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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국가주의를 바라보는 지혜
by Tim Keller
2021-08-18
이 글은 사무엘 페리(Samuel L. Perry)와 앤드류 화이트헤드(Andrew Whitehead)가 쓴 ‘미국을 다시 하나님에게로: 미국의 기독교 국가주의(Take America Back for God: Christian Nationalism in United States, 옥스포드, 2020)’에 관한 팀 켈러의 서평으로 ‘기독교 국가주의 바로 알기’에서 이어집니다.종교적 관습(practices) 대 기독교 국가주의 그러나 기독교 국가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이 기독교 국가주의가 아닌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반복해서 말한다. “일부 독자들을 놀라게 하거나 또는 실망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백인 복음주의자에 관한 게 아니다. 확실히 백인 복음주의자와 기독교 국가주의 사이에는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다. … 그러나 이 두 개념은 전혀 동의어가 아니다. … 기독교 국가주의자 중 많은 사람이 … 복음주의적 특징을 가진 개신교 신앙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많은 … 비기독교인도 … 강한 기독교 국가주의 신념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주의적 믿음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 국가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정치에 있어서 기독교 국가주의와 종교적 헌신은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중요한 부분에서 저자들은 바로 이런 사례를 제시한다. 조사 과정에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중동에서 온 난민은 테러 위협이 된다.”, “미국의 전통을 존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기독교 국가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에 강하게 동의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 출석, 기도, 성경 읽기에서 열성을 내는 미국인일수록 이런 문제에 대해 기독교 국가주의자의 주장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교회 공동체에서 성경과 기도에 더 시간을 쏟는 기독교인일수록 기독교 국가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적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서 기독교 국가주의는 높은 도덕 표준을 장려하지 않으며 자기 희생, 평화, 자비, 사랑, 정의 등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종교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는 기독교인일수록 기독교 국가주의자와 달리 이민자를 환대하고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평등하게 받아들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구현하려는 데에 더 열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약자를 보호하라는 건 성경의 명령이고 성경에는 기독교 국가주의와 완전히 모순되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종교 활동 수준이 높아질수록 인종, 빈곤, 정의에 대한 믿음은 덜 보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반면에,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개인의 종교성 수준이 높아지면 섹슈얼리티, 젠더, 이혼에 대해 더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종교적 관습에 더 많이 참여하는 미국인은 “이민자를 배척할 가능성이 적고, 흑인에 대한 편견을 지지하거나 무슬림을 두려워할 가능성이 적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반대를 발견한다. 높은 수준의 종교적 헌신을 보이는 미국인의 경우에 … 그들은 가정에서 더 전통적인 역할을 원하고, 동성 결혼 및 트랜스젠더 권리에 반대하며, 이혼에 대해 훨씬 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이런 사실이 저자들을 당황시킨 거 같다. 그들은 “문화적 시간 차이(lag)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대부분의 미국 기독교인도 결국에는 성에 대한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비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들이 뭘 잘 모르는 거 같다(그게 아니라면, 알면서도 책에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성경말씀에 깊이 빠지게 될수록 경제적, 인종적 정의에 관해서는 훨씬 더 개방적이 될 수 있지만, 현대의 성 혁명에 관해서는 오히려 더 보수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뿐 아니라 이성 간의 결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성을 착취하는 것도 반대한다. 저자들이 지적했듯이, 자유주의 주류 교파들이 성과 젠더에 대한 견해를 바꾼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수십 년의 갈등이 있고 난 이후였다. 성경의 어떤 가르침(예를 들어 인종과 정의)은 받아들이면서 또 어떤 부분(예를 들어 성과 젠더)은 거부하는 이율배반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런 교회들은 무엇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오류가 없는 말씀이라는 기독교의 역사적 믿음 자체를 바꿔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성장하는 많은 교회는 여전히 성경에 대해 기독교의 역사적 이해를 지키고 있다. 무너진 주류 교회들에 비교해 그런 교회는 계속해서 번성했다. 이것은 북미에서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와 오순절 교회의 성장이 인구 성장 속도보다 몇 배나 빠른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페리와 화이트헤드처럼 교회가 성에 관한 문제에서 조금 늦더라도 곧 현대 문화와 발을 맞추길 바라는 사람들은 실망할 수 있다.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기독교인이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려면, 그 전에 기독교의 교리와 믿음이 오로지 성경에만 근거해야 한다는 교회의 근본적인 이해 자체에 지각변동에 맞먹는 큰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 경우, 그들에게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맞지 않다.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 “자유주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뭘 배울 수 있을까?시의적절하고 중요한 교훈이 있다.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마지막 장에서 세 가지 교훈을 제시한다.첫 번째로, 그들은 기독교 국가주의가 끼치는 영향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국가주의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지하고 또한 종교의 장식물과 수사학을 사용하여 폭력까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국가주의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 자신들을 도덕적, 종교적 상징주의로 은폐하기 위해 기독교 언어와 상징을 선택한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반대자들에 대한 인내, 존중, 정중함, 표현의 자유, 토론 등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약속을 그들이 훼손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기독교 국가주의를 ‘복음주의’나 ‘백인 복음주의’와 동의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들은 주장하며 그렇게 하는 순간 물이 흐려진다고 지적한다. 이런 그들의 주장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들은 기독교 국가주의가 복음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 모두에게서 아이디어를 끌어내고 또 사람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국가주의가 이런 다양한 원인의 산물이나 표현일 뿐’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저자들은 결론짓는다. 거부자들은 종종 기독교 국가주의는 복음주의와 보수주의가 합쳐진 논리적인 결실이라고 단언하지만, 저자들은 데이터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주의가 다른 운동의 요소들도 신중하게 채택하는 게 사실이지만, 기독교 국가주의는 “그 자체로서 독특한 문화적 틀을 이루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정반대 주장도 가능하다. 오늘날 복음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독교 국가주의이다. 좌파 쪽 많은 이들의 주장처럼, 복음주의자들이 모두 다 사악한 기독교 국가주의자라고(또는 그쪽을 지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그렇지 않은 일부까지 극단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에 대한 매혹적인 예는, 1월 6일 국회 의사당에 입성한 폭도 중 한 명인 복음주의 기독교인 마이클 스파크(Michael Sparks)이다. 2020년 마지막 몇 달 동안 병적으로 소셜 미디어에 빠진 그는 시간이 갈수록 양측의 극단주의자가 서로 물어뜯는 모습에 점점 더 분노를 느꼈고, 결국 자신도 기독교 국가주의자라는 ‘미디어 거품’에 빠졌다. 기독교적 믿음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취약하게 만들었지만, 교회 목사와 친구들은 점점 더 분노를 키워가는 그를 향해 소셜 미디어를 제발 그만 하라고 충고했다. 무엇보다 분노에 찬 언어가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지금 폭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상태이다. 워싱턴 포스트 기사는 복음주의가 어떻게 그를 국가주의자로 만들었는지를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그런 그를 정반대 방향으로 끌고가려고 했던 환경도 함께 소개했다. 복음주의 신앙이 필연적으로 기독교 국가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세 번째로,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인구 통계학적으로 기독교 국가주의가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늙은 백인이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에) 또한 이렇게도 지적한다. “그 크기는 줄어들고 있지만 중요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저자들은 현재의 하락 추세에도 불구하고 사회 정치적 사건이 그런 추세마저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911 테러 이후 4년 동안 기독교 국가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가 일시적으로 증가했다. 더욱이 숫자가 줄고 있다고 인식하는 기독교 국가주의자는 더 위기감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그런 추세를 뒤집기 위해서라도 더 활동적이고 극단적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기독교인을 위한 몇 가지 교훈을 더 생각해보자첫 번째로,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지만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와 그 유산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 반드시 성경 신학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약은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로 인종적, 민족적 장벽이 제거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우리 조국을 사랑하고 이 나라가 이룬 성취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이 나라의 성취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면 우리는 또한 이 나라가 건국 이상에 부응하지 못하고 저지른 죄와 실패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죄인으로 구성된 모든 국가는 어디나 과거에 저지른 큰 도덕적 잘못과 악을 가지고 있다. 그런 과거를 숨기거나 최소화하는 것은 우상숭배로 나가는 큰 발걸음이고,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특정한 한 나라나 인종을 통해 구속사를 이루지 않는다. “모든 나라는 다 같은 수준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 모든 나라(인종)가 이웃과 형제라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의 한 가지 예로 갈라디아서를 참조하라. “하나님은 종교 자체에 관심이 없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초청하지만, 단지 도덕주의와 종교성의 추구에는 비판적이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을 참조하라. 기독교 국가주의는 법에 도덕을 담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요구하는 것은 회심과 변화된 삶이다. 성경의 도덕적 비전을 반영하는 법으로 나라가 움직이는, 그런 세상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 대중까지도 교회와 성경 가치를 반영한 법이 추구하는 것이 다름 아닌 공동의 선(common good)이라는 점에 동의할 때에만 가능하다.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심판한다. 야고보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궁핍한 형제들을 사랑하고 돕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알려준다.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다. 참된 구원의 믿음은 항상 사랑, 희생, 그리고 자비의 행위에서 나온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순종한다. 두 번째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독교 국가주의가 진짜 우상숭배임을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 국가주의는 정치권을 우리의 구원자로 바라본다. 특정한 사회 정책 세트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은 단지 잘못된 게 아니라 사악한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이제는 아예 미국이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선택받은 백성이고 세계의 “구속자 국가”라고 가정한다. 