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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이 만드는 교활하고 거짓된 친밀함
by Chris Martin
2021-10-08
소셜 인터넷은 다양한 의견과 각종 오락이 물결치는 분주한 시장과도 같다. 쇼핑몰의 상점처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또는 틱톡(TikTok)과 같은 다양한 앱은 더 많은 정보와 영감 또는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우리의 끝없는 갈망을 채워주겠다고 약속한다. 각각의 앱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지만, 그 모두를 작동시키는 핵심 구성 요소는 바로 “알고리즘”이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관계없이 피드(feeds)를 통해서 볼 내용을 결정하는 알고리즘은 다른 앱이나 플랫폼으로의 전환을 위한 탭과는 대조적으로, 사용자의 주의를 끌어서 오로지 해당 플랫폼에서만 계속 스크롤을 하도록 만드는 콘텐츠를 제공하도록 설계되었다. 알고리즘이 사용자의 관심을 끌도록 설계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소셜 미디어 앱이 사용자의 관심을 오래 끌수록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하게 되고, 그에 따라 사용자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광고의 가치도 더 높아지게 된다. 알고리즘이 우리를 오싹하게 만드는 이유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은 최근 가장 진보된 알고리즘 중 하나를 갖춘 소셜 미디어 플랫폼인 틱톡이 어떻게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을 감지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 조사한 비디오를 게시했다. 저널은 특정 관심사를 갖도록 프로그래밍된 인공 지능이 실행의 수를 설정하는, 다수의 “가짜” 계정이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오로지 슬프고 우울한 콘텐츠에만 관심을 갖도록 설계된 한 계정의 경우, 틱톡이 그 계정이 무슨 내용에 관심을 갖는지 인식하는 데에는 단 36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가짜 계정이 시청한 모든 동영상과 좋아요를 표시한 정보에 근거해 틱톡이 이 계정에 제공한 콘텐츠 중 무려 93%가 우울증 또는 슬픔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 불행하게도 아주 흔한 이런 예를 통해서 볼 때, 알고리즘의 관심은 우울한 생각을 완화시키는 게 아니라 사용자의 관심을 더 유지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한 사용자는 점점 더 심각한 우울증에 더 빠져들 수밖에 없다. 알고리즘은 치유나 개선에 관심이 없다. 알고리즘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망가진 자아가 거부할 수 없는 내용을 계속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를 무척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이런 알고리즘이 소름 끼치는 주된 이유는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알고리즘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피드에서 만나는 내용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숨기고 싶어하던 가장 어두운 욕망에 직면했기 때문일 수 있다.알고리즘은 숨겨진 마음을 드러내고 지배한다알고리즘은 마음에 우상 숭배를 퍼뜨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음미하는 것보다 소셜 미디어를 스크롤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정작 숭배하는 것이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이라는 사실이 그리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비록 인스타그램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지는 않더라도, 사실상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시간을 인스타그램에 쏟고 있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유튜버의 통찰력이 하나님 말씀의 진리보다 더 중요한 게 현실이 아닌가? 우리가 알고리즘을 “숭배”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한 가지 이유는 알고리즘이 마치 하나님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과 욕망까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아시는데(시 139:23; 렘 12:3; 행 15:8; 계 2:23), 그건 알고리즘도 마찬가지이다. 알고리즘에서 우리는 가장 깊은 두려움과 취약성을 악용하는, 왜곡된 친밀감을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진정한 친밀함, 즉 우리의 가장 큰 갈망을 충족시키는 진짜 친밀함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알고리즘은 우리를 속여 우리를 돌보는 것이 알고리즘이라고 믿도록 만들 수 있다. 겉으로만 봐서는 알고리즘이 꽤나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가진 선호도에 따라서 우리를 기분 좋게도 또는 나쁘게도 만든다. 알고리즘이 요구하는 건 단지 우리의 시간과 관심뿐이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이야기 속 영웅으로 만들고, 모든 현실이 오로지 욕망에만 맞춰지도록 유도한다.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알고리즘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와의 영원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알고리즘도 우리를 친밀하게 알 수 있지만, 결코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지는 않는다. 알고리즘은 결코 우리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위해 우리 마음을 찾으신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미치는 알고리즘의 엄청난 통찰력과 영향력을 깨달을 때, 우리는 현실 속 알고리즘과 같은 수학적 중재자를 피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삶을 중요시하는 사람들과의 친밀감을 추구해야 한다. 알고리즘에서 도망치라, 그리고 사람을 찾으라사람들과 얼마나 자주 어울리는가? 직장을 잃을까봐 거의 항상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느낀다고 소그룹에서 털어놓는가? 아니면, 그냥 형식적으로 웃으면서 모든 게 잘 돌아간다고 말하는가? 친구와 커피를 마실 때 십대 자녀 양육이 주는 고민을 나누는가? 아니면, 그냥 새 학기 시작에 대한 잡담으로 그치는가? 당신이 지금도 정욕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자가 알고 있는가? 배우자는 몰라도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교회 사람들보다 알고리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보다 화면을 두드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보다 알고리즘이 나를 더 잘 아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기초한 안전한 우정을 통해, 우리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알고리즘은 욕망에서 탈출하는 대신 욕망 속에 존재 전체를 던질 때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는 거짓말을 우리가 믿기 원한다. 알고리즘이 우리로 하여금 믿기를 원하는 다른 또 하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라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알려지고 그 안에서 자라야 한다는 사실이다.알고리즘의 거짓된 친밀감과 거짓된 약속에 속지 말라. 진짜 친구 및 가족과 누리는 진정한 친밀감을 추구하라. 알고리즘이 당신의 마음을 형성하고 예배를 훔치도록 놔두지 말라. 목적 없이 스크롤하고 클릭하는 시간을 줄이고,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모든 피드에 속절없이 빠지지 않도록 하라. 대신 기도와 성경 연구 그리로 예배를 통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라. 오늘날 온라인 생활에 관한 아픈 진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콘텐츠가 당신을 소비하고 있음을 기억하라.원제: The Insidious, Fake Intimacy of Algorithm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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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한 내 모든 생각을 바꾼 한 문장
by Joni Eareckson Tada
2021-10-07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 싫어하는 일까지도 허락하신다. 그날을 나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병원에서 퇴원한 나는 막 십 대 티를 벗은 때였고, 친구 스티브 에스테스(Steve Estes)와 함께 성경과 탄산음료를 앞에 놓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스티브와 나는 내가 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후 하나님에 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중에 알게 된 사이였다. 무엇보다 내가 던지는 질문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알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것을 스티브는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스티브는 나와 거래를 했다. 나는 탄산음료와 어머니의 특기인 BLT 샌드위치를 주는 조건으로 그는 내게 최선을 다해 성경에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주는 것으로 말이다. 비록 그날 나눴던 말을 문장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지만, 그로부터 무려 오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대화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그날의 대화는 내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나는 항상 하나님은 선한 분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날 봐, 난 휠체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지 마비 환자야. 지금 느끼는 감정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적인 것 같다니까. 하나님은 왜 사고를 막지 않으신 거지?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니야? 아니, 하나님이 그 현장에 계시기는 했나? 아니야, 그날 거기 있었던 건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일 거야.”그날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후, 스티브는 그날을 기억하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조니, 그날 밤 너와 마주 앉았을 때, 나는 정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어. 사실 나는 휠체어에 의지하는 내 또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거든. 네가 던지는 질문을 들을 때 사실 교회에서 배운 성경 구절 열 개 정도가 생각났지. 그러나 그날 맞은편에 앉은 너를 보면서 나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그 구절이 말하는 진리를 삶속에서 확인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 사실 나한테는 수학에서 D학점 받는 것 보다 나쁜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거든. 그래서 나는 널 바라보며 계속 이렇게 생각했어. 성경이 지금 온몸이 마비된 이 소녀의 삶에서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면, 성경은 사실 아무 소용이 없는 거다. 그래서 조니, 난 사실 그날 목소리를 가다듬었고, 말씀을 가지고 그냥 모험을 한 거야.”하나님은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허락하신다그날 밤, 스티브는 식탁에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조니, 너를 그 휠체어에 앉게 하신 건 하나님이야. 그리고 나는 그 이유는 몰라. 하지만 하나님과 싸우는 대신 그분을 믿고 의지한다면, 너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게 비록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이 아니라고 해도 천국에서라도 알게 될 거야. 하나님은 네 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일어나도록 허락했어. 그리고 아마 내가 오늘 여기 있는 건 그 이유에 관해 몇 가지 이유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야.”잠시 말을 멈췄던 스티브는 곧이어 그날 이후 내 인생을 바꾼 한 문장을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 싫어하는 일까지도 허락하신다.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진부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 문장은 마치 신비로운 수수께끼처럼 나를 유혹했다. 거기에는 내 속에서 매혹을 불러일으킬 어떤 깊고 신비한 진실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그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어.” 그리고 이내 나는 그의 이야기에 푹 빠졌다.그 여름 내내 나는 스티브와 함께 성경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탐구했다. 나는 하나님이 어떻게 악마와 손을 잡지 않고도 혐오스러운 일을 허용하는지 알고 싶었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은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아니, 내 목을 부러뜨려서 이뤄야 할 만큼 가치있는 게 하나님에게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다그해 여름 스티브가 나에게 준 조언을 앵무새처럼 옮겨보면 이렇다. 