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성경과 신학

[거룩한 7일간의 도전_7일] 주님 거기 안 계신다!
by 최성은2023-04-09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


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

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

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

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

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마 27:45-56)

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

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태복음 28:1-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예수님을 증오하는 사람들부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자칭 유대인의 왕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나 않을까 기적을 기대하는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까지,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주님은 분명히 돌아가셨다. 


열한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다.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들도 깊은 비통에 빠졌다. 그런데 여인들의 믿음이 더 깊었던 것일까? 여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시신이 안치된 무덤을 찾아갔다. 십자가 사건 후 3일째 되는 날, 지금의 일요일이었다(마 28:1).


사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찾아간 여인들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다. 제자들도 찾지 않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것을 보면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고 해도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가르쳐 주신 생명의 말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기적,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그들에게 보여 주셨던 사랑…, 이런 모습들만으로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사실은 누구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실제로 믿은 사람은 없어 보인다. 여인들이 달려가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그 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어처구니없는 말”(새번역)로 들려 믿지 않았다고 누가는 기록한다(눅 24:11).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명대답을 남긴 베드로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못 했다. 


왜 그랬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자기 생명처럼 좋아했던 사람들조차도, 살아생전에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면서, 그들이 (가롯 유다만 빼고) 이미 목욕을 했다는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이미 구원받았음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한 여인들도 물론 예수님을 굳게 믿는 참다운 신앙인들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가까이 있었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두개인의 전통을 따른 사람들을 빼고 유대인들은 대부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다.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는 자기 오라버니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예수님께 고백했다.


그러한 믿음이 있는 그들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그럴까?


죽음의 권세의 참혹함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말했는데, 니체의 이 말의 의미는, 신이 정말 죽었다는 의미라기보다, 인간의 고통에도 함께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항변이었다. 


니체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당하신 고난을 만나보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니체는 삶에 대한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사람도 오직 인간 자신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니체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비참한 고통보다도 더 무서운 지옥의 권세가 임하는 고통이었다. 


십자가를 목격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의 무게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독한 죽음의 권세를 눈앞에서 똑똑하게 목격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맞으신 죽음은 인간의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혹한 죽음이었다


그들이 본 십자가에는 온 인류가 지은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고통스럽고 아주 처참하게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비참하게 죽었는데 다시 살아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버림받은 예수님의 모습, 철저하게 저주받은 예수님의 모습,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예수님의 모습, 살려 달라고도 외치는 예수님의 모습, 그것은 우리의 모든 형벌의 모습이었다. 그 십자가의 무게는 감히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순히 육신이 고통받는 무게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의 무게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모든 사람을 사랑한 무게만큼,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신 죽음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그래서 비록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조차 부활에 대한 소망을 생각해 내지 못하였다.


코미디에 불과한 ‘사탄의 승리’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한쪽에선 대형 파티가 벌어졌다. 사탄은 잔치를 크게 벌이며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사탄은 정말로 모든 죽음의 권세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쓰러뜨리기를 원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진 날이기 때문이다.


멜 깁슨이 감독한 영화 ‘패션’을 기억할 것이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군중 가운데 바라보는 섬뜩한 모습 하나가 출현한다. 핏빛 없는 얼굴, 두건을 쓴 어두운 얼굴이 예수님을 희한하게 비웃고 있다. 


그렇다. 사탄은 예수님 탄생부터 줄곧 어두움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파괴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마침내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승리를 외치며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우스운 코미디인지 아는가? 


왜 그런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 실은 사탄은 완전히 패배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의 부활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보다 한 단계 뛰어난 영의 존재인 사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기뻐하고 자기가 다 이겼다고 믿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렇게 예수님을 죽여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사탄은 그런 부질없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다 안다. 


그러함에도 사탄이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었던 최대의 약점은 바로 사탄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꿈도 못 꾸었다. 그것이 이 땅에 속한 무덤의 세계의 한계이다.


공중 권세 잡은 자, 어둠의 권세자, 사탄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것이 있다. 생명의 존재가 무엇인지, 사랑의 존재가 무엇인지, 용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사탄은 알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다 내어 주는 희생이 무엇인지, 그 무서운 죽음의 권세보다 강한 그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을 배신한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사탄은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


왜? 사탄은 무덤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죽음의 권세의 핵폭탄을 짊어 지시고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다시 살아나실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광야의 요한은 십자가에 수난당하실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하며 한마디로 표현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것이 무덤의 권세이고 죽음의 권세이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기가 막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랬으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왔다. 신앙에 있어서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주님을 놓치지 말고 끝까지 붙들고 있어라! 그러면 하나님의 때를 만난다.


부활의 기적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올 시점에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다. 천사가 번개와 같은 형상으로 하늘로 내려와 지진이 일어나고 그 여파로 무덤의 돌을 굴려 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위엄 때문에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죽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버렸다(마 28:2-4).


