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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과 싸우는 5가지 방법
by Christa Threlfall
2021-09-07
바닷가에서 세 번째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친구들을 보거나, 당신이 바라던 승진에 동료(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뽑혔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 보라. 부럽지 않다거나 샘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시기심은 좋은 직업을 얻거나 건강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 혹은 멋진 은퇴 계획과 같이 중요하고 거창한 일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보통 우리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을 시기한다. 예를 든다면, 누군가의 깨끗한 자동차(내 차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계속해서 흩어져 있을 때)를 보았을 때나 소셜 미디어에서 친구가 올린 멋지고 인상적인 음식 사진(나는 먹다 남은 음식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을 때)을 볼 때 등이다. 지난주에 나는 내가 사는 곳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키우는 토마토보다 키가 커 보이는 토마토를 째려보았다. 부러움과 시기심은 그 크기에 상관이 없다.나는 근본적으로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이렇게 쓰면 시기심이라는 것이 간단하고 그리 복잡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문제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시기심은 관계를 망치고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를 방해할 수 있다. (어떻게 아느냐면?) 하나님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시기심의 썩은 과일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내 마음에 있는 이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직접 대면해서든 혹은 온라인상에서든 내 관계를 통해서든 그것이 드러나는 여러 방식을 보여주고 계신다.때로 시기심은 내가 원했던 일을 누군가가 성취하여 주목을 받았을 때 화를 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혹은 다른 사람이 성취한 좋은 일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내가 받을 수 있었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어떤 때는 시기심이 나를 극도로 비생산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나보다 잘하고 있는지 계속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기심의 더 위험한 결과는 우정을 갈라놓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기심이 들면 친구와의 우정조차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인데도 말이다. 아마도 이러한 “선망의 열매” 중 일부는 당신에게도 친숙하게 들릴 것이다. 그것은 모두 교만이라는 죄로 귀결된다. 내가 최고가 되고 싶어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부러워지는 것이다. 이 죄와 싸울 수 있도록 성령이 가르치시고 능력을 주시는 다섯 가지 방법을 살펴보자.1.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을 채우라나에게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두 구절이 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그리고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울 때 성령님은 그 말씀을 사용하여 시기심으로 가득한 내 마음이 그분을 따르도록 도우신다.2. 성령님이 시기하는 생각과 행동을 드러내시면 바로 회개하라이 죄와 싸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시기하지 않고(고전 13:4)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은혜를 구하라.어떤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전에 잠재적인 나의 시기심을 하나님께 이야기할 때가 있다.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에 적을 식별하는 것과 같다(내 경우엔 누군가의 아름다운 집에 들어가거나 그들의 대단한 성과를 보게 될 때이다).3. 시기심이 드는 상대에게 복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라시기심이 드는 상대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 주시기를 간구하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들의 삶, 관계, 직업, 사역에 복을 내리시기를 기도하고, 그들이 번성하고 그들을 보호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라. 그들이 영향력을 높이고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마음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하라. 이러한 간구는 하나님이 나에게(그리고 나 혼자만) 해 주기를 원하는 일을 그들에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4. 도움과 조언을 구하라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척하는 것을 멈추게 한다.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할 때 다른 사람의 지혜와 전문성을 인정해야 한다. “자기 보기에 옳은” 시기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보다는 “권고를 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라(잠 12:15).5. 조언을 구하는 이에게 너그럽게 베풀라사람들이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데 내가 인색하게 대응하는 것은 보통 그들이 나보다 더 많은 성공 거두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8)라고 하신다. 남이 나보다 더 번성할까 걱정하기보다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풍성히 베풀라.계속되는 싸움나는 오랫동안 이 죄와 싸워왔다. 성령님이 처음으로 나를 깨닫게 한 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시기심과 씨름하고 있다. 물론 어떤 때는 더 힘들 때도 있지만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이 죄를 이겨내고, 내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닮을 때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마음을 쏟기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의 시기를 근절하시는 선한 일을 멈추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시리라”(빌 1:6)는 것을 확신한다.원제: 5 Ways to Fight Env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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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망의열매
권고
하나님의은혜
성령의능력
은퇴계획
남겨진 선교사 가족 돌보기
by Candace Echols
2021-09-06
우리 교회는 매년 겨울이 끝나갈 때면 세계 각국의 국기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세계 선교 컨퍼런스(World Missions Conference)를 개최할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컨퍼런스의 마지막 세션에서는 모든 청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십자가 높이 들고”를 찬양했다. 참으로 감동적인 찬양이었다. 설교는 힘이 있고 은혜를 깨닫게 했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그러나 나는 일찍 자리를 떠났다.딱 한 가지를 빼고 모든 것이 다 훌륭했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소명, 내가 중심에서부터 붙들고 있는 그 사실이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복음 선포를 위해 내 동생은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 사역하고 있다. 스테피(Steppie)와 나는 여섯 살 차이가 나고, 어른이 될 때까지 우리는 같은 침실을 사용했다. 우리는 잠들기 전까지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밤을 보냈다. 그런 순간이 모이고 또 모여서 끈끈한 자매애가 생겨났다.스테피는 2주 후면 첫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다. 귀여운 아기는 하나님이 그녀와 남편을 풀타임 선교사로 부르신 이탈리아에서 출생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출산을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귀여운 조카의 요람을 흔들어주는 좋은 이모가 되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힘든 사명선교사로 떠난 이의 남겨진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는 지상명령의 사역 뒤에 숨어있는 또 다른 부르심이 있다. 그건 “힘든 사명”(Hard Commission)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선교사로 떠난 이의 남겨진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는 선교사로 떠난 가족에게 생명을 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소리 없이 감내해야 하는 그들의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가족 누군가는 자신의 사명을 따라 선교사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은 남은 가족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가족을 해외에 선교사로 보내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세계 선교 컨퍼런스에 참석할 수 있다. 그 자리에서 선교를 위해 떠나 보낸 후 고군분투하는 사람들과 함께 세계의 깃발이 행진하는 것을 보며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다. 선교지에 있는 이들의 헌신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선교 컨퍼런스 참가 여부와 상관없이 선교사들이 남겨두고 간 가족을 도울 수 있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1. 물어라타지로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는 선교사 가족들과 관계를 맺고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진심 어린 호기심을 가져라. “그녀가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 가족의 경우 스테피를 파송한 교회가 그녀를 선교지에 보낸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2. 조언하라출장 또는 여행에서 얻은 유용한 정보는 사랑하는 사람을 선교지로 보낸 가족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다. 선교사 가족은 이런 궁금증이 있을 수 있다. 좋아하는 스낵을 생일선물로 꼭 보내고 싶은데 해외로 음식을 보낼 수 있는 건가? 비행기 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저렴한 항공편을 찾는 웹 사이트는? 평판이 좋은 웹 사이트를 어떻게 찾지? 이러한 궁금증과 고민은 갑작스럽게 혹은 처음으로 국제적인 교류를 해야 하는 선교사 가족들을 힘들게 한다. 해외여행이 당신에게 자연스럽다면 당신의 조언은 그들에게 매우 유용할 것이다. 그들이 물어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조언하라. 3. 도우라스테피는 로마 외곽의 올리브 농장 걸을 때 영상 메시지를 보냈고, 휴가 때면 신선한 올리브 오일을 보내주었다. 그녀의 남편인 레이드(Reid)는 이탈리아 정통 파스타 기술을 익혔다. 그들의 새로운 삶을 듣는 것은 항상 재미있지만, 직접 만나지 않고는 완전히 알 수가 없다.많은 선교사 가족은 먼 곳을 방문할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여분의 항공 마일리지가 있거나 넉넉한 마음이 있다면 비행기 표를 제공하겠다고 제안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선교사 가족을 현실적으로 축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선교사 부모가 자녀와 함께 칠레에서 엠파나다를 먹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그러면 당신은 네 번째로 소개할 ‘기도하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선물을 주게 될 것이다. 4. 기도하라선교사와 그 가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라. 그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하라. 해외 사역, 특히 언어에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라. 언어는 누구에게나 힘든 도전이다. 아니면 그들을 떠올리며 무엇이든 기도하라.몸이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선교사와 그 가족 모두의 마음을 계속해서 새롭게 함으로 그들의 생활이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과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6).그리고 선교사의 가족이 기도할 때마다 그들이 기도하는 대상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특별히 간구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oving Those Whom Missionaries Leave Behind번역: 무제
