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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가 중요한 이유 두 가지
by Justin Dillehay
2021-09-28
당신에게 삼위일체는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만약 하나님이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질까? 삼위일체 때문에 당신의 생각과 전도 그리고 기도하는 방식에 대대적인 점검이 필요하게 될까? 당신에게 삼위일체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당신 교회에 삼위일체는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만약 당신이 좋아하는 청년 담당 목사가 확고한 양태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목사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 각각의 위격(persons)이 아니라 실제로 한 위격이고 단지 세 가지 형태로 드러날 뿐(manifestations)이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의 교회는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사실이 머리카락을 쪼개는 것처럼 충격적인 일로 생각되는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an Creed)가 당신 교회에서는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삼위일체를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누구든지 이 믿음을 저버리는 자는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아니면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과장된 표현에 불과하다고 여기는가? 역사 속 교회의 신조로만 판단하면 과거 기독교인은 삼위일체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다. 위에서 던진 질문의 정직한 답변으로 판단할 때 많은 현대 기독교인이 교리적 진술에서는 여전히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유지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한 감각은 잃어버린 상태다. 하지만 점점 더 커지는 목소리로 판단할 때 이런 현실은 교회가 꼭 회복해야 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했다. 우리는 대부분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믿음을 유지해 왔다. 정작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다. 삼위일체가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로 소개한다. 1. 복음이 중요하기에 삼위일체가 중요하다삼위일체는 단순한 복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복음의 일부이다. 언젠가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가 말했듯이 삼위일체가 중요하기에 전도를 위한 모든 만남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삼위일체로 계십니다”. 모든 복음 전도에서 삼위일체의 포장을 풀 필요는 없다(하지만 대화의 상대가 무슬림이라면 그래야 할 경우가 많다).그런데도 나는 가장 단순한 복음 진술에서도 삼위일체가 표면 바로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그 와중에도 삼위일체의 진리는 고개를 들곤 한다).이렇게 말하는 나를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면 그리고 삼위일체는 기껏해야 전문가를 위한 고급 신학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전체 신약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복음 진술 중 하나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을 외우는 당신은 이미 삼위일체의 물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라. 삼위일체의 전체 교리가 이 구절 속에서 완전히 구현되었다는 말은 아니다(성령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3장 5절 앞부분의 몇 구절을 포함하여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이 다 필요하다). 이 간단한 구절에서 삼위일체를 언급하거나 암시하고 있는 모든 내용을 찾아보도록 하자. 적어도 6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1. 세 위격 중 두 위격, 즉 하나님과 독생자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다.2.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이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을 말할 때 그것만으로도 아버지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3. 아버지가 아들을 주셨다는 사실은 각각의 인격체라는 것을 말한다. 아들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들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4. 이 사실은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아들을 주는 것이 아버지 사랑의 궁극적인 증거가 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5.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로 언급된 것에는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는 독특한 점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성경은 하나님께 아들들이 있다고 가르친다(욥 2:1; 히 2:10). 사실 요한은 이미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아들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본질상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듭나고 양자로 삼아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물보다 먼저 아버지에게서 나셨다.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요, 빛에서 나온 빛이요,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분이요,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다.6. 요한복음 3장 16절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주셨기에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구원은 삼위일체이다. 아버지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원하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람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우리가 아들로서 새 생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그들의 영을 보내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신다(요한복음 3:5, 7:37-39, 15:26, 16:12-15).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4–6).어느 작가가 말했듯이 “삼위일체와 복음은 같은 모양이다”. 이제 왜 그런지 알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은 그가 보내신 아들과 성령을 통해서다. 즉 우리의 구원은 보내신 두 가지에 달려있다. 그런 보냄이 없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아버지가 되시겠지만, 결코 우리의 아버지는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여전히 아들이 있겠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복음이 중요하기에 삼위일체가 중요하다.2. 하나님이 중요하기에 삼위일체가 중요하다삼위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는 당신이 없었고, 내가 없었고, 하늘과 땅이 없었더라도 항상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었을 것이다. “삼위일체가 실용적인가?”, “이게 시험에 나올까?”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이 아니다. 바른 질문은 “나는 하나님을 알고 싶은가?”라는 것이다. 프레드 샌더스가 관찰한 것처럼 말이다. 삼위일체의 요점이 무엇인지 또는 삼위일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바른 질문이 아니다. 삼위일체는 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삼위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언제나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교제 안에서 완벽하고 완전하시다. 이러한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면 삼위일체의 실제적 관련성을 말하는 모든 것이 엄청난 오해로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유용하게 만드시기 위해 삼위일체로 계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미국인이 삼위일체에 무관심한 이유는 너무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인가요?”라고 묻는 대신 미국인은 “유용한 건가요?”라고 물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까요?”, “삼위일체가 더 나은 배우자나 더 좋은 부모가 되게 할까요?” 하는 질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가 이교도들과 다른 게 무엇이란 말인가? 심지어 이교도들도 그런 것들에 관심을 둔다. 당신이 자신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까?”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하나님을 구원자로 안다는 것은 그분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아는 것이다. 그것이 아닌 것은 모두 다 잘못된 것이다. 삼위일체가 실용적이진 않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삼위일체는 중요하다. 그런데 삼위일체는 실용적이다.왜냐면 지금까지 살펴본 두 가지 요점을 종합해서 알게 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맺게 될 관계를 결정하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언제라도 당신의 무한한 공급이자 기쁨과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외롭고 당신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신을 창조하고 구원하셨는가?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가? 혹시 아리우스주의(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믿는 신), 양태론자 또는 이슬람교의 단일신을 믿는가? 아니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삼위일체를 믿는가? 요한복음의 하나님은 결코 외로운 분이 아니다. 왜냐면 태초에 그 어떤 것도 만들어지기 전에 그분은 이미 누군가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1).이것은 참으로 좋은 소식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사랑할만한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미 영원히 나신 아들이 계시니, 곧 그의 영광의 광채와 그의 성품의 정확한 흔적이고(히 1:3), 그의 품에 누우시며(요 1:18), 그의 사랑을 받으시는(요 17:24) 분이다. 당신과 나는 아버지의 마음에 있는 사람 모양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당신과 나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누리는 사랑은 너무 좋아서 우리끼리만 간직하기에는 아깝구나.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하신 성령과 함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우리의 사랑을 보고 서로 사랑하게 하자”(창 1:26; 롬 8:29 참조).삼위일체는 실용적인가? 한번 물어보자. 복음은 당신에게 어떤 구원을 주는가? 당신의 죄를 용서하는 재판관인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충분하지도 않다. 그보다는 삼위일체 복음이 훨씬 낫다.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 안에서 자신을 당신에게 주셨다. 만세보다 먼저 아버지에 의해 나신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살고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죽도록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인도하신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둘러싸여 그를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즐거워하게 되었다. 그것은 용서 이상의 것이다. 영원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롬 8:29),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벧후 1:4). 한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이다. 이것이 삼위일체다.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우리의 삶이다. 그것은 미스터리 한 사건이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수학 문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주신 우리 하나님이시고(요 3:16),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아들이시며(갈 2:20),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시다(롬 5:5).원제: Two Reasons the Trinity Matter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신학
