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선교

뉴비긴에게서 배우는 전도의 자신감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2023-02-20

복음의 공적 우위성과 진리됨은 어떻게 전달될 수 있나? 그것은 일방적이거나 우월주의적인 선포가 아니라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공동체를 통해서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심플리 미셔널

Simply Missional


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선교적 교회론의 교부로 불릴 만한 인물이다. 선교적 교회는 우리나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으로 인정받고 있다. 종종 선교적 교회론은 복음전도와 구령사역 일변도에서 벗어나 지역사회를 위한 공동선을 중심 과제로 삼는 교회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선교적 교회라는 선구적 착상을 제공한 뉴비긴이 과연 복음전도가 약해지거나 소거된 교회의 공공적 사역을 추구했을까? 뉴비긴의 생애와 사상을 제대로 공부해보면 복음전도에 대한 그의 신념이 얼마나 일관되고 확고하게 토대를 이루고 있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얼마나 진지한지는 다른 사람들과 그 믿음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복음전도를 신앙의 진정성과도 연결하였다. 


뉴비긴의 생애를 관통하는 복음전도의 열정


뉴비긴은 남인도에서 38년간 선교사이자 주교로 사역하는 동시에, 에큐메니컬 운동인 WCC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거의 사라지고 선교를 사회정의와 민권운동으로 채색한 WCC의 정책을 보면서 그는 깊이 가슴 아파하며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그래서 WCC에서 일할 때도 뉴비긴은 선교의 세속화 물결에 맞서며 “가장 중요한 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알도록 인도하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아직 끝나지 않은 길, 390). 


일화로, WCC의 선교 저널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편집인을 할 때 해외선교나 복음전파를 의미하는 ‘missions’라는 단어에서 ‘s’를 제거하고 세상을 향한 증언과 활동을 의미하는 총체적 선교로서 ‘mission’으로 바꾸려는 주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s’자를 계속 보존했다. 나중에 그가 WCC를 떠난 뒤에 결국 ‘s’자가 제거되고 인간화로서의 선교를 부각하는 ‘미시오 데이’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뉴비긴의 전 생애와 사역에서 회심과 복음전도는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남인도에서 선교를 할 때도 그는 직접 길거리를 다니며 성경을 반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는 우리가 진지하게 믿는다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회심에 대한 관심은 이웃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의미한다. “복음을 모든 곳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권하는 것, 복음을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생애를 이해하는 궁극적 실마리로 증언하는 일은, 아무리 오해받고 무시받고 비난받는다 할지라도, 결코 불필요하게 되거나 도외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62).


뉴비긴은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심한 이유를 두 가지로 본다. 첫째,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주관적 감정의 영역으로 몰고 가며 사실상의 공적 영역에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둘째, 대도시는 이미 다종교, 다문화의 상황에서 기독교를 전하는 것은 인종차별적 태도가 될 수 있고, 소수 공동체를 존중하기 위해서 복음전도는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이러한 발상을 뉴비긴은 “신학적 간음”으로 경계한다). 이러한 과학주의적 인식론과 다원주의적 태도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 중대한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난관들 앞에서 그가 제시하는 전도의 해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복음의 역사적 공공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복음의 공적 진리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이와 같은 명료하고 거시적인 신념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적절한 확신(proper confidence)을 제공한다.


복음 진리의 공공성과 역사의 실마리로서 예수 그리스도  


뉴비긴이 거듭 강조하는 바는 복음의 공공성이다. 이는 세상을 개선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라는 공공신학과는 차이가 있다. 계몽주의 이후 기독교 진리는 인간의 주관적 감정이나 내면적 가치로 축소되고 공적인 삶을 비롯한 현실 세계와는 무관하게 취급됐다. 뉴비긴은 과학과 종교, 또는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이 결국 서구사회를 세속화, 심지어는 이교화로 이끄는 근본 인식이라고 본다. 물론 그는 교회의 공적 세계에 대한 책임도 강조하며, 사회의 모든 분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정립하는 과제도 진지하게 제안한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기독교 복음이 공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은 역사를 뒤집는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데에 맞춰져 있다. 그는 한 힌두교도 친구의 말을 전한다. 


내가 성경을 읽어 보니, 거기에는 우주 역사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석과 더불어 인간을 역사의 책임 있는 행위자로 보는 독특한 이해가 담겨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당신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또 하나의 종교 경전인 것처럼 이야기한단 말이야. 우리 인도에는 그런 유의 종교 서적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75)


성경은 처음부터 인생을 우주적, 보편적 역사의 맥락에서 조망한다. 성경은 역사이며 사실이다. 성경의 세계관과 역사는 신뢰의 행위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개인적 믿음이다. 개인적이라고 해서 주관적인 느낌이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를 믿는 것이다. 이는 인류 역사 전체의 의미에 관한 진리를 믿는 것이며, 모든 시대와 장소의 모든 사람과 공유하려는 보편적 의향을 품고 견지하는 신앙이다. 따라서 복음전도에는 이와 같은 복음의 역사적, 공적 진리됨에 대한 확신이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복음의 우주적인 이야기 안에서 개인도 참된 자신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선교의 논리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인간 이야기의 참된 의미가 이미 드러났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진리이기에 보편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이는 사적인 의견일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모든 사람과 나눈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들 자신에 관한 진리를 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즉 그들의 인생이 속한 그 진정한 이야기를 앎으로써 자기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인간 역사의 의미가 의문으로 제기되기 마련이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38).


