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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로소 엄마 되게 한 시편
by Harriet Connor
2022-01-11
나는 성 평등이라는 가치에 푹 빠져서 자랐다. 유치원 시절, 색칠 놀이 테이블에서 있었던 열띤 대화를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여자 색과 남자 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라며 논쟁하던 아이였다. 내가 다니던 여고에서는 “남학생을 이겨라”라는 무언의 구호가 있었다. 우리는 남자 못지않은 과학자, 변호사,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큰 꿈을 꾸라는 격려 속에서 공부했다. 교직이나 간호사 같은 전통적인 여자의 직업을 말하는 선생님은 거의 없었고, 학교에서 “모성”(motherhood)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내가 성장할 당시 경험한 이런 페미니즘을 아비게일 파베일(Abigail Favale)은 다음과 같이 완벽하게 설명한다. 고전적인 페미니스트 주장은 성 역할의 유동성, 곧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여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의 본질에 관련해서 남자와 다른, 그 어떤 차이도 없다고 전제된다. 대신, 여자와 남자는 본질적으로 상호교환이 가능하고 동일하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주어진 일은 다 할 수 있기에, 여자는 여자라는 것 때문에 특별할 게 없다는 입장이다. 그 결과, 나는 내 속의 여성성과 매우 단절되어 자랐다. 나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분홍색 옷을 입지 않았다. 화장을 한 적도, 머리를 한 적도 없다. 치마와 젖가슴, 생리 기간은 “남자들을 이기기” 위해 극복해야 할 사소한 불편에 불과했다.부모 역할: 평등을 위한 투쟁젊은 성인이 된 내게 적합한 파트너를 찾는다는 것은 나와 똑같은 가치와 신념뿐 아니라 같은 관심사와 취향, 같은 유머 감각과 의사소통 방식까지 공유하는 사람, 곧 나와 똑같은 사람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대한 것은 목표를 공유하는 두 사람이 상호교환 가능하게 일하는 파트너십이었다. 결혼하고 임신하고 나서야 나는 여자로서 내 몸을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복잡하게 설계된 어떤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를 낳았을 때까지만 해도 역할 면에서 남편과 나를 구별하는 유일한 것은 수유 정도라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아들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나와 남편이 다르지 않다고, 곧 “부모 역할”에서는 피차 평등하고 동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이 생각만큼 잘 풀리는 것 같지 않았다. 남편의 자녀 양육 방식은 나와 근본부터 달랐다. 때때로 아들이 우리에게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에 관해서 우리는 상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남편은 아들에게 더 많은 독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오히려 더 많은 연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내가 너무 유하다고 생각했고, 나는 반대로 남편이 너무 엄하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 때문에 우리 가족의 삶은 투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 각자가 타고난 경향은 항상 다른 방향으로만 향하는 건지, “평등”은 도달이 힘든 애매한 목표처럼만 보였다. 모성: 즐거운 재회젊었을 때 나는 시편 139편을 수없이 읽었다. 외롭거나, 오해를 받거나, 또는 길을 잃을 때마다 139편을 찾았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하신다는 진리, 곧 하나님은 나를 너무 잘 아시며, 또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진리에서 위안을 찾곤 했다.그러나 최근 들어 나는 시편 139편에서 새롭고 더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 시편 139편이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진리뿐 아니라,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인류에 대한 심오한 진리까지 인식하게 된 것이다. 내 인생에서 시편 139편은 이제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완전한 전환, 일종의 “회심”을 상징하는 말씀이 되었다.나는 내 몸이다나는 내가 물려받은 세계관이 여자의 몸에서 인격을 소외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몸이란 단지 진정한 자신, 곧 성격, 신념, 욕망을 담는 무작위로 걸린 그릇에 불과하다는 신념을 갖고 자랐다. 따라서 애초부터 내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생각과는 대조적으로,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는 ‘네 몸을 사랑하라’(Love Thy Body)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몸과 영혼을 동전의 양면으로 취급한다. 영혼의 내적 생명은 육체의 외적 생명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녀는 좀 더 자세히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성경의 윤리는 성육신의 윤리다. 우리는 마음과 몸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여기에는 그 어떤 분열도, 소외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육화된 존재다. 이 점은 시편 139:1-4을 보면 명백하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이 시구에서 사람의 마음과 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하나님은 나를 아실 때 내 생각과 말뿐 아니라 내 몸의 행실까지도 다 아신다. 나는 단지 내 몸 안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다. 나는 영혼뿐 아니라 나라는 몸이기도 하다. 성경에 따르면, 몸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당신을 영화롭게 하고 반영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수단이 바로 몸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다시편 139편에서 시인은 어떤 목적을 갖고 몸과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이 구절은 여성이라는 나의 성이 나를 위해 하나님이 가진 좋은 계획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신시킨다. 하나님이 여자의 몸을 만드신 게 나를 위해서라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여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은 어떤 형태를 가지기 마련이다. 피어시는 이렇게 지적한다. “신체의 물리적 구조는 우리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단서를 드러낸다.…기독교 윤리는 자연과 몸의 목적론(내재된 목적)을 존중한다.”나는 엄마다앞에서 말한 “회심”이 내게 가능했던 건,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 내가 도무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성경 전체를 읽었고, 부모가 되는 것에 관한 모든 내용을 기록했다. 심지어 나는 그 주제로 책까지 썼을 정도였다. 하지만 육아에 있어서 성별 차이가 가지는 질문에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성경의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또는 무엇을 가르치지 않는지) 너무 자세히 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성경 속 이미지와 상징이 창조로부터 추정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름 성경은 부지런히 팠지만, 나는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것은 등한시했다. 나는 파벨(Favale)이 말한 것처럼 실재를 제대로 포착하는 데에 실패했다. 우리 몸에는 어떤 주어진 것(givenness)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변덕에 의해 결정되거나 구성되지 않는, 신성한 의미에 의해서 새겨진 것이다. 몸은 우리의 허가 여부에 관계없이 상징의 언어를 말한다. 예를 들어, 시편 139편은 어머니의 태를 창조 장소로, “땅의 깊은 곳”과 평행하게 설정한다. 첫 사람은 하나님이 땅의 흙을 빚으시고 생기를 주실 때(창 2:7) 땅의 “태”에서 형성되었다. 지금도 매일 지구는 땅(또는 여자)에 심어진 씨앗이 초목으로 싹을 틔우면서 계속해서 “낳는” 활동을 반복하고 있다. 몸 안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여자는 땅과 같다.임신한 동안 하나님께서 친히 내 태 속에서 사람을 만드시고 계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울 뿐이다. 기적과도 같이 방금 내 몸에서 나온 진짜 인간 아기를 경외심에 쳐다보던, 어머니가 된 첫 날 밤의 초현실적인 그 느낌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 4:1)고 고백한 첫 어머니 하와의 감정을 느꼈다. 나는 ‘부모’ 중 한쪽 이상이다어머니와 아버지의 차이는 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신했을 때, 나는 우리 아이들의 첫 번째 집이었다. 태어날 때 아이들은 내 몸에서 나왔다. 육아를 할 때 나는 아이들에게 영양과 위안의 첫 번째 원천이었다. 물론 우리 아이들은 남편에게서도 왔고 나만큼이나 남편에게도 똑같이 속해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훨씬 더 큰 물리적 거리에서 시작되며, 이 거리는 아버지가 개인적인 헌신으로 연결해야 한다. 창세기 1-2장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는 기원도 다르다. 아담은 땅에서 나왔고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다. 알라스테어 로버츠(Alastair Robert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남자와 여자는 따로따로 그리고 다르게 형성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본성과 목적 사이에는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남자는 땅을 경작하고 땅을 섬기고 또 다스리도록 땅으로부터 지음을 받았다. 반면에 여자는 결합을 통해 생명과 친교를 가져오기 위해 남자의 옆구리에서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어머니로서 나는 남편과 다른 무엇을 상징하고 의미한다. 육체를 떠나 성별의 구분이 없는 “육아”는 애초에 있을 수 없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자녀와 연결된 진짜 어머니와 진짜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여자인 내가 계속해서 “내면”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전혀 놀랍지 않다. 곧, 내 속에는 언제나 “가정 만들기”, 음식 준비,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위안과 안식처를 제공하려는 경향이 피어오른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아이들이 내 속에서 잉태되었던 순간부터 내 몸이 해 온 일이다. 물론 모든 여자가 다 출산을 통해 엄마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양어머니와 계모라도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고 호르몬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경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가 돌보는 아이들은 때때로 우리에게서 모성을 끌어내기도 한다. 반면에 남편은 외부 세계에 대한 눈으로 아이들과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다. 남편은 자녀를 대표할 뿐 아니라 보호하고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며 세상을 직면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힘을 갖추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로서의 육체적 관계도 처음부터 그런 경향을 띄고 있었다. 이런 모든 깨달음은 자아 이해와 자녀 양육에 대한 접근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다. 나는 더 이상 남편과 상호교환이 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기쁨으로 나는 여자라는 내 몸과 재결합했고, 나는 이제 여자라는 사실로 살 뿐 아니라 여자로서 내 아이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한 나는 육아에 대한 나와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진 남편을 나의 완벽하고 필요한 보완으로 인식하는 법을 배웠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애써서 “육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날이 배워가고 있다. 원제: How Psalm 139 Made Me a Mother (Not Just a Par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시편139편
육아
창조질서
성경적육아
남녀차이
몸과영혼
여성들의 죄 고백: 그 거짓과 진실
by Tori Campbell
2022-01-10