그는 예레미아애가 3장 32-33절로 시작했다.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한 구절에 걸쳐 성경은 하나님께서 “근심하게 하시나”,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단언한다. 그 구절을 근거로 스티브는 하나님이 내게 사고를 허용한 건 맞지만, 그 사고 때문에 하나님이 재미있어 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내게 일어난 끔찍한 사고가 하나님에게 아무런 기쁨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내게 참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내 사고가 누구의 책임이냐는 질문은 어떤가? 비극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관해서는, 그게 하나님이건 또는 악마이건 간에, 예레미야애가 3장은 그 비극을 하나님이 가져온 것이라는 점에 관해서 분명하게 하고 있다. 모든 비극 뒤에는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은 사탄이 운전하는 버스에 탄 밀항자이시며, 악마의 분노 주위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세우고 사탄의 사악함에서조차 궁극적인 선을 가져오신다. 모든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다“하나님이 주관자야,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는 거야, 조니.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너를 실제로 뗏목에서 밀어내 물에 빠뜨렸다는 뜻은 아니야.” 스티브가 말했다. “민수기 35장 11절은 ‘사고’로 죽은 사람을 묘사하면서 그 일을 ‘의도하지 않은’이라고 말해. 그러나 같은 사건에 대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거든.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출 21:13). 그러니까 사고지만, 하나님이 낸 사고라는 거지. 하나님은 명령을 내려서 고난이 일어나도록 허용은 하지만, 결코 그 고난을 직접 ‘행하지는’ 않으셔.”이것은 너무 깊은 차원의 이야기다. 하나님이 명령은 하시는데, 그렇다고 반드시 직접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내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달라고 말했을 때 스티브는 미소를 지었다. “조니,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유한한 사람들의 모임에 온 것을 환영해.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신이 기꺼이 승인하지 않는 모든 일까지도 허락하신다는 거야. 하나님은 자신이 결코 하지 않을 일을 다른 누군가가 하는 것을 허용하셔. 하나님은 욥의 낙타를 훔치지도 않았고, 갈대아인을 유혹해서 욥의 재산을 빼앗지도 않았어. 그러나 그 모든 비극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단 일 초도 욥의 인생에서 손을 뗀 적이 없으시지.”이어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조니, 모든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거야. 비록 사람들이 하나님이 네 사고와 아무 상관이 없고, 모든 비극은 다 얕은 물에 부주의하게 다이빙을 한 네 책임이라고 말해도 말이야.”오케이, 이제 알겠어. 하나님은 당신이 싫어하는 일까지도 허락하신다. 그러나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가 사랑하는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 끔찍한 일을 허용하는 부분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아직도 내가 겪는 이 고통과 사지 마비라는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할 정도로 하나님이 이루고 싶은 그 선하고 사랑스러운 역사가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었다.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비용 대 수익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은 가장 먼저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렸다. 그는 독생자의 죽음을 원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겪은 고통을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계획은 하나님이 했지만, 그 모든 일을 선동한 것은 사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초래한 반역과 고문 그리고 죽음과 살인을 생각해보라.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가룟 유다는 물론이고 예수를 나무에 못 박은 로마인을 포함한 온 무리도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행 4:28)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오케이, 너희들이 그렇게까지 죄를 짓고 싶다는 거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너희가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럼에도 내 뜻을 이루는 방식으로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하겠다.” 요컨대, 하나님은 자신의 놀라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유대인의 사악한 계략을 조종하셨다. 그의 백성에게 선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하나님 자신에게는 최대의 영광을 가져다줄 신성한 계획을 이루셨다.“그리고 십자가의 끔찍한 대가까지 치러야 했던 영광스러운 계획은 다름 아니라 죄인들로 가득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거야.” 스티브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나는 곧 고통과 죄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악으로 악을 물리치기“조니, 하나님은 네 고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지만, 네 고통은 단지 더 심각한 문제의 징후일 뿐이야. 하나님에게는 네가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 바로 네가 죄를 미워하고 그럼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네가 천로역정의 길을 걷는 동안 고통을 통해 죄의 쏘는 것이 무엇인지 많이 느끼도록 하시고 있어.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너는 네가 얼마나 끔찍한 죄로부터 구원받았는지를 계속해서 상기할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래서 사실상 악의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한 너의 고통과 마비는 도리어 무기가 되어서 다른 형태의 악을 물리칠 수 있어. 바로 쓴뿌리, 분노, 불안, 두려움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이 모든 과정이 다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기 위함이야.”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갈보리 언덕에서 미워하셨던 십자가 죽음을 허락하심으로 그가 사랑하시는 것, 곧 나의 구원과 그 구원을 통한 그의 영광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사실상 자기 목을 베었다. 세상 최악의 살인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그들을 위한 고통“조니, 이건 정말로 네 인생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져.” 스티브가 말했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싫어하는 일, 지금 경우에는 바로 네 척추에 생긴 사고지, 바로 그 일을 허락하셔.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니라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이 말씀을 이루시는 거야.”“하지만 그 일이 너에게서 끝나는 건 아니야.” 스티브가 말을 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셔야 했던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난 받는 법을 배워야 해. 이건 비밀이 아니야. 하나님은 네 고통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올 수 있도록, 네 고통을 하나의 불쏘시개로 쓰기를 원하셔.” 그러니까, 내 이야기가 요셉과 그의 사악한 형제들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요셉은 창세기 50장 20절에서 형제들에게 노골적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그렇다. 하나님은 내게 증오스럽고 끔찍한 전신 마비를 허락하셨지만 그의 사랑은 단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 할렐루야!오십 년이 지나고스티브와 대화를 나눈 그해 여름 이후 벌써 오십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현재 펜실베니아주 브릭레인 커뮤니티 교회(Brick Lane Community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나는 장애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단체 ‘조니와 친구들(Joni and Friends)’을 통해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요셉”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나의 기쁨에 의아해한다. 특히 요즘 들어 나는 만성 통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방식으로 그의 기쁨을 내게 나눠주고 있으며, 그 조건은 내게 어느 정도는 그의 소중한 아들, 예수처럼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다 괜찮다.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만 굳게 붙들면 그가 주시는 기쁨이 모든 고통보다도 더 낫다. 그렇기에 내가 증오하는 전신 마비로 인해서 나는 지금도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쁨도 내가 천국에서 누릴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7).하나님은 끔찍한 일을 허용하시지만, 도로시 세이어스(Dorothy Sayers)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나 웅장하고 영광스러운 역사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지구 행성에서 경험한 모든 고통은 그날의 영광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날 이 땅에서 흘리는 모든 눈물에 관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보상하실 것이며(시 56:8), 모든 상처에 대해서도 실로 풍성하게 보상하실 것이다(롬 8:18).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고통 속에 숨은 신비스런 당신의 모든 뜻을 그날 환히 밝혀 주실 것이다. 끔찍한 일이 생겼는가? 나는 당신에게도 이 문장을 전하고 싶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 싫어하는 일까지도 허락하신다.” 만약 당신도 언젠가 나처럼 고군분투하고 있다면, 선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서도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다면, 자, 나도 스티브처럼 말씀에 의지해서 모험을 하겠다. 하나님이 명령하셨기에 당신에게 고난이 닥쳤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하나님과 싸우는 대신 그를 신뢰한다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당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셨고, 아마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당신이 자신의 삶을 축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며, 구주께 최대의 영광을 돌리고, 그렇게 함으로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하늘의 재산을 통해 더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 아름다운 수수께끼를 푸는 것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다. 원제: Ten Words That Changed Everything About My Sufferi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고통의의미
합력하여선을이룸
인자하심
주관자
사지마비
십자가
하나님의뜻
만성통증
배우자가 꼭 가장 친한 친구일 필요는 없다
by Shane Morris
2021-10-06
