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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을 설교하라(2)
by 고상섭
2021-09-17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을 설교하라의 첫 번째 아티클은 2020년 6월 16일자에 올라와 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설교의 적용이다. 또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적용이 없는 설교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P. Clowney) 교수로부터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배운 팀 켈러도 목회를 하면서 다양한 적용의 필요성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 교수를 추모하면서 그 제자들이 만든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책에서 팀 켈러는 적용에 대한 고민을 언급했다. “클라우니 박사님이 가르치신 대부분의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 9년 동안 구약 성경을 설교하면서 저는 본문에 충실한 동시에 현실과 관련된 방식으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라는 어려운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특정 본문의 주제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또다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해석학적 측면에서는 건전하고 고무적으로 하지만 그 본문이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도록 구상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팀 켈러도 본문에서 예수님을 선명하게 드러내었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자신만의 방법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팀 켈러가 찾은 자신만의 방법은 무엇일까? 자세히 살펴보면 에드먼드 클라우니와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이 말하는 구속사적 설교에서 적용부분이 강화된 것을 알 수 있다.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적용의 원리는 “The Gospel changes everything!”(복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이라는 구호로 요약될 수 있다. 1. The Gospel : 은혜와 순종의 순서를 기억하라팀 켈러가 말하는 복음신학에서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혜택을 분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이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 당시에 율법주의와 복음을 구분한 표현으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 원리를 설교에 적용해보면, 구체적인 행위의 변화를 적용하기 전에 반드시 칭의 즉 구원의 은혜를 먼저 언급하라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법을 살펴보면 인간이 명령에 순종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먼저 행하신 구원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실 때는 단순히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근거해서 그 은혜가 자발적인 순종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다.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의무적인 율법이 아니다. 만약 지키지 않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순종한다면 자발적인 순종이라할 수 없다.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러한 명령을 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1-2) 하나님은 자신을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한 여호와라고 소개한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에 앞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신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구원받았다. 바로 유월절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구원얻은 것이다. 그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구체적인 명령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을 선포한다. 이것은 설교의 구체적인 적용을 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 적용은 단순한 인간의 의지를 자극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은혜의 반응으로서의 순종인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적용을 하기 전에 먼저 The Gospel 즉 복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설교할 필요가 있다. 2. Changes everything : 은혜의 동기로 순종을 강조하라그러나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적용이 끝난 것이 아니다. 단지 복음의 은혜를 드러냈을 뿐이다. 이제 그 은혜를 삶으로 적용하여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 적용이란 다른 일반 설교의 적용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은혜와 순종의 순서를 지키는 것이다. 은혜가 동기가 되어 삶의 모든 영역(everything)에 적용될 수 있도록 복음이 어떻게 삶에서 역사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팀 켈러는 다양한 삶의 주제들을 복음과 연결해서 설교한다. 마가복음 14장 46-49절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 중에서 제사장의 귀를 칼로 자르는 장면이 나온다. 팀 켈러는 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를 따르겠다고 큰 소리 치는 사람이지만 정작 위기가 오면 세상의 방식 즉 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지 않은가? 말로는 정의와 평화와 공평의 편이라고 외치면서 막상 시험이 닥치면 검 자루에 손이 간다. 우리를 검을 위시해서, 돈, 권력, 성공, 명예로 이어지는 이 세상 나라를 추구하고 있다.”(왕의 십자가, 279쪽)그리고 그리스도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 즉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분이라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면 우리도 늘 세상의 방식으로 칼을 잡는 삶에서 변화될 수 있다고 적용한다. “스스로 구원하려는 사람들, 자손심을 세우려는 사람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 돈과 권력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두 가지 극단 중의 하나다. 너무 사랑하던가 너무 미워하던가, 첫째 돈을 미워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돈과 권력을 멀리하면 스스로 고결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행위이다. 그런가 하면 돈과 지위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도 역시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태도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돈과 권력이 있든 없든 연연하지 않는다. 돈과 권력이 생기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좋다. 돈이나 권력이 사라져도 하나님이 또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실 테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런 사람은 일을 하지만 일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왕의 십자가, 284쪽)팀 켈러 설교에서의 적용은 구체적인 행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그 행위의 동기가 되는 마음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변화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의 결과가 나오는지를 설명한다. 일에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일에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먼저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일과 영성>이란 책에서도 타락한 세상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이 땅에서의 일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동참하는 과정임을 이야기 하면서 구원을 통해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이 된다고 일의 동기를 복음으로 바꾸어준다며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 주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능숙한 사역이다. 하나님이 일을 주신 목적이 인간 공동체를 섬기게 하는 데 있다면, 그 뜻을 받드는 으뜸가는 길은 주어진 과업을 끝낼 뿐만 아니라 제대로 해내는 것이다.”(일과 영성, 94쪽)그리고 도리시 세어어즈(Dorothy Leigh Sayers)의 문장을 인용한다. “교회가 목수에게 신앙을 좇아 살려면 무엇보다 훌륭한 테이블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가르쳐야 한다.”구원의 은혜가 일상의 직장 생활에서 탁월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웃 사랑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구원의 은혜에 있다는 것이다. 은혜가 순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애국심을 심어주지 않고서 전쟁에 군대를 내보내는 것과 비슷해진다. 단순한 순종과 구체적인 적용을 강조하면 율법주의로 치우칠 위험성이 있다. 복음은 은혜의 반응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팀 켈러의 <센터처치>에서 복음 신학을 보면 ‘The gospel changes everything’(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소제목이 나온다. 여기서 팀 켈러는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급과정이 아니라 시작부터 완성까지 관통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복음을 통해 다양한 주제들을 연결해서 설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낙망과 우울, 사랑과 인간관계, 성(性), 가정, 자기 관리, 인종과 문화, 전도, 인간의 권위, 죄책감과 자아상, 기쁨과 유머, 다른 계층에 대한 태도 등을 소개하고 있다.팀 켈러의 설교에서 적용은 칭의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구체적인 삶의 순종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팀 켈러 설교에서 적용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말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이해부족이라 할 수 있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드러냄으로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 은혜의 동기가 순종으로 이어지는 인격적 순종의 과정을 추구한다. 이런 복음 중심적 적용만이 은혜를 강조하지 않는 순종이라는 율법주의와 은혜만을 강조하는 반율법주의의 오류에서부터 벗어나 제 3의 길을 제시할 수 있다. “The Gospel changes everything!”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구호 그대로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으로 인해 모든 영역이 변화되는 것이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의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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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사역자를 구하기 어려운 일곱 가지 이유
by Griffin Gulledge
2021-09-16