잠에서 깨어 일어나 앉았다. 어슴푸레한 휴대폰 빛이 얼굴을 감쌌다. 내용이 빈 채로 문자 앱이 열려 있다. 변명거리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갔다. 지난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아니야. 엄지손가락이 바빠졌다. “엉망이 돼 버렸어. 우리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송’ 버튼을 눌렀다.처음 죄를 고백하기 위해 친구에게 연락을 취했을 땐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위험한 행동 같기도 했다. 그러나 또다시 죄에 빠져든 나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하는 현명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죄를 고백할 타이밍이었다.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교회 안에서 남자들에게는 서로 죄를 고백하고 회개를 통해 서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 이러한 책임을 서로 나눌 복된 기회가 자주 주어졌다.그러나 야고보서 5:16의 하나님의 이 명령은 남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적용해야 할 말씀이다.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여성들 사이에서도 서로 죄를 고백하는 이 쉽지 않은 일에 적극 동참하는 이들이 늘고 있어서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힘든 일을 실천하려 할 때마다 온갖 거짓과 의심이 슬그머니 찾아와서는 선한 의도가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여기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일’을 실천하려는 여성들을 주저하게 하는 몇 가지 흔한 거짓말을 살펴보고, 더불어 이러한 여성들이 붙잡아야 할 진리들을 나누고자 한다.1.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일 뿐이야.’“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요일 1:9). 우리가 처음 복음을 들을 때 배우게 되는 진리의 말씀 중 하나이다. 그렇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 오직 예수님만이 용서를 베푸신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고백해야 할까?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께 하는 고백과 사람에게 하는 고백은 목적이 다르다. 우리가 우리의 숨겨진 어두운 부분을 우리 자매들과 나눌 때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성에 가깝다. 우리 믿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는 지체다. 서로의 부끄러운 모습조차 은혜와 자비로 대할 때, 서로를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하는 자리로 이끄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변함없는 소망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 확신을 줄 때, 그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용서를 보여 주는 것이 된다.데인 데서리지(Dane Deatherage)가 말한 대로, 죄 고백은 “하나님의 용서를 생생하게 경험할 기회”이다.2. ‘내 죄가 고백할 만큼 큰 건 아니잖아.’문화에 따라 특정한 죄에는 집착하고 다른 죄에는 비교적 너그러운 어떤 경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문화에서 여성이 음란물에 빠지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마음속에 시기심을 갖는 것은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하거나 별일 아닌 듯 넘긴다. 그러나 로마서 1:29은 시기심으로 얼룩진 삶은 다른 죄와 동일하게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죄라고 가르친다.모든 죄는 다 우리 마음이 부패했다는 신호이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우리 삶을 갉아 먹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정식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살피고 애초에 죄의 싹을 잘라낼 기회이다. 3. ‘죄를 고백하면 내 이미지가 안 좋아질 거야.’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고백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을 취약한 상태로 내모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바로잡고,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해준다. 비록 직면하기 고통스러울지라도 하나님은 다른 자매의 애정 어린 책망은 은혜로운 것이며 심지어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시 141:5). 그런데도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서로 죄를 고백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벽은 자신이 고백한 죄로 인해 수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인 것 같다. 자신의 비밀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가십거리가 되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말이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이미 이러한 쓰디쓴 현실을 맛본 후라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을 하기 싫을 수도 있다. 확실히 어떤 자매들은 이러한 일을 감당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대상을 선택할 때는 신중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에릭 레이먼드(Erick Raymond)의 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우리 삶에 따라오는 모든 위험요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혹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용당한 모든 굴욕은 그날에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이다(시 7:8). 영혼을 잃어버릴 처지에 있으면서 좋은 이미지를 잃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격려가 되는 것은 우리가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성숙한 자매를 찾게 된다면 그녀는 성령께서 자신 안에서 열매를 맺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적절한 신뢰 관계를 지킬 줄 안다는 것이다(잠 11:13). 게다가 성숙한 그 자매는 우리만큼이나 자신도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 죄의 고백을 듣는다고 그녀가 충격에 빠지거나 우리를 덜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다. 만약 그녀가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애초에 그녀가 우리와 그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한 것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지혜롭고 성숙한 여인은 자신에게 죄를 고백하는 자매가 죄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도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우리의 시선이 예수 곧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신 주님을 향하도록 도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수치를 짊어지고 담당하신 분이시다. 죄 고백은 결국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된다. 죄 고백의 목적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이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정반대로 너무 과하게 우리 죄의 세세한 부분까지 누군가에게 쏟아내는 것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간혹 자신의 죄를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만 자신이 진정으로 ‘용서받았다’고 느끼는 듯하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혹시 이러한 일을 습관처럼 하고 있다면, 이는 ‘죄 고백’ 속에 담긴 핵심을 간과한 것이다. 우리의 죄를 말하고 나면 확실히 마음의 짐은 내려놓을 수 있겠지만 죄로 인한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 죄 고백의 목적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사실 야고보서 5:16의 “병이 낫기를 위하여”로 번역된 헬라어의 뜻은 때때로 몸의 치유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관계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할 때가 더 많다. 야고보는 이러한 이중 의미를 담아 놀라운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우리 죄가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는지 인정하고 용기를 내어 서로 마음을 드러낼 때,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걸음을 방해하는 질병이 떠나가고, 우리의 유일한 치료자 되시는 주님의 길을 다시금 자유함 속에서 걸어가게 된다.원제: Women Need Accountability, Too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여성
죄고백
수치
회복
고백과용서
죄고백의용기
다함께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
by Kai SoltauㆍMatthew Short
2022-01-09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척한 지 얼마 안 되는 우리 교회는 예배드릴 때 이렇게 니케아신경을 낭송한다. 이런 옛 신앙고백들을 암송하는 전통이 낯설거나 아니면 구식으로 보이는 복음주의자들도 많이 있겠지만, 우리 교회는 주일마다 신조들과 신앙고백들과 교리문답들(신앙고백들로 통칭하겠다)을 낭송한다. 탈교회, 탈기독교 현상이 뚜렷한 이 유럽 국가에서, 이처럼 신앙고백이 교회생활의 중심 리듬이 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는 몇 가지 입장에 따라 그 의미하는 바에 차이가 있으며, 우리는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전통의 가르치는 그 원리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교회로서 우리는 성경이 공예배(corporate worship)에서 지켜야 하는 요소들을 규정한다고 확신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 요소들이 취하는 형식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보통 우리는 매주 같은 예배모범을 따라 예배를 드린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송축하고, 우리에게 구주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그리스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공급하심을 찬양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숙고한다. 우리는 신앙고백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성경을 잘 요약한 이러한 내용들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교회(the church)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우리’ 교회도 거기에 포함해서 그렇게 고백한다. 우리 교회는 ‘거룩하다.’ 곧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보다 큰, 보편 교회의 일부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사도적이다.’ 곧 우리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른다. 이렇게 신앙고백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성도들이 신앙고백에 따라 생각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 역사적 신앙고백들이 우리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되기를 기도한다. 거룩한 교회_세상과 구별되는 교회 복음주의자들은 거룩함(holiness)을 점진적 성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거룩함은 교회의 구별된 특징이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세상과는 다르다는 의미다. 보편 교회로서의 교회도 지역 교회로서의 교회도 그렇다. 하나님을 떠난 시대에 하나님께 헌신하는 교회그리스도인은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나그네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시어 우상숭배의 삶을 버리고 당신의 거룩한 백성이 되라 하셨다(벧전 1:13-21; 살전 1:9-10). 이곳 유럽에서 기독교의 원칙과 덕목은 더 이상 규범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것을 규범에서 벗어난 것으로 취급한다. 현대 유럽 문화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것은 멍청함의 극치요, 성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살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현실이 이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마다 더욱 더 이러한 고백을 해야 한다. 신앙고백들은 세상이 비정상 취급하는 것을 정상이라고 시공을 초월하여 고백하고 증언하는 기독교의 자기표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예배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 편에 서 있다고 하나님께 고백한다. 세상은 우리의 고백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고백에서 어떤 매력도 알아본다. 거짓의 시대에 진리를 확신하는 교회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에 “모든 인간은 그들이 행세하는 대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썼다. 칭찬에 대한 욕망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가면을 쓴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그 가면과 우리 얼굴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중에서도 동료압력(peer pressure)이 가장 거물급 유혹 책략이다. 그렇다면 근본 진리들을 다함께 고백함으로써 어떻게 우리는 세상의 악이 우리 마음속에서 정상으로 탈바꿈하지 못하도록 더 잘 물리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나갈 때, 살아 있는 성도들은 영원히 살 것이지만 죽은 사람들에게는 죄의 책임이 없다는 거짓 교리에 오염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교회에서 10명, 20명, 50명, 또는 500명의 성도들 앞에 서서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라고 다함께 고백할 때 우리는 세상의 교리를 물리치는 증언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그냥 그런 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증언하고 그래서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분열에 맞서 다함께 하나 되는 교회 세상에서 사람들은 코로나19나 정치 같은 다양한 주제들을 두고 의견과 입장이 분열되어 있지만, 우리는 힘써 하나됨을 유지한다는 교회 언약(church covenant)에 서약했다. 주일마다 우리의 신앙을 한목소리로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이 하나됨을 우리 마음에 뚜렷이 새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들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반기독교 문화가 득세하는 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독특성을 되새긴다.