이런 주장이 아주 노골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이런 생각은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소리 없는 “전제 내지 기초(givens)”가 되어 기독교 국가주의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다 비성경적이고 우상숭배로 거부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교회 내부에서 기독교 국가주의를 반대할 때 우리도 힐 목사처럼 마르크스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힐 목사를 향해 “진정한 애국자가 아니다”라며 부당한 낙인을 찍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갈 때, 힐 목사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신문이나 라디오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 자기 변호가 얼마든지 가능했음에도 말이다. 그가 세운 기독 학교가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백인 기독교인을 보았을 때, 그러면서 그들이 오늘날 식으로 말해서 “그래, 너만 엄청 잘났어(super-woke)”에 해당하는 각종 욕을 쏟아놓을 때에도, 그는 그 모든 비방을 무시했다. 기독교와 백인이 하나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건 단지 인기가 없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무서운 공격까지 받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공격은 그를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구세주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값을 치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도 그렇게 해야 한다. 네 번째로, 기독교 국가주의가 영향력을 키워가는 만큼, 전도의 문이 닫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국가주의의 기풍은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또는 복음적으로 대화하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불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이렇다. “그들은 악해. 그런 인간들의 의견이 뭐가 중요해? 물론 우리를 미워하겠지. 미워하는 만큼 우리도 미워하면 돼. 걔네들이 최대한 열받을 만한 말만 골라서 하라고(Own the libs).”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기 바라는 전도의 동기는 기독교 국가주의에서 완전히 근절되었으며, 이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종교 운동이 아니라, 단지 종교 언어의 힘을 사용할 뿐 분명한 정치적 운동임을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에 관해 오로지 말씀에만 근거하는 한, 우리는 결코 세속적 진보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페리와 화이트헤드의 과학적 분석에 의해 확인된 바와 같이, 도덕적 나침반을 위해 성경에 더 깊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결국 인종, 빈곤, 정의에 대한 견해에서 더 “자유주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에 관해서는 더 “보수적”이 된다. 그러나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다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일종의 윤리적 정신분열증이라는 인상을 준다. 사실, 성경의 사회적 가르침은 매끄럽고 통일된 하나(whole)이다. 인종과 빈곤 그리고 성과 결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랑에 뿌리를 두고 그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 그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난하고 다른 인종과 이웃을 존중하고 오로지 이성 결혼 안에서만 성관계를 가지라고 성경이 분명하게 지시할 때, 그 모든 명령은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이 우리를 어떤 사랑으로 구속하셨는가라는 윤리적 규범에 근거를 두고 있다.이런 사실은 기독교의 역사적 정통을 유지하고 기독교 국가주의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신자의 경우에 오히려 더 많은 전선에서 공격받을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독교 국가주의자보다 훨씬 더 큰 외로움과 현대 문화로 인한 더 큰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페리와 화이트헤드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미국인은 당분간 복음주의 기독교를 백인 우월주의 및 국가주의와 동일시할 것이다. 국회의사당 폭동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복음주의적 기독교 상징과 언어가 국민의 의식에서 사라지기까지는 앞으로도 수년이 족히 걸릴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그 아픔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믿음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성장하고 있고, 따라서 복음주의가 본질적으로 결코 국가주의적,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있다. 사실, 다른 지역에서 온 대부분의 복음주의자 친구들은 왜 그렇게도 많은 미국 복음주의자가 정신을 잃은 것 같냐고 묻곤 한다. 우리는 베드로전서 2장 12절과 같은 약속의 말씀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주님께 충성하는 자는 공격적이지만 또한 매력적이고, 비방과 함께 칭찬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오로지 공격만 받거나 또는 항상 인정만 받는 기독교 단체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말씀과 복음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임을 기억하자.원제: A Book Review on the Topic of Christian Nationalism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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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 Keller
2021-08-17
이 글은 사무엘 페리(Samuel L. Perry)와 앤드류 화이트헤드(Andrew Whitehead)가 쓴 ‘미국을 다시 하나님에게로: 미국의 기독교 국가주의(Take America Back for God: Christian Nationalism in United States, 옥스포드, 2020)’에 관한 팀 켈러의 서평으로 두 번에 나누어 게재합니다.하나님과 국가 올해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폭도들은 기독교 상징물을 전시하고 또 카메라 앞에서 공개 기도를 했다. 그 이후로 주류 언론을 움직이는 논리적 가설(assumption)은 이것이다. 복음주의는 이제 민주적 절차를 뒤집는 일이 있더라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백인 우월주의 봉기 세력임이 밝혀졌다. 이제 “기독교 국가주의자(Christian nationalist)”는 백인 복음주의자를 묘사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게 과연 맞는 말인가? 기독교와 국가주의자라는 이 두 용어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을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최근에 들어서야 이 문제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지만, 사실 이건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1975년 나는 버지니아 주 호프웰에 있는 웨스트 호프웰 장로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다. 개척 목사인 윌리암 힐(William E. Hill, Jr.)에 의해 (PCA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던) 웨스트 엔드(West End) 장로교회로 시작한 그 교회는 내가 왔을 때, 힐 목사는 이미 은퇴한 상태했고 그를 이은 담임 목사는 케네디 스마트(Kennedy Smartt) 목사였다. 그러나 힐 목사가 얼마나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남부 지역에서는 현충일이나 독립기념일 전후에 “하나님과 나라” 축하 행사와 예배가 항상 열렸다. 종종 신도들은 예배 중에 성조기에 충성을 맹세하고 애국적인 찬송가와 노래를 불렀다. 다음은 당시 보편적인 예배의 모습이다.“군대에서 나온 합창단과 관현악단이 애국가를 부르고 사회자가 엄숙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이 나라를 인도하고 보호하셨습니다. 미국에게 주어진 모든 승리는 모두 다 하나님과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신도들 때문이며, 하나님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언제나 우리 편입니다.”그러나 힐 목사가 담임이었던 동안 그런 예배는 있을 수 없었다. 교회에서 애국가를 부르거나 하나님이 항상 “우리편”이라는 식의 설교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 성조기를 걸어두는 것조차 그는 일종의 우상숭배로 여겼다. 힐 목사(항상 검은 양복에 흰 셔츠와 끈으로 묶는 넥타이를 매는 키가 150cm가 조금 넘는 둥글고 작은 체구)는 장례식 예배 때 성조기가 드리워진 관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은 것으로 유명했다. 다음날 리치먼드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신문은, “힐 목사를 비애국적이고 공산주의적이며 반미적인 사람으로 낙인찍는 기사를 실었다. … 많은 참전 용사들이 그런 언론을 믿었고 … 교회는 아마도 이 사건 때문에 이삼백 명의 신도를 잃었을 것이다.”라고 실었다. 힐 목사는 1940년대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할 당시 처음부터 인종 통합을 주장했다. 이것은 당시에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버지니아 그 지역 기독교 학교 대부분은 백인 학교였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교회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 국기로 상징되는 애국심 그리고 미국의 백인 중심적 이익을 신앙과 결합해도 되는가를 놓고 싸워왔다. 애국심과 백인의 이익을 기독교와 결합하는 것을 우상숭배라며 반대했던 힐 목사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러다 내 경우 운이 좋게도, 1970년대 중반 내가 그 교회에 갔을 때 여전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교회 지도자들이 대체적으로 힐 목사의 경고와 모범을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한 장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과 미국’이라는 기독교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런 구호는 기독교적이라고 보다는 미국적인 거니까요.” 복잡한 사회 현상에 대한 한 노동계급 기독교인의 분석이었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기독교 국가주의가 무엇인가?이것은 사회학자 새뮤얼 L. 페리와 앤드류 화이트헤드가 쓴 중요한 새 책이 탐구한 기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풀뿌리 개신교 속에서 “하나님과 국가”라는 날개는 수십 년, 심지어는 수백 년 동안 우리와 함께했으며, 이제는 새롭고 두드러진 정치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세심한 사회과학 연구를 통해 기독교 국가주의라는 세력을 다음과 같은 정의로 구분한다. 첫 번째, 그것은 “기독교(거의 다 개신교), 인종(백인), 그리고 출생(미국 출생) … 그리고 거기에 정치적 이념(사회 및 재정적 보수주의)”이 융합된 미국인의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무슬림이거나 유대인인 경우, 이민자인 경우, 또 백인이 아닌 기독교인인 경우에는 진정한 미국인이 될 수 없고, 심지어 아무리 미국인이라고 해도 정치적 자유주의자라면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주의자는 연방 정부가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선언하고 기독교 가치를 법으로 규정하고 또 기독교 상징을 전시하고 공공장소에서 기독교식 기도를 드리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기독교 국가주의자는 지역 사회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기뻐하지만, 정부가 이슬람의 모스크 건축은 아예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기독교 국가주의는 미국 역사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그들의 관점에 의하면, 미국은 애초부터 명백한 기독교 국가로 설립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과 거의 (많은 사람들이 ‘거의’라는 이 단어를 빠뜨린다) 언약 관계를 맺은 수준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고 계속되고 있다. 좌파와 불신자는 계속해서 미국을 세속적이고 상대주의적 국가로 만드려고 한다. 우리가 이들에게 밀려서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지도자를 제대로 선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미국을 축복하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 기독교 국가주의는 아주 오랜 상하 관계의 사회 질서를 암묵적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지지한다. 즉, 외국인보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유대인과 이슬람 교도보다는 기독교인이, 타 인종보다는 백인이 상위에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또 강조한다. “기독교 국가주의는 따라서 미국인이 사회와 세계를 인식하고 탐색하는 데 필요한, 우리가 ‘문화적 틀’이라고 부르는 명시적이고 암묵적인 이상과 가치 그리고 신화의 복합체를 제공한다.”기독교 국가주의자는 누구인가?기독교 국가주의 신념이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페리와 화이트헤드의 연구는 그리 놀라운 게 아니다. “미국의 기독교 국가주의에는 크게 네 가지 경향이 있다. 미국인은 거부자(Rejecters), 저항자(Resisters), 수용자(Accommodators) 또는 대사(Ambassadors)이다.” ‘대사’는 본격적인 기독교 국가주의자로 전체 인구의 19.8%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반면에 인구의 약 48%는 기독교 국가주의 신념이 전혀 없는 강력한 “거절자” 또는 거의 없는 “저항자”이다. 그러나 마지막 그룹이자 32.1%를 차지하는 가장 큰 단일 그룹은 일정 부분 기독교 국가주의 신념을 갖고 있고 또 거기에 전반적으로 우호적이지만, 완전히 수용하지는 않는 ‘수용자’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수용자가 핵심이다. 왜냐하면 인구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그들이 비록 과격한 기독교 국가주의 신념을 고수하지 않는다고 해도, 극단적인 지지자를 향한 이들의 동정과 지원은 극단주의자가 활동하는데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다양한 기독교 국가주의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분명히 대사 그룹을 차지하는 대다수는 정치적 견해가 보수적인 백인 종교인이다. 그러나 누구나 예상하는 바로 이 결과 다음에 페리와 화이트헤드가 제공하는 또 다른 발견은 놀랍다.백인 미국인은 위에서 말한 네 가지 그룹이 거의 같은 비율로 나뉜다. 그러나 아프리카 계 미국인은 백인보다 기독교 국가주의를 더 지지한다. 