6개월 전, 아내와 나는 새로운 목회를 시작하면서 삶을 정리하고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 집을 찾아보면서 우리는 주택 시장에 집이 거의 나와 있지 않으며 거의 모든 집이 요구하는 가격보다 훨씬 높게 팔리며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아주 어려운 주택 시장 상황에서 집을 구하고 있었다.빡빡한 주택 시장은 청소년 사역자가 없는 오늘의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과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듣는 고민거리는 “청소년 사역자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청소년 사역자가 부족한 이유 일곱 가지를 살펴보자.1. 청소년 사역자 공포 이야기목회자들은 자기들의 사역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는 새어 나오게 되어 있다. 청소년 사역을 시작하고나서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임을 발견한 사람들의 악몽 같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진짜' 목회자가 아니라 성스러운 베이비시터 취급을 받고, 부당한 대우와 저임금을 받으며, 존중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부모는 자기 자녀를 신앙으로 교육시키는 일을 청소년 사역자에게 떠넘긴 다음에 자기 자녀가 어려움에 처하면 그에게 책임을 돌린다. 탈진은 현실이고, 청소년 사역은 너무 많은 젊은 사역자들을 집어 삼킨 후 내뱉는 것 같다.2. 교회 개척의 매력교회 개척은 사역에 부름받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훨씬 더 인기를 얻고 있다. 한 세대 전에는 목사가 25세나 30세에 교회 개척이라는 힘든 사역을 하기에는 아직 너무 경험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대신, 청소년 사역자로 시작하여 봉사하며 사역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신학교 졸업생들이 청소년 사역의 어려움을 감내하기보다는 커피숍에서 일하며 교회 개척을 돕는 쪽으로 가고 있다.3. 돈에 대한 불경건한 동기청소년 사역은 다른 일보다 수입이 적다. 그게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 그것이 현실인가? 그 또한 그렇다. 한때 수많은 목회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을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부름을 받고 목회자가 된 일부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했던 것처럼 차나 휴대폰을 파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로 인해 급여를 삭감 당하기보다는 말이다.너무 많은 사람들이 (칭찬받을 만한 이유인) 가족을 부양한다는 명목으로 사역의 기회를 거부하지만, 실제로는 안락한 삶에 대한 세상의 표준을 따르고 싶어하는 것이다. 젊은 신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교회나 비상 사태로 인해 무너지는 교회에 가지 말라. 교회에 가려면 경차가 아니라 중형차를 운전하는 교회를 선택하라.4. 상향 이동에 대한 욕구큰 교회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큰 연못에서는 상향 이동을 더 빨리 할 수 있다. 잘 배치된 인턴십, 전임 또는 펠로우십 프로그램에 남아 있기 위해 사역의 자리를 거절하는 것은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그 자체는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나는 전임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그중 일부는 매우 유익한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현 시대에는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작은 마을이나 작은 교회에서 청소년 사역자가 되기보다는 큰 교회에서 일하면서 봉급을 모으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5. 장소와 사람의 우상화많은 신학생들에게 도시를 떠나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로 부름을 받는 것과 같다. 작은 마을이나 작은 교회의 사역은 특권이 아니라 형벌로 여겨져 왔다.또는 사모가 다음과 같이 선을 그을 수 있다. “나의 부모(가족 혹은 친구 등)를 떠나 그렇게 멀리 이사가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편안한 곳에서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분의 부르심을 제한된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부르심을 대놓고 거부하는 방법이다.6. 사역에 대한 열망이러한 경향에 기여하는 몇 가지 좋은 동기가 있다. 많은 잠재적인 청소년 사역자들은 학생들을 위한 사역에 특별히 열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 자리를 디딤돌처럼 취급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고귀한 것이다. 이력서를 작성하고 6개월 만에 그만두고 싶다면 지원하지 말라.하지만 제자를 삼는 일에 열정이 있다면 학생들보다 더 비옥한 땅은 없다. 담임목사, 제자훈련목사, 선교사로서 미래의 기회를 열어 두고, 한동안 이 사역에 열정을 쏟아보는 것은 좌천당한 것이 아니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그 사역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 놓치지 말라.7. 깨진 약속청소년 지도자들은 종종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그들을 지원한 적이 없는 담임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더 나쁜 것은 채용 단계에서 제자훈련과 청소년 사역에 대한 지원, 설교 기회 등을 약속하지만 채용 후에는 그런 지원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화되지 않으면 절망감이 생길 수 있다. 고립되고 무시당하고 아무것도 못한 채 막혀 있으려고 사역의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설상가상으로 수많은 청년 사역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짓밟히거나 변호를 받지 못하고 사역을 떠나는 경우가 많은데, 종종 그들을 채용하여 그 직분을 맡긴 담임목사에 의해 이런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청소년 사역에 대해 지원하지 않고, 더 심한 경우, 직접적으로 그들을 부당하게 대함으로써 교회에 상처를 입히고 다음 세대를 위한 청소년 사역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린다. 목회자들은 청소년 사역자들을 지원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제자 삼는 일을 할 수 있다.청소년 사역은 목회자 양성을 위한 인큐베이터가 될 수 있다. 청소년 사역자들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일하고, 시스템을 구축하고, 말씀을 전파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다. 물론 담임목사의 투자와 지원이 중요하다. 또는 이를 통해 학생들을 섬기라는 평생의 소명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청소년 사역은 진정한 사역이고, 청소년을 위한 목회자는 진정한 목회자다. 바나(Barna) 연구소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사람들의 64퍼센트가 18세 이전에 그런 결단을 한다고 추산한다. 특히 지금과 같은 문화적 시기에 아마도 가장 중요한 선교지는 문화적 변화의 가장자리에 있는 고등학생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원제: 7 Reasons It’s Hard to Find a Youth Minist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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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가 되고 싶은가? 오늘부터 장로답게 살기 시작하라
by Bobby Jamieson
2021-09-15
장로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장로로 임명되기 전에 장로로 ‘오해’받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 어떤 장로들에게는 목회가 그들의 사역이다. 하지만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종종 목회를 다른 직업과 똑같이 취급함으로써 많은 혼란과 피해가 발생한다. 그래서 존 파이퍼(John Piper)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비록 목회가 직업이라 하더라도 목회는 다른 모든 직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따라서 목사보다 좀 더 넓은 범주인 장로의 직분을 놓고 생각해보자. 장로가 되기 위해 지원하지도 않고, 장로로 취업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장로라는 직업을 갖고 장로 직분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장로는 그 대신에 교회로부터 임명받는다. 비록 이런 용어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교회가 장로들을 “인정한다(recognizes)”라고 표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본다. 어떤 개인이나 교회도 사람을 장로로 만들 수 없다. 물론 교회는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장로로 임명할 수 있지만, 성경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또 장로로서 헌신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장로라고 불려도 그는 결코 장로가 아니다. 누군가가 장로인가 아닌가를 결정짓는 것은 성품과 영적 수고(spiritual labor)다. 이런 사실은 모든 장로가 사실상 장로로 임명받기 전에 이미 장로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적법한 장로는 그 직분에 임명되기 전에 이미 품성과 능력 면에서 자격이 있음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짧은 에세이는 장로의 능력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장로는 무엇을 하는가?모든 장로가 수행하는 근본적인 사역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온 교회의 삶이 성경을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인의 영적 싸움과 죄에 적용하고, 다른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의 전체 사역과 선교 사명을 인도해야 한다. 모범을 보이고, 가르치고, 조언하고, 인도하라. 인도하는 사람만이 공식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교회가 요구하지 않는 한 교회 전체를 이끌 수 없다. 그러나 경건한 모범을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조언하는 데는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다. 사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건한 모범을 보이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의논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리스도인을 칭찬한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 1:6-7),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살전 2:14)라고 말한다.그리고 베드로는 우리에게 사탄을 대적하고 믿음에 굳건히 서라고 말한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그러므로 지금 당장 경건한 모범을 보임으로 장로보다 더 먼저 장로가 되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요점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서로 가르치고 조언하기를 기대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롬 15:14).그리고 골로새 교회에도 권면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마지막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권면한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이 모든 구절이 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권고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 예외없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가르치고 조언해야 한다.그러니 당신, 지금 뭘 기다리는가? 당장 시작하라.‘장로가 되기(Eldering)’를 시작하는 데에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1. 제자 훈련제자 훈련은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도록 돕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영적인 선을 행하라. 다른 교인에게 영적인 질문을 던지고 인내심 있게 그들의 대답을 탐구하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라.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어하며 또한 정기적으로 함께 성경을 읽고 싶어하는 다른 신자를 찾으라. 일주일에 한 번 만나 교대로 로마서 한 장을 서로에게 가르칠 수 있다. 제자를 삼는 것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엡 4:15).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복음뿐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다(살전 2:8).제자 훈련은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일 수도 있고 또한 정기적이거나 비정기적일 수도 있다.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커피숍의 같은 테이블에서 만날 수 있다. 또는 식료품을 사러 갈 때 누군가를 데리고 와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길에 대해 질문할 수도 있다.2. 환대환대에 관한 대부분의 성경의 권고는 당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물질적 지원을 하라는 것이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롬 12:13; 요삼 5-8). 그러나 베드로전서 4장 9절은 환대가 상호 간의 의무라고 규정한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을 위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인턴을 한 독신 형제인 제레미 뮬러(Jeremy Mueller)는 정기적으로 저녁 식사를 만들어 다른 교인들에게 가져다 주곤 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교회의 많은 가정에서는 다른 교인에게 단지 아이 돌보는 일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그 사람이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다. 어떤 필요를 충족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가정을 봉사와 교제의 허브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을 육체적으로 섬기면서 동시에 영적으로도 도울 수 있을까?자녀가 많아 어쩔 수 없이 미니밴을 사야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사실 나의 첫 차는 1996년식 은색 머큐리 빌리저(Mercury Villager)로서 내가 로스앤젤레스의 대학에 갈 때 갖고 가도록 부모님이 허락해 주신 차다. 그 미니밴은 지금 내가 이어서 타고 있는 은색 2011년식 혼다 오디세이(Honda Odyssey)와 묘하게 비슷했다. 그러나 학부 시절에 내 빌리저는 서핑보드와 악기, 캠핑 장비를 운반하는 것 외에도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캠퍼스에서 그레이스교회(Grace Community Church)로 가는 비공식 버스 사역을 담당했다. 학생들에게는 교회로 갈 운송 수단이 필요했고, 빌리저에는 좌석이 있었다.