교리
삼위일체
실용적삼위일체
복음적삼위일체
위격
아타나시우스신조
구원자
복음
우리가 열심히 운동해야 하는 이유
by David Mathis
2021-09-27
“난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올림픽에 출전했던 육상선수이자 선교사인 에릭 리들(Eric Liddell)의 기념비적인 말이다. 이 고백은 1981년도 오스카상 수상에 빛나는 영화, 그의 이야기를 담은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운동할 때 나오는 엔도르핀이 그가 말한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는 데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는 일은 아마추어 달리기 선수인 내게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내 경험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기쁨”을 가능한 한 크게 느끼기 위해 반드시 프로 선수처럼 달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엔도르핀을 만드셨기 때문이다.운동은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은 우리가 움직일 수 있게 하셨고, 또 격렬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 우리의 뇌가 격렬한 운동으로 지친 육체에 보상을 줌으로 육체를 더 강화할 수 있게 하셨다. 인류 역사를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앉아 있는 생활이 움직이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형태가 되어버렸다. 과거에는 요즘처럼 운동의 중요성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운동이 필요하다. 이 땅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과 강인함을 위해서도 필요하다.엔도르핀은 ‘엔도제너스 모르핀’의 준말이다. 이것은 우리 몸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모르핀과 비슷한 화학 물질이다. 엔도르핀은 통증 신호가 전달되는 것을 억제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엔도르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그분이 우리에게 심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두뇌 속에 은밀하게 심어놓으신 것,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 신성한 선물은 1974년이 되어서야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독립적인 활동을 했던 두 그룹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정리되었다. 육체적인 쾌락에 영향을 미치는 이 엔도르핀의 효과는 크게 웃거나 매운 음식을 먹을 때 혹은 사랑을 하거나 운동을 할 때 기분이 좋아지는 물질을 무의식적으로 분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격렬한 에어로빅 운동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내가 하나님을 원하지 않을 때’(When I Don't Desire God)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짧은 시간의 격렬한 훈련이나 장시간의 에어로빅 운동은 뇌의 엔도르핀, 아드레날린, 세로토닌, 도파민과 같은 즐거움을 주는 화학 물질의 양을 증가시킨다.”거룩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정직한 그리스도인의 관심사이고, 무엇보다 그 사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격렬한 운동이 어떻게 당신의 영적 건강과 기쁨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은 신비롭게도 우리의 몸을 영혼과 연결되게 하셨다. 영혼은 예배와 성경 묵상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을 깨우는데, 그것은 몸에도 놀라운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또 어떻게 잠을 자는지가 우리 영혼의 만족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데이비드 머리(David Murray) 교수는 그의 책 ‘리셋’(Reset)에서 “운동과 적절한 휴식을 취하는 생활 습관은 하루 평균 약 20%의 에너지를 증가시킨다. 만일 일주일에 3회에서 5회 정도 운동을 한다면 이는 낙심한 사람에게 항우울제를 처방한 것만큼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우리가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은 단지 죄악의 행동을 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하나님은 우리가 정기적으로 운동을 함으로써 건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운동한 날 우리의 내면이 활력으로 넘치고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하기를 원하신다. 우리 영혼을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죄의 유혹과 싸우고 죄를 이기는 최고의 방법이다. 그것은 운동을 통해 얻는 효과의 크고 작음과는 상관이 없다. 게리 토마스(Gary Thomas) 목사는 그의 책인 ‘모든 몸은 중요하다’(Every Body Matters)에서 “내 몸을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이해할 때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게으른 마음을 이기고 내 몸을 제대로 관리하겠다는 새로운 동기를 부여한다”라고 조언했다.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정기적인 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죄와 싸울 수 있게 한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 자신을 넘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싶은 마음을 갖도록 한다. 나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이웃, 교회, 직장 동료 그리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심으신 모든 사람이 내가 운동을 함으로써 혜택을 얻는 것이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했다.“내가 운동하는 가장 큰 동기는 순전함과 생산성이다. 순전함이란 예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마태복음 22장 39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생산성이란 바울이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라고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좀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예수님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생애는 단 하나밖에 없다(고후 5:15). 나는 그것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내 삶의 방식은 시간의 길이를 늘이는 것이 아니라 순전함과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성경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몸을 단련함으로써 우리는 주의 일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몸을 그저 편안한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운동은 이처럼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필요까지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단지 뭔가를 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집중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몸으로 하는 일을 통하여 기회를 잡고 무언가를 더 적극적으로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달란트 비유에서 말하는 것처럼 몸은 단지 묻어 두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성장시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운동에 관한 성경적 교훈은 ‘인생은 짧기에 몸이 원하는 대로 살아라’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몸을 단련하라’라는 것이다.하나님은 몸을 경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몸에 무관심하지도 않으신다. “몸은…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전 6:13). 이는 지금의 육체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시대의 새 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다음 구절을 보자.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인간의 몸속에 구현된 창조의 광채와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뢰할 수 있는 기독교 신학은 몸의 중요성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조한다. 하나님의 독창적인 디자인, 변하지 않는 확실성, 몸의 부활 그리고 그 몸을 통해 일하시는 부르심에 이르기까지 말이다.그의 기쁨을 느껴라우리 귀에 들려오는 진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몸을 제대로 단련시키지 않고 보내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짧다’라는 것이다.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이 몸을 제대로 단련시키지 않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에게 남은 날은 너무나 적고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은 너무나도 많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함께 배워가야 하지 않을까?원제: Do You Exercise for the Wrong Reason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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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예배해야 할 때 혼자인 이들을 위해 할 일
by Kathryn Butler
2021-09-26
지난 몇 개월 동안 교회는 대면 예배로 회복하는 달콤함을 기뻐했다. 줌 회의가 모든 일을 대신하도록 만든 2020년의 격동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대면 예배와 친교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도록 만들었다. 콜린 한센(Collin Hansen)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몸이 제대로 일하려면 손과 발, 그리고 귀와 눈 모두가 다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그러나 예배하는 모든 제자가 다 모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일마다 감사의 소리를 높이는 순간에조차 우리는 자리를 비운 형제자매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면역이 저하된 상태이며, 그 결과 백신 접종에도 불구하고 COVID-19에 걸릴 위험이 높다. 또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일상적인 단어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심각한 상태에서 고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겪는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시련을 견디는 그리스도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리스도의 몸에서 단절되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연결되어야 할 때 혼자가 된내 친구 앨리스는 이 외로운 길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암 치료를 위해 화학 요법을 시작했을 때 그녀가 다니는 교회는 조심스럽게 대면 예배를 재개했다. 마침내 형제자매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지만, 취약한 면역 체계로 인해 그녀는 자가 격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려운 일을 겪는 그 때에 사실상 가장 취약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어떤 분리감(dichotomy) 말이에요. 