요즘 들어 가장 이상적인 결혼을 만드는 조건으로 긴밀한 우정 관계가 자주 언급된다. 흔히 소셜 미디어에 배우자 사진을 게시하는 젊은 커플이 자주 하는 말이 이것이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했다.” 흔히들 배우자를 향한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들의 결혼이 성적 매력을 초월한 수준에서 이뤄졌다는 사실, 즉 동반자적 관계의 연속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싶어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결혼 서약을 하러 주례자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이미 잘 확립되어 있는, 주로 플라토닉한 관계에 또 하나의 단계를 추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태도에 대해 할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우정을 결혼까지 이끌어낸 사랑의 정점으로 취급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의미에 대해 우리 문화가 겪고 있는 혼란의 징후이며, 그런 현실을 보며 나는 여러 유형의 사랑을 구별한 C.S. 루이스(Lewis)가 지금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본다. 절친과 결혼하는 것이 좋을 때나는 진실한 친구로 교제를 시작했다가 결혼까지 골인한 많은 커플을 알고 있다. 그런 커플은 좋아하는 취미에서부터 종교까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상대를 매력적으로 생각했던 그들은 대화 중에 서로에게 끌렸고,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사랑이라는 다른 측면이 드러났다. 종종 매력은 다른 것보다 먼저 시작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성적 매력이 드러나게 되고, 사랑이라는 막강한 힘을 그냥 표면 아래에 방치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로맨스의 가능성을 차단할지, 아니면 받아들일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 후자를 선택하는 커플(특히 남성)은 종종 눈이 열리는 경험(sense of epiphany)을 한다고 말한다. “나는 워낙 오랜 기간 이 여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겨왔기에, 사실상 그녀가 적합한 배우자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어요.” 때때로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친구로 지내는 여자가 신체적인 면에서 평소 남자가 생각하는 “이상형(type)”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들이 남편을 향해서도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 다른 사람과 낭만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우정이 애초에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다. 미래의 아내인 조이 데이비드맨(Joy Davidman)을 향해 끌리는 진심을 깨닫고 인정하는 데 무려 몇 년이나 걸렸던 C.S. 루이스에게 로맨스적 관계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우정은 새롭고 아름다운 애정을 탄생시켰다.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하는 것은 조금도 나쁜 일이 아니다.사랑의 카테고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그러나 결혼으로 이끄는 사랑의 절정 내지 그 이상으로 우정을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깊은 우정에 근거하지 않은 결혼을 애초에 뭔가가 결핍된 상태라고 은근히 암시하는 것도 전혀 맞는 말이 아니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마치 결혼이 (성적 관계 및 가족의 혜택까지 포함된) 반드시 강렬한 우정의 결과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와 관련해서 사용하는 다양한 단어와 개념을 심각하게 혼동시킬 수 있다. 거기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다. 역사를 통틀어서 볼 때 대부분의 결혼은 우정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혼 중 상당수는 경제적, 사회적, 심지어 정치적 필요성에 근거했다.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은 틀림없이 두 사람 사이의 가장 중요한 결합이었을텐데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아닌 양가 아버지의 주선에 의해서 이뤄졌을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결혼에 관한 교훈적인 구절 그 어디에도 배우자와 더불어 우정을 키우라는 명령을 찾을 수 없다. 결혼과 관련해 성경에서 찾는 진리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뿐 아니라 창조와 구속의 중심에서 신성한 신비를 구현하는, 다스림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 관계가 드러내는 황홀한 비전이다. 창세기에서 시작되어 솔로몬의 노래에서 찬양을 받고, 복음서에서 확인되고 옹호되고, 바울에게서 거룩하게 되며, 그리고 마침내 계시록에서 성취되는 결혼에서 발견하는 것은 단지 같은 방을 쓰는 동반자적 관계 그 이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에로스적 관계인 결혼을 주로 우정의 한 유형으로 묘사하는 것은 결혼과 우정 모두를 다 값싸게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했다.”라는 말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배우자를 단지 친구 상태로 두는 것은 신부이자 조력자라는 정당하고 가장 높은 지위에 있어야 할 내 배우자를 강등시키는 것이다. 우정을 에로틱하게 여기지 말라우정을 결혼의 최고 기준(gold standard)으로 삼는 현대적 습관은 심각하면서 대중적인 또 다른 사랑 유형 간의 혼동과 유사하다. 우정이 에로틱해지는 반대 현상을 생각해 보자. 나는 최근 반지의 제왕이 동성애를 기저에 깔고 있다는, 피곤하고 불쾌한 주장을 반복하는 트위터를 보았다. 그 트위터는 이렇게 주장한다. “J. R. R. 톨킨(Tolkien)은 단지 두 종류의 인물들만 썼다. 아내를 사랑하는 빛나는 남자와 여우 구멍을 갈망하는 동성애자.” 그보다 훨씬 더 현명한 어느 트위터 사용자는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사랑(The Four Loves)’을 인용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우정을 실질적인 사랑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변장한 에로스나 에로스의 확장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사실은 이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제대로 된 친구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 책에서 루이스는 우정과 낭만적인 사랑, 또는 필리아와 에로스의 차이점에 대해 그리스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용을 이어간다. 같은 사람을 놓고 에로틱한 사랑과 우정을 함께 가질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 우정만큼이나 사랑과 거리가 먼 것도 없다. 연인들은 항상 사랑에 대해 서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친구는 거의 없다. 연인은 일반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게 흡수된다. 그러나 친구는 서로를 보는 게 아니라 나란히 한 곳을 바라보며, 공통 관심사에 몰두한다. 무엇보다 에로스(최소한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는 필연적으로 단지 두 사람 사이에만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정에 있어서 두 사람이라는 숫자는 필요 조건도 아닐 뿐더러 반드시 최상의 숫자도 아니다. 반성애(Demisexuality)와 진정한 에로스의 죽음또는 에로스를 “게이”, “레즈비언” 또는 “양성애자”와 유사한 성적 정체성 내지 지향으로 재정의함으로 단순한 동물적 육체로부터 에로스 자체를 구하려는 노력을 생각해보자. 뉴욕 주지사의 딸인 미카엘라 케네디 쿠오모(Michaela Kennedy-Cuomo, 23살)는 최근 스스로 자신을 ‘반성애자(demisexual)’라고 표현한 내용이 담긴 인터뷰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이 신조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가디언지(Guardian) 칼럼니스트는 반성애자를 “일단 강렬한 정서적 유대가 먼저 형성되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사람들”로 정의하다. 그 칼럼니스트는 소위 성적 성향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눈에 띄지 않는지, 그렇기에 쿠오모와 같이 이미 부유하고 특권층인 젊은 여자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굳이 이처럼 난해한 성적 정체성을 선언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칼럼니스트는 계속해서 누군가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있어서 감정과 관계가 수행하는 역할에 관해 굳이 선언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가 되려면 우리 문화가 얼마나 더 성적이고 음탕해져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나는 성에 관한 대화에 실제 에로스(actual eros)를 다시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낀 쿠오모야말로 지금 우리가 다양한 유형의 사랑을 어떻게 혼동하고 또 융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서 제시하고 싶다. 구원하는 사랑우리 문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의 의미를 모른다. 때때로 사랑과 생식기를 동의어로 취급할 정도다. 또 어떤 경우에는 모든 사랑, 심지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까지도 함께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 사이의 강렬한 우정 형태에 불과하다는 영지주의적 이상을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플레이보이(Playboy)와 홀마크(Hallmark, 카드 회사) 사이를 오가며 어떤 순간에는 동물적 욕망을, 그러다가 다음 순간에는 감상적인 사랑을 찬양한다. 여러 사랑이 다투는 현실 속에서 볼 때, 진짜지만 시큰둥한 우정은 “억압된 동성애” 정도로 중상모략을 당한다. 그리고 모든 사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인 아가페 사랑, 즉 그리스도로 하여금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도록 이끈 신성하고 영적인 사랑, 하나님께서 다른 사랑들을 소생시키고 성화시키려고 의도하신 그 사랑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스토르게, Storge), 에로스 사랑(Eros), 친구간의 사랑(Philia) 및 아가페 사랑(Agape)을 올바르게 구별하도록 함으로써 오늘날 문화가 각각의 사랑의 이해에 끼친 피해를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장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루이스가 이 네 가지 사랑에 대한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지식을 끌어낸 우물인 성경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불어 루이스는 이 네 가지 사랑을 완벽하면서도 뚜렷하게 구분해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연인인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마음을 고정할 수 있도록 돕는다. 원제: Your Spouse Doesn’t Have to Be Your Best Frie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가정
결혼
친구와의결혼
성경적인결혼
왜곡된결혼
네가지사랑
진짜사랑은예수님
C.S.루이스
영혼의 감독자가 제대로 보고 행동해야하는 이유
by Joe Rigney
2021-10-05
목사, 장로, 감독(overseer).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의 직책을 표현하는 세 가지 용어이다. 현대 기독교인이 교회 지도자를 언급할 때, 첫 번째 단어인 목사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두 번째로 장로를 쓰지만, 세 번째 감독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직책과 업무를 이해하는 데 이 세 가지 용어는 모두가 도움을 준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선한 일을 사모하는 감독의 직분은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는 첫 번째 편지의 끝부분에서 한 가지 대답을 준다. 그곳에서 그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벧전 5:2)라고 명령한다. 따라서 교회의 장로는 하나님의 양 떼를 감독하며 목양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목양의 맥락에서 감독의 의미를 풀 때 모든 장로를 부르신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보는 것, 거기에 더한 책임그럼 목양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실제 목자와 양의 사례를 든다. 목자는 양을 돌본다. 목자는 양 떼를 이끌고 또 양 떼를 먹인다. 목자는 양 떼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곰과 이리와 우는 사자로부터 지키고 보호한다. 그들은 양의 건강과 안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병들 것 같은 양을 위해서는 먹이를 살피고, 진짜로 병에 걸리면 약으로 치료한다.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해낸다. 공격하는 사자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양 떼를 지킨다. 베드로가 추가한 “감독을 행사하는 것(한글 성경에서는 ‘양무리를 친다’로 번역)”을 고려하면 의미는 더 명확해진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냥 보는 것(sight)과 감독(oversight)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감독에는 당연히 보는 것이 포함된다. 명확하게 보고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감독할 수 없다. 그러나 감독은 단지 보는 것 이상이다. 감독은 거기에 책임까지 더한 것이다. 감독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즉시 조치할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그냥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제대로 보고 “조치해야 한다.”보는 것에 실패장로가 실패할 수 있는 영역을 생각할 때 그들의 사역을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감독이 보는 것과 그에 따라 행동하는 책임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에서 목회자가 실패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을 본다. 첫 번째, 제대로 보지 못해서 실패하는 경우다. 그들은 언제 무리에게 질병이 퍼졌는지 알지 못했다. 늑대 무리가 언덕 위로 기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고, 양가죽을 입은 늑대에게 속았으며, 진짜 양을 늑대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물이 오염된 사실을 보지 못했다. 보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은 실패한 목양을 의미한다.교회 상황으로 보면 장로가 그들의 양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지는 거짓 가르침을 보지 못할 수 있다. 특히나 기만적인 가르침이 남성 사역, 여성 사역, 아동 청소년 사역, 상담 사역과 같은 하위 그룹을 통해 전체 커뮤니티로 퍼져갈 수 있다. 