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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기업가에게
by J. D. Greear
2021-10-28
우리가 가진 모든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노력을 단지 한 곳에만 독점적으로 쏟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나는 전도서보다 이런 갈등을 다루기에 더 적합한 성경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전도서의 대부분은 헤아릴 수 없는 부,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혜와 더불어 비할 데 없는 권능까지 가졌던 솔로몬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인생이 종종 헤벨(hevel)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헤벨은 “증기” 또는 “연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이다.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실망을 주는 네 가지 영역솔로몬은 성공 때문에 도리어 실망하게 되는 삶의 네 가지 영역을 구분한다. 오늘날 모든 기업가는 이 네 영역을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추구하는 선의의 기업가 정신이 허무한 헤벨로 전락하지 않으며, 인상적으로 보이지만 구름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있다. 1. 쾌락은 궁극적으로 실망을 준다솔로몬은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전 2:10)라고 말한다. 솔로몬의 모든 소유는 금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풍성하고 이국적인 음식을 즐겼다.그러나 솔로몬은 단순히 돈만 많은 부자가 아니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는 너무 박식했기에 다른 나라의 왕과 왕비들이 그의 지식에 감탄했다. 그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주제에 관해서 베스트셀러를 쓸 수 있었다. 그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된 노래를 만들기까지 했다.이런 모든 것을 소유한 솔로몬의 결론(verdict)이 무엇인가?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다른 말로 하면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 할 수 있는 거 다 해봤어. 그리고 성공했지. 그런데 그게 다 완전히, 완벽할 정도로 헛된 것이더라고.”2. 때로는 가장 뛰어난 비즈니스 지혜도 실패할 때가 있다다시 솔로몬이 말한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전 9:11).기업가라면 대체로 현명한 비즈니스 관행이 어리석은 관행을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반 원칙이 결코 철칙은 아니다. 때로는 운이 따르지 않을 때도 있다. 현명한 비즈니스 관행이 자동으로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당신의 인생 전체가 무너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이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기회도 될 수 있다. 3. 마찬가지로, 세상의 정의 시스템은 결국 실패한다솔로몬은 다시 말한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8:14).누구나 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이런 고통스러운 현실과 씨름한 적이 있다. 때때로 이 땅에서 선은 결코 보상을 받지 못하고, 악은 전혀 처벌받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악이 처벌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공의 길로 가는 비결처럼 보일 때도 있다.그럼 이런 식의 비즈니스 불공정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당연하다. 우리가 쓸 수 있는 권한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 청렴의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청렴까지도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솔로몬이 알고 있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종종 부패는 승리한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청렴과 의라는 기업가 정신에 기반하고 있다면, 부패가 승리하는 현실은 얼마든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위협할 수 있다. 4. 노동의 열매는 무너진다“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18–19).우리는 승계 계획(succession plans)을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내가 은퇴하고도 지속될 수 있도록, 회사에 사명선언문을 작성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후계자를 세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좋든 싫든 때가 오면 우리는 기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 기업가를 위한 네 가지 진리자, 이처럼 우리가 하는 일이 지속되지 않고, 정의가 우리를 실망시킬 수도 있다면, 왜 굳이 옳은 일을 하는 데 신경을 써야할까? 그냥 대충 생활하고 다른 사람이 더러운 건 청소하도록 놔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솔로몬은 우리가 더 큰 그림을 보도록 자극한다. 기업가 정신이 결코 우리에게 만족, 의미 또는 중요성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다음은 기업가 정신의 헤벨(entrepreneurial hevel)이 초래할 수도 있는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는 솔로몬의 네 가지 진리이다. 1.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음을 깨달으라!만족과 의미 그리고 가치는 결코 세상 성공에서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정체성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바로 그 정체성에 뿌리를 내릴 때, 삶의 우여곡절은 고작해야 딱 어느 정도까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뿐이다. 물론 성공은 여전히 기분 좋은 일이다. 동시에 실패는 여전히 끔찍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한 닻을 내리면, 결코 성공이 우리를 취하게 할 수 없고, 실패가 우리를 황폐화시킬 수 없다.전도서는 세상 모든 것의 무의미함에 비추어 볼 때,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솔로몬이 깨닫는 것으로 끝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오로지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 2. 확실한 심판을 생각하며 네 삶을 정리하라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은 당신의 삶에서 유일하게 절대적인 두 가지 현실이다. 당장 오늘 오후에 그 심판이 올 수도 있다. 그게 칠십 년 후일 수도 있다.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올 것이다.이런 현실이 우리를 두렵게 해서는 안 된다. 믿는 자들을 위해 죽음 저편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차리게 하고 삶에 대한 기대를 조절하도록 만든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오로지 어리석은 자만이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말한대로, 네 남은 날을 세는 법을 알고 그 날을 세면서 살아야 한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찾고 그 일을 추구하라솔로몬은 인생에서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한다. 탁월한 기술, 신중한 계획, 의로운 생활도 성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지혜와 계획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한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6). 다시 말해서, 삶의 불확실성과 실패 가능성이 나를 마비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 기업가인 우리가 성공에 대한 철통같은 신성한 약속을 원한다고 해서, 그런 게 인생에서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현명하고 잘 계산된 위험마저 감수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4. 미래가 아닌 현재에서 행복을 찾으라우리에게는 항상 “밖에서” 행복을 찾고자 노력하는, 진짜 유혹이 있다고 솔로몬은 설명한다. 그러나 행복은 바로 저기, 눈앞에 있는 게 아니다. 행복은 지금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나중이 아니라 지금 찾아야 한다. 당신이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당신이 처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솔로몬은 말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바로 이것이다. 솔로몬의 결론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를 경외하며, 때가 되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스칼(Pascal)은 ‘팡세’(Pensées)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겪는 비극을 기술했다. 파스칼에 따르면, 그들의 비극은 항상 나중에 즐기기 위해 살기 때문에 현재 속에서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현재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한다고 해도, 고작해야 미래에 비춰서 지금 현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할 뿐이다. 그렇다보니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표가 되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는 단지 수단에 불과하며,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짜로 살지 못한다. 단지 살고 싶다고 희망할 뿐이다. 결국 우리는 항상 어떻게 행복할지 계획만 세우기에,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운명이다. 기독교인에게 이게 사실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미래뿐 아니라, 오늘도 자녀들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이다. 원제: Dear Entrepreneu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생활
직업
파스칼
기업가정신
전도서
솔로몬
행복의비결
팡세
하나님의심판
승계계획
성경 속 하나님과 연결된 아름다운 내면
by Rutledge Etheridge III
2021-10-27
우리 시대를 특정하는 단어는 온전함(wholeness), 흠 없음(intactness) 그리고 완전성(integrity)에 대한 깊은 갈망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무너진다.”라는 사실을 전 세계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고통스럽게 목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만물을 하나로 묶으실 뿐 아니라(골 1:17), 타락하고 분열된 세상에 완전한 치유를 가져오기 위해 다시 오실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사이에 발생하는 일이다. 행여 너무 강한 압박으로 인해 주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개인적인 수단마저 무너지는 건 아닐까? 조심하지 않으면, 약한 믿음을 지키려는 상한 마음의 노력이 오히려 영혼에 더 큰 균열을 일으킬 수도 있다.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개인적인 회고록에서 자신을 종교적인 수준에 이르는 이성의 힘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린 철학자로 묘사한다. 스미스는 결코 반지성적 신앙(anti-intellectual faith)을 옹호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기독교 진리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이성을 뛰어넘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정열과 감정까지도 이성이 지배하는 인간에 대한 플라톤의 기본적 그림”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황폐함과 목회적 부적절함을 비난한다.(그가 스스로 표현한 대로) 철학에 대한 스미스의 자신감은 절망의 구덩이에 빠진 그 자신을 구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깊은 우울증을 앓는 동안 이성이 그의 상태에 관한 그 어떤 설명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그는 추상적 심리 분석을 제공하는 대신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와 그냥 옆에서 함께 있어 준 카운슬러의 존재를 향해 찬사를 보낸다. 자신과 같은 개인적 절망이 문화 속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을 본 스미스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나는 이 혼란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을 스스로 생각할 수 없다.” “지적 진리”와의 거래에 지친 그는 또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이제 내 운명을 시인과 화가, 소설가 그리고 작곡가와 함께하고 있다.”이 글을 쓰는 내 목적은 단지 스미스에게 어떤 답을 주기 위한 게 아니다(이미 많은 이들이 그런 시도를 했다.) 스미스가 거부하는 것이 단순히 합리주의와 그로 인한 서구 신앙의 잔류물이라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속이 다 시원하네.” 신앙 및 인간의 온전함과 관련해서 창조적 예술에 이바지하는 그의 비전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부족(tribe)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금 시대를 고려할 때,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얼마든지 좋을 수도 있는 것을 부분적으로 경시하고, 그가 보기에만 좋은 것을 찬양하는 스미스에게는 경고가 필요하다. 파편화된 신앙스미스는 새로운 운영 방식(modus operandi)에 필요한 동기로 다음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의 말을 인용한다. “믿을 수 있는 건 사랑뿐이다. 