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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 설교? 그리스도 형상 설교?
by 고상섭
2024-05-08
남침례신학교 설교학 교수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설교를 이렇게 정의한다. “성경적 설교는 교회의 지도자에 의해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성경의 한 문단의 요점을 전달하는 것인데, 신학적 석의에 의해 분별력 있게 하며, 신자의 특정한 공동체에 그것을 적용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1]쿠루빌라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설교를 ‘그리스도 형상 설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도(Christ)와 ‘형상’(Icon)이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만든 이 단어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데 있다는 말이며, 고린도후서 3:18과 로마서 8:29 등을 근거로 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9)“그리스도 형상적 해석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충족시키셨기 때문에 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성경의 모든 문단은 함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의 한 면을 모범적으로 묘사한다.”[2]아브라함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 설교’가 최근에 대두되는 이유의 하나는 쿠루빌리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비판하며, 그리스도 형상 설교를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대안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 비판 쿠루빌라는 에드먼드 클라우니, 브라이언 채플,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D.A. 카슨 등이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구속사의 큰 그림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성경의 목적은 단순히 그런 그림을 보여주는 수단이 아니라, 설교는 특정 텍스트의 특정한 메시지를 강해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나님의 메시지와 신자들의 삶을 서로 연결하는 언어적 사건”이라 설명한다.[3] 또 에드먼드 클라우니가 말하는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명제도 비판한다. “모든 성경 장르는 구속사적 논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윤리적 교훈을 제시한다. 이러한 교회의 성경 해석 역사는 삶의 변화를 위한 설교의 풍요롭고 교훈적인 전통을 지지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성경의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개별 텍스트의 윤리적 강조점을 약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4] 합동신학대학원 설교학 이승진 교수는 그의 논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이후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에서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중심 해석의 비판을 인용한다. “쿠루빌라는 구약 내러티브 본문에서 과도하게 그리스도와 관련된 의미를 찾으려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지나치게 자의적인 신학이라 비판한다. … 쿠루빌라가 보기에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의 잠재적인 문제점은, 구약을 성급하게 신약과 연관 지으려는 시도 속에서 개별적인 구약 본문의 특정한 요지가 해석자에게서 소홀히 취급될 수도 있다. 그러면 결국 구약 본문에 대한 온전한 설교를 통해서 해석자가 청중에게 충분히 드러내야 하는 해당 본문만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는, 과도한 신학적 해석 속에서 실종될 수 있다는 것이다.”[5] 정말,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쿠루빌라가 말하는 것처럼 윤리를 빈약하게 하고, 본문을 약하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그리스도 형상 설교로 전환해야 하는가? 필자는 쿠루빌라의 비판이 정당한 비판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쿠루빌라가 말하는 ‘그리스도 형상 설교’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살펴보자.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 설교’ 1)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아브라함 쿠루빌라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이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을 독자의 변화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아감을 목표로 삼는다. 특히 쿠루빌라는 프랑스 철학자 폴 리꾀르가 말하는 ‘본문 앞의 세계’에 대한 이론을 자기의 성경해석 방법으로 수용했다. 총신대학원 설교학 김대혁 교수는 “쿠루빌라의 본문 앞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그의 설교 방법론에서 설교의 적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설교는 본문 뒤의 세계만이 아니라 본문 앞의 세계를 비추는데, 여기에 본문이 투사하는 세계는 청중들을 향한 미래-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6] 여기서 말하는 ‘본문 앞에 세계’라는 말을 쿠루빌라의 다른 저서 본문의 특권에서는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용어로 설명했고,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말은 성경 텍스트를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의도’ 즉 ‘보편타당한 원리’를 말한다. 만약 닭싸움을 시도하는 닭의 주인이 자신이 닭이 다른 닭을 물어뜯고 이길 때는 기분이 좋다가 자기 닭이 물리고 살이 찢기면 자신도 닭과 함께 극도의 분노로 치닫는다는 글을 읽는다면 텍스트 안의 세계는 닭이나. 사육사의 사건 또는 닭싸움을 위해 걸린 판돈, 그리고 치열하게 응원하는 장면일 것이다. 텍스트 뒤편의 세계는 텍스트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당시의 상황들을 연구하면서 알게 되는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는 닭싸움을 하는 글을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2024년의 지금의 독자들이 동일하게 느끼는 무엇에 관한 것이다. 즉, 닭이 이기면 함께 기뻐하고, 지면 함께 우울해지는 닭싸움을 하는 주인이 느끼는 남성적 자존심이다.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세계이다. 이솝우화에도 길거리에서 뼈다귀를 발견한 개가 다리를 건너다 개울물을 내려다보고서 자신과 닮은 또 다른 개가 입에 뼈다귀를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벌려 짖다가 자기 뼈다귀까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이 이야기를 통해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를 설명한다. “이 우화는 어떤 개와 뼈다귀, 그리고 개울물과 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우화는 단순히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교훈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 우화의 저변에는 자족하면 어리석은 손실을 예방할 수 있다는 통렬한 교훈이 담긴 세계를 재현하면서 독자들도 그러한 만족의 지혜를 따르도록 안내한다.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는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해석학적 진행의 개념적 프레임을 제공한다.”[7]쿠루빌라는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개념을 통해 성경의 본문은 독자들에게 어떤 보편타당한 원리를 통해 삶의 변화를 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독자는 단순한 텍스트의 의미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 즉 보편타당한 신앙의 원리를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2) 문단 신학 아브라함 쿠루빌의 설교에서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문단 신학’(Pericopal theology)이라는 개념이다. ‘문단’이라는 말은 성경 본문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교회 상황에서 설교나 예전을 위해 다룰 수 있을 만한 정도의 분량을 의미한다. “성경은 쪼갤 수 없는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사상 덩어리로 구성된 것은 분명 아니다. 또 성경의 방대한 내용이 하나님과 그의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궁극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이 다양한 장르와 수없이 많은 문단 속에서도 이 추상적 주제만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8]설교할 때 목회자는 모든 성경을 한 번에 본문으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매번 설교를 위해 일정한 본문을 다루게 된다. 쿠루빌라는 텍스트가 청중의 삶의 변화를 위해 말하는 적용을 그 일정한 본문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는다.“단순히 의미론적 차원에서 단락을 구분하여 이를 설교의 기본단위로 보고 거기에서 저자가 전달하는 내용을 설교의 핵심 재료로 삼기보다는, 기능적/화용적 차원에서 설교의 단위를 구분하는 것을 선호하고, 그 문단에서 성경 저자가 전하는 내용을 가지고 행하는 바를 신학적 추동력으로 삼아서 이를 설교의 주요소로 삼는다.”[9]쿠루빌라는 문단 신학을 통해 성경은 전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설교하는 각 문단은 그리스도 형상의 한 일면을 닮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전체 그리스의 형상 중에서 한 일부분을 닮아간다고 생각한다. 만약 전 성경을 다 설교하고 듣고 순종한다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문단의 세계가 그리는 부분이 그리스도 형상의 일면을 나타낸다면, 통합된 본문 앞의 세계(즉, 각 문단이 투사하는 세계의 조각들을 모두 합친 것, 혹은 달리 표현하면 성경의 모든 문단의 신학 종합)는 완전한 그리스도 형상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각 문단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그들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한 문단, 한 문단, 한 설교, 한 설교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이뤄진다.”[10]‘그리스도 형상 설교’ 비평 김대혁 교수는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라는 논문에서 쿠루빌라 설교에서 아쉬운 점 중의 하나를 자칫하면 단순히 ‘모범적 설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각 문단에 집중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는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마치 전체 그림이 없이 퍼즐을 맞출 수 없는 것처럼 전체 성경에서 보이는 그리스도 중심적 내용이 없다면 모범적 설교가 될 우려가 크다. …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 개별 본문의 독특성을 경시했다면, 그 반대로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는 정경보다는 개별 본문의 구체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김대혁 교수의 지적처럼 쿠루빌라의 ‘문단 신학’의 약점은 성경 전체가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담고 있고, 각 문단은 그리스도의 형상 중의 일부분을 가진다면, 전체 성경의 온전한 그리스도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명확한 큰 그림이 없는 것이고, 각 문단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어떤 인격의 어떤 부분이 전체 그림 중의 어느 부분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또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이고 각 문단은 그 전체 중의 일부라는 말도 명확한 성경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오늘 설교하는 본문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어느 부분을 드러내는가? 어쩌면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모든 본문에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이라는 용어도, 성경의 텍스트와 오늘의 상황을 이어주는 ‘초자연적 의미’ 즉 ‘보편타당한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을 강조할수록 하나님이 텍스트를 통해 전달하려는 변화와 적용을 강조하게 되는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어떤 변화를 염두에 두고 변화를 촉진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내어서 그 인격을 만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목적이 삶의 변화라면 묵상할 때 반드시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묵상하는 목적이 삶의 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는 교제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삶의 변화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의 만남을 통해 사랑이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이지, 노력하고 추구해야 하는 하나의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날 때 변화가 따라오는 것인데, 쿠루빌라의 이론처럼 변화를 강조하게 되어, 순서를 바꾸게 되면 자칫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성도 있어 보인다.‘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적용이 곧 ‘그리스도 형상 설교’이다서두에서 제시했던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비판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추구하는 모든 설교자가 깊이 새겨들어야 하는 지적이다. 쿠루빌라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보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잘못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비판이다.