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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감정론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Joe Rigney
2022-08-25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은 엄청난 책이다. 무엇보다 잠재적으로 파괴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이 제기하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를 구별하는 표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라면 피할 수 없다. 내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위선자인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내 믿음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이 책이 바로 그 거짓을 밝혀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책에 잠재적 파괴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파괴는 좋은 것이다. 내 믿음이 근본적으로 잘못 인도되고 있거나 부족하다면 또는 나아가서 아예 거짓이라면, 마지막 심판에서 예수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심판 날 그리스도로부터 거부당해 황폐하게 되는 것보다는 에드워즈의 이 책 때문에 황폐하게 되는 게 훨씬 낫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나마 복구가 가능하다. 회개는 여전히 가능한 선택지로 남아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라면 회복은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그러나 이 책에는 또 다른 이유로 인해 잠재적 파괴성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신앙감정론은 18세기를 목사와 신학자로 산 진정한 천재가 쓴, 당시 분위기를 여실히 풍기는 복잡하고 정교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부흥과 종교 체험, 도전받는 구원의 확신,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제대로 분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수십 년을 성찰한 신학적 결실이다. 같은 주제를 담은 에드워즈의 네 번째 책인 신앙감정론은 18세기 중반에 유럽과 미국을 휩쓴 첫 번째 대각성운동 직후에 쓰였으면, 그 부흥 운동이 제기한 여러 도전에 대한 그의 가장 성숙한 성찰을 담고 있다. 주제의 복잡성과 저자 특유의 명확한 산문은 이 책이 오해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그 오해 때문에 우리는 황폐해질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 우리의 신앙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그건 우리 믿음이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에드워즈가 말하는 표시를 자신에게 잘못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하면서 나는 지금 말한 두 가지 유형의 황폐함 또는 파괴성을 염두에 둔다. 필요하다면 첫 번째는 더 키우고 싶지만, 그럴 수 있다면 두 번째는 피하고 싶다. 이 목표를 위해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필요한 열 단계 오리엔테이션을 제안한다. 어렵지만 가치 있는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열 가지 항목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1. 구조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주제를, 그러니까 대부분 경우에 진정한 종교는 거룩한 감정(affections)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감정이 의미를 정의한다. 2부에 들어서 저자는 신뢰할 수 없는 거룩한 감정의 열두 가지 표시(signs)를 서술한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 신뢰할 수 있는 거룩한 감정의 열두 가지 표시를 소개한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다. 용어의 정의, 신뢰할 수 없는 거룩한 감정의 표시,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거룩한 감정의 표시, 이것이 이 책의 기본 구조이다. 2. 감정의 의미에드워즈에게 감정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려면 인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몸에는 외부 세계의 인상을 받아들이는 오감이 있다. 우리의 영혼 또는 마음(mind)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기능(faculties) 또는 능력(powers)이 있다. 첫 번째가 이해력이다. 이해력은 우리가 지각하고, 분별하고, 보고, 또 판단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두 번째는 이해력으로 인해 지각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또는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의지력(will)이다.“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감정을 살펴야 합니다.” 미식축구 경기에서 보라색과 금색 유니폼을 입은 팀을 미네소타 바이킹으로, 그리고 녹색과 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팀을 그린베이 패커스로 식별하는 것은 이해를 통해서 이뤄진다. 하지만 바이킹을 향해서는 응원의 함성을 보내지만 패커스에게는 야유를 퍼붓는다면, 그건 다 의지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의지의 성향이다. 의지가 가진 일부 성향은 단순하고 사소하다. 그런 의지는 거의 의식하지 않고 이뤄진다(예를 들어, 오늘 어떤 양말을 신을지 선택하는 것). 그러나 또 다른 성향의 의지는 강하고 끈기 있고 역동적이다(예를 들어, 배우자 선택). 저자는 오로지 후자에 해당하는 의지만을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의지를 더욱더 강력하고 분별 있게 활용하는 것이다. 3. 감정의 중요함감정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감정은 종종 인간 행동의 원천이 된다. 감정은 세상이 움직이도록 한다. 살아 움직이는 누군가가 감정 없이 일한다면 제대로 된 결과를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행동에 활력을 주는 것은 사랑과 미움, 두려움과 욕망, 그리고 슬픔과 기쁨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정이 마음의 근본 방향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원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내 감정을 살펴보아야 한다.4. 감정 평가감정을 평가할 때 실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감정이 드러내는 즉각적인 강도보다는 습관적 감정이 가지는 고정성과 끈기, 강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점을 에드워즈는 분명히 한다. 명료성은 우리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잘못 평가하지 않도록 한다. 번뜩이는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즉각적인 외적 효과((그중 일부는 성격과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로 감정의 강도를 측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습관적 감정의 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다양한 도전을 거치는 내내 우리 마음이 바라보는 방향에 주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누구라도 만나는 비정상적으로 나쁜 날에 (또는 비정상적으로 좋은 날에) 생기는 순간적 감정이 가져다주는 성급한 결론을 막을 수 있다. 5. 믿을 수 없는 표시우리는 에드워즈가 쓴 믿을 수 없는 표시라는 말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믿을 수 없는 표시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단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삶에 믿을 수 없는 신호가 있다는 것은 결코 결함이 있다는 게 아니다. 단지 결론을 내릴 만큼 결정적이지 않다는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이건 불리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유리한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을 수 없는 신호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강렬한 감정은 신뢰할 수 없는 표시이다. 한편으로는 강한 강도가 좋을 수도 있다. 시편에 나오는 다윗을 생각해 보라. 반면에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육체적 표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임재를 접한 선지자는 엎드린다. 이것은 좋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정치 집회와 록 콘서트에서 기절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우리는 격렬한 감정이 가져다주는 육체적 표현에 너무 큰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표시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다. 에드워즈가 정한 법칙은 다음과 같다. 불신자에게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표시는 신뢰할 수 없다. 마귀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을 어떻게 믿겠는가? 우리는 결코 믿을 수 없는 표시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그런 표시에 의지해서도 안 된다. 6. 믿을 수 있는 표시열두 가지의 믿을 수 있는 표시에는 뚜렷한 진행 과정이 있으며 또한 몇몇을 모아 묶을 수도 있다. 지난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나는 그것들을 나무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네 가지 표시는 뿌리이다. 그것들은 나무의 기초가 되지만 종종 숨겨져 있고 식별하기 어렵다(특히 다른 사람들 속에서). 참된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갖게 하는, 우리 영혼에 새로운 기초를 놓는 성령의 구원 사역의 결과이다. 이런 새로운 감각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가지는 도덕적 탁월함과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지식을 낳는 하나님의 거룩함 속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책을 읽고 꿀이 달다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꿀의 단맛을 맛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을 아는 것(악마도 그 사실은 안다)과 그의 거룩하심이 주는 달콤함과 기쁨을 맛보아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거듭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더 깊고 체험적인 지식이며, 또한 진정한 종교적 감정을 느끼는 데에 필수적이다. 뿌리에서 우리는 표시 5에서 7까지 해당하는 줄기로 이동한다. 진정한 종교적 감정은 이러한 표시가 “따라오게” 되어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맛보았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실재하심을 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 속 영원한 죄가 더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죄를 후회하는 게 아니다. 죄가 역겹고 혐오스럽기 때문에 미워한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 우리의 본성까지도 변화된다. 줄기에서 나오면 8에서 11까지의 표시로 이동하게 되고, 각각의 표시가 훨씬 더 잘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새로운 본성은 예수님의 사랑과 온유와 자비를 반영한다.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양심은 남아있는 죄에 민감해진다. 거룩함의 추구는 포괄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남에게 소홀히 하면서 어떤 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모든 열매를 전반적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더 중요한 것은, 단지 지금까지의 발전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과 은혜를 더 많이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점이다. 에드워즈는 마지막 표시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른 모든 표시가 향하는 곳이 바로 이 표시이다. 가지에 달린 마지막 표시는 바로 거룩한 삶의 열매이다. 우리는 열매를 통해 어떤 나무인지를 안다. 이 경우에 마지막 표시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에 대한 보편적이고 진지하며 끈기 있는 순종이다. 보편적이라는 게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순종과 관련해 금지된 영역이 없으며, 순종의 예외로 두는 그 어떤 죄도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서 주님께 순종하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내가 맛본 은혜의 열매, 나를 안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은혜의 열매를 드러낸다. 7. 에드워즈의 통찰을 테스트하기에드워즈가 특별히 강조한 특정 표시에 관해서 그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내 경험에 따르면 여섯 번째 표시와 관련해서 겸손에 대한 그의 조언이 항상 도움이 되는지를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그가 말하는 기본적인 요점, 그러니까 우리가 느끼는 법적 굴욕(우리가 벌을 받고 있기 때문에 슬픔을 느낌)과 복음주의적 굴욕(우리가 심각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괴로워함)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내가 교만하지 않은지 또는 내가 겸손하다는 사실 때문에 설혹 도리어 교만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평가하라는 에드워즈의 권고는 사람을 지치게 할 수 있다. 자기 성찰이라는 러닝머신에 갇히게 될지도 모를 뿐 아니라, 내면만 관찰하다가 지칠 수도 있다. 이건 단지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 모든 지혜와 성경적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 또한 하나의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글도 성경으로 검증해야 하며 그가 권유하는 적용 사항도 지혜를 활용해 적절하게 평가해야 한다. 8. 몸과 환경, 그리고 죄표시와 관련해 우리의 감정과 확신을 방해하는 것으로 에드워즈가 몸과 환경, 그리고 죄를 지목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몸의 변화는 우리의 상상력과 마음과 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우울증(에드워즈가 멜랑콜리라고 부르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며,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얼마든지 영향을 주는 신체적 측면이다. 실제로 에드워즈는 사탄이 이러한 육체적 약점을 이용하여 지치고 우울한 성도를 공격한다고 말한다. 즉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위한 완전한 처방에는 영적 조언뿐 아니라 육체적 도움이 모두 포함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에드워즈가 주로 초점을 맞춘 것은 영적인 차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확실히 육체적 차원이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3부 시작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라.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상황과 죄가 우리에게서 구원의 확신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받은 은혜가 적고 깊은 죄에 빠진 사람이라면 구원의 확신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확신이 없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전심으로 그분을 찾게 하려는 하나님의 자비이다. 