교회는 오전 8시 30분에 시작했고 학교에서 20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주차하고 자리를 찾으려면 늦어도 8시까지는 가야 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거의 매주 일요일 아침에 나는 6시 전에 일어나서 7시 전부터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기숙사 주차장에서 듣는 전화 응답은 마치 영화 대본처럼 예측 가능하고 똑같았다. “(베개에 파묻혀서) 아, 뭐라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알았어. 바로 내려갈게.”3. 전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일을 하라”(딤후 4:5)고 명령한 것처럼 우리도 전도해야 한다. 맥 스타일스(Mack Stiles)는 이렇게 말했다. “전도는 설득을 목적으로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장로의 말씀 사역이 주로 전체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모든 장로, 특히 전임 설교 목사는 개인 전도에서 본을 보여야만 한다. 비기독교인 학우나 직장 동료들과 복음주의적 성경공부를 시작하는 것을 고려하라. 전도의 기회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의 기회를 만들라. 4. 상담영혼을 돌보는 법을 배우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을 묵상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게으름의 원인과 증상은 무엇인가? 마음이 나약한 사람을 강하게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약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가? 아니면 너무 열심을 내는 바람에 그들을 짓밟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가? 다양한 영적 질병을 진단하고 그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책장을 가득 채운 정확한 맞춤 처방전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법을 배우라. 젊은이와 노인, 열망이 있는 사람과 무관심한 사람 등 다양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영적 주도권을 잡으라. 당신과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영적인 선을 행하는 방법을 배우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특정한 영적 프로필을 가지고 있다. 성격, 문화, 성장 환경, 가족, 삶의 시점, 물질적 상황, 직업과 책임, 희망과 두려움, 죄와 투쟁, 육체적 정신적 고통, 영적 은사, 영적 성숙 등등 이 모든 것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무엇을 가지고 갈지를 결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얻어갈지도 함께 형성한다. 그리고 이 모든 특징을 통해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또 과연 그들에게 열린 귀가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성도들의 은사와 은총은 매우 다양하며, 사탄이 그들을 올무에 가두려는 계략 또한 다양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말하는 방법까지 함께 배워야 한다. 열쇠가 꼭 맞는 자물쇠를 찾는 법을 배우라. 고군분투하는 양들을 뻔한 진리만이 아니라 진정한 진리(the right truth)로, 또한 적절한 때에 적절한 어조로 섬기는 법을 배우라. 말을 잘하는 것만큼 잘 듣고자 하는 열망도 가져야 한다.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은 “사람과 더불어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여러 종류의 양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누리는 방법을 익히라. 거의 환상적일 정도로 다양한 성도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장로가 되기 전에 장로가 되라. 원제: Want to Be an Elder? Start Eldering Now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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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을 견디게 하는 로마서 8장의 질문 두 가지
by Dan Doriani
2021-09-14
비난은 리더의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을 괴롭게 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재선에만 신경을 쓴다는 비난을 받는다. 기업의 경영자는 통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인해 파산하는 것을 막고자 노동자를 해고하더라도 이기적인 행위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상담사는 고객이 결혼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얻지 못하거나,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할 때 비난을 받는다. 아이의 부모님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극성스러운 아이로 인해 비난을 받는다.바울이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라고 말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딤전 5:19). —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인기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하므로 불가피하게 비판과 분노의 대상이 된다. 물론 리더 역시 완벽할 수 없다. “두세 증인”이 혐의를 확인하면 죄를 범한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음을 받게 함으로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여야 한다”(딤전 5:20). 우리가 만약 고발당한다면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말라기는 이스라엘의 기만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비난한 책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실망하게 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실망하게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편 139편 23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나를 살피시고 나를 시험하사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라고 기도해야만 한다.리더의 자리에 있든 아니든, 남들이 진실로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그 비난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가 있다. 성경에는 악의적인 중상모략을 당한 여러 인물이 있다(마 5:11–12; 시 35:11–16; 41:5–7; 창 39:13–18; 벧전 3:16).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이런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나는 바울을 말씀을 떠올린다.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속량해 주시고 자녀 삼아 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묵상하며 로마서 8장에서 던진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 본다.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로마서 8장 31절은 우리가 어떤 원수를 만나도 그것은 하나님보다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헬라어는 문자 그대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해석한다. 이 번역은 독자들에게 믿는 자에게는 대적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실제로 바울은 박해와 칼로부터의 위협을 나중에 언급한다(롬 8:35).여기서 칼은 바울 서신을 읽는 사람들에게 로마 제국을 의미한다. 그들의 칼은 입을 막거나 힘으로 짓누르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고 위협하는 폭군들에게 대항하던 제자들을 향하고 있다. 폭군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우리를 반대한다. 직장에도 경쟁자가 있고, 까다로운 이웃과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에게는 또한 죄, 죽음, 육신 그리고 마귀와 같은 영적인 적들도 있다. 여기에 사고와 질병을 더할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만성적이든 간헐적이든 우리 자신을 상하게 하는 사각지대와 죄악이 있다.만약 이 모든 것의 경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행한다면 하나님은 사람들의 뜻에 반대하여 행하신다. 바벨론과 앗수르에게 “나는 너를 대적한다”라고 말씀하셨다(렘 50:31). 그는 또한 반항적인 이스라엘과 거짓 목자들에게 “나는 네 대적이라”라고 말씀하셨다(렘 21:13, 겔 13:8-20).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는 너를 위해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은혜롭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면 앞에 나열한 적들은 감히 우리를 대적할 수가 없다.누가 고발하리요?바울의 다음 질문은 더 길다.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사람들이 우리를 반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비난하고 책망한다. “고발한다”로 번역된 εγκαλεο(egkaleo)는 바울을 고발(행 19:38–40; 23:28–29; 26:2–7)하는 묘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 누구나 비난받는 것을 경험한다. 기독교의 대적들은 기독교인들을 오만하고 율법주의적이며 총으로 무장한 반환경주의자라고 부른다. 특히 성적 윤리에 있어서 우리는 사람들의 결정에 찬성할 수 없으므로 편협한 자로 낙인찍혀있다. 그러면서 우리 내부의 잘못에는 관대하기에 위선자라는 비난도 함께 받는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비난은 일부 타당한 것도 사실이다.이사야 50장 6절부터 9절에는 하나님의 종이 학대와 중상모략을 받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예고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육체적 고통을 넘어 하나님의 종이 수치를 당하고 거짓 혐의를 받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대답한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8-9).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위를 비난했고, 예수님이 신성모독 죄를 저질렀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그를 회복시키셨다.근거 없는 비난은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의 주요 전략으로 남아있다. 스가랴 3장은 제사장 여호수아가 성전에 서 있는 환상을 보여준다. 제사장에게 어울리는 의복을 입고 희생 제물을 바치는 대신 그는 오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사탄은 그런 상황에서 제물을 바칠 자격이 없는 그를 비난한다. 그러나 주님은 사탄의 입을 막으시고 천사에게 이르시기를,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3-5)라고 말씀하신다.믿는 자들에게 가장 무거운 비난이 있다. 사탄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잃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여 죄로 가득한 존재임을 아시지만, 더러운 옷과 같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옷을 입히신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부터 11절에 따르면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다.”라고 말씀하신다.우리에게 남은 무기력한 참소자들이제 예수님께서 우리를 참소하는 자들을 침묵하게 하셨으니 누가 감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탄은 계속 지껄이고 있고, 우리는 자신을 책망한다. 세상은 우리를 비난하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 공격을 당한다. 정치인, 의사, 목사 또는 참을성이 없는 운전자들로부터 일부러 타이밍이 맞지 않게 신호등을 설계했다고 비난받는 도시계획가 등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비판에 대한 책임이 있다. 바울의 시대에 문서검열관들은 고발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을 파멸시키기도 하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믿는 자들을 실족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많은 사람이 비난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비난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다(롬 4:25). 이제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그의 일을 완성하신다. 하나님의 오른편은 권위의 자리이고(시 110:1) 그 핵심은 심판자로서의 자리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이루신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하나님께 우리를 대신하여 변론하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변하여 주심으로 심판의 날에 우리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누구나 비난을 받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비난이 사실이라면 참회하고 정당한 의로움을 선물로 받자.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우리의 대변자를 믿자. 그가 우리의 영혼에 더 큰 은혜를 베풀기를, 그의 음성이 우리의 귀와 가슴에 울려 퍼져서 그의 공의 가운데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하자.원제: If God Is for Us: Standing Accused with Romans 8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목회
리더십
비난
대적
칭의
함께하심
로마서8장
난관
심판의날
참소자들
무지개 깃발이 있는 헤어숍을 이용해도 될까?
