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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유신론/무신론 사용법’에서 ‘일반계시/특별계시 사용법’으로

뱅크스는 대표적인 무신론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by 김경호2023-01-19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9.11 테러 이후 새로운 무신론이 등장했습니다. 새로운 무신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샘 해리스Samuel Benjamin Harris,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Eric Hitchens,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등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전제의 핵심은 실증주의적인 입장에서 신과 신앙, 종교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단순하고 강력한 전제 위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공격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널리 퍼져나갔고 지금은 수많은 사람이 신앙이란 비합리적이고 미개한 것이며, 종교란 인간을 이상하게 만드는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의 이런 주장은 사실일까요? 공교롭게도, 이 주장을 판단하기 위한 유용한 두 권의 책이 친절하게도 출판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그리스도인을 위한 무신론 사용설명서라는 책과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라는 책입니다. 전자는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이고, 후자는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 사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유신론 안에 무신론이, 무신론 안에 유신론의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뱅크스와 드 보통의 글은 각자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기발한 아이디어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


먼저, 뱅크스는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을 소개합니다. 이는 과거의 무신론의 대표적인 사람들의 주장 속에 비친 모습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는 “신은 인간이 창조한 환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신은 상상 속 대상을 현실 속 대상으로 바꾼 인간적인 소원의 산물입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신을 압제 상태의 대체물이라고 정의하며, 신을 찾으려는 노력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며, 자신의 반영만을 찾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신은 심리학적으로, 높임을 받은 아버지에 지나지 않은,” “억눌린 욕망의 투사”라고 정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원래 신은 이상화된 인간일 뿐이므로, 결국 신은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표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가능성은 권위주의적 종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주의적 종교/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네 명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들은 모두 종교적 배경을 가졌고, 종교적 신앙과 실천의 역할을 연구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뱅크스는 여기서 이 네 명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즉, 신이 길들여졌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중요한 이정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포이어바흐의 경우, 우리는 신을 통해 자신의 소원과 갈망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마르크스의 경우, 우리는 신을 통해 자신의 현세의 삶에서 부족한 것, 부당한 것, 뜻하지 않은 고통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프로이트의 경우, 우리는 신과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에 의해 거꾸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프롬의 경우, 우리는 신을 권위 있다고 여기지 않고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표상이라고 여기지 않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뱅크스는 우리가 인간이 만들어 낸 신, 또는 신을 대체하는 것들을 파괴하는 성상파괴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만큼 더 많은 우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 사용법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라는 책에서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 사용법에 대한 자신의 전제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철저한 무신론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종교가 유용하고, 흥미롭고,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때때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전제이다.” 그리고 드 보통은 이 책의 사용법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이 책은 종교에서 보다 독단적인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골치 아픈 이 행성에서의 우리의 유한한 생애 동안에 가뜩이나 회의적인 현대인이 마주쳐야 하는 재난과 슬픔에 대한 시의적절하고 위안이 되는 몇 가지 측면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얼마나 도발적이며 기발한 생각입니까! 드 보통은 이런 생각을 교리가 없는 지혜, 공동체, 친절, 교육, 자애, 비관주의, 관점, 미술, 건축, 그리고 제도에 적용하여, 유신론자들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들을 들여다보며 어디 쓸 만한 것 없나 하고 기웃거리기 때문입니다. 


먼저, “교리가 없는 지혜”에서, 드 보통은 수많은 고전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골라내는 것이 범죄가 아니듯이,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철저하게 무신론자의 전제하에(“교리가 없는”), 때때로 종교에서 발견한 유익한 것들(“지혜”)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공동체”에서, 종교는 유대를 강화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한 건축적 장엄함을 우리에게 빌려줌으로써, 예배 시에 서로 인사를 나눌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한 교회는 계층과 직위에 대한 집착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줌으로써 우리가 억지로 꾸미거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게 합니다. 교회의 식탁은 사람들에게 너그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교회에서의 속죄의 날은 분노에 대한 통찰과 용서를, 상처의 희생자와 가해자의 경우, 희생자의 나약함과 가해자의 죄의식 모두에게 속죄의 날은 이런 모든 것들을 바로잡아 줍니다. “친절”에서, 만약 우리가 친절에 관한 적절하고, 솔직하고, 단순한 조언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에 관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 약아빠진 견해를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도 사람이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오히려 규제되고 인도하는 것을 당연히 전제로 해야 합니다. 


