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경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by Paul Tripp
2021-12-13
다가오고 있다. 벌써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우리 가족에게 공격이 임박했다. 테러리즘이나 허리케인, 산불 같은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다. 은밀하고, 매력을 발하고, 흥미를 끄는 공격이다. 훨씬 더 위험한 공격이다.우리 가족에게 ‘크리스마스 연휴의’ 공격이 임박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폴 트립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제 설명하겠다.크리스마스 시즌이 우리 앞에 와 있다. 이 시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으나 하나님을 반역하여 길을 잃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반응을 기억하는 영광과 평화의 때가 되어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반응은 정죄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최종의 선물, 곧 자신을 내어주신 은혜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경배하고 경축해야 할 이 평화의 시간이 우리가 가정에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하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아름다운 장식이나 가족모임, 선물이 문제될 건 없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온 가족이 다시 모이고, 관계를 새롭게 하고,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다만 내가 염려하는 까닭은, 이 시즌에 어떤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의 생각, 곧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어떠한지를 규정할 것이냐를 놓고 한판 전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어떤 규정된 이야기의 의미를 먹고 살아간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두 개의 이야기가 맞서 싸우는 전쟁이 되었다. 한 쪽은 매력이 넘치고 흥미를 끄는 이야기인데, 근본이 가짜다. 다른 한쪽은 우리를 너무나 낮아지게 만드는데, 모든 사람에게 어디서든 필요한 이야기다. 가짜 크리스마스 이야기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가 들려주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을 중심에 올려놓는다. 사실 그 자리는 하나님을 위한 자리요 하나님만을 위한 자리다. 이 이야기는 창조주 경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기대하는 것은 피조물의 자기만족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가장 먼저 채워야 할 것은 물질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구속자의 구원의 개입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순간의 위안이다. 영원히 중요한 것들이 아니다. 이 시즌에 우리 아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위험하고 잘못된 이야기를 온갖 경로를 통해서 거듭거듭 듣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에게 위로가 없는 곳에서 위로를 찾으라고 말한다.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에 희망을 걸라고 말한다.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라 말한다.진짜 그리스도 강림 이야기그러나 이 가짜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달리, 진짜 ‘그리스도 강림 이야기’는 우리를 낮아지게 하고 아무 매력도 없다. 이것은 죄악으로 끔찍하게 망가진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파멸에 기꺼이 가담하려는 인간들이, 자기중심에 빠진 반역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한 슬픈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지음 받았지만 모든 면에서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 창조주께서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피조물 가운데로 들어오신 이야기다. 너무나 절박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구속의 희생양이 되게 하신 상상하지도 못 할 일을 하신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질문하는 이야기요, 우리가 길을 잃었고, 죄의 종이 되었고, 자기기만에 빠졌으며, 그래서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답해 주는 이야기다.이 나쁜 소식을 듣고 이해하기 전까지, 우리 아이들은 좋은 소식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에 오셔서 살고, 죽으시고, 다시 사시는 영광스러운 은혜의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는 소식이야말로 우리가 축하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소식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 소식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임을 깨닫게 된다. 진짜 전투에 나서라이 시즌에 치러야 하는 전투는 대중 캐럴을 부를 것이냐, 복음 캐럴을 부를 것이냐가 아니다. 성탄 예배를 드릴 것이냐, 가족 모임을 할 것이냐가 아니다. 진짜 전투는 우리 아이들이 믿게 될 것이고, 또 마음을 다해 추구하게 될 정체성과 필요, 의미, 목적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삶은 실로 이야기들의 전쟁이다. 진짜 이야기가 내는 목소리가 가장 커질 때, 그 전투도 가장 치열해진다. 선물도, 장식도, 별미도 즐기길. 하지만 가족에게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올해는 일찌감치 다가올 전투에 다함께 대비하길 바란다. 휴일 분위기에 정신을 빼앗기기 전에, 아이들의 마음을 지켜내기 위한 전투에 나서길 바란다.마음의 전쟁을 위한 무기 5가지우리 아이들이 진짜 그리스도 강림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줄 5가지 방법이다.1. 일찍 시작하라. 어디서나 가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진짜 이야기를 일찍 시작하지 않고서는 충분히 들려줄 수 없다.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가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2. 나쁜 소식을 전하라.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된 나쁜 소식을 전하여, 가족을 가짜 뉴스로부터 보호하라. 나쁜 소식으로 시작하지 않는 좋은 소식은 진짜 좋은 소식이 아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이야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이야기임을 우리가 절실하게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3. 가짜 이야기를 경고하라. 전통을 즐기고 즐거운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아이들이 반복해서 듣게 될 가짜 이야기가 어떻게, 왜 진짜가 아닌지 가르쳐 줄 기회를 잡아라.4. 선물 중의 선물, 예수님을 선물하라. 선물을 주고 사랑을 표현하라. 다만 아이들에게 피조물은 만족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오직 한 선물, 곧 예수님의 성육신과 임재와 일과 은혜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어라.5. 그리스도 강림 이야기를 곳곳에 심어라. 그리스도 강림절은 예수님의 탄생과 삶, 죽음, 부활이라는 좋은 관점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다. 그리스도 강림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 이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이 그들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이해하고자 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님의 은혜가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선물보다 더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우리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 빛은 절대 꺼지지 않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원제: Warning: Christmas Is Com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성탄절
크리스마스
대림절
예수그리스도
복음
팀 켈러의 ‘크리스마스는…’ 20선
by Matt Smethurst
2021-12-12
다음은 팀 켈러 탁월한 저서 <팀 켈러의 예수, 예수: 이 시대가 잃어버린 이름>(Hidden Christmas: The Surprising Truth Behind the Birth of Christ, 두란노 역간) 중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대목들이다. 01다른 불빛이 다 꺼질 때에도 그분만이 우리를 위한 빛이시다(34). 02 크리스마스의 주제는 단순히 출생이 아니라 강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일은 창세전부터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43). 03크리스마스가 정말 실화라면 인류 전체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들이 전혀 오락용 현실도피가 아니라는 뜻이다. 복음이 실화이기에 그런 최고의 이야기들도 궁극적으로 모두 실현될 것이다(53). 04당신의 시간표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는 없다. 더디어 보일 수 있으나 그분은 결코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 일하시는 속도가 아주 느리거나 아예 약속을 망각하신 듯 보일 수 있지만, 그분이 하신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며, 그분의 약속이 실현될 때는 언제나 당신의 상상을 초월한다.…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무난하다고 여기는 기간이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사실상 전무하다(62-63).05히브리 세계관은 인간이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개념을 철저히 배격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입에 담거나 글로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장 가까이 따르던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삶과 주장과 부활을 통해 이런 확신을 심어 주셨다.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법을 알려 주는 한낱 선지자가 아니라 우리를 찾으러 오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이다(73-74).06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주장은 또한 우리에게 최고의 희망을 준다. 이는 우리 사는 세상이 존재의 전부가 아니고 죽음 후에도 삶과 사랑이 있으며, 언젠가 악과 고난이 끝난다는 뜻이다. 끝없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희망이 있을 뿐 아니라, 끝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내게도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79).07하나님이 거룩하기만 하신 분이라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냥 우리 스스로 분발해서 거룩하고 착해짐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를 얻어 내라고 요구하셨을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뭐든 다 받아 주는 ‘사랑의 신’이라면 굳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죄와 악을 묵과하고 무조건 우리를 품어 주는 이런 신은 현대인들이 지어낸 것이다. 도덕주의의 하나님이나 상대주의의 하나님이라면 크리스마스의 수고를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79)08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삶에 들어오시면 흠 없는 평판과는 작별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아직 마태복음 1장이 그 정도이고, 2장으로 넘어가면 요셉은 더 많은 사실을 깨닫는다. 예수님을 삶에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그는 사회적 지위만 훼손당한 게 아니라 목숨까지 위태로워졌다. 우리에게는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삶에 받아들이려면 용감해야 한다(92).09그리스도께 가려면 당신의 조건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만약 ~하면 순종하겠습니다. 만약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권리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순종에 조건을 다는 순간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주님은 제 주인이 아니라 조언자입니다. 주님의 권유를 기쁘게 받아, 가능하다면 그중 더러는 시행해 보기도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당신 마음대로 인생을 결정할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아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후기 현대의 문화와 충돌하지만, 우리는 바로 거기로 부름 받았다. 그 이하로는 안 된다(95).10당신이 그분과 함께 있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분이 당신과 함께 계시는 데는 무한히 더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가 하나님의 속성인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용기가 필요한 신은 다른 어느 종교에도 없다(98).11우리는 종교를 통해 하나님을 길들이려 한다. 온갖 행위를 통해 그분을 우리의 채무자로 만들려 한다. 우리가 바라는 방식대로 그분이 복을 주실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주권에 적의를 품는다. 다만 그것을 종교적인 방식으로 표출하거나 감출 뿐이다(112).12‘왕이 어디 계시냐?’ 그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가장 소동하게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저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삶의 왕좌를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또 종교를 이용해 그 왕좌를 고수할 수 있다. 조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내 의를 내세워 그분을 내 말대로 하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종교를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어, 신은 없다고 목청 높여 주장할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참되신 왕의 주권에 맞서 본능적 적의를 표출하기는 마찬가지다(112).13이렇듯 크리스마스의 사실성 여부에 정말 중립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정말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면 우리는 이미 자신의 삶을 주관할 권리를 잃었다. 어떤 주장이 사실일 경우 당신이 자신의 삶을 통제할 권한을 잃는다고 하자. 누가 그 주장에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당신도 객관적일 수 없다. 당신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점을 늘 염두에 두기 바란다. 당신의 회의에 의문을 제기하라(115).14왜 그들을 택하셨을까? 하나님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누누이 말씀하신다. ‘나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나사렛을 택하겠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소녀를 택하겠다. 모두에게 잊혀진 소년을 택하겠다(120).15천사가 나타나 말을 건다면 당신도 마리아와 똑같이 반응할 것이다. 당신과 나는 초자연적 세계를 믿지 않도록 문화적으로 교육받았다. 앞서 보았듯이 유대인인 마리아도 행여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수 있다는 개념을 믿지 않도록 문화적으로 교육받았다. 따라서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믿지 못하게 그녀를 막아 선 장벽은 종류만 달랐을 뿐 당신 앞의 장벽과 똑같이 높았다. 그런데도 증거와 체험이 합해져 그 장벽을 허물었고, 마리아는 결국 믿었다. 믿음의 원리는 지금도 똑같다. 그녀는 회의와 의문을 품었고 이성을 움직여 질문했다. 오늘날 우리도 믿으려면 똑같이 해야 한다(133).16기독교 신앙은 흥정이 아니라 순복이다. 당신이 자신의 삶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의미이다(148).…순복의 가장 큰 동기는 그분이 우리에게 해주실 일이 아니라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어야 한다. 그분이 이미 우리를 위해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154).17크리스마스란 하나님의 은혜와 성육신을 통해 그분과 화평해질 수 있고, 일단 그분과 화평해지면 밖에 나가 다른 누구와도 화평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복음을 받아들여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된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를 통해 온 세상에 평화가 증대된다. 하나님과도 화목하고 사람들끼리도 서로 화목해진다(172).18크리스마스의 구유는 당신도 예수님처럼 살면 웬만한 여관에 당신의 방이 없을 거라는 뜻이다(185).19지난 세월 내게 이런 식으로 말한 사람들이 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잘 모르겠다. 성육신이나 온갖 교리를 왜 믿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착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착실하게 사는 것이다’라는 그 말도 교리다. 이것을 가리켜 은혜 구원이 아닌 행위 구원의 교리라 한다. 거기에 깔린 전제는 당신이 구주가 필요할 정도로 죄인은 아니며, 스스로의 힘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실상 당신은 하나님과 인간과 죄의 속성을 총망라한 일련의 교리를 주창하는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는 그게 다 틀렸다고 말한다(200-201).20크리스마스가 그럴듯한 전설에 불과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사실이라면(사도 요한은 전적으로 실화라고 증언한다) 당신은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203).원제: 20 Quotes from Tim Keller’s New Book on Christm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윤종석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의의미
