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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겪는 아이들을 돕는 법
by Justin Holcomb • Lindsey Holcomb
2021-11-16
우리 주변에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어린이들이 있다. 트라우마는 육체적, 성적, 심리적인 학대, 왕따,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인종차별의 경험, 심각한 질병 등의 충격적인 경험이 어린이들에게 남긴 부정적인 흔적이다. ‘약물 중독과 정신 건강 서비스 관리국’(Substance Abuse And Mental Health Services Administrations, SAMHS)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신체적, 정신적인 고통스러운 경험, 생명을 위협당하는 직간접적인 경험들을 단회적으로, 또는 반복하여 경험할 때 발생한다. 이는 개인의 정서적, 신체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인 웰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Concept of Trauma,’ 7). 트라우마를 겪는 어린이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반응하는 부모나 양육자가 꼭 필요하다. 어린이들이 홀로 있다고 느끼지 않고, 그들이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어린이들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부모나 양육자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어린이들이 트라우마에서 치유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트라우마를 겪는 어린이들의 치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이해하시며 돌보신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어린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어린이들이 트라우마에 대한 두려움으로 미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평안이 있는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야 한다. 어린이들이 트라우마로 인하여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안다면 우리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린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돌보시는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어린이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보며, 그들이 언제나 평안을 누리며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만약 어린이들이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약물 중독과 정신 건강 서비스 관리국의 보고서’(SAMHS)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개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나 경험은 그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에 따라서 다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충격적인 사건의 상황을 온전하게 이해해주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옆에서 끊임없이 도와주는 공동체는 개인에게 치유와 회복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회피하고, 트라우마의 아픔을 간과하는 공동체는 개인에게 치유의 길을 가로막으며, 더 큰 트라우마를 안겨줄 수도 있다. 때로는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큰 트라우마를 안기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트라우마와 정의에 대한 전략, ‘약물 중독과 정신 건강 서비스 관리국’(SAMHS)의 트라우마 이해와 트라우마 중심의 접근법 안내책자, 17).트라우마를 겪는 어린이들을 돌보는 실제적인 방법사실 어린이들마다 각자에게 맞는 다양한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들을 돌보는 부모나 양육자에게 필요한 일반적인, 그러나 실제적인 도움을 제시하려고 한다. 여기서 제시되는 방법들은 충격적인 사건으로부터 벗어나서 어린이들이 이미 안전한 환경에 있을 때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다.▶ 어린이들을 안심시키고, 그들이 지금 안전한 곳에 있음을 확인시켜야 한다. 어린이들이 가정에 있을 때에나, 학교에 있을 때에나 당신이 그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매일 어린이들이 학교에 갈 때 함께 걸어간다든지, 집에 있을 때에도 항상 어린이들 곁에 있어준다든지, 밖에서 놀 때에도 계속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든지, 어린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고 있고, 스쿨 버스에서 내릴 때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린이들이 안정을 되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린이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끊임없이 당신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최선을 다하여서 그들을 돌봐주어야 한다.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안아주기, 함께 시간을 보내기).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 찾아오는 굉장히 낯설고 어려운 감정들을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 어린이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매우 조심스럽게 그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들을 스스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내면에 있는 그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도록 적절한 단어를 제시해주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말하거나, 쓰거나, 놀이나 음악으로 그런 감정들을 표현하게 하는 것도 좋다. 어린이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무시하거나, 어린이들의 고통들을 가볍게 여기면서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 어린이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이다(히 4:14-1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치유, 위로를 구하며 정의를 회복시켜달라고 구해야 한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서 트라우마로 인한 슬픔과 상실이 치유되며, 우리의 기도를 듣고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자신감을 발견할 수 있다. ▶ 어린이들에게 필요하다면 전문적인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전문적인 상담가, 아동 돌봄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정신과 전문의, 치유회복 전문가, 학교 전문 상담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 만약 어린이들이 학대를 받았거나, 학대가 의심된다면 경찰이나 적절한 기관에 신고를 하여서 전문적인 조사를 의뢰할 필요도 있다. ▶ 어린이가 매우 흥분되어 있거나, 강한 분노를 표출할 때에는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맞대어서 분노하지 말고, 도리어 차분한 목소리로 당신이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당신에게 분노한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어린이들은 당신의 반응에 따라서 자포자기할 수도 있고, 다시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당신의 침착한 대응이 어린이들을 트라우마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가능한 때가 되면 다시 일상의 삶을 회복하여야 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고, 학교에 가고, 주말에는 다양한 활동을 하며, 규칙적으로 잠을 자는 일상의 삶을 회복해야 한다. 어린이들과 일관되게 일상의 삶을 지속하며,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그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이 좋다. ▶ 어린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다. 물론 나이와 상황에 맞추어서 결정권을 부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입을 옷을 선택하거나, 먹을 음식을 결정하도록 할 수 있다. ▶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르쳐야 한다. 만약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어린이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이 구원의 확신은 트라우마를 겪는 어린이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구원의 확신은 자신이 트라우마의 피해자로 살아야 할 운명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땅에서는 그들의 상처와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가 언젠가 때가 되면 사라질 것임을 깨닫게 한다. ▶ 때로는 분노를 느끼게 하는 것도 좋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정당하다. 바로 그 하나님의 분노가 필요할 수도 있다. 데이비드 폴리슨(David Powlison)은 이렇게 말하였다. “분노는 악한 것에 대한 정의롭고, 선하고, 적절하고, 아름답고, 공정한 유일한 반응이다. 또한 그 분노는 악의 피해자를 위한 사랑의 반응이다”(“Anger, Part 1: Understanding Anger,” The Journal of Biblical Counseling 14:1 [1995], 40). 하나님의 사람도 당연히 거룩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엡 4:26). 어린이들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였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 대하여 분노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좋다. ▶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그저 긍정적인 생각을 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희망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신실하게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앞으로도 변함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실 것을 알기에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바로 그 부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 당신이 트라우마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어린이를 돌보고 있든지, 아니면 그런 어린이를 돌보는 자를 돕고 있든지,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으로 격려해야 한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올바르게 되돌려 놓으실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통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돌보고, 그들에게 소망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그 어린이들과 함께 인내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이다. 원제: How to Help Children Who’ve Experienced Traum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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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데이비드폴리슨
중년 여성에게 드리는 5가지 권면
by Shelley Madueme
2021-11-15
