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시간 관리를 위한 여섯 가지 교훈
by Sarah Eekhoff Zylstra
2022-01-21
나는 생산성을 좋아한다. 그렇다 보니 칼 뉴포트(Cal Newport)와 로라 벤더캄(Laura Vanderkam) 같은 작가들의 글을 즐겨 읽고, 시간 관리에 도움을 주는 다양한 팟캐스트를 듣는다. 나는 생산성과 관련한 정보와 요령을 수집하고 필요한 습관과 목표를 모으기도 한다. 나는 정말로 시간을 잘 관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목적이 이끄는 효과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그러나 시간 관리와 관련한 모든 조언이 결국에 가서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내가 항상 생산적일 수는 없다는 진실 때문이다. 나에게는 느린 날, 중단된 날, 그리고 게으른 날이 있기 마련이다. 오후에는 특히 더 피곤하다. 소셜 미디어 때문에 산만해지기도 한다. 매순간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과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올바른” 일을 하고 매분매초를 효율적으로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피곤과 더불어 게을렀다는 느낌으로 하루를 끝낼 수도 있다.당신은 나처럼 느낀 적이 없는가? 하루 일정을 도무지 쫓아가지 못할 것 같은 때는 없는가? 게으름과 열정적인 활동 사이를 수시로 오가는 것처럼 느낀 적은 없는가?아마 당신도 나처럼 시간과 좀 더 나은 관계를 찾는 길을 모색하고 있을 것이다. 바른 양의 시간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완벽하게 만드셨는지를 막 이해하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홈스쿨링을 하는 엄마였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우리에게 딱 적절한 양의 따뜻함과 빛을 주기에 적절하게 맞춰져 있다. 지구에는 호흡뿐 아니라 우주의 추위와 태양 복사로부터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정확한 대기가 형성되어 있다. 게다가 정확한 양의 중력, 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정확한 토양, 물 순환에 적합한 정확한 양의 물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꼭 맞는 식물과 동물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적절한 몸도 가지고 있다.모든 것은 일종의 제약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주 공간에서 숨을 쉴 수 없다. 화성에서 작물을 재배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금성에 있다면 당장 타 죽을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지구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구가 감옥은 아니다. 지구는 우리를 위해 완벽하게 설계되었다.시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나님은 계절 속에 몇 주를, 그리고 한 주 속에 각각의 날을 분명하게 구분하셨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완벽한 한계이다. 연구에 따르면 매일 밤 예닐곱 시간의 수면이 우리 몸에 가장 좋다고 한다. 최적의 근무 시간은 하루 약 여덟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일주일에 서른여덟 시간 이상 일하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쉰 시간 넘게 일하면 생산성이 급감한다. 주7일제(창세기에 나와 있는 시간의 표준)는 너무도 뿌리 깊게 박힌 시스템이다. 그래서 그런지 과거 소련이 주5일제를 시행하고, 프랑스가 주8일제를 시행했을 때, 그 결과는 둘 다 끔찍한 재앙이었다.깨끗한 공기와 채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하루와 한주와 한해라는 시간을 좋은 선물로 창조하신 것이라면, 그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도록 할까? 너무 느슨하거나 너무 빠듯한 경우나는 아이오와에서 자랐다. 그곳에선 달력을 보는 것보다 옥수수 밭을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농부가 밭을 관리하는 행동 방식은 우리가 시간을 관리하는 행동 방식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극단으로 떨어질 수 있다. 너무 느슨하게 풀어 놓거나 아니면 너무 꽉 조이는 경우이다. 너무 느슨하게 풀어 놓는 밭은 엉망이 되기 마련이며, 바위와 잡초가 사방에서 솟아나서 농작물을 죽인다. 너무 느슨하게 보내는 하루 또는 계절은 형편없는 계획으로 낭비되기 십상이다. 비디오 게임이나 소셜 미디어에 빠져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반면에 너무 빡빡하고 빠듯하게 관리되는 밭은 과도하게 경작되기 쉽다. 너무 많은 화학 물질이 비료로 뿌려지고, 그 결과 땅의 영양분이 고갈되고 토양은 그 생명력이 마모될 때까지 계속해서 경작된다. 하루도 너무 빡빡하게 관리될 수 있다. 너무 많은 일정과 여유시간조차 쥐어짜서 경제적 생산성을 올리려는 욕심에 휴식은 말할 것도 없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주어지는 성령의 음성이 개입할 여지조차 남기지 않을 수 있다.이런 양극단의 삶 대신에 우리는 정원과 시간 모두를 다 잘 기르고 번성시켜 건강한 생산성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럼 시간 관리자가 농부와 정원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땅에서부터 오는 교훈1. 계획(작물 절반을 새나 바위투성이 토양에 빼앗기고 싶지 않은 한) 한 움큼의 씨앗을 아무 생각 없이 밭 아무데나 던져서 심는 사람은 없다. 대신 농부들은 다양한 식물을 다양한 유형의 토양에 맞게 조심스럽게 심고 세밀하게 추적한다. 시간 계획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미 몇 부분에서 농부의 경작 방식과 일치한다.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하고, 보통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심신이 지쳤을 때는 금요일 저녁에 영화를 볼 수도 있다. 조금 더 관찰해 보자.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작업은 가장 에너지가 충만한 시간 (대부분의 경우 오전 10시에) 할 수 있다. 에너지가 떨어지는 시간은 일반적인 관리 작업을 하는 데 쓸 수 있다(목요일 오후 정도). 시간 관리 전문가 로라 밴더캄(Laura Vanderkam)은 보통 업무 활동을 마무리하는 금요일 오후에 주간 계획을 작성하라고 권장한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하기를 원한다면, 화요일 오후 2시 30분에 회의를 열라고 조언한다. 2. 밭 갈기밭을 갈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오랫동안 쉬지 않고 뭔가를 시도했다면) 올바른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처음 시작이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시간이 갈수록 궤적은 점점 더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다. 하루의 시작도 다르지 않다. 나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아침에 경건 시간을 가지라는 명령은 성경에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주님과 가장 먼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시간이 하루의 질을 결정한다고들 증언한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멀리 있는 목표물에 시선을 고정함으로 농부는 직선으로 똑바로 계속 이동할 수 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또한 오로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여, 예배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가다듬을 수 있다. 기도나 찬양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하루 중 잠시 멈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점을 다시 주님께로 조정하고 영혼을 새롭게 하는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것이다. 3. 잡초 제거에덴동산 이후로 우리는 끊임없이 잡초와 싸워 왔다. 정원사와 농부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잡초를 제거한다. 손으로 뽑기, 퇴비 뿌리기, 괭이질, 화학약품 살포 등등. 단, 당신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잡초가 스스로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잡초를 아예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잡초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도 세심한 가지치기는 유익을 준다. 달력을 꽉 채우는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약속은 나름의 공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우리가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의 존재 목적을 기억하고 어떤 약속과 활동이 그 목적에 부합하는지를 계속 상기하지 않는다면, 소중한 주말과 저녁 시간은 잡초로 뒤덮이고 말 것이다. 민들레의 노란 솜털과 엉겅퀴의 보랏빛 꽃처럼 시간을 질식시키는 잡초가 언뜻 보기에는 전혀 해롭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를 자라게 못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의 소중한 시간에서 제거해야만 한다. 지금 이 비유를 아침과 오후 시간에도 적용할 수도 있다. 휴식이 필요한데도 끝없이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비생산적인 기다림으로 시간을 낭비하기 쉽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일정에서 잡초를 찾아내고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4. 비료 주기작물은 땅에서 영양분을 흡수하여 자란다. 토양은 사람이 먹기 위해 가져간 작물 외에 죽고 썩은 작물로 인해 다시 영양분을 흡수한다. 그렇기에 농부들은 퇴비, 거름, 화학 물질과 같은 비료를 사용하여 토양에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한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좋은 습관을 사용하여 에너지를 일상 속으로 되돌릴 수 있다. 작업은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고갈시키며, 에너지 보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활동이 작업 사이에 들어 있기 마련이다. 심야에 넷플릭스 몰아 보기, 장시간 인스타그램 스크롤, 아침 식사로 사탕 먹기. 그러나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기, 일정한 아침 일과 하기, 차 안에서 찬양 부르기, 책 읽기, 점심시간에 감사 일기 쓰기, 점심시간에 20분 걷기, 잘 차린 저녁 식탁에서 가족과 대화 나누기 등등은 우리의 삶을 채우는 습관이다. 하루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수십 가지의 건강한 방법이 있다.5. 비밭을 갈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농부에게 악천후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도 없다. 비는 하루의 계획을 무산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성장에 꼭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의 질문에 제때 응답하지 않은 동료나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가정 또는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겨서 일일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 그럴 때면 당황하거나 좌절하기 쉽다. 하나님께서 그런 좌절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시려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면 특히 더 그렇다(롬 8:28). 그러나 그럴 때 정원사의 모범을 따르면 어떨까? 예상치 못한 비가 주는 실망을 이겨 내고 다른 일에 몰두하면 어떨까? 6. 추수레위기에는 가장 초기에 기록된 농업 관련 조언이 담겨 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업무, 회의, 약속을 잡을 때, 중간 중간 다음 작업으로 이동하는 데에 딱 필요한 시간만큼만 남겨 두는 게 바로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는 것이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일을 해봤다면, 여유를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 때문에 당신은 분명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고, 또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조바심을 내곤 했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공간만 만들면 동료나 아이들과 예상치 못한 대화의 시간이 생길 수도 있다. 생산성 전문가들은 이것을 여백(margin)이라고 부른다. 시간을 내어 친구에게 안부를 묻거나, 아이의 작품에 감탄하거나, 교대 근무를 마치고 누군가를 집에 데려다 줄 수도 있다. 시간 추수(time gleaning)는 하루의 속도를 완화하며 남는 시간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돕는다. 하나님이 컨트롤하신다나는 땅을 사용한 이 비유를 계속 쓸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씨를 뿌릴지 주의해야 하며, 그 식물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휴지기를 가진 토양이 더 많은 작물을 생산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게으름 때문이 아닌 더 나은 생산성을 위한 휴식 시간을 정해야 한다. 열매 맺는 시간 활용을 통해 수확의 계절을 맞을 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성취를 축하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그러나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우리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오와에서 자란 나는 건방진 농부를 만난 적이 없다. 아무리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고, 똑바로 쟁기질을 하고, 쉬지 않고 잡초를 뽑고 비료를 준다 해도, 농부의 그 어떤 노력도 결코 좋은 수확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농부라면 누구나 다 너무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비와 햇빛을 가져다주신다. 하나님은 옥수수와 콩과 밀이 싹이 돋고 무럭무럭 자라게 하신다. 일하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보장되지 않는 것이 농사처럼 명백한 직업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계획하고 시간을 쪼개고 또 유명한 일정 관리 도구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수고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하신 동안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최대한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한다. 이 새해, 우리의 시간이 풍족하고 번성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딱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게 하소서. 오직 주께 영광을!원제: 6 Lessons for Tending Your Tim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시간관리