팀켈러
팀켈러의예수
세계관
나사렛
성육신
다문화 크리스마스
by Michelle Reyes
2021-12-11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시점은 제1 세기다. 이 이야기에 백인은 단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축하하는 크리스마스에는 으레 바닐라 향이 진하게 풍긴다. 마구간 장식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는 백인이다. 성탄을 축하하는 식탁 위에는 온통 앵글로아메리카 음식뿐이다. 예배에서도 유럽풍 찬송가만 부른다. 물론 유럽계 사람들도 자기네 고유의 민족 문화를 일관되게 담아낼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수많은 백인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은 다양성이 부족한 이 크리스마스 축하 문화가 왠지 불편하다. 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지 자문하면서….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 저마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탄생을 바라보는 다양한 문화적 관점들을 포용하면서 말이다. 새로운 관점 갖기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다(마 28:1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인종 구분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가닿는다(눅 2:10). 예수 나심의 사실이 이러하니, 우리는 저마다의 문화를 가지고서 성탄을 이해하고 또 축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문화 공동체에서 함께 성경을 읽다 보면,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방이 그네의 문화에 젖어서 볼 수 없는 성경의 진실을 볼 수 있도록 서로서로 도와준다. 미국에서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른 문화와 다른 민족적 자질을 갖고 있는 성도들로부터 배우기를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의 믿음이 새롭게 풍성하게 그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그저 크리스마스 식탁에 여러 나라 음식을 함께 올리거나 여러 문화권의 옷이나 장식을 갖다놓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에서 저마다 의미를 두는 요소가 특별한, 각 문화의 고유한 이야기(내러티브)를 서로 알아가자는 것이다. 포사다스, 거절당한 이들 기억하기중남미 사람들은 포사다스(posadas, ‘임시숙소’ 또는 ‘여관’)를 경축한다. 이 절기에 사람들은 친구 집을 방문하여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에서 묵을 방을 얻지 못하고 거절당한 사실(눅 2:7)을 재연한다. 포사다스는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이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 전통은 예수님이 거절당한 사람들과 함께하셨다는 것을,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일러준다. 포사다 절기 중에 사람들은 노래와 음식을 이웃과 나눈다. 이는 가진 것이 적더라도 하나님과 이웃에게 기꺼이 나누며 살겠다는 다짐이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 편에 함께 서겠다는 연대감의 표현이다.키악, 모욕당한 이들과 함께하기이집트의 콥트 그리스도인들은 잉태한 마리아의 이미지에 주목하는 키악(Kiahk) 전례를 따른다. 이를 통해 그들은 대림절이 마음을 다해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간임을 되새긴다. 많은 콥트 그리스도인들이 12월 한 달 동안 금식한다. 그들은 마리아가 자신에게 임한 수태의 신비로 인해 받았을 극심한 모욕과 시련을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금식을 하면서 견뎌냈을 것이라 믿는다. 미국화된 이 휴일이 주는 온갖 달콤함과 즐거움에 빠져 있는 우리가 이러한 금식을 실천한다면, 우리 마음이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본래 담겨 있는 고난의 이야기로 향하게 되지는 않을까? 지금 미국 국경에서는 이민자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마리아에만 주목하지 않고, 마리아 앞에 높여 있는 현실의 처지―사생아로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아기를 곧 낳게 되는 연약한 젊은 여자―를 간과하지 않는다면, 이민 위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가짐도 달라지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담겨 있는 마리아의 수치와 믿음을 기억하고 기리는 다른 문화들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다. 빠롤, 반짝이는 그리스도의 빛빠롤은 필리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장식해 놓는 랜턴이다. 전통 빠롤은 대나무와 종이로 만드는데, 오각형 별 모양이 가장 흔하다. 밝은 색감과 반짝이는 빛이 아름다운 빠롤은 저 베들레헴의 별(마 2:9-10)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을 떠올리게 한다. 가정집 창문에 매달건 예배당 안에 줄지어 장식하건, 이 전통은 “세상의 빛”(요 8:12),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강림을 경축한다. 빠롤을 보면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게 된다. “나는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고 있는가?” “나는 이웃과 친구들에게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가?”동방 박사의 날, 이방인의 믿음 기리기‘동방박사의 날’(Dia de los Reyes)에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푸에르토리코, 우루과이, 멕시코에서는 먼 길을 여행하여 진정한 “유대인의 왕”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이방인 박사들(마 2:1-12)을 기념한다.이 박사들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를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2:18; 사 11:10, 60:1-6). 마태복음은 이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으로 끝을 맺는다(마 28:19).‘동방박사의 날’은 우리도 이 박사들처럼 우리 문화의 개성과 표현을 온전히 담아 왕이신 예수께 나아가 경배해야 한다(사 60:11; 계 21:24-26)고 일깨워 준다.다문화 크리스마스 다문화 크리스마스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여, 문화적으로 다양한 관점들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는 다양한 문화들로 우리의 가정, 공동체, 교회를 풍성히 채우면 좋겠다.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길 바란다. “우리 문화유산에는 예수 탄생의 어떤 면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다른 문화에서 배울 수 있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새로운 면은 어떤 것이 있는가?예수님이 태어나신 이야기를 다문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읽고, 서로에게서 이번 크리스마스에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경배할 수 있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그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원제: Making Space for a Multicultural Christm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크리스마스
다문화크리스마스
포사다스
키악
동방박사의날
빠롤
크리스마스이야기
강림
위대한 기도, 더 위대한 응답
by 최성은
2021-12-10
유다 왕국에 위기가 닥쳤다. 주변 국가들이 연합하여 유다 왕국을 침공했다. “연합군 대부대가 사해 바다 저쪽에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미 엔게디까지 이르렀습니다.” 전령이 긴급 상황을 여호사밧 왕에게 보고한다. 유다 주변국 모암과 암몬이 마온 사람들과 결탁하여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한 이 국가 위기 상황이 역대하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남 왕조 유다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태평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약소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까지 했다.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던 이 나라에 별안간 위기가 닥친 것이다.이러한 급박한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국가 최고 지도자는 어떤 조치부터 취할까? 따져 볼 것도 없이 가장 먼저 군대를 소집하고 전시 상황에 돌입할 것이다. 전군에 비상령을 발동하고 국가비상사태 내지는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다. 그게 상식이다. 왕위에 오르고 유다 왕국을 다방면으로 개혁해 온 왕이지만 여호사밧에게도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런 급변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지하 방공호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군사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은신하여 국가안보회의를 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상식에 어긋난다.여호사밧은 계엄령 대신에 국가 금식령을 내린다. 이상하기는 유다 백성도 마찬가지다. 피난 갈 준비는 하지 않고 온 나라가 국왕의 이 이상한 명령을 따른다. 국왕은 몸을 숨기지도 않는다. 여호사밧은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국가비상사태에 대한 대국민 연설을 하려나 보다. 그런데 그 내용 역시 이상하다. 국방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라거나 예비군 소집령에 따르라거나 하는 내용이 아니다. 왕은 군중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주를 위해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돌이켜 그들을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그들이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6-12).국가 위기 상황에서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 드린 여호사밧의 이 기도를 찬찬히 살펴보자.여호사밧이 드리는 기도의 초점은 여호사밧 자신이나 그의 왕조나 그의 백성에 가 있지 않다. 그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고백한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 상기시키신다. ‘하나님은 이러 분이 아니십니까?’ 매우 당돌하다. 계속 이어지는 그의 수사의문문은 마치 하나님을 설득하겠다고 작심이라도 한 듯하다(이 기도는 시종일관 수사의문 문장이다.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모두 9문장으로 된 이 기도문에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이 4개나 된다). 이 당돌한 기도를 살펴보자. 여호사밧의 이 기도는 그 첫마디가 “우리 조상 하나님!”이라는 하나님 부름이다. 왜 조상을 소환하는지는 이어지는 기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부르자마자 바로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마치 하나님께서 잠시 잊고 계시기나 하듯이, 그래서 하나님께 환기시켜 드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힘주어 아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세계 만민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 누구도 맞설 수 없는, “권세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지 않습니까?’ 여호사밧은 “우리 조상의 하나님” 곧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고 확인한다. 이 하나님은 유다는 물론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믿는 이들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안 믿는 이들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악한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곧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어떤 신학자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했다. 이 단순하지만 확고한 믿음을 여호사밧이 지금 국가 위기 앞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휴전이나 강화조약 같은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지 않는다. 전군 비상령을 내리지도, 진군명령도 공격명령도 내리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만 찾을 뿐이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자기 자신에게, 그의 백성에게,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께 되새길 뿐이다. 그의 이러한 고백 속에는 지금 시시각각 좁혀 오는 저 연합군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닥친 이런 상황과 처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렇지만 동시에 여호사밧은 이 위기 상황에서 분명히 자신과 백성이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왕이 되자마자 “주적” 남쪽 이스라엘 왕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국가 방어 체계부터 개혁하고 강화한 자신이(대하 17:1) 오히려 교만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았을 것이다. 바알숭배를 척결하고 우상의 산당들을 일소하려한 자신의 종교개혁도(대하 17:3-4, 6) 돌아보았을 것이다. (사실 그는 이 종교개혁을 완결하지 못했다. “산당만은 철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대하 20:33).) 북쪽 이스라엘 왕조와 정략혼인 관계를 맺고 전략적 제휴를 시도한 뼈아픈 실책(대하 18장)이 시국이 이렇게 되니 다시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지금 이 위기가 자신과 백성의 죄로 인한 것이든 불가항력적인 주변 상황으로 인한 것이든, 여호사밧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한 분 하나님께 오로지 무릎 꿇을 뿐이다.