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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J. I. 패커를 읽어야 하는가
by Kevin J. Vanhoozer
2021-11-06
1980년대 중반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 나는 J. I. 패커(J. I. Packer)를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이미 복음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원로(senior statesman)였고, 사실은 꽤나 한참 전부터 그렇게 인식되던 참이었다. 1973년에 출간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다. 그 책은 또한 내가 나중에 아내가 된 여자에게 선물했던 첫 번째 책이기도 하다(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가 두 번째 책이었다). 그 책을 선물한 내 판단은 아주 적절했다. 패커의 경우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머릿속에서 구성한 모습과 실제 모습이 일치한,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인데, 사실 그의 경우 실제 모습이 작품을 능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커는 캠브리지 대학 내 복음주의적 성경학자를 위한 연구 센터인 틴데일 하우스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케임브리지에 왔다. 패커는 모든 면에서 확실한 옥스포드 사람이었기 때문에, 캠브리지에 왔다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포함한 모든 학위를 취득했으며, 옥스포드의 틴데일 하우스에 해당하는 라티머 하우스에서 소장을 역임했다. 그는 나중에 옥스퍼드에서 브리스톨의 트리니티 칼리지로 옮겼고, 결국에는 밴쿠버의 리젠트 칼리지에서 공식 은퇴 후 오랜 시간이 지난 1979년부터 2016년까지 신학을 가르쳤다.패커의 틴데일 하우스 연설 주제는 성경적 권위와 해석학이었다. 그 주제는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는데, 내가 애초에 캠브리지에 온 이유가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성경적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또는 최소한 모든 교파가 자신이 보기에 옳은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다원적 해석의 도전을 피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란 결코 있을 수 없음을, 나는 당시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 패커 또한 이 문제를 명확하게 이해했고, 그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J. I. 패커반세기 동안 J. I. 패커의 이 고전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는 경이로움, 영광, 기쁨을 발견하도록 도왔습니다.패커의 심오한 신학적 지식에서 비롯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기독교 신앙의 두 가지 핵심 측면, 즉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을 결합합니다. 매력적이고 실용적인 어조로 쓰여진, 읽는 이의 사고를 자극하는 이 놀라운 작품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하고 풍부하게 만듭니다. 크리스챠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서 복음주의자를 형성한 최고의 책 50권 중 하나로 선정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제 IVP 시그니처 컬렉션에 이름을 올린 상징적인 책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한 성경 구절을 스스로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동반 성경 연구(. A new companion Bible study)’도 함께 구입할 수 있습니다. IVP패커는 불트만(Bultmann), 하이데거(Heidegger), 푹스(Fuchs) 및 가마머(Gadamer)와 같은 20세기 해석학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을 거론했고, 또한 성경 해석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평가했다. 그런 다음, 그는 복음주의 해석학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깨닫게 하시는 자(illuminator)와 해석자로서의 성령 사역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강의가 끝난 후, 나는 그에게 당시 성경해석의 가장 최신 도전이었던 해체(deconstruction)에 대해 물었다. 패커는 그 주제에 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내 창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것은 당신과 당신 세대가 처리해야 할 일”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나는 그때 그가 지휘봉을 넘기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가 했던 양도는 교회가 항상 해오던 방식,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전달하는 그 방식을 상징했다. 그것은 또한 내 논문의 최종 형태와 소명, 그리고 후속 작업의 많은 부분에 구성적 영향을 미쳤다.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해석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한 책이다. 패커는 그 책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이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을 알아서 얻는 유익. 따라서 나도 같은 방식으로 이 글의 서론을 전개하려고 한다.(편집자 주: 이 글은 IVP 발간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시그니처 판에 실린 저자의 소개글(forword)에서 발췌한 것이다.) 왜 독자들이 패커를 알아야 하는가, 패커의 책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패커를 읽어서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패커를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패커는 자신을 무엇보다도 교리교사로, 즉 다른 사람에게 기독교 신앙과 삶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묘사하기를 좋아했다. 교리교사가 꼭 학자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의상 교리교사는 교회 신학자, 한 번에 한 명씩 제자를 키움으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패커가 교리문답과 관련해서 남긴 족적은 적지 않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성공회 교리문답(To Be Christian: An Anglican Catechism, 2020)’ 뿐 아니라 북미 성공회 프로젝트에서 신학 편집자로 봉사했으며, 그 당시를 패커는 “패커의 마지막 십자군”이라고 냉소적으로 언급했다.패커가 다른 곳에서 지적했듯, 기독교가 누구에게나 다 본능적으로 다가가는 건 아니다. 기독교는 누구나 다니는 거리에서가 아니라 예배당(pew)에서 배울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 즉 사도 바울이 “아름다운 것”(딤후 1:14)이라고 부른 것, 건전한 교리와 일치하는 것, 또는 패커가 “위대한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기독교 교리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친다. 교리와 제자도는 같은 장갑을 끼는 형제이다. 교리가 없는 행동은 맹목이고, 행동이 없는 교리는 죽은 것이다.“할 수 있는 사람은 한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사람은 대신 가르친다.”라는 옛 격언은 패커에게 적합하지 않다. 패커는 기독교를 아주 잘했다. 나는 그점에 관해 대단히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가장 잘한 것은 기독교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잘 하도록, 그러니까 좋은 기독교인이 되도록 도운 것이 바로 가르침을 통해서였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요점은 결국 실제적인 문제이다.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가의 문제이다. 가르침에 대한 패커의 사랑은 단지 주제(복음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사랑은 학생들을 향한 사랑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소개하는 사랑에서부터까지 비롯되었다.패커를 안다는 것은 존 스토트(John Stott),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칼 F.H. 헨리(Carl F. H. Henry), 버나드 램(Bernard Ramm), 해롤드 오켄가(Harold Ockenga) 등등,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기독교를 초월한 20세기 중반 기독교 구축 집단인 복음주의 “위대한 세대”의 스승을 아는 것이다. 그들은 그 시대가 느낀 현대 사회 및 지적 위기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시대를 향해 성경에 근거한 정통 신앙을 확언했다. 마지막으로 패커를 안다는 것은 “신학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는 성경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고 간결한 말로 설명하고 전달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하는 지식’을 읽는 것은 패커의 실재가 아닌 하나님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하다. 하지만 패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실재를 글 속에 담아냈다. 한 때 패커 스스로가 자신을 묘사했듯이, “패커라는 이름 그대로, 그 사람의 본질이 포장하는 일이다.” (역자 주: pack이 ‘포장하다’라는 동사이다. 패커가 하나님을 글로 잘 포장했다는 의미).패커를 알게 되면‘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삼위일체 삼부작의 첫 작품으로 잘 알려져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은 후,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기(Growing in Christ)’와 ‘성령을 아는 지식(Keep the Spirit)’을 마저 읽는 것이 좋다. 세 권 다 신학을 가르치지만, 단순히 머리 속에서만 노는 데 그치지 않는 살아있는 신학을 가르친다. 패커 자신도 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삶의 가르침(교리)”이라고 정의한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와 같은 영국 청교도 선조의 발자취를 따랐다. 패커를 알기 위해서 독자는 청교도에 대한 그의 열정을 이해해야 한다. 청교도와의 사랑은 옥스포드 대학의 먼지 투성이 지하실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곳에서 패커는 청교도의 대표자(Puritan divine)인 존 오웬(John Owen, 1616-83)의 24권 저작 세트를 발견했다. 오래된 책을 펼치기 위해서 그는 페이지 사이를 칼로 잘라야했다. 페이지가 열렸을 때, 거기서 뿜어져 나온 것은 퀴퀴한 쉰내가 아니라 신선한 공기였다. 오웬의 책은 삶에 대한 한 기독교인의 진지하고 현실적인 설명이었다. 또한 내재된 죄의 실체에 관한 인정 뿐 아니라, 그 죄를 다루는 실질적인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로마 가톨릭 역사가는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를 20세기 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본다. 그 공의회의 목적은 교회를 새롭게 하고 그것을 현대에 맞게 개조하는 것이었으며, 그 방법은 과거의 “발굴(retrieving)”이었다. 즉, 교회의 초기 세기부터 시작된 교부 신학자의 저술을 다시 발간하는 것이었다. 교회 역사의 연대기라는 차원에서 볼 때 패커의 존 오웬 발굴이 그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패커를 아는 것은 한편으로 그가 찾아낸 청교도 신학자의 저술의 가치를 아는 것이기도 하다. 패커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청교도 연구 회의(Puritan Studies Conference)를 설립했다. 