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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프란시스 쉐퍼의 합일적 복음전도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2023-02-13

쉐퍼의 지성적 변증은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말씀하신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사람들의 삶에서 영적 실재로 경험시키고 전달하기 위해서 당시에 사용했던 하나의 유력한 통로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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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리 미셔널

Simply Missional


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프란시스 쉐퍼(1912-1984)에 대한 평가는 양가적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스위스에 라브리를 세워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서구의 젊은이들에게 인본주의와 실존주의 사상이 인생과 사회를 얼마나 깊이 침식하고 있는지를 치열하게 설명하며 성경적 진리가 우리의 참된 존재를 발견하고 회복해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와 90년대 한국의 그리스도인 지성인과 청년들에게도 쉐퍼는 당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도입과 더불어, 사회와 문화를 향한 복음주의적 관심을 일깨워 준 인물이었다. 실제로 쉐퍼는 라브리 사역과 기독교 진리의 실재성에 대한 강연과 저술 외에도 복음주의권에서는 선도적으로 낙태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그래서 필자는 최근 미국 대법원에서 낙태를 허용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사건도 일찍이 쉐퍼가 복음주의자들에게 사회의 인본주의와 상대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도록 각성시킨 노력이 맹아가 됐으리라 추측한다. 


쉐퍼의 사상에 매료된 이들의 스펙트럼은 꽤 넓다. 쉐퍼는 근본주의의 사도라 불릴 정도로 진리의 절대성과 성경의 무오성을 수호하는 데 인생 후반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쉐퍼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신학적 근본주의나 정치적 우파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좀 더 유연한 입장에서 문화와 신학의 관계를 선구적으로 연구한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쉐퍼로부터 그와 같은 착상을 얻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William Dyrness, James K. Smith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 일반 인문학뿐 아니라 신학계에서도 환대(hospitality)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쉐퍼의 라브리는 기독교적 환대의 모델로 신학적 진영을 넘어서 언급된다. 필자가 환대라는 개념을 처음 들은 것도 30년 전 한국에서 열린 라브리 수양회에서였다. 아직도 복음주의권은 단순히 친절한 환영이나 접대를 넘어서는 환대라는 고유한 성경적, 기독교적 덕목에 충분히 천착하지 못한 상태이다. 흥미롭게도 쉐퍼의 신학과 삶이 구현된 실체를 보여주는 책 ‘라브리’(L'Abri)를 처음 한글 번역자는 진보적이고 토착화된 신학을 추구하는 감리교 목사였다. 


쉐퍼는 복음주의적 사회참여의 실천가로서 보수적 복음주의와 진보적 복음주의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 쉐퍼의 사상적 유산은 현대문화와의 예리한 긴장을 강조하는 세계관 운동가들에게로 계승됐지만, 또한 현대문화를 이해하는 가운데 복음을 소통하려는 더욱 유연한 기독교 지성인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영감이 된 것이다. 이처럼 쉐퍼가 다양하게 해석되고 수용됨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는 이들이 공통으로 매력을 느끼는 점은 그가 라브리 공동체로 맞이하고 그들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며 기독교의 진리를 증언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필자는 연구, 대화, 식사, 산책, 예술, 자녀교육과 같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진리를 구현한 라브리 공동체를 건너뛰고 쉐퍼의 변증과 전도를 사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반쪽 이해에 그친다고 본다.


쉐퍼의 지성적 변증


쉐퍼는 루이스와 더불어 20세기에 가장 빛나는 기독교 변증의 대표주자들이다. 사실 쉐퍼와 루이스는 신학적 전제(루이스의 신화적 성경관 vs. 쉐퍼의 성경무오설)에서는 다른 관점을 가졌지만, 인간과 문화에 대한 접근에서는 가족적이라 할 만큼 유사성을 보인다. 필자가 처음 루이스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쉐퍼를 통해서였다. 쉐퍼의 예술적 창의성과 상상력에 영감을 준 이가 C. S. 루이스였고, 그의 책들은 라브리의 서재에서 많은 추천을 받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지성적, 문화적 변증은 이 두 사람의 공통분모가 된다. 쉐퍼는 루이스에 비해서 더욱 명료하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신앙을 견지했지만, 그렇다고 경직된 교리주의로 흐르지 않고 생동감 있는 영적 실재성(spiritual reality)을 강조한 점에서 루이스와 또 다른 유사성을 갖는다(이에 대해서는 “C. S. 루이스에게 배우는 정감적 전도”를 참고하라).     