사실, 여호사밧의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 부름은 하나님이 그의 조상에게 하신 약속과 하신 일을 우리가 잊지 않고 있다는 재확인이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조상과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근거로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조상의 하나님, 곧 조상과 약속하신 하나님이심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평소에도 곧 태평성대를 구가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고 그 말씀으로 백성을 가르쳤다.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그의 방백들[을]…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또 그들과 함께…레위 사람들을 보내고 또 저희와 함께 제사장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대하 17:6-9). 이 절체절명의 국가위기 앞에서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기도할 수 있었다.여호사밧이 구체적으로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그리고 또한 솔로몬에게 하신 약속도 들추어낸다. 이제 그의 기도는 현실의 급박한 상황에 더욱 근접한다. ‘우리가 성전에서 주께 부르짖으면 우리를 기근이나 환난이나 전염병에서 구해 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람 연합군이 쳐들어오는 지금 이렇게 성전에 올라와 무릎을 꿇고 주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이제 비장의 카드로 하나님을 압박(?)한다. “옛적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은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을 보십시오.” 옛적 ‘그들’은 지금 유다로 쳐들어오고 있는 바로 ‘그들’이다. “옛적에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우리는 암몬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들을 침공하지 않았는데, 이제 그들이 유다를 침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여호사밧,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약속을 지켜달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는 정곡을 찌른다. 더 나아가 그는 지금 그들이 유린하려고 쳐들어오는 땅은 ‘우리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 “주의 기업”이라고 아뢴다. “그들이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그런 땅을 연합군이 빼앗으려 한다고, 그는 지금 하나님께 핵심을 찔러 일러바치고 있다. 여호사밧의 기도는 이제 맺음 부에 이른다. 조상과 과거를 들추어 하나님께서도 도저히 어찌하실 수 없게 한 그는 거두절미하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요구한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나님, 조상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저들을 무찌를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볼 뿐입니다!’기도는 끝났다. 절박함에서 우러나온 기도였다. 당돌하다 싶을 정도로 간절한 기도였다.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우리 군대에게 힘을 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침공한 연합군을 박살내 버릴 수 있을 것이야.’ 아마도 여호사밧은 이 정도로 예상했을 것이다. 이것으로도 어찌 큰 믿음이 아니겠는가! 기도와 믿음의 군주 여호사밧은 이 기도를 마치고 어쩌면 현실적인 행동에 나섰을지도 모른다. 출정식을 거행할 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차례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의 허를 찌르신다.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 당당히 요구한 여호사밧에게, 하나님도 그 백성 앞에서 당당히 말씀하신다. 여호사밧이 백성 앞에서 기도한 바로 그 자리에서 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 있는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대하 20:14-17). 여호사밧의 기도가 매우 구체적이었던 만큼 하나님의 응답도 매우 구체적이다. 여호사밧의 지난 역사 회고(말)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현재적 행동으로 응답하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놀라지 마라. 이 전쟁은 너희 전쟁이 아니라 내 전쟁이다. 너희는 싸울 필요 없다. 내가 직접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너희는 그 들판에서 구경만 해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그냥 수사가 아니었다. 이 전쟁은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전쟁으로 끝난다. 유다 백성은 전쟁터에 그냥 구경하러 간다. 군악대도 아니고 찬양대가 선두에 서고, 백성은(전투 부대가 아니다) 전장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찬송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암몬-모압-세일 연합군을 전멸시키신다.여호사밧의 기도는 위대했다. 하나님의 응답은 훨씬 더 위대했다.
여호사밧
기도
기도응답
약속
조상의하나님
하나님부름
전쟁
하나님의전쟁
힙합 가수 샤이 린의 ‘인종화합’ 명언 20선
by Matt Smethurst • Shai Linne
2021-12-09
아래에 인용한 샤이 린(Shai Linne)의 글들은 그의 책 <새로운 개혁: 인종화합을 위한 싸움 속에서 희망 찾기>(The New Reformation: Find Hope in the Fight for Ethnic Unity(Moody, 2021)를 읽는 중에 내 눈을 사로잡은 것들이다. 교회 안에서 인종화합(ethnic unity)을 성공적으로 추구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15-16). 마르틴 루터가 이와 같은[반유대인 증오 발언] 죄를 범했을 때,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교리를 고수하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는 그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그리했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 죄를 지을 때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르틴 루터나 조나단 에드워즈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나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96). “인종”(race)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바르게 방향을 잡으려면, 우리는 문화가 아니라 성경을 살펴보아야 한다.…이러한 논의에서 진전을 이루려면, 오직 성경만이 이 주제에 답할 수 있는 처음이요 끝이 되어야 한다(104-105). 어떤 문제가 가하는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사람들에게서 의도적으로 멀어져 있으면, 그 문제의 긴급성은 고사하고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느끼지도 못하게 된다(106).[증오, 우월감, 편애/편파, 억압, 그리고 맹목적 신념]은 인종 문제가 있는 곳에서 유독 그 본색을 드러내는 유별난 죄들이다(113).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일치(unity)는 어떤 것이든 결국 하나님께서 좌절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일치에는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다.…사탄의 속임수 중 하나는 인간 본성에 기인한 일치를 기독교라는 가면으로 위장하는 것이다(120). 바벨탑 이야기 바로 직후에 바로 그 다음 장에서 아브라함이 나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바벨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사람들을 여러 민족으로 온 땅에 흩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도, 하나님도 없는 세상에 사람들을 버려두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그 흩으신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모든 민족을 하나 되게 하시는 계획을 세우셨으며, 이로써 바벨이 품은 악과 하나님이 계획하신 선이 밝히 드러나게 하신다.…하나님의 목적은 바벨탑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민족들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는 것이다(121, 125). 바울의 생각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기를 거절한 것(갈 2:11-14)]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복음의 문제였다. 과거의 민족적 또는 문화적 분열로 회귀한 것은 곧 복음의 진리를 범한 것이다. 복음은 어떻게 말하는가? 복음은 예수님이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인종 집단을 위해 죽으셨다고 선포한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인종 구분도 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우리는 인종을 구별하여 친교를 나눌 사람을 고르는가?(130). 민족정체성(ethnicity)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합당한 반응은 이것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은근히 뻐기지 않는 것이다. 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또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이다. 합당한 반응은 나에게 민족정체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것을 지렛대 삼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백인 형제자매들에게 말씀 드린다. ‘피부색을 봐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길 바란다. 무슨 뜻인지는 나도 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또 피부색이 아니라 내면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을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멋진 일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갈색 피부를 주신 데는 분명한 뜻이 있다. 하나님은 무시당할 수도 있는 이 피부색을 굳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피부색에 내가 감사하길 바라셨다. 다양한 피부색을 만드신 지극히 비범하신 당신이 찬양받으시길 바라셨다. 그러니 피부색을 무시하여 하나님께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찬양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133).전적 타락 교리를 받아들이는 우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영역[인종문제]에서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힘들어 한다. 이 사실이 나를 매우 당황스럽게 만든다. 죄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면서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인종과 관련한 죄를 이겨 내려는 최소한의 투쟁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놀랄 일이다(147).논쟁의 “반대편”에 예수님과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올바르게 예수님을 따르는 쪽은 우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 중에 모든 사람을 다 꾸짖고 기분 상하게 하시기도 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점에서 다 공감해 주신 그런 특별한 사람들일까?(155).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교회의 일치는 결코 숨겨지지 않고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주님이 주신 가르침은 분명하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얻으신 교회가 하나 되어 걸어갈 때, 비로소 교회는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증인이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수단 중 하나가 바로 교회의 일치이다(162). 오늘 교회에서 인종 문제를 두고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그 가운데서 적지 않은 분노를 목격한다. 적지 않은 냉소도 보인다. 용서하지 못하고 서로 조롱하는 모습도 많다. 그런데 내가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모습이다(164). 집단 신음(Collective Groan)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현상이 있다. 일부 독자는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특히 개인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데 익숙하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다른 많은 미국 흑인들과 더불어 나는 지금까지 미국에서 일어난 여러 살인사건들이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흑인들은 이 사건들을 한 민족으로서 우리의 역사적 서사의 맥락에서 발생한 비극으로 바라본다. 노예제의 참상; 짐 크로우(Jim Crow) 시대의 린치(lynchings, 법을 벗어나 흑인들에게 자행된 백인들의 사사로운 처벌 행위); 소방호스와 개를 무기 삼았던 민권운동 시대; 흑인에 대하 부당한 주택 대출 제한; 에밋 틸(Emmitt Till)·메드가 에버스(Medgar Evers)·마틴 루터 킹 살해; 흑인 여자아이 넷이 희생된 버밍엄에서 일어난 교회 폭탄 테러;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한 흑인 교인들이 희생된 찰스턴 학살; 전국의 헤드라인 뉴스들을 장식한, 뜨거운 다리미가 노예의 살을 지지는 것처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신을 그을린 각종 사건들과 그럼에도 뉴스에 나오지 않는 일상의 모든 굴욕과 모욕, 잔인함과 결합된 조부모 시대의 노골적인 차별로부터 아버지와 삼촌을 절망에 빠트린 유리천장; 경찰과 마주쳤을 때는 이렇게 “대화”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많은 흑인 가정에게 뿌리 내린 일종의 통과의례; 그리고 미국에서 흑인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인간으로 대우받기 위해 평생 매일같이 치러야 하는 온갖 투쟁이 된 이 현실, 이 모든 것이 백인 경찰이 비무장 흑인을 죽이는 것을 본 많은 흑인들로 하여금 “또 시작이다” 토로하며 집단 신음하게 하고 있다(173-174).누군가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무시하는 것이, 그들이 가진 진정한 관심사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 주는 것보다 훨씬 쉽다. 누군가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치부하는 글을 써 재끼는 것이, 비록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도탄에 빠진 그들을 위로해 달라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드는 일이다(180-181).유오디아와 순두게(빌 4:2-3)는 무슨 문제로 의견 차이를 빚었으면서도, 영원을 함께 보낼 사이였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갈등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유혹이 있다. 서로의 차이점을 부각하고, 그 차이점을 벽돌과 모르타르 삼아 분리의 장벽을 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동일한 하늘 아버지, 동일한 구주, 동일한 성령, 동일한 믿음, 동일한 소망, 동일한 보편 교회, 동일한 언약, 동일한 약속, 그리고 동일한 영원을 공유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 우리의 문화적 배경, 그리고 우리가 속한 정당보다 훨씬 더 우리의 존재에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타자”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꼭 이것을 기억하자(182-183).회심한 후에 “우리”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나아오기 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실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방식으로 이 단어를 내뱉는 것이다. 