그리스도를 드러냈지만 적용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발생하면 설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긴 했지만 삶에서 아무런 적용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팀 켈러도 이런 적용이 없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우려 깊은 목소리를 냈다. “클라우니 박사님이 가르치신 대부분의 학생들이 경험하는 것처럼 박사님이 보여주신 비전을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9년 동안 구약 성경을 설교하면서 저는 본문에 충실한 동시에 현실과 관련된 방식으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라는 어려운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특정 본문의 주제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본문을 어떤 식으로 적용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 중심 설교 중에는 해석학적 측면에서 보면 건전하고 고무적이지만 그 본문이 우리가 평일에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도록 구상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남겨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뉴욕에 와서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기 전까지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아냈습니다.”[11]팀 켈러도 단순히 구속사 과정을 이야기하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설교를 추구하지 않았다.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복음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즉 칭의가 성화의 동기가 되는, 칭의와 성화가 연결되는 설교이다. 팀 켈러는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한계를 ‘그리스도 중심 적용’으로 돌파했다. 스승인 에드먼드 클라우니로부터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배웠지만, 팀 켈러의 설교는 소위 구속사 설교가 비판을 받는 적용을 강화함으로써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할 만큼 독자적으로 다른 영역의 설교이다. 팀 켈러는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여기서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즉 칭의를 말한다. ‘모든 것’이란 삶의 모든 상황을 말하고 이 복음이 모든 것에 연결될 때 삶은 변화된다는 확신을 품고 있다. 센터처치에서도 복음을 자존감, 유머, 인간관계와 같이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즉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추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사람은 팀 켈러가 말하는 ‘복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와 일맥상통하고, 진정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은 만들어 가는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 설교’요 ‘구속사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팀 켈러는 설교란 진리를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인데, 진리를 마음에 와닿게 잘 전달하는 두 가지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설교의 두 가지 과업이라면, 이 둘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쇠가 있다. 바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 성경적인 정확성과 그리스도 중심성은 바울에겐 동일한 것임을 기억하라. 어떤 본문을 설교하든 그것의 주제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성취됨을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 본문을 제대로 설교할 수 없다.… 예수의 아름다움을 가리킬 수 없다면 다시 말해 그 본문의 특정한 진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만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마음의 정감을 제대로 건드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12]팀 켈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일 없이는 ‘마음의 정감’을 건드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여기서 ‘정감’(affection)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에서 차용된 단어인데, 인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을 뜻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감정(emotion)과 정감(affection)이 있는데, 사람의 변화는 ‘정감’의 변화로부터 이루어진다.삶의 변화는 ‘정감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 정감의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선포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으면, 참된 변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가난한 사람의 불쌍함을 자극할 수도 있고, 나눔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나눔을 자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모두 감정의 변화에 불과하다. 의지에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나누는 삶으로 변화하려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물질주의’가 깨트러져야 한다. “설교에서 우리는 그들 앞에 그리스도를 다시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정감 안에 그리스도가 물질적인 것을 대체하도록 해야 한다. 합리적인 주장이나 교리적인 가르침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다. 물론 그런 것들을 포함하지만, 그와 함께 우리를 위해 자신의 부요함을 포기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13]수련회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지만 돌아오면 여전히 삶의 변화가 없는 이유는 정감의 변화가 아닌 감정의 변화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정감이 변화될 때 삶은 변화되는데 그 정감의 변화가 일어나는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선포’가 필요하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라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필수적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 형상을 이루려면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추구하는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하고, 팀 켈러처럼 ‘그리스도 중심 적용’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대신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을 삶에 적용하며 나아가야 한다.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 설교’는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므로 이른바 도덕적, 율법적 설교와 차별성을 가지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매로우 논쟁이 한창일 때 교회의 상황을 설명한다. 모두 동일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복음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율법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는데, 그 핵심에는 “잘못된 분리”가 있었다고 말한다. 퍼거슨이 말하는 ‘잘못된 분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혜택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사역을 서로 분리하여 전할 수 있다. … 복음의 혜택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마치 그분을 떠나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그것과 그분을 분리할 수는 없다. … 마치 우리 힘으로 그리스도가 주시는 혜택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혜택을 그분과 분리하기 쉽다.”[14]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하는 분리는 ‘칭의와 성화의 분리’를 말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려면 먼저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하고 그 은혜가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결국 모든 성경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제시하지 않는 그리스도 형상을 따르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된 분리’를 가져와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 형상을 추구할 수도 있다. 결국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말하는 설교의 최종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한계점은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어쩌면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비판은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가진 한계를 팀 켈러는 ‘적용’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쿠루빌라가 말하는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가는 설교의 목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쿠루빌라는 각 문단이 하나씩의 그리스도를 드러낸 윤리를 나타내고 그 윤리의 조각들을 하나씩 모을 때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한 번에 하나씩 윤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그분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과 사랑을 경험할 때, 삶은 자연스럽게 변하게 된다. 설교의 첫 번째 초점은 삶의 변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은혜를 공급받는 것이다. 사랑하면 삶은 변화된다. 삶의 변화를 위한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법을 살펴보면 그 앞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행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히 순종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임을 알려준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20:3)고 명하신다. 그러나 이 명령에 앞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20:2). 결국 십계명을 지키는 힘은 우리를 위해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다. 종살이하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께서 먼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할 때 그 은혜가 순종의 동기가 되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살을 선포할 때, 그 은혜가 동기가 되어 순종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의 결과가 바로 ‘그리스도 형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앙상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서 우리는 늘 경계하고 자신의 설교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 형상 설교’는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1.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p.28.2. 아브라함 쿠루빌라, 본문의 특권, p.437.3. 같은 책, p.399. 4. 같은 책, p.401.5. 이승진,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이후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 설교 한국, 18(2023), 9-41.6.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복음과 실천신학, 60(2021), 11-44.7. 아브라함 쿠루빌라, 본문의 특권, p.73. 8. 같은 책, p.149. 9.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복음과 실천신학, 60(2021), 11-44.10.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p.197.11. 데니스 존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p.80. 12.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p.37.13. 같은 책, p.218.14. 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p.57.
칼뱅의 편지에서 찾아내는 그의 신학 발전
by Christopher Osterbrock
2024-05-07
중요한 인물의 편지 연구는 시간의 간격이나 문화의 차이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온 관행이다. 종교개혁 사상가 사이에서는 단연 장 칼뱅(1509-64)의 편지가 가장 사랑받는다. 칼뱅의 편지는 그의 내면의 묵상을 드러낸다. 그는 친구나 교인들과 관계 가운데서 편지를 씀으로써 자기 성찰의 한 형식으로 이를 활용했다.칼뱅의 편지 중 특정 시기(흔히들 말하는 1538-41년의 스트라스부르 시대)를 통해 우리는 그의 신학 발전을 검토할 수 있다.칼뱅은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편지는 아예 쓰지 않았다. 이러한 함의는 세 가지 특별한 윤곽, 곧 우정과 교회와 믿음의 연합하는 능력에 대한 칼뱅의 견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우정칼뱅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하나님을 아는 체험적 지식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연합의 본질이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일종의 개인 수도원에서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칼뱅은 정기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특별히 사역 중에 생긴 고립이 가져다준 낙담을 이기는 힘을 얻었다. 스트라스부르 시절 그가 느꼈던 고립감은 인내할 힘을 주는 우정이라는 측면을 깊이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과 연합을 경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하는 것임을 더 깊은 차원에서 깨달았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형제자매들 맺는 깊은 우정과 하나님과의 상호 연합이야말로 삶에서 더 큰 만족감을 누리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요소가 빠진 세상의 우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만큼이나 그를 믿는 신자들이 서로 싸워서 찢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점을 표현했다.교회(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 있고 윌리엄 파렐이 뉴샤텔에 있을 때) 제네바 양 떼를 섬기는 기능적인 목자였던 칼뱅은 자신과 파렐이 축복의 전달자로서 제네바 사람들을 각자의 교회를 섬기는 다른 목회자들과 결속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진실하고 우호적인 애정으로 말이다.