케빈 포드(Kevin G. Ford)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복음전도의 방향을 논하면서, 쉐퍼의 책(The God Who Is There)은 기독교의 진리 됨을 증명하는 데 역점을 두는 베이비붐 세대의 전형적인 변증 방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세대에게는 경제정의, 인종갈등, 화해, 성문제, 젠더 문제와 같이 현재의 관심사와 연관된 기독교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제는 증명하는 신앙(faith that proves)에서 효능 있는 신앙(faith that works)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대가 관심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Jesus for a New Generation, IVP, 174). 물론 쉐퍼는 현대인이 진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절대성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지 못함으로 절망의 선 아래로 빠졌다는 사실을 미술, 철학, 문화, 신학 등의 사례를 들며 실증하는 데 주력했다. 게다가 그의 유명한 “지붕 벗기기”(taking roof off)라는 변증 전략은 현대인들이 받아들인 상대주의적, 회의주의적 전제로는 실제 세계와의 긴장과 모순에 놓인다는 점을 직시하도록 압박을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쉐퍼를 지성적 변증의 프레임 안에서 보는 이러한 시각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못하다.


쉐퍼는 라브리라는 삶의 공동체적 맥락 안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의 사역이 알려지면서 강연 요청을 받고, 강연 내용이 책으로 출판되면서, 그의 변증적 전제와 전략은 활자를 통해서 관념적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쉐퍼를 체계적이고 정합성 있는 기독교 변증가로만 이해하는 것은 전후 맥락이 제거된 문장을 보는 것과 같다. 쉐퍼의 지성적 변증은 라브리라고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가족처럼 어울리는 가족적 공동체에 차려진 식탁의 인기 있는 메뉴 중 하나였다. 그 식탁은 인생의 고민과 혼란 속에서 진리를 맛보아 알 수 있도록 섬기는 자리였고, 그 자리에서 정직한 질문과 정직한 대답이 오갔다. 추측건대 시대와 사람의 변화에 따라 맛과 메뉴도 달라질 것이다. 지적인 탐구심보다 관계의 갈망을 안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도 기독교는 여전히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이 지속적으로 견고하게 형성되는 데 있어서 합리적 체계는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 세대 사람들의 절대 진리에 대한 반론과 애매모호한 의미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려주지 않으면서 역사적 기독교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다는 기대는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여는 데 지적인 변증이 항상 최전선에 있는 것은 아니다. 


라브리의 공동체적 전도


쉐퍼의 아내 이디스(Edith)가 쓴 라브리를 보면 라브리 사역의 목적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삶과 일 속에서 증언’하는 것이라고 하며, 이를 위해 네 가지 구체적 영역에서의 기도를 한다고 한다. 

 

• 재정적, 물질적 필요를 기도로 하나님께만 아뢰고 사람에게 요청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역에 동참케 하실 것이다.

•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만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한다. 홍보물을 돌리지 않는다. 

• 미래를 계획하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계획대로 인도받기를 기도한다. 

• 하나님께서 택하신 동역자(간사)만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한다. 


이디스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것을 경험하기 원했고, 그가 ‘라브리’라는 책을 쓴 목적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거의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거듭 기도에 응답하셔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신 사실의 실체를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한다(21-22). 이러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그분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것은 생각과 마음뿐 아니라 물질적인 경험 세계에서도 일어난다고 그는 믿는다. 


이디스가 명토박아둔 라브리의 목적과 원리를 상기한다면, 쉐퍼의 지성적 변증은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말씀하신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사람들의 삶에서 영적 실재로 경험시키고 전달하기 위해서 당시에 사용했던 하나의 유력한 통로로 이해해야 한다. 라브리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그곳을 찾던 당시는 전쟁 이후 서구의 많은 청년이 절대적, 객관적 진리와 가치에 대한 상실감 속에서 허무주의적 실존주의로 후퇴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쉐퍼의 변증 3부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과 같은 책은 현대 철학의 인식론에 대한 기독교적 비평을 다루지만, 거기에는 바로 우리와 교통하시고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실재로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해야 한다는 변증적 의도가 선연하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정서적, 관계적, 물질주의적 갈등으로 기독교 진리와 멀어진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방식은 쉐퍼 당대의 지성적 변증이 지녔던 비중은 조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쉐퍼의 사상은 라브리라는 공동체적 삶의 맥락을 주목하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을 위한 쉐퍼와 그의 라브리 사역에서 전도의 교훈 두 가지를 찾는다면, 필자는 공동체적 전도와 영적 실재로서의 전도라고 생각한다. 라브리의 전도 사역 표층에는 공동체가 있고, 기층에는 영적 실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는 소중하다. 특히 전통적 유대관계가 해체되고 파편화된 개인의 시대에 대안적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화급한 과제다. 하지만 모든 공동체에는 그 내부에 핵심적 가치와 실천이 있다. 기독교 공동체를 가능하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현실화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이다. 


라브리를 통해서 공동체적 전도를 구상하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다. 오늘날 복음전도의 주된 과제는 전도의 은사가 있는 소수 개인에게 의존하는 전도가 아니라 대안적 공동체로서 교회의 매력적인 존재 양식이 곧 복음전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공동체의 도덕적 덕목과 습관을 강조하는 철학으로부터 착상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중시하는 전통적 신앙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지난 19-20세기의 전도가 개인 결신을 유도하는 명망가와 이벤트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교회의 역할은 왜소해졌다. 복음에 기반한 교회의 실천과 덕목이 사람들을 초대하고 변화시키고 형성하기보다는, 내세적이고 이원론적 구령주의나 현세적 번영주의가 복음의 참맛을 혼동시키면서 새롭게 지음받은 이들의 독특하고 차별적인 공동체는 피상적인 구호로 전락했다. 기독교의 실재가 자기 계발적 번영주의나 도덕주의적 이신론과 다를 바 없다면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를 깊은 근본에서부터 변혁시키는 성령과 대면하도록 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지 않는 공동체가 어떻게 기독교의 고유한 신념과 가치를 견지할 수 있겠는가? 