옛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 가족, 우리 국적, 우리 민족, 우리 하위문화 그룹, 우리 정당, 우리 성별, 우리 출신 학교, 우리 동료, 우리 스포츠 팬 따위에 제한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새로운 “우리”가 있다. 이 “우리”는 우리가 한때 동일시했던 이전의 모든 그룹을 대체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우리”는 매우 다양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이 새로운 “우리”는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 청년과 노인, 공화당과 민주당, 대도시와 농촌이다. 교육 많은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이다. 상류층과 하류층이다. 이 새로운 “우리”는 국제적이다.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다. 여러 피부색이 함께하는 우리다. 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하나 된 우리다. 그리고 영광된 우리다. 새로운 “우리”는 이렇다(189).나는 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좋아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신 것에 정말 감사한다. 또한 나는 내가 태어난 때와 태어난 곳에도 감사한다. 힙합 문화의 발상지인 뉴욕에, 그리고 힙합이라는 문화가 다섯 자치구를 넘어 발전하고 확장하기 시작한 바로 그 때,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 나는 흑인 문화, 흑인 여성, 흑인 설교, 흑인 음악, 흑인 유머, 그리고 흑인 음식과 그 양념을 좋아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 중 하나는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문화 박물관’에 갔을 때이다. 내 조상들의 끈기, 결단력, 창의성, 그리고 저 노예선의 어두운 선창에서 시작하여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기까지, 비상하는 흑인의 역사 앞에서 나는 겸손과 영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첫째 되는 “우리”는 흑인이 아니다. 나의 첫 째 되는 “우리”는 교회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존귀한 이들…그 안에 나의 모든 즐거움이 있는, 땅에 있는 성도들”이다(시 16:3). 과격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웨스트 필라델피아 출신의 겁이 많은 흑인 힙합 가수인 나는 웨스트버지니아 산맥의 백인 광부, 사우스다코타 출신 주부, 그리고 베이 지역 의 중국계 미국인 의사와 근본적으로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남부 필라델피아 출신의 흑인 힙합 가수 사촌보다 더 그렇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인류의 영광이요 아름다움이다(190, 191).진리 편에 선다는 미명하에 성령의 열매를 버릴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193-194).인종 다양성은 그 자체로 고결한 것은 아니다. 다양성 면에서야 지옥도 뒤지지 않는다.…일치도 그 자체로 고결한 것이 아니다. 지옥도 못지않게 일치를 이룬 곳이다(210, 211).원제: 20 Quotes from Shai Linne on Ethnic U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인종
민족성
인종차별
인종다양성
일치
하나됨
노예제
민권운동
요소수의 절실함, 그리고 기쁨
by 김돈영
2021-12-08
“띠링, 띠링, 띠링∼ 부릉”시동 거는 소리가 시원하다 못해 묵직하고 든든하기까지 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편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운전을 했는데 말이다. 요즘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있다. 바로 요소수다. 경유 차에 넣어서 배기가스를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은 요소수의 존재 자체도 몰랐으나 소위 ‘요소수 대란’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품귀 현상으로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요소수를 좀 전에 가득 넣었다. 차량 계기판에 요소수 부족을 알리는 불이 들어와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가득 채우고 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평안함마저 든다. 아니 날아갈 것 같다. 정말 기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든다.가는 곳마다 품절이라 구하기 어려운 요소수를 얻은 기쁨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시동 걸 때마다 알람이 들어오고, 계기판에 있는 경고등을 보면서 언제 멈출지 모르는 차를 운전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절박함이 없이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씁쓸한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한 요소수를 얻은 기쁨, 그러면 구원의 기쁨은?”이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구원의 기쁨’, 물론 누구도 구원의 기쁨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듣는다면 멈칫할 것이다. 그 기쁨을 삶에서 누리고 있는가? 지금도 느끼고 있는가? 그만큼 구원의 기쁨은 현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안개와 같이 뿌옇고 추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왜 구원의 기쁨이 없는가? 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가? 아니다. 이 질문이 더 와닿을 것 같다. 요소수에서는 왜 기쁨을 느끼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차가 멈출 수 있었는데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 혹은 ‘구할 수 없는 귀한 것을 구했다.’ 앞에 던진 질문에도 답은 비슷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대답은 결국 절박함, 절실함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절실하게 원하는 것을 얻었기에 기쁜 것이다.그렇다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는 절실함이 없다는 말이 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원의 은혜는 세상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라는 사실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 모르기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현실적인 질문을 해 보자. “당신에게 구원은 없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물론 사람은 누구도 그런 말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게 사실일 리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언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가정을 해 보자. 그 말이 사실이라고 말이다. 어떤 마음이 드는가?큰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마치 계기판에 요소수 경고등이 들어온 것처럼 불안한 마음이 드는가? 아니면 당장 변하는 것이 없기에, 지금과 별다를 것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가?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피부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와닿지 않기 때문에 절실함이 덜한 것이다. 결국은 구원이 현재 나의 삶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구원이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라고 말씀하신 약속과 그것을 어긴 첫 사람의 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에 놓인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에 긴장감이 없는 것이다. 경고등을 보는 듯한 떨림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긴장과 떨림이 없기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라는 말씀에 기쁨이 없는 것이다. 죄를 모르고, 죽을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같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다.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와 찬양을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지만, 그것이 삶에 투영되지 않는 것이다. 믿는 것이라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야고보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라고 말씀한다. ‘이만하면 잘 믿고 있어’라고 자신을 속이며 살기에 구원이 삶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마 9:20).마태복음에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그의 병이 나은 이야기다. 같은 내용을 다루는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상황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 12년이나 병을 앓고 있는 여인은 치료를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실력 좋다는 의사를 찾아다닌 것은 물론이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때문에 재산은 모두 소진되었다. 성경은 모두 허비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병으로 인해 그는 고립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레 15:2), 레위기는 유출병 곧 혈루증 환자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그가 누웠던 자리는 물론이고 앉았던 자리나 옷, 그릇, 만진 물건 등 혈루증 환자가 접촉한 모든 것은 부정한 것이 되었다.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이 지나간 모든 곳을 소독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일반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사람이 없는 외곽에 살며, 가족과도 떨어져 혼자서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있는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 소문을 들었다고 인파를 헤집고 예수님 앞에 가는 일은 ‘그냥 한번’ 해 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일 자체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사람들과 접촉하며 인파를 뚫고 지나간다는 것은 더 큰 용기와 결단,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만일 출근 시간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지하철을 이용하겠다고 인파를 뚫고 지나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신약시대 사람들이나 현재 우리나 별로 다를 게 없다.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예상되는 현실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결단해야 한다. 생각한 대로 일이 진행되어 병이 낫는다면 정말 좋은 결말,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대혼란이 일어난다. 요즘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면 “오늘 예수님이 지나는 경로에 있었던 사람들은 혈루증 여인과 접촉이 의심되니 지금 즉시 몸을 씻고 저녁까지 격리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자가 전송될지도 모른다. 그것으로만 끝날지 아니면 무언가 더 있을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데 한번 가 볼까? 나으면 좋은데, 안 나아도 어쩔 수 없지 뭐!”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움직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낫는다’는 확신이 없으면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제쳐 두고 움직일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께 올인’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혈루증 여인은 다른 모든 문제를 ‘나중에’라는 곳, 차순위로 보냈다. 눈에 보이는 우선순위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높은 벽을 넘게 했고,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뚫을 수 있게 했다. 실패할 경우 돌아올 모든 결과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한마디로 ‘절실함’으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절실함, 다르게 말하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다. 그 믿음이 그를 이끈 것이고, 앞만 보고 가게 한 것이다. 기쁨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우리는 어떤가? 정말로 구원이 없으면 안 되는가? 그런 절실함이 있는가? 요소수가 떨어지면 차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절실함, 예수님만이 오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절실함 말이다. 그 절실함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장애물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것을 찾았을 때 진정한 기쁨을 느끼며 평안을 누리는 그 절실함이 있는가 말이다. 우리에게 진짜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우선과 차선의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는 말이다. 급하게 생각되는 그 무엇도 절실함보다 앞설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절실한 것을 가장 먼저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한 가지 더 씁쓸한 것은 많은 사람이 요소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경유차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요소수가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평소에 신경도 쓰지 않았던 요소수를 알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요소수로 인해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요소수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요소수를 찾기 위해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다. 절실한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해 관심도 없던 사람들마저도 궁금해 하고 관심을 쏟게 된 것이다.우리는 전도를 위해 많은 힘을 쓴다. 금전적인 비용은 물론이고, 시간과 인력 등 동원할 수 있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활동에 절실함은 얼마나 들어 있는가? 노방전도를 하거나 집을 방문하며 전도하는 일, 교회로 초청하는 일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도를 한다. 그 안에 얼마나 절실함이 있는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많은 전도 활동을 해 왔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은 소위 ‘그들만의 리그’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중요한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어떤 활동 중 하나로 혹은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행동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요소수를 찾는 사람들의 행동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어떤 ‘행동’이 아니다. 그것이 없으면 정말로 차가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절실함이고 ‘진심’이다. 진심으로 했던 행동, 그 진심이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보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관심을 보이고 함께 안타까워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그러한 절실함, 복음을 대하는 진심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게 있는 것을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기에, 전하는 것을 보는 사람도 그렇게 귀하게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닌지, 구원의 소식을 스스로 기뻐하지 않기에 그것을 전달받는 사람 역시 크게 기쁜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닌지, 복음이 없는 이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지 않기에 그들도 그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봐야 할 문제다. 절실함, 진심, 믿음, 이 말들이 서로 다르게 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두 한 의미로 여기며 행동할 때 참다운 삶이 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으로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말이다. 우리는 해마다 성탄의 기쁨을 나눈다. 우리에게 죄와 죽음과 구원이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다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성탄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많은 이가 즐거워하는 날, 왠지 들뜨고 설레는 날, 선물이 오가는 기분 좋은 날이 아니라 떨어져 가는 요소수로 인해 마음 졸이던 것이 해결된 기쁨,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의 시간이 될 것이다. 무엇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것을 얻은 기쁨으로 가득할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느낄 때 비로소 절실한 마음, 진심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성탄의 소식이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한 것임을 느끼는 시간,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거창하게 누구를 위해서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 그저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기쁨이 흘러넘치기를 바란다.