청지기
농부의지혜
잡초제거
생산성향상
루이스와 파이퍼가 발견한 영광, 그리고 기쁨
by Elliot Clark
2022-01-20
한 세대 전, 존 파이퍼는 ‘하나님을 기뻐하라’(Desiring God)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과 답변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했다.“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파이퍼가 이 책을 통해 (그리고 그의 사역을 통해) 주장한 핵심 논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은 별개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발견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찬양한다는 C. S. 루이스의 시편 묵상에서 처음 이루어진 면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축구팀, 또는 넷플릭스 시리즈 같은 것을 칭찬할 때 더듬거리거나 주저할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하라는 성경의 명령은 전혀 부담스러운 명령이 아니다. 이 명령은 사실상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찾으라는 초대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찬양 받길 원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와 제로섬 게임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기시면 우리가 지는 그런 게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쁨을 얻을 때 영광을 받으신다.우리 안에서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개념은 루이스의 또 다른 개념, 곧 기독교 신앙은 이기심 없는 노력이 아니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욕망을 통해 자기부인을 하도록 동기부여 하신다. 루이스는 ‘영광의 무게’(Weight of Glory)에서 이런 생각을 적용하여 우리에게 무엇인가 얻는 것을 약속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희생하도록 동기부여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주목한다. 파이퍼 또한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이 주제를 택하지만, 루이스와 똑같은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하지는 않는다. 루이스는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놀라운 만족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에게 주어진 그것은 곧 영광이다. 루이스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심”(fame with God), 승인, 감사, 영예라고 부른다(36). 다른 말로 하면, 그가 꿈꾸는 최고의 행복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로 인해서 기쁨을 느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고 우리에게는 영광이 돌아오는 기쁨이다!루이스에게, 그러한 영광은 “하나님께서 좋게 보심, 하나님께서 받아주심, 응답, 인정, 만물의 중심으로 환영을 받아 들어감”(41)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창조된 이유이다.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다. 영광의 약속은 믿기지 않은 정도로 놀라운,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약속입니다. 우리 중 일부, 곧 진심으로 그 약속을 선택하는 우리 중 누구라도 실제로 그 시험에서 살아남아서 인정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하나님의 행복에 실제로 기여한다는 것…하나님께 사랑 받는다는 것, 그저 동정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보고 기뻐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보면서 기뻐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는 것, 이것은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실로 불가능해 보이는 영광의 무게 곧 부담입니다(38-39).파이퍼도 루이스처럼 영광이 기쁨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피조물의 기쁨이 창조주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 그러나 ‘영광의 무게’에서 루이스는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진리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기쁨이 인간에게 영광을 가져다준다.영광의 무게루이스는 이 영광의 무거움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미래 희망에 대한 다섯 가지 주요 원천을 그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 간략하게 나열한다. (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약속. (2)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라는 약속. (3) 엄청나게 풍부한 이미지가 보여 주듯이, 우리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 (4)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잘 대접 받고 잔칫상을 받고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 그리고 (5) 우리는 우주에서 일종의 공식적인 위치를 갖게 될 것이라는, 곧 도시를 다스리고, 천사를 심판하고,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라는 약속(34).이러한 약속들을 숙고하면서, 루이스는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왜 처음 약속 말고 굳이 다른 약속이 더 있는 거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개념에 더해질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다는 건가?” 결국, 하나님 자신이라는 그 선물 외에 다른 선물을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루이스의 놀라움을 생각하는 중에 나는 또 다른 놀라운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가 요약한 각각의 약속은 영광이라는 구체적인 소망과 관련이 있으며 그 소망을 확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영광을 의미한다. 명예란 자고로 왕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에게 속한다(욥 36:7; 삼상 2:8).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처럼 될 것이기에(요일 3:2),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정확하게 드러낼 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롬 8:18-19; cf. 고전 11:7). 그리고 하나님의 광채와 아름다움을 반영한다(시 34:5; 단 12:3). 우리가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존귀함을 소유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이스가 탐구하는 특정한 특권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롬 2:7, 고전 4:5). 우리는 잔치에 참여하는데, 그것은 왕의 잔치에 왕의 손님이 되는 특별한 영예를 포함한다(사 25:6-7; 마 8:5-13; 눅 14:7-11). 앞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높은 지위가 주어질 것을 말한다. 나라의 권세와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행사한다는 것, 심지어 천사까지 심판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영광이 얼마나 회복되는지 그 정도를 보여준다(시 8:5, 고전 6:3).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약속의 각각의 면이 독특한 광채로 빛났을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명예를 타고나지 않은 경우라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는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우리는 왕의 가족으로 입양되었고, 그리스도 왕국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으며, 왕의 식탁에 초대되었고, 그의 왕국의 대리 통치자(vice regents)로 승격되었다.같이 받은 영광, 천국의 기쁨‘영광의 무게’에서 루이스는 이것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우리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단순한 경이로움에 충격을 받는다. 이것만으로 그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전형적인 루이스의 방식으로 그는 그러한 영광이 “우리의 깊은 갈망과 얼마나 깊은 관련이 있는지”(41)를 조명한다. 우리 각자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승인과 인정은 기쁨의 중요한 원천이다. 우리의 부담을 덜어 주는 상사의 세속적인 인정, 우리의 하루를 밝게 해주는 선생님의 칭찬, 자존심 강한 아버지의 인정과 기쁨에 찬 배우자의 칭찬, 이 모든 것이 한줄기 빛이 되어 우리 눈을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의 충만함을 향해 돌리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을 그 순간을 향해서 말이다. 그러한 특권은 실재하고, 공감할 수 있고, 바람직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이야기하고 또 교회가 가르치는 영광의 개념은 비인격적이고, 가질 수 없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릴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기쁨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보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난해해 보인다. 그 결과 성경의 많은 약속들이 우리의 가장 큰 갈망들과는 단절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루이스의 논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우리의 내면에 인정을 향한 깊은 갈망이 있다는 사실은 그 갈망이 충족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있음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에게 칭찬 받고 싶은 우리의 굶주림은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그런 굶주림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입증되어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고 또 하나님께 받게 될 그날을 고대한다(롬 2:6-10, 살후 1:9-12). 그때까지 수많은 시험을 겪을지라도 우리는 또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다(벧전 1:7-8). 그러한 기쁨과 영광은 두 가지의 독립적인 경험이 아니라 서로 묶인 하나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된 위대한 목적이요 우리가 고대하는 위대한 목적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목격하고 공유하는, 그리하여 우리를 기쁨으로 채우고 궁극적으로 다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게 되는 그런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함이다. 원제: What Glory Awaits: Journeying with C. S. Lewis and John Pip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C.S.루이스
존파이퍼
영광의무게
천국의영광
영광과기쁨
기독교희락주의
기뻐하시는하나님
1퍼센트, 그 두 가지 진실
by David Mathis
