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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소망, 그리고 천국의 향기: 무엇이 사랑을 가장 위...
by Haddon Anderson
2022-01-02
2021년,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알려졌던가? 무엇이 교회의 특징이 되었던가?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을 대신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우리는 비신자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구별하여 알아봐 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비신자들이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보여주는 존재로 알아봐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특히 우리는 비신자들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이나 지역 교회들을 바라볼 때, 거기서 세 가지 핵심 교리, 곧 믿음과 소망,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복음이 만들어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충만한 사람,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차고 넘치는 사람이다. 실제로, 바울 서신과 베드로 서신, 그리고 히브리서 곳곳에 있는 아홉 개의 본문에서 우리는 이 기독교 은혜 트리오(trio of Christian graces)를 확인할 수 있다(고전 13:13; 갈 5:5-6; 엡 4:2-5; 골 1:4-5; 살전 1:3; 5:8; 히 6:10-12; 10:22-24; 벧전 1:21-22).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같은 대답을 반복해서 듣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제일 고린도전서 13:13은 이 트리오를 강조하는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의 이 주장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왜 사랑이 세 가지 은혜 중 “제일”일까?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엡 2:8), 그리스도와 그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신자로서 계속 성장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할 때 소망은 우리를 기쁨으로 채우고, 고난을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롬 12:12). 그러나 바울은 이 거룩한 세 가지 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왜 사랑이 제일일까? 고린도전서 13:13을 세 가지 문맥에서 살펴봄으로써 이 질문에 답해 보자. 우리는 먼저 이 바울 서신서 전체를 큰 맥락으로 하여 시작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고린도전서 12-14장에 초점을 맞추어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근접 맥락인 고린도전서 13:8-13에 집중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이 감동되어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고, 또한 우리 가정,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이웃이 사랑으로 가득 차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세상에 널리 전하게 되기를 바란다.믿음과 소망은 사랑을 낳는다바울 서신들에서 우리는 믿음과 소망이 사랑을 낳는다고 말하는 여러 구절을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5:6은 믿음과 사랑을 이렇게 연결 짓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지만, 의롭게 하는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다. 믿음은 항상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을 통하여 일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게 지내도 된다? 아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믿음이 생기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믿음을 통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사랑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있는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한다. 골로새서 1:4-5에서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바울은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서 영광스러운 소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동료 신자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임을 알았고, 이러한 소망으로 인해 시간과 소유물은 물론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정도로 동료 신자를 섬길 수 있었다. 믿음과 소망은, 어떤 의미에서,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더 큰 목적이 빠진 믿음과 소망은 불완전하다. 믿음과 소망은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 삶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사랑으로 넘쳐나게 한다. 사랑은 교회를 세운다이제 우리는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바울의 말이 들어 있는 고린도전서의 문맥으로 초점을 좁힐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신령한 은사들에 대해 고린도 교회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은사와 우리가 “기적의 은사”라고 부르는 은사의 사용과 같은 문제를 정리해 나가는 바울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그 모든 것이 다 교회를 세우는 데에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함께 모일 때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누구나 이 목적을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나머지 지체들을 세우지 않으면서도 신령한 은사를 행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영광을 차지하고 교회의 덕은 세우지 않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그런 은사들이 넘쳐나는 교회는 원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열매 맺지 않는 종교 활동과 교회를 북돋우는 섬김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다.이 서신의 앞 부분에서 바울은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고 썼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문맥에서, 사랑에 관한 바울의 유명한 말이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교회를 세우는 은사와 “소리 나는 징이나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에 불과한 은사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지식을 초월하는”(엡 3:19)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시기에 예수님은 당신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세워주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소망으로도 안 된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영원토록 제일이다사랑이 기독교 은혜 트리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이유는 고린도전서 13장 후반부에 나온다. 13:8-13에서 바울은 예언과 방언과 지식 같은 신령한 은사들은 지금 이 세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바울은 13절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은혜는 영원한 것이기에 은사들보다 더 귀하다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이며, 소망을 가지고 미래를 계속 고대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를 통해 흐르는 사랑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요일 4:16).1738년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천국은 사랑의 세계”(Heaven Is a World of Love)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는 천국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천국은 사랑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태양이 빛의 샘인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의 샘이십니다. 그러므로 맑은 날 반구 중앙에 위치한 태양이 세상을 빛으로 채우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는 사랑으로 하늘을 가득 채우십니다”(Works, 8:369).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넘치듯, 하늘에서는 사랑이 모두의 마음에서 왕 노릇할 것입니다”(8:373).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영원을 보낼 소망을 가지고 기뻐한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점점 더 사랑으로 가득 찰수록, 우리는 현재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반영하고, 교회는 천국의 전초기지로서의 소명을 수행하게 된다. 우리의 삶과 교회는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할 때 천국의 달콤한 향기를 퍼뜨린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원제: Faith, Hope, and Heaven on Earth: What Makes Love the Greates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고린도전서13장
사랑
믿음소망사랑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대계명
천국
더욱 예수님을: 새해를 위한 ‘맥시멀리즘 기독교’
by David Mathis
2022-01-0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면 된다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침체되어 있을 때도 약해져 있을 때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손을 능히 잡아 주신다. 예수님은 기진맥진한 채 겨우 버티고 있는 우리 영혼을 온유와 자비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신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 같은 우리를 꺾어 버리지 않으신다. 꺼져가는 우리 영혼의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 그리고 은혜로우신 예수님은 우리가 ‘적당히’의 상태(그럭저럭 적당히 믿고, 적당히 소망하고, 적당히 사랑하기)에 영원히 갇혀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메말라 가는 우리 영혼의 저장고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빈약한 영성, 미니멀리즘 신앙에 안주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이 요구하시고, 더 많이 약속하시고, 더 많이 힘주신다. 성숙하고 건강한 기독교는 맥시멀리즘을 추구한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 사모한다. 덜 사모하지 않는다. 거듭한 사람들은 최소한에 만족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누리길 원한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이 믿고, 더 많이 소망하고, 더 많이 사랑하기를 원한다.때가 이르면, 성령이 내주하시는 마음은 곤궁과 결핍에서 더욱, 더욱, 더욱 회복되어, 예수님을 더욱 분명히 보고, 더욱 깊이 사랑하고, 더욱 가까이 따르게 된다. 묵은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밝아오는 지금, 우리는 최소한으로 성경 읽고, 최소한으로 기도하고, 최소한으로 교제하려고 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새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싶어 한다.우리는 새해에 예수님을 더욱 원한다.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존귀맥시멀리즘의 열망이 빌립보서 1:22-26 만큼 빛나는 구절도 없을 것이다. 갇혀 있던 곳이 어디였든 바울은 해방의 날이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이 서신에 담아낸다. 곧 판결이 내려질 것이고, 그러면 감옥에서 풀려나거나 아니면 죽음을 통해 이 땅의 삶에서 풀려날 것이었다. 