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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by Jaclyn S. Parrish
2021-11-26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걸작이다.” “압도적이다.” 영화 홍보에 남용되기 일쑤인 이 단어들이 드뉘 빌뇌브의 영화 ‘듄’(Dune)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은 “부드러운” SF와 복잡하고 난해한 가상의 세계를 창조해 낸 걸작이다. 그리고 빌뇌브는 놀랍게도 이러한 원본 소설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원작 소설과 비교해서 떨어지기 마련인 디테일을 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촬영시와 상연시의 화면 비율 조정 기법]로 보완한다. 그리고 허버트가 그린 세계의 미세한 부분 중 일부가 지나치게 넓은 획으로 그려졌다면, 빌뇌브는 스토리의 방대한 규모를 아름답게 포착함으로 그 부분을 해결했다. 인류 미래의 수천 년을 배경으로 한 ‘듄’은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삭)과 아내 레이디 제시카(레베카 퍼거슨)의 외아들인 젊은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의 이야기이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파디샤 제국과 이 제국을 형성하고 있는 복잡한 행성간 봉건 체제 속에서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이다. 이 때문에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표적이 된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에게서 위협을 느낀 파디샤 제국의 황제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천적인 하코넨 가문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민다. 결국 폴은 이 배반의 잿더미를 뚫고 빠져나와야 한다. 허버트가 그린 세계는 인상적인 인물과 배경으로 가득 차 있지만, ‘듄’은 우주를 (정치적, 경제적, 영적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이나 그 우주에서 살아가는 개별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돈을 따라가라‘듄’을 움직이는, 마치 돈과 같은 힘은 스파이스에서 나온다. 인류에게 가장 귀중한 상품인 스파이스는 사막 행성 아라키스에서만 나온다. 스파이스는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고, 더 많은 먹으면 어느 정도의 예지력까지 생기게 해준다. 스파이스가 없으면, 성간 여행이 불가능해지고, 그러면 결국 그렇게 우주를 지배하는 제국도 붕괴될 것이다. 스파이스 거래를 서로 나눠 쥐고 있기 때문에, 성간항행길드(Spacing Guild)는 성간 여행을 독점하고 , 파디샤 제국 황제 샤담 4세는 봉건제의 최상위 지위를 유지하고, 하코넨 가문 일족들은 듄(아라키스)의 군주로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금권의 발판을 유지하고, 수많은 유력자들은 막대한 돈을 번다.허버트의 의도는 거의 확실하다. 그는 듄의 스파이스 거래를 화석 연료에 대한 서구의 착취 무역에 대한 은유로 사용했으며, 이 비유가 드러내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수천 년이 흐른 미래에도, 우리의 본거지인 이 지구가 오래 전에 시간과 재앙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난 뒤에도, 인류는 여전히 이 지루한 게임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세에 유럽의 왕과 교황은 정치적 경쟁을 성전(holy war)으로 위장했다. 18세기에 미국 남부의 번영은 노예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21세기에 사람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에 노출된 채 일하는 저임금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만든 값싼 서양식 옷을 입고 산다. 수천 년 후에 파디샤 제국도 사막 행성 하나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 바뀌는 건 없다. 신화와 조작‘듄’을 움직이는 금권의 역학은 상당히 단순하지만, 사실 더 미묘하고 교활한 다른 세력이 뒤에서 작동하고 있다. 착취로 금권을 장악하는 세력에게 가하는 허버트의 비판이 예리하다면, 교묘한 종교에 취하는 그의 태도는 신랄하다. ‘베네 게세리트’는 기나긴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막후에서 인류의 정치를 움직이고 있는 여성들로만 이뤄진 유사 종교 집단이다. 신중하게 계획된 혼인, 유전자 조작, 때로는 전략적 유혹을 통해, 이 집단은 가장 유력한 가계의 혈통을 조작하여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 ‘퀴사츠 헤더락’을 창조해 내려 한다. 그렇게 선택적 번식을 통해 태어나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메시아는 시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강력한 정신을 소유할 것이며,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에도 인류를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통치할 것이다. 이 집단은 심지어 수 세대에 걸쳐 퀴사츠 헤더락이 도래할 것이라는 소식을 온 우주에 퍼트렸고, 그 메시아 강림의 예언을 수많은 사회의 문화적 기억 깊숙한 곳에 심었다. 사막 행성 아라키스의 모래 언덕(듄)에서, 폴은 이 행성의 선주민 프레멘 부족이 자신을 ‘리산 알 가이브’라고 부르며 메시아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라키스 부족은 리산 알 가이브가 자신들을 압제자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고, 더 나아가 아라키스 사막을 파라다이스로 바꿀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폴은 자신의 태생에 환멸을 느낀다. “이 사람들은 보도록 세뇌된 것만 볼 뿐이에요” 프레멘 순례자들이 자신에게 모여 들자, 폴은 어미니 레이디 제시카에게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신화의 불행한 운반자이다. 폴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젊은 아트레이데스에게는 누군가의 메시아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동료들에게 배신당하고, 적들에게 쫓기고, 사막에 버려진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트레이데스 동맹군이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탈주한 상태에서 폴과 그의 어머니가 의지할 데라고는 프레멘 부족뿐이다. 그리고 이 젊은 아트레이데스 공작이 이 유목민으로 군대를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리산 알 가이브가 필요하다. 폴이 프레멘 부족에게 합류할 수 있게 된 결투에서, 이 젊은 공작은 이미 자신의 미래에 놓인 끔찍한 목적을 감지한다. 결투가 시작되자 폴은 시간의 바람 속에서 “퀴사츠 헤더락이 일어나려면 폴 아트레이데스가 죽어야 한다”라는 말을 듣는다. 젊은 아트레이데스는 위대할 것이고, 실수 같은 것은 하지 않겠지만, 베네 게세리트가 그를 위해 고안한 역할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의 인간성 중 상당 부분은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두려워하고 심지어 끔찍해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영화 ‘듄’의 개별 캐릭터들은 그들의 문화, 유전 또는 상속된 종교에 의해 정해진 궤도에서 제대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엄청난 특권을 누릴 뿐 아니라 자신을 움직이는 힘의 존재까지 충분히 알고 있는 폴조차도 다른 길을 선택하지 못한다. 빌뇌브가 결정론(determinism)이라는 주제를 탐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빌뇌브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컨택트’(Arrival)에서 주인공 루이스 뱅크(에이미 아담스)는 외계인 종족과의 만남을 통해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만나 키스를 나눈다. 뱅크는 자신의 어떤 (영광과 비극이 모두 있는) 미래를 보고 자유롭게 선택한다. 그렇지만 영화 ‘듄’에서는 사람들이 인간 종족의 주기적이고 진부한 패턴 안에 갇혀 있다. 익숙한 세계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 우리 시대의 공동의 죄와 조직적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두 손 들고 감사하기는 쉬울 것이다. 폴, 제시카, 레토,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자연주의적 결정론에 사로잡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더 나은 방법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그런데 정말 우리가 그런 자유를 선택할까? 허버트의 우주를 진정한 구원자가 없는 세계에 대한 황량하고 우울한 묘사에 불과한 것으로 특징짓기란 전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버트가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하는 악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십자군은 이교도가 아닌 사제들이 주도했다. 남북전쟁 전 노예제를 지지한 남쪽은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고 내 옷장을 뒤져 보면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Made in Bangladesh) 태그가 적어도 두 개 이상은 있을 것이다. 커리큘럼, 정치, 인프라, 교단, 그리고 공급망을 탐욕과 권력 남용이라는 영원한 죄에서 풀어 내는 과정은 쉽지도 또 간단하지도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정도로 내가 그 속에 숨어 있는 역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속에 심각한 질병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변화를 향한 운동은 시작될 수 있다. 이것만은 자신 있게 주장하고 싶다. 허버트의 이야기는 특별히 행복하지도 않고, 또 그가 그리는 세계가 대단히 희망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 세계는 아름답고, 고통스러우며, 도저히 피해갈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 원제: ‘Dune’ Is About All of U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듄
기독교세계관
메시아
사회정의
복음의능력
마음속 우상을 진단하는 세 가지 테스트
by Matthew Miller
2021-11-25