설립 초기부터 그가 가진 생각은 골동품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현대 교회에 필요한 가르침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청교도 작품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청교도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종종 사람들이 비난하는 “청교도적 도덕” 자체에 패커는 별 관심이 없다. 청교교는 편협하고 신중한 반대론자라는 낡고 고정된 관념은 더 영광스럽고 흥미진진한 실제의 풍자화일 뿐이다. 패커가 청교도 글에 매료된 것은 그들이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강력한 비전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청교도 중에는 날카로우면서도 동시에 영적인 사상가가 적지 않다. 청교도는 교리와 헌신을 동등하게 평가했다.패커를 안다는 것은, 모든 신학이 영성이라는 청교도의 확신을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적 경험을 중시하는 현대 복음주의자는 경건의 훈련, 즉 경건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 습관을 형성해야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중시한 17세기 청교도에게서 배워야한다. 영적 성장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청교도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게 패커의 지론이었다. 내 생각도 비슷하다. 영적 변화에 대해 진지하지 않다면, 패커를 읽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마음 속에만 머무는 게 아니다. 그 지식은 살아 있으며 활동적이며 개인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패커를 “최후의 청교도”라고, 나름 적절하게 불렀던 교회 역사가가 옳았을 수도 있지만, 굳이 패커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을 찾자면, 최후의 청교도인 동시에 새로운 세대, 그러니까 21세기 최초의 청교도가 더 적절하다. 결국, 패커가 청교도를 발굴한 가장 큰 이유는 현재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패커를 아는 유익패커는 한때 신학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마음과 혀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요점은 주님의 제자라면 모든 일이 다 주를 향한 찬양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게 바로 교리라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패커의 모든 작업의 동기는 오로지 하나,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여기에 지금 살아있기 때문이다. 패커는 아마도 복음주의 신학자의 “가장 위대한 세대”의 마지막 사람일 것이다. 그는 구십 대에 들어서까지 계속 가르쳤고,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할 때에도 여전히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을 전달할 방법을 찾았다. 그의 마지막 책은 인생을 보다 더 잘 마무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현명한 지침을 제공한다. ‘기쁨으로 이 과정을 마치는 것: 잘 늙기 위한 하나님의 안내(Finishing Our Course with Joy: Guidance from God for Engaging with Our Aging, 2014).패커의 책을 읽는 것은 그와 다른 순례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치는 다양한 단계를 통해 이룬 발전 지점에 표시한 이정표를 방문하는 것이다. 이것이 패커를 알게 될 때 누리는 큰 유익이다. 패커처럼 되자는 건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자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욱 닮도록 영감을 받자는 것이다. 모든 순례자는 힘들 때 의지할 조언(words)이 필요하다. 패커를 알아서 누리는 유익은 순례길을 함께 하는 현명하고 경건한 좋은 동반자가 있다는 것이다. 패커는 자신의 생각을 “화목을 통한 입양”이라는 세 단어로 압축했다. 이것이야말로 패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지적 훈련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이유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만물의 창조주가 사랑하는 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패커가 말 그대로, 땅을 뒤흔드는 이 지식, 즉 옛 세상이 지나가고 있다는(고후 5:17, 요일 2:17, 계 21:1) 그 지식에서 회복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님은 지금도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입양에 관한 장은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하이라이트 중 하나이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됨에 따라 당신이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또는 딸로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읽기 시작하라. 창문을 열고, 날아갈 준비를 하라.원제: Why You Should Read J. I. Packer: Review: ‘Knowing God’ by J. I. Pack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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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ll Anderson
2021-11-05
디지털 시대에는 실족한 목회자들의 이야기가 소셜 미디어, 유튜브, 팟캐스트 및 온라인 매체를 통해 기사화되고 대중에게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촉망받던 지도자일수록 그를 향한 더 큰 분노의 외침이 들린다. 죄악이 심각할수록 청중은 더 늘어나게 마련이다.종교의 탈을 쓴 거짓 목회자에 관해 알리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것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나쁜 리더들에게 책임을 지게 하며, 섬김이 아닌 명성을 지향하는 데에 뿌리를 둔 잘못된 리더십 모델에 경고를 한다. 하지만 치욕스러운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 정의를 향해 접근하는 확실한 단계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라 중요한 첫 단계에 불과하다.위선은 마주치는 영혼을 상하게 하며 방향을 잃은 성도에게 배신이란 자갈밭에서 비틀거리도록 만드는 방해물이다. 가짜 목자들은 양들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든다. 이에 실망한 어떤 이들은 기독교와 결별하겠다면서 회심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신들만의 방법을 고민한다. 교회 밖이 아닌 내부에서 치유를 찾기로 하고 머무는 사람들에게도 분노, 불신, 그리고 자기 의심은 좀처럼 수그러지지 않는다. ‘어떻게 목사를 다시 신뢰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이다.지침은 정의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을 탈진하게 한다. 영적 학대자들을 고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응급 구조요원도 되어야 한다. 상처 입은 형제자매들을 붕대로 싸매어주고,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바라보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맹렬히 꾸짖으시는 예수님을 기록한 마태복음 23장을 내가 사랑하는 이유이다.몇 가지 중요한 방향으로 마태복음 23장은 세 가지 교훈을 통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위선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법을 가르쳐 준다.1. 지도자의 위선으로 우리의 복종을 무력화하지 않는다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을 “지옥 자식”과 “맹인 된 인도자”라 부르시며 신랄하게 비판하시지만, 놀랍게도 그의 첫마디를 듣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라고 가르치신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2-3).예수님의 말씀은 반문화적이긴 하지만 분명하다. 모든 제자는 누가 가르치든 성경의 진리에 따라야 한다. 당혹스럽게도, 잘못된 목회자들이 종종 좋은 내용으로 가르칠 때도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짓 목회자에 관해 관심을 갖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신랄한 비평은 나중에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목욕시킨 아기(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진리)를 목욕물(믿음을 궤멸시키는 위선)과 함께 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계신다. 죄가 누군가의 목회를 무력화시킬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무효화 되어서는 안 된다(사 55:9~11). 주석가 마이클 J. 윌킨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성경에 대한 모든 정확한 해석은 우리가 따라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좋은 말을 많이 했고, 그들의 교리는 다른 집단들보다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까웠다. 예수님은 정의의 추구 자체를 비난하지 않으셨다. 그는 정의로워지려는 노력 안에서 표출되는 특정한 태도나 관습만을 비판하신다.영적인 권위가 사람들을 속일 때,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르친 모든 것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리를 포함한 모든 것을 멀리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영적 권위에 대해 욕하며 순종에 대한 요구를 율법주의로 받아들이는 냉소주의자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압제자들에게는 엄격하여야 하지만 성경 말씀에 대하여는 온순하여지기를 원하신다. 진리를 포기하는 것은 악에 대항하여 싸울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는 늘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2. 하나님은 위선을 우리가 싫어하는 것보다 더 싫어하신다마태복음 23장은 대부분의 성경(겔 34장 참조)의 내용에서 보여주듯 영적 지도자들이 그의 백성을 오도하고 학대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훼손하거나 자신의 신부를 괴롭히는 악행을 은폐하거나 최소화하려는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동정심을 품지 않으신다. 그의 거룩한 진노는 그저 그런 모호한 것이 아니라 강력하고 구체적이다. 마태복음 23장 4절에서 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눈살이 찌푸려지게 하는 비난, 즉 외식하는 자, 지옥 자식, 눈먼 인도자, 어리석은 맹인, 맹인, 탐욕과 방탕, 회칠한 무덤, 불법, 뱀, 독사라는 단어로 꾸짖으신다. 이는 과도한 비난이 아닌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해치려는 누군가를 꾸짖는 것처럼, 그 꾸짖음의 강렬함은 사랑을 나타낸다.사랑은 또한 예수님의 진노의 구체성에서도 명료하게 보인다. 윌킨스가 이 구절에 대한 논평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고(4절),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며(5절), 자신들의 위치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고(6~12절), 종교를 빙자하여 왜곡하며(15~22절),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며(23~34절), 전통을 하나님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25~28절) 그리고 자신들 스스로 의로운 목소리를 억누른다(29~32절)는 예리한 지적을 통해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신다: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웃을 희생하며,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자들이여,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그렇게 하라. 