바울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죽음이란 곧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기에 그는 죽는 것이 “훨씬 나았다”(빌 1:23). 그의 가장 큰 바람이요 그가 개인적으로 원한 것은 가능하다면 예수님과 더욱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죽는 것도 유익”했다(빌 1:21).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원한다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기꺼이 바쳤다. 바울은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좋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시려는 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삶의 여정과 본을 따르는 것조차도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고 종종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남겨 두었다. 바울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그리고 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현재로서는 자신의 소명이라고 확신했다(빌 1:24-25). 그러면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의 새로운 삶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고”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이 새롭게 펼쳐질 그의 삶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밝아 오는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은 빌립보서 1:22-26에 나오는 바울의 ‘맥시멀리즘을 추구하는 기독교’(Maximalist Christianity) 비전을 연마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일 것이다.열매 맺는 수고먼저, 바울은 열매 맺기에 힘쓰기를 강조한다.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빌 1:22). 이것은 바울이 스스로를 유능하다고 생각하여 한껏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그런 자만심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성령의 능력을 겸손하게 인식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삶을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살라는 명령으로 여겼던 것이다. 특별히 사도로 살아가는 삶이 그러해야 했지만, 이는 또한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울은 젊은 목사요 자신이 후견하는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딛 3:14). 그는 열매 맺는 사도들을 기대하면서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온 교회가 열매 맺는 일꾼 되기를 바랐다. 열매 맺는 수고는 마법 같은 것은 아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부르시고 삶 속에서 겪게 되는 시행착오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그것을 행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신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진정으로 신령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또한 그 열매가 우리가 원할 때 하늘에서 우리 머리 위로 뚝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배울 수는 있다. 진정한 수고는 배움이 있는 곳에서 일어난다. 진정한 수고는 힘써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일에 참여한다. 우리의 에너지와 노력을 투입한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게 한 걸음씩 밟아 나가고 점차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다양한 계획과 행동에 헌신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으로 우리의 수고에 힘을 실어 주시고, 당신의 때에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다른 사람들의 진보와 기쁨바울은 더 나아가 “이 유익한 수고”는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라고 25절에서 분명하게 말한다.자기를 중심에 두고 뻔뻔하게 자기를 홍보하는 우리 시대에 특별히 우리 눈을 사로잡는 것은 바울의 열망 가운데 있는 타자성이다. 이것이 참으로 상쾌하게 느껴진다. 현대인의 열망, 특히 미국인의 열망이 우리 영혼에 슬며시 스며들어 겉보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열망처럼 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의 관점은 다르다. 그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다른 사람들을 위함이다. 바울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에 자신을 바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바울은 삶은, 그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증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높이는 데 바쳐진 삶이다. 바울은 그럭저럭 살지 않는다. 그는 영적으로 최소한의 것만 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계획은 한두 가지의 말이나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가 도모하는 것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것이다(고후 9:8). 그는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기 위한 수많은 행동과 말로 넘쳐흐르기를 소망한다. 그를 움직이는 열망은 최선을 다하려는 열망이요 타인을 지향하는 열망이다. 최고의 자랑거리마지막으로, 우리는 26절에서 한 가지 더 특별한 점을 발견한다. 바울 사도는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이 땅에서 지금은 계속 살아갈 것인데, 여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석방되면 빌립보를 다시 방문할 예정인데, 그의 계획은 명백히 맥시멀리즘을 지향한다. 그의 계획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셔서 그가 이 도시를 다시 방문하여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살아갈 때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자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게 하려 함”이었다. 말 그대로 “풍성한 자랑”이다. 그가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면, “그들의 자랑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 때문에 많아질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럭저럭 자랑거리로 살겠다는 뜻이 아니다. 자랑이 넘쳐나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들의 자랑이 될 만큼만 최소한의 노력과 에너지만 들이겠다는 뜻이 아니다. 최대한의 수고와 에너지를 쏟겠다는 뜻이다. 최소한을 택하든, 최대한을 택하든, 우리는 새해에 선택한 만큼의 소망과 꿈을 갖게 될 것이고, 그만큼의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 영혼이 그냥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에 만족한다면, 낚싯줄을 던져 넣고 걸리면 걸리는 대로 만족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쁨도 박탈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랑거리만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자랑거리로 깎아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전염력이 강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에 주목해 보자.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께 집중되고, 우리의 남은 삶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바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이유가 될 뿐 아니라 그들이 우리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풍성한 이유가 된다.기쁨의 촉매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예수님과 나의 기쁨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기쁨의 촉매가 되어 그들도 우리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한다. 또한 그리하여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며, 이로써 더욱 풍성해진 우리 삶의 향유를 그리스도께 부어 드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새해는 우리가 바울처럼 마음을 다질 기회가 된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늘 해 오던 그런 새해 결심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풍성한 기쁨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영광이 극대화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긴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우리에게 베푸실 주님의 은혜는 참으로 많다. 우리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번성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그 은혜 말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우리가 가장 진지하게, 가장 겸손하게 우리의 마음을 바칠 수 있는 분이시다. 이러한 맥시멀리즘 기독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치를 미니멀리즘의 눈으로 볼 때는 매력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원제: More of Jesus: ‘Maximalist Christianity’ for a New Yea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정은심
맥시멀리즘
극대주의
미니멀리즘
극소주의
옥중서신
광야에서 들려오는 새해 희망
by Clarissa Moll
2021-12-31
작년 이맘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기억하는가? 팬데믹으로 한해를 보내고 2020년도 마지막 달력을 넘기면서 내년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졌었다. 인종 갈등과 정치 대립, 자연 재해, 코로나19가 우리 삶을 마비시킨 한해였기에 새해에는 분명히 더 나을 것이라 희망했었다.그러나 올해를 마감하면서 돌아보면, 1년 전에 우리가 너무 낙관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2021년은 푸르른 목초지가 아니라 작년과 똑같이 메마른 황무지였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건강을 지키고 서로 연결을 유지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휘발유 가격이 치솟고, 교회가 텅 비고, 바이러스 긴급 검사기가 바닥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죽음과 사회 갈등이 우리 마음을 지치게 하고 짓누르고 있다.작년에는 비현실적으로 낙관했다면, 올해에는 비관과 절망으로 내년을 바라볼까 두렵다. 광야에서 유랑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듯이, 우리도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 있는 사막의 외로움을 보고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재정, 관계, 건강의 어려움이 새해에도 이어질 것이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한탄마저도 신물이 날 지경이다(시 13:1-2). 의심은 커져만 간다. 새해가 밝아오는데도 옛 형제자매들처럼 신음한다. '우리를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출 14:11).희망이 없어 보이는 새해를 어떻게 맞아야 할까? 미래를 향해 항해하려는데 돛을 밀어 줄 낙관주의의 바람이 불어 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슬픔과 실망과 끊임없는 다툼이 가득 찬 이 땅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노래를 그치지 않을 수 있을까?2022년에 펼쳐질 풍경이 저물어 가는 올해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을 조금만 움직이셔도, 우리를 위해 조금만 예비해 주셔도, 은혜와 권능의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나 크고 신비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아 알기에, 우리는 희망을 품고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 만나를 찾아 나서라빡빡한 재정과 관계의 긴장이 여전히 예상되는 한해라면, 2022년에는 만나를 찾아 나서는 열심을 내 보라. 