뿐이다.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난다. 아쉽고 아깝고 서글프기만 하다.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것이 못내 아쉽고, 지금까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고 이제 한 달만 지나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거의 완수한 이 사명을 미완으로 남겨두고 죽는 것이 너무 아깝고 서글프기만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시적 시야에 제한된 인생의 렌즈가 아니라 영원에서 영원을 잡아내고 보여주는 신앙의 렌즈로 더 넓게 보라고 말씀하신다. 죽음 너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나은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 땅이라는 그림자 나라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셨다. 죽음이라는 더 나은 은혜를 통해서 말이다. 이것이 신앙의 렌즈로 잡아낸 그림이다.사람은 누구나 갈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갈망을 의미하는 독일어 제엔주흐트(sehnsucht)의 사전적 의미는 ‘그리움’, ‘갈망’, ‘동경’이지만, 좀 더 깊은 의미는 ‘이 세상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너머를 지향하는 갈망’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생 경험에서 생겨난 갈망이지만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이다. 모세의 갈망은 가나안이었고 사명의 완수였지만, 하나님은 그 갈망은 그런 것으로 완전하게 채워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 갈망은 저세상의 것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그리고 그의 기도를 거절하심으로써, 모세에게 가나안보다 그리고 그의 사명 완수보다 더 나은 것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죽음을 선언하심으로써, 가나안에 대한 애착이나 그가 가진 어떤 소명보다 더 나은 은혜를 주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초기 교회 성도들이 죽음을 어떻게 대하였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165년, 가공할 역병이 제국 전역을 강타했다. 의학 사가들이 서구 최초의 천연두 출현이라고 추정하는 사건이었는데, 이 역병이 돌던 15년 동안 제국의 인구 1/4 내지는 1/3이 역병으로 사망을 했다. 당대 최고의 의사로 추앙받던 갈렌은 역병을 피하여 멀리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였는데, 거기서 이런 말을 남겼다.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멸시하는 게 날마다 우리 눈에 확연히 보인다.” 그는 무엇을 보았기에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일까? 그는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전염력이 가장 강했던 도시들에 그대로 남아서 병들고 죽어가는 이웃을 돌보는 일을 감당했던 것을 보았다. 의사 갈렌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은 말 그대로 죽음을 멸시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말이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았지만, 조금도 구차하지 않았다(히 11:35). 그들은 위풍당당하게 왕의 대로를 걷는 왕의 자녀들이었다.이후 1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251년, 로마 제국이 다시 동일한 파괴력을 지닌 역병의 공격을 받았을 때,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힘겨운 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훈련이 죽음을 멸시함으로써 면류관을 예비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영광이 됩니다. …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서 먼저 놓임을 받은 우리의 형제들은 애곡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먼저 부름을 받은, 우리보다 앞장서 길을 떠난 자들입니다. 여행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들은 그리움의 대상이지 애도의 대상은 아닙니다.” 당시 신자들도 역병으로 많이 죽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슬퍼했지만, 그것은 절망의 애도가 아닌 그리움의 애도였다. 그들은 먼저 부름받아 자신들보다 앞장서 길을 떠난 형제자매들을 다시 보게 될 날을 그리워하며 슬퍼했을 뿐이다. 이것도 역시 갈렌이 주목하였던 바, 죽음을 멸시하는 신자들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죽음에 대한 초기 교회 성도들의 관점은 그들의 삶을 더 용감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도록 해주었다. 왕의 대로를 걷는 왕의 자녀들처럼 말이다.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떻게 살 것인지, 삶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형성한다. 그래서 죽음을 더 많이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는 죽음을 고려하거나 언급하기를 회피하면서, 죽음 이전의 인생사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땅에서의 애착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죽음을 환영할 수 없는 불청객이나 방해꾼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죽음은 우리가 인생에서 애착을 가지는 모든 대상(이것도 물론 하나님의 은혜다)과 비교할 수 없는 더 나은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더 많이 말할 필요가 있다.이 글과 함께 읽으면 좋은 글: 목회는 죽음을 준바시키는 일이다
죽음
메멘토모리
므리바사건
카르페디엠
그런데도 여전히 순종한다
하나님은 골짜기에 빠진 우리를 어떻게 만나주시는가?
by Joe Rigney
2022-08-12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웜우드, 속지 말거라. 인간이 원수의 뜻을 따르고 싶은 갈망을 잃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원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왜 그가 자기를 버렸는지 계속 의문이 생기는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그때보다 더 우리의 대의가 위협받을 때는 없다.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인 조카 웜우드에게 보내는 여덟 번째 편지 끝에 있는 이 짧은 문장이, 내게는 인생을 바꾸는 문장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믿음을 굳건히 지켜주는 문장이라고는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내가 얼마나 자주 이 문장을 되새기고 있는지 최근에 알아차리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 문장을 내가 쓴 나니아에 관한 책에서 두 번 인용했다. 또 C. S. 루이스에 대해 강연할 때마다 인용했다. 그중에는 전혀 계획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학생이나 교인과 상담할 때도 이 문장이 내 혀에서 맴돈다. 가장 중요한 건 심령이 건조해질 때면 이 문장을 사용해서 나 자신을 향해 설교한다는 사실이다. 기복의 법칙이 문장은 스크루테이프가 편지에서 웜우드에게 “기복의 법칙”(law of undulation)을 이야기하는 중에 나온다. 기복(undulation, 起伏)은 “파도 같은 리듬”을 표현하는 멋진 단어이다. 기복의 법칙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간 삶의 영구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스크루테이프는 인간을 양서류라면서 조롱하는데, 한 발은 (천사처럼) 영원한 세계에, 한 발은 (동물처럼) 물질의 세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존재로서 우리는 영원한 세계에 속하지만, 동물로서 우리는 유한한 시간 안에 살고 있다.영혼은 영원한 대상을 향할 수 있지만, 우리의 몸과 열정과 상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 결과가 바로 기복이다. “골짜기로 떨어졌다 꼭대기로 올라갔다 하며 끊임없이 후퇴했다 복귀”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한때 풍요로운 감정과 활력에 넘치는 육체를 경험하는 시기를 맞는다고 해도 다시 건조함과 둔감함, 무감각과 빈곤의 시기를 만나기 마련인 것이다. 꼭대기와 골짜기스크루테이프는 하나님이 인간을 기복의 법칙에 복종시킨 이유를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우주를 자신을 닮은 작은 복제품으로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가 그분의 뜻에 자유로이 순응함에 따라, 당신의 형상을 지닌 우리 피조물의 삶이 하나님 속에 피조물로서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와 연합하는 동시에 그분과 구별되기를 원하신다. 골짜기, 특히 영적 골짜기는 바로 이런 더 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하다. 때때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하나님은 강하게 임재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우리가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참으로 지혜롭게도 우리가 유혹을 더 쉽게 이길 수 있도록 능력을 주는 감정적인 감미로움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럴 때면 순종은 마치 살아 있는 샘에서 솟아오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기도는 호흡처럼 자연스러워진다. 우리 삶에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임재는 가장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다. 