내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누군가가 안아주는 것, 함께 있는 것, 그리고 내 머리에 손을 얹고 해주는 안수기도인데, 약해진 면역력과 코로나 때문에 정작 가장 힘든 시간 내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또 다른 친구 진은 코로나가 한창 퍼지고 있을 때 장기 이식을 받았다. 그녀가 예상했던 것은 수술 후의 격리였지, 결코 백신을 기다리는 예닐곱 달의 장기 격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오랜 기다림 끝에 알게 된 것은 백신 효과가 이식 환자에게는 떨어진다는 사실이었고, 진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말했다. “제가 기억하는 한 교회는 내게 매우 중요해요. 아버지가 목사님이셨고 어머니는 오르간 반주자였어요. 다시 교회에 다니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릴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질병과 씨름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다. 그러나 이런 신자들도 몸의 일부, 곧 하나님의 양자로 남아 있기에 그리스도의 왕국의 발전에 있어 다른 어떤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롬 12:4-8, 고전 12:12-13).여기 교회가 도울 수 있는 세 가지 방법과 가정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교회가 도울 수 있는 세 가지 방법1. 사역을 집으로 심방, 전화 통화, 그리고 영상 통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이들에게 시원한 물 한 컵을 제공할 수 있다. 앨리스는 말한다. “목사님과 장로님이 정기적으로 줌을 통해서 성경 구절을 읽어주었고 우리는 함께 기도했습니다. 교회 리더십과 나누는 달콤한 교제의 시간이었고, 그건 제게 힘을 주었어요.”앨리스의 사례는 대면 예배가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사역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심방은 암담한 상황에서도 빛을 제공할 수 있다.2. 이웃 사랑내가 이야기를 나눈 많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형제자매들과의 교제가 생명을 준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돌봐야 하는 책임 때문에 일년 넘게 교회에 가지 못하게 된 내 친구 헬렌은 전화를 통해 위안을 얻었다. 진은 교회 친구들의 방문에서 위안을 얻었다. 진은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기도할 때 정말 도움이 됐어요. 나는 특히 아이들이 오는 것이 너무 좋아요. 무엇보다 병 말고 다른 얘기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런 만남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은 ‘새 장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어요.”앨리스는 또 교인들의 사랑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격려하고 기도하기 위해 그 사람을 반드시 잘 알 필요는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교제의 네트워크 보다 훨씬 큰 분입니다.”앨리스는 여전히 교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십시오. 격려하고, 나누고, 경청하고, 함께 그리고 (심지어 줌을 통해서라도) 기도하고, 실질적인 필요를 제공할 방법을 찾으세요. 당신의 손을 내미십시오.”라고 격려한다.3. 녹음 자료의 활용라이브 스트리밍 교회가 대면 예배를 대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데에는 꼭 필요하다. 헬렌은 어려운 시기에 만나는 온라인 예배를 “생명선”이라고 부른다. 앨리스는 말한다. “항상 그렇지만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특히나 더 거의 모든 설교나 찬양이 저에게 더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 내가 아예 예배를 건너뛰었다면, 그 시간 동안 내 영혼을 위한 중요한 모든 격려를 다 놓쳤을 것입니다.”많은 교회가 대면 예배를 재개하고 라이브 스트리밍에서 멀어짐에 따라, 이런 여성의 이야기는 집에서 나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라도 디지털 녹음 서비스가 선택적으로 배포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소망을 붙잡는 세 가지 방법1. 말씀 속에 머물기성경은 우리 발에 등이요 길을 비추는 빛이다(시 119:105). 우리가 몸과 분리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 험한 폭풍우도 헤쳐 나갈 수 있다.헬렌은 이렇게 말한다. “이 기간 동안 나는 과거에 성경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 외에는 다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내내 앉아서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가졌습니다.”앨리스는 말한다. “집에서 혼자 고립된 나 자신을 생각하면서 이게 혹시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인해 생긴 강요된 휴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나를 눕게 하신다.’ 그건 내가 스스로 휴식을 선택할 능력이 없어서라는 게 아니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나 스스로 선택했을 리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이 분리 기간 동안 교제를 갈망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혹시 주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의 말씀을 깊이 연구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시 46:10)으로 부르시는 건 아닌지 말이다. 2. 쉬지 말고 기도하기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염려를 그의 발 앞에 두라고 부르신다(빌 4:6). 질병이 우리를 고립시킬 때 우리의 기도는 더욱 뜨거워질 수 있으며, 우리를 소망에 더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다.앨리스는 말한다. “내가 믿음의 길을 걸으면서 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은(그런데 그게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신 사명의 전부였을까요?), 신실함을 유지하고, 말씀 안에 머물며, 계속 기도하는 것뿐이었어요.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답을 못 하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라서 그냥 도와 달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을 때에도, 믿음이 약해져서 헤맬 때에도 하나님은 온유와 사랑으로 저를 대하셨습니다.”우리 구주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히 4:15). 그리고 그는 상황에 관계없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요일 5:14).3.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할 것질병으로 인해 소중히 여기던 훈련과 교제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릴 수 있다. 교회에서 아무도 당신을 신경 쓰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보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의 가치는 자립, 재능, 건강 또는 독립성에서 오는 게 아니다. 당신의 가치는 오로지 변하지 않는 예수님으로 인해서만 샘솟는다. 참되고 가장 중요한 당신의 정체성은 교회 출석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모든 것은 다 당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창 1:26)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요 3:16) 자녀라는 진리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었다(계 21:5). 장애도, 질병도, 전 세계에 만연한 바이러스도,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당신을 끊을 수 없다(롬 8:38-39).원제: When You Can’t Gather: Help and Hope for Those Worshiping from Hom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예배
코로나바이러스
환자사역
고난중에기뻐하기
심방의중요성
대면예배
질병
라이브스트리밍교회
온라인예배
한 때 가장 두려워했던 일, 가족의 장례 설교
by Hershael York
2021-09-25
지난 7월 27일, 나는 장인 장례식에서 설교했다.결혼 생활 32년 내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장인을 바라보며 나는 언젠가 일어날 이 끔찍한 일을 두려워했다. 그는 그리스도나 그의 복음의 어떤 부분도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했고, 직접 전도했고, 또 다른 사람들을 보내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5년 전에는 투쿠나레(공작농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브라질 마나우스로까지 모시고 가서 전도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우리는 그의 영혼을 위해 발버둥쳤다.그의 영혼을 위한 노력마나우스에 머무는 내내 우리는 숙식을 제공한 절친한 친구인 데이비드와 페니가 섬기는 노바 바티스타 교회(Nova Igreja Batista)에 참석했다. 데이비드 부부와 노바 교회의 모든 교인이 장인을 향한 우리의 구원 계획에 공모자가 되었다.나는 구세주를 숭배하고 찬양하는 수천 명의 브라질 사람들로 가득한 거대한 성소의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장인은 그들이 계속해서 노래하는 찬양의 가사 속 한 단어, 한 단어에서 바로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내 아내를 바라보며 이렇게까지 말했다. “얘야, 이 사람들, 자신이 노래하는 가사를 정말로 믿고 있구나.” 그녀는 그 순간을 십분 활용해 예수님이 지금 찬양하는 모든 이의 삶을 바꿨고, 바로 그것이 그들이 그토록 열렬히 찬양하는 이유라고 증거했다. 우리가 켄터키로 돌아왔을 때, 공항에 나온 조카가 할아버지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조카가 나중에 말하길, 할아버지는 집에 가는 내내 노바 교회와 데이비드 그리고 페니에 대한 이야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루마 강에서 보낸 삼 일 간의 낚시, 그리고 민물 돌고래, 카이만, 고함 원숭이 등등 장인이 브라질에서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것들은 정작 장인의 머리에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단지 많은 사람들 속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 복음을 향한 명백하고도 깊이 있는 믿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몇 달 후, 장인은 쓰러졌다. 어느 날 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다시는 걷지 못했다. 가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병시중이었고, 결국 한 때 드넓은 대자연도 좁은 공간인 양 활개치며 살던 장인은 네 면의 벽으로 제한된 요양원 작은 방에 등을 대고 누워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처음 사오 일 동안 우리는 장인 방에 텔레비전을 들여놓기 위해 각종 행정 절차를 거쳐야만 했지만, 결과적으로 난청 때문에 텔레비전도 그에겐 우리가 없을 때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가 그를 강권했고, 결국 그는 가장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곳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요양원의 조용한 방에서 누군가 그에게 복음을 전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예수님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반복해서 생각나게 하셨다. 그는 마침내 복음이 자녀들과 손주들, 그리고 사망한 아내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도무지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위, 자네가 내게 설교해줘’요양원에 들어간 바로 다음날 장인을 다시 만난 아내와 나는 그의 태도에 놀랐다. 솔직히 우리가 예상한 것은 요양원을 퍽이나 싫어하는 장인의 비협조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긍정적이었고 뭔가에 집중한 듯 보였다. 그는 분명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그를 살아남도록 만든 동일한 투쟁심으로 현재의 도전에 대처하고 있었다. 우리는 적잖이 놀랐다. 우리가 가려고 일어났을 때, 장인이 손을 들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사위, 자네가 내게 설교해줘.”그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가 혼란스러운 상태이거나 아니면 나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너무 이례적이어서 그런 식으로 말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지난 32년 동안, 그러니까 그 때 그 순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자기를 위해 또는 함께 기도하자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며칠 전에 그가 했던 말은, “날 위해 좋은 말 좀 해줘.”