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구별됨을 보여 주며, 동시에 교회 안에서는 자비와 하나됨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따른다. ‘우리 교회 밖, 다른 교회의 그리스도인과도 “하나” 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보편 교회_하나님 백성들이 함께하는 교회 신앙고백들은 또한 우리 모두가 보편교회의 구성원이라고, 곧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부로서 우리는 하나라고 가르친다. “보편 교회”(catholic church), 이 용어는 약 주후 107년에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의 편지에서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이 용어는 점점 그 인기를 잃었다. 우리는 ‘가톨릭’이라는 용어 대신에 “유니버설”(universal)이라는 용어를 선호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우리를 로마가톨릭과 구분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타협은 다소 유감스럽다. 원래 “가톨릭”이 사용된 역사를 보자면, 이 용어는 ‘보편’을 뜻하기도 하지만 전체(wholeness), 함께함(togetherness)의 의미도 담고 있다. 이것은 어떤 중요한 사안들에서 우리가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전체 신앙고백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과도 우리는 하나라는 의미이다.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구원받은 모든 무리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있다. 겸손히 헌신하는 교회 우리가 신앙의 근본들을 정기적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힘써 낮추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빈 같은 국제도시에서, 우리 교회는 새로운 신자가 교회를 찾을 때 발견하게 되는 첫 번째 참된 교회는 아니다. 우리가 이 도시의 유일한 개척교회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목회자들과 교회개척자들도 알고 있고,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이 그들에게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정해 두고서 그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가, 예를 들어,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는 것은 곧 복음 안에서 그들과 하나됨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유일한 참된 교회라고 믿는다면, 교회생활의 매우 많은 것들이 쉬워질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받은 세례가 아니라면 그런 세례는 다 무효일 것이니, 어떤 사람에게 어떤 세례를 어디서 받았는지 물어 볼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 외에 다른 교회는 모두 거짓 교회일 터이니, 다른 교회를 굳이 분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교회들과 개척교회들은, 특히 탈기독교 상황에서, 그들보다 앞서 사역한 사람들의 수고를 인정해야 한다. 주님이 모세를 감추셨다면, 주님의 목적들은 단지 한 사람 또는 한 교회보다 클 뿐이다. 역사에 뿌리 내린 교회 보편 교회의 일부로서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형성하는 2000년 교회 역사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감사하게도, 이러한 역사가 맺은 많은 열매가 신앙고백들 안에 표현되어 있다.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보편 교회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있는 교회들에서 교리교육을 강화함으로써 복음을 수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갈 1:8-9). 간단히 말해서, 교회가 성도들을 교리로 교육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을 오래된 이단들, 포장을 바꾼 새로운 이단들에 넘어가도록 내버려 두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고백들에는 내주하는 성령의 지혜로 성경을 해석한 사람들의 지혜의 정수(精髓)가 들어 있다. 아타나시우스, 나지안주의 그레고리, 아우구스티누스, 마르틴 루터, 토머스 크랜머,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 앤드류 풀러, 존 브로더스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그들이다. 21세기 신자세례파(Credobaptist[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성인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파로 유아 세례에 반대한다])라면 이 지혜의 사람들 중에서 동의할 수 없는 점들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이들과 더불어 우리는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성경적 진리들을 고백한다. 역사적 신앙고백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문화 안에서 기독교의 증인으로서 우리의 신용을 쌓는다. 빈에 터를 잡은 신생 개척교회로써 우리는 전 세계 형제자매들이 갖지 못했을 수도 있는 엄청난 자유를 누리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세계 다른 지역에서 누리는 만큼의 종교자유와 정교분리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떤 종교단체가 컬트(cults; ‘사교집단’)나 섹트(sects; ‘폐쇄적 종파’)로 규정되면 불법 단체가 된다. 이것은 신생 종교단체(church innovations)에 대한 문화적 반감이 이 나라에 널리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국가 교회(state church)에 소속되어 있지 않는 자유 교회들이 최근(2003년)에 종교 단체로 인정받았지만, 오스트리아 국민 다수는 이러한 종교 모임들을 여전히 신생 종교단체 아니면 사교집단 비슷한 것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17세기까지 올라가는 신앙고백을 가진 교회를 어떻게 이렇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스트리아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1689년 제2차 런던 신앙고백(1689 Baptist Confession of Faith)을 공포하고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성도의 교제 가운데 용기를 얻는 교회 주일마다 빈에서 예배드리는 우리 교회는 많지 않는 성도들의 무리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성경을 믿지 않고 고백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많은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는 전 세계 모든 시간 속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나란히 함께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 중에 신앙고백을 낭송하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이제 전 세계 모든 시간 속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교회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신앙고백을 시작함으로써 큰 용기를 얻는다. 사도 교회_성경에 기초한 교회 역사적 신앙고백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낭송하며 교리문답을 배우는 것은 곧 신약과 구약의 진리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다음세대를 가르치라고 명한다(신 6:4-9). 신약에서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했다”(행 2:42). 역사적 신앙고백들을 우리의 교회생활에 통합함으로써, 우리는 교회(the church)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님께서 그리고 주의 사도들이 가르친 대로 받고, 지키고, 물려주어야 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표현한다. 진리를 물려주라는 명령을 따르는 교회 역사적 전통들을 통해 내려온 우리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마음을 다하고”(신 6:5), 하나님의 진리를 “자녀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 6:7), 그럼으로써 사도들의 가르침(행 2:42)에 몰두하는 교회가 되고자 한다. 여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한 가지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 4:11-14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각 교회의 “목자-교사들”에게는 신령한 진리를 교인들, 곧 그 “자녀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기본 진리들 안에서 제자로 훈련받는 교회 “똑같은 옛 신앙고백”을 계속 고백하면 그 의미를 상실하고 결국 기계적인 고백이 되고 말 것이라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일마다 우리가 참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긴다는 것은 곧 축복임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래, 이것이 바로 내가 믿는 거야, 그렇지?”하고 자신을 점검할 수도 있고, “내가 정말 이것을 믿고 있을까? 내 삶과 행동은 내가 바로 전에 함께 고백한 것을 진정으로 반영하고 있을까?”하고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도전을 줄 수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가! 이 진리를 얼마나 더 고백해야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까? 또 사도신경의 두 번째 행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를 깊이 생각해 보라. 이 고백을 할 때면 나는 ‘이번 주에 나는 그 외아들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모하고 또 얼마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살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권위에 복종하는 교회 우리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사역자의 권위” 곧 초대 교회가 “신앙 규칙”이라고 불렀던 것을 대부분 잊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권위는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권위는 로마가톨릭교회가 독점한다는] 성경에 대한 “교회의 권위”와는 대조된다, 사역자의 권위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이나 요약, 해석의 열쇠를 마련해 준다. 이러한 것들은 물론 성경 자체에서 비롯되지만, 모든 신학은 결국 성경의 진리를 체계화하고 종합하기 위한 범주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함축하는] 위격의 연합(hypostatic union), [첫 창조에서 인류의 머리인 아담과 새 창조에서 구속받은 인류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함축하는] 언약의 대표성(federal headship) 같은 신학 개념들을 우리가 사용할 이유는 없다. 신앙고백들은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나타내는 신앙고백들에는 권위가 있다. 이 사실은 신앙고백들은 성경에 불필요한 것들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없애 준다. 오히려, 많은 신앙고백들은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심오한 성경적 깊이를 가진다. 진리 안에서 강해지는 교회 주일 설교에서 가르칠 만한 아주 간결한 진리의 공식 같은 것을 찾으려 할 때가 있다. 이번 주일에 에베소서 4장 11-16을 설교하려 한다고 치자. 설교자는 성도가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러 그리스도 앞에 영광스럽게 나타나도록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사랑 안에서 세워 나가도록” 부름 받았는지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이 가르침을 거의 300년이나 된 이 교리문답으로 보충하여 설명할 것이다. “가시적 교회가 무엇입니까?” “가시적 교회란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이 있고, 참된 복음이 설교되고, 세례와 성찬이 바르게 시행되는 모임입니다.” (1693년 발표된 벤자민 키치 교리문답 제105 문답니다.) 결론 모든 지역 교회는 언덕 위에 서 있는 거룩한 도성이 되어야 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도들과 하나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터를 잡아야 한다. 역사적 신앙고백들, 신조들, 그리고 교리문답들은 우리가 정체불명의 신앙고백들, 편협한 성경주의, 연표에 기댄 속물근성(chronological snobbery[이전 시대의 사상이나 학문보다 현 시대의 것이 더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에 오염되는 것을 막아 준다. 역사적 신앙고백들, 신조들, 그리고 교리문답들은 교회가 그 신앙고백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방편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핵심이 되는 방편이라고 확신한다. 원제: Confessing the Faith: The Place of Confessions in Church Life출처: www.9marks.org번역: 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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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밤의 시편
by Ken Montgomery
2022-01-08