이때가 바로 그리스도인 삶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이다. 그러나 그다음에 계곡 또는 골짜기가 따라온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거두어버리신다.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 경험, 또는 우리가 느끼는 현실로부터 하나님이 스스로를 감춘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분은 순종을 매우 자연스럽고 힘들지 않게 만드는 정서적 지원과 영적 동기를 제거한다. 그런 시점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임재가 제공하는 감정적 풍요와 즐거움 없이도 의무를 수행하라고 하신다. (물론 그렇다고 그분이 항상 주시는 은혜까지 거두신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더 온전하게 부합하는 피조물로 성장하게 된다. 갈망 대 의도이런 현실이 우리를 믿음을 지키도록 하는 바로 이 문장으로 이끌고 간다. “인간이 원수의 뜻을 따르고 싶은 갈망을 잃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원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왜 그가 자기를 버렸는지 계속 의문이 생기는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그때보다 더 우리의 대의가 위협받을 때는 없다.” (김선형 옮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77)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문장을 부분으로 나눠보자. 루이스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 하는 갈망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를 구분한다. 이 구별은 기복의 법칙에 의해 만들어진다. 골짜기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감미로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무겁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이 시기에 우리는 자신과 분리된 느낌을 받는다. 아예 갈망을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오로지 우리 몸과 밀접하게 연결된 현실에 대해서 거의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반응이라는 열정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차원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느낄 수 없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느끼지 못한다. 도무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기에, 우리의 열정은 (즉,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예 자극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과 의지라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바로 의도가 작동하는 단계이다. 이 수준은 열정의 수준보다 높거나 더 깊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깊고도 근본적인 헌신이 있다. 심지어 어떤 상황을 만나도 그 뜻을 따르겠다는 깊고 본질적이며 지속적인 열망이 깔려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뜻이 아니다”라는 건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잔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수준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 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여전히 당신의 뜻을 행할 생각이며, 이 의도는 내 마음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사라지지 않는 갈망을 반영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간격루이스는 말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Malcolm, Chiefly on Prayer)에서 기도에 관해 말하면서 이 구분을 다시 언급했다. 그는 기도가 성가시게 느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도는 분명 귀찮네. 기회만 생기면 얼씨구나 하고 기도를 빼먹게 되고…”(113). 기도에 대한 이런 의무감이 우리를 정말 거북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장미꽃을 피우기 싫어하는 장미나무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혹은, 그런 장미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장미나무는 장미꽃을 피우고 싶어 해야 마땅하지 않나?”(홍종락 옮김, 개인기도, 1667, 167쪽)우리가 완전해진다면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될 것이라고 루이스는 말한다. 우리가 의무로 분류하는 다른 모든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의무라는 범주는 자발적인 열망과 꼭 해야 할 의무 사이에서 생기는 간격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과 꼭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도덕적 노력이라는 전체 범주를 만든다. 그렇지만 루이스는 “언젠가 우리는 의무와 도덕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천사들은 당위라는 단어의 의미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단지 의무를 넘어서는 수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기도와 사랑이 “종달새의 노래처럼, 꽃의 향기처럼 자연스럽게”(169) 우리에게서 흘러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의무의 영역에서, 곧 시도 때도 없이 열망과 해야 할 일이 나눠지는 곳에서 살아야만 한다. 루이스는 우리를 격려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리가 드린 최악의 기도가 최선의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까 경건의 느낌이 조금도 없고 전혀 내키지 않는데도 억지로 드리는 기도 말일세. 거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이런 기도들이 감정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나오기 때문일세”(172). 그러나 여기에 굳이 덧붙이자면,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다시 스크루테이프로 돌아가서, 우리의 열망을 자주 질식시키는 것은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하나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흔적이 실제로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 것 같다”는 말이 중요하다. 그분의 모든 흔적은 사실상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실재는 창조주를 계속해서 증언하고 있다. 하늘이 지금도 영원히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시 19:1).그러나 골짜기에서 이런 실재를 인식하는 우리의 능력은 줄어든다. 실제로 느끼는 현실은 종종 현실 그 자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럴 때면 하나님이 마치 “사라진 것 같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매우 강력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힘, 그러니까 ‘그런 것 같은’ 때의 그 힘을 우리는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단지 주기적인 (심지어 영구적인) 겉모습이 우리 행동을 지배하는 독재자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루이스는 더 나은 방법을 소개한다. 골짜기 인정하기골짜기에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 정직하게 시작하라. 골짜기에 있음을 인정하라. 그 골짜기의 이름을 정하라. 하나님이 없는 것 같으면, 그렇다고 큰 소리로 말하라.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이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속 환자는 “왜 그가 버림받았는지를 묻는다.” 그는 마치 자신을 버린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향해, 관찰의 방향을 위로 바꾼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위대한 성경적 혈통을 따르고 있다.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시 88:14).(겉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부재에 직면하여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왜?”라고 간청한다. 그리고는 “얼마나 오래?” 또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외친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되풀이한다. 예수님은 시편 저자를 인용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시 22:1). 이것이 바로 골짜기에 빠졌을 때 바른 믿음의 모습이다. 절망과 혼란 속에서 터지는 외침은 하나님이 부재한 것 같이 느껴질 때 드러나는 믿음의 모습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메마른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야말로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풍부한 소통의 지원 없이, 신앙의 정점이 주는 정서적 감미로움이 없음에도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가장 깊고 끈질긴 갈망과 헌신을 담고 있는 영혼의 깊은 곳, 즉 마음의 중심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마지막 세 단어와 함께 이 문장이 주는 울림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런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열렬한 열망이 없고 하나님의 명백한 버림 앞에서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순종한다. 