언젠가 정의가 찾아올 것이다.3. 하나님께서는 위선자들의 치유를 갈망하신다그의 핏줄에 의로운 진노가 들끓고 있는 가운데, 마태복음 23장에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충격적이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37절)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시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고쳐주려 하신다. 그들이 종종 그렇듯 그의 은혜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탄식하신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예수님의 진노와 연민을 본받고 싶은 의향이 있는가? 모든 기독교인은 같은 변화를 경험한다: 하나님의 원수는 그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롬 5:10).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이 우리 안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뿌리내리는 것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위선자들과 단절하기위선자들과 맞서는 예수님의 접근 방식은 확실히 우리 시대의 정신과 상충한다. 그분의 급진적인 모범을 따르기 위해서는 양극단의 경우는 피할 필요가 있다.첫 번째 극단은 비하에서 비롯된 분노인 오만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위선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정의로운” 분노는 정의보다는 자존심에 의해 자극되어 빠르게 정의롭지 못한 분노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안다. 거룩한 분노는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는 절제를 수반한다. 그러한 절제는 취소문화(기존에 맺은 SNS 관계나 팔로우를 취소하는 것과 같은 단절)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희생자들을 보호하고 위선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을 취하면서 우리의 분노는 무모하지 않은 정의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께 내려놓아야 한다.두 번째 극단은 잘못된 겸손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는 모두 위선자이기 때문에” 위선을 위선이라 부르길 거부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판단을 회피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은 교회에 규율이 필요하다는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무시한다(마 18:15~19).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칭하면서도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거부한 것을 책망하기도 하였다(갈 2:11~21).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분노가 우리에게 무언가 교훈을 준다면,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위선에 대하여는 목청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때에 꾸짖기를 거부한다면(눅 17:3) 우리의 침묵은 겸손이 아니라 비겁함이다.내가 좋아하는 신학 교수 중 한 분은 마태복음 23장을 매년 읽자고 우리에게 권면했고, 나는 그와 함께 이를 실행하여 왔다. 우리는 모두 이기적으로 리더십을 활용하고 싶어 한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우리는 어리석은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원제: Confront Hypocrites, But Don’t Cancel The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목회
리더십
위선
정의
관계
취소문화
관계단절
분노
진노
책망
하나님께 더하는 것과 제하는 것은 같은 의미다
by Tim Shorey
2021-11-04
솔로몬의 이야기는 경고의 장이다.열왕기상 11장 1절에서 11절의 내용을 살펴보면 솔로몬은 훌륭하게 시작했다가 형편없이 끝을 맺는다. 그는 신실한 사람으로 시작했으나(왕상 3:3-10) 영적으로는 실격한 사람이다.솔로몬의 종말은 그의 마음이 나뉘었을 때 일어났다. 비록 그가 여호와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다른 신들을 함께 섬겼다. 믿음을 유지한 것이다. 누군가 그에게 종교를 물었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처럼 그는 여호와를 따른다고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다양한 것을 섬기는 신앙이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솔로몬의 죄는 하나님을 뺀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왕상 11:4-8)을 더한 것에 있다. 그는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더하여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 주인을 섬기듯이 여호와를 섬기는 동시에 그모스와 아스다롯에게도 헌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플러스 하나님이라는 혼합주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다른 신들을 더하는 순간 그는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것이다(왕상 11:9).하나님의 유일성과 절대성하나님은 다른 신을 더한다고 해서 줄어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우리의 온전한 마음과 헌신을 받으셔야 한다(눅 4:8). 하나님은 “내가 상상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 성령으로 계시는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유일한 근원이고, 통치하는 주권자이시며, 구원자이자 판결하는 분이시다.오늘날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유일성과 주권을 말하는 배타적인 언어를 불편해한다. “참된 하나님 vs 거짓 종교”와 “절대 진리 vs 나의 진리”라는 용어는 (기독교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상당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되심만이 다른 신과 다른 믿음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살전 1:9, 요 14:6, 요일 5:20-21). 사람들은 배타주의보다는 혼합주의를 선호한다. 유일한 주권자이고 당연히 섬겨야 하는 절대자 하나님보다는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어떤 대상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영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른다.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보다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좋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다.당신이 만약 그들과 타협한다면 당신은 절대적이고 배타적이며, 경쟁자를 허용하지 않는 하나님을 등지고, 성경적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 무엇인가 더하는 것, 즉 God-plus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제하는 God-less와 같은 것이다. 당신의 그모스와 몰렉은 무엇인가? 이러한 영적 이중성은 거짓 종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영적 불신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세상이 그분과 경쟁자가 되도록 우리 마음에 쏟아 놓는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고 허용할 때 일어난다(약 4:3-4; 요일 2:15-17). 그것은 어떤 목적, 사람, 원인, 캠페인, 갈망, 기쁨이나 소유물 등이 마음을 분열시키는 것이다(마 6:24; 엡 5:5; 고전 6:14-20; 7:29-31; 10:21-22).핵심은 간단하다. 당신은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긴다. 돈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앗아간다. 성경에서 말하고 서로를 향해 헌신하는 결혼 관계 외에 성적 즐거움을 탐닉하려는 생각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고갈시킨다. 정치적인 충성심이 우리의 헌신을 가져간다. 사회적 각성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는다. ‘좋아요’와 ‘공유’가 축적되는 만큼 진리를 향한 헌신과 믿음의 우선순위가 바뀔 수도 있다.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하는 것은 수백만의 기독교인이 한 명, 두 명 또는 열 명의 또 다른 연인을 두고 하나님과 결혼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과 같다.만약 세상이 우리의 또 다른 연인이 되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요일 2:15-17; 약 4:3-4)? 우리는 깊은 슬픔으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약 4:6-10). 우리의 마음에 우상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서 우상 숭배의 죄를 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는 은혜 안에서 참되신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살전 1:9)을 섬겨야 한다(요일 1:7-9).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날마다 용기 있게 선택하며 전심으로 섬기는 시간을 마주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이 되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셔야 한다. 이러한 일을 시작하며 알아야 할 것은 영적으로 오직 한 분만을 섬기려고 할 때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멸시와 소외를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가 사람들을 아주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대할지라도 세상은 우리와 같이 대하지 않을 것이다.십자가는 그리스도에 대한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게 하고 항상 그분께 충성하도록 이끄는 곳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장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세상은 곧 우리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어디에 충성해야 할지 결정해야만 한다.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인가 아니면 친구들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다른 신들인가? 진리인가 아니면 대중적인 의견인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수구주의인가? 하나님의 도덕법인가 아니면 진보주의인가? 다양한 것을 향한 충성인가 아니면 오직 한 분을 향한 사랑인가?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적 음성인가 아니면 정치적인 바른 소리 혹은 세상을 따라 하는 앵무새의 음성인가? 하나님과 다른 신들 그리고 인생의 쾌락, 내가 추구하는 일과 인생의 목표들 사이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때, 우리가 선택하는 그 순간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말해야 한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4-15).그리고 우리는 덧붙여야 한다. 예수님이 분명하게 명령하신 것처럼, 그를 섬길 것이 아니라 ‘오직’ 그만 섬길 것이라고 말이다(눅 4:8).원제: God-Plus = God-Le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신학
구약성경
솔로몬
영적이중성
유일성
절대성
배타주의
혼합주의
그모스
몰렉
결혼식을 넘어 왜 칭의는 거룩함을 향해 가는가?