불평만 하지 말고 아침마다 문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찾아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가 비처럼 광야에 내릴 것이라고, 긍휼이 그들의 장막 문 앞에 룸서비스처럼 아침마다 새롭게 쌓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당신에게도 해당된다.희망을 갖고 앞날을 기대한다는 게 쉽지 않다면, 당신이 딛고 서 있는 발아래를 내려다보라. 당신의 삶을 위해 일용할 작은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아름다운 일출, 뜨거운 커피 한 잔, 작동하는 컴퓨터, 또는 문자를 보내오는 친구…. 하찮은 선물은 없다. ‘만나’라 이름 붙이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말하라. 흠뻑 받아들이라. 오늘 하루치 영양분에 감사하라.당신의 홍해를 기억하라모세와 미리암은 40년 동안 광야를 걸으면서 홍해 옆에서 외쳤던 이 말을 몇 번이나 더 감미롭게 노래했을까?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먼지가 발을 덮고 밀려오는 모래바람이 눈앞을 가릴 때, 이 말은 그들을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리듬이 되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도 모세와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신 일을 기억할 수 있었다.어린 시절 나는 조부모님의 작은 침례교회에서 주중 기도 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신실한 기도의 전사들이 모여 온 교회를 위해 간구했다. 모여서 기도 제목을 나눴다. 그렇지만 그 주중 기도 모임에서 하나님께 긴급 전화를 드려 도움만 구했던 것은 아니다. 기도는 곧잘 간증으로 바뀌었다. 간구 중에 사람들이 지난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고백하곤 했던 것이다. 건강진단 결과가 암울하게 나왔을 때,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이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지난날의 놀라운 역사를 기억해 냈다.새해로 첫 발을 내딛을 우리도 그들처럼 할 수 있다. 2022년에 하나님께서 크게 움직이시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당신의 고통에 함께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슬그머니 의심하는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려고 씨름하고 있다면, 당신의 ‘홍해’를 기억하라. 당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을 찬양했던 옛 노래를 다시 불러라. 지난날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해 주셨던 일들을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게 들려주라. 눈앞에 질고의 풍경이 끝없이 펼쳐 있는 듯 보여도, 끝은 있다. 지난날 당신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앞날에도 당신과 함께 걸으실 것이다.바위에서 터져 나올 물을 기대하라체념하면 기대하지 않는다. 실망할까 두려워 미래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잘될 거라 확신하지 못하니 어떤 일에도 냉담하기만 하다. 그런 우리를 현실주의자라 자처하겠지만, 체념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런 우리의 정신에 남을 것이라고는 건강하지 못한 비관주의일 뿐이다. 팬데믹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고, 끔찍한 사건사고가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고, 전쟁과 기근이 온 세상을 할퀴고 있다. 이런 삶을 바라보고 있자면, 절망에 빠지기 쉽다. 엉망이 된 이 현실을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바로 잡으시려는 것일까? 심해도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절망이 점점 크게 밀려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광야에서 절박하게 부르짖은 모세의 믿음을 가지라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라고 말씀하신다. 일용할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구원의 하나님,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 말씀하신다. 그러니 바위에서 터져 나올 물을 기대하라 하신다.모세는 목이 말라 대드는 백성에게 떠밀리다시피 하나님께 나아갔다. 분노와 굶주림과 피곤에 지친 무리의 절규가 귀에 윙윙거렸다. 모세는 하나님은 선하시며 물을 주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백성의 아우성이 그의 희망을 갉아먹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세는 부르짖었다. 그리고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게 하신 하나님의 기적에 군중은 잠잠해졌다.2022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일하실 것을 기대하는가? 아니면, 기대치를 낮추는 것으로 실망을 사전에 회피할 것인가? 당신의 기도에 절망의 소리뿐인가? 새해로 첫걸음을 들여놓을 지금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진다면, 기억하라. 이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서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케 하신다. 당신도 바위에서 물을 기대할 수 있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다. 우리뿐이라면, 우리는 결코 희망의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만한 믿음을 갖지 못 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선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나날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길 때 우리는 참된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 체념과 비관주의가 2022년을 채우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걸으신다. 우리 옆에서 동행하신다. 새해로 발걸음을 옮겨 놓는 우리에게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원제: New Year Hope from the Exodus Deser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만나
광야
출애굽
희망
새해
낙관주의
비관주의
실망
체념
2021 미국 기독교 10대 신학 기사
by Collin Hansen
2021-12-30
2020년이 떠넘겨 준 소란과 분노와 불안이 2021년에는 모두 사라지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희망과 치유를 경험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었다. 세상에, 틀려도 이렇게 틀리다니. 2020년에 비하면 올해 그리 새로운 도전이 많았던 건 아니다. 그 대신 2021년, 내가 선정한 미국 기독교 10대 신학 기사들은 작년에 겪었던 갈등의 많은 부분을 되풀이했다. 아주 예리한 복음주의 비평가들은 인종과 학대에서 정치와 전염병에 이르기까지,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각종 문제의 중심에 있는 분열의 근원을 설명하려 애썼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개혁주의 복음주의자를 (긍정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통회 그룹, 자비 그룹, 신중 그룹, 그리고 용기 그룹이라는 네 그룹으로 나누었다. 드영은 이렇게 적었다. “종이에 쓰는 교리 내용은 똑같다더라도, 이들이 그 교리와 관련해서 취하는 자세와 실천은 하늘과 땅 차이다.” 조지 패커(George Packer)가 매거진 ‘디 애틀랜틱’(The Atlantic)과 그의 책 ‘마지막 최선의 소망’(Last Best Hope)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회에만 이러한 분열이 있는 건 아니다. 사실 드영의 네 가지 범주를 패커의 네 가지 아메리카에 다음과 같이 투영할 수도 있다. 통회 그룹(정의로운 미국인), 자비 그룹(똑똑한 미국인), 신중 그룹(자유로운 미국인), 용기 그룹(진짜 미국인). 이렇게 얼마든지 달리 상상할 수 있듯이, 신학도 결국은 전기(biography), 직관, 종족(tribal), 충성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이 자연적 분열을 극복하지 못할 때, 온 세상이 고통 받는다. 헨리 클레이(Henry Clay) 미국 상원의원은 1852년에 이렇게 말했다. “종교인들조차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없다면, 위대한 사랑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고백하는 정치인이 극소수에 불과한 우리 정치인들에게서 기대할 게 있기나 할까요?”1830년대와 1840년대, 장로교와 감리교와 침례교 교단에 분열이 일어났을 때, 곧이어 남북전쟁이 따라왔다. 나는 지금 우리 시대에 같은 일이 있을 거라고까지 예측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것은 최종 단층선이 어디에 형성되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그 선이 통회와 자비와 신중과 용기 그룹마저도 제각각 분리시킨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구분해서 보는 이 나라에서 교회가 선지자의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을 맞을 것이다. 만약에 자비와 신중 그룹이 공통점을 찾고, 통회 그룹과 용기 그룹이 계속해서 자기네 성격을 밀고 나간다면, 미국 교회는 그보다 더 나은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교회는 모든 게 조작되고 일시적인 공황을 일으키는 상황 속에서, 또는 심지어 불공정과 불신의 실제 사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가리킬 것이다. 교회들은 학대와 낙태를 모두 비난할 수 있다. 교회들은 정의와 정당성을 모두 다 찬양할 수 있다. 참으로 교회들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신실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2022년을 위한 이런 희망과 기도를 가지고, 나는 지금 2021년 10대 신학 기사를 골라 보겠다는 무모한 시도를 하려 한다. 내가 제시한 다음 내용은 복음 연합(The Gospel Coalition)의 신앙고백 선언에 동의하는 미국인의 관점에서 쓴 것이다. 2021년 내내 교회에서 잘못을 찾아내기 위해서 쏟은 같은 양의 에너지를 2022년에는 믿음을 쌓기 위해서 쓴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허락하실지 상상해 보자. 10. 메타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2021년에 우리는 유행을 선도하는 일부 목회자가 교회의 미래가 현재 ‘메타’로 알려진 페이스북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Facebook/Meta 및 기타 주요 기술 회사가 현재 온라인 3D 세계를 만드는 데 투자하는 압도적인 리소스를 근거로 할 때, 아마도 향후 십 년 우리는 지금 이 기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은 고작 10위에 올려놓은 이 기사를 1위로 다시 분류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교인이 급격하게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것을 지켜본 교회 지도자라면, 이제는 함께 모여서 드리는 대면 공동 예배의 실용적이고 신학적인 가치를 입증해야만 한다. 9. 신흥 세대가 종교개혁 이전의 신조를 얼마나 받아들여야 할지 논쟁하다특히 침례교 전통에 속해 있는 젊은 신학자들이 성경과 에큐메니컬 신조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계속해서 열띤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몇 년 전, 삼위일체 내에서 영원한 복종과 권위의 관계(ERAS: eternal relations of submission and authority)를 찾는 신학자에 대한 장로교의 비판으로 시작된 논쟁이 이제는 신학적 방법 자체에 대한 논쟁으로 확장되었다. 학생들과 멘토들 사이의 날카로운 비판을 토대로 볼 때, 앞으로 침례교 신학자 중 일부는 다른 개신교로, 심지어 고전적 신학과 관련해서는 가톨릭과 정교회로까지도 분열할 것으로 보인다. 8. 평결들이 2020년 폭력의 트라우마를 되살리다아흐마우드 아버리(Ahmaud Arbery) 살해에 대한 재판에서 나온 세 건의 유죄 평결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2020년 8월 케노샤 폭동 중 두 명의 남성을 총으로 살해한 카일 리튼하우스(Kyle Rittenhouse)에 대한 무죄 판결만큼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리튼하우스 사건에서 당국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도록 허용한 도시에서 발생하는 자기방어 모델을 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무죄 판결을 받은 후에도 그를 위험한 자경단원으로 바라본다. 지속적인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싸우거나 비판적인 인종 이론의 확산에 저항하려는 신학적 우선순위는 2021년 미국 문화를 더욱 더 대표하는 사례와 판결을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7. 