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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by Sinclair Ferguson
2021-12-23
‘윌리엄 채터턴 딕스(William Chatterton Dix, 1837-98)가 작사한 “이 아기 누구신가?”(What child Is This?)는 아마도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찬송의 하나일 것이다. 영국 전통 민요 “그린슬리브즈”(Greensleeves)에 맞춘 곡이라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찬송은 또한 우리를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핵심으로 이끈다. [이 찬송은 새찬송가 “저 아기 잠들었네”로 번안되어 있으나, 원 가사와는 다른 점이 많다.]이 찬송은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 두 절은 예수님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에서는 우리의 삶을 그에게 드리라고 권고한다(3절).이 찬송이 던지는 질문은 근본적이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 아기 누구신가?”) (2) 그는 무엇을 하기 위해 오셨는가? (“왜 그는 이토록 초라한 땅에 누워 계시는가?) 그의 정체성과 사명이 이 찬송의 성경 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다. “이 아기 누구신가?” 이 찬송을 시작하는 이 질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다양하게 전면에 등장한다. “죄를 용서하시는 그는 누구인가?”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그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까?”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까?”딕스는 성경적인 대답을 하면서 두 가지 요소에 주목한다. 첫째, 이 아기는 “왕이신 그리스도”이시다(1절 5행).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예수님의 계보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그가 강조하는 핵심이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그의 보좌에 앉으실 메시아로 오래 전에 약속되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결코 끝이 없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다(3절 3행). 그래서 천사들은 “감미로운 찬송”으로 그의 탄생을 맞이했다(1절 3행). 그런데 왜 딕스는 목자들이 그를 “지킨다”(1절 6행)는 시적 표현을 썼을까? 왜냐하면 딕스는 마태가 우리에게 거듭 말하듯이 또 다른 왕이 그가 왕이 되시는 것을 질투하여 그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마 2:13).둘째, 이 아기는 또한 “고요한 말씀” “육신이 되신 말씀”(2절 3행, 7행)이시다. 그는 ‘프로스 톤 데온’(pros ton theon, 요 1:1)이셨던 영원하신 분이시다. 이 헬라는 “하나님과 함께” 또는 “하나님을 향하여”라는 의미다. 하나님과 대면하셨던 그가 우리와 대면하시는 육신이 되셨다. 참 하나님이신 오직 한 분만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수 있다. 그렇지만 또한 육신이 되신 오직 한 분만이 우리를 대신하실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을 대면하신 분,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그분 앞에 두려워 떨라고 하는 이 노래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2절 3행)그런데 왜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할까? 그 답은 딕스의 이 두 번째 질문에 있다. “왜 이토록 초라한 땅에 누워 계시는가?” 2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 신비에 대한 설명을 더 밀고 나간다. 1절에서 아기는 “마리아의 무릎”에 누워 계신다. 그런데 2절에서는 “소와 나귀를 먹이는 곳”에 누워 계신다(2절 2행). 그는 나무 구유에 누워 계신다. 마치 그가 나무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고 “못과 창이 그를 꿰뚫게 되는” 날을, “그 십자가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지실”(2절 5-6행) 날을 예언하려는 듯이. 이제 우리는 성탄의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의 핵심으로 이끌려 간다.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그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서 “오 주여,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만나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영접해야 합니까?”(O LORD, how shall I meet thee, how welcome thee aright?)라는 가사를 [중세 시대 그리스도 수난곡] “슬픔과 수치의 무게로 상하신 거룩하신 머리”(O sacred head, now wounded, With grief and shame weighed down)의 멜로디에 넣어 음악으로 고백한 것을 딕스는 말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구간은 골고다를 향하고 있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구유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3절이 그리스를 우리 마음에 왕으로 모시라고, 왕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그분께 드리라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신 이 계절에 그분을 찬양하라고 강권하는 이유이다. 이 성탄 찬송에는 (다른 많은 찬송가와 마찬가지로) 한 가지 중요한 누락 사항이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의 돌봄과 보호와 양육과 교육을 맡기신 요셉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딕스가 살아온 환경을 생각하면, 이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딕스의 외과의사 아버지는 슬프게도 알코올중독자였고 가족을 버렸다. 이것이 어린 딕스에게 온전히 상처로 남았다. 이것으로 딕스가 목자들과 동방박사들과 마리아와는 이야기하면서 요셉은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가 설명된다 하더라도, 이 찬송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끝을 맺는다. 그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3절 3행). 크리스마스의 그리스도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길을 잃고 희망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유일하게 합당하신 구주로 당신을 내어 주셨다. 이 구주를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 기뻐하라, 기뻐하라. 그리스도 나셨으니(Joy, joy for Christ is born), 이 아기, 마리아의 아들 나셨으니(The Babe, the Son of Mary). 원제: The Word Made Flesh 출처: www.ligonier.org번역: 서은성
복음의핵심
만왕의왕
윌리엄딕스
약속된메시아
십자가
성육신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 않으셨다
by Robert Rothwell
2021-12-22
크리스마스 찬송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시즌의 기억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많은 크리스마스 찬송에 풍부한 신학이 담겨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기 쉽다. 특별히 내 눈에 띄는 그런 찬송 한 구절이 있는데, “O Come, All Ye Faithful”의 2절이 그것이다. 이 구절은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 곧 하나님 교리를 단 몇 줄로 담아내고 있다. [찬송 “O Come, All Ye Faithful”의 2절 첫 소절의 라틴어 가사(“Deum de Deo, lumen de lumine”)와 영어 가사(“God of God, light of light”)가 한국어 번안 찬송 “참 반가운 성도여”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빛에서 나오신 빛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당신에 관한 진리를 우리에게 드러내신 계시 종교다. 그러므로 하나님 교리를 확고히 정립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도 잘못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시대 이후에 가장 일찍 발생한 신학 논쟁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으신지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초기 교회에서 예수님에게 신성이 있는지 여부는 사실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이단 아리우스 같은, 하나님의 아들은 창조된 존재라고 믿은 사람들조차도 성자는 어떤 의미에서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믿었다. 당시 논쟁은 신성의 유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는 신성의 존재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성자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 다른가? 이 논쟁이었다. 초기 교회는 성경 전체와 구체적으로 요한복음 1:1-18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완전히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고 결론지었다. 바로 이 교리가 니케아신경과 “O Come, All Ye Faithful”에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빛에서 나오신 빛”으로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신성만 존재한다고 확언하는 유일신주의자이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세 위격이 공통으로 가지고 계시는 신성은 모든 면에서 동일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 위격은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이요 성령의 사랑이다. 성부의 지식은 성자의 지식이요 성령의 지식이다. 성부의 의지는 성자의 의지요 성령의 의지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자는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빛에서 나오신 빛”이라고 고백할 때 의미하는 바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 위격에 속해 있다. 그리고 신성은 오직 하나로 표현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구체적인 표현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의 신성은 동일하다. 창조된 본성이라면 이럴 수 없다. 창조된 본성들에게는 수없이 많은 저마다의 구체적인 실체가 있다. 나의 지식은 당신의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과 나는 인간 본성의 서로 다른 구현체이기 때문이다.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 않으신 성자물론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한 다양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구별되지만 분리할 수 없는 삼위가 단일의 나눌 수 없는 하나님의 본질을 공유한다고 성경도 똑같이 강조한다. 삼위 하나님을 구별하는 것은 속성의 차이가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우리가 “위격의 속성”(personal properties, 또는 “각 위의 고유한 품성”)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서로 구별된다. 