연로한 사도 요한은 첫 번째 서신 끝에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고 썼다. 그보다 앞서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경고한 것이 가마에서 만든 은과 금의 우상이었다면(사 37:19), 신약의 기자들이 경고하는 우상은 또 다른 종류, 곧 마음이 빚어낸 사상과 집착이라는 우상이다. 요즘에는 교회가 이 두 번째 우상을 “마음의 우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애정과 갈망의 대상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 지금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가? 그 “다른 것”이 그 자체로 악일 필요는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돈을 섬길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돈 그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도 말했듯, 모든 악의 뿌리가 “돈을 향한 사랑”이라는 점이다(마 6:21-24; 딤전 6:10). 따라서 타락한 마음은 돈, 성취, 로맨스, 애국, 가족, 숭고한 사업 등 겉으로 볼 때 마냥 선하기만 한 것들을 변질시켜 주님에 대한 순수한 헌신에서 멀어지게 하는 위험한 우상으로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영적 간음을 저지르게 한다. 그 결과 따라오는 모든 위험과 불행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마음에 우상이 있다면, 그것을 처리하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단 우상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아야 하며, 거기에는 영적 진단이 필요하다. 이 짧은 글에서 나는 마음의 우상이 있는지 여부를 드러내는 세 가지 증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행여 당신의 삶에 이 세 가지 증상이 있다면, 당장 긴급조치를 취해야 한다. 마음 속 우상 여부를 드러내는 첫 번째 증상은 별 다른 생각을 할 게 없을 때, 무언가에 관한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경우이다. 그것은 마치 마음 한구석에 접착제처럼 붙어서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다음 경기 승리, 결혼, 긴급한 직장 문제, 자녀 문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지나친 관심 등등이다. 이러한 것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한 때도 있겠지만, 때로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할 수도 있다. 직장에서 내일 있을 발표 준비, 자녀의 복지 문제, 국가적 문제나 대의에 투신하고 싶다 등등, 이런 모든 생각이 어떤 집착의 형태를 가지고 한 방향으로 집중적으로 흘러간다면, 게다가 한동안 그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음 안에 서서히 어떤 우상이 자라고 있다는 신호이다. 두 번째 증상은 그것을 얻기 위해 현명하지 못한 조치까지 취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데이트해서는 안 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거나, 관계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그 선을 넘는 경우이다. 현명하지 못한 곳에 투자를 하거나, 월급에서 노후 연금으로 빠지는 부분은 십일조에서 빼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력서에 거짓말을 하거나 분기 보고서를 “아주 조금” 과장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다. 무척 소중한 우정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대의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친구를 멀리할 수도 있다. 또한 자녀의 스포츠 행사를 비롯해 가족과의 이런저런 일정 때문에 주일 예배를 소홀히 할 수도 있다. 이런 마음의 우상에는 특징이 있다. 당신이 현명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을 하게 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변명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게 내가 그마나 결혼할 유일한 기회에요.” “이 투자만 성공하면 나중에 지금 못 한 헌금 몇 배는 할 수 있어요.” “세 시간만 내 맘대로 하게 놔둬요. 그럼 더 좋은 부모가 될께요.” “내 아이가 주일에 교회 간다고 토너먼트에 참가하지 않으면 팀원들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그게 전도에 도움이 되겠어요?” 아무리 좋은 것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 목적을 위해 현명하지 못한 조치를 취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면, 그건 이미 마음에 우상이 자리 잡았다는 신호이다. 세 번째 증상은 그것을 얻지 못해서 느끼는 괴로움이 당연하다고, 그렇기에 그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이 가장 원하는 그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만족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제안하더라도, 당신은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냥 짜증만 낼 것이다. 그런 제안을 하는 것 자체에 화를 낼 것이다. 그런 제안을 무시하며 당신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런 소리를 할 리가 없지.”결혼을 우상으로 만든 독신자는 복음이 주는 위로를 말하는 사람을 속으로 멸시한다. 돈을 우상으로 만든,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부부는 예산 범위 안에서 생활하는 법을 배우는 교육 등을 무시하고 지금 자신들은 얼마든지 불평할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 성과를 우상으로 만든 운동선수나 직장인의 경우에는 상실감이나 좌절의 고통을 느낄 때 그것을 배움의 기회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바울의 이 말을 무시한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대신 어떤 때는 스스로를 극한의 단계까지 다그치거나 또는 그냥 포기해 버린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과 만족을 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갖지 못해 생기는 괴로움을 더 좋아한다면, 그것은 이미 마음에 우상이 자리 잡았다는 강한 징후이다. 자, 당신은 과연 어떤가? 별 생각 안 하고 있을 때 계속해서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는가? 그것 때문에 바르지 못한 조치를 취하는 것까지 고려하는가? 아니면, 이미 그런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갖지 못해서 생긴 괴로움을 알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가? 오히려 못 가졌으니까 괴로운 게 당연하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친애하는 친구여, 나는 당신이 다음 세 가지를 하도록 강력히 권하고 싶다.첫째로, 그것에 관해서 주님께 정직하게 털어놓으라. 그 우상을 주님께 고백하면 주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시고 당신에게 팔을 벌리실 것이라 믿으라. 둘째로, 이 우상이 어떻게 당신을 속이고 있는지 주님께 보여 달라고 간구하라. 지금 당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기쁨과 만족을 그 우상이 어떻게 앗아가고 있는지 보여 달라고 기도하라. 셋째로, 당신이 원하는 그것, 그러니까 결혼, 성과, 가족의 안녕, 조국의 안녕, 사업의 발전 등등을 향한 욕망이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달라고 간구하라. 하나님의 목표는 당신의 마음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먼저 성화시키고 그런 다음 진짜를 통해 만족을 누리도록 하는 것임을 깨달으라. 마음의 우상은 우리를 ‘천로역정’ 두 번째 책에 나오는 “쓰레기 갈퀴를 든 남자”처럼 만든다. 이 환상에서 한 남자는 “손에 오물 갈퀴를 들고 아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래에 널린 무가치한 것에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그 사람 위에는 왕관을 들고 있는 사람이 서 있었다. 왕관이냐, 오물 갈퀴냐? 그것은 계속되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위를 향해 주목하기는커녕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갈퀴로 짚과 잔가지들, 바닥의 먼지만 열심히 긁어 모았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이게 바로 마음의 우상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비참한 모습이다. 집착에 빠지고, 노예로 살고, 무엇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거부하는 인생이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원제: Three Tests for Diagnosing Idols of the Heart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영성
예배
우상숭배
요한일서
우상의실체
천로역정
진정한갈망
사도요한
마음의우상
괴로움
거룩한 습관은 우리를 다시 정상 궤도에 올릴 수 있다
by Darryl Dash
2021-11-23
2020년이 끝났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기억하는가? 2021년이 끝나 가는 지금, 그런 설렘은 이제 순진하게만 보인다. 팬데믹은 사라지지 않는다. 양극화는 여전히 높고, 사람들은 피곤하다. 많은 교회가 정상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몇몇 보고서에 따르면 사임할 준비를 하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 장기 계획이 차질을 빚는 걸 즐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팬데믹이 계속되는 이 상황이 가져다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혼란스러운 계절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와는 상관없이, 혼란은 정상 궤도로 돌아가 지속가능하고 건강하며 또한 경건하게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습관을 재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태 vs. 열심우리에게는 중단이 필요했다. 팬데믹 이전에도 우리는 경건한 습관을 잘 지키지 못했으니 그렇다. 조지 거쓰리(George Guthrie)는 ‘삶을 위한 성경 읽기’(Read the Bible for Life, 성서유니온 역간)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지나치게 경계하거나 비판적이고 싶지 않다. 또 설교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성경 읽기에 관해 대단히 큰 걱정을 하고 있는데, 당신도 그 걱정을 나눠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제대로 읽기는 고사하고,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목사로서 나는 또 다른 걱정스러운 경향을 발견했다. 과거에는 그래도 정기적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점점 더 드문드문 예배에 참석한다. 특히 젊은 세대가 더 그렇다. 예전에는 거의 매주 예배에 참석했지만, 이제는 한 달에 한두 번 참석하는 사람들이 많다.성경을 읽거나 예배를 위해 꾸준히 모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기도 같은 다른 경건한 습관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세속 문화의 흐름에 맞서 저항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는 생활 속에서 경건한 습관을 들이는 법을 아예 배운 적이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그러면 낙심하고 포기한다. 한껏 열정을 품은 채 헬스장에 등록했다가 2월에 바로 그만두는 것과 비슷하다.새 출발팬데믹은 우리의 삶을 혼란에 빠뜨렸고, 어떤 추세를 부추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팬데믹은 또한 동시에 다시 시작하게 함으로써 우리 삶 속에 새롭고 경건한 습관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의 행동과학자 케이티 밀크먼(Katy Milkman)에 따르면, 생일이나 새해 같은 새 출발은 변화에 대한 동기를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날은 뭔가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을 주고, 실패를 과거로 보내게 하며,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을 높여 주기 때문이다. 밀크먼은 그의 책 ‘변하는 법’(How to Change)에서 “변화 추구를 고려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시기는 새 출발 이후이다”라고 썼다. 언젠가는 팬데믹이 끝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에 직면할 때 은혜의 길로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될 새로운 습관을 우리는 지금부터 삶 속에서 쌓아 가야 한다. 