또한 장로가 교인들 사이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는 파괴적인 행동 패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험담과 중상모략, 믿음 없는 의심, 독선적인 리더십이나 수동적인 리더십 또는 헌신자를 비난하거나 헌신자를 이용하는 것 등 잘못된 믿음과 파괴적인 행동 패턴이 교인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것을 제때 보지 못한다면 장로는 감독하지 않은 것이다. 행동하는 데 실패두 번째, 장로가 알면서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 퍼지고 있는 질병을 보지만 제대로 약을 바르지 않는다. 늑대를 보지만 도리어 두려움에 움츠린다. 오염된 물을 보고도 양 떼를 다른 목초지로 옮기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보살피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교회 상황으로 보면 장로가 거짓 가르침을 진리로 무장하여 대적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그들은 참을성 있게 오류를 수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참으면서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또는 그와 반대로, 그런 오류가 특정 사람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대응하여 신학적 갈등만 더 확대할 수도 있다. 그들은 사소한 문제를 너무 자주 일으킬 수도 있고(또는 진짜 중요한 문제를 사소하게 처리할 수도 있고), 조바심이나 게으름으로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다.파괴적인 행동 패턴에 직면했을 때 장로가 냉정하고 명료한 판단과 진실한 사랑으로 무장하지 못해서 제대로 말을 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그들은 교인이 “교회를 떠남으로 의사를 표시(vote with their feet)”하고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이 두려워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다루는 것을 회피할 수도 있다. 전혀 평화롭지 않은데도 “평화, 평화”라고 포장하고 싶은 충동에 굴복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만날 때 장로는 분명한 위험을 알기에 그들 앞에 놓인 문제를 현명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용기가 부족할 수도 있다. 결국 그들은 감독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치명적인 유혹아주 교묘하고 치명적인 유혹에 빠져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목회자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목회자는 분명히 보고 있고, 눈에 보이는 현상과 관련해 용기와 연민으로 행동할 준비까지도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양 떼의 특정한 필요, 염려, 문제, 위험, 유혹 등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눈은 위험을 멀리 그리고 넓게는 볼 수 있지만, 정작 가까이에 있는 구체적인 위험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베드로의 부름은 구체적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양 떼를 치는 것”이 아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치라”는 것이다. 목회자는 자기 교인을 돌보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남의 교인이 아니다. 다른 목자의 양이 아니다. 목회자는 자신이 맡은 자들을 감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인스턴트 뉴스와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는 이런 사실의 중요성을 놓치기 아주 쉽다. 목회자가 저쪽에 있는, 도시 반대쪽이나 나라 반대편에 있는 양 떼의 건강을 놓고 걱정하기는 쉽다. 그러나 정작 자기 양 떼가 처한 위험은 무시하고 저 멀리 다른 양 떼의 위험을 지적하는 것이 사랑이 많은 목자, 더 목자다운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정작 자기 교회에는 홍수가 났는데 다른 동네나 다른 교단에 있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모습, 온라인에서 차고 넘치는 화재를 진압하겠다며 양손에 소화기를 들고 뛰어다니는 목자가 되기 쉽다. 그러나 지혜롭고 신실한 목자는 그들 가운데 있는 양 떼의 필요와 염려, 그들이 처한 문제와 위험 그리고 유혹과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인다. 더 많은 눈과 더 많은 손보지 못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위험에 직면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 큰 도움을 주셨다. 첫 번째는 다수의 장로이다.지역 교회 장로에 관한 신약의 모든 언급에서처럼 베드로는 장로를 복수로 말한다. 장로가 여러 명일 때 더 많이 보고 더 잘할 수 있다. 한 명의 양치기가 360도 시야를 확보할 수는 없다. 한 명의 양치기는 거시적 위협과 미시적 위험에 주의를 기울일 수는 없지만, 양치기 팀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떤 목자는 수평선을 동쪽으로 훑어볼 수 있고 또 다른 목자는 지평선을 서쪽으로 훑어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멀리 떨어진 위협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늑대 무리가 계곡에 정착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목초지의 상태와 개별 양의 건강 문제가 소홀히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장로가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가 되어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함께 치면 혼자 보고 행동할 때보다 더 많이 보고 더 큰 지혜와 명철로 행동할 수 있다.감독자를 위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두 번째 도움은 기도이다. 감독을 행사하라는 부름과 잠재적인 두 가지 실패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좋은 방법을 제공한다. 하나는 목회자가 교회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을 분명히 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즉 그들이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현실에 주목해서 자신이 담당한 교인들의 필요와 위험 그리고 그들의 상황과 유혹까지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전국의 많은 교회에서 화재가 발생했지만, 우리 교회는 홍수가 났다면 우리가 원하는 목사는 소방관과 소방 호스가 아니라 모래주머니와 구명 뗏목을 들고 오는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목회자가 양 떼 속에서 봐야 할 것을 분명히 보았으므로,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와 행동할 용기와 동정심을 갖고 말씀을 통해서 양들에게 최선의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보아야 할 것을 본 목회자는 이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무엇을 행동해야 하는가? 누가 그것을 말해야 하는가? 언제, 얼마나 자주 말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목회자로서 감독을 잘 하려면 마음과 배짱(nerve), 용기와 연민, 복수의 동역자(plurality)와 책임 그리고 가르침과 기도가 필요하다.원제: Overseers of Souls: Why Elders Must See and Ac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교회
교회사역
감독자
목양
목회사역
장로
목자
목회자
동역자
양치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기
by David Boxerman
2021-10-04
내가 만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 개인적인 결정을 내릴 때, 특히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중요한 결정일 경우(“하나님이 예비하신 결혼 상대가 이 사람이 맞습니까?” 혹은 “이 일자리가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이 명확한 답을 주시길 우리는 바란다. 그렇게 바라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게 아니다. 특히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잡고 책상에 앉아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원한다. 편안한 자세로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다 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정확히 말씀해 주시기를 원한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굳이 내가 나서서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기 전에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알아서 그 일을 이끌어 가기 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개인적인 결정을 내릴 때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그 인도하시는 방향을 바로 알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우리는 성경이 계시한 것 외에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려 하는 가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도움을 주실 때 어떻게 하시는지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내가 찾아낸 사실은 개인적인 의사 결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주신 원칙을 따르는 바로 그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서 꼭 필요한 구체적인 결정을 내릴 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도움을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방법이다. 가장 기본이 되고 꼭 필요한 처음 두 개를 제외하고는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다음에 설명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가야 할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1. 성경: 드러난 하나님의 뜻 그리고 “신앙과 삶의 유일한 원칙”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결정의 지침과 조언을 구하는 데 있어서 분명하고 오류가 없는 유일한 원천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 119:105-6).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어기는 결정이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2. 기도: 믿음에 기반을 둘 때 하나님은 들으신다그분은 사랑 많으신 아버지이시며 의사 결정 과정에서 언제나 도와주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3. 당신을 잘 아는 거룩하고 성숙하며 성경적으로 지식이 많은 기독교인이 주는 조언우리가 내린 결정에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 우리가 고려하지 않은 잠재적인 위험, 도전 또는 기타 요인(사각지대)을 경고할 수 있는 사람과 의논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3:10).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잠 20:18). 이러한 일반 원칙을 자주 위반하는 것 중 하나는 덜 성숙한 사람이나 비기독교인 친구에게 상담을 받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잠 12:5)라는 말씀에 근거할 때 상담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성경에 정통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4. 준비, 확인, 창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오류가 전혀 없는 상황 해석이란 게 있을 수는 없겠지만, 약간의 오류를 인정하더라도 그 상황 또는 환경은 주님의 지시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시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정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계 3:7). 아직 오지 않은 기회조차도 주님의 주권 아래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타이밍이나 기회의 방향을 하나님이 언제라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할 요소이다. 5. 이미 주신 하나님의 빛 속에서 순종함으로 걷는 것“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요일 1:7). 우리는 빛 가운데서 걸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선명하게 밝히신 부분조차 인정하지 않고 그분을 무시하는 가운데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우리의 그런 요청을 하나님이 들어주실 이유가 없다.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7-8).6. 관심사, 은사, 소망 및 재능하나님은 우리의 소망, 은사, 재능을 통해 그분의 뜻으로 인도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과 능숙하게 하는 일을 결합하여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롬 12:6).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4-5).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잠 10:24).7.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이 결정이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인가? 