은혜가 낮은 자의 눈에는 하나님이 마치 먹구름에 덮여 숨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더군다나 은혜가 낮은 사람은 영적인 시력마저 흐릿하다. 따라서 먹구름과 흐릿한 눈이 뒤섞일 때 결코 하나님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없다. 이 책이 제시하는 그 어떤 처방도 그런 경우가 가져다주는 좌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는 없다. 유일한 치료법은 오로지 새로운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향하고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9. 확신을 구함이제 구원의 확신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에드워즈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진술이 이어진다. 은혜와 확신이 부족해서 내가 정말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의심되고 두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이 책을 읽고 황폐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에드워즈가 이 책에서 한 다음 말을 기억하라.각 사람이 죄악됨을 멸하고 은혜가 자라가며, 그 은혜를 활발하게 행사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확신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록 자기 성찰이라는 것이 대단히 유용하고 중요한 의무이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의무이지만, 그것은 결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얻은 구원으로 만족하게 하는 주된 수단이 아닙니다. 확신은 자기 성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얻어져야 합니다다(신앙감정론, 195).확신이 자라는 길은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를 최대한 사용하는 것이다. 확신은 내면을 들여다봄으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또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감으로 생기는 것이다. 10. 겸손한 자세이 마지막 항목은 책에 관해서가 아니라 목회적 조언에 가깝다. 겸손하게 이 책을 읽으라. 다른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평가하려는 마음으로 읽지 말라. 사실 에드워즈도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진정성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는 판단할 수 있겠지만, 타인의 진정한 거듭남 여부를 확실하게 아는 길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마음을 볼 수 없다. 결국 주님만이 당신의 양을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진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이 책은 우리의 시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함으로써 그러한 확신에 이바지한다. 이 책을 겸손하게 주의 깊고 또 현명하게 읽는다면,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혜로운 목회자 또는 상담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읽는다면, 이 책은 단지 파괴적인 것 이상이 될 수 있다.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선물을 진정으로 깨닫고 소중히 여기도록 인도하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다.원제: Religious Affections: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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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e Dean
2022-08-24
세르게이 나쿨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키이우의 붐비는 기차역에서 펼쳐졌다. 나쿨 목사는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교인 몇 명을 공격을 받고 있는 나라 밖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있었다.몇 주 전 나쿨 목사의 아내는 남편과 사랑하는 교회에 남겠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고 키이우를 탈환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기에 나쿨이 부드럽게 타이르자 잠시 떠나 있기로 했다. “여보,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됐어요.” 그는 붐비는 플랫폼에 서서 아내의 손을 잡은 채 아내와 아들들, 교인들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생각했다. “이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이자 목사로서 가장 끔찍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말한다. 떠나보낸 그들이 접경 국가에 안전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나중에 왔을 때 나쿨은 안도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 그는 두려움 없이 섬길 수 있게 되었다.우크라이나 정부 조치에 따라 45세의 나쿨 목사도 18-60세의 여느 남자들처럼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나쿨은 이런 전시 계엄령과 상관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저는 목사입니다. 대답은 이겁니다.” 키이우 그의 집에 있는 그는 전화상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양 떼를 절대로 떠나지 않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목자인 제가 어떻게 교인들 곁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나쿨은 곧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날을 바라며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교회를 섬기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서 섬기는 것은 반년을 넘긴 이 예기치 않은 전쟁에서 나쿨 같은 사역자들이 적응하게 된 기독교 사역의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폭격, 1,200만 명의 난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사역자들에게 변하지 않는 복음의 소망을 품고서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도록 했다. 나쿨은 복음에 굳게 닻을 내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는 주님의 놀라운 신실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값진 경험입니다.”뜻밖의 메신저주님의 신실하심은 나쿨이 예수님을 알기 오래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소련 치하의 우크라이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그는 성경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경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는 도서관에서 무신론 서적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책에는 성경을 논박하려고 인용한 성경 구절들이 꽤 많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의 조작들”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돌이켜보면, 설명할 수 없는 그의 관심은 “[그의] 삶 가운데 있던 순수한 은혜”였다.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후 소련의 붕괴는 구소련 국가들은 경제 위기에 빠졌다. 시대는 암울하고 절망적일 때가 많았다. 그러던 1994년 어느 날 오후 나쿨은 거리에서 두 명의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들은 그에게 간단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으세요?”복음주의 교회를 다녔던 그 두 사람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나쿨에게 신약성경도 한 권 주었다. “그 시절에 무료로 신약성경을 얻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상이 안 되실 겁니다.” 나쿨이 말한다.그 성경을 읽으면서 그가 발견한 메시지는 “신선한 공기와 같았다.” “빛과 같았습니다.” 그가 회상한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 열린 것 같았습니다.” 몇 달 후에 나쿨은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믿음을 받아들였고 그의 삶을 사역자로 헌신하기로 했다.전시 사역나쿨의 사역에는 키이우 은혜개혁교회 담임목사 사역 9년이 포함되어 있다.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 나쿨은 교회 지하실을 폭격 대피소로 바꾸었다. 이 교회는 이곳에서 예배 참석자 수가 한때는 4명까지 줄었지만 계속 예배를 드리고 있다.피난을 떠나는 교인도 있고 또 군 복무하러 떠나는 교인도 있기에 교인 수에 기복이 심하지만, 이제 나쿨 목사는 이런 상황에 적응됐다. 나쿨 목사는 군사 훈련에 지원했지만, 군 당국이 그를 돌려보내면서 교인들을 섬기게 했다. 최근 인근 침례교회 담임목사 친구는 군 복무를 하게 됐다. 세르제이 나쿨 목사가 키이우의 폐허를 가리키고 있다. Image courtesy of FEBC.한편, 나쿨은 국제 기독교 라디오 네트워크인 극동방송(FEBC)의 선임 방송인으로서 이번 전쟁의 참상을 알렸다. 러시아 침공 초기에 그는 인근의 파괴된 건물을 영상에 담고 남아 있는 키예프 주민들이 겪고 있는 참혹한 상황을 보도했다.극동방송의 다른 방송인들도 온라인 기도회를 열고 청취자들을 이 방송 사역이 진행하고 있는 상담 센터로 안내하여 영적 도움을 받도록 했다. 6월 기도 모임에 한 청취자가 옆집 건물이 로켓에 맞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청취자는 이렇게 적었다. 방송 진행자는 겁에 질린 청취자를 위해 기도했고 몇 분 후에 응답을 받았다. “당신의 기도 덕분에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의 기도가 저의 마음에 평화를 주고 있습니다.”전쟁의 상흔을 어루만지는 사역우크라이나의 일부 지역은 유난히 치안이 불안한 상태이고, 전쟁이 할퀸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이러한 긴장은 영적인 돌봄을 요구하고 있다. 나쿨을 비롯한 목회자들은 육체적인 필요만큼이나 영적인 돌봄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페디아 미나코우는 이런 돌봄 사역은 신학교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우크라이나 복음주의 개혁 신학교의 히브리어 및 구약학 교수인 그는 2월에 폭격이 시작되었을 때 키이우에 있는 자신의 집을 탈출했고, 서쪽 국경 근처에 정착했다. (그는 네덜란드로 피신해 있던 가족과 이후 재회했다.)그 신학교는 우크라이나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학생들을 위해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면서 전시 상황에 적응했다. 이미 정원이 거의 찬 새로운 과정—군목 과정—이 포함될 가을 학기를 준비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갑자기 전쟁에 소집된 나라이니 이해가 가긴 하지만, 군목 훈련이 군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미나코우는 말한다. 수개월 간 계속되는 폭격, 사망, 파괴, 가족 이산 및 피난으로 인해 PTSD 같은 문제로 고통받는 주민들과 성도들을 돕는 방법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훈련을 목회자들이 요청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에서는 목회자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절실한 도움이 됩니다.” 그는 말한다.목회자들에게는 또한 비상한 상황들 가운데서도 일상의 교회 개척 사역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미나코우는 우크라이나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는 목사들과 신학생들이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잘 반응하고 있는 지역에서 올바른 설교를 하는 더 많은 교회의 필요성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생명에 위협받고 있기에, 큰 질문을 던집니다.” 지역 사회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필요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성경과 그리스도가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하고 진정한 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추수할 밭이 된 전시세르게이 라쿠바는 고향 우크라이나를 포함하여 유럽 전역의 교회 지도자들을 훈련하고 동원하는 복음주의 사역인 미션 유라시아(Mission Eurasia)의 대표로서 목격한 지역 교회 반응 사역에서 용기를 얻는다.이 사역은 인도주의 단체는 아니지만 지난 6개월 동안 많은 구호 사역을 폈다. 지역 교회들과 협력하면서 이 단체는 수천 명의 어린이를 위한 난민 센터들과 데이 캠프들을 지원한다. 우크라이나 내에서도 이 단체는 러시아가 점령했다가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탈환한 지역의 주민들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을 가장 먼저 보냈다.세르게이 라쿠바 미션유라시아 대표가 피해를 입은 본부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Image courtesy of Mission Eurasia.라쿠바는 사역팀이 2, 3개월 동안 러시아가 장악했다가 우크라이나군이 탈환한 지역에 있는 , 약 5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한 마을에 최근에 닿았다고 말했다. 그 팀은 주민들이 굶주림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러시아 군인들이 이 작은 마을에 있는 소를 전부 도살했다고 보고했다. 그 팀은 주민들에게 음식과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이 사역은 다른 지역에서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라쿠바는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하면서 최전선에서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는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교회들이 파괴의 잿더미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한다.미래에 대한 희망다시 키이우. 세르게이 나쿨 목사는 계속해서 적응하고 있으며, 극동방송 라디오 네트워크에서뿐만 아니라 키이우에 있는 그의 회중과 함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계속 목격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 곧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지만, 최근에 피난 후 처음으로 아내가 찾아와서 힘을 얻었다고 말한다. “신혼여행 같았습니다.” 그가 말한다. “완전하게 새 기운을 얻은 6일이었습니다.”이 목사 부부가 다시 결합할 때까지는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새 힘을 얻을 것이라고 나쿨 목사는 말한다. “저는 사람들에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보증은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소중한 약속을 신뢰하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나쿨은 전쟁이 처음 시작됐을 때 자신이 강조한 메시지가 그가 지금도 여전히 선포하고 있는 메시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관련 기사•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기착지가 되어 주는 교회들•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남아서 섬길 것이다•우크라이나 선교사들에게도 밀려든 불안한 위협•우크라이나 난민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폴란드 교회원제: Church in the Trenches: 6 Months of Wartime Ministry in Ukrai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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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었다?