절실함
구원
기쁨
전도
혈루증여인
성탄의기쁨
아담은 인류 전체의 아버지이다
by Michael Reeves
2021-12-07
어제 게재한 “‘첫 사람’ 정말 중요한 문제일까?”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아담, 인류의 머리됨 인류와 아담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항상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의 오래된 논쟁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펠라기우스는 아담과 인류 사이의 물리적 연결에만 의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아담과 인류의 물리적 연결은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구원과 저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개별 인간 각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떤 사람이 저주를 받는 것은 그가 아담과 근본적인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담의 죄를 따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의 의를 본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과 저주는 다른 누군가의 상태(status) 때문에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운명을 가진 대상을 본받는가에 달렸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이런 주장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12-21과 결코 일치할 수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로마서의 이 본문은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이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바울을 이해한 것처럼, 하나님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인류를 다루신다. 곧 아담, 모든 인류 중 최초의 인간이자 최초의 머리, 또는 그리스도, 하나님이 재창조하신 새 인류의 처음이자 머리. 왜 아담의 정체성 및 아담과 나머지 인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만 나오면 자꾸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논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구원과 구원에 대한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 사이의 논쟁을 실제로 대표한다는 점에서 이 논쟁에 근원적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논쟁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현대의 가장 난해한 공식들에도 적용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사실은 전체 (아마도 신석기 시대) 인구 집단의 상징이며, 그 인구 집단에서 어느 날 죄가 나타났고 또 모든 인류에게 퍼졌다는 데니스 알렉산더의 개념을 예로 들어 보자. 여기서 펠라기우스주의의 문제는 인류 대부분의 문제에서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로 가마득한 원시시대 극히 소수의 문제로 간단히 바뀌어 버렸다.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논쟁의 틀을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머리로서 아담을 부인하게 되면 개별 인간의 운명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개인이 결정한다는 [펠라기우스주의] 식의 해석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개별 인간의 자기 결정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기보다는 모범으로 보려는 경향도 커지게 된다. 머리됨에는 존재론적 뿌리가 있다또 다시 데니스 알렉산더는 그의 합성 이론에서 이런 함정을 교묘하게 회피한다. 아담을 옛 인류의 머리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중대한 신학적 필요성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아담이 결코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는 자신의 견해를 아담이 인류의 머리라는 신학적 사실과 통합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식은 인류의 머리로서 아담이 가지는 법적 또는 계약적(federal) 지위를 아담이 인류의 자연적 머리 또는 아버지라는 개념에서 분리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느 시점에 아담을 단지 모든 호모 디비누스뿐 아니라 모든 호모 사피엔스를 대표하는 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이 처음으로 (알고도) 죄를 지었을 때, 호모사피엔스들이 아담과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아담이 지은 죄를 모든 호모 사피엔스에게 전가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아담의 신석기 공동체에 연결되지 않은 앞에서 언급한 한 인간 집단을 들자면) 호주에 살던 계몽되지 않은 호모 사피엔스는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을 갖게 되었다.하지만 아담의 계약적 머리됨(대표성)을 그의 자연적, 물리적 머리됨에서 분리해 냄으로써 알렉산더는 이제 낯익은 문제들에 봉착한다. 첫째,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존재론적 근거가 전혀 없는 신학적 확정을 하신다. 아담은 물리적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데도, 어떤 것(인류의 머리)으로 선언되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담과 하등 관계가 없는 순진한 호주 원주민에게 죄를 전가하시는, 독단적인 신이 되고 만다. 서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호모 사피엔스와 아담은 아무런 연결의 근거도 없는데도, 하나님은 그들도 아담의 죄를 공유해야 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무슨 근거에서? 하나님의 변덕에 근거해서일 뿐이다.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결코 성경이 말하는 머리됨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개별 인간들을 심판하실 때 그 영향이 미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후손이다(그렇기에 구약에서 족보는 중요하다). 그런 사례가 무척 많지만, 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에게 내린 복이 그들의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는 여호야긴에게 내린 저주가 그의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라. 거꾸로,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 속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 “안에서” 행동한 것으로 간주된다(히 7:9-10). 다시 말하면, 개인의 머리됨 또는 집단적 본성은 결코 실제적 연결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아담 안에서” 났는지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이야기가 옮겨간다면, 진정한 연결의 필요성은 더 명확해져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는 근거가 전혀 없는 일에 기초한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 거듭나거나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진정한 존재론적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된다. 성령이 그러한 연합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의 의는 단지 하나의 법정 가설(legal fiction)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두 가지 방식, 곧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와 육신에 의한 아담과의 연합 안에서 작동하는데, 여기서 본질은 이것이 서로 관련이 있는 존재론적 연결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다 법정 가설이 될 수 없는 것은, 온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옳은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굳이 존재론적 토대를 두지 않고도 하나님이 (아담이나 그리스도를 위해) 계약적 머리(federal headship)를 세우실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아담과의 연합의 병치하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연합이라는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신성한 명령으로 개인의 의를 세우셨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은 없다고 상상해 보자. 무엇이 부족할까? 성령이다. 따라서 이 모델은 삼위일체적이지 않다. 바울의 아담-그리스도 병치가 맞는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어떤 실제적인 연결도 없이 아담과 결합될 수 있다는 제안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에 이를 수 없게 한다. 고린도전서 11:3의 논리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아내와 그 어떤 존재론적 연결도 없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가 인정하는 것이 이상할 것 같다면, 그리스도의 머리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과 아무런 존재론적 연결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울 것이다. 머리됨에 대한 이런 식의 가벼운 존재론을 삼위일체에 적용하면 아리우스주의나 삼신주의에 빠지기 쉽다. 물론 두 경우 다 그런 식의 결과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왜 머리됨에 관한 문제가 경우에 따라서 그렇게 다르게 취급되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그러므로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아담이 물리적 실재로서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모든 인류의 머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아담이 모든 인류의 기원이 된 한 사람임을 암시하는(행 17:26) 정황적인 성경 증거와는 별개로, 신학적으로 아담이 모든 인류의 머리인 것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아담이 전 인류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다심지어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Nazianzen)가 깔끔하게 표현하기 전에, 속사도시대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론의 상당 부분이 이 사상, 곧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통해서 감당하지 않은 것은 결코 “치유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사상이 형성되었다(Philip Schaf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ume Ⅶ Cyril of Jerusalem, George Nazianzen, 438쪽). 본질적으로 그것은 히브리서 2:11-17의 사상을 체계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예수님이 자신이 오셔서 구원하신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살과 피를 나누어야 이 살과 피가 하나님의 저주를 지나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성육신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천사의 육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것은 참으로 그가 우리와 같아지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을 훼손하고 그분이 가져오신 구원을 훼손하는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한 것은 바로 이런 신학이었다.그러나 아담이 모든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단절된 호모 사피엔스의 여러 구성원 중 하나일 뿐이라면,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의 말은 다소 걱정스럽게까지 보인다.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이 나의 육체가 아니라 또 다른 어떤 인성을 가진 육체였다면, 그는 결코 나와 같은 혈육을 가진 구속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속사도시대의 교회가 히브리서 2장을 제대로 읽었고, 성육신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옳았다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무 인성이나 취하신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평결: 역사적 아담은 중요하다역사적 사실과 연결되지 않은 교리는 성경이 아닌 다른 데이터 및 이데올로기와 조화를 이루기 쉽다. 물론, 본질적인 면에서 굳이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교리도 적지 않다. 아담의 정체성, 그리고 인류의 물리적 조상으로서의 아담의 역할은 결코 독자적이고 역사와 분리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라는 게 나의 주장이다. 아담의 역사적 실재성은 죄와 악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뿐 아니라,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근거로서 필수적이다. 모든 인류에 대한 아담의 물리적 아버지 됨은 아담 안에서 우리를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존하며(같은 추론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도 보존한다), 또한 성육신의 논리를 보호한다. 멋대로 재해석하는 믿음이 초래하는 결과는 실로 심각한 재앙일 뿐이다. 이 글은 Should Christians Embrace Evolution?: Biblical and Scientific Responses, Norman C. Nevin 엮음(P&R, 2011)에 실린 Michael Reeves의 글을 갈무리한 것입니다. 원제: Does It Really Matter Whether Adam Was the First 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진화론
창조와진화
아담과예수
아담의대표성
인간타락
아담의역사성
머리됨
펠라기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첫 사람 아담’ 정말 중요한 문제일까?