습관에 관한 간략한 신학습관을 성경 어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언뜻 보면 습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절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이 단어는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도 부정적인 의미이다. 함께 모이지 않는 나쁜 습관을 키운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구절이 그것이다(히 10:24-25).이 구절의 의미: 우리는 함께 모이는 좋은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습관은 성경 어디에나 나온다. 시편 1편은 밤낮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아침과 저녁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하나님의 율법을 생각하라고 권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예수님의 이 말씀은 또 어떤가? 각 동사(구하다, 찾다, 두드리다)는 현재 명령형이다. 계속 구하라. 계속 찾으라. 계속 두드려라. 곧,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라. 성경은 우리가 삶에서 키워 가야 하는 많은 습관, 곧 일상이 되는 규칙적인 실천을 권장한다. 제대로 성장하려면 경건한 습관이 필요한 것이다. 동시에, 습관이 중요하지만 이게 핵심은 아니다. 바리새인보다 습관을 더 잘 연마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은 습관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하는 하나님을 놓치고 있었다. 습관 그 자체가 저절로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습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수단이다. 습관을 만드는 8가지 조언오늘 당장 경건한 습관을 어떻게 키우기 시작할지, 여기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다.1.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 습관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명령을 규칙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2.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라. 우리는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변화하기를 원하신다. 당신이 하나님을 추구할 때 함께 걸어갈 사람들을 교회에서 찾으라. 3. 중단을 활용하라. 중단이 일상에 초래하는 불편이 적지 않지만, 새로운 행동 패턴을 형성하고 또한 팬데믹이 종식될 때를 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제공하기 때문이다. 4. 핵심이 되는 습관을 선택하라. 규칙적으로 말씀 읽고, 기도하며,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5. 작게 시작하라. 당장에 큰 목표를 이룰 수는 없다. 작지만 현실적인 습관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에 성경 열 장씩 읽겠다고 하지 말라. 한 장부터 읽으라. 한 시간 기도 대신 5분으로 시작하라. 6. 그때그때 새롭게 시작하는 습관을 들이라.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말라. 주일 예배에 빠졌다고, 성경을 하루 읽지 않았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다시 시작하라. 7. 계속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실패해도 포기하지 말라. 실수를 인정하자. 안 되는 방식에서 배우라. 호기심을 유지하라. 실망감을 기도로 주님께 가져가서 은혜를 구하라. 8. 발전이 없어 보여도 계속하라. 오랫동안 유지하는 작은 습관이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다. 코로나라고 하는 중단을 낭비하지 말라. 영적으로 연약한 상태에 안주하지 말라. 믿음을 강화하는 경건한 습관을 기르라. 성령의 도움을 구하라. 오늘 시작하라. 원제: Godly Habits Can Get Us Back on Trac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코로나19
팬데믹
경건의습관
열심
습관
낙관론
성경읽기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
by 최원준
2021-11-23
아무도 모르게 계시고자 했지만 숨길 수 없었다. 이미 명성이 두로와 시돈까지 널리 퍼졌다. 예수에 대한 소문이 한 여인에게도 미쳤다. 여인은 소문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찾는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출신”이다. 여인은 시리아 지역에 속해 있는 페니키아 이방인이었다(마태복음은 ‘가나안 여인’으로도 표현한다). 여인은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애원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취해서 개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막 7:27).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이방 여인을 “개”라고 하신다. 인종차별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 예수님도 사람을 차별하시는구나.’ ‘예수님도 유대인이시니, 사랑을 베푸는 대상은 불쌍한 이스라엘 사람들이지 이방인이 아니구나.’ 오늘 우리에게는 참으로 불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이 불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학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이 언행은 인종차별적이고 남성우월적인 예수님 당신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억압적 체제를 짐짓 빗대신 것, 흉내 내기(simulation) 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수님의 이 발언은 인간을 비극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 세상의 의식과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몸으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또 당시 유대인의 식탁 문화를 배경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에 등장하는 개는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사나운 들개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이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퀴나리온’은 작은 개를 의미한다.) 당시에 애완견은 식탁 밑에서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었다. 여기서 우리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나사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허기를 면하려고 했을 때,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 이 개들 역시 집에서 기르는 개다. 당시 유대인들은 수염을 길게 길렀는데, 식사할 때 음식이 수염에 묻으면 식후에 빵으로 털어 냈다. 그리고 그 빵을 개에게 주었다. 그러나 어떤 주인도 ‘먼저’ 자녀에게 빵을 주지 개에게 주지는 않는다. 먹고 남은 것을 줄 뿐이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제시되고 그 후에 이방인에게 차례가 돌아간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병이어 이적 이후에 칠병이어 이적이 나오는 것도 그렇다. 오병이어 이적에서 남은 빵을 담은 바구니가 열둘이라는 사실은 이 이적이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반면에 칠병이어 이적은 이방인 지역에서 있었고, 또 일곱 광주리가 이방 세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여인은 대답한다.“주여, 맞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먹다 떨어뜨리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막 7:28) .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퀴리에)이라고 부른다.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듣고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예수님을 높이고 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한다. 사람은 모욕을 당하게 되면 수치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때 나타내는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 번째, ‘그래, 내가 그렇지. 내 주제에….’ 이전보다 더 자기를 비난하고 숨어 버린다. 두 번째, 자신을 모욕한 사람에게 분노하고 그를 비난한다. 이 두 반응은 자신을 모욕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런데 여인은 다른 반응을 보인다. 곧, 현실을 직면한다. 이 가나안 여인은 자신을 개 취급하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현실에 대한 체념이나 막연한 분노가 아니라, 현실을 마주하고 인정한다. 문제 해결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여인은 현실 직시 및 인정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간다. 이제 여인은 불의한 현실 속에서 자신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들을 먹습니다.” 여인은 개의 권리를 주장한다. 자녀가 우선되어야 하는 현실, 인정합니다. 그러나 개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부스러기라도! 여인은 우리가 “부스러기 은혜”라고 부르는 바로 그 은혜를 자신에게 베풀어 달라고,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한다.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급식 이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막 6:52; 8:14-21), 또 정결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우둔함과 대조된다. 또한 여인은 자기의 요청을 사실상 거부한 예수님의 대답에 좌절하지 않고 겸손히 자비를 구하는 믿음을 가진 자라는 점에서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은 제자들(막 4:40)과 대조된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 보아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지혜와 믿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막 7:29). 같은 내용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여인의 지혜와 믿음에 놀라기까지 하신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마 15:28, 개정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감탄사 ‘오’가 있다). 예수님은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쓰인 ‘나갔다’의 헬라어(엑세레뤼쎈)는 현재완료시제다. 예수님은 귀신 축출을 위한 그 어떤 말씀이나 행동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이미 귀신은 떠나갔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내다보신 것이 아닐까? 이미 요청은 이뤄졌다. 그러나 여인은 모른다. 여인에게는 거쳐야 할 테스트가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그것을 잘 통과했다. 이 글은 최원준 목사의 ‘마가복음’(홍성사, 2021)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갈무리하여 다시 엮은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믿음