선교
선교지침
선교사가족
선교사파송
선교사후원
지상명령
힘든사명
선교사
주일 아침에 울리는 가장 중요한 악기
by Bob Kauflin
2021-09-05
시편 낭독이 끝날 때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러 개의 악기가 폭발한다. 류트, 하프, 탬버린, 현악기 및 파이프는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인다. 오늘날에는 피아노, 일렉트릭 및 어쿠스틱 기타, 금속악기, 현악기, 그리고 신디사이저, 오르간 및 여러 종류의 타악기가 사용된다. 이 모든 악기를 연주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치 그리고 그분의 역사하심에 반응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많은 악기가 예배 시간에 쓰이는 것을 보는 사람 중에서 어쩌면 더 많은 악기를 쓸수록 더 잘 예배드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교회가 다 이렇게 많은 악기와 연주자를 동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상당수의 교회가 단지 피아노 또는 기타 하나로만 예배를 드리고 있고, 하물며 그것조차 없는 교회도 많다. 그러나 교인 숫자와 관계없이 교회라면 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악기가 있다. 그리고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그 악기는 매 주일 아침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악기이기도 하다. 바로 교인들의 목소리이다. 이 사실이 예배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다른 악기들의 가치 있는 기여를 허사로 만든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기를 단지 예배에 유용한 것으로 보아야지, 예배에 필수적인 것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악기는 단지 우리의 목소리를 보완하고 돕기 위한 것이지, 우리의 목소리를 대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목소리를 높이자수많은 악기가 나열된 총 150편에 이르는 시편이지만, 목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은 악기를 사용하는 시편보다 일곱 배나 더 많다. 물론 이 사실 하나만을 놓고 결론이 났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이 점이 우리에게 바른 찬양과 관련해서 주는 시사점은 결코 적지 않다. 시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시편을 통해 찬양할 때 그 뒤를 받쳐주는 악기를 하나님이 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노랫말을 주었을 뿐이다. 물론 많은 시편에는 악기가 언급되어 있고, 또 그런 악기를 연주하라는 명령도 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악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어떤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신약이 플루트, 트럼펫 , 하프를 언급하고 있지만(마 11:17; 고전 14:7–8; 살전 4:16; 계 5:8; 14:2; 15:2),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였을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찬양이라는 점을 신약은 분명히 하고 있다(마 26:30; 막 14:26; 행 16:25; 고전 14:15, 26; 엡 5:19; 골 3:16; 약 5:13). 악기만 가지고 “가르치고 훈계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사, 리더, 기술팀,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찬양 사역자까지도 그들이 교회에서 맡은 역할은 교인들의 목소리가 예배에서 가장 크게 들리도록 돕는 것이다. 바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회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번 살펴보자. 교회 구성원을 위해서비록 당신이 교회 찬양팀에 속한 정식 멤버가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네 가지 방법을 통해서 당신은 찬양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준비하라. 좋은 연주자는 주일 예배를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또 연습한다. 그러나 단지 교인 중 한 사람으로서 당신이 굳이 교회에 가면서 목을 풀 필요는 없지만, 당신은 그 대신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주일 예배 시간에 찬양이 당신의 마음을 열기 전에 토요일 밤 또는 그 전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신 풍성한 은혜를 묵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라.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게 하셨고, 그 결과 우리는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받았고 또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모든 것은 100퍼센트 이뤄질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여하라. 뻔한 말이지만 모든 교인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다 찬양할 때 그들의 찬양 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릴 것이다. 찬양팀에서 악기를 담당하는 누군가가 악기를 아예 연주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다면 아주 이상할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교인이 찬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면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시 40:9).주변을 돌아보라. 찬양을 하는 중에 주변 교인들과 간간히 눈을 맞추도록 하라. 나도 당신과 함께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기쁜지를 보여주도록 하라.받으라. 나는 종종 주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찬양하기를 잠시 멈추고 대신 다른 이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내 영혼을 씻기도록 한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실 때, 우리는 “서로 화답하고” 또 “피차 가르치며 권면”해야 한다(엡 5:19; 골 3:16). 이건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서로를 세우기 위해서라고 한 말씀과(고전 12:7; 14:5, 12, 26)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다른 교인이 내 주위에서 찬양하는 것을 듣는 것은 은혜와 성숙을 가져다주는 좋은 방법이다. 시끄러운 신디사이저 소리와 혼란스러운 기타 화음 때문에 심지어 찬양하면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오늘날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런 일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단지 음악적인 경험을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 격려하라. 찬양 사역자와 멤버들을 칭찬하라. 그들이 선택한 특정 찬양에 대해서 감사하라. 하나님이 그들이 선택한 찬양을 사용해서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바로 바라볼 수 있었고 또 믿음이 더 강해질 수 있었다고 고백하라. 주변에서 큰 소리로, 담대하게, 기쁘게, 그리고 신실하게 찬양하는 사람들 때문에 당신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표현하라. 특히 슬픔과 시련 속에서 믿음, 신뢰, 기쁨의 찬양을 부름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격려하라. 교회 지도자를 위해서만약에 당신이 지금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책임자라면, 당신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교인들의 찬양을 방해할 수도 또는 도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인들이 다 함께 한 목소리로 드리는 찬양의 가치를 가르쳐라. 주일 예배 시간 중 멘트를 통해서건, 아니면 설교를 통해서건, 교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서 찬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마음을 다해서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야 한다. “예배로의 부름”이라는 순서로 예배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에 관한 찬양을 하는 것을 고려해보라. 세팅된 볼륨을 잘 살펴보라. 많은 경우에 악기 소리가 너무 커서 전체 교인의 찬양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또한 그와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밴드와 찬양 인도자의 소리가 너무 작아서 노래에 자신이 없는 교인으로 하여금 음정이 틀릴까 봐 소리 내서 찬양하는 것을 꺼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음악의 볼륨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찬양이 아예 들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 커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노래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찬양을 못 할 정도로 너무 작아서도 안 된다. 키(key)와 음역대를 곡이 아닌 교인들 수준에 맞춰라. 찬양곡에 따라서 더 근사하게 들리는 음 높이에 키를 맞추려고 한다면, 그건 인도자가 자기들을 위해서 찬양하는 것이지 결코 교인들을 위해서 찬양하는 게 아니다. 어떤 솔리스트가 멋지게 찬양하는 걸 보려고 교인들이 예배에 오는 게 아니다. 아니,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나 교인이 찬양을 할 때 키가 너무 높거나 낮아서 부르는 게 고역이 되는 경우라면, 그들은 너무도 쉽게 단지 구경꾼으로 전락할 수 있다.구성을 단순화하라. 악기 연주가 너무 일정하고 단조롭다면, 교인들은 앞에서 인도하는 찬양대를 보고 별 대단하지는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무 전문적이고 화려하게 찬양을 인도하는 경우라면 교인들이 내적 진리에 집중하기보다는 찬양 인도대의 화려한 음악적 기교에 감탄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가능한 한 적은 악기를 사용해야 한다. 언제 어떤 악기를 연주할지에 대해서 다양성을 가지라. 