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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약함, 희망: 인종갈등 속 목회에서 배우자
by Steven Lee
2021-08-28
내가 자랄 때에도 우리 동네에서 인종 문제는 언제나 중요한 주제였지만, 오늘날처럼 격렬하고 심각했다고는 기억하지 않는다. 거의가 다 백인인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나는 “칭크”(chink) 또는 “국”(gook)이라고 불리곤 했다(역자 주: 칭크와 국은 동양인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반에서 어떤 아이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지껄이면서 나의 가늘게 찢어진 눈을 흉내 내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 지역에 난민으로 들어온 동남아 학생들과 나는 거리를 두려고 했었다. 나는 놀이터와 농구장에서 흔히 쓰는, 인종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말들을 웅얼거리듯 슬프게 지껄이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이제 목사가 된 내게 인종, 인종주의 그리고 인종간 화합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오늘날 가장 양극화된 주제 중 하나를 건드리는 것인데, 그건 일반 사회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심지어 교회에서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나름의 생각이 있고 누구나 다 지지하는 입장이 있기에, 인종 문제는 승자 없는 패자만 나오는 주제라고 느낄 정도이다.미국에서 인종 문제만큼이나 분열적이고, 적대적이며, 취약하고 또 도전적이면서도 복잡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주말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사역과 비전을 기억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근거로 여전히 이 문제와 관련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다시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1963년 8월 28일, 링컨 메모리얼에서 행한 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에서 킹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언급했다. “큰 시험과 환난을 경험한 사람들 … 박해의 폭풍을 경험하고 또 경찰의 잔혹함에 시달린 사람들 …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고통을 당한 사람들 …” 그럼에도 킹은 연설을 듣는 이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이렇게 당부했다.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오늘 여러분께 말합니다. 절망의 계곡에서 몸부림치지 말자. 우리가 오늘과 내일의 역경을 만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습니다. 아메리카 드림에 깊은 뿌리를 박은, 바로 그런 꿈 말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지금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진실의 강령대로 살아가는, 그런 날이 있을 것이라는 그 꿈이 내게는 있습니다.킹은 그가 꾸는 꿈이 현실이 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우리가 사는 오늘이 킹이 연설을 하던 1963년보다는 훨씬 더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그의 꿈이 현실이 된 시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세상에는 여전히 폭력, 적개심, 분열, 편견, 인종적 적대감, 원한, 분노, 냉담함, 무관심이 가득하다. 그러나 절망에 빠지는 대신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지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또 단지 마틴 루터 킹의 꿈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은 꿈,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가진 모두에게 다가오고 있는 종말 계시의 현실(the end-time Revelation reality)이라는 더 나은 꿈을 위해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안에 깊이 뿌리박은 꿈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준 권위에 힘입어 모든 믿는 자와 지역 교회는 온 세상을 제자로 만들어야 하는 부름을 받았다(마 28:18-20).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어 제자를 만드는 이 글로벌 미션은 세상의 모든 민족으로 구성된 천상의 합창단, 다양성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합된 그 모습을 통해 절정에 이를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를 위한 이 영광스럽고 종말적이며 또 그리스도를 높이는 성경적 꿈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이것이 끝이다. 모든 나라가 다 나아올 것이다. 모든 족속과 모든 민족이 다 나아올 것이다. 모든 언어가 다 등장할 것이다. 거기에 이등 국민은 없다. 엘리트도 없다. 오만함과 적대감과 증오도 없다. 당신은 이런 광경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날에는 모든 잘못이 다 바로잡힐 것이다. 모든 원한, 오해, 헛점, 완악함, 적대감, 인종적 선입관, 시스템적 불법, 그리고 개인적인 죄성까지 모두 다 바로잡힐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자신을 믿는 모든 죄인들을 위해 그의 피를 통해서 죄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이런 구원의 무료 선물을 거부하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흠 없는 재판정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날에는 모든 분열, 불일치, 그리고 적대감이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이들 위로 쏟아내리는 그의 보혈로 인해 다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위한 교훈당신이 이런 미래를 정말로 믿는다면, 그런 미래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큰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이 미국에서 인종 문제에 대한 해법이 생길지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예상하기로 나의 사역이 끝날 때가 되어서도 우리는 여전히 노예제도, 시스템적인 인종차별, 불의, 경찰의 잔혹함 그리고 인종간 적대감을 얘기하지 않을까 싶다. 기독교인이자 목사로서 나는 큰 슬픔을 느낀다. 너무도 느리게 또 힘들게 움직이는 이런 잔인한 현실에 탄식한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이런 현실이 끝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감사한다. 다음과 같은 날이 올 것이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여기에서도 성경적인 정의를 이뤄내는 주도자가 될 수 있으면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정의를 완벽하게 구현할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리며 살 것이다. 그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족, 방언, 언어, 국가로 구성된 다민족 모임에 대한 이 영광스런 종말의 비전을 더 사랑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개인 생활, 교회, 가족 및 지역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야 한다. 다양성의 연합을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교회를 목회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오로지 우리 구세주에게만 우선순위로 맞추며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다음 세 가지를 나누려고 한다. 1. 다양성을 사랑하고 추구하라존 파이퍼(John Piper)는 다음과 같이 썼다.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에게 교회에서 만나는 인종적 다양성이 주는 아름다움과 인종적 다양성이야말로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디자인의 일부라는 확고한 성경적 확신이 실종된 상태이다. 교회 속 인종적 다양성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민족적 다양성에 대해서 적대적인 그리스도인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내가 목격하는, 다른 인종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적대감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을 화해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깊고 성경적인, 십자가 중심의 우러남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올바를지 모르는 다양성의 관용이 가진 아주 얕은 수준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계시록 5장 9-10절에서 드러나듯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핏값으로 사신 다양한 인종의 신부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필요하다. 2. 정의를 사랑하고 추구하라하나님이 성경에서 드러낸 원칙에 따라서 옳고 바른 일을 하는 것이 정의이다.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한다. 이사야 30장 18절을 보라.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시편 37편 28절도 보자.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완벽한 정의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주관한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의 백성을 통해서 이 세상에 정의를 이루길 원한다. 시편 106편 3절을 보자.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잠언 21장 3절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공의와 의를 행하는 것은 불법을 참는 게 아니다. 대신 우리는 이사야가 받은 환상에 주목해야 한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7).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날 참된 성경적 정의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이 땅이 아니라 다시 오실, 완벽하게 정의로운 그분에게만 희망을 가지고 사는 존재들이다. 3. 외부인(Outsider)을 사랑하고 추구하라 우리는 더 이상 국경 남쪽의 이웃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우리는 종교적 박해, 대량 학살 또는 정치적 불안에서 도망치는 난민들이 느끼는 두려움 속에서 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백성들에게 나그네를 사랑하고(신 10:19), 그들을 압제하지 말고(슥 7:10),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돌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시 146:9) 명령했다. 그렇다면 이 지상에 잠시 머무르는 나그네이자 또한 유배자이면서도(벧전 2:11), 상상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아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 우리들은 얼마나 열심을 다해 압제받고 취약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켜주어야 할까? 우리는 난민 위기와 이민 논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할 뿐 아니라 사랑과 인내, 친절함으로 주변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왜 아직도 희망이 있는가예수님은 “미움으로 나누는 벽”을 허물었다(엡 2:14). 우리가 보여주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 우리가 드러내는 이 세상에는 없는 타인을 향한 사랑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요 13:35). 아무리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정치 정책, 문제 해결 전략, 교회와 선교 단체를 포함해서 특정 문제를 어디까지 다뤄야 하는지의 정도 그리고 무엇이 가장 현명하고 유익하며 시기적절한 경로인지 등등에 대해서 얼마든지 서로 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지체로서 서로를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결코 분열과 적대감이 생길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스러운 하나됨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지킬 능력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의미있는 발걸음을 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좌와 우로 나뉘는 게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왕국에 뿌리를 내리고 믿음에 찬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또한 우리 모두가 달성하려는 목적을 잊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전략, 전술 및 이해 수준이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은혜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마침내 그의 왕관 주변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의라는 옷을 입고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는 마지막 날에 이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인종 차별이라는 문제와 관련한 대화에서 완전할 수는 없다. 이 문제를 다루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누구나 다 실수를 저지른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그 누구도 도덕적으로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다 동일한 장소에 서서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이 땅에 살았던 동안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연약함과 신실한 기도, 수고함과 적극적 참여를 통해 그분의 종말 사명을 진전시키는데 참여할 수 있었는지, 새삼 감탄하게 될 것이다. 오 주 예수님이시여, 빨리 재림하소서. 만일 그 재림이 지체된다면, 그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서 우리가 서로의 팔을 꽉 잡고 당신이 주시는 능력으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당신이 오는 그날까지, 당신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원제: Hostility, Fragility, and Hope: Lessons from Pastoring Through Racial Tension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존파이퍼