삼위 사이의 차이는 실재하지만, 그 차이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삼위의 신성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면, 우리는 더는 유일한 신성을 기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더 이상 한 분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성부 하나님의 의지가 성자 예수님의 의지와 다르다고 말한다면(성육신하신 아들에게는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고 계시다), 우리는 결국 서로 다른 두 가지 신성을, 그리고 성령께도 다른 의지가 있다고 한다면, 세 가지 신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은연중에 유일신 교리를 부인하게 된다.찬송 “O Come, All Ye Faithful”은 성자의 고유한 품성을 니케아신경과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성자는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 않으셨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만세 전에 성부는 성자를 나으셨다. 이 행위는 시간 가운데에서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내는 인간의 낳음과는 다르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아들을 낳아 오셨다. 순서로는 성부가 먼저 나오지만 존재 자체로는 그렇지 않다. 한동안 성부만 존재하셨다가 그 다음에 성부께서 아들을 낳으신 것이 아니다. 성부는 항상 계시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은 항상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아들은 항상 계시다. 그리고 아들은 항상 아들이시다. 성령은 항상 계시다. 그리고 (만세 전에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성령은 항상 성령이시다. 원제: Begotten, Not Created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명근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니케아신경
위격
복음을 지킬 것인가,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by 김정우
2021-12-21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라틴어 문자 그대로는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뜻인데, ‘외교상 기피하는 인물’이라는 외교 용어로 사용된다. 유대인에게는 이방인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 곧 기피 인물이었다. “주여,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나이다.” 유대인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이렇게 기도했다.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식탁 교제도 가졌다. 베드로는 더 이상 과거의 베드로가 아니었다. 백부장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기 전후로 바울을 나눌 수 있다면, 이제 그는 이후의 베드로였다. 더 이상 이방인을 불결하게 여기지 않게 된 베드로였다. 자연히 그는 이방인 그리스인의 중심지인 그곳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셨다. 어쩌다가 한번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었다.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갈 2:12). ‘먹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미완료형이다. 헬라어 문법에서 계속적인 행동을 뜻할 때 사용하는 동사형이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먹는 것에 익숙했고,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방인들과 ‘계속’ 식탁 교제의 자리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할례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들이닥쳤다.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하고 있는 그 식사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떠났다. 안타깝게도, 베드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의식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베드로는 할례자들의 비난을 두려워했고, 또 그들과의 갈등도 원치 않았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다녀온 후 할례자들에게서 받았던 비난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행 11:2). 베드로는 비난받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인정받는 사도로 남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자신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베드로, 교회의 반석으로 남길 원했을 것이다. 이방인과 한자리에서 식사하는 것이 본심으로는 더 이상 거리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자기 밖에 있는 눈, 자신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베드로는 그 진리를 따라 행하지 못했다. 존 스토트는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보인 이 행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여종을 두려워하여 주님을 부인했던 바로 그 베드로가 이제는 할례주의자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복음의 진리를 믿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한순간에 외식하는 유대인 게바, 유대인의 가면(페르소나)을 쓴 베드로가 튀어 나오고 말았다.더욱 심각한 사태는 지도자 베드로의 행동이 끼친 파급 효과였다.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를 따라 외식했고,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넘어갔다. 그 자리에 황망히 남게 되었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을 또 어떠했을까. 칼뱅은 베드로의 외식이 미친 영향을 세 가지로 풀이했다. “첫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중간 벽을 다시 세움으로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심겼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빛을 흐리게 함으로 사람이 만든 규례와 인습에 더 주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셋째, 유대인들의 마음을 더 굳게 하여 그릇된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진리 앞에 솔직하게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 훨씬 쉽다. 좋은 영적 공동체를 세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세워진 좋은 영적 공동체라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우리는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특별히 지도자의 ‘외식’이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 대 관계이제 사도 바울이 그렇게 행동한 베드로를 “대면하여”(갈 2:11) “모든 자 앞에서”(갈 2:14) 책망한다. 베드로와 바울을 비교해 보자. 누가 믿음의 선배요 교회의 선임인가? 베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베드로를 향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도 대면하여 공개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를 공개적으로 면박했으니 인간관계의 파국은 물론이고 교회의 질서를 훼손했다는 조직의 역공에 부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것은 ‘참된 복음’ 대 ‘다른 복음’의 투쟁, 본질이 걸린 문제였다.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침묵하거나 흘려버릴 사안이 아니었다. 인간관계, 사회 질서, 교회위계를 고려하여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비위도 맞추고, 안디옥 교회의 지지도 유지하려면, 다른 사도들(전부 선배다)과 좋게좋게 지내는 게 좋은, 좋은 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 받았지만, 사도 공동체의 인정과 신임과 지지도 중요했던 바울 아닌가. 긴장하고 대립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및 그 공동체의 “기둥들”과 “친교의 악수”까지 나눈 마당에(갈 2:9), 여기서 눈 한번 질끈 감아 주면 “좋게” “융통성 있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매몰 비용의 오류”(sunk Cost Fallacy)라는 경제학 용어가 있다.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걸 뻔히 알면서도 잘못된 결정을 되돌리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노력, 들인 비용이 아깝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떤 것을 묻어두고 갈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어느 쪽을 포기할 것인가? 예루살렘 공동체와 그간 쌓은 친교 관계를 위험에 빠트릴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훼손할 것인가? 바울은 과감히 전자를 묻어 버리는 쪽의 위험을 택한다. 사람들을 좋게 하는 쪽을 택하지 않았다.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하나님께 좋은 쪽을 택했다. 나중에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안디옥에서도 바울은 동일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갈 1:10).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는 것만은 가볍게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베드로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오래 전 일을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에서 꺼내 놓는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다니요!”(갈 1:6). 갈라디아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도, 베드로가 보인 행동의 변화도 바울에게는 ‘사소한 차이’가 아니었다. ‘속삭이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학자이자 런던대학교 교수인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가 저술한 <속삭이는 사회>(교양인 역간)에 나오는 표현이다. 스탈린 통치 하에 살던 소련의 평범한 개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 침묵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고난과 희생을 두려워해서 언제나 속삭이는 데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자칫 복음을 살짝 옆으로 밀쳐 내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 “다른 복음”에 침묵할 수 있다. 사역도 그런 식으로 할 수 있고, 친교도 그런 식으로 하는 걸 오히려 권장할 수도 있다. 문제가 없는 것처럼 지나는 것은 화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피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베드로가 미워서 책망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두 경우 모두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쉽게 할 수 없는 방식을 결행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갈 4:16). 바울은 일시적인 관계의 단절이 발생하더라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쪽을 택했고, 그것만이 허물어진 관계를 제대로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복음 외에는 허물어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사도 바울은 확신했다. 다른 모든 시도는 그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실상 이런 모순에 빠지는 게 우리다. 에필로그 이후의 전개가 놀랍다.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였다. 바울의 진심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꽤 흐르고 베드로는 바울을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벧후 3:15)라 부른다. 자신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사람으로 바울을 내내 기억하고 있었다면 베드로는 그를 “형제”라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존 파이퍼의 말을 빌리면, “복음과 더불어 다시 사랑에 빠지면” 관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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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성탄 설교