하나님의 부재는 결코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감정의 빈곤과 건조함과 둔감함이 결코 불순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실수하지 말라. 그것은 골짜기에 숨겨놓은 악마의 계략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게 하려고 악마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부재한 것 같다고 느끼는 우리의 경험을 악용한다. 그렇기에 모든 합리적인 지원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오로지 예수님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처럼 사탄의 대의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도 없고 또 하나님의 부재가 주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예수님을 붙들고 빛 가운데 행하려 한다면, 그런 상황에서 이 마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늘진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갈고 닦은 신실한 순종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하는 길이 된다. 루이스의 영웅 조지 맥도날드(George MacDonald)는 “순종은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인의 부재야말로 오히려 주인의 존재가 주는 기쁨으로 이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원제: Pray and Obey Anyway: How God Meets Us in the Valle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C.S.루이스
신앙의위기
순종
조지맥도날드
사탄의전략
스크루테이프의편지
개인기도
위무와순종
실낙원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Leland Ryken
2022-08-11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지난 반세기 동안 기독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가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알려주는 작은 지표로, 1941년 프린스턴 대학의 한 영어 교수는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에서 특별히 목사를 대상으로 한 책을 출판했다. 나는 교사와 작가로서 살았던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책을 참고했으며, 심지어는 ‘은총의 수단으로서의 시(Poetry as a Means of Grace)’라는 그 책의 제목을 필요한 경우에 변형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첫 장에서 저자는 목사 (암시적으로 모든 교회 지도자와 문학에 관심 있는 평신도를 위해) 정말로 적절한 조언을 하나 한다. 그리스도인도 한 사람의 저자를 확실하게 ‘우리의 저자’로 지정하고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특정 저자를 파고들 듯 전문가를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조언을 저자뿐 아니라 평생에 걸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하나의 걸작을 선택할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폭넓은 독서를 방해하는 건 아니다.)바로 이 조언을 염두에 두고 내가 평생 친구로 지낼 후보로 추천하는 책은 다름 아닌 실낙원(Paradise Lost)이다. 실낙원에 관한 논문을 썼고, 실낙원을 200번이나 가르쳤으며, 밀턴에 관한 기사와 책을 저술했고, 또한 밀턴 컨퍼런스(Milton conferences)에서 연설까지 한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밀턴의 이 걸작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은 사랑이기도 하다. 목사에서 시인으로실낙원은 17세기 중반 존 밀턴(John Milton)이 쓴 책이다. 어린 시절부터 밀턴은 여러 정황상 목사가 될 운명이었다. 목사의 길을 예상한 밀턴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남아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장애물이 그가 의도하던 성직자의 소명을 무산시켰다.신념에 따라 청교도가 된 밀턴은 영국국교회에서 목회 후보자로 환영받지 못했다. 밀턴 자신도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 쫓겨난 교회”에 관해 말한 적이 있는데, 다름 아니라 성공회를 지배하는 계층에 의해 교구 사역을 거부당했음을 의미한다. 밀턴 학자들은 밀턴이 정확하게 언제 목사를 포기했는지를 놓고 꽤 오랫동안 토론해 왔으며, 그에 관한 가장 좋은 결론은 그가 결코 목회적 소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밀라 라레스(Jameela Lares)가 ‘밀턴과 설교 예술(Milton and Preaching Arts)’에서 효과적으로 주장했듯, 그는 단지 강대상에서 시로 장소를 변경했을 뿐이었다. 이 부분에 관한 한 산문에서 밀턴은 그리스도인 시인의 소명을 “강대상 직분 바로 옆에” 두었다.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까지는 강대상에서도 열매를 맺었다. 밀턴에 대한 많은 논평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장로교회에 가입한 어떤 사람의 간증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나는 존 밀턴에 의해 주님께 인도되었습니다”라는 말로 간증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람의 회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도구가 바로 실락원이었다. 진짜 삶보다 더 차원 높은실낙원의 내용을 논의하기 전에 나는 C. S. 루이스가 그의 획기적인 책 실낙원 서문(A Preface to Paradise Lost)을 시작한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할 필요성을 느낀다. 필요한 출발점은 시가 속한 장르 파악이다. 그리고 그 장르는 서사시이다. 서사시는 고대부터 17세기까지 가장 중요한 문학 장르로 여겨졌다. 당당하게 책의 위상을 가진 긴 시로서 서사시는 하나의 장엄한 활동이다. 서사시의 목적은 범위에 있었다. 문학 이론가 노스롭 프라이(Northop Frye)가 말한 대로, 서사시는 “만물의 이야기”였다(The Return of Eden, 3). 이와 유사하게, C. S. 루이스는 서사시는 한 시대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바를 요약한다고 주장했다(English Literature in the Sixteenth Century(Excluding Drama), 339).서사시는 하나의 이야기(사실상 그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를 말하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현대 독자가 익숙한 방식과 크게 다르다. 긴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서사시를 계승한 것은 소설이고, 소설을 특별히 새롭게 만든 점은 사실주의였다. 소설은 우리에게 일상에서 만나는 삶의 조각을 제공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서사시는 초자연적인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이야기하는 신화이다. 따라서 서사시를 읽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그것이 사실주의에 기반한 게 아니라 신화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서사시 때문에 놀라는 또 다른 이유는 시라는 사실 때문이다. 보통 긴 허구의 이야기라면 산문으로 쓴다. 그러나 문학사의 측면에서 볼 때, 이는 18세기 중반에 들어서 책을 읽는 주된 대중으로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생긴 최근의 변화이다. 서사시는 시와 이야기의 혼합체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두 가지 측면에 다 동등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밀턴의 신학 이야기서사적 범위를 유지하면서 밀턴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범위는 영원한 과거에서 영원한 미래까지의 전체 역사이다. 첫 번째 주요 사건은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 그리고 사탄과 그 추종자들의 추방이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아담과 하와의 낙원 생활, 순결에서 타락, 타락한 인류 역사에 대한 조사, 타락이 초래한 파멸을 역전시키는 수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그리고 종말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매우 친숙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이게 다 성경이 말하는 우주 역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실낙원을 처음 가르쳤을 때, 한 학생이 나에게 청교도인 토마스 보스턴(Thomas Boston)이 쓴 ‘사중 상태의 인간 본성’(Human Nature in Its Fourfold State)이라는 책을 건넸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보스턴의 책이 가진 연관성을 내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다. 인간 본성의 완전성과 타락,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하늘에서의 영광에 대하여 보스턴이 그리는 패러다임은 밀턴의 이야기를 구체화한다. 실락원이 “교리적이고 국가에 모범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 밀턴의 말은 유명하다. 실낙원을 읽을 때 우리는 즐거움뿐 아니라 교화를 받는다. 