by Greg Lanier
2022-08-23
하나님이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이)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울”이라고 부르는 중요한 인물의 이름을 바꾸셨다는 ‘접착성 강한’ 오해를 나는 지금도 계속 마주하고 있다.“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최근에 들은 설교의 한 대목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한 학생이 시험 답안지에 “복음의 주요 메신저는 바울로 개명된 사울”이라고 썼다. 한 교인은 나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잠깐만요.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지 않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문제는 이런 개념이 널리 퍼져 있지만 맞지 않다는 것이다. 나도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인기 있지만, 성경에는 근거가 없다이런 생각이 어디서 유래하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몇몇 부지런한 사람들이 연구한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이 ‘바울로 개명된 사울’ 개념은 구약의 이야기를 위대한 사도의 이야기로 영리하게 다시 읽은 데서 연유한 것 같다.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구약의 두 족장의 이름을 분명히 바꾸셨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창 17:5), 야곱을 이스라엘로(창 32:28). 이 이야기를 기초로 해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사도행전 9장)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 같다.그러나 성경에는 사울-바울 이름 변경을 지지하는 증거가 없다. 다음은 이 인기 있는 개념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여섯 가지 성경의 증거다.1.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신다(행 9:4).이 이야기에는 예수님이 그때부터 사울의 이름을 바꾸셨다는 어떤 내용도 없다. [자신이 사도가 된 내력을 밝히는] 갈라디아서 1:15-17에서 바울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으로 구별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2. 아나니아는 회심한 그를 “사울”이라고 부른다(행 9:17).이름 변경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이, 그리스도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나타나신 이후의 그를 여전히 “사울”이라고 부른다.3. 성령이 첫 선교 여행을 앞둔 그를 “사울”이라고 부르신다.사도행전 13:2은 이렇게 전한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있다.’” 앞서 9장에서 성삼위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시며 이름을 바꾸셨다면, 여기 13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번째 위격께서 굳이 그를 “박해자” 시절의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건 정말 어색한 일이다. 4. 회심 후에도 그는 열한 번이나 더 “사울”이라고 불린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셨다면 이건 어색한 호칭이다.5. 사도행전에서 “사울”에서 “바울”로 분명하게 바뀌는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 선교 여행을 떠난 후에 한 번만 나온다.이 미묘한 변화는 사도행전 13:13에서 일어난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건너갔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의 이름을 “바꾸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누가이다.6. 사울과 바울은 줄곧 같은 사람의 두 가지 이름이었다.사도행전 13:9이 핵심이다. “그래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술사를 노려보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회심한 사람은 “그리스도인 바울로 개명된 박해자 사울”이 아니라 사울과 바울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사울과 바울은 회심 전과 후에 모두 사용된 이중 이름이다.바울은 사울이다밝혀진 바와 같이, “사울”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초대 왕이자 사울/바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에서 유래한 이름으로(빌 3:5), 단순히 이 사람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일반적인 코이네 이름인 “바울”은 라틴 성씨 파울루스에서 나온 그의 그리스어 이름이다.다소에서 태어났지만(행 21:39)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바리새파 교육을 받은 사람(갈 1:14; 빌 3:5-6)인 그에게 이는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영어권 세계로 이주한 많은 이민자가 민족 이름에 영어식 이름을 더하여 사용하는 것처럼, 바울 시대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많은 유대인이 유대인/히브리어 이름과 헬레니즘/그리스 이름을 같이 사용했다.스모킹 건은 여기 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 때에 히브리 말로 나에게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하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행 26:14). 바울은 예수께서 자신을 히브리 이름으로 부르셨다고 주의를 기울여 설명하면서도, 지금은 그 이름이 버려졌다고는 말하지 않는다.사울/바울이 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방인 중심의 사역을 시작할 때(사도행전 13:9에서 시작),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그를 헬라어 이름으로만 부르기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바울”로 언급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예루살렘에도 헬라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누가는 사도행전의 더 넓은 주제(예: 1:8)를 고려하면서, 13장 즈음에서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을 바꾸어 주제를 제시한 것이다. 결국 그 교회의 핵심이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에서 로마와 같은 그리스 중심의 “땅끝”으로 옮겨 가고 있다.이 사도만 두 가지 이름을 가진 것도 아니다. 신약에 나오는 다른 몇몇 인물들도 두 가지 이름이 있다. 요셉은 나중에 바나바라고도 불린다(행 4:36). 시므온은 니게르라고도 불린다(행 13:1); 도마는 디두모라고도 불린다(요 21:2). 이들이 전부도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까닭그렇다면 이 문제를 명확히 따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울(나쁜 사람)에서 바울(좋은 사람)로 이름이 바뀌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가치 있는 실례라면, 왜 내가 그 사람의 앞길에 비가 내리기를 바라겠는가?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신학적 아이디어는 매력적이고 유용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박해자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 예수님이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다는 개념에서 강력한 적용점을 끌어내기란 정말 수월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들 설교하려고 할 것이다. 성경에서 이름과 정체성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이들로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성경에 없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설교가 재미없어지더라도 말이다.이러한 원칙은 이 상황을 넘어서도 물론 적용되어야 한다. 또 다른 흔한 오류는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이 구유 앞에 함께 있는 그림이다. 동방 박사들은 같은 시간에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건 몇 달 후였다. 우리는 잘못된 본문에서 올바른 교리를 도출할 수도 있고, 올바른 본문에서 잘못된 교리를 도출할 수도 있다.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고 가능한 한, 모든 영역에서 말씀에 충실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경에서 끌어낸 것으로 보였는데 사실은 성경과 무관한 적용이었다는 걸 아는 순간―그것이 아무리 유용하거나 멋진 적용이라 하더라도―자신이 내내 속았다고 생각하게 될 터이고, 그러면 정말 믿음이 약해질 수도 있다.원제: No, ‘Saul the Persecutor’ Did Not Become ‘Paul the Apost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사울과바울
바울의회심
베드로의 장모의 눈으로 보는 예수
by Rebecca McLaughlin
2022-08-22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만나신 사람들은 대부분 익명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많은 여성 역시 익명이라는 사실에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사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남자들을 고쳐주신 이야기들 가운데서도 이름이 나오는 이야기는 다음 사례들이 전부다: 마가가 유일하게 이름을 밝히는 맹인 바디매오(막 10:46), 요한이 유일하게 이름을 밝히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요 18:10), 그리고 나사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여성들도 한 명을 빼고는 모두 그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신원이 드러난 그 여인도 이름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여인의 신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그녀가 예수님의 한 제자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 뿐이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더러운 귀신 들린 남자가 소리쳤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막 1:24). 예수님이 그 귀신을 꾸짖으신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그 악한 귀신이 그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그 남자에게서 떠나간다. 이 사건 때문에 온 갈릴리에 예수님의 명성이 퍼졌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다.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정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막 1:29-31).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사람들은 대부분 낯선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은 익히 아시고 계셨을 사람을 고치신다. 상세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 그 여인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고치시자마자 그녀는 시중을 든다. 우리 모두를 위한 모범마태, 마가, 누가 모두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우리는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예수께서 치유를 베푸신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이 여성을 유독 조명을 받는 것일까? 여성이 시중을 들었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복음서 이야기 전체의 틀 안에서 읽는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가 그저 한 여성의 위상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여인, 곧 베드로의 장모를 가리키는 ‘섬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디아코네오)는 예수님이 광야의 유혹을 물리치셨을 때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다고 했을 때도 사용된다(막 1:13; 마 4:11). 이 동사는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고 있을 때, 시중을 드는 베다니의 마르다를 묘사할 때도 등장한다.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셨다(눅 10:38-42).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이 동사가 예수님을 묘사할 때도 쓰인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 10:43-45). 베드로의 장모가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보인 반응은 단지 여성들을 위한 모범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모범이다. 예수님의 나라에서 섬김은 여성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의 일이다.스스로 섬기는 이 여성의 눈을 통해서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우리를 손수 이끄시어 높이 세우시는 분이다.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우리를 만지시기만 하면 바로 우리의 고통을 들어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그를 섬길 힘을 가지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다. 1662년 성공회 공동기도서는 하나님을 “그의 섬김은 완벽한 자유”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그 본을 본다.우리는 현대인의 삶에서 섬김과 자유가 상반되는 걸 너무나 자주 목격한다. 그러나 2천 년 전에 베드로의 장모는 현대 심리학자들이 최근에야 발견하게 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 인간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길 때 번성한다. 끊임없이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자유”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육체의 치유와 영혼의 치유마태, 마가, 누가에서, 베드로의 장모와 악마에게 사로잡힌 남자의 치유 사건은 수많은 병자와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예수께로 밀려오는 계기가 되었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마을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또 병자를 모두 고쳐 주셨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여기서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치유가 함께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주께서 어떻게 히브리 성경을 성취하시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마태가 예수님의 행동들을 구약의 예언으로 거슬러 올라가 함께 묶는 것을 본다. 이 문맥에서 인용된 구약의 예언은 이것이다.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사 53:4-5).“고통”(grief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에는 “병”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그리고 “슬픔”(sorrow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에는 “고통”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여기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의 신비를 본다. 그는 하나님 백성의 병과 죄와 고통을 대신 지신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육체와 영혼이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실 때, 그는 그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하신다. 부활의 삶예수님이 우주적 진리의 위대한 교사로 자주 묘사되지만 온 우주의 위대한 하나님으로는 자주 묘사되지 않듯이, 사람들은 종종 우리의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일을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벌을 받으시는 그의 일과 분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마태는 우리가 이렇게 쐐기를 박는 걸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형벌을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의 다가오는 새 창조로,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여셨다(계 21:4).우리는 지금 여기서 죄와 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열쇠 구멍을 통해 완전히 새롭고 다른 세상을, 예수님과 그의 부활의 삶이 죄와 고통을 영원히 없애버리는 곳을 들여다보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주러 오신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또한 그의 삶을 우리와 함께 나누러 오셨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다. 그때 그녀는 예수님의 부활의 삶을 조금 맛본다. 그리고 그렇게 맛본 그 부활의 삶으로 그녀는 섬긴다.원제: Jesus Through Peter’s Mother-in-Law’s Ey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고난받는종