칼뱅이 부재중에도 제네바 교회에 조언을 했다는 사실은 그가 교회에 대해 느꼈던 친밀감과 청지기직에 대한 영적 의무뿐만 아니라 교회를 향한 그의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그는 멀리 있으면서도 감독자로서 그들을 가르치고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얼마든지 보기에 따라서 뻔뻔스러운 영적 권위로 여겨질 수도 있는 내용을 썼다. “먼저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부탁하건대 무엇이든지 먼저 그 문제를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때 조금도 서두르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두 다 사랑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으니,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그의 편지는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거리나 물질적 수단에 구애받지 않고 행사하는 진실한 영적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 칼뱅은 편지를 통해서도 친교의 유대 (그리고 심지어 어느 정도의 권위)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에게 교회는 지역적이면서도 세계적이었다. 그러한 연결이 가능했던 건 신앙의 역할에 대한 그의 개념 때문이었다. 믿음의 연합칼뱅에게 믿음이란 “신자 개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 주어진 선물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삶과 하나님의 섭리라는 손길을 통해서 얼마든지 성숙한 차원에서 체험되고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신앙의 형제자매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친교는 중단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기회가 되는 대로 기꺼이 온 마음을 다해 서로 나누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제네바 회중 및 가까운 친구들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칼뱅은 그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원했다. 비록 거기에는 펜과 종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했지만, 그럼에도 단지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만이 아니라 “특별한 애정”이 요구하는 만큼 지속적인 교제를 원했다.칼뱅은 이런 교제를 통해 드러내는 믿음과 관련하여 교회에 관한 어떤 기대를 표명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 구성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사랑의 교감, 비록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교회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칼뱅은 이렇게 썼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비록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를 향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증거로서 멀리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서로 연합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라고 촉구했다.제네바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칼뱅은 편지를 나누는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한 신학 원칙을 견지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도하셔서 그의 신실한 백성을 이끌어가시는 연합은 실로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성도라면 누구나 모든 가능한 선한 형태로 그 연합을 추구해야 합니다.” 칼뱅과 동료 개혁가 마르틴 부써(Martin Bucer)는 편지 교환을 통해서 교회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친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종종 개인적인 신앙으로 이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사회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공동체는 다 함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비록 (성찬식 같은) 지역별로 이뤄지는 관행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전체 공동체의 일부로서 자리를 잡는다. 비록 칼뱅은 작은 프랑스 난민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지만, 칼뱅과 부써가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상대방의 통찰력을 즐기는(앞서 언급한 파렐과 제네바 회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기초는 이러한 공동체 성장에 기초를 둔다. 이들의 편지는 각자가 간직한 개인 경건을 진심으로 존중하면서 동시에 지역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존재하는 성도들 사이의 친교에 대한 개념을 확증한다. 편지 쓰기를 통한 성화훈련으로서의 편지 쓰기는 칼뱅이 자기 말과 소명을 성찰하면서 제네바 사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그리고 스트라스부르와 그 너머로까지 우정을 꽃피우는 데에까지 도움을 주었다.스트라스부르에 잠시 머무는 사이에 꾸준히 편지를 썼기에 칼뱅은 제네바로의 귀환이 순조로울 수 있었다. 더불어서 유럽 전역에 퍼진 개혁파 사역과의 파트너십이 열매를 맺는 것도 가능했다. 칼뱅은 부써에게 그와의 편지 교환을 통해서 얻은 혜택과 명예에 대해서 자신이 결코 “무신경하지 않다”라고 말했다.스트라스부르 편지는 칼뱅이 개인적 사역의 혼란 속에서 견디게 한 힘이었고 또한 그가 풍부한 교회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수단이었다. 이런 유익은 칼뱅 개인뿐 아니라 미래의 제네바 공동체에도 유익이 되었다. 비록 칼뱅이 성경의 정경을 위해서 글을 쓴 건 아니지만, 그의 글은 편지라는 틀에서 볼 때 사도 바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칼뱅의 편지를 연구하고 거기에 담긴 그의 사상을 신학적인 이점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결코 뭔가를 “훔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칼뱅이 편지 교환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인식했던 믿음으로 연합된 공동체 유대를 계속 이어가는 당사자이다. 비록 칼뱅과 몇백 년이라는 시간으로 떨어져 있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Christopher Osterbrock, “The Spiritual Utility of Calvin’s Correspondence During the Strasbourg Years,” Themelios 49, no. 1 (April 2024)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출처: Read John Calvin’s Mail to Discover His Theological Development
죽음의 청소
by 양혜원
2024-05-06
이사를 앞두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 미국으로 유학 갈 때 슈트케이스 두 개를 들고 떠났는데, 일본 생활까지 포함해서 6년 반 만에 귀국할 때는 배로 부쳐야 할 만큼 짐이 늘었다. 그로부터 4년 반이 흐르고 나니 포장 이사를 맡겨야 할 만큼 짐과 가구가 늘어버렸다. 아무래도 이사를 위한 짐 정리는 평소의 정리와는 다르게 좀 더 강도가 높다. 내가 기껏 포장비까지 내고 챙겨간 짐이 결국 안 쓰는 물건이나 쓰레기는 아니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어떻게든 짐을 줄여 이사 견적도 좀 싸게 받을 요량으로, 서랍 하나하나까지 다 뒤지면서 정리를 해나갔다. 한 번씩 정리해서 진작에 버린 것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서류와 노트, 입지 않는 옷, 쓰지 않는 그릇, 읽지 않을 책, 꺼내보지도 않는 기념품 등이 제법 많았다.쉬운 일은 아니었다. 버리는 쪽에 뒀다가 다시 가져가는 쪽에 뒀다가 하면서 망설이기를 여러 차례. 미국으로 유학가서 처음 핸드폰을 개통할 때 받은 서류에는 현지에서 살아갈 준비가 이제 되었다는 당시의 설렘이 담겨 있고, 일본에서 국내로 이사할 때 받은 이사 업체와의 계약서는 어찌어찌 2년간 구르다 보니 일본어로 일 처리가 가능해졌다는 사실에 뿌듯했던 마음이 담겨 있다. 하물며 박사 시험 볼 때 썼던 노트들은 어떠하랴. 그 노트들을 보면 학교 도서관에 아침부터 해 질 무렵까지 앉아서 하루에 한 권씩 해치워 가며 박사 시험공부를 하던 때가 고스란히 떠오른다. 이렇게 하나하나 추억하다 보면 짐 정리는 오래 걸릴 수밖에 없지만, 마침 그 무렵 중고 서점에서 사 들고 온 두 권의 책이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평소에도 더 이상 책꽂이에 다 꽂지 못할 만큼 책이 늘어나면 중고 서점에 내다 팔고, 그렇게 생긴 몇 푼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사서 나오기도 하는데, 두 권의 정리 길잡이 책도 그렇게 손에 넣게 된 책들이다.한 권은 데스클리닝(death cleaning)에 대한 책이었다. 데스클리닝이란, 남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죽기 전에 자신의 짐을 정리하는 스웨덴의 관습인데, 마당이 딸린 큰 주택에 살다가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한 나이 지긋한 스웨덴의 할머니가, 모아 둔 편지에서부터 정원 도구까지 하나하나 처분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하고는 규모가 다른 생활을 하신 분이라 그 내용을 나에게 다 적용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정리에 동기 부여는 잔뜩 해주었다. 그냥 이사 준비가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는 데스클리닝이라니, 제법 엄숙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날 함께 사 온 또 다른 책은, 데스클리닝의 디귿도 안 하고 갑자기 죽은 쉰넷의 중년 남성이 남긴 짐을 정리하면서 그 여동생이 쓴 일본의 책이었다. 콘도 마리를 낳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리의 고수 일본인도 케바케(케이스바이케이스)인 듯, 이 오빠는 정리를 안 하는 차원을 넘어서 쓰레기와 동고동락하며 살다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혼자 집에서 죽었다. 데스클리닝을 안 했을 때 남은 사람이 보게 되는 광경이 이런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면에서 이 책도 역시 열심히 청소하자는 쪽으로 동기 부여를 해주었다. 하지만 좀 과도했던 것일까. 평소에도 정리를 좋아하는 편인데 책으로 의미까지 부여받으니 일에 속도가 붙었고, 한번 버리기 시작하니 마음도 홀가분해져, 그래 싹 정리하자, 하는 기분으로 밀어붙였다. 만유인력이 작용하는 이 세상에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도 있어서 한번 발동이 걸리니 손대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눈이 갔고, 어느새 철거의 단계까지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원래 어머니가 사셨다가 잠시 내가 들어와 살게 된 집인데, 어머니가 사실 때 설치한 주방 싱크 쪽 보조 등이 진작에 고장이 나서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되었건만, 나는 무슨 강박적 미니멀리스트라도 된 것처럼, 내 정리의 완성도를 한층 더 올리고픈 충동에 사로잡혀 그것을 철거하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고로 죽다 살았다. 데스클리닝에 고무되어 죽음으로 나를 클리닝할 뻔한 것이다. 아, ‘적당히’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적당히 타협하라는 말과 함께 쓰여서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적당히’를 몰라요, 하는 말처럼 어디에서 멈출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도 함의하는 말이다. 그날 나는 그 ‘적당히’를 몰라서 나까지 청소해버리는 데스클리닝의 끝판을 볼 뻔했다. 사실 많은 물건을 가지고 산다고 딱히 잘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 물건을 다 정리하지 못하고 가는 게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갑자기 죽은 그 오빠의 경우, 일본 문화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여동생에게 큰 폐를 끼쳤지만, 오빠가 데스클리닝을 하지 않고 산 덕분 또는 탓에, 사이가 좋지 않아 30여 년 거리를 두었던 오빠가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이 여동생의 몫으로 남았다. 썩 반가운 흔적은 아니었어도, 냉장고에 남은 여러 종류의 장아찌를 치우며 오빠가 의외로 장아찌를 담가 먹는 남자였다는 것을 알았고, 마지막까지 취업을 위해서 썼던 이력서를 보면서 오빠가 얼마나 많은 자격증을 땄는지를 알았으며, 벽에 붙여 놓은 여러 장의 가족사진을 보면서 오빠에게 어느 때가 가장 행복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고, 그 쓰레기통 같은 집에서도 같이 살던 초등학생(일본에서는 소학교 학생) 아들을 위해 거북이와 물고기를 키우는 아빠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오빠가 혼자 쓰러져 죽은 그 작은 아파트를 정리하면서 여동생은 그동안 만나지 않고 살던 오빠와 제대로 이별할 수 있었다. 스웨덴 할머니는 데스클리닝을 해도 되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잉마르 베리만 같은 사람을 꼽았는데, 그가 하나도 정리를 하지 않고 산 덕분에 후대를 위해 많은 연구 자료를 남겼다고 했다. 베리만 같은 사람에 비하면 그 오빠가 남긴 것은 연구거리는커녕 오롯이 민폐지만, 여동생은 그 경험으로 책 한 권을 남겼으니, 나름 자료라면 자료 아닐까. 이 여동생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남긴 유품이 너무 많아 힘들었던 경험 때문에 자신의 짐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하는데, 사실 나의 어머니도 너무 버릴 줄 모르는 분이라 본가에 다녀오고 나면 정리 강박이 한 번씩 발동하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짐을 좀 정리하시라고 여러 번 종용드렸지만, 그럴 때면 어머니는, 나 가고 난 다음에 니들이 버리든 어쩌든 마음 대로 해라, 라는 말로 응대하신다. 그래, 큰이모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짐을 정리할 때 사촌 언니들이, 정리하다 보면 어디에서 현금이 나오고 보석 반지도 나오고 하는 통에 그냥 마구 가져다 버릴 수도 없어 애를 먹었다고 했는데, 나도 나중에 엄마 짐을 정리하면서 돈이든 추억이든 또 무엇을 건질지 어찌 알랴. 남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편지 한 장, 사진 한 장까지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무탈하게 장수한 스웨덴 할머니, 그리고 잔재주는 많지만 무엇 하나 진득하게 하지 못해 이혼당하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며 생활보호대상자가 되고 건강은 상할 대로 상해버려 중년의 나이에 돌연사한 일본의 남자. 데스클리닝은 이처럼 데스와 클리닝 사이에 있는 무수한 이야기들이다. 그래도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고(마 8:20), 전도 여행을 나서는 제자들에게는 돈은 물론이고 여벌 옷도 챙기지 말라고 하셨으니(막 6:8-9), 클리닝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한번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역시 마음을 돌아보는 일이 되지 않을까. 정리를 하다 보면 지금 내가 쌓아놓고 있는 물건들에서 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된다. 박사 공부할 때 썼던 노트는 추억도 추억이고, 언젠가 강의나 연구에 필요할 것 같아 가지고 있었지만, 그때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하는 마음으로 남아 나를 과거에 묶어 두는 물건일 수도 있다. 라떼의 기나긴 이야기는 거기에서 나오고, 아무도 듣지 않는 독백 속에 스스로 갇힐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물건이 오히려 대화의 물꼬를 트는 물건이 될 수 있다면, 그 물건은 조금 더 오래 가지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추리고 추린 나의 추억 박스에는 곧 입대를 앞둔 아들을 임신했을 때 썼던 산모 수첩, 그리고 죽어서 태어난 둘째 아들의 산모 수첩이 아직도 있다. 이런 물건들은 클리닝하지 않고 그냥 두고 가도 좋지 않을까. 이번 이사에도 이 추억 박스는 그대로 나와 함께 새집으로 간다.
