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 설교? 그리스도 형상 설교?
by 고상섭2024-05-08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구약 내러티브 본문에서 과도하게 그리스도와 관련된 의미를 찾으려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지나치게 자의적인 신학이라 비판한다. … 쿠루빌라가 보기에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의 잠재적인 문제점은, 구약을 성급하게 신약과 연관 지으려는 시도 속에서 개별적인 구약 본문의 특정한 요지가 해석자에게서 소홀히 취급될 수도 있다. 그러면 결국 구약 본문에 대한 온전한 설교를 통해서 해석자가 청중에게 충분히 드러내야 하는 해당 본문만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는, 과도한 신학적 해석 속에서 실종될 수 있다는 것이다.”[1] 


최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브라함 쿠루빌라이다.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달라스 신학교 설교학 교수를 엮임했고, 현 남침례신학교 설교학 교수로 제직하면서 피부과 의사를 동시에 하고 있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를 제시한다.


“그리스도 형상적 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매우 다르다. 이 두 접근 사이의 주요 차이는 후자가 모든 구절, 구약 문단에서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찾지만, 그리스도 형상적 읽기는 하나님의 정경적 목적에 맞추어(롬 8:29) 모든 문단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그리스도의 형상-에 관한 암시적 묘사를 발견하는 것이다.”[2] 


쿠루빌라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설교를 ‘그리스도 형상 설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도(Christ)와 ‘형상’(Icon)이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만든 이 단어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데 있다는 말이며, 고린도후서 3:18과 로마서 8:29 등을 근거로 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9)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 비판 


쿠루빌라는 에드먼드 클라우니, 브라이언 채플,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D.A. 카슨 등이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구속사의 큰 그림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성경의 목적은 단순히 그런 그림을 보여주는 수단이 아니라, 설교는 특정 텍스트의 특정한 메시지를 강해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나님의 메시지와 신자들의 삶을 서로 연결하는 언어적 사건”이라 설명한다.[3] 


또 에드먼드 클라우니가 말하는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명제도 비판한다. 


“모든 성경 장르는 구속사적 논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윤리적 교훈을 제시한다. 이러한 교회의 성경 해석 역사는 삶의 변화를 위한 설교의 풍요롭고 교훈적인 전통을 지지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성경의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개별 텍스트의 윤리적 강조점을 약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4] 


정말,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쿠루빌라가 말하는 것처럼 윤리를 빈약하게 하고, 본문을 약하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그리스도 형상 설교로 전환해야 하는가? 필자는 쿠루빌라의 비판이 정당한 비판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쿠루빌라가 말하는 ‘그리스도 형상 설교’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살펴보자.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 설교’ 


1)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이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을 독자의 변화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아감을 목표로 삼는다. 특히 쿠루빌라는 프랑스 철학자 폴 리꾀르가 말하는 ‘본문 앞의 세계’에 대한 이론을 자기의 성경해석 방법으로 수용했다. 


총신대학원 설교학 김대혁 교수는 “쿠루빌라의 본문 앞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그의 설교 방법론에서 설교의 적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설교는 본문 뒤의 세계만이 아니라 본문 앞의 세계를 비추는데, 여기에 본문이 투사하는 세계는 청중들을 향한 미래-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5] 


여기서 말하는 ‘본문 앞에 세계’라는 말을 쿠루빌라의 다른 저서 본문의 특권에서는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용어로 설명했고,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말은 성경 텍스트를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의도’ 즉 ‘보편타당한 원리’를 말한다. 


만약 닭싸움을 시도하는 닭의 주인이 자신이 닭이 다른 닭을 물어뜯고 이길 때는 기분이 좋다가 자기 닭이 물리고 살이 찢기면 자신도 닭과 함께 극도의 분노로 치닫는다는 글을 읽는다면 텍스트 안의 세계는 닭이나. 사육사의 사건 또는 닭싸움을 위해 걸린 판돈, 그리고 치열하게 응원하는 장면일 것이다. 텍스트 뒤편의 세계는 텍스트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당시의 상황들을 연구하면서 알게 되는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는 닭싸움을 하는 글을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2024년의 지금의 독자들이 동일하게 느끼는 무엇에 관한 것이다. 즉, 닭이 이기면 함께 기뻐하고, 지면 함께 우울해지는 닭싸움을 하는 주인이 느끼는 남성적 자존심이다.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세계이다. 