아프리카 계 미국인의 65%가 대사 또는 수용자이며, 이건 모든 인종 그룹을 통틀어서 가장 큰 비율이다. 아시아인 및 기타 인종과 마찬가지로 히스패닉은 두 개의 중간 그룹 비율이 가장 많다. 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표방하는 게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백인들만의 입장이 아님을 나타낸다. 백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도 성향에 있어서 종교적, 전통적, 그리고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또한 미국의 이상과 과거 역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정치 견해를 밝히는 진보적 태도를 불편해한다.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 국가주의자의 약 50%가 복음주의자이지만, 강력한 저항자 또는 거부자 중 거의 25%가 또한 복음주의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적 믿음이 자동적으로 기독교 국가주의를 유발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복음주의는 오히려 국가주의를 거절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국가주의는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훨씬 더 “인종적(ethnic)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다. 국가주의는 결코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믿음이 빚어내는 불가피하거나 논리적인 결과가 아니다. 그들은 입맛에 맞는 구절을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는데, 주로 역대하 7장 14절 같은, 율법을 지키는 경우 이스라엘에게 번영을 약속하는 구절을 미국에 적용하는 식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와 이민자를 위한 정의를 요구하는 구약의 구절을 무시하고, 또한 원수를 사랑하고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대라는 신약의 명령은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 국가주의는 “특정 종교 전통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신교 복음주의, 가톨릭 또는 다른 그룹이 지향하는 확고한 기독교 신앙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 (특정 신학에 대한) 종교적 헌신과 기독교 국가주의는 비판적인 방식으로 상호간에 완전히 다른 도덕적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결국 기독교 국가주의가 기독교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무시하고 출생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등을 지향함과 동시에 지극히 편협한 방식으로 성경 구절을 골라서 결합한다는 것이다.‘기독교 국가주의를 바라보는 지혜’로 이어집니다.원제: A Book Review on the Topic of Christian Nationalism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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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자유주의
기독교우파
기독교와정치
복음주의자
우상숭배
저항자
백인우월
성경은 없었지만 예수를 소유했던 베뢰아 사람
by Griffin Gulledge
2021-08-16
보수적인 침례교회에서 성장한 나는 성경 지식만큼 가치 있는 기독교인의 특징은 없다고 믿었다. 주일성경학교에서 성경 암송을 하면 상을 주었고 주일 설교는 늘 성경 말씀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여름성경학교에서는 열심히 성경 이야기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런 환경 가운데에서 우리는 마치 베뢰아 사람과 같다는 말을 듣곤 했다.사도행전 17장 10절부터 12절까지는 베뢰아 사람을 “이것이 (바울과 실라가 설교한 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베뢰아 사람과 같다고 확신하는 것은 내게 어려서부터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최근까지도 베뢰아 사람과 같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나의 이해에는 오류가 있거나 부족함이 있었다. 내가 상상하는 베뢰아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성경을 찾아보는 모습이라서 말씀 중 근거가 되는 구절을 찾을 수 없으면 그들은 사도들이 가르친 것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상상한 그러한 그들의 모습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초대 교회의 일반 성도들이 성경의 사본을 갖는 일을 매우 드문 일이었다. 실제로 종교개혁 시대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대량 보급이 가능해졌다. 대신 그들이 공동체(이 경우 회당)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구약 성경이라고 이해하는 기록을 소장하고 있었다.세 가지 기본 사실우리에게 ‘베뢰아 사람 같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롭게 평가하는 일은 유익을 줄 것이다. 다음 세 가지 기본적인 사실은 더욱 정확한 개념을 갖는 데 도움을 준다.1. 베뢰아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들인다그들이 추구하는 순서를 주목해 보라: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성경을 상고하였고, 마침내 진리을 믿었다(행 17:11-12). 사실 이 구절은 성경만을 유일한 규범으로 여기고자 하였던 종교개혁 원리를 잘 묘사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양한 규범이 있겠지만 성경만이 우리의 규범을 규정하는 궁극적인 규범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베뢰아 사람들이 받은 것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말씀에 의한 증거 때문이었다. 해석에 따른 결론에 의해 그들은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통해 이 진리를 확인하였다(이는 회당에 구약 성경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믿었다. 여기에 중요한 적용이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신학을 대할 때 무에서 시작하거나(ex-nihilo), 관찰되고 추론된 이성에 의한 해석(ex-ratio)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초대 교회에 나타난 신앙의 기본 진리는 개인의 논리에 근거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여 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그 가르침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증거가 되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하였다. 우리가 세상에서 처음 성경책을 대하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서도 안 되지만, 성경을 사도신경과 같이 외적인 진리를 교리로 삼아 옆에 놓아두고 있기만 해서도 안 된다. 말씀의 권위에 의해 우리에게로 전해진 진리를 수용하여 그것을 확인하고 보존하여야 한다(딤후 1:14).2. 베뢰아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배운다우리가 놀랄 일도 아니지만, 혹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주의 시대에는 신학에 대한 개념이 팟캐스트나 개인의 헌신, 독서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연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베뢰아 사람의 방식이 아니다.본문은 그들이 매일 말씀을 찾아보기 위해 회당에 모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을 함께 읽고, 랍비들과의 토론과 논쟁, 가르침과 해석, 그리고 모든 관련된 대화를 포함했을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방식은, 세부적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공동체적 모습으로 나타났다.이러한 방식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의 목적을 위한 근본적인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인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의 도움을 받자면, 그는 성경의 주된 목적과 그 도구로서의 목적을 구별하여 설명했다. 그것의 근본적 목적은 성부, 성자와 성령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그것의 도구적 목적은 진정한 정의의 지혜, 즉 우리의 죄성을 떨쳐내고 그리스도의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회의 현재와 미래의 아름다운 모습은 이렇게 형성된다.이것은 성경 해석의 기초가 되는 것인데, 성경의 목표가 하나님의 계시이고 그의 영광을 교회 안에 드러내는 것이라면 성경은 교회의 공동체, 지혜, 사명감에서 나오는 추상적인 해석으로는 제대로 해석될 수 없다. 우리가 베뢰아 사람처럼 되기 위해서는, 우리 가운데에서 신학을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가르침을 분별하기 위해 서로가 필요하다. 신학은 교회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3. 베뢰아 사람은 구약성경의 기독교 신앙을 믿는다초대 교회(베뢰아 사람들을 포함하여)가 완성된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로마서 8장이나 에베소서 2장 또는 요한복음 없이 교회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동시에, 이러한 불편함은 구약성경이 신약성서와 다소 구체적으로 다르다는 잠재된 오해를 필자나 독자들이 가질 수 있다.구약성경이 삼위일체에 관해 가르치고 있는가? 메시아에 관해서는? 로마서 10장 9절 없이 예수님이 주님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현실은 이렇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복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실제로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이 암시하는 것들을 가장 자주 보여준다.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구약성경을 빛이 많이 들지 않지만, 가구로 풍성하게 장식된 방에 비유할 수 있다. 조명이 밝아지면서 처음부터 그곳에 없던 물건들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겠지만 원래부터 그 방에 있었던 이전에 인식되지 못하였거나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던 가구들은 더 명확히 보이게 된다. 또 로버트 스미스 주니어(Robert Smith Jr.)가 종종 말하였듯 모든 신약의 교리에는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그림이 존재한다.베뢰아 사람과 같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완성된 성경을 전부 찾아보라는 것이 아니라 특히 구약성경의 말씀을 찾아보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하는 것이다. 워필드의 말을 빌리자면, 베뢰아 사람이 되는 것은 불을 밝히고 성경을 읽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대할 때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찾은 구원의 계획이 신약성경을 통해 계시가 된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9).진정한 베뢰아 사람이 되려면이 모든 것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토론에서 이기기 위함이나 지식 그 자체를 위해 우리의 머리를 지식으로 채우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증거한다(행 17:12).베뢰아 사람들을 본받고자 하는 목적은 믿음을 끌어내고 강화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말씀을 통해 설교하신 그의 사역의 결과이다. 베뢰아 사람은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예수가 있었다. 우리에겐 성경이 있다. 우리 모두 함께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해가야 한다(고후 3:17-18).원제: The Bereans Had No Bibles: Re-envisioning Acts 17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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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기본진리
삼위일체
설교를 더 잘 듣기 위한 일곱 가지 방법
by Christopher Ash
2021-08-15
어떻게 설교를 듣는가? 여러분은 이것이 어리석은 주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어떻게 TV를 시청하는가에 대해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리모컨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니 설교를 듣는 것은 TV를 시청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설교를 듣는 것은 수동적인 활동으로 나에게 설교되는 것이지 내가 능동적으로 하는 무언가가 아니다.그러나 설교를 듣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눅 8:18).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듣는다면 더욱 많이 받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듣는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설교를 듣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듣고 있는지 주의하여 삼가도록 하자. 여기에 일곱 가지 조언이 있다.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대하라우리가 사람의 목소리에 의해 생기는 음파를 듣는 것이지만, 설교자가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권위있는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교회 내의 성경 강론에 대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라고 기록하였다(벧전 4:11). 만일 누군가 신실한 설교를 듣는다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들어야한다.주중에 다음 주일의 설교자를 위해 기도하라. 당신 자신과 그리고 교회에서 함께 예배할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가능한 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새롭고 주의 깊은 자세로 설교 듣기에 임하라. 당신의 생각과 마음을 고요히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 것을 기대하라. “주여, 제게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2. 하나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디모데가 에베소에서 설교할 때, 바울은 그에게 경고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설교자를 원한다고 하였다(딤후 4:3). 