그렇다고 해서 뉴비긴이 전통적인 교회성장적 전도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교회성장학의 창시자 도널드 맥가브란의 열심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그러한 접근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며 거리를 두었다. 그에게서 전도는 단지 개개인의 영혼이 멸망하지 않도록 구원하는 차원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종말에 완성된다는 희망의 증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복음의 공적 우위성과 진리됨은 어떻게 전달될 수 있나? 그것은 일방적이거나 우월주의적인 선포가 아니라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공동체를 통해서이다. 


선교적 공동체, 기독교의 진리됨을 증명하는 통로


뉴비긴은 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은 바로 지역 교회 회중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인간사의 최종 결론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게 될까? 그것은 복음을 믿고 복음에 따라 사는 남자와 여자들로 이루어진 회중이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이자 단 하나뿐인 해답이라는 것이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419). 이 문장은 그의 글과 책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되고, 선교적 교회론의 착상에 결정적 영향을 준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그는 복음이 공적인 영역에서 펼치는 활동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며, 복음전도와 영적 집회, 기독교 저술 등의 중요성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부차적이며, 근본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신앙의 공동체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교적 교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실재가 최우선이어야 한다. 새로운 실재가 위기와 의문, 응답을 일으키고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의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발생했고,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실천하고 재연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에게서 복음전도와 공동체의 관계는 항상 긴밀하다. 그가 실제로 참여했던 길거리 전도도 이러한 말과 행동이 같이 간다는 전제 아래서 가능했다. 길거리에서 복음을 듣는 이들은 낯선 순회전도자의 외침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존재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의 섬기는 사역을 경험하는 상태에서 말로 선포된 복음을 접한다는 것이다(아직 끝나지 않은 길, 137). 뉴비긴은 성령의 새로운 실재가 교회를 통해서 흘러넘치고 사람들에게 드러났을 때, 불신자들이 이러한 현상에 대해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서 복음전도의 사역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선교의 시작이 우리의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실재의 현존, 곧 하나님의 영이 능력으로 임재하는 데 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교회가 그 주인에게 신실한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임하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이 질문을 던질 것이며 우리는 복음으로 그 질문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의 편지들에는 신실한 삶을 살라는 권면은 아주 많지만 적극적으로 선교하라는 권면은 없는 게 아닌가 추정된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28).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이나 공공연한 선교가 금지되는 구 공산국가에서도 성령의 능력이 발휘되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을 경험하는 부흥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복음전도에서 우리의 말보다 앞서 성령의 새로운 질서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뉴비긴의 이와 같은 변화된 공동체에 임하는 성령의 실재와 그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 전도라는 개념은 베드로전서 3:15-16의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전도가 명령으로 인식될 때 전도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도는 명령이기에 앞서 먼저 초월적 은혜의 사건이라는 맥락에서 의미를 지닌다. 뉴비긴은 전도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설명이 요구될 때 비로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실재의 도래에 대한 의문에 응답할 때 복음전도가 이루어진다. 바로 이러한 논리가 선교적 교회론을 끌어가야 한다.


복음전도에 대한 고유한 확신


뉴비긴은 과학주의와 다원주의로 인해서 기독교가 주변부로 밀려나고 위축된 사회 속에서도 이와 같이 복음의 공공성과 역사의 실마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그의 이러한 변증적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적절한 확신(Proper Confidence)으로 나아가게 한다. 종종 “적절한”으로 번역되는 영어 형용사 “proper”는 또 다른 뜻으로 “고유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의 실마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형성된 세계관에 걸맞은 고유하고 적절한 확신을 품을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고유한 확신은 우선은 공적 진리로서 복음에 대한 자신감으로부터 출발하지만, 또한 그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성령의 임재를 드러내는 사랑과 겸손의 공동체를 통해서이다. 자신의 옳음을 논리적으로 입증해서 상대를 바꾸려는 펠라기우스적 방식이나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정복주의적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 선택 교리의 참된 의미와도 어긋난다고 뉴비긴은 본다.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역사의 실마리가 풀린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며, 이를 기반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아 성찰과 회개, 새로운 헌신의 인생으로 변화시키는 확신을 제공한다. 오늘의 다원적 사회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의 교회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 높이와 깊이를 더 많이 배울 수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적절한 자신감을 지닐 수 있다. 이는 또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신뢰함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고유한 확신이다. 


전도학을 전공한 필자는 종종 교회들로부터 전도 관련 특강을 요청받을 때가 있다. 어떻게 전도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알려달라는 강의를 부탁받는 경우도 있지만, 교인들에게 전도에 대한 동기부여를 제공해달라는 주문이 의외로 많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복음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위축된 현실을 방증한다. 최근 발표된 한국 교회의 대 사회적 신뢰는 여전히 주요 종교들 가운데 가장 낮게 나온다. 이는 전도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떨어뜨리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슬리 뉴비긴의 전도에 대한 통찰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실로 복음의 위대한 매력과 전도의 실마리를 찾도록 안내할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뉴비긴에게서 배우는 전도의 교훈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복음의 공공성과 역사성이라는 깊은 차원을 재발견함으로 시작된다.     

둘째, 이러한 복음은 세상에 대한 증언과 섬김의 소명을 받은 공동체의 삶을 통해 전파된다.

셋째, 복음의 실체를 목격한 사람들은 질문을 품게 되고, 우리는 고유한 확신 속에서 겸손하고 진실하게 질문에 답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뉴비긴은 성령의 새로운 실재가 교회를 통해서 흘러넘치고 사람들에게 드러났을 때, 불신자들이 이러한 현상에 대해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서 복음전도의 사역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