그리고 찬양 인도자가 귀 안에 모니터를 꽂고 있는 경우라면, 교인들의 찬양 소리가 제대로 들리는지를 항상 확인해야 한다. 불을 켜라. 종종 어떤 사람들은 어두울수록 방해도 덜 받고 음악을 하는 데에 더 편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어두운 예배당은 교인들로 하여금 예배의 주인공은 연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고, 또한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저기 연단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불이 밝아야 찬양 인도자는 주변을 더 잘 살펴보면서 찬양을 인도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악기 없이 부르는 아카펠라를 시도하라.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들 자신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자기네들 혼자 찬양을 부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모든 악기음이 사라지고 찬양 인도자가 아카펠라로 혼자 찬양할 때 교인들의 목소리가 사그라든다면, 그건 바로 교인들이 자신들의 찬양이 아니라 앞에 있는 찬양팀의 찬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예배 때마다 두세 번 아카펠라를 포함하도록 하라. 그렇게 함으로서 찬양 팀의 역할은 교인들을 도와주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악기만 연주하는 독주 시간에 제한을 두라. 교인들이 중간중간 악기 연주를 듣기 위해서 찬양을 멈춰야 한다면, 교인들의 영혼이 찬양 속 진리와 계속 연결되는 것은 쉽지 않게 된다. 한 가지 제안을 하자면 처음에 시작할 때 악기로만 시작을 하고, 중간에 들어가는 독주 부분은 최대한 제거하는 것이다. 또는 마지막 엔딩 부분을 악기로 마무리하지 말고 교인들의 찬양으로 끝내는 것이다.모든 이의 유익을 위해서 교인의 목소리를 가장 중요한 악기로 삼을 때, 우리에게는 다음 다섯 가지의 유익이 있다. 첫 번째로 교인의 목소리가 가장 중요한 악기가 될 때 우리는 에베소서 5:19과 골로새서 3:16의 명령을 새롭게 상기하게 된다. 단지 하나님을 향해서만 찬양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 서로를 바라보며 찬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보다 더 확실하게 내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로 인해 각 사람이 세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두 번째로 교인들의 전체 목소리가 내는 찬양의 가치를 알게 된다는 것은 예배가 공연으로 전락할 위험을 줄여주고, 그에 따라 모든 교인이 참여하는 진정한 예배가 됨을 의미한다.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에게 받는 감동은 줄어들고, 내가 참여함으로 느끼는 감동이 늘어남을 의미한다. 찬양 팀은 단지 함께 예배하는 큰 지체의 일부이지 결코 분리된 파트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인도하는 분은 오로지 대 제사장되신 예수님뿐이고, 오로지 그분만이 우리가 아버지께 드리는 모든 찬양의 제사가 완전하도록 할 수 있다(벧전 2:5).세 번째로 교인 전체의 역할을 중요시함으로 우리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수 있다. 통상 “오늘 예배 어땠어?”라는 질문이 함축하는 바는 앞에서 찬양을 인도했던 사람들이 잘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경우가 많다. “예배”가 단지 주일에 모여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앞에 있는 몇 명의 찬양 팀이 하는 게 아니라, 교인 전체가 다 함께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교인 전체가 보여주는 열정과 합심과 참여와 표현에 달려있다.네 번째로 교인 전체의 목소리에 우선 순위를 둠으로 우리는 앞에서 환상적인 소리를 내는 음악가에게 덜 의존하게 되고, 반대로 믿음으로 넘치는 우리의 내면을 더 의존하게 된다. 매주 훌륭한 악기를 동원해서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교회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한번 솔직해지자. 교회에서 찬양을 담당하는 대부분의 음악가는 잘해야 평균 수준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실력이 늘기를 바라지만, 사실 그들은 그렇게 탁월한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결코 주님의 영광을 향해 육신과 마음의 눈을 열고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 각자가 내는 목소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교인을 가장 중요한 악기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하나 됨을 더 잘 표현하게 된다. 교인들과 찬양팀 사이를 가르는 줄도, 또 목사와 교인을 가르는 줄도 없다.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의 피를 통해 하나가 되었으며 또한 성령 안에서 함께 묶인 바 되었다.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6).어린 양의 영광을 노래하는, 영원토록 계속될 그 찬양이 다른 악기가 아닌 교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점점 더 크게 울려퍼지는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원제: The Most Important Instrument on Sunday Morning 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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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과 희망: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위해 기도하자
by Madeline Arthington
2021-09-04
오늘 아침 나는 고대 실크로드 땅에서 채굴된 푸른 돌로 만들어진 단순한 모양의 목걸이를 손에 들었다. 이 목걸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일부이다. 나는 그 푸르고 작은 청금석을 내 가슴 중앙에 위치시키고 목걸이 줄을 목에 걸었다. 거울은 비록 목걸이를 한 내 모습을 푸른색과 금속성 반짝임 정도로 빛나게 했지만, 내 마음의 고통까지는 드러내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살아본 적은 없지만, 지난 2-3주 동안 들려온 소식으로 알게 된 탈레반의 급부상과 그에 따른 모든 결과를 향해 쏟아지는 세계적인 애도에 나는 동참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걱정하는 많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소셜 미디어 속 사진은 인상적이다. 1970년대에 짧은 치마를 입고 웃고 있는 한 아프간 여성과 탈레반 아래에서 부르카를 입은 한 여성을 비교한 사진이 특히 그렇다. 물론 탈레반이 집권하기 전부터 아프간 여성의 삶은 고단했다. 탈레반 전에도 여자들은 1970년대의 “과거” 사진처럼 미니스커트를 입고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들은 냉정한 현실을 드러낸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탈레반이 권력을 강화함에 따라 우리는 아프간 여성들이 대중의 시선에서 훨씬 더 멀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교육과 공적인 목소리가 없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베일 뒤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더 눈에 띄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현실은 절망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카불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교의 무스카 다스카기어(Muska Dastageer) 강사는 트위터에 “두려움은 검은 새처럼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새가 날개를 펴도 숨을 쉴 수 없다.”라고 썼다.이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할까? 나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길을 잃은 모든 여성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에 관한 몇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위해 기도할 때면 내가 묵묵히 의지하는 감춰진 현실은 바로 이것이다. 주님이 다 보고 계신다고통받는 무슬림 여성들과 나누고 싶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가 하갈의 이야기이다. 궁핍했던 가장 비참한 순간을 맞은 하갈은 도망쳤으며 바로 그 때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를 발견했다(창 16장). 하갈은 하나님에게 “엘로이” 그러니까 “보고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건 매우 놀라운 장면이다. “하갈이 …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13).나는 지난주에 자신이 겪은 학대와 고뇌에 대한 끔찍한 이야기를 공개한 어느 중앙아시아 여성과 직접 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그녀가 아프가니스탄 사람은 아니지만 트라우마, 학대, 사별, 잃어버린 꿈으로 인해 매일 우울한 절망감으로 매일 아침잠에서 깨는 많은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절망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모든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곤경을 보고 계신다. 이번 주 카불의 동정에 따르면 거리는 조용하고 감히 거리로 나서는 몇 안 되는 사람은 다 남자라고 한다. 비록 이처럼 여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났지만 하나님의 눈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보고 계신다.주님이 말씀하신다내가 매일 정기적으로 해오고 있는 성경 읽기에는 기도를 인도하는 시편이 항상 포함된다. 월요일 아침, 나는 하나님의 강력한 음성에 이끌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편 29편을 읽었다. 내 전화기의 뉴스 알림이 계속해서 나쁜 소식을 전할 때마다, 나는 도리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더 생각하고 생각했다.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영광이라 하도다(시 29:7–9).폭풍의 분노보다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권능을 폭풍에 비유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세력도 그 힘을 잃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목소리로 표현된다.많은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외부의 목소리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음성을 막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영광”을 외치도록 만드는 능력의 목소리로 하나님은 지금도 가장 고립된 아프가니스탄 여성에게 다가가신다.주님은 들으신다오늘 나는 시편 31편을 읽고 21-22절 옆 성경 여백에 “탈레반 점령, 2021년 8월”이라고 메모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시 31 21-22).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여성들은 듣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짓눌린 영혼의 아주 작은 속삭임까지도 듣고 계신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복음을 듣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지금도 듣고 계신다. 주님은 존귀함을 주신다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마 9장, 막 5장, 눅 8장)는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말씀이다. 그리고 무슬림 여성과 관련하여 나와 내 친구는 그 이야기를 “수치에서 해방된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부르곤 한다. 이슬람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보면 명예와 수치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다. 