by Michael Reeves
2021-12-06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은 보통 복음서를 탈신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의 부활을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드러내는 일종의 신화적 묘사로 보는 식의 해석을 반대한다. 반대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역사성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라는 성경의 두 인물과 관련해서는, 복음주의 안에 이들을 신화적이거나 상징적인 인물로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글의 목적은 단순하다. 까다로운 문자주의자의 주변 문제까지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담을 인류 전체의 조상이 되는 역사적 인물로 믿는 것이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바로 이것이다.아담은 역사에 존재한 사람이다텍스트 증거창세기 처음 몇 장은 종종 ‘아담’이라는 단어를 “인류”라는 의미로 사용한다(예, 창 1:26-27). 그리고 아담을 이런 의미로 사용한 장들에 어떤 문학적 구조가 분명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아담을 실제 존재했던 한 사람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적 장치로 파악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여기서 이미 질문이 생긴다. 그럼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할까? 성경 전체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기 위해서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는 예를 종종 만난다. 굳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니고데모 이야기나, 복음서가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에 맞추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 예로 든 두 사건의 경우에 주석가들 대부분이 그 역사적 사건의 신학적 중요성에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문학적 장치가 사용되었음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이 경우에 “문학적”이라고 해서 꼭 “문자적 사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 이제 이런 질문을 해야 하다. 아담의 경우에는 “문자적 사실”이 배제된 “문학적” 장치일 뿐인가? 아담을 언급하는 다른 성경 구절들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창세기 5장과 역대상 1장,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족보는 모두 다 아담을 첫 조상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성경의 족보를 보면 이름을 종종 생략하기는 하지만, 허구나 신화의 인물을 족보에 넣는 경우는 전혀 없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9:4-6에서 혼인에 관해 가르치셨을 때, 그리고 유다가 유다서 1:14에서 아담을 언급할 때, 그들은 아담의 역사적 실재를 의심한다거나 아담을 구약의 다른 인물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그 어떤 암시나 경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나중에 여자가 아담에게서 났다는 사실을 말하면서(고전 11:8-9; 딤전 2:11-14), 바울은 창세기 2장을 당연한 역사적 사실로 간주했다.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영원한 진리를 설명하면서 바울이 만약에 아담과 하와를 역사가 아닌 신화적 상징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구절을 쓴 것이라면, 그의 모든 주장은 한마디로 난센스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신학적 필요따라서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성경 저자들은 하나같이 아담을 역사적 실존 인물로 생각했다는 정황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정황 증거도 유용하고 중요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이 있다. 바울의 신학 안에는 아담이 맡고 있는 실로 엄청난 역할이 있다. 그것은 곧 아담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사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기본 줄거리에서 필수 요소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담의 역사성은 단지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첫 번째로 주목할 구절은 로마서 5:12-21인데, 여기서 바울은 “한 사람” 아담의 죄와 “한 사람” 그리스도의 의를 대조하고 있다. 바울은 단수형 “자손”과 복수형 “자손들(갈 3:16)의 분명한 구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낀 사도이다. 따라서 그가 아담을 놓고 “한 사람”이라고 썼을 때, 그 의미는 결코 복수형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이 단수형 “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과 반복해서 대조되고 있으며, 이 단수 “한 사람”이야말로 한 사람(아담)의 한 번의 죄가 한 사람(그리스도)의 한 번의 구원으로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바울의 핵심 주장의 근간이 된다. 이 본문 전체(롬 5:12-2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방식과 똑같이 아담에 대해 말한다. (또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사망을 이야기하는 바울의 단어 사용은, 그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복에 대해서 말할 때와 유사하다.) 바울은 이 한 사람의 범죄가 있기 전(그 때는 죄나 죽음이 없었다)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사람의 범죄 이후(아담에서 모세까지 이어지는 기간)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바울이 아담을 그리스도와 모세(그리고 아브라함)와 똑같이 실제로 살았던 역사의 인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단지 바울의 언어만이 그가 아담을 역사의 인물로 믿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신학 전체가 곧 그가 아담을 역사의 인물로 믿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바울이 역사적 인물(그리스도)을 신화적 또는 상징적 인물(아담)과 비교하는 순간, 그의 논리는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아담과 그의 죄가 단순한 상징이라면, 굳이 역사 속에서 속죄가 일어나야 할 필요가 없다. 신화적 타락을 되돌리려면 신화적 속죄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신화적 인물이라면,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용서와 새 생명을 나타내는 단순한 상징 정도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실제 역사 속으로 들어온 죄와 죄책감, 사망이라는 문제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반드시 역사적 해결이 필요한 문제이다. 아담의 죄에서 역사성을 제거하는 문제는 십자가와 부활이 반드시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만 한다는 논리나 근거만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건 바울의 복음을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도대체 죄와 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만일 이것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면, 거기에는 단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곧 죄는 원래부터 있었고 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일부라고 선택하거나, 죄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으로 각 사람이 저마다 거의 무에서(ex nihilo) 범하여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라고 선택하거나 둘 중 하나다. 전자는 선하신 창조주와 그의 선한 창조세계를 일원론적으로든 이원론적으로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비기독교적 사고이고, 후자는 펠라기우스주의에 해당하는데, 선한 개인이 아담을 본받아 죄를 짓게 된다(그리고 아마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의롭게 된다)는 사고이다.바울의 신학에서 역사적 아담이 갖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증언하는 두 번째 구절은 고린도전서 15:21-22과 45-49이다. 여기서 다시 바울은 죽음에 이르게 한 첫 사람 아담과 새 생명을 얻게 하신 두 번째 사람 또는 마지막 사람 그리스도 사이의 긴밀한 유사점을 풀어낸다. 다시 말하지만, 아담은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언급된다. 또 한 번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생명의 기원으로 간주되듯이 아담은 사망의 기원으로 간주된다. 고린도전서의 이 곳에서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몸과 관련하여 일으키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들과 관련한 목회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으로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미래에 반드시 있을 육체의 부활이라는 현실에 대한 확신을 주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바로 바울이 제시하는 궁극적인 해답인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만일 바울이 아담을 신화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담과 그리스도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바울의 글은 수사학적 어리석음의 극치에 해당할 것이다. 만약에 신화적 아담과 그리스도의 부활, 이 둘이 평행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얼마든지 신화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바울의 서신 전체가 그 핵심과 목적, 효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내가 고린도전서 15:21-22과 45-49에 담겨 있는 바울의 신학을 정확하게 표현했다면, 바울의 복음에서 역사적 아담을 제거한 채 그 복음을 온전하게 유지하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아담을 역사 속에서 제거한다면 바울의 신학 자체가 결국 탈역사화하고 말 것이며, 그 결과 악의 기원에 대한 전혀 다른 설명을 주장할 것이며 구원에 대한 완전히 다른 방법을 요구할 것이다. 제3의 길?데니스 알렉산더(Denis Alexander)는 존 스토트가 제시한 이론을 매우 정교하게 다듬으면서 역사적 아담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이러한 전통적 입장은 이제 과학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는 견해로 갈라진 날카로운 이분법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제안한다(Denis Alexander, Creation or Evolution: Do We Have to Choose?, 9-10장). 곧 아담을 의심의 여지없이 역사적 인물로 봐야 하지만 굳이 아담이 최초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다. 알렉산더가 선호하는 모델에 따르면, 해부학적 현대인은 20만 년 전에 나타났고, 이 현대인의 언어는 5만 년 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6,000년에서 8,000년 전쯤에 하나님이 신석기 시대 농부 두 사람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인류 최초로 하나님을 알고 영적 생명까지 갖춘 최초의 인간, 호모 디비누스(Homo divinus)가 되었다는 것이 알렉산더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역사적 아담을 부인하면서 생긴 신학적 틈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실로 기발한 합성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새로운 근본적 문제 몇 가지를 스스로 야기한다. 첫 번째는 아담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곧 이미 수만 년 동안 세계를 채우고 있었다고 알렉산더 스스로 말하는 그 해부학적 현대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알렉산더는 현명하게도 그들이 완전한 인간은 못됐다고 말하지 않고, 이렇게 단호하게 강조한다.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신석기 시대에 세계에 살았던 다른 수백만 명의 사람들도 포함된다”(238쪽).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스스로 매우 불쾌하게 여겼을 수렁에 빠졌을 것이다. 알렉산더 자신이 말하길 아담과 하와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4만 년 동안이나 호주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 인구가 그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바고 그 순간 곧바로 비인간 상태의 동물로 강등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인간이 아닌 동물 단계였을 아담과 하와의 부모도 다른 호주 원주민과 함께 얼마든지 배고픈 호모 디비누스의 합법적인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그런데 이 모든 것을 피하는 바람에 알렉산더의 제안은 오히려 더 위험한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아담과 하와가 동시대 사람들과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를 설명하면서, 그는 결정적인 주장을 한다. 