다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고, 다른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 스미스는 이렇게 추론한다. “만약에 믿을 수 있는 게 사랑뿐이라면 문학이 철학보다 더 진실하다.” 그는 “고양된 상상력”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예리함보다는 매력”을 가진 글을 쓰고 싶어 한다. 철학은 “상상을 ‘말하지’ 않기”에 실격이고, “마음에 맞지 않는 방언을 말하는” 논리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둘 중 하나(either)/또는 단절이라는 식의 사고는 사랑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존재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거라면(신 6:4; 마 22:37), 논리적 분석조차도 각자가 느끼는 마음의 언어를 통해 서로 따뜻하게 소통해야 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우리는 왜 철학과 상상력이 서로를 필요로 하지(commiserate) 않는다고 가정해야만 하는가? 이성과 그 변증법적 액세서리야 제자리를 찾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신앙과 관련한 이성의 제한된 기능 때문에 꼭 기피 대상이 되어야 할까? 이성이 가진 한계가 항상 부채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가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이성은 오로지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고 선언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이러한 내적 분열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전체성의 신학(Theology of Totality)스미스가 추구하는 전통의 한 축을 담당하는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신앙의 “일방성(one-sidedness)”에 대해 경고했다. 이런 영적 “병리학”은 기독교 신앙을 지성이나 감정과 같은 하나님과의 상호 작용에 필요한 특정 영역 속으로 가둔다. 바빙크는 이렇게 주장했다. “종교를 완전히 정의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의 기능을 구별하는 데 기초가 되는 핵심적 일치(unity)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성경이 마음(heart)이라고 명명한 것으로, 거기에서부터 삶 속의 정신(mind)과 감정 그리고 의지의 모든 표현이 나온다.” 바빙크에게 있어서 인간 내면의 연결성은 우리가 마음을 다한 신앙의 추구라는 과정(arts)에 참여하도록 한다. 뛰어난 바빙크 전기를 쓴 제임스 엘링튼(James Eglinton)은 바빙크가 가졌던 근본적인 부담은 다름 아니라 전체성의 신학을 수행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바빙크는 피조물의 세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을 때 창조의 “측량할 수 없는 상호연관성”, 즉 온전함(integrity)을 즐겼다고 고백한다. 사랑에 관한 작품에서 바빙크는 무엇보다 미학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기뻐했다. “우리를 만나 비추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 자연과 예술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는 둘 다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같은 이유를 가지고, 같은 정신으로, 또 같은 질서 속에서 이 둘이 함께 존재한다.” 이 존경스러운 바빙크 교수는 예술을 인류학(인간에 관한 연구), 심지어 종말론의 교사로까지 바라보았다.아름답고 구체적인 한 에세이에서 바빙크는 아름다움이 가진 계시적 능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름다움은 잠자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이미지와 기분 그리고 감정을 일깨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나를 나 자신에게 드러낸다. … 하나님의 은혜로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느끼고 또 전달한다. 그것은 예언이기도 하다. … 이 세상은 멸망할 운명이 아니라 … 모든 인간의 마음속 갈망이 추구하는 영광을 향해 가고 있다.아름다움은 우리 인간성의 숨겨진 측면을 드러내고 완전한 치유가 우주를 향해 오고 있음을 보증한다. 성령님이 성경에 그토록 많은 아름다움을 더해 주셔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성경은 예술적 영혼을 키운다성경은 종종 예술적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는 스타일로 인간의 마음 전체에 이야기한다. 많은 사례가 있지만, 성경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소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작은 성경”이라고 부른 시편이다. 시편은 내용과 구성 면에서 성경이 어떻게 둘 다(both)/그리고에 관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마음의 외침은 삼단논법적 추론을 특징으로 하지만(시 66:18-19), 또한 논리적 분석은 마음이 가진 창조적 한계도 알고 있다(시 131; 139:6). 때로는 건전한 전제를 설정했음에도 추론된 결론에 이르지 못하기도 한다(시 42).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시편은 나머지 성경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다윗 왕의 애처로운 시(시 32)는 자기 의를 향한 사도 바울의 분석적인 공격(롬 4장)의 토대가 된다. 시편에서 독단적 교리는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승화된다. 인간이 만든 학문 속에서 발견되는 잘못된 이분법은 찾을 수 없다. 에스더 믹(Esther Meek)은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표현한다. “사상 최고 철학자이신 하나님 편에서 베푼, 과도할 정도로 관대하고 예술적인 사랑의 행위로 성경을 바라볼 때 성경의 가치는 비로소 가장 빛난다.” 성경은 예술적으로 말해서 절대적인 진리이다. 나머지 성경과 마찬가지로 시편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동시에 완전히 인간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영적인 노래는 육신이 되신 영원한 말씀, 예수님의 마음을 채웠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기까지 했다. 시편은 우주적 완전함이 되신 예수님을 예언했고, 또한 그 일을 이루신 그분 영혼의 양식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분리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치유의 찬양을 통해서 우리 마음 전체를 하나로 묶는다. 비인간적인 양극화와 종교적 환멸의 시대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서 우리의 고결성을 잃도록 만드는 유혹이 사방에서 공격할 때, 하나님이 주신 사랑스러운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지 않고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원제: The Bible’s Beautiful Both/A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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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Griggs
2021-10-26
화요일 화요일이다. 점심시간에 목사는 오랜 시간 회의를 했다. 그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교회에 도착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제 아내가 수술을 받았을 때 병원에 오셔서 기도해주신 것 정말 감사드려요. 제 아내는 수술 후에 아직도 회복 중이에요. 사실 최근 몇 주간 저희는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교회에 있는 다른 분들은 아무도 저희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서 속상하네요. 아무래도 저희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는 그에게 사과와 위로를 전하며 전화를 끊었다. – 낙심.한 시간쯤 지난 후에 투병 중인 다른 성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사님, 전화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교회가 저희를 돌봐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정말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는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준 후 전화를 끊었다. – 감사.교회에서 퇴근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집사 한 사람이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왔다. “목사님,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지난번 회의 때 있었던 일 때문에 성도 몇 명의 마음이 많이 상한 것 같아요. 자신의 의견이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분들의 마음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목사님께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목사는 이야기를 듣고 힘이 쭉 빠져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걱정.그날 저녁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어떤 집사를 마주치게 되었다. “목사님, 정말 반가워요! 기회가 되면 목사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저희는 목사님의 목회를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혹시라도 저희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꼭 알려주세요.” – 용기. 수요일다음 날 아침, 목사는 수요기도회를 준비하기 전에 잠시 앉아서 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이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늘 교회에 가서 누군가와 얘기를 좀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모두가 너무 바쁘시더군요. 아무래도 저는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여기와는 다른 새로운 교회에 가보고 싶습니다.” 목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오후에 목사는 우편으로 온 카드 한 장을 받았다. “목사님,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희 가정의 믿음이 많이 자란 것 같아요. 말씀을 잘 가르쳐주시는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목사는 언제든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그 카드를 성경책에 넣어두었다. 그날 밤 10시 20분 목사에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심장이 뛰었다. “목사님, 지금 어머니가 많이 위중하세요. 병원에서는 어머니가 오래 버티기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제가 지금 빨리 가볼게요.” 목사는 즉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차려입고 나섰다. 목요일목사는 수요일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기에 목요일 아침에는 좀 쉬려고 했다. 그런데 아침 8시 45분에 전화기가 울렸다. 누군가 음성사서함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목사님, 오늘 아침에 잠시 뵙고 싶어서 교회로 찾아갔었는데 안 계셔서요. 혹시 어디에 계세요? 상담을 좀 하고 싶어요. 전화 부탁드립니다.” 목사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 지침.토요일토요일 아침에도 목사는 책상에 앉았다. 목사는 매주 목요일까지 설교 준비를 끝내려고 하는데 토요일 아침에도 설교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매주 힘들게 설교 준비를 하면서 목사는 자기 스스로 무능하기에 그렇다고 실망한다. 그는 아마도 다음 주 토요일에도 여전히 설교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토요일 저녁에 목사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후 10시 반쯤 되어서야 다시 책상에 앉았다. 설교를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시간쯤 더 씨름한 후에 그는 조용히 침대로 돌아와 기도하면서 잠이 들었다. 주일주일 아침을 깨우는 알람을 듣고 일어나서 목사는 숨 가쁘게 주일을 준비한다. 아침부터 교회에 나온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목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위로에 관하여 설교했다. 예배 후에 성도들과 악수하면서 그들의 기도 제목을 들어주었고, 새로 등록한 분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점심 식사 후 의자에 기대어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저녁에 있는 모임에도 참여했다. 하루를 마치면서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목회자로 불러주신 소명에 감사했다.매우 좋고, 매우 고통스러운목사의 대부분은 이런 일정으로 한 주를 보낼 것이다. 어떤 주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감정이 요동친다. 사도 바울처럼 교회를 위하여서 날마다 눌리고 염려하기도 한다(고후 11:28). 때로는 바울처럼 성도들과 무릎을 맞대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축복할 때도 있다(행 20:36-37).“하나님의 양무리를 칠 때”(벧전 5:2) 목사는 반드시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예수님이 목자장이시고, 목사는 그분의 양을 위임받은 목자이다. 둘째, 목자들은 양과 똑같이 보고 똑같이 냄새를 맡는다. 왜냐면 양과 함께하는 것이 목자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셋째, 모든 양은 때로는 목사에게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목사를 매우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양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닮은 모습과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득 채우는 것은 목사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목사가 예수님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하는 이유이며, 성도들이 예수님을 신뢰하며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발견할 때까지 목사가 그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이다. 매주 주일마다 목사는 성도들을 예수님께 인도한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가르치며, 참된 소망을 바라보게 하고, 이 세상은 헛된 것(약 4:14)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하도록 가르친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영광의 왕을 기쁨으로 경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모든 수고가 끝이 날 것이다. 천 명 중 한 명 나올 만한 사람천로역정을 보면 해석자의 집에 그림이 하나 있다. 그 그림은 목사를 그린 그림이다. 목사의 눈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목사의 손에는 최고 중의 최고인 책이 있으며, 목사의 입술에는 진리의 법이 새겨져 있다. 목사는 온 세계를 짊어지고 있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으며, 목사의 머리에는 황금 면류관이 씌워져 있다.크리스천이 그림의 의미를 묻자 해석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이 그림에 나온 사람은 천 명 중 한 명 나올만한 사람이다. 그는 영적으로 자녀를 잉태하고, 애를 써서 출산한 후에 자녀들을 정성껏 돌보는 자이다. … 그는 장차 임할 세상에서 큰 영광의 상급을 받을 자이다.”그 천 명 중 한 명이 나올만한 사람이 바로 당신, 목사이다. 당신은 고귀한 사명에 부름을 받았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최선을 다하여 우리 주님께서 정하신 그 날에 그분의 신부를 준비시켜 주님께 올려드려라. 주님은 당신에게 이렇게 칭찬하실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원제: A Week in the Life of an Ordinary Pasto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목회