2022-01-19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깨어 있는 시간의 기껏해야 1퍼센트를 공예배에 쓴다.계산법은 이렇다. 매일 밤 당신이 약 7시간(대부분의 성인에게 필요한 최소 수면시간)을 잔다고 하고, 당신이 참석하는 주일 예배 시간이 약 75분일 때(당신이 주일마다 충실하게 예배에 참석했을 경우), 일주일에 깨어 있는 시간은 120시간이니, 당신이 예배를 위해 쓰는 시간은 대략 1퍼센트가 된다.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의 1퍼센트만 매주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사용한다는 사실에 당신도 나처럼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낮은 비율이다(특히 교회 생활이 기본적으로 주일 오전에 한정되어 있다고 우리가 가정한다면 더욱 그렇다). 한주간의 남은 시간 동안 우리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20년에 평균적인 미국인은 하루에 거의 8시간을 뉴미디어나 기성 미디어에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에 50시간 이상을 각종 영상물을 보는 데 썼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시간은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의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이제 삶은 점점 덜 집중되고 덜 생산적인 노동으로 채워지고 있으며, 디바이스들을 통해 콘텐츠를 점점 더 많이 소비하는 것으로 채워지고 있다. 우리가 공예배라 부르는 이 놀랍도록 작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1퍼센트에 대해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단 한 시간 첫째, 매주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일아침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이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에 인식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런 개념을 가지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교회 된다는 것’(being the church)은 단지 매주 60-75분짜리 주간 이벤트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가 모일 때만이 아니다. 가정으로, 학교로, 직장으로, 지역사회로 흩어져 있을 때도 우리는 교회이다. 깨어 있을 때도, 자고 있을 때도, 일주일 168시간 모두 우리는 교회다. 현대인의 삶의 슬픈 단면, 곧 자동차가 퍼뜨려 놓은, 서로 섞이지 않고 각자 따로 사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일주일 내내, 평생 동안 펼쳐지는 삶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 일어나는 이벤트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24시간, 7일, 365일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다.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예배당에서만이 아니라 거리에서나 지역사회 어디에서나 매일 섬김과 사랑과 예배의 삶을 살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 곧 교회다. ‘교회 된다는 것’은 한 주간의 삶 전체가 아니라 단지 한 번의 모임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축복하고 서로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언제 우리의 소중한 신약성경의 ‘서로’를 실천할 수 있을까? 예배 전후에 나누는 짧은 시간으로는 사도들이 우리에게 그려 준 우리의 삶을 함께하는 그림에는 비참하도록 불충분할 것이다. 1퍼센트 이상교회 된다는 것은 단 1퍼센트의 이벤트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서로들’ 곧 서로 영접하는 것(롬 15:7), 서로 사귀는 것(요일 1 :7, 11-12; 요이 5), 서로 돌아보는 것(고전 12:25), 서로 선을 행하는 것(살전 5:15), 서로 격려하고 덕을 세우는 것(롬 14:19, 살전 4:18; 5:11),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는 것(롬 12:10)을 포함한다.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매일 실천하는 이러한 ‘서로들’은 갈등이나 관계의 고통으로 인해 삶이 가장 힘들 때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서로 용납하는 것(엡 4:2, 골 3:13), 서로 친절히 대하는 것(엡 4:32),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는 것(엡 5:21), 서로 거짓말하지 않는 것(골 3:9), 서로 비판하지 않는 것(롬 14:13), 서로 비방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것(약 4:11; 5:9)이 그것이다.서로 조화롭고 화목하게 살기 위해서는 1퍼센트 이상의 삶을 드려야 한다(막 9:50, 롬 12:16, 15:5). 가장 중요한 최고의 ‘서로’를 실천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요 13:34-35; 15:12, 17; 롬 12:10; 13:8; 살전 3:12; 4:9; 벧전 1:22, 요일 3:11, 23, 4:7), 곧 서로의 짐을 져 주고(갈 6:2) 서로 섬김으로써(갈 5:17)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다. 착각 하나가 오늘날 점점 널리 퍼지고 있다. 한 주간 모두 교회 되어 살아가는 경험도 관점도 빈곤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잘못된 생각, 곧 교회에서 섬기고 선을 행하는 주된 방법은 주일 아침에 “앞에 서서” 사회를 보거나, 찬양을 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헌금위원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168시간 모두 교회 된다는 것에 대한 빈곤한 이해를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목자와 교사로 삼으셔서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셨다(엡 4:11-12). 우리의 온 몸으로 하라고 명하신 “봉사의 일”은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30분짜리 메시지가 아니다. 성도들이 거실에서, 커피숍에서, 마당에서, 직장에서 서로 함께하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시간 이제, 1퍼센트의 중요성을 맥락 속에 넣는 것과 함께 나란히, 우리는 또한 공예배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는 “한 주간에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습관”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는 공예배는 한 주간 모두를 교회로 사는 삶에서 “일주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시간”이라고 책임회피성 발언을 할 수도 있다.물론, 개인의 삶에 주어진 한 주간의 시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 무엇이라고 누가 감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희생의 사랑을 행하라고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그 시간을 우리가 드리는 공예배보다 더욱 중요하고 더 영으로 드리는 예배로 여기실 것이다. 진심으로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 교회로서 주일마다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만큼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예배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한 주간의 습관이요 기쁨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가장 위대한 무기 중 하나일 수 있는 이유는, 공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의 공급의 세 가지 필수 원칙,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그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귀를 여는 것(기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몸에 속하는 것(성도의 교제 안에서)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예배에서 우리는 예배에의 부름에서, 말씀을 읽고 가르칠 때, 신실한 복음의 설교에서, 성찬의 말씀에서, 세상에 빛으로 보냄 받는 파송 명령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듣는다.’ 공예배에서 우리는 죄 고백, 찬양, 감사, 낭송, 청원기도, 믿음으로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반응한다.’ 그리고 공예배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함께’ 한다. 하나님은 각자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가고 예배하라고 우리를 만들지 않으셨다. 개인 성경묵상도 개인 기도도 영광스러운 선물이며 꼭 필요한 것이다. 소홀히 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의 뇌가 다른 것들, 곧 서로 경쟁하는 다른 내용들로 넘쳐나는 이 정보화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 개인의 영적 습관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누리는 하나님과의 꾸준한 친교의 맥락 안에서 비로소 번성하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교를 위한 리듬으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것이다. 한 시간과 한 주의 모든 시간공예배는 매주 168시간 가운데 단 한 시간이며 이것은 깨어 있는 시간 동안 교회로서 살아가는 시간 중 1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공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경건한 기쁨으로 응답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이 긴장 관계에 있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렇지 않다. 이 둘은 쌍둥이다. 대적이 아니라 친구다. 교회 안에서 규칙적이고 의미 있는 헌신은 한 주간 모두 우리가 교회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또한 우리가 교회로서 깨어 있는 120시간을 살아가는 방식이 1퍼센트의 예배의 헌신을 구체화한다. 매주 함께 예수님을 진정으로 신실하게 예배하는 교회는 매시간 교회로서 살아갈 준비가 더욱 더 되어 있고, 한 주간 모두 교회로서 사는 교회는 매주일 가장 감미로운 예배를 함께 즐긴다. 원제: Two Truths about the One Percen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서은성
공예배
예배와봉사
교회론
교회가된다는것
예배와섬김
교회생활
우리는 세균이 아니다: 인간 존엄성을 위한 변론
by R.C. Sproul
2022-01-18
몇 년 전에 한 어머니가 찾아왔다. 그녀에게는 대학생 아들이 있었는데, 이 어머니는 부들거리는 손을 부여잡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아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계속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그런데 그 아이는 완전히 타락해 버렸어요. 마약에 취해 있고, 온갖 미친 짓을 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도무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혹시 목사님이 그 아이와 만나서 말씀을 좀 해주실 수 없을까요?”나는 그녀에게 아들을 강제로 데려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권면했다. 왜냐하면 강제로 데려올 경우 이미 그는 마음을 닫고 대화를 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간청하였고, 마지못해 나는 그녀의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내게로 데리고 왔다. 그 아이는 들어올 때부터 잔뜩 화가 나 있었고, 내게 굉장히 퉁명스럽게 응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어 보았다. “지금 너는 누구한테 화가 나 있는 거니?” 그러자 그는 “우리 엄마요”라고 대답하였다. “왜 엄마에게 화가 나있지?” 그러자 “엄마는 틈만 나면 내게 이 종교를 쑤셔 넣으려고 해요”라고 대답하였다.그래서 나는 “너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구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예. 저는 기독교를 믿지 않아요”라고 답하였다. “좋아, 그럼, 너는 무엇을 믿니?” 그러자 그는 “저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요”라고 답하였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좋아.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왜 엄마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이지?” 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목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나는 다시 설명하였다. “아마도 엄마는 지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너는 화가 날 이유가 없잖아. 엄마는 사람들에게 이 종교를 쑤셔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 전에 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어. 그런데 네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너는 거부하고 있지? 그러면서 반대로 너는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아, 그렇지?”“나는 기독교의 윤리 기준을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에 만약 네가 나에게 기독교의 윤리에 입각하여서 문제를 얘기했다면 나는 너를 도와주었을 거야. 만약 그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네 엄마가 너를 분노하게 만들고, 한 인간으로서 너를 비인격적으로 대우하였다면, 나는 어쩌면 네 편에 서 있을지도 몰라. 아마도 네 엄마에 맞서서 너를 보호해 주었을 거야” 그 아이는 나와 이 대화를 나눈 후부터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젊은 청년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는 윤리의 궁극적인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 아이도 그런 세상에서는 도무지 살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바로 이 문제가 임마누엘 칸트 같은 비그리스도인 철학자도 가졌던 고민, 곧 하나님이 없이는, 정의 없이는, 죽음 이후의 삶이 없이는, 우리 삶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고민이었다.