본성적으로 우리 모두는 그것을 원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낫게 느끼게 하고 우리의 자존감을 부추기며 이미 존재하는 편견을 강화하는 설교를 원한다.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날마다 주마다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의뢰하도록 명하신다. “모든 도덕적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명하신다(약 1:21). 우리는 말씀 아래 겸손히 앉아야 한다. 심판하는 자세로 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지 우린 아니다. 우리의 견해와 신념과 마음과 삶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3. 설교자가 본문이 말씀하는 것을 말하는지 확인하라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강해 설교를 듣는가에 관한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에 넣어두신 의미를 성경으로부터 찾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강해, 곧 거기 있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주입하는” 설교인데, 설교자가 본문에 어떤 뜻을 주입하는 것이다. 물론 한 단락을 해설하는 설교가 있고 한 단락 이상의 더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해설하는 설교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설교자가 그 본문이 말씀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 확인하기에 더 쉽다는 장점이 있다.설교자의 권위는 목사든 사역자든 그 누구든지 그의 직위나 그 사람의 능력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위임받은 권위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그가 말할 때 그는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에게 권위가 없다. 한 친구가 전에 내게 말했다. 그 목사가 설교할 때 그는 스스로 성경을 펴서 “이것이 어디에 나오지?”라고 질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질문이다. 만약 설교자가 성경 본문에서 그것을 얻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고개 숙이고 회개하며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겸손하라. 그러나 속지 마라. 설교를 듣기 전, 주중에 그 본문을 읽어라. 그것을 숙고하라. 이것을 하기 위해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그 주된 생각이 무엇인가? 그 설교의 핵심이 그 본문의 핵심인가?”를 확인해 보라4.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라요즘은 온라인상에서 설교를 내려 받아 자기가 원하신 시간에 편한대로 듣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최선은 아니다. 하나님의 표준적인 방법은 그분의 백성이 모여서(‘교회’의 뜻이 ‘모임’이다) 함께 그분의 말씀 아래 앉아 듣는 것이다.설교를 듣는 것은 단지 ‘나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함께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듣는다. 그래서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 내가 그 설교를 들었고 여러분도 내가 그것을 들은 것을 안다. 이제 여러분도 내가 들은 것을 알기에, 내가 그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할 것을 여러분들이 기대하고, 나도 여러분이 그러리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서로 도우며 경건하게 살도록 서로 격려한다(히 10:24-25).5. 매 주마다 그곳에 있어라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라. 우리는 헌신하지 않아도 괜찮은 문화적 분위기 속에 살고 있다. 이리 저리 떠다니며 구경꾼처럼 뒷좌석 끝자락에 앉아있기가 매우 쉽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약의 가족과 함께 지속적으로 모이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쉽게 한두 주일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우리를 고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오랜 시간 동안 그분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려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인격을 만드시고 형성해 나가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시는 설교를 듣고 또 들어야 한다. 베드로가 말씀하기를, “너희가 이것을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라고 한다(벧전 1:12). 교회에 출석한 주일 혹은 출석하지 않은 주일에 대해 계속 출석 체크를 해보라. 당신이 얼마나 자주 참석하지 않는지 놀랄 수도 있다. 그곳에 규칙적으로 있기를 다짐하라. 당신 자신의 유익과 주위 사람들의 유익 모두를 위하여 그리하라.6.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행하라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하는 것을 행하라”(약 1:22)라고 기록한다. 설교의 목적은 우리가 다 아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 같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인내로 경건한 인격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눅 8:15). 우리는 대접을 받거나 지적인 정보로 우리의 뇌 세포들을 자극하거나 교묘한 웅변술에 의해 우리 감정이 동요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에 나아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듣고 예배하고 순종하기 위해 나아오는 것이다.주일 설교 후에, 설교 말씀을 순종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하라. 그것을 적어두라. 그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라. 어떤 것은 새로 시작해야 하고 어떤 것은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말은 해야 하고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 수 있다. 대부분은 마음의 태도와 소원에 관한 것이다. 주일마다 기록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때때로 과거 기록을 살펴보고 당신의 진보를 돌아보라.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그분의 말씀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당신 스스로 놀랄 수도 있고 격려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7. 성경이 오늘 말씀하는 것을 행하고 즐거워하라“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시편 95편에서 그렇게 말씀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그것을 인용하여 그렇게 말씀한다(히 3:15). 우리의 들음에는 긴급함이 있다. 내일로 미루지 말라. 내일이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즐거워하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정확히 기록되게 하신 것을 기뻐하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소식을 인하여 기뻐하라. 당신이 신자라면 당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가족과 함께 앉아서 설교를 듣는 매시간이 당신의 왕께 새로운 회개와 새로운 신뢰와 새로운 순종의 시간이 되게 하라.원제: 7 Ways to Become a Better Sermon Listen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강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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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라
by David P. Barshinger
2021-08-14
“대니는 죽을 거야.”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사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자리에는 열 살 된 대니 형도 있었다. 그를 변호하고 싶은 강한 절박함에 나는 여덟 살짜리 아이가 쥐어짤 수 있는 모든 힘을 모아서 “아니에요! 대니는 안 죽어요.”라고 말했다. 당시 대니는 뇌종양을 앓고 있었다. 한때 그는 내 누나와 레고 만들기, 태그 놀이, 촌극 꾸미기 등을 즐기던 활기찬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피부는 뼈에 달라붙은 것처럼 말라버렸고, 몸은 서서히 쇠약해졌다. 철없는 사촌들의 행동은 단지 부모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한 것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그 말이 나와 우리 형제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알 리 만무했다. 그러나 결국 대니 형에 관한 내 생각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이모와 삼촌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대니 형은 그 날로부터 채 일 년을 더 살지 못했다.죽음, 그리고 삶인간에게 죽음은 실로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부활의 생명과 천국에 있는 사랑하는 그리스도인과의 재회에 대한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죽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내며 경험하는 죽음은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기 충분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극단적인 상실의 형태는 죽음이지만, 오늘날 COVID가 고통스럽게 상기시키고 있듯이 우리는 때때로 다른 종류의 상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COVID가 지금 강요하는 상실은 정상적인 사회적, 전례적, 그리고 직업적 리듬에 관한 것이다. COVID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인간 번영에 꼭 필요한 갈망을 가져다주는 연결성마저 상실하고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지금과 같이 단절된 세상에서 삶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굳이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기도 한다. 이런 현실은 여전히 상실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더욱 부각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와 함께 할 수 없을 때, 교회에서 함께 예배할 수 없을 때, 무슨 힘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나 자신을 절단하기지속되는 상실과 관련한 이미지 중 하나가 미국의 남북 전쟁 참전 용사이다. 남북 전쟁 동안 의사들이 집도한 절단 수술은 약 60,000건이다. 사실상, 전쟁에서 하는 수술의 4분의 3이 절단 수술이다. 그중 약 45,000명의 수술에서 살아남았고, 그리고 그들은 신체적이고도 개인적인 상실을 시각적으로 상기시키는 세대를 대표한다. [‘의학 및 통합 과학 역사 저널(Journal of the History of Medicine and Allied Sciences)’에 실린 ‘내전의 절단: 물리적 및 사회적 차원(Amputation in the Civil War: Physical and Social Dimensions)을 참조하라]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신체 일부가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더 이상 걷거나 글을 쓸 수도 없었고, 생계를 유지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만질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실은 정상적인 삶을 방해하고, 이런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상실의 삶은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삶을 거스를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까지 좌절시킨다.크리스토퍼 애쉬(Christopher Ash)는 욥기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살다 보면 인생에서 모든 것이 잘못되는 때를 만나거나 또는 만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고통과 실패, 심지어 재난과 비참한 시간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어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한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팔다리를 잃은 것, 직업을 잃은 것, 그리고 형제를 잃은 것과 같은 상실 속에서조차 하나님이 선하실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멀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마음을 현세적인 것에서 돌이켜서 오로지 그분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신다. 따라서 상실은 어떤 의미에서 반직관적이지만,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그 혜택을 다른 방법으로도 찾을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러나 상실이 주는 유익을 거둬들일 때조차, 우리는 종종 상실 이전으로 돌아가길 갈망한다. 지금의 내가 아닌, 이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종종 대니 형을 생각할 때, 그가 아직도 살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대니 형이 지금 내 아이들과 함께 논다면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공유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상실을 지워버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상실을 지우는 게 적어도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또 다른 상실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간과한다.매건 웨일런 터너(Megan Whalen Turner)가 쓴 소설 ‘도둑의 귀환(The Return of the Thief)에는 현명한 마법사와 유게니디스(스포일 주의: 그녀의 이전 책에서 손을 잃은 인물) 사이의 대화가 나온다. 유게니데스에게 잃어버린 손을 여전히 원하는지 마법사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당연히 그립지요. 누구나 다 더 춤을 잘 추고 싶고, 더 노래도 잘하고 싶고 또 더 강해지고 키도 커지고 싶어할 겁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 자신을 바꾸고 싶어하지요…. 하지만 손을 잃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손이 다시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건 결국 지금의 내가 어떤 낯선 사람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과 같아요. 