였고, 나는 그게 기도해달라는 말로 받아들여 기도를 했었다. 이제 나는 “설교해달라”는 말을 해석해야 했고, 그건 분명히 나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장인의 손을 하나씩 잡고 기도했다. 하나님께 그의 뜻대로 그를 강하게 하시고 낫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임을 그가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나는 장인이 너무 오랫동안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았음을 하나님께 고백했고, 장인이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에 압도되어 완고한 마음을 회개하고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이 자라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아멘”하고 기도를 마쳤을 때, 장인은 내 손을 두드리고 나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나, 이미 그렇게 했다네.”“나, 이미 그렇게 했다네”우리 부부는 회의적이고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와 비슷한 말 조차도 과거에 한 적이 없는 장인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너무 쉽게 구원을 확신한 게 아닐까 걱정했다. “뭐라고요?”“이미 그렇게 했다니까.”“그러니까 죄를 회개했고, 오로지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거예요?”“그렇다니까. 나 이미 다 회개했어.”“저기, 장인어른, 이거 정말로 중요하거든요.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장인어른하고 함께 영원을 보내고 싶어서 그래요.”“그렇게 될 거야. 나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니까.”그 누구도 바라지 않을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날로부터 시작된 장인의 마지막 삼 년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제대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우리의 삶에서도 역사한 은혜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장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래서 7월 27일 장례식 설교는 결코 내가 두려워하던 내용이 아니었다. 그날 내가 한 설교는 라합이나 룻 또는 마지막에 구원받은 십자가의 도적의 장례식에서나 했음직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구속의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손조차 닿을 수 없을 것이라 보았던 한 사람에게까지 확장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였다. 새벽부터 일한 자와 똑같은 상을 받은, 오후 다섯 시에 도착한 일꾼의 이야기였다(마 20:1-16). 그것은 은혜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였다. 원제: Preaching the Funeral Sermon I Once Most Dreade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
설교
장례설교
영혼구원
노인전도
가족전도
전도전략
막판구원
회개
은사주의자와 칼빈주의자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
by Adam Mabry
2021-09-24
양복을 입은 백발의 장로교 변호사는 일반적으로 십 대의 인기를 얻지 못하지만, Mr. Z는 달랐다. 매주 우리 또래 수십 명이 그의 집에 모이곤 했다. 그는 우리에게 먹을 음식을 주고, 그의 집을 어지럽혀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그의 집에서 영화를 보고, 농구를 하게 해 주었다. 모임은 매번 성경 공부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Mr. Z를 만나 그의 집에 초대받아 성경 공부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나는 1년 동안 계속해서 그의 집을 방문하여 성경 공부를 했다. 전혀 멘토 같아 보이지 않는 그는 우리에게 에베소서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이 아름다운 책을 한 구절 한 구절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성경에 대한 그의 사랑은 전염성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내가 오늘날까지 소중히 여기는 그 은혜의 교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그때 배운 말씀 덕분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에베소서를 다시 공부하곤 했다. 등산객들에게 사랑받는 잘 다져진 길처럼 에베소서는 내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위엄을 만나고 싶을 때 가장 좋아하는 트래킹 코스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얻지 못한 어떤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바울이 기도한 것이었다. 그는 에베소 성도들이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1:19)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나는 그 능력을 얻지 못했다. 내가 J 목사를 만나고 나서야 이 능력이 비로소 내가 생각한 그런 종류의 힘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J 목사는 여러 면에서 Mr. Z와 닮았다. 둘 다 나이가 많고, 현명하며, 경건하고,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었고, 예리한 지적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J 목사는 다른 종류의 재능들을 가지고 있었다. J 목사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가 기도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곤 했다. J 목사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고 그들에게 아무도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나는 J 목사를 알게 되면서 이것들이 영적인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내 삶은 바뀌었고,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였다.매우 개혁적인 한 사람과 강력한 은사를 가진 한 사람, 이 두 사람은 나의 특성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두 단어를 물려준 분들이다. 나는 개혁파 은사주의자다. 나의 한 발은 역사적 개혁주의 세계에 확고히 서 있다. 리폼드신학교를 졸업한 나는 존 프레임(John Frame)과 같은 세계적인 교수들 가까이에서 배웠다. 그러나 나의 다른 한 발은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은사주의 운동의 세계에 서 있다. 지구의 남쪽과 동쪽에서 영적 능력으로 애쓰는 선교사들의 열정과 그들이 기적을 만들어가며 삶에서 구현하는 믿음을 나는 존경한다. 그렇다, 이것은 교회의 상황에서는 좀 낯선 모습이다.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후, 아내와 나는 교회 개척 팀의 일원으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로 이사했다. 5년 동안 우리는 몇몇 놀라운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고, 그 시간 동안 나는 Mr. Z와 J 목사에게 매우 감사하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기적이 일어났다. 성령님은 나의 간구를 통해 일하셨고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은혜의 모든 교리로 장식된 복음을 가르쳤고, 오래전에 Mr. Z의 집에서 교리공부를 할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학생들이 이 교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는 매우 고무적이고 깨달음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나는 다른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보스턴으로 이사를 했다. 다시 말하지만, 은혜의 교리와 은혜의 은사가 혼합된 능력이 맺은 은혜의 열매는 마침내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개혁주의와 은사주의, 이 두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확신 말이다.은사주의자는 교사가 필요하다교회 역사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기적적인” 은사를 가진 사람들과 관계적으로나 구조적으로 분리되었을 때 나쁜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의 목표는 그러한 은사의 지속에 대해 누군가에게 확신을 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 그렇게 해 온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분리가 현재보다 더 분명한 적이 없다. 오순절교도(은사주의자)들이 그들만의 집회에 함께 모여 책을 읽고 그들만의 교회에 머물며 그들만의 우물 안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을 때 우려할 만한 일이 발생한다. 그러한 종족주의(tribalism)는 몇 가지 꽤 지독한 오류를 낳고 양육하는 방식이다. 번영 복음이 가장 분명한 예가 된다. 나는 나의 오순절(은사주의)적인 형제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문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여러 번 있다. 나의 멘토 중 한 명이 말했듯이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불을 사랑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것으로 모든 것을 태워 버립니다.”종종 보듯이, 은사주의적 경험은 정직한 선의의 그리스도인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항상 유일하게 당신을 축복하고 당신의 인생을 위대하게 만들기 원하신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목소리는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한다. 믿음의 말씀 운동(The Word of Faith movement, 번영 신학의 한 갈래)은 때때로 공감의 마법과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곳이 바로 성경에 대한 개혁주의적 사랑의 깊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우리가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칼빈주의자도 은사주의자가 필요하다은사주의자들이 자신만의 우물에 머물듯이 우리 칼빈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최근 개혁신학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한다. 개혁파 기독교 그룹이 문신을 하고, 체크 셔츠를 입고, 수염을 기르고 다닐 만큼 충분히 멋지기 전에도 나는 개혁파였지만 그런 그룹에 속해 있는 것은 여전히 괜찮은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개혁주의 운동은 규모 면에서 보면 현대 오순절/은사 운동(Modern Pentecostal/charismatic Movement, 이하 MPCM)에 비해 떨어진다. MPCM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 운동이다. 그 그룹의 숫자는 1900년에는 통계상으로 미미했다. 현재 그 수는 약 7억 명(Wheaton Theology Conference에서 2015년 4월 3일 발표된 Allan Anderson의 논문 “Global Pentecostalism” 참조), 즉 신자 3명 중 1명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전 세계의 불교도(약 5억 명), 유대인(약 1,400만 명), 모든 민속 종교(약 4억 명)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다. MPCM의 확장세는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다.그리고 그들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그들 모두가 이단자이기 때문은 아니다(명백히 말하면, 많은 이들에게 그런 요소가 있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의 규모가 커지는 이유는 제자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칼빈주의자들이 이 주제에 대해서 잘 말하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만큼 은사주의자들도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멘토의 비유를 다시 사용해 보면, 우리 칼빈주의자들은 아름다운 벽난로를 만들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 불을 유지하는 데 애를 먹는다. 