지혜
모욕
인종차별
남성우월주의
이방여인
오병이어
수치심
C. S. 루이스의 삶을 다룬 영화 한 편, 그리고 기적을...
by Brett Mccracken
2021-11-22
최근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의 회의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제기하는 주된 쟁점은, 기독교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기독교가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시대에 득세하는 윤리 의식은 (특히 성과 젠더 문제에서) 성경의 가르침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변증법이 기독교의 논리(‘이것은 사실인가?’)를 논증하는 데만 몰두하는 것으로는 회의론자들에게 충분한 답을 줄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기독교의 윤리(‘이것이 옳은가?’)를 세상에 말해야 할 것이다.변증에는 상대해야 할 다양한 전선들이 있으며, 각 전선에 나서려면 저마다 알맞은 맞춤형 접근법이 필요하다. 이는 회의론의 양상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회의론자들이 갖는 질문과 의심은 그들 각자의 삶의 경험에서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질문에 뛰어들어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제 소개할 두 편의 영화는 이러한 점을 잘 포착한 영화다. 개인의 삶을 추적한 전기(biography)와 맞춤형 접근이 변증법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질문과 의심 속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영화라 하겠다. 먼저, ‘가장 반항적인 개종자’(The Most Reluctant Convert)는 C. S. 루이스가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여정을 탁월하게 묘사한 원맨쇼 형식의 영화다. 두 번째 영화 ‘증거를 대라’(Send proof)는 “기적이 존재한다면 그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오늘날의 많은 회의론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초자연적 현상을 그리고 있다. 두 편 모두 추천할 만하며 논의의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가장 반항적인 개종자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C. S. 루이스의 삶을 다룬 ‘가장 반항적인 개종자’는 미국에서 11월 초 한정된 기간에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앞서 같은 이름으로 무대에 올라 크게 흥행했던 연극을 각색한 것으로, 루이스의 자서전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 홍성사 역간)을 토대로 한다. 영화의 초반에는 맥스 맥린(Max Mclean)이 등장하여 중년의 루이스를 연기하고 루이스가 기독교로 개종할 시기의 연기는 니콜라스 랠프(Nicholas Ralph, 영국의 유명 드라마 ‘All Creatures Great and Small’에 출현한 배우)가 맡았다.영국의 기독교 영화 제작자 노만 스톤(Norman Stone, 루이스의 삶을 그린 BBC의 영화 ‘Shadowlands’의 연출을 맡음-역주)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영국의 옥스퍼드 지역에서 대부분 촬영했다. 영화 자체로도 기독교 배경을 가진 다른 대부분의 영화보다 확실히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지만 대체로 루이스의 기존 팬들과 성도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것이다.8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영화는 루이스가 어리고 젊은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부터(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4살에는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19살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지적인 깨달음과 함께 하나님께 돌아가기까지의 영적 여정을 조밀하게 담고 있다. 한편, 루이스의 이러한 영적 여정에 지대하게 영향을 끼친 것이 있는데, 루이스는 조지 맥도날드(George MacDonald)의 소설 ‘판타스테스’(Phantastes)를 읽는 중에 자신의 상상력이 “세례”를 받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또한, 그에게는 믿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오언 바필드(Owen Barfield) 같은 문학적 동지들이 있었으며, 특히 루이스는 톨킨(J. R. R. Tolkien)과 함께 막달렌(Magdalen) 대학 교정을 산책하곤 했는데, 그때 톨킨이 루이스에게 해준 “참된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루이스의 회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나 같은 루이스 마니아들에게는 이 영화에 볼거리가 정말 많다. 교수 시절의 루이스로 분한 마이클 와드(Michael Ward)의 카메오 연기는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맥린의 내레이션 또한 유쾌하고 재치가 넘치며, 그의 뛰어난 전달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은 바로 영화의 대본이다. 이 영화가 루이스의 회심을 명료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루이스가 그간 했던 수 없이 많은 말들을 적확하게 인용한 것이 한몫을 했다.예컨대, 영화의 한 장면에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홍성사 역간)의 한 구절이 흘러나오는데(“온전한 만족을 이 세상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또 다른 세상을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어서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 홍성사 역간)의 한 문장(“지금 우리는 세상의 바깥, 문 저편에 있다.”)이 뒤따라 나온다. 출처가 다른 두 인용구가 매우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 영화가 으레 하는, 뭔가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듯한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이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 장황하다. 원작이 1인극임을 고려할 때 당연하겠지만, 이는 개인적으로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예컨대 루이스가 기쁨을 젠주흐트(Sehnsucht, 갈망, 열망, 그리움을 뜻하는 독일어) 개념으로 표현한 것과 같은) 원작의 문구를 그려 낸 이미지는 간혹 실망스러울 때가 있다. 루이스는 장난감 정원을 보면서 처음으로 기쁨을 경험했다고 한다.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기쁨’에 눈을 떴을 때, 그때의 느낌을 “이제 막 멈췄다고 생각한 그리움에 다시 사로잡힌 것 같은”이라고 루이스는 표현한 바 있다. 영화는 비스킷 통으로 만든 장난감 정원으로 이를 이미지화했다. 영화의 연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그려 낸 이미지가 과연 루이스의 강렬한 메시지 전달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의문이다.증거를 대라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VOD 이용 가능) 최근 몇 년간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기독교 다큐멘터리이다. 감독과 내레이션을 모두 맡은 엘리야 스티븐스(Elijah Stephens)는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 그중에서도 기적적인 치유 사건을 다룸으로써 관객들을 흥미진진한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감독은 영화를 위해 놀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평론가들을 각지에서 불러 모았다. 기독교 변증학 쪽에서는 J. P. 모어랜드(Moreland),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 게리 하버마스(Gary Habermas), 크레이그 키너(Craig Keener) 같은 신학자들과 교수들이 대거 등장한다. 한편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와 존 로프터스(John Loftus, ‘The Case Of Miracles’의 저자)같은 회의론적 무신론자들의 출연도 눈에 띈다. 스티븐스 감독은 치유를 주장하는 사례를 조사하는 의학 연구계, 실제로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 또한 벧엘 교회(Bethel)의 빌 존슨(Bill Johnson)을 비롯한 치유 사역의 지도자들과도 인터뷰를 진행했다.스티븐슨 감독은 이러한 견해와 목소리들이 그저 스스로 말하도록 둔다. 기적적인 치유를 믿을 것인지 의심해 봐야 할 것인지의 판단은 관객에게 맡긴다. 기독교 배경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오늘날의 다큐멘터리들 사이에서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대부분이 자료에 기반한 복잡한 논쟁을 공정하게 보이기보다는 답을 정해 놓고서는 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정해진 답 쪽으로 조종하려는 경향이 있다. 감독은 그리스도인이고 영화가 다루는 문제에 관해 자신의 확실한 견해가 있지만, 그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함으로써 관객들에 대한 존중을 표한다. 이 영화는 무신론자는 결국 패배하고 멸절해 버린다는 식의 선동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견해가 다 타당하다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식으로 문제를 가볍게 다루지도 않는다. 단도직입적으로 ‘기적의 증거가 있는가?’라고 묻고 서로 다른 의견이 공정하게 겨루도록 한다.이 영화는 개혁주의 은사지속론의 관점을 담아내면서도 은사 남용을 강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적이 가능하다고 믿지만, 기적의 간증에 대해서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증거를 대라’는 은사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과학적인 단서(evidence)와 확실한 증거(proof)는 적이 아니라 동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가장 반항적인 개종자’와 ‘증거를 대라’가 엄청난 걸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관람할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특별히 믿지 않는 친구들 가운데 이 두 영화를 받아들일 만한 친구가 있다면 함께 보고 토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두 영화가 회의론자들을 완전히 설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심 많은 회의론자가 설복되어 신앙인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멀고 험하다. 수많은 생각과 주변의 조언들이 그 길을 따라 나서기 마련이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보여 주듯이) 하나님께서 이 두 편의 영화를 사용하셔서 이것을 보는 이들이 믿음의 길로 돌아서는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원제: The New Films About Faith and Skepticis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C.S.루이스
변증
회의론
무신론
가장반항적인개종자
증거를대라
기적
은사지속론
예기치못한기쁨
게으름을 깨고 열심의 불꽃으로 타오르다
by Marshall Segal
2021-11-21
지금 시대에 열심(Earnestness)은 워낙 드물기에 그 가치가 더 인정받고 있다. 화면 스크롤링과 대충 읽기로 대표되는 이 시대는 대체로 우리를 더 가볍고 피상적이며 유약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진지함에 점점 더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우리 마음은 너무 쉽게 지친다. 그러나 극히 소수가 되어 버린 그 밝은 삶은 이런 영적 안개를 뚫고,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에겐 이제 희미해져 버린 현실 속에서조차 환히 빛나고 있다. 그들의 말과 우선순위 그리고 그들이 보여 주는 반응은 그리스도께서 그들로 하여금 완전한 헌신을 하도록 만드셨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드러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신음하고 변명할 때 희생하고 섬기기를 좋아한다. 역경에 직면했을 때조차도 그들은 더 강하고, 갈등 속에서도 더 친절하며, 고통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즐거워 보인다. 그들은 스트레스와 산만함조차 뚫지 못하는 초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는(종종 그런 그들이 두렵기도 하지만),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 감각의 표면 아래에 존재하는 진짜 세계, 그리고 영혼을 위한 영적 전쟁을 그들이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사랑하고, 더 성장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이런 성도들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고린도후서 8:7의 말씀대로 열심에서 뛰어나다는 사실이다. 열심에 게으른그리스도인의 열심은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안정되고 기쁨으로 가득한 집중(intensity)이다. 히브리서 6:11-12을 보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열심은 영적 둔함, 게으름, 무관심, 안일함의 반대이다. 모든 신자가 그렇듯, 열심인 사람도 예외없이 의심과 갈등, 그리고 낙심의 계절을 겪는다. 그러나 그런 때에 조차도(아니, 특히 그런 때에 더) 믿음의 불꽃은 생각보다 더 뜨겁고 밝게 타오른다. 이런 영적인 불이 또 어디에서 언급되었을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고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그 구절만으로도 진지한 반성과 기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열심에서 나태해짐을 느끼는가? 