몇 달 전, 8살 난 아들이 내 머리를 보더니 늙어 보이지 않으려면 염색 좀 해야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지만, 아이들이 창피해하지 않도록 염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였다. 이것도 부모로서 해야 할 일 아니던가?40대에 들어서면서 나는 부쩍 나 자신이 늙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띄게 흰머리도 늘고(나를 보는 사람마다 그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팔자 주름도 선명해졌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이따금 내 눈은 나인지 몰라보게 부어 있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노화의 징후와 싸우든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냥 내버려 두든지 아니면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맞게 나를 돌보는 법을 배우든지 말이다.나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여성은 중년이 되어도 여전히 25살처럼 보여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부담을 느낀다. 흰머리가 보이면 염색을 한다. 얼굴에 주름이라도 눈에 띄면 영양 크림에 기능성 화장품, 보톡스 주사, 시술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체형 변화에는 또 어떤가? 여기에는 사회의 전반적인 산업이 다 뛰어든다.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누군가는 단순한 허영심이 문제라고 단정할지도 모르지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폭넓게 대화할 필요가 있다.중년 여성들이 겪는 폐경 전후 증후군이나 갱년기와 같은 신체적인 변화 외에도, 대부분의 중년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노후, 실존적인 질문 그리고 유산과 같은 문제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몸이 점점 쇠약해지면서 죽음에 대해 더욱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기도 한다(주변에 40대 이상 된 사람에게 잘못된 자세로 잠을 자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물어보라).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변화에 맞춰 몸을 잘 돌볼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주님을 뵐 때까지 우리 자신의 삶을 청지기로서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이다.자, 그럼 어떻게 하면 젊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여성에게 새로운 압박과 압력을 주는 이 시대, 사회적 역할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지금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중년의 삶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간단하게 답을 할 수는 없겠지만, 안정적으로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섯 가지의 권면 사항을 소개하고자 한다.1. 말씀과 교회로 시선을 돌리라중년의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한 특별하고 새로운 기술이나 중재안은 없다. 다만 복음은 여전히 우리 모든 삶의 기초임을 기억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중년 여성에게 말씀과 교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필요하다.중년에 대한 사회상은 과거에 비해 달라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인생의 어느 시기에나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부르신 목적, 즉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마 12:30-21)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된다.어느덧 커버린 자녀와 연로한 부모님을 돌보느라 이리저리 치이는 중년 여성을 배려하여 교회가 실제로 할 수 있는 활동도 있을 것이다. 이들 중에는 정말 심각한 상황에 부닥친 이들도 있기 때문에 교회는 적절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전화 심방을 통해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놓고 함께 기도해 줄 수도 있으며, 중년 여성을 위한 식사 만찬을 준비할 수도 있고,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여성들을 연결해 주어서 자신만 겪는 어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2. 지혜롭게 행하라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노화가 일어나는 우리 몸을 돌보는 것과 노화의 징후들을 감추는 데 급급한 것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둘은 정말 한 끗 차이다.여기서 어떤 것은 괜찮다는 식으로 목록을 만드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들과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붙잡을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 비현실적인 젊음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노화를 겪는 우리 몸을 잘 관리하기 위해 우리가 실제적인 방법을 탐색할 때 어디까지 가능한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왜 그 방법을 사용하려고 하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로 주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전 6:20). 때로는 주위의 신실한 여 성도들을 관찰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준을 자신의 삶에 맞게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3.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감을 찾으라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주 안에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노화의 징후를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의 관심 대상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눈으로는 우리가 점점 가치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힘을 낼 수 있다(골 3:3). 기대와 좌절을 오가며 힘겨워하는 우리의 자매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위의 것을 찾으며(골 3:1-2), 준비된 상을 받기 위해 그들 앞에 놓인 달음질을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고전 9:24).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도록 우리는 이 메시지를 한 번에 그치지 말고 듣고 또 들어야 할 것이다.4. 무엇이 진리인지 기억하라우리 주변의 거짓 이미지는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한다. 그 이미지들은 제공한 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거르고 수정한 것으로 우리 주변 곳곳에 깔려 있다. 소셜미디어는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 교회들의 웹사이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이 항상 실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광고를 목적으로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수정된 어떤 모습을 본래 우리 모습과 비교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잊어버리는 듯하다.5. 관계에 시간을 쏟으라우리는 또한 개인적인 교제가 갖는 중요성을 다시금 주목해야 한다. 가상의 공간이나 먼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도 유익할 수 있지만, 성도가 서로 만나 나누는 교제에는 특별히 통하는 뭔가가 있다. 실생활에서 성도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복음이 실제가 되게 하는 행위이다.우리는 친구가 필요하다. 아무도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찾도록 애정을 담아 우리에게 권면해 줄 수 있는 친구 말이다. 기복이 심한 중년의 시기를 보낼 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격려해 줄 사람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우리의 피부가 매끈하든지 주름이 자글대든지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중년이라는 풍랑이 다 지나가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주님을 신뢰하자(히 12:1-3; 빌 1:6).원제: 5 Encouragements for Women in midlif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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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여성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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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갱년기
노화
소셜미디어
피부가꾸기
Z세대 그리스도인을 좌절시키는 다섯 가지 문제
by Jacob Murrie
2021-11-14
기성 그리스도인 세대가 젊은 Z세대 그리스도인을 잘 훈련시켜서 복음으로 인도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 이는 분명 중요한 주제다. 나도 1997년과 2012년 사이에 태어난 Z세대의 한 사람이지만 몇 가지 언급하려고 한다. 현대 복음주의 문화의 양상을 짚어 보면 그 안에서 젊은 세대를 힘들게 하는 걸림돌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걸림돌을 거론한다고 해서 기성세대의 허물을 들추거나 젊은이들이 더 깨어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격변하는 세상에서 세대와 세대가 서로를 더 잘 보살피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섬길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토론의 밑거름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 취지 아래 젊은 복음주의자들을 좌절시키는 다섯 가지 걸림돌을 제시해 보려 한다. 1. 당파 정치로 신앙을 판단하는 현상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기성세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와 복음주의 신앙의 맞물림 현상에 점차 지쳐 왔다. 그 이유는 우리 젊은 세대가 어른 세대와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과 정치적으로 온전히 연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어른 세대가 우리의 기독교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만 좌측이나 우측으로 기운다 싶으면 우리 신앙이 위험에 빠졌다고 간주한다.기성세대는 사무엘상 8:6-8에서처럼 우리가 왕을 선택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세대의 대부분은 보수나 진보의 성향보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 비춰지기를 더 원한다. 그래서 지난 2020 총선에서 30세 미만 젊은이 35퍼센트가 무소속 투표에 참여했다. 이런 행태는 때로 순진하거나 경험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많은 Z세대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선택이다. 2. 변증론이 관계를 넘어서는 문제분명히 하자. 기독교 변증론은 중요하다. 우리가 왜 믿음을 갖게 되는지 그리고 왜 그런 믿음이 합리적인지를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Z세대들은 기독교 변증론이 불신자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된다고 보고 있다. 나는 세상의 무신론자들과 싸워 물리칠 준비를 하면서 사립 기독 학교를 졸업했다. 세상이 나에게 적대적이며 논쟁을 걸어올 것이라고 가정하며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기독교를 이상하게 여기며 싸움을 걸어오는 아주 부정적인 젊은이보다는 외로움 속에서 깊은 관계를 갖고 싶어하는 청년들을 더 많이 만났다.나에겐 불신 친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변증법은 교우 관계가 만들어진 이후에 더 긴요했다. 가령 ‘만약 하나님이 선하다면 왜 악을 용납하는가?’와 같은 까다로운 질문에 사려 깊은 답변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 ‘God’s Not Dead’의 무신론자 제프리 래디슨 교수 같은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취약한 상황 속에서 상처받거나 호기심 많는 동료들이 그런 식의 질문을 해왔다. 만약 리차드 도킨스가 기독교에 대해 토론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정면으로 맞설 준비를 해야 할까? 물론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은 변할 수 없지만 그러나 어떻게 말할지 어조나 타이밍은 변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이 믿음대로 살지 않는 경우우리는 이런 문제를 2020년 선거에서 실감했다. 인격이든 정책이건 간에, 명확하게 비도덕적이고 비기독교적인 가치를 지닌 두 대통령 후보를 목도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대다수에게 그것은 걸림돌이었다. 그런데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을 외면하거나 지지하는 후보를 옹호하려고 했다. 우리 젊은 세대는 위선에 대해서 지나칠 만큼 민감하다. 우리 주변 어디서나 위선을 목격했다. 우리는 또한 신학적 위선과 선택적으로 적용된 교리에 민감하다. 성경적 성윤리는 동성결혼을 반대하기 위해 인용되지만 이혼이나 혼전동거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교리는 낙태의 문화 시스템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죄가 구조적 형태를 띨 수 있고 전체 사회를 물들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외치고 싶은 구조적 죄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인다. 신실하게 살려는 많은 Z세대들은 비록 정치적 노선과 상충하더라도 삶속에서 성경을 일관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4. 그리스도인이 사랑보다 심판을 더 우선시하는 경향심판과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이다. 은혜와 회개도 다 복음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으로 대하시고 요한복음 8:11에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사랑보다 심판에 가깝다. 물론 우리시대의 문화 속에서 이 둘에 대한 정의는 왜곡되어 왔다. 성경적 계명은 우리의 문화 속에서 심판으로 비춰지지만 실제로는 사랑이다. 죄를 짓는 형제자매와 대면할 때 심판을 떠올리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문제로 귀결되어야한다. 바로 사랑이다. 세속 문화 속에서 왜곡되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사랑의 비전을 품는 것은 실제로는 성경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살아내는 방법이다. 진리와 거룩함을 타협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기독교가 ‘너무 심판적’이라는 비난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다. 