목사
리더십
사명
소명
돌봄
천로역정
고통
양무리
목자장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리스도 고백적 복음주의 정치
by Steve Bryan
2021-10-25
2018년 캘리포니아 연설에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전 대통령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과 뒤를 돌아보는 사람 사이에는 늘 밀고 당기는 긴장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는 사람의 특징은 분열과 두려움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희망을 바탕으로 하는 통합의 정치를 수용한다고 덧붙였다. 오바마의 이런 말은 마치 미국 정치가 언제나 희망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진보주의자와 과거만 집착하는 분열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주의자로 나눠진 공화국과 같다는 이분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현실 자체를 양극화로 인식할 때, 양극화를 비난하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우리는 양극단으로부터 눈을 돌려 또 다른 지혜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 비록 양극단에 빠진, 자칭 복음주의자가 우리 주변에 많다 하더라도, 고백적 복음주의(confessional evangelicalism)는 여전히 정치에 관해서 할 말을 해야 한다. 언제나 개혁하는최근 미국 정치 속에 등장한, 투표권을 가졌으며 대부분 백인으로 구성되었고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the lightly churched)과는 대조적으로, 고백적 복음주의는 개신교 종교 개혁의 역사적 고백에 뿌리를 둔 다민족 글로벌 운동이다. 서서히 그 교리를 발전시킨 “단번에 받은 믿음”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경적 규범에서 차차 벗어나고 있다는 인식에 따른 반응으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셈퍼 리포르만다(semper Reformanda), 즉 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하거나 더 좋은 방향인 “항상 개혁되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원칙을 따랐다. 역사적 기독교의 이런 깊은 뿌리야말로 고백적 복음주의자를 2016년 선거 이후 스스로 “복음주의적”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반대자와 분명하게 구분하도록 만든다.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주의 의제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과거 개신교 개혁가는 아주 다른 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이 추구한 개혁은 변화하는 사회 관습에 교회를 맞추는 식의 변화도 아니었고, 역사의 상향식 발전에 따라 진보하는 식의 변화도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당시의 지배적인 사고체계와 상반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교회가 언제나 정교한 성경의 가르침 아래에서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오래된 찬송 가사처럼 우리 인간은 본성상 “방황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에서 볼 때 고백적 복음주의자가 가진 끊임없는 개혁의 열망은 때때로 그들을 “진보적” 성향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말씀에 신실하게 뿌리박고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진보와 공유점을 가지게 된다. 최소한 그들은 스스로 추구해 온 개혁의 성취를 결코 한때 유행하다 사라지는 식의 “진보”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 개인이 자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 의미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식의 급진적 자유로 대변되는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식의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추구하는 개혁은 신실함으로의 회귀, 잃어버린 중요한 무언가의 회복 그리고 굳건하게 진리를 붙들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이다. 셈퍼 리포르만다를 추구하는 것 때문에 일각에서는 고백적 복음주의자를 정치적 보수주의자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보수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고백적 복음주의자도 과거로부터 보존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그들도 사회학자 및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전문가”의 최신 “발견” 또는 문화 엘리트의 현재 감수성보다 선과 진리에 있어서 지혜를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안내자로 받아들인다. 이런 특징(commitments) 때문에 많은 고백적 복음주의자가 스스로 정치적 보수주의자로 규정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특히 영국과 같은 곳에서는 거의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셈퍼 리포르만다의 추구는 우리가 받은 것을 최종적으로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받은 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예를 들어 고백적 복음주의자는 1950년대의 사회적 규범을 굳이 보존하려고 하지 않는다. 개혁자는 자고로 전통이란 무조건 그 자체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개념을 거부해왔다. 그건 그들이 전통의 가치를 보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는 전통을 존중했다. 단 전통이 성경 속 권위 있는 규범을 보존하는데 한해서만 그런 존중이 가능했다. 물려받은 전통이 말씀을 통해 받은 계시와 반대되는 경우, 관행적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무용지물보다 오히려 더 나쁜 것이다.이런 특징은 많은 복음주의자가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에 동조하도록 만들었다. 체스터턴은 진보주의자의 임무는 “계속해서 실수하는 것”이고, 그에 반해 보수주의자의 임무는 “실수를 바로잡는 일 자체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이러한 선택에 직면했을 때, 고백적 복음주의자는 온건하고 고결하며 욕먹을 일 없는 정치적 중립에 자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고백적 복음주의자는 기껏해야 조금 더 짠 맛을 낼 뿐이다. 복음주의 운동은 결코 정치 운동이 아니다. 그 영향력이 특정 정당 내에서 머무는 한 빠르게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백적 복음주의의 진정한 영향력은 사람과 당파가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서 참되고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하는가 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선지자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함으로 정치 지도 전체에 걸쳐 혼란스러움을 가져올 뿐 아니라, 그 지도에서 벗어나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사상을 변함없이 지지할 것이다. 타협할 수 없는 확신선지자의 증거는 양극단이나 중립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 증거는 오로지 광야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록 주변부(margins)처럼 보이고, 심지어 그렇게 느껴지더라도 광야는 결코 주변부가 아니다. 광야는 선지자가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서 주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굳은 확신으로 담대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을 의미한다. 당 내부에서 오는 영향력을 거부함으로, 그들의 말은 오히려 위로부터 오는 진실의 능력에 덧입혀 권력의 중심에까지 더 확실하게 울려 퍼질 수 있게 한다.이러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현재 정치적 양극에서 발생하는 위협이 최소화되는 것은 아니다. 양극단이 주는 위험에서 자유로운 사회는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복음과 기독교 신앙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 명백하게 복음을 반대하는 적대자들에게서만 온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믿음에 우호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진리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권력에만 관심 있는 자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한다. 약한 자를 짓밟는 자, 그들은 얼마든지 화려한 종교 쇼를 할 수 있으나 실상은 진정한 믿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다(딤후 3:5a).주어진 순간의 긴급한 상황이 우리를 특정 그룹으로 이끌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한 극단이 초래하는 위협이 아무리 커 보일지라도, 당파를 따라 양극단을 옮겨 다닌다면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특정한 당을 대신하여 말하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적인 적이 아무리 진실과 선을 말한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더 큰 선”을 위해 가입했다는 당이 아무리 선을 위협하는 악을 말한다 해도 침묵하기만 할 것이다. 우리의 증언은 근본적으로 영적일 수 있지만, 그 증언이 신실하다면 모든 계층의 정치 지도자에게 놀랍고 불편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한 부유한 “관리(ruler)”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라는 영적인 질문으로 예수님께 다가온 적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웃 중심의 십계명을 강조하는 동시에 권위 있는 토라의 말씀을 그 관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 마음과 관련된 계명(“네 이웃의 것은 탐내지 말라”)을 생략하셨다. 그 계명에는 그 관리에게 없는 “한 가지”가 들어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이것은 변화된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는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소유에 대한 욕심까지도 버리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은 그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이웃 사랑과 무한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선을 갈망한다. 오늘날 “정치인”과 관련하여 고백적 복음주의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정치적 지지가 아니다. 우리의 분명한 고백과 홀로 선하신 하나님 사랑을 증거하는 것 그리고 이웃의 공익을 위한 우리의 헌신이다. 원제: Neither Progressive nor Conservative: The Politics of a Confessing Evangelic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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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연합하는 찬양의 능력
by Andrew Wilson
2021-10-24