by Marshall Segal
2021-11-03
결혼식을 하는 날, 나는 꽤 오랜 시간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려서 기다림이 아픔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그렇게까지 결혼식을 미룰 필요가 없었다.마침내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결혼식을 올리던 날, 그 날은 다른 어떤 날보다도 훨씬 더 밝고 찬란하며 강렬하게 느껴졌다. 너무도 아름답고 황홀해서 불안한 마음마저 느끼게 하는 일출처럼 말이다. 굳이 그날의 사진을 일일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결혼식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기억이 난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복도에 서 있던 열 살 소년, 남보다 먼저 찬송가 첫 소절을 불러버린 성경 봉독자, 강대상 앞에 서서 신부를 기다리던 순간의 느낌 그리고 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 등 모든 것이 생생하다. 만일 예고에 없었던 비가 내려서 모든 참석자를 적시고 결혼식 장식을 다 망쳐 놓았다고 해도, 그런 비조차 우리에게는 결혼식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결혼식은 평생 함께 춰야 할 행복한 춤을 어색하게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결혼 생활에는 결혼식과 같이 찬란한 날은 없다. 처음 얼마 동안과 같은 신혼의 즐거움도 거의 없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기쁨이 단지 그날 하루의 기억으로 국한된다면 그 얼마나 비극적인가? 아내와 내가 결혼식 사진을 볼 때만 행복을 느낀다면, 결혼 생활 내내 사진 속의 행복만을 되새기며 평생을 보낸다면 그건 어떤 결혼일까? 부부가 결혼식의 아름다움을 넘어 실제 결혼 생활의 꾸밈없고 짜릿한 정원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토록 오랜 시간 결혼을 기다렸는데 단지 아름답게 치른 결혼식에만 만족하고 산다면 그건 과연 올바른 결혼 생활일까? 좀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사실상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십자가와 바른 관계를 갖고 사는지 궁금하다. 결혼식을 넘어서많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분,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죄가 있던 자리를 완전한 의로 채우신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런데 마치 죄를 씻음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해주는 전부인 양, 그 칭의를 되뇌는 데만 열중하며 여생을 보내기도 한다. 착각하지 마라. 십자가는 우리에게 결혼식(altar)이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구원을 결정짓는 중심이자 결정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이며, 사탄과 그의 모든 군대에 치명타를 가한 역사의 타오르는 절정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결혼식이지 결코 결혼 생활이 아니다. 칭의가 없으면 우리에게는 희망도, 생명도 그리고 미래도 없다. 그러나 단지 칭의 하나가 우리의 생명은 아니다. 칭의는 생명으로 들어가는 입구, 훨씬 더 많은 영광으로 가는 관문, 그리고 점점 더 넓어지는 은혜의 초장으로 나아가게 하는 시작점이다. 하늘나라 반대편에 있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천국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보물 중 하나는 우리가 더욱더 그분을 닮아가도록 만드시는 일, 곧 하나님이 이끄시는 변화의 역사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화라고 부르는 깊고도 놀라운 일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사는 기회, 즉 점점 더 거룩해지는 그 성화의 기회를 지금 누리고 있는가? 이 거룩함은 필수적이다. 그 누구도 성화됨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히 12:14). 이 거룩함은 가장 수준 높은 것일 뿐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계속되는 즐거움을 품고 있기도 하다. J.C. 라일(J.C. Ryle)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을 해도, 거룩함이야말로 행복 그 자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확신하며 느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볼 때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도 또한 빼앗을 수도 없는 견고한 위안이 있다.”대신 값을 치르신 은혜칭의(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행위)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영광스러운 실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야 하는 죄인이 죽음 대신 은혜의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남김없이 받아야 하는 죄인이 분노 대신 끊임없이 계속되는 평화를 맛보게 되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들어감(접근, access)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자. 많은 사람이 정보에 접근하고, 자원에 접근하고, 서로에게 접근하는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경이로운 특권의 중요성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우리는 작고 보잘것없으며, 또한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죄를 짓고, 거기에 더해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시하고 있는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스스로 그 전쟁을 감당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지옥 불 못에 던지지 않으시고 대신 당신의 아들을 지옥 불 속에 보내어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삼아 주셨다. 갈보리에 선 텐트이런 평화가 주는 영광, 하나님에 대한 이런 접근과 칭의의 영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단지 십자가라는 시작점을 떠나지 않은 채 그 순간만을 복음의 유일한 영광으로 삼지 않는다면 말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갈보리에 텐트를 치고 살라고 예수님이 죽으신 게 아니다. 그가 죽으신 것은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과 또한 앞으로 만날 새로운 세상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거룩함으로 채우기 위해서이다. …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불타 죽지 않고 기쁨으로 그 영광을 드러내며 영원토록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죽으셨다. … 따라서 칭의의 영광은 끝없이 계속되는 성화의 영광으로 이어진다.우리가 간과할 수 있는 복음의 영광 중에서 성화는 가장 쉽게 간과될 수 있다.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를 강조하며 칭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행위 또는 공로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라도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그러나 칭의를 옹호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도 바울은 진정한 성화를 기뻐하고 촉구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칭의와 평화 그리고 접근이라는 밝은 별이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에 떠 있는 유일한 별이 아니다. 그는 칭의(결혼식, 제단, 선언)를 사랑했지만, 정작 그가 더 원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보고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실 때, 그는 우리를 계속해서 더 깊은 결혼 생활로 이끄신다. 다만 이뿐 아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1-4). 다만 이뿐 아니라, 이 말이 이 구절에서 부담이 되는 부분이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은 용서뿐만 아니라 성품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셨다. 칭의뿐 아니라 성화이다. 용서뿐 아니라 변화이다. 결혼식뿐 아니라 결혼 생활이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단지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제한하지 말라. 우리는 이 칭의와 성화의 별들이 디도서 3장에서 다시 정렬되는 것을 본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우리가 이룬 그 어떤 공로도 하나님의 관심이나 개입을 얻어낼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의 크신 자비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그러니까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칭의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이지 공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행위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인한 것이니 우리는 더더욱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앞서서 바울은 이렇게도 썼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정결하게 만들기 위해, 의롭게 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죽으셨다. 성화가 아니라 단지 칭의만 강조하는(celebrate) 것은 복음을, 십자가를, 은혜를 그리고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반쪽으로 만드는 일이다. 역사상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전파하고 보존하기 위해 싸웠지만, 그에겐 단지 칭의가 목적이 아니었다. 칭의는 그를 다른 어딘가로 몰아갔다. 바울은 자신의 죄를 없애는 것만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된 자신이 더 큰 자유를 누리기를 갈망했다.사실, 그는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을 만큼 예수님이 피로 사신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충만한 거룩함을 소중히 여겼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는 옥에 갇혀서도, 매 맞을 때도 기뻐할 수 있었다. 강도를 당하고 굶주림과 궁핍 속에서도, 더불어 배신당할 때도 기뻐할 수 있었다. 그는 역경이 자신을 그리스도와 하나로 만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난이 믿음을 만날 때, 고난의 불이 경건의 풍성함을 낳고 그를 연단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은 결혼식을 아름답게 한다칭의는 이처럼 우리를 성화의 영광으로 이끈다. 동시에 영광스러운 성화의 체험은 우리를 더 깊은 칭의의 영광으로 인도한다. 로마서 5장에서 이 순서가 어떻게 끝나는지 주목하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소망은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께 속해 있고 그분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는 더 깊고 더 강한 확신이다. 그리스도 닮아가기를 추구하고, 그리스도와의 닮음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그것이 칭의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성숙해지는 경건함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분이 실제로 내 안에 거하신다는 또 다른 간증이기도 하다. 거룩함은 소망에서 흘러나올 뿐만 아니라 실제로 더 큰 소망을 낳기도 한다. 해가 거듭될수록 행복한 결혼은 결혼식을 더욱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든다. 그러므로 결혼식을 잊으면 안 된다. 결혼 생활 자체도 놓쳐서는 안 된다. 용서와 평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접근이라는 이 측량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라.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체험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원제: Don’t Miss the Marriag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칭의
성화
결혼비유
교리
그리스도닮아가기
결혼식
십자가
결혼생활
거룩함
존파이퍼
종교 개혁의 기반이 된 루터의 중요한 세 가지 발견
by Jim Davis
2021-11-02
10월 31일은 마틴 루터가 95개 논제를 공개한 지 504주년이 되는 날이다. 루터가 종교 개혁의 기초를 놓을 수 있도록 그가 발견한 것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그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에 서방 세계를 향해 로마 가톨릭의 숨막히는 권위를 깨뜨리고, 성경을 보통 사람들도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여 유럽 전역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높이고, 또 수천 개의 새로운 기독교 교파를 탄생시키는 과정을 일궈낼 수 있었을까?루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았다. 로마 가톨릭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복수심에 불타는 하나님을 달랠 수 있다고 가르쳤지만 결국 그 두려움을 더 증가시킬 뿐이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교황 제도 아래서는 죄책감이 우리를 떠날 때까지 수고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고를 다하여도 그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루터 자신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이 전혀 하나님께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우울증에 빠져들 때마다 “복음이 왜 좋은 소식인가?”라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그가 종교 개혁의 발판을 놓게 하는 발견으로 이어졌다.조나단 리네보(Jonathan Linebaugh)는 곧 출간될 그의 책 ‘십자가의 말씀’(The Word of the Cross)에서 루터의 대답을 세 부분으로 설명한다.1. 하나님의 약속루터가 후기 중세 로마 가톨릭 전통을 이해한 것처럼, 사제가 “당신을 사죄합니다”(te absolvo)라고 할 때 그 말은 이미 받은 용서의 상태를 확증하는 것뿐이다. 회개한 죄인은 용서받았고 사제의 선언은 그 현실을 확증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 사실이 너무 궁금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내 죄를 사하는 것은 무엇인가?’루터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하실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 존재를 의롭다고 하시지 않을까? 우리의 행위로 의를 획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의를 약속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겠다고 인간 존재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하신다.