핵심은 이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만약 죽음 이후의 삶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윤리적 결정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이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진리다. 만약 우리 생각에서 하나님을 지워 버린다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다. 절대자를 기준으로 하는 윤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모두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상대적 윤리이다. 인간은 인격적 창조주가 없이는 절대적 윤리 기준을 가질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아무런 의미가 없이 우연히 태어나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우리는 어딘가 분명히 아주 중요한 곳으로부터 와서, 또한 아주 중요한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기계적 결정론자들이나 초진화론자들(hyperevolutionists)은 인간이라는 동물은 원시 세균 덩어리가 발달한 최고 단계라고 주장한다. 세균이 고도로 발달한 단계인 인간은 우주의 힘에 의하여 발생한 우연의 산물이며, 인간의 운명은 이런 비인격적이고 무의미한 우주의 힘에 달려 있다. 이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목적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하게 만들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세균에서 시작된 인간 존재는 때가 되면 유기물로 해체되고 분해될 뿐이다.이런 기계적 관점은 삶의 의미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기계적 의미의 윤리를 발전시켜 보려는 수많은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노력은 실패하였다. 왜 세균들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만약 내가 우연의 산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갈 이유가 무엇인가? 삶이 죽음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삶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저 바위보다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그런데 현대 세속 인본주의는 인간 기원에 대한 이런 기계적 관점이나 진화론의 설명을 수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져다주는 피할 수 없는 모순에 대해서는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실 인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 존엄성을 중시한다. 그러나 인간 존엄성의 영구적 토대가 될 수 있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것은 존재할 수 없다.기독교와 인본주의 둘 다 소외된 인간관계를 치유하고자 하며, 인간 존엄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 존엄성의 토대는 근본부터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수평적 인간관계를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수평적 인간관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영원한 인간 존엄성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인간 존엄성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인본주의자들은 자의적이고 비이성적인 방법을 끌어올 수밖에 없다. 만약 인간이 우연히 생겨난 존재라면 어떻게 인간 존엄성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인본주의자들도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제거한 채로 기독교의 가치와 윤리를 가지고 와서 적용하려고 한다. 사실 인간은 누군가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하라”고 요구하면 분노한다. 그런데 인본주의자들은 인간 존엄성과 우연히 “주어진” 인간의 삶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제공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이 가치 있고 존엄한 존재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그저 세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외침은 공허해질 뿐이다.기독교는 인간 존엄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기인한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엄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 1:27). 무한한 가치와 존엄을 지니신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그 가치와 존엄성을 부여하셨다. 그래서 인간 존엄성은 하나님의 가치와 존엄성의 파생물이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인간 존엄성의 초월적이고 근본적인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인간을 개나 돌고래, 심지어 잡초와 다르게 대할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위대한 두 계명을 이해할 수 있다(마 22:34-40).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한한 존엄성을 가진 하나님을 사랑하면,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인간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개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인간에게만 존엄성을 말할 수 있다. 다른 동물이나 피조물에게는 그러한 존엄성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 스미스라는 사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에게 “존 스미스 박사” “존 스미스 의원” “존 스미스 회장”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존 스미스 세균”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세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지 않고, 파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어떤 개념의 문제나 역사의 문제가 아니다. 인본주의자들과 창조를 믿는 사람들이 각자 생각하는 인간 존엄성에는 근본부터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동등한 시민권을 외치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대상은 동료 흑인 세균들이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낙태를 반대하는 것은 뱃속에 있는 세균을 지키기 위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인간 존엄성을 알고 있지만, 창조를 떠난 인간 존엄성은 무의미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세속 인본주의자들의 화려한 말을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덕스럽게 살아야 하며, 인간 존엄성과 자유와 사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철학적 인본주의자들의 주장보다 모순된 주장은 없다. 그들은 인간이 진화된 세균으로서 우연의 산물이며, 그렇기에 인간은 궁극적으로 소멸(annihilation), 없음의 깊은 심연(the abyss of das Nichts)을 향해 가는 운명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은 굉장히 존엄하고 중요한 존재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이는 환상과 희망사항이며, 맹목적 믿음과 어리석음이다. 진화된 세균의 존엄성을 말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나는 세속 인본주의자들에게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게 와서 인간 존엄성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나는 백인 세균이나 흑인 세균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진화된 세균들이 핵폭발의 대재앙 속에 죽어나가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게 인간 존엄성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면, 내게 그 이유를 가져다주길 바란다.”만약 내게 인간을 위한 희생적, 이타적 행동을 요구한다면, 더욱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저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이유보다는 더 큰 이유여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이유는 감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쉽게 변한다. 인권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근본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 우리가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 근본 이유는 인간 존엄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진리에 있다. 이 진리가 우리 문화 속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원제: We Are Not Germs: The Case for Human Dignity출처: www.ligonier.org번역: 박광영
인권
인간의존엄성
창조
진화
믿음
기독교윤리
인본주의
인간관계
소멸
‘그리스도’보다 더 큰 충격: 예수는 ‘주’
by Joe Rigney
2022-01-17
구약성경을 읽어야 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다가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2장[5-11절]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말씀이지만, 이사야 45장에 비추어 읽으면 놀라운 말씀이 된다.이사야 45장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관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대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교도 통치자임에도 불구하고 고레스는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소문자(c)로 시작하는 그리스도(christ)였다(사 45:1). 비록 고레스는 여호와(하나님의 이름, 출 3:14)를 알지 못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고레스를 아셨고, 고레스를 세우셨고, 고레스를 부르셨고, 고레스를 준비하셔서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신다(이사야 45:4-5).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여호와께서는 당신이 여호와이시며 당신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을 모든 백성이 알게 하신다(사 45:5-6).사실 주님의 홀로 유일하심(uniqueness)은 이사야 45장의 예언을 지배하는 주제가 된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고유의 거룩한 특권을 거듭해서 강조하신다. 여호와 홀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서 빛을 지으시고 어둠을 만드신다(사 45:7). 여호와께서 땅에 비를 내리시고 식물이 자라게 하신다(사 45:8). 여호와는 진흙으로 빚으시는 토기장이시요 온 인류를 만드시는 아버지이시다(사 45:9).홀로 위대하시다이사야는 창세기 1장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놓는다.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여호와께서 홀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홀로 세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스리신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그[고레스]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사 45:11-12).여호와 홀로 창조주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여호와 홀로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시다(사 45:21). 여호와는 열방의 온갖 우상들과 구별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이교도들은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사 45:20). 그러나 언젠가는 열방이 자기 우상의 허무함을 깨닫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할 것이다(사 45:14).홀로 유일하시다이사야 45장에서 주님은 당신의 선지자를 통해 당신 홀로 하나님이심을 거듭 선포하신다. 이 한 장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홀로 유일하심을 나타내는 일곱 가지 나팔 소리를 들어 보자.5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6절: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14절: “[그들이]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18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21절: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22절: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24절: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바로 이런 까닭에 우리는 여호와께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실 때 놀라지 않는다.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사 45:23). 홀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맹세하실 더 큰 이는 없으며(히 6:13), 하나님의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함을 증명한다. 