시편 77편에서 아삽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시 77:4). 고통스러운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아삽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을 살펴보기 전에, 시편 77편의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77편은 [총 5권으로 되어 있는] 시편의 제3권(시편 73-89편)에 들어 있는 아삽이 노래한 시다. 제3권에 펼쳐져 있는 시편의 풍경에서 이 시는 “어두운 골짜기”에 해당한다. 이스라엘은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데, 악인(바벨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것을 시인은 목도한다(시 73:3).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가 되어 버렸고(시 74:7), 다윗 왕가는 사라졌으며. 그 왕관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다(시 89:39). 한때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72편) 번창했던, 솔로몬의 치세와 그의 왕국이 그 찬란한 빛을 비추었던 곳에 지금은 무거운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시편 73-83편을 쓴 합창단장 아삽은 우울한 노래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삽의 시들을 지배하는 음조는 단조다. (적어도 오늘날의 문화 상황에서는) 단조는 긴장과 방향감각의 상실 및 그 해결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다. 합창단 지휘를 위해 지휘봉을 든 아삽은 슬픔 속에서 노래를 부른다.나는 아삽이 다른 건 몰라도 동기부여 강사로는 생계유지가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왜? 동기부여 강사가 가져야 하는 핵심 마인드는 당신 앞에 있는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올바른 접근방식과 “닥치고 해결”이라는 정신으로 무장하면 언제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삽은 (남겨진 사람들과 함께 겪고 있는) 자신의 곤경이 너무 깊고 가혹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사실은 우리를 시편 77:7-9의 질문으로 이끈다. 이 시구를 풀어 보면 이렇다. (우리에게 “밝은 얼굴로 대하시겠다”고 아론의 축복[민 6:24-26] 속에서 약속하셨던)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등을 돌리시는 것일까?” “나는 지금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 처음 시작된 길) 하나님이 약속한 길이 끝나버린 곳에 서 있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아삽은 자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은혜의 약속을 잊으신 것일까?”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모세를 바위 틈에 들어가라 하시고[출 33:21-23]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나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출 34:6-7]이 아니셨던가?) 한밤중 아삽의 생각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 아삽의 머리 위에서는 불길한 구름이 뭉게뭉게 자리를 잡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백록’에서 같은 말을 한다. “심오한 자기성찰이 내 영혼의 저 신비로운 심연으로부터 내 모든 비참함을 함께 끌어내어 내 마음의 눈앞에 쌓아 두었을 때, 엄청난 눈물의 폭우를 동반한 강력한 폭풍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 시편 제3권 전반부의 시들이 노래하는 슬픔이 이제 77편에서는 훨씬 더 극심해진다. 명백한 불의를 목도하면서 아삽이 느낀 복잡한 심정(시 73편)과 폐허가 되어버린 하나님의 도성을 걷는 트라우마(시 74편)보다, 77편의 슬픔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제 아삽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등지시는 게 아닌지 두려워한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시 77:3). 아삽은 하나님이 자신의 대적하실까 두려워한다. 시편 77편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욥의 부르짖음을 느낄 수 있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욥 30:21-22).아삽은 이제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천로역정’에서 ‘절망의 늪’(Slough of Despon)에 사로잡힌 주인공 ‘크리스천’(Christian)이 ‘전도자’(Evangelist)에게 어떻게 하면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 묻는다. 전도자는 대답한다. “길을 만든 사람이 적어 놓은 안내를 보면 수렁 사이에 분명히 안전하고 튼튼한 계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계단이 어떤 때는 보이는데 또 어떤 때에는 보이지가 않아요. 또 때때로 그 계단에서 현기증을 느낀 사람들이 그 수렁에 빠지기도 합니다.” 아삽은 어떻게 해야 딛고 걸을 수 있는 “안전하고 튼튼한 계단”을 찾을 수 있을까? 10절이 핵심이 되는 구절이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아삽은 현재의 경험에 자신이 사로잡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삽은 로자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가 ‘오직 체험’(Sola Experientia)이라고 부른 개념, 곧 개인의 본능과 인식이 지식의 최종 표준이자 권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삽은 자기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없으며, 개인의 주관을 넘어 상소할 수 있는 고등법원이 있음을 이해했다. 낙담한 상태에서 마치 눈가리개를 한 말처럼 아삽은 한때 단지 망막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것에만 집중했었다. 따라서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바로 앞에 있는 것뿐이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아삽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눈가리개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아삽은 결연한 마음으로 외친다.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시 77:11). 찬송이 흐른다. “어둠이 그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릴 때, 나는 그의 변함없는 은혜에 의지합니다. 높고 거센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나의 닻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습니다.”시편 77편의 후반부가 시작되면서 아삽은 “언약 고고학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성공의 확신도 없이 몇 달, 몇 년, 심지어 수십 년 동안 발굴에 투자해야 하는 다른 고고학자들과 달리, 아삽이 캐고 있는 것은 과거의 보물,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11절)이다. 그렇기에 그가 금을 캐는 것은 보장된 사실이다. 어디선가 “시내 광야와 가나안 땅을 깊이 파다 보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고 말한 이의 발자취를 찾을 것이다”라는 말을 본 기억이 난다. 그게 바로 아삽이 잡은 방향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뒤로 나아갔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16). 헤세드(Hesed)의 역사(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의 역사)가 이제 아삽에게 현재 상황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위안과 격려의 근원이 된다.시편 77:16-20은 사실상 모세의 노래인 출애굽기 15장을 노래로 주석한 내용인 동시에 묵상의 기록이다. 친숙한 찬송의 가사가 전면에 나오고, 이제 그는 노래하기 시작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2).아삽의 영성은 결코 일반적인 영성이 아니다. 아삽의 영성은 결코 공허한 하늘 곧 추상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아삽의 영성은 구체적인 것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순간과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장소에 근거한다. 밀려오는 바다가 갈라졌다. 유월절(Passover) 밤에 당신의 백성을 “뛰어 넘은”(passed over; 踰越) 하나님은 그들이 홍해를 건널 때 신발에 단 한 방울의 물도 떨어지지 않고도 바다를 “지나가는(passing through)” 백성이 되게 하셨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인 순간이며, 갈라진 물을 건넌 것은 언약 민족으로 태어나고 세례를 받는 사건이었다(참조, 고전10:1-2).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라는 반석은 지금 불어오는 그 어떤 바람에도 무너질 수 없다.이집트를 탈출하는 그 길에 있을 때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시 77:19)라는 아삽의 말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는다. 이집트를 탈출하던 당시에도 하나님은 유일하고 주권적인 능력으로 분명히 행동하고 계셨다. 갈대 바다 기슭 바로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있었고, 그들 앞에는 넘실거리는 바다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들은 명령은 이것이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이처럼 주님이 놀라운 일을 계시하셨을 때에도 주님의 임재에는 어떤 숨겨진 차원이 있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어떤 차원에서 보자면, 아삽과 포로로 잡혀 있던 백성에게 하나님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포로로 잡혀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거나 접근할 수 없는 분은 아니셨다. 오히려, 충만한 믿음으로 옛 기억을 떠올릴 때, 하나님의 임재는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시 77:12).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막연한 원칙이나 이상주의적 의미의 “절대적 진리”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려주신 대로, 그리고 때가 차는 것에 따라서(참조, 갈 4:4) 행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홍해의 구속 사건과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라는 마지막 출애굽의 준비 작업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궁극적 “파라오”인 사탄을 멸하셨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무덤에서 나오신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더 위대한 목자이시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피로 사신 양 떼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히 13:20). 이런 사실들이야말로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옛날의 경이로움”이다. ‘리멤버’(remember; 기억하다)는 말 그대로 ‘멤버들을 하나로 합친다’는 뜻이다. 그럼 ‘리멤버’의 반대말은? ‘멤버에서 탈퇴시키다’(dis-member)이다. 잊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산산조각내고, 개별적으로 분해하고, 전체적으로는 샅샅이 흩는다는 것이다. (험피덤피(Humpty-Dumpty, 동요에 나오는 알 모양 인물)는 한번 부서지면 결코 다시 원대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와 대조적으로, 믿음으로 사는 교회는 함께 나누고 있는 거룩한 기억을 통해 다시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인 친교 공동체(communion)의 지체들이다.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5-6).하나님은 우리가 걷는 순례의 길에 기념비와 더불어 에벤에셀(기억의 돌; 기념 표석)을 두어 우리를 안심시키시고, 또한 우리가 방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셨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와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이제 시작된 새로운 창조 둘 다의 이정표를 나타내는 “기억의 돌”이다. 안식 후 첫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물을 물리치시고 무덤에서 이겨 부활하신 것을 기억한다. 이날,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볼테르는 언젠가 “기독교를 파괴하려면 안식일을 파괴해야 한다”고 썼다. 그의 말이 맞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집단 기억을 행사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을 빼앗으라. 그러면 교회는 오래지 않아 희망의 근원을 더 이상 붙잡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킬 때 우리는 히브리서 10:23의 이 명령에 순종한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안식일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대한 미래의 희망이 현재로 옮겨진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를 기억한다. 성례전(세례와 성찬)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가시적인 기념이다.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위해 홍해 바다를 가르신 장소를 “표시”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일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증언한다. 세례의 물은 결코 고요한 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우리는 당신의 거룩한 음성이 전달되는 것을 듣고 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과 합하는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묶는 인장이 되며, 주를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할 때, 결국 그리스도의 모든 일은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었다(롬 6:3-4).성찬은 눈으로 만질 수 있는 기억의 식탁이다. 정통장로교회 예배 지침(The Directory for Public Worship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은 이렇게 말한다. “성찬은 그리스도를 다시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찬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단번에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은혜의 수단이다. 그는 성령과 믿음을 통해 그렇게 하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죄와 싸우고 거룩하게 그분을 섬기려는 모든 노력을 하는 우리를 강하게 붙드신다.”시편 77편에서 아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무엇인가? 불면이 망각보다 훨씬 낫다. 한밤중에 깨어서 주님과 주님의 놀라운 일을 기억하도록 하는 불면이라면 더욱 그렇다. 원제: Sleeplessness and Forgetfulness in Psalm 77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시편77편
아삽
은혜
기억
성찬과세례
세례의의미
성찬의의미
출애굽의의미
마블의 멀티버스, 틱톡의 타임라인 전환, 그리고 하나님 나...