이솝우화에도 길거리에서 뼈다귀를 발견한 개가 다리를 건너다 개울물을 내려다보고서 자신과 닮은 또 다른 개가 입에 뼈다귀를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벌려 짖다가 자기 뼈다귀까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이 이야기를 통해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를 설명한다. 


“이 우화는 어떤 개와 뼈다귀, 그리고 개울물과 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우화는 단순히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교훈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 우화의 저변에는 자족하면 어리석은 손실을 예방할 수 있다는 통렬한 교훈이 담긴 세계를 재현하면서 독자들도 그러한 만족의 지혜를 따르도록 안내한다.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는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해석학적 진행의 개념적 프레임을 제공한다.”[6]


쿠루빌라는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개념을 통해 성경의 본문은 독자들에게 어떤 보편타당한 원리를 통해 삶의 변화를 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독자는 단순한 텍스트의 의미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 즉 보편타당한 신앙의 원리를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2) 문단 신학 

아브라함 쿠루빌의 설교에서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문단 신학’(Pericopal theology)이라는 개념이다. ‘문단’이라는 말은 성경 본문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교회 상황에서 설교나 예전을 위해 다룰 수 있을 만한 정도의 분량을 의미한다. 


“성경은 쪼갤 수 없는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사상 덩어리로 구성된 것은 분명 아니다. 또 성경의 방대한 내용이 하나님과 그의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궁극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이 다양한 장르와 수없이 많은 문단 속에서도 이 추상적 주제만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7]


설교할 때 목회자는 모든 성경을 한 번에 본문으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매번 설교를 위해 일정한 본문을 다루게 된다. 쿠루빌라는 텍스트가 청중의 삶의 변화를 위해 말하는 적용을 그 일정한 본문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는다.


“단순히 의미론적 차원에서 단락을 구분하여 이를 설교의 기본단위로 보고 거기에서 저자가 전달하는 내용을 설교의 핵심 재료로 삼기보다는, 기능적/화용적 차원에서 설교의 단위를 구분하는 것을 선호하고, 그 문단에서 성경 저자가 전하는 내용을 가지고 행하는 바를 신학적 추동력으로 삼아서 이를 설교의 주요소로 삼는다.”[8]


쿠루빌라는 문단 신학을 통해 성경은 전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설교하는 각 문단은 그리스도 형상의 한 일면을 닮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전체 그리스의 형상 중에서 한 일부분을 닮아간다고 생각한다. 만약 전 성경을 다 설교하고 듣고 순종한다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문단의 세계가 그리는 부분이 그리스도 형상의 일면을 나타낸다면, 통합된 본문 앞의 세계(즉, 각 문단이 투사하는 세계의 조각들을 모두 합친 것, 혹은 달리 표현하면 성경의 모든 문단의 신학 종합)는 완전한 그리스도 형상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각 문단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그들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한 문단, 한 문단, 한 설교, 한 설교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이뤄진다.”[9]