성경의 도덕적 요구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런 식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바라기는 철저히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이 우리 믿음의 실상이 되며 불신자들에게서 칭찬을 받는 것이다. 바로 로마제국 시대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5. 그리스도인이 신중하게 사고하지 않는 경향전반적으로 진지하고 비판적인 사고가 쇠퇴하고 지적으로 게으른 행동이 늘어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이 그중 최악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알든 모르든 간에 잘못된 정보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이 싫어하는 전문가의 조언은 곧잘 외면한다. 여러분에게도 아마 소셜 미디어에서 근거 없는 기사나 음모론을 정기적으로 공유하는 그리스도인 이모가 있을 것이다. 사실 확인도 없이 의심스런 정보를 그대로 믿어 버리는 신중하지 못한 그런 이모 말이다. 이런 건 우리를 실망시키는 더 커다란 추세의 부산물 중 하나다. 학술적이고 지적인 삶에 대한 불신을 말한다. 이런 사례가 실망스러운 이유는 학술계가 궁극적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 때문이다(시 19:7). 진리의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지적으로 가장 역동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다. 학자들에게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이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엄격한 학문, 자격, 전문성을 경시하는 탓에 문화창조의 최전선에서 뒷걸음질치고 있다. 그러면서 뒤늦게 따라잡기에 나서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도 한다. 성경이라는 확고한 진리의 토대 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지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사상가이자 문화 주창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배움과 교육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우리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원제: 5 Things that Frustrate Gen Z Christia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순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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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를 신고하고 증언하는 일, 그것은 성경적이다
by Jennifer Greenberg
2021-11-13
믿었던 목사들이 배신을 하고 거짓말을 할 때, 나는 익사하는 느낌이었다. 공황 상태와 슬픔이 섞인 그런 느낌말이다.20대 초반, 내가 다니던 교회 지도자들이 텍사스 주법을 준수했고, 나의 아버지와 다른 아동 학대자들까지도 다 신고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출판사와 공동으로 내가 겪은 일에 관한 책을 편집하면서 우리는 과거에 들은 모든 것에 관해서 팩트 첵크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목사,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인터뷰했고, 그래서 나의 아버지가 성적 학대를 저질렀고 폭력적이었으며, 따라서 결코 아이들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아버지를 한 번도 신고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어머니가 성적 학대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신고하는 대신 모든 증거를 다 깔아뭉갰고, 그 결과 내 동생들로 하여금 말이 아버지지, 그 끔찍한 ‘포식자’와 함께 살도록 내버려 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당시 담임 목사에게 있는 그대로 나의 배신감을 토로했다. 그들이 신고하지 않았기에, 학대가 계속되었고 더 많은 어린이가 피해를 입었다. 피해자 중 일부는 자살 충동을 느꼈고, 또한 일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다른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와 더불어 공개적으로 성적 학대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듣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마침내 미국장로교(PCA) 노회는 조사에 착수했다. 약 15명의 목회자가 아버지에 대한 신고를 게을리하여 텍사스 주법을 실제로 위반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저지른 범죄와 악행을 설명하는, 양탄자 깔개 아래 숨어있던 수십 년 된 이메일이 밖으로 드러났다. 기도에 대한 뒤늦은 응답이라고 해야 할까? 무려 삼십 년 넘게 우리 가족을 공포에 떨게 한 그 남자를 마침내 한 목사가 경찰에 신고했다.그리고 나는 정통장로교회(OPC: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부터 편지를 하나 받았다. 제니퍼에게, 2020년 4월, 귀하에 관한 모임을 열었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근거 없는 공개적인 비난을 중단하라고 당신에게 두 번 이상 경고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니퍼 그린버그, 당신은 제9계명을 반복적으로 범한 죄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바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가 주신 권위로 우리는 당신이 교회의 성례전으로부터 무기한 자격 정지되었음을 선언합니다. … 제니퍼, 당신은 지금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는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가정에서 논쟁의 여지가 되어서는 말이 안 된다 나에 대한 유죄 판결은 다른 장로들에 의해 부정행위로 간주되어 취소되었지만, 오히려 당회는 내게 더 많은 혐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경찰 보고서, 법원 기록 및 열 명의 다른 피해자 증언을 포함하여 내 주장의 모든 세부 사항을 확인하는 증거 목록을 작성한 후에야 나에 대한 모든 혐의가 취하되었다.나는 다른 OPC 교회로 옮겼고, 그곳에서 다정한 상담과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다녔던 교회의 담임 목사는 우리 노회 전체에 나를 거짓말쟁이이자 가짜 성 학대 생존자라고 비난하는 이메일을 퍼뜨렸다.성경에는 악에 대한 정의로운 보고로 가득 차 있는데도, 내 경험은 그렇게 독특한 게 아니다. 성범죄를 당한 많은 생존자가 교회에서 진리를 말할 때, 오히려 반대와 질책에 직면한다. 말씀 속에서 몇 가지 예를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그들의 용기 있는 고백을 단지 가십이나 중상이라고 간주하는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무엇보다 그런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책임감 있게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비가일: ‘내 남편은 사악한 바보이다’사무엘상 25장에는 다윗이 아비가일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아비가일은 나발이라는 “음란하고 비열한” 남자와 결혼했다(3절, NIV). 나발이 다윗을 조롱한 후, 다윗은 나발과 그 집안의 모든 남자를 죽이려고 계획했다(22절).이 장에는 세 가지 사건이 등장한다. 첫째, 다윗의 부하들은 나발이 다윗에 대해 말한 “모든 말을 전했다”(12절, NIV). 다음으로 나발의 신하들은 그 사건을 아비가일에게 보고했다(14절). 마지막으로,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25절).아비가일이 남편에 대해 진실을 말한 것이 잘못된 일일까? 그녀가 한 일이 험담, 중상모략 또는 불순종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로, 성경(하나님)은 그녀를 “총명하다”(3절)고 칭찬한다. 다윗도 그녀의 “지혜”(33절)를 칭찬하고 축복했으며, 결국 그녀와 결혼했다.바울: ‘알렉산더를 조심하라’디모데후서 4장 14-15절을 보자.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고하고 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알렉산더가 바울에게 어떤 해를 입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는 거짓 가르침을 퍼뜨림으로써 복음을 “강하게 반대”했을 것이다. 어쩌면 심지어 바울을 반기독교 또는 반유대주의자로 당국에 신고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바울은 알렉산더를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경험과 현명한 분별력을 바탕으로 그는 디모데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요한: ‘내가 그를 불러내리라’요한삼서 1장 9-10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한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요한은 디오드레베가 특히 “악의적이고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리고”라며 신자들에 대한 교회 징계를 무기로 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한다. 마치 경고 편지를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지, 요한은 직접 방문해서는,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주의를 환기시키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는 기다리지 않았다. 가능한 한 빨리 다른 사람들에게 긴급하게 경고했다.의로운 보고의 여섯 가지 표시아비가일, 바울, 요한은 모두 다 학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강하게 말했다. 결코 학대를 비밀로 하거나 닫힌 문 뒤에서 속삭이지 않았다. 그들은 직접 목격하고 겪었던 학대에 대해 공개적으로 증언했다.그들의 증언 속에는 다음 여섯 가지의 핵심 요소가 들어있다. 1. 신실함그들은 진실이 창피하거나 괴로울 때에도 정직했다. 그것이 교회 브랜드의 손상이나, 학대자의 명성 악화에 관해서 걱정하지 않았다.2. 공적 책임그들의 보고는 비공개가 아니었다. 영적이든 언어적이든 육체적이든 간에 하나님은 학대를 우리가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할 죄로 여기신다. 이것은 디모데전서 5장 20절과 일치한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가 죄에 빠지는 것을 피할 뿐 아니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도록 바른 경고를 받게 된다. 3. 위급성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위험한 사람의 잘못을 입증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까지 사용했다. 사도 요한은 일종의 재판이나 교회 징계를 염두에 둔 것 같지만,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고사하고, 자신이 목격한 것을 증언하기 위해 그 자리에 도착할 때까지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서신서를 통해서 미리 경고했다. 4. 보호아비가일이 나발의 무모함에서 가정을 보호한 것처럼, 바울은 알렉산더로부터 디모데와 교회를 보호했고, 요한은 디오드레베로부터 가이오와 교회를 보호했다. 마찬가지로 학대자 또는 거짓 교사를 만났을 때, 우리는 다른 교인들, 특히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참조, 마 18:10).5. 정의아비가일, 바울, 요한은 복수심이나 교활함 또는 술수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정당하게 정의를 구했다. 나발이 갑자기 죽자 다윗은 기뻐하며 말했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삼상 25:39). 같은 정신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딤후 4:14)라고 말했다. 요한은 디오드레베의 죄를 직접 대면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은 교회 징계를 의미할 수 있으며, 범죄나 신체적 위험이 있는 경우 당국에 신고하는 것일 수 있다.6. 사랑아비가일, 바울, 요한은 사랑으로 말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예수님은 말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에 반해 요한은 학대를 계속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죄를 보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저지르는 바로 그 사람이다(겔 18:20). 우리가 진실을 보고함으로 신자들 사이의 화평과 연합을 증진시킨다. 학대자들은 입으로야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들의 행동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따라서 결코 예수의 이름으로 학대자를 보호할 수 없다. 오히려 열매라고는 찾을 수 없는 그들의 어두움의 행실을 거부하고,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을 빛 가운데에 훤히 드러나게 해야 한다(엡 5:11).원제: Reporting Abuse Shouldn’t Be Controversial. It’s Biblic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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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음,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
by 김형익
2021-11-12