by Patrick Miller
2022-01-07
케이디 록스(Kady Rox)는 파리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놓칠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아직 탑승 중이라는 문자를 친구로부터 받은 케이디는 서둘러 공항으로 달려왔고, 다행히도 게이트가 닫히기 직전에 터미널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 두 명은 앞쪽 자리에 앉아 있었고, 케이디는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비행기 한참 뒷좌석에 배정되었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세 친구가 해변으로 가자고 문자를 보냈지만, 시차 때문에 힘들었던 케이디는 그냥 그 문자를 무시했다. 그리고 일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이틀 후, 케이디는 같은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기억하는 미국행 비행기는 완전히 달랐다. 케이디는 비행기 앞좌석에 앉아 있던 두 친구를 보았는데, 이 친구들은 자기네는 비행기를 놓쳤다고 한다. 또 세 친구 중 누구도 자기에게 해변에 가자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한다. 시차 때문에 기억이 헝클어졌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케이디는 하나의 급진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케이디는 타임라인을 바꿨다! 케이디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평행현실(parallel realities) 속에서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무한한 타임라인이 있는 다중우주에 살고 있다. 케이디의 원래 타임라인에서 그날 사건은 케이디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비행 후 어느 시점에서 케이디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타임라인으로 가는 포털에 들어갔는데, 거기는 바로 케이디의 친구들이 비행기를 놓친 평행현실이었던 것이다. 케이디는 틱톡에 이 이야기를 공유했고, 이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갔다. 케이디는 전환(shift) 이후 자신의 삶이 어떻게 좋아졌는지 계속 설명했다. 케이디는 인생의 대부분을 앞뒤가 맞지 않고 되는 일이 없는 잘못된 타임라인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 케이디는 올바른 타임라인에서 최고의 삶을 살고 있다.케이디는 타임라인을 변경하는 간단한 방법을 제공하는 틱톡의 영향력 있는 그룹에 합류했다. 그 방법은 샤워를 하는 것이다. 먼저 뜨거운 물로 스스로를 제한하는 믿음에서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찬물로 긍정적인 생각을 주입함으로 올바른 타임라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외부인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내부자에게 이 방법은 삶의 완전한 변화를 약속하는 새로운 복음이다. 이건 내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도대체 이런 새로운 유형의 새로운 사고(New Thought)는 어디에서 왔으며, 왜 그렇게 매력적인 걸까?마블의 멀티버스 상상틱톡 유명인사가 다중우주의 개념을 발명한 게 아니다. 이 개념은 이론물리학에서 나왔다. 다중우주 이론은 우리가 아는 우주가 단순히 많은 평행우주 중 하나라고 가정한다. 현실은 평생 동안 미세 조정되는 건 아니다. 단지 확률법칙 덕분에 우리 우주가 운이 좋았을 뿐이다.그러나 이것은 이론이 운을 띄우고 상상력이 나래를 펼치는 곳이다. 만약에 다중우주가 있다면 그 우주 속으로 무한대로 나를 만들어서 공급할 수 있다는 창의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TV 쇼, 책, 비디오 게임, 심지어 어린이 영화까지 생산하는 가내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만큼 이 아이디어를 주류 속으로 받아들인 프랜차이즈는 없다. 디즈니 플러스(Disney+)의 ‘로키’(Loki)에서 안티 히어로는 자신이 수많은 로키 중 하나일 뿐임을 알게 된다. TVA(Time Variance Authority)라고 불리는 레트로 기술관료 조직은 스스로에게 진실함으로 TVA가 미리 정해 놓은 스크립트에 균열을 일으키는 “변종”(variants)을 제거함으로, 다중우주의 모든 타임라인이 계획에 따라 진행되도록 관리한다. 주권적 능력을 가진 관료들이 마음대로 세상을 휘두른다는 사실에 반기를 든 로키는 TVA를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이 최고의 로키가 될 수 있는 새로운 타임라인을 만든다.이번에 나온 ‘스파이더맨’은 다중우주 싸움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반응은 폭발적이다. 관람권이 판매된 날, 이어지는 다중우주에 대한 온라인 수요는 디지털 박스 오피스를 붕괴시킬 정도였다. 마블과 케이디 록스는 둘 다 비슷한 이야기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지금의 현실은 우리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으며, 다른 현실로 뚫고 들어가는 것만이 우리 삶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이런 이야기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디즈니와 틱톡의 타임라인 시프터는 이 기도를 기괴하고, 환멸을 일으키며, 나 중심적이고, 인간의 능력과 사이비 과학에 근거한 대안 복음으로 변형시킨다. 나 중심의 멀티버스가톨릭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에 따르면, 근대 사회 이전에는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할애한 시간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건 내부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이 아니라, 외부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의미로 가득한 매혹적인 우주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인 것이다. 과거에 수도사의 존재 목적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대표하여 거룩해지는 것이었다. 농민인 경우, 삶의 의미는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와 식량생산에 있었다. 영주의 목적은 사회를 질서 있게 만들고, 모든 사람을 부양하고,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목적은 매혹적이고 의미로 가득한 우주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위치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그러나 현대인은 우주마저 무의미하고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환멸의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 밖을 봄으로써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발견한다. 나를 중심으로 도는 이 우주는 자유를 약속한다. 마침내 스스로를 정의하고, 스스로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아(selfhood)란 그 가능성이 무한하기에, 그런 발견은 오로지 더 큰 불안만 줄 뿐이다. 나를 정의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없이, 되어야 할 바른 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게다가 내가 잘못 선택한 경우라면?초신성이 하나의 별을 수조 개의 성운 입자로 폭발시키는 것처럼, 환멸의 세계는 인간의 마음을 끝없는 불안을 유발하는 대안적 자아의 성운으로 폭발시킨다. 다중우주를 제안하기 위해 굳이 이론물리학자가 필요하지 않다. 현대인의 마음은 이미 다중우주 중 하나에 살고 있다. 마블의 멀티버스는 단지 현대적 자아에 CGI 의상을 입힌 것이다. ‘스파이더맨’과 ‘로키’는 우리 시대의 실존적 곤경에 직면해 있다. 스파이더맨은 가능한 많은 스파이더맨 중에서 올바른 스파이더맨을 선택해야 한다. 로키는 가능한 많은 버전 중에서 올바른 로키를 선택해야 한다. 모든 서사 속 드라마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불안에 중점을 둔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잘못 선택하면 어떻게 될까? 누가 우리를 정의하는가?그러나 진리는 이것이다. 실존주의적 불안은 결코 내면을 들여다보아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우리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고 부서진 현실을 깨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에서 오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천국을 이 땅에 가져오려면 예수님이 필요하다(계 21:2).현재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외부를 통해 우리의 목적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공동체(교회)를 주셨다(엡 2:8-22). 자기발견이든 자기표현이든, 그게 뭐가 되었든 내면화된 인간의 노력은 결코 내가 진짜 ‘나’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롬 1:22-23).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정확하게 정의하고 자유를 줄 수 있다. 그 결과 마침내 나는 애초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요 8:31-38).원제: Marvel’s Multiverse, TikTok Timeline Shifters, and the Kingdom of Go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마블
로키
자기발견
인생의목적
자아확장
다중우주
멀티버스
디즈니+
스파이더맨
나의 슬픔 가운데 오신 하나님
by Jessica Gray Roberts
2022-01-06
나는 삶을 영적으로 결부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종교나 믿음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거부해야 할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나의 세계에는 종교나 믿음 같은 범주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최근에야 이를 가리키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은 바로 무신론이었다.하나님의 이름은 내게 하나의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가볍게 내뱉던 하나의 이름, 사람들이 승리하거나 패배할 때 외치는 하나의 이름 정도로 말이다. 그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에게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이라 믿으며 살았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실제적인 것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나이 스물다섯일 때 남편 텔이 이라크에서 죽고 말았다. 당시 내 딸 에이바는 5개월이었고, 나는 이제 막 엄마가 된 때였다. 그 소식은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현관문 안쪽에 서 있던 군인들을 붙잡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굳기 시작했다.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애원하는 내 목소리만 들려왔다.조문 편지와 시편그날 이후,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책을 급하게 넘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성경책이 어떻게 내 집에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받은 조문 편지마다 가득 적혀 있는 성경 구절들을 찾으려고 성경책을 뒤적였다.그러다가 시편 139편에 가닿았다. 조문 편지에 들어 있던 말씀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이 말씀을 보는 즉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러한 것을 몰랐다. 나는 단지 그 말씀이 사랑하는 남편 텔에 대한 것이길 바랐다. 나는 남편이 거기에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싶었다.고통이 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던 그때, 이 생소한 성경 구절이 무신론자이자 불신자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그렇게 내 슬픔의 샘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주었다.혹시 텔과 더 가까이 있게 해 줄 다른 지점은 없는지, 나는 날마다 시편을 읽었다. 내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눈이 아파올 때까지 읽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에 시편 40편과 18편, 30편, 27편 말씀에 사로잡혔다. 이 말씀은 비탄에 잠겨 울부짖는 내 현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만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차이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편을 쓴 이들은 자신의 울부짖음을 누군가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물은 바람에 그냥 흩어져 버리지 않았다. 자신을 짓누르는 시련이 극심한 고통으로 치닫고 있을 때, 그들은 누군가에게 울부짖었고, 그 누군가가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알았다.슬픔과 결합되어 있는 강렬한 감정들을 느끼는 사람들을 내치지 않으신다는 것을 성경말씀에서 찾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시편의 이 구절들에서 고통 가운데 탄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희망을 상실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았다.이 하나님은 누구신가?당신을 나타내셨다시편 기자들이 절망 속에서 부르짖었던 그 크신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 계시며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성경구절 속에서 텔을 찾던 나에게서 차츰 빠져 나오고, 슬픔에 빠져 있는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더 많이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에서 좋아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그 지점과 거기에서 어떻게 우리를 만나야 할지를 정확하게 아신다. 내 고통이 시작되었던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줄곧 나를 시편으로 이끄셨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을 지나쳐 버리거나 하나님에게서 나를 숨기지 못하게 하셨다. 절망에 빠져 있는 나에게 찾아오시고 죽고 싶은 마음뿐인 나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주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그러나 당시에 나는 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엡 2:1).나의 죄가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 나는 예수님에 관해 들어본 것이 별로 없었다. 나의 죄 때문에 내가 죽어야 마땅한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더 없이 크신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롬 3:21; 8:32; 요 3:16).