아담과 하와가 태어났을 때,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거대한 신석기 시대 인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를 다른 신석기 인구와 달리 호모 디비누스로 구별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통해…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실질적으로 스스로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238쪽).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태어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오랜 가계의 자녀들이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 두 사람의 차이점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제기하는 첫 번째 문제는 이것이 성경적인 주장인지 여부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구체적으로 아담과 하와였다고 특정한다(창 1:27의 사건은 창 2:18-25에서 새롭게 제시된다). 이것은 누군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나중에 그 후손 몇몇이 그 사실을 알게 됐을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다. 정반대다. 창세기 2:7은 대단히 예외적일 정도로 분명하게 하나님이 인간 아담을 존재하게 하시려고 직접적이고 특별한 창조 행위를 하셨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문제까지는 어떻게 해서 극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도무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번째 신학적 문제가 이 사실로 인해 생기게 된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 존재했다면, 우리에게는 다음 두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아담과 하와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최초의 인간이 있었다는 시나리오다.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두 명의 아담이 생긴다.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첫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 첫 인간 아담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류 안에서 서서히 진화했다는 시나리오다. 이럴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최초의 인간 집합체와 복수의 아담을 갖게 된다. 이런 입장이 가져다주는 황당한 어색함과는 별개로, 이로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눈덩이처럼 빠르게 불어날 것이다. 알렉산더가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계시를 받지 못한, 하나님의 형상을 한 모든 인간은 죄를 짓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들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알렉산더가 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리는 이런 그림은 우상숭배에 빠진 인류의 모습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 믿음은 아담과 하와 이전에도 존재했는데, 삶의 의미를 나름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지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이나 신들을 찾았다”(237쪽). 따라서 이 모델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 전에 이미 죄를 짓고 있었다. 아마도 하나님이 그런 죄를 무시했던 것 같다(무슨 근거로 그랬다는 건지, 우리가 알 길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정말로 그러셨다면, 그건 바울이 로마서 1:18-32에서 말한 내용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인류를 향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창조세계에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서 1:18이하를 보면, 알렉산더가 말하는 종교적이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아담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도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모델을 억지로 로마서 1장에 끼워 맞춘다고 해도, 하나님이 아담에게만 베푼 특권, 그러니까 의로움 및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을 전혀 제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맘껏 죄를 짓고 우상숭배의 기회를 허용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아담은 어떻게 되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 계시를 받도록 택함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죄에 물들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 계시를 받기 전까지 아담은 애초에 창조된 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 계시를 받은 그 순간에 일시적으로 죄가 없다고 선언된 것인가? 아니면 창세기 3장이 말하는 것은, 항상 죄를 지어 왔던 아담이지만, 마침내 처음으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죄를 지었다는 의미인가? 후자가 맞는다면, 왜 그 전에 지은 무의식적인 죄는 용서가 가능한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은 의식하지 못하고 짓는 모든 죄도 다 정죄한다고 했는데 말이다(레 5:17; 시 19:12).알렉산더의 주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정작 인간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 기회는 준 적 없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짓도록 허용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만나는 하나님은 별로 이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일해야 하는 신이다. 알렉산더의 주장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지금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규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마치 이 우주의 주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 점은 하와의 창조에 대한 알렉산더 논평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하와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인간 부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담의 몸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창세기 2:21의 목적은 단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상호보완성의 확인이라고 주장한다(197쪽). 이 점이 이 본문의 목적 가운데 하나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창세기 2:21을 단지 신화와 상징으로 만들어 버리면, 존재론적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남녀의 상호보완성은 불가능하다. 하와가 아담과 별개의 물리적 기원을 가졌다면, 하나님은 자신만 아는 어떤 불가사의한 이유로 남녀의 상호보완성을 원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거기에 그 어떤 존재론적 근거도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알렉산더의 확언(그리고 적어도 그의 다른 확언 중 일부도 해당한다)은 현실과 무관하게 둥둥 떠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신학을 근거 없는 허공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건(또는 비사건)에 의미를 접목하도록 강요받는 하나님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도무지 주권을 가진 창조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만든 모델에 따라 창세기를 읽어 가는 알렉산더를 보면 마치 사각 구멍에 둥근 못을 박으려는 사람과 같다는 느낌을 준다. 여자의 창조가 다시 좋은 보기가 된다. 알렉산더는 이렇게 썼다. “하와를 ‘내 뼈 중의 뼈이자 살 중의 살’로 인정했을 때, 아담은 그 한 사람을 단지 호모 사피엔스로 인정한 게 아니라(하와뿐 아니라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함께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까지 인정한 것이다”(237쪽). 이런 주장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내용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이 구절과 관련해서는 고전 6:16-17과 엡 5:28-31을 참조하라), 하와를 아담을 위해 꼭 필요했던 “돕는 자”라고 말한 성경 내용을 온통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로 만들어 버린다. 창세기 2:18-20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아담에게 돕는 자가 필요했는가? 그건 아담과 같은 차원의 다른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돕는 자라는 개념이 단지 다른 신자를 찾는 것이라면, 왜 들짐승과 공중의 새 중에서 찾지 않는가? 다른 곳에 있다가 아담에게로 이끌려 온 인간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그냥 주변에 있는 다른 호모 사피엔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의 의미를 계시하고는, 자연스럽게 아담에게 필요한 ‘돕는 자’가 되도록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알렉산더는 비슷한 논지로 창세기 6:2을 해석한다.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통혼한다. 알렉산더가 보기에 이것은 영적으로 살아 있는 아담의 가족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인 현대의 호모 사피엔스와 결혼하는 단순한 사건이다. 알렉산더의 적용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제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지 말라. 6:5이하에서 보듯이 그런 경우에 홍수 사건과 같은 심판이 분명히 뒤따르기 때문이다”(199쪽). 그러나 창세기 6장의 교훈이 정말로 믿는 아담의 가계가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에 관한 경고라면, “경건한” 아담의 아들 가인이 믿지 않는 가계 밖 아내를 취했을 때, 홍수의 심판이 뒤따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241쪽 참조). 내 생각은 이것이다. 아무리 독창성이 있다고 해도, 역사적 아담을 고수하는 알렉산더의 “제3의 길”(말이 아담이지, 알렉산더는 그를 최초의 인간으로 믿지 않는다)은 창세기 본문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제공할 수 없으며, 창세기가 내포한 각종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야기한다. 그러한 문제들 중 일부(앞에서 설명한 창세기 6장의 적용과 같은 경우)는 단지 그가 제시하는 모델이 내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성경의 설명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작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에 하나님을 주권적인 창조주로 이해하는 그의 방식이 초래하는 다른 문제들은 너무 심각해서, 그의 주장은 아예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내일 “아담은 인류 전체의 아버지이다”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원제: Does It Really Matter Whether Adam Was the First 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창조와진화
아담과예수
아담의역사성
인간타락
진화적창조론
창세기
진화론
존스토트
십자가
부활
알아 두면 좋은 크리스마스 전통 9가지
by Joe Carter
2021-12-05