우리는 승리주의적 사고 체계로 기독교와 복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하고 재단하기가 너무 쉽다. 승리주의적 사고에서 그리스도인의 표는 성공하는 것이고 1등이 되는 것이다.하지만 이런 사고 체계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에 부합하지 않으며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는 무엇일까?초기 교회의 아비투스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허용한 313년의 밀라노 칙령 이전까지의 초기 교회는 무엇을 그리스도인의 표로 여겼을까? 앨런 크라이더(Alan Kreider)는 그의 책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에서 끈기 있는 인내(참음)의 발효가 초기 교회 성장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이 참음의 덕은 복음 증거라는 대전제 아래서 전략적으로 행해진 수단이 아니었다. 참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적대적이거나 호의적이지 않았던 세상 앞에 보여준 기독교 고유의 경이로운 삶의 특징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따라 행하고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는 참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적대적 불신 세상 앞에 참음의 덕 즉 ‘아비투스’를 보여주었다.아비투스(habitus)는 라틴어에서 파생한 단어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사회학적 용어로 처음 사용했다. 이 용어는 후천적인 배움을 통해서 무의식 중에 또는 위기의 순간에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행동 양식을 의미한다. 한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아비투스가 형성되면, 아비투스는 바깥 세계에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특징이 된다. 참음의 아비투스는 오늘날 번영신학의 틀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복음의 역설을 보여준다. 초기 교회는 신약성경이 많은 곳에서 참음(인내)을 믿음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마 10:22; 24:13; 막 13:13; 눅 8:15; 21:19; 롬 8:25; 딤후 2:12; 히 10:36; 12:1; 계 13:10; 14:12 등). 신약의 저자들과 함께 초기 기독교는 참음 곧 인내를 믿음의 본질이라고 이해했다. 256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가 쓴 글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말이 아닌 행동의 철학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를 우리의 옷이 아닌 진리를 통해 드러낸다. 우리는 덕을 그것에 대한 (말의) 자랑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알아본다. 우리는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살아낸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과 예배자로서 영적 경의를 지니고 우리가 하늘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인내를 보여 주자. 그 덕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공통점을 갖는다.” 실제로, 참음의 아비투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말 보다, 삶과 삶의 방식으로써 기독교와 복음을 세상 앞에 보여주는 표가 되었다.고대 로마 사회가 대개 참음에 대해 싫어도 참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는 하층민들이나 희생자들의 태도라고 인식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초기 기독교가 참음을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로 여겼다는 점은 마케팅의 실패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참음의 아비투스는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게다가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배우는 것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세례를 주기 전까지 그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가 형성되었는지를 시험한 뒤에야 비로소 세례를 베풀었다. 아비투스의 교육에는 믿음으로 인해 순교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세례를 받기까지는 적어도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참음의 아비투스를 배움으로써 시작되었다. 참음은 초기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아비투스였다. 바울이 말하는 사도됨의 아비투스바울은 1년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들여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행 18:1-12). 하지만 슬프게도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거짓 교사들이 들이닥쳤고 고린도 사람들은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거짓 교사들과 달리, 바울은 여전히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고생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바울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참 사도라면 저렇게 고생하며 살 수 있겠는가?” 바울은 자신이 거짓 교사들에 비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말함으로써, 자기가 보기와는 달리 매우 훌륭한 사람의 외적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전한 복음의 참됨을 입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나는 너희가 보는 대로, 여전히 가는 곳마다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너희가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은 내가 전한 복음은 유일한 진짜 복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모든 참음’으로 이 고난의 삶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참 사도임을 증명하는 표적이다.”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참음’을 말했다는 것은 참을성이 없는 현대인들에게는 의아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이 구절에서 ‘모든 참음’이 사도의 표적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모든 참음’의 태도로 사도의 표적들을 행했다는 뜻인지는 논란이 있다. 나는 ‘모든 참음’이 바울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사도됨의 표적이었다는 칼빈의 해석에 동의한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 행함이야 누구나 당연하게 예상하고 동의할 수 있는 사도의 외적 표적들일 수 있었기에, 사도는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외적 표적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기서 그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사도의 표적은 ‘모든 참음’이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이 주는 모욕을 견뎠다. 그는 또 사방으로 욱여쌈과 답답한 일, 박해, 거꾸러뜨림을 참았다(고후 4:8-9).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4-10절)과 11장(23-29절)에서 자신이 참고 견뎌야 했던 일들의 목록을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연민의 함정에 빠졌다는 증거가 아니다. 도리어 복음의 역설을 통해 복음을 입증하려고 하는 바울의 방식을 보여준다. 바울은 단지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영적 자녀들이 복음의 본질을 알고 그 본질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참음’을 사도의 표라고 말한 것이다. 1세기 고린도교회에 가만히 들어왔던 거짓 교사들은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었다(고후 5:12). 고린도 사람들에게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외적 조건들은 그들이 전하는 가르침이 참된 복음이라고 믿게 하는 설득력 있는 조건들이 되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메시지)의 영광스러운 본질은 역설적이게도 복음을 담지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의 별 볼일 없음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려는 사도의 아비투스는 모든 참음이었던 것이다.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아비투스우리는 참을성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유튜브를 1.5배속 또는 2배속으로 돌려보는 시대이다.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근대선교역사만 보더라도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나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같은 선교사들이 한 사람의 영혼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리지 않는다. 원하기만 하면 초고속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대를 경험하고 살아간다. 목사들은 경쟁 사회에서 더 빠른 속도로 성장의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1970년대 교회성장의 물결을 타고 메가처치들이 등장하며 수많은 교회들이 교회성장이라는 지상 목표를 내세우면서, 한국 기독교에서 참음의 아비투스는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아비투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그리스도인됨을 바깥 세상에게 경이롭게 보여주고 있는가? 성공과 1등이 됨으로써 그리스도인됨을 증명하려는 유아적 승리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가 잃어버린 기독교의 아비투스인 참음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참음’을 통해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초기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인 참음, 즉 인내의 발효가 초기 기독교의 성장 동력이었다는 앨런 크라이더의 말을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적성장
아비투스
참음
초기교회
번영신학
거짓교사
교회성장
인내의발효
앨런크라이더
칼 트루먼과 복음적 지성
by Thomas Kidd
2021-11-11
칼 트루먼(Carl Trueman)은 우리 시대 가장 흥미로운 기독교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로브시티 칼리지(Grove City College)의 교수이자, 그 탁월한 ‘현대적 자아의 부상과 승리: 문화적 기억상실과 표현적 개인주의(The Rise and Triumph of the Modern Self: Cultural , Expressive Individualism)’와 ‘성 혁명으로 가는 길(Road to Sexual Revolution)’을 포함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한 저자이기도 하다. 트루먼은 현재 미국에서 소용돌이치는 양 극단, 탈진실 수용주의(woke accommodationism)와 미친 트럼프주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전통주의 기독교인을 위한 제3의 길을 제안한다. 그가 주창하는 세 번째 방법을 “신실한 현실주의(faithful realism)”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신학적이고 문화적 헌신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정통의 길을 따라야 하겠지만, 예의를 갖추고(civil)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를 지켜보는 세속 세계가 정통적 가치관에 헌신하는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퍼스트 씽즈(First Things, 역자주: 미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보수주의 지향의 종교 저널)에 게재한 “복음주의 엘리트의 실패”라는 제목의 긴 형식의 글을 통해서 트루먼은 이 세 번째 방법을 설명했다. 그 글에는 논의할 게 한두 가지 담긴 게 아니지만, 여기서는 가장 관련성이 높은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겠다. 바로 역사학자 마크 놀(Mark Noll)과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 내가 노터데임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 나의 고문이었다)의 업적과 유산에 대해서 트루먼이 논의한 부분이다. 1990년대 중반, 정통 기독교인의 지적이고 학문적인 온전함을 회복하고 수호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이 운동에서 지도자 역할을 감당한 역사학자 마크 놀과 조지 마즈던은 기독교 정신에 대한 용감한 사례를 만들었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에서 놀은 미국 복음주의가 지적 신뢰성이 결여된, 그래서 도무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입장에만 집착함으로 심각한 장애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복음주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지성인의 경멸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지적 표준의 결여(lack)는 교회를 다니는 지성인들마저 힘들게 만들었다. 놀이 그 책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세대주의와 문자적 육 일 간의 천지창조였는데, 이런 사실에 집착하는 것은 이성의 차원(canons of reason)에서 방어가 불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실상 엄격한 정통 기독교 신앙에도 필요하지 않다는 게 놀의 주장이었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은 지나친 근본주의를 지양하는 동시에 정통 기독교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함으로 기독교 설파를 목적으로 삼은, 대표적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천 투데이(Christian Today)가 꼽은 베스트셀러이자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독교 학문의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부르던 구절을 그대로 제목으로 붙여서 발표한 한 연구 논문을 통해서 마즈던이 등장했다. 