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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돈 카슨: 팀 켈러를 떠나보내며
by Don Carson2023-05-24

기리며: 팀 켈러(1950-2023)


거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를 떠나보낸 지금 그로부터 배운 몇 가지를 숙고하려고 한다. 조만간 신중하고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소천 기사가 나오겠지만, 이 글은 그런 종류가 아니다. 나의 겸손한 목표는 그에 관한 몇 가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아벨처럼 “죽었지만 여전히 말하도록”(히 11:4) 하려는 것이다. 


켈러와 나는 직접 대면하기 전에 저술 프로젝트부터 먼저 공동으로 진행했다. 말씀 아래서 드리는 예배(Worship by the Book)라는 제목 아래, 교파는 다르지만 하나같이 강해 사역에 깊이 헌신한 목회자들이 회중 예배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개요를 각자 한 장씩 맡아 길게 써내는 프로젝트였다. 켈러는 우리를 대표하는 장로교인이었다. 2002년 책이 나올 무렵, 나는 마침내 켈러를 만났다. 첫 미팅은 우리 두 사람이 다 연사로 초청된 런던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였고, 그다음은 뉴욕에서였다. 후자의 경우, 나는 다른 일로 프린스턴에 있었는데, 켈러가 고속 열차를 타고 뉴욕으로 오라고 초청했다. 우리는 노천 카페에서 만나 점심을 즐겼다. 


살다 보면 가끔 만나자마자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다. 켈러가 내게는 그런 친구였다. 우리의 대화는 막힘이 없었다. 할 말이 없어 서로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신학, 교회의 현실, 고백적 복음주의의 강점과 실패, 더 많은 강해 설교에 대한 긴급한 필요성, 미국과 다른 지역의 현재 문화 및 기타 경향에 대한 분석, 특정 성경 구절의 의미, 영적 훈련 등등…. 이게 다가 아니다. 우리는 정말로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고, 서로의 가족에 대한 부분도 들어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윔블던, PGA 투어, 월드 시리즈, 스탠리 컵, 또는 그런 것들과 비슷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켈리와 아내 캐시는 뉴욕 시절 내내 아파트에서 살았기에 그의 대화에 정원과 새소리, 꽃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스펄전과는 확실하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에게는 뒷마당 있는 집에 사는 남편이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아주 자주 우리는 전도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약 12년 전, 우리는 서로의 전도 여행을 나누기 위해서 전화 통화를 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선교 사업을 마치고 방금 돌아왔고, 나는 호주 멜버른에서 막 귀국한 시점이었다. 나와 비교해서 켈러가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분야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복음 전도에서 어떻게 더 열매를 맺을 것인가라는 주제에 관한 전망은 그가 확실히 나보다 뛰어났다. 


복음 전도는 우리를 지난 사반세기 뉴욕시에서 목격한 그의 놀라운 사역의 열매로 이끈다. 많은 설교자가 대형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모든 대형 교회를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다. 상대적으로 극히 소수의 교회만이 성경 문맹으로 가득 찬 고도로 세속적이고 도시적인 환경에서, 그것도 오로지 초신자의 회심을 통해서 대형 교회를 이뤄냈다. 켈러의 설교는 형태와 디자인이라는 특징에서 볼 때 강해였다. 그의 첫 번째 우선순위는 성경 본문의 설명이다. 그가 텍스트의 단위로 보는 건 반절(half-verse)이나 난해한 표현이 아니라 한 단락 또는 장 전체였다. 그는 오래된 진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 능력의 일부가 텍스트 적용에 쏟은 그의 노력의 결과로 달성되었다. 그가 다룬 주제가 단지 개인의 죄와 필요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설교에서 대규모의 도덕적이고 문화적 경향에 관한 통찰을 빼지 않았다. 구약의 선지자처럼 그는 주저함 없이 문화와 국가라는 문제를 거론했고, 단지 회개만이 아니라 정의를 촉구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질투했다. 그는 또한 성경 신학의 구조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의 궤적이야말로 사려 깊은 독자들을 거듭거듭 복음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듣는 이로 하여금 성경을 읽는 방법을 알게 하였다. 뉴욕 회중 대부분이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그의 설교는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듣고 깨달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건 그가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회중을 상대로 거의 12년 동안 설교한 결과였다.


그의 독서량은 대단했다. 사회 분석과 시사 문제에 관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역사 신학, 주석, 그리고 광범위한 문헌을 탐독하는 데에도 엄청난 시간을 쏟았다. 일정 기간, 그는 매일 훈련의 과정으로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읽었다. (그가 기독교강요를 처음 읽은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또한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C. S. 루이스를 얼마나 철저하게 소화했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건 루이스의 신학을 흉내 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루이스의 이미지와 언어 사용 능력, 매력적인 변증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향한 헌신이라는 틀 안에서 이뤄졌다. 


켈러 추종자 중 일부는 이 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의 문화적 분석에는 매료되었는지 몰라도, 그의 설교가 얼마나 깊은 수준에서 역사적 신앙고백주의(historic confessionalism)에 묶여 있는지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설교는 항상 겸손한 경건 속에서 이뤄졌다. 그의 설교가 머리에서 멈추는 법은 결코 없었다. 그는 논쟁이 고백, 기도,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깊은 감각을 대체하도록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삶과 사역에 있어서 그가 암과 투병하던 마지막 몇 년은 그 어느 때보다 이 점이 더 통렬하고 예리하게 발휘되었다. 