외부인
인종문제
다양성
미래
희망
마틴루터킹
재림
딥페이크와 진실의 타락
by Jason Thacker
2021-08-27
노래하는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이사하는 더글러스! 틱톡(TikTok)에서 골프하는 탐 크루즈(Tom Cruise)!온라인에서 이런 걸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재미있으면서도 중요한 신기술인 딥페이크를 이미 접한 것이다. 최근 몇 달에 걸쳐서 특히 더 각광을 받고 있는, 인공 지능으로 구동되는 딥페이크라는 이 기술이 사실 그리 새로운 건 아니다. 단 최근 들어서 대중이 더 믿고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얼마 전 우리는 쉰 살 먹은 한 일본 자전거 선수가 인터넷에서 자신을 젊은 여성이라고 믿도록 하기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와 같은 유명 지도자의 가짜 동영상을 만드는 데에도 이 기술이 사용되며, 경우에 따라서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 여성의 가짜 누드 사진을 만드는 데에도 사용된다. 딥페이크 기술을 통해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재미있는 비디오를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기술 만능의 시대를 맞아 현실 및 진실의 또 다른 닻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비극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무너지는 기초여러 면에서 딥페이크 기술은 현대 서구 사회와 진리의 빈약한 관계에 대한 간결한 은유이다. 이는 진리와 초월의 구속을 해체한 계몽주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닐 포스트만(Neal Postman)이 그의 고전 ‘테크노폴리(Technopoly, 궁리, 2005)’에서 설명했듯이 경험주의를 향한 계몽주의의 추진은 궁극적으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모든 권위(종교, 정부, 언론)의 거부로 이어졌다.경험주의로의 이러한 전환은 또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와 폴 니델스키(Paul Nedelisky)가 ‘과학과 선(Science and the Good)’에서 적절하게 설명했듯이, “새로운 도덕 과학”에서 도덕에 대한 경험적 기초를 추구하는 새로운 사상가의 흐름을 촉발했다. 데이비드와 폴은 이러한 문화적 변화가 우리 시대에 허무주의적 공리주의를 수용하게 했다고 결론지었다.과학과 기술의 배후에 포괄적인 목적 의식(telos)이 없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경향은 단지 이전에 파괴한 것을 고치기 위한 혁신에 불과하다. 캐나다 철학자 고 조지 그랜트(George Grant)는 ‘기술과 정의(Technology and Justice)’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술이 빚어낸 긴급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술이 필요하다.” 그랜트는 비기술적 수단과 기술적 수단 사이에 선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자크 엘륄(Jacques Ellul)의 “기술적 명령”에 관한 생각을 하나의 단서(thread)로 집어들었다. 이 세상은 점점 더 기술에 의해 조정되고 관리되고 있다. 여기에는 진리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마저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순환 논리(기술로 인해 발생하거나 악화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시 기술을 의지하는 상황)는 우리가 직면한 더 깊은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진과 비디오로 대표되는 현대 시대에서 “무엇이 진리인가?”와 같은 질문이 던진 딜레마에 한때 도움을 주는 것 같았던 기술은 이제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 같다. 상실한 진리에 대한 신뢰오늘날 사진과 비디오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맥락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일종의 문서화된 증거를 얻게 되었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비디오나 사진에서 본 것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고 법적으로 또는 여론 형성에 있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시간 내내 포토샵 및 비디오 편집 소프트웨어와 같은 도구에도 불구하고 비디오와 사진을 수정하는 것은 여전히 꽤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그 결과, 가짜와 실제를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누구나 비디오가 장착된 스마트폰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간편한 편집 도구가 확산됨에 따라, 다른 건 몰라도 사진 및 비디오가 언제나 “진실”이라는 신뢰성마저 흐려지게 되었다. 무수히 많은 인종 편견, 성적 학대, 그리고 부패 사건이 비디오와 사진으로 인해 폭로되었지만, 한편으로 디지털 방식으로 조작된 사진이나 편리하게 편집된,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비디오 영상의 목적이 진실의 포착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더 퍼뜨리고 싶은 욕망이라는 사례 또한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딥페이크라는 이 기술은 골치 아픈 가능성의 새로운 영역이 되었다. 딥페이크의 위험딥페이크 기술이 계속해서 더 저렴해지고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왜곡된 형태의 문서화된 “진실”의 남용이 증가할 것이고, 그 결과 우리 문화에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길 것이다. 첫 번째, 가짜(디지털로 재구성되거나 변조된)와 진짜를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관해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될 때, 그 결과는 인간의 심리와 사회 문화 전반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이다. 회의론이 확대되고 가속화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적”이 계속해서 우리를 속이고 있고, 오로지 “내 편”만을 신뢰할 수 있다는 가정에 함몰될 것이다. 그 결과는 더 가속화된 민족주의(tribalism)와 정치적 분열이다. 회의론이 확대되고 가속화됨에 따라 민족주의와 정치적 분열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두 번째, 딥페이크 기술이 점점 현실이 됨에 따라 비디오 및 사진 증거의 신뢰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 결과 누구나 쉽게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사진 또는 비디오 속 누군가가 실제 그 사람이 아닌 경우를 상상해보자. “증거”가 단순히 정치적 또는 개인적 이득을 위해 만들어진 딥페이크라고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다. 머지 않아 사진과 비디오를 인증하는 기술이 새롭게 나온다고 해도, 그 기술을 돌파하는 새로운 기술이 나올 것이고 끝없는 기술의 속도 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다음은 무엇인가?우리에게는 딥페이크와 진실을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런 현실 속에 숨겨진 도덕적 또는 사회적 불안에 맞서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과도한 영향을 미치는 기술의 힘에 대한 경종을 울려야 한다. 진실의 타락에 맞서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기술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현실 감각을 재조정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와 이웃을 비인간화할 수 있는지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소셜 미디어, 딥페이크 그리고 무너져가는 진리 기반으로 요약할 수 있는 지금 시대에 기독교인의 소명은 최신 기종의 반짝이는 베니어판을 지나 그 너머에 있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이다. 정치, 섹슈얼리티, 기술, 심지어 교회를 포함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지금 진리와 현실에 대한 대대적인 거부라는 초유의 상황을 겪고 있다. 그러나 확고한 진리와 초월적 목적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결코 번영을 꿈꿀 수 없다. 여전히 교회에게는 도덕적 공허함 속으로 과감히 들어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초월적이고도 현실에 부합하는, 진리로 이끄는 밝은 길을 보여줄 기회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밝히는 그 현실(reality)은 결코 누군가의 당파적 의제나 사악한 환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딥페이크 버전이 아니다. 원제: Deepfakes and the Degradation of Tru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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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 Carter
2021-08-26
탈레반 세력들이 20여년 전에 잃었던 나라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다시 얻으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몰락이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프간 기독교인들이 수일 내로 큰 위험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미군이 주둔하여 억제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아프가니스탄은 오픈도어선교회(Open Doors)에 의하면 박해가 단지 북한보다 약간 덜 심한 땅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은 그들의 새로운 신앙이 발각되면 무서운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오픈도어선교회가 언급하는 대로 그들은 그 나라에서 도망하든지 아니면 죽임을 당하든지 해야 한다. 숨어 지내던 한 아프간 신자가 “우리가 어떻게 날마다 살아남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라고 말한다. “그분께서 아십니다. 그분께서 인자하셔서 우리와 함께 거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죽음에 지쳤습니다.”미국 군대가 급히 그 나라를 떠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더욱 핍박에 노출될 것이다. 여아들과 여성들 또한 고난을 당할 것이고, 지난 20년간 서방 세력을 도왔던 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부지런히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가오는 고난에서 보호하시기를 구해야 한다.기독교인들은 그 나라에 있는 목회자와 선교사들의 영적 공급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저에게 이메일과 문자를 보낸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주께서 그들을 믿음 안에서 강하게 하셔서, 그들이 누군가 말하듯이 ‘주권자요 왕이신 주님 안에서 강하게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라고 조쉬 맨리(Josh Manley)는 말한다.우리는 또한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오픈도어선교회가 지적하듯이, “국제 매체에서 잘 다루지 않지만 코비드-19 확진자 수가 이 나라에서 치솟고 있고 병원에서 제공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도 제한적이다. 그나마 그 의료 체계가 새로운 탈레반 정부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또한 국가의 몰락으로 인해 더욱 극단주의와 테러주의에 이르지 않게 기도해야 한다. 핍박받는 크리스천을 살피며 돕는 국제기구(Release International)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은 “탈레반의 재빠른 진격은 극단주의자들을 대담하게 할 뿐입니다”라고 말한다.그러나 예수께서 우리가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또 다른 부류가 있는데, 곧 탈레반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3-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예수께서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명령을 주셨을 때, 언젠가 탈레반 같이 그분의 신부를 살해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탈레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다.우리 아프간 형제자매들을 살해할 수 있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세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탈레반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라탈레반과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회심에 대해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주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회심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첫 번째 이유가 보다 일반적인 것은 그 극단주의자들의 회심을 기도하는 것이 소용없는 간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셨던 것을 그들에게도 하실 수 있다는 신학적 진리를 잘 안다. 하나님은 구원을 받도록 은혜의 선물을 주신다(엡 2:8). 그러나 우리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그들이 참된 회심을 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여서 우리가 구하는 것조차 우리와 하나님 모두에게 시간 낭비일 거라고 생각한다.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참된 회심을 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회심을 위해 어쨋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최소한 그들의 마음을 바꿔달라고 간구할 수 없겠는가?많은 경우는 아니지만 우리가 그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이 실제로 회개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니느웨 땅에서의 요나 같이,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이 긍휼과 용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내려질 마땅한 결과를 받기를 원한다.