밀턴의 상상력으로 풀어낸 큰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중심성과 주권, 우주와 인간의 영역 모두에서 발생하는 선과 악 사이의 큰 갈등,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피조물의 운명, 인간이 하나님과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들, 죄의 본질상 불순종의 본성을 가진 인간이 삶의 가장 큰 의무로서 수행해야 할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 그리고 죄에 찌들어 타락한 상태에 빠진 인간에 대한 해독제로서 그리스도의 속죄. 이것들은 큰 주제이지만,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의 삶을 묘사한 것처럼, 선한 삶의 본질과 같은 소소한 주제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와서 보라실낙원을 깊이 탐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조언이 있다. 실낙원은 문학 이론가들이 소위 백과사전 형식(상부 구조 내 개별 단위를 모아놓은 형태)이라고 부르는 것이므로 꼭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읽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실낙원이 암시하는 풍부한 성경과 고전 신화의 내용 때문에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그것들은 사실상 실락원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굳이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나의 의도는 실락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독자들이 실낙원과 깊은 만남을 갖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점은 실낙원은 아름다움과 공포가 공존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밀턴의 서사시는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많은 신학적 아이디어를 다룬다. 그러나 문학적 동기는 말하기보다 보여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추상적으로 논의하기보다는 구체화하고 구현하려고 한다. 신학자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미지를 만들고 또 이미지를 사용하는 피조물이다. … 그리고 우리는 마음속 이미지에 의해 인도되고 만들어진다”(The Responsible Self, 151).우리가 실낙원을 읽는 방법은 아이디어 모음집이 아니라 등장인물과 배경과 사건이 있는 이야기로, 또 보고 즐길 수 있는 이미지와 상징과 은유로 구성된 시로 읽는 것이다. 밀턴은 그가 쓴 20권이 넘는 주석(조직 신학 포함)을 읽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그의 이 서사시를 읽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문학 작품에는 “부가 가치”로 따라오는 미적 요소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실락원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저명한 문학 이론가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가 받은 느낌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영국 문학의 주요 운동과 작가(셰익스피어 포함)에 관해 약 50권의 책을 쓴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최고의 찬사를 보낸 책은 다름 아닌 실낙원이다. 그는 실락원을 “영국 시가 이룬 가장 완벽한 성취,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도 가장 복잡하며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극찬했다(Romantic Image, 196). 원제: Paradise Lost: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존밀턴
실락원
C.S.루이스
서사시
왜 가난하면 더 비싸게 살아야 하는가?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by Joe Carter
2022-08-10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교회 지도자들이 “그 성읍의 평안”(렘 29:7)을 제대로 구하려면 경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경제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시리즈는 경제 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리즈의 취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경제와 공공 정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비평가들에게서 굉장한 호평을 받은 영화 ‘양 도살자’(Killer of Sheep, 1978)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왜 더 비싸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이 영화는 1970년대 로스앤젤레스 와츠 구역에 사는 흑인 가족 이야기이다. 그들은 고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어느 주말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그런데 와츠 구역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차가 말썽이다. 타이어가 펑크가 나버린 것이다. 예비 타이어도 없다. 어쩔 수 없이 펑크 난 차를 끌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바람에 바퀴 프레임까지 망가져 버린다. 사실 여기에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장면을 보면서 가난을 아는 사람들은 앞으로 이 가정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예비 타이어를 장만할 돈도 없는 이 가정이 어떻게 바퀴 프레임이 망가진 차량을 고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이 가정은 망가진 차량을 방치하거나 폐차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이 가정에 더는 차량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들의 삶은 더욱 고단해질 것이다.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가장 큰 비극은 그들에게는 세상에 있는 것들 대부분이 사치품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사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차량을 고칠 수 있을 것이고, 이렇게 문제가 커지기 전에 이미 수리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작은 자동차를 수리하는 것마저도 너무 비싼 일이다. 그리고 차량을 수리하지 못한 결과는 재앙에 가깝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차량 수리를 하지 못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에게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소비 평탄화소비 평탄화에 관하여 먼저 쓴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중하층부터 1퍼센트 최상층까지의 미국인은 대부분 소비의 균형을 가지고 있다. 소비 평탄화란 삶의 수준을 항상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하여 일정 기간 소비와 저축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첫 직업부터 은퇴까지 이런 방식의 경제생활을 유지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소비의 균형을 유지하기 어렵다. 전 생애를 아우르는 경제계획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그들에게는 사치다. 당장 이번 주를 버티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러한 경제적인 위기를 일 년에 여러 번 겪기도 한다. 그렇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소득, 소비, 저축을 보통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이것이 경제적인 계층별로 사람들의 삶에 차이가 벌어지는 이유이다. 일반적인 중산층 가정의 지출을 생각해보면 음식이나 필수적인 공과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출이 소비의 균형과 연결이 되어 있다. 주택 대출, 차량 대출, 학자금 대출 상환, 신용카드 청구, 보험(차량, 건강), 저축, 연금보험, 교육비 등이 바로 소비의 균형을 위한 것이다. 이처럼 중산층 가구의 소득은 대부분 과거에 소비한 것을 갚거나 미래에 소비할 것에 대비하여 저축하는 용도로 지출이 이루어진다. 중산층 가정은 소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삶을 더 수월하게, 덜 위험하게,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노동자들은 소비의 균형을 유지하기 어렵기에 삶이 더욱 어려워진다. 사실 다음에 제시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네 가지 경제적인 문제들은 모두 소비의 균형과 연결되어 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겪는 네 가지 경제적인 문제첫 번째이자 가장 분명한 경제적인 문제는 지금 당장 생계를 감당할 만한 소득이 없다는 것이다(유형 1). 두 번째 문제가 더 심각할 수 있는데, 앞으로도 이들의 소득이 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신용거래를 할 수도 없다(유형 2). 세 번째 문제는 중산층, 고소득층은 장기간의 미래를 내다보며 경제계획을 세울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며 경제를 계획할 수 없다(유형 3). 네 번째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가난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더 비싼 비용이 든다는 사실이다(유형 4).이 네 가지 요소가 가난한 노동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예를 들어보겠다. 톰은 시골에서 2008년식 닷지 네온 자동차로 출퇴근하면서 최저시급을 받는 가난한 노동자이다. 