천사들을 본 여인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그때 천사들은 아직 십자가의 공포와 천사를 만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인들을 이렇게 위로한다(마 28:5).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우리가 절망과 공포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포해 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두려움 가운데 거하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다고 일러 준다. 그가 늘 말씀하시던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일깨워 준다(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는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는다!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 이 한 문장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평생토록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도 동일하게 이야기한다(눅 24:5-8).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


천사는 두려워하는 여인들에게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사건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느냐며 격려한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여인들은 천사의 권유대로 무덤이 있는 동굴 안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만 예수님께서 그냥 쓱 바로 빠져나가신 것처럼 있던 그 자리에 있다!(요 20:6-7). 


이제 천사는 부활의 증거를 보여 준 후에 이렇게 도전한다(마 28:7).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마태가 전해주는 천사의 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무서워 말라

2. 그가 여기 계시지 않는다.

3.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4. 그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다.

5. 가서 증언하라.


천사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인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주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제는 무엇보다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한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이제 내가 삶 가운데 해야 할 사명이 생길 때이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무덤에 먼저 간 것 같고, 내가 십자가에 먼저 간 것 같고, 내가 갈릴리로 먼저 간 것 같지만, 주님은 늘 우리보다 먼저 가서 계신다.


기억하라! 주님은 나의 고통보다 먼저 십자가를 경험하셨고, 나의 죽음보다 먼저 죽으셨다. 그리고 가장 희망이 되는 것은, 나의 부활보다 먼저 살아나셔서 갈릴리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여인들은 큰 두려움과 큰 기쁨이 교차했다. 그러나 여인들은 더 이상 빈 무덤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았다. 삶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걷지 않았다. 그들은 뛰었다. 이 아줌마들은 한걸음에 갈릴리로 뛰었다(마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만나 주셨다(마 28:9-10).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다가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하였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지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영광을 안게 되었다. 얼마나 놀라고 기뻤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나는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발생할 만한 사건들을 늘어놓았다. 부활이 정말 없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헛것이요,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가 다 헛된 것이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미련하고 불쌍한 자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을 믿지 않는 것처럼 비참한 인생은 없다.


무덤에서 부활을 찾으려는 세상의 헛된 노력


세상이 살아 있는 것 같고, 영원히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장소 같지만, 세상은 늘 무덤에서 생명을 찾으려고 하는 허망한 짓을 한다. 무덤은 이 땅에 있는 것들이 잠시만 존재하는 것을 상징한다.


과학과 의학은 생명체를 창조하려 한다. 그러나 과학과 의술은 피 한 방울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헌혈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과 논리를 가지고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세상의 물질과 권세는 생명을 연장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물질과 권세는 오히려 영생을 방해할 뿐이다. 그것은 다 무덤에 속한 것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주의 역사의 막을 내리시기 전까지는 빈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빈 무덤에서 영생을 찾으려고 하고, 빈 무덤에서 능력을 찾으려고 하고, 빈 무덤에서 부활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으신다.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상징하는 무덤에 더 이상 계시지 않으신다.

 

수많은 천국 환송 예배를 치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유가족들도 가족같이 지낸 교인들도 사랑하는 고인의 육신의 얼굴을 보며 하염없이 슬퍼한다. 누구에게나 너무도 당연한 슬픔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고인은 더 이상 그 슬픔에 계시지 않는다. 무덤 앞에서 과거의 추억이 생각나고 다시 말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슬픔 때문에 그렇지, 사실 이미 고인의 영혼은 거기 계시지 않는다. 믿는 자의 영혼은 죽음과 동시에 이미 주님 품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사랑하는 사람을 주님 품으로 먼저 보낸다. 우리는 거의 매주 그런 천국 환송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간절히 격려하기는 이제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무덤에서 찾지 마라. 무덤은 죽음을 뜻하고 소망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덤을 만들어 돌아가신 고인을 기념하며 함께 모여 추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믿는 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한다.


부활의 의미


우리 주님이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사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부활이다. 


그 영생은 또한 그냥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권세에 종노릇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이상 어두움과 혼돈과 아픔 가운데 거하는 것이 아니다. 아픔과 슬픔과 거짓도 그 어떤 어둠이나 죄에 권세가 근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함께 왕 노릇 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소망 가운데로, 승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어둠의 권세, 죽음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주님은 우리의 죗값을 다 치르셨고, 또한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하시려고 부활하셨다.


주님의 부활이 있기에, 내일을 두려움 없이 대할 수 있고, 주의 복된 이름을 늘 찬송할 수 있고, 영원한 구원을 확신할 수 있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주님의 부활이 있기에, 죄와 사망에 대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고, 시련의 때에도 담대할 수 있고, 하나님과 놀라운 평화를 가질 수 있고, 소망을 가지고 요단강을 건널 수 있고,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 수 있다.


주님은 살아 계신다. 빈 무덤에 계시지 않으신다. 


세상의 썩어질 허무로 점철 지어진 빈 무덤에서 주님을 찾지 말라! 


갈릴리로 달려가자. 거기서 주님을 만나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최성은

최성은 목사(PhD,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는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이며, 지구촌미니스트리네트워크(GMN) 대표 및 (사)지구촌사회복지재단 대표이사로 섬기고 있다. 한국교회의 복음화 운동과 복음 생태계 마련을 위해 한국로잔위원회와 TGC코리아ㆍCTC코리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저서인 '뉴노멀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