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예수님의 명령을 의무감으로 따르며 나치를 위해 기도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자신의 죽음을 앞둔 순간에 참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면 그 기도의 용사들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많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불공평한 것처럼 억울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살려주셨을 때 요나가 했던 것처럼 그들은 아마도 불평했을 것이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그러나 정확히는 그분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원수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원수였을 때에 우리에게 베푸셨던 동일한 은혜를 우리 원수들에게 베푸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 말고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겠는가?탈레반이 악을 행하는 것이 제지되도록 기도하라우리 원수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그들의 악한 행위가 제지되도록 기도하는 것은 상반되지 않는다. 탈레반 박해자들이 더 많은 악을 범하지 않도록 억제되는 것은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유익하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계속 박해하는 것보다 그들의 생명이 짧아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마태복음 5장 22절 설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이생에서 죄를 단 하나라도 덜 범했기를 바랄 것이다.지난 20년 동안 무고한 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위해서 미국을 포함한 정부들이 군사적 행동을 취하여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남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을 박해하는 것을 막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런 악을 막는 데 힘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지지함에는 우리에게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그렇게 억제하는 힘을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요청하는 동기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탈레반 세력의 멸망이 그들이 일으키는 죽음과 고통을 막는 데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나 죽음을 기뻐해서는 안 된다(잠 24:17).탈레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도록 기도하라우리가 합당하게 세워진 정부 당국이 세상의 정의를 구현하기를 간구하듯이,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하시기를 간구할 수 있다. 존 N 데이(John N. Day)는 “사랑과 축복은 신구약 신자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윤리이지만, 저주와 하나님의 보응을 구하는 것은 극단적인 상황에 해당되는 윤리이다. 극심한 상황에서는 완고하고 간사하고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불의한 죄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보응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기를 구함에 있어서 우리의 동기를 삼가 주의해야 한다. 주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의무를 회피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 보응을 맡겨야 하는 한편,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9-21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것은 “마지막 호소”로 포함되어야 한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거나 악을 행하는 데서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 필수적인 것을 행하시도록 마지막으로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예전에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을 확실히 알고 우리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심에 은혜와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탈레반이라 할지라도 그의 자비를 받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크게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거절하고 그들을 살려주실 분을 대적하여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없는 자들에게 내려질 마땅한 하나님의 보응을 그들이 받도록 구해야 한다.원제: How to Pray for Afghanistan and the Talib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강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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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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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호소
요나
산산 조각난 믿음을 찾아준 로마서 5장
by Kathryn Butler
2021-08-25
외과 수술 훈련 기간 중, 응급실에서 하룻밤 일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내 믿음이 산산 조각이 났다.나는 성경적 진리보다는 감성에 근거한 믿음을 가진 명목상의 크리스천으로 자라났다. 어느 날 밤, 응급실에서 소생을 기다리던 많은 심장들이 내 손 아래에서 그 박동을 멈추었다. 그것을 대비할 성경적 진리를 알지 못하여, 나의 빈약한 믿음은 먼지처럼 훅하고 날아가 버렸다.참혹한 밤이 공포는 20대 청년이 자다가 누군가에 의해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공격당하면서 시작됐다. 그의 아내는 폭행을 당하여 사망했고, 그의 4세 아들은 이 모든 것을 목격했다. 그 남자는 두개골 골절과 뇌에서 피가 튀는 상태로 응급실에 도착했다. 그를 안정시키려고 서두르면서 나는 집중하려고 애썼다. 나는 그의 어린 소년이 잠옷을 입고 비틀거리며 복도를 지나가며 주먹으로 눈을 비비다가 눈을 뜨고는 방망이 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세상이 붕괴되는 것을 보는 것을 상상했다. 잊히지 않는 그런 기억을 가지고 이 아이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내가 여전히 이 생각과 씨름하고 있는 동안, 구급대원들은 총상으로 죽어가는 십대를 응급실에 데려왔다. 그의 심장은 멈췄고 응급치료팀은 뇌에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흉부압박을 시행하고 있었다. 나는 멍한 상태에서 메스를 잡고 어린 소년의 흉부를 살펴보았다. 그의 뛰지않는 심장을 감싸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 주변을 더듬어 보았다. 벌어진 구멍에 손이 들어가자 내 숨이 가빠졌다. 총알이 그의 대동맥을 찢어 놓았기 때문에 상당한 양의 피가 가슴에서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그를 구할 수 없었다.나의 트라우마 호출기가 다시 울렸다. 또 다른 십대 아이. 또 다른 총상. 이번에는 소년의 머리가 총알을 맞았다. 레지던트가 그의 눈에 빛을 비추었을 때, 소년의 눈동자는 멍하니 고정되어 초점이 없었다. 그는 의 의식이 없는 뇌사 상태가 되었고 우리는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젖 먹던 힘을 모아 그의 머리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그의 상처를 꿰매어 깨끗하게 해주고, 그의 가족들이 사랑하는 소년을 마지막으로 알아보게 보여 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작업이 한창일 때 문이 열렸다. 나는 눈을 들어 그 소년의 어머니가 방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피는 여전히 아들의 머리를 후광으로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을 때, 나는 그녀가 이 끔찍한 장면의 여러 모습들, 모든 상처와 흠집을 그녀의 기억에 영원히 새겨 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피 묻은 장갑을 벗고 방에서 뛰쳐나와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침묵을 찾아서다음날 아침 퇴근 후, 나는 내 몸의 중요한 부분이 뿌리에서 뽑힌 것처럼 속이 텅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하나님은 그런 악을 허용하고 계신 걸까? 우리 모두처럼 가족을 사랑하고 행복을 꿈꾸며 더 나은 것을 바라는 사람들을 황폐화시키는 그 고통을 하나님은 어떻게 허용할 수 있을까?몸은 쉬고 싶고 또 아팠지만, 나는 선하고 진실한 것을 찾아 두 시간 동안 차를 몰고 버크셔 산맥으로 향했다. 한참을 달려 코네티컷 강이 내려다보이는 다리에 멈춰 선선한 가을 공기를 마시고 눈을 감고 기도했다. … 그러나 아무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눈을 감았지만 내 장갑에 묻은 피만 보였고, 그 소년이 마지막으로 고정되어 응시하던 눈만 보였다. 그의 어머니가 바닥에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광활한 침묵 속에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답을 분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복음을 통해 고난을 보다그 후 1년 동안 나는 매일 코네티컷 강을 가로지르는 그 다리로 돌아가 난간에 나를 던지는 걸 계속 떠올렸다. 하나님 없이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병원에서 목격한 암울한 순간을 감싸줄 어떤 의미도, 어떤 자비의 빛도 찾지 못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의 공포, 만연한 고통, 절망만을 보았다.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내 환자 중 한 명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치명적인 뇌 손상에서 회복했을 때, 내 안에서 한 줄기 희망이 꿈틀거렸다. 내가 마침내 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내 마음에 불꽃을 일으켰다. 나는 사복음서를 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경이롭게 했다. 그 다음 나는 로마서에 뛰어들었다. 5장을 읽으면서 나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3-8).1년 동안 고난의 문제가 나를 신앙에서 멀어지게 했다. 그러나 로마서 5장 3-5절을 읽으면서 나는 복음의 렌즈를 통해 고난을 보았고 하나님의 자비가 나를 압도했다.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다바울은 로마서 5장을 환란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는 놀라운 주장으로 시작한다(3절).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1-2절). 하나님이 시련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그분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강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3-5절).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구주를 기억하므로 우리가 기뻐할 수 있다(히 4:15).하나님은 고난, 곧 사랑하는 아들의 고난을 통해 역사하셔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셨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의 사랑을 분별하지 못할 때라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고난을 참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을 아신다는 진리에 매달릴 수 있다(사 53:3; 히 4:15). 그리고 놀랍게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 그 고난을 짊어지셨다. 그분은 우리 죄의 모든 무게를 짊어지고 우리가 받은 형벌을 감당하셨다.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아버지를 향한 순전한 사랑으로 순종하셨다(요 3:16).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죄에 짓눌리고 부서지고 자격이 없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사랑의 본을 알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시는 방법이다(롬 5:8).흔들리지 않는 소망로마서 5장 3-8절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재난이나 재앙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소망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죄로 병든 세상에서 우리의 눈을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향하게 한다(계 21:5). 그리고 우리의 눈이 그분에게 고정되면, 우리의 고통은 대장간에서 철이 제련되는 것처럼 우리를 단련시키는 도구가 된다. 십자가는 가장 비참한 환난의 순간에도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일깨운다. 우리가 탄식할 때에도(롬 8: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은 절망을 몰아낸다.질병, 고통, 죽음은 타락의 가증한 열매이며, 날마다 우리를 둘로 나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소망이 있다. 비극이 지금 우리를 황폐화시키고 있지만, 우리의 눈물은 영원히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악을 정복했으며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죄의 열매인 총상, 뇌 손상, 애도, 교량 위에서의 절망은 새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원제: How Romans 5 Brought Me to Christ When Suffering Had Killed My Fai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신학
신약
로마서5장
산산조각난신앙
고난
복음
타락
트라우마
소망
양극화 시대에 대사명은 우리의 인도자이다
by Kathy Keller
2021-08-24