by 고상섭
2021-12-20
팀 켈러는 성탄 설교 모음집 <팀 켈러의 예수, 예수>(두란노 역간, 원제: Hidden Christmas)에서 잊혀 가는 성탄절의 의미를 새롭게 상기시켜 준다. 두 편의 설교, “그늘진 땅에 빛이 비치도다”와 “예수님의 어머니들”에서 그가 오늘의 문화 내러티브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 중심의 성탄 설교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그늘진 땅에 빛이 비치도다“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문화 내러티브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세상은 어두운 곳이며 예수께서 빛이 되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길을 찾거나 실체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둡다’는 말은 악과 무지를 가리키고, ‘흑암’이라는 말은 악과 고난을 치유할 방법을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의 문화 내러티브는 어두운 현실을 인간의 지능과 혁신으로 타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것과 우리가 세상을 연합시키고 나아가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광고 문구다. 빛이 인간 안에 있으며 따라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주체도 바로 인간이라고 이 광고는 말한다. 빈곤과 불의와 폭력과 악을 거뜬히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힘을 합하며 세상의 연합과 평화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체코 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바츨라프 하벨은 “인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사실 그는 무슨 정치 제도나 이데올로기로 인간의 문제를 구원할 수 잇다는 신념, 즉 자기 힘과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어둠을 더 악화시켰을 뿐이다”라고 역설했다(25쪽).그리스도 중심적 대안 기독교는 우리가 최대한 애쓰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미래의 디스토피아만 내다보는 비관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문제가 아주 심각해서 우리 스스로는 치유나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세상은 심히 어둡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있다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다. 빛은 우리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비취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그 빛을 가져오셨다. 좀 더 확실히 말하면 그분이 바로 빛이시다,…다른 불빛이 다 꺼질 때도 그분만이 우리를 위한 빛이시다(34쪽)“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님은 어둠을 비추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 세상에 빛이신 그분이 어둠 속으로 내려가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빛 가운데 인도하시기 위해서이다(39쪽). 예수님의 어머니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 1:3-17). 문화 내러티브 당시의 족보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사람마다 자신의 학력과 경력과 실적을 열거하여 사람들에게 자기를 홍보하고 추천하는 것과 동일하다. 분봉왕이었던 헤롯은 자신의 천한 출신을 숨기려고 족보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빼기도 했다. 족보 겸 이력서의 취지는 자신이 수준 높은 명문가 출신임을 내세워 주변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데 있었다. 더 높은 곳으로 더 많은 성취와 성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오늘날의 문화와 달리 예수님의 족보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특히 여인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모두 명문 가문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대안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어머니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다. 또 가장 더럽고 추하고 부도덕한 사건을 가운데 몇 가지를 환기시키는 이름들도 있다. 근친상간의 이야기도 있고, 라합은 매춘부였다. 또 밧세바는 우리야의 아내로 표기함으로써 다윗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런 역기능 가정에서 그리고 이 치명적 흠이 있는 인간에게서 메시아가 오셨다. 이것은 문화나 상류 사회나 심지어 하나님의 법에 의해 배제된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혈통이나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 회개하고 그분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당신의 죄를 덮고 당신을 그분과 연합시킬 수 있다(58쪽). 성경은 뛰어난 가문과 능력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하시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나사렛 시골 출신이셨다. 장남이 아니라 차남과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다. 가인이 아니라 아벨을,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므낫세가 아니라 에브라임을, 형들이 아니라 다윗을, 사랑받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왜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택하실까? 하나님은 그냥 약자 편에서 약자를 좋아하시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분은 이것을 통해 구원 자체를 말씀하신다. 모든 종교와 도덕 철학은 인간의 전력을 다한 노력을 통해 목적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종교와 철학은 늘 강자에게 호소한다. 피땀 흘려 매진할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약자를 위해 왔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위해 왔다. 나는 그들의 행위를 봐서가 아니라 내가 이룬 일을 통해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121쪽). 예수님은 세상의 방식을 전복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와 도전이 있다. 어떻게 살아왔든 관계없다. 지옥의 앞잡이였다 해도 관계없다. 아무리 지독하게 망쳤더라도 관계없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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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성례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by Tiago Oliveira
2021-12-19
복음주의자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후예다. 우리는 구원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저 개혁자들은 세례와 성찬을 구원의 도구로 잘못 해석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거부했다.그러나 프로테스탄트가 구원의 도구로서 성례를 거부했다고 해서 성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위해 모일 때 지키도록 성례를 제정하셨다고 믿는다. 성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시요 또한 성도들 사이 연합의 표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례가 사람들을 정말로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이러한 확신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성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이다.성례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더 나아가, 불신자들이 믿음에 이르고(롬 10:13-17),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요 17:17)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교회가 예배를 위해 모일 때 말씀은 기도와 설교, 성경 낭독과 찬송, 그리고 세례와 주의 만찬을 통해 우리 모임의 한가운데 자리한다. 따라서 성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이다.우리 주 예수께서 세례(마 28:18-20)와 주의 만찬(눅 22:14-20; 고전 11:23-30) 둘 다 제정하셨다. 이 둘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주님은 당신의 교회에 세례와 주의 만찬을 행하라고 명하셨다. 이 둘은 우리의 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성례는 그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성례는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킨다. 2. 성례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 그리고 우리 사이의 연합을 가리킨다.성례는 복음의 가시적 표지다. 이게 무슨 뜻인가? 설명하겠다.세례에서, 우리는 복음이 회개한 죄인의 물에 잠길 때 표현되는 것을 본다. 세례를 통해 그들의 죄는 “씻겨 나간다”(행 22:16). 세례는 이제 세례 받은 이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선포한다(골 2:11-12; 참조. 롬 6:3-4).성찬에서, 우리는 지역 교회가 한 몸으로서 떡과 잔을 함께 나눌 때 복음이 묘사되는 것을 본다(고전 10:16-17).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당신의 백성을 대신하여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기억하고, 또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기억하는 식사다. 이러한 상징들은 추상적이지 않다.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 진리, 곧 구원과 중생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이런 상징을 주신 것이다. 성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표상이 보이지 않는 실재와 일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한다. 그렇다. 성례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성례는 또한 이미 변화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세례를 받았을 때, 우리는 회개(행 2:38; 참조. 롬 6:3-4)와 중생 모두와 일체감을 느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느낀 것이다(요 3:5-7, 롬 6:4).