명예를 주는 일은 해야 하고 수치를 주는 일은 피해야 한다. 혈루증 여인은 수치심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 전까지 그녀는 무려 12년 동안 부정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녀를 고치는 동시에 그녀의 수치까지 품어주셨다. 주님은 그녀를 “딸”(눅 8:48)이라고 부르시며 명예를 회복시켜주셨다. 수치심에 싸여 살던 여인이 이제는 왕의 영예로운 딸이 되었다.무슬림 여성들은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몸을 가리거나 덮는다. 그러나 진실은 천 조각이나 어떤 옷가지가 불명예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딸”이라고 불러주시는 온유하신 구주만이 수치 속에 갇힌 여인을 구원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여인들의 영혼 안 속사람에게 구원과 치유와 존귀를 가져다주신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주님은 자비를 베푸신다신약에서 야고보는 학대받는 독자들에게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굳건하라고 권면한다. 그는 긍휼과 자비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호소한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세계의 뉴스를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로 하여금 아프가니스탄을 함께 애도할 수 있도록 하며, 또한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는 이 암울한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통해 진리로 나아가도록 가르쳐준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우리의 기도를 주관하도록 하자. 하나님, 당신은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모든 여성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하나님, 당신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복음의 희망을 가지고 많은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도합니다.하나님, 당신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우리는 오늘도 당신을 찾는 여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하나님, 당신은 존귀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우리는 당신이 그들의 수치를 감수하고 그들이 당신의 딸이 되는 영예를 주기를 기도합니다.하나님, 당신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연민과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원제: Lament and Hope: How to Pray for Afghanistan’s Wome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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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간을 영을 가진 몸으로 만들었다
by Jon Bloom
2021-09-03
영이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영은 몸과 어떻게 연결되었을까? 영과 구분되는 혼이라는 게 있을까? 몸과 혼과 영은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의 단위(unit)일까? 또 죽으면 이 세 가지 차원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그리고 부활하면 또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기독교인은 지난 역사 내내 이 문제를 놓고 씨름했다. 그 이유는 성경이 본문에 따라서 영과 혼 그리고 몸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특히 서구 기독교의 경우 플라톤이 우리의 사고에 끼친 막대한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뇌과학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영향까지 받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자 대부분은 역사를 통틀어서 아타나시우스 신경(Athanasian Creed)의 표현대로,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성적인 영과 육체’로 이뤄져 있다는 데에 성경이 동의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크게 두 개의 차원, 즉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으로 인간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 두 차원은 서로 나눠지도록 고안되지 않았다. 그러나 죄와 그 댓가 때문에(롬 6:23) 비극적인 비정상 상태가 발생했는데, 바로 죽음으로 인해 이 둘이 나눠지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궁극적인 목적은 이 둘의 통합이고, 기독교인이라면 몸이 죽고 천국에서 영만 따로 존재하는, 그런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 엄청난 분리하나님은 인간을 영을 가진 몸으로 창조했고, 따라서 영과 몸이라는 이 두 차원은 완벽한 조화 속에서 서로 작동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락이 찾아왔고, 그 결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리고 죽을 때 인간의 영이 몸으로부터 분리된다고 성경은 묘사한다. 모든 기독교인이 다 그런 분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신학자 중에는 인간은 분리될 수 없다고, 인간의 어떤 부분도 몸과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성경이 말하는 영과 혼이라는 용어는 단지 인간 자신, 또는 인간의 삶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일원론자(Monists)이다. 일원론자는 인간이 죽으면 일종의 영수면(soul sleep) 상태에서 부활할 때를 기다린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죽음을 잠으로 표현한 요한복음 11장 11절과 고린도전서15장 20절 외에 다양한 구절을 제시한다. 그러나 대다수 기독교인이 일원론자가 아닌 데에는 이유가 있다. 너무도 많은 구절이 죽음이 우리의 몸을 가져간 이후에도 우리의 영(또는 혼)은 살아남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창 35:18; 시 31:5; 눅 23:43, 46; 행 7:59; 빌 1:23–24; 고후 5:8; 살전 4:14; 히 12:23; 계 6:9; 20:4). 그러므로 ‘잠’은 영이 아니라 죽은 몸에 생기는 일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중간 상태여기에 관해서 가장 명확한 성경 말씀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다(눅 16:19-31). 이 비유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는 다 죽는다. 그들의 영은 몸에서 떨어져서 ‘하데스’로 간다. 하데스는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나사로는 아브라함이 있는 쪽에 머물고 거기서 건널 수 없는 반대쪽에서는 부자가 고통을 받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예수님이 비유를 위해 만든 픽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현실적인 픽션을 사용한다. 만일 이 비유가 어떤 식으로든 죽음 이후에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반영하지 않는다면(그리스도 자신이 인간의 영혼이 되어 하데스로 가서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면전으로 데리고 갈 때까지), 이것은 실로 이상한 이야기가 되고 또한 예수님의 다른 비유와 달리 오해의 소지가 많게 된다. 신학자들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영이 간 곳(둘 사이에 커다란 단절이 존재하는 곳, 눅 16:26)을 ‘중간 상태’라고 부른다. 거기서 죽은 자의 영은 부활과 마지막 심판을 기다린다(요 5:28-29). 죄 중에서 죽은 자(요 8:24)에게 그 상태는 말 그대로 지옥과 같은 고통을 받는 곳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죽은 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우리가 ‘천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한 말씀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그렇기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고후 5:8)이 타락으로 인해 “사망의 몸”(롬 7:24)에 머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 1:23).비록 임시라고 해도 이 낙원은 헛된 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결코 이곳을 최고의 장소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록 성경이 아주 명확하게 말을 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건 영이 몸이라는 옷을 입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후 5:4).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이 황홀하겠지만, 그럼에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1)처럼 몸을 입기 전까지 우리는 미완성의 단계다. 영적인 몸기독교는 단지 죽어서 천국 가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그 무엇보다 부활의 종교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물론 핵심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우리의 죄에 대한 그의 죽음이 가진 효과적인 대속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전 15:17-19), 궁극적인 미래의 희망을 가리킨다. 바로 부활이다(고전 15:20).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 피조물은 지금의 ‘허무함’과 ‘부패의 속박’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심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롬 8:19-21).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들이 ‘몸의 구원’을 경험할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인데, 바로 새로운 몸을 의미한다(롬 8:23). 그리고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인이 갖고 있는 “복스러운 소망”(딛 2:13), 구름 안에서 시작되는 거대한 모임으로 시작하는(살전 4:15-17)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것이다. 신약 전체가 부활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에서 몸도 없이 모여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애초에 창조를 보고 “좋다”(창 1:31)라고 하셨다. 그러나 죄에 의한 타락 이후로 하나님은 이제 “모든 것을 새롭게”(계 21:5) 만들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이 새 창조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정화된 영과 부활한 새 몸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위대한 재결합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뤄진 왕국을 주셨고(사 65:17; 벧후 3:13), 예수님 안에서 양자된 모든 이는(엡 1:5) 이제 그와 함께 다스리며 또한 그의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계 20:6). 우리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무찌르는 최후의 적은 죽음이다(고전 15:26).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1–55).저주받은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비물질적인 영과 물질적인 몸의 엄청난 분리를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활할 때 우리의 영과 몸은 다시 엄청난 결합을 하게 될 것이고, 영광스럽게 된 몸은 예수님의 몸처럼 “결코 다시 죽지 않을 것이다”(롬 6:9).부활해서 다시 영과 몸이 하나 된 상태에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우리가 경험하게 될 기쁨 중의 기쁨, 새로운 삶의 빛, 그리고 새 땅의 하늘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원제: God Made You for a Body: How Resurrection Will Make Us Whol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부활