많이 노후한 그의 차는 엔진에도 고칠 데가 한두 곳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톰에게는 차량을 수리할 비용이 없다(유형 1).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량이 고장이 났고, 수리비가 500달러나 나왔다(그의 월급의 40퍼센트다). 게다가 그는 낮은 임금과 체납 이력 때문에, 신용등급이 낮고 그래서 당연히 통상적인 금리로 금융기관의 도움을 받기도 어렵다(유형 2).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톰은 대부업체에 손을 벌려야 한다. 두 주간 100달러를 빌리는데 이자 비용만 15-30달러가 드는 데다. 톰이 이자 비용으로 30달러를 지출해야 한다면, 2주 후에 갚아야 할 비용은 650달러다. 연이율로 계산하면 782.14퍼센트에 해당한다(유형 4). 톰은 지금 당장 500달러도 감당할 수 없으니, 당연히 2주 후에 돌아올 650달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유형 2, 유형 3). 대부업체의 이자를 감당할 수 없다면, 톰은 차를 고치지 못할 것이다. 차를 수리하지 못하면,직장에 가지 못한다. 직장에 가지 못하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고,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톰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톰이 왜 그런 상황에 놓였는지 질문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그의 잘못들을 책망할 수도 있다. 학교 다닐 때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더 나은 직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기세를 연체하지 않았더라면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러한 개인적인 잘못들과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들이 결합하여 그에게 이러한 경제적인 위기가 찾아왔을 것이다.그러나 톰을 비난하기 전에 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 우리가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우선,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우리 사회 안에서 한 사람이 경제적인 문제에 봉착했을 때 이를 해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렵다.교회가 도울 수 있는 방법사람들은 가난에 대하여 논하면서 너무 거시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실업률이나 복지 정책 같은 거대 담론도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의 삶의 측면에서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비싼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더욱 고민하고 노력한다면, 그리스도인이 개인으로나 교회로서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방법은 많다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생각해보자면, 그들을 위하여 긴급 지원 대출 기금을 만들 수도 있다. 형편이 넉넉한 성도가 사랑의 마음으로 출자하여 지금 당장 어려움 가운데 있는 다른 성도들을 도울 수 있는 대출 기금을 만들 수 있다. 그러한 자금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순환이 되고, 출자금이 많이 모이면 다시 처음 출자한 성도에게 초기 자금을 상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이런 자금은 무이자로 대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상황에 따라서 대출 상환이 불가능한 경우를 대비하여 부채를 탕감할 수도 있어야 한다.)미국의 교회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앞다투어 시행한다면 교회 안에서 가난 때문에 파산하고, 사채를 쫓아다니고, 빛의 노예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확실히 줄어들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라(엡 4:28)는 명령은 그들이 먹을 만한 음식을 나누어주는 그런 자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지금 당장 직면한 어려움을 넘어갈 수 있도록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경제적인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구제가 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다시 소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교회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원제: Economics for Church Leaders: Why Being Poor is So Expensiv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소비
경제학
소비평탄화
가난
파라오의 ‘소비 평탄화’ 꿈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by Joe Carter
2022-08-09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교회 지도자들이 “그 성읍의 평안”(렘 29:7)을 제대로 구하려면 경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경제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시리즈는 경제 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리즈의 취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경제와 공공 정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용어 소비 평탄화(Consumption Smoothing)의미소비란 소비 가구가 재화와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이다. 소비 평탄화는 가능한 한 최고의 생활 수준(소비로 측정)으로 평생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 기간 지출과 저축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중요한 이유 소비는 성경에 언급된 최초의 경제 개념 중 하나이다(“성경의 첫 경제 개념” 기사를 참조). 마찬가지로 소비 평탄화는 구속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최초의 경제 개념 중 하나이다. 창세기 41장에서 우리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두 가지 꿈을 꾸는 장면을 만난다. 요셉이 등장하여 그 꿈을 풀이해 준다. 요셉이 바로에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두 번 꾸신 꿈의 내용은 다 같은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장차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좋은 암소 일곱 마리는 일곱 해를 말하고, 잘 여문 이삭 일곱 개도 일곱 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 꿈이 다 같은 내용입니다. 뒤따라 나온 야위고 흉측한 암소 일곱 마리나, 열풍에 말라 버린 쓸모없는 이삭 일곱 개도, 역시 일곱 해를 말합니다. 이것들은 흉년 일곱 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임금님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임금님께서 앞으로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올 일곱 해 동안에는, 온 이집트 땅에 큰 풍년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일곱 해 동안 흉년이 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집트 땅에 언제 풍년이 있었더냐는 듯이, 지나간 일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근이 이 땅을 황폐하게 할 것입니다. 풍년이 든 다음에 오는 흉년은 너무나도 심하여서, 이집트 땅에서는 아무도 그 전에 풍년이 든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같은 꿈을 두 번이나 거듭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시기로 이미 결정하시고, 그 일을 꼭 그대로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이제 임금님께서는, 명철하고 슬기로운 사람을 책임자로 세우셔서, 이집트 땅을 다스리게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전국에 관리들을 임명하셔서, 풍년이 계속되는 일곱 해 동안에, 이집트 땅에서 거둔 것의 오분의 일을 해마다 받아들이도록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앞으로 올 풍년에, 그 관리들은 온갖 먹거리를 거두어들이고, 임금님의 권한 아래, 각 성읍에 곡식을 갈무리하도록 하십시오. 이 먹거리는, 이집트 땅에서 일곱 해 동안 이어갈 흉년에 대비해서, 그 때에 이 나라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갈무리해 두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면, 기근이 이 나라를 망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꿈을 해석하는 요셉의 지혜를 본 바로는 그에게 국민적 소비 평탄화 계획의 책임을 맡긴다. “평생 사이클 가설”(life-cycle hypothesis)은 개인이 장기적으로 소비 및 저축 행동을 계획할 수 있고, 또한 평생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소비를 균등하게 하는 의도로 생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셉은 이집트의 모든 백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규모의 방식으로 이런 소비 평탄화 계획을 적용한다. 실제 삶에서 칠 년의 풍년에 이어 칠 년의 기근이 바로 오는 식의 극적인 경제 상황은 드물다. 그러나 살다 보면 돈이 더 들어오는 때도 있고, 또 그 반대일 때도 있다. 다음은 중산층 배경을 가진 젊은 고등학생에게 평생 사이클 가설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예이다. 