복음주의의 문화와 역사를 점검하다복음주의 세계에 로마 교황 같은 수장, 말하자면 “휘튼의 주교” 같은 이가 있다 하더라도, 로마 교황과는 달리, 그에게는 세계 복음주의를 정의할 권한이 없다. 설사 그런 권한이 있다 하더라도 다양한 저자들이 이 무정형의 개신교 갱신 운동을 신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특히 2016년 이후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미국의 주요 유권자 집단으로 부상하면서 정치적 위세를 행사하자 여러 작가들이 보수적 개신교 신학이 현대 문화의 포로가 되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베스트셀러가 된 책도 있다. 모든 세대가 예외 없이 시대를 초월한 복음과 근시안적 사고에 빠진 복음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영적으로 건강한 해체라면 문화에 사로잡힌 교회를 해방시키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6.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들의 보수적 판결에 바이든 행정부가 진보적 의제로 맞불을 놓다미국 대통령 선거가 종말론적 분위기를 풍기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문화적 교착 상태를 중재하는 대법원의 역할이 확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낙태논쟁 만큼 미국 민주주의의 열정을 자극하는 것도 없다. 진보성향 재판관은 낙태반대론의 주장을 “종교적 견해”로 규정하면서도, 모든 인권이 사실상 신학적 결론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는다. 연방 기금으로 낙태를 지원하도록 행정명령을 내린 바이든 대통령의 백악관도, 낙태를 제한할 수 있도록 주정부의 손을 들어준 트럼프가 새로 임명한 가톨릭교인 대법관들도, 결국 생명의 저자(주인)가 누구인지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려야 했을 것이다. 5. 치열했던 총회장 경선으로 남침례회의 분열의 벽이 더욱 단단해지다미국장로교(PCA) 같은 작은 교단이 현대의 성 정체성 개념을 두고 토론하고 또 적시에 관련 보고서를 발표했다. 주목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은 남침례회(SBC) 같은 거대 교단에서 일어났다.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 교육자[앨버트 몰러 남침례 신학교 총장]가 남침례회 총회장 경선에서 3위로 낙선했다. 2위를 한 마이크 스톤은 선거 운동 내내 교단 내 성 학대 의혹을 총회실행위원으로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고전했고, 총회장에 당선된 에드 린튼은 표절 의혹에 휘말렸다. 물러나는 그리어 총회장가 집행위원회에 남아도 되는지를 두고 일어난 논란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남침례회는 과연 “남부” 또는 “침례교”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 나갈까? 4.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그리스도인들이 탄압에 노출되다 미국인은 이제 이십 년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안정과 승리의 길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더하여, 보복 공격을 피해 필사의 탈출을 하는 미군을 보면서 수치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 탈출 행렬 속에는 아프가니스탄 지하교회 교인들도 있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탈레반의 탄압이 미치기 전에 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탈출하지 않고 남은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그 중에는 미국인도 있다. 현실은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들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탈레반 때문에 결코 좌절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남았다. 3.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둘러싸고 교회들도 갈라지다최근 몇 년 동안 페이스북 엄마 그룹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2021년 상반기까지 전 국민에게 제공된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일부 그리스도인의 반응이 미약할 것이라고 쉽게 예상했을 것이다. 백신 회의론은 현재 아프리카에서도 여전히 높다. 남침례 신학교와 에스베리 신학교는 백 명 이상 직원을 보유한 사업체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백신 명령에 반대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동의를 잘 하기로 유명한 캐나다인들조차도 앨버타의 제임스 코테스(James Coates) 목사가 에드먼턴 교회의 정원 제한 명령을 거부한 것을 놓고 찬반 여론으로 갈라졌다. 교단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교회가 비록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팬데믹을 놓고 음모와 권위 사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있다. 2. ‘마스힐의 부흥과 몰락’ 팟캐스트가 교회를 뒤흔들다 마이크 코스퍼(Mike Cosper)의 팟캐스트 ‘마스힐의 부흥과 몰락’은 지난 십 년을 통틀어 가장 획기적인 기독교 미디어로 전 세계 팟캐스트 차트의 정상권에 오르기도 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이 팟캐스트는 특히 2021년에 수면 위로 올라온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학대 행위를 잇달아 폭로하면서 정신적 학대의 문제를 교회가 해결해야 할 최상위 의제로 밀어 올렸다. 이러한 상호 의심의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유명 교회들이 내부 분열을 겪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지도자가 그들에게 단지 말씀으로 도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확인시켜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 신학자들은 “공감”의 적절한 정의와 적용에 대해 더욱 심도 있는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1.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이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다팬데믹과 정치가 몰고 온 아홉 달의 긴장이 마침내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잔디밭에 십자가들이 세워지고 교수형장의 올가미들이 걸리는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폭발했다. 이 사건을 기독교 민족주의를 주제로 하여 다룬 후속 해설 기사들은 적절한 애국심과 비성경적인 혼합주의를 뒤섞어 놓았다. 그렇지만, 왜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이 2020년 선거 결과에 격렬한 분노로 반응했고, 지금도 여전히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지 한번쯤은 물어 봐야 한다. 아마도 기독교 민족주의,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미국에 적용하는 이 사상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지나치게 현실화된 종말론 또는 언약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원제: My Top 10 Theology Stories of 2021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독교민족주의
문화적포로
성경적성정체성
낙태논쟁
프로라이프
복음주의비평
사람의 곡선, 하나님의 직선
by 최병락
2021-12-29
류시화 작가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서 19세기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통나무를 짓고 살았던 월든 호수를 찾아갔던 이야기를 전한다. 잘못된 주소를 가지고 월든 호수를 찾다가 종일 헤매다가 결국 저녁에야 월든 호수에 도착한 그는 우연히 데이비드 소로를 좋아하는 어느 백인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류 작가는 그 백인 작가의 집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밤새 철학자 소로 이야기를 나눴고, 두 사람은 그렇게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만약 아침부터 나선 그 길에서 제시간에 월든 호수를 찾았더라면 나는 내 평생의 친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헤맨다고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 되기도 한다.”‘도리어’의 역사바울이 감옥에 갇혔다. 사람들은 그의 사역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상황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게 일어난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도움을 준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빌 1:12). 우리 말 ‘도리어’는 헬라어 ‘에르코마이’를 옮긴 것이다. 이 말에는 ‘나쁜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좋은 일인 것으로 밝혀진다’는 뜻이 들어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인 ‘의외성’과 ‘반전’과 ‘상황의 역전’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다. 이어 바울은 자신이 갇힌 것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빌 1:13).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이 시위대와 감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감옥에 갇힌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로마의 ‘시위대’(프라이토리온)는 황제의 궁과 총독 관저를 지키는 정예 부대였다. 철저히 로마 시민 중에서 선발한 남자들로만 구성된 시위대의 전체 규모는 9,000명에 이르렀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시위대는 전체 시위대 9,000명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위대는 로마 식민지 전역에 배치되어 있었고, 로마에 있는 시위대는 1,000~2,000명 정도였다. 그러니까 바울은 로마 시위대 1,000-2,000명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이라고 셈한 것이다. 또한 바울은 이들과 더불어 이 시위대를 유지하는 사람들과 다른 수감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다고 말한다. 로마에서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오니 합법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로마를 종일 뛰어다녀도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찾아온 것이다. 감옥 안에서만 이런 일이 생긴 것도 아니다. 밖에서도 의외의 반전이 일어났다. 함께 복음을 전했던 동역자들 사이에 두 파가 생겼다. 평소 바울을 시기했던 사람들 쪽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다른 한 쪽은 감옥에 있는 바울을 대신하여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을 내는 착한 마음의 순수파였다. 이 두 파가 경쟁하듯 복음을 전했고, 가속도가 붙은 복음이 로마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수감이 결정되었을 때 바울이라고 처음부터 이 반전을 알았을까? 아마도 그도 적잖게 좌절했을 것이다. ‘하나님, 걸어 다니고 뛰어다녀도 부족한데, 이렇게 손발을 묶어 두시면 어떻게 복음을 전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의구심을 말끔히 씻어 버리신 것이다. 감옥 안에서는 2명씩 돌아가면서 24시간 교대로 바울에게 제자훈련을 받으러 왔고, 감옥 밖에서는 두 팀이 경쟁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밖에서 고군분투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리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바울은 탄성을 발했을 것이다. ‘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구나!’ 자신에게는 곡선처럼 보이는 이 일이 하나님께는 직선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하나님의 일하심감옥 안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바울은 이제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간다. ‘내가 감옥 밖에 있을 때보다 감옥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이 더 많은 일을 하신다면, 감옥보다 못한 곳으로 가도 하나님은 더 큰일을 하시겠구나’ ‘감옥보다 못한 곳은 없으니, 내가 이곳에서 죽어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 일을 통해서 더 크게 일하실 수 있겠구나. 