그의 주장이 바탕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미국 내 가장 중요한 고등 교육 기관의 대다수가 설립 기원을 기독교에 두고 있다는 것인데, 이 점은 사실 그가 이미 과거에 발표했던 연구이기도 하다. 마즈던이 내린 결론에 따르면, 교양을 갖춘 기독교 경멸자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다름 아니라 신앙이 지성적인 삶을 살 수 없도록 만든다고 그들이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러 건설적인 사례를 통해서 마즈던은 기독교 학자가 자신의 믿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학문적 담론의 규범을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사려 깊고 정직한 학문적 동참까지도 배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와 달리, 놀과 마즈던은 정통 기독교 신앙의 전인격적(full-blooded) 확증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슐라이어마허의 주장과 달리, 나는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적 표준이 애초에 비판 자체를 넘어선 영역으로 간주되지만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죽음과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은 결코 지적 엄격함을 훼손하지도 않을뿐더러 학문적 표준과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1990년대 당시 놀과 마즈던의 주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까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건, 당시 대학 교육을 받은 복음주의자들이 하나 같이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켜 줄 무언가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다녔던 대학은 하나 같이 지성과 동떨어진 신앙이야말로 가치 없는 것(disqualifying)이라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놀과 마즈던은 전혀 상반되는 주장을 한 것이다. 신앙인에게도 얼마든지 자기비판이 가능할 뿐 아니라, 또한 지지할 수 없는 신념도 버릴 수 있기에, 신앙을 가지고도 현대의 지적 생활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마즈던과 놀의 주장이 있은 지 채 삼십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이 마치 고대의 이야기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는다. 철저한 정직함과 성실함만 갖추면 학문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대학 및 주요 기관에서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지금 돌이켜서 보면 순진한 생각이다. 오늘날 고등 교육은 대체로 탈진실한(woke) 이들의 영역이다. 아무리 뛰어난 생화학자이거나 또는 미노스(Minoan) 문명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인종과 섹슈얼리티 또는 심지어 성별에 대한 문화적 정통에서 벗어났는가 아닌가가 학문적 능력과 세심한 연구 같은 고려 사항보다 고용 및 재임 과정에서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대학에서 마즈던의 “기독교 학문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르치는 중에 트루먼은 오늘날 엘리트 학계와 기업 문화의 편협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그의 주장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다소 비현실적인 것으로 학생들이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분명히 트루먼에게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놀과 마즈던의 주장이 점점 더 과거 세대의 고리타분한 소리로 들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 더불어 나에게는 여전히 예리함과 역사적 방법의 황금 표준인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역사에 관한 그들의 서술도 (비극적이지만) 이제는 약간 구식처럼 보인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그들의 작품은 비판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복음주의자들에게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난 십 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복음주의 역사는 활동가 중심으로, 도리어 반복음주의적 방식으로 쓰였다. 그 결과 일부 기독교 역사가들 사이에서조차 혐오는 이제 미국 복음주의자에 대한 연구에서 공감이라는 단어를 대체했다. 마즈던은 또한 트루먼이 잘 설명하지 못하는 방식으로(그럼에도 그것만으로 이미 아주 길다), 현대 아카데미에 관해 비판적이다. ‘터무니없는 생각’과 ‘미국 대학의 영혼(Soul of the American University)’에서 마즈던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양성에 대한 노골적인 맹신(commitment)에 관해서 현대 세속 아카데미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문화적 관점의 소산임을 인정하고, 보다 더 다양한 관점과 경험의 포함이야말로 활기찬 학문의 특징이라면, 왜 학계는 솔직한 기독교인을 배제하는지, 마즈던은 질문한다. 기독교인(또는 유대인과 같은 다른 전통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왜 학문의 테이블에 같이 앉으면 안 되는가? 마즈던은 이미 1990년대에 학문적 “다양성”이 결코 이데올로기까지 포용할 정도로 다양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짧은 순간 동안,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에 대한 마즈던의 요구는 엘리트 학계에서조차 더 많은 기독교적 관점을 위한 기회를 만들어낼 것처럼 보였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에 관한 비평적이면서 감탄을 자아내는 전기로 미국의 학술 역사가에게 수여되는 가장 권위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가 주관하는 미국사 부문 밴크로프트 상(Bancroft Prize)을 수상했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기독교 역사가가 쓴 기독교 인물에 관한 책으로 그런 상을 받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더욱이 2000년대 초반에는 베일러(Baylor)대학에서 만든 “2012 비전”이 시작되었다. 이 비전에서 베일러대학은 적어도 매우 광범위한 종류의 기독교 정통에 대한 분명한 헌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연구에 집중하는 대학이 되겠다는 비전을 밝히고 있다. 그 비전이 초래한 운명(fate)은 또 다른 이야기꺼리가 될 수 있겠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된 리더십 변화와 풋볼 팀에서 일어난 끔찍한 성폭행 스캔들은 비전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전반적 신뢰는 고사하고, 특히나 기독교의 명확성에 대한 헌신을 추구하는 데에 베일러대학이 제도적으로 초점을 맞추겠다는 주장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트루먼은 학계에서 엘리트를 제대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타협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성경 연구, 윤리학, 심리학, 사회사업 등의 분야 전반에 걸쳐 다양한 사례를 통해 얼마든지 뒷받침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전통주의 기독교인과 엘리트 학계가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 트루먼이 제안한 것처럼 흑백 논리로 설명된다고는 확신하지 못한다. (이건 내가 마즈던의 제자이기에 갖는 약간의 의구심일 수도 있다.) 아무튼 트루먼은 일반적인 세속적 학문적 지표에서조차 좋은 점수를 받는 뛰어난 기독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를 포함한 엘리트 학술 매체에서 책을 출판했다. 따라서 기독교 학자로서의 그의 부인할 수 없는 신뢰성은 이러한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학계를 신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학적 또는 문화적 문제 때문에 교수직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믿기지 않을 것이다. (끔찍한 취업 시장이 사실은 훨씬 더 어려운 진짜 문제일 것이다.) 더욱이 트루먼, 나, 놀, 마즈던 그리고 다른 많은 학자들은 우리의 작업이 정상적인 학문적 기준을 충족하기 때문에 대학 언론에서조차 우리의 작업을 종교사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출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대학 출판사에서 출간을 하려면 최소한 충족해야 할 학문적 기준이 있다는 건 상식이다. 물론 나도 잠재적 고용주뿐 아니라 언론 및 저널의 익명 독자로부터 미묘하면서도 공공연한 형태의 반기독교적 편협함을 접하곤 했지만, 분야를 막론하고 자신의 신앙이 학문적 성공을 가로막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트루먼이 지적했듯이, 진짜 문제는 당신이 지배적인 세속 학계를 혐오스러운 그 무엇으로 간주하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현할 때 발생한다. 이것은 단지 전통주의 기독교인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시카고 대학의 지구 물리학자인 도리언 애벗(Dorian Abbot)은 최근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이라는 현행 학문적 규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MIT 초청 강연이 취소되었다. 보장된 임기(tenure) 때문에 해고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대학은 여전히 주류 이념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할 수 있다.이제 막 학계에 발을 들인 예비 학자들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문제에 대해 발언할 필요가 없거나, 또는 있다고 해도 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신의 연구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경우라면, 상황이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텍사스 대학교의 사회학자인 가톨릭 신자 마크 레그너러스(Mark Regnerus)는 2012년 감히 동성 부모가 키운 자녀의 번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연구를 출간했다는 사실 때문에 대대적인 괴롭힘과 수치심에 이어 조사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장된 임기가 있었기에 그런 폭풍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이 1994년에 옥스포드 대학 출판사를 통해서 발표한 ‘루터의 유산: 구원과 영국의 개혁자(Luther’s Legacy: Salvation and English Reformers, 1525-1556)처럼 신앙이나 개인의 신념이 굳이 문화 전쟁을 촉발할 필요가 없는 많은 분야와 주제가 있다. 다양한 고백적 관점에서 종교사에 대해 글을 쓰고 옥스포드나 예일(마즈던이 조나단 에드워드 전기를 출판한 곳)과 같은 최고의 세속 언론을 통해서 출구를 찾은 기독교인의 예는 다양하게 인용할 수 있다. 언론과 저널이 학계 및 언론의 이익에 반하는 견해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예를 들어, 도리언 애벗)의 출판 작업을 중단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경우에 따라 비록 미묘하지만 이미 그런 경우가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전통주의자뿐 아니라 세속화된 사회가 결코 좋아하지 않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글이 가능한 한 세속 언론을 통해 계속해서 출판되어야 한다. 많은 기독교 학자가 특히 기독교 출판과 계속해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은 필수이다. 트루먼의 ‘현대적 자아의 부상과 승리’를 출판할 세속 언론은 거의 없다(크로스웨이와 같은 일부 기독교 언론은 여전히 그런 책을 출판할 것이다. 너무도 감사하다!).기독교 학자 중 일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속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출판함으로써 세속 엘리트 학계에서 계속해서 자리를 유지할 것이다. 가능한 한 그런 방식을 취하는 데에는 길고도 독특한 기독교 전통이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그리고 C. S. 루이스(C. S. Lewis)와 같은 기독교 지식인 지도자는 당시 엘리트 학계에서조차 독특한 기독교적 목소리를 유지했다. 물론 당시가 지금과 비교하면 훨씬 더 기독교적 사회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본격적인 기독교적 지성의 증거는 신학적이고 문화적 타협을 하지 않는 한, 최대한 세속 학계를 통해서 일하는 기독교 학자들의 역할을 유지하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탈기독교 서구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와 관용의 원칙에 대하여 우리 문화가 표면적으로 표현하는 헌신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학문과 문화의 구석구석에까지 기독교적 지성을 증거하는 문이 계속 열려 있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왕국을 건설하는 데 우리의 학문적 기여는 거의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마스 힐에서 있었던 바울의 증언에서부터 오늘날까지, 학계라는 숲속에서는 복음의 진리를 옹호하는 기독교인의 목소리가 항상 있어왔다. 할 수 있는 한, 우리 세대에서도 그 증인의 역할을 계속해서 이어가도록 하자. 원제: Carl Trueman and the Evangelical Mi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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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갈등, 과연 해결이 가능할까?