“교육”에서, 문화가 성서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주 터무니없는 것까지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성스러운 경전에서 찾아내는 바로 그런 특성은 문화 예술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잘 조율된 조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애”에서, 성모 마리아의 숭배가 우리의 정서적 필요를 위해, 무엇을 밝혀주느냐에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의존성을 인정하는 힘이야말로 도덕적이고 영적인 건강의 지표라고 봅니다. 오직 교만하고 허영심이 강한 사람만이 자기의 나약함을 부정할 것입니다. “비관주의”에서, 무신론이 빌려온 것은 이렇습니다. 종교적 비관주의가 오직 종교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종교가 구원의 희망에 영원히 의존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는 세상은 지금 이 세상 하나밖에 없다는 무신론자의 기본적인 교훈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영위된다하더라도, 우리는 낙원을 믿는 사람들의 명민한 시각을 빌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관점”에서, 세속적인 사람이 경외감을 경함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는 바로 별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미술”에서, 특별히 우리의 미술관이 우리의 새로운 교회가 되어왔습니다. 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시간과 똑같은 심리적 위안을 줍니다. 물론 지루함도 느끼지만, 그곳을 나설 때만은 이전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건축”에서, 가톨릭은, 우리가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기 위해서는 우리 주위에 훌륭한 건물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곳에서 중요한 감정과 추상적 테마를 위해서 고안된 세속 신전을 만들고, 우리의 희망을 일깨우는 기능을 담당하게 할 것입니다. “제도”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은 성스러운 전통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전통을 모두 적대시하며 내던져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전통에서 보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측면을 찾아내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는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은 사실상 기독교에 기식하는 무신론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예를들어, 리차드 로티Richard McKay Rorty는 평등권에 대해, 그는 자신을 일컬어, “기독교에 기식하는 무신론자”라고 말하며, 무신론을 위해, 유신론의 사상인 평등권을 불러내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좀 더 분명한 신학적 기준과 적용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사용법입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사용법으로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과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와의 관계와 많이 닮았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nam Kuyper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구분합니다. 그에 따르면, 일반계시란 하나님이 세상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보편적인 은총입니다. 일반계시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 똑같이 대하시며, 심는 대로 거두는 원리에 따라 살게 하십니다. 일반계시는 창조에 근거합니다. 반면에 특별계시는 타락 이후에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타락과 구속에 근거한 특별계시는 타락과 구속 간의 상호 대립되어 있는 특징으로 인해 ‘반정립’Antithesis이라고도 부릅니다. 


또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간의 상호 작용으로 나타나는 네 가지 영향이 있습니다. 첫째, 특별계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일반계시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는 중국과 같은 비-기독교 국가의 영역입니다. 둘째, 특별계시의 영향만 받는 ‘제도적 교회’가 있습니다. 셋째, 특별계시의 빛이 밝게 비친 일반계시의 영역이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의 경우지만, 카이퍼는 이 영역을 기독교 국가 안에서 ‘비-고백자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넷째, 일반계시의 자료를 사용하는 특별계시의 영역, 즉 교회 밖의 유기체 교회입니다. 카이퍼는 이 영역을 교회 제도 밖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즉, 교회 밖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가장 이상적인 실천은 일반계시의 자료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과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이 기발한 전략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기발함이 곧 정확함은 아닙니다. 우리의 전략은 성경적-신학적 정확함에 있습니다. 그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사용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의 신학이 말한 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라는 신념 때문입니다.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과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이 기발한 전략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기발함이 곧 정확함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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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경호

김경호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M.Div.) 논문 “세 가지 유형의 개혁주의 세계관 연구”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연구단체 Worldview & Work를 설립하여 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0년부터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국내외에서 세계관 교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