찬양은 몸과 영을 하나로 연합한다.“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시 71:23).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주를 기뻐하는 마음으로 선율을 만드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찬양은 우리 몸도 움직이게 한다. 혀, 목, 가슴, 횡경막, 폐의 호흡 그리고 흉부의 떨림까지 영혼의 기쁨에 합해져서 찬양은 더욱 은혜롭게 된다. 온 몸으로 찬양하면 우리의 감정은 고조되고 우리의 기쁨은 한층 더 커진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할 때 엔돌핀과 옥시토신의 분비가 증가하도록 창조하셨다. 우리 몸과 영혼은 찬양할 때에 하나가 된다.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찬송하리)”(시 84:2).찬양으로 하나 되는 네 가지 유형을 보자. 1. 찬양은 다른 성도들과 하나 되게 한다제니 폴락(Jennie Pollock)이 지난 달 그녀의 블로그 아티클 'Together We Sing'에서 함께 부르는 찬양의 기쁨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의 글에 의하면, 노래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게 해준다. 노래는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이든 축구 경기장에서 부르는 응원가이든 서로를 하나 되게 해 주며, 함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교감을 준다. 심리학자들은 노래가 갖는 독특한(하이브 스위치) 기능에 대해 끊임없이 말한다. 노래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일시적으로 이타적이며 공동체적인 상태로 몰입하게 하는 기능에 대해서 말이다. 음악에는 분명 그런 기능이 있다. 만약 많은 사람이 동시에 말을 한다면 각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함께 노래를 한다면 더더욱 하모니를 맞춘다면, 개별 라인의 의미는 선명해질 것이고 다른 파트와 조화를 이루며 그 노래는 더욱 강하고 아름답게 표현될 것이다. 그게 바로 교회가 보여줘야 할 영광스러운 모습이다. 시편을 함께 노래하며 산 자와 잠자는 자가 서로 하나됨을 느낀다면 더욱 영광스러울 것이다. 2. 찬양은 인간과 살아있는 피조물을 하나로 이어준다아침에 눈을 떴을 순간에 차소리나 애들 소리가 없다면 새들의 새벽 합창이 들렸을 것이다. 피조 만물은 노래를 한다. 항상 그래왔다. 진짜 음악처럼 노래하는 새들도 있고, 바다 속 깊은 곳에서 혹등고래는 멜로디를 만들기도 한다. 생쥐는 찍찍거리는 초음파 소리로 노래하고 귀뚜라미는 날개를 비벼서 아름다운 곡조 소리를 낸다. 한번은 조용한 이른 아침에 사자가 점잖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적이 있는데, 기묘하게도 음악처럼 들렸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 같은 존재들은 말할 것도 없다. 창세 이래 매일같이 찬양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아름다운 찬양은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 왕되시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여, 목소리 높여서 우리 함께 노래하자.” 그런데 그 밖에도 노래하는 방법들은 허다하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이미 노래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대열에 초청받은 것이다. 3. 찬양은 생물과 무생물을 이어준다사람들은 종종 모든 것과 연결되고 싶다는 소망이나 그걸 실제로 경험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과 조화되며 만물이 하나됨을 느낀다. 외딴 곳을 여행하거나 혹은 환각초를 피웠을 때 이런 느낌이 든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성경적 관점으로 보면, 우주 만물과 연결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래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사 55:12),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시 98:7~8)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하늘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 지어다”(시 148:2). 이런 구절들이 조금이라도 과장되게 들린다면 이 성경 구절을 깊이 새겨보라. 예수께서 환호하는 제자들을 꾸짖어 달라는 바리새파들의 항의를 받고 하신 말씀이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눅 19:40). 4. 찬양은 피조물과 하나님을 하나되게 한다창조의 노래는 위대한 성악가이신 하나님, 윤율의 창시자, 조화의 근본, 세상만물을 지탱시켜 주시는 그분의 능력의 말씀과 때마다 계절의 리듬을 유지하시는 그분의 박자로 시작하고 끝난다. 나는 방금 ‘마술사의 조카’(나니아 연대기 여섯 번째 작품)를 아들에게 읽어 주고 있었는데, 아슬란이 노래로 나니아를 창조하는 대목이 다시금 경이로웠다. 그런데 하나님의 노래 가운데서는 가장 큰 환희는 창조가 아니라 구속사역에 담겨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르시는 특별송이 있는데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함께 찬양할 때 단지 우리끼리 서로 맞추거나 전체가 하나로 만들어진 질서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분은 자녀들을 위해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며,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함께 찬미의 노래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분이시다.“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원제: The Unifying Power of Sing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순곤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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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적
피조물
나니아연대기
죄인된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by 고상섭
2021-10-23
“나는 누구인가?” 많은 철학자들이 던졌던 질문이지만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은 태어날 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태어난다. 그래서 중요한 타인들(The significant others) 에 의해 자신의 자아상을 정립하기도 하고, 대부분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누구보다 더 잘하는 것, 못하는 것 등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립해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체성을 이야기 하지 못한다.여러 일반 서적들에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 안에는 이중적인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닮은 고귀한 면이 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죄인으로서의 본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며 또한 죄인된 본성을 가진 이중적 정체성 때문에 사람들은 늘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양극단에서 살아가게 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창 2:25) 완전한 연합의 관계였지만 죄가 들어온 이후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창 3:7) 스스로를 가리게 된다. 서로를 부끄러워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서 가린 것이다. 죄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을 남겼고, 인간은 그것을 가리면서 살아가게 된다. 오늘날에는 학벌, 외모, 능력, 직업 등으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외부의 무엇으로 삼을 때가 많다. 인간은 스스로 부끄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다양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자신의 수치심을 다양한 것으로 가리고 살기 때문에 자신의 외면을 보면서 괜찮은 사람이라 착각하지만 누군가의 비난이나 실패 앞에서면 내면의 수치심 때문에 또 좌절하게 된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인간의 정체성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 팀 켈러는 복음의 능력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첫째 ‘나는 내가 감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죄인이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둘째 ‘나는 내가 감히 바랐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용납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센터처치, 99쪽) 복음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끼게 해준다. 동시에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고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것은 인간 안에 있던 왜곡된 이중적 정체성을 하나로 통합시켜 준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만 깨달으면 절망하게 된다. 살 가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목숨을 스스로 끊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용납되었다는 사실만 주목한다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정체성과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하나가 되는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죄가 얼마나 큰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저렇게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면서 죽으셨을까 하며 깨닫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저렇게 큰 고통을 감당하시면서도 나를 구원하셨을까 하며 생각하게 된다. 십자가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에 대한 깊은 회개와 동시에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게 된다. 죄인됨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 가지 사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런 죄인인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한 자신을 ‘근심한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 라고 고백한다. 팀 켈러는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면서도 담대한 사람이 되게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겸손과 담대함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인간의 성품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온유한 사람’ 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와는 다르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는 야생말을 길들인 성품을 말한다. 그냥 착하기만 한 사람은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한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말을 함으로 죄를 지을 때가 있고, 말이 없이 과묵한 사람은 말을 해야 할 때 말하지 않음으로 죄를 지을 때가 있다. 겸손과 담대함이라는 두 가지 성품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는 생득적 자질이 아니라 오직 복음 안에서만 가질 수 있는 균형된 이중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이유는 내가 죄인 되었음을 깊이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대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나는 죄인이지만 사랑받는 자녀이다. 그래서 겸손하면서도 담대한 삶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 겸손하기 때문에 실패 앞에서 좌절하지 않게 된다. 자기 자신을 향한 기대나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담대함이 있다. 또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것을 성취하게 되더라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죄인된 나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역사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다. 이런 상반된 두 가지 정체성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이다. 자신의 실패에 너무 좌절하는 이유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성공에 쉽게 교만하게 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담대함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이룬 일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복음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정체성은 다 균형을 이룰 수 없다. 실패 앞에 좌절하고 성공 앞에 교만하게 된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된 나를 향해 절망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또한 성공 앞에서도 교만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룬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면서 좌절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지만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다 죄인된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지만 여전히 죄인된 존재이다. 이것이 어떻게 균형된 정체성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복음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또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죄인이기에 겸손하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에 담대할 수 있다. 실패 앞에 좌절하지 않고 성공 앞에서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오직 복음 안에서만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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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실종을 가족 실종처럼 느껴야 하는 이유
by Trevin Wax
2021-10-22