알고 있는 은사주의자 형제들이 있다면 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듣고, 배우고,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MPCM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종종 길을 잃은 양들을 미워하는 화난 칼빈파의 근본주의 부기맨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내가 개혁주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뱀을 다루고, 방언하고, 돈을 탐하는 오순절 교파의 허수아비를 불태우는 듯한 상황에 처한다.이러한 조롱은 나를 슬프게 한다. 하나님도 슬프지 않으실까?우리가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 칼빈주의자들은 MPCM 형제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나는 베니 힌(Benny Hinn)을 회의 연사로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단지 우리가 우리의 정통 MPCM 친구들이 말하는 것을 경청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그에게 동의하지 않더라도 형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는 블로그, 페이스북의 폭언, 소셜 미디어에서 간접적인 논평보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크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일부러 가셨다.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칼빈주의 목사들에게 은사주의 친구와 점심식사를 해 보라고 권한다. 뜻밖의 우정을 쌓아보라. 나는 TGC 독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은사 지속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괜찮다. 하지만 현재 이 은사를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손을 내밀 것을 권하고 싶다. 오순절 목사라면, 장로교 친구를 불러 골프를 쳐보라. 이상할 수도 있지만, 9번 홀에 이를 때쯤에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가 될 것이다.사랑은 또한 우리가 서로에게서 배우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은사주의자들이 돈 카슨(Don Carson)과 같은 사람으로부터 주석을 배운다면 일어날 수많은 좋은 일들을 상상할 수 있는가? 칼빈주의자들이 MPCM 소속 상대방처럼 선교적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배운다면 어떤 왕국의 열매가 나타날 것인가? 나는 때때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오순절파의 열정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칼빈파의 열정이 결합되어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공상을 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이 글의 목적은 우리가 앞장서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서구 교회의 역사는 두 번째 세 번째 지점의 교리적 차이들에 관한 분열과 갈라짐과 수많은 나뉨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 문화권에서 기독교인들은 분열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은혜의 교리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는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실천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셨던 방식을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러한 은혜가 가능하도록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다. 선교를 완수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함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다. 은사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기분 좋게 동의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우리의 양심을 타협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영적 능력을 위해 성경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둘 다 가질 수 있지만 둘 다 얻으려면 아마도 서로를 설득시켜야 할 것이다.Mr. Z와 J 목사는 만난 적이 없지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아마도 내가 이 만남을 주선할 것이다.원제: Why Charismatics and Calvinists need each oth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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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은사주의자
MPCM
은사지속주의
은사중단주의
번영복음
말씀운동
부부 사이 ‘사소한 갈등’이 만든 쓴 뿌리 이겨내기
by William P. Farley
2021-09-23
트로이의 목마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십 년간 고대 그리스의 전사들은 트로이를 포위했지만, 트로이의 막강한 방어벽은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마침내, 그리스는 전면적 공격 대신 속임수를 쓰기로 했다. 그들은 나무로 만든 거대한 말을 만들었고, 그 안에 군인들을 남겨놓고는 철수했다. 포위하던 군인들이 다 철수했다고 생각한 트로이는 남겨진 말에 호기심을 느꼈고, 그 거대한 말을 도시 안에 들여놓고 잠에 들었다. 바로 그날 밤, 그리스군은 말에서 나와 트로이를 안에서부터 함락했다. 사탄은 이런 트로이의 목마를 결혼 생활 안에 들여놓는다. 사탄은 아주 사악한 숨겨진 무기를 통해서 결혼 생활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을 성취한다. 그리고 트로이의 시민들처럼 우리 대부분은 사탄의 무기가 우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기 전까지 목마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사탄이 숨겨놓은 이런 무기를 “쓴 뿌리”라고 불렀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히 12:15). 작은 불만 그러나 커다란 영향 쓴 뿌리의 위력은 대단하고, 특히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쓴 뿌리는 아주 사소한 작은 불만이 서서히 쌓이고 또 쌓이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쓴 뿌리는 당신의 결혼생활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위협할 정도로 위험하다. 나는 지금 나와 다를 바 없이 원죄로 타락한 또 한 명의 사람과 함께 살 때 “항상 발생하는(routine)” 매일의 불만과 상처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죄인 가정 폭력과 외도 같은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게 아니다. 보다 더 전문적인 토론이 필요한 그런 죄는 지금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 주제다. 예를 들어서, 수도 없는 아내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계속 더러운 셔츠를 마룻바닥에 던져놓고, 아내가 계속 그 셔츠를 치우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내는 무시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또 자녀와 관련된 일은 결코 잊어버리는 법이 없는 아내가 남편과 함께 나가는 외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경우도 생각해보자. 그녀는 남편보다 자녀들을 더 사랑한다. 그때 남편은 자신이 항상 돈만 갖다주는 사람이란 느낌을 받을 것이고, 자기가 가정에서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정 폭력과 외도와 같이 결혼을 파멸로 이끄는 자명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모르는 게 있다. 바로 아주 사소한 갈등이 마음 속에서 쌓여갈 때, 그것은 서서히 쓴 뿌리가 되고 건강한 결혼을 손상시킨다는 사실이다. 현명한 부부라면 애정 관계에 흠집을 내고, 친밀함을 사라지게 하고, 또 결혼의 기쁨을 앗아가는 쓴 뿌리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배우자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을 하는 경우, 해결되지 않은 쓴 뿌리가 그 원인일 때가 적지 않다. 그렇기에 잠언 저자는 이렇게 썼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우리의 다섯 자녀가 아주 어렸던 정신 없던 시절에, 우리 부부는 부부 수련회에 참석했다. 우리는 우리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내, 주디는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너무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나를 위한 에너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집에 와서 양육을 도우면서도 좋지 않은 마음을 품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는 문제를 인식했다. 나는 내가 가진 쓴 뿌리를 회개했고, 내가 생각하기에 아내가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여겼던 것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대신 나는 어떻게 해야 아내를 더 잘 도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회개하지 않은 쓴 뿌리는 영적 눈덩이가 되어 결국은 굴러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만다. 부당한 이유로 남편을 비난하는 아내의 남편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마음속에 원한을 품는다. 또 다른 원한이 하나둘씩 쌓여가기 시작한다. 결국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늦게 집에 오는 날 아내에게 늦는다는 전화를 하지 않는 남편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내는 원한을 품기 시작한다. 또 다른 불만이 그 위에 쌓이고, 삼 년이 지나자 그들은 결국 각방을 쓰게 된다. 사소한 것을 덮으려고 하지 않고, 또 용서하려고 하지 않을 때에 그런 관계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예수님은 강하게 경고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성경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은 허물을 용서한다(전 19:11). 그러나 이 지구상에서 가장 친밀한 두 명의 죄인이, 겉과 속을 서로 너무 빤히 보면서 살아야 하는 부부라면 어떨까? 결혼 생활 속에 있는 쓴 뿌리와 싸우는 최소한 네 가지의 방법이 있다. 1.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라이런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배우자가 아닌 나 자신의 죄를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무한한 댓가를 치름으로써 들보와 같은 죄를 지은 당신을 용서한 사실을 인식하는 정도와 상대를 용서하려는 마음은 비례한다. 오랫동안 나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나의 죄는 가볍게 여기고, 대신 나에 대한 아내의 죄는 중대하게 여겼다. 나는 나의 죄를 하나님이 보시는 방식으로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왜 내가 용서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결혼 14년 차에 들어가면서 나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설교집을 읽기 시작했다. 에드워즈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동시에 내 죄의 심각성을 보도록 도와주었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에베레스트 산과 같이 높은 나의 죄를 보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아내의 죄는 에베레스트 산 옆에 있는 작은 모래 더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내가 내게 저지른 잘못이 하나님께 지은 내 죄에 비해서 그토록 사소한데, 어떻게 내가 아내에게 고의적인 원한을 품을 수가 있겠는가? 내 죄의 심각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아내를 향해서 내가 품었던 쓴 뿌리의 원인이었다. 자존심은 대부분의 경우 쓴 뿌리의 원인이 된다. 자존심은 내 죄는 희미하게, 그러나 배우자의 죄는 시력 2.0의 정확성으로 보도록 만든다. 이런 자기 의는 결혼생활에 치명적이고 또 용서하려는 마음을 갉아먹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먼저 용서했기에 용서하는 사람들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확보한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준다. 2.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결정임을 깨달으라두 번째 무기는 더 어려울 수도 있다. 너무도 자주 배우자가 회개하고, 우리는 용서하고 또 용서한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다. 아픔은 사라지지 않고 생채기는 여전히 벌어져 있으며, 고통은 여전히 생생하다. 우리는 감정을 조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결정은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반복적으로 또 끈질기게 배우자의 실수를 용서하려는 의지를 가지라는 것이다. 3. 