섬감과자유
섬김
부활의삶
고통
천국
재택근무 중에도 동료를 사랑하는 다섯 가지 방법
by Whitney K. Pipkin
2022-08-21
일 년째 원격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안 간 지 한참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동료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휴식 시간에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동료들과 멀게만 느껴지고 도무지 서로의 관계를 돈독하게 할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요?거의 십 년 동안 나는 완전히 외진 뉴스룸에서 일했고, 종종 동료들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고심했다. 누군가가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눈물을 참으며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그 사람의 필요를 알아채고 채워주는 건 쉽다. 하지만 이메일만 읽고서 상대편이 어떤 마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는 건, 더는 같은 물리적 공간에 있지 않다고 해서, 동료를 알고 사랑해야 할 필요성이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임을 안다. 그런 당신을 칭찬하고 싶다. 고린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 삶의 모든 면을 재평가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을 향한 바울의 격려가 생각난다. (팬데믹 중에 우리도 똑같은 유혹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4)고 상기시킨다.여기서 ‘거하라’에 사용된 단어는 요한복음 15:4의 ‘거하다’와 똑같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직장 관계에 적용되는 이 구절은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삶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를 일깨워준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안에서 머물며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하나님과 함께”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 우리가 애쓰는 것과 별도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한다. 하나님은 재택근무 지침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다. 계속되는 줌(Zoom) 호출 때문에 취소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일과 우리 주변 사람들 가운데서 항상 일하고 계신다.동료를 사랑하는 것은 이제 더는 열두 개짜리 도넛 상자로 생일 축하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는 몇 가지 방법이 여기 있다. 1. 일을 잘하라.재택근무 때문에 사랑하는 게 힘든 것이 아니다. 재택근무가 힘들게 하는 건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린 자녀가 있거나 홈오피스를 배우자와 공유하면서 계속해서 회의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온라인 쇼핑 때문에 또는 바로 옆에 있는 스낵 유혹 때문에 쉽게 산만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상황을 떠나 동료를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골 3:17).바울은 또한 일을 잘하는 것과 이웃 사랑을 연결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1-12).우리가 맡은 일을 잘하는 것이 모든 소망의 근거이다(벧전 3:15).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 자체로 고객이든 동료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2. 당신의 이웃을 알라.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던 날이 그립다. 얼굴을 볼 때 대화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외에도 다른 방법이 있다.상호작용이 부족할 때는 약간의 관심만 보여주어도 큰 도움이 된다. 동료의 삶에 숨겨진 세부 사항을 기억하고 대화 중에 꺼내 보라. 동료가 고양이 문제로 수의사의 전화를 받았던가? 그 고양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라. 이빨 신경 치료를 앞두고 있다면 그 이야기를 하라. 손자 이야기도 꺼내 보라. 당신이 잘 섬기고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고 노력하라. 그 사람을 공부하는 학생이 되라. 그러면 피상적인 세상에서 당신의 관심은 많은 이에게 큰 감동을 줄 것이다. 이를 위해 일 관련해서 이야기하면서도 꼭 시간을 만들어서 그 사람의 관심사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라. 잘 지내냐고 묻지만 말고 그 속에 진심을 담아라. 다시 말해서 말하기는 더디하고 듣기는 속히 하라는 것이다(약 1:19). 할 일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해도,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도록” 성령께 간구하라(빌 2:3-4).3.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중보 기도보다 더 큰 이웃 사랑은 없다. 중보 기도는 앞으로 언젠가 있을 하나님의 섭리의 순간을 위해 내 마음 밭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위해서라도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연습은 기도로 이어진다. 폴 밀러가 일상기도(A Praying Life)에서 쓴 것처럼, 기도 일지나 기도 카드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으면 기도하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고 기도 대상에 더욱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그들을 위해 꼭 필요한 성경 말씀을 찾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기도 카드가 특히 유용한 건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며 바라보도록 한다는 점이다. 기도하는 습관을 익히면 게임 전체가 바뀐다. 가족을 잃거나 자녀와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동료에게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나중에 기도와 관련한 후속 조치까지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원한 만큼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용기를 잃지 마라. 우리를 대신해서 항상 기도하는 중보자가 계시니까. 우리가 기도를 제대로 못 해도, 예수님이 항상 기도하신다. 4. 기회를 포착하라.동료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팬데믹 환경에서도 동료를 사랑할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이다. 재택근무를 하기에 도리어 더 의도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사무실 관리자가 직원 생일 때면 카드를 보내곤 했는가? 달력에 미리 알림을 설정하고 이메일에 생일 축하 카드까지 붙여서 기억하도록 하라. 그 사람이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끼도록 하라. 멀리서도 동료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하라. 코로나로 재택근무하는 동료가 아이들 때문에 고군분투하고 있는가? 아이들에게 필요한 선물을 보내주라. 아픈 동료가 있다면 음식을 배달시켜 주라. 동료를 위로하자. 비슷한 환경에서 당신에게 좋았던 게 무엇인지 기대하라. 그리고 당신이 받았던 그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라(고전 1:3-5).5. 진짜 옆에 사는 이웃을 잊지 말라.당신 집 근처에는 여전히 이웃이 살고 있다. 재택근무를 하면 할수록 그들과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나는 평소에 방해 거리로 생각하던 것을 새로운 기회로 바꿔서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바삐 움직이는 나를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정원사의 경우 말이다. 평소에는 사소하던 미팅이 팬데믹 상황에서는 놀라운 기회로 바뀔 수 있다. 팬데믹 상황이 나아지고 직장이 다시 열리기 시작하면 곧 동료들과 재회할 것이다. 상쾌한 마음으로 사무실로 돌아가 그들을 만나라. 주님을 섬기듯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 모든 일에 당신의 은사를 활용해서 최선을 다하라.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라. 원제: 5 Ways to Love Colleagues Remotel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재택근무
팬데믹
이웃사랑
중보기도
실업은 영적 문제이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by Joe Carter
2022-08-20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교회 지도자들이 “그 성읍의 평안”(렘 29:7)을 제대로 구하려면 경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경제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시리즈는 경제 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리즈의 취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경제와 공공 정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용어실업의미 이 단어를 사전을 찾아보면 상식적인 많은 정의가 나온다. 직업이 없는 상태, 유급 직업이 없지만 일은 할 수 있는 상태 등등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경제 용어와 마찬가지로, 사전상 정의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십대 딸, 이웃의 전업 배우자, 은퇴한 할아버지는 직업이 없지만 그렇다고 실업자로 간주되는가? 따라서 이런 모든 경우를 감안할 때 대답은 하나이다.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다.”미국 연방 정부에 따르면 실업자가 되기 위해 다음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1) 일이 없음 (2) 구직 중임 (3) 일할 수 있음. 사람들은 (임시든 시간제나 그 이상이든) 일이 있으면, 고용 상태로 간주된다. 고용도 또 실업도 아닌 사람들은 아예 노동력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간주된다. 미국에서 노동력은 군에서 현역 복무를 하지 않고, 요양원이나 교도소와 같은 시설에 국한되지 않으며, 직업을 갖고 있거나 구직 중인 열여섯 살 이상의 모든 사람으로 구성된다. 노동력은 또한 취업자와 실업자로 구성된다.따라서 실업은 일자리가 없고, 일자리를 원하며, 일할 수 있고, 또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고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마지막 부분은 “구직 의욕을 잃은 근로자”가 실업자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중요한 이유창세기의 창조 기록은 인간은 태초부터 일하도록 창조되었다고 알려준다. 하나님은 아담을 동산에 두어 “경작하며 지키게”(창 2:15) 하셨다. 우리 대부분은 직장을 통해서 이웃에게 봉사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 베이스(Gene Veith)는 이렇게 말했다. 주기도문을 드릴 때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간구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는 방법은 농부, 제분업자, 빵 굽는 사람의 소명을 통해서이다. 여기에다가 트럭 운전사, 공장 노동자, 은행원, 창고 직원, 계산대 직원까지 추가할 수 있다. 이 나라 경제 시스템 전체, 그러니까 거의 모든 경제 단계가 당신과 내가 오늘 아침 식사로 먹었던 토스트 한 조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음식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때, 그건 지극히 당연하다. 일자리는 이웃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개인과 지역사회 모두를 위한 인간 번영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무엇보다 경제 시스템이 도덕적으로 작동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직업은 개인, 지역 사회 및 경제적 번영에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실업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실업은 지역사회, 가족, 그리고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 웰빙과 자존감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실업 기간이 길어질수록 심리적 안정감은 나빠진다는 보고가 있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일 년 이상 실업 상태였던 미국인 다섯 명 중 한 명이 우울증을 앓거나 아예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 수치는 실업 상태가 5주 이하인 사람들의 거의 두 배에 해당한다. 2016년 글로벌 설문조사에서도 젊은이라고 해도 실업 상태에서는 직업을 가진 노인보다도 신체적 복지가 더 나쁜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신체적 복지에 관해서는 나이보다 고용 상태가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며, 실업 상태인 경우에 특히 더 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직업을 가진 젊은 성인(15-29세)은 직업을 가진 노인(50세 이상)과 동일한 수준(31%)의 복지가 보고되었다. 그러나 실업 상태인 젊은 성인은 직업이 있는 노인보다 낮은 복지 수치(26%)를 보였다. 실업이 주는 가장 안 좋은 영향은 자살로까지 이끌 수 있는 절망감이다. 란셋 정신학 저널(Lancet Psychiatry)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자살자 다섯 명 중 한 명이 직간접적으로 실업과 관련되었다고 한다. 장기 실업은 단순한 정신 건강 위기로 끝나지 않는다. 