by Laura Baxter
2021-09-13
“우리는 가면을 쓰지 않은 사람, 인종차별주의자, 동성애 혐오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내가 다니는 헤어숍의 입구에는 이런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 년 내내 무지개 깃발(성소수자 운동을 상징-역주)이 걸려있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결혼의 정의를 믿는다. 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성경을 믿는 나는 동성애 혐오자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헤어숍을 이용해도 되는 것일까?성경적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에 무지개 깃발이 걸린 헤어숍은 그리 놀라운 광경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질문은 시의적절하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죄라고 정의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거나 죄의 행동을 부추기는 기업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걸까?’우선은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 혐오”와 같은 비방을 예상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박해 가운데서도 기뻐하라고 하신다(마 5:11-12).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고 성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헤어 디자이너와 관계를 계속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단절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도움이 되는 질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경은 그것을 금하고 있는가? 다른 하나는 현명한 방법인가? 하는 것이다.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과 교제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세 가지 원칙이 있다.1. 성경은 그것을 허락하고 있다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과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말씀한다(고후 6: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업에서든 결혼 생활에서든 우리와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과는 장기적인 동반자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성적으로 부도덕하거나 다른 죄를 짓는 사람과의 모든 교제를 끊거나 피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말한다(고전 5:10 참고). 그리고 우리가 자기의 의로 우쭐해지기 전에 과거 죄에 빠져있던 우리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라고 말이다(고전 6:11).헤어 디자이너와 파트너 관계가 아닌 한 우리는 언제든지 다른 헤어숍으로 갈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들에게서만 상품과 서비스를 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같은 장소에서 계속 머리를 자르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다.2. 현명하지 않을 수 있다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은 특정한 선택을 금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신중한 태도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것은 합리적이지만 유익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전 10:23).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불경건한 사람으로 바꾸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우리는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로 인해 불순종하는 세상에 타협하고 마치 친구처럼 가까워질 수도 있다(약 4:4). 그런 우리에게 바울은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3)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헤어 디자이너는 그리스도인이 불순종하도록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한 가지 예를 보자.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협력하도록 창조하셨다. 성경은 문화적 규범에 따라 남자는 남성적인 옷을 입고 여자는 여성적인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친다(신 22:5; 고전 11:14~15). 따라서 우리는 옷을 입는 방식으로 성별을 인정하고 서로의 성별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은 특히 여성들에게 단정하게 옷을 입으라고 하신다(딤전 2:9). 그러나 오늘날은 성별의 구분이 없고 극단적인 헤어스타일이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운영하지 않는 헤어숍에서 볼 수 있는 불경건한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등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헤어숍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있는 곳의 주인이자 모든 곳을 다스리는 통치자이시다.또 다른 고려 사항은 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현명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무지개 깃발이 단순한 신념의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헤어 디자이너가 우리의 돈을 사용하여 반기독교 운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도 있다. 주변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돈을 더 감사하게 생각하고 중요한 곳에 사용할 다른 헤어 디자이너가 있을 것이다. 이제 막 헤어숍을 시작한 경우라면 우리가 지출하는 돈을 더 감사하게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돈의 청지기로 삼으셨으니 작은 일이라도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길이고, 가장 좋은 방법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눅 16:10).내가 헤어숍에 가는 이유가 헤어 디자이너의 유창한 말이나 유행에 앞선 스타일로 인해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라. 지혜가 필요한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도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하며 조언을 구해보라. 그런 다음 기도하며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그곳에 계속 갈지 말지 최선의 결정을 내리라.3. 복음을 전할 수 있다일단 현재의 헤어숍을 선택한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돈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 경우에는 나 자신을 헤어숍에 파견된 그리스도의 대사로 생각하기를 권한다(고전 8:19-23).헤어숍으로 가는 길에 성령님께서 헤어 디자이너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서로가 교제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라. 직원을 친절하게 대하고 팁을 아낌없이 주라(마 7:12). 헤어 디자이너가 말하는 것을 좋아하면 그의 말을 들어라. 배우자와 결혼 등 관심 있는 주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은 물론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영적인 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가라. 그리고 헤어숍을 떠날 때 교회의 전도지를 주거나 관심 있는 기사의 링크 주소를 전달할 수도 있다.머지않은 미래에 무지개 깃발이 실제 서비스 거부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혹은 훨씬 더 나쁜) 일이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게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여(마 10:16) 그 기회를 이용하자. 그래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자.원제: Can I Get My Hair Cut Under a Rainbow Fla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생활
관계
무지개깃발
성소수자와의관계
성경적결혼
복음전파
문화적규범
불경건한사람
서비스거부
TGC 선언: 교회가 최우선순위이다!