감정이 따라올 때까지 인내를 가지라베드로가 예수님께 원수를 일곱 번 용서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일곱 번씩 일흔 번은 성경적으로 결코 끝나지 않는 인내를 상징하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용서하고, 용서하고, 그 용서를 끝내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부부라고 할지라도 결혼 생활을 하다보면 친밀감을 방해하는 상처를 하나님의 자비가 녹일 때까지 회개하고 서로 용서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당신의 감정, 느낌을 함께 나누라. 당신의 감정은 중요하다. 비록 사안이 확실한 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중요하다. 감정을 꾹꾹 눌러놓지 말라. 정직하라. 당신이 느끼기에 배우자가 당신에게 지은 죄라고 생각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라. 서로를 향해서 겸손하고, 또 필요하다면 완전한 용서와 화해가 올 때까지 회개하도록 노력하라. 4. 당신의 상한 감정과 쓴 뿌리가 사실 근거가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놓으라전혀 마음 상할 일이 아닌데도 마음이 상하는 것도 가능하다. 상대방 마음에 있는 동기를 정확하게 볼 수 없기에,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 혹시 배우자로부터 결코 기대해서는 안 되는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해결책은 쓴 뿌리를 가진 것에 대한 회개 밖에 없다. 쓴 뿌리가 서서히 자라기 시작할 때,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내가 상담했던 한 남자는 부인과의 잠자리 횟수가 원하는 만큼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아내를 향한 그의 분노는 몇 달에 걸쳐서 부글부글 끊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자신의 기대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아내를 향한 그의 쓴 뿌리가 죄성의 결과임을 깨달았다. 아내가 아닌 그가 회개해야 했다. 그는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고, 아내는 그를 용서했다. 우리가 행여 비정상적인 기대를 하는 건 아닌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기대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죄를 짓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고, 그 결과 죄가 없는데도 죄가 있다고 생각하며 회개할 필요가 없는데도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치명적인 쓴 뿌리다. 예수님을 바라보자오래전 트로이 시민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군이 얻은 승리는 전면적인 공격이 아닌 속임수 때문이었다. 사탄은 우리에게 같은 방법을 쓴다. 사탄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생기는 쓴 뿌리라는 비밀 병기로 친밀한 결혼 생활을 박살내려고 한다. 무엇보다 당신의 눈을 십자가에 고정시켜라.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적극적으로 용서하라. 부부가 함께 대화하라. 반복해서 용서해라, 그러면 쓴 뿌리가 당신의 결혼 생활이 주는 기쁨을 상하게 하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원제: 4 Ways to Battle Bitterness over ‘Minor Offenses’ in Marri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가정
결혼
갈등
쓴뿌리
불만
용서
자존심
감정
죄인
인내
며느리 사랑하기: 아들의 결혼 생활을 돕는 법
by Jani Ortlund
2021-09-22
문제는 지금 당신이 다른 여자의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신은 그 여자가 자기 남편을 알기 한참 전부터 그를 알았고 사랑했는데, 그가 당신이 아닌 그 여자를 선택한 것이다. 게다가 그 여자는 당신보다 훨씬 젊고 예쁘기까지 하다. 사랑으로 오랜 세월을 헌신했지만, 당신 아들은 자기 엄마가 아닌 그 여자를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로 여기며 사랑할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당신이 모르는 것도 아니다. 며느리와 당신의 이 독특한 관계를 어떻게 하면 잘 세워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며느리의 마음에 바리케이드를 치지 않고, 그 마음과 소통하는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처음 해야 할 일시어머니로서 당신이 처음 해야 할 것은 자기 아내를 향한 당신 아들의 사랑과 기쁨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머니라면 아들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길 바랄 것이다. 사실 며느리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경건한 아내를 주시도록 오랫동안 기도해 온 당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응답이다. 아들이 당신에게 “어머니, 찾은 것 같아요.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찾았어요”라고 말하는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려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당신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아들 부부로 인해 놀라거나 실망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며느리의 태도로 인해 속이 상할 때도 있다.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것은 안다. 하지만 서로 믿는 솔직한 관계, 며느리와 당신이 함께 사랑하는 그 남자에게 유익을 주는 관계를 세워가고 싶다. 당신의 아들이 사랑하는 그 여자와 솔직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로 세워나가는 것은 바라는 일이고 기쁜 일이다. 당신에게 딸이 있다면 그 딸이 ‘자기’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원하지 않겠는가? 당신에게는 며느리를 바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셈이다. 그렇게 하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ㆍ지금 누구의 감정이 중요한가? 내 감정인가 아니면 며느리의 감정인가? 며느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ㆍ이번 명절에 시댁에 오라고 하면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지는 않을까?ㆍ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이나 이야기가 자기 인생 전부를 내 아들에게 주기로 한 며느리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는가? 그 이야기를 듣는 며느리가 평안할 수 있을까?아들의 결혼 생활을 돕는 방법아들의 결혼 생활을 지지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며느리를 사랑해주는 것이다. 경건하셨던 시어머니께서 나를 사랑해주심으로 자기 아들의 결혼 생활을 응원해 주셨던 실제적인 방법들을 나누고자 한다. 필자의 시어머니께서 세워주신 모본에 깊이 감사한다. 1. 구체적인 방식으로 사랑하라며느리의 생일을 챙겨라. 성탄 선물도 잊지 마라. 전화나 문자를 통해 안부를 물어라. 공감해주고 이해해줘라. 며느리가 듣고 있든 아니든 당신 아들의 아내를 높여줘라. 누구보다도 먼저 며느리를 존중하는 사람이 되라(롬 12:10).2. 아들 부부의 결혼 생활이 우선이다조언은 며느리가 요청할 때만 하라. 며느리와 당신 아들의 관계가 당신과 아들의 관계보다 훨씬 중요하다. 만일 아들이 자기 인생의 두 여자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면 당신이 아닌 며느리를 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쉽진 않겠지만 이것이 옳은 길이고 좋은 선택이다. 나는 훌륭한 시어머니를 모시는 복을 누렸다. 앤 오트룬드(Anne Ortlund) 여사는 여러 면에서 뛰어난 당신의 아들이 선택한 나를 보며 실망했던 부분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이를 내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묻지 않으면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며느리가 되는 법이라 할지라도 먼저 조언하지 않았다. 속마음을 터놓고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오후, 시어머니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시아버지(Ray Sr.)와 내 남편(Ray Jr.)이 함께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찍은 사진에 눈길이 갔다. “부자가 모두 정말 잘 생겼지요?”라고 내가 말하자 그렇다고 맞장구치시며 “아들이 그 시합에서 다쳤는데, 그때 아빠(Ray Sr.)가 거기 있어서 참 감사했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어머님, 저는 레이가 저렇게 머리를 짧게 깎은 게 좋아요”라고 작은 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그러니?” 어머님이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나는 레이가 머리를 기르는 게 네가 그런 스타일을 좋아해서인 줄 알았어.” “사실, 아니에요. 하지만 그이가 머리를 길게 하는 걸 좋아하니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됐는데 잔소리꾼이 되긴 싫어서요.”“그렇구나.” 어머님은 지갑이 있는 곳으로 가서 현금을 좀 꺼내오셔서는 내 손에 그 돈을 꼬옥 쥐여 주며 말했다. “남편이랑 꼭 얘기해보렴. 얘기하지 않으면 네 생각이 어떤지 전혀 모를 거야. 하지만 언제 얘기해야 할지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기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직후라든지 배가 고플 때는 하지 말고, 한가한 날 저녁에 이 돈으로 함께 나가서 외식을 한번 하렴.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충분히 대화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즐긴 후에 네 생각을 이야기하면 될 것 같구나. 애원하거나 충고하는 말투,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고, 그저 조용히 용기를 내어 네 마음을 말하고, 결정은 남편에게 맡겨보렴”.어머님은 현명하셨다. 당신 아들이 부모를 떠나 새로 맞이한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수 있게 하셨다(창 2:24). 어머님이 당신 아들과 자신의 관계보다 나와 당신 아들과의 관계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존중하셨기 때문에 나도 어머님의 조언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저녁, 남편이 깔끔하게 이발한 모습으로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나와 어머님이 얼마나 놀랐는지 여러분은 아마 모를 것이다. 3. 며느리의 살림과 육아 능력을 불안해하지 마라당신 역시 당신이 최선이라 믿는 대로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키워온 것이 아닌가? 며느리에게도 같은 기회를 주라. 주부와 어머니로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그녀를 풀어주라. 며느리를 대할 때 불편한 마음이나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인내와 열린 마음으로 하라. 당신에게 있는 염려들을 내보이지 않고 자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늘 아버지께 구하라(갈 5:22–23). 인생에 있어 진짜 문제는 가장 가까운 가족 관계 안에서 발생한다. 며느리가 당신에게 해주길 바라는 만큼 당신도 며느리에게 관대하게 대하라. “아이들을 셋이나 보살피면서도 다시 전업으로 일을 시작해야 하니 얼마나 힘드니? 정말 대단하구나”, “요즘 무척이나 바쁠 텐데, 내가 널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니? 혹시 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은 없니?”라는 말과 같이 부드러운 질문을 하라.진실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는 옆으로 비켜서고 다른 이들이 올라가게 해준다. 공감과 존경을 받고 싶은 당신의 욕구는 당신 아들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데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그런 것을 추구할 필요가 있는가? 며느리와 경쟁하지 마라. 며느리가 당신보다 잘 하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라. 며느리와 경쟁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승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가장 큰 피해는 당신 아들에게 돌아간다. 어려울 때 그리스도를 신뢰하라며느리에게 정말로 동의할 수 없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구주께서 무시와 학대 그리고 경멸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셨던가?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다.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기셨다(롬 12:21). 그의 은혜로, 또한 그의 영광을 위해 당신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 며느리와 의미 있는 관계를 세워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당신 가정의 아버지 되시고, 당신 아들 가정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당신의 잔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를 넘치도록 채우라. 가까운 가족 관계에서는 늘 다툼이 생기게 마련이다. 갈등이 일어날 때, 당신의 보잘것없는 의견이나 불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갈등의 공간을 채워주실 것이다. 당신이 쏟아내는 것보다 많은 것을 그분에게 받아 마시라. 그래야 텅 빈 채로 살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의 약속,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견고한 기초가 당신과 며느리 사이에 세워지도록(사 58:12) 기도하라. 원제: The Other Woman in His Life: How to Strengthen Your Son’s Marriag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이정훈