교리
새몸
새창조
고린도전서15장
중간상태
몸과영의분할
몸과영의재결합
일원론자
미래 선교사에게 던지는 다섯 가지 도전
by Josh Manley
2021-09-02
이 아티클은 CROSS19 컨퍼런스 직전에 게시되었던 글이다. CROSS19는 8세에서 25세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지도자를 위한 컨퍼런스로 이 컨퍼런스의 목적은 모든 부족, 언어 및 국가의 사람들이 예수를 알고 예배하는 영원한 기쁨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6년 전 우리 가족은 바다를 건너 아랍 세계에 교회를 세웠다. 아랍인 통치자는 복음주의 교회를 위한 땅을 아낌없이 주었다. 이주와 관련된 위험이 있었지만 아내와 나는 복음의 문이 분명하게 열렸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하시는 목적과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에 비춰볼 때 그 정도의 위험은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CROSS19가 다가오면서 나는 주님께서 이 컨퍼런스를 사용하여 다섯 가지 근본적인 신념을 마음속에 깊이 심어주시기를 기도한다.1. 복음에 대해서 명확하라대부분의 운동팀 코치는 기본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선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복음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잃게 된다. 부활한 예수님이 투옥된 바울에게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행 23:11) 하라고 지시하신 것처럼, 우리의 사명은 예수에 관한 사실을 잃어버린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사람이라면 들어야 하는 권위있는 공적 사실의 발표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명료함과 복음의 절박함을 함께 가지고 선교 현장에 나갈 젊은이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믿도록 전도하고, 예수에 관한 사실을 바로 선포하겠다는 헌신이 필요하다.2. 행복하게 또 전적으로 지역 교회에 헌신하라“행복하게 그리고 전적으로”라는 말이 중요하다. 지역 교회는 선교 사업을 추구하는 데 불필요한 장애를 가져다주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단순히 선교에 필요한 승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지역 교회는 선교사 파송을 담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위임하셨고, 예수님이 대사명을 주신 기관이기도 하다. 교회가 없는 곳에서 개척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건강한 선교사라면 교회와 떨어져 사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지역 교회에 행복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묶여 있는 존재다. 그리고 지역 교회가 감당하는 책임과 격려를 감사할 뿐 아니라 신중하면서도 성경적인 사고를 통해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선교사들이 필요하다.첫 선교 여행을 끝낸 바울은 교회에서 장로들을 가르치고 임명하기 위해 자신이 박해를 받았던 도시들을 다시 여행했다(행 14:24-28). 교회는 그를 보냈고(행 11:30), 교회 개척이 그의 목표였다. 바울처럼 우리의 선교 전략도 교회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3. 기꺼이 가서 머물라어쩌다 한 번 정도는 크게 성공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목격한다. 히트곡 하나만 내고 다시는 히트곡이 없는 가수가 허다하다. 장기간 헌신하는 젊은 선교사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영원한 가치는 수년간 헌신을 하면서 또 수많은 시험을 겪고도 열매가 거의 없는 종들의 삶을 통해서 더 크게 드러난다. 애도니럼 저드슨(Adoniram Judson),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이 지속적인 성공은 결코 눈에 즉시 보이는 열매에 의해 측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 가르쳐주는 것에 대해서 나는 감사한다. 교회와 세상은 땅에 밀알처럼 떨어져 죽고 그 결과 많은 열매를 맺겠다는 큰 뜻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요 12:24). 컨퍼런스가 주는 흥분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꾸준하고 신실하게 사역하겠다는 사람이 간절하게 필요하다.4.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며 인내하라선교지에 가면 위험할 것이다. 정착할 때 극복해야 할 초기 결정과 과제들이 적지 않다. 또한 당신이 떠나면서 뒤에 남겨놓은 즉각적인 위험도 있다. 내게 가장 많은 가르침을 준 선교사들은 편안하게 정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이 주는 위험을 지속적으로 감수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의 끝에 보이는 지평선은 은퇴가 아닌 영원이다. 영원을 생각하며 살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닥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통해서 바울은 많은 회심자를 만들었고 많은 교회를 세웠다. 바울은 그 정도로 안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죄수로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행 21-28장). 성경이 말하는 주권자 하나님에게 단단히 자신감의 뿌리를 내린 선교사들을 더 많이 키움으로써 우리 주님에게 기쁨을 드리길 바란다.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또 그분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킨다는 사실을 믿을 때에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선교사를 더 키움으로써 우리 주님에게 기쁨을 드리길 바란다. 5. 항상 기도하라성령님이 선교 전략의 중심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지금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선교는 항상 꾸준하고 믿음 충만한 기도에 달려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고 희생적인 기도를 통해 얼마나 많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는 오로지 천국에 갔을 때에만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교회는 기꺼이 그런 희생을 하고자 하는 남녀 젊은이들이 필요하다. 사도행전은 분명하다. 기도에 대한 엄격한 헌신(행 1:24; 4:31-35; 6:6–7; 28:8) 없이 복음은 결코 땅끝까지 전파되지 않을 것이다(행 1: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그의 고통에 대한 상을 받을 때까지 천국을 이 땅에 오도록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며 선교 현장에서 계속 싸울 더 많은 사람들을 일으켜달라고 나는 주님께 기도한다.새로운 컨퍼런스는 또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CROSS19가 가까워질수록 추수의 주님이 그의 복음과 교회를 사랑하는 일꾼, 또 그의 영광스러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선교의 사명을 장기적으로 감당할 일꾼을 일으키시길 바란다(마 9:38).원제: 5 Challenges to Future Missionaries출전: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선교지침
선교사
CROSS19
사도행전
복음
헌신
인내
기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by Jerry Bridges
2021-09-01
미국 가정에서는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구운 햄 또는 칠면조 요리와 같은 전통 음식을 저녁 식사 때 나눈다. 이따금 스테이크를 먹거나 주말이 되면 팟 로스트를 즐기기도 한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람들은 생선이나 조류, 또는 다양한 짐승을 잡아먹으며 살아왔다. 최근 동물권(the animal rights)에 대한 주장이 부상하기 전까지, 식용을 목적으로 동물을 죽인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인간을 죽이는 일은 오래전부터 형벌을 받아 마땅한 범죄로 취급해 왔다. 왜 그렇게 취급해 왔을까? 왜 새나 동물을 죽이는 일과 사람을 죽이는 일은 서로 구분되었을까? 우리는 창세기 9장 1절-6절에서 그에 대한 답변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사람과 구별하신다. 그리고 모든 동물을 사람에게 양식으로 주신다. 그 결과 사람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동물을 죽이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이 동물을 양식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그런데 동물과 달리 사람에 대해서는 이런 말씀이 주어진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즉 동물을 음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죽이는 일은 괜찮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이 사람 곧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창 1:27).여기까지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성경 구절을 간과한다. 그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본문이다. 바로 야고보서 3장 9절이다. “이것으로 [곧 우리의 혀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약 3:9). 다른 모든 동물과 달리 인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인간에게 잔존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창세기 9장 6절과 야고보서 3장 9절이 타락 이후의 인류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타인에게 해서는 안 될 두 가지 금기 사항이 주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바로 살인과 저주이다). 특히 야고보서의 문맥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 본문이 타인에 대한 저주나 강도 높은 비난만이 아니라 상대에게 상처나 모욕을 주기 위해 내뱉는 차갑고 거친 말까지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이유로 인해 누구도 타인을 살해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저주하거나 수치심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살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 너무나도 자주 거친 말을 입 밖에 내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그런 말을 한다.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때, 우리는 상대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는 셈이다.이처럼 살인과 거친 언사를 금하는 두 가지 경고로부터 우리는 대인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성경의 더 큰 원리를 도출하게 된다.