고등 교육을 통해 평생 소득의 잠재력을 높일 수 있기에, 젊은이라면 대학에 갈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는 부모로부터 약간의 용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여 생활비를 내고 나머지는 학자금 대출로 갚을 것이다. 졸업 후 정규직 일자리를 찾고, 아파트를 임대하고, 학자금 대출을 갚기 시작하고, 또 중산층에 걸맞은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기 시작한다. 수입은 생필품을 살 만큼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가 원하는 모든 건 아니다(예; PlayStation 5). 그러나 그는 지금이야 연간 4만 달러밖에 벌지 못하지만, 약 십 년이 지나면 몇 번의 임금 인상과 함께 6만 달러를 벌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소비를 원활하게(평탄하게) 하기 위해 그는 신용으로 몇 가지 품목(자동차, 옷 등)을 구입한다. 앞으로 몇 년에 걸쳐서 지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중간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그는 모든 기본 소비를 지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저축, 즉 미래의 은퇴를 위해 소비할 금액의 일부를 연기할 여지도 있다. 따라서 그의 경력에서도 중년 기간은 (신용을 통한) 젊음의 소비와 (저축을 통한) 노후의 소비, 이 두 가지 모두를 원활하게 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런 과정에서 중간중간 쉽지 않은 상황을 맞기도 하겠지만, 그와 같은 중산층 노동자는 삶의 과정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과 저축의 균형을 맞추게 된다. 이런 식의 패턴은 적어도 두 가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사고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첫째, 우리가 가진 모든 경제적 자원(예; 수입)이 청지기 직분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인식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성경 말씀과 삶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경제적 자원의 수준이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마도 우리가 풍년과 기근 사이를 오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대신 요셉이 이집트에서 한 것처럼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자원을 관리하기를 바라실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중점을 두는 방향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원을 증가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하여 신용을 통해 오늘날의 소비(잠 22:7)를 늘리는 게 아니라, 미래 사용을 위해 지금의 자원을 절약하는 것이다(잠 6:6-8).청지기 직분에 대한 우리의 관점 또한 소비를 원활하게 하는 결정을 개선하거나 또는 왜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상적인 미래의 자아감에 도취해서 앞으로 많은 돈을 벌어 갚으면 된다는 생각에 과소비에 빠질 수도 있다. 이것은 나 자신이라는 우상숭배로 이끌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게 만들 수도 있다(마 6:31-32).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경제적 자원이 나 자신의 유익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목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눅 6:38). 이것은 우리 소유의 일부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엡 4:28). 여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고아와 과부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반복되는 성경의 교훈이다. 고아는 앞으로 성인이 되어 미래 소비를 감당할 전망이 있겠지만, 부모가 없기에 현재에 필요한 소비가 부족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과부는 과거에 남편을 통해 소비 욕구를 충족했지만, 이제는 미래 소비를 위한 자원을 비축하지 못하게 된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필요에 집중함으로써 그들의 소비를 원활하게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우리는 그들의 현재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애 주기 전반에 걸쳐 소비를 원활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그들이 평생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중하류층에서 상위 1퍼센트에 이르는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이런 소비 평탄화의 평생 사이클 모델은 첫 직장에서 은퇴에 이르기까지 경제생활의 일반적인 하나의 긴 곡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근로빈곤층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하나의 광범위한 평생 패턴이 아니라, 이 주기는 평생 반복해서 발생한다.이런 패턴이 일주일에 한 번에서 일 년에 여러 번에 걸쳐서 반복된다. 자주 반복되는 이런 패턴이야말로 근로빈곤층이 소득과 저축과 소비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경제적 계층 간의 차이이고 또한 가난한 미국인의 삶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는 다음 기사 “왜 가난하면 더 비싸게 살아야 하는가”에서 이 관해서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원제: Economics for Church Leaders: Pharaoh’s Dream About ‘Consumption Smooth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경제학
소비
소비주의
요셉의꿈
소비평탄화
성경의 첫 경제 개념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by Joe Carter
2022-08-08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교회 지도자들이 “그 성읍의 평안”(렘 29:7)을 제대로 구하려면 경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경제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시리즈는 경제 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리즈의 취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경제와 공공 정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용어: 소비의미: 가정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중요한 점: 소비란 추한 단어로 인식되는 선한 개념중세부터 소비는 몸을 망치는 결핵처럼 소모적인 질병으로 일컬어졌다. 최근에는 소비가 종종 완전히 경멸적인 의미를 띄는 말로 사용되는 소비주의와 혼동되고 있다.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 의미에서 소비는 각 가정에서 사용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가리키는 순수하게 중립적인 용어이다. 배우자와 함께 스테이크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아기 돌보미를 고용하면 상품(스테이크)과 서비스(보모의 시간과 관심)를 모두 소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품과 서비스는 수입이나 저축을 통해 모은 돈을 지불하지만, 소비로 나타나는 것은 단지 그들이 사용한 내용뿐이다. (잠시 후 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자.)소비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첫 경제 개념이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문화 명령(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을 내리신 후에 하나님은 이 인류 첫 부부에게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창 1:29)라고 말씀하셨다.아담과 하와는 일해야 했지만, 수입이 생기기도 전에 소비하도록 허락받았다는 점을 주목하라. 이것이 우리 대부분이 인생을 시작하는 방법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방을 치우거나 잔디를 깎는 등) 일을 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일은 우리의 소비 능력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열 살짜리 남자아이는 신문 배달을 통해 고작 몇 달러밖에 벌지 못하지만 한 달에 수백 달러가 드는 음식, 주택, 교통비를 소비한다.그렇기에 소비는 소득, 심지어 부보다 웰빙과 번영을 더 잘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것의 좋은 예는 2015년의 영화 ‘마션’에서 볼 수 있다. 화성에 고립되어 있을 때,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니는 논리적으로는 나사(NASA)로부터 여전히 수입을 얻고 있다. 하지만 그가 슈퍼마켓이 없는 행성에 갇혀 있을 때 그 돈은 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와트니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예금 계좌에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이다.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이 복지의 지표로서 소비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비 수준은 종종 수입이나 지출과 같은 다른 관련 요소보다 주변의 복지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집을 소유하고 있고 적당한 규모의 농장과 가축을 보유한 가난한 농부는 수입이 거의 없고, 약간의 지출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음식과 주택에 관련된 적절한 수준의 소비를 할 수 있다.