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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거룩한 7일간의 도전_6일] 용감하게 행동하라
by 최성은2023-04-08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


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

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

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

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

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마 27:45-56)

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태복음 27:57-66)

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

성경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지낸 두 사람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고, 또 하나는 니고데모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고, 세리 마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아리마대 요셉을 보기 이전에 먼저 그의 친구인 니고데모를 살펴보자.


니고데모의 이름은 요한복음 3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는 유대 종교 지도자 그룹 중 가장 세력이 강한 바리새파의 일원이었다. 바리새인들은 평신도 그룹으로 당시 부유한 귀족 상인들과 경제를 이끄는 사람들 가운데서 유대교의 전통을 철저히 지키는 보수파 엘리트 그룹이었다. 


그 일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리고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한다. 평생을 유대 종교 지도자로 살았으나 니고데모는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는 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도 답답하고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법을 가장 쉬운 말로 풀어 니고데모에게 설명해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바로 이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런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나눈 이 흥미진진한 대화는 요한복음 3장에서 결말 없이 끝나버린다. 요한은 니고데모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응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스토리가 이렇게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 니고데모의 반응이 없이 끝났을까? 왜 요한은 더 설명을 안 할까?


그런데 디고데모가 요한복음 7장에서 다시 등장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두고 “그가 참 선지자다. 아니다”를 두고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도 심각한 논쟁이 있었다. 7장 서두에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에 주로 계셨다. 유대로 가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예수님에게 더욱 불리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앞에 예수님을 변호하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요 7:50). 그렇다. 바로 니고데모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니고데모의 응답을 여기서 보여준다. 이제 니고데모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겁도 없이 예수님을 변호한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요 7:51, 새번역) 이 말이다: 어떻게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느냐? 그의 행한 열매들을 확실히 알고 하는 이야기냐? 우리가 믿는 율법이란 것이 겨우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그런 유치한 것이냐? 그러자 동료 바리새인들이 니고데모에게 말한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 성경을 살펴보시오. 그러면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요 7:52, 새번역).


요한은 니고데모가 앞서 예수님과 나누었던 대화의 결론을 그의 단순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다. 니고데모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삶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본질적인 변화가 있음을 보여준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대부분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자신이 종교 국회의원이고 바리새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사회적 흐름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하는 말을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아직 다 드러내놓고 하지는 못하지만, 니고데모는 서서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고 있다. 조금씩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예언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배경으로 예수님을 사모하는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도 니고데모처럼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했지만, 늘 옆에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흠모했던 사람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십자가 사건)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 19:38). 


아리마대 요셉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부자였다(마 27:57). 마가는 그를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막 15:43)라고 기록한다. 누가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눅 23:50-51)이라고 기록한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지만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태는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변호하고 “내가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드러내놓고 다니지도 않았다. 니고데모와 비슷한 데가 많다. 신중하고 천천히 변화되었다. 이들에게 가장 큰 것은 두려움이었다. 동료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드러내놓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못했다. 


저명한 신학자 윌리암 거날(William Gurnall)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많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적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두려움이 전자의 두려움을 치유한다. 사람이 당신을 겁나게 할 때는 하나님의 진노를 향해 당신의 생각을 돌려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맞서 싸우거나 유대인들 앞에서 정면으로 맞서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의 죽음 앞에 드디어 용기를 내었다. 성경은 “이 일 후에”라고 기록하여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변화되었음을 알려준다. 


요셉은 당돌하게 빌라도를 찾아갔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해서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생각한다면, 요셉의 이 행동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서 장사지낸 동굴 무덤은 바로 요셉의 소유였다. 나중에 유대인들에게 보복당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이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리마대 요셉의 친구가 한 사람 더 등장한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앞에서 말한 그 니고데모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친구가 된 것 같다.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의기투합하여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 지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요 19:40, 새번역). 