by Jon Bloom
2021-11-10
이십 대의 기독교 여성으로 이루어진 어느 작은 그룹의 예는 지금 내가 냉소주의와 관련해서 느끼는 많은 유혹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미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어마어마한 양의 정치적이고, 이념적이며, 문화적인 신랄한 비판, 리더십의 실패, 교회의 분열, 민족적 긴장, 그리고 관계의 붕괴를 보면서 크게 낙담했다. 그게 다 그냥 미디어 알고리즘과 무책임한 기독교인의 클릭 유도로 생긴 거라고, 그렇기에 다 과장된 거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그런 분열의 현장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사람이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서 기독교적 분열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내가 사랑하는 세 교회는 모두 지난 몇 년 동안 하나같이 파괴적인 내부 갈등을 겪었다. 신학적으로는 아무런 이견이 없을 뿐 더러 여러 해 동안 함께 예배해 온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서로에 대해 인내하지 않는다. 수년에 걸쳐 만들어진 관계가 순식간에 깨진다.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는 결코 예전처럼 관계를 회복할 수 없게 만드는, 불신의 흉터 자국을 남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엄청 많은 일이 벌어지는 건 분명하다. 아주 복잡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문제 꺼리에다 리더십과 영적 전쟁과 관련한 각종 이슈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분열이라는 전염병에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결코 이런 현상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실제 발생하는 현실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그러나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분석과 토론을 하는 중에 아이러니하게도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거나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저히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기독교의 하나됨(harmony)을 키우거나 또는 반대로 파괴적인 기독교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큰 인과 요인은, 신약 성경이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언급하는, 바로 사랑이다. 극단적일 정도로 단순한, 주님의 해결책사랑이라는, 내 말을 웃어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복잡한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있을 때 항상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다 해결됩니다!” 그리고 그런 외침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종류의 진술은 너무 순진하고 단순한 이상주의로 들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문제를 서로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을 때, 간단한 해결책이 없을 때, 그래서 깊어진 갈등과 긴장 가운데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서로를 참고 견디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느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고, 그게 어떤 모습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약의 사랑은 결코 환원주의처럼 단순하지 않다. 물론 근본적이라는 면에서는 단순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내 몸 같은 이웃비틀즈의 노래 제목인 “All you need is love”는 순진하고 단순한 이상주의이다. 누구나 다 사랑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진술은 개념적으로 공허하고 또 일관성도 없다.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천할 때 어떤 모습인지, 비용이 얼마인지, 아무런 언급이 없다. 결과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둘러싼 갈등 해소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문장이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틀즈의 이 가사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라는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과 한번 비교해보라. 차이가 보이는가? 예수님의 명령은 근본적으로 단순하지만, 사실 전혀 단순하지 않다. 이 명령을 접한 모든 사람이 기본 원칙을 즉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단순하다. 사랑은 우리의 가장 핵심 가치여야 하며, 다른 사람과 관련하여 우리의 모든 동기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우리가 갖는 모든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방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기서 파생하는 적용은 끝이 없다.“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기능적으로 강력하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도 사랑의 모습과 그 대가에 대해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관계와 상황 그리고 문제의 복잡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진지하게 추구할 수만 있다면, 지금 미국 복음주의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아예 들불로 번지게 만드는 죄의 불꽃을 끄는 데에 효과적일 수 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그리고 신약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례와 설명)이 가진 능력은 지난 이 천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에 의해 실현되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자, 내가 처음에 언급한 이십 대 여성의 작은 그룹 이야기로 돌아가자. 내게 그들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모습이다. 사랑을 거리로 들고나가기나는 이 젊은 여성들 대부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통해서 그들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거리 어린이가 겪고 있는 곤경에 대해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몇 년 전, 약간의 경험을 쌓고 검소하게 생활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재정적 지원만 받은 그들은 남미의 도시로 이사하여 거리에서 만나는 어린이와 청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학대, 유기, 심각한 빈곤, 중독 또는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부양해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움막과 다리 아래에서 그리고 건물 출입구에서 잠을 자는 그들은 음식을 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아이들이었다. 거리는 그렇게 취약한 아이들에게 잔인하고 무자비한 곳이다. 그들 중 많은 이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부드러운 마음은 굳어지고 불신감으로 차게 된다. 위험과 절망은 타락을 더 악화시킨다. 그러나 이 여성들은 그런 아이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물론 그 사랑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가 이 점을 강조하길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그들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의사에게 데려가고, 화학 물질 중독을 앓는 많은 이들을 치료 센터로 데리고 왔다. 또한 출산과 그 너머의 두려운 여정을 앞에 둔 임신한 어린 소녀들과 함께 길을 걸었다. 공원에서 아이들과 우노를 연주하고 케이크와 파티로 생일을 축하했다. 이런 경험은 아이들 중 상당수가 접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경우에, 예수님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좋은 교회를 연결시켜 주었다. 그 결과,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기에’끈질기고, 확고하며, 또한 신실하고, 희생적인 예수님의 사랑으로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거리의 아이들을 사랑한 여성들은 이제 그들의 신뢰를 얻었고, 이제 이 수백 명의 거리 아이들이 이들에게 사랑을 되돌려주고 있다. 아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 여성들을 돌보고 있다. 그리고 물론 거리에서 이런 소문이 빠르게 퍼지면서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이 여성들을 찾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박한 사역 센터를 제공하셨다. 정부 관리들 또한 그들의 사역을 그토록 효과적으로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들을 찾고 있다. 정부 센터에도 다양한 자원과 프로그램이 있는데, 왜 거리 아이들이 굳이 이 여성들에게 가는지 정부 관리들은 알고 싶어한다. 아이들의 대답은 이것이다. “이 아줌마들은 우리를 사랑하거든요.”이 여성들은 결코 인정받는 전문가가 아니며 오랜 경험이나 풍부한 자원 또는 박사 과정 프로그램을 이수하지도 않았다. 공식적인 신학 훈련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아이들을 더 희망적이고 생산적인 미래로 전환하는 데 매우 효과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왕국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변화된 삶에서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많은 제자를 삼고 있다. 게다가 매우 소홀하게 취급받고 역사적으로도 접근하기 어려운 그룹에서 말이다. 왜냐고?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이유를 알려줄 것이다. “아줌마들은 우리를 사랑한다니까요.”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들에게는 소중한 영혼이다. 사랑의 희생을 살아내기 그렇다면 지금 이 여성들은 오늘날 미국에서 유행하는 기독교 분열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답은 이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적 사랑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한 예이다. 그러나 그들을 지금 우리가 겪는 상황과 비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게 아닌가? 상황적으로는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여성들의 이야기에 대한 나의 보고서는 간결하기 때문에 실제보다 더 이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물론 현실은 어렵다. 때로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살아야 하고, 말 그대로 피땀 흘리며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저분하다. 등을 돌리거나 사라지는 아이들이 왜 없겠는가? 아이들은 여전히 중독에 빠지고 강간당한다. 그리고 죽는 아이들도 생긴다. 게다가 이 여성들도 실수를 저지른다. 그래서 오해를 받고 때로는 욕을 먹으며 종종 신체적인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또 외로움과 혼란 그리고 슬픔과 향수병에 시달린다. 행여 지금 제대로 사역하는 게 아니라는 불확실성에 고통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런 모든 상황에 관계없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진지하고 의도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힘들 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우리도 이 여성들과 똑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산 제사”(롬 12:1)가 된다는 의미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에서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혁적(transformational)이다. 분열과 갈등이 차고 넘치는, 이 복잡한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것은 과연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우리가 진지하게 순종하고 있는지 여부이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원한과 분열 그리고 관계의 붕괴는 로마서 12-15장, 고린도전서 13장, 에베소서 4장 또는 요한일서 3장처럼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서 거리에서 만나는 부상당한 이웃에 대한 문맥상 동등함에도 우리가 지금 의미 있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사랑에 따르는 댓가는 결코 적지 않다. 사랑의 결핍은 관계의 파국을 만들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까지 왜곡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그리고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이웃 사랑”의 기준을 세우셨다. 때때로 쓰레기가 날아가고 불화의 소리가 요란할 때, 어려운 상황에서조차 예수님처럼 단순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들을 통해 나 자신에 관한 새로운 관점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기억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냉소주의에 대한 축복받은 해독제가 될 수 있다. 그 해독제가 지금 내게는 바로 이 놀라운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다. 그들이 고통받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 나는 그들로부터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원제: Can Anything Mend Our Conflict?: How Cynicism Dies in a Divided Church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교회
교회사역
교회분열
이웃사랑
분열의치료제
서로사랑하라
좋은교회
희생
냉소주의
영혼 안에 숨은 분노를 조심하라
by Joe Rigney
2021-11-09
