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함정’, 최선이 만드는 어떤 결과에 대한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놓고, 희망을 이뤄요 최선을 다해 놓고, 희망을 찾지 못 못하는 게 문제란 말이죠. 마르다는 그야말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거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죠. 그리고 사랑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은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인 줄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단 말이죠. 하지만 여전히 최선의 함정에 갇혀 있어요. 자기의 고백과 예수님의 말씀을 연결 짓지 못한 채 슬픈…
우리가 살아가는 법은 아주 명확합니다. 뭐냐면 오늘 주시는 말씀 앞에서 어제와 오늘과 내일 변함없이 신실하신 또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어제의 간증과 기억 그리고 내일의 약속과 기대를 연결하는 맥락 속에서 오늘 생각하고 행동하면 되는 거예요. 마리아는 좀 자기 생각에 깊이 빠져들고 몰두하는 소위 우리 식으로 덕후 같은 스타일이라면 마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 열심 이런 게 특별한 아주 성실한 아줌마 스타일이었어요. 이 마르다는 자기랑 예수님을 이렇게 분리하려고 해요. 어떤 식의 분리냐면 오빠의 죽음으로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을 말…
화해 없는 자유는 없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 우리와 우리 사이에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거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믿지 않으면 화해할 수 없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관심은 울타리 안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를 넘어서 다른 양들을 향하세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울타리 밖에 있는 존재들은 개, 돼지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내 안에 있는 내 양이다’ 이렇게 게 말하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유대 사회로 오셨지만 사실은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을 위한 자로 오신 거죠. 그니까 유대인들은 처음…
요단에 도착했는데도 엘리사는 작업 과정을 지도하지도 않고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말씀하시지 않을까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아니나 다를까 사건이 터지는 거예요. 이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도끼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단지 빌려온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정도가 아니죠. 과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느냐를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근데 이때 엘리야가 취한 방식이 매우 독특하죠. 갓 베어져서 죽음에 내던져졌지만 나뭇가지가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는 거죠. 그리고 자기의 죽음으로 결정적인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만 만드는 방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