영적 위기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교회는 그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미국 내 유일한 기관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사람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직업을 찾도록 돕는 것은 더 넓은 공동체의 번영에 기여하며, 따라서 기독교 지도자의 관심사가 되어야만 한다. 기타 세부 사항실업의 유형구조적 실업(예; 일자리는 텍사스에 있는데, 그 일을 할 만한 사람들이 캘리포니아에 많은 경우), 일시적 실업(예; 직장을 옮기는 과정 중에 있는 경우,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일자리를 찾는 사례처럼), 자발적 실업(예; 현재 임금 수준이 맘에 들지 않아 취직하지 않는 경우), 계절적 실업(예; 여름에 일이 없는 스키장 근로자)과 같이 실업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또한 불완전 고용은 시간제 또는 임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풀타임으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관련 개념이다. 일시적이고 자발적인 실업 때문에 적지 않은 경제학자는 건강한 경제 속에는 자연적 실업률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내 자연적 실업률이 3.5퍼센트에서 4.5퍼센트 사이로 간주되기 때문에, 인구의 약 4퍼센트 미만이 실업 상태일 때 우리는 “완전 고용”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직의 의욕을 잃은 근로자”는 누구인가?일자리를 원하고, 지난 12개월 동안 구직 활동을 했으며, 또한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정부는 “노동력 주변부에 붙어 있는 인력”으로 간주한다. “구직의 의욕을 잃은 근로자”는 노동력 주변부에 붙은 사람 중 하나의 하위 집단에 속한다. 구직의 의욕을 잃은 낙담한 근로자는 다음 네 가지 이유 중 하나로 현재 구직 상태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1. 그들은 자신의 전문 직종이나 영역에서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2. 그들은 이전에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3. 그들에게는 교육이나 훈련, 기술, 경험이 부족하다. 4. 고용주의 눈에 자신들이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다른 유형의 차별에 직면했다고 생각한다. 실업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노동통계국은 매달 흔히 “고용 보고서”라고 부르는 고용 상황 요약을 발행한다. 여기에서도 가장 널리 인용되는 수치가 실업률이다. 실업률은 구직 의욕을 잃은 근로자를 포함하지 않기에 보고서 수치 하나만 가지고는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구직을 포기하는 바람에 지난달 아예 구직 활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생기는 경우에 실업률이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 더 중요한 통계는 비농업 고용의 추세이다. 그리고 그 추세의 수치이다. 인구 증가를 따라잡기 위해서라도 경제는 10-15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추가해야 한다. 새로운 일자리의 수가 대체율보다 높은 경우에 고용 전망은 긍정적이다. 그 숫자가 낮다면, 전망이 부정적이고 경제가 침체로 향할 가능성이 높다. 실업 혜택 이해하기정부는 실직으로 인한 재정적 피해를 상쇄하기 위해 실업 수당을 제공한다. 가장 일반적인 혜택은 실업 보험에서 지급하는 주간 급여이다. 실업 보험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실직한 직원에게 임시 수혜금을 제공하는 연방과 주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각 주는 자체 실업 보험 혜택 자격 지침을 갖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라면 자격이 된다. • 실직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어야 한다. 이건 대부분의 주에서 일자리가 근로자 숫자보다 적어서 실직한 경우를 의미한다. • 근로 및 임금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사람들은 정해진 “기준 기간” 동안 벌어들인 임금 또는 근무한 시간에 대한 해당 주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대부분의 주에서 일반적으로 실업 급여 청구가 접수되기 전 마지막 5개 분기 중 처음 4개 분기를 기준으로 한다.)• 해당 주의 추가적인 요구 사항을 충족해야 한다. 실업 수당은 손실된 임금을 부분적으로 대체한다. 따라서 그 금액은 이전에 벌어들인 금액에 따라 달라진다. 주마다 다양한 공식을 사용해 금액을 산정하지만, 모든 주가 예외 없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전 소득을 고려한다. 일부 주에서는 부양가족이 있는 직원에게 추가 혜택 금액을 제공한다. 아론 핫펠더(Aaron Hotfelder)가 지적한 것처럼 이 금액은 작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대부분의 주는 추가 혜택으로 주는 이 금액을 부양 가족당 주당 25달러 이하로 하고 있다. 실업 급여는 과세 대상이며, 연방 소득세 납부를 위해 수혜자는 급여 금액의 최대 10퍼센트의 원천징수를 선택할 수 있다.많은 주가 웹을 통한 실업 수당 신청 제출을 지원하고 있고, 일부 주에서는 무료 전화번호나 여러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당신이 속한 주가 시행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실업 보험은 주로 고용주가 지불하는 연방 및 주 세금(연방 실업세법 및 주정부 실업세법)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근로자를 대신해 고용주가 이 수당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면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할 수도 있기에, 실업 보험은 사실상 간접적인 근로자 보상의 한 형태로도 간주될 수 있다.원제: Economics for Church Leaders: Unemployment Is a Spiritual Proble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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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문제다
by 고상섭
2022-08-19
영화 ‘기생충’은 경제적 양극화를 다룬다. 같은 비라도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문제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된다. 영화는 단순히 영화로 끝나지 않고 2022년 오늘의 이야기로 다시 등장한다. 수도권에 100년 만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빌라에 거주하던 발달장애인과 십대 여학생 등 일가족 3명이 빗물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시에서도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고, 교회와 여러 단체가 수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는 손길을 펼치고 있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면 폭우의 문제와 안전의 문제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가난의 문제가 그 뿌리에 있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양극화가 신림동 반지하까지 사람들을 몰아갔기 때문이다. 교회는 재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역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교회가 해야 하는 중요한 사역 중에서 이웃에게 경제적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사역을 ‘정의 사역’이라 명명하며 강조한다. 왜 정의 사역인가? 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선은 경제적, 물리적 필요를 채워주는 실제 원조이어야 하고, 이것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이라 말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으면 단지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오늘을 사는 잠언, 43).왜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이 불의한 일이 되는가? 구약성경에서 ‘정의’ ‘공의’라는 단어는 ‘미쉬파트’이다. 미쉬파트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2백 번 이상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데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을 공평하게 대한다’이다.“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위기 24:22에 나오는 ‘법’이라는 말이 바로 ‘미쉬파트’이다. 이 단어는 ‘동일하게’ 법을 집행하라는 의미이다. 즉 징벌이든 보호든 보살핌이든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그에게 돌려준다는 의미이다. 특히 4대 취약 계층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고 보호하라는 의미로 ‘미쉬파트’가 사용되었다. 팀 켈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이런 집단을 어떻게 대우하느냐는 한 사회의 미쉬파트(정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어떤 식으로든 취약 계층에 속하는 이들을 외면하는 처사는 자비와 자선의 부족이라는 차원을 넘어 정의, 곧 미쉬파트를 짓밟는 행위로 규정해야 마땅하다”(정의란 무엇인가, 36).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은 교회가 베풀어야 할 자선이 아니라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정의 사역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은혜이며, 우리는 세상의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교회의 정의 사역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정의 사역의 동기 정의 사역의 동기는 가난한 사람을 향한 긍휼이 아니라 은혜이어야 한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요구할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자비를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에게서 너그러움이 흘러나와야 한다”(여리고 가는 길, 82).복음과 종교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순종하느냐 아니면 순종을 통해 원하는 복을 추구하느냐의 차이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통해 어떤 보상이나 공로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일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인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을 때 분노하며 들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버지의 명을 다 지켰는데 보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을까? 바로 자신에게 있을 유익과 복 때문이었다.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에서 첫째 아들이 품은 마음의 동기를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아들은 그의 선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선함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것이다. 첫째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벽을 만드는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도덕적 삶이었다. 그의 악행이 아니라 의로움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다”(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45).교회의 정의 사역은 교회가 더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을 돕는 자선의 의미가 아니라 마땅히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돌려주는 의미이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이며 그것을 나눠주어야 할 청지기로서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은혜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공로로 사람을 돕게 되면 정의 사역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가난하기는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집에 가보면 다 살만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 태도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문제라면 벼랑 끝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어떻게든 손을 쓰려고 하면서, 왜 이웃에게는 굶어 죽을 지경이 돼야 도움을 주려고 하느냐”(정의란 무엇인가, 116).또 “나누고 자시고 할 여력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네 식구 먹고 살기도 빠듯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굴 도울 힘이 없다는 말은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잘라내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누군가를 도와줄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상대방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하신 것처럼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그 이웃의 몫을 나누는 것이다. 정의 사역의 실천 정의 사역을 시작하려면 먼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교회와 지역 공동체로 관심의 원을 넓혀가야 한다. 직계 가족을 포함한 근친 중에서 장애인, 노인, 만성질환 환자가 있다면 그들을 돌보는 사역으로부터 시작하면 된다. 지역사회를 섬기면서도 혈연에게조차 자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다음은 교회이다. 먼저 교회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조사해서 다각도로 섬겨야 한다. 때로 교회에서 기금을 조성해서 전달하거나 비공식적인 통로로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웃이나 지역 공동체이다. 슬픔, 상실, 이혼, 질병, 장애, 개인 문제 등으로 힘들어하는 이웃은 없는가? 이주민 가정이 눈에 보이거나, 노숙을 하는 사람들을 섬길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노력하면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관심의 원을 확대하라(여리고 가는 길, 170).또한 정의 사역은 긴급한 필요를 채우는 데만 급급해서는 안 된다. 장기적인 사역의 계획이 필요하다. 한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면 단순 후원금 이상이 필요하다. 자립할 수 있게 도와야 하고, 위협적인 사회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팀 켈러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약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단계를 소개한다. 첫째. 구제의 단계이다. 구제란 말 그대로 신체적, 물질적, 경제적으로 시급한 필요를 직접 채워주는 것을 말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응급처치를 해 주고 회복 기간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는 구제 활동을 펼쳤다. 수해를 만난 사람들에게 물품을 기부하거나, 궁핍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나눠주거나, 최소 비용이나 무료로 병을 고쳐주거나 상담을 해주는 식의 섬김은 흔히 할 수 있는 구제 사역이다. 