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3) ‘선교’
by 문대원
2024-05-03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인천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세계 선교를 위한 글로벌 플랫폼으로서 로잔 운동의 비전을 설명하기 위한 세 번째 키워드는 선교(mission)입니다. 제3차 로잔대회의 공식 문서인 케이프타운 서약은 선교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세계 복음화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세상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은 그를 대적하여 반역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선교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타락한 인류를 자신과 화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선교는 교회가 감당하는 여러 가지 사역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선교적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그의 사랑과 구원을 알기 원하시고, 그에게 돌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택하심은 편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그를 편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로서 땅의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원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선교의 핵심인 복음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와 온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변증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다원주의 시대에는 공적 영역에서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고 설득하는 변증이 중요한 전도의 방편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진리(특별계시)와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진리(일반계시)를 총체적으로 연구하여 선포할 때 변증적인 전도가 가능합니다.로잔 운동은 그 시작부터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협력적 관계임을 강조해왔습니다. 로잔 언약 제5항은 “우리는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라고 고백합니다. 실제 선교 현장에서 “복음이 먼저인가, 빵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거부한다고 빵을 주지 않는 선교사는 없을 것이고, 복음을 도외시하고 빵만 주는 선교사도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궁극성”(ultimacy)이라는 개념이 “우선성”(priority)라는 개념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인데, 그것이 모든 선교사역에서 항상 첫 번째 임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순서를 논쟁하는 것보다 이 두 가지가 지향하는 동일한 목표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모든 선교 사역의 목표는 소망 없는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자 되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서 선교사는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 경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나타내야 합니다. 선교사는 깨어진 세상에서 고통받는 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복음의 힘을 적용해야 합니다. 동시에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대속을 통해 완성된 구원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선교사는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진리를 시대적 상황에 민감한 형태로 증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선교사는 항상 지역 문화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헤르만 바빙크를 읽기 위한 다섯 가지 원칙
by N. Gray Sutanto
2024-05-02
2023년에 헤르만 바빙크의 Christianity and Science의 영어 번역본이 출판되고 그의 사상에 관한 문헌이 증가함에 따라 점점 더욱 많은 독자가 그의 신학 그리고 그가 대표하는 신칼빈주의 전통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1] 그러나 Reformes Dogmatics(개혁파 교의학), Christianity and Science, Philosophy of Revelation 등으로 대표되는 바빙크의 책을 읽는다는 건 절대로 만만치 않다. 그의 글은 우아하기 이를 데 없지만, 문제는 그가 배경으로 하는 19세기 및 20세기 유럽 학문이 독자들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때때로 그는 우리가 더 이상 쓰지 않는 신학 용어를 사용한다. 게다가 바빙크 저술의 방대함은 잠재 독자들을 질리게 하기에 충분하며,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읽기 시작해야 할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모더니즘의 급속한 진화와 성장을 실시간으로 겪은 사람이 바빙크였기에, 그의 저작은 21세기 독자들에게 매우 귀중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개혁파 정통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며 보편성(catholicity)을 목표로 모든 작업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신학적 반대자들과 벌인 학문 논쟁에도 언제나 정정당당하게 돌입했다. 당시 사상가들의 올바른 부분에 관해서 긍정적으로 인용하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던 바빙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고작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서라도 서슴없이 비판을 던지곤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빙크는 당시의 상황에 비춰서 자신의 주장을 최대한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했음에도 오늘날 시각에서 바빙크의 실제 관점이 어디에 들어있는지 파악하는 데에 독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바빙크의 작업은 일반적으로 함께 다뤄지지 않는 특정 미덕을 결합했다는 점에서도 연구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성경적으로 철저한 개혁파 정통에 대한 추구와 이 정통이 현대 시대의 문제에 해답이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주장을 넘어서 그 사실을 보여주는 능력. (2) 공정한 시각으로 반대파의 글을 읽고 그들을 비판하는 능력. (3) 주요 문제의 양면을 보고 이를 넘어서 더 큰 통합을 향해 나아가려는 비전. (4) 성경의 권위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교회사 전반에 걸쳐 일어난 교리 발전에 대한 공정한 평가. 바빙크 독서가 주는 도전과 더불어서 그를 이해할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을 고려할 때, 가장 좋은 바빙크 독서 방법은 무엇일까? 일반적인 함정을 피하면서 글을 읽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다섯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1. 맥락을 설정하라여느 작가와 마찬가지로, 지금 읽겠다고 손에 든 책이 바빙크의 전체 저작물 안에서 차지하는 맥락과 위치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의 저작물은 크게 다음 두 가지 범주에 속한다. (1) Kampen의 신학대학원 재직 기간과 그 전까지의 저작물(1883-1902)과 (2)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시절(1902-21)의 저작물이다. 초기 작품은 주로 다양한 신학 주제에 대한 짧은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개혁파 교의학 초판에서 절정에 달했다.[2]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의 말년은 개혁 신학을 삶의 다양한 영역에 적용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예를 들어, Christian Worldview(1904)는 철학의 세 가지 주요 영역, 즉 형이상학(존재 연구), 인식론(지식 이론), 윤리학(도덕적 삶에 관한 연구)에 대한 신학적 함의에 관한 내용이다.[3] Christianity and Science는 같은 해에 출판되었는데, 세계관에 관한 소책자의 자매 편이자 또한 기독교 대학을 위한 일종의 선언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역사, 자연과학, 종교, 인문학 전반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유익함을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바빙크는 계시야말로 모든 인간 존재의 “비밀”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는 이런 관점을 1908년 스톤 강연에서 깊이 있게 제시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나중에 Philosophy of Revelation으로 출판되었다. 바빙크는 이 기간에 끊임없이 성찰을 수정하고 발전시키려고 애썼다. 개혁파 교의학은 확실히 그의 대표작이지만, 1906년에서 1911년 사이에 심리학과 종교과학에 관한 부분이 추가된 2판이 증보판으로 나왔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 생각과 씨름했고, 1921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비록 열매를 맺지는 못했지만) 본문에 대한 추가 수정과 확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바빙크의 신학적 견해에 대한 간결하고 성숙한 진술을 원하는 독자라면 The Wonderful Works of God(1909)와 Guidebook for Instruction in the Christian Religion(1913)을 포함한 그의 후기 저작을 보는 게 좋다. 이는 각각 평신도와 학생을 위해서 쓰였으며, 여기에는 보다 많은 독자에게 신앙의 깊이를 “전달”하고 싶어 한 바빙크의 열망이 담겨있다. 따라서 이 두 작품은 바빙크의 전체 저작에 입문하려는 새로운 독자에게는 최고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2. 개혁주의 보편성을 준수하라바빙크는 건설적인 신학 저술에 관해서 의도적으로 개혁주의 보편성 접근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특정 인물을 인용하는 경우에 한 구절에서는 그의 신학을 끊임없이 비판하다가 다른 구절에 가서는 도리어 건설적으로 활용하는 습관이 바로 그것이다. Wolter Huttinga는 이 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표현하는 경우에, 심지어 자신이 명백히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빙크는 항상 깊은 공감을 표시하기 때문에 독자는 바빙크가 논의 중인 저자의 의견에 실제로 어느 정도나 동의하는지 궁금할 수 있다. 바빙크를 읽을 때 종종 “이것은 누구의 목소리이지?”라고 궁금할 수 있다. 바빙크가 표현한 형태로만 보면, 가장 명백한 이단조차도 매혹적으로 들릴 수 있다. 바빙크 자신도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종종 “거기에도 크고 깊은 진리가 담겨 있다”고 고백한다. 비록 나중에 보면 그게 바빙크 자신의 의견이 아닐 때도 말이다. 바빙크의 지성이 추구하는 종합적 특징으로 인해서, 우리는 사실 무엇이 바빙크 신학이라는 맥락에 속하는지, 또 어떤 것은 아닌지를 분명하게 확인하기가 어렵다.[4]독자는 심지어 바빙크가 가장 문제가 많은 작가들에게서조차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의해서) 항상 선하고 참된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내가 에든버러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에 만난 한 사람은 바빙크를 “탐욕스러운 진공 상태”라고 부르며 그의 글을 읽는 것에 대한 좌절감을 표현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바빙크는 자신이 인용하는 사상가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조차도, 그들로부터 최대한 좋은 점만 찾아서 부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점이 바빙크를 일관성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도리어 너그러움을 가지고 다양한 사상가를 광범위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에게 개혁적 기독교가 참으로 보편적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은 종종 우연한 방식일지라도 시대를 초월한 모든 철학과 가치 속에는 필연적으로 개혁신학과 공명하는 측면이 있음으로 드러난다. 개혁주의 신학은 참으로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Cory Brock은 바빙크가 정통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이라고 주장한다.[5] 예를 들어, 그가 살았던 시기의 “철학 체계”로 눈을 돌려보자. 바빙크는 “칼뱅주의”의 중심 노선이 “칸트의 도덕적 원칙” 속에, 쇼펜하우어의 “비관적 철학” 속에 그리고 실제로 ‘의지의 비결정론’을 부정하는 19세기의 ‘거의 모든 철학 체계’ 속에 스며있다고 주장한다.[6]그렇다고 개혁주의 신학이 모더니즘과 결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시대의 철학을 수용하고 전유할 수 있는 칼뱅주의야말로 19세기 철학과 대화하는 데에도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초기 기독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적 시녀로 사용했던 경향에도 불구하고,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학에는 특정한 철학이 필요하지 않다. 신학은 어떤 철학 체계에도 반드시 적대적일 이유가 없다. 도리어 선험적으로나 또는 아무런 비판 없이 플라톤이나 칸트의 철학에 우선권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신학은 자신만의 기준을 따라 움직이며, 그 기준에 따라서 어떤 철학이든 테스트하고, 진실하고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7]기독교가 반드시 따라야 할 영속적이거나 자연적인 철학은 없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기독교는 그 어떤 세상 철학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8]그러므로 독자는 바빙크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출처를 같이 사용하더라도 놀랄 필요가 없다. 그가 특정 사상가를 참고했다고 해서 거기에 완전한 동의했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빙크가 누군가를 특정한 용도로 활용한 게 그 사람에 대한 전적 승인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함으로 우리는 바빙크가 일관성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3. 바빙크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바빙크는 일반적으로 (1) 성경적 주석, (2) 교리의 역사적-신학적 발전 추적, 그리고 (3) 해당 교리를 현대에 맞게 신선하고 규범적으로 표현할 것이라는 특별한 삼중 접근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한다. 개혁 윤리 조직에 대한 바빙크의 의도적인 설명을 살펴보자. 1. 우리는 성경의 자료를 모아 죄, 중생, 성화, 부모와 자녀의 관계 등에 관해 가르치는 모든 내용을 정리해야 한다. 2. 그리고 교회, 특히 개혁 교회가 이런 자료를 다루는 방식을 주의 깊게 조사해야 한다…. 3. 마지막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규범적인 방식으로 더욱 발전시키는 동시에 우리 시대에 적용해야 하며, 특히 윤리적 교리를 완성할 방법까지 제시해야 한다.[9]이러한 구조는 그의 윤리학과 교의학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를 염두에 두면 독자는 나무를 면밀하게 조사하는 중에도 숲을 바라보는 전체적 시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성경 자료에 대한 조사와 특정한 역사적 사상가 및 운동에 대한 평가가 도움이 되지만, 주어진 주제에 대한 바빙크의 건설적인 진술을 보려면 해당 부분을 반드시 끝까지 읽어야 한다. 바빙크의 이런 독특한 패턴은 책임 있는 신학자라면 단순히 낡은 것을 재현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대에게는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1895년판 개혁파 교의학 서문에서 그는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교의학을 발전시키려는 목표가 개혁주의 보편성의 정의에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고대라는 이유만으로 고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개혁주의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다. 교의 신학의 저작물은 무엇이 참되고 타당했는지를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여전히 참되고 타당한지를 기술해야 한다. 그것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10] 따라서 그는 의도는 교리의 발전과 현대의 맥락을 모두 고려하여 자신만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4. ‘유기적’이라는 개념에 주목하라앞의 원리에 이어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유기체의 개념을 잡아야 한다. “유기적(organic)”이라는 개념은 유기체가 다양한 부분에 생명을 불어넣는 “중심” 또는 “통합”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관찰에 근거한다(예: 심혈관계는 심장에 의해 통합되어 몸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바빙크는 이 아이디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데, 그건 창조물 속에서 발견하는 수많은 통일성과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한 구조화 장치이다. 