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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팀 켈러와의 만남: 격려, 부끄러움, 안도감
by 고성제2023-06-02

기리며: 팀 켈러(1950-2023)

늦게 신학을 한 관계로 부교역자 생활도 못해 본 채, 1990년대 초 교회를 개척한 나는 평생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려고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균형의 문제를 고민하는 설교, 변증적 설교, 십자가 복음을 풍성하게 선포하는 설교, 구속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하는 설교, 시사적이고 상담적인 설교 등등. 


그저 듣기 좋은 말 다 끌어다 쓴 것 같은 느낌도 있지만, 사실 그 하나하나는 당시 오랫동안 혼자 고민하던 것들의 진실한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지향한다!’고 표방할 수는 있지만 쉽게 거기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의 처지가 그랬다. 끊임없이 고민은 했지만, 속 시원한 진전은 없었다. 다소 진전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통합 정리된 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 굴착이 끝나 터널 저편 빛을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터널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굴착공과 같은 심정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팀 켈러와의 만남, City To City, 그리고 그 운동을 함께하는 동역자들과의 만남은 바로 그런 때에 이루어졌다. 나는 늘 그 만남을 ‘마치 터널 작업장 저편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한 마스터(대가)와의 만남이었고, 탁월한 멘토를 만난 것과 같았다. 그 만남은 내게 격려(위안)와 부끄러움과 안도감이 뒤엉킨 묘한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먼저는 격려였다. 그것은 그동안 고민해온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위안 같은 것이었다. 팀 켈러가 세밀하게 관심을 두고 고민한 부분들이 내가 고민해온 부분들과 상당히 중첩되고 있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틀리지 않았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희열과 위안이 느껴졌다. 회중 가운데 있을 ‘사실상의 불신자들’을 의식한 변증적 설교에 대한 강조, 타 종교나 세속적 신념을 비난이 아닌 존중의 태도로 극복하려는 것, 시대의 문제를 잘 분석하고 극복하려 애쓴다는 점,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한 강조, 복음 안에 답이 있음에 대한 확신 등이 그러했다. “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내게 부끄러움 또한 느끼게 했다. 그의 가르침은 그동안 나의 고민이 얼마나 폭이 좁고 미숙하며 피상적이었는지를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름 고민하며 해 온 설교가 얼마나 허술하며, 전체적으로 통합된 탄탄함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파편처럼 따로 노는, 조직되지 못한 지식들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갑자기 이런 목사를 의지해서 신앙의 여정을 걸어온 성도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더 잘 정립된 목회자였더라면 성도들은 얼마나 더 잘 세워지고 복음 안에서 기쁨과 확신에 찬 생활을 하였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느낌은 안도감이었다. 그것은 복음을 깊고 넓게 그리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하고, 그 토대 위에서 신앙의 여러 주제를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여 뚫어내고, 통합하여 균형 있는 복음적 입장을 정리해 낸 탁월한 마스터를 만났다는 안도감이었다. 지금까지 고민해 오면서도 마땅히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확고한 복음적 논리 위에서 명쾌하게 답을 찾아가도록 도와줄 길잡이를 만난 느낌! 이분이라면 나뿐 아니라 지금 한국 교회 전체가 처한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데에 본질적 도움을 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그는 한국 교회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이미 급격한 ‘역-엑소더스’(탈교회) 현상을 겪고 있었다. 혹자는 그 현상을 몇몇 대형 교회의 탈선 탓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돌릴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더 근본적 이유가 그들이 교회 안에서 진정한 복음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데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경험한 것은 ‘우상과 죄의 속박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는 복음’이 아니라 그저 ‘의무나 관습으로 옭아매는 종교’뿐이었던 것이다. 진리를 만나기를 기대하며 교회에 왔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스스로 진리를 부정하는 모순된 삶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오히려 교회를 떠나는’ 기막힌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의 윤리적 노력으로 극복될 일이 아니며, 교회가 복음을 통해 본질적으로 새롭게 될 때 극복될 수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팀 켈러는 바로 그 점에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었다.


그는 복음을, 그것과 혼동하기 쉬운 것들과 탁월하게 대비해 줌으로써 복음과 복음 아닌 것의 차이를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우선 그는 복음을 각종 의무와 종교적 관습으로 가득한 ‘종교’와 대비시킴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복음 아닌 종교에 빠져 있는지를 깨닫게 했다. 또 그는 복음과 복음의 결과(선행 섬김 헌신 등의 윤리적 삶)를 구별함으로써 우리 목회자들이 일반적으로 자주 빠지는 오류로부터 건져주었다. 복음 자체에 대한 올바른 강조가 선행과 헌신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 목회자는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선포하는 데 더욱 힘을 써야 하는데, 종종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이 가져오는 결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강조하고 선포해 왔음을 보게 하였던 것이다. 강단의 설교가 그러하다 보니 교인들은 풍성한 동기는 알지 못한 채 의무를 강조하는 말만 듣게 되어, 괜히 교회를 다녀서 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가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풍성한 설명 없이 의무만 강조한 것이 한국 교회를 끝없는 죄책감 아래로 몰아가고 성도들을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팀 켈러는 이 점에서 깊은 임팩트를 남겼다.