그러나 도시의 빈민은 무료 급식소에서 무상으로 음식을 공급받으면서 음식을 소비할 수 있지만, 노숙자가 되어 적절한 주택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소비와 상품과 서비스가 어떻게 얻어지는지 주시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이 필요로 하는 요구의 종류나 수준을 더 잘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기타 세부 사항• 인간 번영에 대한 소비의 중요성은 비록 두 그룹이 필수적이지만, 소비자가 생산자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많은 경제학자가 주장하는 주된 이유이다. 18세기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소비는 모든 생산의 유일한 종착점이자 목적이며, 생산자의 이익은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하는 데 필요한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격언은 너무나 자명해서 그것을 증명하려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른 많은 중요한 경제 개념들은 소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저축의 주된 이유는 현재 수입의 일부를 적립하고 현재 소비를 포기하여 미래에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잠 6:6-8).• 소비에 대한 결정은 일, 소득, 저축, 투자 등에 대한 우리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흔히 사람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소비 경로를 선호하고 그 선호도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신혼부부는 소득이 증가하면 나중에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주택과 가구를 사기 위해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말년에 생활양식의 이전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퇴직금 계좌에 적립한다. 이 프로세스를 “소비 평탄화”라고 한다. 빚을 지든 저축하든 평생 최소한의 소비기준을 유지하겠다는 취지다. 우리는 일생을 통해 소비 패턴의 고저를 평균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소비 평탄화)을 함으로써 달성한다. (다음 글에서는 “소비 평탄화”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원제: Economics for Church Leaders: Scripture’s First Economic Concep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경제학
소비
소비평탄화
소비주의
기독교 앞에 놓인 가장 어려운 질문들
by Matt Smethurst · Rebecca McLaughlin
2022-08-07
아래 인용한 글들은 레베카 맥클러플린의 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Confronting Christianity: 12 Hard Questions for the World’s Largest Religion)에서 특별히 내 눈을 사로잡은 것들이다_맷 스미서스트.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비종교인으로 자란 미국인 중 40퍼센트가 성인이 되어서 종교인(보통은 기독교인)이 되지만, 개신교 교인으로 자란 사람 중에서는 20퍼센트만 비종교인이 된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내가 나중에 비종교인이 될 아이 한 명을 기르는 동안, 내 친구 중에 종교가 없는 친구들은 나중에 기독교인이 될 아이를 두 명 기를 듯하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지닌 종교적 신념은 자동차 범퍼 스티커에서 자주 보는 ‘공존’이라는 개념에 수월하게 들어맞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북미에서 순수한 기독교가 신학적 자유주의 신앙보다 번성하는 것은 일정 부분 이민자 신자들 덕분이다. … 다음 세대에 물어야 할 질문은 “종교가 얼마나 빨리 소멸할 것이냐”가 아니라 “기독교냐, 이슬람이냐?”이다. (13, 15)물론 우리는 신문을 펼쳐 보기만 해도 종교 신앙이 해를 끼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당신에게 해롭다고 말하는 것은, 코카인을 생명을 구하는 약과 구별하지 않고서 “약은 당신에게 해롭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보통은 종교 활동이 건강과 행복에 유익해 보인다. 이 자료를 뒤집어 보면, 미국의 세속화 경향은 곧 보건의 위기다. (24)기독교가 서양 문명을 독차지한 반면에, 서양 문명은 한 번도 기독교를 독차지한 적이 없다. 사실상 기독교를 ‘서양적’이라고 일컫는다면, 문자 해득(literacy)을 ‘서양적’이라고 일컫는 것과 마찬가지다. … 기독교가 다양성을 반대하는, 서구 백인의 특권 종교라는 생각은 신약 성경과는 전혀 양립할 수 없다. (43, 45)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성경적 기독교를 백인 중심적 국가주의와 결합시키려는 것은 고양이를 쥐와 결혼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하나가 상대를 사냥하게 되어 있지, 짝이 되지는 않는다. (58)다양성에 신경을 쓴다면 기독교를 외면하지 말라.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다민족적이며 다문화적 운동이다. (60)의견 차이는 존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다. 사실 내가 무척이나 존중하는 사람들과 아주 열띠게 토론하는 까닭은, 그러한 이들의 생각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는 친구 간 토론의 기술이 사라지고 있는 듯하며, 대신에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있다. … 우리가 다양성에 대해 피상적인 다짐 이상을 하려면, 우리와 완전히 의견이 다르지만 현명한 사람들과 깊이 사귀어야 한다. (65, 66)일부 종교는 서로 일치시키기가 가능할지 몰라도, 기독교는 엉뚱한 세트에서 나온 퍼즐 조각 같아서, 가장자리를 아무리 구부려도 맞지 않는다. (76)십자가에서, 이제껏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끔찍한 죽음을, 힘없는 자들을 위해 달게 받으셨다. 기독교는 폭력을 미화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폭력을 수치스럽게 한다. (131)종교가 폭력의 원인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수백만 명이 신앙에 이끌려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섬긴다. 그리고 특히 기독교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거름 역할을, 정의를 위해서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치유를 위해서 권한을 위임받는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가 없다면 세상에 폭력이 더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면, 사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32)합리적인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과학적 진취성의 최초이자 최고인 토대가 나온다. … 무신론은 윤리적 신념의 기반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정당성도 입증하지 못한다. (157, 159)에베소서 5장은 결혼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의 근거를 성별 심리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에 둔다. … 결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여성에 대한 남성 우월주의나 학대나 폄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전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206, 209)처음 기독교인들은 [그 당시 나는 사도행전을 읽고 있었다] 온갖 고난에 처하고 돌에 맞아 죽기도 했지만, 그들이 맞닥뜨리지 않은 싸움이 하나 있었다. 바로 고독이었다.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를 성적 관계나 핵가족으로 축소해 버린다면, 성경의 윤리를 전혀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234)우리가 깨어진 죄인으로 오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을 수 없고,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심지어 정죄받기까지 한다. 깨어진 죄인으로 온다면, 다정한 포옹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적인 죄를 무섭게 정죄하시는 반면, 성적인 죄를 짓고서 회개한 죄인들은 마찬가지로 놀랍게 시종일관 환대하신다. (243)현대 서구 사회는 내게 가르치기를, 진짜 자아를 찾는 일을 가장 우선시하라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양파껍질 같은 내 정체성을 벗겨 내고 거기에서 발견한 것에서 떠나 살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하나님과 관련하여 누구인지가 내 진짜 자아이다. 나는 내 심리 깊숙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자아를 발견한다. 그분이 우리를 ‘자녀’, ‘사랑하는 자’, ‘친구’라고 부르실 때,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이며,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와 친구와 같은) 다른 모든 정체성은 거기에서 흘러나온다. (254)부활할 때, 성적 만족감보다 예수를 선택한 이들 중에 아무도 누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 관계에 비하면 인간의 결혼은 테슬라 옆에 있는 장난감 자동차처럼, 또는 연인의 포옹이 아닌 편지 봉투에 하는 키스처럼 보일 것이다. (256)신약은 포셔가 안토니오의 죽음을 반대하던 방식으로, 즉 노예제도를 완전히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노예제를 반대한다. 