by Brett Mccracken
2021-09-12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를 놓고 우리는 매주 수백 가지 선택을 한다.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열 때 차고 넘치는 수많은 선택 앞에서 우리는 압도되곤 한다. 광고에 기사에 각종 동영상에 팟캐스트 등등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많은 것들이 넘친다. ‘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은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선택지 중의 하나이다.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특성 자체가 풍성함이 부족하기에, ‘복음연합’이 제공하는 콘텐츠로 인해 당신이 영적으로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지금 영적 건강과 관련해서 당신이 꼭 했으면 하는 하나의 행동이 있음을 말하려고 한다. 이 행동은 그 어떤 콘텐츠(물론 ‘복음연합’ 사이트를 포함해서)를 클릭해서 읽는 것보다도 훨씬 중요하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 특정한 행동이 도대체 무엇일까? 바로 교회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TGC는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존재한다. 결코 교회를 대체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주일 아침에 어딘가에서 보낼 두 시간이라는 여유가 있다면, TGC 등 웹사이트를 탐색하는 데에 그 시간을 쓰지 말라. 교회에 가라. 간곡히 당부한다. 교회를 소홀히 하지 말라(히 10:25).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하라. 그리고 그 우선순위에 전념하라. 거기에 투자하라. 교회에서 봉사하라. 피와 살이 느껴지는 진짜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라. 사람들과 부딪힐 때 만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할 정도로 불편한 측면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라. 인터넷 시대에 더 깊이 빠져들수록, 인터넷을 기반으로 사역하고 있는 우리 TGC는 더 확신하게 된다. 건강한 지역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교회를 향한 사랑과 헌신에 의해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이 가장 건강하고 능력이 넘친다는 사실을 말이다.신앙 형성은 교회에서 만들어진다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좋든 나쁘든 영적으로 세워져 간다.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을 읽고 교회 생활에 투자한다면, 우리는 분명한 한 방향을 향해서 영적으로 세워져 갈 것이다. 반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TikTok, Twitter, 그리고 Netflix에서 보낸다면, 우리의 신앙 형태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서 형성될 것이다. 온라인에서 보내는 과도한 시간은 기독교인을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편견을 강화시키는 온라인 거품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또한 다양한 방향에서 우리를 급진적으로 만들려는 목소리로 가득 찬 선별된 기사들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록, 우리의 욕망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온라인 종족이 사랑하는 것을 더 바라도록 형성되기 마련이다. 고도로 온라인화 된 기독교인(Highly Online Christian)은 자연스럽게 대표적으로 성경이나 교회 등등과 같은 대상을 향해 점점 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한 것들이 그들이 온라인에서 섭취하는 내러티브와 완벽하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견고한 기반 위에서 그들의 사고를 재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대상을 기피하는 HOC(Highly Online Christian)는 그 결과 디지털을 기반으로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자기기만이라는 나선형 구조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슬프게도, 이런 일이 지금 전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기독교인이 온라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교회 공동체에서는 더 적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는 무엇인가? 많은 교회가 바른 기독교인을 만들어내는 싸움에서 지고 있다.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교회 재발견’이라는 탄원이 지금 무척이나 시급한 이유이다. 기독교 세계를 포함해서 온 세계 속에서 들끓는 분열과 불안은 지금 빠르게 그 전환점(tipping point)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 속에서 꼭 필요한 치유는 결코 온라인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교회에 다시 한 번 더 헌신한다면, 진전을 기대할 수 있다. 교회는 그의 백성의 번영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선물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법을 배우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적용하며 그의 사명에 참여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주문하고, 그분을 찬양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고조시키기에 가장 좋은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다음에 열거하는 모든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다. - 그 어떤 유튜브 동영상이나 위키피디아 항목도 교회처럼 우리를 미덕으로 훈련시킬 수 없다. - 그 어떤 트위치(Twitch) 스트림이나 서브레딧(subreddit)도 교회처럼 지속 가능하고 양육에 효과적인 커뮤니티를 만들 수 없다.- 그 어떤 어떤 트위터 토론도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없다. - 그 어떤 활동가의 해시태그도 교회처럼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려는 기독교인의 의로운 분노와 열망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 어떤 스포티피(Spotify)의 예배 재생 목록도 예배당에 모여서 함께 부르는 회중 찬양의 영광을 복제할 수 없다.- 그 어떤 유명 설교자의 블로그나 팟캐스트도 개인적으로 나를 알고 사랑하며 가장 힘든 순간에 내 곁에 앉아서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우리 교회의 목사님이라는 선물을 대신할 수는 없다. - 그 어떤 소셜 미디어의 “자신의 약함 고백”도, 그게 아무리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교회에 모여 함께 한 목소리로 고백하며 느끼는 가족과도 같은 친밀함이 주는 만족에 비교할 수 없다. 온라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유익한 것이 많이 있을까? 물론 많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감히 교회를 이기지는 못한다. 물론, 이건 힘든 이야기이다“너무 이상주의적이라고 당신은 지금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교회는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도 아니고 나를 아는 곳도 아니야. 게다가 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자란 사람도 아니라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열거한 진술이 현재 당신이 느끼는 교회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진술은 교회를 여전히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에 헌신하는 교인으로 사는 것이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최대한 건강한 교회를 찾으라. 그러나 그 교회가 완벽할 것이라고 가정하지는 말라. 결코 그렇지 않을테니까. 분명히 불편할 것이다. 탈수 증세로 병원을 찾은 당신의 팔에 의사가 링거 주사를 꽂으면 불편한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수액은 당신의 생명줄이다. 불편함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지금 디지털 시대라는 덩굴 위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교회에 가는 것이 결코 가장 편한 것은 아니지만, 다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하다. - 디지털 시대의 혼란 속에서 교회는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 당파적 민족주의 속에서 다양하고 글로벌한 가족인 교회는 당파의 벽을 허문다. - 육체가 없는 초현실주의나 가상의 삶 속에서 육체를 입은 교회는 우리를 현실과 다시 연결시킨다.- 순간적이고 눈 깜짝할 사이에 놓칠 수 있는 온라인 생활의 속도 속에서 교회는 우리를 역사와 연결할 뿐 아니라 현실보다 훨씬 더 큰 이야기, 즉 영원한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교회는 이긴다인터넷에서 1시간(또는 트위터에서 5분)만 보내면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온라인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감정적 긴급성과 “속보”의 중요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길한 헤드라인은 또 다른 COVID-19의 급증, 또 다른 끔찍한 폭력 행위, 페이스북에서 공유된 또 다른 무모한 음모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트위터가 주요 기준점이라면, 교회도 지금 무너지고 있다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 경험에 따르면,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교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거의 항상 우울함과 절망감이 사그라들었다. 왜 그럴까? 그건 내가 교회에 있을 때 나는 이 세상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유일한 기관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영원토록 나의 민족이 될 다양한 피부색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앞으로 영원히 하게 될 바로 그 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하고 있다. 교회는 나를 이 덧없는 삶의 흐릿한 안개에서 벗어나 맑고 산소가 풍부한 영원의 공기로 인도한다. 손을 들어 찬양하며 내 입술이 찬양이 주는 달콤함을 맛볼 때, 그건 마치 에이미 애덤스(Amy Adams)가 영화 콘택트(Arrival)에서 경험했던, “그녀의 미래에 대한 기억”과도 같다. 그렇다. 교회에서 우리는 천국의 삶을 미리 엿볼 수 있다. 세상의 기초가 무너질 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는 교회로 달려가야 한다. 교회가 당신을 실망시킬까? 당연하다. 상처와 흉터가 생길 것이다. 거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천국의 한 모습이기도 한 교회에는 항상 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오늘도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있으며 언젠가 그 신부는 흠 없이 빛날 것이다(엡 5:27).기독교인이여, C. S. 루이스(C. S. Lewis)가 말한 것처럼 “교회는 우주보다 오래 살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문화, 모든 제도, 모든 국가, 인류, 모든 생물학적 생명이 멸종되어도 교회 안에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여전히 살아 있는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불멸은 세상의 일반성에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사회나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지옥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약속(마 16:18)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지옥의 문이 시애틀의 한 대형교회나 국제 변증 사역 또는 복음 중심의 연합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런 것들은 다 왔다가 갈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교회는 끝까지 남을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유일한 기관이며 성공으로 끝날 유일한 기관이기도 하다. 