텔을 잃은 슬픔이 이전처럼 자주 나를 삼키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만 알았다. 막 가족을 이루고서 함께 꾸었던 꿈이 산산조각 나버렸다는 절망감, 아무도 텔처럼 나를 사랑해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상실감, 홀로된 두려움, 이런 고통이 옅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새로운 소망을 갖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알고 싶었지만, 그런 삶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새 생명그렇지만 주님은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내게 주신 믿음의 목표 곧 내 영혼의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가실 것인지 정확히 아셨다(벧전 1:9). 주님은 로도스라는 한 남자를 내 삶에 보내 주셨다. 이라크에서 돌아온 텔의 부대 동료들과 가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로도스는 텔을 알고 있었고, 또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었다.그의 겸손함과 자상함에 나는 호감을 느꼈다. 그는 여러 면에서 텔과 비슷했지만, 그에게는 나에게 새로운 것을 비추는 어떤 빛이 있었다. 나는 평소 내 성격과 달리 과감하게 그에게 다가가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내게는 없는, 내가 원하는 무엇가가 있었다. 그것은 평화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로도스는 나의 우정의 마음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수많은 질문을 받아 주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씨름하는 동안, 그는 자상하게 곁을 지켜주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마침내 내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게 될 때 그는 나와 함께 기뻐해 주었다. 내가 세례를 받을 때도 그는 그 자리에 함께 했으며, 텔을 잃은 슬픔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내 딸 에이바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뻐했다. 에이바가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도 느끼지 않도록 그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이런 그와 결혼한 지 어느덧 12년이 되었다.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쓰고 계시며 그 은혜로 우리를 두르고 계신다. 내 인생의 범주에 없었던 하나님은 스스로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내게 나타내 보이셨으며, 하나의 범주에 속할 수 없는 분이심을 날마다 내게 보여 주신다. 내 관심 밖에 있던 하나님이 이제는 나의 전부이시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원제: I Found God in My Grief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슬픔
절망
새생명
시편묵상
무신론
아름다운 유산: 기도와 공공선
by 최창국
2022-01-05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에서 사회학과 역사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어떻게 불과 몇 세기 만에 예수 신앙이 로마제국 변방의 작은 공동체에서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었는지 연구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목숨까지 내놓은 채 소외된 이들을 기꺼이 맞아들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전 세계로 확장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의학이 낙후하여 낙태가 불가능했던 고대 세계에서는 원치 않는 아기를 낳은 사람들은 아기를 성 밖에 내다 버렸다. 그러면 아기는 추운 날씨에 동사하거나 야생 동물의 먹잇감이 되어 죽었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영아 살해가 합법인 동시에 흔한 일이었다. 심지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둘 다 영아 살해를 합당한 국가 시책으로 천거했다. 주전 450년에 작성된 가장 오래된 로마법으로 알려진 ‘12표법’은 아버지가 여아나 기형아, 허약한 남아를 유기하는 것을 허용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81). 그러나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이 사람들이 그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웠다. 대부분이 여자아이였다. 또 그렇게 성장한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자식을 낳아 대대손손 기독교 신앙을 물려주었다. 스타크가 제시한 기독교의 또 다른 성장 동력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아 준 것이었다. 고대 세계에서는 전염병 확산을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어느 지역에 전염병이 발생하면 환자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성을 떠나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스타크의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지 않고 남아서 전염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보았다. 많은 경우, 독감이나 다른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은 음식과 물, 목욕 같은 최소한의 돌봄만 받아도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 간호사들이 전염병으로 인해 버려진 사람들을 돌보는 사이 병에 면역력이 생겼다. 스타크는 버려진 환자들이 회복되었을 때 목숨을 살려준 이들의 신앙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다시 전염병이 돌아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질병에도 생존할 수 있는 면역력을 갖게 되었다.빛나는 업적 기독교 초기에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로마인은 구제에 대해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구제는 신을 섬기는 일과 무관했던 것이다. 이방 신은 윤리적 요구를 한 적이 없었기에 윤리적 범죄를 벌하지도 않았다. 인간이 신의 심기를 건드릴 때는 신에게 무관심하거나 의례 기준을 어겼을 때이다”(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37-38). 그러나 기독교는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독교 사상의 발전과 함께 ‘사회적인’ 윤리 강령을 종교와 결부시켰다. 특히 이교도가 기독교의 삶의 강령 중에 낯설게 여긴 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는 가르침과 실천이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선행의 대상은 믿는 가정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었다는 것도 이교도들에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2세기 말 기독교 변증가 마르쿠스 미누시우스 펠릭스(Marcus Minucius Felix)는 이교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 벌어진 논쟁 중에 기독교의 대변인이었던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날마다 우리의 수는 증가일로에 있다”면서 그 원인을 “건전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87). 초기 기독교의 성장이 사회 안에서 “건전한 삶의 방식”의 결과였다는 기록은 많은 의미를 제공해 준다. 초기 기독교는 교제와 나눔과 기도를 중요한 영적 실천으로 여겼다. 이런 실천들은 사회 안에서 건전하고 건강한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옥타비아누스의 고백이 증명해 준다. 기도하는 삶과 사회적 실천이 상호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이교도는 기도와 같은 의례와 사회적 실천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겼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생활과 사회적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인 기도가 사회적 삶의 실천으로 발전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없음을 가르쳐 준다. 기도와 공공선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은 기도의 실천을 “사물의 현상들 너머에서” 존재하는 것을 알게 할 뿐 아니라 그 존재에 참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Parker 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19). 이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여정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로의 참여와 실천을 위한 행위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단지 간청의 차원을 넘어 실존적, 경험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도는 삶의 실천을 강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기도와 함께 승화된 행동 또는 실천은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 파커 파머(Parker Palmer)는 기도뿐만 아니라 행동도 성령과 더불어 공동 창조하는 행위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은 곧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의 능력이 산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 차이점이다. 그러나 행동은 움직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계를 표현하고 발견하고 구성하는 것을 포함하는 움직임이다. 행동이란 우리가 다른 존재와 성령과 더불어 현실을 공동 창조하는 것을 일컫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행동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가진 혹은 원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표현하고 또 배우게 된다. 성례처럼 행동은 보이지 않는 영의 보이는 형태이고 내면의 힘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행동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세계에 모양새를 부여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을 받기도 하고, 우리 내면의 자아를 다시 빚어 내기도 한다. 우리가 행동할 때 세계는 반응을 보이고, 우리와 세계는 함께 창조된다(파커 파머, ‘일과 창조의 영성’, 42-43).그리스도인은 기도가 행동 또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논리를 넘어 행동 또한 성령과 소통하는 중요한 방식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충만한 삶으로서 기도한다는 것은 가부좌를 틀고 앉거나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은 특정한 훈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행동의 한 형태, 곧 표현과 발견과 재창조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진정한 기도는 세상 속에서 행동까지 그 지평을 확장시킨다. 특히 우리의 기도는 자비, 정의, 관대함 등과 같은 공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단지 자기욕구 실현이나 자기도취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기도의 생명력이 상실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생명력 있는 기도는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과의 생명이 넘치고 성장하는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케네스 리치(Kenneth Leech)가 “공동체 안에서 인간의 정의를 위한 투쟁과 신적인 정의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381), 사회와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비인간적인 불평등에 눈을 감은 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바른 기도가 아니다. 따라서 진정한 기도는 공공선을 추구한다. 개신교 전통에서 공공선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장 칼뱅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여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영적 공공선’과 ‘사회적 공공선’ 모두 중요하게 여겼다(송용원, ‘칼뱅과 공동선’, 22-30). 막스 스텍하우스(Max Stackhouse)는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으로 공공선을 지향한다고 보았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 공적으로 선한 것인지, 무엇이 궁극적으로 선하고, 그 선이 어떻게 이 땅의 현실에서 성취될 수 있는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록 그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나 점점 다가오고 있으므로, 공공선을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 나라를 희망하며 살도록 한다. 진정한 기도는 공적 차원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공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와 이웃, 자연 세계가 모두 하나님의 세계에서 제 위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만물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실제로 기도할 수 없다”(사이몬 찬, ‘영성신학’, 181). 존 애서턴(John Atherton)은 교회와 사회가 긴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신학은 생명을 밝히는 역할을 할 수 없으며, 단순히 영적인 문제와 세상에 무관심한 하나님에 관한 좁은 이해로 전락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신앙이 어떻게 인간의 경험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John Atherton, Faith in the Nation, 136). 이와 같은 맥락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삶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지 개인의 욕구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그러한 기도는 너무 협소한 기도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도는 건강한 사회적 삶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공동선을 추구한다.
