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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게으름과 한계는 다르다
by Tim Shorey2023-03-16

평상시 입는 땀복과 티셔츠를 입은 나는 체육관에 가는 대신 최대한 편한 자세로 안락의자에 누워서 아침 낮잠을 즐겼다. 그리고 아내 게일린에게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게으름 피우는 날이야.”


나에 대해서 스스로 판사와 배심원 역할을 한 나는 안락의자, 땀복, 체육관에 가지 않는 것, 그러면서 활동적인 아내와 달리 활동하지 않는 내 삶을 게으름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런 양심의 책망을 듣자마자, 성령님이 나를 위로하셨다. 그리고 “게으르다”라는 양심의 목소리를 향해서 “그렇지 않아!”라며 반박할 수 있도록 하셨다.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린 판단은 사실 틀렸다. 나는 게으른 게 아니라 한계를 만난 것이다. 그 차이가 중요하다. 


나에 관한 진실


겉으로만 봐서는 아픈 사람 같지 않지만, 나는 사실 이 세상에서 살날이 그리 길지 않은, 4기 암에 걸린 예순네 살 노인이다.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제대로 말하는 의사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암시하는 예후는 하나 같이 다 “오 년 미만”이며, 실상은 훨씬 더 짧을 수도 있다. 내가 걸린 암은 치료할 수 없으며 최선의 희망은 일시적이더라도 최대한 느리게 퍼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개입하시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따라서 게으름에 대한 나의 자기 평가는 암과 항암 치료로 인해 손상된 몸으로 발버둥을 치는 남자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여도, 실상은 몹시 아파서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쉽지 않았고, 체육관에 가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겉모습이나 이런저런 정황과는 달리, 그날이 내게는 결코 게으른 날이 아니었다. 한계에 부딪힌 날이었다. 게으른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도 안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어서 못 한 것이다. 전자는 게으름이지만, 후자는 한계이다. 그 차이를 바로 알아야 정죄하는 비난(나 자신 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과 현명하고도 건강한 자기 인식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다. 


왜 중요한가?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나름의 괴로움이 있지만 죄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과 항상 연결되어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을 게으름이라고,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예 죄라고까지 느끼기 쉽다. 그러나 게으름과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게으름은 성경이 정죄하는 분명한 죄이지만(예, 잠 18:9; 21:25), 한계와 유한함에 대한 인식은 도리어 지혜로 칭송받는다(예, 시 90:1-12). 게으름은 의무를 게을리하는 것이고, 할 일을 하지 않겠다는 교만이다. 그러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으름과 한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쩌면 암보다 더 나쁜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불필요한 수치심과 끊임없는 죄책감에 직면할 것이다. 꼭 암이 아니더라도 몸을 갉아 먹는 만성 질병에 시달리는 모든 환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신을 현실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부정확한 자기 비난은 영혼의 파멸이라는 잘못된 길을 이끈다. 


실직은 매일 아침 출근하지 않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생아 간호는 몇 시간 동안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편두통이나 불면증과의 싸움은 다른 사람이 바쁠 때 당신은 잠을 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모두는 다 죄의 문제가 아니다. 한계일 뿐이다. 


두 번째 적용은 삶 전체를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첫인상을 적극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종종거리는 사이에 나는 차 안에서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그 사람은 내 아내가 아주 게으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쉽게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틀렸다. 아무리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도, 나는 아픈 사람이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이해하자


우리는 하나 같이 첫인상으로 성급하게 타인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항상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겉모습으로 틀린 판단을 한다(삼상 16:7; 잠 31:30; 사 11:3-4; 요 7:24; 약 2:1-13; 4:11-12, 벧전 3:3-4). 그 결과 인간관계, 결혼, 양육, 교회 생활, 다문화 상호작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까지 죽이고 있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계급, 문화, 피부색, 조건 또는 기타 다양한 차이와 관계없이 사람을 구분하는 외모로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라. 대신 더 깊이 알고 이해하기 위한 선택을 하라. 진리와 이해심에 바탕을 두고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판단하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의 무한한 수준의 용납하심을 체험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안락의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또는 다른 고난이나 불의함 또는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갇힌 사람들)은 암이 아니라 오히려 수도 없이 반복되는 비난 속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진짜 정죄 받아야 할 대상은 우리 스스로 내리는 자기비판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누구에 대해서 말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스스로를 모든 사람의 판사라도 되는 양 타인을 향한 은밀한 비난을 멈추지 않는 누군가이다. 



원제: Know the Difference Between Laziness and Limitation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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