크리스마스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공유하는 경축일이자 다양하게 실천하는 관습이다. 크리스마스 전통에 대해 알아 두면 좋은 9가지를 정리했다. 1. 크리스마스트리상록수를 집 안에 들여 놓고 장식하는 전통은 1500년대 독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아담과 하와의 축제’에서 공연된 연극에 등장하는 “낙원의 나무들”에서 이름을 따서 “낙원”이라고 불렸다. 에드윈(Edwin)과 제니퍼 우드럽 타이트(Jennifer Woodruff Tait)의 설명에 따르면, 이 나무에는 성찬을 상징하는 둥글고 얇은 과자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독일의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쿠키 장식으로 발전했다.2. 크리스마스 조명전설에 따르면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크리스마스트리를 집에 가져온 최초의 사람이자(사실이 아니다), 조명들로 장식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이것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루터와 관련 있다는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한겨울 밤, 집으로 걸어가던 루터가 전나무와 그 주위에 빛나는 별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그 장엄한 광경을 가족들과 나누고 싶었던 루터는 나무를 집으로 가져와 별처럼 빛나는 긴 양초로 장식했다. 이로써 현대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 조명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3. 지팡이 사탕민간전승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지팡이 사탕은 1670년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쾰른 대성당의 한 성가대 지휘자가 예배 중에 아이들을 정숙하게 하려고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사탕 제조업자에게 아기 예수를 방문한 목자들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사탕 막대기 끝을 목자들의 지팡이처럼 구부려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인디애나의 사탕 제조업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죽음의 여러 상징을 통합하여 지팡이 사탕을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4. 크리스마스카드상업용 크리스마스카드는 1843년 런던에서 시작되었다. 바빠서 편지 쓸 시간이 없었던 헨리 콜 경(Sir Henry Cole)은 예술가 친구에게 그림과 간단한 인사말이 있는 카드를 디자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술가 존 캘코트 호슬리(John Callcott Horsley)는 카드 1,000장을 인쇄하여 런던의 펠릭스 서머리 트레져 하우스(Felix Summerly's Treasure House)에서 1실링에 판매하였다. 미국인들은 줄곧 영국에서 크리스마스카드를 수입해 오다가, 1875년에 “미국 크리스마스카드의 아버지” 루이스 프랑(Louis Prang)이라는 독일인 이민자가 미국에서 최초의 상업용 크리스마스카드를 제작했다.5. 크리스마스 양말 주머니“크리스마스 전날 밤이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 “성 니콜라스의 방문”(A Visit from St. Nicholas, 1823)에는 크리스마스트리에 대한 언급은 없고 양말 주머니가 나온다. 이것은 1800년대 내내 크리스마스트리보다 양말 주머니가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1883년 12월에 <뉴욕 타임스>에 실린 기사에서는 “수년간 양말 주머니가 크리스마스와 너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말 주머니가 없는 크리스마스는 부적절하고 불충분하게 경축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양말 주머니와는 대조적으로 “뿌리도 없고 생명도 없는 시체처럼 보이는 독일의 크리스마스트리는 결코 그날을 기념할 가치가 없다”라고 논평했다. 양말 주머니를 걸어 놓는 전통이 실제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와 관련한 민간 설화가 있다. 산타클로스가 어떤 가난한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가족은 자존심이 강해서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홀아비가 된 지 얼마 안 되는 아버지는 세 딸의 결혼지참금을 마련 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산타클로스는 굴뚝 밑으로 금화 세 닢을 던졌고, 벽난로에 말리려고 걸어 둔 세 딸의 양말 속으로 떨어졌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산타클로스가 금으로 된 공 세 개를 주었고, 그래서 오렌지나 귤을 넣어 주기도 한다는 것.)6. 에그노그에그노그(eggnog)는 우유, 크림, 설탕, 거품 낸 계란에 술(브랜디, 코냑, 럼주, 셰리주, 위스키)과 때로는 계피나 육두구 같은 향신료를 넣어 만든 음료이다. 음식 역사가들은 이것이 중세 초기 영국의 포셋(posset, 우유가 섞인 뜨거운 맥주 같은 음료)에서 유래했다고 믿는다. 미국 식민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우유와 계란 덕분에 에그노그는 인기 있는 크리스마스 음료가 되었다.7. 크리스마스 캐럴14세기부터 캐럴은 대중적인 종교 노래의 한 형태로 간주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지만, 19세기에 크리스마스 노래 악보들이 출판되면서 일반 장르가 되었다. 예를 들어, 1833년 영국인 변호사 윌리엄 샌디스(William Sandys)는 ‘크리스마스 캐럴: 고대와 현대’를 출판했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안식과 기쁨을 주시네(God Rest Ye Merry, Gentlemen)”와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천사 찬송하기를” 같은 곡들이 실려 있었다. 또한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는 가정집을 방문하여 노래하는 전통(wassailing, 우리나라의 “새벽송”)이 크리스마스에 채택되어 “캐롤링”(caroling)과 동의어가 되었다.8. 대림절 달력중세 시대 대림절은 성탄절에 오신 그리스도의 초림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오늘날 대림절은 크리스마스까지 4주간 이어지는데, 대림절 달력 대부분이 12월 1일에 시작하여 크리스마스 전까지 24일의 기간이다. 대림절 달력의 전통은 19세기 중반에 독일 개신교인들이 대문에 분필로 표시하거나 촛불을 켜 두고 크리스마스까지 날짜를 세던 관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림절 달력을 최초로 인쇄한 사람은 1900년대 초 독일인 게랄드 랑(Gerald Lang)이다. 랑이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쿠키 24개를 상자 뚜껑에 매달아 두고서 대림절 기간 동안 하루에 하나씩 먹게 했다고 한다. 1908년에 랑은 이것을 자신의 대림절 달력 모델로 사용했다.9. 크리스마스 선물 라이언 리브스(Ryan Reeves)는 짧은 영상에서 크리스마스에 주고받는 선물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라이언 리브스_크리스마스 선물의 역사▶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Christmas Traditi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혜
크리스마스전통
크리스마스트리
크리스마스카드
크리스마스선물
대림절
개혁주의 복음전도
by Grant R. Castleberry
2021-12-04
2018년 2월 21일, 빌리 그레이엄이 소천한 이후로 나는 현 시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복음전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좋지 않다. “번영 복음”의 부상과 더불어, 극단적 오순절 운동의 발흥, 정치에 대한 집착 등 여러 요인들이 교회의 복음전도 사명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혼란을 이미 우리 문화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장 강력한 제도들이나 기관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세속주의와 한데 묶어 바라보면, 우리가 복음의 확장을 극렬하게 저지하는 최악의 폭풍우 한가운데 있음을 느끼게 된다. 구속 언약바로 이 위태로운 시기에 중요한 진리 하나가 떠올랐다. 오래된 진리, 성경의 진리다. 개혁 신앙이 특히 갱신과 부흥의 시대에 강조했던 진리다. 지난 2000년 동안 전도와 선교의 원동력이 되어 온 진리다.바울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영생”(딛 2:1)이라고 디도서에서 말한 진리다. 요한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요한계시록 13:8에서 말한 진리다. 바로 ‘구속 언약’이라고 부르는 그 진리다. 이 언약은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 곧 구속하실 사람을 택하시는 성부 하나님, 대신 자신을 내어 주어 그들을 속량해 주신 성자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당신 이름의 존귀와 영광을 위해 한 백성을 구속하기로 언약하셨다는 영광된 교리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의 사람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들으면 반드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았던, 바울과 베드로와 여러 사도들이 땅 끝까지 전한 그 진리다(행 13:48; 18:10; 딛 1:1). 19세기 영국의 저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그의 복음전도 사역 중심에 구속의 언약을 두었다. 그는 구속 언약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은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생각이요, 우리가 가르치는 옛적 칼빈주의 교리의 바로 그 시가(詩歌)다. 샛별이 그 자리를 알기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무에서 존재를 말씀하시기도 전에, 천사의 날개가 아직 아무도 난 적 없는 창공을 휘젓기 전에, 고독한 노래가 하나님께서 지존자로 다스리시는 침묵의 장엄을 방해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영과 함께 엄숙한 의논을 시작하셨으며, 그 회의에서 당신의 백성의 구원을 작정하시고, 결정하시고, 목적하시고, 예정하셨다.구속 언약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복음전도 사역의 발판을 복구하는 데 중추가 된다. 두 가지 이유만 간략하게 얘기하겠다. 방향을 잃은 인류와 구원의 확실성프란시스 쉐퍼는 비행기에서 옆에 앉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한 시간 주어진다면 처음 55분 동안은 그 사람이 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있는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를 설명하고, 나머지 5분 동안을 복음 그 자체를 설명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누군가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것이 가장 큰 금기가 되어 버린 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으려면, 프란시스가 했던 것처럼, 복음 자체를 전하기 전에 먼저 사전 작업을 해야 할 때가 많다. 바로 이런 점에서 구속 언약이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구속 언약은, 첫째, 인류는 항상 하나님의 구원의 개입이 필요한 지점에 서 있기에(딤후 2:26; 벧전 2:10) 가야 할 방향을 상실한 현대 문화를 보면서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언약은, 둘째, 문화가 아무리 불경건하고 세속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속하기로 하셨고, 그 택함 받은 사람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고전 1:26-28; 엡 1:3-10; 딛 1:1; 벧전 1:1-2)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복음전도 사역 앞에는 큰 장애물들이 놓여 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택하셨고, 아들께서는 자신을 대신 내어 주시고 그들을 속량하셨으며, 성령께서는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왜냐면 우리가 큰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할 것을 확신하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세우신 언약의 이행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전함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 언약은 또한 우리를 십자가의 위대한 메시지로 다시 이끈다는 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신부를 속량하셨다. 그리스도는 백성을 구속하셨다. 구원하시는 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셨고, 또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단번에 바치셨다.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서 성부의 공의를 충분히 만족시키셨으며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화목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주신 모든 백성을 위하여 천국의 영원한 기업도 얻으셨다”(8.5).개혁주의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다는 사실에 항상 의지하고 있다. 로마가톨릭 미사의 희생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또 우리는 믿음을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에 우리가 덧붙이는 어떤 일로 여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위대한 구속 언약의 결과로써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다. 구속 언약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와 온전한 십자가를 전한다. 이런 말이 설 자리는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몫을 하셨고, 이제 당신이 당신 몫을 해야 한다.”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두 다 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 고 존 머레이(John Murray)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준비하고 이루셨다는 바로 이 교리가 복음의 풍성함과 능력을 값 없이 제공한다. 오직 이 교리만이 그리스도의 성취와 그의 인격에 합당하게 그리스도를 드러냄을 허용한다. 그가 구속을 준비하고 이루셨기에 그는 가장 충분하고 적합한 구주이시다.” 바위 위 등대 휘몰아치는 문화의 풍조와 복음주의의 격변 가운데서도 우리에게는 우리를 교리적 확신과 복음주의적 확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우뚝 선 바위 위 등대가 있다. 우리 사명의 성공은 영원 전부터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로 언약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성부 하나님은 백성을 택하셨다. 성자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들을 이끄신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혼란한 시대 가운데 있는 우리가 확신을 갖는 이유다. 원제: Reformed Evangelism 출처: www.ligonier.org번역: 서은성
복음전도
구속의언약
십자가
구속
속량
개혁주의복음전도
빌리그레이엄
스펄전
존머레이
복음주의
처음
이전
81
페이지
82
페이지
83
페이지
열린
84
페이지
8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