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께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헌신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후자의 헌신은 주의 만찬을 통해 구체화된다. 지역 교회는 이러한 주의 만찬의 자리에 함께 모여 주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고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한다(고전 11:23-26).고린도전서 11장은 주의 만찬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서는 자기점검이 필요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고전 11:28). 자기점검을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리고 동료 신자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신 일을 기억하고, 우리 삶을 하나님께 다시 헌신하라고 촉구한다. 이러한 자기점검은 우리를 회개로 이끈다. 변화는 성례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다시 말한다. 그렇다. 성례는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킨다.3. 성례에는 정말로 의미하는 바가 있다.마지막으로, 성경이 성례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보면 성례가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물은…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1; 참조. 롬 6:3-4, 골 2:11-12). 구원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 올리는 호소라는 점에 유의하라. 하지만 세례가 “구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조금 전 말한, 세례가 구원에 필요하지 않다는 점과 연관해서 그럼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혼하는 부부에 비유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그냥 모여서 사적인 상호 합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증인 앞에서 선서하는 공개 의식은 눈에 보이는 계약이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결혼식에서 남자와 여자는 공개 서약에 따라 남편과 아내로 선언된다.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을 때, 그 사람은 공개적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교회는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한다. 세례 받은 사람은 이제 새로운 삶,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충성을 시작한다. 이제 그는 새로운 사람들에 속한다. 주의 만찬에 관해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참조. 요 6:53-58).잔과 떡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상징이다. 그러나 지역 교회의 성도들이 이 둘을 취할 때, 이 둘은 더 많은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 둘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고, 또 다른 성도와 친교를 나누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너희가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 10:21)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주의 만찬에 올바르게 참여할 때,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 진정한 교통(communion)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올바르게 참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사실 다른 어떤 것과 교통하는 것이다. 물론 세례를 위한 물, 성찬을 위한 떡 한 덩이, 포도주 한 잔에 신비한 같은 속성은 없다. 성경 말씀이 유익하다고 믿어야 하는 것처럼, 성례도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믿고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한다. 그렇다. 성례는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믿음이 먼저다. 원제: Yes, The Ordinances Really Do Change People출처: www.9marks.org번역: 무제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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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성찬
연합
성탄 설교에서 피해야 할 여섯 가지
by Steve Mathewson
2021-12-18
설교자들에게는 대림절이나 성탄절이 가장 멋진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선포하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지만, 활용할 만한 설교 본문은 부족하기만 하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탄 기사가 아예 없다. 더구나 마태가 기록한 성탄 기사들 가운데 적어도 두 개는 독자들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하나는 따분하게만 느껴지고(마 1:1-17), 다른 하나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마 2:16-18). 그런데 또 다른 난관이 설교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성탄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 기사들이 수세기에 걸친 잘못된 주해들과 전설이 가미된 설명들로 덧씌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R. T. 프랑스(R. T. France)는 이렇게 풍자한다.많은 사람들이 성탄 연극을 통해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인지하게 된다. 수건을 둘둘 말아 쓰고 있는 마가복음의 목자들과 마태복음의 동방박사들(왕으로 신분 상승)이 어깨를 맞댄 채 나란히 서 있고, 무뚝뚝한 여관 주인 부부와 반짝이 후광을 붙인 아기 천사들이 한자리에 있다. 이런 등장인물 칵테일에 한겨울 눈 덮인 풍경과 발갛게 빛나는 마구간과 미소 짓고 있는 황소와 당나귀를 그려 넣은 크리스마스카드까지 보태면, 우리의 감성을 촉촉이 적혀 주는 현대 크리스마스의 주재료는 다 모이게 된다. 그리고 나도 누구 못지않게 이걸 즐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설교하는 누군가가 작은 디테일 하나라도 과장하거나, 아니면 그걸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기만 하면 투덜대는 심술쟁이가 아니다. 하지만, R. T. 프랑스가 그랬듯이, 내가 보기에도 복음서의 탄생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위태롭기만 하다. 그런 작은 오해들이 쌓이면서 복음서 기자들이 진짜 강조하는 것들이 왜곡된다. 정반대의 문제도 있다. 설교자들이 수년 동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성탄 이야기를 설교하다 보니 참신한 통찰에 굶주려 있다. 그래서 오래된 오해들 만큼이나 성탄 이야기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새로운 해석들을 덥석 받아들이고 만다. 피해야 할 실수 여섯 가지이러한 우려의 마음을 담아,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설교할 때 피해야 할 여섯 가지 실수를 제시하고자 한다. 모쪼록 이 글이 탄생 이야기를 선포할 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청중의 (그리고 당신의) 사랑과 애정이 드높아지기를 바란다. 1. 마태복음 1장의 계보를 건너뛰는 실수 우리가 예수님의 계보를 건너뛰다시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헨델이 ‘메시아’에서 이 계보를 담아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이 계보를 잠깐 훑어보기만 해도 파악된다. 이름들이 생명 없는 해골처럼 거기 놓여 있지만, 예수님의 계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몇 이름이 지면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르호보암, 아비야, 요람, 아하스, 므낫세,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이 그렇다. 이 인물들이 말하는 진실은 이것이다. 예수님의 가계도에는 역기능 가정이 적지 않다. 이런 가계에서 예수님이 나셨다. 그래서 천사가 요셉에게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고 말할 때, 이 메시지는 명백히 예수님의 계보를 되돌아보게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여성 넷(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포함하면 다섯)이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유대 족보에 여성이 등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구나 이 여성들은 뜻밖의 인물들이다. 사라나 리브가도 아니고, 다말과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라니? 우선 넷 다 성적 부도덕과 관련된 과거가 있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유혹했고, 라합은 창녀였다. 룻은 모압 여자인데, 이 모압 족속은 근친상간에서 기원한다(창 19장). 우리아의 아내는 다윗 왕과 불륜을 저질러 아이까지 낳은 여자였다. 네 여성 모두 이방인과 연결되어 있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다. 룻은 모압 사람이었다. “우리아의 아내”의 남편 곧 “우리아”는 헷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을 관통하는 주제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마 1:21)의 확장이다. 곧 경건한 유대인의 남은 자들(마 3:9, 8:11, 28:19)에 이방인들이 포함된다는 주제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탄생 이야기를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한다면, 마태복음 1:1-17을 포함해야 한다. 어떻게 은혜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다말(과 유다), 라합, 룻, 밧세바(와 다윗), 그리고 마리아 이야기를 시리즈로 설교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2. 여관에 빈 방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나셨다고 단언하는 실수무엇보다도,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머물면서 겪은 문제는 묵을 ‘여관’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헬라어 카탈뤼마(Katalyma)를 [현대적 의미의 숙박업소를 연상케 하는] “여관”(눅 2:7)으로 번역하지만, 신약성경에서 모두 세 번 등장하는 이 단어가 쓰인 나머지 두 곳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했던 가정집 객실(막 14:14, 눅 22:11)을 가리킨다. 케네스 베일리(Kenneth Bailey)는 이렇게 올바른 질문을 던진다. “누가복음의 끝 부분에서 카탈뤼마라는 단어가 개인 집에 딸린 손님방을 의미한다면(22:11), 같은 복음서의 초반부에서 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요셉이 베들레헴에서 지인의 집에 묵을 생각이었는데, 마침 그 방을 다른 손님이 먼저 차지하고 있었다면, 요셉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었을까? 아기를 구유에 뉘었다고 보고하는 것으로 봐서, 예수님은 요셉이 묵으려고 찾아갔던 가정집에 딸린 마구간이나, 아니면 심지어 지하실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대안도 있었다. 손님이 묵을 방이 이미 찼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족 방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있다. 