둘째, 개발의 단계이다. 개발은 개인이나 가족 또는 공동체 전체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여 구제 단계의 의존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일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을 보면 종의 부채를 면제하고 해방해 줄 때는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가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을 넉넉히 제공하라고 주인들에게 명령했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종의 해방, 이삭줍기, 희년에 관한 갖가지 율법 규정이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집 마련을 돕는 작업뿐만 아니라 교육, 일자리 창출과 직업훈련, 취업 정보, 재정 자문과 같은 항목들이 들어 있다. 물론, 개발은 구제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며 복잡하고 비용부담도 큰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구제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들의 자립을 위한 개발 단계를 고민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은 단순히 개인의 구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회복이었다. 셋째, 개혁의 단계가 있다. 개혁은 즉각적인 필요를 채우는 구제와 의존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의 차원을 넘어 의존성의 문제를 만들거나 약화하는 사회적 조건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노력이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던 사마리아인이 여리고를 갈 때마다 강도 난 사람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가 출현하지 않도록 방범을 강화하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구조적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사회 개혁의 문제까지 확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회 시스템과 직접 맞닥뜨린다는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이 변하다 보면 언젠가 사회 전체가 변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편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개인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죄를 외면한 채 개인적으로 구제 활동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한 교회의 영향력이 크지 않은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먼저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구제의 일이다. 또 개발의 단계에도 어느 정도 참여하고 헌실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교회가 맡아서 하기에는 힘든 일이기에 개발의 단계에서는 지역교회의 연합이 필요하다. 한 교회가 세 가지 단계를 모두 하려면 가장 중요한 복음과 말씀 사역이 흔들릴 수도 있다. 개발과 개혁의 단계는 교회뿐 아니라 지역사회 단체들과 연관해서 함께 일하는 것이 좋고, 교인들에게도 비영리 조직과 연합해서 개발과 개혁에 동참하여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쉽게 말해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교인들을 훈련하여 복음의 영향력이 담긴 작품을 만들게 할 수는 있지만 교회가 스스로 영화를 찍는 회사를 설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는 기관이나 조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구체적인 적용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 주권이란 개념을 이야기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양육하는 책임이 있다. 그럴 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세상과 구별된 방식으로 예술, 과학, 교육, 언론, 영화, 비즈니스를 이끌어 가는 그리스도인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개인을 길러내지만, 지역교회가 자체적으로 특정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카이퍼는 제도적 교회와 유기적 교회를 구분했다. 제도적 교회는 교회의 기관으로 공동체 안팎의 식구들을 구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바탕으로 복음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도들을 양육하는 기능을 감당한다면, 유기적 교회로서 교회는 개발과 사회개혁 활동을 위해 다양한 기관, 단체와 연합하여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정의 사역은 극도의 정밀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지역교회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일꾼들을 통해 말씀과 행동, 양면에 걸쳐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구제와 개발, 사회 개혁에 뛰어들어야 한다. 빈곤의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단순히 총과 칼로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그 종류가 다르다. 복음으로 무장해야 하고 교회가 함께 교회와 지역사회를 도와야 하지만, 또한 개혁의 차원에 눈을 뜨고 동참하며 활동해야 한다. 단지 구제에만 집중하는 교회가 있고, 또 복음을 제쳐 두고 사회 개혁만을 부르짖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언제나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고, 하나님의 복음은 개인과 사회구조 모두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제 교회는 단순한 구제를 넘어 개발과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의무나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하나님을 가장 아름다운 분으로 여길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가난한 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드리는 일이기에 기꺼이 나설 뿐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흡족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정의란 무엇인가, 170-200).이러한 자세는 구제를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좌절하지 않게 우리를 도와준다. 결국 교회가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을 떨쳐 버리고 정의로워지라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에 먼저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나라의 샬롬이라는 이 땅의 번영으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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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Zach Howard
2022-08-18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이상한 책이다. 많은 옛 책들이 그러하듯이 스타일과 어조는 현대 독자들에게 너무 낯설다. 그러나 고백록의 장르와 구조가 시대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워낙 이례적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동시대인에게조차 이 책은 낯설고 이례적이었다. 그러하면서도 고백록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느끼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여러 우려 사항과 질문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설명함으로써 지난 수 세기 동안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심사는 너무도 보편적이어서 항상 현대적이며, 그의 대답은 지금까지 그 숱한 세월을 다 견디어 왔다. 그렇기에 고백록은 계속해서 여러 세대의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면서도 또 동시에 만족시켜 왔다. 고백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고려하기 전에 먼저 이 책을 처음 대하는 독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세 가지 서로 관련 있는 퍼즐, 곧 청중과 장르와 구조라는 퍼즐을 해결해야 한다. 고백록은 어떤 책인가?지금 여러분 앞에 고백록이 놓여있다고 상상해보자. (더 나은 방법은 선반에 지금 그 책이 있으면 꺼내서 앞에 놓거나 아니면 고백론의 미리보기를 클릭하는 것이다.)독자 퍼즐첫 장을 넘기는 순간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대상이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오히려 시편 기자들처럼 그는 자신의 죄뿐 아니라 찬양까지 더불어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 “당신은 위대합니다. 주님이시여,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1.1.1). 그는 사람에게 직접 말하지 않는다.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당신은 이 책의 정체가 당신이 엿듣도록 고안된 300쪽짜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는 것을 바로 깨달을 것이다. 장르 퍼즐아우구스티누스의 과거 이야기가 전반적인 책 속 풍경에서 이런저런 스토리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기 삶을 연대순으로 이러쿵저러쿵 늘어놓는 것이 애초 그의 목표가 아님을 당신은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럼에도 굳이 자신의 개인사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의 어두움을 통해 그리스도의 자비의 빛이 더욱 빛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2.1.1). 구약의 예언서 및 복음서와 유사하게, 고백록은 자전적 반성, 철학적 탐구, 주석적 묵상을 통합한 혼합 장르의 글이다. 저자의 개인 이야기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섭리의 역사를 더욱더 영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적 회고록이다. 구조 퍼즐마지막으로 목차를 보면 1-9권은 일반적으로 연대순이지만, 10-13권은 기억, 시간과 영원, 하늘과 땅, 그리고 창조의 날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책의 구조가 복잡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고백록의 주제는 광범위하다. 수사학자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술가가 모자이크를 배열하거나 작곡가가 악보를 배열하는 방식으로 고백록을 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각각의 내용을 전체 내용과 밀접하게 연결한다. 거기에 더해, 과거 중요한 에피소드(배 훔치기, 친구의 죽음을 슬퍼함, 환상 속에서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뿐 아니라 현재의 유혹(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교만)을 서술하는 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이런 세부 내용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전체 삶에, 더 넓게는 우주 역사(특히 11-13권의 창세기에 대한 그의 성찰)와 어떻게 관련되는지까지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다. 당신 앞에 지금 놓인 고백록은 회고록처럼 쓰인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합당한 관계에 대한 심오한 신비를 탐구하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기도이다. 왜 고백록을 읽어야 하는가? 이제 나는 고백록을 읽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인 동시에 일곱 가지 핵심 주제를 통해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고백록을 손에 들도록 유혹하려 한다. 1. 하나님과 인간, 그 관계에 관해서첫 문단에서 마지막 문단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 가지 핵심 질문에 대한 답을 엮어간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여러 층의 답변을 제공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 다 다음 첫 번째 단락의 주제를 발전시킨 변형이다. “주님이 우리를 당신께 나아가도록 지으셨으며,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쉼을 얻지 못합니다”(1.1.1). 하나님은 안식이지만 우리는 안식할 수 없는 존재이다. 결국 우리라는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을 찾는다. 그게 과연 진실이라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를 찾아가는 것이 이 책이 다루는 큰 과제이다. 우리 모두 그가 제기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깊은 명상이 당신을 인도하도록 하라. 2. 고백: 죄, 신앙, 그리고 찬양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에 붙인 라틴어 ‘콘페시오’(confessio)는 이 책의 폭넓은 성격을 알려준다. 그는 이 용어를 최소한 세 가지 중복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첫째,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것이 ‘고백록’이라는 제목의 지배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참되다고 믿는 것을 신앙(faith)으로, 마치 신경(creed)을 믿는 것처럼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줄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향해 찬양과 경배를 고백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단순히 죄를 회개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신앙을 선언하고, 고백 속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까지 포함하도록,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고백의 의미를 확장한다. 3. 바르게 정렬된 사랑과 슬픔아우구스티누스의 어린 시절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그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체험한 격렬한 사랑은 그가 결코 슬픔에 관해 낯선 사람이 아님을 의미한다. 어느 날 영혼의 반쪽인 것처럼 사랑했던 소꿉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음은 “슬픔으로 검게” 그을렸다. 회심하지 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영혼에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 11)고 명령했지만, 그는 순종할 수 없었다. 왜였는가? “내 영혼이 사랑하는 잃어버린 소중한 친구가 내가 영혼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한 상상 속의 신보다 더 고귀하고 더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시를 돌이켜 생각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무질서한 사랑에 이렇게 이름 붙였다. “오, 인간을 인간답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광기여!”(4.7.12). 그는 마치 친구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잃어버린 친구로 인해 하나님이 마치 상상에 불과한 존재인 양 슬퍼했다.