그렇다면 죽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바울은 드디어 저 위대한 고백을 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실제로 바울이 60~70년 동안 살면서 전한 복음보다, 그가 죽은 후 지난 2천 년간 전파된 복음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널리 퍼졌다. 바울이 로마 전역에 써 보낸 13권의 편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전 세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졌고, 오늘 우리 손에도 들려 있다. 그는 죽어서 오늘까지 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울의 인생이 감옥 안에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의 믿음은 오히려 그곳에서 단단해졌다. 바울이 멈추니 하나님이 더 바쁘게 일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한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우리는 매여도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손발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었다. 동료 유대인들이 죽어나가는 수용소에서 그는 살아남았다. 훗날 그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대의 역작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로고테라피’ 또는 ‘의미치료’라는, 정신치료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이론을 제시한다. 수용소에서 그는 다른 이들을 관찰하면서 이런 의문이 생겼다. ‘왜 어떤 사람은 살아났고 어떤 사람은 죽었을까?’ 그가 찾은 이유는 이러했다. 육체의 고통을 뛰어넘는 정신세계에서 창조성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의미를 지속해서 부여함으로써 자신에게 실존의 용기를 불어넣는 사람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대상자에서 제외되더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추운 겨울날 강제 노역을 한 후에 주어지는 딱딱한 빵 한 조각과 미지근한 숭늉보다도 못한 커피 한 잔을 받았을 때, 어떤 사람은 그 빵과 커피를 모두 마셔 버리지만 삶의 의미를 갖고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은 그 커피를 절반만 마시고 남은 절반으로는 세수를 하고 얼굴을 가다듬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강력한 삶의 의미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았다.감옥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그곳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것을 보면서, 프랭클은 인간의 실존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에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유대인 그리스도인 바울은 역시 감옥 안에서, 빅터 프랭클이 발견한 정신의 의미를 뛰어넘는, 영적 의미를 발견했다. 내가 살아날 것과 전해야 할 복음이 있다는 것과 감옥 안에 있는 순간조차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이 우리 생각에는 곡선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직선일 때가 있다. 우리 눈에는 멀리 돌아가야 하는 길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지름길일 때가 있다.
그리스도인의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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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진보
복음전파
의미치료
류시화
은혜는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능케 한다
by Ruth Chou Simons
2021-12-28
뭔가 늘 부족하고 유능하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우리는 왜 매일 지쳐 있고, 두려워하고, 초조하게 애를 쓰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이 질문을 붙잡고 씨름한 지 몇 년이 됐다. 왜 우리는 마치 우리가 자원이나 시간, 성취, 명료성, 목적, 에너지, 확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수용과 환대가 부족한 것처럼 살고 있을까? 왜 우리는 친구로서, 동료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살고 있을까? 전례 없이 많은 기독교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을 채우고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책장에 꽂혀 있는 이런 책들로 우리 세대를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 시대의 여성은, 자력으로 성공하고 힘을 갖고 자유를 쟁취하여 이 시대의 틀을 깨트릴 수 있는 기회를 제한 없이 갖고 있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불안과 압박과 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 중에는 이런 감정을 일상생활 속에서 마치 배경 음악처럼 느끼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함께 이렇게 노래한다. ‘내 목적을 놓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내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면? 기대에 부응하려면?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충분히 했다고 느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충분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터놓고 인정하지는 않지만, 나도 종종 나의 “달성”을 보장하는 공식을 찾고 있다.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을 없애 줄 무언가를 원한다. 목표에 도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싶어 한다. 나만 그럴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애쓰다 우리는 성적을 평가하고, 우리의 성과, 우리의 지지율, 우리의 소속감을 통제하려고 애쓰는 데 몰두하는 문화에 사로잡혀 있다. 사실은 훨씬 많은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창조된 우리인데, 지금 우리는 햄스터 바퀴에 갇힌 채 우리 힘으로 애쓰고 있다.누군가가 당신의 질병에 대해 처방전을 제공했는데 그 처방이 당신 상태에 대해 아무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면, 처방전이 잘못되었거나 진단이 잘못된 것이다. 극도의 피로감과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 ‘더 나은 전략’이라면, 왜 이런 처방전들이 효과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성공을 위한 공식, 삶의 방향을 위한 전략, 또는 기분 좋아지게 하는 격려의 말을 끊임없이 찾으면서 이것들이 우리의 무능감(feelings of inadequacy)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나은 길’을 주셨다. ‘뭐라고요? 그게 말이 되나요?’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할 수도 있는 길을 주셨다. 나의 이러한 충족감(adequacy) 탐구를 완전히 바꾸는 놓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이해였다. 나는 충족감이라는 개념을 진부한 틀에서 끌어내어 성경의 관점에서 새롭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게 필요한 것은 최신 처방전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끝없이 고군분투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른 진단과 진짜 해결책이었다.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 ‘이 세상의 문제점’(What’s Wrong with the World)에서 내린 평가는 신랄하다. “기독교의 이상은 시도된 적도 없으면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어려운 것으로 결론이 났고, 그래서 시도되지 않은 채 내버려졌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기소침해지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체스터턴의 이 말 때문에 나는 위로를 받는다. 어떤 게 하나님의 역할이고 어떤 게 당신의 역할인지 혼란을 느낄 때가 있는가? 당신이 그런 혼란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이 이것을 정말 곰곰이 생각할 때) 너무나 터무니없는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때로는 잠재의식 속에서, 경시하고 우리 자신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의 별난 주장(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성취하신다)을 쳐다보면서 우리는 이것으로는 변혁과 변화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화를 위한 진정한 수단 예수님을 믿는 것에 우리의 노력을 더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 않을 터이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과(또는 성과의 결여)에 연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존의 복음을 숭배하는 것이다. 자기의존이란 우리의 노력에 따라 우리가 통제할 수 있고, 조작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은혜는 자기효능감(self-sufficiency)을 거부하고 자기 힘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오늘의 문화에 대항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부활의 완성된 사역을 통해 당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온전히 합당하게 하시어 더 이상 우리 스스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획득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는 대로 행하도록 훈련되고 준비된 자녀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 문화는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마저도 자기의존의 유혹에 도취되어 있다. 예수님으로 충분하다고 말로는 신뢰를 표하면서도, 우리는 평생 ‘우리로’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변화를 위한 진정한 수단 곧 변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계발 및 공식들로 대체한다. 오늘 당신을 지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가능한 기준? 비교? 최선을 다했는데도 “아직 멀었어”라는 부담? 어머니, 당신을 압니다. 자녀가 “잘 되도록” 최신 양육 전략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대학졸업생, 당신을 압니다.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세밀한 계획을 짜고, 당신의 삶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은사와 재능을 사용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의 동료 여성 여러분, 압니다. 시작하기도 전인데 벌써 뒤쳐진 느낌이라는 것을. 여러분을 보면 내가 보입니다. 나도 그러한 삶을 이미 여러 번 경험해 보았고, 이제 당신에게 더 이상 그렇게 계속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리게 있게 되었다. 은혜 안에 거하는 삶보다 스스로 은혜를 획득하려고 분투하는 삶에 빠지기가 더 쉽다. 은혜는 당신 자신을 갈구하는 삶을 멈추고 대신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갈구하고 살도록 만들어 준다.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지를 드러내지 못하는 나태함이나 무관심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드러내는 데 함께할 수 있게 하는 촉매다. 당신의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는 당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열매를 맺으려는 분투를 멈추고 당신이 해야 할 선한 일을 가지고 계신다(엡 2:8-10). 은혜는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능케 한다.이 글은 Ruth Chou Simons의 When Strivings Cease: Replacing the Gospel of Self-Improvement with the Gospel of Life-Transforming Grace(노력을 멈출 때: 자기계발의 복음 대신에 삶을 바꾸는 은혜의 복음을)의 일부를 간추린 것입니다. 원제: Grace Fuels What Striving Can’t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은혜와행위
자기무능감
자기효능감
은혜와공로
자기계발
자기의존
의무에서 보물로: 기쁨이 바꾸어 놓은 내 신앙