훌륭한 책은 다시 읽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새로운 교훈을 주기 마련이다. 책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책이 주는 의미는 그대로이지만,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한다(적어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성장할 때,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진리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우리에게는 게다가 읽고 또 읽는 책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광범위하고 풍부한 프레임워크(기준)인 성경이 있다. 이것은 어린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어린이 책의 경우, 예를 들어, 나니아에 대한 나의 애정은 전혀 비밀이 아니다. 나는 나니아 시리즈를 수십 번 읽었다. 가장 최근에 읽었을 때에는, 옷장 여행을 통해서 그 시리즈의 마지막 책에 담긴 중요한 주제가 나를 새롭게 밝혀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주제와 관련해서 성경을 읽었고, 마침내 모든 주제가 명확하게 내게 이해되었다. 그 주제는 마지막 전투에 관한 초반부 장에서 드러나는 열정에 관한 것이다. 열정은 충동적이고 거의 본능적인 영혼의 움직임이다. 좋은 것이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두려움, 불안, 욕망, 연민,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즉각적인 반응이다. 마지막 전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런 열정이다. 화를 낼 충분한 상황이었기에 분노가 그 자체로 정당화된다 하더라도, 억제되지 않고 마구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억제할 방법이 있을까?왕의 성급함두 번째 장은 아슬란이 나니아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티리안 왕과 그의 절친한 친구 쥬얼 유니콘이 몽롱해지는 상태로 시작한다. 아슬란의 도착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소식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곧 아슬란의 도착 소식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룬윗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거짓말!” 왕이 거칠게 말했다. “나니아 또는 전 세계의 어떤 생명체가 감히 그런 문제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왕의 반응이 보여주는 강도에 유의하자. 더 중요한 것은 그 반응이 그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주목하는 것이다. 그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칼을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충동적인 열정은 그의 마음과는 별개로 어떤 반응을 하도록 유도했다. 잠시 후 숲에서 나타난 드라이어드가 파괴된 나무에 대한 정의를 외쳤을 때에도 우리는 똑같은 경솔함을 본다. 그말을 들은 티리안은 벌떡 일어나 검을 뽑는다. 주변에 아무런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티리안의 검은 이미 뽑혀졌다. 그가 열정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일으킨다드라이어드가 죽은 채 땅에 쓰러지자 티리안은 슬픔과 분노로 말문이 막힌다. 곧 이어 그는 쥬얼과 룬윗을 불러 이 살인을 저지른 악당들을 죽이기 위한 여정에 즉시 합류한다. 그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떠나야 한다. 쥬얼은 동의하지만 룬윗은 주의한다. “왕이여, 당신의 의로운 진노에 주의하십시오” 룬윗은 화가 났을 때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다. “바보가 되지 말라. 군대를 모으고 적의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기다리자.”그러나 티리안은 “10분의 1초도 기다리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그의 분노에는 이미 불이 붙었고, 그를 조종하는 주인은 이제 분노이다. 티리안은 혼자 중얼거리며 주먹을 꽉 쥐고 쥬얼과 함께 출발한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강을 건널 때 물의 차가움도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분노는 그의 목을 조르고 놓지 않을 것이다.나무 벌목을 지시한 사람이 아슬란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티리안과 쥬얼은 위험을 향해 달려간다. 해설자 코멘트가 따라온다. 쥬얼은 단지 두 사람이 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순간 깨닫지 못했다. 그건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너무 화가 나서 명확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경솔함은 결국 많은 재앙을 불러왔다.이것이 문제이다. 너무 화가 나서 그들은 명확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불의에 대한 분노가 아무리 의롭더라도 경솔한 분노는 어리석음에 이르게 한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충동적으로 반응했고, 그 결과는 큰 악과 해를 입는 것이다. 무엇이 분노를 막을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악의 일부가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다. 말하는 말이 칼로멘 병사들에게 구타와 채찍질 당하는 것을 본 두 사람의 분노가 극에 달한다. 그 말이 나니아인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 티리안과 주얼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분노했다. 왕의 검이 올라가고 유니콘의 뿔이 아래를 향했다. 그들은 함께 앞으로 돌진했다. 다음 순간, 칼로멘 병사 둘은 다 죽어서 쓰러졌는데, 하나는 티리안의 칼에 베였고 다른 하나는 쥬얼의 뿔에 심장이 찔렸다. 반복해서 우리는 이 장의 주제를 보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칼을 쥔 손, 너무 화가 나서 명료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 너무 화가 나서 상대를 죽이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의 상황이다. 왕의 무자비한 경솔함은 큰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나는 티리안의 경솔함을 성경 속 이야기와 함께 엮어서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억제되지 않은 성급한 분노가 큰 어리석음과 악과 유혈로 이어진다면 무엇이 과연 그러한 열정을 억제할 수 있냐고 말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의 성급함다윗의 삶에 관한 성경 이야기는 친숙하다. 다윗이 광야로 쫓겨난 이유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 왕과 멀어졌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울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서 사울의 추격에서 일종의 유예를 얻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죽었고 바란 광야에 있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물자가 떨어져가고 있었다. 다윗은 근처에 사는 부자 나발에게 사자를 보낸다. 나발은 잔치를 준비하고 있고, 다윗은 호의와 물자를 요청한다. 이 요청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나발의 목자들 근처에 진을 쳤다. 그들은 그의 양 떼를 약탈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다른 약탈자로부터 그 양떼를 보호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밤낮으로 나발의 양 떼를 지키는 성벽이었다(삼상 25:16). 도적도, 또 짐승도 양 떼를 해치지 않았다. 이런 식의 보호와 더불어, 다윗은 자신이 나발의 아들이자 종이라며 겸손하게 요청한다(삼상 25:8).그런데 나발은 조롱과 모욕으로 반응한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삼상 25:10-11). 즉,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윗아, 너는 무익한 무법자요 왕을 거역하는 자니라. 그리고 나는 내 빵과 물과 고기를 그런 자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그런 모욕을 들은 다윗은 나니아의 마지막 왕처럼 반응한다. “각기 칼을 차매!"(사무엘상 25:13). 분노한 그와 그의 부하들은 즉시 모욕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들의 의도는 분명하다. 나발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삼상 25:22). 티리안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우리는 분노의 충동적인 열정, 곧 엄청난 유혈과 유혈죄로 이어질 분노를 목격한다. 하지만 티리안과 달리 여기에는 점검의 과정이 있었다.어떻게 분노에 호소할 것인가그 점검은 다름 아니라 나발의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아내인 아비가일로부터 왔다. 나발의 모욕과 더불어 조만간 그들의 집에 재앙이 닥친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즉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위해 풍성한 음식과 포도주를 준비한다. 그녀는 예물을 가지고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은혜를 간구한다. 그녀는 책임을 진다. 남편의 어리석음을 증언한다. 그리고 다윗에게 선물을 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두 가지 근본적인 호소를 한다는 점이다. 첫째, 그녀는 다윗에게 무죄한 자의 피 흘림과 자기 손으로 구원하는 일을 삼가라고 촉구한다(삼상 25:26).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이 앞으로 자신의 손으로 유혈죄를 짓거나 자신을 구원하려고 할 때 만날 슬픔과 양심의 고통을 피할 것이라고 한다(삼상 25:31). 둘째, 그녀는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그를 위해 싸우실 것이며, 다윗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삼상 25:29)라며 다윗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호소는 왕의 경솔함에 제재를 가한다. 적절한 점검은 분노뿐 아니라 분노로 인한 복수까지도 막는다. 충동적인 분노가 주는 열정마저도 길들일 수 있게 한다. 다윗은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삼상 25:34) 아비가일의 분별력과 용기를 축복한다. 그리고 그녀를 자기에게 보내셔서 다윗의 손이 아비가일과 그 남편의 집에 해를 끼치는 큰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은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확실한 응답이다.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삼상 25:39). 다윗은 악을 행하는 일에서 스스로를 보호했을 뿐 아니라,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아내까지도 덤으로 얻었다.분노에 대응하는 무기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화를 다스리는 데 아비가일과 같은 지혜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영혼의 온도가 급작하게 올라가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잠시 멈추고 나 자신뿐 아니라 서로를 상기시켜야 한다. 첫째, 불경건한 분노는 우리의 부상에 죄악을 더할 뿐이며, 둘째, 주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9).이 두 이야기 중 하나는 허구이고 하나는 성경 속 역사이다. 그러나 두 이야기 다 같은 경고를 보낸다. 육체의 정욕을 조심하라. 그들은 종종 당신의 영혼을 대적하여 전쟁을 한다(벧전 2:11).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엡 4:26). 성내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약 1:20). 대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라(벧전 4:19). 당신을 대신해서 싸우고 당신의 이름을 지키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렇다고 이런 태도가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건 아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서 물매돌을 들었을 때, 여호와는 다윗과 함께 싸웠다. 반면 나발과 관련한 구원 이야기는 다윗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행동할 때, 우리는 결코 반응적이거나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반대로 의도적이고 사려 깊게 행동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주님의 보살핌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고, 동시에 항상 진정한 아슬란의 강력한 두 발이 우리를 지키고 있다고 믿는다.원제: Beware the Anger of Your Soul: How to Restrain Ungodly Passio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생활
감정
분노
분노조절장애
나니아연대기
아슬란
아비가일
경솔함
분별력
그는 선한 목자와 잘 알고 지냈다
by Ligon Duncan
2021-11-08
‘양은 기억한다’(A Sheep Remembers)는 진실한 그리스도의 양으로 살았던 한 목사의 마지막 책이다. 이 책은 깊이 있는 성경적 주해와, 신학적인 분석 위에, 삶의 경험과 영성이 배어 있는 시편 23편의 묵상집이다. 또한 이 책은 한 평생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며 살다가, 지금은 선한 목자가 계신 본향으로 돌아간 경건한 목사이자, 신학자의 신실한 고백이다. 데이비드 칼훈은 우리 시대 위대한 교회사학자이자, 목회자이며, 선교사였다. 사실 그는 삶의 업적에 비하여서 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칼훈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깊이 사랑하였고, 그에게 감사하였다. 그는 탁월하였지만 겸손하였고, 경건하면서도 신실하였으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진실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였다. 양은 기억한다(A Sheep Remembers)David B. Calhoun시편 23편은 많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말씀일 것이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암송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이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 시편 23편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이비드 칼훈은 깊이 있는 주해와 자신의 삶의 간증들을 통해 시편 23편에 담겨있는 은혜로운 말씀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특별히 그의 삶이 담긴 묵상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선한 목자의 양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양은 기억한다’는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칼훈은 각 장마다 서로 다른 번역의 시편 23편 말씀과 시편찬송을 제시한다. 또한 그는 다양한 주석과 자료를 제시하는데, 양의 특성을 알려주는 ‘목자로부터 온 편지’, 여러 종류의 기도문, 다양한 예화들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며, 마지막에는 저자의 개인적인 간증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영적인 지혜를 제시한다.BANNER OF TRUTH칼훈의 유산 데이비드 칼훈은 나의 신앙의 아버지이자, 멘토이며 친구였다. 그는 커버넌트 신학교에서 30년간(1978-2008)간 교회사를 가르쳤으며, 또한 그는 40년간(1987-2021) 고통스러운 암투병을 하며 살았다. 이 책은 그의 삶의 마지막 책이었다. 이 책을 집필하여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출판사에 원고를 전달한 후에 그는 하나님께 소천을 받았다. 나는 신학교에 다닐 때 그의 수업을 거의 다 들었다. 나는 그에게 고대교회사, 중세교회사, 종교개혁사, 근대교회사, 칼빈의 기독교 강요, 개혁파 전통의 역사, 남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배웠다. 또한 내가 에든버러에서 공부를 할 때에는 그와 함께(그의 아들 알랜과도 함께)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언제나 내게 친절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지금까지 나의 신학의 여정에서 그분만큼 내 삶과 신학, 목회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은 없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리폼드 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총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내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신 분이다. 데이비드는 치열하게 늘 새로운 것을 배우는 성실한 학자였다. 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에 그는 신약과 구약을 각각 공부하여 2개의 신학석사(Th.M.)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교회사를 공부하여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하였다(그의 논문은 “1812-62년 기간에 프린스톤 신학교와 선교의 역사”였다). 그는 존 칼빈의 신학을 사랑하였고, 초기 개혁자인 헨리 불링거를 연구한 전문가이기도 하였다. 특별히 나는 리처드 멀러의 ‘그리스도와 율법’(Christ and the decree)을 읽기도 전에 그에게서 먼저 “멀러 테제”의 담론을 배울 수 있었다. (“멀러 테제“는 종교개혁(Reformation)과 종교개혁 이후(Post-Reformation)의 개혁신학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20세기 칼 바르트 주의자들이 주장하였던 “칼빈과 칼빈주의자”의 대립을 반박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자신의 연구에 대해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연구를 공유하였고,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데이비드는 켄터키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나처럼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자라났다. 우리는 모두 역사, 특별히 교회사를 사랑했다. 