“복음이 모든 것을 바꾼다”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한 계간지 ‘생명의 복음'(The Gospel in Life) 1주년 기념판에 실린 글이다. 2020년 3월 창간한 계간지 The Gospel in Life는 복음이 어떻게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과 공동체 전체를 변화시키는지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를 실어왔다.양극화 시대가 가져다주는 정치권력 다툼이나 문화 분쟁으로 인해 교회의 영향력이 점점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주님이 주신 대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마음과 헌신을 바쳐야 한다.갈라디아서 4장 4절은 여러 번역판에서 일관적으로 “적절할 때, 합당할 때, 구분되었을 때, 택함을 입었을 때, 찼을 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점령된 팔레스타인에 오신 건 우연이 아니다. 성육신한 하나님이자 사람인 그는 완전한 순간에 그의 피조물에 들어가 구원하기 위해 영원 전부터 가장 적절한 시간을 선택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당시는 그렇게 좋은 시기가 아닌 것 같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이 징수하는 세금 때문에 압제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던 식민지였다. 오늘날 역사는 당시 통치했던 로마 황제들과 그들이 꼭두각시로 삼았던 유대 지도자들을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선동가로 기억하고 있다. 칼리굴라, 네로, 헤롯.그런데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자세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제자들은 스승이 승천하기 직전까지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왕국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압박했다.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했다. 세상 국가의 회복을 신경쓰지 말고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개종시키며 세상에서 제자의 수를 늘리라는 것이다. 마태는 이런 대사명(마 28:18-20)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성경을 사랑하고 특히 붉은 글씨로 표시된 예수님의 말씀에 특히 주목하는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정치적 영향력을 추구하기보다 복음을 전하라는 우리 구세주의 이런 확고부동한 명령은 오늘날 고도로 격렬한 정치 문화 상황에서 더 “필요하고, 관련있고, 적절한” 문제라는 우선순위에 밀려서 무의미한 것으로 무시되고 있다.다양한 분야에서 신학적 입장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더 적대적인 오늘날 문화에서 더 중요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전략을 포기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단체가 적지 않다. 다양한 미디어(SNS, 인쇄, 방송)를 통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사역과 설교, 그리고 공동체 생활이라는 기존의 접근 방식으로는 더 이상 기독교가 오늘날 우리 문화가 직면한 현실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도자들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정치적 차이를 극복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파함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도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로지 인간의 영광과 권력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도 교회만은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인간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바로 제시할 것이라고 소망했다. 그 뿐 아니라 교회는 예술, 미디어, 정치, 그리고 비즈니스라는 대중의 삶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기독교인(제자가 된 신자)을 파송하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이처럼 교회가 문화를 변화시키는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는가에 따라서 교회의 성장(동시에 사회에서는 ‘소금과 빛’으로 봉사하는 신자의 수)과 대중의 수용 정도가 좌우되었고, 이 모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이뤄졌다. 오늘날 다른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는 기독교인이라도 시대가 바뀌었고 교회와 관련한 이런 의제가 더 이상 적절하지 않거나 효과적이지 않다는 데에는 한결같이 동의한다. 그런 기독교인은 세속적이고 진보적 좌파에 속한 기독교의 적이 신자를 사회적으로 소외시키고 ‘무시(cancel)’하며, 또한 대중적 영향력에서 배제되거나 완전히 사라지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오늘날 강력한 목소리는 표현과 실천(예를 들어,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한 현대적 관점의 영역에서)을 통해서 반대 의견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제거할 새로운 체제를 강제로라도 부과할 것을 원하고 있다. 이런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아카데미, 예술 및 정부 부처 등 많은 부분에서 문화에 영향력을 끼치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신자들은 곧 대기업, 대학, 그리고 공무원 취업에서 아예 제외될 수도 있다. 따라서 많은 기독교인에게 균형, 정중함, 정치적 중립 및 “기독교의 매력을 발산하는 문화 참여”를 기대하는 시대는 이제 끝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설교자는 더 이상 “정치 위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더 이상 전도를 하는 등의 신실한 신자의 모습을 보일 수 없게 되었다. 구형 모델은 이제 작동하지 않는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우익 우선순위(낙태 종식)” 또는 “좌익 우선순위(고통 중에 있는 산모 중심)” 중 하나를 지지하는 진정한 신자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해법(정치권력)이다. 이런 논쟁에 발을 담근 많은 개인과 교회도 다 좋은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결국은 현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런 교회의 설교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특집 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그 교회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와 관련해서 교인들이 좀 더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한 책망이 주된 내용이다. 남편(팀 켈러 목사)과 나는 교회에서 다뤄지는 주제가 사회 정의 밖에 없는 사실에 절망해서 교회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과 매주 고통스러운 대화를 나눠왔다. 이들은 하나같이 장벽을 허무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선한 의도를 갖고 일부러 다인종 교회에 합류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결과적으로 교제와 대화를 가로막는 온갖 장벽을 경험하고 있다.우리가 자주 대화를 나누는 또 다른 그룹은 목사들이다. 그들 중에 일부는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기독교인이 나서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고통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사회 정의에 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아 괴로워하는 목사들도 적지 않다. 우리 부부는 단지 집회에서 마스크를 쓰라고 한 것 때문에 교인을 잃고 교회 분열까지 겪어야 했던 목회자의 이야기도 들었다. 낙태라는 악을 인식하고 끝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은 분명히 교회의 우선순위 중 하나이다. 낙태를 살인이라고 부르고 끝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문제는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이다. 오로지 생명의 소중이라는 메시지만 전하겠다는 교회의 생각도 말씀을 바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그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배한 후에야 비로소 낙태 문제에 대해 확신하게 될 현재의 불신자에게 우리는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자궁을 통해 태어나지 않은 아기와 엄마를 이미 하나로 묶어 주신 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신경을 써야할까?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복된 소식이 전해지고, 그래서 복음으로 마음이 변하게 되면 과거에 낙태를 찬성하던 사람들조차 생각을 바꿀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기꺼이 산모와 가족, 청소년을 지원하는, 낙태를 줄이는 사역에 동참할 것이다. 그런 역사는 반드시 일어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이미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이어진다. 좌익과 우익의 여부와 관계없이 어느 한쪽의 신념에 깊이 빠진 열렬한 옹호자는 정치 및 사회 정책에 대해 말할 때에 한해서는 예의, 균형, 그리고 겸손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정치 이데올로기의 모든 범위에 상주하는 죄와 일반 은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대신, 그들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특정 지점과 교회를 동일시하면서 공공연하게 교회를 향해서도 정치적 집단이 되라고 요구한다. 극단주의자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일을 이제는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대담한 전술이 필요할 때라고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또 자기 백성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마 5장)와 같은 예수님의 명령은 무시당하거나 심지어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비난받기까지 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인간이 만들어 낸 의견을 성경적 권위의 수준으로 높이는,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도 그들은 무시한다. 오늘날 문화 현실은 놀라울 정도로 심각하게 부패했고, 더불어 세속적이고 편협한 좌파 진보주의가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위층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이런 현실 속에서조차 신실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건설적인 대화에 참여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종교적 신념을 민족주의 및 정치 권력과 결합하고 심지어 광신적인 음모론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우익 신념의 놀라운 증가세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기쁜 소식은 이들에게도 전해져야만 한다. 이것은 “양비론 또는 양시론(both-sides-ism)”이 아니다. 오히려 스펙트럼의 모든 지점에 대한 비판이다. 로마서 3장 10-17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시편과 이사야서를 차례로 인용하고 있다).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롬 3:10-17)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정치적, 사회적 가치의 어느 지점이든 가릴 것 없이)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잘못되고, 해롭고, 죄가 있고, 심지어 사악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아니한 사람이 없기에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 바깥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복음을 믿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새 생명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복음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술사이자 코미디언인 펜 질렛(Penn Jillette)은 이렇게 말했다.나는 전도하지 않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항상 말해왔다. 그렇다, 나는 그런 기독교인을 조금도 존경하지 않는다. 말로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지옥에 갈 수도 있고 영생을 얻지 못할 수도 있고 등등을 믿는다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전도하지 않는 건, 천국이니 지옥이니 그런 대화를 하는 게 사회적으로 어색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럴 가치가 없다고? …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전도하지 않는 대상을 도대체 얼마나 미워하는 걸까? 아니,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정도라니, 도대체 얼마나 미워하기에 그게 가능한 걸까?그러나 현재 미국 교회의 상황이 생각과 행동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제자를 양성하기에 부적절하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공동체와 예배, 그리고 교리 교육을 강화하여 기독교인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이 세상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조차, 지금 우리에게 닥친 새로운 사회와 세계를 향한 건전한 복음주의 전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문제는 교회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마음을 변화시키고 제자를 삼는데 효과적이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복음으로 인해 사회 정책으로까지 전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특정 방식에 대해서 서로 동의하는, 이미 개종한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만 만족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복음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초대 교회는 우리만큼이나 소외된 존재였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여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있어서 그들에게는 엄청나게 효과적인 전략이 있었다. 교회는 도시에서 성장했다. 또한 주변화(marginalization)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는 내내 초대 교회는 우리가 지금이나 앞으로 겪게 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박해를 받고 있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적대적이고 소외된 문화 속에서 살던 신자들이 받아들인 전도 전략은 무엇이었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되셔서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과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와 같은 학자는 초기 기독교인이 주로 그들의 관계 네트워크 내에서 비공식적인 대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전도를 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로마 이교도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득력 있게 구현하고 분명히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건 효과가 있었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부르셨다. 