의가 우리의 행위와는 별개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이 새로운 이해(또는 오히려 옛 이해의 재발견)는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루터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함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는 것이며,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당신의 말씀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2. 율법과 복음루터는 율법과 복음이 기능적으로 동일한 것이며, 다만 구속 역사에서 다른 부분을 담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받아들여졌지만 교회는 복음에 순종함으로써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율법과 복음이 별개의 것임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었다.그는 율법의 기능을 새롭게 이해하고 이중적인 기능으로 설명했다. 그의 이해에 의하면, 첫째, 율법은 우리 죄의 결과를 보여 준다.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루터는 타락한 인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자기의’라는 괴물, 목이 뻣뻣한 짐승은 큰 도끼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큰 도끼입니다.”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루터는 “율법이 당신을 절망에 빠뜨릴 때, 법이 당신을 조금 더 나아가게 하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팔 안으로 곧장 들어가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그리고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위업을 성취하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짊어지신 것이다.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복음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다. 그러면 이 자유의 약속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3.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것은 루터의 획기적인 세 가지 발견 중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이다. 수년 동안 그는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배웠다. 즉 하나님이 불의한 사람들을 벌하시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당시 교회가 사용하고 있던 불가타 라틴어 성경은 의롭게 됨이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서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해하게 했다. 이것은 결국 교회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보지 못하게 막는 결과를 낳았다. 대신, 그것은 고행과 연옥과 같은 교리에 자리를 내주었다.그러나 원어인 헬라어에서 “의”(righteousness)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게 된 루터는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칭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우리에게 즉시 전가시켜 주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복음의 약속을 믿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 장자의 명분으로 이 두 가지 특권[왕권과 사제직]을 얻으신 것과 같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것을 나누어 주십니다”라고 했다. 루터는 이것을 “행복한 교환”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주신 대신 그 대가로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람들이 의로운 것과 불의한 두 가지 다른 상태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루터는 이 두 가지 상태가 서로 겹쳐진다고 보았고, 그 겹치는 공간에서 크리스천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으로(simil iustus et peccator)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결과: 좋은 소식루터는 이러한 발견을 스스로 이렇게 묘사했다.그때 나는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와 순전한 자비를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다시 태어나 낙원의 열린 문을 통과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루터가 발견한 것은 복음이 참으로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처음으로 자유를 경험했다. 충분히 알려지고 완전히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을 받을 때의 그런 자유를 말이다. 그것은 보장과 확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가져다주는 자유이다.원제: What Was Martin Luther’s Breakthroug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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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전가
사데 교회가 주는 교훈: 시작한 일을 끝내라
by David Schuman
2021-11-01
켄트 휴즈(Kent Hughes)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무려 사십 년이 넘게 목회를 하셨고, 일흔다섯이 되었을 때 이미 은퇴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잠시 비운 신학교의 공석을 메꿔주시기도 했다.내가 필라델피아에 살 때 우리는 같은 교회를 다녔고, 어느 주일인가 우리 부부는 우연히 그 목사님 부부와 나란히 앉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아내를 소개하자 목사님은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물었다. “사실 이번 주가 우리가 결혼한 지 육 개월이 되는 주입니다.” 그리고 내가 던진 같은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십이 년이니까, 당신네들 보다 백 배는 더 기네요.”내가 휴즈 목사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끝까지 신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고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매우 분명하다. 각종 스캔들과 탈회심(deconversion) 이야기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아내에게 신실했다. 이게 바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휴즈 목사님처럼 살 수 있을까? 요한계시록 3장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 부분에 관해서 사데교회에게 편지를 보낸다. 다름 아니라, 시작한 일을 제대로 끝내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사데교회를 향해서 어떻게 시작한 일을 끝낼 것인지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 특히, 이 메시지는 당신이 시작한 일을 제대로 끝낼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천천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영적 삶을 결정하는 갈림길에 관한 것이다. 당신이 얼마 동안 기독교인이었다면 아마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중에 어느 정도의 기복을 경험했을 것이다. 영적으로 좋을 때도 있지만, 떨어질 때도 있다. 그건 지극히 정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적 침체기에 무엇을 하는가이다. 바로 그 부분에 대한 것이 이 편지의 내용이다. 경계하라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가 ‘요한계시록(The Book of Revelation)’에서 쓴 것처럼, 사데는 한때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벽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는 계곡 위로 1,500피트 높이의 성벽이 있는 산 요새가 있었고, 이로 인해 도시는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기원전 549년에 페르시아 왕 키루스가 그 도시를 정복했는데, 그것도 사데인이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키루스 왕의 군대는 성벽의 틈새를 발견했고, 첩자로 하여금 그 틈새를 따라 벽을 오르게 했다.만약에 사데의 파수꾼이 조금이라도 주의를 더 기울였다면, 성벽을 오르는 침입자를 발견하고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파수꾼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키루스 왕의 첩자는 1,500피트의 성벽을 올라 성 안으로 잠입한 후 성문을 활짝 열었다. 사데가 전혀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인은 아예 벽을 넘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들은 당당하게 정문을 통과해서 곧장 진군했고, 도시를 정복했다. 당연히 사데인이 이런 역사에서 교훈을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BC 216년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예수님은 사데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일깨어”(계 3:2)라는 훈계로 편지를 시작하신다. 우리는 이 구절을 “조심하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명령은 사데에 있는 예수님 추종자들의 마음을 찔렀을 것이다. 스스로 안전하다고 안심하고 경계를 늦출 때 자신들에 어떤 결과가 오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 연약하다예수님은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시작한 일을 마치려면 믿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내 마음이 적에게 취약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사탄(The Devil)은 매우 현실적이며 또한 교활하다. 종종 사탄의 전략은 사데를 정복한 자들과 같다.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여는 것이다. 사탄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미묘하게 당신이 하나님 이외의 것을 갈망하도록 유혹하고, 당신을 내면으로부터 변화시킨다. 그래서 당신이 삶의 중심을 이 시대의 우상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런 다음 사탄이 하는 일은 당신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코스에서 한 단계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당신은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데인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랜트 R. 오스본(Grant R. Osborne)이 ‘계시록(Revelation)’에서 쓴 것처럼, 그들은 당시 문화권의 우상을 수용함으로 스스로의 옷을 더럽혔다(계 3:4).어떤 면에서 기독교인으로 명성을 얻기는 쉽지만, 시간이 지나도 거룩함에서 도통 자라지 않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점점 비기독교인처럼 보이게 된다. 어떻게 해야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항상 경계하고 시작한 일을 제대로 끝낼 수 있을까? 과업 완수를 위한 세 가지 열쇠영적 삶에서 침체(low points)를 경험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사실 사회학자들은 다니엘 핑크(Daniel H. Pink)가 ‘언제: 완벽한 타이밍의 과학적 비밀(When: Scientific Secrets of Perfect Timing)’에서 쓴 것처럼,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삶 중간 어딘가에는 침체기(dip)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행복이든, 에너지든, 프로젝트 수행이든, 거의 항상 중간 어딘가에는 슬럼프가 있기 마련이다. 누구나 힘차게 시작하지만 결국 천천히 쇠퇴하기 마련이다. 그건 영적인 삶에서도 다르지 않다. 또한 그것은 바로 타락한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방황하는 경향이 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하나님조차 떠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가장 중요한 것은 그 중간 지점에 다달았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가이다. 계속 아래로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일어나서 언덕을 다시 올라갈 것인가?사데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는 이 시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준다. 시작한 일을 끝내도록 하는, 세 가지 열쇠를 제공한다. 그 어떤 것도 특별한 건 없다. 그것은 산꼭대기에서 경험하는 특별한 게 아니다. 단지 일상에서 만나는 신실함의 단순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 충고는 확실하게 마무리하도록 만드는 열쇠가 된다. 1. 기억하라“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계 3:3). 첫 번째 열쇠는 기억하는 것이다. 당신이 받고 들은 것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매주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예배로 모인다. 시작한 일을 마치려면 매주일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고 자라나야 한다. 2. 지키라두 번째 열쇠는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을 기억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을 지켜야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 필요한 의지적 요소가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 한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한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당신 스스로가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기도로 도움을 요청하라. 또한 그리스도인 친구에게도 도움을 구하라. 3. 회개하라세 번째 열쇠는 두 번째와 관련이 있다. 바로 회개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의지의 명령이자 지키는 것의 이면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행하고, 행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한 것에 관해서는 회개하라. 그리고 이점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팔은 지금도 당신을 맞이하시기 위해 활짝 펼쳐져 있다. 그분께 와서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실 것이다. 