몰약은 시신이 급격하게 썩는 것을 방지하고, 침향은 시신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을 방지했다. 몰약과 침향의 값어치는 금을 넘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값진 것이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가져온 것도 바로 이 몰약이었다


성경은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침향의 무게를 일부러 자세히 기록하는데, 예전 성경은 “백근”으로 기록하고, 개역개정은 예수님 당시의 로마 측량 단위로 백 리트라라고 기록한다. 1 리트라는 무게가 326그램이므로 100리트라는 33킬로그램 정도인데,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용한 나드 한 근의 100배 분량이다. 나드 한 근은 노동자 1년치 삯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지금의 값어치로 다 환산하는 것은 무리지만, 노동자 한 사람의 일 년 치 임금을 3천만 원으로 쳐서 계산해도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 지내기 위해서 가져온 향수와 몰약의 양은 무려 30억 원의 값어치로서 한 나라의 왕을 장례 치르고도 남을 양이다. 노동자 100명의 1년 월급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니고데모의 전 재산일 수 있다. 니고데모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몰약과 침향을 가져왔는지도 모르겠다.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와 산헤드린 공회원인 요셉은 이제 더 이상 은밀한 제자가 아니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용기를 내어 담대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요청하고, 나아가 자신의 땅과 무덤을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전 재산일 수도 있는 몰약 100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렀다.


이 두 사람은 의심 많고 은밀한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용기를 내어 아무도 찾지 않고 돌아보지 않는 예수님의 찢긴 시신을 품에 안은 채 장사를 지내고 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다 도망간 마당에 은밀하게 자신이 제자인 것을 숨겨온 그들은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어 주님께 헌신하고 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가장 외로운 바로 그 시간, 늘 은밀하게 예수님을 사모하던 이 두 제자는 드디어 주님 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들고 환호할 때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버려졌을 때 용기를 내었다. 


니고데모와 요셉은 향유와 몰약을 예수님 시신에 바르고 세마포로 싸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시 면류관 쓰셨던 예수님의 머리, 태장과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기고 부서진 몸, 옆구리에 난 창 자국, 구멍이 난 손과 발에 못 자국을 보면서…. 이렇게 가까이서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이 둘뿐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내며 예수님께서 전에 그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눈물로 깊이 묵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니고데모를, 아리마대 요셉을 십자가에 돌아가실 만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내어 주셨으니, 이스라엘의 율법사야, 선생아! 그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려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단다.”


예수님과 마음 터 넣고 선생님과 제자로 그렇게 시간을 보낸 적은 없지만,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 지낸 용감한 사람으로, 또한 사랑을 행동으로 옮긴 실천적인 믿음의 사람들로 영원히 우리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헌신이 진정한 섬김이 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우리는 그 무덤 가까이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두 여인을 발견한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다. 예수님의 시신을 데리고 가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를 몰래 따라온 것이다. 


두 여인은 이 두 남자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꿈에도 모르고 있다. 어쨌든 이 여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열심히 쫓아다니더니, 결국 이틀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또 한 부류의 “용감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대제자장들이다. 예수님을 그렇게 잔인하게 십자가에서 죽이고도, 그들은 아직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빌라도를 찾아갔다.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서는, 백성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마 27:63-64, 새번역).


그리고 빌라도도 이것을 합당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잘 훈련된 로마의 병사들을 빌려주었다. 악인들은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다시 하나가 된다. 그들은 로마의 군인들과 함께 동굴 무덤에 큰 돌을 굴려서 막아 놓았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고이 장례 치르기 위해 그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의 몸을 달라고 빌라도를 찾아갔다. 그런데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시신을 지키려고 빌라도를 찾아갔다. 


둘 다 생각한 대로 행동했다.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용감하다”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생각은 하는데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두 부류는 생각하고 믿는 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택이 달랐다. 


한 부류는 악한 일을 계획하고 행동에 옮겼고, 또 한 부류는 선한 일을 계획하고 행동에 옮겼다. 앞의 악한 부류의 사람들도 ‘이 예수가 진짜 메시아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순간순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얼마나 “용감한” 행동인가? 


인류 역사는 늘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용감하게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에 이끌려 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을 용감하게 생각하고, 무엇을 용감하게 행동하느냐이다.


정말 인생은 길지 않다. 쓸데없는 일에 용기를 내지 말자. 영원하신 예수님을 위한 행동에 용기를 내자. 영원 속에서 칭찬받을 행동에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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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성은

최성은 목사(PhD,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는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이며, 지구촌미니스트리네트워크(GMN) 대표 및 (사)지구촌사회복지재단 대표이사로 섬기고 있다. 한국교회의 복음화 운동과 복음 생태계 마련을 위해 한국로잔위원회와 TGC코리아ㆍCTC코리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저서인 '뉴노멀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