겨울에 가축을 집 안에 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가축이 온기를 제공해 주기도 했고, 또 가축을 도둑맞을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하실이든 마구간이든, 가축도 함께 있는 그런 가족 방이든, 어떤 시나리오든 예수님이 태어나신 누추한 환경을 반영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예수님이 정확히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따지는 것이 괜한 헛소동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부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성탄 이야기의 초점이 사실이 아닌 엉뚱한 이야기―거절당한 이야기, 가혹한 여관주인 이야기, 여관방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생각하지 못한 무능한 남편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성탄 이야기는 예수님의 출생의 “정상성”으로도 충분히 놀랍다. 만왕의 왕께서 누추한 환경에서 평범하게 태어나셨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이야기다. 3. 목자들에게 과도한 성격을 부여하는 실수예수님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이 목자들(눅 2:8-20)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법적 소송에서 증언할 자격이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사회의 멸시와 경멸을 받았다고 목자들을 그리는 것은 정확한 묘사일까? 좋은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죄인들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까?대럴 보크(Darrell Bock)는 이러한 이해에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이러한 증인 자격에 대한 랍비 규정은 후대에, 더 정확히는 5세기에 생겼다. 둘째, 성경에 나오는 목자 모티프는 대부분 긍정적이다(시 23; 눅 15:4; 막 6:34; 마 18:12; 요 10; 엡 4:11; 히 13:20; 벧전 2:25).물론 목자들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하층 경제 계급을 대표한다. 따라서 그들을 하나님의 구원 메시지에 반응하는 낮고 겸손한 사람들을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하다.설교자들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유월절에 도살될 어린 양들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처음으로 전해진 아이러니를 강조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궁극적인 유월절 어린양이기 때문에, 이 사실은 정말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연결을 애써 강조하려고 무리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다른 목자들도 모두 유월절 희생제물로 바쳐지게 될 어린 양을 돌보고 있었을 터였다. 티모시 라니악(Timothy Laniak)은 더 유망한 강조점을 몇 가지 지적한다. 첫째, 목자들을 선택한 것은 미가 5장에 예언된 ‘목자 통치자’로 태어난 갓난아이의 정체성을 세심하게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둘째, “목자들이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눅 2:8)라는 누가의 표현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속의 ‘새벽’을 상징적으로 기다리는”(눅 1:68, 2:38; 사 63:4) 모습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 4. 동방박사들을 현자로 표현하는 실수여기서 문제는 동방박사들은 현자라는 의미에서 “현명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왕도 아니었다. 또 꼭 세 명이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다. 예물이 세 가지였기 때문에 세 사람이었으리라 가정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우리가 부르는 크리스마스캐럴 목록에서 “동방박사 세 사람”(We Three Kings)을 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동방박사들이 꿈, 점성술, 마술, 미래 예언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게 되면 우리가 동방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이 갖고 있는 아이러니와 경이로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의 독자들은 동방박사들을 부정적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예수님을 찾을 것이라는 의미로 “현자들은 여전히 그분을 찾습니다” 같은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언어유희는 자제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현자(지혜 학도)가 아니었다. 그들의 지혜가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한 것이 아니었다. 마태복음에 들어 있는 두 부류의 아이러니를 조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마태는 제한된 지식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했던 동방박사들의 열심과, 아이러니하게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무관심이나 적대감으로 일관한 유대 지도자 집단 및 헤롯 왕궁을 대조하고 있다.5. 마태복음 2:16-18이 보고하는 무고한 아이들의 학살 이야기를 회피하는 실수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하듯이 나도 수년 동안 이 이야기를 설교하지 않고 건너뛰었다. 그러다가 17년 전에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설교했다. 그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생각하게 되는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2012년 12월 16일 코네티컷 뉴타운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틀 뒤에 나는 또 이 설교를 했다. 그렇다, 나는 구주의 영광스러운 탄생으로 인해 베들레헴에서 남자 아기들이 잔인하게 도륙되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기록으로 보면, 당시 베들레헴의 인구를 고려할 때 사상자는 20명 남짓이었을 것이다.)마태는 예레미야 31:15을 인용하면서 베들레헴의 이 유아 살해는 라마에서 여인들이 슬퍼하며 통곡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로써 그는 이 사건을 끔찍한 일로만 대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강조한다. 이것은 훌륭한 전략으로 판명된다. 마태는 예레미야 31:15을 인용함으로써 우리에게 예레미야 31:16-17로 나아가서 나머지 이야기를 듣게 한다. 하나님께서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해 내시고 회복해 주실 것이라는 이야기다. 마태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녀를 위하여 울부짖은 어머니들에게 약속해 주신 희망은 곧 자녀를 잃은 베들레헴의 어머니들과 끔찍한 악과 불의에 직면한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희망임을 우리가 이해하길 바라고 있다. 6. 마가복음의 서문은 ‘크리스마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실수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성탄 이야기를 설교한 다음에 요한복음의 장엄한 서문으로 눈을 돌리는 목사들이 있다. 그렇다. 요한복음 1:1-18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마가복음도 그러하다. 요한복음의 서문은 성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계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마가복음의 서문은 이사야가 예언한 “새 출애굽”을 수행하는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오심을 강조한다. 마가복음은 이사야 40:3을 중심으로 시작하는데, 이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앗시리아에서 건져내시도록 대로를 준비하라고 촉구한다. 이 본문에 앞서 이사야 11:15-16은 이러한 대로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실 때 마련해 주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이사야의 새로운 출애굽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이 사명의 연속선상에서 사명을 맡으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비추어, 마가복음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외침으로 서문을 마친다. 곧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속박에서 건져내시고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다(막 1:14-15)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서문에는 성탄과 함께해야 할 모든 의미가 담겨 있다. 설교자의 목표 이 여섯 가지 실수를 피하자는 것은 지적 허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실수를 바로잡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듣는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에서 복음서가 전하는 이 이야기의 경이로움에 더욱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중심에 있는 복음의 영광을 다시금 드러내는 복음서의 본문을 정확하고 분명하며 설득력 있게 주해하여 설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설교는 우리의 설교를 듣는 회중의 애정을 드높이고 그들이 왕이신 예수님을 향한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박차를 가할 것이다. 찬송작가 엘리자베스 프렌티스(Elizabeth Prentiss, 1818-1878)는 간결하게 이렇게 썼다.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우리가 예수님이 나신 이야기를 선포할 때 우리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가장 멋진 시간이 될 것이다. 원제: 6 Ways Not to Preach the Birth of Jes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마가복음서문
동방박사
예수의계보
성탄
성육신
유아학살
목사-신학자가 필요하다
by Kevin DeYoung
2021-12-17