by Steven Lee
2021-12-27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우리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이번에 좀 더 천천히 그 구절을 다시 읽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우리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 문장 속 단어를 하나하나 다 이해했지만, 전체 의미가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한다는 게 무슨 의미이지?” “나의 만족이 하나님의 영광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거지?” 이 문장은 너무나 생소해서, 마치 아랍어나 아이슬란드어로 쓰인 글 같았다. 이 한 문장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기쁨,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씨름하도록 자극했다.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의 기쁨에 관심이 있다는 생각에 직면했다. 그리고 그는 단지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분 안에서 내가 누리는 기쁨을 발전시키고 최대화하고 또 자극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나는 성경을 통해 이런 사실에 관한 내용을 계속해서 찾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항상 성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한 문장은 내 삶을 말 그대로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십 년 전 나는 성인으로서 독립을 하고 싶은 마음에 들떠 집에서 500마일 떨어진 대학에 도착했다. 신실한 기독교 가정과 성경 중심의 설교를 하는 교회에서 성장한 내게 기독교의 본질은 의무와 규칙이었다. 적어도 열일곱 살 당시 내게는 그랬다. 그러니까 나는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뿐 아니라 부도덕하기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까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지만, 십대의 마음은 규칙과 금지 사항에 집중되어 있었다. 교회 출석, 기도하기, 성경 읽기, 혼전 성관계 금지, 술과 담배와 마약 금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말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건 집안일이나 숙제처럼 의무였을 뿐 결코 기쁨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고(고전 10:31),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대학 1학년 때 기독교 동아리에서 소그룹 리더가 존 파이퍼(John Piper)의 ‘하나님 갈망하기’(Desiring God)를 내게 건넸을 당시, 나는 기독교 서적을 별로 읽은 게 없는 상태였다. 첫 번째 장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끝없는 혼란에 빠졌다. 저자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반복해서 말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라는 명령은 고사하고, 나는 한 번도 내 행복이 하나님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식의 가르침과 함께 자라지 않았다.예수님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또 행동으로 그분을 공경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누리는 것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의무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고통의 길로 들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육신의 행실을 버리고 또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의무(labor)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했지만, 은혜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인용했지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까지 연결하지 않았다.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는 말은 마치 다리가 다섯 개 달린 개나 마른 물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진리이다. 그래서 나는 순종한다. 그러니까 순종만 하면 되지, 순종하는 내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문화적으로 이런 접근 방식은 매우 의미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속에는 좋은 성적, 근면, 의지, 규율, 인내가 심어졌다. 내가 자란 문화적 환경에서 시험에서 A 마이너스를 받으면 다음에 A 또는 A 플러스를 받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나는 임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라고 배웠다. 내가 좋든 싫든, 그건 상관없었다. 주어진 일은 무조건 잘해야 했다. 그러나 주로 거래 관계로 규정되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예수님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며 성경을 읽었다. 벌을 받지 않으려고 죄를 피했다. 그리고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내 세상은 그냥 허물어지곤 했다. 내가 방탕한 죄인인데,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이거나 용서하시는 것은 고사하고, 어떻게 나를 사랑하실 수 있을까? 밭에 감추인 보배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축소시켰다. 그것은 순종에 대한 강력한 동기가 되지 못했다. 내용 자체가 부족했다. 서서히,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하는 기쁨, 예배 속의 기쁨, 그리고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만족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보기 시작했다. 나의 기쁨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삶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단지 기쁨을 구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 영혼의 만족을 찾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내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위해 싸운다. 이런 생각이 성경 지면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다(시편 1:2). 주의 명령은 무거운 게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이다(요일 5:3).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경험하고 그의 우편에서 영원한 즐거움을 얻는다(시 16:11). 예수님은 천국이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판다고 말씀하셨다(마 13:44).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그에 대한 보상이 줄어드는 게 아니다. “당신의 직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신혼부부에게 “당신의 직업은 배우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온 휴가지에 도착한 사람이 “이제부터 당신의 직업은 긴장을 풀고 즐기는 것이야”라는 말을 듣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계명은 그분을 기뻐하라는 계명이고, 그분을 기뻐하라는 계명은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는 계명이다. 이 둘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갈 뿐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성한다. 더 나은 곳은 없다기독교 희락주의(Christian Hedonism)를 요약한 이 한 문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것에서 놀라운 것으로 바뀌었다. 내 인생은 이제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목사로서 성경을 전할 때, 내 목표는 순종을 위해 순종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나는 교인들에게 수치감과 죄책감을 줌으로 예수님을 따르거나 희생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위협이 있는 곳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더 큰 즐거움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분의 미소를 경험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예수님이 더 낫다.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것이 각종 오락이 주는 작은 즐거움보다 낫다. 예수님은 소셜 미디어의 늪을 끝없이 스크롤하는 것보다 낫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불법적인 쾌락, 화학적으로 유도된 쾌락, 그리고 이 세상이 죽음의 접시에 담고 있는 재물보다 낫다. 예수님께 순종하고, 교회에 참여하고, 그리고 주님의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이 보내는 일시적인 칭찬과 인정보다 낫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만족이 점점 커져갈 때, 그에 비해 세상이 주는 작은 기쁨은 점점 더 시들어간다. 그리고 가장 큰 경이로움은 그런 기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소망에 뿌리를 둔 영원한 기쁨을 만난다. 우리는 영원한 희망, 영원한 고향, 썩지 않을 왕국, 더 나은 기쁨, 그리고 영원한 기쁨을 약속받았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현실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을 찾기 위해 창조되었고 설계되었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이 진리를 이해하도록 하라. 그리고 우리가 그를 기뻐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원제: From Chore to Treasure: How Joy Transformed My Christianit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기독교희락주의
하나님께영광돌리기
기쁨
존파이퍼
신앙의본질
누군가 내 고통을 아신다
by Tim Shorey
2021-12-26
10년 전에 두통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냉동 참치에 정말 진심인 의사였다. 그런데 그 의사는 만성 두통을 방치했다면서 내게는 호통을 쳐댔다. 의사라는 사람 앞에서 20년간(지금은 30년) 두통을 달고 살았다고, 많은 의사를 만났고, 수많은 검사에 MRI 촬영, 약물치료, 식이 요법, 운동, 비타민 섭취, 영양 섭취, 침술, 도수치료 다 해봤다고 말하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래 봐야 의사에게서 돌아오는 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는 핀잔뿐이다. 어찌됐건 그 전문의는 나를 고치려고 노력했으니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환자로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머리를 쿡쿡 쑤시는 만성 통증에 시달리는, 살과 피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나는 정말 간절하게 그 이상을 바랐다.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는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하나님은 그 이상이 되신다. 성자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은 그냥 전문의가 아니시다. 그는 공감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결코 그냥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신다. 그는 가까이 다가오신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끼신다. 그리고 우리를 돌보신다. 이는 특별히 약하거나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진리가 아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위한 복음의 진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육신은 모든 믿는 자에게 깊은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렇다고 그는 말한다.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히브리서 2:14-18; 4:15-16)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친히 낮아지셔서 우리가 겪는 슬픔의 골짜기를 앞서 지나셨기 때문이라고 히브리서는 말한다. 성육신(영원히 지속될 것이다)은 우리 구주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가 지니신 상처가 이 성육신을 증명한다.