다른 모든 기관, 파라처치 사역, 자선 단체 및 기업은 결국 다 끝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TGC가 20년 후에도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복잡하고 도전적인 역사 속에서 번성하도록 돕기를 원할 뿐이다. 우리 TGC는 교회를 대체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교회의 치어리더이자 교회를 돕는 장비에 불과하다. 우리는 디지털 제자도라는 어려운 과제에서 교회를 돕고 싶다.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디지털 시대 기독교인 양성을 위한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면, TGC는 영혼을 위해 싸우고 다양한 방향에서 오는 무자비한 공격을 감당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이 잠시 참호에서 쉴 때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는 보급선과 같다.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다 전투이다. 당신이 이 글을 어떤 디바이스를 사용해서 읽고 있든지 간에 그곳은 영적 전쟁터이다. 온라인에서 기독교인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늘도 뽑혀지고 있다.그게 당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방어력을 강화하고, 산소를 보충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영양을 섭취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당신의 삶을 맡기라는 것이다.원제: TGC’s Manifesto: Prioritize Your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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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승리자: 다윗과 골리앗의 성경 신학
by Jason Hood
2021-09-11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 베스트셀러 ‘다윗과 골리앗 – 거인을 이기는 기술’의 저자-역주)에게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어떻게 약자가 잘 훈련된 막강한 용사를 보유한 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함은 아니다. 또한 이야기를 통해 기업의 리더십에 관한 전략이나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채무, 체중 조절, 중독 등과 같은 무거운 주제들에 대한 조언 등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에게 맞는 갑옷을 입으라”는 교훈은 더욱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어떤 가르침을 주는 것일까?더 적절한 접근법은 사무엘상으로부터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규범적인 맥락에서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우리와 연결되는지를 알 수 있다.예수를 만나다: 다윗, 골리앗, 그리고 성경의 큰 줄기사무엘상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족장 통치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변화시키시고, 그들과 함께 영원한 언약을 맺을 왕을 예비하신다(삼하 7). 그 언약의 줄거리는 사무엘상을 지나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의 해석은 아마 그것을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 본문에는 성경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을 유도하는 여러 가지 단서가 있다.하나님의 백성을 상대로 무자비한 전쟁을 벌인 골리앗과 블레셋은 창조주와 그의 뜻에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대적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여자와 뱀이 원수가 되게 하셨고 여자의 후손과 그의 후손 사이가 원수가 되게 하셨다.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는 비록 상하겠지만 그들이 유혹자(뱀)의 머리를 짓밟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골리앗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백성을 대항하는 뱀과 벌이는 싸움의 일부가 되어 머리에 상처를 입고 죽는다(삼상 17:49, 51; 창 3:15 참조). (사무엘서의 내용 중에는 특히 머리를 상한 자들의 많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참수를 모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머리카락이나 수염이 상한 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또 다른 창세기 3장의 암시는 골리앗의 갑옷이다. NASB 및 NET의 성경 번역은 히브리어의 원래 의미를 잘 반영하고 있다. 골리앗은 “비늘 형태의 갑옷”(작은 사슬을 엮어 만든 갑옷을 말함)을 입고 있었다. 블레셋의 맥락에서 이것은 반어반인(半漁半人, half- fish, half-men)인 그들의 인어신(人魚神) 다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상상력을 가진 성경 독자는 창세기 3장에 등장한 뱀과의 연결고리를 떠올릴 수 있다.마지막으로, 골리앗은 ‘승리자’로 알려져 있는데 문자적 해석에 따른 표현은 “두 군대 사이에서 공간을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기 위한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인 대리자이다. 그는 백성이 할 수 없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다윗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백성과 적 사이에 서서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한다.그러나 하나님 백성의 가장 큰 적은 사탄과 백성 자신의 죄악이다. 우리가 성경의 패턴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의 참된 대속자가 되시며 더 큰 승리를 주실 다윗의 자손에 관한 투영을 보게 될 것이다.자신을 돌아보며: 다윗, 골리앗,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과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러한 말씀의 단서들과 성경 전반에 걸친 흐름을 따라가며 예수를 발견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다.우리는 다윗의 승리에 고무되어 전쟁과 노략에 동참하는 우리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삼상 17:52–53). 우리는 “사이”에 계시는 분에 의한 대속 사역의 수혜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치를 전쟁에도 참여해야 한다.우리는 로마서의 처음과 마지막에 있는 구절을 통해 어떻게 성경이 이런 연관성을 이루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처럼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적을 물리쳤다는 기쁜 소식에 전념할 것이다(롬 1:3–4). 그리고 우리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처럼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우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을 기억하며 나눈다(롬 16:20). 바울의 조심스러운 어법에 주목하라. 하나님 자신이 사탄을 상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그 과정에 우리의 발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싸움에 참여하지만, 승리는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고전 15:10 참조).바울은 아마 예수로부터 이런 식의 이해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께서 그의 나라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72명의 제자의 사역 보고를 들으시면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으며, 창세기 3장이래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인 대적을 상징하는 생물인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다고 말씀하신다(눅 10:17-20).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우리의 영적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죄와 사탄을 대적하라고 격려한다(엡 6:10-20, 사 11:5; 49:2; 52:17 참조). 우리의 무기와 전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말과 일과 십자가로 싸우시듯 우리도 창과 돌팔매가 아닌 믿음과 평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무기로 싸운다.이 모든 것은 동시에 낮게 겸손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승리를 써 내려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승리자도 아니다. 또한 전쟁에 소집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고귀한 일이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려면 예수께서 사탄의 거인들과 죄를 결단력 있게 정복한 것과 같은 상상력과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받는 자이며 동시에 시대가 필요로 하는 전쟁에 참여한다.기대하며: 다윗의 완성되지 않은 승리우리는 또한 다윗의 이야기에서 예수와 우리 자신을 본다. 다윗과 그의 위대한 자손 모두 삶은 단순히 승리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윗의 성공 이후 이야기는 긴장감의 시간으로 빠르게 전환된다. 기름 부음 받은 왕이자 승리자였던 다윗은 이제 사울에게 경멸당하고 거부당하며 부당하게 추적당한다.다윗이 기록한 수많은 시편은 예수의 삶의 모범이 된다. (본문에는 적어도 5번 이상 다윗을 추격한 사울의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기름 부음 받은 왕인 그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부당했고, 초를 마셨으며(시 69:21), 옷은 나누어지고 관절은 찢겼으며(시 22:16-18), 그와 함께 빵을 나눠 먹었던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욕설과 함께 거부당했으며(시 27:12), 위증자들의 모함을 받았다.다윗의 고통은 기름 부음을 입었으나 거절당한 다윗의 자손에게 유형학적 패턴으로 작용한다. 시편의 말씀들은 여전히 그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기도집이기 때문에 메시아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다(시 37:11; 마 5:5).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고통을 배제하지 않는다.다윗과 예수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정하고 마귀의 계략에 대항하여야 한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갈보리에서 이미 결정적인 시합이 치러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게서 느끼는 분노는 패배한 원수의 분노이다(계 12:12). 골리앗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배회할지 모르지만(벧전 5:8), 골리앗과 마찬가지로 그의 머리는 이미 부서졌다(골 2:15, 요 16:11, 히 2:14).원제: Our Champion: A Biblical Theology of David and Golia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신학
구약
다윗
골리앗
영적전쟁
승리
성경
왕정시대
창조주
진정한승리자
탕부 하나님처럼 선교사 가정 환대하기
by 김형익
2021-09-10