아니면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짐으로 나만 위한다면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요소까지 고려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빌 2:4).8. 내적 평안의 여부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남용되는 기준일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뜻이라고 느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찾기보다는 합리화나 죄의 변명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 감정은 결코 최종 결정자가 아니다. 감정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어떤 일과 관련해서 평안을 말하려면 다음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요약하면, 하나님의 인도 방법은 섭리 가운데 원칙을 따르게 하시고 더 나은 것을 찾게 하시는 과정을 통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도움을 구하고, 성경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생각하고, 대안을 비교하고, 조언을 저울질하고, 마음의 소망을 고려하고, 스스로 능력을 평가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하신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그분이 더 놀랍게 역사하실 일이 무엇인지, 어떤 방법으로 역사 하실지를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역사를 받기에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항상 겸손한 자세를 유지한다면 놀라운 지혜는 언제라도 주어질 것이다. 주의와 위로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이 “처방”과 더불어 경고 라벨이 붙어야 한다. 프로세스의 한 측면을 강조하다가 자칫 다른 측면을 간과하게 될 때 어려움은 불가피하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과정에서 잘못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단일 소스” 솔루션은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감정’이다. 특히 이 두 가지 중 하나에 집중하여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할 때 ‘나쁜 결정에는 결과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죄는 언제나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라는 내용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개인적인 결정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여전히 정확하지 않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의 일과 욕심을 살피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은 거짓된 것이라고 말한다(렘 17:9). 우리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해야 하지만, 누군가의 조언은 또 다른 사람의 조언과 얼마든지 상충할 수 있다(잠 18:17). 우리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하지만, 상황 판단만으로는 결코 오류 없는 지침을 내릴 수 없다(창 3:6).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만, 그분의 응답은 직접적인 계시나 환상의 형태로 오지 않는다(히 1:1-2).문제가 생길 때면 언제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차선책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최선책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모든 결정, 심지어 잘못 내린 결정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그의 모든 거룩한 뜻과 궁극적인 목적을 항상 성취하신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편 57:2).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어떤 결정을 내릴 때 평화와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궁극적인 선과 그의 최종 영광을 위해 모든 결정 과정에서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에 개입하시고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분을 찾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선하고 옳은 일을 하려는 올바른 동기로 내린 결정이라면 대부분 상황을 더 쉽게 만든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결정을 통해서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일을 망치고 엉망이 되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실수까지도 선용하신다. 여전히 우리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신다. 불안과 두려움이 휘몰아치는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평화와 위안은 오직 하나, 그분이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원제: God’s Will and Personal Decision Making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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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책
성경
찬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by Shai Linne
2021-10-03
20여 년 전 내가 기독교로 회심했을 때 어머니 교회에서 보낸 첫 주일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교회 예배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상상한 적이 거의 없었다. 자라면서 나는 가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 건물에 발을 디뎠다. 어머니와 내가 알고 지내는 몇몇 기독교인들은 여러 해에 걸쳐 나를 교회에 초대했다. 내게도 구원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라는 그들의 생각을 속으로 비웃으면서 나는 항상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몇 주 전에 나는 요한복음을 읽은 후 내 삶을 그리스도께 바쳤다. 갑자기 나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나는 교회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게 강력하게 자신을 계시하신 나의 보배로운 주 예수님을 환호하는 데 나만큼 열심인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자리로 걸어가는데 이름 모를 성도들이 수차례 멈춰 서서 따뜻한 포옹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나를 위해 기도해 왔다고 말했다. 반주가 시작되자 모두 일어서서 한참 동안 ‘찬양과 경배’에 전념했다. 노래하고, 박수치고, 춤추고, 외치는 소리가 가득했다. 회중 전체가 동참하는 경배 찬양은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며 매우 중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모든 찬양이 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멜로디가 익숙해지자마자 바로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한 곡은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사랑의 기쁨과 단순함을 잘 포착하고 있었다.주의 이름 높이며주를 찬양하나이다나를 구하러 오신주를 기뻐하나이다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위에십자가를 지시고 죄 사했네무덤에서 일어나 하늘로 올리셨네주의 이름 높이리주님을 영접한 초기에 나는 위의 찬양 가사처럼 교회에서의 찬양을 주로 나의 구원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때는 찬양이 성도의 성화를 위한 은혜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잘 몰랐다.성화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우리 대부분은 성경 말씀, 믿음, 성령, 시련, 시험, 고난, 기도와 같은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 모든 단어들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더 닮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신자 개개인과 회중 모두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잘 자라도록 돕는 데 찬양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나타난 새 언약의 더 큰 영광을 대조한다. 그는 18절에서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되어가는지에 대해 강력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다음 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도들이 발견한 성경의 진리를 공개적으로 진술하는데, 그 말씀을 통해 이 영광스러운 성화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부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것을 설교나 성경 연구 또는 개인의 헌신과 연관시킨다. 그러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엡 5:19)로 우리가 함께 찬양할 때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렇다, 찬양은 정말 사람을 변화시킨다!우리는 고난, 어려움, 의심 또는 낙담을 다루는 시편 기자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뢰와 희망의 표현으로 결론을 내리는 수많은 시편에서 이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특히 시편 3, 22, 31:9–24, 38, 73 참조). 시편 기자가 경험한 것은 단순히 더 좋아진 기분이 아니라 영적으로 심오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깊어지는 사랑과 같이 성령님만이 주실 수 있는 특별한 은혜다. 시편은 원래 하나님 백성의 찬송가였다. 교회는 이 시편들을 시대에 걸쳐 메아리쳐 왔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은 원저자들이 처음 시를 썼을 때 경험했던 것과 같은 영적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이것은 우리가 성경과 복음으로 충만한 노래를 부를 때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든 노래로 불리든 영광이 그분께 돌려진다. 복음은 묵묵히 읽든지 선율로 읽히든지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기독교인들이 기쁘게 모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 스스로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순복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사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합된 자들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경험은 거의 없다.회중이 함께 모여 성경 말씀에 근거한 복음 중심의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강화되고 있는가? 또 복음에 대한 감사가 깊어지고 죄의 유혹이 약해지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고조되었는가?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 말씀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자기 백성에게 좋은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베푸시는 친절이다.나는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교회 예배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한다. 히브리서 6장은 우리가 “내세의 권세”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암시한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결케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우리가 교회에서 말다툼을 하거나 예배 중 키보드의 시끄러운 소리나 예배 후의 점심 식사 계획으로 주의가 산만해지면 그것을 쉽게 놓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우리가 모임에 참여하면, 죄인들이 모든 얼룩진 죄과를 벗게 된다는 찬양을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방황하거나 사랑하는 하나님을 떠나기 쉽다는 것을 노래로 다시 고백할 때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게 될 수 있다. 우리는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고 자비롭고 전능하신 삼위의 하나님, 복되신 삼위일체’를 말로 표현할 때 경외심에 압도될 수 있다. 우리가 월요일을 맞으며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주일을 통해 그분이 승리하심으로 죄의 저주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우리 교회의 전통 중 하나는 모임이 끝날 때 서로에게 축복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하나님의 사랑과성령의 교통하심이지금 그리고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기를지금 그리고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기를우리는 찬양을 드리며 형제자매들을 둘러보고 음악에 맞춘 성경 말씀으로 서로 격려한다. 그리고 매주 나의 이야기는 똑같다. 내가 교회에 와서 느낀 것이 무엇이든, 지난주에 얼마나 힘들었든지 간에, 우리가 거룩한 세레나데에 참여하면서 성도들과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에 무언가 일어난다. 항상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찬양을 드리고 나면 내가 예배를 드리러 교회 안으로 처음 들어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항상 지구를 뒤흔드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거기엔 뭔가 다른 초월적인 것이 있다.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찬양은 진정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원제: Yes, Singing Really Does Change People출처: www.9marks.org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찬양