가족
결혼
고부관계
은혜
용서
관계
가정
며느리
결혼생활
육아능력
명절 가족 모임을 위한 5가지 목표
by Kathleen Nielson
2021-09-21
명절 가족 모임의 시간이 가까워졌다. 이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별생각 없이 기쁜 마음으로 그 시간을 기대하는 사람들조차 각자의 습관과 생활 리듬을 가진 가족들과 만남에 따른 긴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어찌 보면 복잡한 이 시기를 헤쳐 나가기 시작하면서, 믿음의 아내, 장성한 자녀의 어머니, 비교적 풋내기 시어머니와 할머니로서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5가지 가족 모임에 관한 목표를 적어 보았다. 물론 각자의 삶의 다양한 배경과 상황에 따라 관점은 다를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삶의 여정의 단계에서 얻은 괜찮은 조언을 목록에 추가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1. 미리 기도하자너무도 바쁜 일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명절을 맞이하게 되다 보니 우리는 흔히 여행, 메뉴, 손님맞이 등 실용적인 준비에만 몰두하게 된다. 우리가 함께 모이기 전, 시간을 내어 육체적 준비뿐 아니라 영혼의 준비를 위해 미리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내가 자녀들의 가정을 방문하거나 우리 집에 맞아들일 때 기도로 북돋아 주며 아이들의 바쁜 삶 가운데 그들을 격려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큰 차이를 만든다. 우리가 중요한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한 기도,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드리는 기도,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유익한 말만 하도록 드리는 기도를 해보자.2. 하나님께서 내 입술을 주장해 주시기를 기도하자(시 141:3)수년간 장성한 미혼 아들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제쳐 놓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미 2년간의 할머니 역할과 3년 동안 결혼한 자녀와 함께 여러 차례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는 (전화 대화와 이메일을 포함하여) 방문 전과 방문 중 및 후에 기도하는 것이 포함된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때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 무심할 수 있다. 장성한 자녀와 손주를 둔 한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그저 “NORTH”라고 말한다고 한다.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그것은 “Not Our Row To Hoe!”(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님)의 머리 약자라고 한다. 이제 남편과 나는 종종 “NORTH”를 사용했다. 그것은 다른 많은 불필요한 단어를 대체한다!성경의 지혜는 우리에게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는 꿀송이와 같은 선한 말”을 위해 기도하도록 가르친다(잠 16:24).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 안에 거하시고 우리 삶에 선한 말씀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시는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말씀이다. 주님, 당신의 영으로 제 입을 지켜 주시옵소서. 복음의 은혜로 나의 말에 품위가 있게 하옵소서.3. 삶의 다양한 상황에 있는 가족들을 돌아보자종종 가족이 모일 때에는 자녀가 있는 기혼 자녀, 자녀가 없는 기혼 자녀, 미혼 자녀, 연로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및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된다. 어떻게 하면 모두를 한 번에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아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만나는 동안 각기 다른 상황이나 관심 분야에 뭔가 관심을 끌 만한 무언가가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좋은 음식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좋은 매개체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우리는 가장 연장자와 막내가 한자리에서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시간과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충분한 활동이 필요하다. 우리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하기 시작한 이야기로부터 해외여행에 대해 배운 것이나 방문한 이야기들 혹은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이야기 등,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다양한 구성의 가족 단위를 다양한 활동에 관여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경건의 시간이든, 식사 시간이든, 다양한 종류의 게임이나 산책이든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복음을 위해 사용하시는 수많은 방법을 볼 수 있도록 젊은이와 노인, 그리고 매우 다른 삶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가족의 기쁨을 나누는 것은 얼마나 큰 선물인가?4. 나의 계획에 주권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불어넣자잠언은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라고 말한다. 그 구절은 내게 현실로 서 있는 견고한 하나님의 계획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계획은 사람들의 두뇌에서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상상하게 한다. 우리가 가장 신중하게 생각해낸 크고 작은 계획들이 우리 눈앞에서 얼마나 빨리 바뀌곤 하는가! 우리가 비행기를 놓쳤거나, 저녁 식사를 망쳤거나, 질병에 걸렸거나, 훨씬 더 심각한 반항적인 아이나 건강 위기와 같은 슬픈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의 전반적인 관점은 견고하고 확고한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에 의해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다.우리는 여전히 애통해 하거나 슬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믿는 자로서 우리 영혼의 흔들리지 않는 밑바닥에 주님께서 우리의 반석이 되시며 우리의 구세주시라는 것을 안다. 그분의 구속 계획은 모든 역사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로 묶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계획이 우리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더라도 우리는 잊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정하여 주신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5. 함께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자화려하거나 색다르거나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이것을 듣거나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지적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목적하신 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은 간단하지만 서로에게 우리의 영혼을 열고 영적 실재를 경험하게 한다. 믿지 않는 손님이나 가족에게 이것은 강력한 간증이 된다. 아버지가 이러한 습관을 주도하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그런 가정과 결혼한 사람으로서 나는 기도와 찬송, 그리고 주위에 울려 퍼지는 말씀으로 모인 가족들에게 강력한 증거와 기억에 대해 간증할 수 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들에게도 이것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성장하게 한다.물론 어떤 가정에서는 관련 가족의 구성에 따라 그러한 공개적인 간증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 얼마나 놓칠 수 없는 축복이겠는가!그러니 우리를 모으소서, 주님,어려운 상황의 가정 가운데서, 우리가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지만아버지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며,아버지의 은총으로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이신 생명,그 풍성한 생명을 당신의 아들을 통해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주님, 우리 가족의 지경을 깊고 넓게 만들어 주시고우리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옵소서 보이는 것 이상을 위해,하늘과 당신의 하늘 보좌를 위하여,그토록 소중하고 짧은 삶을 위해,당신의 아들을 통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기도합니다.원제: 5 Aims for Holiday Family Gathering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생활
관계
명절
가족모임
가정
가족
결혼
NORTH
간증
은혜
어려운 환경에도 감사하기
by Laura Baxter
2021-09-20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들은 첫 번째 정신질환을 앓았다. 조현병의 변종인 분열 정동병 진단을 받았다. 지난 몇 년 동안은 그에게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가족인 우리도 그와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5년 전, 아들은 전액 장학금을 받고 대학교에 들어갔다.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친구들과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변했다. 4년 동안 다섯 번이나 병원에 입원했고, 학교도 여러 번 휴학 해야만 했다. 아들의 행동은 이상했다. 소외감을 느끼고 좌절하고 낙담하는 모습이 때로는 무섭게 느껴졌다. 많은 약을 먹었다. 어떤 약은 비쌌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또 어떤 약은 악몽을 꾸거나 공포를 느끼게 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마지막 입원 후, 의사는 그의 전두엽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서 보호 기관을 알아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조현병은 인구의 약 1%를 괴롭히는 파괴적인 정신질환이다. 일반적인 증상으로는 환청, 환시, 망상, 횡설수설하는 말, 의욕감소 그리고 무감각 등이 있다. 정신분열증이 있는 사람은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다. 친구를 사귀거나 직장을 다니는 것, 심지어 정기적으로 옷을 갈아 있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나는 엄마로서 5년 동안이나 울며 기도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감사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명절 연휴에는 특히 힘들었다. 물론 감사 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음식, 가족, 친구들, 집 등. 그런데 이런 감사의 제목도 사랑하는 아들이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믿음이 있는 사람은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하지만 현재의 나는 어떻게 감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시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세계 2차 대전 중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일원이었던 코리 텐 붐은 벼룩이 가득한 독일 강제 수용소의 생활을 기록했다. 