글을 시작하면서 먼저 주의사항을 하나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목사-신학자(pastor-theologian)는 한 발은 학계에 담그고 또 한 발은 교회에 담그고 있는 절반의 학자, 절반의 목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뉴스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논평하는 목사-전문가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기고하고, 책을 내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목사-작가도 아니다. 이들도 목사-신학자의 한 유형이 될 수는 있다. 이들도 귀하고 또 필요하다. 나 자신도 학자로, 전문가로,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목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목사-신학자라고 할 때에 내 머리 속에 있는 개념은 더 단순하고 더 성경적이다. 그래서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내가 교회에 목사-신학자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는 신학적으로 바른 진리를 선포하고, 신학적 오류를 분별하며, 성도들이 바른 진리를 알고 전하도록 가르칠 수 있는 목사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성경적 비전이런 목회 비전은 개혁주의 지식인들이 만들어 낸 몽상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목회자의 리더십이다. 우선 ‘목사’는 ‘목자’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목자는 용기 있는 열정과 부드러운 권위를 가지고 양들을 책임지는 이다. 목자의 일은 양들을 보호하고, 먹이고, 훈련하고,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인도하는 것이다(시 23:1-3, 요 10:1-15). 장로/감독에게 부여된 책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나운 이리 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말씀이 변질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행 20:17-31). 이것이 바로 목사-신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바울처럼 2년 동안 날마다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칠 수 있고(행 19:9), 3년간 매일 밤 교회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할 수 있으려면(행 20:31) 제대로 훈련 받은 깊이 있는 신학적 목사가 되어야 한다.목회서신의 가르침도 이를 말하고 있다. 디모데와 디도를 향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목회란 그저 따뜻한 공감과 도덕적 교훈을 제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목회의 목적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가르친다(딤전 1:5). 이 사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사랑은 헛된 말에 빠져서 진리를 떠나 믿음에서 파선하는 사람들을 경고하는 것이다(딤전 1:6, 19). 또한 이 사랑은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이다(딤전 3:2). 이는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으로 훈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딤전 4:6). 그리고 성경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딤전 4:13). 또한 바른 교훈과 바른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진리를 고수하는 일이기도 하다(딤전 6:2-3). 목사-신학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지켜내는 이다(딤전 6:20). 신학적 통찰교회 안에서 목사-신학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만 기록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나무만 바라보지 않고, 좀 더 높은 관점에서 숲을 바라보면 목회 사역이 필연적으로 신학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셨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계시를 이해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이해가 부족한 사람에게도 은혜로 구원을 베푸신다. 그러나 수많은 신학 책들과 논문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우리는 읽을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신학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알려고 하는 학문이며, 목사는 성도를 그 방향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2) 신약성경은 거짓을 분별하고 진리를 지키라고 강조한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진리가 있다. 거짓 가르침을 분별해야 한다. 바른 교훈을 가르치고 보호해야 한다. 이 일은 신학교에 있는 교수들만의 사명이 아니다. 이 일은 사도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열정을 품으셨던 우리 모두의 일이다. 주님은 거짓 교사를 용납하지 않고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다(계 2:2, 6).(3) 신약성경의 윤리적 가르침은 신학적 토대 위에 있다. 많은 바울서신이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초반부에는 교리를 가르치고, 후반부에서는 순종을 촉구하는 윤리가 제시된다. 둘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로마서 1-11장에 나타나 있는 방대한 신학적 교리는 로마서 12장에서 우리 삶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부르심으로 연결된다. 그렇다. 바른 교리가 바른 윤리로 연결된다. 바른 윤리가 없이는 바른 교리를 가질 수 없다. 제자도는 이러한 바른 교리에 달려 있다. (4) 신학적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더욱 온전하고 풍성한 기쁨을 누리게 한다. 진리들은 단순하면서도 경이롭다. 우리가 진실한 믿음으로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라고 찬양할 때에 우리 주님은 분명히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우리가 왜 이 진리를 믿어야 하는지 알면서 찬양하고 기도하면 주님은 더욱 기뻐하실 것이다.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만 알아도 이렇게 기쁜데,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취를 깨달을 때에는 얼마나 더 기쁨이 충만하겠는가? 또한 모든 것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영원하심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뻐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 앞에 경탄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더 기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신학적 가르침은, 우리의 머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을 키우고 더 나은 시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바라보며 그분이 하신 일을 맛보게 한다. 결론당신이 교회의 목사-신학자가 되는 비전을 품었다면, 나는 이렇게 권면하고자 한다. 목사-신학자가 되려고 학위를 받을 필요는 없다(물론, 이러한 전문 신학 훈련도 중요하다). 대중적 지식인이나 존경받는 학자가 될 필요도 없다(물론, 이런 사람도 필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주 간단하다. 그렇지만 실행하기는 말만큼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독서를 통하여) 머리의 습관을 함양해야 한다. (기도 가운데 성장하고, 기꺼이 나의 잘못을 고치고, 우리가 확신하는 것들에 대하여 용기를 가짐으로써) 가슴의 습관을 함양해야 한다. (최선의 것을 위하여서 현상의 선에 안주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의 습관을 함양해야 한다. 모든 교회가 이런 목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교회에 정말 절실하게 필요한 목사는 바로 이런 목사-신학자이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이런 목사가 되어야 한다. 원제: Why We Need Pastor-Theologians in the Church출처: www.9marks.org 번역: 박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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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의 힘
by 김형익
2021-12-16
타락한 인간이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함보다는 강함을 추구한다. 실패보다는 성공을 추구한다. 온갖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세상의 정치와 경제는 결국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본성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복음은 이런 자연인의 성향을 구속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받은 신자는 자연인의 성향을 거슬러 살기 시작한다. 그래서 복음은 역설이다. 거스르는 삶, 역생(逆生)이다.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자연인의 성향에서 구속받은 신자는 이제 약함과 실패에 기뻐한다. 약함과 실패를 오히려 자랑하는 기이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세상의 눈에는 낯설기만 한 것이다. 이 일은 “우리는 신자니까 이제부터는 약함을 자랑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신자들은 이 일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약함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표적을 중시하는 유대인이나 지혜를 숭상하는 헬라인에게 복음은 거리끼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은 우주적이든 사회적이든 정치적이든 증명하는 표적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도 메시아 되시는 표적을 그토록 끈질기게 요구했다. 고대 헬라철학은 헬라인이 얼마나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복음은 그들이 생각하는 근거 위에서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들에게는 거리끼고 미련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일 뿐 아니라 만유의 주요 통치자로 믿기 때문이다. 복음은 처음부터 그리스-로마 세계의 가치관에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힘과 권력, 승리와 성공을 원하는 세상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승산이 없는 일이다. 심지어 바울 사도는 자신의 수고로 세워진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여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전 2:3)고 말한다. 당대의 카리스마 있는 전문적 선생들처럼 회중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승부를 보려고 하지 않는 대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다(고전 2:4-5). 성령의 능력은 자신이 가진 능력 여하에 좌우되지 않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때 인간 능력의 크고 작음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도, 능력 없음으로 주눅 들지도 않는다. 승리주의 성경오독복음은 힘과 권력, 승리와 성공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미련해 보인다. 더구나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교회가 세상의 권력과 가까워지고 국가권력을 등에 업기 시작하면서 복음과 성경의 메시지를 비트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승리주의 성경오독은 이후 1500년이 넘도록 서구 기독교를 지배해 왔다. 승리주의 정신은 교회와 국가권력의 유대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한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발전과 함께 교회가 폭발적 성장을 경험하면서, 한국 교회는 승리주의의 망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복음이 가지는 역설의 힘은 점차 쇠퇴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공허한 낭만적 표현에 불과한 낡은 유물이 되고 말았다. 이에 발맞추어 등장한 현상이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의 번성이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서만 일어난 독특한 현상은 아니지만,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이나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 못지않게, 번영을 추구하는 이 나라의 소위 “기독교인”에게 십자가의 복음이 거리끼고 미련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승리주의 성경오독과 복음오해가 만연하게 되었다. 