얼마나 자주 영적 불타오름을 느끼는가?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이가 얼마나 쉽게 지속적인 나태함에 익숙해져 버렸는가? 한때 가지고 있었던 열심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가?둔감함이라는 참호가 믿음을 위해 매일 싸움을 벌이는 현장이 될 때가 많다. 매일 아침 찾아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에게는 다가올 날을 위한 새로운 깨어있음이 필요하다.불붙은 죄인들열심이라는 이 단어(그리스어 spoudei)는 고린도후서 7-8장에서 가장 자주(네 번) 나타난다. 이 두 장에서 사도는 죄에 대한 경건한 근심과 불경건한 근심 사이의 치명적인 차이점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파멸시키려 했던 이들을 징계하는 일에 등한시했다. 그래서 이전에 고통스러운 편지(고후 2:2 참조)를 썼을 때, 바울은 진심을 담아서 그들을 근심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경건한 근심, 회개하는 근심, 희망에 찬 근심,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근심을 경험하기 원했다. 그건 많은 사람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종종 죄의 결과에 대해 느끼는 천박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런 근심이 아니다. 그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죄에 직면했을 때,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원했을까?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고후 7:12).바울은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할 때, 그들의 눈에서 그분을 향한 간절함을 보기 원한다고 말한다. 그 편지로 인해 그들 속에서 영적인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길 바란다. 그래서인지 고린도 사람들은 쉽게 근심했다. 바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그들은 자신의 죄를 대면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했을 뿐만 아니라, 신선하고 냉정하며 거기에 능동적인 현실감으로 충만했다.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진지한 확신은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헌신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진지한 사랑까지 낳는다. 자, 기억해야 할 점은 이러한 깨어있음과 열심이 다름 아니라 바울이 어렵게 전했던 말이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불쾌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책망은 종종 더 큰 영적 온전함과 활력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초대이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우리는 자기 연민에 빠져 초대를 놓치고, 그 초대로 인해 경험할 지도 모르는 뜨거움 마저 잃어버리곤 한다. 열심 안에서 자라나기열심이 부족했던 고린도 성도들이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더 그 열심이 커졌다는 것은, 아무리 영적으로 더디다고 느껴질지라도 우리도 간절하게 바랄 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심을 다하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단어는 베드로후서 1:3-8에 다시 나온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등등.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열심 위에 너희의 믿음과 덕을 더하라.”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열심에 대해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보여준다.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더 높은 수준의 우선순위와 함께, 더 확고한 기반 위에서 지속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게다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차마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원까지도 활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열심의 토대첫째,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더 견고한 기초 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수준으로까지 안전하고 안정된 삶을 산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3-4). 과연 이러한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확신이 무엇인지 유의하자. -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그의 영광과 탁월함 가운데로 부르셨다.- 하나님은 그의 귀하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모두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적 성품에 참여하게 하셨다.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닮아가도록 하신다. -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부패함에서 건져내셨다.이런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깨어있음은 우리 영혼 속에서 중심점(gravity)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자유함을 준다. 영혼 속 중심점과 자유는 상황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도록 각 사람 아래에 단단한 기초를 형성한다. 그 결과 견고하게 고정된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사랑 안에서 더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열심을 추구하는 과정의 일부는 우리 발아래 놓인 땅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앞에 두신 반석 위에서 삶과 사역을 세워가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로 아침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현실에 대한 바른 발판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세상 것에 몰두하고 있는가?열심의 방향안전과 안정 외에도 영혼에게는 방향이 필요하다. 열심을 다한다고 할 때, 그 열심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아예 고갈될 때까지 방해받지 않은 열정으로 열심히 일하지만, 그들의 모든 방향은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기쁨으로 가득 찬 경건한 열심의 경우에는, 그 모든 노력이 하늘의 우선순위와 일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5–8).열심을 내는 사람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소진시키는 시간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 영역 때문에라도 세상 사람들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보다 영적인 관심사와 기회에 전념하며, 그렇게 하는 것을 즐긴다. 열심을 내는 사람은 세상과 사랑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딤후 4:10), 아무리 절박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결국에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릴 세상일에 최선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은을 찾듯이 진리를 추구한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갈망과 충동을 통제하기를 원한다. 달성할 수 있는 세상 모든 것보다 경건을 더 소중히 여긴다. 조금 사랑하는 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고,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빌 1:9) 되기를 원한다. 열심의 우물믿음과 확고함 그리고 거룩함과 사랑에 대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지라도, 결코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이 주시는 힘과 은혜 안에서 견디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더 오래 짐을 지고 갈 수 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생명과 경건에 관해서 우리는 스스로 무력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가 이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마음과 관계라는 측면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양의 기능 장애를 우리는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제를 우리 자신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무능력한 우리로부터 아무것도 취하지 않으시면서,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바로 이 우물 옆에 집을 짓는다. 그들은 하늘의 힘, 지혜, 용기, 사랑의 보고를 쓰는 방법이 기도 밖에 없음을 잘 안다. 그들은 그래서 하나님의 소중하고 위대하고 구체적인 약속으로부터 끊임없이 그 능력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강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능력이 없이 자신들이 한 없이 약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노력을 다하라아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가? 누구의 삶이 지속적으로 주변에 가득한 세속성을 뚫고 초자연적인 특성으로 빛나고 있는가? 누구의 말과 행동이 긴급함과 인내, 야망과 겸손, 그리고 배고픔과 만족으로 특징지어 지는가? 누구와 나누는 대화가 당신으로 하여금 더 기도하고 더 사랑하고 더 성장하도록 자극하는가?그런 성도들을 연구하고, 친구가 되고, 또 본받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 그들의 삶은 천박하고 산만한 시대에 귀중한 간증이자 깨달음(reminder)이며, 그런 이들과의 우정은 무엇보다 매우 소중하다. 게으름을 부릴 때 느끼는 편안함을 거부하라. 열심을 내는 데에 그 누구보다 앞선 사람이 되도록, 그런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다. 원제: Disrupt Your Dullness: Rekindling the Flame of Earnestnes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열심
게으름
영적나태
고린도교회
깨어있음
자기연민
초자연적
‘여기서’ 예수 냄새 내는 교회
by 정갑신
2021-11-20
교회 이름 짓기의 설렘 교회를 개척하면서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설레고 두드러진 일이 이름 정하기다. 잉태의 희열 가운데 태아를 마음에 담고 태명을 정하여 불러 주려는 부모의 설렘과 같다. 나는 화성시의 타 지역에 있는 외가에 어릴 때부터 드나든 기억이 있어 발안이라는 이름을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개척지에 도착한 후에야 발안이 향남에 속한 동네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편안하고 반가웠다. 그런데 발안의 영문 표기는 ‘Baran’(바란)이었다. 히브리어로 ‘광야’이다. 그에 따라, 발안 혹은 바란과 조화를 이룰 만한 이름이 무엇일까를 연신 고민한 끝에 ‘바란하늘’이라는 이름을 억지로 만들었다. 바란하늘교회, 파란하늘교회라는 느낌을 주는 동시에 광야의 하늘, 곧 광야에서도 하늘을 본다는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김진홍 목사의 ‘바닥에서 살아도 하늘을 본다’(한알의밀알)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 탓이었을까? 제법 의미가 담긴 이름으로 여겨졌다. 최종으로 이름을 결정할 자리는 은혜의동산교회에서 파송받게 될 개척 멤버들과 함께 모인 자리였다. 창신교회에서 개척 멤버로 참여할 분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교회 이름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였다. 모인 성도들 대다수는 생경한 이름이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별다른 이견도 없었다. 일단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 어색해 하는 거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런데 모임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미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은혜의동산교회 성도 한 분이 말을 흘렸다. “목사님, 여기가 향남읍 발안리예요. 이왕이면 ‘리’보다는 ‘읍’ 이름이 들어가면 좀 더 비전이 있어 보이지 않을까요?” 그의 말이 마음에서 맴돌았다. 얇은 귀 탓인지 갑자기 ‘향남’이라는 이름이 마음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개척 멤버들에게 이름을 공모하는 과정을 밟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개척 날짜를 단 몇 주 앞둔 터라 처음 모인 어색한 이들 사이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이 부담스러웠다. 더구나 후보 이름을 제출했다가 채택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개척도 하기 전에 거절감부터 느낄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이 제출한 이름을 거절당한 끝에, 정해진 교회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고민 끝에, 예수님이 머리 되시는 교회를 꿈꾸는 마당에 과감하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향기가 난다’는 이중의 의미를 담아 ‘예수향남교회’로 정한 것이다. 