내가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는 제일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에 데이비드에게 우리 교회의 역사를 저술해줄 것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2012년에 교회의 175주년을 기념하여 역사집을 편찬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그는 이미 여러 교회들의 역사를 책으로 저술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콜롬비아의 제일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 조지아 사바나의 독립장로교회(Independent Presbyterian Church), 조지아 아우구스타의 제일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의 역사가 그의 손으로 집필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미국 남부지역의 또 다른 유서 깊은 교회인 우리 교회의 역사를 집필하기에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암이 재발하였고,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인하여 우리 교회의 역사를 집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의사가 그에게 책을 저술하기 위한 여행을 말렸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교회의 역사 집필을 내려놓으며 내게 이런 말을 적어주었다. “내게 오직 하나의 불치병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주님이 최선의 것을 아시리라 믿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이 책에서 그의 이 믿음의 고백을 확인할 수 있다).시편 23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데이비드의 교회사 강의는 언제나 풍성하고 깊이가 있었다. 그는 은혜로운 기도문과 글들을 학생들에게 제시하였다. 나는 그의 마지막 책인 ‘양은 기억한다’를 읽으면서 마치 신학교에서 그의 수업을 듣던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수업을 듣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이 책은 데이비드 칼훈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책이다. 또한 이 책은 스펄전의 시편주석(Treasury of David)과도 많이 닮아 있다. 그는 이 책의 각 장에서 시편 23편의 다양한 번역을 제시하였고, 깊이 있는 주석을 덧붙였으며, 많은 기도들, 예화들을 통하여 더욱 풍성한 교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그의 간증은 더욱 은혜를 더하였다. 그의 간증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교훈을 주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에게 영적으로 유익할 것이다. 짧은 분량의 이 책을 독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읽어 내려갈 수도 있다. 또한 설교자들이 시편 23편을 강해하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 이 책을 옆에 두고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매일 조금씩 분량을 정해서 묵상을 하면서 읽어가는 것도 좋다. 하루에 1장씩 10일 동안 이 책을 읽어 나갈 수도 있다(그래서 칼훈이 시편 23편을 10개의 주제로 나누어서 묵상하였는지 모른다). 만약 천천히 묵상하면서 이 책을 읽어 나간다면 이 책의 부록에 실려 있는 다양한 번역의 시편 23편을 읽어가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참고도서들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저자가 제시하는 방대한 분량의 참고도서와 그에 대한 저자의 요약을 통하여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영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소개한 ‘시편의 기도들’(Prayers on the Psalms)은 그가 편집한 책이기도 하다. ‘시편의 기도들’에는 프랑스 위그노 목사이자 순교자인 오귀스탱 말로라(Augustin Marlorat)의 기도들이 담겨 있는데,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서 1595년 스코틀랜드 시편 찬송집에 수록되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말로라의 시편 23편의 기도는 다음과 같다.만복의 근원이신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아버지, 모든 원수에게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우리의 목자, 우리의 보호자이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모든 두려움과 사망의 위협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진리를 믿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진리만이 우리 주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데이비드 칼훈은 거의 인생의 절반 가까이의 시간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암투병을 하며 보냈다. 그는 이제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서 본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양은 기억하고 있다’는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하며, 그분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히 13:20). 아마도 칼훈은 지금 선하신 목자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원제: He Knew the Good Shepherd: The Last Book of David B. Calhou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박광영
목회
리더십
시편23편
선한목자
데이비드칼훈
죽음
항암치료
섭리
기독교강요
참된 영성이란 무엇인가?
by David Strain
2021-11-07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이제 막 검토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리스도인 삶의 구조를 형성하는 건축학적 원리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 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의 영성에 미치는 몇 가지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다. 확실히 영성이라는 말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다. 일반적으로 이 영성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것은 주관적인 영적 경험 내지 정신적 또는 정서적 웰빙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영성을 동양의 명상 및 마음챙김과 같은 수행과 쉽게 연결시킨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영성은 그런 사고 방식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영성의 중심이 무엇인가, 즉 영성이 추구하는 대상 내지 초점(focal point)과 관련이 있다. 오늘날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성 모델에서 초점은 언제나 자아이다. 우리는 체험하기 위해, 그러니까 영성이 약속하는 웰빙 감각을 위해 영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 영성에서는 체험이 비록 현재적이고 생생하고 풍부할 뿐 아니라 실제적이기까지 하지만, 그건 결코 목표가 아니며 동시에 자아도 초점이 아니다. 기독교 영성의 초점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분을 알고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된다. 그렇기에 기독교 영성에서도 자아에 대한 생각이 차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건 매우 작을 수밖에 없다. 영성에 대한 이런 기독교적 관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에만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한다. 일단 영성을 정의할 필요가 있겠다. 성경적 훈련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깊은 교감이 점점 더 커지도록 추구하는 것, 나는 “영성”을 이렇게 정의하겠다. 그러니까 이런 나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야말로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 그리고 그 교제가 깊어질 수 있도록 돕는 모든 은혜의 훈련과 습관의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연합은 교제로 이끈다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다른 보혜사, 그가 진리의 영이라고 부른 이를 주시도록 간구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다른 보혜사”라는 구절은 같은 종류의 또 다른 돕는 이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후 아버지께로 떠나셨지만, 그분은 당신과 같은 성품을 가진 다른 조력자를 보내겠다고 하신다. 이 조력자는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동시에 그들 안에서 거하실 성령이시다. 그러나 18-19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의 연결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지금은 떠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오실 것이다. 이 구절은 부활이나 세상 끝날에 있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의 오심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은 그 영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도록 만든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또 우리 안에 거하신다. 예수님께서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9-20)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지금 성령으로 인한 권능의 결과를 말씀하고 계신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예수님은 20절에서 그 연합의 경이로움을 볼 수 있도록 도우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다. 복되신 삼위일체의 교통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연합과 친교가 있다.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신 그 영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그리스도와의 바로 그 연합과 친교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또 중재하신다. 성령의 사역은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경험하고, 또 누리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1장 3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목적을 서술한 바로 그 내용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이 전한 복음을 믿게 될 때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와 교제함으로 누리는 충만한 영광은 무엇인가? 단지 성도 간의 사귐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사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 범위와 영광은 실로 놀랍다. 복음을 믿어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실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과의 교통함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에베소서 2장 18절을 살펴보자.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심으시며,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 체험적인 기독교, 느낄 수 있는 기독교를 위해 호소하고 있다. 나는 지금 느낄 수 있는 그리스도를 위해 간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교통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더 풍성해지도록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성령께서 항상 하시는 일이다. 기독교인은 결코 합리주의자가 아니다. 기독교인은 초자연주의자이다. 우리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진정한 의사 소통과 친교, 그리고 교제를 불러 일으키시는 성령을 믿는다. 이런 사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면, 게다가 우리의 신학이 단지 교리와 실천으로만 만족하고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건 우리가 아직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연합, 교제, 그리고 은혜라는 일반 도구그럼 어떻게 해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라는, 깊은 경험과 이해의 단계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건 예상치 못한 감기처럼 갑자기 닥치는 걸까? 초능력자만이 알 수 있는 으스스하고 무섭기도 한 주문, 일종의 두 번째 축복이라고 불리는 그런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스펙트럼의 다른 끝에서 하나님과의 깊어지는 교제, 그러니까 일종의 어떤 기술을 적용해서 얻어내는 결과일까? 아니, 과연 영적 경험이라는 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일가? 몇 개의 양초와 적절한 미학적 주문으로 올바른 분위기만 만들어내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걸까?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54는 이렇게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중보의 혜택을 그 몸된 교회에 전달하시는 외적 방편은 무엇인가?” 대교리문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고 나서 이제 우리의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은 혜택을 우리가 과연 어떻게 누리는가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그분 안에” 있는데 어떻게 그분과 교통하는가? 교리 문답의 대답을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자기 중보의 혜택을 그 몸된 교회에 전달하시는 외적 또는 일반적인 방편은 그의 모든 규례인데, 특별히 말씀과 성례 및 기도이다. 이 모든 것은 택함을 입은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유효하다.”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제정하신 모든 의식, 모든 훈련과 관행은 외적이며 또한 일상적인 수단이다. 그런 다음 그로부터 파생된 세 가지 중심이 되는 기본 수단을 나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유익을 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기 전에, 은혜의 수단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누리는 은혜와 함께(corporate) 누리는 은혜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두 개의 분리된 훈련 세트가 아니라 동일한 세 가지 수단인 말씀, 성례, 그리고 기도를 다른 방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기도는 공적으로(그리고 사적으로) 사용도록, 그리고 세례와 성찬식은 함께 사용하도록 정하셨는데, 부지런함과 믿음으로 그 명령을 잘 수행함으로 주님과의 더 깊은 친교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사실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에 대한 더 깊은 체험을 갈망한다면, 삶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더 많이 느끼기를 원한다면, 굳이 특별한 집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 어떤 영적 카타르시스나 또는 흔히들 말하는 두 번째 축복을 받을 필요가 없다. 함께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면 된다. 매주 풍성한 말씀의 꼴을 먹으면 된다. 또한 집에서 성경을 펴서 그 진리를 마셔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위해 마음에서부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성찬식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형제 자매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그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우리의 죄를 죽이고, 우리 마음을 위로하고, 우리가 참으로 그분 안에 있으며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확신을 심화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모두가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그리스도와 더 연합하여 그분의 크신 이름을 찬양하는 그 영광을, 우리 중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누릴 수 있기를 간구한다. 원제: What Is Real Spirituality?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영성
예배
영성추구
그리스도와의연합
세속적영성
삼위일체
보혜사
웨스트민스터대교리문답
성찬식
사도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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