모든 입이 여호와를 주님이시라 고백할 것이다.최고의 이름이사야 45장에서는 놀랍지 않았던 내용이 빌립보서 2장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주는 말이 된다. 이사야처럼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의 기름 부으심을 기뻐하고 있다. 고레스는 주님을 몰랐지만, 예수님은 주님을 아셨고,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은 우리의 본보기가 된다. 예수님은 당신을 낮추셔서 당신의 그 순종이 죽음까지 이어지셨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빌 2:6-9).그리고 예수님이 겸손하셨고 순종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높이 세우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우주 최고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이 존귀와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것이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바울은 이 근본적인 기독교 신앙고백(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이 단지 예수를 헤롯이나 시저와 같은 인간 통치자로 선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울은 저 위대한 ‘유일하신 하나님’ 장[이사야 45장]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것을 되울리고 있다. “다른 신은 없다”는 이사야 45장의 선포는 이제 충격과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나사렛 출신의 한 남자, 예수는 단지 위대한 예언자나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아니라는 선포로 전환된다. 나사렛 예수는 주님, 유일하신 주님, 여호와이시다. 사람이 되셔서 구출해 주시고 속량해 주신다. 고난 받으시고 구원해 주신다.그렇다,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예수는 주시다예수께서 태어나시던 날 밤 천사들의 말을 목동들이 먼저 들었다. 이사야가 선포한 만민에게 전해질 큰 기쁨의 소식은 간결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되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다윗이나 심지어 고레스처럼) 단지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아니라, 이 그리스도는 바로 주님이시며, 이제 하나님이신 특권을 내려놓으시고 자신을 비워, 겸손히, 종노릇하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셨다.이제 이 땅의 끝에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향해 나아갈 때,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나사렛의 하나님-사람, 베들레헴에서 나신 그 사내아기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이시며, 다른 주는 없다. 예수님은 주이시다. 예수님 같은 다른 이는 없다.원제: More Shocking Than Christ - Why We Call Jesus Lord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장명근
예수그리스도
여호와
이사야45장
메시아
그리스도
홀로유일하심
기독론
성육신
두려움 없이 시대를 거스르는 그리스도인
by Thaddeus Williams
2022-01-16
채프먼 대학교는 미국인의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연례 설문조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미국 주요 도시의 화재, 논란에 휩싸인 대통령 선거, 선거 부정 주장, 전례 없는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 테러리스트 소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 셧다운 행정명령, 백신 의무화 등등, 2020년과 2021년을 장식한 이런 뉴스 헤드라인들을 떠올려 보면, 최근 미국 사회에 불안감이 급등했다는 사실에 놀랄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채프먼 대학교의 이번 조사 결과에서 정치성향에 따라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초점이 달라진다는 것이 확인됐다. 예를 들면, 진보성향 응답자일수록 대통령 선거 결과를 더 걱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74.6%). 보수성향 응답자는 29.5퍼센트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걱정한다고 응답했다.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밝힌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매우 두려워”하지만, 공화당을 지지하는 응답자는 1/4만이 그런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을 “극 진보”라고 응답하는 75.8퍼센트는 전국으로 번지고 있는 소요사태에 대해 걱정한다고 밝혔지만, “극 보수”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43.2퍼센트만 소요사태에 대해 걱정한다고 응답했다. 물론 정치적 좌파가 두려움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은 당파의 경계를 넘나든다. 왜냐면 모든 정치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거기에는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당을 초월하여 미국에서 (6년 연속으로) 가장 으뜸가는 두려움의 대상은 “부패한 공직자”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응답자(84.6%)와 민주당을 지지하는 응답자(77.8%) 모두가 갖고 있는 두려움이다. 2위를 차지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부패한 공직자”에 대한 두려움의 지수가 무려 20점이나 높을 만큼, 이 두려움은 지배적인 두려움이다. “부패한 공직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을 일으키는 데에는 여러 (일부는 타당하고 일부는 비합리적인)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두려움을 더 큰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1세기 그리스도인의 믿음공포심을 조장하는 오늘의 우리 정치 현실을 조명하기 위해서 1세기로 돌아가 보자. 사도행전에는 적어도 13건의 정치적 부패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보통 폭력이 개입되었고 심지어는 죽음이 수반된 그런 사건들이었다. 그런데 이 13건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두려움이나 절망, 정치적 편집증으로 반응한 사례는 정확히 제로다. 그리고 그 13건 가운데 1세기 그리스도인이 담대하게 대처했던 사례는 정확히 13건이다. 그들은 13건 모두에서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이웃을 사랑했으며, 정치적 살해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다.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는 명백한 정치적 부패 사건의 첫 번째 사례를 살펴보자. 베드로와 요한은 공중 앞에서 치유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다. 사도행전 4장에서 보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예수를 입 밖에 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 입을 다물게 하겠다”며 살해 위협을 가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종교 지도자들의 이런 위협으로부터 겨우 풀려난 뒤에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그들이 당한 일을 낱낱이 일렀다. 예루살렘에서 교회 식구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공황 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두려워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초대 교회는 어떻게 하는가? 기도한다. 그들은 소리 높여 하나님을 “데스포테스”(Despotes), “대주재”라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한다(행 4:24). 이 단어에는 절대적이고, 전권적이며,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무너뜨리려고 위협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종교적, 정치적 세력은 “대주재”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들의 기도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라고 선언하며, 이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인간의 시도는 모두 무익하다는 시편 2편의 말씀을 인용한다(행 4:26).그 다음에 이 기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향한다. 예수를 처형하는 데 공모한 정치 세력(“군왕들”과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28절) 그대로 했을 뿐이다. 누가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chier), 아무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boule), 미리 정하여 두시는(proorisen) 하나님의 주권. 부패한 정치 세력이 예수님을 이긴 것처럼 보였던 그 암울한 날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초대 교회의 대답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항상 계셨던 바로 그 자리, 당신의 주권적 보좌에 앉아 계셨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을 몰아내는 이 진리를 부패한 지도자들이 자신들에게 가하는 절체절명의 위협에 적용한다. 그렇게 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행 4:31). 그리고 그 교회는 자신들을 철저하게 박해하는 세력 앞에서도 급격하게 성장해 나갔다. 시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런데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주재,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우연히 생긴 우주에서 그저 우주적으로 소외된 존재라면? 정말 그렇다면, 오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온갖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려움이라는 심리적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속주의가 팽창하고 있는 시대에 부패한 지도자에 대한 두려움 또한 증가한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약해질수록 권세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은 커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두려움이 필연적인 심리적 결과가 아니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두려움은 오히려 기회가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을 조장하는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을 따르지 않고 1세기 교회의 저 굳건한 신학을 따라 구속의 은혜로 이 시대에 맞서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불안해하는 친구들과 가족들, 이웃들에게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우주의 하나님을,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행 4:24) 하나님을, 그리고 이 땅에 있는 가장 강력한 제국들과 나라들과 왕들을 왜소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가르쳐 줄 수 있다. 2022년을 시작했다. 올해도 세상에는 온갖 무시무시한 헤드라인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다는 사실 속에서 살아가자. 이 불안한 시대 안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아가자. 원제: In 2022, Christians Can Be Counterculturally Fearles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두려움
대주재이신하나님
1세기믿음
부패관료
시대를거스름
주권적보좌
다시 나그네로
by 김형익
2022-01-15