그것은 결국 지금의 내 자신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데, 누가 그걸 원할까요? 불신자의 경우 상실이 그 사람을 더 낫게 만든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믿는 자라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구원과 거룩함을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그렇기에 나의 상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나 자신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지금 나 자신의 모습을 지우려는 것이다. 내면의 변화(character arc)이런 주제는 사실상 오래된 질문의 되풀이이다. 에덴 동산에서 처음 세워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재건된 하나님의 왕국을 드러내는 선함과 생명에 대해 명백하게 모순되는 나쁜 일이 생길 때, 나는 그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우리는 타락이 이 세상에 가져다 준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는 상실은 죄에 빠진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더 많은 진실을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동시에 구속주이시다. 그의 일하시는 방식은 선하게 창조된 질서 속에 인간이 도입한 악에서조차 선함을 가져오는 것이며, 또한 상실을 통해서도 우리의 부서진 몸과 영혼 속에 생명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우리를 지금도 빚어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상실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려고 애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상실을 통해 주시려고 준비한 선한 무언가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런 희망은 손상과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준다. 욥의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는 상실 이후의 회복의 그림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회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렇기에 계시록의 마지막이 단지 새 하늘과 새 땅의 건설 및 더 이상 애통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없다는 보장(계 21:1, 4)만이 아니라, “만국의 치료”까지 덧붙여서 끝나는 이유이다(계 22:2). 어떻게든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상실을 연결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존재로, 상실이 없이는 결코 될 수 없는 존재로 우리를 만드신다. 나는 대니 형이 아직 살아 있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암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나의 결함을 드러낸다. 나는 하나님이 대니 형의 삶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보지 못한다. 하나님은 대니 형을 육체적 고통과 죽음을 통해 죄와 질병, 그리고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난 더 나은 상태로 인도하셨다. 왜냐하면 대니 형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은 또한 대니 형의 죽음을 사용하여 나를 빚으셨다. 하나님은 그 죽음을 사용하여 나를 구속하고 또 거룩하게 하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내 안에서 성취하신 일이 지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비하게도 나의 상실을 지우는 것은 나의 유익을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상실에 직면했을 때 나는 울면서 발버둥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분의 백성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하나남의 방법을 받아들여 소망에 매달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절뚝거리고 걸으며 비틀거리더라도 말이다. 원제: Learning to Live with Lo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생활
건강
고통의의미
상실의유익
남북전쟁
부활생명
COVID
욥기주석
도둑의귀환
불신자
성 윤리를 무력화시키는 다섯 가지 기초
by Brett Mccracken
2021-08-13
한주도 빠지지 않고 새로운 CCM 스타, 전직 기독교 유명인사 또는 기독교 대학 졸업생이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진화하는” 믿음, 즉 신앙의 “해체(deconstruction)” 여정을 발표하는 거 같다. 즉, 그 과정이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 신앙 교리를 다시 해석하도록 했는지, 또는 아예 신앙을 포기하도록 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여정 중 일부는 사려 깊고 궁극적으로 건설적인 고민으로 이어져 더욱 견고하고 정통적인 신앙을 갖게 하기도 한다. 동시에 또 어떤 것은 냉소적이고 반동적이며 결과적으로 탈회심(deconversion)을 초래한다. 다양한 “이슈”가 이러한 해체 여정의 촉매제가 되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전체 신앙의 탑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가장 큰 잠재력을 가진 주제는 바로 성경적 성 윤리이다. 현대 서구 기독교의 풍경에서 정통 신앙에서 멀어지는 대부분의 길은 “LGBTQ+ 옹호자”라고 불리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는 정류장을 통과하게 된다. 이건 단순한 경로 변경을 위한 정류장이 아니다. 여기서 멈추고 앞으로 가야 할 전체 지도를 재구성한다. 우리가 성과 정체성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의심과 흔들리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점점 더 많은 그리스도인, 심지어 성경에 깊이 빠져 있고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란 사람조차도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불안한 기초모든 길이 결국 성 윤리 라인으로 이어진다 해도, 모두가 다 같은 곳에서 시작되는 건 아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고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결국에는 타협하도록 만드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기독교가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미묘한 형태를 고려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성 윤리 문제 때문에 생각을 바꾼 대부분의 해체적 기독교인은 지금부터 소개하는 불안정한 토대 중 하나(또는 그 이상)를 신앙 배경으로 가지고 있다. 1. 소비주의(Consumeristic)아마도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가장 널리 퍼진 왜곡(최소한 서구 문화에서는)은 소비주의 경향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믿음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내 체형에 완벽하게 맞는 청바지를 찾는 것처럼 신자가 “내게 완벽한 교회”를 찾아 쇼핑하는 신앙이다. 그리고 소비주의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믿음은 표현적 개인주의의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편안함을 지향한다. 내게 도움을 주고 손해를 끼치지 않는 한, 믿음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익은 크지만 비용이 별로 안 드는 게 중요하다. 나의 자율성을 방해하지 않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나를 표현하고 싶은 ‘진정한 나’에 한계를 두지 않는 한, 믿음은 그럴 듯한 것이다. 이런 식의 신앙은 논쟁이 실종된 믿음, 반문화적이지 않은 기독교 관습, 그리고 교회 출석이 사회적 지위에 이득(또는 중립)이 되는 상황에서 번성한다. 소비주의 신앙은 타협하는 신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2. 실용주의(Pragmatic)실용적인 경향은 좋은 동기에서 비롯된다.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자는 것이다. 오늘날 구도자 중심 운동, 대형 교회, 신흥 교회, 힙스터 기독교, 또는 기타 다양한 선교적 또는 교회 개척 전략을 낳은 믿음의 유형이기도 하다. 느낌과 여론을 중시하고, 또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모이는 것”과 같이 고도로 조정된 이런 외향 지향적이고 홍보 지향적인 믿음은 좋은 의도에서 시작하지만 종종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3. 정치적(Political)정치적 소속과 신학적 믿음이 합쳐질 때, 후자는 필연적으로 전자에 의해 형성되고 그 하인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바로 이런 사실이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정치적인 이유로(정당 교체 또는 기존 정당 내 노선 변경) 어떤 문제에 대해 “기존 신앙적 입장을 바꾸게” 하고, 또는 정치적 목적에 투신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4. 감정적(Emotionalistic)건강한 기독교에서 감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감정적인 경우에 믿음은 흔들릴 수 있다. 마음을 감동시키는 예배, 감동적인 설교, 영적 황홀경이 주는 “뿅 가는(mountaintop)” 느낌 등, 오로지 체험에만 중점을 두는 신앙이다. 이런 신앙은 종종 강렬함과 열정으로 평가된다. “교회에 가도 더 이상 느낌이 없어”라는 경우거나 그래서 교회가 지루해지기 시작한다면,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좋은 느낌”이 계속될 수만 있다면 식의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묵상하고 싶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산타클로스나 키다리 아저씨처럼 항상 안아주는 좋은 모습으로만 생각하려고 한다. 5. 이성적(Cerebral)건강한 기독교에 교리와 성경 지식은 필수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지적인 믿음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올바른 믿음”이 삶과 분리되어 따로 놀 때, 특히 더 문제가 된다. 교리 교육과 건전한 가르침을 올바르게 강조하는 특정 기독교가 있을 수 있겠지만, 신앙이 가시적으로 형성하는 바른 삶과 믿음이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건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이 정답을 알면서도 바로 살지 못한다. 너무도 많은 교회가 믿음과 삶을 적절하게 연결하지 않는다. 이러한 단절은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지속 가능한 믿음을 갖는 데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문화적 바람내가 가진 기독교 신앙에 이 다섯 가지 구조적 결함(또는 조합된 형태) 중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문화적 역풍이 불 때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성 윤리 문제에 관한 바람은 그냥 바람이 아닌 진짜 강풍이다. 다음은 다섯 가지 왜곡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타협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1. 소비주의“자기 발전(self-enhancement)”이라는 용어로 프레임화된 믿음은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부수적인 혜택이 주는 만큼 견딜 뿐이다. 사회적 낙인, 문화적 주변화(marginalization), 긴장 관계의 우정과 같은 미세한 비용이 관련되어 있다. 소비자 기독교인은 예수를 따르는데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편리하게 제거하는 맞춤형 영성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언제라도 선회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은 정통 기독교, 특히 성에 관해 말하는 것이 문화적으로, 관계적으로, 직업적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시대에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편견에 치우친 기독교 신앙”과 관련을 맺는 한 사회적 상승이 불가능한 산업에서 일하거나 도시에 거주하는 경우에 또는 단지 성에 관한 “압제적인” 성경의 제약에서 개인적으로 벗어나고 싶은 경우이든지 간에, 소비자 믿음은 타협하는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표현적 개인주의와 자율성 - 각 사람이 선택하는 고유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고 긍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권리 – 이 가진 우위는 성 윤리 문제에 대한 소비주의적 믿음을 희미하게 만든다. 표현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자의 행복이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은 선으로 여겨진다면(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기능적으로 그렇다), 성경은 당연히 자아를 위해서 배제될 것이다. 2. 실용주의성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점점 더 크게 여론과 충돌한다. 이건 기독교에 피해를 주는 광고이다. 또한 이 문제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믿음이 주는 효용성을 강조함으로 전도하고 싶어하는 실용주의 신자에게 딜레마를 제시한다. 단지 성 윤리라는 한 가지 문제 때문에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이 망설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실용주의 기독교는 성경의 성 윤리를 무시하거나 재해석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계산된 결정을 내린다. 이 접근 방식은 대형 교회나 많은 돈이 걸린 단체와 기독 관련 산업체(CCM 참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생존 여부가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청중(돈)이 가장 많이 가는 방향에 달려있다고 믿기에 거기에 맞춰서 교리를 “재검토”해야하는 상황에서, 많은 기독교인은 타협을 선택할 것이다. 3. 정치적정통이란 말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어떤 국가라도 단정하고 당파적이며 정치적인 시스템과는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 윤리에 관해서 나는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을 가진 소수의 기독교인이 정치 프로그램에 필요한 “패키지 거래” 때문에 기꺼이 자신의 성경적 신념을 바꾸는 모습을 꾸준하게 목격하고 있다. 