이번 여름, 선교사 가정의 방문이 유독 많았다. 예정된 방문 일정을 앞두고 선교사 가정들에게 ‘아낌없는 환대’를 베풀자는 나의 제안에 교우들은 풍성한 연보로 호응하여 주었다. 그리고 방문하는 선교사 가정들에게 2박 3일의 짧지만 즐거운 가족 휴가를 제공하며 아낌없이 환대한 일은 선교사 가정들 뿐 아니라 교회에게도 큰 기쁨이 되었다.팀 켈러는 그의 책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을 통하여, 탕자를 가리키는 영어 ‘prodigal son’의 ‘prodigal’(방탕하다는 뜻)이 하나님을 수식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쓰일 때, ‘prodigal’은 ‘방탕하게 낭비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낌없이 베푸는, 낭비하듯이 베푸는’이란 뜻이다. 이런 환대가 선교사들에게만 국한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선교사와 그 가정들을 향한 아낌없는 환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아낌없는 환대’는 죄인의 자연스러운 행동은 아니다. 언제나 자기 쓸 것도 모자란다고 느낄 뿐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뿌리 깊은 죄성을 가진 것이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아낌없는 환대는 은혜를 필요로 하며, 이런 환대는 복음이 자라서 맺는 열매이고 은혜의 결실이다. 또한 환대를 받는 입장에서도 유연함이 요구된다. 내가 말하는 유연함은 받을 때 받아 누리고 또 베풀 때 아낌없이 베푸는 여유이다. 사실 이 유연함도 은혜의 작용이다. 나는 환대와 관련하여 두 입장을 말할텐데, 먼저 환대를 받는 선교사와 가정의 입장이다. 선교사와 가정—환대를 받는 사람들선교사로 15년을 살아온 내 경험을 돌아보건대, 나는 정말 누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30년 전의 일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사역하던 우리는 자카르타에 일이 있을 때마다, 친근하게 지내는 교민의 집에 묵는 은혜를 누렸다. 여느 호텔 못지않게 편하고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좋은 음악이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랬더니, 그 안주인 권사님이 CD를 꺼내서 주신다. 나도 모르게, “그림에 떡이네요”라는 말이 튀오나오고 말았다. 그 말에 당황한 권사님은 우리가 떠날 때, 500불을 쥐어주며 말했다. “좋은 CD 플레이어를 구입하시라고 드리는 선물입니다.” 당시 그 댁에서 보았던 ‘그것’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나는 수마트라로 돌아와 당연하게도(?) 그 돈을 종족 사역을 위해 사용했다. 자랑하려고 한 말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잘잘못의 가치 판단의 문제도 아니다. 당시 전시체제의 생활방식(Wartime lifestyle)이나 검소한 생활방식(Simple lifestyle)을 많이 말하던 나는 때때로 주어지는 환대를 누릴 수 있을만한 자유를 잘 알지 못했다. 또 하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선교단체의 대표로 있을 때의 일이다. 신학생들을 인솔하여 2주간의 단기선교(field trip)를 떠났다. 고된 일정 중의 한 밤은 도시의 저렴하지만 괜찮은 호텔에서 묵도록 일정을 계획했다. 호텔에 묵는 것이 거의 생소하던 시절, 그것도 선교 훈련의 일종이었다! 그때 신학생 중 용감한 한 자매가 모두를 대변하여 말했다. 단기선교 중에 이런 호텔에 묵는 게 마음이 불편하다고. 바로 이런 마음이 그전에 나를 지배하던 그 마음이었다.바울 사도는 선교사들과 같이 교회들의 후원을 받던 선교사였다. 물론 자신의 삶을 위해서는 텐트메이커로 일을 했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이 설립했고 또한 자신의 사역을 따뜻하게 후원했던 빌립보 교회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바울 사도는 비천에 처하기만 한 게 아니라, 풍부에도 처할 줄 안다고 말했다! 그는 배고픔과 궁핍에만 일체의 비결을 배운 게 아니라, 배부름과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말이다(빌 4:13). 주님은 사역에 지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1).” 일할 때와 쉴 때를 잘 구분할 수 있다면, 두 가지 모두를 잘 감당하고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교회 방문은 그들에게 사역으로서의 보고만큼이나, 그 가정에게 쉼의 시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이번 여름, 교회의 아낌없는 환대를 경험한 선교사들은 “이런 환대는 처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특히 즐거움이 뚝뚝 떨어지던 어린 자녀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온 만 9살의 루지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우리 여기에 더 있다가 가자고 목사님에게 말씀드리면 안 돼?” 다른 이유로 비록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들은 모두 이런 환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교회—선교사를 환대하는 사람들선교사에게 환대를 베푸는 교회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교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관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다가 잠시 한국에 들어와 모교회이자 후원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가정과 사역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주던 교회이다. 어머니의 친구분들이기도 하셨던 권사님들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김 선교사 얼굴이 두 배가 되었네.” 살이 쪘다는 말이다. 그 말의 뉘앙스는 알아서 생각하시라! 나는 정말 그때 살이 쪘었는지 모르겠다. 놀라운 것은 권사님들의 반응이 내 어머니의 반응과 너무나 달랐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나를 보았을 때, “아이고, 너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라고 하셨으니까. 여기서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내 아들로 볼 것인가, 우리가 돈을 보내서 선교의 일을 시킨 일꾼—선교사로 볼 것인가? 한 선교단체의 책임을 맡고 있던 시절, 나는 기회가 되는대로 교회들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여러분의 아들, 딸, 형제와 자매로 여겨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 인도네시아 우리 집을 잠깐 방문하셨던 나의 아버지는, 365일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어찌 에어컨도 없이 사느냐고 나무라시고는, 직접 나가서 에어컨을 사오셨다. 한국의 가정집에서 에어컨을 사용하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의 일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선교사를 자기 자식이나 친형제로 여기는 관점은 그들을 대하는 교회의 방식을 결정한다. “우리도 휴가 못 가요. 우리도 별로 가보지 못하는 호텔에, 우리도 먹지 못하는 값비싼 음식을 꼭 대접해야 하나요?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지요!”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선교사들, 그리고 그 자녀들은 낯선 나라, 낯선 문화, 우리와 다른 피부의 사람들 속에서 살아간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물리적 환경이 열악한 곳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 있든 간에, 그들은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려고 자신들의 생명, 그리고 가정을 주님께 드린 우리의 형제들이다. 우리가 물질과 기도로 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교사와 가정들이 고국 교회를 방문하여 아낌없는 환대를 경험할 때, 주님은 그 환대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넉넉하게 하시고 웃게 하신다. 즐거이 사명을 감당할 마음을 회복하게 하신다. 메시지 성경이 완간 되었을 때, 그 성경으로 시편을 읽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시편 23편을 읽을 때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선하신 환대를 느끼며 전율했던 기억이 새롭다. “You serve me a six-course dinner!” 주님께서 나에게 성대한 코스 요리를 차려 주신다고? 개역개정역이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라고 번역한 부분이다. 마지막 날,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보는 앞에서 성대한 코스 요리로 우리를 환대해 주실 것을 나는 믿는다. 그러나 때때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사람들을 통해 선교사와 그 가정들에게 ‘성대한 코스 요리’를 차려 환대하신다. 물론 주님이 직접 차려 주시는 상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충분하고 넘치도록(More than enough)당신과 당신의 교회는 우리를 환대하시는 탕부 하나님처럼, 선교사와 그 가정들을 아낌 없이환대하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될 의향이 있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충분한 것보다 더 많이(more than enough)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분이시다. 탕부 하나님(Prodigal God)처럼, 아낌없이 환대를 베푸는 프라디걸(prodigal) 교회들이 되면 좋겠다.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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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정
팀켈러
탕부하나님
아낌없는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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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단체
시편23편
베푸는교회
절실하게 기도하며 양육하라
by J. D. Greear
2021-09-09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기도하는 삶(A Praying Life)’의 저자인 폴 밀러(Paul Miller)가 지적했듯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시간, 돈, 재능이 인생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라고 조용히 확신하기” 때문이다.물론, 우리는 그것을 뻔뻔스럽게 말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것을 소리내어 말하면 그것은 이상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종종 마음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우리는 너무 피곤하거나 너무 바쁘다는 말로 기도하지 않는 것을 핑계댄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마음 속으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린다. 충분한 시간과 돈과 재능으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우리 삶에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나를 겸허하게 만든 육아나의 삶에서 DIY 접근 방식을 적극적으로 적용시킨 영역은 육아였다. 17년 전 처음으로 부모가 되었을 때,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모든 육아 관련 책을 읽었다. 내 철학은 이랬다. 기독교 양육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면 내 아이들이 잘 된다고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들의 웃는 소리가 들린다.)이 철학을 무너뜨린 책은 엘리스 피츠패트릭(Elyse Fitzpatrick)의 저서 ‘Give Them Grace(은혜를 베풀라)’이다. 기독교 양육에 관한 대부분의 책은 원칙을 알려주고 (대개 암묵적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A, B, C를 하면 자녀가 잘 될 것이라고 한다고 그녀는 지적한다. 내가 바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스, 이것이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겁니다. 내게 A, B, C를 알려 줘요. 시작. 나는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으니 D와 E가 있으면 내게 전수해줘요.’