세 가지 약속우리 모두는 다 예외 없이 영혼이 메마르고 영적으로 낙심하라 때,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때에 당신이 기억하고 지키고 또 회개한다면, 예수님은 이 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신다. 첫 번째 약속은 우리가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계 3:5). 흰 옷은 순결의 상징이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더러워진 옷을 씻어서(참조, 계 7:9-14) 죄가 덮이고, 그래서 시작한 일을 다 끝내고 마지막 날에 이르렀을 때 이뤄지는 약속이다. 우리는 희고 순결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오스본에 따르면, 로마 문화에서 흰색 옷을 입는 것은 승리와 축하의 상징이었다. 시민들은 군사적 승리를 축하할 때 흰색 옷을 입었다.예수님은 원수를 이기고 돌아오는 로마 장군처럼 모든 죄와 사망을 이기고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가 시작한 일을 마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얼마든지 시작한 일을 끝낼 수 있다. 그리고 승리를 축하하는 로마 시민들처럼, 그날을 맞아 우리도 전에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대대적인 축하잔치를 누릴 것이다. 예수님의 두 번째 약속은 그가 결코 당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도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계 3:5). 그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지킨다면, 그분도 당신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얼마든지 시작한 일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세 번째 약속은 전체 구절의 절정을 이룬다.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오스본에 따르면, 심판자로서 판결을 선고하는, 재판관으로서의 예수님 모습이다. 끝까지 신실한 자들을 예수님은 마지막 날 아버지 앞에서 의롭고 깨끗한 승리자로 선포하실 것이다. G. K. 비글(G. K. Beale)이 ‘요한계시록: 짧은 주석(The Book of Revelation: A Shorter Commentary)’에서 제시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우리는 누구나 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영적 침체기를 경험한다. 그 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가이다. 주님께 도움을 구하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 시작한 일을 제대로 끝내라. 원제: Lesson from Sardis: Finish What You Starte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신학
신약성경
요한계시록3장
사데교회
영적침체
파수꾼
사탄의전략
회개
생명책
심판자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by 복음과도시
2021-11-01
“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 놀라운 한 사람 · 사랑하는 것을 속일 수는 없다 · 고통에 관한 내 모든 생각을 바꾼 한 문장 · 누가 하나님 앞에서 ‘막아선 자’가 될 것인가? · 의무에서 보물로: 기쁨이 바꾸어 놓은 내 신앙· 간달프의 죽음 ·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 · 그런데도 여전히 순종한다 · 국경 없는 하나님 나라 · 불일치라는 팬데믹 · 하나님이 내게 천국이 될 때· 주님의 사역은 주님의 방법으로 · 진짜 기독교는 싸움이다 ·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신 책 ·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든 신비 ·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 · 하나님께서 가져가실 때 · 예수 vs. 대체 가능 사회· 목사여, 당신 영혼이 우선이다· 예배에서 중요한 건 ‘나’도 ‘우리’도 아니다 · 나는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하나님 추구하기, 나의 모든 만족· 짧은 인생이 최선의 인생이 되려면· 거룩한 습관을 지닌 젊은이가 되라·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주시는 시련보다 크다
주일과 주일 사이: 은혜로 사는 삶
by Raymond Johnson
2021-10-31
예배가 시작되기 전 십 분의 여유를 가지고 데이비드는 그가 평소에 앉는 오른쪽 상단 발코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최근 아내와 이혼한 친구, 댄을 올려다보았다. 댄의 이혼 과정은 쉽지 않았고, 장로들이 조용히 뒤에서 기도를 통해 그를 돕는 와중에서조차 댄의 아내가 저지르는 불륜 소식이 교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댄을 보면서 데이비드는 짧게 기도했다. “아버지, 댄이 요즘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내는지 제가 상상할 순 없지만, 어제 아침에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연약함을 느끼고 있음을 댄이 알게 해주십시오. 이 끔찍한 고통의 시간 동안에도 당신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다는 것을 댄이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예배로의 부름과 함께 예배가 시작되었다. 데이비드는 시편 95편 1절을 생각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솔직히 그는 찬양할 마음도 또 구원의 반석에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지난 주는 유달리 힘들었다. 경영진 앞에서 했던 프레젠테이션도 형편없었고, 지금 그에게 주어진 일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말까지 회사 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우리 구원의 반석”이라는 말씀을 읽을 때, 그는 그 말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반석이 필요했고, 어릴 때부터 들어온 구원의 말씀은 점점 더 귀중해졌다. 강단에서 목사님이 외쳤다. “구원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난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아요.” 데이비드는 생각했다. 바로 그 때 예배를 시작하는 찬송,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가 흘러나왔다. 찬송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도성 시온을 향한 행진”을 묘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데이비드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했던 찬송 중 하나였으며, “저 밝고도 묘한 시온성 향하여 가세, 내 주의 찬란한 성에 찬송하며 올라가세”라는 가사는 그가 지난주에 직면했었던 또는 아마도 이번 주에 또 직면하게 될 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그로 하여금 오로지 주 예수님만을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걸었고 또한 완벽하게 살았으며, 나를 대신하여 죽고 또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승리의 부활을 했다. 서서히 마음이 성경 말씀에 집중되었고, 마침내 기도할 때 그는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기 시작했다.목사님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할 때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백성들이여, 항상 그를 신뢰하라. 그 앞에 마음을 쏟아놓으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데이비드는 기도로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자신을 비방했던 친구 마이클을 같이 욕했던 것을 기억했다. 하나님께 마이클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다. 데이비드는 또한 직장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천히, 자신의 죄를 하나씩 언급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무거워졌지만 동시에 더 위로를 받았다. 기도할수록 죄는 끝도 없이 떠올랐다. 죄가 더 많이 생각날수록, 영혼에 대한 걱정도 같이 커져갔다. 하나님의 용서를 약속하는 목사님의 말을 듣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 나는 적어도 이생에서는 희망이 없어. 나는 죄를 멈출 수 없는 존재니까.” 설교는 로마서 5장 1-11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었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시련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는 것이 무엇인지 목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마음에 서서히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안에 무엇인가를 세우신다”고 데이비드는 생각했다. “힘들고 직장에서 겪는 모든 것이 다 싫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시련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음을 알아. 그분은 분명 그 모든 것을 사용하여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더 거룩하게 만드실 거야. 오, 주여!”월요일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난 데이비드는 운동을 했다. 조깅을 하면서 성경 말씀을 들었다. 출근하고도 사무실 사람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게 뻔했다. 지난주에 일어난 일 때문에 회사 사람 모두가 다 그를 반대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것은 아침 성경 읽기 팟캐스트가 그에게 준 구절이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지만 오늘 제가 겪을 모든 일에 아버지께서 저를 도와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데이비드는 기도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반대편 복도에서 걸어오는 상사를 보았다. 그의 마음은 무너졌고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그런데 갑자기 찬송이 떠올랐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그는 심호흡을 하고 상사를 향해서 걸어갔다. 상사는 앞으로 함께 일을 잘 만들어보자며 그에게 인사했다. 데이비드는 순간 생각했다. “이 직업은 내게 끔찍해. 내가 하는 건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갑자기 드는 이런 생각이 그를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삼 주 전 부목사님은 성령의 권능에 의지해서 우리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진리를 전하는 것에 관한 설교를 했다. “아버지, 저는 지금 정말 두렵고 끔찍합니다. 인생이 무너질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면 저는 혼자가 될 것이고, 어찌할 바를 모를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데이비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지난 주, 가장 친한 친구인 제임스가 과거의 고통이 매일 그에게 영향을 미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었다. 미처 나쁜 생각이 마음을 장악해서 그를 절망의 길로 보내기 전에, 단지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단순히 성경의 진리를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바로 잡는데 도움이 되었다.수요일시간이 지날수록 하루하루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일상이 그로 하여금 영적으로 그리고 직장에서 정상 궤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수요일 밤, 주중 성경공부가 끝난 후, 그는 교회에서 온 제임스와 함께 주간 만찬을 가졌다. 이 시간은 데이비드가 일주일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인데, 항상 주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를 격려했기 때문이다. 웃고 산책을 하고 또 먹는 사이에 데이비드를 짓누르던 외로움이 조금씩 그를 떠나갔다. 금요일금요일 묵상 시간 동안, 데이비드는 온라인을 통해 예정된 예배 순서를 보았고 성찬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간 그는 마이클을 중상모략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지만, 아직 그와 개인적으로 화해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이래 가지고는 결코 선한 양심으로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음을 느꼈다. 데이비드는 마이클에게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읽은 후 그는 용기를 내어 주님의 명령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마이클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순간적으로는 굴욕적이었지만, 그가 받은 용서와 화해는 결국 그의 영혼에 생명을 공급했다. 토요일토요일, 그는 전날 마이클과 나눈 대화를 회상했고, 과거에 마이클의 세례를 목격했을 때 느꼈던 기쁨, 그리고 그의 신앙고백을 통해 자신과 마이클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형제임을 깨닫고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 기억은 데이비드로 하여금 그가 다른 모든 교인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 평화의 띠 안에서 성령의 일치를 생각나게 했으며, 앞으로 다른 형제자매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영적인 선을 행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이끌었다. 다시 주일주일이 돌아왔을 때 데이비드는 항상 앉는 오른쪽 상단 발코니에 있었다. 예배가 시작되었고 따뜻한 친숙함이 그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초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데이비드는 약 육 개월 동안 예배에 빠지지 않았다. 그의 삶은 이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복음의 사업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평일뿐 아니라 매주일, 목사님은 그에게 “평범한 은혜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 말씀으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순전히 예측 가능한 90분은 지루함의 정반대였다. 성경 말씀과 성도의 찬양,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는 그의 마음 그리고 모든 성도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난 정말 말씀과 교회가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가 없어.” 데이비드는 생각했다. 원제: Between Sundays: Life in the Means of Grace출처: www.9marks.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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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
프로테스탄트 윤리: 어떻게 ‘믿음만으로’ 산업에 활력을 줄...