공개적으로 무지개 깃발을 흔들지 않고서는 오늘날 좌파가 정치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확실히 성 윤리 문제는 최근 몇 년 동안 보수 지도자들의 일탈적인 성적 행동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우파의 정치화된 기독교도 같이 괴롭히고 있다.4. 감정적“좋은 느낌만” 계속 될 수 있다면 식의 치료적 기독교는 동성에게 끌리는 여성에게 성적 욕망에 따라 살기보다 독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이 그런 끔찍한 요구를 할 리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하나님이 단순히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진행 경향은 다음과 같다.(1) LGBTQ인 기독교인의 친구나 가족이 교회에 나온다. (2) 기독교인은 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서로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또는 불확실한 용어로 그렇게 듣는다).(3) 기독교인은 이 사랑하는 사람의 성 정체성을 긍정하는 것과 그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하는 것은 상호 배타적임을 깨닫는다.(4) 그리스도인은 그 주제에 대한 성경의 권위를 경시하거나 “다시 생각” 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긍정하기로 선택한다.이런 식의 변화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사실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 구절에서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객관적이고 하나님이 정의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정의하는 주관적이고 자기지시적인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이다”).5. 이성적지적이고 교리에 깊이 빠진 기독교인이라면 성 윤리에 대한 문화적 태풍이 몰아치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말씀의 기반 위에 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믿음과 행동 사이의 치명적인 단절이다. 비밀 포르노 중독에 빠진 교회 개척자, 여자 친구와 동침하는 신학생, 혼외 정사를 하면서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목사. 극단적인 예이지만, 성경적 진리를 깨닫는 지적인 현실과 그 진리를 삶에서 실천하는 것 사이의 연결이 단절된 사람이라면, 그 단절이 아무리 미묘하더라도 거의 필연적으로 타협하게 된다. 성경에 정통한 많은 젊은이들조차 오늘날 성 윤리에 타협하는 이유 중 하나가 너무도 많은 기독교인의 위선적인 삶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독교인에게 기독교적 확신은 그들의 실제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결과 시간이 갈수록, “당신 믿음이 진짜입니까?”는 점점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 바람을 견딜 수 있을까?아마도 당신은 이 글을 읽고 하나 이상의 카테고리에서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놀라지 않아도 된다. 21세기 성 윤리의 폭풍우를 이겨낼 수 있도록 믿음을 굳건히 하고, 또 갈라진 틈과 구멍을 메우라는 경고와 도전으로 받아들이라.성 윤리에 관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 타협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대신 그런 일이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지금 당장 당신의 믿음을 점검하라. 그리고 마음을 살펴보라. 당신이 믿는 기독교가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에 달려 있는가? 마음에 들어서? 편안함을 줘서? 권력을 줘서? 행복해서? 옳기 때문에? 만일 그렇다면, 그 모든 기초가 움직이는 모래와 같으며, 당신은 마태복음 7장 26-27절이 말하는 어리석은 건축자와 다르지 않다. 바람이 불면 무너지는 믿음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확고하게 믿음의 뿌리를 내린다면, 그래서 (오늘날 아무리 인기가 없어도) 주님의 사역과 말씀의 충분성을 확신할 뿐 아니라 그 진리에 만족한다면, 당신이 만들어가는 믿음의 집은 든든하게 설 것이다. 원제: 5 Foundations That Lead to Compromise on Sexual Ethic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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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준에서 바울은 모자란 선교사였을까?
by Jonathan Worthington
2021-08-12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신다. 그건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그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 사명을 “선교”라는 모자란 생각으로 축소한다. 하나님의 사명은 문자 그대로 우주적 규모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마지막에 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 일부는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고 나머지는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물 속에 있는 미움을 없애고 있다. 하나님은 죽음에서 부활해 이 세상을 통치하는 아들의 피를 통해서 이 우주적 평화를 이루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대사명하나님의 우주적 사명의 필수적인 부분 중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주신 대사명이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주적 평화를 이루는데 필요한 모든 과정을 책임질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회심하도록 이끄셨고, “모든 족속(panta ta ethne)을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을 가르치라”(마 28:19-20)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공동 사명이다. 왜냐하면 왕 되신 예수께서 그 사명을 수행하는 내내 흔들리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공동 사명을 수행한 지 몇 년 후, 바울과 바나바는 왕의 행군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일부 선교사, 교회 및 “선교” 기관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바울과 바나바의 실질적 사례바울과 바나바는 미전도 유대인과 비시디아 안디옥의 연합 이방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했다(행 13장). 두 번째 안식일 발표 후, 이방인(열방, ta ethne)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또 영화롭게 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과 저명 인사들이 그들을 쫓아냈다.바울과 바나바는 미전도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왕 되신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남쪽 갈라디아로 95마일(도보로 아마도 30시간 거리)을 여행하여 이고니온에 이르렀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대인, 이방인(열방, ta ethne), 그리고 통치자들은 그들을 거의 돌로 쳐서 죽일 뻔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로이스, 유니게, 그리고 디모데의 고향인 루스드라까지 남쪽으로 20마일을 더 달려갔다(도보로 6시간 추가?). 그리고 “모든 이방인”(panta ta ethne, 16절)의 일부이자 리카오니아 언어(행 14:8-20)를 사용하는 미전도 종족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고니온(20마일 떨어진 장소)과 심지어 비시디아 안디옥(115마일 떨어져 있음)에서 온 유대인들이 군중의 마음을 바꿨다. 그들은 바울을 돌로 치고 그의 몸을 성 밖에 내던졌다. 그러나 바울은 일어나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바울과 바나바는 갈라디아를 통해 더 동쪽으로 전진했다. 오늘날 인기 있는 선교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이 지역에서 작업(task)을 완료해야 했다. 그들은 이곳 갈라디아에서 이방인(열방)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더베까지 70마일을 더 걸었다. 그리고 더베의 미전도 종족 가운데 “많은 제자”를 삼았다(행 14:20-21).여기서 잠깐 멈추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까지 빨리 읽기만 하지 이 속에 숨은 암시적이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놓친다. 사도행전 14장 21절을 보면 중요한 선교적 결정이 더베에서 일어난다. 바울과 바나바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과 남부 갈라디아 전역의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했다. 이제 효과적인 선교사로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당신의 성화된 상상력을 사용하여 갈림길에 선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대화를 상상해 보라(다음 대화는 현대적 표현으로 약간 바꿨다).바나바: “글쎄, 어떻게 생각해? 시실리안 성문을 통해 남동쪽으로 우회해서 갈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다소에서 일단 당신 가족을 만나고 나서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야.”바울: “맞아. 파송한 교회에 보고도 해야하니까.”바나바: “그래, 그러고 나서 다른 미전도 지역으로 가면 되지.”바울: “응, 하지만… (잠시 생각)…. 여기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어. 갑바도기아 전역의 많은 미전도 국가들도 그리스도 왕국의 좋은 소식을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바나바: “당연하지.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왕이 주신 임무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완수해야 할까?”바울: “흠, 작업을 완료하려면”…. (지금 바울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그와 공동 선교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 중이다)…. “알았다! 이미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루스드라,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야 해!”바나바: “아니, 돌을 맞은 거기로? 쫓겨난 거기로? 이미 복음을 들었고 그래서 더 이상 ‘미전도 종족’이 아닌 거기로 말이야? 아멘!”이게 당신이 예상한 결론인가?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 메모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선교를 끝내는 것은 복음을 가지고 미전도 종족에게 가는 것뿐이다. 아니면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위대한 대사명을 반으로 축소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 점을 이해했을 것이다.그리스도의 사명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믿음에 거하도록 권하며,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함을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각 교회에서 그들을 위하여 장로들을 선발했고, 기도와 금식으로 주님께 그들을 맡겼다. (행 14:21b-23)바울이 신자들과 지역 지도자들을 더 세우고 가르치는 데 사용한 시간과 정력은 다름 아니라 그가 미전도 종족을 개종시키는 데 썼어야 할 시간과 정력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라. 한 마디로 그는 보기에 따라서 “덜 긴급한” 사역을 선택했다. 그가 갈라디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데에 들인 시간 또한 새로운 영혼을 개종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갈라디아에 있는 그 교회들을 계속해서 다시 방문하는 시간(행 16:1-5; 18:23; 19:1)도 마찬가지로 미전도 종족 개종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계속해서 이미 전도한 곳에 되돌아가고 또 되돌아가는 데에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했을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명이 모든 족속을 회심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제자를 삼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명과 모든 자원을 투자했고, 그에 따라 다른 기독교인들로부터 지원받은 모든 자원까지 투자했다.그러나 오늘날 많은 선교 전문가들은 갈림길에 선 바울과 바나바에게 전혀 다른 가르침, 이런 식의 충고를 했을 것이다. "형제 여러분, 사명(mission)은 분명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습니다. 북쪽으로 향하여 갑바도기아에 있는 미전도 종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형제여, 이제 나가서 임무(task)를 완수하세요!"이것은 내 친구들이 선교 현장에서 실제로 받은 코칭 내용이다. 나는 너무 느리게 전도하고, 너무 비효율적으로 사역하며, 미 전도 종족을 외면한다는 이유로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선교사에게 자금을 지원하지 않으려는 교회와 많은 대화를 나눠왔다. 비록 선의라 할지라도 축소된 선교사의 사명은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상처를 준다. 선교사 사역의 내구성과 지속성을 해친다. 그리고 통계 수치가 그리 나쁘지만 않았다면 얼마든지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선교 파트너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가 지금 선교를 업무와 조언 그리고 투자라는 측면에서만 보기에 그리스도의 공동 사명을 축소한 건 아닌지, 또는 지금 축소하고 있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하나님이 이루시는 우주적 화해와 평화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 하나님에게 많은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닌가? 선교는 시급한 일이다. 그렇기에 더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다. 원제: Would Paul Be Considered a Bad Missionary Tod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선교
선교전략
선교의우선순위
제자양육
바울과바나바
미전도종족
대사명
이방인
열방
선교현장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사랑의 참된 의미
by Alex Duke
2021-08-11