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타인을 대할 때는 그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마치 하나님 자신을 상대하는 일처럼 간주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잠언에는 이런 교훈이 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또한 예수님도 그와 같은 원리에 근거하여 마지막 날 우리의 행위가 평가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흔히 우리는 누군가가 정직하거나 도덕적으로 바른 생활을 할 때 그에 대해 진실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진실함이란 타인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삶에서는 정직하고 도덕적으로 바르게 행동하지만, 타인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거칠고 교만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그 성별이나 인종 또는 경제적 형편이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존중받아야 할 대상임을 잊고 있다. 그 결과 자신의 진실성에도 큰 타격을 입힌다.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는 많이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타인에게 하는 말이나 타인에 관해서 하는 말은 그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기본 원리를 벗어나면 안 된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여기서 지적하는 더러운 말이란, 우리의 직접적인 대화 상대이든 혹은 우리가 대화의 소재로 삼고 있는 상대이든 그 상대를 비방하는 모든 말을 일컫는다. 일상의 다른 영역에서는 신중하게 행동하려는 사람도 대인 관계에서는 그 같은 말을 금하는 데 안타깝게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경솔하게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일이 쉽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 상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인데도 말이다.노숙자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겨울철 시내에 있는 도서관에 가면 바깥 추위를 피해 그곳으로 찾아 들어온 노숙자를 만날 수 있다. 그런 노숙자는 흔히 도서관 이용자들에게 불편을 끼치기 쉽다. 면도도 안 하고 샤워도 하지 않은 상태로 지저분한 옷을 입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서관에 어울리는 단정하고 말쑥한 사람들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노숙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그런 사람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 자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더 나아가 우리는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이상의 일을 실천할 수도 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곤경을 돌아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엄중히 질책하셨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이 질책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이 글에서 다 나눌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는 모든 성도가 가난한 자를 섬기는 사역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현장에 가서 도움의 손길을 주든 아니면 다른 수단을 통해 후원하든 그러한 사역에 꼭 참여해야 한다. 물론 아프리카에 있는 고아를 돕기 위해서는 관대하게 베풀면서도 정작 우리가 사는 지역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는 생명을 보호하는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태아를 보호하는 이슈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낙태를 허용하는 현행법으로 인해 태아의 생명을 지키려는 운동이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들이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여성을 돌보는 기관을 몸소 방문하거나 재정적으로 돕는 일이다. 또는 낙태를 쉽사리 허용하는 법률을 개정하기 위해 의회에서 또는 법정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지지할 수도 있다.미국의 경우에는 ‘로 대 웨이드 대법원 판결’(the Roe v. Wade Supreme Court decision) 이래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쟁점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공론이 양분되는 현상을 보여 왔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이슈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리다 보면, 우리 역시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기본 신념을 잃어버리기 쉽다. 각각의 태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을 놓쳐 버릴 수 있는 것이다. 태아의 생명은 정당 간 대립이나 법정 싸움을 초월해서 지켜져야 할 가치이다. 우리는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서 기도로 싸워야 한다.이러한 낙태와 더불어 노인이나 심각한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해 안락사나 조력 자살을 허용하는 일도 위협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가족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요양병원에서 쇠약하게 지내는 노인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정신력이 크게 손상되어 타인과의 관계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얼마나 크든 간에, 그들 역시도 인간의 존엄성을 가졌기에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현재 세계에는 7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제 우리는 세계에 흩어진 사람들을 이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신문이나 TV 뉴스에서 치명적인 지진 또는 태풍이 일어나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거나 거처를 잃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런 소식을 마치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 세상의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어야 할까? 아니면 이재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고 여기며 그 존엄성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깊은 연민을 품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까?우리 가운데 누구도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딴 섬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매일 타인과 교제한다. 어떠한 상황과 맥락에서 상대와 교제하든, 우리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명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갈 6:10).원제: Designed for Dignity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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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
야고보서
낙태
자녀를 교회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려면
by Jared C. Wilson
2021-08-31
최근 LifeWay 연구에 따르면 교회를 떠나는 청소년의 비율이 70%를 상회한다. 라이프웨이 리서치의 스캇 맥코넬(Scott McConnell)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소식은 교회가 10년 전보다 더 많은 학생을 잃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탈교회 비율의 실질적 개선 여부를 말할 만큼 통계적 차이가 큰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교회 이탈률은 거의 그대로(실제로는 4% 하락)이지만, 다시 교회로 돌아올 가능성은 더 나빠지고 있다.이런 걱정스러운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최근 트위터에 ‘청년 문화’에 대한 내 생각을 간략하게 공유했다. 대부분 동의하고 있는 것은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들에게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독교 가정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추론하여 믿음의 가정에 있는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제 그에 관한 여섯 가지 원인을 살펴보도록 하자.1. 부정기적인 교회 출석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교회에 출석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자녀들도 같은 길을 따르게 될 것이다. 별다른 일이 없을 때나 교회에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또는 운동이나 취미 활동 혹은 휴가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자녀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2. 교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것은 목회할 때 아내와 내가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다. 우리는 교회의 문제에 대해 불평하거나 실망스러운 상황에 낙담하는 것조차도 자녀들 앞에서 보이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다. 아이들이 교회를 엄마와 아빠를 낙담시키는 장소로 인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상처를 무분별하게 드러냄으로 아이들이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의 어린 자녀 앞에서 교회를 향한 당신의 불평, 불만, 실망, 갈등, 심지어 교회와 관련한 험담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교회에 대한 환멸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3. 지엽적인 교회 공동체의 경험이것은 교회 안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경험하는 교회는 전적으로 또는 대부분 중고등부 공동체 문화에 한정되어 있다. 모든 것은 그들의 관심사 혹은 흥미에 의해서만 돌아간다. 그것은 교회가 가는 근본적인 방향과는 다른 방향일 수도 있다. 교회 전체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목적과는 동떨어지기도 한다.나는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연령대로 나뉘어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는 또래들과 함께 지내며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교회 경험이 그들의 연령대 중심일 때 그들은 교회가 아닌 중고등부의 체험만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보완하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대학 청년 부서가 일종의 고등학교 “4학년”과 같은 역할을 함으로 우상 숭배와 속임수가 가득한 대중문화에 둘러싸인 청소년 문화가 교회 모임에 잠입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잘 먹혀 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커서 집을 떠나게 되면 그들은 '대형 교회'를 찾게 되고, 타지의 교회들은 그들의 취향과 비슷하지도 않고 잘 맞춰 줄 수도 없다.청소년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그들이 예수님의 몸과 연합하며 교회의 일원으로 부르기 위해 세례를 준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약 우리가 그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기독교가 언약 공동체가 아닌 각자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인식했다면 그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했다고 생각할 때 기독교의 경험에는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4. 