영적 실재의 현시로서 복음전도


이 점은 공동체적 전도에서 주의해야 할 맹점이다. 인간의 선한 상호성을 강조하는 공동체는 매력적일 수는 있어도 전복적이지는 않다. 쉐퍼와 라브리의 사역 또한 공동체적 전도로 볼 수 있다. 세퍼는 “타락했으나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했다. 그는 신앙의 의심을 품는 자에게 55분 동안 듣고 질문하며, 5분 동안 기독교 메시지를 말하겠다며 인간에 대한 연민과 존중을 피력했다. 더 나아가 쉐퍼는 기독교의 최종적 변증은 아가페적인 삶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고, 실제로 라브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용납하고 환대하는 공동체였다. 마약중독자, 미혼모, 방황하는 젊은이들, 심지어 귀신 들린 사람들까지 라브리를 찾았고 그곳에서 사랑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쉐퍼 부부는 “그러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지니고 온 짐을 함께 짊어진 것이다. … 그들은 각 사람의 문젯거리들을 짊어졌으며, 그러고 나서 복음으로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심령을 뒤흔들어 놓았다.”(레인 데니스 편, 프란시스 쉐퍼, 그의 삶과 사역, 아가페출판사, 195)


여기서 공동체적 전도에서 영적 실재로서의 전도로 이어진다. 라브리의 사역은 공동체로 사람들을 환대할 뿐 아니라 그들과 나눴던 기독교 진리가 식사와 설거지, 청소, 집안일, 장식, 예술 활동, 육아와 같은 실제 삶에서 생생히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상에서 초월을 접하게 하는 영적 실재로서의 전도였다. 최근 공동체로서의 교회됨과 전도의 관계를 논하는 중요한 연구들이 있다. 필자는 공동체적 전도를 위해서 교회가 화해, 용서, 비폭력, 환대의 습관과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는 데에 깊이 동의한다. 교회라는 독특한 공동체의 아비투스(habitus)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될 것이라는 데 공감한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이 과연 전존재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근원으로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기독교 공동체의 차별적이고 독특한 덕목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날마다 맛보는 살아계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세워진다. 물론 구원과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는 강조하면서 새로운 덕목을 형성하지 않는 공동체는 단순히 믿음과 행함의 격차 문제가 아니라,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믿음의 진정성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매력적인 존재 양식은 초월적인 영적 실재에 견고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이 주관하시는 지속적인 복음의 증언이 이루어질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영적 실재라는 가치는 주관주의, 신비주의, 기복주의 등에 잠식되어왔다. 매일의 일상과 관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보다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초월성에 의존하는 인습이 있다. 이는 영적 실재의 약화를 초래한다. 게다가, 한국 사회 전반에서도 신과 종교에 관한 믿음은 크게 하락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문명과 개인주의의 과잉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개인을 존중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관계와 공동체를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쉐퍼와 라브리의 사역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적실한 전도의 지혜를 제공하리라 본다.  


첫째, 인생과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이고 유물론적 설명이 득세하기 때문에 진리의 지성적 변증은 여전히 유효하다. 삶을 형성하는 사상과 문화의 영향을 간파한 쉐퍼의 틀은 전도를 위한 귀한 자산이다. 다만, 사상과 삶의 양식이 변화되었는데도 쉐퍼의 내용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지 말라는 쉐퍼의 의도와도 어긋난다.


둘째, 라브리 사역에서 발견하는 공동체적 전도의 지혜는 오늘날의 상황적 필요에 더욱 부합할 것이다. 복음전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들의 공통점이 “초대와 환대의 문화”였다는 빌리 그레이엄 센터의 최근 조사는 이를 뒷받침한다(Rick Richardson, You Found Me, IVP). 그러나 공동체 자체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를 떠받치는 영적 실재다.


셋째, 따라서 필자는 쉐퍼와 라브리 사역에서 지성적 변증과 공동체적 환대, 그리고 영적 실재라는 삶의 전 차원들이 합일된 전도의 교훈을 발견한다. 그것은 너무 익숙해져서 시들어가고 있는, 하지만 다시 발견해야 할 전도의 생명력일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롬 15:18-19)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라브리의 사역은 공동체로 사람들을 환대할 뿐 아니라 그들과 나눴던 기독교 진리가 식사와 설거지, 청소, 집안일, 장식, 예술 활동, 육아와 같은 실제 삶에서 생생히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상에서 초월을 접하게 하는 영적 실재로서의 전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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