예수께서는 노예의 역할 안에 거하셨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일컫고, 도망 노예를 자기 심장처럼 사랑하며, 노예와 자유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신약은 우월성이나 착취나 강제의 여지 없이 그저 형제애와 공통 정체성만으로 구조적인 긴장을 만들어 냈으며, 그 긴장이 마침내 노예제 폐지에서 화산처럼 분출되었다. (270-271)우리가 기독교를 백인 노예 소유자와 관련짓기를 그만두고 수세기 내내 울려 퍼진 흑인 신자들의 피 묻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세대의 신실한 흑인 신자들이 미국에 있어야 하는가? (285)우리고 고통에 대해 늘 던져야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이 고통이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을까? 당혹스럽게도 예수께서 주장하신 말씀에 따르면, 그분이 그 가치다. (298)고통은 기독교 신앙에 골칫거리가 아니다. 고통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리 삶에 꿰매 넣는 실이다. (306)예수가 생명의 떡이며, 예수를 잃으면 굶어 죽는다는 뜻이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면, 예수를 잃으면 어둠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선한 목자라면, 예수를 잃으면 홀로 헤매다가 실종된다는 뜻이다. 예수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면, 예수를 잃으면 영원한 죽음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희생당하셨다면, 예수를 잃으면 그 대가를 우리가 치른다는 뜻이다. (325-326)예수의 세계에는 과학 진리와 도덕 간 결합 조직이 있다. 인간은 모두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말할 근거와, 다양성을 넘어 사랑하라는 나직한 부르심이 있다. 악을 일컫는 이름이 있고, 용서의 방법이 있다. 현재 우리 마음이 품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은 사랑의 모습이 있고, 우리의 연약한 몸이 지금껏 경험할 수 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진정한 친밀이 있다. 죄로 가득 차 있지만 은혜로 속량할 수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진단이 있다. 가난하고 압제당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라는 명령이 있는데, 그 명령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생겨났으며 그 바탕에는 언젠가 모든 눈물이 닦이고, 모든 배가 채워지며, 모든 버림받은 사람이 받아들여지리라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번지르르한 대답이나 쉬운 길은 없다. 그 대신 와서 죽으라는 명령이 있다. (331)원제: 20 Quotes on the Hardest Questions Christians Fa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
세속화
비종교화
무신론
다양성
종교다원주의
폭력
결혼
개인주의
공동체
인종차별
‘일과 삶의 균형’ 신화의 허구
by Denise Yohn
2022-08-06
가시덤불과 엉겅퀴_신앙과 일의 통합을 추구하며 고민하는 이들에게 현장의 조언을 들려드립니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창세기 3:18 지금까지 받은 일과 삶의 균형을 잡으라는 조언 중 최고는 어떤 것인가? 많은 사람이 과로에 시달리고 새로운 업무와 집안일 사이를 곡예를 하듯 오가며 해내야 하는 오늘날의 직업 환경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잡고자 하는 노력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내가 30년이 넘게 직장 생활하면서 깨달은 것은 일과 삶의 균형은 그저 신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균형”은 안정된 상태를 의미하지만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은 삶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일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삶의 필수 요소이다. 적어도 그렇게 여겨야 할 영역이다. 따라서 일과 삶의 균형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려고 애쓰는 대신에 ‘중심’을 추구하기로 했다. 나는 나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그다음에 삶의 다른 부분들을 계획하고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결심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의 중심이시다. 만물의 주이시며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성경과 이 세상의 주역이시다.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 자신이 삶의 중심인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중심이시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 삶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삶의 우선순위들을 계발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다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나의 삶을 예수님 중심으로 맞추기 위해 내가 실천하는 몇 가지 방법이다.1. 자기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하라.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받아들여야 하고, 이것이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역의 성취임을 이해해야 한다.그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의를 확보하셨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의 선물에 대한 감사, 사랑 많으신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는 자녀로서 갖는 진실한 소망 가운데서 자유롭게 무엇이든 하면 된다.따라서 우리는 꾸준히 우리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할 필요가 있다. 잭 밀러가 말했듯이 복음은 한번 듣고 믿은 후에 우리의 노력과 의지에서 비롯한 어떤 일을 하기 위한 메시지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복음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2. 삶의 목적과 가치를 분명히 하라.기업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과 그 방법을 압축하여 핵심 가치를 만들고 비전선언문을 세우는 것처럼 목적과 가치를 분명히 하는 것은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데 유용하다.목적과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기도와 깊은 묵상에서 비롯한다. 기도와 묵상 가운데서 목적과 가치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적어서 당신의 시간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보낼지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하길 바란다.나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나는 사업가들이 자신의 직업 소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일을 돕고 있다.” 이는 내가 하는 일이 사업가들이 직장에서 소명을 분별하고 그 소명을 이행하도록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콘퍼런스에서 기업의 지도자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내가 이끄는 부서의 젊은 전문가들을 가르칠 때도 항상 이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나의 핵심 가치 중 하나는 “단순한 생산성보다는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핵심 가치를 마음에 새김으로써 해야 할 일 목록을 확인하는 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내가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하시는 사람들과 일들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한다. 이것은 때로는 내가 계획한 모든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내가 계획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중심에 놓는 삶의 실천으로 나를 이끈다.3. 직장 내 업무가 돌아가는 주기를 파악하고 계획하라. 불가피하게 더 오랜 시간 일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직장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능하다면 다음에 해야 할 업무까지도 명확하게 해 놓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다른 이들에게 기대기도 하고 우리가 맡게 될 추가적인 책임도 피하면서 직장이 아닌 다른 삶의 영역을 위한 계획도 적절하게 세울 수 있게 된다.그러나 이것은 일정 기간만 지속해야 한다. 과중해진 업무량은 줄 때도 있어야 하며 휴식과 다른 우선순위를 위한 시간이 끼어들 수도 있어야 한다. 나의 직장이 이러한 시간 리듬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처음에 언급한 두 가지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수백만 가지 길로 끌려다닐 것이고, 저마다 먼저 해 주길 기다리는 일들 속에서 방향을 잃은 채 힘들어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중심에 모실 때, 우리는 집중과 쉼을 경험하게 된다.원제: Debunking the ‘Work and Life Balancing’ Myth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일과삶의균형
일터신학
일과삶
워라벨
처음
이전
56
페이지
57
페이지
58
페이지
열린
59
페이지
6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