엄격한 삼위일체론적 관점에 따라 바빙크는 창조가 수많은 영역에서 다양성 내의 통일성(unities-in-diversities)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삼위일체 자아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나님은 독특한 의미에서 다양성 속의 통일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적 존재는 단순하고 따라서 결코 부분들의 합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은 유비적 복제물이고, 서로 다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양한 통일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바빙크는 우주의 다양한 측면을 계속해서 “유기체”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우주 전체는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된 유기체를 형성하고, 하나님의 법칙은 단일 유기체이며, 지식은 과학의 유기체라는 등의 설명이다. 이 유기적 동기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유한 존재인 인간을 묘사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 세 분인 동시에 한 분인 것처럼, 또한 절대적 수준에서 다양성 내의 통일성인 것처럼, 인류도 원자 수준의 개인들이 모인 집합이 아니라 모두를 아우르는 머리 아래에서 만들어진 연합체(a corporate entity)라는 것이다.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쓴다.오직 인류만이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로서, 하나의 머리 아래에 연합하여 온 땅에 퍼져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제사장으로서, 땅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말이다. 실로 그것은 온전히 완성된 형상이요, 하나님의 가장 뚜렷하고 놀라운 형상이다.[11]인간을 묘사하는 바빙크의 유기적인 방식은 계시, 성경과 그 영감, 언약, 윤리, 죄의 기생적 성격, 교회 등 신학의 다양한 주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글 속에 담긴 유기적 동기를 찾아보라. 바로 그 곳에서 당신은 바빙크의 건설적인 목소리를 찾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5. 전체적 사고를 추구하라아브라함 카이퍼와 마찬가지로 바빙크는 획일성, 일방성 또는 잘못된 이분법을 사상의 역사에서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오류로 본다.[12] 획일성은 모든 다양한 창조 현상을 하나의 이념이나 사물로 축소하려는 유혹이다. 예를 들어, 자연주의는 모든 것을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 축소하려는 유혹이고, 범신론은 모든 것을 신성한 것으로 축소하려는 유혹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물질적인 것과 신성한 것의 차이를 적절히 구별하기에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포용할 수 있다. 일방성도 심각한 오류이다. 역사주의는 한 시대나 민족 집단을 황금 시대로 특권화하고, 비슷하게 발전된 다른 문화와 지적 삶이 다른 시대와 장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자유주의는 수평 관계, 이웃사랑과 윤리적 삶을 지나치게 우선시하는 바람에 올바른 종교마저 거부하게 만드는 해악을 끼친다. 또한 종교 광신주의는 이웃과 사회에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하면서 엄격한 개인적 경건만을 행사한다. 따라서 이러한 일방성은 세 번째 오류, 즉 잘못된 이분법의 발생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경우에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옵션이 전부이다. 반드시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이분법이 아니다. 대신에 창조 질서가 주는 풍요로움을 정당하게 평가한다. 이 점이 바로 Christianity and Science에서 바빙크가 과학주의나 급진적 경험주의에 대해 제기하는 일종의 비판이다. 간단히 말해서, 과학주의는 인간이 데이터를 분리되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파악이 가능한 기계와 같은 존재라고 가정하는 일방성이며 속임수라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과학자도 사람이고, 그들이 아무리 “사실”에 대해 “중립”을 요구한다고 해도 그들 또한 종종 자신의 개인적인 전제 또는 가정을 몰래 숨기는 경우가 많다. “어디서나 생명은 철학보다 앞선다.”[13] 과학자들의 중립성 주장 뒤에는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방적이고 비현실적인 설명이 깔려 있으며, 그런 식의 일방적인 인류학은 일종의 획일성을 낳기도 한다. 인간의 단지 그들의 관찰 대상인, 감각적 인지 능력을 가진 물질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경험 데이터만으로는 이런 사실 자체를 증명할 수 없다).바빙크는 통합의 관점이 부족하거나 “이원론”이라는 등의 이유로 특정 입장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독자들에게 어떤 추론이나 관찰의 패턴을 쉽게 거부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대신 특정 통찰력이 과연 전체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통합 가능한지를 검토하라고 촉구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를 편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생각과 삶이 더욱 온전해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실제로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지혜를 더 풍성하게 키운다. 우리가 더욱더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접근 방식에서 바빙크의 지향점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의 논의가 어디로 흘러갈지 훨씬 더 쉽게 예측하고 이해할 것이다. 바빙크를 읽자바빙크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심 있고, 여유가 넘치지만 동시에 열정의 독서가로 만들어 줄 것이다. 또한 양극화를 피하고 자신의 신념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나와 다른 사상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하는, 일종의 원칙에 입각한 유연성을 개발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러한 원칙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최고의 신칼뱅주의 신학자, 바빙크의 책을 읽으려고 할 것이다. 바빙크를 읽는 일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의 책은 고통을 보상하고도 남을 유익을 선물할 것이다. 톨레 레게(Tolle lege)!1. Herman Bavinck, “Christianity and Science,” trans. and ed. N. Gray Sutanto, James Eglinton, and Cory Brock (Wheaton, IL: Crossway, 2023); Cory Brock and N. Gray Sutanto, “Neo-Calvinism: A Theological Introduction”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3). 2. 초기의 이 논물들은 그 일부가 다음에 들어 있다: Herman Bavinck, “Essays on Religion, Science, and Society,” trans. Harry Boonstra and Gerrit Sheeres, ed. John Bol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3). 이 두 편이 더 중요하다: Herman Bavinck, “The Catholicity of Christianity and the Church,” trans. John Bolt,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7 (1992): 220–51; and Herman Bavinck, “Common Grace,” trans. Raymond C. Van Leeuwen,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4, no. 1 (April 1989): 35–65. 3. For a further introduction to 바빙크의 “Christian Worldview”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을 참고하라: “RTS Washington DC: Dr. Gray Sutanto ‘Bavinck's Christian Worldview,’”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January 25, 2020, YouTube Video, 2:33, https://www.youtube.com/watch?v=6VZKgOxQTBE&t=153s; and N. Gray Sutanto, “Bavinck’s Christian Worldview, Context, Classical Contours, and Significance,” in “Reformed Faith and Practice” 5 (2020), 28–39. 4. Wolter Huttinga, “Participation and Communicability: Herman Bavinck and John Milbank on the Relation Between God and the World” (Amsterdam: Buijten & Schipperheijn Motief, 2014), 78. 5. Cory Brock, “Orthodox Yet Modern: Herman Bavinck’s Use of Schleiermacher”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6. Bavinck, “Future of Calvinism,” in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Review” 17, trans. Geerhardus Vos (1894): 22. 7.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1, Prolegomena,” ed. John Bolt, trans. John Vriend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609. 8. 바빙크의 보편성(catholicity)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Neo-Calvinism: A Theological Introduction,” chap. 3; Cory Brock and N. Gray Sutanto, “Herman Bavinck’s Reformed Eclecticism: On Catholicity, Consciousness, and Theological Epistemology,” in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70 (2017): 310–32. 9. Herman Bavinck, “Reformed Ethics, vol. 1, Created, Fallen, and Converted Humanity,” ed. John Bol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9), 29–30. 10. Herman Bavinck, “Foreword to the First Edition (volume 1) of the Gereformeerde Dogmatiek,”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45, trans. John Bolt (2010): 10. 11.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2, God and Creation,” 576. 12. 특별히 다음을 보라: Abraham Kuyper, “Uniformity: The Curse of Modern Life,” in “Abraham Kuyper: A Centennial Reader,” ed. James Bratt (Grand Rapids, MI: Eerdmans, 2008), 19–44. 13. Bavinck, “Christianity and Science,” 108. 출처: 5 Principles for Reading Herman Bavinck
기독교의 배경이 된 역사 이야기 (1)
by 전재훈
2024-05-01
역사는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민족들의 전쟁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무력을 행사하여 권력과 부를 쟁취한 이야기가 역사인 셈이지요. 그 힘이 강을 중심으로 농경문화를 일찍 이뤘던 고대에는 농경이 발달한 국가가 힘이 있었을 터이고, 결국 그 힘을 이용해 정복 전쟁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인구가 많은 국가가, 그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똑똑할 때 그 국가는 강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반드시 늙고 죽기 마련이니, 한 시대를 풍미한 지도자가 죽고 나면 그이 나라도 붕괴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고대사는 이런 구도로 역사가 진행된 것입니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구의 생김새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구는 여러 대양과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한국에서 동쪽으로 미국에 갈 때 어마어마한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이 바다가 태평양입니다. 유럽으로 가려면 중국과 인도를 넘어 날아가게 되는데 인도 밑에 있는 거대한 바다를 인도양이라고 합니다. 유럽에 도착하면 이탈리아반도 아래에 있는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이를 지중해라고 부르지요. 이스라엘 서쪽에 있는 바다입니다. 이 바다는 마치 거대한 호수처럼 생겼습니다. 아프리카와 스페인 사이가 가까워서 마치 협곡처럼 생겼는데 이 해협을 지브롤터 해협이라고 부르고, 스페인 서쪽의 거대한 바다가 대서양입니다. 유럽인들이 자기네 기준으로 스페인 서쪽에 있는 거대한 바다라는 의미로 대서양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바로 이 세 개의 거대한 바다를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이라고 하고, 러시아 위쪽으로 북극해, 호주 밑으로 남극해를 합쳐서 오대양이라고 합니다. 이 물의 양이 지구의 70퍼센트 정도 되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행성은 ‘지구(地球)’보다 ‘수구(水球)’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인류가 이 바다에 눈을 떴을 때 바다를 지배하는 쪽이 힘을 가지게 됩니다. 농경문화에서는 인구와 지도자로 힘을 발휘했다면 중세 항해술이 발전할 때는 해군력이 강한 나라가 힘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면서 바다가 아닌 하늘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제공권을 장악한 나라가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대륙은 크게 여섯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아시아이지요. 아시아는 거대한 땅이라 다시 여섯 덩어리로 나누어 부릅니다. 러시아 쪽을 북아시아, 우리와 중국을 동아시아, 중국 옆 카자흐스탄 쪽을 중앙아시아, 태국·필리핀·인도네시아 쪽을 서남아시아, 그 옆으로 인도와 이란 쪽을 남아시아,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까지를 서남아시아로 구별합니다. 이스라엘이 있는 팔레스타인이 서남아시아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이집트 쪽으로 홍해를 건너가면 나오는 거대한 땅덩어리가 아프리카입니다. 이스라엘 서쪽 바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그 위쪽이 유럽이 됩니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등이 유럽에 속합니다. 스페인 서쪽 바다인 대서양을 건너면 나오는 아메리카는 다시 미국 쪽을 북아메리카, 브라질 쪽을 남아메리카 또는 라틴아메리카라 부릅니다. 우리나라 제주도에서 배 타고 남쪽으로 쭈욱 가면 만나게 되는 거대한 섬나라 호주는 그 자체로 오세아니아 대륙입니다. 더하여 이 대륙 주변에 있는 태평양의 여러 섬을 포함하여 오세아니아주라 일컫기도 하지요. 호주의 동쪽은 태평양이고 서쪽은 인도양입니다. 이렇게 여섯 대륙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북극과 남극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북극과 남극에는 사람이 살기가 좀 추워서 말이지요.고대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문명을 이루고 살았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4대 문명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이집트 문명,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인더스 문명, 황하강을 중심으로 황하 문명이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집트의 바로(파라오)는 이집트 문명의 지배자였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손입니다. 인더스 문명은 지금의 인도, 황하 문명은 중국입니다. 그 밖에 유럽이나, 아메리카, 오세아니아는 그냥 야만족이었지요. 인더스 문명과 황하 문명은 서로 너무 멀었던 반면에 나일강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중간에 팔레스타인을 두고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 두 강은 특이하게도 물이 흐르는 방향이 서로 다릅니다. 나일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유프라테스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릅니다. 이집트인들의 눈에는 물이 태양에서 흘러오는 것으로 보였고, 메소포타미아인들의 눈에는 태양 쪽으로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지요. 이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태양신을,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달의 신을 숭배하게 됩니다. 이 둘은 이렇게 서로 생각이 크게 다르다 보니 툭하면 싸웠습니다. 이 둘의 거대한 싸움이 인류 마지막 싸움 ‘아마겟돈’이라 생각했고, 그 싸움터가 팔레스타인이 될 거라고 예언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계 16:16; 왕하 23:29).