승리주의 성경오독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의 하나가 고린도후서 2:14이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이 말씀은 로마의 대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개선행진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맨 앞에는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이 백마가 끄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행진한다. 그 뒤를 함께 전쟁을 치른 영웅적 군사들이 따른다. 그리고 행렬의 끝에는 전쟁에서 패해 사로잡힌 포로들과 전리품이 뒤따른다. 그 때 대로변에는 피워 놓은 향들이 거리를 진동했다. 바울 사도가 향기 진동하는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들어와 있다고 말했던 그것이다. 문제는 바울이 어떤 자격으로 이 개선 행렬에 참여하는가이다. 승리주의 성경오독은 바울이 승리한 장수인 그리스도의 선두 마차에 나란히 서서 승리의 행진을 한다고 읽는다. 하지만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은 승리한 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정복당한 포로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개선 행렬의 맨 끝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행렬을 따르는 패장과 포로들은 개선 행진이 마치면 원형경기장에 들어가 죽임을 당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에게 정복당한 포로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리고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한다는 말이다. 이어지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는 포로들의 체취가 아니라 포로의 존재 때문에 빛나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 개선 행진을 경축하는 향기다. 신자는 힘과 권력, 승리와 성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정복당한 포로로서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다. 이것은 “나는 그리스도의 포로다. 그리스도가 나를 정복하셨다. 나는 그리스도께 항복했다. 그에게 붙잡혔다. 나를 정복하고 나를 굴복시킨 저 위대한 장수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는 고백이다. 내 인생은 그리스도께 붙잡혔고 그분께 정복당했으며 내 인생과 목숨과 모든 것이 그분께 달려 있다는 선언이다. 이것은 세상과 육신의 방식을 거스른다. 성공과 부와 학식과 명예와 업적을 추구하고 그것을 성취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가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외적으로 성공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많은 간증이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간증이다. 기도와 주의 도우심으로 성공했다는 그들의 진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 이것은 교회가 승리주의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것은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의 영광을 가리고, 자신도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허영으로 형제들을 유혹한다. 여기에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계실 곳이 없다. 약함의 역설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의 결론부에서 진짜 간증을 들려준다. 그런데 간증은 기도응답의 간증이 아니다. 기도거절의 간증이다. 육체의 가시—바울을 괴롭혔던 사람들이거나 지병이었을 것이다—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지만 거절된 이야기다. 그의 간증에서 핵심은 간구를 거절하신 하나님의 설명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사도는 이 설명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절을 도리어 기뻐했고 자신의 약함—육체의 가시를 포함하여—을 자랑할 마음이 일어났다. 그 약함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문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고후 12:9-10). 여기에 복음이 보여 주는 약함의 역설이 있다. 이 역설을 아는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할 수 있다. 신자는 자신이 약할 그때에 진정으로 강해지는 것을 안다(고후 12:10). 이 복음의 역설은 우리를 모든 열등감에서 자유하게 하고 모든 우월감에서 우리를 지켜 준다.복음은 힘과 권력, 승리와 성공을 쫓는 사람들에게 거리끼고 미련해 보일 수밖에 없다.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섬기고 그를 따르며, 승리와 강함이 아니라 패배와 약함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고린도 사람들에게 다시 들려주는 복음은 약함을 자랑하게 하는 복음이었다. 이 복음 안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고 그 능력이 역사한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배웠다. 그래서 약함을 기뻐하고 심지어 자랑할 수 있었다. 복음은 자기 잘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전하는 일이다. 인간의 잘남과 못남은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기뻐하고 자랑할 때, 거기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 그리스도도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에(고후 13:4), 그렇게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 되셨기에, 이 복음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기뻐하고 그 약함을 자랑할 수 있다. 신자는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복음의 역설을 온전하게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복음의역설
약함과강함
개선행진
그리스도의향기
승리주의
기쁨과자랑
바울의간증
기도응답
기도거부
미래 목회자 양성은 명령이다
by Steve Meister
2021-12-15
오늘날 그리스도인 열 명에게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열 명 모두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좋은 목회자를 원하지만, 교회가 미래 목회자를 길러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매우 적다. 19세기에 서부 개척 시대가 열리고 전문인을 육성하는 대학원 제도가 발전하면서, 미국 교회들도 이전까지의 사적인 목회 견습생 훈련 방식에서 벗어나 미래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신학대학원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성경대학과 신학원은 이후 교회에 셀 수 없이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래 세대의 목회자를 준비하는 일이 지역 교회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오로지 목회자 교육 기관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현실이다. 그런데 성경은 말한다. 미래의 목회자를 길러내는 책임은 현재의 목회자에게 있다고. 성경에서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두 가지 유형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다수를 대상으로 하기도 하지만, 또한 소수에게 집중하여 그들을 말씀의 사역자로 육성하기도 한다. 구약성경에서 예를 하나만 들자면, 에스라는 광장에서 온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느 8:2-3, 8). 또한 그는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아서 “율법의 말씀”을 가르쳤다(느 8:13). 예수님의 사역도 이 두 대상 모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예수님은 모여든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으며, 훗날 당신의 말씀을 모든 민족에게 전할 열두 명의 제자를 훈련하셨다(막 4:1, 10). 바울은 에베소에 오래 머물면서 사역했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유형이 눈에 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의 보여준 본을 기억하라고 권고하면서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또한 유익한 것이면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하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행 20:20). 바울의 이 증언은 목회자의 소명을 요약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바울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배 중에 설교하고 권면한 사역자로, 아니면 가정을 방문하여 교리를 가르친 사역자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고 여기에도 바울의 목회 사역의 지혜가 드러나 있지만,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바울은 에베소에서 삼년 간 머물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했는데(행 19:9), 두란노 서원은 바울이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임대한 강의실이었던 것 같다. 누가는 바울의 이 집중 제자훈련 기관에서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행 19:10)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소아시아 전역에 복음을 전할 복음전도자, 교회개척자, 목회자를 길러냈다. 이들 중에 우리가 아는 사람도 몇 사람 있는데, 에베소 동쪽 골로새 교회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한 에바브라 같은 이다(골 1:6-7, 4:12). 두기고와 드로비모도 에베소 및 아시아 사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행 20:4, 엡 6:21, 골 4:7, 딤후 4:12). 많은 열매를 맺은 바울의 이 제자양성에 대하여 시몬 키스트메이커(Simon Kistemaker)는 이렇게 평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신학교를 세워서 아시아 지역에 교회를 세울 미래 지도자들을 키웠다.…바울이 훈련한 이 제자들이 목회자가 되어서 소아시아 지역에 교회들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바울은 사도행전 20:20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떠올려 보라면서, 자신이 그들을 “공중 앞에서”에서 가르쳤고, 또한 “각 집에서”도 훈련했다고 강조했다. 바울 시대에 그들은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다(예를 들면, 고전 16:19; 롬 16:5, 골 4:15, 몬 1:2도 참고). 이처럼 바울의 사역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을 키우는 것은 분리되지 않았다. 이것을 동일한 말씀의 사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그의 마지막 서신을 디모데에게 보내면서 이것이 가장 우선하여 할 일이라고 가르쳤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자신에게서 들은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당부했다(딤후 1:13-14). 이것은 흔들리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는 요구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다른 설교자들에게도 이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라는 요구이기도 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특별히 당부한 것은 무엇인가? 디모데는 바울에게 들은 바를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딤후 2:2). “믿음직한 사람들”과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바울의 말에는 디모데전서 3:1-7에 나오는 감독의 자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처럼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될 미래 목회자들을 키우는 일이었다. 