소금과 빛이라는 각각의 이미지는 차이와 참여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보여준다. 소금은 고기와 화학적으로 다르지만 고기 속으로 퍼졌을 때에만 도움이 된다. 빛은 어둠과 다르지만 바구니 아래에 숨겨지지 않고 밖에서 감지할 수 있을 때에만 어둠을 밀어낸다(마 5:15). 따라서 교회는 비신앙 문화에 동화되는 대신 고유성을 유지해야 하며, 그 문화에서 분리되지 않으면서 계속 참여하고 또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비기독교인, 세속화된 기관 및 현장과 지속적인 관계와 대화를 유지해야 한다. 그들을 단순히 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대가가 따르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런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예수님이 주신 대사명을 포기하고 대신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모든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돈을 투자하라는 허락을 당신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받았는가? 이미 보았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묻는 것은 언제 그가 왕국을 회복할 것인지, 즉 언제 로마를 쫓아내고 이스라엘이 이교도에게 압제당하는 나라가 아닌 경건한 나라로 재건될 것인지이다. 그러나 예수님 초림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죽기 위함이었지, 억압적인 정치 질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실상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그들이 사냥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또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교회가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오늘날에도 중국의 기독교인은 정부에 의해 압제, 투옥, 고문을 당하고 있고, 교회는 불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숫자는 아마도 올해 안에 1억 명을 돌파할 것이다. 2030년까지 그 수는 3억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며, 그들 모두는 가장 가혹한 고난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폭력으로 대응하거나 정치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개적으로(또한 조심스럽게) 예배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있으면,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을 때도 예배와 전도를 계속하고 있다. 서방 교회는 아시아에 있는 이런 형제자매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영적인 권세라고(엡 6:12)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적이 눈에 보이는 세상 권세라고 말하는 건, 시대를 초월해 거짓 선지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해 온 위대한(?)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쉬지 않고 전파되어야 하고 또한 가르치고 생활 속에서 증거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 말씀을 고작 죽 한 그릇(권력)과 바꿔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며, 권력이 아닌 말씀과 삶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서 우리가 같은 생각을 가진 신자들 사이에서 살면서 언제까지나 자신을 숨기고 보호할 수만은 없다. 우리는 죄인과 세리를 만찬에 참여시킨 예수님께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전도 전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1950년대 인도 성공회 선교사였다.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영국은 사라지고, 대신 나라 전체가 세속적인 이교 문화에 빠져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귀환한 선교사는 애초에 그를 파송한 문화의 선교사가 되어야 했다!뉴비긴은 이렇게 썼다. 좋은 소식이 있다. 그것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생각하기 전에 부정적인 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지금 당면한 가장 큰 질문이 교회의 생존에 관한 것인지는 잘 전달되지 않고 있다. … 우리 사회는 이교도 사회이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인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비전과 (이 시대가 간주하는) 가정(assumptions) 사이의 모순이 얼마나 급진적인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에 빠져 교회를 단지 우리의 지원이 필요한 많은 “선한 일(good causes)” 중의 하나로만 생각한다. … 만약에 우리가 하는 “전도”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교회의 구조를 떠받치는 노력에 그친다면(때로는 그렇게 보인다), 결코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다. 교회의 안위에 관해 우리에게는 걱정할 권리가 없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거시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온 세상에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단순하다. 우리가 지금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예수님의 명령에 맞는, 복음의 능력으로 탄생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로마서 12장 9-21절에 요약되어 있다. 이 공동체는 때때로 다양한 설득을 통해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때로는 화나게도 하는,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에는 일종의 현기증 나는 혼합체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9-21)이 말씀은 상충되는 명령이 합쳐진 것처럼 들린다. 악을 미워하라는 명령에 주목하라. 원수들과 화목하게 지내며 심지어 원수를 축복하기까지 하라고 한다. 이 부분도 주목하라. 열심을 내야 하지만 동시에 인내심을 가지라고 한다. 이 부분 역시 주목하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물질을 나누라고? 잠깐만, 바울이 마르크스주의자였던가? 당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라. 다른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연합하라. 서로 조화롭게 살고, 사람들이 당신을 화나게 하거나 다치게 했어도 복수하지 말라. 아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복음 전파는 오로지 마음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다른 어떤 메시지도 복음처럼 역동적인 기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완전한 삶을 사셨고 우리의 죄가 요구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하셨고, 지금도 만물을 새롭게 하고 계신다. 그리고 마침내 이 하늘과 땅을 재창조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바로 이런 복음의 메시지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삶과 공동체 등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이런 놀라운 복음을 이 세상에 전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원제: The Great Commission Must Be Our Guide in These Polarizing Times출처: https://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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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건 진짜 무슨 의미인가?
by Andrew Wilson
2021-08-2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피조물 중에 소금만큼 평범한 것도 별로 없다.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우리는 이미 지난 몇 시간 동안 소금과 상호 작용해왔다. 가죽, 도자기, 비누, 세제, 고무, 옷, 종이, 청소용품, 유리, 플라스틱, 의약품을 만드는 데 소금이 사용된다. 소금은 전 세계 수억 개의 카페와 레스토랑 테이블에 놓여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보통 옆에 나란히 있는 후추와 달리 소금은 건강에 필수적이며 사람이 정착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항상 필수품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언어에 단맛과 짠맛을 구분하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소금은 음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요소이다. 눈이 쏟아지는 날 도로 곳곳에 뿌리는 것도 소금이다. 우리가 만드는 화학 제품의 절반 이상이 특정 단계에서 소금을 포함한다. 소금과 관련해서, 지구 표면의 70퍼센트를 덮고 있는 바다의 수조 톤의 물질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렇게 소금은 어디에나 있다. 예수님의 비유모든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소금의 평범함은 예수님의 예화에 좋은 후보가 되게 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관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상용품 사용을 즐겼으며,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마 5:13)으로 묘사하신 것이 가장 잘 알려진 예이다. 오늘날까지도 선하고 정직하며 겸손한 사람을 묘사할 때 이 표현을 쓴다. 의외이겠지만, 롤링 스톤즈의 노래, D. H. 로렌스의 시, 그리고 탈취제, 연수기, (당황스럽게도) 와인을 비롯한 흥미로운 다양한 제품의 이름에도 소금이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 정말 이상한 점이 있다. 예수님이 정작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른 사람들, 엄청나게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소금이 의미하는 바를 배웠다. 그러니까 우리의 임무는 세상을 더 맛있게 만들고, 또 썩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설명은 종종 서로 충돌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 예수님은 음식이 아니라 세상(땅)과 관련해서 소금을 언급했다. 땅에 소금을 뿌리는 건 원수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시킨 후에 하는 일이다.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소금을 불과 연결할 뿐 아니라 또한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과도 연관시킨다(막 9:49-50). 둘 다 맛이나 보존이라는 개념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기술적으로 볼 때, 염화나트륨은 어떤 경우에도 맛을 잃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고대 세계에서 소금이 갖고 있던 다양한 목적 때문이다. 그 중 적어도 다섯 가지는 제자들을 향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소금은 맛을 내고, 보존하고, 희생하고, 파괴하고, 또한 비옥하게 하는데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혼란스럽다는 가정 하에 예수님이 특히 염두에 두었던 소금의 특정 용도가 뭔지 토론하기보다는, 소금에 대한 모든 지식을 다 갖고 있었던 예수님이었기에 그의 은유가 여러 방식으로 다양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예수님의 제자는 소금과 같다. 우리 또한 소금처럼 평범하고 어디에나 있고 또 우리가 눈치채건 아니건 이 세상 거의 모든 일에 관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에 따라 우리가 해야 할 역할도 다양해지기 마련이다. 소금의 다섯 가지 목적을 살펴보자.1. 맛내기소금은 밋밋한 음식(칩이나 감자튀김)에 풍미를 더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풍미(야채)를 강화하거나, 또는 전혀 다른 반대되는 맛을 제공함으로써(절인 카라멜), 음식의 맛을 더 좋게 만든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소금의 용도일 것이다. 맛내기가 다섯 가지 소금의 용도 중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원래 청중들도 이런 사실을 먼저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맛내기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섬기는 방식에 대한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사례이다. 우리는 전세계에 퍼져서 이 세계를 향상시키고, 밋밋한 것에 풍미를 더하고, 좋은 것으로부터는 축복을 이끌어 내고, 또한 구분되고 구별됨으로 대조를 제공한다. 바울이 우리를 향해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골 4:6)라고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게 바로 맛내기이다.2. 보존하기소금은 고대 시대 냉장고에 해당했다. 고기나 생선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소금을 문질렀고, 그럼으로 더 오래 보존할 수 있었다. 소금이 그토록 귀한 주된 이유였다. 로마 군인들은 때때로 소금으로 급여를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월급(salary)’ 이라는 단어의 기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이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 즉 세상의 선함을 보존하고, 부패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는데, 이는 우리가 매일 아침 출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다.소금은 단지 맛만 내는 게 아니다. 소금은 보존한다. 3. 희생하기희생이라는 측면은 덜 친숙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소금의 두 가지 기능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모세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호와께 희생 번제를 바쳐야 하는지 설명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아마도 음식의 맛을 내고 고기가 상하지 않게 했기 때문에 소금은 모든 이스라엘의 희생 번제에 필요한 부분이었으며 심지어 그들과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기도 했다.따라서 피터 레이하르트(Peter Leithart)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들도 이런 의미에서 소금이다. 이 세상은 제단이다. 