이사야가 교회 금식에 답하다
by 최창국
2024-04-30
성경에는 금식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예수님도 금식하셨고, 성경의 다윗, 다니엘, 에스더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도 금식 기도를 실천하였다. 특히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금식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였고, 교회의 교부들과 교모들도 금식을 실천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내용, 즉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KJV에는 “기도와 금식”(prayer and fasting)으로 되어 있다. 성경도 금식을 중요한 영적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성경에는 금식의 이유와 목적이 다양하게 언급되고 있다. 먼저 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방편으로 금식을 하였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금식하였다(삼상 31:11-13, 삼하 1:11-12).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 자기 원수였지만 슬퍼하며 울며 금식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기고 난 후에 금식할 것이라고 하였다(마 9:14-15). 이처럼 금식은 극한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행하였다.다음으로, 개인의 죄나 민족의 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금식하였다. 니느웨 성의 왕과 백성은 요나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금식하며 회개하였다(욘 3:3-10).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세계 선교에 대한 성령님의 계시를 받게 된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3)라고 기록하고 있다. 금식에는 또 다른 목적도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충실한 봉사를 하고자 할 때, 내적으로 자신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금식하였다.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금식도 바로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출 24, 왕상 19, 마 4). 예수님은 사십일 금식 후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였다.한국 교회 안에도 금식을 중요하게 여기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한국 교회 안에는 금식에 대한 신앙과 공식이 있다. 하나는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금식은 물만 먹고 해야 한다는 신앙과 공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금식할 때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가? 아쉽게도 성경의 답은 그 반대이다. 성경의 사람들과 초기 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물만 먹고 금식을 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 교회 안에는 이사야 58:6의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이라는 내용을 통해, 우리가 금식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가르치며 설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본문의 전후 문맥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금식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하고 있다. 당시 금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영적 실천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식하면서도 이웃을 압제하며 위선적인 일을 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금식보다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신다. 금식은 정의로운 삶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진정한 경건은 금식보다 사회 정의와 인권과 관계된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금식을 근본적으로 금하지 않는다. 금식은 영성 생활에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다.나아가 중요한 문제는 이사야 58:6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라는 구절이 없다. 즉, 마소라 사본에는 “기뻐하다”라는 용어가 없고, “선택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바하르”(bachar)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가 선택한 금식은”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대부분의 영역본은 마소라 사본에 따라 “내가 선택한 금식은”(the fast that I choose)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오로지 TNK만 “내가 바라는 금식”(the fast I desire)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어 성경도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손석태, 성경을 바로 알자, 213). 한글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최근에 번역된 거의 모든 성경이 한결같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분명 오역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금식의 목적을 재정의하고 있다(사 58:6). 하나님이 바라는 참된 금식은 이 땅에 존재하는 불의에 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불의에 대한 가장 온당한 반응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연민을 가지고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평화를 이루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이사야가 말하는 금식의 목적은 정의와 연대이며, 다른 하나는 거룩이다. 이사야가 말하는 금식의 목적은 다른 사람의 유익과 세상 속에서, 더욱더 거룩한 삶을 위해 스스로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금식의 첫 번째 목적은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을 베풀기 위한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정의를 실현하는 방편이다. 금식하면서 먹지 않은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금식함으로써 절약된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거룩한 행위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초기 기독교 문헌,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에는 “그날 먹었을 음식을 돈으로 계산해서 과부와 고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야 한다. 그대가 이런 방법으로 스스로 가난에 처하면, 그대의 겸손한 행위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마음의 감동을 받고 그대를 위해 주께 간구할지도 모른다”(25)라고 기록하고 있다. 속죄를 위해서 금식할 뿐 아니라 금식을 자선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문헌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하는 목적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한 영적 실천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금식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기 위한 것이었다. 금식은 자신의 거룩한 삶과 스스로 가난을 경험하며 다른 사람의 가난에 반응하는 몸의 빈곤을 경험하는 실천이었다. 금식은 경건한 삶을 위한 영적 실천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경청하며, 그 고통에 참여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로잔 ‘대위임령 현황’의 네 가지 주제
by Trevin Wax
2024-04-29
올해 9월, 로잔운동이 주최하는 제4차 세계복음화 국제 대회를 위해 세계 각지에서 오천 명의 참가자가 한국에 모일 것이다. (동시에 수천 명이 위성 사이트를 통해 이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올해는 존 스토트가 주도하여 작성된 로잔언약을 발표한 제1차 로잔대회의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문서는 오늘까지도 여전히 전 세계 복음주의자를 하나로 만드는 구호로 남아 있다. (이 선언문에서 내가 뽑은 최고의 인용문을 참조하라.)대위임령 현황로잔운동이 전 세계 백 명이 넘는 기고자가 작성한 수십 개의 차트, 그래프, 그리고 에세이로 구성된 “대위임령 현황” 보고서를 이번 주에 발표했다. 현재의 추세에 비추어 세계의 기독교를 바라보고, 세상에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드러내는 복음주의 선교 노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다중 기고자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이 보고서도 여러 형태가 혼재되어 있다.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환상적인 에세이가 있고, 새로운 지평을 열기보다는 현 상황을 요약하는 중점을 둔 에세이도 있다. 별로 근거가 없는 주장을 하는 에세이도 몇 편 있고, 더불어 로잔언약을 확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신학 영역으로 방향을 트는 글도 있다.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다음 네 가지 주요 주제, 즉 현대 세계에서 고려할 가치가 있는 선교의 네 가지 측면을 발견했다.1. 다중 중심 선교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 실린 이 그래프는 1900년에서 2050년까지 기독교 지역 분포의 변화를 보여준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에서 기독교가 성장하고 유럽과 북미에서 쇠퇴한다는 사실 은(이미 마크 놀과 필립 젠킨스 등등이 지적했다) 이제 비밀도 아니지만, 이 그래프는 변화의 중요성을 포착한다. 다른 게 아니라, 2050년에는 아프리카가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인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것이 타문화 선교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Decio de Carvalho, Larry 및 Stephanie Kraft, Stephen 및 Rosemary Mbogo가 쓴 에세이 “다중 중심 글로벌 선교(Polycentric Global Missions)”는 오늘날 선교 노력의 방향이 “모든 사람에서 모든 곳으로”라는 측면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Allen Yeh의 중요한 작업을 기반으로 한다. 점점 더 우리는 전통적인 지리적 범주를 뒤집는 전도와 사회 사역의 협력을 목격하고 있다. 같은 국가 내 다양한 교차 문화 선교사에 관한 Bong Rin Ro, Babu Karimkuttikal Verghese, 그리고 Fenggang Yang가 쓴 “아시아의 부상”을 포함한 여러 에세이에서 우리는 이러한 발전을 확인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인도 선교사의 60퍼센트 이상이 인도 내에서 일하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다른 민족 집단에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고 있다.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관계적, 재정적 협력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2. 조직의 재건에세이를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는 북반구에서 발생하는 (종교 조직을 포함한) 제도에 대한 신뢰의 약화로 인해서 복음 전도의 효율성이 방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Andrew Love, Kevin Muriithi Ndereba, Mary Jo Sharp는 복음의 객관적인 진리 주장에 대한 종교적 다원주의의 도전을 제시한다. 그들의 훌륭한 에세이에 이어서 제자도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정직함과 성실성(integrity)을 제시하는 Manfred Kohl, Lazarus Phiri, Efraim Tender의 글이 따라온다. 많은 교회 지도자의 위선과 일부 교회와 조직의 부패를 애도하면서, 이 저자들은 하나 같이 다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정직함과 성실성을 나타내는 데에서 실패하거나 우리의 삶 전체와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의 일관성을 드러내지 못할 때 사람들은 결코 복음을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진리라는 주장을 높이 들고 도덕적 상대주의의 구름을 뚫고 나가기를 열망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지 말이 아니라 조직의 건강함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정직하고 성실한 개인의 삶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는 이 보고서가 기독교 조직의 건전성과 부패가 많이 드러난 최근 이후의 재건을 강조한 점에 감사한다. 3. 인구통계의 변화이 보고서에 있는 차트의 인구통계학적 변화는 북부에서 남부로의 기독교 이동뿐만 아니라 세계 인구의 다른 추세(전 세계 이주율, 난민, 디아스포라 선교 등)를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중산층이 증가하는 인도와 중산층이 정체된 중국, 그리고 전 세계에서 눈에 띄게 생계 수준의 빈곤이 감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출산율이 감소하고 기대 수명이 증가함에 따라 현재 전 세계 모든 지역에 전례 없이 큰 영향을 미치는 인구 고령화의 도래이다. 교회는 (다른 세계와 비교할 때) 매우 젊은 아프리카와 점점 더 노령화되는 유럽, 북미, 아시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인구통계학적 변화는 시간의 스냅숏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부름을 받은 선교 지역을 살펴보라. 이런 자료는 복음 사역을 계획하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더불어서 미래를 계획하는 데에 지혜를 더해준다. 4. 인류학과 디지털 세상우리 시대의 가장 큰 신학적 도전은 인류학이다. 인간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보고서는 신기술, 가상의 정체성, 성적 행동, 의학적 개입에 비추어 인류 문제를 다룬다. 몇몇 에세이는 트랜스휴머니즘, 인공지능, 젠더와 섹슈얼리티, 생명공학, 유전자 편집 같은 주제에 중점을 둔다. 인류학적인 과제에 대한 후속 조치로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주제는 디지털 생활에 관한 섹션이다. 온라인 연결,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의 최근 발전에 대한 성찰, 인간의 자기 인식과 “디지털 공동체”의 디지털화가 교회와 선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주제를 다룬 대부분의 에세이가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우상 숭배에 가까운 경향을 보이는 인류가 처한 도전과 더불어서 인류의 독창성이 가져다주는 기회를 동시에 조망한다. 이 모든 에세이가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문제에 관한 대화를 시작하도록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내가 깨달은 점이 있다. 디지털 시대의 사역(성경연구 참여 증가, 제자도 훈련, 교회 모임 등)은 오늘날 세상에는 자주 전시되는 환원주의, 물질주의, 기술이 초래한 인간의 평면화에서가 아니라, 성경이 그리는 인류의 모습이 주는 강력하고 전체적인 이해에서 흘러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올해 9월 서울에서 열리는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모두가 만들어 갈 협력의 열매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진다. 모든 좋은 은사를 가지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주시고, 우리가 왕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노력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열정과 긍휼을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처: 4 Themes in Lausanne’s ‘State of the Great Commission’
하나님은 하나님. 그는 선한 일을 하신다, 우리가 아플 때...