변화
주의이름높이며
회중
시편
성화
십자가
삼위일체
놀라운 한 사람
예수 안에 있는 ‘훌륭한 결합’
by David Mathis
2021-10-02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책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고작 한 단락이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아니, 단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한다. “문단은 책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책 전체에 걸친 문맥 때문에 종종 독특한 힘까지 얻는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것이다. 한 문장이나 단락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 또는 단락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사실, 우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특정 구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게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한 구절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실로 엄청난 내용이다.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쓰고 존 파이퍼가 책으로 인쇄한 이 한 구절, “다양한 탁월함의 감탄할 만한 결합”은 이미 인생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자 같은 어린 양대학 2학년 때(게다가 몇몇 선배들의 도움으로), 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주권에 대해 나름 눈을 떴지만, 그것이 어떻게 예수님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순진할 정도로 무지했다. 그러던 중 파이퍼가 출간한 예수님이 복음입니다(Seeing and Savoring Jesus Christ)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빨리 읽어서 별로 얻은 게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각 장을 경건한 마음으로 읽었을 때(서론과 더불어 13장, 그래서 하루에 한 장씩 총 2주 동안 읽기), 그것은 내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사랑과 초점을 일깨워주었다.이 책에서 가장 변혁적인 부분은 3장이었다. 에드워드가 쓴, 내 마음에 날아와서 강력하게 꽂힌 구절과 함께 이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자는 사나운 힘과 군주의 풍모를 지님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어린 양은 온유하고 마치 종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옷에 양털을 제공함으로 감탄하게 한다. 그러나 더욱 존경할 만한 것은 사자 같은 어린 양과 어린 양 같은 사자이다. 250여 년 전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관찰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은 “다양한 탁월함의 감탄할 만한 결합”이다. 그와 같은 이는 없다 삶을 변화시키는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 5장 5-6절의 깃발 아래 선포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라는 설교에서 처음 나타났다. 에드워즈는 말한다.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다양한 탁월함이 훌륭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사자와 어린양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생물이지만 각각 고유한 탁월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자는 힘과 용맹, 그리고 용모와 포효하는 음성에서 탁월하며 온유함과 오래 참음에서 뛰어난 어린 양은 그 성품에 따라 음식으로 먹거나 옷을 만들기에 합당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데에도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런 두 가지 특징 모두가 다 그리스도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의 다양한 탁월함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놀랍게도 하나가 되어 만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어떤 사람이나 천사,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나 성령조차도 한 사람 안에서 연합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한 인격 속에서 하나로 만드셨다는 생각과 현실에 사로잡혔다. 바로 사자 같은 힘과 어린 양 같은 부드러움 말이다.그 당시에 내가 비로소 보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이 단지 인간이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는 수단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나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그 분 자체로 위대한 목적이다. 그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완전하고 가장 깊은 계시이다. 그를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가 당신의 아들을 지극히 값진 큰 보화와 가장 값진 진주로 보고 맛보기를 원하신다. 신선하고 거룩한 불만에드워즈의 잘 만들어진 구절과 파이퍼의 짧은 책은 나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세부 사항을 평생 동안 찾아 헤매도록 유혹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대중의 모호함에 대한 신선하고 거룩한 불만을 내 속에서 불러일으켰다.몇 년 전, 한 기독교 출판사의 노련한 편집인으로부터 오늘날 예수님에 관한 책은 일반적으로 잘 팔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과 생활 응용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극적으로, 그들은 온 우주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놀랍고 심오한 주제,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그 문제와 관련해서 지식이 거의 없거나 또는 모호한 수준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예수는 더 인기 있는 다른 주제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정거장이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예수님께만 집중했다. 이 특별한 설교의 경우 15,000단어(약 2시간) 내내 그는 온전히 예수님께만 머물렀다.한 사람 속에 있는 일곱 가지 다양함설교의 첫 부분에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가 소유한 탁월함의 다양성, 즉 하나님으로서 그의 무한한 높임과 인간으로서 그의 무한한 겸손, 그의 무한한 정의와 무한한 은혜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 다음 2부에서 그는 이러한 탁월함의 결합, 특히 “한 사람 안에서는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다음은 에드워즈가 그리스도 안에서 강조한 일곱 가지 “훌륭한 결합”의 내용이다. 1. 무한한 영광과 가장 낮은 겸손2. 무한한 위엄과 초월적인 온유함3.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와 하나님과 동등됨4. 무한한 선의 가치와 악이 초래한 고난 아래에서 견디는 가장 큰 인내5. 하늘과 땅을 가장 잘 다스리는 순종의 영6. 절대주권과 완전한 포기7. 자족하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존잔치에 나온 음식 중 한 가지를 맛보는 의미로 에드워즈가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한 말을 생각해보다. 겸손은 오직 신성한 본성으로만 존재하는 성부 하나님과 성령님 안에서는 찾을 수 없다. 겸손은 창조된 본성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고유한 탁월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으로 낮고 작다는 의미, 또는 하나님과 이 미덕의 주체 사이의 큰 거리라는 의미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그러한 겸손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자신의 존귀함이나 신성을 조금도 잃지 않고(마치 그런 일이 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인성과 자신을 낮추는 능력을 얻으셨다(빌 2:8).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 위에” 계시며 “겸손에 있어서는 만유 중에 가장 낮은” 분이시다. 에드워즈는 계속해서 말한다. 겸손의 미덕과 관련해서 예수님만큼 인간이나 천사들 사이에서 위대한 사례를 보인 이는 없었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만큼 하나님과 그분 사이의 거리에 대해 그토록 명확한 분별력을 가진 이는 일찍이 없었으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만큼 겸손한 마음을 가진 이도 없었다.정확하고 광범위한 영광 성부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그의 아들 예수를 일반적인 개념에 그치지 않고,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의 특정한 윤곽을 통해 소중히 여기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아들을 단순한 일반화 또는 묘사가 불가능한 진술이 아니라, 정확하고 세밀하며 광범위한 영광으로 알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예수님에 관한 모든 세부 사항과 영광스런 광채로 빛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영원토록 더 알아가도록 만드셨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단순한 일반화와 설명 없는 진술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자세히 알지 않는 한, 우리는 그를 아예 잘못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참된 예수님을 결코 깊고 열렬하게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다양한 탁월함의 감탄할 만한 결합"에 대한 마지막 진리로 인도한다. 예수님은 단지 죄의 문제에 대한 정답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탁월함으로 인간 영혼의 복잡한 갈망까지 만족시키는 분이다. 복잡한 영혼에 만족을 주는 예수님바울은 에베소서 3장 16-19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지식에 뛰어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이 사람, 바로 예수님 안에 있다. 완전한 인간성과 신성의 충만함이 있다. 우리는 그의 위대함과 탁월함, 그리고 전지전능함에 경탄하고, 그의 은혜와 자비와 온유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놀라운 한 사람 안에서 결합된, 조만간 만나서 보게 될 이 신인(God-man) 안에서 경탄한다. 그분이 주시는 모든 충만 속에서 녹는다. 천국에서 우리는 영원히 방해받지 않고 그분을 더 온전히 알고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파이퍼의 책에서 한 구절을 더 인용하고 20년 전에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그 역사를 당신에게도 베푸시길 기도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양한 탁월함의 이 영광스러운 결합은 우리가 느끼는 개인적인 피로와 위대함을 향한 갈망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 이 사자가 가진 어린 양과 같은 부드러움과 겸손은 피곤한 우리에게 오라고 손짓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 그러나 이러한 온유함의 특성만으로는 영광스럽지 않을 것이다. 어린 양 같은 사자의 온유함과 겸손은 사자 같은 어린 양의 무한하고 영원한 권세와 함께 할 때에만 빛날 수 있다. 이런 결합이 가능할 때에만 위대함을 향한 우리의 갈망을 채울 수 있다. …언젠가 죽는 인간은 그렇다고 단순하지만도 않다. 인간은 불쌍하지만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약하지만 기적을 꿈꾼다. 인간의 생명은 일시적이지만 우리 마음에는 영원이 기록되어 있다. 다양한 탁월함으로 결합된 그리스도의 영광은 다름 아닌 이런 인간의 복잡성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원제: One Spectacular Person: The ‘Admirable Conjunction’ in Jesus Christ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복음
예수그리스도
그리스도의영광
조나단에드워드
갈망
존파이퍼
내영혼의기쁨
어린양
겸손
온유함
성경으로 기도하기
by 최창국
2021-10-01