나는 무척이나 조부모님을 다시 안아드리고 싶다. 나는 동생과 동그란 도넛들을 우적우적 먹고 난 후 함께 기타를 치며 보내는 토요일 아침을 기다린다. 나는 부모님과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나서 연못 주변을 거닐며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 날 아이들은 시끄러운 사촌 모두와 재회하여 그 집은 왁자지껄한 기쁨으로 가득해 간다.우리에게 과학 기술의 발전은 감사한 일이지만,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는 시간만큼 좋지는 않다. 나는 가족이 그립다. 나의 교회 사람들 또한 그립다. 줌(Zoom)을 통해 교회 내 모임을 만나거나 또는 예배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주일을 보내지만, 나는 성도들의 대면 모임을 몹시 기다린다. 교회를 그리워하는 것은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가족이기 때문이다.트레빈 형제20대에 루마니아에서 목회 사역을 하면서 알게 된 문화적 차이 중 하나는 모두가 나를 “트레빈 형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형제”는 성도들이 교구 목사들에게 준 직함이었다. 그것은 애정과 존경의 용어였다. 루마니아 교회가 가진 문화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형제나 자매였다. 어린 10대들이 노래하고, 큰소리로 기도하고, 또는 권고할 때에 알린 형제 또는 리디아 자매 등으로 소개되곤 했다. 모두가 형제 또는 자매였기 때문에 교회는 내가 전에 경험했던 어떤 것보다 더 가족처럼 느껴졌다. 영적 성장을 향한 사도 바울의 비전을 다룬 스코트 맥나이트(Scot Mcknight)의 최근 저서(바울 목사: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돕는 것)에서 ‘형제자매로 지칭되는 문화’로서의 교회에 관해 한 챕터를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목사들이 성도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더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말이 중요하다. 이미지는 모양을 만든다. 비유는 살아 있다. 어떤 설교자 유형들은 그들의 교회를 청중들로 생각하고, 어떤 상담자 유형들은 자신들의 회중들을 영혼들로 생각하며, 어떤 교사 유형들은 그들을 학생들로 생각한다; 제사장 유형들은 자신들의 회중들을 중재가 필요한 죄인들로 또는 가난한 사람들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의 교회들을 형제자매들이라 불렀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을 형제자매로 생각하고 그들을 형제자매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청중, 영혼들, 학생들 또는 중재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문화가 아닌 형제애라는 문화를 만들었다.”(62)친구 이상스코트는 가족 문화로서의 교회가 두드러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교회는 5가지로 특징 지어진다.1. 사랑으로2. 모든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으로3.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동반 성장으로4. 경계의 안전과 보장을 인정함으로5. 형제자매 관계는 우리의 형제이신 예수와 함께 시작되었음을 앎으로써마지막 요점은 나머지 모든 것의 토대가 된다. 스코트는 기록한다.바울에게 우리는 친구 이상이다. 우정은 최종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우정은 형제애로 변한다. 우리는 우리의 맏형 때문에 형제자매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형제자매들이 되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때문에 형제들로 관계를 맺었다(78). 형제자매라는 용어로 교회를 묘사한 바울의 서술은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자매처럼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코트는 루마니아 작가 에밀 시오란(Emil Cioran)의 말을 인용한다: “사랑은 서로를 더 낫게 여기는 두 사람의 합의이다.” 즉 교회 가족 구성원이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는 바울의 훈계와 같다(롬 12:10). 형제자매라 칭하는 문화에 대한 도전소비주의 사회에서 교회로서 우리가 직면한 도전들 중의 하나는 민족성, 계급, 문화, 정치 또는 예배 스타일로 구별된, 여러분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교회 모임을 찾기 쉽다는 것이다.우리는 소비주의적 충동에 저항해야 한다. 가족으로서 교회의 형성적 영향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을 사람들, 즉 다양한 차이점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로 던져질 때 가장 큰 효과가 있다. 여러분의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선택하셨듯이 하나님은 그들을 양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형제자매의 문화는 교회가 단지 예배에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연합이라는 개념에 반대한다. 어떤 신자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그리고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는 본질적으로 견고하지 못하다(porous understanding of the church)는 이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코트는 교회가 가족처럼 "사랑의 경계가 있는 공동체"라고 인식한다.기독교 공동체의 형제자매를 표시하는 것은 세례, 그리스도 아래 있는 믿음의 삶, 그리고 그 물에서 흘러나오는 정체성이다. … 그 경계가 있는 공동체는 고대 가족들처럼 신앙의 공동체로서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그 명예를 지키는 형제자매 공동체와 같다는 것을 알도록 배워야 한다(70). 가족 싸움이 있는 교회나는 교회를 가족으로 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싶지 않다. 모든 사람이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보는 교회, 사람들 서로가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확고한 것이라 보는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가족처럼 사랑할지 모르지만 반대로 가족처럼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의 모험거리이다, 그렇지 않은가? G. K. 체스터턴(Chesterton)은 가족이 “항상 화목한 것은 아니다”라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작가들을 문제 삼았다. 그리나 가족의 불협화음이 가족을 좋은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그것은 너무나 많은 차이점과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는 그 이유 때문에 건전하다. … 그것은 우리의 형제 조지가 우리의 종교적 어려움에 관심이 없지만 트로카데로(Trocadero) 레스토랑에 관심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삼촌 헨리는 우리의 자매 사라의 과장된 야망, 즉 가족은 인류와 같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좋은 이유나 나쁜 이유로 가족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좋은 이유든지 나쁜 이유든지 솔직히 인류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이모는 다른 사람들처럼 불합리하다. 아빠는 일반 사람들처럼 흥분을 잘한다. 우리 막내는 일반 사람들처럼 장난꾸러기이다. 할아버지는 세상 사람들처럼 어리석고 늙었다. 또한 체스터턴(Chesterton)의 교훈은 교회에 관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품는 자들에게 적용된다. 이런 저런 쟁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 사람 또는 저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한다. 불필요한 것들을 토론하는 것 같다. 교회 가족을 같은 친구 그룹으로 바꾸는 것이나 또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기독교 사상가들이나 팟캐스트에 기초하여 당신의 영적 성장을 재단하는 것은 유혹적인 일이다. 하지만 교회가 살아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이슈들과 문제들과 논쟁들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교회가 진짜 죄인들, 아니면 성인들로만 가득 차 있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그의 위대한 구원에 대해서 감사 외에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종종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어떨까? 아마도 이번 격리 기간에 우리는 교회를 그리워하는 것이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형제자매 문화를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고립의 시기에서 벗어나게 될 때 우리가 어떻게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원제: Why Missing Church should feel like Missing Famil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종성
교회
교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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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예배
소비주의
사랑의공동체
교회가족
체스터턴
가족문화
형제자매
설교자에게서 기대할 점
by Collin Hansen
2021-10-21
도대체 무슨 권리로 설교자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예를 들어 30분 동안 강대상에 서서 하나님을 대변해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권위는 미국 대통령조차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수학 교사나 문학 교수에게 이런 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요즘 얼마나 다양한 다른 종류의 한 방향 독백이 우리 주변에서 넘치고 있는가? 한때 고대 세계에서나 인기 있었던, 세상을 순회하며 즐거움을 주던 대중 연설이라는 오락은 오늘날 수익성 있는 직업은 고사하고, 그 어떤 도심에서도 군중을 끌어들일 수 없는 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설교자는 그들의 권위를 뛰어난 지식, 정치적 권력, 또는 수사적 화려함에서 얻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들이 가진 권위의 유일한 근거다. “말씀을 전파하라”라고 바울은 에베소의 목사인 그의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 말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최신 넷플릭스 시리즈에 관한 지식을 얻고 싶은 사람에게 설교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분야와 관련해서 그들에게는 아무런 권위가 없다. 좋은 식당 추천도 마찬가지다. 페이스북에서 자주 접하는 음모론과 관련해서도, 나름 참고가 되는 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게 별 권위가 없다. 구직 관련해서도 도움이 되는 조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만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포하는 특별한 권세와 권위를 가진다. 단지 인간의 지혜로 만족하지 말라교회를 재발견하면서, 우리가 지금 찾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신성한 권위다. 오늘날 인간의 지혜는 차고 넘친다. 요즘처럼 광범위하게 인간의 지식을 누구나 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세상은 일찍이 없었다.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을 지배한다. 팟캐스트는 더 나은 당신을 약속한다. 인터넷 세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단지 인간의 지혜를 전하는 교회는 치열한 경쟁을 만날 수밖에 없다.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지 않고 굳이 목사의 설교를 들어야 할 이유가 뭘까? 유력 정치인이 등장하는 뉴스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대신, 굳이 주일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뭘까? 우리가 매주일 교회와 함께 하는 것은 오로지 교회에서만 거룩한 왕을 만나고 그가 전하는 좋은 소식과 우리 삶에 대한 그의 권고를 듣기 때문이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매주 모임에서 함께 있을 때에도 그 목소리를 듣는다. 함께 모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a people)으로 만들어져간다. 이것이 바로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교회 모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는 이유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교회 모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분된 백성으로 특징짓는 하늘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분리된 이 세상의 도시와 나라에서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들을 때 신성한 지혜를 알게된다. 그 지혜는 소셜 미디어와 베스트셀러 책에서 흔히 만나는, 오늘날 자칭 서기관이 외치는 인간적인 지혜와는 차원이 다르다. 설교자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 모두를 포괄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이상은 아니다. 설교자는 너무 많이 또는 너무 적게 말하는 죄를 지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의 기초이면서 동시에 한계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마크 데버(Mark Dever)는 종종 설교자의 사역을 우편 배달부와 비교한다. 우편 배달부가 우편물 봉투를 열고 추가로 메모를 하고는 다시 봉인해서 우편함에 넣지 않는다. 우편 배달부는 그냥 우편물을 있는 그대로 배달한다.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말씀은 우리가 그분의 합당한 권위를 분별하도록 도와준다. 그에겐 단지 우편물을 배달할 권한이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듣기 싫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소비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자기 계발 고수는 오로지 당신이 듣고 싶은 말만 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권위가 부족하다. 