오랜 세월 기독교가 주류가 된 시대, 소위 크리스텐덤이라고 불리는 세상을 살아온 기독교가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는 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벧전 2:11-12). 1970년대 이후 급성장하기 시작한 한국 교회가 적어도 1980년대 말까지 보여 준 모습을 돌아보자. 어느 새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가 싶더니 성시화운동의 기치를 내거는 정치권과 교계 인사들이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나타나기도 했다. 적어도 내 기억 속 1970년대 이전의 한국 교회는 불신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를 많이 말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로 지나면서 한국 기독교는 사회의 주류가 되어 가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땅의 불신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과 관심과 가르침을 점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눈치를 보던 마이너리티 시절은 지나갔다고 느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은 의도적이거나 의식적으로 일어났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세상은 다시 바뀌었다. 우리는 기독교의 성장 시대를 뒤로하고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닌 거류민과 나그네로, 다시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존재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옛 시대를 향한 향수를 드러내거나 현 시대를 한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맞닥뜨린 이 시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선교적 소명을 감당한다는 점에서 볼 때, 과거 1970-80년대 보다 더 어려운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서구 기독교가 크리스텐덤의 시대를 지나 탈기독교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이 우리의 선교적 소명을 감당하는 데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지금 들어선 이 세상은 우리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짜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아닐까? 우리가 기독교의 본질로서 나그네와 거류민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아닐까? 거류민과 나그네성경이 가르치는 신자의 정체성은 분명히 그리고 언제나 거류민과 나그네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밝혔다(벧전 1:1). “나그네”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었겠지만, 이 표현은 하늘에 본향을 두고 잠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신자의 정체성을 염두에 둔 영적,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이너리티로 존재해야 하는 지금 이 시대에 불편하고 낯설더라도, 성경을 오독하지 않고 복음의 본질을 직면하고 나그네와 거류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거류민과 나그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담지한 표현이다. 베드로전서의 일차 독자인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은 사도가 말하는 나그네로서의 신자의 영적인 정체성을 오해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하고 사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거류민’(파로이코스)은 자기 집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인데, ‘더부살이를 한다’는 뉘앙스를 가진다. 그리스도인의 집은 하늘 본향에 있기에, 우리가 잠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거류민일 수밖에 없다. ‘나그네’(파레피데모스)는 외국에 머무는 임시 거류자를 지칭한다. 사실, 사도 베드로가 세상 속의 신자를 가리켜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한 것은 그만의 독특한 관점은 아니었다.히브리서 기자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동일하게 말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여기서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야곱 등을 가리킨다. “외국인”(크세노스)은 말 그대로 외국인이다. 주인이 아닌 손님, 낯선 곳, 낯선 문화, 낯선 언어의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외국인이다. ‘나그네’(파레피네모스)는 사도 베드로 가 말한 나그네, 곧 임시 거류자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을 쓸 때,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얻기 위해서 헷 사람들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 23:4).히브리서 기자는 앞에서(히 11:9) 이들이 ‘장막에 거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보여 주는 거주 방식이었다. 윌리암 레인(William Lane)은 히브리서 주석에서 “(장막에 거한)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문화 속에서 영구적인 정착을 이루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설명한다.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장막 생활을 한 것은 자신의 영원한 본향,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 11:10)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면서 드러내는 가시적 삶의 방식, 곧 장막에 거주한 삶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일종의 ‘증거’였다는 것이다. 나그네 됨은 신자들의 정체성이라면, 장막 생활은 그 정체성에 대한 증거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복음 증거를 말에 의존하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잃어버린 증거 방식이다. 사도 베드로나 히브리서 기자의 논지는 나그네의 정체성은 신자의 선택 사항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은 나그네의 삶의 방식을 통해 세상 앞에 증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나그네의 삶의 현실을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수자로 살아야 했던 초기 교회의 성도들과 달리,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에게는 직면하기 불편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당신과 나에게도 말이다. 긴장: 시민이면서 외국인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일은 무엇보다 불편한 삶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불편함을 전제하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편안해지는 것과 나그네가 되는 것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존재한다. 제럴드 싯처는 ‘회복력 있는 신앙’에서 초기 교회 신자들의 삶의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은 자기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산다. 시민으로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외국인으로서 모든 것을 견딘다. 모든 외국 땅이 이들의 조국이지만, 모든 조국이 이들에게는 외국 땅이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많이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세상은 낯설고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대로, 우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을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다.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선한 행실, 그리고 삶의 방식의 증언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삶의 방식이 육체의 정욕(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었다면(엡 2:3),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신자들은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벧전 2:11). 악행한다고 우리를 비방하는 세상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도록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불편함을 신자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유수자로 하나님의 은혜 증언하기신자는 거류민과 나그네이자 동시에 모범 시민으로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미 탈기독교 시대에서의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고민한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1989년에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을 공저하면서, 신자는 불신앙의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나그네 된 거류민이라고 말했다. 월터 브루그만이 구약 시대에 바벨론에서 살아가던 유대인과 같이, 이 세상의 신자들은 “유수자”(exiles)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쩌면 이 주제에 접근하고 신학을 하는 일에서 선교사들과 선교학자들은 유리한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이 관점으로 성경을 읽고 접근하기에 최적화된 사람들일 테니 말이다. 우리가 거류민과 나그네의 삶의 방식을 적대적인 세상 앞에 보여 주기 전에,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은 신자들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부름 받은 존재임을 자각하는 일일 것이다.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 말이다. 사도 베드로는 나그네의 신학을 신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조국 땅에서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했던 우리의 역사적 경험, 슬픈 우리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 살게 된 디아스포라 한인들의 삶의 역사는 우리가 나그네의 신학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시대가 어렵다고 한탄하지만 말고, 우리가 나그네의 정체성을 회복함으로써 복음 안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이 세상 앞에 풍성하게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그네신학
거류민
디아스포라
크리스텐덤
장막에거하는삶
탈기독교시대
이중시민
장기 선교사를 계속 파송해야 하는 이유 세 가지
by Lloyd Kim
2022-01-14
예배드리고 나올 때 예배당 출구에 “당신은 이제 당신의 선교지로 향합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교회를 본 적 있는가? 자기가 살아가는 지역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해외 선교만 선교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로잡는 올바른 구호이긴 하다.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지역사회에서 은혜의 복음에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이 해외 선교의 중요성을 약화하는 말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여기서 장기 선교사를 계속 파송해야 하는, 특별히 글로벌 팬데믹 상황에서, 세 가지 이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1. 자원의 압도적 불균형 때문이다.첫째는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미전도 지역이나 소외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영적 인력 자원의 지나친 불균형이다. 전 세계에 550만 명의 풀타임 사역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통계 몇 가지를 살펴보자. • 사역의 75.9퍼센트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인구가 다수이거나 상당수인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사역의 23.7퍼센트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인구가 2퍼센트 이상인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사역의 0.37퍼센트만이 미전도 지역, 곧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인구가 2퍼센트 이하인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증인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곳에서 사역할 최고의 능력을 갖춘 현장 선교사, 캠퍼스 사역자, 제자훈련 사역자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 소수인 지역에 가는 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전도 그룹의 사람들을 섬기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왜 그럴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교회들, 자원들, 관계들, 그리고 멘토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미전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평생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도 만나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제자가 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2. 우리는 세계인이 한 가족인 세상에 살고 있다. 세계인이 이제 한 가족이기에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한다. 그리고 미전도 지역에서 섬기고 있는 형제자매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일본 치바에 있는 오유미노 그리스도 교회의 테츠야 데다치 목사는 일본 인구 1억 2,500만 명 중 99.9퍼센트가 비신자이며, 그들 대부분이 성경을 모른다고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었다. 테츠야 목사는 미국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에게 기도해야 하며 선교사들을 전 세계에 파송해야 한다고 도전한다. 현지 일본 목회자를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본에는 전국에 복음을 전할 목사는 고사하고 그리스도인조차도 부족하다. 이는 전 세계 다른 미전도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에 나와 있는 우리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를 진정으로 믿고 있는가? 또한 성도의 교제를 믿고 있는가? 이 신앙고백을 할 때 우리는 일본, 인도, 중국, 방글라데시, 태국, 시리아, 이란, 이라크, 그리고 서아프리카의 신자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전 세계의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선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신 것처럼 복음이 가장 소외된 지역에서 우리의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적절한 시기이다. 