by Garrett Kell
2024-04-26
조지 뮬러는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가장 큰 영감을 준, 교회 역사가 자랑하는 성도의 한 사람이다. 고아들을 섬긴 사역과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한 그의 기도는 특히 유명하다. 그의 자서전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기도문과 하나님의 신실한 응답의 기록으로 가득하다. (그는 무려 5만 번이 넘는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에 관한 많은 전기가 나왔고 그건 당연하다. 뮬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에 대한 깊은 신뢰로 특징지어진다. 많은 사람이 어리석고 추정에 불과하다며 평가절하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었던 뮬러는 결코 자신의 필요를 채움 받지 못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에게 선하셨다. 그렇다고 뮬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를 가슴 아픈 시련에서까지 면제시킨 건 아니다. 그는 자녀 세 명을 잃었고, 끊임없는 육체의 고통을 견뎌야만 했으며, 불신자로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두 명도 먼저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 모든 고통에 대한 뮬러의 반응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 속에 담긴 소망을 만난다. 고통은 신앙을 단련한다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질병이나 불화, 배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일상적인 위안은 그 빛을 잃는다. 편안한 소파와 잔고가 넘치는 은행 계좌만으로 고통 속에서 경험하는 질병과도 같은 어려움을 보상받을 수 없다. 어두운 시간에 의지할 대상은 오로지 한 분, 전능하신 하나님뿐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홀로 서 있을 때,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과연 내가 하나님을 진짜로 믿는지 씨름한다. 뮬러가 믿었던 것처럼, 정말로 하나님이 선하시고 주권적이라면 왜 내 삶에 이런 고통을 허락하실까?평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태양이 빛나고 꽃이 피어날 때 온 세상은 그의 자비로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겨울의 재난이 불어닥치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라진 것만 같다. 어두운 구름은 온통 회색으로 바꾼다. 고통의 찬 바람이 우리를 물고 또 찌른다. 우리의 영혼은 하염없이 무감각해져서 하나님도, 모든 사람도 포기하고 싶어진다. 아예 모두로부터 멀리 물러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의심으로 가득한 그 순간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굳게 붙드신다는 사실이다.누구도 고난에서 면제될 수 없다. 고통은 삶의 일부이다. 내가 견뎌야만 했던 어려운 시기 내내, 뮬러의 삶에서 일어났던 한 가지 특별한 이야기가 내 믿음의 부표가 되어 나를 붙잡아 주었다. 메리 뮬러의 죽음결혼한 지 39년이 되던 해에 뮬러의 첫 부인 메리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알려진 류마티스열에 걸렸다. 아내의 마지막 순간에 뮬러는 그녀에게 시편 84:11을 읽어주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뮬러는 마지막 구절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나는 나 자신이 불쌍하고 쓸모없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 나에게 정말 좋은 일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아무리 아프더라도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좋지 않은 일입니다.1870년 2월 6일, 메리는 뮬러의 고백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아내가 죽은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뮬러는 살렘 채플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렸다. 뮬러의 말에 충격을 받은 참석자 한 사람이 그의 말을 기록했다.그리스도 안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던 사랑하는 아내를 당신의 품 안으로 데리고 가신 주님의 자비에 진심 어린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감사와 찬양에 여러분도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나는 이 모든 게 다 아내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기뻐합니다. 아내가 이 땅에서 알았던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 바로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을 바라보는 지금 아내가 얼마나 행복에 겨워 기뻐할지를 생각하며 나도 함께 기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이 부족한 종이 그녀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도록, 또한 우리 유족의 마음이 말할 수 없는 상실감 대신에 그녀가 가져다준 축복으로 가득 차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뮬러의 힘 있는 설교2월 11일에는 약 1,200명의 고아와 수천 명의 슬픔에 잠긴 친구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했다. 뮬러는 고질적인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그날 장례식 설교를 했다. 본문은 시편 119:68이었다. “선하신 주님, 당신은 선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는 설교에서 간단하면서도 감동적인 세 가지 요점을 제시했다. “주님은 선하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1. “내게 아내를 주셨다….” 2.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내 곁에 있게 하셨다….” 3. “그녀를 데리고 가셨다.” 아내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뮬러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은 평안했고 내 마음은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가능한 이유는 …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선한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는가? 당신의 삶에서 말이다. 이생에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질문들 가운데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바로 이 순간 또는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몰라도, 당신이 고통의 어두운 날을 지날 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진실보다 더 영혼에 안식을 주는 것은 없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심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생각하는 것보다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로마서 8:32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라고 말한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 선하시며 선을 행하신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 죄를 위해 죽게 하시고 그를 무덤에서 살리심으로 그의 선하심을 나타내셨다. 도저히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아무런 의도 행하지 않은 우리를 살려주셨다. 영원히 우리 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과 적이 되셨다.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은 버림받으셨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못 주실 게 뭐가 있겠는가? 뮬러는 상실의 슬픔 중에서도 모든 것이, 심지어 고통까지도 인도하시는 주권적이고 선한 손이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뮬러에게 주신 은혜를 오늘 우리에게도 허락하시길 간절히 바란다. 출처: God Is Good and Does Good-Even in Our Pain
확신의 범주
시편 73편 묵상
by 고명환
2024-04-25
1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왜 그 사람들이 대화 중에 내게 화를 냈었는지. “고 선생님과 얘기하기가 힘들어요. 자기 주장으로 끝까지 설득하려 해요.” 30대 때 한 학우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여러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고 주로 반박하던 내게 격앙되어 분을 표출했다. 40대 때에도 비슷한 말을 들어야 했다. “전도사님하고 말 못하겠어요. 왜 내가 하는 말마다 아니라고 해요?”평소 친하던 나이 어린 신학도와 커피를 마시며 한가하게 이야기하던 중 들은 말이다. 그가 던진 말들은 가볍게 지나칠 만한 이야기였는데 꼬치꼬치 ‘아니요’로 응수했고 참다 못한 그가 화를 내며 한마디 했던 것이다. 50대에 들어서 아니나 다를 까 또 분노 섞인 말을 맞이해야 했다. “목사님은 언제나 아니라고 말해요. 내게 잘했다고 하는 법이 없어요.”주변에서 알게 된 동년배 목사님이 대화 중 얼굴을 붉히며 충청도 억양으로 퍼부은 말이다. 본인 딴 에는 열심히 많은 일을 벌이고 뛰어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 놓았는데, 앞에 앉은 화상은 사사건건 칭찬은 커녕 태클 걸기에 바빴으니 충분히 화가 날 법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지금도 그런 사람이 내 안에 숨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으며 경청하고 공감해 주지 못했다. 내 생각이 옳다고 믿으며 사수하려 했지 상대의 생각을 꼼꼼하게 숙고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가벼이 여기고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니, ‘아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수밖에 없었고, 가르치고 설득하려는 태도를 버릴 수 없었지 않았는가. 자연히, 우호적인 만남에서 조차 긴장의 순간들을 조성하고 뒤끝을 개운치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 나이 들어, 그때와 달라진 점을 찾자면 내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정도이다. 지난날의 나는 검증되지 않은 여러 분야의 설익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지나치게 강한 확신을 만들어 냈고, 그것으로 자주 심리적으로 다른 사람의 우위에 서려 했다. 물론, 알량한 지식 안에는 많은 거짓이나 편견이 섞여 있었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막히지 않은 이슈를 막힌 것으로, 다양한 의견을 하나라고 주장하며 가까운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근래, 대화를 발전적으로 이어 나가기 힘든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아 ~ 그거요.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이 말 뒤에 앞뒤 문맥이 없어진 성경의 몇 구절이 나열되고 단순하지 않은 문제는 깔끔하게 결론에 이른다. 느지막한 나이에 복음을 알게 되어 교수라는 본업보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말 그대로 불철주야 뛰어 다니는 분이 복잡한 신학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 뒤에는 사탄이 작용하고 있어요.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중에 아멘을 많이 강요하는 목사님들이 현 시대에 떠오른 여러 이슈들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방법이다. 이 해석과 대처 방법의 프레임은 유연성이 뛰어나서 어떤 문제에 씌워도 들어맞는 것 같다. 이 가설 앞에 모든 이성적인 논의는 설 곳이 없게 되고 합리적인 접근 방법들은 영적이지 못한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이성적 논리를 펴는 사람은 기독교 진리를 허물 가능성을 가진 경계 대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런 류의 사람들과 언쟁할 에너지도 없고 승산도 없는 것을 알고 나면 다음부터는 반가운 인사 가벼운 대화 이상으로 진행하지 않지만, 그 막힌 현실이 서글픈 건 어쩔 수 없다. 너무도 확고한 철학과 지식으로 모든 의제를 가볍게 마무리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 느끼는 좌절감 또한 한동안 여운으로 남는다. 한편, 그들 속에서 지나간 나를 본다. 나로 인해 좌절하며 화를 삭였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올라온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에겐 세상의 모든 일과 현상에 대한 명쾌한 답이 주어졌는가? 그래서,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모든 문제에 대해 확신과 단정의 태도를 보이기 원하시는가? 또, 그분은 우리에게 언제나 한 가지 길만을 제시하고 그것만을 선택하기 기대하시는가? 2시편 73편 아삽의 노래1하나님은,마음이 정직한 사람과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2나는 그 확신을 잃고넘어질 뻔했구나.그 믿음을 버리고미끄러질 뻔했구나.3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부러워했기 때문이다.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5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그런 고통이그들에게는 없으며,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그들에게는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6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폭력은 그들의 나들이옷이다.7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8언제나 남을 비웃으며,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거만한 모습으로폭언하기를 즐긴다.9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10하나님의 백성마저도그들에게 홀려서,물을 들이키듯,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11덩달아 말한다.“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가장 높으신 분이라고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하고 말한다.12그런데 놀랍게도,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신세가 언제나 편하고,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13이렇다면,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깨끗하게 살아온 것이허사라는 말인가?14하나님,주님께서는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15“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하고 말했다면,나는 주님의 자녀들을배신하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16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깊이 생각해 보았으나,그것은 내가 풀기에는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17그러나 마침내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악한 자들의 종말이어떻게 되리라는 것을깨닫게 되었습니다.18주님께서 그들을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거기에서 넘어져서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19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20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그들은 한낱 꿈처럼,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21나의 가슴이 쓰리고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22나는 우둔하여아무것도 몰랐습니다.나는 다만,주님 앞에 있는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이후 구절 생략, 새번역)시인은 마음이 정직하고 정결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복을 받아 잘되고 악인들은 응당 벌을 받고 망한다는 단순한 믿음과 기대로 살았다. 헌데, 현실은 그의 믿음을 비웃듯 악인들의 편이다. 악한 일만을 일삼는 자들이 벌을 받는 건 고사하고 평화롭게 자기들 세상인양 버젓이 활개치며 다닌다. 헛된 상상만 하고, 거만한 모습으로 함부로 말하고, 하늘을 비방하며, 남을 비웃고, 폭력을 행사한다(4-9절). 그런데도 악인들의 신세는 편하고 재산은 계속 늘어간다. 기막힌 일은 이들의 번성함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마저 ‘하나님인들 이런 일을 알고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하며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불신하는 모습이다(11절). 이런 왜곡된 현실은 시인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렸다. 믿음을 버리고 넘어질 뻔 했다고 고백한다(1-2절). 거만한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과 가진 재산은 시샘거리로 바뀌었고, 옳다고 믿고 걸어온 정직하고 진실한 길은 의문스러워진다.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13절)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은 온종일 그를 괴롭혔다(14절). 마침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닫고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해답을 얻는다(17절). 