종종 그런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뛰어넘어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권위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단지 성경 말씀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당신의 양심을 구속하려고도 한다. 누구와 데이트를 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투표해야 하는지, 자녀를 어느 학교에 등록시켜야 하는지, 어떤 옷이 경건함을 나타내는지 등등을 당신에게 알려주려고 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문제와 관련해 그들이 얼마든지 지혜를 전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좋은 조언을 결코 신령한 권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인간적인 성찰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후렴구를 반복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고 선포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선지자가 하는 말이 항상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왕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는 선지자를 벌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이스라엘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교회를 재발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말하는 지도자를 찾는 경향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 역시, 교인들이 원하는 말만 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렇게 하는 게 생계 유지에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교인이 아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가혹하게 말할 때, 마치 대담한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런 말이 용감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과연 설교자가 정작 헌금 내는 교인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설교를 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사실상, 이것은 대부분의 설교자가 직면하는 가장 큰 도전일 것이다. 어떻게 교인의 마음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100%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게 가능할까? 설교자의 생계를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설교자의 가정까지 얼마든지 경제적으로 곤란하게 할 수 있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무겁고 진실한 말을 할 수 있을까?당신 자신에게 말씀을 가르쳐라설교자가 처한 이런 유혹을 감안할 때, 비록 듣기에도 좋지 않고 또 동의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를 재발견하려 할 때, 당신이 설교자를 의존하는 것은 단지 숨겨진 성경적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당신 스스로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방법을 보여줄 설교자까지도 찾고 있다.최고의 설교자는 당신이 설교자의 기술에 놀라도록 만들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당신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될 때, 당신은 설교자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갈망을 갖게 되고, 당신 자신을 위해 말씀을 읽고 적용하려는 열망도 함께 커진다. 그런 다음 선순환의 과정에 들어간다. 당신이 말씀을 알고 더 사랑하도록 설교자가 더 많이 도와줄수록, 말씀을 향한 당신의 취향은 더 많이 개발되며, 그 결과 더 깊이 있는 설교를 향한 당신의 갈망까지 함께 커지게 된다. 적어도 다음 네 가지 모습을 통해 교회에서 일어나는 말씀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1) 설교자는 전체 교회를 향해 말씀을 선포한다. (2) 교인들은 찬양와 합심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입과 마음 속으로 받아들임으로 응답한다. (3)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스스로에게 말씀을 가르친다. (4) 교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말씀을 가르친다. 이런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모든 교인이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말씀을 배우는 학생이자 동시에 가르치는 교사로 부름 받았음을 의미한다. 말씀에 관해 이렇게 생각할 때, 교회는 비로소 오늘날 가장 흔한 문제 중 하나, 다름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스스로 예상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가 견디어 낸 문제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4)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도 이렇게 경고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우리는 말씀에 초점을 맞춘 교회일수록 “자기의 사욕”, 즉 지식의 겉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가르침에 관심을 덜 가질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분명 인터넷을 창조한 사탄이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서 끝없는 추측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늘 설교자가 처한 독특한 도전을 생각해보자. 이번 주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설교자는 45분에서 60분 정도, 당신의 집중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집중은 집에서 설교를 들으려고 할 때 쉬지 않고 생기는 아이들의 성화, 문자, 졸음 등 방해 요소가 없을 때 이야기이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 비디오 및 팟캐스트는 24시간 쉬지 않고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가 이런 인터넷 세상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지금 인터넷 세상과 성경을 같은 선상에 놓고 성경에 우선순위를 두려는 게 아니다. 코로나19 라는 엄청난 여파 이후에도 성장할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터넷과 경쟁해서 이기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발버둥 치는 세상의 수많은 목소리를 오로지 권능으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잠재우는 교회일 것이다. 원제: What to Look for in a Preach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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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첫 8세기에 관한 여덟 가지 이야기
by Donald Fairbairn
2021-10-20
교회사에 관심 있는 대부분의 개신교인이 가장 잘 아는 분야는 아마도 종교개혁이고, 또 동시에 자신이 속한 교단의 역사 정도는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적지 않은 사람이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에 대한 지식도 조금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역사에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이야기가 숨어있다.다음은 아마도 당신이 몰랐을 기독교 교회의 첫 8세기에 관한 여덟 가지 중요한 사항이다. 1. 초기 기독교를 단지 로마에 해당하는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인이 로마 제국 내에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거의 처음부터 로마 제국 외부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신이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1세기는 아니었지만 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복음은 오늘날의 터키 동부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의 가장자리에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늦어도 4세기에 이르러 인도에 확실하게 도달했는데, 어쩌면 1세기 또는 2세기에 이미 닿았을 수도 있다. 4세기에 들어서는 복음이 로마제국을 넘어 아프리카(지금의 에티오피아)에까지 이르렀고,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으로, 멀리는 아일랜드까지 로마제국 바깥에까지 뻗어나갔다. 첫 번째 천 년 동안 유럽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더 많은 기독교인이 살았다.2. 초대교회가 로마인에게 박해를 받아 카타콤에서 은밀히 예배를 드렸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처음 3세기 동안은 매우 산발적이었고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다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당신이 몰랐을 사실은 기독교 초기에 기독교인에 대한 최악의 박해는 로마가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처음 3세기 동안 로마인은 기독교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도리어 페르시아인이 기독교인을 용인했다. (고대 산스크리트 속담 중에 “내 적의 적은 내 친구”가 있다) 그러나 4세기 초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페르시아인은 기독교인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로마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니까 말이다. 페르시아의 박해는 339년부터 370년까지 일어났으며, 상대적으로 기독교인은 그 기간 내내 로마 제국 내에서 우호적인 지위를 얻었다.3. 4세기 초 로마제국의 개종이 기독교 역사에서 분수령이 된 순간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로마는 기독교로 개종한 4개 왕국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나머지는 아르메니아, 조지아, 악숨(오늘날의 에티오피아 북부와 예멘)이었다. 사실, 현대 터키 동부의 작은 왕국인 오스로엔(Osrhoene)이 아르메니아보다 120년 앞선 2세기 후반에 공식적으로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스로엔은 수세기 동안 중요한 기독교 중심지로 남아 있었지만 독립 왕국으로 남아 있지는 않은데, 216년에 로마제국에 흡수되어 공식적으로 기독교 왕국으로 인정받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가 지금까지 기독교로 개종한 왕국 중 가장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유일한 왕국은 아니었다.4.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리스어로 완성된 니케아 신경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로마 제국 내 모든 교회의 표준 신경이 되었다. 그러나 410년에 페르시아 내 교회와 그 이후에 조지아, 악숨, 아르메니아, 그리고 멀리 인도에 있는 교회까지도 이 신경을 채택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니케아 신경은 전체 기독교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유일한 성서 이후의 저작물이다. (이와 반대로, 사도신경은 교회 협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된 적이 없다. 단지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구 교회에서만 전통으로 존중받을 뿐이다.)5. 사람들이 고유의 언어로 성경을 읽을 권리를 옹호한 14세기 영국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를 알 것이다. 물론, 위클리프 성경 번역(Wycliffe Bible Translators)은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성경 번역이라는 분야에 있어서 위클리프는 사실상 천 년이나 늦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동부 아프리카와 서부 아시아에서는 초기 기독교 세기에 이미 방대한 수준의 성경 번역이 있었다. 5세기 경에 성경은 시리아어(서아시아에서 사용되는 언어, 예수가 사용했던 아람어와 유사)로, 아프리카 방언인 콥트어(이집트에서 사용됨) 및 게츠어(에티오피아에서 사용됨)로, 그리고 아르메니아어와 그루지야어로 번역되었다. 사실, 4세기 말에 메스롭 마쉬토트(Mesrop Mashtots)라는 뛰어난 아르메니아 언어학자는 오로지 성경 번역을 목적으로 아르메니아 알파벳을 고안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고, 그는 나중에 그루지야어 알파벳 개발에도 참여했다. 얼마든지 위대한 현대 성서 번역 기관을 “메쉬토트 성경 번역(Mashtots Bible Translators)”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6. 당신은 아마도 6세기와 7세기에 북유럽의 많은 지역을 복음화한 아일랜드 수도사 콜롬바(Columba), 콜롬바누스(Columbanus), 그리고 보니파시오(Boniface)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활동하던 당시에 페르시아 기독교 수도사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실크로드 동쪽으로 여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600년까지 그들은 소그디아(오늘날의 구소련 중앙아시아 공화국) 전역에 기독교 센터를 세웠고, 635년에는 중국의 수도인 장안(현재의 시안)까지 도달했다.7. 732년에 있었던 투르 전투(Battle of Tours)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프랑크족 전사들이 무슬림 군대를 물리치고, 그들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후퇴시켜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이슬람으로부터 “구원”했다. 그러나 아마도 당신은 8세기 초에, 유럽을 “구한” 훨씬 더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전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었는데, 그것을 간절히 원한 아랍 무슬림은 80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의 절정은 717년에 시작된 해상 연합 공격이었지만, 일 년 이상의 전투 끝에 비잔틴 제국이 승리했다. 