다음 모임에서, 고민했다는 엄살과 함께 조심스럽게 이름을 제출했을 때 참석자들의 반응은 모두 호의적이었다. 예수향남교회. 많은 이들이 이 이름이 참 좋다고 한다. 어감과 의미가 좋고 느낌도 따뜻하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이름마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같아 기쁘다. 더구나 예수향남교회는 태생부터 분립 개척과 유사한 본질을 지녔으므로, 향후 분립 개척을 할 때마다 예수 이름에 동네 이름을 붙이면 자연스러운 연대감이 느껴질 것 같다는 기대도 생겼다. 실제로 2016년 1월 첫 주에 첫 번째 분립 개척한 교회는 ‘예수평화교회’다. 예수의 이름으로 평택과 화성을 아우르는 교회라는 뜻이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내가 분립 개척하게 된다면 화성과 평택 중간쯤에 두 도시를 아우르는 예수화평교회를 세우리라 생각하며 마음에 담은 이름이었는데, 개척하는 목사가 그 이름을 요구했던 거다. 그리고 2017년 수원 호매실 지역에 세워진 두 번째 분립 개척 교회 이름 역시 ‘예수호매실교회’다. 교회가 시작되고 교회와 복음의 본질에 천착케 하시는 성령의 강렬한 이끄심을 느낄 때마다 나는 이 이름이 참 좋다. 예수님이 머리이신, 예수님이 주인이신, 예수님이 대답이신, 예수님이 전부이신 예수향남교회, 고마운 이름이다. 나라의 교회 될 생각 말고 지역의 가족이 되라개척 교회의 사명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면에 이런 감동을 주셨다. “한국 교회를 생각하지 말라. 조국 교회 운운하지 말라. 다만, 너와 더불어 시작하는 교회가 심긴 그곳을 위해 기도하고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있으라.”하나님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가 속한 지역에서 지역의 주민들과 더불어 진실된 사귐의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 사귐은 안으로의 사귐뿐 아니라 밖으로의 사귐이어야 한다. 지역의 결핍과 필요에 영적으로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사귐과 책임의 공동체여야 한다. 교회는 대한민국의 모든 영혼을 향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마을 혹은 그 동네 혹은 그 작은 도시의 교회여야 하고, 그 지역 사람들이 그 교회와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하고, 교회와 지역이 서로에게 기꺼이 즐거움으로 상호 접촉하고 상호 참여할 수 있는 지역의 가족이어야 한다. 교회는 그곳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해야 한다. 이미 그곳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신 하나님이 어디서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를 묻고, 하나님의 대답을 따라 그 사역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에 기꺼이 참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 귀 기울여야 하고 귀 기울임에 답하시는 하나님의 대답에 다시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겠는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물 각각에게 주신 존재 의미와 목적이, 다시 말하면 남자에게, 여자에게, 가정에게, 자녀에게, 서로의 관계에게, 학교에게, 문화적 표현들에게, 사회구조적 질서에게 주신 모든 존재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이 목적하신 뜻에 합당하도록 회복되고 충만해지도록 일하시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일들은 교회 안팎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들이다. 따라서 교회가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그 형태와 규모의 차이는 있겠으나, 모든 교회는 예배, 선교, 가정, 교육, 복지, 문화, 사회 이슈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 영역에서 명백한 복음적 대안을 향한 하나님의 이끄심에 대답하도록 자신을 내어드릴 준비를 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충만, 곧 완성을 향해 드려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여기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정갑신 목사의 '대답하는 공동체'(아르카, 2018)의 일부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교회
교회세우기
교회개척
지역교회
예수향남교회
복음적대안
광야
공동체
교회이름
분립개척
오래된 속삭임
by 이인호
2021-11-1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복음은 타락의 선언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이 선언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복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게 된다. ‘내가’ ‘나’ 자신이 나의 흉악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아래 있다는 이 선언에서부터 복음은 시작된다.이를 잘 아는 사탄은 복음을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것은 긍정의 속삭임이다. “네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사탄은 절망적인 인간에게 긍정의 불을 지핀다. 이것은 오래된 속삭임이다. 사탄은 첫 사람 아담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사탄의 이 속삭임은 그치지 않고 있다. 사탄이 오늘도 우리를 파멸로 이끌고자 우리에게 이렇게 주입하고 있다. 인간은 괜찮은 존재다. 인간은 이성의 존재다. 인간은 스스로 진리에 이를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은 신에게 반항할 수 있다. 칼빈은 말한다. “진실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는 사람들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자력으로 싸우라고 가르치는 것은 갈대로 우리를 높이 드는 것과 같다. 그 갈대가 꺾이면 우리는 떨어지고 만다. 허망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은 모두 연기와 같다.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것을 찾으라고 강요하고, 사람이 자기를 높이게 하는 것은 사탄의 음성이다.” 칼빈에 앞서 아우구스티누스도 동일하게 경고한다. “아무도 자신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도 인간성의 능력을 중요시하는가? 그것은 상하고 부서지고 혼란하고 망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고백이지 그릇된 자기변호가 아니다.”초기 교회부터 종교개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사탄의 이 끈질긴 계략을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간다. 사탄은 오늘도 그 목소리를 위장하여 우리의 도덕의식, 비판력, 정의감에 짐짓 호소하는 듯 ‘인간이여, 그대는 괜찮은 존재다’라고 속삭인다. 사탄은 오늘도 그 목소리를 변조하여 우리더러 성경 지식을 깨달음을, 열심을, 헌신을 자랑하라 부추기며 ‘너희는 괜찮은 신자다’라고 속삭인다. 더 나아가 사탄은 ‘너의 삶의 주인은 너다’라고 속삭이며 주인 되신 하나님께 반항하라 부추긴다. 이 속삭임에 굴복하여 우리 사회의 한 쪽에서는 사회의 미덕과 규범을 당당하게 어기고 반항하는 사람들에게 ‘매력 있다’ ‘용기 있다’며 찬사를 보내는 문화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단언한 것처럼, 결단코 우리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이만하면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실 거야!’ ‘나는 평생 법 없이 살았어!’ ‘나는 평생 진리를 가르친 사람이야!’ 자신의 종교 생활, 공로, 선행이 은근한 의가 되어 남들과 비교하면서 공로 의식에 젖어 사는 것이야말로 지옥에 이르는 멸망의 대로이다. 하나님은 남들 눈에는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은폐한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의 구원을 포기해야 살 수 있다. ‘나 같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우리 내면의 이 뿌리 깊은 자기 의, 자기 숭배를 포기해야, 산다. 내 안에 구원의 길이 없음을 깨닫는 사람, 자기 파산을 선언하는 사람,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비로소 예비 하신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신다. 긍정의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거짓 복음이다. 사탄의 복음이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습니다.” 이 글은 이인호 목사의 ‘믿음에서 믿음으로’(익투스, 2017)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복음
변증
칼빈
사탄의속삭임
거짓복음
아담
긍정의불
타락선언
종교생활
자기숭배
줄리어스 김의 믿음 안의 ‘형들’
by Julius Kim
2021-11-18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은 나를 그들의 어께 위해 세워 준 형들 덕분이다. 지나온 53년의 내 인생에서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은 나를 가르치고 사랑해 준 지혜롭고 경건한 여러 형들에게서 거의 전부 비롯되었다. 그러니 지금 나누려는 PCA(미국장로교) 교단의 미래에 대한 나의 짧은 생각들은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들의 어깨를 내어준 형들에게서 빌려 온 것임을 알아주길 바란다. 여기서 ‘형’이라는 단어는 사회 계층이나 나이 차이 이상의 것을 표현한다. 특히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형과 동생 사이에 일어나는 깊은 애정, 신뢰, 헌신, 희생, 가르침 모두를 의미한다. 러셀 무어(Russell Moore)는 존 스토트(John Stott)를 기리는 최근 글에서 스토트가 사역을 하면서 겪은 문화적 도전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스토트는 교리와 선교 모두에서 진실성(integrity)을 강조했다. 이런 이유에서 스토트는 성경이 ‘둘 중 하나’라 한 것을 ‘둘 다’라고 하는 것을 거부했다. 여호와와 바알, 하나님과 맘몬, 예수와 가이사 둘 다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 성경이 ‘둘 다’라고 한 것을 ‘둘 중 하나’라고 하는 것도 거부했다. 은혜와 진리, 해석과 적용, 전도와 정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책임과 자비, 확신과 존중, 지성과 감성, 교단에 뿌리를 두는 자세와 글로벌하게 연결되는 자세, 여기서 우리는 ‘둘 다’여야 한다. 다양한 이슈와 아이디어가 우리를 사방팔방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바로 지금, 이러한 접근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바람직한 균형을 잡아 준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것은 상당한 지혜를, 여러 형님들의 지혜와 균형을 요구한다. 사실은, 내가 주장하는 지혜는 우리 모두의 지혜다. 우리는 서로의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서 미리 언급할 것은 우리가 PCA의 미래를 구상할 때,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이 정확하게 말했듯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우리 교단의 근본적인 정체성과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 무오한(inerrant) 성경은 신앙과 삶의 유일하고 정확한(infallible) 규범이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에 요약된 위대한 개혁주의 교리는 참되며, • 지상 명령은 우리 교회의 소명이다.이것에 더하여,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다가가서 가르쳐야 하는 것은 막중한 책임이요 특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지역사회에서 전도와 제자훈련은 필수적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앞을 걸어간, 나에게 어깨를 내어 준 이들에게 내가 빚진 이유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막중하고 두렵지만,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 많은 디도서 2장의 우리 ‘형’들의 은사 덕분에, 우리의 미래는 밝다. 나는 우리에게 많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이제 PCA의 미래에 대한 내 생각에 영향과 도움을 준 두 형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형, 돈 카슨 돈 카슨은 내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 지도교수들 중 한 분이었을 뿐 아니라, 지역 교회의 목자들이 양들을 잘 먹이고 보호하려면 얼마나 성경적, 역사적, 세계적이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분이다. 카슨 박사는 신약성경의 세심한 학문적 업적과 가르침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전도와 세계 교회에 대한 그의 열정도 알고 있다. 특히 주석과 성경 신학 분야에서 학자로서 쌓은 성과와 더불어, 그는 국내외를 순회하며 특정 단체를 확장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복음 중심의 ‘운동’을 육성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편향적 이슈를 조장하는 편협한 조직이 아닌, 복음 중심의 글로벌 운동을 육성하는 아이디어는 탐구할 가치가 있다. TGC의 글로벌 비전에 대해 카슨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우리 TGC는 해외 그룹들이 미국의 통제를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일종의 새로운 전 세계 선교라는 식으로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고, 효과적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친교를 전 세계에 이루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그가 한 말을 눈여겨보자. 