로마제국의기독교
초기기독교
기독교공공선
기독교와자선
기도
사회적실천
교인이 떠날 때, 목회자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것인가
by Phil A. Newton
2022-01-04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한 면접을 마치고 내가 속한 노회의 목회자들이 한마디씩 조언을 했다. 항상 말씀을 전하세요. 거룩한 사람이 되세요. 그런데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교인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세요.” 아무도 그의 말이 잘못됐다고 하지 않았지만, 순간 성령님이 내 마음에 경종을 울려 주셨다. 그의 말이 드러낸 것은 그의 삶 깊숙이 파고든 원초적 분노와 상처였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목회 사역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어렸고 영적 성숙과는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담임목사로 섬긴 적도 물론 없었지만, 사람을 마음에 품지 않고는 사람을 보살필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하나의 패러다임이 모든 교회와 목사에게 다 맞을 수는 없다. 교리와 목회 방법과 변화와 맞물려 성격과 관심사와 스타일이 교회 분위기를 불안정하게 만들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은 각 사람에게 적절한 처방을 내리신다. 우리는 그 처방을 지역 교회에서 조화와 신실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선한 싸움을 상기시키기에 풍부할 정도로 성경 속에서 자주 만나는 단어, “서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신실하게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격려하고, 친절히 대하라는 명을 받았다(요 13:35; 롬 15:7; 살전 5:11; 엡 4:32).이런 가운데 마귀는 긴장, 부조화, 무관심, 불만 같은 수많은 불화살을 쏘아 댄다(엡 6:10-20). 게다가 여기에 세상의 영향력을 더해 보자. 차고 넘치는 소셜 미디어 정보는 언제나 다른 교회가 더 좋아보이게 만들고, 교회를 낮추어 보는 태도, 심지어는 목회 사역을 낮추어 보는 태도까지 유발하며, “온라인 교회”라는 위험한 대안을 조장할 뿐 아니라 낙담의 근원이 된다.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자들에게 양 떼를 치라고 명하신다(행 20:28, 벧전 5:2). 그는 “목양”에 대한 어떤 주의 사항을 추가하지 않으셨다. 지난 수년 동안 나는 교인들이 떠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경험했다. 그중 일부는 신학이 달라서, 또 누구는 단순히 친구가 나갔다는 이유로 떠났다. 근처 다른 교회가 좋아서 떠나간 사람도 있다. 직업을 바꾸면서 이사 간 사람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하나같이 그들은 다 내가 사랑해서 섬겼고 교제하며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들이었다. 어떤 때에는 교인들이 연달아서 떠나는 속도가 너무 빠를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떠나기도 했다. 이렇게 얼마나 머물지 모르는 교인을 위해서 어떻게 내 마음을 계속해서 줄 수 있을까?균형 회복교인이 떠날 때, 목사는 원심 분리기 속에서 빙빙 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어지럽다. 궁금하다. 아프다. 길을 잃는다. 그래도 예수님은 당신의 피로 사신 양 떼를 치라 하신다(행 20:28). 목자는 양 떼와 긴밀하게 접촉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양 떼에게 노출해야 한다. 가까이 있지 않고서는 양 떼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 그러나 가까이 있다는 것은 또 다시 상처 입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취약성이 목회 사역에 늘 따라다닌다. 그렇다. 당신은 또 다시 상처 입을 것이다. 때로는 당신을 떠나는 사람이 가장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 나도 그런 아픔을 겪어 알고 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시다. 어떻게 해야 균형을 되찾을 수 있을까? 사역이 성공해서 기뻐하는 칠십 인에게 예수님은 그 성공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사역에서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찾으라(눅 10:17-20)는 말씀이시다. 당신의 기쁨이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기만 하다면 양 떼의 변덕이 아무리 큰 상처를 주더라도 그 상처는 맡은 양 떼를 계속 목양하려는 당신의 용기를 결코 꺾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마음을 언제나 뜨겁게 유지하라. 낙심하지 말라우리는 사역에다가 소유격 인칭 대명사 “나의”를 붙일 때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 사역은 우리 주님의 것이다. 이탈과 반대의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사역을 이야기할 때 주님께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사역을 만든 건 바울이 아니다. 예수님이셨다. 그런 이유로 바울은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하노니”(고후 4:1-6)라고 쓸 수 있었다.어려움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기에, 바울은 전혀 낙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바울에게 사역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성과, 심지어는 자신의 위안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것이었다(아마도 바울은 이런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을 것이다). 바울에게 사역이란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전하는 것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당신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역을 통해서 말씀을 받은 사람이 떠나는 경우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의 삶을 투자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이탈을 통해 우리 안에서 성취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언젠가 있었던 생각지 못한 급작스러운 교인의 떠나감은 내가 사실상 주님의 인정이 아니라 얼마나 간절하게 교인들의 인정을 원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목회라는 마라톤을 견디기 위해 내게는 급진적이고 내적인 기질의 변화가 필요했다. 주님은 내가 주님께 더욱 의탁하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르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주님은 표면 아래 숨어 있는 내가 보지 못하는 교만의 흔적까지도 벗겨낼 수 있는 분이시다. 주님은 우리를 양들에게 더욱 충실하게 공감하는 목자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통을 명하실 수도 있는 분이시다.사역은 주님의 것이다. 그러니 낙담하지 말라. 선한 목자께서 당신을 아신다. 맡겨진 양 때를 돌보라떠나지 않은 교인에게는 세심한 목양이 필요하다. 떠난 교인들 때문에 쉽게 집중력을 잃을 수도 있다. 마음이 마비되고 떠나간 사람들에게 몰두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목회자의 기쁨까지 놓칠 수 있다. 교인들도 집중을 잃어버린 목사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 무리가 떠날 때 예수님은 눈도 깜박하지 않으셨다(요한복음 6장). 떠나가는 제자들의 숫자까지 세면서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로지 아버지의 주권적인 목적에만 의지하셨다(요 6:65). 망설임도 불평도 하지 않고 오로지 남은 자들을 보살피셨다.그렇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을 최소화하자고 말하는 건 아니다. 몇 년 전, 삼 년을 사역하는 사이에 약 65퍼센트의 교인이 떠나갔다.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에서 좋은 교훈을 얻었고, 남은 교인들과 더 가까워졌다. 우리는 남은 조각들을 한데 모아 앞으로 나아갔고,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강해졌고, 사역에 대해 겸손해졌고, 주님의 지혜로운 섭리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목회하는 법, 사람들을 섬기는 법,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계속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허물을 용서하라우리가 교인들에게 남의 허물을 빨리 용서하라고 권면하는 것처럼, 우리도 허물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잠 19:11). 의도적이든 아니든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비통함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당신은 얼마든지 그들이 당신에게 지은 죄를 덮을 수 있다(벧전 4:8). 그렇게 하려고 할 때, 기도하라. 저주 섞인 간청이 아니라 은혜의 마음으로 기도하라.나는 교회를 개척한 날 가족과 함께 예배에 참석했던 한 형제와 가까워졌다. 그는 여러 교인들에게 리더이자 격려하는 사람, 친구가 되었다. 우리가 네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가장 먼저 병원을 찾은 교인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가 교회를 떠나겠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성공하는 사람들 주변에 있고 싶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목회는 성공과 거리가 머네요. 그래서 떠나야겠습니다.” 그게 다였다. 그와 함께한 십 년의 세월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그리고 그후로 몇 년에 걸쳐서 그의 가족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도 내게 다가와 용기를 주었다. 사실상 그는 떠났어야 할 성경적 이유가 없었지만, 그는 떠났던 것이었다. 이런 일을 통해 나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은혜와 온유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이러한 일은 그 어떤 것도 자연스럽게 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가장 깊은 만족을 찾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들을 섬김으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지만, 주님이 줄 수 있는 기쁨은 그것과 비교가 안 된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해야 하는 것을 교인에게서 기대한다는 것이다. 양 떼를 목양하라. 양 떼를 마음에 간직하라. 그러는 동안에도 예수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라. 원제: When Members Leave: How Pastors Can Guard Their Hear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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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섭리
by Aaron L. Garriott
2022-01-03
에스더서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책이다. 어떤 사람들은 에스더서에 하나님의 이름이 없는 이 사실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이는 마치 처칠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는 윈스턴 처칠 자서전과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에스더서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어떤 학자들은 에스더서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침묵한다고 주장한다. 너무 분명하게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를 실수라고 보기 어렵고 의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에스더서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침묵 자체가 메시지이다. 신학의 부재가 도리어 신학을 드러낼 수 있듯이, 에스더서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침묵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런 방식으로 에스더서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에스더서는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늘 가까이하며 즐겨 읽는 책이 되어야 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이야기들과 우리 삶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에스더서를 읽어야 할 이유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에스더서의 이야기는 출애굽기, 여호수아, 열왕기서에 나오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우리 삶과 관련이 깊다. 사실 우리 가운데 출애굽과 같은 기적의 구원을 경험하거나(출 7-12),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표징(출 4:1-9)을 경험한 사람은 많지 않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는 것(출 16)을 경험하거나 적의 거대한 요새 성벽이 눈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수 6)을 경험한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당연히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물 벽이 되는 것(출 14)을 경험하거나, 3년의 가뭄을 끝내는 하늘의 불이 내려와서 제단의 물까지 다 태우는 것(왕상 18:20-40)을 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의 삶은 에스더 시대의 페르시아 상황과는 비슷한 점이 많다. 일상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우연과 같은 일들, 사람들의 실수, 불행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는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고레스 왕의 칙령 이후에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느 7-10, 13) 페르시아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스 1:1-4)처럼, 오늘 우리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이 땅의 삶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주권과 섭리주권과 섭리의 차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방식의 차이를 통하여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주권은 모든 것 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킨다. 반면에 섭리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주권은 그분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속성을 드러내고, 섭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섭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나오고, 주권은 섭리로 역사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섭리에 대하여 “자기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지극히 거룩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게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것”(11문답)이라고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그 행동을 모두 다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계몽주의 이후 서구인들은 이 섭리라는 개념을 거부하였다. 