그리고 아마도 당신은 아랍 정복의 결정적인 전투가 751년 탈라스 전투(현대의 타지키스탄)라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이 전투에서 아랍인은 중국을 물리치고 지상 최강국이 되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정복에 성공한 아랍이었지만, 그들이 유럽 정복에는 실패했다는 사실 때문에 세계 지도는 다시 그려져야 했다. 유럽은 대부분이 살아남았고, 그제서야 유럽이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8. 전체 이슬람 기간 내내 중동 전역에 존재했던 소규모의 기독교 단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그룹은 20세기와 21세기 역사상 가장 박해받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이 그룹의 조상이 한때 시리아, 페르시아 및 중앙 아시아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구였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아랍 국가에서 확실한 2등 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웃 무슬림들 사이에서 신앙을 증거했다. 그들은 이슬람교도를 대상으로 아랍어로 사과문을 썼고,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이슬람 지도자와 공개 토론을 벌이기까지 했다. 당시의 글은 오늘날 이슬람교도와 교류하는 우리에게 계몽적인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교훈이 기다린다우리는 왜 이런 사실들을 몰랐을까? 비록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 역사에 대해 많이 들었다고는 해도, 우리가 배운 대부분이 종교개혁의 배경이 되는 서방 교회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현재의 기독교 주류와 연결되는 역사만을 배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기독교의 모든 역사가 아니며 초기 기독교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은 오늘날 가치 있고 매혹적인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주님은 개신교인인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른 때에 세계의 더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종족을 통해 일하셨다. 따라서 유럽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초기 기독교인의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의 일부이다. 편집자 주: 이 주제와 관련해서 보다 더 많은 내용을 접하려면, ‘글로벌 교회- 첫 8세기: 오순절에서 이슬람 시작까지(The Global Church—The First Eight Centuries: From Pentecost Through the Rise of Islam)’를 읽으라. 원제: 8 Things You Didn’t Know About the First 8 Christian Centuri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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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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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
성경의 권위를 포기하게 만드는 교묘한 수법
by Don Carson
2021-10-19
편집자 주: 오늘날 서구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권위와 관련해 여러 가지 명백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단지 위협이 명백하다는 사실만으로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눈에 띄지 않게 다가오는 교묘한 위협이 회의론을 조장한다는 사실이다. TGC 전 대표인 돈 카슨(Don Carson)은 데멜리오스(Themelios)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포기하게 만드는 교묘한 수법 열 가지를 설명한다. 다음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그의 에세이 발췌 내용이다. 선택적 증거에만 의존하는 위험성에 관해선택적 증거에만 호소함으로 말씀의 권위가 약해지는 표류의 가장 심각한 형태는 건강, 부, 번영의 복음을 의미하는 HWPG(Health, Wealth, Prosperity Gospel) 설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번영을 주신다는 구절과 왕의 자녀가 되는 사실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구절을 서로 연결하라. 그러면 확실한 이론(case)이 하나 만들어진다. 거기에도 조건이 하나 따라온다. 우리가 앞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내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 아니 그런 고난이 사실상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이라는 등의 생각은 깨끗하게 머리에서 지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말씀 왜곡은 너무나 자명하기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조금도 어렵지 않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교묘한 것이다. 교회 내 논쟁을 피하려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는 언급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기 싫다는 이유로 뜨거운 주제(빈곤, 인종차별, 동성애 결혼, 남녀 차별)에 관해서 진통제(anodyne) 치료법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런 골치 아픈 문제들이 알아서 사라지겠지라는 비참한 희망을 붙들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슬프다. 아무리 어려운 주제라고 해도 우리가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올바른 사고체계를 갖추려고 하지 않는다면, 교인의 대부분이 결국에는 세상 문화가 만들어주는 사고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가장 좋은 해독제는 체계적인 강해 설교이다. 왜냐면 강해 설교는 텍스트가 말하는 그대로 설교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주제 설교는 얼마든지 어려운 텍스트를 피해 갈 수 있다. 물론 문화적으로 맹목적 시각에 빠진 사람들은 바른 설교를 하는 설교자를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다. 난처한 구절과 주제의 회피에 관해설교자가 이따금 특정 주제를 피하는 이유는 주제가 주는 어느 정도의 난처함 때문이다. 당혹감을 느낀다는 것은 설교자가 스스로 보기에도 설교를 통해 선포할 만큼 특정 주제(예를 들어 종말론이나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주제)를 충분히 연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낸다. 또는 주제 자체에 느끼는 일반적인 불편함(예를 들어 예정론) 때문에, 교인들이 너무도 싫어하는 주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또는 성경에 반복해서 등장하나 설교자 자신이 정말로 싫어하는 주제라서(예를 들어 지옥과 영원한 심판) 그럴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추한 형태의 말은 이런 것이다. “오늘 아침 우리는 누가복음 16장 19절부터 31절의 말씀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이 본문도 예수님의 생애를 공부하다 보면 만나는 다른 많은 구절과 마찬가지로 꽤 충격적인 방식으로 지옥을 묘사하는데요. 솔직히 저는 이 구절에 관한 설교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구절은 무엇보다 저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이런 구절을 완전히 무시하고 설교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엄연히 성경에 있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설교자가 공식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설교자는 사실상 자신을 예수님보다 더 동정심 많고 민감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사악한 것 이상으로 기만적인 이러한 태도는 실제로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비정통적인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성경 남용에 관해최근에 존더반 출판사는 ‘동성애, 성경 그리고 교회에 대한 두 가지 견해(Two Views on Homosexuality, the Bible, and the Church)’를 출간했다. 이 책은 두 가지 견해를 각각 “지지(affirming)”와 “지지하지 않음(non-affirming)”으로 구분하고, 두 명의 저자가 양쪽의 견해를 대변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양쪽 다 말로는 “성경을 근거로” 논쟁을 벌인다고 한다. 한때 “지지” 쪽의 견해조차 신앙고백적 복음주의자가 견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왔던 반면,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지지하지 않는 견해뿐만 아니라 지지하는 쪽의 견해도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일종의 대안적 복음주의 입장이다. 그러니까 같은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성경이 동성애 결혼을 금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이 동성애 결혼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내용을 읽는 독자라면 천년왕국, 선택, 지옥, 세례 등의 주제와 관련해서 세 가지 견해 또는 네 가지 견해를 표방한 책이 시중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동성애에 관한 이 새 책도 다르지 않다.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지적할 필요가 있다. (a) 이런 부류의 책이 채택하는 형식, 그러니까 “y에 대한 x의 견해(입장)”에는 본질적으로 함정(slippery)이 있다. 학생들이 단 한 권으로 복잡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접하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되겠지만, 각각의 견해가 다 “성경에 근거해서” 논의되기 때문에 마치 모든 견해가 다 동등하게 “성경적”이라는 잘못된 시각을 전달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도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들이 “성경을 근거로” 펼치는 주해가 매우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전혀 망설이지 않는다. “y에 대한 x의 견해”라는 형식은 이런 측면에서 본문을 바탕으로 정당한 해설을 힘들게 만들고, 그 결과 각각의 견해가 마치 이론적(성경적)으로 볼 때는 모두 다 동등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양 세례를 베푸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y에 대한 x의 견해”는 어떤 측면에서는 유용하지만 다소 조작적이다. 내가 언젠가 다른 곳에서 주장한 것처럼 논쟁이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해서 모든 논쟁거리가 다 제대로 논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b)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y에 대한 x의 견해” 형식의 책이 어느 정도까지는 묵시적 신앙 고백의 틀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인지에 대한 세 가지 견해’ 같은 책은 (아직까지는!) 출판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도 철학적 자연주의에 심취한 자유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고백적 기독교인을 모두 다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제목의 책이 출판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약에 이 책이 출간된다면 그건 신앙 서적이 아니라 ‘비교 종교’에 관한 책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크다. “y에 대한 x의 견해” 같이 분류되는 책은 대부분 주제인 y에 해당하는 구성요소를 현재까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허용하는 주제로만 제한하고 있다. 이 목록을 확장하여 십 년 전에는 그 어떤 복음주의자도 허용하지 않았을 주제(예를 들어 예수의 신성 부정 또는 동성애 행위의 합법성)를 오늘날 다양하게 포함한 이유는 성경이 언급된 주제에 관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함으로 복음주의의 경계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하고 재정의하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규범적 규범(“룰을 지배하는 룰” norma normans)으로서 성경의 목소리가 이론적으로는 여전히 온전하지만, 실제로는 미묘하게 축소되었다.동성애 결혼에 대해 “지지” 견해를 취하는 것이 구원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을 복음주의 진영 밖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분명한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에세이 ‘성 윤리에 대한 복음주의적 접근(An Evangelical Approach to Sexual Ethics)’에서 스티브 홈즈(Steven Holmes)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오직 믿음(Sola Fide), 나는 거기에 서 있어야 한다. 내가 걷는 곳과 우리 모두가 걷는 곳에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온 세상을 위하여 단번에 드리신 완전한 제사이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새롭게 하시는 보혈이다. 그리고 그 구원이 나를 포함한 것이라면 나의 모든 실패와 혼란 속에서도 구원은 유효하다. 또한 동성 결혼을 긍정하는 나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이 겪는 모든 실패와 혼란 속에서도 구원은 역사한다. 신실하고 믿음이 확고한 내 친구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없다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솔라 피데를 외치는 복음주의 주장의 남용이다. 나는 구원이 믿음을 고백하는 것 이외에 이성애를 긍정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을 만난 적이 없다. 오직 믿음만이 은혜를 전유하는 수단이다. 