인류와 세상은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의 큰 제물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순종하고 고통받는 자기 희생으로 스스로를 바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주 희생(cosmic sacrifice)의 조미료가 된다.”4. 파괴하기파괴는 훨씬 덜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다른 어떤 목적보다도 심판이나 멸망에 소금이 사용된다는 성경 구절이 더 많다.“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 19:26). 또한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오실 날을 묘사할 때 언급하신 이야기이다 (눅 17:3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면 그들의 땅이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할 것”(신 29:23)이라고 경고한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했을 때, 세겜 사람들이 그에게 반역했고, 그는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응수했다(삿 9:45).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시 107:34)라고 묘사한다. 복음서에서 가장 맹렬한 심판의 구절 중 하나가 예수님의 바로 이 말씀이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9). 고대 근동에서 소금은 악에 대한 심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제자들의 목적이 다 같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고 악을 멸하며 정욕이나 탐욕이나 살인이나 불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소금맛 나는 그리스도인을 세상 속으로 흩어지게 하신다.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교회의 존재 자체가 원수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이고, 또한 바울이 말한 “멸망의 증거”(빌 1:28)의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를 때 우리가 만날 박해를 묘사한 바로 직후에 우리가 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종종 교회는 이런 식으로 살지 못한다. 악의 브레이크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악을 조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될 것까지도 다 알고 계셨다. 그렇기에 심판에 관한 그분의 말씀은 거의가 다 믿지 않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다. 우리도 소금에 절여져야 한다. 5. 비옥하게 하기몇몇 고대 문명에서는 토양을 위한 비료로 소금을 사용했다. 또한 조건에 따라 토양이 수분을 유지하고 밭을 갈기 쉽게 만들고 또한 식물을 위한 미네랄을 방출하고 잡초를 죽이고 질병으로부터 작물을 보호하고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 소금이 필요했다. 이런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살았던 환경이 시골이었기에 농경 문화가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비료이다. 우리는 조건이 어렵고 삶이 힘든 곳에 있어야 한다. 제자된 우리가 흩어질 때,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잡초를 죽이고,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성장을 촉진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명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 생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탄생한다. 척박한 땅이 열매를 맺는다. 선지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구속될 때,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한다”(사 35:1).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미료, 보존제, 희생 제물, 파괴자 또는 비료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의미일까? 한마디로 그렇다. 소금의 역할이 그중에서 오로지 한 가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의 말도 꼭 끝까지 들으라. 그러나 오늘 읽은 이 글을 기억하고 감안하면서 듣기를 바란다.원제: What Does It Really Mean to Be the Salt of the Ear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소금
소금과빛
마태복음5:13
예수님의비유
피터레이하르트
심판
제자
조미료
마음과 펜으로 드리는 기도
by 최창국
2021-08-22
쓰기기도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를 소리를 내어 하거나 묵상적인 형태로만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기도는 다양한 형태로 실행될 수 있다. 특히 쓰기기도와 같은 기도는 매우 중요한 기도의 방편이 될 수 있다. 쓰기기도는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 앞에 깊이 성찰하는 기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큰 소리로 정신없이 하는 기도보다 더 깊고 풍성한 기도가 될 수 있다. 쓰기기도는 하나님과 관계를 성찰하는 기도로 작용할 수 있다. 쓰기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에 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의 파노라마를 마음과 펜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쓰기기도는 소리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일명 ‘마음과 펜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우리의 지식과 세계가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영혼으로 화할 수 있다. 영혼을 만들 수 있는 그릇은 성찰과 경이로 빚어진 내면의 컨테이너이다. 만일 날마다 몇 분 동안의 시간을 내어 쓰기기도를 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심리치료의 경비와 수고를 덜 수 있다. 쓰기기도의 이런 소박한 실천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삶의 성찰을,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과 보다 더 깊은 관계를,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의 변형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영성지도로써의 쓰기기도 쓰기기도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깊이 성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영성 지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쓰기기도는 일상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들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서술하는 기도 형태이기 때문에 자기 인식과 동시에 영적 성찰과 감수성을 수련하는데 효과적인 기도 방식이 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삶의 의미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쓰기기도를 통해 우리 삶의 모양과 관련된 부정적이고 긍정적 암시를 주는 고정된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할 수 있다. 때문에 쓰기기도는 단지 하나님과의 대화에만 목적인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지도의 형태로 작용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를 분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쓰기기도는 감정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우리의 내적 삶을 반영하는 하나의 분별 훈련이 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쓰기기도는 일상의 구체적 상황을 넘어 뜬구름 잡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쓰기기도는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deepest self)을 감추고 사회적 공동체적 역할만을 강조하는 표면적 자아(surface ego)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쓰기기도가 영성 형성의 효과적인 방식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이어야 한다. 쓰기기도가 영성 형성을 위한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어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쓰기기도는 좋은 날이나 슬픈 날 모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가지고 마음과 펜으로 하나님과 대화함으로서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을 치료할 수 있다. 또한 쓰기기도는 ‘나에게는 좋은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비관적인 평가를 하는 것도 치료할 수 있다. 쓰기기도는 하나님과 더불어 자기 통찰력(self insight)을 기르는 좋은 방식이 될 수 있다. 쓰기기도는 고통스럽고 힘들 때 자신을 마주함으로써 내면의 긴장과 갈등을 성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나아가 쓰기기도는 자신의 기도 역사로 남을 수 있다. 쓰기기도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통하여 감사의 삶과 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 쓰기기도는 다양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성경의 구절이나 사건에 대한 통찰이나 묵상과 함께 드릴 수 있다. 특히 성경 묵상을 통해 성찰기도, 회개기도, 탄식기도, 기쁨기도, 감사기도의 형태로 쓰기기도를 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영성 일기 형태로 실행될 수도 있다.쓰기기도를 오랫동안 하면 기록된 기도를 통해 성찰하면서 읽을 때 삶의 일반적 방향에 대해 성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삶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실제적으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는가를 결정할 때 유용할 수 있다. 특히 고통스런 시기에 드려진 쓰기기도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삶의 질문이나 투신들에 대해 실제적으로 다시 회상하게 해주기도 한다. 쓰기기도는 전에 쓰인 기도를 통해서 다시 기도함으로 자신의 영적 여정의 패턴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는 우리가 기도했던 상황이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려움을 이겨낸 것들을 후에 읽게 되면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더욱 하나님께 둘 수 있게 된다. 쓰기기도 모델로써의 시편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는 젊은 시절에 기도 생활의 깊이를 더하려고 애쓰던 가운데 펜으로 기도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속에서 약동하는 감성을 파악해서 토로하고 분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정직한 자세를 취했던 시편 기자들의 기도의 길을 따라갔다. 오코너는 이렇게 기록했다.당신에 대해 생각하거나 늘 갈구하는 당신의 사랑으로 가슴 벅차기보다 예술적인 기교를 닦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은 가느다란 초승달입니다. 내 자아는 옹근 달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지구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내 자아의 그림자가 점점 더 커져서 달의 전모를 보지 못하게 될까, 그리하여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그림자를 근거로 나 자신을 판단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스스로 길을 막고 선 탓에 난 하나님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Flannery O’Connor, A Prayer Journal, 3).오코너는 삶의 승패는 사랑의 우선순위를 다시 설정하는데 달렸다는 것을 의식한다. 이는 어거스틴이 깨닫고 그의 기도 일지 고백록에 기록했던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하나님과 이웃보다 성공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은 심령에 공허를 증가시킨다. 오코너는 자신의 비범한 재주로 인해 오만하고 이기적인 작자가 될 뻔 했지만 기도로 끊임없이 마음의 지향점을 조절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오 하나님, 제발 내 생각을 투명하게 해 주세요. 정결하게 씻어 주세요. … 만물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주님이 머무시는 곳을 깨닫게 도와주세요”(O’Connor, A Prayer Journal, 4). 오코너는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 되풀이하는 기도 행위를 답습하는 것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여태 되뇌던 기도문의 내용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입으로 읊조릴 수 있을지언정 마음으로는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의식은 도망자처럼 사방팔방 떠돌았습니다. 매번 이런 식으로 기도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심정을 적을 때는 사랑의 온기가 온몸을 감싸는 걸 감지했습니다”(O’Connor, A Prayer Journal, 4). 어느 날 그는 그의 쓰기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적었다. “아무라도 좋으니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없나요?”(O’Connor, A Prayer Journal, 23).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지금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도는 단지 소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는 입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쓰기로도 할 수 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이 기도이지만, 시편에 나타난 기도 실천방법은 입술의 기도보다는 쓰기기도였다고 할 수 있다. 시편은 쓰기기도의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옳고 그른 특정한 방식이 있지 않다. 쓰기기도라고 해서 논리적인 형태의 글쓰기와 같이 할 필요가 없다. 쓰기기도의 형태는 문장으로 써도 되고, 구절이나 단어만 써도 된다. 쓰기기도는 내면의 성찰과 깊이 관련된 기도이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소리 내어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천천히 마음과 펜으로 드려야 한다. 쓰기기도에는 적어도 참된 마음, 회개, 감사, 희망, 성찰, 두려움이 하나님 앞에 토로되어야 한다.