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나중에 인간이 피조물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법을 고민했다. 그의 대답은 이것이다. “너는 그것들을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도록 하라”(4.12.18). 아우구스티누스는 피조물로부터 아예 고립된 상태에서도 우리가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스토아의 금욕주의를 거부했다. 또한 하나님과 떨어져서도 얼마든지 피조물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에피쿠로스의 방종도 거부했다. 오히려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피조물을 사랑해야 하고, 피조물을 적절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바른 질서를 가진 사랑만이 올바른 질서를 가진 슬픔으로 이어진다. 고백록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인생을 사는 우리가 항상 불안한 마음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다른 피조물을 올바로 사랑할 수 있다. 4. 회심: 이야기의 힘모든 사람의 회심은 다 특별하다. 그럼에도 모든 회심 이야기에는 죄에 대한 속박, 용서와 자유에 대한 열망,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은혜 같은 특정 요소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항복하는 회심이라는 일련의 사건이 사람에 따라서 아무리 극적이거나 또는 지극히 단순하더라도, 모든 회심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과정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유사한 특징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진리를 인식한 아우구스티누스는 1-9권의 절정에 해당하는 회심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에 불을 붙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먼저 세 가지 회심 이야기가 자신의 회심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설명한다. 빅토리누스를 통해서 그는 명예와 부, 그리고 치명적인 교만의 매력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에 대해 배웠다고 말한다. “나는 그를 닮고자 열망했습니다”(8.5.10). 다른 사람의 회심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으며, 자신의 영혼을 보여주는 거울처럼 “내가 얼마나 가증스럽고 마음이 비뚤어져 있으며 더러운지”(8.7.16)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다.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그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넘어 하나님을 통해 변화된 삶을 목격함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회심에 얼마나 다른 이들의 회심 이야기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고려할 때, 그가 자신의 강력한 회심 이야기를 나누는 건 당연하다. 생을 마감할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다시 읽으며 과거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동했다. 그리고 그는 독자들도 자신과 같은 은혜를 받기를 기도했다!5. 우리 자신에게 낯선 자들(내면성)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면에서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내면에서 분열되어 있고, 자신에게 숨겨져 있으며, 따라서 자신에게 문제가 된다. 그가 자신 안에서 낯선 자를 발견한 것은 죄가 그의 마음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반영하는 그 무언가를 드러내는 자아 속 어떤 신비를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지의 영역을 표시하는 지도 제작자처럼,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추구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 내면의 삶을 지도로 만들어간다. “영혼의 가장 안쪽 부분”(10.25.36)에 해당하는 기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그는 치유가 여전히 절실하게 필요한 “상처 난 마음”(10.41.66)을 발견한다. 자아 깊숙한 곳에 있는 이 비극적인 상처를 의식한 그는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의사”(10.3.4)로서 갈구한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치유하시고, 자신을 하나님께로 다시 인도할 “진정한 중재자”(10.43.68)가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6. 시간 안에서 구원받음(임시성)삶 전체를 되돌아보는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지 현재 자신이 누구인지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궁극적으로 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도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는 성경의 증거를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잘 알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스스로에 회의감을 갖게 될 때도, 그는 바울처럼 미래를 향해 시선을 확장한다(빌 3:12-14). 마지막을 바라볼 때 그의 시작은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마지막 때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시간에 맞게 우리를 구속하신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이다. 7. 책이 가진 변혁의 능력청년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책으로 “개종”했다. “이 책은 내 열정을 바꾸어 놓았고 내 기도가 당신께 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 나로 하여금 다른 소망과 갈망을 갖도록 했습니다”(3.4.7).그러나 고백록 속에 성경보다 더 큰 책은 없다. 철학자의 책이 진리에 대한 열망을 일깨워주었다면, 성경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주었다. 그의 회심의 절정은 “톨레 레게”(tolle lege)를 외친 어린이의 목소리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난다. “그것을 집어들고 읽어라.”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13:13-14을 읽었다. “그 구절 끝에 이르자마자 즉시 확신의 빛이 내 마음 안에 부어졌으며 모든 의심의 어두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8.12.29). 그는 창세기 1-2장에 대한 확장된 묵상으로 고백록을 끝맺는다. 왜냐하면 창조로 시작해 완성에 이르는 성경의 구원 이야기 안에서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백록을 읽어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를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를 확인하라. 그리고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놀라운 드라마에 빠져보라. 톨레 레게, 지금 당장 고백록을 집어 들고 읽어라!원제: Confessions: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고백록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by Wayne Grudem
2022-08-17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우리는 웨인 그루뎀 교수와 제이슨 드루치 교수에게 각자의 오래된 지구와 젊은 지구 관점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 다음 서로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_제이슨 드루치 · 오래된 지구_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_웨인 그루뎀 ·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웨인 그루뎀 · 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제이슨 드루치나는 젊은 지구에 찬성하는 드루치 박사가 사려 깊고 명확한 주장을 전개한 점에 대해서 감사하고 싶다. 또한 이번 토론이 지구의 나이와 관련해서 얼마든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지만, 여전히 교리적 정통 내에서 우리가 피차 한 형제라는 사실을 확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 강조한 그에게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전개한 여섯 가지 논증에 설득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가장 자연스러운 읽기’라는 주장대답 1: 어떤 구절을 읽었을 때 처음 이해되는 내용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다.드루치 박사는 “성경의 서문을 가장 자연스럽게 읽을 때 우리는 젊은 지구를 받아들이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는 창조의 6“일”이 왜 “비록 나흘째까지 태양이 창조되지 않았더라도(창 1:14-19), 일관되게 이 계시의 전달자가 하루를 달력상 24시간에 해당하는 날로 묘사하고 있는지”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그는 젊은 지구 관점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성경 읽기의 결과”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표현을 “읽었을 때 드는 첫인상”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일반 독자가 어떤 구절을 처음 읽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바로 그 의미 말이다. 그러나 여러 번 본문을 반복해서 조사한 결과 첫 번째 이해가 옳지 않았음이 드러난 사례는 성경 안에 많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전 1:5)를 읽고, 성경이 해가 밤에 되면 빠른 속도로 지구 주위를 돈다고 가르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해는 다음날 아침이면 동쪽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결국 과학적 관찰은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자전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했고, 첫인상 또는 “가장 자연스러운 읽기”가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전도서 1:5은 지상에 서 있는 관찰자의 눈에 보이는 태양의 움직임을 묘사했을 뿐이다. 비록 태양 중심이 우리가 읽은 첫인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올바른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에 대해서 읽고 이해한 우리의 첫인상은 올바른 게 아닐 수 있다. “날”은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창 2:4에서와 같이) 얼마든지 긴 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그리고 최초의 독자는 나흘째까지(창 1:14)는 어차피 “날과 해”를 구분하는 데 필요한 태양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따라서 창조의 처음 사흘은 (적어도) 보통의 날과는 어떤 형태로건 달랐으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그럼 과학은 어떻게 되는가? 대답 2: 과학적 증거는 설명을 요구한다. 나는 드루치 박사가 젊은 지구 지지자로서 지구, 달, 암석의 방사성 연대 측정, 수많은 별 사이의 수십억 광년 거리, 우주의 팽창률, 수백만 년 전에 타버린 먼 별의 관찰, 대륙 이동 속도, 북극의 수십만 년의 얼음층, 호수에 있는 수만 년에 걸친 퇴적층 등등을 통해서 드러나는 극단적으로 많은 나이를 가진 우주, 특히 지구의 나이에 관한 증거에 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은 것에 약간 놀랐다. 이러한 과학적 관찰은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오래된 지구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이며, 이 증거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안적 해석이 제공되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창세기 1-4장 전체를 다 ‘태초로’ 대답 3: 신약성경은 창세기 1-4장 모두를 “시작”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성경의 주요 이야기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인간의 창조, 타락, 구속의 역사를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4장의 사건이 모두 다 “태초”로 언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적 관점에서 바로 그 사실이 창세기 1-4장이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관련하여 기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가 드루치 박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야구의 “9이닝”이 아니지만, 창세기 1-4장은 모두 첫 번째 이닝과 더 비슷하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다윗을 통해서, 나아가서 바벨론 유배와 귀환, 예수의 삶과 사역 및 죽음과 부활, 교회의 설립,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진행되는데,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구속 이야기 속 남아있는 나머지 8이닝을 구성한다. 족보의 역할대답 4: 창세기 5장과 11장에 있는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보여주는 신약성경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족보는 홍수 이전 세대의 놀라운 장수 능력과 건강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결코 지구의 나이 또는 인류의 나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드루치 박사는 성경에서 아들이라는 단어가 때때로 손자 또는 증손자를 의미할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따라서 그는 (원칙적으로) 아일랜드 대주교 제임스 어셔(James Ussher)가 만든 창조가 발생한 날짜, BC 4004년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족보에 담긴 나이를 다 더하면 인류의 나이가 약 6,000세임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실상 어셔 주교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족보에 얼마든지 공백이 있을 수 있고, 족보가 특정 개인만 강조해서 표시했으며, 초기 세대의 많은 개인이 수백 년을 살았다는 데 동의한다면 인류와 관련해서 10,000년 또는 20,000년이라는 숫자를 반대할 이유가 거의 없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오래 참으심대답 5: 수십억 년 동안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지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더 큰 영원하심과 그의 무한한 오래 참으심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숙고하도록 자극한다.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라고 기록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말하는 현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138억 년이 전혀 긴 시간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그 시간은 초속 186,000마일로 여행하는 먼 별에서 오는 빛이 땅에 닿아 우리의 경외심을 일깨우고, 그토록 광대한 우주를 만드실 수 있는 창조주의 무한한 지혜와 권능을 생각하면서 경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평화로운 동물의 죽음이라는 가능성대답 6: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전에는 식물처럼 동물도 정상적인 수명을 살다가 조용하고 평화롭게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경고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그들이 죽는 것이지, 결코 짐승도 죽는다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한다. 