그것은 악인이 세상에서 번성하고 평안을 누리나 결국은 심판을 받아 멸망할 인생들이라는 가르침이었다. ‘한낱 꿈처럼 그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이었다(18-27절). 스스로 풀 수 없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고 난 뒤,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를 돌아본다. 그리고 시인한다.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다”고. 다만 자신은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 이었다”고(22절).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한 개인이 보유한 신앙 지식과 관점을 가지고 다양한 현상을 모두 해석하려는 시도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고 잘못하면 믿음마저 좌초될 수도 있다. 많은 세상의 현상은 전통과 신앙 지식으로 설명해 낼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니거나 모호한 것들이다. 아니면 시인이 씨름해야 했던 기대를 꺾어 버리는 역 현상들이다. 물론, 이러한 도전적인 현상이 이미 계시된 말씀과 전통으로 형성된 신앙의 체계를 허물지는 못한다. 시인이 일찍이 간직해 왔던 신앙의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모순되는 현상을 바라보고 믿음을 저버릴 뻔했던 것은 그가 가진 일반적인 신앙의 법칙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 만으로는 설명해 낼 수 없는 난제를 만났을 뿐이다. 이때, 취할 방책은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기보다는 의문을 품었던 생각의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그 자리가 뒤로 미끄러지지 않을 자리이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자리이다.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자리이며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자리인 것이다. 참고) 생략한 구절에서는 시인의 완전한 회복과 다짐을 기록했다. 3흔히들 욥기는 한 개인의 영웅적 믿음을 보여주는 책 정도로 가벼이 여기고 신중한 탐색을 내려 놓는다. 물론 그에 관한 절대적인 믿음의 기록만으로도 책은 충분히 돋보인다. 그럼에도, 진지한 독자라면 놓치지 않을 책 안에 담긴 흥미로운 지식과 진리가 간과되는 점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사실, 욥과 관련된 에피소드만을 기록한다면 요나서 정도의 분량이면 족할 텐데 성경이 방대한 양을 할애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독자를 지치게 할지 모를 욥과 그의 친구들의 지난한 담화 안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식과 교훈을 찾아야 하고, 긴 침묵을 깨신 후 인간의 논쟁을 종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그분의 섭리와 가르침을 들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욥은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남 없이, 갑작스런 고난 중에도 변함없는 믿음의 자세를 견지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의 적은 지식으로 크신 하나님을 담아내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설명한 결과는 무모하고 무의미한 시도로 끝나 버린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나름대로 자기 주장을 펴는 방문객들(친구들) 앞에서 그가 가진 지식과 지혜로 많은 것을 설명하고 반박하고 그려냈지만 하나님은 이런 욥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욥은 스스로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시인했다[욥기42:5]). 크신 하나님을 정의하고 규정하려 했던 그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 아무리 많은 말과 적절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도 하나님을 온전히 그려낼 수는 없다. 아니면,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형상화 하려는 의도가 금송아지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모욕적인 결과를 낳고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들은 욥은 시인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욥기42:3) 그가 인정했듯이 욥은 너무 많은 말을 했다.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많은 설명이나 묘사는 원점에서 작은 각으로 출발한 두 선의 간격이 갈수록 점점 벌어지듯, 더욱 진실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차라리 원점에 머물러 나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욥의 경우처럼 많은 말을 하는 쪽을 택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또 현상에 대해서. 모호한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자르고 다듬어서 확실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 전체를 드러내시지 않은 것에 대해 주어진 부분을 전체로 확대묘사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열린 여러 가능성을 한 가지 가능성으로 좁히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분은 사람들이 물어오는 의문에 모른다고 하신 적이 없다. 과거와 미래는 물론 하늘의 비밀까지 알려 주셨다. 듣는 이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자주 은유와 비유를 사용하시어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사람들을 설득하신 것은 아니다. 어떤 화제에 대해서는 직답을 피하시고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두셨다. 어려운 질문을 피하시기 위해서나 물의를 일으킬까 봐 두려워서 그러신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시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 나가도록 맡겨 두신 것이다. 예수님의 행보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골칫거리를 넘어서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종교 전통을 무너뜨리는 반동으로, 그동안 향유해 왔던 권위를 약화시키는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특히, 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성전에서 벌이신 소동이나 여러 혁명적인 가르침은 그들을 두려움에 빠뜨렸다(마가복음11:18). 두려움의 증폭은 분노와 적대감의 수위를 높였고 급기야 조직적인 행동으로 발전한다. 유대교 교직을 대표하는 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장로들이 대거 성전에 머무시던 예수님께 몰려왔다. 이들은 유대교의 경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교직 제도로 따지자면 목사들, 신학자들, 장로들에 해당하는 무리가 연대해서 나사렛 예수에게 권력시위 하듯 찾아왔던 것이다(마가복음11:33). 그들은 묻는다.“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까?”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종교적인 일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고 당신은 이런 일에 아무런 권한도 없는 사람이요.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소란을 피우는 거요?’라는 뜻으로 묻고 있다. 그들이 예수님께 찾아온 이유는 듣고 알아보고 토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질문 역시 답을 듣기 위해서나 건설적인 대화를 시작하려고 건넨 것이 아니다. 이에, 예수님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질문으로 응수하신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으니,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내게 대답해 보아라.”(마가복음11:29-30) 마가의 설명이 보여주듯( 마가복음31-32)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예수님 질문은 몰려온 종교지도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어느 선택도 좋은 결과로 돌아 올 게 없는 선택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답을 알고 있었지만 정답을 말할 수 없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손해보지 않을 선택을 한다.“모르겠습니다.”예기치 못한 문제에 직면하자 이들은 의논 끝에 회피성 답변으로 궁지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대답을 들으신 후, 그들이 앞서 던진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시겠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그들이 생각하고 판단해 보라고 맡기셨다.‘사사건건 해명하지 않아도 지금까지의 모든 말과 행적이 내가 어떤 권위를 가졌는지 말해 주지 않느냐’고. ‘성경의 예언과 내가 행사한 능력이 메시아임을 증명하지 않느냐’고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설명과 설득을 통해 당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답을 찾아 가도록 그들의 몫으로 넘기셨던 것이다. 4우리 안에, 당면한 문제와 보이는 현상에 대한 모든 성경적 해답이 주어졌다고 믿고 확신에 찬 해명을 생산해 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나치게 강한 확신에 사로잡혀 본인 생각 외에 어떤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기독교 신앙을 콤팩트하고 단순하게 다듬는 재주가 있다.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을 구체화하고, 열어 놓은 것을 닫는 능력도 보여 준다. 그것에 따라 다진 신념과 지식은 절대 양보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돌판이 된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 자식이 빗나가는 일은 없습니다.’‘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백신을 맞으면 영혼을 사탄에게 빼앗깁니다.’‘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선교와 전도입니다.’‘우리의 세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날 겁니다.’‘그곳에서 벌어진 전쟁은 종말의 마지막 징조입니다.’‘이 번역의 말씀만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고 기름 부으신 성경입니다.’‘목사 직분은 오로지 남성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다 손꼽기 힘든 용감한 기독교 전위대들이 생산해 낸 확신과 단정은 어느새 진리가 되어 면역력이 약한 성도들을 감염시키고 있다. 반대로, 교회 바깥 이방인들에게는 더욱 복음에 대한 면역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안팎으로 그 폐해가 보이지만 그들은 진리에 따르는 가벼운 부작용 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아니다.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해서 확신을 만들고 유포해서도 안되고, 그 부작용을 경시해서도 안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과 사고의 능력으로 사람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대한 모든 속성과 현상을 밝혀 내고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를 해낼 수 있다는 태도는 마치 몇가지의 연장만 가지고 복잡한 기계의 모든 부품을 분리해 내겠다는 것과 다름없다.사람은 위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지식 외에 스스로 창조하고 발견할 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모호한 것을 뚜렷한 것으로 제시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놔두어야 하며, 밝혀질 것은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한 가지의 가능성으로 억지로 욱여넣어서도 안된다. 열어 두어야 할 것은 열어 두어야 한다. 그것이 이전에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이다. 과거에 많은 사람이 오늘날 진리로 받아들이는 믿음 때문에 핍박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기 바란다. 지동설을 주장한 과학자들이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고,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가르친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그 시대에, 성경은 교육받은 성직자들만 읽고 해석해야 했고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금기 중 금기였다. 노예를 소유하고 부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경적인 제도라고 정당화하며 하늘 아래 반인륜적인 행위가 성행하던 때가 우리와 먼 과거의 시대가 아니다.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확신과 단정을 유보해야 할 다른 또 이유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즉 소통하기 위해서다. 확신과 단정으로 단단히 무장할수록 고립을 면하기는 어렵다. 들으려 하지 않고 신앙으로 석화한 생각을 놓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를 즐거워할 상대자는 없을 것이다. 헌데, 이 시대에 그런 불통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기독교란 인식이 크게 번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세상과의 벽은 점점 두터워졌고 돌아온 것은 냉대와 따돌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진리 수호의 훈장으로 착각하고 내부적으로 한층 그들만의 도그마로 단단히 무장하며 결속을 다져 나갈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상당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지금의 생태에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소음이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닫아야 한다. 행여, 기독교 전체를 향한 적대감이 고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5우리는 확신과 단정의 범주를 좁혀야 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또 복음의 길을 막지 않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포기와 유보가 따라야 한다. 내가 확신하고 단정했던 것을 내려놓을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들어 보려 하고 상대방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끝까지 고수해야 할 진리의 영역까지 허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구원 등과 같은 타협할 수 없는 핵심 진리를 가감없이 끝까지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계속 공고히 하고 전파해야 한다. 다만, 명확하지 않는 것을 확신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전체로, 밝혀지지 않은 것을 단정하지 말자는 뜻이다. 그러려면 나의 것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상에는 아니, 기독교 공동체 안에도 다른 사람과 삶의 방식이 다르거나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아픔을 겪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편향된 종교적 잣대로 인해 평생을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 대해 더 개방적이고 따뜻한 마음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에게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들어 보고 싶다고, 내 생각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나의 것을 잠시 포기하고 귀를 기울이는 아량을 갖기 바란다.“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16절) 현실은 시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풀기에 너무나 어려운 문제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말씀만으로 문제의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복잡한 이슈들이 산적해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안에도 여러 문제와 현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면 갈등과 분열이 뒤따르고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우리 안에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태도보다, 시인처럼 ‘풀기에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는 자세가 자리잡기를 바란다. 그러면, 섣부른 결론이 만들어낸 확신과 단정으로 타인이나 집단을 맹목적으로 거부하고 배제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 외에 알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세우신 불변의 진리의 기둥과 터와는 달리, 사람이 세워 나간 전통, 사상, 제도는 오류의 가능성을 가진 불완전한 산물이라는 가정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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