‘그리스도 형상 설교’ 비평 


김대혁 교수는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라는 논문에서 쿠루빌라 설교에서 아쉬운 점 중의 하나를 자칫하면 단순히 ‘모범적 설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각 문단에 집중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는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마치 전체 그림이 없이 퍼즐을 맞출 수 없는 것처럼 전체 성경에서 보이는 그리스도 중심적 내용이 없다면 모범적 설교가 될 우려가 크다. …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 개별 본문의 독특성을 경시했다면, 그 반대로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는 정경보다는 개별 본문의 구체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김대혁 교수의 지적처럼 쿠루빌라의 ‘문단 신학’의 약점은 성경 전체가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담고 있고, 각 문단은 그리스도의 형상 중의 일부분을 가진다면, 전체 성경의 온전한 그리스도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명확한 큰 그림이 없는 것이고, 각 문단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어떤 인격의 어떤 부분이 전체 그림 중의 어느 부분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또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이고 각 문단은 그 전체 중의 일부라는 말도 명확한 성경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오늘 설교하는 본문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어느 부분을 드러내는가? 어쩌면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모든 본문에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이라는 용어도, 성경의 텍스트와 오늘의 상황을 이어주는 ‘초자연적 의미’ 즉 ‘보편타당한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을 강조할수록 하나님이 텍스트를 통해 전달하려는 변화와 적용을 강조하게 되는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어떤 변화를 염두에 두고 변화를 촉진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내어서 그 인격을 만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목적이 삶의 변화라면 묵상할 때 반드시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묵상하는 목적이 삶의 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는 교제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삶의 변화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의 만남을 통해 사랑이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이지, 노력하고 추구해야 하는 하나의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날 때 변화가 따라오는 것인데, 쿠루빌라의 이론처럼 변화를 강조하게 되어, 순서를 바꾸게 되면 자칫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성도 있어 보인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적용이 곧 ‘그리스도 형상 설교’이다


서두에서 제시했던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비판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추구하는 모든 설교자가 깊이 새겨들어야 하는 지적이다. 쿠루빌라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보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잘못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스도를 드러냈지만 적용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발생하면 설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긴 했지만 삶에서 아무런 적용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팀 켈러도 이런 적용이 없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우려 깊은 목소리를 냈다. 


“클라우니 박사님이 가르치신 대부분의 학생들이 경험하는 것처럼 박사님이 보여주신 비전을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9년 동안 구약 성경을 설교하면서 저는 본문에 충실한 동시에 현실과 관련된 방식으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라는 어려운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특정 본문의 주제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본문을 어떤 식으로 적용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 중심 설교 중에는 해석학적 측면에서 보면 건전하고 고무적이지만 그 본문이 우리가 평일에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도록 구상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남겨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뉴욕에 와서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기 전까지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아냈습니다.”[10]


팀 켈러도 단순히 구속사 과정을 이야기하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설교를 추구하지 않았다.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복음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즉 칭의가 성화의 동기가 되는, 칭의와 성화가 연결되는 설교이다. 팀 켈러는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한계를 ‘그리스도 중심 적용’으로 돌파했다. 스승인 에드먼드 클라우니로부터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배웠지만, 팀 켈러의 설교는 소위 구속사 설교가 비판을 받는 적용을 강화함으로써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할 만큼 독자적으로 다른 영역의 설교이다. 


팀 켈러는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여기서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즉 칭의를 말한다. ‘모든 것’이란 삶의 모든 상황을 말하고 이 복음이 모든 것에 연결될 때 삶은 변화된다는 확신을 품고 있다. 센터처치에서도 복음을 자존감, 유머, 인간관계와 같이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즉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추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사람은 팀 켈러가 말하는 ‘복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와 일맥상통하고, 진정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은 만들어 가는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 설교’요 ‘구속사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팀 켈러는 설교란 진리를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인데, 진리를 마음에 와닿게 잘 전달하는 두 가지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설교의 두 가지 과업이라면, 이 둘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쇠가 있다. 바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 성경적인 정확성과 그리스도 중심성은 바울에겐 동일한 것임을 기억하라. 어떤 본문을 설교하든 그것의 주제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성취됨을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 본문을 제대로 설교할 수 없다.… 예수의 아름다움을 가리킬 수 없다면 다시 말해 그 본문의 특정한 진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만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마음의 정감을 제대로 건드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11]


팀 켈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일 없이는 ‘마음의 정감’을 건드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여기서 ‘정감’(affection)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에서 차용된 단어인데, 인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을 뜻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감정(emotion)과 정감(affection)이 있는데, 사람의 변화는 ‘정감’의 변화로부터 이루어진다.