예를 들어서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자연 만물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미국인은 자연 법칙이 자연 만물을 다스린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의 통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에스더서를 포함하여 성경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주 평범한 일 속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건 배후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마치 무대의 뒤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연극의 모든 무대를 통제하고 있는 연출 감독과 같이 말이다.에스더서에서 성취된 언약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위협하였던 수많은 위기가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아달랴의 위협을 피하여서 6년 동안 여호사브앗이 유다의 왕자 요아스를 숨겨 놓았던 사건이 그런 위기였다(대하 22:10-12). 만약 아달랴가 아기 요아스 왕자를 죽였더라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그분의 약속이 실패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삼하 7:12-13).에스더서에서도 이와 같은 위기가 기록되어 있다. 에스더서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마치 드라마 같은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에스더서는 한 번에 이야기 전체를 다 읽어야 한다). 다른 유대인의 적(출 17:1, 삼상 15, 에 8:1)과 마찬가지로 아말렉인 하만은 유대인을 이 땅에서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만들었다. 세심한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이전에 사울이 아말렉인을 제거하지 못하였던 불순종이 이런 비극을 만들어 내었음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삼상 15). 그런데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의 명령에 따라 하만은 자신이 증오하였던 모르드개 앞에서 그가 왕이 존귀하게 여기기 원하는 자라고 외치며 수산성을 돌아다녀야 했다. 이는 하만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 자신이 달려서 죽게 되었다(에 7:10). 그리고 모르드개가 하만의 집과 소유를 갖게 되었고 페르시아의 총리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에 8:2). 이를 통하여서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 땅에서 제거하려고 하였던 하만의 악한 법령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에 8:9-14). 그런데 이 모든 일은 페르시아의 왕이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던 하룻저녁의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에 6:13).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기 요아스를 숨겨 두었던 그 사건처럼, 왕의 잠 못 이루는 그 밤이 하나님의 언약이 끊어질 뻔한 비극으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원하였다. 이처럼 비록 에스더서에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실은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이 계셨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섭리 속에서 평범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결론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끝내시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에스더서는 하나님께서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다스리고 계시는지 보여 준다. 하나님은 에스더서에서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자신이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창 12:3). 기적의 사건이 없이도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반드시 지켜내셨다. 때로는 악한 사람들의 악한 결정들로 가득한 일상의 평범한 사건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분이 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그분을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계시고, 항상 일하고 계시며, 항상 그분의 언약을 성취하고 계신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복음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섭리 속에서 우리의 선, 곧 우리 영혼의 구원을 이루고 계시는 분이다(롬 8:2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에스더서가 보여 주는 것처럼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무시하기에는 너무 크게 들리고, 그분의 임재는 놓치기에는 너무 선명하게 보인다. 그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심을 알기에 우리는 그분을 더욱 신뢰할 수 있다. 원제: Invisible Providence 출처: www.ligonier.org번역: 박광영
에스더
일상의삶
하나님의통치
성취된언약
주권과섭리
로고스이신 그리스도: 예배의 이유
by Mark Jones
2022-01-0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2).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성경을 읽는 사람은 요한이 왜 예수님을 육신이 되신 “말씀”(요 1:1, 14)이라고 표현하는지 의아해 한다. “말씀”에 해당하는 ‘로고스’는 헬라어 사용자에게는 일상적인 말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300번 이상 나타나며,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 단어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이해할 때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로고스라는 사실은 논쟁 이상의 문제이다. 곧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예배의 이유가 되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의 아름다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말씀이신 예수에 관한 몇 가지 분명한 진리를 주장하게 된다. ‘하나님’ 정체성요한은 자신이 사용한 일반적인 아람어와 관련하여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아람어 타르굼(구약성경의 아람어 번역 및 간단한 해석)에는 “주의 말씀[멤라]”이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따라서 이사야 45:17을 아람어 타르굼으로는 번역(또는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멤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다.”더하여 호세아 1:7의 표준 히브리어 “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는 아람어 타르굼로 이렇게 풀어쓸 수 있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들을 구원하겠고.” 이렇게 “말씀”은 하나님의 히브리어 이름(YHWH)을 부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령 민수기 7:89을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람어 타르굼으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거기[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이 그[모세]에게 말씀하셨다.”그러므로 아람어 타르굼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근거로 할 때,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사실상 그의 신성을 확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1장의 직접적인 문맥을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증거로 취하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요한이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부른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이 용어를 1세기 맥락에서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기 드러내심더하여, 로고스는 말이나 말하는 행동을 가리키기도 한다(행 7:22). 더 구체적으로, 로고스에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자기표현이 들어 있다(막 7:13).인간을 향한 하나님 말씀의 의인화는 육신이 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핵심적으로 그리고 장엄하게 요약되어 있다(요 1:14).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그렇게 함으로 다른 어떤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요 1:1-2, 18). 만물은 창조되지 않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위해(골 1:16) 창조되었다(요 1:3). 말씀이신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이시다(요 1:4). 그는 세상에 빛을 주시고 어두움을 이기신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 속에 생명이 있는 말씀(요 5:26)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다. 죽으심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통하여 그는 이루셨다.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 로고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신다. 로고스와 창조우리가 태초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칭호에 담겨 있는 영광을 놓치게 된다. 그렇기에 서문에서 요한은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이면서 우리를 태초로 데려가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의 구분은 분명하다. 더욱이 로고스는 만물의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만물을 보존시는 분이기도 하다(히 1:3). 만물을 창조하고도 섭리에 따라 창조한 세상을 창조자의 능력에 따라 다스리고 보존하지 않는, 그런 하나님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밖으로 드러내시는 당신의 일들은 기본 패턴을 따른다. 그 일들은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로고스(아들)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고전 8:6). 창세기 1장은 또한 하나님은 곧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하나님이 이르시되…”). 시편 기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시 33:6).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창조와 함께 계시도 하시기에 그 아들을 당신의 말씀이라고 합당하게 부르신다. 하나님은 로고스를 통하지 않고서는 피조물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로고스는 모든 진리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보고(寶庫)이기에, 모든 진리는 오로지 로고스로부터만 나온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계시가 인류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중보자로서의 역할과는 별개로, 그는 또한 창조나 성경에 있는 모든 계시의 중개자이시다. 로고스는 창조하고, 유지하고, 말씀하고, 어느 정도 하나님을 닮은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그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자기표현이며, 이것이 바로 요한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자기계시를 강조하기 위해 말씀을 의인화한 이유이다. 로고스 없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로고스와 구속청교도 스테판 차녹(Stephen Charnock)은 인류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선포하는 사람이 로고스라고 말한다. 마음속에 있는 이성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그 자체의 발견으로 깨어나 말과 연설을 통해서 마음의 내적 감각, 생각, 관념, 본성, 그리고 자세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듯이, 본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육신이라는 옷을 입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성품과 생각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 분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에 가장 적합하다(Works of Stephen Charnock, 4:132).로고스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완벽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큰 목적”은 그 대상이 천사든 인간이든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11:25; 요 1:18). 실제로 차녹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아버지에게 맞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승천하여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영원히 왕좌에 오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때, 천사와 관련해서 이렇게 썼다. “천사들도 하나님과 그의 성품, 그의 지혜의 깊이, 그의 은혜의 보화, 그의 진노의 무서움에 대해 더 많이 배웠고, 그들이 존재했던 지난 사천 년 동안에 사실상 그들이 했던 모든 행동이 다 하나님의 깊은 뜻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나타난 로고스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자연신학은 죄 많은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지식을 제공하는 데에 그치지만, 로고스 때문에 구속을 염두에 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빛나게” 된다. 차녹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무대이다. 그 무대 위에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님이 하신 최고의 선언, 인류에게 하신 최고의 말씀은 (실로 적절하게) 로고스를 통해 우리에게 온다. 요약하면, 아들을 로고스라고 부르는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본성(하나님의 자기계시자)뿐 아니라 예수님의 목적도 엿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시는 구속의 계시자이다. 죽음을 이기신 분으로서, 주님은 하나님의 로고스이시며 구속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누리도록 하시는 바로 그분, 로고스는 다름 아니라 여호와 자신이다. 원제: The One-Man Revelation of God: Why We Worship ‘the Word’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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