또 그는 복음을 선포하되, 마음의 우상을 분석하여, 거기에다 대고 복음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복음이 효과적으로 선포되도록 도와주었다. 당시까지 우리는 우상을 대개 피상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은연중에 우리 자신은 우상과 무관한 줄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상을 예리하고 실제적으로 파헤침으로써 우리 안에 깔려 있는 불안과 두려움, 인정과 통제의 욕구 등 우상의 역동들을 잘 드러내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로, 복음을 선포하되, 허공을 치듯 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복음이 우리 안의 무엇을 겨냥해서 어떻게 선포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 무엇에서 자유롭게 될 것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며 설교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팀 켈러는 설교자의 선포가 분명하게 초점 잡히게 도와주어서 복음 선포가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청중의 내면을 깊이 흔드는 울림이 되게 도와주었다. 


또 그는 상황화에 대한 강조를 통해 복음이 ‘오늘 여기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와닿는 말씀’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설교자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상황화를 하고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켈러는 설교자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과도한 상황화와 과소한 상황화 사이에서 균형은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세밀하게 생각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설교가 주변 문화와 적절하게 관계하게 함으로써 설교가 더욱 들리는 설교, 와닿는 설교가 되게 했다. 


이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그의 확신과 열정, 즉 복음 안에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는 그의 확신과 그 확신에서 비롯된 끝없는 열정이다. 바로 그런 뜨거운 확신 때문에 그는 설교 때마다 그 속에서 무언가에 대해 답을 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회중은 그의 설교를 통해 무언가 적어도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듣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런 이유로 그의 설교는 모든 회중에게 매력적이고 심지어 불신자에게까지 매력적 전도가 되었다. 설교할 때 그가 그저 전해야 할 내용을 전하는 데에만 치중하지 않고, 설교를 듣는 회중 가운데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불신자와 회의자의 반론과 질문을 의식하고 그것들에 대해 대답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단히 중요한 태도라 여겨진다. 그런 설교는 ‘기독교는 맹목적 신앙을 강요한다’는 일반의 오해를 불식시킴으로써, ‘이유 있는 신앙’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와닿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 “질문에 대답하는 설교”에 힘쓴다면 우리의 설교 또한 적실성(relevance)을 더욱 갖게 되어 회의적인 세대들에게 더욱 와닿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복음 안에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답이 있음을 확신하는 사역자는 복음 안에서 그 보물을 찾기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좀처럼 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복음 안에 그 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흥분과 기대를 품고서 열정적으로 탐구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결국 교회는 그런 목회자들에 의해 새로워질 것이며, 이 회의론자의 시대는 그런 목회자들에 의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팀 켈러가 발굴해 낸 보화(대답들)을 배우는 데에 만족하지 말고, 그보다 더, 복음 안에 모든 답이 있다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탐구를 계속해 온 그의 치열한 자세를 더욱더 배우면 더욱 좋을 것이라 믿는다.


보수신학 계열에 서 있는 나로서 그에게 특별히 감사하는 것은 그가 ‘보수신학이 가지기 쉬운 편협함을 보수신학에 의해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논지를 위해 성경 말씀을 일부러 비틀지 않고도 교회가 이 모든 책임 가운데서 균형을 갖추도록 깨워준 것은 무엇보다 감사한 일이다.


이렇듯 신선한 도전이 되었던 팀 켈러!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이제 더 이상 우리와 같은 별 위에 있지 않다. 그가 자신이 평소 그처럼 사랑하고 또 위하여 살던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위대한 말들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자신이 남긴 수많은 책과 글, 설교와 족적을 통해 여전히 우리 곁에서 그가 하던 일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짧은 시간이지만 살아서 그를 만나 함께할 수 있었던 귀한 특권을 누렸던 우리는 그가 죽어서도 한 알의 밀알처럼 백배, 천배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되리라 믿는다.


살아 있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세속적인 도시에서도 복음은 여전히 뉴요커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던 팀 켈러, 그가 천국에서도 그의 소원이 한국을 포함해 지구촌 곳곳의 도시와 시골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목사님, 정말 수고 많았어요. 주안에서 다시 뵐 때까지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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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성제

고성제 목사는 부산대학교 상과대학과 총신신대원(M.Div.)을 졸업하고 현재 평촌새순교회 담임목사와 (사)복음과도시의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정치 공간에 그리스도인으로 서기의 저자이다.