영성
묵상과기도
쓰기기도
반추기도
시편
표면적자아
통찰력
영성지도
어거스틴
자비와 정의 사역을 위한 교회의 역할
by 고상섭
2021-08-21
교회의 존재 이유 중의 하나는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이 교회가 당면한 어려움이다. 대부분 개교회를 중심으로 가난한 이웃을 섬기고, 독거노인들의 반찬을 배달하는 등의 일들을 실천하는 경우가 많다. 한 교회의 힘으로 한 나라나 지역의 가난 자체가 변화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은 좋은 태도이지만 우리는 개인의 가난과 함께 가난을 일으키는 구조적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노력도 아울러 필요하다. 1. 왜 정의인가?팀 켈러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우리가 어떻게 정의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왜 가난한 사람들 돕는 사역을 ‘구제사역’ 이라고 말하지 않고 ‘정의 사역’ 이라고 말하는가? 구제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 행위같은 느낌을 주고, 또 구제하는 사람이 선한 일을 한다는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팀 켈러가 ‘정의’ 라고 말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라는 단어로 구약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단어인데 레위기 24장 22절에 그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4:22)여기서 ‘미쉬파트’는 ‘그 법을 동일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징벌이든, 보호든, 보살핌이든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주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실 때 사용되었다. 즉 교회 안이나 그 지역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돌아가야 할 몫을 돌아가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일이 되는 것이다. 약자를 돌보는 것은 이스라엘의 의무였고,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할 때도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이나 성경을 열심히 읽지 않은 것으로 책망하지 않으신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은 것으로 책망하신다. 즉 약자를 돌보는 삶은 이스라엘의 신앙 전체를 판가름하는 열매라고 할 수 있다. 2. 어떻게 정의 사역을 해야 하는가? 팀 켈러는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돕는 것이나, 한 교회가 한 사람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조적인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좀 더 높은 단계의 전략이 필요함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약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단계를 통해 교회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로드맵을 세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 : 구제(Relief) 가장 쉽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제’이다. 구제란 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해서 사람들의 신체적, 물리적, 사회적 필요를 채우는 일이다. 노숙자들에게 일시적인 거처를 제공하거나, 궁핍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의료 봉사 및 위기 상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응급처리를 해주고 회복 기간에 소요되는 경비를 지급한 것이 구제활동이다. 두 번째 단계 : 개발(Development) ‘개발’은 ‘구제’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개념으로 사람이나 공동체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해서 구제에 의존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 15:13-14)신명기 15장 13-14절을 보면 구약 성경에서 노예의 채무가 면제되고 그가 풀려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전 주인이 곡식, 도구, 그리고 재물을 그에게 주어서 내보내어 자급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하셨다. 성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법은 … 공동체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립할 기회를 보장해준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길 요구하고 있다. ‘기회’라면 재정적인 자원이 먼저 떠오를지 모르지만, 교육이나 법률 지원, 일자리 창출 등도 여기에 속한다. 이런 요소들은 쓰고 남은 걸 넘겨주거나 선심 쓰듯 베푸는 차원을 넘어서는 권리의 문제이다.”오늘날로 적용해보자면 개인을 위한 교육, 직장 창출, 훈련 등이 포함된다. 또 이웃이나 지역에 대한 개발은 사회 재정적 자본을 사회 시스템에 투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택 개발 또는 주택 소유 그리고 여러 자본 투자를 말한다. 물론 ‘개발’은 ‘구제’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서 한 교회의 구제사역이 아닌 지역 교회의 연합을 통한 개발사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개교회의 구제 사역만으로는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을 때가 있다. 은혜로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결단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좀 더 체계적인 전략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지역 교회의 연합을 통해 구제와 함께 개발사역이 전개 되어야 한다. 세 번째 단계 : 개혁(Reform)개혁은 즉각적인 필요를 채우는 구제와 의존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의 차원을 넘어 의존성 문제를 만들거나 약화시키는 사회적 조건과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다. 욥은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욥 29:17) 고 말했다. 또 레위기 19장 15절에서 모세는 부자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는 법률 체계에 대한 하나님의 반대 입장을 말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 19:15) 또 사람들의 수입을 쥐어짜는 대금업 시스템에 대한 반대를 표하기도 했다(출 22:25-27). 선지자들은 불공정한 임금에 대해 책망하기도 했고 타락한 사업 관행을 심판하기도 했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단 4:27) 또 다니엘은 비기독교 국가에서 공무원으로 빈곤층에 대한 자비가 결여되지 않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이것은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정의 사역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여러 가지 존재 이유 중에 정의 사역에만 온 교회가 많은 에너지를 투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제와 개발 그리고 개혁까지 이루는 이상적인 전략은 좋지만, 그것을 이루기에는 개교회가 너무 큰 짐을 지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정의 사역의 단계를 이룰 것인가? 3. 어디까지가 교회의 역할인가? 팀 켈러는 첫 번째 구제의 일에 지역교회가 집중해야 하고, 두 번째 개발의 사역도 어느 정도 헌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교회가 개발을 모두 하기는 힘든 일이므로 지역 교회 연합을 통해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 교회가 세 가지 단계를 모두 하려면 가장 중요한 복음과 말씀 사역이 흔들릴 수도 있다. 개발과 개혁의 사역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드는 일이다. 교회의 재정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개교회가 이 일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또 교회 리더십의 자원도 한정적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지역개발과 관련된 행정 일에 전문성을 갖지 못할 때도 많다. 결국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교회 외 사역단체들과 연관해서 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또는 비영리 조직을 분리하여 지역 개발과 사회 구조 개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구제와 개발을 힘쓰고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 중에 헌신된 사람들이 지역단체들과 연합하여 개발과 개혁에 동참해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팀 켈러는 제도적 교회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과 유기적 교회가 해야 하는 일들을 구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제도적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원리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유기적 교회에서는 흩어진 평신도들이 각 영역에서 다양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제도적 교회가 전부를 맡아서 진행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 일을 전담으로 하는 단체와 유기적 교회의 신자들이 함께 동참해서 일을 하는 것은 훨씬 수월하게 일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교회의 말씀 사역과 정의 사역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구제와 개발과 개혁을 이루어가야 한다. 개교회가 너무 무리해서 모든 것을 맡게 되면 교회 자체가 가지는 중요한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제에만 집중한다면 의존성과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전체적인 전략을 가지고 구제와 개발과 개혁을 이루어야 하지만, 그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하고 개교회가 집중해서 해야 할 일과 지역교회가 연합해서 해야 할 일, 그리고 사역단체와 연결해서 해야 할 일들을 분별해야 한다. 세상의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일이지만 또한 좀 더 지혜롭고 좀 더 명확한 전략과 단계도 필요하다. 개인의 윤리에만 집중하는 교회가 있고, 개인의 윤리를 배제한 사회 윤리에만 집중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언제나 이 둘은 따로 떼어질 수 없는 하나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개인의 윤리와 사회의 구조 모두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은혜도 필요하고 더 큰 지혜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세상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흐르기를 원하신다. 그 중요한 역할이 은혜를 받은 교회에게 있다. 좀 더 전략적으로 우리는 세상을 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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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카니스탄 목사들이 믿는 하나님의 주권
by Mark Morris
2021-08-20