중요한 질문에 대한 무시대형 교회에 영향력을 펼치는 성인으로서 도덕적 심리치료 이신론(道德的心理治療理神論; Moralistic Therapeutic Deism)에 초점을 맞추는 청소년 그룹, 외부인들에게 복음의 전통적인 개념만을 강조하며 슬픔이나 고통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 설교, 복음주의와 정치적 우상 숭배의 상관성, 10대들이 가지고 있는 남녀, 성, 인종 등 문화적 질문에 대한 변증이나 명확한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 부모와 지도자들, 이 모든 현상은 교회가 실생활과 관련된 궁금증에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한다. 그들이 대학이나 그 이후에 직면하게 될 문제의 답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 만일 그들이 확고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지 못한다면 교회는 삶에 활력을 줄 수 없는 곳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현실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지적, 문화적 매력이 없는 곳이라고 판단하게 될 수도 있다.5.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소비지상주의 정신은 미국 문화에서 강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내가 ‘탕자교회’라는 책을 쓰면서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은 일반적인 가정이 교회에 정착하기까지는 4-7년 정도가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변화와 연관이 있다. 교회를 떠나는 데는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하거나 취향이 변할 때 혹은 실망감을 느낄 때 다른 교회로 쉽게 옮기는 가정은 교회를 가족처럼 여기고 사랑하고 헌신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교회는 필요에 따라 버릴 수도 있는 소비지상주의 상품처럼 대하도록 아이들에게 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교회를 정하거나 옮길 때 큰 고민 없이 쉽게 진행한다.6. 무시되거나 선포되지 못하는 복음2010년 ‘True Love Waits’ 캠페인에서 기독교 청소년들의 성 순수성을 장려하기 위해 수년간 활동한 결과를 분석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임신과 질병의 위험과 성경에서 말하는 혼전 성관계 금지에 초점을 맞춘 이 캠페인은 결혼 때까지 순결을 지키겠다고 자발적으로 서약한 교회 아이들에게도 사실상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결과 때문이다. 공동 설립자인 리처드 로스(Richard Ross)는 ‘Christianity Today’에서 “그들의 약속은 도덕적 심리치료 이신론보다는 경외감과 친밀감으로 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십 대들이 더 잘 지켜나가고 있다”라고 말했다.로스는 이어 “예수님을 아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질병과 임신을 피하고 싶은 욕구보다 훨씬 더 강한 동기 부여가 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순수한 삶이 가져다주는 혜택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성행위의 위험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춘기의 청소년들에게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설득은 그리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지 못한다. 고등학교 졸업 파티 날 밤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 지도자, 친구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율법은 선하며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오직 복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 우리 사이에 있는 분열을 깨뜨리시고, 믿음으로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며 우리를 서로 묶어 주셨다. 종교적 관심과 교회에 대한 자기 생각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학생들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단절시킬 뿐이다.만일 교회가 복음이 주도하는 기도, 친교, 예배를 포함한 생활의 중심이 아닌 매주 돌아오는 습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면 아이들은 교회가 사람들과 함께 몸담아야 할 곳이 아닌 단순히 주일 날 가야 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아닌 율법의 그늘에서 키운다면 교회와 관련된 모든 행위는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점수를 따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거나, 종교적인 행동이거나, “영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은 탈진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며, 어쩌면 영적 우울증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복음을 중심으로 은혜 아래에서 잘 되기를 기도하라.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교회 이탈률 통계 수치에 포함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위에서 이야기한 여섯 가지를 기억하고, 그것을 피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원제: How to ‘Disciple’ Your Kids into Church Dropout Statu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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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이탈률
교회이탈의이유
기독교가정
교회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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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지상주의
개척 당시 꿈꿨던 비전과 다른가?
by Jason James
2021-08-30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교회 개척자로서 소명의 핵심이다. 그것은 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재정적 지원을 늘리고 교회가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개척자의 마음에 고통이 서린다. 사역은 더 이상 그가 상상했던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그의 부르심을 확신할 수 없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소명에 그토록 확신했던 그에게 더 이상 확신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눈은 희미해져가고, 그 비전은 구체화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나는 이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뉴욕시에 교회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 우리는 들떠서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 이 부르심이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반복해서 말했다. 그러나 여정의 어딘가에서 우리는 이 섭리가 우리가 상상한 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고 잘못 생각했다.사역 계획이 우리가 상상한 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망한 바가 성취되지 않아 암울함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힘을 찾을 수 있을까? 실망으로 인해 우리의 소명에 의문이 생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나 더 나쁘게 하나님의 성품에 의문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더 큰 비전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가 먼저 상상을 하는 방식에 대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야기를 세상을 위한 그분의 계획에 짜 넣으실 것이라고 겸손하게 생각하면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교회 개척은 어떤 모습이 될까?’ 우리는 교회 개척이 가시적인 성공과 중요한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상상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우리 대부분과 달리) 하나님이 이루실 일에 대한 분명한 약속까지 들은 사람들의 예로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상상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들의 생애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사례도 있다.아브라함은 그의 후손이 별처럼 셀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자주 별 아래 누워서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아이가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죽기 전에 그의 자손이 수많은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지 않다는 걸 발견한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하나님은 타오르는 불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도록 그를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그 약속의 땅을 멀리서만 볼 줄 어찌 알았겠는가?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담대히 고백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그는 자신의 고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가? 그는 바라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예수님에게 물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은 것과 경험한 것,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과 그들이 상상했던 것들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한 갈대들을 꺾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도 꺾지 않을 것이다.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우리는 교회에 대한 강력한 비전을 생각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촉구하는 구름 같은 증인들이 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고대해야 한다(요 8:56). 모세가 그랬듯이, 우리도 사역의 모든 상급보다 예수님을 더 큰 보화로 여겨야 한다(히 11:26). 그리고 요한이 그랬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께 질문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마 11:6).우리는 별들 너머로 그 수를 계수하고, 이름을 지어 주시는 창조주를 바라보며 그분에게 매료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구름이 끼고 우리의 소명을 확인시켜 주는 모든 표징과 상징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게 될까?