by David Mathis
2021-10-30
살아 있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최초의 미국인”으로 여겼다. 그의 업적은 실로 놀랍다. 편집자 및 출판인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과학자이자 발명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변신해갔다. 공인된 수학자이기도 한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교뿐 아니라 필라델피아 최초의 소방서도 설립했다.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보다 이 년 늦게 태어났지만 삼십 년 이상 더 오래 살았고, 무엇보다 그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한 삶을 살았다. 그는 쌍안경, 피뢰침 그리고 프랭클린 스토브를 발명했다. 프랑스 주재 대사를 지내기도 한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도 기억되는데, 무엇보다 여러 식민지를 하나로 통합했고 또한 초대 우체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에 따르면, 프랭클린은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미국인이자 우리가 아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사회 유형을 발명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었다. 프랭클린의 노력은 지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백 여 년이 지난 후에도, 근면함과 여러 업적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는 프랭클린은 독일 철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에게는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직업 윤리”라고 부른 모범으로 나타났다.그러나 베버는 심각하게 실수한 것이다. 잘못 알고 있는 베버1905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문구를 유명하게 만든 베버는 프랭클린을 “교리적 특수성을 소진한 프로테스탄트가 현대 자본주의를 육성한 방법에 대한 거의 완벽한 예”라고 표현했다(토마스 키드, Thomas Kidd, ‘Benjamin Franklin’, 3쪽).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와 마찬가지로 프랭클린은 개신교이자 칼빈주의의 가정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근면함, 검소함, 성실함을 배웠다. 그러나 키드는 프랭클린의 윤리는 그가 “기독교 정통을 버림”으로 “종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모든 것에서 분리”되었기에 가능했다고 썼다. 20세기 초에 들어 베버는 정통을 향해 프랭클린이 가졌던 혐오감이 베버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모델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일으키는 단점이 제거된 프로테스탄트의 생산성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오류를 범했다. 첫 번째로, 그는 교리가 사라져 버린 윤리에 교리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두 번째이자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그의 이해가 거꾸로 된 것이다. 베버의 무교리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아예 뿌리에서부터 열매를 끊어낸 것일 뿐 아니라, 애초에 뿌리에 대한 그의 이해부터가 틀렸다. 베버의 눈에 프랭클린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교리적으로 특별한 조상의 윤리를 개선한 것으로, 베버의 주장에 따르면, 그 조상은 근면한 노동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음을 증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뉴욕 타임즈에 여전히 발생하는 이런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존 스타크(John Starke)는 2012년에 이렇게 썼다. “베버의 책은 불행히도 프로테스탄트, 칼빈주의, 직업 및 자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배가시켰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은 개신교도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다름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라고 오해한다.”베버가 자신의 틀린 생각에 동의하는 자칭 프로테스탄트, 칼빈주의자 또는 청교도를 알고 있었는지에 관해서 나는 별 의문을 제기할 마음이 없다. 그러나 과연 성경과 프로테스탄트 운동, 그리고 그 대변인들이 이런 충동을 가르쳤는지 여부는 결코 모호하지 않다. 종교 개혁의 피뢰침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였으며, 만약에 우리가 이 교리가 주는 자극을 통해서 생산성 향상을 지향한다면 우리는 베버와 그의 잘못된 개념의 나머지 상속자보다 훨씬 더 잘할 것이다. 믿음에서, 노동을 위해베버는 관찰자로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교회뿐 아니라 세상을 바꿨다. 프로테스탄트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근면성을 촉발시켰다. 칭의의 재발견이라는 바울 신학은 고되기도 했지만, 누가 봐도 유익한 노동을 낳았다. 그러나 베버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프랭클린 속에서 엄청나게 생산적인 사람을 보았고. 아마도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교리가 없이도 존속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베버는 프랭클린이 프로테스탄트 교리에 깊이 잠긴 가정에서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 그리고 바로 그런 사실이 정확히 그로 하여금 어떻게 그토록 근면한 삶을 살게 한 것인지에 관해서 간과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회복시킨 두 가지는 이른바 최고 권위(교황 및 공의회를 포함한 모든 인간 권위에 대해서 최종 권위는 오로지 성경뿐이라는 사실)에 관한 형식적 원칙과 인간이 하나님(아무리 의롭고 선해도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한 물질적 원칙이었다. 개신교도는 결코 노동이 하나님의 은총을 보장한다고 믿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선택을 내가 증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의 원동력이 된다고도 믿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오로지 은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과 희생적인 죽음과 승리의 부활을 근거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그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개신교도에게 있어서 노동에 대한 첫 번째이자 기본 단어는 손으로 하는 노동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노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아무리 인상적이다 해도, 그것으로 전능자의 인정과 은총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칭의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수용은 우리의 공로나 하나님의 명령 수행 여부에(롬 3:28) 달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롬 3:24)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롬 9:16)이다. 따라서 참으로 적절하게도,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승인과 포옹은 그를 향한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서이지, 결코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는 공로를 통한 게 아니다(롬 4:4-5; 딤후 1:9; 딛 3:5).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은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안식이 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리고 이 안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통해 우리가 가진 에너지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쏟아 붓도록 하는, 심지어 초자연적인 야망을 공급하신다. 공로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개신교도는 이 두 주제에 대한 대부분의 성경 가르침이 사도 바울이라는 한 목소리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지적하곤 한다. 사랑과 노동을 위해 자유롭게 된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우리는 칭의에 더하여 “약속된 성령”(엡 1:13)이라는 또 다른 은사를 받는다. 성령은 우리 속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을 낳도록 도우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 새 욕망, 새 성향, 새 본능, 그리고 새 사랑을 부어주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안식에 들어간다고 해서 우리가 게을러지는 건 아니다. 도리어 바울은 성령이 우리를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딛 2:14) 준비시키고, 또한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고 준비되게 하신다고 말한다(딤후 2:21; 3:16-17; 딛 3:1-2). 그 뿐 아니라 믿음의 가정 안에서 그리고 가정 밖에서까지 다른 사람의 선을 섬기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딛 3:8, 14).이러한 영혼의 궁극적인 안식을 불러온 종교개혁의 회복은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낳았다. 결코 게으르고 냉담한 사람들이 아니다. 새로운 에너지와 자유, 새로운 비전과 희망, 새로운 주도권, 자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바치려는 새로운 욕망을 가진 부류의 사람들, 이 모두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굳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을 붙여서 불러야 할 직업 윤리가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랑이다. 교리로 네 노동을 채우라베버가 “교리적 특수성이 고갈된 개신교”를 원했던 반면, 베버보다 한 세기 앞서(또한 프랭클린에 훨씬 더 근접했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정확히 그 반대를 원했다. 윌버포스의 생각에 따르면, 직업 윤리의 불을 지피는 게 바로 프로테스탄트 교리라는 것이다. 연료를 빠진 엔진은 멈추는 게 당연하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말했다. 윌버포스를 요동치게 한 것은 그가 기독교의 “특이한 교리”라고 부른 것에 대한 깊은 성경적 충성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이런 교리가 자신 안에서 차례로 진정한 애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바로 이런 영적인 것들 때문에 교만과 탐욕과 두려움의 세력을 깨뜨리고 도덕을 변화시켜 국가를 정치 복지로까지 이끈다고 보았다. 윌버포스가 “특이한 교리”라고 말한 것은 본질적으로 프로테스탄니즘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심판, 십자가 위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성령에 의한 중생, 선에 헌신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성령의 열매”이다. 다른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독특하고 특별한, 이런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성령의 권능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교리는 결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교리로 인해 이웃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와 성실함, 새로운 욕망과 꿈까지 우리 속에서 자라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자기 희생적인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아는 사람이다. 기쁨에서, 기쁨을 위해완전할 뿐 아니라 상세하며, 또한 시간에 의해 검증되고 성경에 근거한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적 특수성은 우리의 일과 소명을 의미와 능력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리고 단지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서도 그럴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일과 노동의 개념은 단지 돈을 받고 일하는 “낮일”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유요, 천국이 되신다. 우리에게는 안전한 영원이 보장되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성령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랑하고 봉사할 수 있다. 게으름으로 주의가 산만한 하루보다 훨씬 더 힘든 노동으로 하루를 보냈다고 해도,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한 영혼을 만드는 교훈을 통해 오늘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에서 시작해서 기쁨으로 끝나는 노동을 한다. 그것은 프랭클린보다 훨씬 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원제: The Real Protestant Ethic: How ‘Faith Alone’ Sparks Industr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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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과 정신의 잊혀진 언어