그리 오래 전이 아닌데도 마치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 오바마가 대통령이던 시절, 그는 이런 트윗을 남겼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리트윗하세요. #사랑은 사랑이다.나는 동성 결혼에 대한 교훈이나 도덕성에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단지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한 더 큰 대화의 출발점을 삼기 위해서 오바마 전 대통령의 트윗을 언급한 것이다. 인기도 있고 트윗하기에 좋은 문장이지만, “사랑은 사랑이다”라는 말은 사실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말하는 사람이 가진 기존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는 말이다. 사랑은 장난감이 아니다물론 “사랑은 사랑이다” 식의 조잡한 사랑의 정의는 진정성 및 자아 실현과 같은 미덕이 지배하는 오늘날 시대 정신(zeitgeist)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제 사랑의 중재자가 되었고 사랑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법과 제도의 가식적인 방해와 타인의 신비한 의견을 뛰어넘어 나무랄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언어 사용은 중요한 개념을 확장시키고 또 확장시켜 완전한 주관주의로 바꾼다. 그 결과는? 진정한 의미와 무게가 사라진 사랑은 이제 훨씬 못한 무언가, 인간이 만들었기에 불안하고 심지어 변덕스러운 대체물로 채워진다. 그래서 사랑은 결국 특별한 것 하나 없는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고, 그럴수록 진정한 사랑에 관한 대화는 더욱 어려워졌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나쁜 거래를 했다. 업그레이드하겠다고 정비소에 차를 맡겼지만 실상은 그만 고물차를 몰고 나오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 자신부터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이 틀린 점에 관해 정확하게 지적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 성경이 사랑에 관해서 말하는 다섯 가지 사실이 있다. 1.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우리가 사랑에 대해 인식해야 하는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은 오로지 하나님에 관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사랑은 삼위일체 창조주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을 통해 이런 사실을 드러내셨다. 때때로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리는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현재와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됨과 사랑을 주시며 피할 수 없는 세상의 미움 가운데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시기를 간구하신다. 예수께서는 또한 자신을 위해, 특히 임박한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몇 구절 후에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잠시 여기서 멈추고, 당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사실, 존재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상상해보라. 사람도, 장소도, 또 사물도 없다.무엇이 있는가? 예수님에 따르면, 뭔가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한 사랑이다. 아들과 그 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없이는, 아버지와 그 영을 사랑하는 아들이 없이는,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하시는 영이 없이는, “창세 이전”부터 있었던 이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리는 사랑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그 대답을 찾아야 하고,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기초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2. 사랑이 땅으로 내려오시다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새하얀, 사랑의 핵 그 자체이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있다.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부메랑”이 되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우리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그의 아들을 희생하셨다. 성경에서 사랑은 대속의 희생과 얽혀 있다. 우리는 이 연결의 정점을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발견한다. 십자가는 아들이 치른 희생의 증거이다. 빈 무덤은 아버지께서 그의 희생을 받아들이셨다는 증거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3. 사랑은 이웃에게 퍼진다사랑에 관한 성경의 핵심적 가르침은 사랑은 수직적이며, 이는 주로 하나님과 사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하나님은 실재하는 수직적 사랑의 존재에 대한 시험으로 수평적 명령(“이렇게 하라”)을 사용하신다. 즉, 수평을 통해 수직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희생적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35).빌립보서 2장의 서두에서 바울도 같은 말을 한다. 여기서 바울은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를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결한다. “같은 마음을 품는 것”과 “같은 사랑을 갖는 것”은 우리를 오로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킨다. 그분은 모범을 보이셨다. 사랑과 겸손을 관해서 그는 선구자이다. 계산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희생적으로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4. 사랑은 왕에게 순종한다또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바로 다음에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니라”는 말씀이 따라오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의 설명은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 속에 권위의 요소를 도입했다. 이런 사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전반과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아직까지 새 몸으로 영화롭게 되지 못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Christians not-yet-glorified)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권위가 실종된 사랑에 대한 정의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기에 이러한 대조는 강조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그의 선하신 권위와 주권 아래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죄라는 신용 카드를 엄청나게 쓰고 아버지가 그 빚을 갚아주기만 바라는 식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의 삶은 그런 게 아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죄와 거룩함에 대한 우리의 생각(disposition)이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 이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가 이루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것이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의 말하는 요점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왜 그런 건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 때문이다. 아무런 구속 없는 내 자신의 자유에 집착하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시나리오에서 꿈꾸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인 신기루를 바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인이 있다. 그 주인이 가혹하고 변덕스럽고 도무지 기쁘게 할 수 없는 존재(죄처럼)인지, 아니면 은혜롭고 변함없고 신뢰하는 존재(하나님처럼)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의 왕은 우리가 그의 통치 아래에서 살도록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5. 사랑은 천국을 꿈꾼다마지막으로, 사랑은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다. 사랑은 단지 “지금”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변할 수 없는 구원을 서로 상기시키고 또한 끊임없이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약속된 예수님의 재림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사랑해야 한다. 두 번째로, 회심은 실제적이고 그리스도인은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필요할 때 지체없이 죄의 심각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서로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서로를 거룩함의 자리로 격려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나 자매가 나의 죄를 놓고 나를 권면할 때, 비록 그 과정이 만족스럽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죄함이나 원망에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비롯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권면이 비록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내 속에 자신감을 억누르며, 때로는 논쟁적으로 반응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랑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대립은 특히 비기독교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모든 면에서 거짓 그리스도인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당히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은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지옥을 예약한 비기독교인에게 그들이 맞을 영원한 상태에 관해 경고함과 동시에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내세움으로써 오늘도 “천국을 소망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만약에 비기독교인이 이 기사를 읽는다면, 나는 대환영이다. 그들에게 이 글이 아마도 당혹스럽고 대립적이겠지만, 그만큼 또한 솔직하고 매력적이라는 사실까지 보기를 바란다. 이와 유사하게, 기독교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함과 동시에 지금도 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기독교인을 향해서도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붙들라고 격려함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반응에 따라 우리는 그들의 회개를 함께 기뻐하거나 또는 마태복음 18장과 고린도전서 5장에 나와 있는 권면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도무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경우, 그 형제 또는 자매를 공동체에서 퇴출함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영혼이 주님의 날에 구원받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흔히들 권징이라고 부르는 이런 과정조차도 사실은 천국을 향한 사랑의 모습이다. 웅덩이와 바다이 세상과 미국의 전 대통령이 말하는 사랑이 틀린 건 아니다. 사랑은 사랑이다. 그러나 이 자기 암시적인 문장이 말하는 사랑의 진짜 의미는 인간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기원, 즉 사랑은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이 아닌 외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두 번째로, 그분은 아들의 희생을 통해 그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 사랑이 조건적이 아니며 강권적인(authoritative) 이유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한 성령을 통해 필요한 것을 그때 그때 우리에게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 즉 신자와 비신자, 그리고 나아가서 죄에 빠져있다고 고백하는 신자까지도 사랑하는 방식을 바꾼다. 성경은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사랑은 우리의 기대를 높이고 또한 우리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놓는다. 이 세상은 아직 웅덩이에서 뒹굴고 있지만, 우리는 저 바다를 그려가고 있다. 원제: Love Is Not Whatever You Want It to B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생활
관계
사랑과권징
오바마대통령
시대정신
삼위일체
창조주
십자가
피조물
권징
사랑하라는 대계명과 게임 체인저들
by 김형익
2021-08-10