더 큰 항복아내와 나는 2011년 12월에 뉴욕시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에 대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2년 후 우리는 그 확신이 계속될 것이라고 가정하고 뉴욕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우리는 도착한 후 거의 1년 동안 실직 상태였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와 소속감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 상실을 안타까워하다가 결국 기존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내가 그 교회의 목사가 된 지 1년 후, 우리는 그 교회를 폐쇄해야 했다.나는 이해하려고 애썼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확신시켜 주시고는 우리 삶에 최악의 두려움만 주셨는가? 물론 하나님은 그 이상을 원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계획에 우리의 성공뿐만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항복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우리가 할렘에 New Hope Church를 개척한 것은 2020년 전염병이 우리 도시를 강타하기 2주 전, 우리가 교회 개척을 위해 처음 기도를 시작한지 9년이 지난 후였다.교회 개척자들은 우리의 계획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정체성이 목사, 개척자, 비전 있는 지도자일수록 더욱 그렇다. 우리의 비전이 성공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와 관련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전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된다.그러나 예수님은 상실로 근심하여 죽게 될 때 항복하는 방법을 보여 주신다(마 26:38). 그분이 항복한 것은 열심 있는 교사나 역동적인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항복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목회자나 개척자로서가 아니라, 종과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로서 예수님처럼 항복할 때, 우리가 잃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는 보화와 결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손을 벌려 그것을 붙들 수 있다. 우리가 여전히 보고 있는 영광을 우리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사역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를 지라도 말이다.원제: When Ministry Is Not What You Envisione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개척
비전
항복
하나님의약속
하나님의섭리
아브라함
모세
세례요한
보화
효과적인 회중 기도를 위한 네 가지 원칙
by Pat Quinn
2021-08-29
지난 13년 동안 미시간 주 이스트랜싱에 있는 대학 개혁교회에서 나는 장로, 예배 인도자, 그리고 상담 책임자로 케빈 드영(Kevin DeYoung) 목사와 함께 교인들을 섬기는 특권을 누렸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성경적인 예배야 말로 드영 목사가 가장 신경쓰는 첫 번째 우선 순위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예배에서 특히 강조한 사실 중 하나가 철저하게 준비하고 드리는 회중 기도였다. 그래서 2010년의 경우 예배 중에 내가 기도를 인도하는 경우 나는 회중 기도를 준비하고 기도문을 쓰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회중 기도야 말로 공예배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요소이며 따라서 우리가 이 기도를 그 무엇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잘 준비하도록 주님께서 은총을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내가 배운 교훈을 책에 담을 수 있도록 도우셨다.내가 쓴 책을 바탕으로 쓰는 지금 이 글이 목회자, 예배 인도자, 기타 사람들이 설교나 찬양을 준비하는 것처럼 기도 인도에도 똑같은 정성과 준비를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를 더 건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한다. 회중 기도를 잘 준비하기 위한 4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회중 기도에는 경배와 회개 그리고 간구가 포함되어야 한다하나님에 향해 마음을 다해서 감탄하고 또한 사랑을 바치는 것은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초가 되기 때문에, 회중 기도에서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경배이다. 경배하는 기도는 우리가 죄 가운데서 죽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엡 2:1-10)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이로움이 넘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하나님은 열광적인 찬양으로 넘쳐나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한없이 합당하신 분이다. 공동 회개는 종종 예배에서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 청중의 자존감을 손상시키는 것으로까지 여겨진다. 그러나 죄의 보편성과 심각성을 고려할 때 회개의 시간이 없는 예배는 진심을 담은 온전한 예배라고 할 수 없다.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끔찍한 죄악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담긴 충만한 용서의 은혜를 묵상할 때 우러나오는 감사의 슬픔을 느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간구는 회중 기도의 자연스러운 부분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당장 느끼는 필요에 초점을 맞추려는 유혹을 받기 때문에 경배 및 회개의 기도와 적절한 균형을 이루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우리가 공동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분위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풍부한 자비를 신뢰하면서 우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올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열렬한 확신으로 넘쳐야 한다. 이 세 가지 필수 유형의 기도는 예배뿐 아니라 그 외 전반적인 신앙생활에서도 개별 기도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에서 적용될 수 있다. 2. 회중 기도는 삼위일체를 반영해야 한다 모든 회중 기도가 성부, 성자, 성령을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삼위일체의 진리를 일관되게 증거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 속 모든 진리가 삼위일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세 위격은 창조, 섭리, 구속, 성화, 완성에 동등하지만 뚜렷하게 구분되어 서로 관계하고 있다. 에베소서 3장 14-19절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는 삼위일체를 반영한 기도의 좋은 예이다. 그는 에베소 성도들이 성령으로 강건하게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들이 그들의 마음에 거하기를 아버지께 기도한다. 다음은 삼위일체 찬양의 한 예이다.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를 경배합니다. … 아버지의 완전한 형상과 빛이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 생명을 주시는 분, 보혜사이시며 돕는 분이신 성령님을 경배합니다.3. 회중 기도는 사려 깊고 경건해야 한다 기도가 공개적일수록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주일 아침 예배에 하는 기도라면 특히 더 그렇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기도는 중언부언과 불경건으로 흘러갈 수 있다. 중언부언은 문장마다 계속해서 그러니까, 음, 따라서, 정말로 등등의 단어를 쓰거나 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계속 반복하는 경우이다. 사실상 그런 기도는 이미 기도한 내용을 단어만 살짝 바꿔서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건 마치 비행기가 착륙하지 않고 계속 하늘을 뱅뱅 도는 것과 비슷하다. 교인들은 그럴 때면 마음속으로 “제발 그만 좀 끝내요”라고 외치고 있다. 이런 중언부언 기도에 대한 치료법은 철저한 사전 기도와 더불어 내용을 잘 준비하는 것이다. 불경한 기도는 하나님의 장엄한 초월성이 우리 속에 거하는 그분의 자비로운 내재성(immanence)으로 인해 잊혀지거나 아예 삼켜질 때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불경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동시에 겸손한 경건함을 과소평가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없이 과도하게 하나님을 친숙하게 표현하는 경우, 하나님은 기도 속에서 거룩하신 분이 아니라 마치 우리의 “친구”나 또는 “여자 친구”처럼 들릴 수도 있다. 불경에 대한 치료법은 죄 많은 피조물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무한한 거리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의 사랑 사이의 불가분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전도서 5장 1-2절은 기도할 때 우리가 왜 사려 깊고 경건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4. 회중 기도는 복음 중심이어야 한다D. A. 카슨(D. A. Carson)은 학생들이 그의 가르침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가 흥미를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엇에 열광했을까? 그는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글을 쓰고, 또 기도했을까? 답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눅 24:44-47), 복음은 회중 기도를 포함하여 모든 예배에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노래하고, 전파하며, 기도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를 격려하는 것은 없다. 다음과 같은 경배의 기도는 복음이 드러내는 다양한 영광을 기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합당히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놀라운 겸손을 봅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늘로 올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그와 같이 될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이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랑을 봅니다. 우리가 주께 올라갈 수 없을 때 그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 그분은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지혜를 봅니다. 주께 돌아갈 마음도 없고 회복을 계획할 지혜도 없는 우리가 완전히 길을 잃었을 때, 그는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 가장 높은 곳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당신의 놀랍고도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구속의 사랑을 함께 찬양합니다.글을 맺으면서 연습 하나회중 기도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기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다. 이번 주에 골로새서 1장 3-14절에 빠져 보라. 아름답고 균형 잡힌 기도, 경건하고도 삼위일체와 복음 중심의 기도를 묵상하라. 그리고 “나”를 주어로 해서 경배, 회개, 그리고 간구의 개인기도를 작성하라. 마지막으로 주어를 “우리”로 바꿔서 회중 기도로 전환하고 이를 사용하여 가족예배에서, 성경 공부에서 또는 교회 예배에서 기도로 인도하라. 원제: 4 Principles of Effective Public Pray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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