이러하시기에 기독교의 하나님은 다른 종교의 신과는 확연히 다른 분이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냉담하거나 무정하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무심하게 계시는 분이 아니다. 결코 냉정하게 계산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말이다. 당신이 지으신 세상에 왜 고통을 허용하시냐며 하나님의 면전에 대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어 대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부르짖는다. 이러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고통이 있는 곳에 항상 계셨고, 지금도 계신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비통을 위로하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의 슬픔에 함께하시고 대신 슬퍼하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겪는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그 고통을 온전히 겪어 내셨다. 그리하셔서 우리를 고통에서 구해 주신다. 나는 33년 째 두통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적합하다며 허락하신 다른 극심한 고통들도 함께. 그리고 이러한 나의 나날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나의 위로의 소망이 되신다. 나와는 다르더라도, 당신에게도 여러 가지 아픔이 있을 것이다. 우리 각자 달리 겪고 있는 고통도 있을 터이나, 우리가 비슷하게 겪는 것들도 있다. 상실, 고통, 슬픔, 불의 같은 것이 그렇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공통의 희망도 있다.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처럼 고난을 겪으셨다. 아무도 모르지만, 예수님은 아신다이 영가의 원곡은 이렇게 탄식한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새찬송가 372장] 그런데 다행히 누군가 마지막 단어를 약간 수정하면서 더 나은 노래가 됐다.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누군가 내 고통을 아신다. 예수님이 아신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니) 고통도 아시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이 고통을 아시는 것은 그가 몸소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신의 이름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나는 내 아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안다. 하나님도 당신의 아들이 (그리고 자녀들이) 겪는 고통을 아신다.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는 외로움과 배신의 쓴맛을 본 적이 있다. 임마누엘께서도 그러셨다. 우리 모두 우리가 지극히 사랑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린 경험이 있다. 예수님도 그런 자리에 계셨다. 우리 모두 주렸고, 목말랐고, 유혹을 받았고, 맞아서 쓰러졌고, 두려워했던 적이 있다. 간고를 겪어 질고를 아는 이(Man of Sorrows)도 그러셨다. 우리 모두 정죄 받고 오해 받은 적이 있다. 예수님을 악령이라 부른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모두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를 실망시킨 사람들이 있다. 겟세마네 동산을 기억해 보라(마 26:37-40). 우리 모두 괴로울 때 아버지께 부르짖는다. 십자가 위에서 구주께서도 똑같이 부르짖으셨다(마 27:46).이러한 진실들에서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언제나 계신다. 이는 정말 경이로운 진리다. 그러나 성육신하셔서,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에나 계시는 창조주께서 육신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그리고 계속 그 육신 가운데 계시겠다고 작정하셨다는) 사실은 이 경이로운 진리를 또한 우리를 위로하는 진리 되게 한다. 우리가 가진 것을 비교할 때 거기에는 위로가 있을 수 없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나 문제들에 집중할 때 거기에는 위로가 있을 수 없다. 위로는 이 사실에 있다. 정말 진짜 아시는 누군가 계시다는 사실에 있다. 고통과 슬픔 중에 있는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원제: Some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기독론
고통
성자
슬픔
위로
임마누엘
히브리서
성육신
잊혀진, 정작 크리스마스를 주신 그분
by Marshall Segal
2021-12-25
목자들 사이에 끼여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동방박사들에 가려졌을 수도 있다. 천사들에 눈길이 쏠려서 또는 베들레헴 위에서 빛나는 별 때문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탄생 이야기 속에서도, 크리스마스트리 위에서도, 대림절 달력 속에서도, 선물 포장지 인쇄 속에서조차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하나님을 더 잊도록 만드는 수많은 캐럴은 또 어떤가? 성탄절에 하나님 아버지보다 더 소외되거나 잊힌 이가 또 있을까? 이런 망각을 계속 생각하자니, 이 사실이 더 이상하기만 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어 최악의 원수였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지만, 정작 그 하나님은 장식에나 어울리는 온갖 잡다한 것들에 밀려나 버렸다. 그러나 요셉이나 마리아, 선지자나 사악한 왕, 그리고 목자나 동방박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성탄절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이는 없다. 하나님이 영원하고 불가피하며 또한 거의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아버지가 되시기에, 예수님도 그 첫 성탄절에 아들이 될 수 있었다.그리고 그분은 영광스럽게 “끝까지 아래로 내려오신” 아버지이시다.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는 이렇게 썼다.예수님이 “아들”이라는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아들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계시하신 방법이다. 가장 중요한 창조주나 통치자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실이다.…그는 아버지이다. 끝까지 아래로 내려오신 아버지이다. 따라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로서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다. 그는 아버지로서 창조하시고, 아버지로서 또한 다스리신다(Delighting in the Trinity, 21-23쪽)대림절이 상기시켜 주는 사실은 우리에게 주님, 구주, 큰 형이자 왕이 계시지만 또한 우리에게는 무한한 지혜와 끊임없는 사랑의 전능하신 아버지, 첫 번째 크리스마스와 그 이후의 모든 크리스마스를 만드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독생자우리는 때때로 대림절 기간에 아버지를 잊고는 하지만, 아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아들이 배신당했던 밤에 올린 그 기도보다 이 사실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 곳도 없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1-3). 굳이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다고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로지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는 목적은 단 하나,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더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파송을 결코 한 번만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전체 기도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는 부담, 그것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 17:8).“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요 17:25).죽으실 준비를 하시는 중에, 무엇보다도 배신과 불의, 고문과 조롱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공포를 앞에 두고 드린 예수님의 기도는 오로지 하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저들이 알기 원하는 그것이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셨듯이’우리가 성탄절에 아버지를 뒤에 남겨두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성탄절이 미묘하게나마 아버지와 아들, 그러니까 진노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과 대척점에 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진노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삼위일체 안에서 어떤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노해서 우리를 벌주시려는 하나님에 대항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싸웠고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2-23).그렇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다”(사 53:10). 그렇다. 그 아들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사 53:4)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 그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덮혀 있었고, 아버지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세상에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희생시키면서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두셨을 때, 그렇다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덜 사랑한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희생 때문에 아들을 더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17)고 말씀하신다. 성부, 성자, 성령은 사랑의 하나님이자 또한 진노의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보내시고, 아들은 오시며, 그래서 죽고 다시 살아나시고, 성령은 소생시키고 비추신다. 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아버지의 사랑에 관해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는 것을 막지 않았다. 도리어 아들과 우리를 위해서,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아들을 보내도록 촉구했다. 결국 우리에게 아들을 약속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 아들의 오심을 보내신 분보다 더 일찍 예상한 이도 없었고, 아들의 오심을 보내신 분보다 더 기뻐한 이도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하나님보다 첫 성탄절에(눅 2:13-14), 그리고 부활이라는 절정에 이르렀을 때(빌 2:9-11), 더 열정적으로 그를 높인 이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한다. (다행히 모든 성탄절 찬양이 하나님을 잊는 건 아니다.)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니그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요 끝이시라지난날과 장래 일을 모두 주관 하시네영원토록 영원토록온 하늘이 찬양하며 천사들도 찬양하네만국 백성 경배하네 우리의 왕 하나님께모든 입술 열어 찬양 목소리를 합하여영원토록 영원토록하나님께서는 첫 소나무를 심으시기 전에 이미 성탄절 이야기, 곧 “창세 전에 기록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삶”의 이야기를 계획하셨다(계 13:8). 아버지께서는 태양에 불을 붙이기 전부터 이미 십자가가 세워질 땅을 파고 계셨다. 그는 언제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언젠가는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결국에는 피를 흘리실 것임을 말이다. 낳은 사랑, 확고한 사랑, 보내진 사랑, 이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졌다.보내진 그리고 보내는 아들아들의 보냄은 첫 번째 성탄절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다시 보내실 것이다(계 1:7, 마 24:36). 그리고 지금과 그때 사이를 사는 우리는 보냄을 받은 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다”(요 17:18).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성자 하나님도 이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 단지 이 세상에서 잠시 더 살게 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마음이 새롭게 되며, 생각이 정화되고, 미래가 밝아지고,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만물의 창조주께서 당신의 영광의 광채, 곧 당신의 본성의 정확한 흔적을 당신의 피조물 속으로 보내시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그 순간 전까지는 말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다시 강조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심과 같이, 창세 전에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능력과 가치를 나타내신 그 보내심을 받아 모든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의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십자가 죽음으로 수십억의 영혼을 살리신 아들이, 이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 성탄절을 맞는 우리는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아들을 하늘에서 보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랑으로 이 땅에서 보내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원제: The Forgotten Giver of Christma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성부하나님