여기서도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그는 일종의 미국 교구가 세계 교회에 권위를 행사한다는 식의 생각이 아니라, 목회자와 지도자로서 우리의 소명에는 같은 생각을 가진 전 세계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함께하는 동역이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미국 기독교가 아니라 세계 기독교를 촉진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겸손하게 인정할 때 많은 혜택과 축복이 온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통계에 익숙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볼 때, 지난 100년은 “교회”의 구성 요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세계 기독교의 지도가 바뀌었다. 예를 들어, 1900년이 시작되든 시점에는 세계 기독교 인구의 90퍼센트가 미국과 유럽에 거주했고 10퍼센트만 비서구권(Global South와 Global East)에 살았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2000년에는 세계 기독교 인구의 단 30퍼센트만이 미국과 유럽에 살았고, 거의 70퍼센트는 비서구권에 거주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성공회 인구가 영국과 미국의 성공회 인구를 합한 것보다 더 많다. 공산 국가 중국의 기독교 인구가 유럽 전체 기독교 인구보다 많다. 바로 이런 변화 때문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 같은 선교학자들은 현실(real) 기독교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기본 전제를 버려야 하며, 우리 안에 있는 잠재적 맹목성을 재고하고 서구 기독교가 문화적 우상숭배에 감염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TGC 설립자인 돈 카슨과 팀 켈러(Tim Keller)는, 개혁주의 유산 안에 있는 역사적, 고백적 기독교의 중심을 회복한다는 그들의 목표에 더하여, 복음 중심적이고 복음 주도적인 사역 운동을 통해 공동선을 추구하는 대항문화적 교회들에 속해 있는 같은 생각을 가진 목회자들의 연합을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이 사역에는 반종교의 위험과 종교의 위험으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는 것도 포함된다. 목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삼가고” 또 “온 양 떼를” 잘 보살피라는 사명을 받았다. 성령은 우리를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사나운 이리들”을 막게 하셨다(행 20:28-29).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하나됨을 추구하면서,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 1:3)는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됨을 위해서 순결을 희생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다양한 위험 수준을 볼 수 있는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요즘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있다. “( )가 기독교 교회에 큰 위협이다.” 우리는 이 빈 칸을 인종차별, 성차별, 여성우월주의, 근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전통주의, 실용주의, 개인주의, 또 모든 것을 망라하는 놀라운 단어 ‘깨어있음’(wokeness, 또는 ‘사회정의각성운동’)로 채울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런 이념들의 위험성을 좌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실제적이고 현재적인 위협이다. 깨어 있는 목자로서 우리는 양 떼를 삼키려고 위협하는 이리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더 넓은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것들 하나하나의 위치를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광범위한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옛 철학들에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전 세계의 그리고 지난 세대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우리만 독특하게 겪는 것일 수도 있는 위협들에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협들은 그저 새 부대에 들어 있는 묵은 포도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혁명 뒤에 있는 더 큰 위협을 알면 도움이 될 것이다. 칼 투르먼(Carl Trueman)이 잘 설명했듯이, 트랜스젠더 혁명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 세상의 신념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자기표출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따라서 시야를 넓히면 그 증상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양 떼의 영적 건강을 실제로 위협하는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 신학적 중증도 분류 더 크고 넓게 생각하면 목자로서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인 신학적 중증도 분류(triage)를 실시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환자의 의학적 응급 상황, 우리의 경우에는 영적 응급 상황에 대한 우선순위를 매기는 법을 지혜롭게 분별하는 것이다. 병원의 응급실이나 전장의 최전선에서 의료진은 먼저 어떤 환자를 가장 먼저 돌봐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다른 위협보다 더 위험한 위협이 있으므로, 긴급성 판단은 현명한 절차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 나는 이것을 2005년에 앨버트 몰러(Al Mohler)에게서 배웠는데, 그는 생사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해서 이 의학적 비유를 썼다. 그는 신학적 긴급성을 세 단계로 분류했다.• 1 단계는 기독교 신앙에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제1 순위 교리를 포함하는데,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 및 인성, 이신칭의, 성경의 권위 같은 것들이다. • 2 단계, 또는 제2 순위 교리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중대한 경계선들을 설정하기도 하는 것들이다. 몰러는 세례의 의미와 방식, 목회 사역에서 여성의 역할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신념과 실천의 틀을 형성할 신자들 사이에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 3단계, 또는 제3 순위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친교를 유지하는 것들이다. 종말론 논쟁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나는 몰러의 분류에 대한 장단점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비유에는 허점이 있고 미묘한 뉘앙스를 더 많이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인정한다.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말하려 하는 것이다. 1. 목자로서 우리의 임무 중 하나는 목회 우선순위라고도 알려진 이 신학적 중증도 분류라는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다. 2. 이러한 중증도 분류는 더 폭넓은 관점에서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을 바라볼 때 현 사회 문제들은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고려하는 것을, 그리고 3. 이 지혜를 우리만의 특별한 양 떼를 먹이고 지키는 데 적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크게 생각하라, 작게 생각하라 다시 말하면, 우리는 크게 생각하고 작게 생각해야 한다. 크게 생각한다는 것은 위를 보아야 하고 또 아래를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에 하시는 일을 보려면 우리는 글로벌한 시각으로 그리고 역사적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북미 교회가 당면한 몇 가지 문제를 보도록 도울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작게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과 우리의 동역 목자들의 집단적 지혜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특별한 양 떼에게 진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가 우리나 우리 양 떼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아닌지 훈련하고 왜곡하게 해서는 안 된다. TGC 블로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 벗어나라. 온라인에서 가장 크게 지르는 소리의 볼륨을 줄여라. 그리고 여러분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보살피는 최선의 길이 어떤 것인지 주의하여 분별하라.” 현명한 조언이다. 둘째 형, 팀 켈러 돈 카슨의 지혜와 더불어, 나는 TGC의 또 다른 설립자인 팀 켈러에게서 배울 수 있는 크나큰 축복을 누렸다. 켈러 목사가 어떻게 설교와 출판 사역을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이 세대에 도움이 되는 그의 통찰에 대해 몇 가지를 나누려고 한다. 2017년 켈러 목사는 총회에서 우리 교단에서 발견되는 세 주요 분파, 소위 교리주의, 경건주의, 문화주의가 가하는 다양한 충격들을 상기시키는 연설을 했다. 미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의 역사에 대한 조지 마즈든(George Marsden)의 이해에 영향을 받은 켈러 목사는 2010년 쓴 글에서 이런 갈등들을 지적했다. 교리주의자들은 우리 가운데 “정체를 숨긴 자유주의자”가 있고 일부 교회의 사회적 참여 강조가 필시 교리적 타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항상 걱정한다. 사회 정의(문화주의) 분파에 속한 사람들은 우리 교단에 문화적 반동으로 기우는 사람들이 있으며, 사회 참여에 대한 공포증으로 인해, 과거에 보수파들이 (가령 노예제도를 두고) 그랬던 것처럼, 불의에 눈을 감고 있다고 걱정한다. 경건주의 분파는 전도의 열정이 부족한 것을 큰 죄로 여기고 다른 분파들의 영적인 생명력을 의심한다. 이렇게 문제가 발생하고, 억눌린 에너지(공포와 좌절)가 터져 나온다. 각 분파가 저마다 중요한 성경적 통찰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각자 고유한 약점이 있다. 각 분파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정확하다. 켈러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교리주의 분파는 그 순수함을 버리고 교만과 독선을 낳을 수 있다.…경건주의 분파는 매우 실용적이고 결과에 신경을 쓰며, 징계나 신학적 논쟁 과정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한다…문화주의 분파는 현대 학문에 지나치게 매료되고 있다. [더불어 그에 상응하여 정통 신학의 침식을 초래하고 있다.] 이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이 분석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의 대부분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이러한 충격들에 기인한다.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더 복잡하고, 솔직히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장로교 시스템에서 솔직한 대화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 대화를 우리가 정치화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이렇게 하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더욱 더 멀어지고 있다.켈러 목사는 한 교회가 이 분파들 중 하나를 제거하려고 할 때, 또는 한 분파가 너무 낙심하여 교회를 떠나려 할 때, 그 교회는 한 두 세대 안에 젊은 지도자들이 그 떨어져 나간 가지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켈러가 바르게 지적했다고 생각하다. 켈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리차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는 교리주의자들은 믿음을 전파하는 일보다 (이단적인 “감염”에 맞서서) 믿음을 수호하는 일을 더 잘하는, 백혈구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곤 했다. 경건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실용주의 때문에 믿음을 전파하는 일을 더 잘하지만, 종종 교리에 대한 무관심이나 쇠퇴에 문을 열어 준다는 점에서 적혈구와 같다. 적혈구보다 백혈구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백혈병이고, 백혈구보다 적혈구가 지나치게 많은 상태가 에이즈이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편할 수는 없지만 함께 있으면 훨씬 더 견고하고 활력이 넘친다.다른 말로 하면, 우리 모두 더 나은 형들이 되어야 한다. 각 분파는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분파를 필요로 한다. 각 분파에는 저마다 사각지대가 있다. 다시, 켈러 목사의 말이 도움이 된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주제가 인종차별이건 섹슈얼리티이건 상관없이, 우리의 신앙고백을 포기해서도 안 되며, 서로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인종차별과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한 작금의 대화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지극히 중요한 문제이며 따라서 우리에게도 그렇다. 