삶의 변화는 ‘정감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 정감의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선포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으면, 참된 변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가난한 사람의 불쌍함을 자극할 수도 있고, 나눔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나눔을 자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모두 감정의 변화에 불과하다. 의지에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나누는 삶으로 변화하려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물질주의’가 깨트러져야 한다. 


“설교에서 우리는 그들 앞에 그리스도를 다시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정감 안에 그리스도가 물질적인 것을 대체하도록 해야 한다. 합리적인 주장이나 교리적인 가르침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다. 물론 그런 것들을 포함하지만, 그와 함께 우리를 위해 자신의 부요함을 포기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12]


수련회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지만 돌아오면 여전히 삶의 변화가 없는 이유는 정감의 변화가 아닌 감정의 변화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정감이 변화될 때 삶은 변화되는데 그 정감의 변화가 일어나는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선포’가 필요하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려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필수적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 형상을 이루려면 


“그리스도 형상적 해석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충족시키셨기 때문에 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성경의 모든 문단은 함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신그리스도의 형상의 한 면을 모범적으로 묘사한다.”[13]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추구하는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하고, 팀 켈러처럼 ‘그리스도 중심 적용’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대신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을 삶에 적용하며 나아가야 한다.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 설교’는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므로 이른바 도덕적, 율법적 설교와 차별성을 가지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매로우 논쟁이 한창일 때 교회의 상황을 설명한다. 모두 동일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복음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율법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는데, 그 핵심에는 “잘못된 분리”가 있었다고 말한다. 


퍼거슨이 말하는 ‘잘못된 분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혜택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사역을 서로 분리하여 전할 수 있다. … 복음의 혜택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마치 그분을 떠나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그것과 그분을 분리할 수는 없다. … 마치 우리 힘으로 그리스도가 주시는 혜택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혜택을 그분과 분리하기 쉽다.”[14]


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하는 분리는 ‘칭의와 성화의 분리’를 말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려면 먼저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하고 그 은혜가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결국 모든 성경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제시하지 않는 그리스도 형상을 따르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된 분리’를 가져와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 형상을 추구할 수도 있다. 


결국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말하는 설교의 최종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한계점은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어쩌면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비판은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가진 한계를 팀 켈러는 ‘적용’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쿠루빌라가 말하는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가는 설교의 목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쿠루빌라는 각 문단이 하나씩의 그리스도를 드러낸 윤리를 나타내고 그 윤리의 조각들을 하나씩 모을 때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한 번에 하나씩 윤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그분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과 사랑을 경험할 때, 삶은 자연스럽게 변하게 된다. 설교의 첫 번째 초점은 삶의 변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은혜를 공급받는 것이다. 사랑하면 삶은 변화된다. 삶의 변화를 위한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법을 살펴보면 그 앞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행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히 순종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임을 알려준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20:3)고 명하신다. 그러나 이 명령에 앞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20:2). 


결국 십계명을 지키는 힘은 우리를 위해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다. 종살이하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께서 먼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할 때 그 은혜가 순종의 동기가 되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살을 선포할 때, 그 은혜가 동기가 되어 순종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의 결과가 바로 ‘그리스도 형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앙상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서 우리는 늘 경계하고 자신의 설교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 형상 설교’는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1. 이승진,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이후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 설교 한국, 18(2023), 9-41.

2.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p.203.

3. 같은 책, p.399.  

4. 같은 책, p.401.

5.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복음과 실천신학, 60(2021), 11-44. 

6. 아브라함 쿠루빌라, 본문의 특권, p.73. 

7. 같은 책, p.149. 

8.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복음과 실천신학60(2021), 11-44.

9.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p.197.

10. 데니스 존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p.80. 

11.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p.37.

12. 같은 책, p.218.

13. 아브라함 쿠루빌라, 본문의 특권, p.437. 

14. 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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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상섭

고상섭 목사는 영남신학대학교와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그사랑교회를 개척해 섬기고 있다. 팀 켈러 연구가로 알려져 있으며 CTC코리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최근 공저한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