by 최창국
2021-10-29
창조적 선물로서 정신세계 몇 년 전 영적지도와 꿈에 대해 강의를 할 때, 한 목회자로부터 교회가 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여 큰 어려움이 있었다는 고백을 듣게 되었다. 이 목회자는 한 권사가 어느 날 꿈속에서 교회 안에서 한 여자 집사와 한 남자 집사가 사귀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이 여 집사가 성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함으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권사는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이 문제를 자기에게 보여주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꿈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해석은 꿈이 상징의 언어라는 점을 간과하는 데서 비롯된 잘못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남성에게는 남성 호르몬이 더 많이 나오고 여성에게는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오듯이, 인간의 정신 현상인 꿈도 보편적으로 여성은 꿈속에서 주로 여자가 많이 등장하고 남성은 꿈속에서 주로 남자가 많이 등장하게 된다. 남자에게 남성 호르몬보다 여성 호르몬이 더 많이 나오면 문제가 발생하듯이, 인간의 꿈에서도 반대 성이 나타나는 것은 성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고 것이 일반적 해석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권사의 꿈속에 등장한 여 집사는 이 여 집사의 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 권사 자신의 성적인 문제가 꿈을 통해 상징적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더 타당하다. 물론 주관적인 꿈과 객관적인 꿈을 분별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즉, 주관적인 꿈 해석은 꿈속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사물은 자기 자신의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객관적인 꿈 해석은 꿈속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사물이 실제로 그 사람이나 사물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대부분 꿈은 주관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하거나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꿈을 통해 말씀해 주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정신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회 역사에서 인간의 정신 질환을 영적인 문제나 마귀의 역사로 이해하고 행한 큰 죄악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학자 루이스 벌코프는 인간 정신 세계의 탐구가 일반계시의 중요한 한 영역임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일반 계시는 언어(verva)의 형태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물(res)로 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구성과 자연의 전체 구조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적인 다스림의 과정으로 인간에게 오는 인간의 지각과 의식을 향한 적극적인 나타남이다. 하나님의 생각들은 자연의 현상 속에, 인간의 의식 속에, 그리고 경험 및 역사의 사실에 나타나 있다”(L. Berkhof, 『조직신학』, 139). 인간의 정신 혹은 마음의 탐구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행위이다. 이는 마치 농부가 계절의 질서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농부가 계절의 질서를 알아야 농사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특히 영혼 돌봄 사역자는 인간의 정신 세계의 질서를 알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인간의 정신 세계의 질서와 문제를 완전히 파악하였다 할지라도 인간의 내면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정신 구조와 꿈과학자들은 뇌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의 무의식적 특징을 발견하였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정신 활동의 대부분은 무의식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인간은 인지 기능의 5퍼센트만을 의식이 감당하고, 나머지 95퍼센트는 무의식이 감당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Leonard Mlodinow, 『새로운 무의식: 정신분석에서 뇌과학으로』, 51).무의식의 언어는 주로 꿈을 통해 발현된다. 무의식의 주요 매개체인 꿈은 의식이 외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형태로 왜곡되었던 것을 교정하는 기능을 한다. 꿈은 또한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하지 못하거나 발달시키지 못하거나 열등한 것들을 의식화하고 정신의 균형성을 위한 보상적 기능을 한다.과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밝혀낸 것은 모든 인간은 꿈을 꾼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루에 잠 속에서 보통 작게는 15분에서 길게는 90분가량 꿈을 꾼다. 우리가 꿈을 꾸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꿈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꿈은 우리의 의식이 쉬고 있을 때 무의식 속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꿈을 피할 수 없는 존재다. 꿈은 의식에서 거부된 정서들과 욕구들을 무의식의 언어를 통해 발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꿈은 그보다 훨씬 더 광활한 역할을 하는 세계이다. 꿈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 정서 불안, 인간관계 갈등, 경제문제 등 헤아릴 수 없는 원인들을 상징적으로 발산한다. 꿈은 우리 안에 좌절 된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안녕을 목표로 한다. 나아가 무의식의 중요한 장인 꿈은 정신의 균형을 통한 인격 발달을 목표로 한다. 창조적 선물로써 꿈꿈은 우리의 몸과 유기체적으로 관계되어 자기 언어를 발산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람이 과식을 하게 되면 간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되고, 그 결과 뇌에 자극적인 액체(humors)를 보냄으로 나쁜 꿈을 꾸게 된다고 생각하였다(Morton Kelsey, Dreams: A Way to Listen to God, 60). 그는 현대 과학에서 밝힌 꿈과 몸의 관계를 일찍 이해했던 것이다. 꿈과 몸의 관계에 대한 한 임상적 연구에서 건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음식과 나쁜 꿈의 관계를 연구하였다. 연구 결과 매운 음식을 많이 섭취한 사람들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매운 음식은 몸의 온도가 올라가게 하여 숙면을 취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잠자기 바로 전에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는 몸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나쁜 꿈을 꾸는 경우가 많았다. 질이 좋지 않은 기름진 음식을 많이 섭취한 경우도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많은 꿈을 꾸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많은 알코올을 섭취하는 경우에는 잠은 쉽게 들지만 오랫동안 숙면을 취하지 못하게 하여 나쁜 꿈을 꾸는 경우도 많았다. 항 우울제와 같은 약을 복용하는 경우도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꿈을 자주 꾸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늦은 밤에 과식을 하고 자게 되면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꿈을 더 많이 꾸게 되고 꿈을 기억하게 된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피곤하면 잠을 깊게 자지만 몸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는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꿈을 더 많이 꾸게 된다. 이러한 예는 우리의 몸의 상태와 꿈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꿈을 통해 우리의 몸의 상태를 알려주기도 한다. 무의식의 언어인 꿈은 우리의 정신 세계의 전체성을 위한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을 지키는 파수꾼이다.과학자들의 꿈과 음식과의 관계 연구에서 자기 전에 몸에 자극성이 심한 음식을 섭취하였을 때 나쁜 꿈을 발현시킨다는 것은 음식 자체가 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질이 좋지 않은 음식이 몸에 나쁜 영향을 주면 몸의 상태가 나쁜 꿈을 발현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몸은 질병과 꿈을 통해 자기 권리와 언어를 발산하기도 한다. 한 중년 여성은 나쁜 꿈을 통해 암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여성은 어느 순간부터 매일 밤에 악몽이 지속되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악몽이 몇 달 동안 지속되자 병원에 다시 가서 점진을 한 결과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암 수술을 받은 후에는 악몽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여성의 악몽은 자기 몸의 치유의 필요성이 꿈의 언어로 발산된 것이다. 이처럼 몸도 정신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언어를 발산하는 기능이 있다. 인간의 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비롭고 예술적이다. 몸은 가르치지 않아도 잠을 자며, 목마름과 배고픔을 구별하고, 울고 웃고, 땀을 배출하고, 체온을 조절하며, 음식을 소화시키며, 노폐물을 배설하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한다. 인간의 정신은 어떤 것도 몸과 소통하지 않으면 최상의 상태나 건강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현대인들은 몸의 외형적인 현상에만 열중한 나머지 몸에 내재하는 예술성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몸의 정신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 몸의 바른 가치를 일구어 내지 못하고 있다. 몸의 정신성은 꿈과 질병을 통해 자주 드러난다. 몸은 생물학적인 기능을 넘어서 생명력이 넘치는 정신 또는 영혼의 마당이요 자원이다. 때문에 몸은 단순히 영혼의 시녀나 정신의 종이 아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몸이 겪는 질병은 단순히 신체적 현상으로만 이해하기보다는 몸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Thomas Moore, Care of the Soul, 164). 우리가 몸의 정신성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몸의 아름다움과 몸이 말하는 소리를 더 깊이 있게 인식할 수 있다. 몸은 정신 또는 영혼의 수많은 신호의 근원이 된다. 우리가 몸이 지닌 생명력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정신 또는 영혼의 흐름이 활성화될 때 몸은 그것을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꿈은 인간의 무의식의 언어를 상징적으로 발현하는 매개체일 뿐만 아니라 몸의 정신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통로라는 인식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꿈 해석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관점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물인 몸은 꿈을 통해서도 자기 언어를 발산할 뿐만 아니라 몸의 권리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꿈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는 중요한 무의식의 언어다. 하지만 12세기 전후 이성주의가 팽배해 지면서 무의식의 언어인 꿈은 잊혀 진 언어가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꿈을 의미 없는 현상으로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꿈의 언어를 왜곡되게 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꿈에 대한 해석적 능력을 상실하여 꿈을 직해하므로 많은 왜곡된 결과를 낳고 있다. 꿈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로써 우리의 정신과 몸의 상태를 말해주는 중요한 상징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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