삼위일체신학
크리스마스
아버지부재
성육신
성탄절이 누군가의 고통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by David Mathis
2021-12-24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지금 이 시점이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건 우리 모두 너무 잘 알고 있다. 특별히 더 힘들게 느껴지는 성탄절도 있는 법이다. 성격 자체가 워낙 활기차서 아무리 힘들어도 기운 내서 밝은 성탄절을 보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성탄절의 기쁨과 즐거움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큰 슬픔, 더 깊은 아픔을 실감하게 할 수도 있다. 평범한 삶, 그것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힘들다. 그런 이들에게 온 세상이 노래하고, 종을 울리고, 갑자기 세상이 기쁨으로 가득 찬 것처럼 쇼를 하는 모습을 보는 건 고문과 다르지 않다. 성탄절의 기쁨을 느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기쁨을 느끼는 게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성탄절은 우리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는다. 성경의 첫 성탄절을 살펴보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성탄절도 모든 게 즐겁고 밝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불행과 무질서를 배경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즐거움의 새로운 모습이 드러난 날이었다. 그 첫 번째 빛줄기는 깊은 어둠의 땅에서 찬란하게 빛났다.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렸고, 무려 400년 동안 침묵하시기만 한 것 같았던 하나님은 어느 날 갓난아기가 되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울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성탄절의 고통과 불행과 두려움을 깊이 생각해 보라.마리아와 요셉먼저 마리아를 생각해 보자. 천사의 발표와 함께 혼란과 오해, 흥분과 기대가 뒤따랐을 것이다. 조만간 그녀의 배가 불러올 것이다. 약혼은 했지만 정작 결혼식은 올리지 않은 상태였다. 머지않아 그녀의 고향 나사렛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정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무려 삼십 년이 지난 후에도 예수님의 적들은 곤란할 때마다 그 카드를 사용했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요 8:41). 예수님조차 그런 소문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면, 그 어머니 마리아는 어떠했겠는가? 이제 요셉을 생각해 보자. 약혼녀는 결혼 전에 이미 임신한 것으로 드러났다(마 1:18). 그에게 이런 사실은 어떤 치욕을 의미했을까?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녀는 요셉의 눈에 너무나 훌륭하고 순결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꿈이 그만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꿈에서 천사를 만난 사이의 시간 동안 요셉이 겪었을 혼란은 얼마나 컸을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천사의 말을 믿고 마음에 위로가 되었겠지만, 순간 아닐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그가 오셔서 지신 죄그러나 요셉이나 마리아가 겪은 고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지신 고통과 죄, 고난과 파멸이다. 천사는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라고 선언했다. 모든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로마의 점령과 지배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적어도 그들이 이교도 이방인에 의해 정치적 예속 상태에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소식에는 로마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하나님의 첫 언약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로부터, 그들 안에 있는 흑암과 부패로부터 구원이었다. 열방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궁핍하지 않았다면, 굳이 성탄절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역사 속에서 쇼를 벌이거나 카메오 역할을 하려고 굳이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를 살리고 멸망하는 자를 구원하며, 병든 자를 고치며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수세기 동안 불행과 어둠의 세력이 점점 더 강해졌다. 이 세상의 타락과 훼손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의 오심은 참된 즐거움과 밝음에 대한 희망의 신호가 될 것이다. 초라한 마을 베들레헴아이가 태어날 때에 베들레헴이 준 것이라고는 놀라울 정도로 초라한 환영이었다. 천사가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메시아의 탄생이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왕이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왕에게 적합한 환영을 하지 않았다. 궁전도 없고, 예루살렘도 아니었다. 왕이 태어난 곳은 대도시에서 6마일 떨어진 곳, 천 년 전 이 나라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이 태어났던 비천한 고향으로 알려진 작은 마을이었다. 베들레헴은 마을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토록 위대한 왕의 놀라울 정도로 겸손한 출생지였기 때문에 알려져 있었다. 예수가 태어난 곳이 우리가 생각하는 “여관”이든 개인 주택의 “객실”(그리스어 카탈뤼마(kataluma)로, 마가복음 14:14과 누가복음 22:11에도 나타난다)이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게 결코 그들을 위한 장소는 아니었다는 점이다(눅 2:7). 그런데 정말로 이 분이 그리스도인데도, 그가 태어나실 장소조차 없었다고? 결국 마리아는 맏아들을 구유에 뉘었다. 최악의 시나리오이건 아니건, 그런 상황은 누가 봐도 이상적이진 않다. 탄생의 겸손함은 그 자리에 오거나 오지 않은 사람으로 인해 더 확실해졌다. 그 지역 또는 국가의 고위 인사는 방문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온 사람이라고는 외국 점성술사들인데, 그 사실은 당시에 오히려 혼란을 주는 사실일 뿐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목자들의 방문과 그들이 드러낸 경외심, 그리고 놀라운 천사의 발표는 요셉 부부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그런 모든 사실을 마음에 큰 기쁨으로 깊이 간직했다(눅 2:19). 그러나 블루칼라 목자들의 방문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에게 주어진, 그의 오랜 영광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멀고 비천하고 고통스러울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영혼을 찌르는 칼마리아는 출산 직후에 성전으로 갓난아기를 데리고 갔을 때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시므온이라는 노인은 이 아이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리고 마리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녀에게 냉정하고 예언적인 말을 했다.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 2:34-35).내 자식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논쟁, 적, 큰 고통에 대한 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마리아는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의 대상이다. 어떤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외에 여기에 다른 무슨 의미가 가능한가? 아들의 이른 죽음 외에 그녀의 영혼을 찌르는 칼이 무엇이 또 있을까? 헤롯과 학살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끔찍하게도, 첫 번째 성탄절과 관련해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가 발생했다. 두 살까지 수십 명의 남자아이들이 부모의 팔에서 떨어져서 불안하고 사악한 폭군에게 살해당했다.“헤롯이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16). 이것은 우리가 성경 전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죄인 학살이 아니라, 갓 태어난 히브리 아들들을 나일강에 던진 바로와 같은, 무고한 이들을 향한 학살이다. 아이들의 엄마를 생각해 보라.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후에 얼마나 큰 고통이 왔을까?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천사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그의 아들을 이 끔찍한 살육에서 구해 내셨다. 그리고 나중에 있을 더 무서운 십자가를 위해서 그를 보호하셨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데리고 사악한 왕에게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고통과 불편을 겪었을 것이다. 어떤 부모라도 아들을 잃지 않는다면 기꺼이 치렀을 대가였다. 그러나 예언대로 마리아의 때가 곧 올 것이다. 슬픔보다 깊은 기쁨첫 성탄절을 맞아 이 세상에 온 예수님의 삶은 이처럼 결코 쉽지 않았다. 태어날 때도, 유아기에도, 또 성인이 되어서도 쉽지 않았다. 사실상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은 예수의 생애 전체에 적용되는 특별한 고통을 포착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이사야는 그리스도가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으셨다. 그는 정말로 그랬다(사 53:3). 그러나 고통스럽고 도전적인 삶이었지만, 동시에 그 삶은 질고의 사람을 지탱했던 깊고도 차원 높은 기쁨으로 채워진 것이었다. 기쁨은 올 것이다첫 번째 성탄절에 천사들이 발표한 큰 기쁨은 우리도 지탱해 줄 수 있다. 성탄절은 우리의 많은 고통을 무시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에게 그 고통에 빠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성탄절은 그 어떤 세속적인 축하 행사보다 더 심각하게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출 2:23-25; 3:7-9; 6:5).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이 시대의 성탄절은 기쁨과 밝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직은 그렇다. 그러나 기쁨과 밝음이 조금씩 스며들 것이라고 약속한다. 최고의 성탄절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타협 없는 기쁨을 엿볼 수 있게 해주며, 멀리서 볼 때조차도 미리 그 맛을 볼 수 있게 한다. 사도 바울과 슬픔의 사람이었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근심하되 항상 기뻐해야”(고후 6:10) 한다. 성탄절을 맞아서조차도 몹시 슬퍼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의 근원이 되신다.원제: Christmas Doesn’t Ignore Your Pai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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