한 달 전, ‘게임 체인저(the Game Changer)’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나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그 다음 이야기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한 서기관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대답하셨다(막 12:28-31). 이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마태복음의 병행본문에서(마 22:34-40), 주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달려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 물었던 서기관은 예수님의 대답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것을 자신의 대답에서 보여주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로군요!(막 12:33)” 누가복음의 병행본문은(눅 10:25-28) 주님께서 부연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들려준다(눅 10:29-37). 이 비유에서 주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표면상의 이유는 분명하다. 제사를 위해서였거나 의식법적으로 정결함을 유지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제사법과 정결법을 위해 대계명을 희생했다는 점에서 틀렸다는 점을 보여주셨다. 이런 일은 지금도 적잖이 일어나고 얼마든지 우리들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와 교제, 기도와 봉사, 구제와 선교보다 더 중요하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대계명의 우선순위를 흔들거나 그 무게를 경감하거나 그 농도를 희석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취와 성공을 추구하면서 경쟁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은 너무나 도전적이며 결코 녹록한 계명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분리시킴으로써 대계명의 부담을 덜어 보려는 시도를 하려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선택사항이고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주님은 이 둘을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마 22:39).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나뉠 수 없다.세상은 우리에게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는 말도 듣는다. 좋은 대학, 높은 연봉과 평생 보장 직장, 멋진 결혼과 안정적인 가정, 그리고 안락하고 넓은 집, 좋은 차, 조기 은퇴와 멋진 은퇴 계획은 이 세상의 게임에서 포기할 수 없는, 모두가 선망하는 중요한 가치들이다. 이것을 얼마나 성취하느냐가 인생의 승패를 결정한다. 이것을 위해서 모든 가치를 희생하고 달려간다. 영혼 마저도! 이것이 세상의 게임의 법칙이다. 내가 너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일까? 사실, 세상은 이것보다 더 터프(tough)하고 험악하다. “실제로는 영화보다 더 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제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신자도, 이 세상의 게임이 진행되고 있는 그라운드에서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신자들이 더 이상 이 세상의 게임이 아니라 새로운 게임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말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되 더 많이 사랑하는 게임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신자들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이 소명을 부여받는다. 하늘에서가 아니라,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동안에,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을 따라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한 게임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다.누가복음 6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눅 6:27-37).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만일 신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세상 죄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누가복음 6:38).” 이것은 좀 더 디테일한 새로운 게임의 법칙이다. 우리가 취사선택하거나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의 말씀이다. 당신은 주님의 이 말씀을 알고 기억하는가? 주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신자인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자세히 말씀하신다.그러나 문제는, 이 땅에서 신자들이 여전히 경쟁과 승리의 게임에 몰두한다는 사실에 있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드리고 예배와 봉사에 열심을 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서기관의 대답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영신학은, 여전히 세상의 게임에 몰두하며, 그 게임의 법칙을 따라 사는 신자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며 그들의 사욕을 채워준다. 신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매 주일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세상의 게임을 하며 살아갈 유혹을 직면하는 성도들에게 매주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거룩한 소명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게 편지를 쓸 때, 이렇게 로마의 성도들에게 거룩한 소명을 일깨워주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사도 요한은 어떻게 그 일을 했는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한1서 3:16–17).”매주일, 복음의 말씀으로 일깨움을 받는 신자가 이 세상의 게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새로운 게임을 하기 위해, 점검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덜 고생하고 좀 더 편하고 좀 더 안락하게 살겠다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이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거나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이 기준이 작동하는 한, 신자의 소명은 관념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이 기준이 뭐가 문제인데?”라고 반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이 기준이 진짜 숨어있는 문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을 따라 살도록 새로운 게임으로 부름을 받은 신자들이 그 소명을 이루고 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문제가 여기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삶을 눈여겨보았는가? 그들이 조국을 떠나 하나님이 부르신 땅, 그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소명을 위해 덜 고생하고 더 편하고 더 안락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부르신 소명을 따라 살겠다고 한 순간, 그런 기준들은 힘을 잃고 만다. 덜 고생하고 더 편하고 더 안락하게 살겠다는 기준을 포기하지 않은 선교사가 있다면 당신은 그를 존경하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신자가 모두 해외선교사로 부름을 받지는 않지만, 신자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대계명과 모든 말씀에 비추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소명은 이전의 세상의 게임을 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포기할 수 없는 암묵적 기준, 덜 고생하고 더 편하고 더 안락하게 살겠다는 기준을 내려놓게 만든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소명을 따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게임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신자는 이 세상의 게임 체인저로 오셨던 주님을 따라 세상의 게임 체인저들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게임체인저
대계명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무한경쟁
신자의소명
우선순위
게임의법칙
번영신학
강단
대중문화 속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by R. C. Sproul Jr.
2021-08-09
할리우드에서 가장 큰 모순어법(oxymoron)일 법한 것이 매스컴의 안 좋은 관심일 것이다. 지금 시대의 방송은,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이 당신에 관해 어떻게 말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대중에게 얼굴을 비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교회도 세상의 이러한 생각이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매스컴이라는 새로운 신 앞에 절을 하고, 이것이 바로 권력으로 향하는 티켓이라고 믿는다.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세상의 관심 속으로 파고들어가 예수님의 빛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풋볼 영웅들은 엔드 존(미식축구에서 점수를 얻는 구간 – 역주)에서 엎드려 기도함으로써 잃어버린 영혼들을 “전도하고,” 홈런을 치는 타자들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다. 저 위의 계신 분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케팅하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 처럼 분석하여 무대에 세웠다. 그것이 너무 고상해 보일 때는 팝송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이마저도 세상을 바꾸지 못했을 때, 우리는 더욱 필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문신이나 팔찌를 사용해 보기도 했다. 마침내 목표에 도달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물건을 몸에 걸친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예수를 나타내는 옷을 입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때 기뻐한다. 즉 기독교인들은 “This Blood’s For You”(이 피는 너를 위한 거야)라고 새겨진 티셔츠를 입음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예수님이 패션 유행의 가운데 있다는 것에 기뻐한다. 20년 전에 십자가 목걸이가 굉장히 유행했다. 이제는 모두가 마음속에는 아닐지라도 옷이나 액세서리를 통하여 예수님과 가까이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얼굴은 유행을 이끄는 사람들의 티셔츠를 장식하고 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우리는 이것을 축하하기 전에 성경적 교리와 대중문화를 구별해야 한다. 예수님이 “짧은 유명세”(Fifteen minutes of fame – 다중 매체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짧게 유명했다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 앤디 워홀의 말 – 역주)를 깨뜨렸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작을수록 더 커진다고 말한다. 반대로 대중문화는 역설적으로 커질수록 작아진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것과 애처롭고 보잘것없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명성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대중문화 아이콘이란 대중을 대표하는 것이다. 즉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중요한 모든 부분을 뒤로해야 한다. 예수님이 티셔츠 위에 축소되어 이미지화 되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는 뒤로 감추어져 버렸다. 티셔츠는 예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아이콘처럼 원래의 의미를 벗어나서 쓰인 것이다. 장식처럼 쓰이는 예수님은 관심을 끌 수 있으나 본질적인 것이 없는 그저 수단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하나의 패션 소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괴하게 만들어서 십계명의 제2계명과 제3계명을 범하며 그 이름을 망령되게 하고 말았다.예수님의 모습은 애초에 신문 1면을 장식할 만한 뉴스는 아니었다. 무덤에서 걸어 나올 때 맞이하는 기자들은 없었다. 그 어느 누구도 속보를 전하며 우리에게 최신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신문이나 잡지의 특별한 면을 할애하지도 않았다. 부활과 승천 사이 40일 동안 그는 수백 명의 사람에게 나타나셨다. 부활의 사실을 증명할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것이 예루살렘의 원형극장을 채울 만큼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결코 유명한 뉴스가 되지 않았다. 그분은 비하(humiliation, 예수님의 인성을 취함으로 낮아짐 – 역주)하셨다가, 승귀(exaltation,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 – 역주)하셨다. 바뀐 것은 그의 인기 순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그분의 자리가 바뀐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한 곳, 그 하나님의 자리로, 영광의 자리로 옮겨 가셨다.예수님의 승귀, 그 이후에 비로소 주님이 신문 1면을 장식할 것이다. 그 위대한 날에 사람들은 티셔츠의 이미지가 아닌 예수님 발아래 서기 위해 소리를 높이거나 아니면 산 아래 숨으려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그리고 왕의 심판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판단할 것이다. 각 사람은 이를 갈며 혹은 큰 기쁨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십니다”(Jesus Christ is Lord”)라고 외칠 것이다. 요점은 대중문화가 주는 보편적인 인정을 받는 예수님이 아니라 오직 높은 곳에서만 올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우리는 지금부터 주님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과 돼지 목에 진주를 거는 것의 차이를 배워야 한다. 대중에게 널리 보급된 예수님의 티셔츠가 신앙을 기품있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의 인기를 축하하기보다는 슬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오직 본질 없이 맹목적인 마케팅을 멈출 때만 바른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조용히 순종의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는 높아질 것이다. 그 높아짐은 제이 레노(Jay Leno, 자신의 이름을 건 토크쇼를 진행한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 역주)의 토크쇼에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영광스러운,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저택에 있는 자리로 가는 것이다. 우리의 길은 주님의 길과 같다. 단지 낮아지면 가는 길인 것이다. 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 우리가 살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풍요로운 삶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십자가를 매는 것뿐이다. 대중문화는 보완하고 적용할 대상이 아니라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굴복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척하는 모든 자들을 낮출 때 그리스도는 비로소 완전히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광은 온전히 주님에게만 있을 것이다.원제: Jesus Christ Superstar출처: www.ligonier.org번역: 허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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