그 은혜는 너무나 강력하여 인간을 변화시킨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은 왕이신 예수의 주권 아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9절부터 11절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바울 사상의 맥락에서 볼 때 그가 주장하는 것은 죄 없는 완전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보혈로 씻음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그러한 죄(탐욕이나 간음, 동성애 행위 또는 그 무엇이든)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죄가 그들을 정의하고 특징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솔라 피데를 외침으로 구원이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얻는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확증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함이 구원의 산물이지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죄라고 선언하신 것, 그 죄를 짓는 자는 왕국에서 배제된다고 하는 죄도 그게 죄가 아니라고(non-sinfulness) 주장하며, 솔라 피데가 어차피 다 구원할 거니까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성경은 홈즈가 말했듯이 “실패와 혼란”에 빠져 미끄러진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말하지만, 구원을 받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안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는 자신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은 항상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동반한다. 너무 부족한 독서가 초래하는 실패, 특히 오래된 작품의 경우에 관해책을 너무 읽지 않는 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경의 권위를 방해하는 경향으로 흘러가는 데에 일조한다…. 너무 적은 양의 독서, 특히 오래된 고전을 멀리하게 되면 현재 유행하는 의제에만 열광하게 되고, 그 결과 단순한 유행을 과도하게 흡수할 뿐 아니라 거기에 도취하기 쉽다. 물론 정반대가 초래하는 실패도 있다. 적지 않은 목회자가 청교도 작품에는 심취하면서 현대 작품을 읽는 데는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쓰는 언어, 사고 체계, 예화 또는 주제를 들으면 거의 4세기 전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이건 여기서 언급할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은 고전, 특히 주석과 탁월한 신학 작품을 읽지 않는 게 훨씬 더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작품만 읽을 때 생기는 문제는 누구나 다 비슷한 소리를 하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나 설교가 저속한 수준(kitsch)으로 떨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주 유창하게 자기 정체성, 환경 문제, 관용의 중요성,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그러나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음) 그리고 성경이 우리의 고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등에 관해서 이야기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재정 관리와 이혼 후 회복에 관한 세미나도 진행한다. 나는 성경이 이런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주제는 결코 성경의 핵심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굳이 세 명의 요한(존)만을 선택해서, 요한 크리소스토모(John Chrysostom), 존 칼빈(John Calvin), 존 플라벨(John Flavel), 이 세 사람의 작품을 더 많이 읽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주제에 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자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죄의 무서움, 복음의 본질, 복되신 삼위일체, 진리, 제자도, 기독교인들이 고난 당할 것이라는 성경의 주장, 잘 죽는 법, 새 하늘과 새 왕국에 대한 소망, 새 언약의 영광, 순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주권자이시며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 회개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믿음의 의미, 인내와 오래 참음의 중요성, 거룩한 아름다움과 지역 교회의 중요성 등등. 다른 세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이 성경에서 발견했던 이런 중요한 주제를 무시하면서, 과연 우리가 성경이 우리 삶과 사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느껴야 할 경외감에 관해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떨어야 하는 인간의 능력을 약화하는 요소는 수도 없이 많다. 그 모두에게서 발견하는 공통점은 오만(arrogance)이다. 오만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할 자녀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태도,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또 읽고 다시 읽고 묵상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대신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데이터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상상까지도 늪에 빠뜨린다. 이런 도덕적 타락은 우리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한다. 음란물에 빠져 있거나 성행위를 조장하는 사람들, 또는 심한 경쟁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말씀 앞에서 경외감에 떠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의 무자비한 행동은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성경의 실제적인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는 지적인 의심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때까지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줄어들 것이다. 물론 주님을 향한 두려움의 한 부분은 말씀 앞에서 떠는 경외감이다. ‘오만한 무지의 기술’에 관해“오만한 무지”는 이런저런 주제와 관련한 성경 구절이 주석적으로 혼란스럽고 불분명하기에 우리 인간은 결코 해당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만하다…. 이 오만한 무지의 기술이 오늘날 알려지지 않았거나 실행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거쉬(David Gushee)는 최근에 낸 책과 기사에서 동성애 결혼은 우리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수준으로(agree to disagree), 그러니까 예전에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불렀던 ‘무관심한 주제’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보수”와 “진보”가 동성애 문제를 비롯한 몇 가지 다른 문제와 관련해서 불행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예측한다. 그건 그들이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평하게 말해서, 성적 취향이 과연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질문에 덧붙여, 동성애에 대한 성경과 전통의 통일된 목소리는 결코 진보주의 기독교인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특히 도널들 포트슨(S. Donald Fortson III)과 롤린 그람스(Rollin G. Grams)가 쓴 ‘변하지 않는 증인: 성경과 전통 속에 드러난 동성애에 관한 기독교의 일관된 가르침(Unchanged Witness: The Consistent Christian Teaching on Homosexuality in Bible and Tradition)’을 참고하라. 트레빈 왁스(Trevin Wax)가 지적했듯이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과 행동 자체를 혁신하여 분열을 시작하는 “진보주의자”가 도리어 “보수주의자”를 향해서 타협하지 않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분열을 조장한다며 비난하고 있는 형국이다. 젠(Jen)과 브랜든 해트메이커(Brandon Hatmaker, 역자 주: 제니퍼 해트메이커와 브랜든 헤트메이커는 미국 텍사스에서 ‘오스틴 새 교회’를 개척했다. 여러 방송 출연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으며, 다섯 자녀를 둔 부부인데, 2020년 이혼했다)의 주장에서도 다소 유사한 패턴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의 게시물 대부분은 선하고 동정심이 많으며 고통과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할 만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최근 들어 일부일처제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의견(move)이 내 눈길을 끌었다. 많은 시간을 들여 그 주제를 연구한 결과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일부일처제일 경우 성경은 동성애 행위를 명백히 금지하지 않는다, 성경이 금지하는 것은 단지 난잡한 행위(이성애자이든 동성애자이든), 강간 및 기타 심각한 범죄에만 한정되어 있다. 해트메이커 부부는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많은 고통을 목격하고 스스로 “깊은 공부와 기도의 시간”을 보낸 후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해명서를 통해서 주장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동성 결혼이라고 해도 평생 일부일처로 산다면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을 말하는 모든 성경 말씀을 조금도 위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이라는 기이한 표현은 별개로 하더라도, 브랜든의 에세이는 윤리학자 데이비드 거쉬를 지나치게 찬양한다. 게다가 그 에세이는 요한복음 13장 34절부터 35절(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명령한 새 계명)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는다.브랜든의 글에 관한 중요한 반응 중에서 세 개를 골랐다. (a) 로자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는 자신의 놀라운 회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독자들에게 진실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조언한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서 다가올 심판을 경고하는, 그런 식의 ‘사랑’은 쉽게 감상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b)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스타일로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짧지만 단호하게 “해트메이커식 해석학”이라고 부르며 맞섰다. 그가 피력한 요점 중 하나를 꼽자면 다음의 내용이다. 해트메이커의 해석학에 따르면 일부일처제와 음행에 반대하는 논리가 어떻게 서로 연결된다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섹스와 결혼에 관한 정통 기독교 가르침을 완전히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러나 취약한 해석학은 결코 전통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 자, 생식 능력(말 2:15), 남성과 여성의 적합성(창 2:18), 또는 두 개의 상보적인 성이 합쳐져서 하나의 유기적인 결합이 된다(창 2:23-24)는 점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라면, 결혼이 왜 꼭 두 사람으로 제한되어야 하는 건지, 왜 꼭 서로에게 정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파트너 두 사람이 모두 다 서로를 향한 정절을 원한다는 데 동의할 수 있겠지만, 성적 정절이 필수라고 주장하는 결혼의 존재론과 목적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해트메이커가 주장하는 결혼의 모습 속에서 더 이상 정절의 가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혼외 성관계가 왜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해트메이커가 다룬 구절들은 아마도 억압적인 상황만을 다루었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일단 어린이를 향한 생물학적 성적 지향만 제거하고 나면, 도대체 어떤 내부 논리에 근거해서 성인 간의 합의된 성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라면 생물학적 형제자매가 결혼하는 것을 도대체 어떤 기준에 근거해서 비난할 수 있다는 말인가(유전적 기형아 출생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피임약까지 사용한다면)? 결혼에 동성을 포함하도록 재정의하는 순간, 결혼이라는 제도를 확장하여 지금보다 더 포용적으로 만든다고 착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결혼을 결혼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이다. (c) 마지막으로 케빈 드영이 2016년 4월 13일 T4G에서 독창적인 스타일로 발표한 “포괄적인 시대의 경계 그리기: 일부 교리는 다른 교리보다 더 근본적인가? 우리는 그 차이를 어떻게 구분하는가(Drawing Boundaries in an Inclusive Age: Are Some Doctrines More Fundamental Than Others and How Do We Know What They Are?)”에서 한 말을 소개하겠다. 우리 시대에 이 섹슈얼리티 문제보다 “오만한 무지의 기술”이 더 강력하게 호소하는 곳을 도무지 찾을 길이 없기에 나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 다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 성도들이 삶에서 전심으로 성경에 복종하려고 할 때 이 섹슈얼리티 문제만큼 그들을 성경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유혹하는 주제도 없을 것이다. 원제: How to Subtly Abandon Your Bible’s Author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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