그러나 켈러 목사가 정당하게 제안한 바와 같이, 온라인에서 논쟁하거나 교회 재판부에 회부하기 전에 필요한 시간을 내어 차이점을 논의하고 서로에게 배워야 한다.지난 16개월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이 시대에 목사로 산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PCA를 이토록 위대하게 만드는 것, 곧 믿음과 삶을 위한 유일한 규범으로써 무오한 성경에 충실하겠다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약속,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에 요약된 위대한 개혁주의 교리에 진실하겠다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약속, 지상명령을 완수하겠다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약속에 계속 초점을 맞춘다면, PCA의 미래는 밝다.그러므로 우리가 성실성을 가지고서 우리를 PCA 되게 하는 일에 전념하듯이, 우리는 또한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간구하시는 하나됨을 위해 분투해야 하다. 하지만 이 성실성과 이 하나됨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서로 앞에서 겸손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위대한 구원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 위대한 복음은 우리가 서로를 위해 희생할 때 우리가 하는 일에 지속해서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이 성실성과 하나됨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서로 앞에서 겸손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서로의 어깨 위에 서야 한다.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서라 이런 희생적인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나의 또 다른 형인 브라이언 채플은 그의 책 ‘서로를 위해’(Each for the Other)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두 형제가 강변 모래 둑에서 놀기로 했다. 우리 마을은 이 강에 의지해서 상업을 하기 때문에 준설선이 정기적으로 강바닥에서 모래를 긁어내어 강 옆에 쌓아 큰 언덕을 만든다. 아이들에게는 이 모래 산더미에서 노는 것보다 더 재밌는 것도 없지만, 그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준설선이 강바닥에서 훑어낸 젖은 모래는 강변에 버려진다. 이 모래 더미는 겉만 단단하게 건조되는데 종종 모래에서 빠져나간 물이 그 속에 동굴을 만든다. 아이들이 이런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이 있는 모래 언덕을 오르면 그 표면이 쉽게 동굴 안으로 무너져 내린다. 언덕 위의 모래가 빠르게 빈 공간을 채우고, 아이는 패인 구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두 형제가 그 큰 모래 언덕으로 질주했을 때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났다. 형제가 저녁시간이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과 이웃들은 수색에 나섰다. 그들은 동생을 찾았다. 머리와 어깨만 모래더미 위에 남아 있었다. 몸에 가해진 모래의 압력 때문에 정신을 잃은 채 있었다. 수색하던 사람들이 미친 듯이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모래를 치우자 동생의 의식이 돌아왔다. “형은 어디 있니?” 그를 구한 사람들이 큰 소리로 물었다. 동생은 대답했다. “제가 지금 형 어깨 위에 서 있어요.” 형이 자기 목숨을 희생하여 동생을 안전하게 떠받쳤던 것이다. 우리를 형제요 자매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히 2:11) 분도 그렇게 하셨다. 우리의 큰 형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방종과 자기중심의 죄에서 우리를 풀어 주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우신 어깨 위에서 하나님 앞에 서고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예수님은 교회의 평화와 순결과 일치를 추구하라 우리를 부르신다. 서로의 어깨 위에 서는 법을 배우라 부르신다. 나는 PCA의 미래를 이렇게 그린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굳게 잡고 서로를 붙잡아 주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힘을 얻어 모두가 갈망하는 성실과 겸손과 일치를 이루는 곳이 될 것이다. 우리의 큰 형이신 예수님과 그의 희생을 생각할 때, 나의 기도와 소망은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형이신 예수님을 따라 서로를 어깨에 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라도. 원제: Julius Kim’s Older Brothers (‘Hyungs’ 형) in the Fai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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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Swindell • Michael Swindell
2021-11-17
지난 10년 동안 함께한 사역 기간 중 우리 부부는 다섯 군데 도시에서의 삶을 경험하였고 다섯 곳의 다른 교회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각 교회에서 우리는 소그룹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종종 소그룹을 인도하기도 하였다.사역지를 옮길 때마다, 나(Ann)는 활력이 있고 생명력을 주는 소그룹 모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우정과 동료애를 갈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였다. 나는 의미 있는 우정을 갈구하였기에 종종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보다는 소그룹의 친구들과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나의 이런 나쁜 성향은 우정이라는 것을 얻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것을 몰래 숨기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나(Michael)는 우리 교회의 소그룹을 인도하는 목회자이며, 우리 팀은 내향적이면서도 외향적인 분위기를 끌어내기 위해 사역한다(행 2:42~47 참조). 이런 유형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단시간에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우리 소그룹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교인으로 사는 동시에 그 소그룹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선교적 시선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할 때 작은 변화들이 모여 큰 결실을 거둘 수 있다.여기 사랑이 넘치는 소그룹과 선교적 사역의 문화를 키울 수 있는 네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1. 함께 사역하는 방법을 택하라우리 교회는 건강한 소그룹 모임을 위한 네 가지 핵심 실천 활동을 장려한다: 성경 공부, 기도, 서로를 돌보는 것,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외부를 향한 봉사와 선교 활동이 그것이다. 각 그룹의 필요성과 시기에 따라 이 네 가지 요소는 각각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예배 지향의 목표는 항상 최우선이다.이것은 어떻게 시행하는 것일까? 어떤 그룹에는, 그것은 성도 중에서 재정적이거나 영적인 지원이 필요한 누군가를 돕는 것일 것이다. 다른 그룹에는 그들의 삶 가운데 있는 불신자들과 복음을 나눌 기회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의 현재 소그룹은 지역 주립대학에 대한 봉사활동을 추진하기로 했고, 우리는 이번 시즌에 도움이 될 최선의 방법을 위해 캠퍼스 사역의 리더들과 협의 중이다.각 그룹이 어떻게 외부 활동을 택하든 간에, 우리의 소그룹 사역 훈련은 자신의 그룹이 그들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고 도전하듯, 우리는 더 넓은 의미의 교회와 공동체에 축복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2. 새로운 구성원들에게 (최대한) 당신의 그룹을 개방하라우리가 몇 년 전 세인트루이스에 살 적에 우리는 한 교회를 석 달간 방문했다. 그 기간, 우리는 여러 사람에게 그들의 소그룹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매번 안된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들의 그룹은 이미 꽉 찼거나,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거나, 아이들을 돌봐줄 여유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Ann)는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충격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우리는 그 교회에 등록하지 않았는데, 큰 이유는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교회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마이클은 신학교에 있었고, 어느 교회의 네다섯 개 소그룹이 우리를 막았다는 이유로 교회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나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그런 거절에서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가 필요했지만 그로부터 배제된 경험을 당한 사람들은 그 교회뿐만 아니라 아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도 멀어지게 될 것이다.소그룹의 참여 인원에 지속적인 변화가 있다면 그룹 내에서 신뢰와 친밀감을 쌓는다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성장과 동질감을 위해서는 일관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하지 않는다면 이런 이기주의적 성향은 소그룹을 파벌화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소그룹 구성원들이 (주먹을 움켜쥐지 않고) 두 손을 벌리고 소그룹을 붙들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깊은 우정과 권유할 기회에 감사해야 하며, 동시에 다른 구성원들도 자신만큼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룹 멤버들이 소그룹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눈과 귀를 열어 두라는 권면을 받을 때 이는 교회의 사명을 최전선에서 지키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제자 삼는 일을 수행할 제자들을 모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우리의 소그룹에서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차단하려 하지 않고 나그네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으신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엡 2:19).3. 선교사 가족을 선정하여 기도하고 후원하라소규모 모임의 시선을 외부로 향하도록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역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여러 선교사를 지원하고, 선교사 가족을 ‘입양’함으로써, 소그룹이 육체적으로는 함께 하지 못하지만, 더 큰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 다른 사람들에게 집중할 수 있다.기도와 재정적 지원 그리고 격려의 선물이나 편지를 보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그룹이나 개 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지역 가까이에서나 세계 어느 곳에서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사역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이 섬기는 사람들의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하여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운다.4. 소그룹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예배에 참석하게 하라소그룹의 모든 구성원이 반드시 교회의 등록 교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배 참석이 교회의 멤버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요구된다면 그 분위기는 구성원 모두가 회중의 일원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경험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우리 교회에서 교인들은 유년 주일학교에서 봉사를 하든 주차 봉사 위원이든 안내위원이든 부서 활동에 참여할 것을 권면한다. 어떤 이들은 청년부에서 멘토로 봉사하고, 어떤 이들은 교회의 조경 작업에 기쁘게 참여한다.이러한 부서에서의 활동들은 주로 사람들이 가진 관심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과의 다양한 교류의 기회가 생길 수 있다. 서로 다른 소그룹의 구성원들이 아마 같은 부서가 아니라면 접해보지 못할 기회를 얻어 성도들 간 다른 사람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개별적인 소그룹뿐만이 아니라 교회와 전반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소그룹은 친밀감과 우정의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면서 교회 생활을 풍부하고 의미 있게 하는 측면을 제공한다. 조금만 노력하면 언제든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외향적인 신앙인으로서의 문화도 키울 수 있다.원제: Keep Your Small Group Facing Outwar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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