켈러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그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로 여겼던 사도 요한처럼, 담임목사님이 자신을 특별히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켈러 교회의 교인이 적지 않다. 이것은 제대로 된 양육을 받는 교회가 가진 공통적인 특징이다. 동시에 차분함(cool)을 잃지 않는 목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켈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냉정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평가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냉정을 “잃은” 모습도 본 적이 없다. 더 넓게 보면, 그의 변증 설교가 특히 더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보다 더 정확하고 공정하게 상대의 주장을 요약하는 놀라운 능력 때문이었다. 점수를 따고 싶은 초보자의 유혹은 때때로 상대방을 이기는 자신의 능력 자체를 파괴하곤 한다. 그러나 켈러는 그런 유혹이 주는 함정에 단 한 번도 걸려서 넘어진 적이 없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동일한 자기 수양과 기독교적 예의는 숱한 논쟁 속에서 변함없이 드러났다. 궁극적으로 The Gospel Coalition이 된 최초 협의회가 구성된 건 2005년이었다. 켈러는 TVM(Theological Vision of Ministry)이라고 부르는 문서의 초안 작성을 요청받았다. 최초 협의회는 약 마흔 명의 목회자로 구성되었고, 대부분은 TVM에 어떤 변화가 담겨야 하는지에 관해서 확고한 의견을 가진 고집 센 사람들이었다. 누구라도 열심히 노력해서 만든 작업물이 이런저런 도전을 받을 때, 짜증 내는 방어적 태도로 후퇴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켈러에게서 그런 기미를 본 적이 없다. 협의회원 중 한 형제가 켈러가 초안을 짠 TVM에 대해서 무려 쉰 개가 넘는 개선안을 들고 왔다. 켈러와 그 형제는 그것들을 하나씩 검토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켈러는 그가 제안한 변경 사항이 개선 사항임을 유쾌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그 형제가 제기한 비판적인 의견에 감사했다. 켈러의 태도는 그 형제의 제안이 TVM의 취지를 약화시킨다고 느끼는 부분을 만났을 경우에 더 큰 힘을 발했다. 켈러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애초 취지를 밀어붙였고, 그러면서도 반대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태도는 TVM(및 기타 문서)의 보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향후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의 특징이 되었다.  우리는 많은 일에 대해 서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서 배웠다. 협의회 구성원은 모두가 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듣고 기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TGC 위원회 회의가 올해 가장 좋아하는 회의라고 켈러는 여러 번 말하곤 했다. 그게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켈러가 보여준 상호 작용의 모범사례가 회의 참가자의 관계의 질 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관계에는 좋은 유머 감각도 도움이 된다. 두 번째 협의회 회의(2006년)에서 내 옆에 앉아 있던 켈러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보던 노트북 화면을 내게로 돌렸다. 어떤 신학적 요점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켈러가 다른 참가자를 놀라게 한 어떤 말을 한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켈러의 말을 요약해서 비서 중 한 명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비서는 그 내용을 즉시 온라인에 올렸다. “놀라지 마세요! 팀 켈러가 방금 이러저러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그 내용을 발견한 켈러의 비서가 여전히 내 옆에 앉아 있는 그의 상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목사님, 정말로 이렇게 말했습니까?” 켈러가 말한 내용이 다시 그에게 돌아오는 데에는 채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찮은 사람이라면 신뢰를 저버린 것처럼 보이는 이런 일에 기분이 상했을 법도 한데, 켈러는 오히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웃어넘겼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약속을 강화했다. “협의회 회의 중에 나온 내용은 협의회장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 (그 후 몇 년 동안 이 간단한 규칙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참가자 모두와 공유한 켈러의 웃음소리는 우리가 그 순간을 잘 이겨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켈러가 농담을 위한 농담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우스꽝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캐시,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캐시를 향한 켈러의 배려를 언급하지 않고 나의 회고를 끝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켈러는 설교에서 지나가는 말로라도 아내를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건 그와 나눈 사적인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켈러에게 캐시가 이렇게 생각하더라, 캐시가 은혜와 사역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다는 식의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나는 농담으로라도 켈러가 그녀에 대해 무시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단 한 번도, 그렇다,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켈러는 아내를 사랑했고 소중히 여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십 년 함께하면서 그들은 서로 더 가까워졌고, 켈러가 병마가 주는 고통의 마지막 시기에 다다랐을 때 그들의 사랑은 절정에 달했다. 병에 걸리고 켈러와 캐시는 그 어느 때보다 서로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때보다 서로를 더 사랑한 적은 없었다. 이건 켈러가 내게 털어놓은 이야기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오늘 우리는 위대한 거인 한 사람을 잃었다. 



원제: Don Carson Pays Tribute to Tim Keller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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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on Carson

돈 카슨은 캐나다 토론토 Central Baptist Seminary에서 석사학위(MDiv)와 영국 Cambridge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PhD)를 취득하고, 일이노이주 디어필드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의 신약학 명예교수로 섬겼다. 팀 켈러와 함께 TGC를 설립하고 2019년까지 대표로 섬겼다. The Enduring Authority of the Christian Scriptures를 비롯하여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