코로나19가 도움이 필요한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긍휼과 자비의 사역을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았다. 예를 들면, 서아프리카에서는 코로나19 봉쇄 조치로 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고, 그로 인해 많은 가정들에게 식료품이 부족하다. 이에 우리 선교사들과 국가 파트너들은 쌀과 식용유, 기본 위생용품을 지역사회에 나누어 주면서 복음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가졌다. 복음은 또한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나아가고 있다. 서아프리카 목회자 4명이 돌아가면서 설교하는 유튜브 채널을 매주 1,000명 정도가 시청하고 있다. 인구의 95퍼센트가 이슬람인 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고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 미전도 지역 및 복음 전파가 더딘 지역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묻고 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인간의 죽음과 연약함을 마주하고 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갈급한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고 나누어야 할 때이다. 3. 주님이 주신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하셨기에 간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존귀하게 되는 것을 보길 원한다. 주님께서 교회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구속적 목적을 성취하시려는 왕이신 주님의 계획이다.전 세계에는 6,741개의 미전도 그룹이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인구의 2퍼센트 미만일 때 미전도 그룹이라 정의한다. 이 6,741개 그룹은 세계 인구의 42.2퍼센트, 31억 4,000만 명에 이른다. 1퍼센트 미만의 풀타임 사역자들이 이 미전도 그룹을 위해 사역하고 있다. 캐나다인 목사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J. Smith)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설교하지만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초림에 대해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왜 장기 선교사를 파송해야 하는가? 단지 자원이 지나치게 불균등하게 배치되어 있어서만이 아니다. 단지 전 세계의 형제자매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보냄 받으신 우리 주 예수께서 모든 나라에 가서 제자 삼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원제: 3 Reasons We Must Continue to Send Long-Term Global Missionarie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장기선교사
코비드락다운
지상명령
영적자원의불균형
미전도종족
해외선교
도시와 도시, 그 역사와 의미
by 이춘성
2022-01-13
역사관의 문제점20세기 초기 역사관은 논리 실증주의에 영향을 받아 실증주의 사관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역사 실증주의는 기록된 역사가 실제 사실이었느냐를 증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후 20세기 중후반의 역사관은 모든 역사 기록이란 당대의 관점으로 해석된 역사라는 주장이 더 힘을 얻게 됩니다. 사실을 찾는 것보다는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를 주관주의 사관, 혹은 역사 수정주의라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즘 “역사는 승자의 역사” 또는 “역사란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라는 주장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결국, 사실보다는 주관적 해석과 남은 자들이 만든 주류적 의미가 역사라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이러한 현대의 역사관은 증명 불가능한 수 백 년, 수 천 년 전의 역사를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긍정적인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여러 면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 부역한 친일파들의 행동에 대해서 이들의 친일 행위는 당시의 상황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과, 지금 우리도 그러한 상황이었다면 이들과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역사 해석이 가능해지지 때문입니다. 또한,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역사적 사실도 얼마든지 왜곡 가능합니다. 이러한 일본과 친일적 역사학자들의 역사 해석에 우리가 불편해하고 분노하지만, 정작 우리가 이러한 수정주의적 역사 해석에 얼마나 익숙한지 생각해 본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 실증주의가 주장하는 것 같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주관적으로 보는 관점도 만만치 않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기록들을 볼 때, 어떤 관점을 가지고 보아야 할까요?성경의 역사관그리스도인들의 역사관도 앞에서 언급한 두 문제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실증 가능한 역사로만 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적에 대한 기록은 실증과 증명이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또한, 성경을 우리의 주관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더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을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바른 해석이 필요한 책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고대의 역사 서술 방식을 이용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사진과 영상 기록과 같은 방식이 아니기에 현대적 사실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부족하나 당시의 사실 기록 방식에 따르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개인의 사적 해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스스로 해석의 가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해석의 방향과 의미를 읽은 자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이 해석의 틀을 발견하고 이용하는 것이 사실을 바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가이드는 여러 영역에 걸쳐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매우 중요한 것 하나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성경적 역사관과 그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도시(עִיר, ir)의 역사창세기의 전반부는 인류의 탄생과 타락의 과정을 다루는 원 역사에 관한 서술입니다. 주로 창세기 1~11장이 이 내용을 포함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고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를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거절하십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가인은 저주를 받아 에덴 동쪽 ‘쉼 없는 땅’이란 뜻의 ‘놋’에 거주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땅의 이름처럼 쉼 없이 일했습니다. 쉼 없는 땅이라는 이름의 뜻이 의미하듯 가인이 거주한 땅, 놋은 가인이 지닌 근본적인 두려움과 불안에 기인합니다. 가인은 이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최초의 도시를 만듭니다(4:17).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도시이자 성인 ‘에녹 성’입니다. 이후 이 도시를 거점으로 가인의 자손인 야발은 목축의 기술, 유발은 음악, 두발가인은 금속 세공과 기계를 만드는 기술, 그리고 라맥은 전쟁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렇게 도시와 도시 속에서 발전시킨 문명과 기술을 통해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불안을 해결하고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얻었던 평안과 안정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도시는 이들 속에 있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발명품이었던 것이지요. 그러기에 도시는 가인의 후손들에게는 새로운 에덴의 건설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에덴이 바로 가인이 세운 최초의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이와 대비되어 하나님의 이름은 도시 밖에서 불립니다. 이것이 창세기 4:25-2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리고 5장에서 가인을 제외한 아담의 새로운 족보가 시작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족보가 서로 나뉩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는 도시라는 인간이 만든 가짜 에덴이 있었습니다. 또한, 도시의 문명과 기술은 하나님이 만드신 진짜 에덴에서 인간들에게 은혜로 주어진 동산의 실과를 대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가인의 도시와 도시가 만든 문명이 하나님을 제거한 가짜 에덴이며, 그곳은 인간이 주인이 되고자 하는 헛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시란 에덴을 빼앗긴 인간이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세운 대체 장치라는 것입니다. 세속 도시와 문명이란 결국 인간의 불안의 상징인 것입니다.이러한 도시에 대한 부정적인 기술은 이어지는 창세기 본문에도 계속됩니다. 셋으로 이어지는 아담의 새로운 계보는 노아에 이르러(6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도시 문화에 잠식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그 결과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하나님을 향해 높은 탑을 건설합니다. 하나님은 바벨이란 도시를 흩으시지요. 인간 안에는 홍수로도 씻기지 않은 가인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불안과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죄인의 불안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암덩이같다고 가르칩니다. 이 불안은 하나님이 만드신 진짜 에덴에서만 해소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만든 가짜 에덴으로 출발한 도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일까요?도시 속의 도시창세기는 바벨탑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도시의 부정적인 측면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돔, 고모라 등의 도시들이 나오며, 이와 대조적으로 아브라함은 도시 밖에 거주하면서 땅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도적으로 도시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도시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이삭의 아내를 찾는 사건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도시로 떠납니다. 종은 ‘나홀의 도시(성)’에서 도시 여자인 리브가를 찾습니다. 이삭의 아내는 도시 출신 여자였습니다(창 24). 그리고 야곱에 이르러 도시의 이미지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도둑질해서 도망합니다. 이때 야곱은 마치 동생을 죽이고 도망하던 가인처럼 불안에 떠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극도의 불안 속에서 가나안의 어느 도시에서 노숙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던 중에 놀라운 꿈을 꾸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야곱에게 들려주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창 28:12-15). 깨어난 야곱은 이곳이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벧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곳은 아브라함이 섞이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던 가나안 지역의 루스라는 도시였습니다. 가인의 도시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집을 찾은 것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6–19). 야곱이 루스에서 발견한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도시가 가인의 도시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후에 야곱이 한 행동은 자신이 노숙하면서 베개로 삼은 돌 하나를 그 땅 위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첫 벽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시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제거한 인간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도시 한 가운데에서, 야곱이 돌 하나를 세우고 여기가 하나님의 도시라고 선언한 것, 그것이 하나님의 도시의 출발이었다는 것이지요.