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접근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완전한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그분이 만드신 천사의 삼분의 일은 반역하였다(계 12:4). 그가 직접 창조한 유일한 두 인간은 둘 다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독자인 내가 기술과 원칙과 양육 면에서 하나님을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그녀는 이런 종류의 생각, 즉 우리가 DIY 기독교 양육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의 정말 위험한 문제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한 가지, 즉 매일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의 자비를 구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는 기도로 최선을 다했다”고 결론을 내린다.성경은 우리에게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렘 17:5). 성경적 지혜를 습득하는 것이 건강한 영적 삶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믿는” 모습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부활의 능력을 제공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예수님은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지침서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 사시는 영을 주려고 내려오셨다. 원칙을 마스터하고 그 원칙에 생명을 주는 관계를 잊어버리는 것은 비극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자들이라고 했다.오직 우리의 소망: 하나님의 은혜원칙이 중요한가? 물론이다. 그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도로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우리 자신, 가족, 교회, 지역 사회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다. 우리의 기술이나 성경적 원칙이 아니다. 당신은 그것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믿는가?그렇다면, 당신은 기도할 것이고, 계속 기도할 것이다.우리의 기도가 절실한 것은 우리에게 매우 원하는 것이 있어도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나와 내 아내가 어떤 원칙이나 규율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게 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수년 동안 우리는 꾸준히 함께 기도하기 위해 애썼다. 이제 우리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으며 그중 세 명은 십대다. 우리는 항상 함께 기도한다. 양육은 규율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절실함으로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십대 아이들을 “북한 지도자들”이라고 부른다. 핵폭탄을 만들 만큼 똑똑하지만 그것을 다룰 만큼 성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절실할 때까지 기억하라. 그렇게 하면 기도하게 되고, 규칙적으로 기도하게 된다.원제: Why We Need to Pray Desperatel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육아
DIY육아
절실한기도
정기적인기도
오직소망
하나님의은혜
가상 교회 같은 것은 없다
by Jonathan Leeman
2021-09-08
COVID-19 대유행으로 전 세계 교회는 많은 도전을 받았다. 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COVID-19 초기에 몇 달 동안 모임을 할 수 없을 때, 나는 내 교회를 잊어버린 것처럼 느꼈다. 사람들은 “당신의 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전화를 걸고 교인들에게 문자를 보내곤 했지만, 성도들 전체를 다 돌보지는 못했다. 교회는 폭풍우가 지나간 후 웅덩이가 여기저기 얕게 퍼져 있는 주차장의 빗물과 같이 느껴졌다.장로들은 신앙에 어려움을 겪거나 특정한 유혹에 직면해 있는 영적으로 연약한 교인들을 가장 걱정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표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전염병이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기 몇 달 전에 한 발만 내디뎠던 사람들에 대해 걱정했다.그러나 모이지 못하는 것은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든 미성숙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모두 정기적으로 성도들을 만나고 교제를 나눌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보거나 만나는 이들은 직장 동료, 학교 친구 또는 TV 캐릭터에만 국한될 수밖에 없다.무엇을 놓치고 있는가?팬데믹이 시작되자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생중계했고, “가상 교회”의 지속적인 가치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이전에 이 아이디어를 비난했던 목사들도 이제 “가상의 예배 공간”을 열고 이것이 무기한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전담 목사를 배치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지상명령을 완수하는 역사에서 흥미로운 발전이라고 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것이 있다. “교회”를 경험하는 수준이 방송을 보는 것에 불과할 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당신은 교회 성도들에 대해 덜 생각한다. 마음에 그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과 직접 맞닥뜨리지 않기 때문에 그들과 잠깐이라도 대화를 할 기회가 없다. 사실 그런 마주침과 간단한 대화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더 긴 대화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그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성도 간에 격려하거나 어떤 책무를 수행하거나 사랑을 베푸는 일에서 목회자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다.진리인 성경을 다운로드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한 정보 전달 이상이라는 사실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교회가 온라인으로만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구체화되는 느낌과 경험과 진리를 목격할 수 없다. 이러한 것들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형제자매 사이에 사랑의 끈을 만든다. 가상 교회라는 말은 모순적이다.엉망인 축복생각해 보라. 어쩌면 당신은 일주일 내내 어떤 형제에 대한 숨은 증오와 씨름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함으로써 죄가 드러나고 이를 고백하게 된다. 어쩌면 당신은 어떤 자매의 신앙에 대해 의심이 들고 그로 인해 씨름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같은 찬양을 부르는 것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쩌면 당신은 국가에서 정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이 문제로 씨름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설교자가 그리스도께서 승리와 변호를 위해 오셨음을 선포하자 주변에서 “아멘!”하는 외침을 듣는다. 이때 당신은 소망으로 동맹을 맺은 하늘 시민에 속해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투쟁을 계속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점심을 먹으며 다정한 목소리지만 절박하게 묻는 노부부의 “정말 잘 지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당신을 빛으로 이끈다.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가상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피조물과 관계를 맺도록 만드셨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삶은 다운로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펴 지키고, 듣고, 직접 행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디모데는 자신의 삶과 교리를 살필 필요가 있었는데(딤전 4:16), 그 이유는 그것이 자신과 그의 청중을 구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가상 교회 또는 인터넷 교회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편리하고, 솔직히 말해서 불편한 관계를 피할 수 있다. 가상 교회에서는 그런 유익을 얻는다. 그것은 강한 유혹이다.나는 미혼일 때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 다니는 교회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가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도 나를 보거나 내 말을 듣거나 내게 묻거나 하지 않았다. 꽤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즉시 성령께서 “그 생각이 어디에서 온 줄 알고 있는가? 그것은 따라야 할 충동이 아니다"라고 나를 꾸짖어 주셔서 감사했다.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날 성령께서 내 마음을 점검해 주셔서 감사하다. 하지만 알아야 할 교훈이 있다. 그 교훈은 성령께서 일반적으로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어리석음과 유혹에 맞서 싸우도록 도우시겠다는 것이다.그렇다, 모임이나 교회가 불편할 수 있지만 사랑도 그렇다. 관계가 엉망이지만 사랑도 그렇다. 상처받기 쉬운 대화도 무섭지만 사랑도 그렇다.우리는 서로 의존하는 존재다가상 교회를 밀어붙이는 것이 기독교의 개인주의화를 독촉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우리는 전염병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 제한된 시간 동안 그러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운지 논쟁할 수 있다. 미국의 해안 도시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정부가 전기를 공급하지 않아서 정전으로 인해 주일 저녁에는 모일 수 없었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하지만 (좋은 의도라도) 가상 교회를 영구적인 선택으로 제안하거나 권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를 해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을 자율적으로 지켜도 된다고 생각하도록 훈련시킨다. 가족의 일원이 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치지 않고도 추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그런 점에서 목회자들은 사람들이 가능한 한 가상 교회에 “출석”하지 않도록 격려해야 한다. 우리는 교인들에게 실시간 스트리밍 옵션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는 부드러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상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그들의 제자도에도 좋지 않고 그들의 신앙에도 좋지 않다. 우리는 그들이 안주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우리와 함께 모이는 데 열심을 내도록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모이라는 성경의 명령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히 10:25; 요일 5:3)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기쁨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원제: There’s No Such Thing as Virtual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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