말씀기도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성경중심의 신앙생활, 성도들의 헌신, 영감 있는 설교, 기도로 충만한 신앙의 결과였다. 그만큼 말씀과 기도의 능력은 강력하다. 말씀의 은혜는 사람의 심령을 사로잡고 창조적으로 변화시킬 만큼 풍성하고 강력하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말씀중심의 설교는 강조해 왔지만, 말씀중심의 기도는 덜 강조해온 경향이 있다. 한국교회는 성경 말씀과 성경의 기도문을 통해 기도하는 훈련을 보다 더 충실하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자신의 감정과 환경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의존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인간의 기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까마득히 앞선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는 것이 기도생활에 필수적이다(Eugene Peterson, Working the Angles: The Shape of Pastoral Integrity, 48). 기도는 성경에 깊이 침잠하는 데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고,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고, 묵상하며, 기도해야 한다. 성경은 기도의 언어로 가득하다. 특히 구약의 시편은 ‘예수님의 기도’라고 부를 만큼 기도로 넘친다. 신약의 바울 서신서들 중에 디도서 외에 다른 모든 서신서들에는 적어도 한 편 이상의 기도문이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되기를, 고린도 교회는 더 성숙하게 행동하기를 간구했다. 그리고 성도들이 악과 맞서 싸우는 법을 배울 때 힘을 주시고 순종하며 연합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 빌립보 교회를 위해 간구하면서는 자신의 소망을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는 말로 압축해서 표현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도 믿는 그대로 하나님께 간구했다. 바울은 종종 편지를 읽게 될 독자들의 성장의 기운을 엿보고 감사하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곤 했다. 바울은 신앙이 성장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기준을 기도생활을 표준으로 삼았으리만큼 기도를 중요하게 강조했다. 바울의 서신서의 기도들은 자신보다 수신인들을 더 염려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이런 기도들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화할 때 자기중심적인 요청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바울의 기도문들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목적과 방향성에 매우 중요한 지침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붙들고 기도할 때보다 더 기도의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도의 가장 중요한 젖줄은 성경이었다. 성경을 통해 기도의 언어를 발견하고 성경을 붙들고 기도했다.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성경과 기도를 분리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 기대하며, 성경에 있는 기도와 찬양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다. 성경 또한 우리에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라고 권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동시에 우리에게 기도의 언어를 제공해 준다. 우리의 기도의 언어가 빈약할 때 성경을 통해 기도의 언어와 지혜를 얻어 기도할 때 천상의 기도를 할 수 있다. 말씀기도로써 렉시오 디비나기독교 전통에서 성경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nia)였다. 렉시오 디비나는 문자적 의미는 ‘성독’, 즉 성스러운 독서, 성경 독서, 성령에 의한 독서이다. 하지만 렉시오 디비나의 실천적 목적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는 데 있다. 즉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데 그 실천적 목적이 있다. 렉시오 디비나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 두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영적인 렉시오 디비나의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학구적인(scholastic) 렉시오 디비나의 방법이다. 전자는 영성 형성과 성숙을 위한 것으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반복하며 말씀과 더불어 살면서 기도하는 방법이다. 후자는 스콜라 철학의 등장과 함께 이성과 상상을 강조하게 되는 성향이 나타나면서, 렉시오 디비나의 방법이나 절차도 복잡해지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렉시오 디비나는 세밀한 독서(lectio), 심사숙고(cogitation), 공부(stadium),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안식(contemplatio) 등 6단계까지 발달하게 되었다. 학구적인 렉시오 디비나의 복잡한 단계를 귀고 II(Guigo II)는 심사숙고와 공부를 묵상으로 통합시키고, 세밀하게 읽기, 묵상, 기도, 안식의 4단계로 단순화시켰다.렉시오 디비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머리가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읽고, 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고, 또 그분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깊게 하고, 우리의 존재의 변화를 추구하는 독서방식이다. 이 독서 방식은 우리의 눈과 생각만을 가지고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으로 성경말씀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하여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고자(encounter) 하는 목적을 가진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르는 독서와 기도의 전 과정을 ‘렉시오 디비나’라고 부른다. 단, 렉시오 디비나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벧후 1:20)라는 말씀처럼 말씀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또한 렉시오 디비나 실천에서 말씀을 통해 주시는 성령의 음성과 자신의 주관적인 내면의 음성을 혼동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즉,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렉시오 디비나의 단계렉시오 디비나는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해석하고 인도하도록 성경 앞에 열린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히 4:12)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렉시오 디비나는 다음과 같은 단계로 실천될 수 있다. 첫째, 준비단계이다. 우선,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 렉시오 디비나를 할 때 가장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시작하기 전, 성경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신 사랑의 편지임을 상기한다. 성경 말씀을 펼치기 전 “도우소서 성령님!” 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청한다. 성경의 저자에게 영감을 준 성령, 그 성령 안에 계시므로 성령께서 우리의 스승이 되신다.둘째, 말씀읽기이다. 손으로 성경책을 들고 읽을 곳을 편다. 눈으로는 성경말씀을 보면서 입으로는 그 말씀을 작은 소리로 천천히 읽는다. 귀로는 그 말씀을 듣는다. 여기서 읽는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열어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우리를 말씀 앞에 드리는 것이다. 말씀을 읽다가 한 줄의 글이나 단어가 마음에 부딪혀 와 관심을 사로잡으면, 거기에 멈춰 서 그 말씀에 머문다. 그리고 그 말씀을 주의 깊게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다.셋째, 말씀묵상이다. 마음에 와 닿는 그 구절에 밑줄을 그어 표시한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천천히 반복 암송한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단어나 구절을 반복하는 것이다. 되새김질한다. 주어진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말씀이 우리 내면 깊이 뿌리를 내려서 말씀과 내가 하나가 되게 한다. 그 말씀이 왜 나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그 말씀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우리의 마음과 이성과 감성, 즉 우리의 전 인격을 동원하여 묵상한다. 여기서 묵상은 말씀에 대한 지적인 연구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넷째, 말씀기도이다. 주어진 말씀과 그 말씀의 의미를 통해서 하나님이 오늘 나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발견한다. 이 단계는 말씀이 나의 전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나를 더욱 말씀 앞에 열어 놓는 단계이며, 주신 말씀에 대하여 나의 생각, 뜻, 결심, 느낌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응답하는 단계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말한다.다섯째, 말씀안식 단계이다. 말씀안식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 머무르는 단계이다. 성령이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해 주시고, 인도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의 품 안에 깊은 사랑과 평화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여섯째, 마침단계이다. 끝마칠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로 마무리한다.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고요히 감사기도와 주님의 기도를 드린다. 일어나기 전에 마음에 와 닿았던 성경구절들 중 하나를 택하여 기억하거나 쪽지를 간직한다. 일어나면서 그 구절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선택한 성경구절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반추한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과 함께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추구하며(독서),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깨달으며(묵상),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청하며(기도), 행복한 삶의 감미로움을 맛볼 때(안식) 우리의 기도는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영성
말씀기도
렉시오디비나
기도의젖줄
성경해석
말씀읽기
유진피터슨
시편
코로나로 힘든 와중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은 이유
by Derek Buikema
2021-09-30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다음 날인 11월 4일 수요일, 내 이메일 편지함은 교인들이 보낸 이메일로 가득 찼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나는 우리 교인들이 보낸 이메일 내용에서 목사로서 내가 실패하고 있다는 목소리를 들었다.당신도 어쩌면 내가 받은 것과 같은 비난을 들었을 수도 있다. ‘목사님은 마스크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너무 조심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대면 예배에 충분히 신중을 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정의와 인간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합니다.’ ‘목사님은 정치적으로 너무 진보적입니다.’ ‘목사님은 너무 보수적입니다.’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회중을 인도하는 사역을 어느 목사라고 잘 할 수 있겠는가? 인종차별주의 논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인종차별에 빠진 국가에서 인종 간의 긴장을 헤쳐 나가고,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이해하고, 기독교인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누가 분명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성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에 기독교적 견해와 상충되는 방향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서구 세속 문화 속에서 기독교적 관점을 누가 충분히 잘 선포할 수 있겠는가?나는 아니다.팬데믹이 진행되면서 나는 내가 무능력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메시지를 정기적으로 받았다. 나의 무능력에 대한 현주소를 알려주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같은 달에 나의 설교 교수이자 사역의 모범을 보여주신 나의 평생 멘토이셨던 할아버지가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떠나 가셨다. 나는 할아버지 장례 설교를 했는데 거기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지 모르고 있던 친척으로부터 전염되었다. 몇 달 후, 아내는 임신했고 우리는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임신 8주가 되던 때에 태아의 심장 박동이 멈추었고, 우리는 그 태아를 땅에 묻었다.전염병 관련 문제가 발생하고 개인적 손실이 누적되면서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신적, 육체적, 영적 피로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이곳에서 계속 목회를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원하기나 할지 궁금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실패뿐인 것 같았다.나는 다른 주에 있는 교회로부터 더 많은 휴식과 더 적은 사역을 약속하는 청빙을 받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만료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나는 그냥 남기로 했다.내가 머물기로 결정한 다음 주일은 부활절이었다. 우리는 야외에서 마스크 없이 해맞이 예배를 드렸다. 1년여 만에 처음으로, 설교하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아내는 “우리가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여기에 남기로 해서 너무 좋다”고 말했다.평범한 영광지난 주에 나는 집 건너편 산림 보호 구역에 달리기를 하러 갔다. 