하나님의 도시하나님의 도시는 강력한 세상의 도시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되었고, 다시 세계로 흩어져서 하나님을 믿는 무수한 사람들과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계속됩니다. 이 하나님의 도시의 특징은 첫째로 문명과 시스템으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도시는 문명과 시스템으로 견고하게 디자인된 기계적 안전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시는 그 출발인 벧엘이 의미하는 것처럼 도시이기 전에 집이었습니다. 그 정체성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시는 시스템이기 전에 인격이며, 기계적 결합이 아닌 유기적 결합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 도시에 속한 모든 자들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우는 모든 공동체에 적용됩니다. 인격의 공동체, 유기적 영적 연합의 공동체가 교회이며, 그리스도인의 모임입니다.하나님의 도시의 두 번째 특징은 세상의 도시를 하나님의 도시로 바꾸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도시는 하나님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진행입니다. 세상의 도시는 그 특성상 하나님을 그들의 도시에서 철저히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불안의 근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을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자멸하는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다만 여전히 우리가 강력한 세상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야곱처럼 작디작은 돌 하나를 세우고 하나님의 도시를 짓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 큰 도시와 더 위대한 문명과 기술을 추구하는 근원에는 인간의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진짜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도시를 건설하는 이유는 마치 노아가 방주를 지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창 6:8) 하나님의 가족들의 정체성이며, 존재의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시가 나약한 모습으로 세상의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외에는 어떤 것도 인간을 불안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는 방법에 나약함,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약함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관
역사관
창세기
최초도시
바벨탑
하나님의집
하나님의도시
공동체
벧엘
우리 혀가 (그리고 손가락이) 불이 될 수 있다
by Jon Bloom
2022-01-12
바리새인과 벌인 매우 긴박한 토론에서 예수님은 말의 중요성과 관련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4-37).이 얼마나 불편한 생각인가? 그렇게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말하는 (그리고 자판으로 치는!) 말은 우리 마음이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 때가 되면 우리가 내뱉은 말, 심지어 별 생각 없이 나온 말까지도 다 증인이 되어서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이다. 말이 드러내는 것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셨을 때(마 12:34),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맥을 살펴보는 것이다.예수님은 조금 전 마귀의 압제에서 한 사람을 구하셨다. 그리고 이 기적을 목격한 군중은 예수님이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군중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서 미리 준비한 대답을 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마 12:24).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고발 속에 담긴 노골적인 위선을 폭로하면서 가장 엄한 책망을 쏟아내셨고, 더불어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의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경고하셨다(마 12:31-32). 그리고 예수님은 말이 드러내는 것과 관련해서 요점을 밝히셨다.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말을 그들에게 그대로 돌려줌으로서 그들의 마음속에서 불을 지피고 있는 악의 세력, 곧 바로 그들의 마음에 있는 악을 폭로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중하고 의도적으로 할 말을 선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근거 없는 비난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심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여론을 동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압제에서 해방하심으로 맺은 “좋은 열매”를 의도적으로 악이라고 불렀지만, 부정직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불신함으로 스스로가 맺은 “나쁜 열매”는 인식하지 못했다(마 12:33).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악한 일에 너무 눈이 멀어 스스로가 처한 영적 위험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을 마귀라고 부르도록 만드는, 마귀의 영향력을 분별하지 못했다. 그들의 말은 단지 그들의 마음에 가득한 악에서 우러나왔을 뿐이었다. 부주의한 말까지도아마도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행여나 바리새인에게 번개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싶어 몇 걸음 물러섰을 것이다. 그러나 말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는 단지 바리새인만을 향한 게 아니라 모두를 다 포함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예수님을 고발했던 바리새인들의 말은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무익한 말(careless word, 부주의한 말)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보다 아주 신중하게 예수님을 비난할 말을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신중하고 사려 깊은 말뿐 아니라 생각 없이 내뱉는 무익한 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는 사실을 당시 유대인뿐 아니라 우리도 알기를 원하셨다. 이런 점은 문제를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만든다. “무익한”은 헬라어 ‘아르곤’(argon)을 잘 번역한 것이다. 무익한 말은 경솔하고, 나태하고, 또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말일 수도 있다. 인내심을 잃었을 때 내뱉는 말 또는 평소 자주 생각하지 않던 문제에 관해서 아는 척하면서 하는 말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또한 공개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우리가 평소에 중요하다고 느끼는 문제에 대해서 화를 내며 거칠고 모욕적인 어투로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에게서는 아주 드물지만, 부주의한 말이 인내, 친절, 존경, 평화, 그리고 겸손의 말이 될 수도 있다.예수님의 요점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 우리를 변호하거나 아니면 공격하는 증인으로 소환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은 무익한 말조차도 다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무익한 말이 주는 교훈은 우리의 영적 경계심이 무너질 때 그런 말이 나오기 쉽다는 것이다. 아픈 비유최근 미국 내셔널 풋볼 리그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살펴보자. 돈 잘 버는 눈부신 경력을 자랑하던 존 그루던(Jon Gruden) 감독은 무익한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2021년 10월, 두 개의 유명 신문은 그루던이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Las Vegas Raiders)의 감독이 되기 전인 2010년과 2018년 사이에 쓴 수많은 이메일에 대한 폭로 기사를 게재했다. 그 메일에는 그루던이 분명히 (그러나 결국은 멍청하게도) 비공개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 단어들이 들어 있었다. 한 뉴스 사이트가 요약한 바와 같이, 공개된 이메일에는 “동성애 혐오, 여성 혐오, 성차별적 모욕의 말과 더불어서 상체를 노출한 워싱턴 풋볼 팀 치어리더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다.특히 10월 11일은 그루던에게는 여론이라는 법정에 서는 심판의 날이 되었으며, 한 스포츠 기자가 말했듯, 그루던은 “바보스럽고 부주의한” 단어를 쓴 자기 자신에 의해 철저하게 비난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레이더스의 감독직을 사임했다.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조금 더 잘 깨달을 수 있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3).미국의 법 제도에서 기소를 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은 법정에서 당신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고 또 사용될 것이다”라는 경고를 받는다. 예수님도 같은 경고를 하셨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고 또 사용될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말하고 사적인 방에서 속삭인 모든 것, 우리가 내뱉은 어리석고 부주의한 모든 말들이 우리에 대한 저주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조치는 법정에 가기 전에(마 5:25) “우리의 고소자와 최대한 빨리 합의를 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와 함께 기도하자.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3-4).우리의 심판자가 의로우시기에,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혀와 손가락에 재갈를 물려라 그러나 회개의 모습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것은 또한 회개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말, 특히 부주의한 말에 관한 한 회개는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특성상 그 재갈은 자판을 치는 손가락까지 포함한다. 나는 재갈 또는 고삐라는 은유를 혀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 세 가지 유용한 비유를 사용한 사도 야고보에게서 가져왔다. (1) 말의 고삐, (2) 배의 키, (3) 불꽃(약 3:1-6). 이것들은 혀와 손가락처럼 큰 힘을 가진 작은 물체이다. 처음 두 가지는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통제를 보여 준다. 작은 고삐는 강력한 말을 통제하고, 작은 키는 강력한 배를 조종한다. 그러나 세 번째는 통제 부족(부주의라고 하자)이 얼마나 큰 파괴를 일으킬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작은 불꽃 하나가 숲 전체를 태울 수 있다. 요점은 분명하다. 통제되는 말은 유용하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명나무”가 될 수 있고(잠 15:4), “듣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 수도 있다(엡 4:29). 그러나 통제되지 않고 어리석은 말은 우정, 가족, 교회, 그리고 직업까지 불태울 수 있다(약 3:9-10). 문제는 우리가 선을 추구하기 위해 말을 통제하려 어떤 고삐를 조이고 있는가이다. 24시간 규칙내가 사용하고 있는 개인적 고삐 하나를 공유하겠다. 바로 24시간 규칙이다. 내 안의 화, 좌절감, 방어 심리를 일으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대답하기 전에 나는 적어도 하루를 기다린다. 누군가는 즉각적인 답을 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응답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거의 항상 24시간이 지나면 열정적으로 폭발할 것 같던 감정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보다 더 신중하고 사랑스러운 말로 응답할 수 있게 된다. 그뿐 아니라, 나는 종종 처음보다 상대방의 관점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이 규칙은 글로 생각을 표현할 때에도 매우 유용하지만,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이 고삐는 특히 남편과 아버지로서 사용될 때, 항상 더 건설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고삐를 찾아야 하며, 그 일은 남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하는 게 중요하다. 예수님을 위해 말(words)이라는 거친 말(horse)에 고삐를 씌우는 힘든 일을 기꺼이 하는 사람은 그런 노력을 통해 예수님을 향한 사랑(요 14:15)뿐 아니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려는 열망(마 22:39)까지 함께 드러낸다. 그리고 혀와 손가락에 고삐를 물리지 않는 자들은 심판 날에 그들이 내뱉은 말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느냐 않느냐는 우리 마음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준다. 원제: Our Tongues (and Fingers) of Fire: What Words Reveal About U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말조심
부주의한말
무익한말
말의위험성
말의중요성
심판자
생명나무
재갈
은유
처음
이전
76
페이지
77
페이지
78
페이지
79
페이지
열린
8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