에스라, 예수님, 믿음의 아버지 바울처럼. 목회 사역에 대한 성경의 비전은 분명히 더 많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이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이 사역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신학교 중 하나인 남침례신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총장 알버트 몰러(Albert Mohler)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교회가 미래 목회자를 양성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또한 기성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젊은이들을 교회의 목회 사역으로 인도하는 일에 진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목회자로서의 사역과 미래 목회자를 길러내는 일은 성경이 명령하는 동일한 소명이요 오늘 교회들이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사명이다. 이 사명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목회 사역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미래 목회자를 육성하는 일은 교회마다, 목회자의 사역마다 그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규모가 있고 조직이 잘 갖춰진 교회들에는 체계적인 목회 인턴 과정이 있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과제를 갖춘 곳도 있다. 다른 많은 교회들의 경우에는 목회자가 재능이 있는 젊은 형제들과 자주 만나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고, 부교역자로 목회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치열한 목회 사역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할 수도 있다. 물론 교회에서 이런 훈련 과정을 한다고 해서 신학교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목회자 멘토링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후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미래 목회자를 훈련하는 방식이 어떤 것이든, 성경이 우리에게 명심하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 훈련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 육성은 목회자에게 내려진 명령이다. 목회자들은 우선순위를 잘 조정해야 한다. 여러 다른 일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새로운 목회자를 키우는 사역에 우선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목회자는 다른 전문직처럼 전문대학원에서 양성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오늘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안 돼서 목회의 자리를 떠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목회에 대한 열정 속에서 교육받은 신실한 목회자 후보생들이 지역 교회의 현장 속에서 격려를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 18세기 영국에서 앤드류 풀러(Anrew Fuller)가 목회하던 소함 침례교회(Soham Baptist Church)의 요람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분의 “모판”이다. 이곳에서 사역자들을 육성하고 파송한다. 우리는 그러한 은사를 받은 이들을 발견하고 격려하고 훈련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교회가 목회자를 위한 “모판”임을 인식하게 되면, 성도들이 열정과 재능이 있는 형제들에게 목회의 소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격려할 것이다. 또한 성도들은 목회자가 그런 형제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다. 그래야만 미래 세대의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실하게 목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가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에 다시금 헌신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지상명령의 부흥을 의미한다.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할 복음과 이 복음을 전파할 이들을 길러내기 위해서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스스로 제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 끝 날까지 제자를 만들어 내는 그런 제자가 되어야 한다(마 28:19-20). 목회자를 키우는 사명을 회복하라고 우리 교회를 자극하는 가장 큰 동기는 성경이 목회자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는 사실일 것이다. 다른 이유 없다. 목회자 양성은 목회자가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다. 원제: The Necessity of Training Pastors출처: www.ligonier.org번역: 박광영
미래목회자
미래목회자양성
제자도
제자훈련
에베소사역
신학교
신학교육
그의 거룩하신 얼굴
by Jonty Rhodes
2021-12-14
1세기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 어디선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오랜 여정에 지친 여행자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만히 다가가 창문 너머를 응시한다. 무엇을 보았을까? 그저 평범해 보이는 아기다. 그날 밤 이스라엘에 태어난 여느 갓난아기와 다를 바 없는 아기다. 아기의 두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점에서 진짜 인간이셨고, 진짜 인간이시다. 진짜 사람의 심장이 진짜 사람의 몸 안에서 박동하신다. 진짜 사람의 영혼, 진짜 사람의 지성, 진짜 사람의 감정이 다른 모든 사람들 안에 있듯이 예수님 안에 모두 있다. 진짜 사람의 폐로 그날 밤 이 땅에서 그는 첫 호흡을 시작하셨다. 고요했을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그러나 우리가 성경이 일러주는 대로, 믿음의 눈으로 보면, 여느 아기와는 다른 아기가 보인다. 뭔가 다르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보통의 남녀와 달리, 아기 예수는 죄가 하나도 없이 태어나셨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 찬송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의 거룩하신 얼굴(thy holy face) 광채가 세상 빛이 되셨네.” 예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그의 신성의 영광이 (변화산에서 잠깐 보이신 것을 제외하고는)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아기 예수의 얼굴에서 실제로 빛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찬송은 중요한 진리를 잘 포착하고 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이 그가 우리시는 구속, 구원의 핵심이라는 바로 이 진리다.인간의 타락 이후, 아담의 죄와 부패한 마음은 이후 오고 오는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롬 5:18-19). 따라서 우리는 타락하고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본질상 죄인인 우리는 죄의 욕망을 좇아가게 되어 있다(약 1:14-15).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는 예수님께는 해당하지 않는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 말한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신비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생물학적으로 확실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지만, 성령께서 마리아의 타락한 본성이 예수님께 전혀 전가되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첫 창조의 때에 수면 위에 운행하셨던 성령께서 이제 여기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새로운, 이전에 없던, 거룩한 인성을 창조해 내신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도 우리처럼 타락한 본성을 지녔다며 논쟁을 벌인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까지 포함한 실제 인간의 모습이 되셔야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입장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죄인인 우리를 구속할 수 있으려면, 예수님은 점과 흠이 하나도 없는, 죄 없는 희생제물이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 그는 온전히 무죄하셔야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실 뿐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마 3:15). 예수님은 아담과 우리가 실패해 버린, 하나님 율법의 완벽한 성취를 이루셔야 했다. 만약 예수님이 타락한 본성을 지녔다면 율법의 성취나 대속의 죽음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복음은 예수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다는 사실에 기초한다(벧전 3:18). 우리의 죄와 죄책이 예수님께 “전가”된 것이지, 그분께 실제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다. 참 인간이라는 것은 죄와 상관이 없음을 의미한다. 첫 사람 아담은 죄가 없는 상태로 지음 받았다.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그날이 오면 우리도 죄 없는 참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완벽하게 거룩한 분이시다. 그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롬 8:3), 죄 있는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지만 죄는 없으셨다(히 2:17).예수의 잉태와 나심으로 그의 구원하시는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날 밤 베들레헴에서 구속의 은총의 서막이 열렸다. 바울은 우리에게 “때가 차매”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전한다(갈 4:4). 1세기 당시가 왜 ‘그때’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쉽지 않다(롬 5:6). 당시 하나님의 백성은 중동과 지중해에 흩어져 있었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여러 민족이 하나의 언어, 그리스어를 통용하게 되었다. 이후 로마의 세계 정복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여행이 쉬워졌다. 이러한 모든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몇 전이나 이후보다는 이때가 가장 복음이 멀리, 빠르게 퍼지는 데 유리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때가 하나님의 적기였다. 분명 고요한 밤은 아니었을 그날 밤, 기쁜 소식이 있었으니 곧 우리를 죄와 사망, 어둠의 권세에서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신 것이다.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점과 흠이 없는, 죄 없는 희생제물이셔야 했다. 하나님께서 흡족해 하시는 제물이 되시려면 온전히 무죄하셔야 했다. 하나님의 법을 완벽히 지키시고, 우리가, 아담이 실패한 삶을 사셔야 했다.원제: The Holy Face출처: www.ligonier.org번역: 염영란
참인간
희생제물
예수님의인성
예수님의신성
성육신
성탄절
십자가
하나님의형상
고요한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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