타락과 더불어 죽음은 동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anthropos의 복수형, “사람, 인간”)에게만 퍼졌다(동물은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라).1975년에 변증가 프랜시스 쉐퍼는 과학의 사실과 성경의 가르침 사이에 결코 “결정적인(final) 충돌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타락 전에 동물이 죽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따뜻한 굴뚝 구석에서 개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거기에는 그 어떤 고통이(struggle) 없다. 그것은 마치 나무에서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 같다. … 인간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동물에게는 쫓기거나 괴로움이 아닌, 평화로운 죽음이 드러내는 자연적인 순환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1]드루치 박사는 다가올 시대에 우리가 먹을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동물의 죽음이 허용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식물처럼 동물도 얼마든지 이 지구에서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정상적인 삶의 과정을 살다가 평화롭게 죽었다는 생각에 원칙적으로 이의가 없어야 한다. 그 동물의 시체가 부패하고 죽은 식물과 함께 분해되어 오늘날 지구에서 발견되는 석탄 및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를 생산하는 물질을 제공하고 있다. 나는 드루치 박사가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논증에 대한 답을 제공할 타락 전 평화로운 동물 죽음에 대한 아이디어에 대해서만은 적절한 고려를 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드루치 박사의 사려 깊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시작한 곳에서 끝을 맺겠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구의 나이를 알려줄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시다. 대신 다양한 과학 분야의 압도적인 양의 증거가 우리로 하여금 우주의 나이는 138억 년이고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라는 결론을 내리도록 인도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놀랍고, 참으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우주를 창조하셨다.[주]1. Francis Schaeffer, No Final Conflic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75), 31. 원제: A Response to Young-Earth Argument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진화론
유신진화론
젊은지구론
오래된지구론
‘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by Jason DeRouchie
2022-08-16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우리는 웨인 그루뎀 교수와 제이슨 드루치 교수에게 각자의 오래된 지구와 젊은 지구 관점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 다음 서로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_제이슨 드루치 · 오래된 지구_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_웨인 그루뎀 ·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웨인 그루뎀 · 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제이슨 드루치그루뎀 박사는 전반적으로 기독교 교리와 윤리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다. 그러나 오래된 지구에 관한 믿음에 있어서만은 성경의 증거는 거의 제시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도되는 과학자들의 제안마저 일축한다. 그는 오로지 자연주의적 동일과정설 가정(과거의 자연환경에 작용했던 과정이 현재의 자연현상과 같을 것이라고 하는 가설_역자)에 기초하여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는 과학자들이 제시한 관측 가능한 데이터의 해석을 따를 뿐이다. (분량의 제약으로 인해 다음 답변을 요약 형식으로 제공한다. 자세한 설명과 자료는는 내 개인 웹사이트에서 참조하라.)날이 긴 시간(ages)을 의미한다? 날의 의미를 결정하는 건 맥락이다(예: 낮 vs. 창세기 1:5 및 2:4에 나오는 지정되지 않은 시간). 창세기 1:1에서 2:3에 나오는 일주일이라는 구조와 하루를 단위로 반복되는 끝의 공식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창 1:5, 8, 13, 19, 23, 31)는 날이 긴 시간이 아니라 24시간임을 나타낸다. 일주일이라는 구조가 (일부 고대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비유적일 수 있지만, 모세는 결코 “날”을 긴 시간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창조 주간(출 20:11)에 맞춰서 이스라엘의 주간(6+1)을 만들었기 때문에, 창세기 1장 속 6일은 24시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지구는 저녁과 아침을 생성하기 위해 고정된 광원과 관련하여 단지 회전만 하면 되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은 단순히 “있었다”(창 1:3).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을 “만들거나” “창조했다(창 1:7, 16, 25, 26; 1:21, 27). 또는 창조에 필요한 과정을 인도하셨다(창 1:11-12).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빛”이시요(요일 1:5) 또한 예수님은 “세상의 빛”(요 8:12)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고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사람들의 빛이 되셨다(요 1:3-4). 완전한 새 창조물에는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 마찬가지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땅을 붙드시고 자기 아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영광으로 고정시킨 빛을 통해 저녁과 아침을 마련하셨다고 암시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새 피조물에 빛을 비추시고 있다(고후 4:6). 하나님께서 첫 사흘 사이에 광명체와 별도로 빛을 주셨다는 사실은 “두 개의 큰 빛이…그리고 별들”이 “신들”이라는 기존 이교도 세계관에 반대하여 그것들은 단지 참 창조주가 자신의 우주에 생명과 질서를 공급하는 데 사용하는 이차적이고 불필요한 대리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족보 안에 갭이 있다?“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창 5:6). 그루뎀에게 있어서는 성경 다른 곳에서 만나는 선택적인 족보의 존재(예: 마 1:8-9)가 “창세기 5장과 11장 속 족보에 공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낳았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Hiphil yld)는 족보상의 공백(이름 없는 후손)을 허용한다. 즉, 주어가 후손으로 지정된 사람의 오랜 조상, 그러니까 직계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참조, 신 4:25; 왕하 20:18). 따라서 에노스는 셋의 아들, 손자 또는 더 먼 친척일 수도 있다.아무튼 그루뎀은 창세기 5:6이 연대기적 간격 또는 갭 (즉, 누락된 연도)을 허용한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바는 에노스가 셋의 직계 아들이든 더 먼 친척이든 상관없이 에노스가 태어났을 때 셋이 백오 세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셋의 나이는 그 어떤 시간적 갭이 없이 행동과 결과가 발생한 바로 그 시점을 나타낸다. 어느 정도의 족보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창세기 5장과 11장은 젊은 인류를 암시하는 연대기적 타임라인을 제공한다.타락 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 드러내서 쓴 것은 아니지만, 그루뎀의 입장은 수백만 년 동안의 동물 죽음과 타락 이전의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피조물의 죽음과 불행을 오직 저주와 연관시킬 뿐이다(젊은 지구에 대한 나의 원래 주장을 참조할 것).오래된 지구를 지지하는 과학적인 ‘증거’?그루뎀에게는 오래된 지구를 믿을 만한 설득력 있는 성경적 이유가 없다. 게다가, 젊은 지구에 대한 나의 성경적 논증이 건전하다면, 성경은 그루뎀의 과학적 해석에 심각한 결함이 있으며 성경의 무오한 증언과 반드시 일치해야 함을 지적한다. 그루뎀이 말하는 “팩트”는 사실상 현재 측정 가능한 프로세스가 먼 과거를 이해하는 열쇠라는 그의 믿음에서 생긴, 하나의 관찰 가능한 데이터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그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는 젊은 지구 옹호론자를 비웃고 있지만, 요점은 바뀔 수 없다. 과학적 수단만으로는 결코 지구의 나이를 결정하지 못한다고 아무리 성경과 과학이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동일과정설 가정이 있다. 그가 주장하는 과학적 주장 6가지 모두를 주도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첫째, 성경은 창조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묘사한다. 그루뎀도 이 점을 지지하지만, 빛(light)과 지상의 초목(창 1:3, 11)이 지상의 생명체를 유지시키는(창 1:14) 것과 더불어 여호와의 약속(창 15:5; 렘33:22)과 능력(사 40:25-26; 암 5:8)의 강조라는 유일한 계시 목적을 가졌던 광명체(luminaries)보다 먼저 있었다는 성경의 증언 앞에서 그는 주저한다. 태양이 없이도 생명을 주는 빛을 비추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에 모세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저해야 하는가? 둘째,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라고 주장하며 비웃는 자들에게 베드로는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벧후 3:5-6)라는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이야말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예, 요 2:9-10), 기적은 정상적인 시간 속도를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홍수가 일으킨 열과 압력이 지리, 지질학, 그리고 기후 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을 것이다. 에너지와 힘은 물질의 형성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대홍수를 통해 지구를 구성했기에(창 7:10-24 참조), 홍수가 영향을 끼친 사물의 진행 속도는 분명히 오늘날 측정되는 속도와 매우 달랐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과학만으로는 지구의 나이를 알 수 없는 세 번째 이유는 너무 많은 가정이 과학적 해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를 언급하겠다.1.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그루뎀은 빛의 단방향 속도가 (불필요한) 왕복 속도와 같으며, (성숙한 우주와 대조적으로) 우주는 크기 없이 시작되었고, 또한 우주의 냉각 및 팽창 속도가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일정하게 유지되었다고 가정한다 (우리가 알 수 없고 또한 많은 물리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다).2. 움직임(travel)은 시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빛의 왕복 속도만 측정할 수 있다(예: 오프 미러 = 186,000mi/sec 또는 300,000km/sec). 그루뎀은 빛의 속도가 모든 방향에서 일정하다고 가정하지만(등방성), 빛의 단방향 속도는 사실상 얼마든지 순간적일 수 있다(비등방성). 이것이 창세기 1:14-15이 제안하는 것이다. 3. 극지 빙하의 나이와 형성은 코어에서 예상되는 연간 층 압축 두께를 결정하며, 바로 그 점은 나이를 계산하기 위해 산소 동위원소의 주기를 측정하도록 한다. 만약에 홍수 후 단일 빙하기 어떤 주간에 있었던 폭풍우가 얼음덩어리를 빠르게 형성했다면, 연간 두께는 더 커질 것이며 (아무리 압력이 강하다고 해도 두꺼워졌던 만큼 다시 얇아지지는 않는다), 오래된 지구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단일연도에 닥친 여러 폭풍 주기를 마치 폭풍우 하나가 일 년을 의미하는 식으로 잘못 취급했을 것이다. 4. 오래된 호수 퇴적물의 연대 측정은 패턴과 비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홍수, 허리케인 및 화산 폭발과 같은 재앙은 움직이는 점토 또는 슬러리(slurries)를 생성하며 그 결과, 연간 계절 퇴적물(varves라고 함)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폭풍 또는 홍수 퇴적물(rhythmites라고 함)을 만들어낸다. 또한 바브 계산(varve count), 나이테 계산(tree-ring count), 그리고 방사성탄소-14 연대는 상호 보정을 위해서 사용되어야지, 각각의 결과를 강화하는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5. 암석의 방사성 연대 측정은 지구 역사에서 상대적 형성 순서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루뎀은 우리가 이미 시작 조건(예: 오로지 우라늄[=모 동위원소]만 있고 납[=딸 동위원소]이 없음)을 알고 있으며 오염이나 침출이 암석의 구성을 변화시키지 않았다고 가정한다(그러나 이것은 독립적인 벤치마크 없이는 측정할 수 없다). 또한 그는 붕괴 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었으며, 붕괴를 가속화할 수 있는 그 어떤 열이나 압력의 변화(즉, 재앙)가 주는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가정한다. 6. 판 구조론은 대륙이 더이상 합쳐지지 않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지만(창 1:9-10), 그루뎀은 대륙의 분리 속도가 과거에도 오늘날과 같이 항상 점진적이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급속 분리를 일으켰다고 보는 재난 모델(catastrophe model)도 얼마든지 데이터와 일치한다. 더불어서 재난 모델은 왜 대홍수 이후에 판 이동이 급격히 느려졌는지, 또한 해양 퇴적물의 압축 부족과 해양 지각의 불규칙한 자기 극성 (혼돈스러운 바닷물과의 접촉으로 인한 불균일한 방식으로 일어난 급속 냉각을 암시)까지도 설명한다. 결론하나님은 말씀과 세상이라는 두 개의 “책”을 기록하셨다. 전자의 무오하고 오류 없는 본질(nature)이야말로 항상 말씀이 후자, 세상을 읽는 데에 지침이 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그루뎀은 오로지 과학만으로 지구의 나이를 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 많은 가정을 하며, 대부분은 하나님의 강력한 통제와 홍수 재앙에 대한 성경의 증언에 반대되는 동일과정설 사고에 근거한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태초에 임재하셨고, 그의 말씀은 젊은 지구를 강하게 가리킨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이 관찰 가능한 데이터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해석을 인도해야 한다. 원제: A Response to Old-Earth Argument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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