날씨가 습해서 빨리 지쳤다. 다리 쪽으로 조금 달려가다가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며 천천히 걸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대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에너지를 모을 때까지 뒷마당에 누워 있었다.다음날 나는 아이들을 같은 다리로 데려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나는 아이들이 엄마를 위해 야생화와 잡초를 따서 튼튼하고 예쁜 꽃다발을 만들 수 있도록 유모차에서 내려주었다. 길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평범하면서도 놀라운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연의 각 부분이 함께 상호 작용하며 숭고한 걸작을 만들어 내도록 하신 그 아름다움에 마치 내 모든 자아가 흡수되는 것 같았다.하루 전에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 놓쳤는지 궁금했다. 내가 어떻게 그 모든 영광을 놓쳤을까? 대답은 분명했다. 고통과 피로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이 평범한 아름다움의 영광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내가 섬기는 회중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굉장한 회중은 아니지만, 올랜드파크교회에는 평범한 영광이 있다. 선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 지체들을 숭고한 걸작으로 엮어 놓으셨다. 이 회중은 충성스럽고 충실하며 기꺼이 도우려 한다.몇 년 전에 한 교인은 자동차를 수리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 사역을 통해 이제 천 대가 넘는 자동차를 기부했다. 교회에는 많은 건축업자와 상인이 있으며, 매년 이들이 모여 함께 작업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집을 짓는다. 우리 교회는 20채의 집을 지어 집을 필요로 하는 가정에 나누어 주었다.우리 교인들은 예언자적 순종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 기꺼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들은 관대하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그들은 서로 감사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카드를 보낸다. 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교인들이 보낸 카드는 쌓아 놓으면 두꺼운 사전 두께만큼 되었고, 태아를 잃었을 때도 그랬다.내가 섬기는 교회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영광스럽다. 그러나 나는 고통과 피로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이례적으로 힘든 1년 반을 보낸 후 같은 종류의 피로를 느끼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내가 자주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교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실패밖에 없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피곤함이나 상처로 인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일을 다시 하기 어렵다면, 겸손히 눈을 들어 잠시 동안 고통 너머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이 속한 성도들의 모임이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원제: Why I’m Staying at My Church After a Hard Yea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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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평범함
아름다움
팬데믹
대면예배
사회적거리두기
성도에게는 세상과 천사까지 심판할 권세가 있다
by Kyle Dillon
2021-09-29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서신서에서 신자들을 향해 몇 가지 신랄한 책망을 던진다. 아마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고린도전서 6장 2-3절에 적힌 내용일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은 분열과 세속적 성향에 물든 고린도 사람들이 세상 법정에서 서로 소송을 제기하여 이기적인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손상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그런 고린도 교인들의 행실은 이웃 이교도들과 다를 바 하나 없는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부조리한 삶을 폭로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궁극적인 운명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바울이 이 서신서를 썼다는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전 6:2–3).바울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나아가는 논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언젠가 세상과 천사들을 심판하게 될 교인이라면 고작 자기네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작은 분쟁 정도는 세상 법정을 의지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이 구절이 그토록 놀라운 이유는 바울이 최후의 심판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맡을 역할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두 번이나 수사학적 질문을 던진다. “못하느냐?” 그러나 바로 이 구절이 없었다면, 오늘날 바울이 말하는 이 진리를 알고 있을 기독교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 성경은 또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수 세기 동안 주석가들은 성도들이 맡은 이 심판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제시했다. 이 해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네 번째 해석은 사실상 세 번째 해석의 확장이다. 1. 모범을 통한 심판이 해석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John Chrysostom)와 같은 초기 교부들과 볼프강 무스쿨루스(Wolfgang Musculus)와 같은 초기 개혁주의 주석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해석의 핵심은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심판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심판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요 5:22 참조). 오히려 불신자를 정죄하는 방식은 그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본보기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그 시대에 회개와 지혜로 응답한 니느웨 사람들과 스바 여왕이 심판 때에 일어나 그의 동시대 세대의 사악함을 정죄할 것이라고 선언하실 때 그와 비슷한 의미의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다(마 12:41-42).그러나 이런 해석이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내용의 일부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전체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니느웨 사람들과 스바 여왕의 이야기를 마지막 심판에 적용해서 볼 때 그들의 역할은 재판관이 아니라 악인에 대해 증언하는 증인에 불과하다. 반면에 바울이 최후의 심판에서 신자들의 역할과 관련해서 말하는 내용은 증인보다는 훨씬 더 권위 있는 역할이다. 따라서 바울의 주장은 그들이 앞으로 언젠가는 우주의 문제까지 다룰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만나는 일상적인 문제 정도는 좀 더 쉽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2. 대리(Proxy)를 통한 심판앤서니 티슬턴(Anthony Thiselton)과 같은 몇몇 현대 주석가가 선호하는 이 해석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강조한다. 우리가 그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 같이 우리는 그의 부활의 능력과 권위에도 참여한다는 것이다(롬 6:3-11, 고전 15:49).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그분을 신뢰하는 우리가 얼마든지 그분의 심판에도 참여한다고 볼 수 있다는 해석이다. 파생적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우리의 머리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구원 행위에 우리는 영적으로 참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해석이 아마도 첫 번째 해석보다는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 또한 바울이 전달하려는 의미의 충만함을 전부 다 포착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만일 바울이 이런 식으로 미래의 대리 심판만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면, 우리가 지금 스스로를 놓고 심판하는 현재의 책임에 더 충실해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이 가지는 정당성은 자연스럽게 약해질 수밖에 없다. 3. 위임된 권한에 의한 심판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바울은 신자에게 능동적이고 위임된 역할이 최후의 심판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이 해석은 교회 역사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우리가 성경 본문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가장 성경적인 해석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마지막 심판에서 신자의 역할에 대한 가장 명확한 구약성서 중 하나는 인자에 대한 다니엘의 환상에서 찾을 수 있다(단 7:22).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제자들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종말에 신자들에게 부여된 권위의 정도를 언급하신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확실히, 이 구절들 중 그 어느 것도 신자들이 천사를 심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타락한 천사에 대한 미래의 정죄에 관한 많은 구절이 있다(사 24:21, 마 25:41, 벧후 2:4). 물론 이 구절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심판자로 묘사하지만 적어도 믿는 자들에게 위임된 역할이 그 속에 암시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4. 뒤바뀐 왕국?세 번째 가능성을 기반으로 한 네 번째 가능성이 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이 제안한 이 해석은 최근 ‘보이지 않는 세계(Unseen Realm)’의 저자인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ser)의 옹호를 받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알려진 지배 계급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이 이교 국가들의 관할권을 일시적으로 할당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신명기 32장 8절의 지지를 받는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단 10:13,20 참조)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불공정한 통치 때문에 이 천사들을 향한 정죄를 선언하셨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시 82:6-7).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일부는 이 마귀 왕국을 전복시키고 그것을 신자들이 공동 상속자로서 다스리는 그의 아들의 왕국으로 대체하는 것이다(딤후 2:13; 계 2:25-28).하이저는 이렇게 말한다. “일단 열방이 복음을 통해 여호와께 회복되면 신자들은 현재 열방을 지배하고 있는 신성한 존재를 대체하고 여호와의 자녀와 공동 통치자로서 그들의 자리를 다스릴 것이다.”현재의 문제를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기만약에 이것이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면 고린도 교인들의 행실에서 비극적인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그들이 누구인가? 때가 되면, 땅의 통치자들을 뒤에서 다스리는 하늘의 권세들을 심판할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고작 땅의 통치자들에게 자신들의 일을 판단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결코 세상 법원에 상소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때때로 심각한 범죄에 대해서는 신자라고 공언하는 사람에게까지도 책임을 물을 것을 공적 정의는 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 신자들과 일상적인 논쟁을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이자 공동 통치자라는 궁극적인 정체성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세상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일에 관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고, 세상이 볼 때 하나님의 영으로 능력을 입은 구별된 사람으로 보여야만 한다. 원제: What Does It Mean for the Saints to Judge Angels?Revisiting 1 Corinthians 6:2–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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