7월 초, 아프간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아프간 정부에 공식적으로 신앙을 등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기독교로의 개종 자체를 금지하는 이슬람 공화국에서 기독교인으로 등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교회 지도자들은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참된 믿음을 법적으로 선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는 이런 희생을 치러야 다음 세대가 공개적으로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그렇게 정부에 신앙을 등록했고 외부에서 바라보는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주셔서 제발 다음날 아침에 바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들은 인터뷰를 마쳤고, 체포되지 않았다.놀라운 교회 후퇴지난 주말에 아프가니스탄/영국 교회 수련회가 열렸다. 수련회 첫날 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의 한 목사가 탈레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너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토요일까지만 해도 그 탈레반은 편지를 받은 목사의 집 앞에 있었지만, 그는 곧 사라졌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나는 또한 삼 일 전 탈레반에게 마을을 빼앗긴 신실한 신자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는 한 아프카니스탄 목사의 말을 들었다. 이 신실한 형제의 열네 살 딸은 아버지로부터 강제로 떨어져 나와 탈레반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그리고 여자라면 수행해야 하는 “의무적인 이슬람 특권과 책임”이라고 부르는, 사실상 성노예가 되어 끌려갔다고 했다. 토요일 들어서 탈레반이 이미 카불 거리를 걷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는 아프간 친구들과 함께 울고 기도하며 또한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나기를 바라는 현지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가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떠날 수 없었다. 도로와 비행기는 이미 폐쇄된 상태였다. 많은 주제들 중에서도 주일 아침에 우리가 다룬 것은 출애굽기 7장에서 11장에 나오는 재앙이었다. 때때로 바로왕은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었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 방에 있던 한 아프가니스탄 복음 전도자가 이렇게 덧붙였다. “하나님이 예레미야 27장 6절과 예레미야 43장 10절에서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왕 느부갓네살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가장 확실하게 탈레반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출애굽기 33장 19절을 펼쳤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나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알고 믿습니다. 그렇죠?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악이 아프가니스탄의 형제자매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악이 그 도시와 국가를 정복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로마서 9장을 펴고 선하고 자비로신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하는 우리 자신의 오만과 마주했다. 그는 토기장이이고 우리는 단지 그의 진흙일 뿐이다. 우리는 또 이사야서 8장과 이사야서 28장을 통해 기초석과 거칠게 하는 돌의 이미지를 묵상했다. 로마서 10장에서 우리 모두는 탈레반이라는 폭풍우를 뚫어낼 수 있는 유일한 초석인 예수님이라는 믿음 위에서 굳건하게 서야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고난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우리는 언젠가 십자가와 고난에 관한 비밀 교회 모임에서 데이비드 플랫(David Platt)이 주었던 훈계를 요약하는 것으로 모임을 마무리했다. 1.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더 높은 기대를 가지고 고난을 맞아야 한다. 2.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겸손한 시각을 가지고 고난을 맞아야 한다. 3. 예수님의 고난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과정이었던 것처럼, 고난과 악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4. 하나님은 다양한 목적과 방법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을 주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으로 이끄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그분을 의지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해서이다. 5. 마지막으로,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대사명을 완수하려는 그분의 계획의 일부로 당신의 백성을 고통과 격동의 바다로 인도하신다. 찬양 리더가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골랐다. 마지막 구절을 부를 때 아프가니스탄 형제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방금 사임했습니다. 이제는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찬양했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다 빼앗긴대도진리는 살아서그 나라 영원하리라아멘더 힘들게 하는 뉴스월요일 아침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말에 예비하신 역사하심에 감사하면서 눈물의 기도를 올린다. 이 어려운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모두가 다 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위로하고 기도하고 또 탄식하며 울었다. 주말을 기점으로 더 충격적인 보도가 나오고 있고, 아프간 교회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탈레반은 어린 기독교 소녀들을 뒤쫓고 있다. 탈레반이 조금 전 한 교회 지도자의 집을 습격해서 성경과 서적을 압수했다고 한다. 여기 멤피스에서 사역하는 한 아프간 목사는 이렇게 썼다. “나는 지금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단어조차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일이 되면 그는 어떻게든 Mohabat.tv와 facebook.com/afghantv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은 소망의 메시지를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라이브로 방송할 것이다. 토기장이는 오늘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토기를 만들고 있다. 원제: How Afghan Pastors Reflect on God’s Sovereign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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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이 복음을 구했다
by R. C. Sproul
2021-08-19
스위스, 제네바의 구시가지에는 제네바 대학에 인접해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 그 공원 가까이에는 존 칼빈이 매일 설교하고 가르친 교회도 있다. 그 공원에는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과 관련한 영구적 기념비가 있다. 주요 볼거리는 칼빈, 존 낙스, 울리히 쯔빙글리, 테오도르 베자 등의 조각상으로 꾸며진 장엄한 벽이다. 그 돌벽에는 라틴어로 ‘Post Tenebras lux’(“어두움 뒤에 빛이 있으라”)라고 새겨져 있다. 이 단어들은 종교개혁의 원동력을 잘 포착하고 있다. ‘어두움’이라는 표현은 복음의 암흑기였던 후기 중세시대를 의미한다. 그 당시 어둠은 점진적으로 최악에 이르렀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 교리의 빛은 거의 꺼져 있었다. 논쟁의 쟁점종교개혁은 교회 역사에서 가장 예민한 사안으로 논쟁의 불길을 불러일으켰다. 교회는 그 이전에, 특히 그리스도의 본성이 쟁점이 되었던 4-5세기에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었다. 4세기에 일어났던 아리우스파 이단은 니케아 회의와 신조로 결국 종결되었다. 5세기에는 단성론자와 네스토리우스파 이단과 이에 대항하는 교회의 투쟁이 칼케톤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히 선언함으로 귀결되었다. 니케아와 칼케돈 이후, 이들 공의회의 결정은 역사적 기독교 정통성에 대한 기준으로서 그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리하여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 교리는 거의 보편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여겨지고 있다.모든 세대는 교회 역사를 통해 교리적 투쟁과 논쟁을 보아왔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은 교회를 괴롭혔고 격렬한 논쟁과 심지어 분열도 불러일으켰다.그러나 지금까지 어떤 교리적 논쟁도 칭의에 관한 논쟁만큼 더 맹렬하게 진행되거나 오랜 기간 영향을 끼친 적은 없다. 16세기에 논의된 다른 부수적인 쟁점들이 있었지만, 이것만큼 중심적이고 이것만큼 뜨거운 것은 없었다. 역사가들은 종종 칭의를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인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논쟁의 중요한 핵심 문제였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 간에 가장 깊은 불화를 만들고 수많은 종파로 나뉘게 하여 교회를 분열로 이끈 중심에는 바로 이 교리 문제가 있었다.오직 믿음 아니면 실패어떻게 하나의 교리에 대한 논란이 그렇게 많은 분파를 만들고 적대감을 초래할 수 있었는가? 사소한 일로 전쟁을 벌이는 경향이 있는, 논쟁하기 좋아하고, 시끄럽고, 호전적인 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단순한 갈등의 한 사례였는가? 별것 아닌 일에 소란을 일으키는 늘 있었던 오해의 한 사례였는가?우리는 마틴 루터가 그 논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교회가 서거나 쓰러지는 신념”이라고 불렀다(교회를 세우거나 무너뜨리는 명제). 가장 핵심이 되는 이 주장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오직 믿음)라는 루터의 대표 명제와 연결되었다. 신약 성경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우리를 위한 그의 사역을 공표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사역의 유익들이 어떻게 신자를 위해, 신자에 의해, 신자 안에서 적용되는지에 대한 선언을 담고 있다.칭의와 구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오직 믿음에 대한 루터의 주장은 칭의의 “방법”은 복음 자체에 필수적이고 본질적이라는 신념에 근거하였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복음과 구원에 필요한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복음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선 이후로,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은 칭의에 대한 논쟁을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두 본성과 같은 기독교의 본질적 진리를 논하는 것처럼 중요하게 여겼다. 복음이 없으면 교회는 무너진다. 복음이 없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개혁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따랐다:1.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복음에 필수적이다.2. 복음은 기독교 신앙과 구원에 필수적이다.3. 복음은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 필수적이다.4.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거부하는 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고 교회 건물로 전락하는 것이다.어둠을 밀어내기개혁자들은 로마가 오직 믿음을 비난하고 거절하였을 때, 로마는 스스로를 정죄하고 참된 교회가 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성경적 기독교를 계속 이어가고 참된 복음을 가진 진실한 교회가 되기를 추구하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들이나 교파들의 창설을 촉진하였다. 그들은 개기일식의 임박한 위험으로부터 복음을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일식 비유는 도움이 된다. 일식은 태양을 파괴하지 않는다. 일식은 태양을 모호하게 가린다. 그것은 빛이 있었던 곳에 어둠을 가져온다. 개혁자들은 복음의 빛이 다시 찬란하게 빛나고 선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 일식을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16세기 개신교 교회의 삶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온전히 환한 빛에서 보면, 그 시대에 다시 일어난 경건의 움직임은 복음의 힘을 입증한다. 원제 : The Reformation Rescued the Gospel출처 :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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