코리의 영적 자매인 베시는 코리에게 벼룩을 보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만큼 감사를 실천하는 생활을 하라고 말했다. 코리는 베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놀랍게도 교도관들은 죄수들에게 전례 없는 자유를 주었다. 이런 자유가 주어진 것은 경비원들이 벼룩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코리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코리가 나치 수용소에 있는 벼룩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사랑하는 아들이 정신질환을 겪고 있지만 말이다. 5년이 지난 후, 내 질문의 대답은 기적처럼 “그렇다”가 되었다. 이제 아들의 아픔과 고통을 직접 경험하고 깨달은 4가지의 축복을 이야기하려고 한다.1. 동지애아들의 정신병은 고통스럽고 남에게 드러내기 싫은 일이다. 그것은 분명 우리 가족 모두에게 위기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위기로만 끝나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가 한편에서는 감사와 축복의 상황으로 변해갔다. 우리는 친구에게 마음을 열고, 교회 가족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면서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조현병에 관한 블로그와 회고록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이런 고통을 나만 겪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전국에 있는 ‘온라인’ 친구들을 사귀었고, 서로 격려하고 위안을 얻었다. 위기를 만나기 전까지 결코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역설적이겠지만 아들의 병을 통하여 만난 관계에 감사했다.2. 연민건강한 사람들에게 정신질환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종종 수치심을 느끼거나 소외되는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솔직하게 나도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피했었다. 그러나 아들의 경험을 통해 정신적 질환이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아들은 여전히 내 아들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형상이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가족의 위기를 통해 내 주변의 고통을, 특히 사회적 기대에 못 미치는 성인 아들을 둔 부모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제는 불안과 우울증으로 약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었다. 아들의 고통을 통해 내 마음을 부드럽게 변화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3. 교감C. S. 루이스가 쓴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 소리치신다”. 내 세계가 무너졌을 때 하나님께로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기도하는 횟수가 많아졌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시간도 늘었다. 모든 예배에 집중했고 눈물로 가득한 찬양을 했다. 욥기를 자세히 읽으며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건 아닌지 궁금했다. 아들의 삶과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았다.여러 정신과 전문의들에게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의 소망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내가 걷는 걸음마다 함께 걷고 계심을 발견했다. 욥과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서 경험하게 되었고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욥 42:5).4. 만족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0). 고통이 찾아왔을 때 나의 첫 반응은 이렇지 않았다. 선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아들의 마음이 파괴되는 것을 허락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나는 서서히 타락한 세상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부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번영신학 설교자들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이 땅에서 건강과 부를 약속하지 않으셨다. 나와 아들의 삶의 의미는 부유한 환경, 목적의 성취,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멋진 순간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거하는 그곳에서 신실하게 남아 있기를 원하신다.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노력 끝에 얻은 교훈이기에 감사하다. 감사를 위한 싸움가족이 함께 모이는 명절에 당신의 어려움과 위기 상황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의 “벼룩”에 대해 이야기하라. 당신이 싸우고 있는 정신적 질환, 외로움, 실직의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다음 감사를 위해 싸워라. 바울은 믿는 자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고후 6:10)라고 묘사했다. 성령님이 함께 하는 당신에게도 이 말씀은 적용된다. 상하고 깨진 마음을 그분께 가져가라. 마음껏 울라. 그리고 주신 것에 감사하라. 원제: Giving Thanks When Your Family Is Struggl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송유희
생활
건강
동지애
연민
교감
C.S.루이스
만족
성령의도움
상한심령
감사
성경읽기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by Terry Johnson
2021-09-19
나는 1960-70년대 전형적인 복음주의 교회에서 자랐다. 그 교회는 성경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며, 남부 캘리포니아의 여러 교회와 농장이 풍부한 캘리포니아 중부 계곡과 교단적으로 연결된 교회였다. 이 회중은 처음에 황량한 지대와 대공황의 고난을 피해 서부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가족들로 구성되었다. 우리 교회는 우리와 유사한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좋은 교회, 복음주의 교회, 신실한 교회였다.그러나 나는 설교 본문이 된 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교회 예배 중에 성경 낭독을 들은 기억이 없다.복음에 대한 소홀함이웃 교회들의 이러한 모습은 10대와 20대 초반에 내가 한 번쯤 방문했던 남부 캘리포니아의 모든 대형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 그 지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교회 예배에서 많은 분량의 성경 읽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오늘날 전형적인 복음주의 교회의 특징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대비되는 성공회 교회의 성경읽기나는 영국 브리스톨에 있는 성공회신학대학 Trinity College에서 2년을 보냈다. 그 기간 동안 예전적 교회나 비예전적 교회, 진보 교회나 보수 교회 등 성공회에 속한 수많은 지역 교회의 예배에 참석해 보았다. 그 교회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바로 기도서와 연간 일정표에 따른 성경 읽기였다. 구약, 신약의 서신, 복음서, 시편 등 모든 성경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성경읽기가 풍요롭고 계속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점이 있었다.대체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공적 예배에서 많은 분량의 성경을 읽지 않는다. 성공회 신자 중 일부는 자유주의적 회의론자이며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이다.왜 복음주의 교회는 많은 분량의 성경 읽기를 하지 않을까?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배 시간에 찬양하고 말씀을 전하고 아마도 광고나 가벼운 대화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설교 본문 외에는 성경 읽기가 생략되어 있다. 왜일까?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안에서 가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적 예배에 많은 분량의 성경을 읽는 것은 매우 지루한 일이며, 지루하다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성경을 믿고 무오성을 옹호하는 복음주의 교회는 단순한 성경 읽기가 공적 예배에서 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성경 말씀 자체의 증언나는 ‘Worshiping with Calvin’에서 J. C. 라일(J. C. Ryle, 1816-1900)을 포함하여 이 단순한 공적 성경 읽기로 변화된 사람들의 예를 제시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에게 성경 읽기를 통해 변화된 것에 대한 이야기식 간증이 필요한 건 아니다.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나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하나님의 말씀의 신령한 젖으로 자라며,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거룩하게 되고,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세워 영원한 기업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진리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열매를 맺으며 자라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고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며, 복음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언한다(벧전 1:23-25; 롬 10:17; 벧전 2:2; 요 17:17; 행 20:32; 골 1:6; 히 4:12; 롬 1:16; 참조 엡 6:1, 살전 2:13, 딤후 3:15, 렘 23:29, 사 55:11, 살전 1:5, 약 1:21). 이 외에도 성경은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내 인생의 전환점나에게 전환점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1977년 가을 밤에 있었다. 그 때 나는 트리니티 학생들 몇 명과 함께 브리스톨 다운스를 가로질러 보수적인 성공회 교회인 St. Mary’s Redcliff Church로 걸어갔다. 예배 중간쯤에 한 남자 성도가 일어나 구약 성경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낭독했다. 그는 그 말씀을 천천히, 주의 깊게, 그리고 강조하여 읽었다. 효과는 강력했다. 그리고, 다이나믹했다.그러자 나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의문이 생겼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왜 확장된 거룩한 독서(역사적 개혁주의 실천)를 지속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이다. 물론 성경 읽기는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의 모든 요소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잘 읽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읽는 사람은 이해와 뉘앙스를 가지고 읽을 수 있도록 성경 본문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자. 회중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구차한 변명이다.우리가 성경이 스스로 증거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성경 읽기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성경 읽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XXI.3-5)와 그 자매고백서(London, Savoy)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된 예배의 필수 요소로 확인된 5개 항목 중 하나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공적 예배에 관한 지침서인 예배모범(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은 두 차례의 주일 예배에서 모두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각각 한 장씩을 읽도록 권하고 있다.공적 예배에서 성경을 적어도 한 장씩 읽는 방식은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일 것이다. 원제: Yes, Scripture Reading Really Does Change People출처: www.9marks.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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